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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지 마스터[7-5]
절대긍정
2011-12-15 오후 3:02:10 Hit. 2119
레인지 마스터 5권
목 차
제16장 몬스터 침공 이벤트의 시작!
제17장 레인지 마스터, 존재를 나타내다
제18장 새로운 비기, 싸이클론 애로우
제19장 레이지 마스터, 존재를 각인시키다
제20장 몬스터 침공 이벤트의 종지부
제21장 신대륙 아리시아! 그리고 오크들과의 첫 대면
제22장 새로운 동료
제23장 바인마하 왕국의 수도 페리안에 도착하다
제24장 무투 대회, 레드 파운의 존재를 각인시켜라!
외전 팔라딘
제16장 몬스터 침공 이벤트의 시작!
2234년 7월 23일. 오후 12시.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 광장.
여느 때와 같이 시계탑 광장 주변은 수많은 유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유저들의 음성이 시계탑 광장을 가득 메웠다.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앞으로 세 시간 후 실행될 몬스터 침공 이벤트를 주제로 삼고 있었다.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강력한 몬스터들이 대거 침공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 이벤트 진행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 남짓 남았지만, 벌써 유저들은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모니터를 통해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영수 팀장이 빙긋 웃으며 등을 기대고 않아있던 의자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번 이벤트만 잘 끝나게 된다면, 세릴리아 월드의 지지도가 상당히 높아지겠군.’
입이 귓가에 걸릴 만큼 활짝 웃어 보인 김 팀장은 앞으로 열릴 이벤트 때문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두 명의 신입 직원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긴장 풀고, 평소에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네.”
두 직원이 동시에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대답했다. 팀장의 격려 섞인 말 한마디에 힘을 얻은 두 신입 직원들이 두 눈이 번쩍였다.
* * *
무언가 따스한 것이 얼굴을 비추는 것을 느끼며 나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눈을 껌뻑이자 뿌옇게만 보이던 천장이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었다.
(나는 근시인지라 완벽한 형태를 갖춘 천장을 보려면 안경을 끼거나 렌즈를 착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으으으.”
잠에서 깬 나는 먼저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아래쪽으로 쭉 편 다리가 기지개를 켬과 동시에 부르르 떨렸다. 기지개를 켠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도대체 얼마나 잔 것인지 잠에 취해 아직까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채 나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거실을 향해 느릿느릿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컴, 지금 시간이 몇 시야?”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현재 시각은 오후 1시 30분입니다. 방학을 맞이했으니 평소에 부족했던 수면을 취하실 수 있도록 일부러 깨우지 않았습니다.」
“음, 그래?”
나는 컴의 말을 건성건설 들으며 욕실로 향했다.
1시 30분이라. 앞으로 1시간 30분 후면 몬스터 침공 이벤트가 진행되는군. 아무 생각 없이 욕실로 들어선 나는 거울을 보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외쳤다.
“아차, 몬스터 침공 이벤트! 다른 녀석들은 벌서 일어나서 준비하고 있을 텐데!”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욕조를 가린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 크린 워터 샤워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자 금세 세수와 양치, 목욕을 자동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아침샤워를 끝낸 후 완벽하게 몸을 말린 뒤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나는 거실로 나와 냉장고에서 인스턴트식품 하나를 꺼내들었다.
“음, 아니지. 오늘은 그냥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로 하자…….”
별안간 생각이 바뀐 나는 집어 들었던 인스턴트식품을 제자리에 둔 뒤 냉장고 한 구석에 보관되어 있는 육포 봉지를 꺼내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봉지를 뜯어 꺼낸 커다란 육포를 쭉쭉 찢어 입에 쑤셔 넣고 질겅질겅 씹으며 어슬렁어슬렁 방으로 들어온 나는 가상현실 게임기기 허리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삑.
위잉.
평소와 다름없는 기계음과 함께 위아래로 열리는 미닫이 식문이 천천히 열렸다.
“웃차.”
손에 육포를 쥔 채 게임베드에 드러누운 나는 아무생각 없이 입에 물고 있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아무리 누워서 즐기는 가상현실게임이지만 머리회전에도 체력은 중요하다.
우선 먹을 것을 먹고 접속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우선 육포를 몽땅 먹어치우는 데만 전념했다.
우적우적 씹어 삼켜 순식간에 육포는 내 위장 속으로 들어갔고, 나는 입맛을 다시며 머리맡에 놓인 헤드셋을 집어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것을 신호로 헤드셋에 전원이 들어오며 캡슐의 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위이잉.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이젠 익숙한 여성의 음성.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63.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웅성웅성.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한 나는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시계탑 광장에 모인 유저의 수가 평소보다 배나 더 많아 보였다. 내가 접속을 함과 동시에 소환된 루카가 내게 다가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반갑다, 루카.”
나는 손을 뻗어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적안(赤眼)을 개안(開眼)했다. 그리고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캬, 완전히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네. 곧 있으면 몬스터들이 대거 침공하겠군.”
적안으로 먼 곳을 응시하던 나는 저 멀리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자 망원경을 통해 보듯 넓게 확보되어 있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전보다 많은 유저들이 모이는 바람에 자연히 광장은 배로 떠들썩했고, 나는 귀를 틀어막으며 공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뭐 그리 할 말이 많은 건지. 특히 여성 유저들이 모여 있는 곳은 더했다.
거의 놀이동산에 필적하는 소음이 메우고 있는 광장을 벗어나 한적한 공터에 도착한 나는 치를 떨며 광장 쪽을 응시했다.
“휴우, 조금만 더 있었다가는 고막이 남아나질 않았을 거야.”
광장 쪽에서 시선을 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공터의 산책로로 향했다. 내 뒤로는 루카가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렇게 조용히 산책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순간 하늘에서 새하얀 빛이 섬광처럼 작렬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나는 눈을 섬광이 뿜어진 중심점으로 돌렸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정체를 모를 한 사내. 적안 덕분에 이내 시야가 확보되어 사내의 이목구비와 전신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익숙한 얼굴. 그는 유저들은 결코 입을 수 없는 화려한 복장에 훤칠한 키를 가진 메인이벤트 담당 운영진, GM추(秋)였다.
“뭐야, 운영자잖아.”
폭발하듯 뿜어진 눈부신 빛과 함께 등장한 운영자 추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많은 유저들께서 이벤트에 참여해주셨군요. 안녕하니까? 메인이벤트 담당 운영자 GM추입니다.]
운영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광장 쪽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운영자다!”
운영자가 말을 할 틈을 줄 생각도 없는지, 광장에선 끊임없이 함성이 터져 나왔으나, 노련한(?) 운영자 추가 손을 휘젓자 언제 그랬냐는 듯 광장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엄청난 통솔력이군. 아니, 프로그램의 힘인가?’
나는 피식 웃으며 다음에 이어질 운영자의 말에 집중했다.
[이번에 개최하는 이벤트는 저희 세릴리아 월드에서 개최한 ‘오픈 3주년 이벤트 공성전’에 이은 두 번째 메인이벤트, ‘몬스터 침공’입니다. 이 이벤트는 세릴리아 대륙의 주요 도시인 수도 세인트 모닝과 엘프의 도시 아리스 노아,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를 중심으로 개최됩니다. 이곳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에는 비교적 강한 몬스터가 추가적으로 침공을 할 것이니, 마음 단단히 먹어두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는 한 시간 후 다시 이곳으로 오겠습니다.]
스슥.
말을 마친 운영자 추의 모습은 나타날 때와 또 달리 안개에 가려지듯 사라져버렸다.
유저들도 저런 멋들어진 복장을 입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투덜거리며 혼자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레드.”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 굵직하지도, 그렇다고 가늘지도 않은 보통남성의 음성이었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기다란 스태프를 쥐고 있는 레온이 빙긋 웃으며 서 있었다.
“앗, 레온?”
반사적으로 내 입술을 비집고 나간 한마디, 그에 레온이 목례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역시 내 예상대로 레온도 몬스터 침공 이벤트에 참가하는군.
나는 빙긋 웃어 보이며 천천히 레온에게 다가갔다. 레온이 말했다.
“광장에 계시지 않고 왜 공터에…….”
“광장은 너무 시끄러워서요. 레온도 그렇지 않나요?”
나의 물음에 레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도 나와 마찬가지로 시끄러운 광장에서 벗어나 공터로 나온 것 같았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산책로의 길모퉁이에 만들어진 통나무 의자로 자리를 옮긴 나와 레온 그리고 루카.
스태프로 땅을 짚은 레온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레드 이번 이벤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직접 사냥터에 가지 않고서도 레벨업을 할 수 있으니까 좋은 것 아닌가요?”
갑작스럽게 이벤트에 관해 질문해오는 레온.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고 그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이벤트의 룰을 보니까, 침공해오는 몬스터가 티르 네티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관청을 파괴시키면 몬스터 측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더군요. 게다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강력한 몬스터들이 대거 출현한다는 것도 문제지요.”
‘관청이 파괴되면 게임오버라…….’
아직 모르고 있었던 정보였기에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도 레온이 엄청난 활약을 할 것 같군. 이번에는 그가 또 어떤 강력한 공격마법을 익혔는지 궁금해진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막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커다란 입체 창이 나타나 내 눈 앞에 있던 레온을 가려버렸다.
[티아 젠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얼레. 뭐야 이건? 레온, 잠시 실례 좀…….”
급 민망해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레온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내가 우스웠는지, 레온이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험. 승인.”
대화 요청을 승인하자 가늘고 고운 음성이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자기야~.
“으, 응?”
갑자기 몸이 굳는 걸 느낀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어라? 얘가 뭘 잘못 먹었나?
-푸흐흐, 반응 봐. 내가 그렇게 부르는 게 이상한가…….
당황한 나머지 더듬더듬 대답을 하자 티아가 이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게 부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갑자기 그러니까 내가 적응이 안 되잖니.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풋. 뭐야~.”
-아니 그냥… 아침에 메신저 창을 열어봤는데, 계속 오빠가 오프라인 상태인 거야, 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지금 다시 메신저 창을 열어보니 오빠가 온라인으로 표시되어 있기에 대화요청을 해봤지.
“그래? 흐흐. 지금 어디야?”
-여기?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잡화상점이지. 오늘 유저들이 참 시끄럽네.
티아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캐릭터의 특성상 엘프 캐릭터는 인간 캐릭터보다 시각과 청각이 훨씬 더 뛰어난 편이다.
물론 나 같은 경우는 레인지 마스터가 되면서 시각과 청각이 일반 인간 캐릭터와는 차원이 달라졌기 때문에 티아가 겪는 소음이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하하. 너도 광장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싫었구나. 잠시만 기다려봐.”
잠시 대화를 중단한 나는 내 앞을 가리고 있는 입체 창을 손으로 밀어내며 레온에게 말했다.
“레온, 혹시 친구 하나를 불러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아, 티아. 너 안 바쁘면 지금 공터 산책로로 와라. 너한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
-응, 알았어. 금방 갈게!
[티아 젠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대화를 끊어버린 티아.
티아와 대화를 마친 나는 레온에게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레온, 혹시 이번에도 강력한 마법을 익혔나요?”
“아하하… 뭐, 강력한 마법이라기보다 다수의 적들을 효율적으로 공격하는데 좋은 마법을 익혔다랄까요?”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산하며 물어오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레온의 표정에 민망함이 들어차는 게 보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또다시 급 민망해져 일부러 시선을 얌전히 앉아 있는 루카에게 두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루카. 마치 루카의 눈에는 ‘내 주인이 저렇게 얼빵했었구나.’라는 무언의 납득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였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루카의 귀가 쫑긋 세워지더니 이내 고개를 쳐들고 코를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카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루카.
“왜 그래. 루카?”
나도 루카가 응시하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서 누군가와 함께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작은 키에 뾰족한 귀를 가진 엘프 유저. 그 옆에 서 있는 유저도 그녀처럼 엘프 유저였는데, 훤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밝은 갈색의 머리칼과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그토록 어울리는 이도 드물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남들이 본다면 잘 어울려 보일 것 같은 한 쌍이었으나, 내 관점에서 내 여자친구인 티아와 나란히 걸어오고 있는 유저가 반갑지 않은 것뿐이랄까.
어디서 한 번쯤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한 유저. 유저의 정체를 떠올리기 위해 나는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처음 아리스 노아에 도착했을 당시 보았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제작하면서 봤었던 그 녀석! 바로 그 녀석이다!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제작할 때, 어느 순간 나타나 훼방을 놓았던 ‘로이체’라는 녀석.
티아와 로이체는 금세 레온과 내가 앉아있는 통나무 벤치에 다다랐다. 내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기 시작하는 티아. 그 뒤론 로이체가 씩 웃고 있었다.
“오빠! 앗, 안녕하세요.”
