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08 오후 9:18:12 Hit. 1433
"저기.....혹시, 진석이?"
"어? 야!! 이게 누구야!!! 김영수아냐!!"
"하하..천하의 하진석이 여자하나 없이 이런데서 혼자 술이냐?"
"임마, 우리가 아직도 20대인줄 아냐, 아무튼, 지금왔냐? 앉아,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
드문드문 서로 안부나 묻는거 말고 직접 만나는건 거의 10년만이었다.
중고등학교 동창으로 10대때부터 붙어다닌 영수는 장난끼있고 거침없는 내 성격과 잘 맞았고,
또한 그 동네에서 힘깨나 쓴다는 부잣집 아들놈이었다. 나역시 어린나이엔 부모님 재력만 믿고
일상다반사로 사고만 치고 다니던 그런놈이었고, 비슷한점이 많았던 우리는 점점 친해질수밖에 없었다.
"어...? 근데 너 왜이렇게 말랐냐..?"
"그럴일이 좀 있다...너도 못지않게 옛날보다 말랐는데 뭐..."
반가움이 가시고 나니 내가 기억하던 영수와 달리 삐쩍마를대로 말라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보이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굳이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지는 않았다.
"야.. 뭐 아무튼 근데 니가 이동네에는 웬일이냐?"
"....."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이곳은 우리가 예전에 살았던곳과는 완전히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은 그나마 번화가라고 술집이나 각종 가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완전 산골로 주로 부유층들이 별장을 지어놓고 때때로 놀러오거나
병에 찌든 사람들이 요양을 위해 찾아오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 네가 이곳 근처에 살고 있다는 소식만 듣고 이 근처에 죽치고 있었어..."
"응?? 무슨소리야??"
영수는 그사이 점원이 테이블위에 올려놓은 소주를 꺼내들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어이,어이 이봐 무슨일이야?? 말을 해봐"
"네 소식 들었다.. 그래서 이런말은 하기 싫었는데.. 나에겐 남은게 그것뿐이야... 이해해줘...."
"야 임마!! 무슨말이야!!"
"너를 찾으려고 친구들 연락처를 다 뒤져서 네가 이근처에 살고있다는건 알게됐지만...
어딘지 정확히는 알수가 없어서 계속 이 거리를 뒤지고 다녔어...너를 찾으려고..."
갑자기 영문모를 오한이 들었다. 계속 눈을 마주칠수가 없어서 내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나...음... 있잖아.. 수희가... 사고를 당했어... 식물인간이 됐는데... 언제 죽을지 몰라...."
나는 순간 심장이 멎는줄 알았다. 분명히 수희라면.. 영수놈 와이프인데.... 이자식도.... 이런일을...
나도 영수처럼 내 목숨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여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얼마전에 사고를 당했고,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래서 은퇴하신 부모님과 함께 와이프 간병을 위해 하던일을 다 때려치우고,
이곳의 별장을 하나 사서 이사를 왔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그녀는 몇달뒤에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녀석도... 우리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기에...
이처럼 죽을것만같은 고통을 둘다에게 주는것인지... 순간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이...일단.. 의사말은 다 집어치우고 생존에 필요한 기구만 가지고 우리집에서 간병을 하고 있어..
그런데... 이제 얼마 안남은거 같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영수는 남은 소주를 입에 털어넣었다.
"근데... 왜 날 찾은거야?"
와이프 이야기가 나와서 순간패닉 상태였지만, 당연한 질문이었다. 내가 같은 일을 당했을거라는걸 알고
있을테고, 설마 이야기를 하려고 굳이 이런 산골까지 날 찾아왔을리는 없지 않은가.
"그...책...."
나는 순간 영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책' 이라는 단어만 듣고도 떠올려버린 책....
"야!! 너 제정신이야?"
"제발.. 제발... "
그 책.... 갑자기 그 책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영수와 한참 어울리던 고등학교시절, 방학중이라 내 집에서 서로 뒹굴뒹굴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갑자기 영수가
나를 불렀다.
"야!! 이리좀 와봐!!"
"아.. 뭔데... 어!! 새꺄!! 아버지 서재에 함부로 들어가면 죽음이야 임마!! 너 미쳤어??"
"아...미안미안..크크.. 암튼 이거 한번 보라니까..."
