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1-20 오후 4:19:02 Hit. 3654
경상도 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문경새재에 아담한 초가집이 한 채 있다. 첩첩 산중에 홀로 서 있는 그 집은 재를 넘는 행인들의 유일한 안식처이기도 했다. 그 집에선 송씨라는 젊은 남자가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과 단란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원래 선비였으나 서울을 떠나 이곳에 내려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글도 잘하고 아는 것이 많았으나 이제는 글도 집어 치우고 술로 세월을 보내는 낙심한 선비의 신세였다. 그런데 남자는 새벽에 돌아오거나 이튿날 아침까지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나니 한양에서 낙향할 때 가져온 재산도 거의 다 밑바닥이 드러났고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는 매일 눈물에 젖어 남편을 기다렸으나 술 취한 그의 남편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갈수록 난폭해지고 장터의 기생들과 어울리는 남편을 원망했다. 그러던 중 여우 한 마리가 이 집에 숨어들어 와서 밤이면 말썽을 저지르고 둔갑질을 하였다. 솥뚜껑을 숲속에 쑤셔 박든가 밥그릇을 팽개쳐 밥이 쏟아지기라도 하고 장롱 문을 열고 옷이란 옷은 다 꺼내어 찢고, 물어 뜯기가 일쑤였다. 문단속을 아무리 잘 해도 어떻게 뛰어 넘는지 들어와서 그짓을 해놓고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내는 어느날 남편을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남편은 잠자코 듣기만 하다가 나가 버렸다. 그날 저녁때쯤이었다. 뜻하지 않은 남편의 친구가 찾아왔다. “송씨는 아직 안들어 왔습니까? 먼저 가 있으면 방금 뒤따라 오겠다더니…” 난처한 듯이 남편의 친구는 머뭇 머뭇 하면서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러시다면 잠깐 기다리시지요.” 그녀가 권하자 남편의 친구는 염치불구하고 들어와 앉아서 송씨가 들어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일찍 돌아 온다던 남편은 해가 지도록 소식이 없었다. 송씨의 아내는 밥상을 차려서 손님 방으로 들여 보내고 자기는 하녀와 함께 부엌에서 밥을 먹었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라 세간살이가 변변치 못하여 밥그릇을 한데 다 두고 살았기 때문에 그날도 무심코 빈 그릇에 밥과 국을 담아 먹었다. 그런데 송씨는 원래가 호색한지라 집안에 양기를 돋구는 약을 두고 늘 사용해 왔었다. 마침 그날 저녁에도 여우가 여전히 전날처럼 야단을 쳐놓고 돌아갔다. 그러나 아내는 방안에 아무 일이 없었으므로 안심하고 부엌으로 나가서 무심코 밥을 먹은 것이다. 아내는 남편의 양기 돋구는 약이 여우의 장난으로 밥그릇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을 꿈에도 몰랐다. 송씨의 아내는 하녀에게 말했다. “얘야, 밥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느냐?” “흠흠……아뇨, 잘 모르겠는데요.” 코를 벌름거리며 하녀가 대답을 했다. 얼마쯤 지나서였다. 송씨의 아내는 별안간 속에서 불이나는 듯 치밀어 오르는 욕정을 느꼈다. 송씨의 아내는 마침내 사랑방 문을 두르렸다. “누구시오? ” 여인의 인기척이 나자 남편의 친구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나 부인은 묵묵부답이었다. 남편의 친구는 얼른 그 뜻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문도 열지 않고 조용조용하게 말을 했다. “저와 부인의 남편은 도의와 인의를 지키며 사귀는 친구 사이며, 사나이의 의리가 있는데 어찌 짐승같은 행동을 하여 우정을 저 버릴 수 있겠소? 부인은 혜량하시오.” 그래도 그녀는 도저히 욕정을 참을 수가 없어서 문고리를 붙잡고 우물쭈물 망설였다. 그러자 남편의 친구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소리를 질렀다. “남편의 해박하던 글솜씨와 단정하던 품행도 당신 때문에 망쳐졌단 말이야! 썩 물러가지 못해! 퇬!” 남편의 친구는 몹시 분하다는 듯이 들창 밖으로 침을 뱉았다. 그 소리를 듣고 그녀는 심한 수치심을 느껴서 얼른 안방으로 돌아왔다. <어쩌자고 내가 그런 망칙한 생각을 하게 됐을까?> 곰곰히 생각에 잠겼던 여인은 무릎을 탁 치며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나갔다. <그렇구나, 아까 밥그릇에서 나든 그 냄새가 바로 …> 남편이 먹던 약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첩에 든 약을 펴본즉 과연 찢어져서 반은 흩어지고 반은 그릇마다 묻어 있었다. 그녀는 냉수를 마시면 낫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물을 마시고 가슴을 내리 쓸었다. 얼마가지 않아 타오르던 불길은 사그러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그러자 부인은 새삼스레 자기가 한 일이 수치스러워서 몸 둘 곳을 몰랐다. 풀이 죽어서 고개를 떨구고 고민에 잠겨 있는 동안에 어느새 먼동이 텄다. 「날이 새면 저 손님의 면목을 어찌 대할손가? 차라리 죽어 사죄함이 마땅하리라」그녀는 치마끈을 풀어서 목을 매어 버렸다. 새벽이 훨씬 지나서야 하녀가 안방 문을 열어보고 기겁을 했다. 하녀는 달려들어 끈을 풀어 주무르는 등 수선을 피웠다. “이게 웬 일이세요? 마님! 정신 좀 차리세요.” 한참만에야 온몸에 생기가 가신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손님은…” “네, 마님, 손님은 밤중에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더군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남편은 아침이 지나고 한낮이 기울어서야 돌아왔다. 아내가 누워 있는 것을 본 그는 어찌된 영문을 물었으나, 아내는 다만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새벽에 안방을 들여다 보니 마님께서 글세…목을 매시고 축 늘어져 까무라치셨지 뭐예요. 놀라서 혼이 났습니다.” 