나에게 손을 흔들던 티아가 내 옆에 앉아있던 레온을 보자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레온도 그런 티아를 보며 목례를 했다.
“오랜만이군요. 레드 파운이라고 했었나요?”
그러자 티아의 옆에 선 로이체가 내게 말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로이체를 쏘아보았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 아직까지도 아니꼬운 녀석이다.
그렇게 로이체를 쏘아보고 있자, 티아가 통나무 벤치에 앉아 내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빠. 인사 정도는 해줘야지.”
“아, 오랜만이네요. 로이체.”
“호오?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군요.”
티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인사를 건넸더니 로이체가 빈정거리듯 대답을 함과 동시에 레온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 분은……?”
“안녕하세요. 레온이라고 합니다.”
로이체의 물음에 레온이 대답했고, 레온의 말이 끝나자 로이체가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기며 소리쳤다.
“레온이라면 혹시 ‘마성의 두 번째 현자’로 공성전 이벤트 때 수성 측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던 마법사 아닌가요?”
“활약까지야… 그저 미숙한 실력을 펼쳤을 뿐입니다.”
레온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역시 어느 누구에게나 첫인상이 좋은 레온이었다.
그건 그렇고, 왜 티아가 이 녀석과 온 거지?
갑작스런 의문(?)이 생긴 나는 팔짱을 낀 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티아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너 혼자 있던 거 아니었어?”
“응? 아, 광장을 지나오다가 우연히 만났어. 그건 그렇고, 다른 친구들은?”
“다른 녀석들은 뭐 다들 접속해 있을 걸.”
나에게 되묻는 티아의 말에 대답하며 나는 신기한 듯 루카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로이체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전과는 다른 롱 보우를 등에 둘러메고 있었고, 복장마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로이체의 위아래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훑어보던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레온에게 시선을 던졌다.
“레온, 이벤트가 시작할 때쯤 광장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죠?”
“아무래도 그렇다고 봐야겠죠? 그나마 지능이 높은 녀석들은 관청부터 파괴하려고 들 테니까요.”
“그렇군요.”
레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때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티아가 급히 머리를 들어 레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레온 씨의 마법이라면 다수의 몬스터도 한 방에 처리할 수 있지 않아요?”
그러자 레온이 멋쩍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건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고위급 마법을 발현시켜 다수의 적을 공격할 수 있긴 하지요. 하지만 마법 내성이 있는 몬스터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리치와 같은 고 서클의 언데드 몬스터나 골렘, 오우거와 같은 몬스터들은 마법에 대한 내성이 엄청나요.”
“아… 그럼 마법도 무적은 아니라는 셈이네요.”
레온의 말에 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 내성이 강한 몬스터라… 하긴, 나 같은 경우도 듀라한을 상대하면서 꽤나 애를 먹었던 것이 기억났다. 놈은 활에 내성을 띠고 있어 화살을 그대로 퉁겨내는 괴물 같은 녀석이었다.
우리는 이벤트에 관한 이야기를 시발점으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실전에서는 자신이 생각했던 일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일이 벌어진다지만 미리 계획을 해놓은 것도 나쁜 것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서로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을 확인한 레온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제 곧 운영자가 나타날 시간이군요. 슬슬 광장으로 돌아갑시다.”
“만반의 준비는 이미 다 해두었으니 이따 침공해오는 몬스터 녀석들만 막아내면 되는 거군. 화살도 넉넉하고.”
나는 아이템 창에 여분으로 만들어둔 화살들과 화살통에 들어있는 화살을 확인한 뒤 아이템 창을 닫았다.
다른 궁수들과는 달리 나는 내가 직접 만든 수제화살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어제 하루 온종일 화살만 제작했다. 그렇다고 일반 화살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또다시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시계탑 광장에 다다랐을 때, 정확히 한 시간 전과 같은 위치에서 눈부신 섬광이 사방으로 뿜어졌다.
번쩍!
“운영자다, 또 나왔다!”
“오오!”
웅성웅성.
운영자가 나타나기가 무섭게 또다시 시끄러운 소음이 광장을 메우기 시작했고 나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한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갔군요. 잠시 후 몬스터 침공 이벤트가 진행될 것이니 아직 티르 네티아 밖에 계신 유저들은 모두 시계탑 광장으로 모여주시기 바라니다.]
아직까지 광장에 오지 않은 유저가 있나?
얼른 루카의 등에 올라타 일어선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그리고 수많은 유저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시계탑 광장을 한 바퀴 빙 둘러본 나는 얼른 루카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운영자의 말이 이어졌다.
[이벤트의 룰은 간단합니다. 몬스터들이 순차적으로 티르 네티아를 침공할 것입니다. 물론 티르 네티아 이외의 수도 세인트 모닝, 엘프의 도시 아리스 노아에도 몬스터들이 침공을 할 것이며 이들로 인해 관청이 파괴되면 몬스터들의 승리로 이벤트가 끝나게 됩니다. 반면에 침공하는 몬스터들을 전부 섬멸시키면 유저 여러분들의 승리로 이벤트가 종료됩니다. 잠시 후 이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운영자는 말없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고, 유저 측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운영자가 이벤트 때문에 나타났기에 많은 유저들이 운영자에게 손가락질하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기대되는 걸.”
나는 빙긋 웃으며 등에 둘러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왼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리고 풀어진 활시위를 힘껏 당겨 활 끝에 고정시킨 뒤, 네 정령들을 소환한 나는 얼른 이벤트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 * *
“긴장 풀어, 자식아.”
“누가 긴장을 했다고 그래?”
경훈의 말에 혁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현성이는 티아 씨랑 있겠고, 너희들 모두 준비를 끝마친 상태지?”
“당연하지”
강찬의 말에 경훈과 혁이 대답했다.
시계탑 광장의 맨 끝자락에 모인 세 명. 새로 장만한 너클 건틀렛을 착용한 경훈이 허공에다 연신 주먹질을 해댔고, 혁도 몸이 근질근질했는지 거대한 배틀 해머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앗? 여기서 다 만나네.”
팔짱을 낀 채 경훈과 혁을 번갈아보던 강찬의 귓전에 많이 익숙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음성이 들려온 곳에 시선을 던진 강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앗? 명석이?”
강찬의 말에 경훈과 혁이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고 ‘명석’이란 유저에게 시선을 던졌다.
새카만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귀에는 기다란 줄로 엮은 작은 해골모양의 귀고리를 하고 있는, 검은 로브로 몸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외모 또한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얼굴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멍청해 보이는 뿔테 안경을 벗었을 뿐인데 명석에게서 풍겨져 오는 분위기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어라? 경훈이랑 혁이도 있었네. 오, 혁아 너 많이 변했다?”
명석이 말했다. 그에 혁이 배틀 해머를 어깨에 들쳐 메며 말했다.
“엥? 명석이? 내가 아는 명석이랑은 다른데? 그 녀석은 멍청해 보이는 뿔테 안경을 끼고 있다고.”
“내가 바로 그 멍청해 보이는 뿔테 안경을 끼고 있던 명석이다! 변한 것 같더니 어째 속은 똑같냐?”
명석이 투덜대며 말했다.
“오, 명석이었구나. 요새 학교에서 거의 볼 수 없었지? 오랜만이다.”
명석에게 다가간 경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고 명석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어라? 특이한 문양이 새겨진 장갑이네?”
악수를 하며 명석의 손을 본 경훈이 말했다. 명석의 장갑 손등 부분엔 복잡한 도형과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뜻 모를 화학기호 같은 것들이 적혀져 있었다.
“아, 이건 내가 직접 만든 장갑이야. 내 무기라고 볼 수 있지.”
“무기?”
“응. 연금술사들은 자신이 쓸 무기를 직접 만들거든. 그래서 연금술사들이 쓰는 무기가 가지각색인 것이고.”
두 손을 쫙 펼쳐 보인 명석이 다시 로브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건 그렇고, 현성이가 안 보이네? 너희들이랑 같이 있는거 아니었어?”
“지금 지 마누라랑 같이 있겠지.”
혁이 귀를 후비며 능글맞게 대답했다.
“얼레? 현성이가 여자친구가 있단 말이야?”
“그래.”
어깨에 들쳐 메고 있던 배틀 해머를 또다시 두 손으로 쥔 혁이 운영자가 있는 허공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강찬과 경훈, 명석도 운영자가 있는 곳에 시선을 던졌다.
[지금부터 몬스터 침공 이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한 마디 마을 내뱉은 운영자는 또다시 화려한 섬광을 뿜어내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광장에서는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함성은 여러 몬스터들의 거대한 포효에 묻히고 말았다.
티르 네티아의 남쪽, 북쪽, 동쪽의 문으로 몬스터들이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중갑주로 무장한 오크들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평소에 유저들이 만만하게 보던 그 오크가 아니었다.
추악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 늑대로 간주되는 짐승의 등에 탐승한 오크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좋아, 선빵을 날려보실까?”
명석이 피식 웃으며 두 손을 로브 밖으로 뺀 뒤 손뼉을 쳤다.
딱.
서로 맞대고 있는 왼손과 오른손을 중심으로 흐릿한 방전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푸른 스파크를 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두 손 사이의 거리를 벌리자 두 손바닥 사이에서 맹렬한 방전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먹만 한 전하 덩어리가 형성되어 푸른 스파크를 튀며 방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넋을 잃은 경훈, 혁과는 달리 강찬은 묵묵히 허리춤에서 문 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플레임 웨폰(Flame Weapon).”
화르륵.
뜨겁게 타오르는 화염이 검신을 타고 밀려올라와 일정한 형태를 갖추었고, 타오르는 화염에서는 열기가 뿜어져 나와 아지랑이를 피워냈다.
“에잇!”
명성이 맹렬히 방전하는 푸른 전하 덩어리를 앞으로 쏘아 보내자 한줄기 번개를 연상시키듯 전하 덩어리가 몬스터들을 향해 쏘아졌다.
콰르릉!
적중당한 울프 라이더(늑대에 탑승한 오크)의 전신을 휘감은 전류가 울프 라이더의 생명력을 빠른 속도로 감소시키기 시작했다.
“멋진데?”
명석에게 감탄사를 내뱉은 강찬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 몬스터들에게 몸을 던졌다.
“나도 질 수 없지, 패스트 워커!”
이동속도를 일시적으로 증가시키는 스킬을 발동시킨 경훈도 몬스터들에게 몸을 던졌다.
경훈의 주먹이 적중할 때마다 몬스터들은 입에서 피를 한줌씩 토해냈다. 발경(發勁)이 가미된 공격에 맥을 못 추는 것이 분명했다.
* * *
“저기 몬스터들이 밀려오기 시작하는군요.”
나는 피식 웃으며 소리쳤다.
“마스터! 저 녀석들은 뭐에요?”
“아, 유저들이 머무는 곳을 침공하는 몬스터들이야. 주작.”
나는 궁금한 듯 물어오는 주작에게 대답해주었고,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현무가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럼 저 녀석들을 모조리 잡아야 되는 거야?”
“그래. 이제 저 녀석들을 잡기만 하면 되는 거다.”
“저 녀석들을 못 잡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어떻게 되긴. 모두들 죽고 말겠지. 그러니까 저 녀석들로부터 모두를 지켜야 하는 거야.”
“우와~ 멋지다!”
현무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재빨리 루카의 등에 탑승했다.
정령 소환을 끝마친 티아가 융합(融合)스킬을 사용했는지, 티아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로이체 역시 전투 준비를 끝마쳤는지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주변을 빙 둘러보기 시작했다.
레온은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법을 발현시키기 위한 주문을 외는 것 같았으나 시동어만은 외우지 않았다. 흔히 마법사들이 사용한다는 메모라이즈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메모라이즈를 해두면 주문을 외거나 수인(手認)을 맺을 필요 없이 마법을 발현시킬 수 있기 때문에 짧은 시간 내에 마법을 남발할 수 있다고 들었다.
“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각종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촹! 촹! 촤창!
“크악!”
간간히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중형 몬스터들의 포효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벤트가 시작된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이벤트에 대한 열기는 뜨겁게 치솟고 있었다.
끼아아아!
찢어질 듯한 포효가 하늘에서 메아리쳤다. 날개를 단 비행 몬스터들이 대거 티르 네티아로 침입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그리폰과 히포그리프도 볼 수 있었고, 가고일도 떼를 지어 날아 들어오고 있었다.
“궁수님과 마법사님들, 정령술사님들은 비행 몬스터들 좀 처리해 주십시오!”
유저들이 지르는 고함으로 순식간에 아수라자이 되어버린 시계탑 광장. 비행 몬스터들이 이내 낮게 비행을 하며 유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끼아악!
히포그리프 한 마리가 레온을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직선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낚아챈 뒤 공중에서 떨어뜨릴 속셈인 것 같았다.
“메로라이징, 플라즈마 볼(Plazma Ball).”
