2007-03-10 오후 1:23:47 Hit. 1892
본편의 무인도 이벤트는 등장인물들과 시청자들에게 숨 돌릴 틈을 주는 에피소드였습니다. 주요인물들이 속세와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마치 세상에 그들만이 존재하는 듯한 장소에서 보내는 시간은 여러 잡음을 차단해주고 자기 자신만을 돌아볼 여유를 제공해주는 동시에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또 다른 시점에서 차분히 살피게 해줍니다. 를르슈와 스자쿠의 대립성은 무인도의 행각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죠. 도입부에서부터 해안에서 정신을 막 차린 스자쿠는 섬의 안쪽을, 를르슈는 해안에 들어서며 섬의 바깥을 둘러봅니다. 를르슈는 계속해서 해안에 머물고 스자쿠는 섬의 내륙으로 향하죠. 식량을 확보할 때도 그렇습니다. 를르슈는 알고 있는 이론에 따라 힘을 적게 쓴답시고 함정을 설치하고, 스자쿠는 맨손으로 잡는데 각자 섬의 내륙과 외각이라는, 그때까지 있던 장소와 반대되는 곳으로 몸을 옮기니까요. 그런데 본편은 두 소년만이 아닌 , 예기치 못한 쌍쌍생존기를 통해 각 일행의 행로, 콤비들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 또한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에서도 묘한 교차와 엇박자를 선보입니다. 크게 보면 지배층과 역도라는 모순된 조합의 공통점을 보이는 동시에 출신성분에서는 보다 비슷한 자들끼리 엮였죠. 동시에 커플(?)간의 분위기를 여러모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팀을 이루게 된 순간부터 명백히 드러납니다. 조우한 시점부터 서로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격하게 드러내는 투사들과 달리 유피는 전부터 은연중에 느낀 진실을 조용하게 타진하고 를르슈도 이를 천천히 수용하죠. 음향과 배경도 그들의 심경을 반영합니다. 카렌과 스자쿠가 있는 물가에선 끊임없이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며 격렬한 소음을 들려주는 걸로 둘의 불협화음을 강조하고, 이복남매가 있는 해안가엔 넓고 푸른 하늘을 비추는 동시에 갈매기 짖는 소리와 파도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지는 걸로 보다 안온한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끊임없이 말싸움을 벌이는 친구들과 달리 남매는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점도 그런 면모를 돋보이게 해주죠. 나중에 식량 확보를 위해 스자쿠와 카렌이 보다 조용한 물가로 옮긴 후부터 조금씩 화가 사그라드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을 수 있겠죠. 두 팀의 거처에서 오는 눈높이도 그렇습니다. 물론 여자 쪽이 본의 아니게 남성 측을 올려보게 됩니다만, 비슷한 높이의 카렌과 스자쿠는 불꽃 튀게 부딪히며, 높이가 확연히 차이나는 남매는 그저 서로의 뜻을 전하고 받아주기만을 빌게 되죠. 위와 아래라는 식의 위치는 그런 법입니다. 를르슈와 유피가 보다 낭만적이고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 반면, 스자쿠와 카렌이 실용적이고 살벌한 디바이서 슈트를 입고 있다는 점도 두 팀이 교감을 나누는 양식과 연관된 미장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씻느라고 벗어뒀던 자신의 옷을 스자쿠가 입혀주는 카렌과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오빠의 옷가지를 걸치는 유피의 상황도 대조되긴 마찬가지죠. 공통점도 만만찮죠. 반역자들이 적대자를 보자마자 먼저 흉기를 겨누고, 이를 상대하는 유피와 스자쿠가 유도심문으로 의혹을 확인하는 전개를 보세요. 