그 책을 보자마자 난 순간 오한이 들었다. 두껍고 새빨간 양피지로 둘러싸인 책... 책을 펼쳐보니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위에 이상한 그림들과 깨알같은 글씨로 영어같은 문장이 빽빽히 적혀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버지가 목숨처럼 아끼시는 고서적 서재에 들어왔다는것도 깜박 잊을 정도였다.
"야.. 이거 웬지 오싹하지 않냐??"
"야 미친... 우리 아버지한테 걸리면 우리 둘다 죽은 목숨이야..."
"야.. 이거 우리 가져가서 해석해 보지 않을래??"
"야 너 진짜 돌았냐?? 우리 아버지가 알면..."
"야!! 임마 여기 책이 이렇게 많은데 너희 아버지가 어떻게 아셔.. 그리고 저 구석에 쳐박혀
있던거란말야...
웬지 눈에 띄길래 꺼내봤더니... 웬지 오싹한 느낌이 들더란 말이지... 킬킬..."
순간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잠깐의 두려움은 삼켜버리고 영수와 또 추억거리가 하나 늘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그럼 저기 헤집어 놓은거 다 치우고......."
그 정체불명의 책을 해석하기란 쉽지 않았다. 너무 옛날 영어라 그런지 문법도 잘 맞지 않았고,
군데 군대 구멍같은게
나서 띄엄띄엄 있는 문장들도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귀찮은걸 그렇게 싫어하던 우리 둘이 몇날 몇일을 붙어 결국 해석을 끝내고
말았다.
방학이라서 어짜피 시간때울일도 없는데 호기심과 맞물려 그랬던것같다. 그리고 우리를 더욱 유혹했던건
그 책의 내용이었다. "Undead" 이것이 이 책의 주 내용이었다. 즉 죽은 사람을 살려낼수 있는 방법을
써넣은 책인것인데 사람의 손발을 잘라 그 피로 어떤 도형을 그리고 그 안에 시체를 넣고 시체를 잘게
잘라 도형대로 쌓아놓으면
그 시체가 일어나 피와 살과 뼈를 먹고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그로테스크하고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와 영수는 피끓는 10대 였고, 마치 무서운 이야기를 해독하듯이 재미있게 작업을 마쳐 나갔다.
하지만 마지막에 몇장이 찢겨 나가고 중간에 해석이 덜된 부분이 있어서 결국 해석작업은 미완성으로
마치고 말았다.
"아 아깝다.. 크크.. 이거 완전히 골까는데?? 야, 우리 둘중 누가 먼저 죽으면 이걸로 살려내기!! 어때??"
"짜식.. 미친소리하네.. 키키킥"
그냥 학창시절의 한 조각의 추억이었다.
이런식으로 10년만에 만난 친구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
잠시 회상을 하던 도중에도 영수는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나도 왜 그때 내가 영수를 우리집으로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다. 같은 처지를 당한 친구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어서 들어와"
아까부터 영수는 말이 없었다. 그냥 초점없는 퀭한 눈빛으로 날 바라볼뿐이었다.
".......제발 부탁이다. 진석아."
".... 잠깐만 일단 술상좀 차릴게 잠깐만 기다려봐"
난 우선 시간을 벌기 위해 술상을 차린다는 핑계로 주방으로 들어섰다.
아무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어떻하지'라는 단어만 머리속에 반복되어 스쳐갈뿐...
하릴없이 시간이 흘러 나와 영수 사이엔 그럴듯한 술상이 차려졌다.
".... 정말 안되겠니?"
영수의 퀭한 눈빛을 쳐다보기 힘들어 눈을 내리깔고는 대답했다.
"야.. 정말 너 왜그래..."
동시에 갑자기 어렴풋이 그 책의 내용이 생각났다.
"야.. 너도 그 책내용을 대충 알잖아... 어쩌려고 그래??"
그렇다. 지금 자신이 사랑하는사람만이 보이는 사람에게 그런 책을 내어준다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도....나도 알아.... 단지... 그 책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더 편해질것 같아서 그래...."
나와 같은 시련에 처하고 같은 아픔을 곧 느껴야할 둘도없는 친구..... 그앞에선 어떤 잣대도
필요없을것만 같았다.
"알았어... 하지만 우리도 이사오면서 책이 없어졌을수도 있고...... 일단 서재로 가보자"
우리는 말없이 서재로 향했다. 서재를 들어서자 종이와 먼지가 섞인 내음이 우리를 반겼다.