레온의 주문영창이 이어지자 이내 레온의 몸 주위엔 농구공만 한 화염구가 형성되어 뜨겁게 타오르며 시전자의 주변을 빠르게 맴돌기 시작했다.
레온이 손짓하자 붉게 타오르는 화염구가 히포그리프에게 쏘아졌고,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히포그리프가 시커멓게 타 따에 처박혔다.
다시 일어서려는 히포그리프를 유저들이 그냥 둘 이유가 없었다. 일제히 달려든 유저들의 무기에 난자당한 히포그리프는 어처구니없이 생을 마감했다. 애초에 유저들의 경험치가 될 녀석이었기에 아주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히포그리프 뿐만 아니라 사나운 그리폰과 가고일들도 낮게 비행을 하며 유저들을 낚아채기 시작했다. 물론 낚아채는데 실패한 몬스터들은 그대로 유저들의 경험치가 되어야 했다.
“티아, 나 잠시 다녀올게.”
루카의 등에 올라탄 나는 고개를 돌려 티아에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같이 가자.]
내 쪽으로 급히 날아오며 티아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타라고 손짓했고, 티아가 루카의 등에 탑승했다.
“가자, 루카!”
“이곳은 제가 맡을 테니 오크들을 처리하고 오세요, 레드!”
“예!”
레온의 말에 대답을 하자 루카가 지면을 박차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든 나는 재빨리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었다.
‘티아가 뒤에 타고 있어 활을 쏘지 못 하겠군. 적당한 곳에 내려준 뒤 티아 주위를 배회하면서 몬스터들을 처리해야겠어. 물론 처음부터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유저들과 오크들이 치고받는 중심점에 다다른 나는 티아를 내려줌과 동시에 사방에서 달려드는 울프 라이더들에게 활을 쏘았다. 물론 주작의 파이어 애로우를 가미한 화살을 쏘았다.
“흐아악!”
울프 라이더의 글레이브에 옆구리가 찔린 유저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유저의 비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울프 라이더가 탑승하고 있는 추악한 몰골의 늑대가 유저의 목덜미를 물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티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타아는 능숙한 솜씨로 다수의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티아의 손아귀엣 소용돌이치는 주먹만 한 물 덩어리가 형성되었다. 그것을 쏘아 보내자 한 마리 울프 라이더에게 적중했고, 압축되어 있던 수압이 터짐과 동시에 강력한 데미지를 먹여 팔 한쪽이 가볍게 날려버렸다.
울프 라이더들의 글레이브와 화살에 상처를 입기도 했으나 물의 정령의 전매특허인 회복 마법으로 순식간에 자신의 상처를 회복하며 싸우는 티아가 대견스러웠다.
티아 말고도 다른 정령술사들도 많았는데, 특히 불의 정령과 융합한 정령술사들은 상상을 초월했다.
티아의 말대로 불의 최상급 정령과 융합한 정령술사들은 강력한 데미지로 몬스터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내 감각을 포착되었고, 루카의 옆구리를 왼발로 툭 차자 루카가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마스터, 하마터면 화살에 맞을 뻔했네요.”
백호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 시선을 던졌다. 울프 라이더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겨 나를 겨냥하고 있었으나 저들의 화살이 내게 통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나는 날아오는 화살 하나하나를 포착할 수 있는 루카가 화살을 피하며 녀석들에게 접근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활이란 무기는 근접전에선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기에 놈들에게 가까이 접근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그 범주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지만.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울프 라이더들에게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하는 루카. 루카의 등에 탑승한 나는 최대한 허리를 숙인 채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허공을 빽빽하게 메우고 날아드는 화살을 수초 사이를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유유히 피해내며 접근에 성공한 루카가 울프 라이더 한 마리를 낚아챘다.
주인을 잃은 늑대가 구슬픈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주인을 잃은 늑대의 머리통에 쏘아 보냈다.
쐐애액.
푸욱.
깨갱!
늑대 한 마리를 처리한 나는 루카의 등에서 뛰어내린 뒤 퀵 스텝을 걸고 울프 라이더들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내 계산에 오차가 있었다. 늑대들을 탑승하고 있었기에 재빨리 뒤로 물러나는 것이 가능했고, 근거리에서는 늑대가 공격을 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자를 택한 울프 라이더들이 재빨리 거리를 두는 것을 본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윈드 애로우!”
재빨리 화살 하나를 쏘아 보내자, 가속이 붙은 화살이 한 마리 울프 라이더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낙랑(落浪:늑대의 등에서 떨어짐)한 울프 라이더는 그대로 유저들의 경험치가 되었고, 주인을 잃은 늑대마저 유저들의 경험치가 되는 신세를 모면하지 못했다.
울프 라이더 하나를 처리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달려들기 시작했고 또다시 퀵스텝을 건 나는 재빨리 지면을 박찼다. 평상시와는 다른 속도로 순식간에, 남들이 본다면 그 자리에서 퍽 꺼지는 듯한 속도로 루카에게 접근한 나는 상당량의 마나가 감소한 것을 느꼈다.
중원의 스킬인 이형환위(以形煥位)를 시전해 절반 이상의 마나가 감소되었다.
“쳇, 루카의 등에서 뛰어내리지 말 걸 그랬군.”
나는 재빨리 루카의 등에 탑승하며 투덜거렸다.
* * *
몬스터 침공 이벤트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아직 강력한 중형 몬스터들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만(오우거 제외), 유저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신대륙에서만 존재하는 울프 라이더들의 등장과 그리폰, 히포그리프의 등장.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오우거도 숲 밖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숲에서만큼 위협적이지 않았다. 먹이사슬 최상위에 위치한 몬스터였지만, 수적으로 밀어붙이는 유저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오우거 이외에 마법에 강한 내성을 지닌 몬스터가 없었기에 얼마 없는 마법사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전쟁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마법이다.
고서클의 마법이 작렬하자 산을 이루던 몬스터들이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고, 마법사들의 버프(보조마법)에 의해 한층 더 가해진 유저들이 전장을 휩쓸고 다녔던 것이었다.
간간이 유저들 사이에 새하얀 빛줄기가 형성되었다. 레벨업을 했을 때 나타나는 그 현사이었다.
“메모라이즈, 기가 체인 라이트닝(Giga Chain Lightning)!”
체인 라이트닝의 강화판인 6클래스의 기가 체인 라이트닝이 레온의 쫙 펼친 왼손바닥에서부터 다가오는 울프 라이더 한 마리에게 쏘아졌다.
콰르르릉!
기가 체인 라이트닝은 실타래처럼 풀어져 사방의 몬스터들에게 옮겨 붙었고, 일정한 수를 옭아매자 맹렬하게 방전하기 시작했다.
파직파직.
눈부신 빛과 스파크가 터져 나왔고, 기가 체인 라이트닝에 적중한 몬스터들은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이제 낮은 클래스의 마법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겠어. 높은 클래스의 마법은 효과 하나는 좋지만 소비되는 마나량이 너무 많다는 게 단점이니까. 게다가 메모라이즈 해둔 마법은 최대 5번까지 사용가능한 것이니 모두 사용하게 되면 또다시 수인을 맺거나 주문을 외야 하는 상황이 된다.”
나직이 읊조린 레온이 공간전이를 이용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 * *
“하앗!”
퍼퍼퍽!
둔탁한 파육음과 함께 육중한 덩치의 오우거가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상처하나 입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상당히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핏발선 두 눈으로 자신에게 공격을 가한 유저를 반드시 찢어발기겠다는 듯이 노려보던 오우거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쫙 펼쳤다.
콰우우우우우!
정말 사납고 광폭한 포효였다.
오우거 한 마리의 포효 때문에 그 주번엣 치고받던 유저들과 몬스터들이 움찔할 정도였으니 숲의 제왕이라는 명칭은 괜이 붙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숲 밖. 오우거의 날렵한 몸놀림도 나무가 없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우거가 지능이 높은 몬스터였다면 빠른 몸놀림과 강력한 힘을 적절히 이용해 다수의 유저들을 사냥했을 테지만, 아쉽게도 오우거에게 그럴만한 지능이 없었다.
단순무식. 직선적으로 경훈을 덮쳐오는 오우거. 하지만 오우거의 손이 경훈의 머리통을 움켜쥐기도 전에 혁의 육중한 배틀 해머가 오우거의 안면을 강타했다.
퍼억!
크워억.
“나이스 샷!"
경훈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오른 주먹을 힘껏 뒤로 내뺐다.
“탬핑 어택(Tamping Attack), 싸이클론(Cyclone)!”
맹렬히 대기를 가르는 경훈의 주먹, 주먹을 회전시킴으로써 충격을 배 이상으로 늘리는 스킬이 오우거의 안면에 적중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뇌에 충격을 줄 수 있지만, 타격점 직전에 발경을 먹이자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경훈의 주먹에 맞은 오우거는 그대로 쓰러져 몸을 부들부들 떨다 혀를 길게 빼물고 늘어졌다.
혁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오우거를 잡았다는 성취감에 젖어들려는 찰나, 울프 라이더의 글레이브가 자신의 목을 쇄도해 오는 것을 보며 경후을 재빨리 허리를 뒤로 졎혀 피해냈다.
“하하하! 와봐라, 멍청한 오크 녀석들!”
성벽에 기댄 명석이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물론 단신(單身)으로 성벽에 붙어 거만하게 서있는 유저를 놓칠 리 없는 몬스터들이 일제히 명성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울프 라이더와 오크 나이트, 트롤과 같은 중형몬스터도 사이사이에 끼어 달려들기 시작했다.
‘좋아, 조금 더 가까이 와라!’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명석은 연신 무언가를 매만지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쯤, 명석이 로브자락에서 손을 뺐다.
명석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은 쇠구슬과도 같이 생긴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 명석이 그것을 몬스터들을 향해 힘껏 던지자 선두로 달려오던 울프 라이더에게 적중했고, 그 뒤로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콰앙!
익스플로전(Explosion)을 연상시키는 규모의 폭발.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 데미지 또한 익스플로전에 육박하는 데미지였다. 비록 몬스터들이라지만 자신들의 동료가 거대한 폭발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보자 섣불리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몬스터들이 주춤거리고 있을 때, 명석이 손뼉을 쳤다.
짜악.
손바닥 사이의 거리를 벌이자 맹렬한 방전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학이라는 과목에선 그 누구에게 지지 않을 지식을 보유한 명석은 세릴리아 월드에서 연금술사라는 직업을 택했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이와 같은 물건을 만들어냈다. 이론이 맞는다면 가상현실에서는 충분히 이런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명석이 생성해낸 전하 덩어리를 주춤거리는 오크 워리어에게 쏘아 보냈고, 전하 덩어리에 적중당한 오크 워리어의 몸에선 방전현상이 일어나 수천볼트의 전류가 오크 워리어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명석의 몸을 휘감는 새하얀 빛줄기.
“레벨업이군.”
* * *
‘괜한 짓을 했군.’
나는 잔뜩 인상을 쓰며 티아, 루카, 주변의 유저들과 함께 떼지어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나량이 적으니 경공을 사용하게 되면 쓸 수 있는 마나가 얼마 남지 않게 된다. 괜히 멋 부린답시고 썼다가 이게 뭐냐.’
이형환위를 시전했다가 마나가 절반도 남지 않았기에 이제 궁술과 정령술을 조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합을 한다 해도 내 특유의 패턴인 상대방을 몰아붙일 때 쓰는 퀵스텝과 같은 보조스킬을 쓸 마나가 남아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지금 사방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들 상대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틈을 봐서 마나 포션을 마셔야겠군.
화살을 쏘는 것을 포기한 채 퀵 스텝과 백스텝, 보우어택을 적절히 이용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있을 때, 티아가 외쳤다.
[오빠, 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림과 동시에 활을 휘둘렀다. 휘둘러진 활은 더러운 면상을 들이댄 오우거의 볼기짝을 강타했다. 일명 ‘귓방망이’를 먹인 셈이었다.
오우거가 움찔하는 사이 순간적인 틈을 놓치지 않은 나는 아이템 창에서 마나포션을 꺼낸 뒤 재빨리 아이템 창을 닫았다.
마나포션의 마개를 열어 마나포션을 모조리 목구멍에 털어 넣은 나는 대량의 마나가 회복되는 것을 느끼며 백스텝을 밟아 오우거와의 거리를 두었다. 물론 화살 하나를 뽑아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부터 ’오러 애로우‘가 뭔지 보여주마.’
나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직선적으로 달려드는 오우거를 향해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그와 동시에 화살촉에는 아름답다 못해 신비한 붉은빛을 강렬하게 발산하는 오러 애로우가 발현되었다. 레인지 마스터의 전매특허이자, 못 부술 것이 없다는 무적의 절기인 오러 애로우가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제17장 레인지 마스터, 존재를 나타내다
쐐애액.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 아니, 붉은 섬광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대기를 갈랐다. 파워 샷이 아니면 오우거의 가죽을 뚫고 화살이 밝힐 수 없다는 상식을 깨부수고 오러 애로우를 머금은 화살은 오우거의 어깨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쿼어억!