하긴 를르슈 같은 경우 호명당할 때 움찔한 것부터 이미 '나 니 오빠다.',고 인정한 꼴이지만요. 공주와 기사가 같은 지배층에 소속된 걸 강조하는 건지, 아니면 비슷한 처지-즉 체제의 안쪽에서부터 바꿔나가려는 자들-란 걸 강조하는 건지... 그 공주에 그 기사라 해야 할까요. 다만 스자쿠가 논리적인 근거에 따라 냉철한 심문을 구사했다면, 유피는 직관과 감성을 통해 알아낸 걸 재확인한 게 다를 뿐입니다. 크로비스를 죽였을 때처럼 권총을 겨누지만, 끝내 쏘지 못합니다. 크로비스야 그만한 짓을 저질렀고, 그런 주제에 목숨을 구걸했지만, 눈앞의 여동생은 오래비의 살의와 증오를 이해한다는 듯 자신을 쏘는 걸 부정하지도 않고 죽은 줄 안 오라버니의 생존을 확인했다는 사실에 그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가면 속 얼굴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홀로 비밀을 간직했줬으니... 제로의 가면을 벗지 않은 상대에게 정체가 드러난 건 를르슈도 처음이었으니 식은땀을 흘릴 만도 했죠. 물론 이때의 당혹감은 단순한 경악이 아니었습니다. 진실을 알아낸 상대가 과거의 자신을 알고 있는 '가족'이었기에 젖혀두고 있던 애정과 온기도 회귀하기 시작한 거죠. 그렇기에 유피의 질문에 자신이 그녀가 알던 오빠라고 대답했을 겁니다. 나중에 를르슈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에 동의하는 걸 보면서 여러모로 놀랐습니다. 이 친구가 이렇게까지 과거를 애절하게 그리워한 적이 있었던가요... 사실 를르슈가 그 자리에서 유피를 처리하지 않은 이유야 한 둘이 아니겠지만... 여차하며 나중에 기억을 날려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슬쩍 넘어간 것도 있지 않을까요. 본편에서 특기할 사항 중 하나는 바로 시선입니다. 시선을 통해 감정표현을 더욱 섬세하게 가꿔나고 있거든요. 스자쿠와 카렌은 서로 마주보는 일이 많고, 를르슈와 유피는 시선이 잘 부딪히지 않습니다. 서로 충돌하는 정도를 반영한 거죠. 유피가 오빠에게 현재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순간에도 서로를 번갈아 엿보지만, 시선이 만나질 않죠. 유피가 질문하는 순간, 를르슈가 여동생을 돌아보며 대답하자, 유피는 자신의 마음을 긍정해준 오빠를 돌아보고 를르슈는 쑥스럽다는 듯 다른 곳을 돌아보는 식으로요. 엇갈리는 시선에 참 많은 감정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두 팀의 대립양상은 계속됩니다. 한쪽은 바다와 육지가 접한 모래사장에서 불도 안 킨 채 식사를 시작하고 야경을 감상합니다. 다른 쪽은 섬 한 가운데서 생선구이를 먹은 후 서로를 보며 논쟁하죠. 남매는 식물의 과일을 날로 먹고 친구들은 생선류를 불살라 먹는 식으로 식생활까지 다른데, 단순히 서로의 대립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쪽은 자연의 음식을 있는 그대로 먹고 밤의 어둠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밤하늘을 감상하는 반면 스자쿠와 카렌은 생선을 조리하고 불을 피워 어둠을 거부하는데 주변과 동화, 혹은 이를 임의로 바꿔 거부하는 모습은 각 팀의 분위기와도 연결되죠. 한 쪽은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주지만, 다른 쪽은 서로의 생각을 있는 힘껏 부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카렌과 스자쿠. 이 둘이 제대로 비교된 건 본편이 처음이죠. 브리타니아인으로 살아갈 수 있음에도 일본인으로써의 정체성을 고집하는 소녀와 일본인이지만 브리타니아인이 되려 하는 소년. 그러나 그들이 지금의 길을 선택한 분기점이 혈육의 죽음이란 점은 비슷합니다. 양상은 다르지만요. 