서로 말없이 그 빨간책을 찾기 시작했다.
".....!!"
의외로 빨간 책은 눈에 띄는곳에 있었다.
영수는 말없이 그 책을 꺼내들었다.
"......."
우리는 말없이 서재를 나왔다.
"고맙다...."
긴 침묵끝에 영수가 입을 열었다.
"야 임마.. 친구로서 충고하는데 그런거에 매달리지마.. 제수씨 아직 살아계시잖냐... 내가 신이라면.. 네
정성봐서라도 완치해 준다.... 완치 되고 말고...."
말없이 영수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 아픔을 아는 나로서는 더욱더 가슴이 아파올 뿐이었다.
그리고 나선 영수와 연락이 되질 않았다.
영수에게 갑자기 연락이 온것은 그 책을 꺼내준지 3개월쯤 되던 날이었다.
"여보세요?"
"크...크흑.... 지...진석아.... 우두둑........ 빠직....."
"여보세요!!!! 무슨일이야!!!!!"
"아...아아... 내가...트....틀렸.... 우득...우득.... 아아악!!!!"
"뭐야!!! 무슨일이야!!!!!"
"으...크.... 미....미안해... 내....틀렸....... 뚜뚜뚜뚜뚜뚜........"
난 끊어진 수화기를 든 채 멍하니 있을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서 들려온 소리는 무었이었을까....
마치... 뼈를... 씹는듯한.....
"아, 안녕하십니까. XX시 강력반 최윤호형삽니다. 다름이 아니고.. 혹시 김영수씨와 아는사이십니까?"
"아..예 친구입니다만"
"저...사실 김영수 씨가 사망 하였습니다."
"............"
"죄송하지만 서로 한번 나와주셔면 감사하겠는데요, 숨지기전 마지막 통화를 하진석씨에게 한걸로 되있더군요."
"꼭 가야하나요?"
"예... 전화상으로 하긴 좀 그런 이야기라서.. 한번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직 겨울이 채 오지도 않은 가을이지만 바람이 쌀쌀했다.
난 옷깃을 여미며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
"마지막 통화 내용을 알수 있을까요?"
"제가 말씀드렸다 시피 친구분은 이해할수 없는 엽기 범죄를 일으킨 사람입니다.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는
데요..."
"사실.. 저도 이상하다고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알수없는 소리만 했었거든요"
".....무슨 소리 말입니까?"
"글세요... 말 그래도 알수없는 소리였습니다. 비명도 아니고... 뭔가 알수없는...."
"즉, 말이 아니라 소리만 들으셨다는 겁니까?"
"네.... 저도 지금 사실 정신이 없네요... 둘도 없는 친구가 이런식으로....."
".....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친구분에 대해서 더 생각나시는게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나는 말없이 명함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날이 쌀쌀했다.
그 형사는 나를 그 빨간책과 연관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하겠지.
아마 정신이상으로 인한 엽기 범죄로 좁혀들어갈 것이다. 이해할수 없는 부분도 많겠지만...
......
아직도 가슴 한켠이 쑤시다.
어찌되었던 친구의 죽음이라는건 받아들이기 힘든것인가보다.
영수를 처음 발견한건 관리인 이라고 했다. 그 전날부터 계속 알수없는 소음에다가 악취까지 풍겼을테니
아무리 평수가 넓은 고급 빌라라 해도 불평이 쌓였을수 밖에.
아마 그 관리인은 바지에 오줌을 지렸든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든 엄청난 충격을 먹었을 것이다.
영수를 도와주던 간호보조사는 형체도 없이 잘려있을테고, 영수 와이프의 시체에다가, 영수 본인도 절반이
뜯긴 상태였다고 하니.
나에게 부탁하던 퀭한 눈빛의 영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그때... 책을 주는것이 아니었는데.
아마도 영수는 우리가 완성하지 못했던 부분때문에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리라....
충분히 고통을 겪었을텐데.... 나역시 아는 고통을.....
엽기적인 범죄자 임에도 불구하고 영수가 싫게 느껴지진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선 무었이든 할수있는게 사람 아니었던가.
영수에겐 모든것이 따라주지 않았다.
하다못해... 간호보조사 말고... 부모님이라도... 같이 살고 있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실험횟수가 늘어났을테니까....
아니... 반드시 성공했을것이다......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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