상당히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움찔하는 오우거. 그냥 두면 미친 듯이 다려들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두 개를 꺼내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그간 써오지 않았던 ‘더블 샷’을 쓰기 위해서였다.
활시위가 힘껏 당겨짐과 동시에 두 개의 화살촉은 오러 애로우를 머금었다.
“더블 샷(Double Shot)!”
쐐애애액!
나의 외침과 함께 쏘아지는 두 줄기의 붉은 섬광은 오우거의 머리와 목덜미에 틀어박혔다.
치이익.
오러에 닿은 살에서 자욱하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세포가 괴사하며 부근의 살갗이 시커멓게 죽어 들어갔다. 순식간에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던 오우거가 그 자리에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오우거를 잡다니…….’
잠시 넋을 잃고 있던 사이 무언가가 내 뒷덜미를 낚은 것이 느껴졌다. 발버둥을 치다 고래를 돌려 내 뒷덜미를 문 무언가에 시선을 던졌다.
루카였다.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몬스터들이 내게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루카가 재빨리 나를 낚아챘던 것이었다.
“고마워, 루카.”
캉캉!
알았다는 듯 짖어 보이는 루카.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루카의 등위로 훌쩍 올라탔다. 오러 애로우를 발현할 수 있게 된 이상 단 한 방으로도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 몬스터들을 경직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전과는 다른 자신감이 생겼다.
“루카, 우선 몬스터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
내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루카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고개를 돌려 티아가 있는 곳을 살폈다. 다른 정령술사 유저들과 합공해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티아.
잠시 저들에게 티아를 맡겨둔다고 생각한 나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향했다. 그리고 멀쩡해 보이는 몬스터들에게 각기 한발씩 화살을 쏘았고, 연신 포효를 지르던 몬스터들이 화살에 맞자 안 그래도 흉측한 면상이 고통을 호소하며 퍽 일그러졌다.
그렇게 몬스터가 경직하게 되면 기회를 노리던 유저들이 달려들어 몬스터들을 공격했고, 그렇게 상당수의 몬스터들이 유저들의 경험치가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유저들이 수많은 몬스터를 잡았지만, 성문에서는 끝도 없이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활공하는 그리폰에게 활을 쏘자, 그리폰은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쳐짐과 동시에 유저들의 공격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지상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 성가신 비행 몬스터들이 공중에서 견제를 해올 때의 기분… 마치 밥을 먹을 때 파리가 주변에서 귀찮게 하는 것과도 같은 기분인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눈에 보이는 가고일, 히포그리프, 그리폰들에게 활을 쏘았다.
물론 모두 맞추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이 화사에 맞아 바닥에 곤두박질 쳐지는 신세를 모면할 수 없었다.
“좋아, 이렇게 신나는 건 또 오랜만이네!”
* * *
“오!”
“저런 것이 가능하군.”
모니터를 지켜보던 운영진들이 감탄사를 내뱉기 시작했다. 아직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유저가 어른들도 해내기 어렵다는 직업인 연금술사를 하고 있다는 것과, 화학 원소기호를 꿰뚫고 있지 않으면 만들기 힘들다던 물품까지 손수 제작해 쓰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유저뿐만 아니라 현재 6클래스의 마법을 거의 통달해 7서클을 내다보고 있는 유저를 보며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천재들이 있었다니. 아마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갈 과학자들이 될 것이 분명해.”
연금술과 마법이란 학문은 일반인의 지식으론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모든 화학기호를 통달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법 같은 경우에는 과학과 수학이라는 과목을 통틀어 빠삭하게 알고 있지 않는 이상 발현을 시킬 수도 없었다. 즉, 마법수식의 계산을 통해 그 계산이 맞아떨어진다면 마법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워프와 같은 공간이동 마법은 복잡한 좌표 계산을 할 수 있어야 했고, 복잡한 마법진 또한 따로 외워 그릴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손도 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에 감탄을 하는 것도 잠시, 운영진들은 다시 한 번 놀라 수밖에 없었다. 예상을 깨고 궁수 유저 하나가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 못지않게 많은 유저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한 유저.
“저, 저런 유저도 있었나?”
한 직원의 말에 옆에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직원이 소리쳤다.
“멍청하긴.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를 모른단 말이야? 첫 번째 제자 로빈훗에 이어 레인지 마스터가 된 유저인데, 자네가 관리하는 생활직 스킬 중 여섯 가지를 석 달 만에 마스터한 장본인이지.”
“여섯 가지 스킬을 서, 석 달 만에…….”
직원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다른 운영진이 말했다.
“이번에는 조선 스킬까지 마스터했다던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것도 한 달 조금 넘겨서요.”
“세상에… 괴물이 따로 없구먼.”
‘흐음. 생각보다 이벤트가 빨리 진행되고 있군.’
뒤에서 직원들의 대화를 들으며 모니터를 주시하던 김 팀장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여러분, 지금부터 조금 더 위협적인 몬스터들을 대거 투입시키도록.”
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니터에 모여 있던 직원들과 운영진들이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가 분주하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 * *
‘후, 오러 애로우도 은근히 마나를 많이 잡아먹는군! 뭐, 정령술을 조합할 때도 이 정도의 마나를 소비하게 되니까.’
침공해오던 몬스터들이 대거 수가 줄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침공해오는 몬스터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몬스터들을 섬멸시키는 것이 성공하는 듯 보였다.
유저들은 그야말로 탈진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병장기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펴졌고, 그대로 풀썩 주저앉은 유저들이 아이템 창에서 포션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벌써 끝난 건가? 우선 티아에게 가보자, 루카!”
고개를 갸우뚱하며 루카에게 말을 건네자 루카는 즉시 티아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융합을 해제한 티아의 얼굴엔 상당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루카의 등에서 뛰어내려 티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괜찮아, 티아?”
“응. 조금 힘들다.”
마나포션 한 모금을 들이킨 티아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초토화가 된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숨을 헐떡이는 유저들과 서서히 회복을 하고 있는 유저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벤트를 시작할 때와는 달리 상당수의 유저들이 게임아웃 되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몬스터들이 침공해오지 않았고 유저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운영자 추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 후, 몬스터들이 2차 침공을 할 것입니다. 약간의 휴식시간을 드릴 테니, 부상을 입으신 유저들은 서둘러 치유하시기 바랍니다. 2차 침공을 하게 될 때는 전보다 강력한 몬스터들이 대거 침입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운영자의 음성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거의 반 폐허가 되어버린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 유저만 공격하는 멍청한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지능적으로 건물들만 파괴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건 그렇고, 강찬이 녀석들은 잘 버티고 있으려나… 설마 게임아웃 되지는 않았겠지?’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등을 꽉 움켜쥐었다. 친구들을 걱정하는 사이 어디선가 미세하게 들려오는 포효가 내 귀에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회복을 끝마친 유저들은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몬스터들이 침공하기만을 기다렸다. 물론 레벨업을 통해 입었던 상처가 말끔히 사라지는 유저도 적잖게 많았다.
나도 막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려는 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거대한 포효가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의 동쪽 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많이 들어왔던 포효. 오우거의 것으로 간주되는 포효였다. 성벽을 부수고 들어오는 오우거는 기존의 오우거와는 달리 더욱 더 육중한 덩치와 큰 신장을 가지고 있었다.
대충 눈으로 보아도 족히 6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오우거가 아가리를 쫙 벌린 채 포효를 내지르고 있던 것이었다.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고 적들의 기세를 제압하기 위해 포효를 내지른 오우거 로드의 뒤로 머리가 둘이 달린 트윈헤드 오우거가 하나 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보통 오우거에 머리하나가 더 달린 외형을 하고 있는 오우거가 무리지어 부서진 성문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우거 로드로군요. 모든 오우거들을 통솔하는 우두머리.”
언제 왔는지 거대한 오우거를 가리키며 레온이 말했다.
오우거 로드라…….
그냥 척 보아도 다른 오우거와는 달랐다.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기세. 하지만 유저들은 오우거 로드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함성을 질러댔다.
“며칠마다 한 번씩 뜬다는 보기 드문 보스급 몬스터인데, 이렇게 보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군요.”
레온이 미간을 찌푸린 채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마법내성이 강한 오우거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은 높은 클래스의 강력한 마법밖에 없었다. 뭐 활에 대한 내성이 강한 몬스터에게 파워 샷을 먹여 충격을 주는 것과도 같은 이치겠지.
오우거 로드가 지면을 박차고 유저들에게 몸을 날리자 그 뒤로 트윈헤드 오우거와 다른 오우거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오우거뿐만 아니라, 하늘에선 난생 처음 보는 와이번이 활공을 하고 있었다. 오우거 로드의 주먹질 한 방에 다수의 유저들이 저만치 훨훨 날아갔다.
방어력이 높은 유저라면 치명상을 입고 살아났겠지만, 방어력이 약한 유저들은 그대로 게임아웃 되거나 데들리 상태가 되어 의식을 잃게 되었다. 그 뒤로 달려드는 트윈헤드 오우거도 무시할 수 없었다.
“레드, 비켜서세요.”
캐스팅을 끝마쳤는지 레온이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곁에 있는 티아, 루카와 함께 레온의 뒤로 급히 물러났고 우리가 비켜서자 레온이 소리쳤다.
“익스플로전(Explosion)”
또다시 발현된 공포의 마법. 폭발점을 중심으로 반경 50미터 안에 있는 목표물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공포의 마법이 발현되었다.
퍼엉!
뜨거운 열기와 함께 눈부신 섬광이 솟아올랐고, 익스플로전에 적중한 트윈헤드 오우거들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폭발 중심부에 있던 녀석들은 아무리 강한 마법 내성을 지녔다고 해도 갈기갈기 찢어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녀석들은 팔다리 하나가 날아가는 것으로 끝이 났다.
오우거 로드는 이미 익스플로전이 발동되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육중한 거구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이내 지면에 착지했고,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푹푹 패여 들어갔다. 오우거 로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새하얀 돌바닥들이 오우거 로드의 발을 중심으로 선명한 선을 그리며 조금씩 갈라졌다.
핏발이 선 두 눈동자를 굴리며 마법사로 간주되는 유저를 찾는 오우거 로드의 뒤로 보통 오우거와 함께 트롤들이 무리지어 밀려들어왔고, 유저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종횡무진 자신들의 병장기를 휘둘렀다.
끼아아악!
“으아악!”
한 마리 와이번이 유저 하나를 낚아챘고 유저는 비명과 함께 하늘 높이 사라졌다. 동시에 이젠 안 나올 줄 알았던 가고일과 그리폰, 히포그리프가 하늘을 가득 메우다시피 들어와 분탕질을 치기 시작했고, 지능적으로 관청을 향해 날아드는 녀석도 몇 있었다.
다른 궁수 유저들이 쏘아 보낸 화살이 허공을 빽빽이 메우며 날아가 관청을 향하는 비행 몬스터에게 모조리 박혔고, 화살비에 맞은 비행 몬스터들은 이내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후,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우선 저 오우거 로드부터 어떻게 해야겠어. 우두머리가 쓰러지면 사기가 꺾이기 마련이니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물론 혼자 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런 강력한 보스급 몬스터에게 혼자 덤볐다간 레벨업은커녕 오히려 내가 사냥될 가능성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었다.
레인지 마스터가 되었다고 무턱대고 달려드는 것은 옳지 않은 판단임을 확인하고 나는 오우거 로드에게 달려드는 기사 유저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우선 오우거 로드가 얼마나 강한지 확인해볼 겸 기사 유저들이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태평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애꿎은 루카만이 나를 보호하려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견제하고 있었다.
‘조금 미안하군.’
나는 꺼내는 화살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 * *
오우거 로드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는 유저들의 말에 헤르만은 고개를 돌려 유저들이 손가락질 하는 곳에 시선을 던졌다.
“저 녀석을 잡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오우거 로드를 노려보던 헤르만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트롤에게 검을 휘둘렀고, 트롤의 몸뚱이는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소드 마스터인 헤르만이게 트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오우거도 우습게 불 판에 트롤이 적수가 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덤벼드는 녀석들 외에 다른 녀석들은 무시하고 먼저 오우거 로드에게 접근하자!”
헤르만이 소리쳤다.
“헤르만, 진짜로 오우거 로드를 잡을 셈이야?!”
“당연하지.”
헤르만의 친구로 보이는 풀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무장한 기사 유저가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검에 짙은 오러가 맺혀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최상급 소드 엑스퍼트는 돼보였다.
그의 뒤로도 그와 비슷한 레벨을 가진 유저들이 대여섯 있었는데, 이들 모두 풀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무장한 기사 유저였다.