둘의 생애 자체로부터 이율배반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이 느껴지죠. 스자쿠와 카렌의 논쟁은 그들을 덥혀주는 불꽃과도 비슷합니다. 스자쿠는 평소와 달리 부드럽게 자신의 생각을 설파하는데, 카렌의 말이 끝난 후 불티가 튀는 것은 둘의 신념이 충돌하는 것과 소년이 겉보기와 달리 내심 탄식과 갈등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존속살해를 조용히 고백하는 것과 반대로 계속해서 불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는 것은 그의 한이 어느 정도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죠. 한없이 어두운 눈길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친구가 제로를 혐오하는 이유는 역시 아버지를 닮은 인종이라는 것도 큽니다만, 둘 다 부친을 부정하는 걸로 지금의 인생을 결정한 놈들이란 말이죠. 카렌이 그나마 감정을 누그러뜨린 것은 상대방이 있는 대로 자신을 내보인, 그만큼 진솔한 이야기란 걸 은연중에 느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런 스자쿠도 대답할 수 없는 게 있었습니다. 카렌의 오빠는 올바르지 않게 산 인간이었기에 비명에 죽은 건가, 그는 틀려먹은 인간이었을까요... 를르슈와 스자쿠는 끝까지 반대되는 행각을 보입니다. 대화가 끝난 후, 별을 보던 를르슈는 잠든 여동생을 돌아보고 스자쿠는 친구를 향하던 시선을 하늘로 옮깁니다. 그런 둘의 생각이 일치하는 순간, 하늘을 본 스자쿠는 서치라이트를 찾아내고, 이로 인해 두 친구가 다시금 교차하는 계기가 마련된다는 게 인상적이죠. 한참 뒤에 를르슈와 유피가 스자쿠에 대해 언급하는 순간, 불의의 사태로 대화가 중단되는 것은 그들이 현재 처한 운명의 한계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남매가 속세와 차단된 섬에서 공유하고 돌아볼 수 있는 것은 과거뿐, 현재를 같이 하기엔 그들은 너무 많이 엇갈렸던 겁니다... 주춧돌이 사라진 혼돈 디트하르트와 토우도, 오우기의 회의양상은 차후 흑기사단의 행보를 단적으로 암시하는 장면이라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이 회의 장면엔 세 거두들이 제각기 싸움을 시작한 동기와 배경이 반영돼 있습니다. 군인출신이며 부하와 전우를 아껴 자신을 던졌던 토우도는 조직 그 자체를 중시하나, 주의주장이 아닌 제로를 추앙해 투신한 디트하르트는 그 반대 양상을 보이는 게 당연하죠. 오우기는 그 사이에서 중재를 거듭하는 게 참 성격에 어울리죠. 제로를 적극적으로 찾자는 기자양반에게 동의하다가도 토우도의 견해도 반대하질 않으니. 중간에 C.C랑 타마키 때문에 얘기가 삼천포로 빠지려는 걸 되잡는 걸 보면 이 친구도 기사단에 필요한 인물이란 점에 이견은 없지만... 사실 명목상이라고 해도 부사령관이란, 제로 다음가는 자리를 잡고 있으니 원칙적으로 따지면 두목이 없는 상황에서 이 친구가 강단 있게 지시를 내려도 뭐라 할 순 없을 텐데 말이죠. 사람이 좋은 게 탈이라 해야 할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이런 성격덕분에 논쟁이 과열되는 걸 일단 되잡았으니까요. 이 시퀸스에서 얼핏 보면 자기 일에 충실한 의인이라 할 수 있는 토우도의 의견이 추종자에 비해 합리적으로 보이나 대화가 전개될수록 그 양상은 조금씩 뒤집힙니다. 무엇보다 결과를 우선해야 하는 아웃사이더들의 모임인지라 그 구심점은 제로 하나뿐이며 그의 위치가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는 마키아벨리즘은 생각보다 강한 설득력을 갖죠. 토우도가 군인 어쩌고 한 발언에 밥상 뒤집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솔직히 좀 무리를 한 게... 고지식한 군인이 언론인을 말빨로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죠.