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18 오후 12:42:31 Hit. 1420
오늘은 성년의 날입니다. 오늘 성년 되시는 분들 모두모두 축하드립니다.
성년의 날 한지가 엇그제 같은데 벌써 십년도 넘었네요..
그땐 받은게 하나도 없는거 같네요...ㅠㅠ
꽃,향수 그리고.......키스...
친구들과 함께 모여 술마신 기억 밖에 없는듯 하네요..
그리고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입니다..
어느정도 나이를드신분은 아시겠지만 젊은층은 잘 모를수도 있겠군요.
의 의 - 5·18민주화운동을 기리고 이를 계승 유래 및 연혁 ·광주민주화운동 발생('80. 5.18) - '93. 5.13 「5.13대통령특별담화」발표 ※ 광주광역시에서 먼저 시(市)기념일로 제정 희망 - '93. 5.19 5.18을 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제정키로 여·야 합의 - '96. 2. 1 광주광역시에서 법정기념일 제정 요구 - '97. 4.14 여·야 3당 총무간 합의, 기념일제정 건의 ※ 5.18관련자 소송확정(대법원,'97. 4.17) - '97. 5. 9 [각종기념일에관한규정]에 규정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10·26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신군부 세력은 한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고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소위 12·12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집권의 의지를 주도 면밀히 준비해온 신군부 세력에게 있어서 권위주의 청산과 민주주의의 여망인 "서울의 봄"에 터져 나온 학생, 야당, 재야 등으로부터의 민주화 요구와 시위는 그들의 계획에 상당한 걸림돌 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1980년 5월의 민주화 운동, 그 중에서도 특히 대학생들의 대규모 저항은 마침내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로 인하여 다소 누그러졌으나, 광주에서는 시위 초기부터 나타난 진압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더욱 적극적으로 시위가 가중되었고 광주시민들이 거들게 되었다. 5월 15일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육대생 1만 6천여명이 참여한 도청 앞 대학연합 궐기대회가 끝난 후 50여명의 교수들이 학생들의 앞장에 서서 함께 금남로를 걷는 민주화 행진이 있었다. 교수와 학생이 함께 한 민주화행진은 "4 19교수단 데모이후 처음있는" 일이었다. 16일 횃불 시위 후 학생들은 헤어지면서 월요일인 19일부터 시위를 재개하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그 동안 정부측에 비상계엄 해제와 정치일정단축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할 시간을 주고, 연일 계속된 시위로 인한 피로도 풀며, 전국의 다른 대학과의 보조를 위해서 일단 휴식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휴식기간중이라도 휴교령이 내려진다면 즉각 오전 10시에 전남대 정문 앞에서 모일 것을 약속하였는데, 그러한 약속에 따라 18일 아침 전남대 정문 앞에는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이들에 대한 충정부대 진압군들의 과격한 진압이 5 18의 시작이 된 것이다. 유혈 광주항쟁의 시발이 된 5월 18일의 시위는 전날의 시위들과 마찬가지로 학생시위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위 초부터 강경 진압에 나선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진압은 오히려 시위대 주변의 군중들을 분노케하여 이들로 하여금 학생시위에 가담토록 부추겼다. 18일 오후부터 시위는 이미 학생시위의 수준을 뛰어 넘어 드디어 시민 항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쟁 2일째부터는 이미 시위의 성격이 시민항쟁으로 변하였다. 이후 '시민군'이 등장하여 무장투쟁이 시작되고, 그 결과 5일동안 광주가 "해방구"가 되기까지 사건의 상승적 전개는 살상을 거리끼지 않는 군의 무자비한 진압이 자연스럽게 유도한 결과였다. 시위에는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이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참여하였지만, 무장 투쟁의 과정에서는 젊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주로 참여하게 되었다. 마침내 5월 27일 "미국 국무성의 무질서와 혼란상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발표와 함께 수천 명의 군인이 탱크를 몰고 시내로 진입, 무차별 학살되고 군부가 통제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죽고 실종되었다. 이후, 수천 명 체포 연행·구금·수배가 시작되고 현 대통령이신 김대중씨 등에 대한 사형선고로 5. 18 광주 민중항쟁은 막을 내렸다. 빛고을, 광주의 5.18 국립묘지는 무등산이 바라다 보이는 아늑한 곳에 터를 잡고 있으며, 이 땅에 다시는 불의와 독재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준엄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광주는 비록 무력에 의해 죽음을 당했지만, 겨레의 역사 속에서 죽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되는 항쟁의 불길 속에서 빛고을의 위용을 과시하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자유의 불사신으로 부활한 것이다.
그날 순국하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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