“그런데 어떻게 저곳까지 가겠다는 거야? 이 멍청한 자식아.”
“생각 좀 하고 살아. 도착한다 해도 오우거 로드의 뒤로 나타나는 몬스터들이 오우거 로드를 보호하려 들겠지. 안 그래?”
친구들의 말에 헤르만은 눈썹도 까딱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달려드는 것들은 그냥 모조리 베러버리면 되잖아. 곧 있으면 소드 마스터가 될 녀석들이 겁은 많아가지고.”
헤르만이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물론 자신의 친구들을 비웃는 것이 아니었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자신이 오우거 로드에게 달려들면 하던 일을 뿌리치고 도와줄 녀석들이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충만히 맺힌 검을 늘어뜨린 채 오우거 로드를 향해 내달렸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는 헤르만에게 아무런 걸림돌조차 되지 못했다.
오러 블레이드가 서린 검을 휘두르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고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는 몬스터들이었기에 헤르만은 생각보다 쉽게 오우거 로드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슈가각!
헤르만은 자신의 검에 상반신과 하반신이 두 동강 난 트롤에게서 시선을 뗀 뒤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과연 친구들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베어내며 자신을 뒤쫒고 있었다.
친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우거 로드의 앞에 서게 된 헤르만이 보기 드문 커다란 흰 늑대에게 호위를 받으며 태평하게 주변을 구경하는 궁수 유저에게 시선을 던졌다.
‘궁수? 거 활 참 무식하게 크군. 저런 것을 들고 제대로 쏠 나 있을까? 겉멋만 잔뜩 들었군. 쯔쯧. 오우거 로드를 탐내고 있나본데, 너희 궁수들은 죽어도 오우거 로드를 잡지 못한다. 흐흐.’
투구의 안면보호대가 닫혀있어 헤르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웃음어린 시선이 역력했다. 수많은 궁수 유저들과 대련을 해오며 지금껏 패배를 한 적이 없는 그가 궁수 유저를 좋게 볼 리 만무했다.
물론 그는 모르고 있었다. 레인지 마스터의 존재를…….
주변에서 달려드는 트윈헤드 오우거와 보통 오우거. 트롤들을 해치우며 헤르만에게 모여든 대여섯 명의 기사 유저가 일제히 고개를 들어 우거 로드를 쏘아보았다.
콰우우우!
오우거 로드가 포효를 내질렀지만 그들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앗!”
헤르만이 몸을 날리자 대여섯 명의 기사 유저들이 일제히 헤르만을 중심으로 오우거 로드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서걱.
헤르만의 검이 오우거 로드의 어깨를 내리그었다. 보통 오우거였다면 그대로 팔이 잘려나갔을 테지만, 오우거 로드의 팔은 온전히 어깨에 붙어 있었다. 과연 오우거 로드다웠다.
오우거 로드는 자신의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흉성을 터뜨렸다.
흉성이 폭발한 오우거 로드가 헤르만을 낚아채기 위해 재빨리 팔을 휘둘렀지만 자신을 쇄도해 오는 솥뚜껑만 한 손을 검을 쳐낸 헤르만은 안전하게 지면에 착지했다.
오우거 로드를 둘러싼 대여섯 명의 기사 유저들이 종횡무진 검을 휘둘렀으나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드 마스터 유저의 오러 블레이드도 통하지 않을 판에 소드 엑스퍼트 유저들의 오러가 심한 상처를 남길 수 있을 확률은 전무했다.
퍼엉!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수없이 많은 몬스터들이 폭발로 인해 공중으로 치솟았다. 이내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퍼억.
“우엑.”
오우거 로드의 주먹이 기사 유저의 복부에 적중했고, 기괴하게 함몰된 갑주 사이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모두들, 비켜서!”
헤르만이 소리치자 그의 친구들이 재빨리 몸을 뺐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기사 유저만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캬오오오!
오우거 로드의 거대한 발이 내동댕이쳐진 기사 유저를 짓밟았다. 그에 헤르만과 그의 친구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이 녀석을 반드시 갈아 마셔주겠다!”
헤르만이 오우거 로드의 복부에 검을 찔러 넣으며 소리쳤다.
* * *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활시위를 벗어난 붉은 섬광이 루카의 뒤를 노리는 트윈헤드 오우거의 머리통 하나에 틀어박힌 채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렸다.
오러 애로우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듯 머리 하나를 잃은 트윈헤드 오우거가 발버둥 치며 한쪽 머리에 꽂힌 화살을 움켜쥐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더 꺼내 트윈헤드 오우거의 남은 한쪽 머리에 쏘아 보냈다. 오러 애로우를 머금은 화살이 남은 한쪽 머리에 틀어박히자 트윈헤드 오우거의 육중한 몸이 비틀거리더니 이내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걸고 루카에게 몸을 날린 뒤 루카의 등에 탑승했다. 엔다이론과 융합한 티아는 그야말로 신이 나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레벨 업! 스탯 포인트를 분해해주세요!]
[정령 백호(바람)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주작(불)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익숙한 메시지 창이 떴고 재빨리 메시지 창을 닫은 나는 오우거 로드를 힘겹게 상대하는 유저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기사 유저 하나가 오우거 로드에게 짓밟히고 나머지 유저들은 오우거 로드의 주먹을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심한 타격을 입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유저들이 그랬듯이 기사 유저들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 몬스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내동댕이쳐진 유저를 둘러싸고 마구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길, 저 성가신 녀석들까지 합세하니 죽을 맛이잖아!’
헤르만이 신경질적으로 오우거 로드를 호위하는 몬스터들을 베어냈다.
방금 전의 일격으로 친구 네 명이 게임아웃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자신과 두 친구뿐이었다. 그러나 두 친구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오우거 로드의 발길질에 채여 훨훨 날아가는 신세가 되었고, 공중에 배회하던 비행 몬스터에게 낚이거나 바닥에 곤두박질쳐져 몬스터들에게 공격당해 게임아웃 되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장시간 동안 끌어올리고 있던 탓에 마나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제길, 저 찌꺼기 같은 녀석들만 아니었어도 충분히 오우거 로드를 처리할 수 있었는데!’
흉성이 폭발한 오우거 로드의 공격을 힘겹게 피해내는 헤르만은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거의 바닥이 드러나는 스태미나 때문인지 숨이 턱까지 올라 찼고, 마나 또한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포션을 마실 시간이 주어진다면 또 몰라도 사방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들과 자신에게 파상적인 공격을 가하는 오우거 로드 때문에 포션을 마실 틈도 없었다.
자신을 쇄도해오는 오우거 로드의 주먹을 회피하려고 지면을 박차는 순간, 바닥난 스태미나로 인해 다리가 풀린 헤르만은 오우거 로드의 주먹이 자신의 지척에 도달한 것을 보곤 모든걸 채념했다.
그렇게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 자신을 쇄도해오던 거대한 주먹이 우뚝 멈춰 섰고, 오우거 로드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도대체 놈이 갑자기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조금 전에 가했던 공격의 통증이 이제야 나타나는 걸까?
의문은 이어진 오우거 로드의 행동에서 서서히 베일을 벗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두 눈은 핏발이 잔뜩 섰고 콧김을 연신 내뿜던 오우거 로드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다름이 아니라 오우거 로드의 등판엔 스몰 스피어로 간주되는 두 개의 창이 박혀있었다. 헌데 언뜻 보면 스몰 스피어와도 같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스몰 스피어와는 조금 달랐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면 결코 오우거 로드의 가죽을 파고들 순 없었다.
그렇담 방금 전에 저 창을 투척한 것이 소드 마스터인 것일까? 헤르만은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오우거 로드의 시선이 향한 곳에 시선을 던졌다.
‘무, 무슨 이런 황당한 일이?’
기이한 광경을 본 헤르만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우거 로드에게 접근하며 무시하고 지나쳤던 궁수 유저가 거대한 활을 한 손으로 쥐고 오우거 로드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화살촉에는 오러로 간주되는 붉은빛이 강렬하게 발산되고 있었다.
‘구, 궁수가 오러를 발현시키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쿠와악!
또다시 흉성이 폭발한 오우거 로드가 지면을 박차고 궁수 유저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궁수 유저가 당겼던 활시위를 슬쩍 놓자 맹렬한 파공성과 함께 붉은 섬광이 대기를 갈랐다.
쐐애액.
헤르만으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도와주는 건데 별다른 소리는 하지 않겠지?’
화살이 오우거 로드의 가슴팍에 박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퀵스텝을 걸고 지면을 힘껏 박찼다. 물론 잠시 움찔한 오우거 로드를 향해 몸을 날린 것이었다.
두 손으로 활을 움켜쥔 나는 활을 휭으로 휘둘러 오우거 로드의 안면에 메다꽂았다.
“보우어택!”
퍼억!
둔탁한 파육음과 함께 오우거 로드의 누런 옥수수이가 우수수 빠져나갔고, 오우거 로드의 어깨에 발을 슬쩍 디딘 나는 재빨리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타탁.
“백스텝!”
그리곤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난 뒤 궁지에 몰려있던 기사 유저에게 다갔다. 아무리 궁지에 몰려있었다지만 이렇게 된다면 스틸(Still:다른 유저들의 사냥감을 훔쳐 사냥을 하는 행위)이 되기 때문에 양해(?)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유저는 재빨리 나와 거리를 두었다. 잔뜩 화가 난 오우거의 발이 쇄도해왔기 때문이었다.
‘말할 틈도 주지 않는군. 저 고릴라 같은 녀석.’
“백스텝!”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선 나는 피식 웃으며 오우거 로드를 올려다보았다.
“현무, 그리스(Grease)!”
일시적으로 바닥의 마찰계수를 0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이 오우거 로드가 굳건히 서있는 대지에 작렬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하급 정령인 현무가 바닥의 마찰계수를 0으로 만들 수 있는 범위가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에 오우거 로드를 넘어뜨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휘청하는 정도로 그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노린 것도 그것이다. 잠시라도 휘청하는 동안 틈이 생긴다. 그 틈을 노려 공격하면 되는 것이다.
백호의 윈드 애로우와 현무의 그리스를 조합한다면 충분히 오우거 로드의 진을 빼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휘청거리는 오우거 로드에게 근처의 유저들이 달려든다면 못 잡을 것도 없으니 말이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오우거 로드의 주먹이 나에게 쇄도해오기 시작했다.
“으악!”
눈을 질근 감은 사이 무언가에 또다시 낚여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을 느낀 나는 조심스레 눈을 뜨며 말했다.
“고마워 루… 응?”
이번에도 루카인 줄 알았지만 나를 낚아챈 것은 조금 전까지 오우거 로드와 힘겹게 싸우던 유저였다.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포션을 이용해 회복을 했는지 유저의 상태는 정상으로 보였다.
늘어뜨린 검에는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짙게 서려 있었다.
“오러를 발현시키다니. 참 특이한 케이스의 궁수로군. 히든 클래스의 직업이라도 얻은 건가?”
그렇게 말한 기사 유저가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오우거 로드에게 몸을 날렸다. 몸이 완벽하게 회복된 이상 아무런 문제없이 본래 실력을 발휘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뒤에서 서포트 해줘야겠군.’
“현무, 그리스!”
현무의 그리스가 오우거 로드의 한쪽 발아래 작렬하자, 오우거 로드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기사 유저의 검이 오우거 로드의 눈알을 파고들었다.
푸학!
공격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세로로 긋는 공격에 가슴팍이 길게 갈라져 피가 배어나오는 상처를 남긴 기사 유저가 재빨리 오우거 로드와 거리를 두었다.
콰우우우우!
눈 하나를 잃은 오우거 로드가 발버둥치지 시작했다.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든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두터운 가죽이 길게 갈라진 가슴팍을 겨냥했다.
두터운 가죽이 갈라졌으니 화살이 보드라운 속살을 파고들게 된다면 엄청난 데미지와 함께 적지 않은 생명력을 깎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오러 애로우가 한껏 응축된 화살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상당량의 스태미나와 마나가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백호의 윈드 애로우가 가미된 파워 샷이 발동하려는 순간이었다.
“파워 샷(Power Shot)!”
푸슝!
쐐애액.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핏빛의 붉은 섬광이 순식간에 오우거 로드의 가슴팍에 적중해 깊게 틀어박혔다.
쿠와아악!
눈가에 가있던 오우거 로드의 두 손이 이내 가슴팍으로 향했다. 사지를 부르르 떨며 발버둥치는 것을 보니 상당한 충격을 먹인 것 같았다.
“꽤 실력은 있지만 아직 물러 터졌군.”
발버둥치는 오우거 로드를 멍하니 지켜보는 나에게 기사 유저가 그렇게 말을 내뱉더니 오우거 로드를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상처가 아물기 전에 연속적인 공격을 먹이기 위함이겠지?