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인신공격의 오류를 범하는 둘을 보면 참 어지간히 흥분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참 브리타니아인 답다느니, 짬밥은 어디로 먹었냐느니... 이 장면에서 '한 사람'의 무게를 강조하는 디트하르트를 식당의 전원이 돌아보는 건 그 자체로 논쟁의 요지를 보여줍니다. 다른 단원들이야 얼른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고 이를 토우도가 대표하며 디트하르트 혼자 여기에 항변하는 판이니까요. 두 사람의 위치도 이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고요. 즉 혼자서 대세에 거스른 기자양반의 입장 자체가 제로와 조직을 저울질하는 현시국을 은유하고 있는 거죠. 를르슈는 자신의 비상시 유고를 대비해 앞으로 보다 확실한 보험책을 마련해야 할 듯싶습니다. 그 자신이 죽거나, 그에 준하는 사태를 대비해 조직체를 대신 맡을 후계자나 대리자, 혹은 비상체제를 마련하는 것은 지도자의 의무니까요. 인지를 초월한 힘이 잠든 섬 본편의 제목은 아마 본작에서 C.C나 황제를 통해 슬쩍 슬쩍 모습을 드러낸 어떤 힘을 내포한 거겠죠. 슈나이젤이 발굴하던 유적, 즉 현재의 인지를 초월한 어떤 힘을 시사하는 흔적이 있는 섬은 그 자체로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이 어쩌면 세계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힘일지도 모르기에 더욱 그렇죠. 인간을 초월한 힘, 기어스와 같은 계통의 유적으로 추측되는데 지금까지 C.C와 연락을 취해온 존재가 섬의 유적을 이용해 를르슈 일행을 이동시킨 걸 보면 그런 추측에 한층 힘이 실립니다. 를르슈 일행이 유적에 내던져지는 순간 사태를 유도한 누군가의 손길이 암시되는데, 그들의 위치를 특정지은 수단은 아마도 를르슈의 기어스겠죠. 지면에 문장이 떠오른 순간 를르슈의 기어스가 발동되고 있으니까요. 그 직후 스자쿠가 유적을 보고 넋이 나간 것은 이전에도 몇 번 지나가듯 나온 어떤 장면들을 돌아보게 하죠. 물론 기어스가 인간을 통해 발현되는 것처럼 이 섬 또한 더이상 신만의 섬이 아닙니다. 힘을 탐하고 예지에 대한 호기심을 내비치는 인간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있으니까요. 슈나이젤. 로이드를 지원하는 것도 그렇고, 바틀레 장군을 구해준 것도 그렇고... 새로운 문물과 알려지지 않은 신비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모양입니다. 로이드조차 자신의 이론을 토대로 전함을 만든 것에 놀랄 정도니까요. 이 남자가 자기 동생이 이쪽에 밝다고 평가한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본시 문화방면에 관심이 많던 크로비스니 유적이나 문화재에도 신경을 썼을 테고, 그러다 이 유적도 찾아낸 거겠죠. 일본을 침공한 게 사쿠라다이트 때문이 아니라, C.C와 연관된 어떤 힘때문이 아니냐고 지적한 분이 계셨는데, 바틀레 장군이 이를 확인해주죠. 그런데, 하필이면 다른 시스템이나 분석기재가 아니라 거웨인을 끌고 온 걸까요? 듣자하니 거웨인은 전자전 능력이 탁월하다고 하는데 아마 드루이드 시스템 때문일 겁니다. 드루이드는 켈트의 무당이고, 아더왕 전설도 본시 켈트족이 원류라니 얼추 맞을라나요. 마법사 멀린도 드루이드 출신이란 소문이 있었죠. 이놈이 드루이드 시스템을 갖고 있는 이유는 전설상의 거웨인이 마녀의 조치를 받아 한정적으로 힘이 두 배로 강해지는 기사였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면 파일롯이 두 명인 것도 그럴싸해집니다. 덩치가 큰 이유와 무지막지한 위력의 하드론포도요. 