남편은 계집아이의 말을 듣고 몹시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자 아내는 맥 없는 손을 들어 하녀를 나가게 하고 사실대로 숨김없이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자세히 듣고 난 남편은 용서해 달라고 비는 아내의 손을 쓰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아무 잘못도 없소. 모두가 내 불찰이었소. 다행히도 더 없이 훌륭한 친구를 만나 무사히 지났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던들 불륜의 화를 입어 모두가 떼죽음을 겪을뻔 하였소.” 남편은 아내에게 머리를 숙이고 잘못을 빌었다. 아내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기뻐 하였다. 그로부터 남편은 지금까지의 방종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개심하였다. 그후로는 여우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 부부가 문경새재에서 금실좋게 살아가자 차츰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제는 제법 조그마한 부락을 이루게끔 인가가 많아졌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아내가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죽고 말았다. 남편은 슬픔에 잠겨서 정신이 나간 사람같이 되었다. 지난날 아내에게 몹쓸 짓을 하고 독수공방 젊은 시절을 홀로 지키게 했던 것이 한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다. 남편은 혼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찬 바람이 쏴아 몰려들더니 죽었던 아내가 소리없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아니? 당신이…」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당신이 왔소?」생시와 다름없이 아름다운 그의 아내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이미 망령이오나 이렇도록 슬퍼하시는 낭군님의 마음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기에 염라대왕께 상주하여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이랍니다.」하면서 아내는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그로부터 매일 새벽에 헤어져서 자정이 되면 또 만나곤 하여 일년 남짓 세월이 흘렀다. 송씨는 밤이면 아내를 만나기 때문에 후처를 얻을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송씨의 친구간에는 구구한 변설이 나돌았다. 그의 형제들은 송씨의 혈통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여 후처를 속히 얻도록 권고를 하였다. 어느날 그의 백부는 그 마을의 양가집 규수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송씨에게 데리고 왔다. 그리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점차 송씨도 마음이 움직여 허락하고 사주단자까지 보냈다. 그러나 송씨는 죽은 아내가 달갑지 않게 여길 것을 염려하여 그 사실을 숨겨 왔다. 점차 혼례일이 가까워지자 송씨 아내의 혼은 그것을 알아 채고 남편을 책망하였다. “이 몸은 당신께서 의리가 있어서 천상 세계의 계율까지 어겨가면서 밤마다 찾아왔었는데 지금에 와서 우리의 연분을 헌신짝같이 저버리려 하시오니 너무 무정합니다.” 「사실은 친족의 의견에 따른 것 뿐이니, 너무 섭섭히 생각지 마오.」 그러나 아내의 혼은 성을 풀지 않고, 「안녕히 주무십시오」하는 인사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어느덧 혼인 날짜가 닥쳐와 혼례를 치루고 첫날밤을 맞이하여 두 부부는 원앙금침에 몸을 묻었다. 그런데 자정이 지나자 송씨의 죽은 아내가 나타났다. 찬바람이 오싹하여 방안을 휩쓸더니 송씨의 전처는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면서 신부를 꾸짖는 것이었다. 「어찌하여 나의 잠자리를 앗아가는고? 그대는 내 저주를 받으리라.」유령이 목청을 돋우며 이불을 걷어 제치고 신부도 벌떡 일어나 노려보다가 달려 들었다. 그들은 서로 물어뜯고 한 바탕 싸움을 벌였다. 송씨는 알몸을 움추리고 여인의 싸움을 지켜보고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송씨의 전처는새벽닭 울음 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싸움을 멈추고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렇게 되니 난처한 것은 송씨였다. 그는 신부의 추궁에 대답이 물리어 땀을 뻘뻘 흘릴 뿐이었다. 「서방님의 전 부인이 죽지 않고 살아서 엄연히 두 눈이 시퍼런데 죽었다고 거짓으로 말씀하시어 이 몸을 속이셨사옵니다. 장차 이 몸은 어찌 살겠습니까?」신부는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면서 목을 매려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송씨는 자초지종을 일일이 설명하고 그것은 죽은 아내의 유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간신히 납득시켰다. 밤에 다시 송씨의 죽은 아내가 나타나자 신부는 겁에 질려서 다른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송씨의 전 아내는 그의 몸을 어루만지며 앉아 있다가 사라졌다. 그런 일이 며칠 밤이나 계속되자 송씨는 몹시 난처해졌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동네 사람에게 부탁하여 복숭아나무를 다듬어서 말뚝을 만들게 하고 그것을 죽은 아내가 묻혀있는 산소 네 귀퉁이에 놓았다. 그러자 바로 그날부터 죽은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그로부터 복숭아 나무는 귀신이나 마귀를 쫓는 힘이 있다고 믿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도 복숭아 나무를 꺾어서 문지방 위에 얹어 두는 미신이 남아 있는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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