오우거 로드를 향해 달려가는 유저를 지켜보는 사이 내 눈앞으로 소용돌이치는 시퍼런 구체가 쏜살같이 지나간 것을 느낀 나는 구체가 날아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던 트롤 한 마리가 배를 움켜쥐고 털썩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바보야! 그 커다란 오우거에만 신경 쓰지 말고 다른 몬스터들도 주의 깊게 살펴봐!]
이어진 것은 티아의 지적이었다. 지금껏 오우거 로드를 상대하는 동안 내게 달려드는 트윈헤드 오우거와 오우거, 트롤을 견제하며 막아준 것 같았다.
그러면서 아닌 척 또다시 다른 몬스터들을 막아내기 시작하는 티아. 티를 내지 않고 뒤에서 챙겨주는 티아를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쿠어억.
육중한 오우거 로드의 몸이 휘청거리는가싶더니 이내 바닥에 대(大)자로 뻗어 곤두박질쳐졌다.
번쩍!
[레벨 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 업! 스텟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백호(바람)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레벨업을 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새하얀 빛이 나와 기사 유저의 몸을 휘감더니 이내 공중으로 치솟았다.
벌써 3레벨업이군. 그런데 루카도 많은 몬스터를 잡았는데 이제야 레벨업을 하는 이유는 뭘까?
의문(?)이 이어졌지만, 깊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얼른 고개를 저은 뒤 기사 유저에게 시선을 던졌다.
“궁수에 대한 나의 생각도 조금은 나아지겠군. 고맙다.”
등을 돌린 유저는 관청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아앗! 소드 마스터와 레인지 마스터 단 둘이서 오우거 로드를 사냥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모니터를 주시하던 직원이 소리치자 개발팀실에 있던 직원들과 운영진, 팀장의 시선이 모니터로 일제히 던져졌다.
“이거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는군. 오우거 로드까지 사냥당할 줄이야. 와이번은 어떻게 됐나?”
“지금 6클래스 엑스퍼트 마법사 유저에게 가로막혀 관청에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와이번 한 마리로는 안 되겠네요.”
팀장의 말에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던 직원이 대답했다. 팀장의 예상대로 마스터급 기사들과 고클래스의 마법사의 활약이 상당히 눈에 띄는 상황이었다. 그중 반전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 반전의 주역은 바로 ‘레인지 마스터’라는 존재였다.
현재 세릴리아 월드에서 NPC로시토를 제외한다면 현존하는 레인지 마스터는 총2명. 상위 랭커를 달리고 있는 궁탑의 첫 번째 제자 로빈훗과 레인지 마스터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레드 파운이었다.
레인지 마스터란 존재가 둘 밖에 없어 큰 지장은 없었지만 화살이란 것에 오러를 개입하자 운영진이 생각지도 못한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이었다.
몬스터들에게 각각 내성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물리적 데미지가 통하지 않는 몬스터가 있고 활이 통하지 않는 몬스터, 마법이 통하지 않는 몬스터가 있다.
물론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데미지를 입힐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데미지를 월등히 적게 받는다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그것을 무시한 존재들이 있었으니 바로 레인지 마스터들이라는 것이다. 본래 활 내성이 강한 몬스터들에게도 ‘오러’가 응축된 화살만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도 푹푹 박혀 엄청난 데미지를 입히니까.
그렇다고 레인지 마스터란 것을 없앨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궁탑의 제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였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레인지 마스터’라는 직업도 히든클래스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음.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일어났군. 유저들의 상당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까진 많다.’
곰곰이 생각하던 김 팀장이 소리쳤다.
“와이번을 두 마리 정도 더 침공시키고 오우거와 트롤은 이제 침공을 중지시키도록.”
“예!”
직원들과 운영진들의 힘찬 대답이 작업실을 가득 메웠다.
* * *
“저게 바로 말로만 듣던 와이번인가? 홈페이지에서 본 드래곤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거대한 배틀 해머를 어깨에 들쳐 멘 혁이 레온에 의해 가로막힌 와이번을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침공하는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레벨이 100에 도달한 혁.
2차 전직을 하지 않았으므로 레벨은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까지 오우거를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달려드는 트윈헤드 오우거나 오우거를 최대한 피하며 트롤만 잡아왔다.
물론 혁은 상당히 불만이 많았다.
‘제길. 2차 전직만 한다면 나도 저렇게 신나게 몬스터를 잡을 텐데.’
배틀 해머만 강하게 움켜쥐며 몬스터를 노려보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혁의 눈에는 아쉬움이 많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청을 향해 일제히 몸을 날리는 트윈헤드 오우거와 오우거를 열심히 막아내는 강찬과 경훈, 명석.
그들은 생각 외로 쉽게 막아내고 있었다.
캬아악!
와이번이 브레스(Breath)를 내뿜으며 독(毒)기가 잔뜩 흘러나오는 꼬리로 레온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맹독이 함유된 독 브레스가 방사되자 유저들은 혼비백산해 그 자리엣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레온만이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내고 있었다.
“실드(Shield)!”
급히 실드를 펼쳐 와이번의 브레스를 막아낸 레온이 실드를 해제하고 간단한 수인과 함께 시동어를 외쳤다.
“인페르노(Inferno).”
왼손을 뻗어 손바닥을 편 상태에서 주문영창이 이어지자 이내 레온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화염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화염방사기를 연상시키는 화염이 와이번에게 쏘아지자 와이번은 재빨리 화염을 피해냄과 동시에 레온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와이번의 발이 레온을 움켜쥐려는 순간이었다.
“블링그(Blink).”
순간 레온의 몸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졌다. 공간전이를 이용해 순식간에 와이번의 등에 올라탄 레온이 피식 웃었다. 메모라이즈 해 두었던 6클래스의 마법을 쓸 작정이었다.
“메로라이징 윈드 프레스(Wind Fress).”
상대를 여러 방향에서 강력한 힘으로 압착시키는 마법이 작렬했다. 강한 공기의 압력이 몸에 가해오자, 와이번은 더 이상 날갯짓을 하지 못하고 바닥에 곤두박질쳐지는 신세가 되었다.
우드득.
까아아아!
뼈가 뒤틀리는 기이한 소리와 함께 와이번이 기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물론 레온은 윈드 프레스를 시전하고 블링크를 이용해 자리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이때다!”
와이번이 거의 다 죽어가고 있자 와이번에게 농락(?) 당하던 유저들이 일제히 와이번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어진 것은 각종 병장기에 의해 들려오는 섬뜩한 파육음이었다.
와이번 한 마리를 처리한 레온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상당히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상당수의 유저가 게임아웃 된 상태였다.
어찌된 일인지 성문에서 쏟아져 나오던 오우거와 트롤들의 수가 서서히 줄기 시작하더니 이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2차 침공이 끝난 것일까?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몬스터의 포효가 티르 네티아 전역을 가득 메웠다.
끼아아악!
비행 몬스터 중 먹이사슬 상위에 위치한 고레벨의 몬스터인 와이번 두 마리가 포효를 내지르며 활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루카의 등에 올라탔고, 마지막 한 마리 오우거를 처리한 티아에게 다각 내 뒤에 티아를 앉혔다.
“꽉 잡아, 티아. 루카, 관청으로 가자.”
캉캉!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카의 다리가 맹렬히 지면을 두드렸다.
순식간에 관청에 다다르게 된 나는 익숙한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강찬과 혁, 그리고 경훈과 레온이었다. 눈엣가시인 로이체 녀석도 아직 살아 있었고 왠지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앗? 저거 현성이 아니냐?”
시커먼 망토로 몸을 두르고 있는 왠지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저가 소리치자 강찬과 경훈, 혁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레드!”
“살아있었네. 그런데 뒤에… 응? 티아 씨? 모습이 왜 저렇게 변했지?”
나는 급히 루카의 등에서 뛰어내리며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지금 티아의 외형이 변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 녀석들아!
드넓은 창공을 가로지르며 와이번들이 활공했다. 활공하던 두 마리 와이번이 일제히 유저들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슬로우(Slow).”
레온의 주문영창이 이어졌지만, 와이번에게도 어느 정도 마법에 대한 내성이 있었기 때문에 1서클의 슬로우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꺼내든 화살을 재빨리 활시위에 먹인 뒤,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화살촉에 맺힌 오러 애로우가 새빨갛게 피어올랐고,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붉은 섬광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대기를 갈랐다.
쐐애액.
와이번의 피막형 날개를 뚫고 날아간 화살. 날개가 뚫리자 와이번이 휘청하며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일반적인 화살이었다면 구멍이 난 날개가 금세 회복되어 자유롭게 활공할 수 있었지만, 지금 공격을 가한 화살은 오러 애로우가 맺혀 있었고, 화살의 굵기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큰 충격을 줄 수 있었다.
쿵.
바닥에 곤두박질쳐진 와이번에게 유저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병장기를 휘둘렀다.
“꺄악!”
한 여성 유저를 낚아챈 와이번이 공중으로 치솟으려는 찰나, 시뻘건 검광이 번쩍임과 동시에 와이번의 한쪽 날개가 처참히 찢겨져 나갔다. 날개 하나를 잃은 와이번이 낚아챘던 유저를 휙 던져두고 두 다리로 지면에 착지해 자신의 날개를 잘라낸 유저에게 시선을 던졌다.
나는 화살을 꺼내며 와이번의 날개를 잘라낸 유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없는 일정한 형태를 갖춘 채 타오르는 화염을 머금은 검을 사용하는 유저. 화염의 대마검사 강찬이었다.
끼아악!
와이번이 브레스를 뿜어냈지만 강찬이 펼친 파이어 실드에 의해 가로막혔고, 와이번 하나를 처리한 유저들이 일제히 강찬의 앞에 선 와이번에게 달려들어 종횡무진 무기를 휘둘러댔다.
제아무리 고레벨의 흉악한 몬스터라지만 수로 밀어붙이는 유저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는지, 유저들의 무기에 난자당한 와이번은 유저들의 경험치가 되어 사라졌다.
제18장 새로운 비기, 싸이클론 애로우
몬스터 침공 이벤트의 열기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참가한 유저들의 수가 상당히 줄긴 했지만, 그들의 사기는 식을 줄 몰랐다.
게다가 남은 유저들은 대부분 소드 엑스퍼트 최상급 이상의 기사 유저들과 4클래스 엑스퍼트 이상의 마법사 몇 명. 고레벨의 궁수 유저나 정령술사 유저, 극소수의 히든 클래스의 직업을 가진 유저들이었다.
“엄청나군.”
모니터를 통해 반 폐허가 된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를 바라보며 김 팀장이 말했다.
오우거 로드와 그 휘하의 오우거 군단. 그리고 와이번까지 투여했지만, 유저들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특히 유저 단 둘이서 오우거 로드를 사냥한 것은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골렘 군단과 리치 군단을 대거 투입시킬까요?”
한 직원의 말에 묵묵히 모니터를 응시하던 김 팀장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던 김 팀장이 말했다.
“우선 골렘 군단부터 대거 투입시키도록.”
“네.”
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직원이 자리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무언가 말을 했고, 동료들은 또다시 분주하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마법 내성과 극에 달하는 활 내성을 지닌 스톤 골렘 군단부터 투입시키도록. 그 뒤로 활, 마법, 타격에 내서을 지닌 아이언 골렘을 투입시켜야 한다.”
“예!”
“그리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골렘 군단이 전명하게 된다면 마스터 급의 데스 나이트 군단과 7클래스 마스터의 리치 군단을 대거 투입시키도록.”
* * *
‘이런… 포션도 얼마 남지 않았군. 아직 몬스터 침공이 끝나지 않았으니 자연적으로 회복해야겠군.’
나는 반 폐허가 된 티르 네티아를 빙 둘러 보았다. 이제 유저의 수는 전에 비해 훨씬 줄어 있었고,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정령과 융합을 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티아의 안색도 그리 좋은 건 아니었다. 융합 상태를 유지하는 데도 소량이지만, 마나가 감소되기 때문에 미약하게나마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번엔 과연 어떤 몬스터가 나올까?’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직 운영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충분한 휴식 시간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친구들이 있는 곳에 시선을 던졌다.
부서진 건물의 파편 위에 털썩 주저앉은 레온과 바닥에 드러누운 경훈, 그리고 책상다리를 한 채 앉아있는 강찬과 평소와는 달리 말없이 가만히 서있는 혁.
혁의 눈엔 무언가 아쉬운 감이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혁이 활약하는 걸 보지 못했군. 혁의 옆엔 롱 보우를 장비하는 로이체도 있었다. 저 녀석도 꽤 오래 버티는군.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달리 모두들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다. 나는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 티아에게 천천히 다가가 물었다.
“괜찮겠어?”
[응. 괜찮아.]
괜찮다고 대답을 하긴 했지만, 티아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나는 아이템 창에서 마나포션을 꺼내 티아에게 건넸다.