슈나이젤이 제대로 된 기재를 가져오지 못한 이유가 유적 조사를 공식적인 규모로 진행할 수 없기에-이래저래 위험한 기밀사항이니까요- 다른 연구시설에 손을 뻗칠 수 없었고, 가지고 있던 나이트메어의 부수적인 기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겠죠. 좀 급하게 온 지라 이런저런 공작을 할 여유도 없었을 테고요. 황자전하께서 아발론이나 사고 엘리베이터같은 신구 문물을 탐하는 것은 도대체 뭣 때문일까요? 그저 패권을 위한 포석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 닫으며. 사실 본편의 전개는 건담씨드의 어느 이벤트를 연상시키는데, PD와 스텦들 중에 같은 사람들이 많거든요. 특히 본편의 각본을 맡은 요시노 선생은 씨드를 담당하기도 했던 양반이죠. 그런데, 그 에피소드를 담당했던 건 다른 각본가였고, 본편의 전개는 다른 작품의 에피소드와 닮은 구석이 더 많습니다. 바로 마이 오토메입니다. 마이 히메와 오토메는 둘 다 요시노 선생이 메인 라이터인 작품이었고, 마이 오토메의 경우 이 양반이 모든 에피소드의 각본을 맡았는데... 중간의 어느 에피소드에서 주인공들이 불의의 사태로 외떨어진 해안가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되는 이벤트가 있었죠. 특기할 것은 이 사건을 유발시킨 진영이 어느 유적을 조사하고 있었으며, 여기서 나온 데이타와 주요인물들의 감정변화가 훗날 일어날 비극과 정세변환의 분수령이 됐다는 겁니다. 비슷한 연출들도 많은데 날이 밝자 야외로 나온 양쪽 진영의 인물들이 뜻밖의 조우로 충돌하고, 이 와중에 테러리스트 쪽의 인물이 엉뚱한 보너스를 챙겨 사라지는 것까지 닮은 구석이 많죠. 본편을 담당한 요시노 선생은 샤리가 주역이던 12화와 13화도 맡았는데, 히메 씨리즈도 그렇고 비교적 감성적인 비극을 곧잘 맡으시는 듯합니다. 솔직히 완성도와는 별도로 12, 13화와 본편은 본작의 전체적인 성격과 살짝 유리된 구석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마이 오토메도 가면 갈수록 정치드라마로써의 성격이 강해지더군요. OVA도 그렇고요. 이 양반이 본작에 참가하게 된 것도 그런 점 때문이려나요. ETC... 를르슈. 우거지상이 볼만하더군요. 하긴 원체 존심이 센 편이니 더더욱 거식했겠죠. 게다가 위로까지 받고... 포로로 잡은 스자쿠에게 역으로 인질이 됐던 개망신을 당했지만, 자력으로 생환한 데다 카렌과 거웨인도 챙겼으니 그럭저럭 상쇄할 수 있겠죠. 그래도 이런 식으로 손에 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스자쿠. 희생을 감수하고 테러리스트를 처단한다는 긍지가 한참 전에 무너졌다는 제로의 지적은 역시 전편의 기어스로 인해 스자쿠가 탈출하게 된 걸 말한 걸까요. 군규위반이라. 기어스가 차후 그의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쪽으로도 앙금이 남을 겁니다. 스스로의 목숨을 돌보지 않겠다고, 자신을 위해서 힘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그 날 이후 어긴 적 없는 신조였는데, 자신 또한 무의식중에 살기 위해 스스로의 신념을 굽힌 속물이라고 자책하게 되진 않을지... 스스로에 대한 몇 안 되는 믿음이 흔들리고, 그나마 있던 주관마저 박살나진 않을런지 걱정됩니다. 처분의 경우, 일단 기사로써의 주군인 유피가 도망치란 명령을 계속 내렸으니 그 점만 잘 이용하면 어느 정도 참작이 되겠죠. 카렌. 스자쿠를 죽이려 할 때, 제복을 가져온 것은 옷가지로 몸을 가리려고 한 게 아니죠. 흉기를 확보하는 동시에 자신의 양손을 가려 공격의 방향을 숨기려 한 겁니다. 먹혀들 인간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지만요. 머리에 피가 몰려 행동으로 옮긴 건 알겠는데... 짱돌 좀 잘 굴리면 스자쿠에게 적당히 둘러대 끌어들인 다음 등에 칼침 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근데 친위대장이라던가 홍련의 파일럿이라든가 하는 정보를 알아서 술술 털면 어쩌자는 거냐. 으휴. 