“자, 이걸로 마나 좀 회복 시켜.”
[고마워.]
생긋 웃으며 마나포션을 받아드는 티아.
이 때였다. 순간 허공이 번쩍임과 동시에 운영자 추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 몬스터들이 3차 침공을 할 것입니다. 약간의 휴식 시간을 드릴 테니, 부상을 입으신 유저들은 서둘러 치유하시기 바랍니다. 3차 침공을 하게 될 때는 전보다 강력한 몬스터들이 대거 침공하게 될 것입니다. 궁수 유저들과 낮은 클래스의 마법사 유저들은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운영자 추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퍽 꺼졌고, 지면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낌새를 차린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든 뒤 성문을 응시했다.
콰앙! 와르르.
쿠오오오오오!
성벽을 부수며 들어오는 다수의 살아 움직이는 돌덩어리들. 저게 말로만 듣던 골렘이란 녀석들인가?
어디로 소리를 내는지 모르겠지만, 골렘들이 기성을 내지르며 관청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리 빠른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신장을 가진 골렘들이었기에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골렘이다! 궁수 유저들을 보호하라!”
“궁수 유저는 즉시 관청의 벽면으로 대피하세요! 골렘들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활에 대한 내성이 강합니다!”
여기저기서 궁수 유저들을 보호하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 이곳으로 다가오는 골렘들을 바라보던 티아의 걱정어린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오빠, 궁수 유저는 관청 쪽으로…….]
“괜찮아. 내가 보통 궁수들과는 다르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런 티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빙긋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티아가 소리쳤다.
[다, 당연하지!]
“그럼 이쯤에서 흩어지자.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재빨리 지면을 박찼다. 그런 내 뒤로 그림자처럼 루카가 따라붙었다. 뒤이어 선두로 달려오던 골렘의 오른팔에 위치한 돌덩이가 내 쪽을 향해 빠르게 쇄도해오기 시작했다.
‘공격 속도는 형편없군.’
가볍게 골렘의 공격을 흘려보낸 나는 꺼내 두었던 화살을 재빨리 활시위에 메긴 뒤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오러 애로우를 머금은 화살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대기를 갈랐다.
골렘이 아무리 무시무시한 활 내성을 지녔다고는 하나, 오러에 대한 내성을 지닐 수 없었기에 오러 애로우를 한껏 머금은 화살을 퉁겨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푸욱.
화살이 다리에 저궁하자, 거대한 골렘의 동체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그저 돌덩이들의 집합체일 뿐이었기에 어디가 머리고 어디가 다리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공격을 하면서 수시로 위치를 바꿨기 때문에 더더욱 헷갈렸다. 하지만 위치가 바꾸지 않는 부위가 한 군데 있었다. 바로 가슴팍.
‘저곳에 약점이라도 있는 것일까?’
혹시나 하는 맘에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든 나는 쇄도해오는 골렘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내며 골렘에게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뒤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활을 쏘았고, 활시위를 벗어난 붉은 섬광이 대기를 가르며 골렘의 가슴팍으로 쏘아졌다.
쐐애액!
푸악.
가슴팍의 정중앙에 화살이 적중하자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골렘의 동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저 큼지막한 바윗덩어리가 된 채 어지럽게 떨어져 내리는 골렘.
멍하니 무너져 내린 골렘을 바라보던 나는 잇따라 끝없이 밀려들어오는 골렘들을 바라보며 화살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밀려들어오는 골렘들을 보며 혁은 더욱 착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아무리 강한 공격을 가진 배틀 해머를 사용한다지만 공격속도가 현저히 느리다는 단점이 있었다. 언제 반격을 당할지 몰랐기에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2차 전직만 한다면, 현성이 녀석처럼 선두로 달려가 맘껏 병자기를 휘두를 텐데…….’
조금 전 선두로 달려 나간 현성과 개미 떼처럼 그 뒤로 우르르 몰려드는 유저들을 보며 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루샤크… 맞죠?”
귓전을 파고드는 왠지 모를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린 혁의 망막에 빙긋 웃으며 서 있는 한 유저가 비춰졌다.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려진 마법사 모자와 로브를 걸친 레온이었다. 기다란 스태프로 땅을 짚고 서있던 레온이 혁에게 느릿하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촹, 촤촹!
그 와중에도 멀리서 들려오는 각종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펴졌다. 혁에게 다가간 레온이 말했다.
“루샤크 군은 안 가시나요?”
레온의 물음에 말없이 물끄러미 레온을 바라보던 혁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레온이군요. 혹시 전투 클레릭이란 직업을 알고 계신가요?”
혁의 물음에 총명한 레온은 왜 혁이 섣불리 골렘들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이번 이벤트에 적극적이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루샤크가 전투 클레릭이었군. 불완전한 직업이라는 평판 때문에 그만두는 유저들이 한둘이 아닌데, 지금까지 꿋꿋하게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네. 뭔가 이유가 있는 걸까?’
잠시 생각하는 사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혁을 보며 레온이 말했다.
“아, 알고 있죠. 성직자 계열의 직업이긴 하지만 그 틀에서 약간 벗어난 직업이지요?”
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혁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혁의 이미지에 레온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유저들과 동행을 할 경우, 일반 성직자 유저들처럼 많은 보조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여타의 직업처럼 강한 전투력을 가진 직업도 아닌 둘 다 완전하지 못한 어중간한 직업이 바로 전투 클레릭이지요.”
말을 마치 혁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에 레온이 되물었다.
“그런 걸 알면서 왜 굳이 전투 클레릭을 선택했나요?”
“2차 전직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전투 클레릭의 2차 전직이라면…….”
“팔라딘이라고 아십니까?”
혁의 말 한 마디에 레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자신이 택한 마법사라는 직업처럼 팔라딘으로 전직하는 유저도 몇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투 클레릭이란 직업으로 레벨 100에 도달하는 것은 그만큼 힘들고 지루한 일이었기 때문에 인내심이 어지간한 유저가 아니고서야 팔라딘으로 전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온도 지금껏 말로만 들어오던 팔라딘으로 전직한다고 마음먹은 혁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의 물음에 대답하려는 찰나, 유저들을 제치고 달려드는 골렘을 본 레온이 급히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그런 레온의 주변으로 마나가 신속하게 재배열되기 시작했고 캐스팅을 끝마친 레온이 소리쳤다.
‘트윈 싸이클론(Twin Cyclone).“
시동어를 외치며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손바닥을 펼치자 손바닥 위로 형성된 회오리가 서로 맞물려 마치 꽈배기처럼 꼬이기 시작했고, 이내 다가오던 골렘 한 구를 향해 맹렬히 쏘아졌다.
콰콰콰콰!
강한 풍압에 지면에 박혀있던 돌들이 터져나갔고, 트윈 싸이클론이 골렘의 동체에 작렬하자 팔, 다리로 추측되는 돌덩이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마법에 대한 내성이 있었기에 그런 데로 잘 버텨내고 있었다.
레온이 앞으로 뻗었던 두 팔을 X자로 교차시키자, 트윈 싸이클론이 골렘의 가슴팍을 향해 맹렬히 솟구치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마법에 대한 내성이 강한 골렘이라지만, 6클래스 이상의 마법까지 모조리 퉁겨낼 수 없는 법. 심장만 파괴하면 끝이다.’
보통 마법에 대한 내성이 없는 몬스터들 같으면 벌써 엄청난 풍압에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처참하게 찢어졌겠지만, 마법에 대한 내성이 강한 마법사로선 그저 천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골렘이었기에 이처럼 레온의 마법을 잘 버텨내고 있었다.
콰쾅!
마침내 골렘의 가슴팍이 파괴가 되었는지, 골렘의 동체가 힘없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다른 한 마리 골렘이 관청에서 어중간하게 떨어진 혁과 레온에게 달려오던 도중, 관청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강력한 화살에 움찍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활 내성을 지녔다고는 하나 수많은 궁수 유저들이 쏘는 파워 샷에는 당해낼 수 없었기에 골렘은 금세 생명력이 바닥을 보였고, 결국 레온의 마법에 심장을 파괴당했다.
“제가 루샤크도 저들처럼 자유롭게 싸울 수 있도록 도와드리지요.”
나머지 골렘 한구를 파괴시키니 레온이 혁에게 말했다.
“그, 그게 가능한가요?”
“물론이죠.”
혁의 물음에 빙긋 웃으며 대답한 레온이 간단한 수인을 맺으며 시동어를 외기 시작했다.
“스트랭스(Strength), 헤이스트(Haste), 스톤 스킨(Stone Skin), 프로텍션(Protection).”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순식간에 혁의 몸을 뒤덮었고, 몸 상태가 전과는 달라진 걸 느낀 혁이 신기한 듯 팔다리를 시작으로 온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니…….”
“지속시간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저에게 오셔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잇지 못하는 혁에게 빙긋 웃으며 대답해준 레온. 그에 혁이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전장을 향해 재빨리 내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레온이 쏘아 보낸 엄청난 풍압을 자랑하는 마법을 막아낸 골렘을 보며 나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약 저런 것에 맞았다면 그대로 게임아웃 될 상황인데, 저걸 버텨내다니 괴물 같은 녀석들. 하지만 오러에는 맥없이 픽픽 쓰러지는 나약한 녀석들에 불과했다.
소드 마스터 유저의 칼질 한 번에 팔 하나가 잘려나가고 열 번 휘두르자 가슴팍이 파괴당해 그대로 쓰러지는 녀석들.
또다시 내게 달려드는 골렘 한 마리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마법에 대한 내성이 꽤나 강했기 때문에 현무의 그리스가 먹힐 일도 없었기에 나는 루카의 등위로 훌쩍 올라탔다.
“가자, 루카!”
루카는 본능적으로 내게 접근하는 골렘에게 빠르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다른 멍청한 짐승들처럼 직선적으로 접근을 하지 않고 지능적으로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접근하는 것이었다.
“와, 이 강아지 똑똑하다.”
쌩뚱맞은 현무의 말에 피식 웃어 보인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골렘을 겨냥했다.
활시위를 힘껏 당기자 화살촉에 오러 애로우가 맺혀 붉은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고, 주위를 분산시키는 것에 성공함과 동시에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쐐애액!
붉은 섬광이 맹렬히 쏘아짐과 동시에 골렘의 등판(앞뒤를 알 수 없지만)에 깊게 틀어박혔다. 하지만 약점을 가격하지는 못했는지, 골렘이 사납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돌덩이에 기겁을 한 나는 상체를 앞으로 최대한 숙인 채 루카를 붙잡았다. 루카는 능숙하게 골렘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내며 또다시 골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나는 숙였던 상체를 세우고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든 뒤 또다시 골렘의 가슴팍에 화살 한 발을 쏘아 보냈다.
쐐애액.
푸욱!
이번엔 정확히 약점을 가격했는지, 골렘의 동체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골렘 한 구를 더 처리한 나는 전장을 둘러보았다.
“이건 뭐 바위산에 온 것 같은데? 온통 돌 천지군.”
움직이는 바위와 사력을 다해 싸우는 유저들. 참 웃긴 설정이었다. 그리고 잠시 여유를 가지려는 사이, 성질 급한 다른 한 구의 골렘이 내게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탬핑 어택, 싸이클론!”
콰앙!
회전력과 발경이 가미된 공격에 골렘의 동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싸이클론과 발경에 의해 겉과 속이 완벽하게 파괴된 골렘을 뒤로한 채 경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찬은 그런대로 잘 버텨내고 있었고, 명석은 골렘과 충분한 거리를 둔 뒤 지능적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저건… 혁이군. 으앙? 잠깐. 루샤크?!”
두 눈이 휘둥그레진 경훈이 한 구의 골렘을 향해 재빨리 달려가는 혁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혁의 움직임이 저렇게 빨랐나? 금세 의문 하나를 가진 경훈이 혁을 자세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아앗!”
쿠앙!
몸과 배틀 해머를 동시에 회전시킴으로써 파괴력을 배 이상으로 늘린 선제공격에 골렘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보통 저런 공격을 한 뒤엔 중심을 잡기 위해 잠시 멈칫하는 것이 정상인데, 혁은 이미 그 범주를 벗어난 것 같았다.
순식간에 중심을 잡고 재빨리 지면을 박찬 혁이 종횡무진 배틀 해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어진 것은 골렘과 혁의 난타전이었다.
골렘의 강력한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맹공격을 퍼붓는 혁. 하지만 꽤 충격을 먹었는지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저 녀석이 언제 저렇게 강해졌지? 분명 저런 공격에 맞는다면 최소한 데들리 상태가 되어 정신을 잃어야 할 텐데…….’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무언가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경훈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낙법을 이용해 바닥에 착 달라붙은 경훈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훑고 지나간 골렘의 거대한 동체를 바라보았다.
“휴, 하마터면 저 무식한 공격에 맞을 뻔했군.”