하지만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죠. 레이져 포인터로 스코프를 쓴 병사들의 시야를 찌르고(요즘 스코프 같은 경우 일반적인 조명은 자동광량조절기능으로 상쇄되죠) 유페미아 쪽으로 총을 갈겨 군인들의 발을 묶는 게 참... 유피. 과일 확보하러 가기 전에 를르슈를 돌아보며 웃음을 참는 게... 슈나이젤. 듣던 대로 페미니스트인 모양이군요. 세실의 지적을 멋지게 넘기는 걸 보면 낯짝 두께가 를르슈의 수십 배는 되는 듯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스자쿠를 살릴지도 모르는 행동이었다고 둘러대는 거 하곤... 아무튼 화술이 상당하죠. 성우분이 건슬링거 걸의 마르코로 낯익은 분인데, 나이에 비해 현숙하고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입니다. 거웨인을 잃은 상황에서도 여유를 보이고, 여러모로 통 큰 모습을 보이는데... 혹시 이게 몽땅 겉치레는 아닐지, 살짝 의혹이 드네요. 바틀레. 이 양반 꼼짝없이 말라죽게 된 걸 살려줬는지라 슈나이젤을 아주 신으로 모십니다. 황권이 절대화된 체제에서 주군이란 칭호를 함부로 쓰긴 힘들 텐데, 황자에게 서슴없이 말하는 걸 보면 참... 본편의 해설자 겸 사회자 노릇을 톡톡히 하죠. 세실. 쿠루미? 혹시 이 아가씨도 혼혈안가요? 슈나이젤이 잡아준 손을 보는 표정이 황홀하다 못해 졸도하기 직전입니다. 거웨인. 본시 란슬롯의 라이벌 격인 기사로 난 척하길 좋아하는 란슬롯과 달리 왕에게 충실했고 자신의 단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아는 겸허한 기사였다고 하더군요. 훗날 란슬롯에게 동생들이 박살나 분기를 못 참고 배신자를 치자고 해 일각에선 란슬롯 못지 않게 원탁을 멸망케 한 계기를 제공했다는 비난도 듣는다죠. C.C. 타마키, 저 자슥 오늘이 제삿날 될 뻔 했다는 걸 알기는 하려나요. 살기등등한 눈빛과 목소리에 소름이 다 끼치더라고요. 전편 말미에서 를르슈의 턱끝에 칼이 들어왔는데도 가만히 있던 게 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렌까지 날려보낸 건 제로와 C.C, 카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공기를 눈치 챈 누군가의 장난인 걸까요. 타마키. 일반단원들에게 C.C가 어떻게 인식되는지 확실히 보여주네요. 하긴 특별한 직책도 없는데 제일 많이 붙어 다니죠, 단둘이 방에 틀어박히면 한참 후에 나오고, 동시에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니. 그리 보여도 어쩔 수 없을지도... 를르슈가 유피에게 친절하고 자상한 모습은 꼭 나나리를 대하는 모습을 연상시키더군요. 카렌이 시작부터 벗고 나오는 건 제작진의 의도와 시청자들의 열망을 충실히 반영한 거겠죠. 카렌이 묶인 팔을 앞으로 돌리는 걸 보면서 미래소년 코난이 떠오르더라고요. 두 팀 다 여성 쪽의 돌발행동으로 조합이 다시금 바뀌는 게 재밌습니다. 근데 카렌의 오빠가 정말 죽었을까요? PD양반은 카렌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 정말 죽었는지는 불확실하다는 뉘앙스의 멘트를 날리던데요. 음. P.S. 이번 뉴타입 '우리들의 나날'은 카렌과 나나리의 대담인데, 보면서 슬쩍 웃게 되더군요. 나나리는 를르슈가 C.C를 데려온 것에 대한 불안감과 질투심을, 카렌도 제로가 C.C를 동료라 말한 것에 비슷한 감정을 품었다고 돌려서 토로하는데, 카렌은 를르슈를, 나나리는 제로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연모하는 대상을 변호하더라고요. 근데, 두 여동생분 들께서는 자신들이 비난하고 변호하는 남자와 최근에 그녀들을 불안케 만든 여인이 동일인물이란 걸 모르고 있다는게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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