재빨리 몸을 일으킨 경훈은 뒤로 황급히 몸을 뺐다. 골렘의 바윗덩이 같은 동체가 자신이 엎드려 있던 곳에 작렬했기 때문이었다.
쿠웅!
“패스트 워커!”
몸을 뒤로 뺐던 경훈이 패스트 워커를 걸고 재빨리 지면을 박찼다.
퀵 스텝과 마찬가지로 이동속도를 증가시키는 스킬을 사용하자 경훈의 몸놀림은 배 이상으로 빨라졌다. 재빨리 지면에 처박힌 골렘의 팔로 추측되는 돌덩이에 몸을 싣고 가슴팍을 향해 빠르게 접근한 뒤 능숙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탬핑 어택, 피스톨!”
피융.
퍼억!
한 지점에 충격을 가하는 직선적인 공격과 발경이 가미된 공격의 조합! 하지만 골렘의 심장을 빗겨나갔는지, 골렘의 동체는 무너져 내리지 않고 온전한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제길.”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조금이라도 충격을 받으면 바로 반응을 보여야 할 골렘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기에 경훈은 얼른 고개를 저어 상념을 날린 뒤 지면을 힘껏 박차고 뛰어올랐다.
“탬핑 어택, 싸이클론!”
와르르.
마지막 일격에 골렘의 동체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경훈의 시선은 자연스레 전장을 쭉 훑었다.
고전하는 유저가 있는가 하면, 골렘을 너무도 쉽게 잡는 유저도 있었다. 새하얀 늑대를 타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붉은 섬광을 쏘아내는 궁수에게 시선이 고정시킨 경훈이 읊조렸다.
‘다른 궁수들과는 확실히 다르군. 현성이 저 녀석은 도대체가 알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현성에게서 시선을 땐 경훈이 피식 웃으며 두 마리 골렘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는 다른 유저를 향해 몸을 날렸다.
대기 중의 수분이 한데 모여 둥근 구체의 형태를 갖추었다. 동근 구체를 갖춘 물 덩어리는 구의 중간지점을 중심을 맹렬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배구공만 한 구체가 티아의 손바닥 위에 형성되어 둥둥 떠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목표물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보던 티아는 목표물이 어느 정도 거리를 좁혀오자 손바닥 위에 둥둥 떠 있던 구체를 목표물에게 쏘아 보냈다.
부웅!
맹렬히 소용돌이치는 구체가 골렘의 오른쪽 어깨 관절에 작렬했고, 제아무리 마법에 대한 내성이 강한 골렘이라 할지라도 연약한 관절까지 그런 건 아니었기에 관절이 적중당한 스톤 골렘의 한쪽 팔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골렘의 팔이 떨어져 나가자 티아는 능숙한 솜씨로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그 뒤로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연한 분홍색의 피부를 가진 한 여성 유저가 뜨겁게 타오르는 화염검을 쥐고 골렘을 공격해 나가기 시작했다.
불의 최상급 정령과 융합을 한 정령술사 유저였는지, 골렘이 받는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대여섯 번의 칼질에 골렘이 작동을 하지 않았고, 마지막 일격을 가하자 골렘의 동체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티아 젠 님, 다른 곳도 살펴볼까요?]
[네!]
골렘들이 속속히 등장한 뒤로 티르 네티아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그 굳건히 세워진 새하얗고 커다란 시계탑이 박살난 지 오래였고, 관청 근처의 건물들은 어느 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다.
간간이 물에 사는 몬스터들도 튀어나와 갑작스런 공격을 해왔기에 유저들은 혼비백산했고, 적지 않은 유저들이 게임아웃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아이언 골렘 군단의 대거 침공이었다. 스톤 골렘과는 달리 강철로 만들어진, 스톤 골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골렘이었다.
엄청난 활 내성을 가진 것은 기본이었고, 마법에 대한 내성 또한 엄청났다. 6클래스 이하의 마법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 최상급 몬스터 아이언 골렘이 무리지어 티르 네티아를 침공했던 것이었다.
외관상 다른 점이 더 있다면 스톤 골렘과는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위치를 제멋대로 바꾸는 스톤 골렘과는 다르다). 움직임 또한 스톤 골렘보다 빨랐기에 유저들은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다.
“하아앗!”
촤촹!
붉은 검광이 연이어 번쩍였고, 아이언 골렘의 강철 동체가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리며 죽어 들어갔다.
-그 정도 공격에 끄덕없다.
“뭐, 뭐라고?!”
말을 마친 아이언 골렘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솥뚜껑만한 주먹을 내뻗었다.
“파이어 실드!”
화르륵.
순식간에 형성된 둥근 화염의 구체가 강찬의 몸을 감쌌고, 아이언 골렘은 황급히 내뻗었던 주먹을 뒤로 홱 빼냈다.
지속적인 마나 감소를 느끼며 파이어 실드를 두른 강천이 투덜거리듯 읊조렸다.
“뭐 저런 게 다 있지? 아까 상대하던 스톤 골렘은 이 정도 공격이면 맥을 못 추렸는데.”
파이어 실드를 계속 유지하게 되면 마나가 금세 바닥이 날 것이었기에 강찬은 얼른 상념을 날려 버린 뒤 파이어 실드를 거두고 플레임 웨폰을 시전했다.
시뻘건 화염이 물밀듯 검신으로 뿜어져 올라와 일정한 형태를 갖추었고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글이글 뿜어져 나오는 아지랑이가 단적으로 플레임 웨폰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강찬을 감싸고 있던 파이어 실드가 사라지자 아이언 골렘이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강찬을 움켜쥐려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강찬은 그런 공격에 당할 맹탕이 아니었기에 쉽게 공격을 회피한 뒤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크윽.
꽤나 충격을 먹었는지, 아이언 골렘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움찔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잠시, 골렘의 발차기가 자신을 쇄도해 오자 강찬은 기겁을 하며 몸을 뒤로 뺐다.
신장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석상이 저토록 빠른 공격을 가해오다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강찬이 이내 냉정을 되찾고 문 블레이드를 꽉 움켜쥐었다.
‘새로운 스킬 중 하나를 쓸 때인가…….’
강찬의 시선이 중심을 잡고 있는 아이언 골렘의 가슴팍에 쏘아졌다.
[헤이스트(Haste)의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프로텍션(Protection)의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스톤 스킨(Stone Skin)의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샤프니스(Sharpness)의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스트렝스(Strength)의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이언 골렘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던 혁의 눈앞에 절망적인 메시지 창이 순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혁이 6서클의 마법사 레온의 버프를 받은 상태였지만 아이언 골렘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저 사력을 다해 막아내는 것이 전부였기에 혁에겐 방금 뜬 메시지 창이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멍청하게 있던 사이 아이언 골렘의 발길질에 채인 혁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아직 지속시간이 끝나지 않은 보조 마법 때문인지 조금 전에 맞은 공격의 충격이나 데미지를 크게 느낄 수 없었지만 공포감마저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바닥에 우스꽝스럽게 널브러져 있는 자신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아이언 골렘을 보며 혁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애석하게도 아이언 골렘이 머뭇거림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시를 파괴한단. 방해자는 제거한다.
‘제, 제길. 여기서 게임아웃 되는 건가…….’
혁이 이를 악물었을 때, 어디선가 쏘아진 강렬한 바람이 아이언 골렘의 동체와 충돌했고, 무시무시한 풍압을 자랑하며 아이언 골렘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뭐, 뭐지?”
화들짝 놀란 혁이 형태를 갖춘 채 나선형으로 날아든 바람이 쏘아진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엔 두 팔을 쭉 뻗은 레온이 서 있었다. 갈색의 머리카락과 로브자락이 강한 바람에 펄럭였고, 모자는 이미 머리 뒤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다행이 끈으로 공정시켜 두었기에 모자에 달린 끈이 레온의 목에 걸린 채 펄럭이고 있었다.
“핫!”
레온의 기합과 동시에 더욱 거세진 폭풍이 골렘의 가슴팍에 집중되어 맹렬히 솟구치기 시작했고, 6클래스의 고위급 마법까지 쉽게 막아낼 강력한 내성이 없었기에 아이언 골렘의 동체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크어어…….
콰콰콰콰 쩌적.
콰앙!
심장이 파괴되자 산산조각이 난 아이언 골렘의 파편이 어지럽게 흩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텅, 터텅.
트윈 싸이클론을 거둔 레온이 간단한 손짓과 함께 공간전이(블링크)를 이용해 혁에게 다가왔다.
“괜찮나요?”
“아, 예. 뭐 괜찮습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상당량의 마나를 소모한 까닭에 레온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아진 것을 느낀 혁이 아이템 창에서 대용량 마나 포션을 꺼내 내밀었다.
“이 정도면 상당량의 마나가 회복되겠죠?”
“아, 감사합니다.”
마나 포션을 받아든 레온이 마개를 따고 포션을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안색이 극도로 밝아진 레온이 재빨리 수인을 맺었고, 휘황찬란한 가지각색의 빛이 혁의 몸을 감쌌다. 물론 레온 자신에게도 버프를 걸고 관청을 향하는 아이언 골렘에게 다가갔다.
‘나선형으로 회전을 하는 바람이라… 강력한 마법 내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뚫었다? 마치 총을 쏘았을 때 탄환이 회전하며 날아가는 이치인가?’
정령과 루카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큰 덩치를 가진 쇳덩이 녀석을 쓰러뜨린 나는 조금 전 레온이 전개한 마법에 완벽하게 매료 되어 있었다.
이 쇳덩이 녀석들은 이상하게도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월등한 덕에 소드 마스터 유저들의 오러 블레이드나 내 오러 애로우에 적중당해도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는 것 같았다.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무식한 쇳덩이 녀석의 주먹이 쇄도해오는 것을 느낀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웃차!”
아이언 골렘의 주먹이 멈출 위치를 대충 어림잡아 기억해둔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을 꺼냄과 동시에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었다. 그런 후 골렘의 주먹에 착지한 나는 활시위를 힘껏 당기며 빙긋 웃었다.
“헤헤. 안뇽?”
그러자 아이언 골렘의 왼팔이 빠르게 쇄도해 오는 것을 느낀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음과 동시에 백스텝을 밟아 뒤로 쭉 물러났다.
올 애로우를 한껏 머금은 화살이 아이언 골렘의 안면에 틀어박혔지만 아이언 골렘은 움찔하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 뭐야. 도대체 저 괴물 같은 녀석은!”
뒤로 물러난 나는 루카에게 시선을 던졌다.
“루카, 정신을 분산시켜!”
크르르…….
목청을 낮게 울리던 루카가 빠르게 내달렸고, 아이언 골렘에게 몸통 박치기를 먹여 자신을 인식하게 한 뒤 몸을 빠르게 움직여 정신을 분산시키기 시작했다.
“후, 단 한 방의 공격으로 가슴팍이 파괴도지 않는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파워 샷을 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런 괴물 같은 녀석에겐 파워 샷을 쏘는 것이 정답이지만, 엄청난 위력을 보이는 파워 샷에도 단점이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목표물에겐 통하지도 않았고, 소량의 마나와 상당량의 스태미나가 동시에 감소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넋을 놓고 곰곰이 생각에 빠진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지만, 벨런스를 생각해서인지 운영자들은 일정량의 아이언 골렘들을 침공시킨 뒤 더 이상 몬스터들을 침공시키지 않았다.
“파웟 샷마저 쏠 수 없다면… 아, 그래!”
퍼뜩 정신이 든 나는 입 꼬리가 씨익 말려 웃으며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조금 전, 레온이 전개한 트윈 싸이클론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나는 또 다른 한 가지 새로운 공격 기술을 생각해냈다.
오러 애로우를 한껏 머금은 화살이 총을 쏘았을 때 발사된 탄환처럼 회전을 하며 쏘아진다면 충격이 배 이상으로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는 내 가설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정령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백호.”
“네, 마스터.”
나의 물음에 즉시 대답하는 백호. 힘겹게 골렘의 정신을 분산시키는 루카를 보자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다.
‘루카의 체력이 다하기 전에 얼른 도와야겠어.’
“혹시 화살에 가속을 붙이는 것 말고 쏘아진 총알처럼 회전시킬 수 있어?”
“총알? 그게 뭐죠?”
아차. 실수를 했다. 정령인 백호가 총알에 대해서 알 리가 없다는 걸 미리 알아챘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해야 좋을까.
“으흠. 아, 그럼 조금 전에 레온이 전개한 마법. 기억해?”
“네.”
“좋아, 그럼 이야기가 빨라지겠다. 너한테 그런 마법을 전개하라는 건 아니고, 윈드 애로우를 쏠 때처럼 쏘아진 화살에 네가 손을 대줘야 해. 트윈 싸이클론 한 발을 연상시키면 되는 거야. 회오리 하나가… 악!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그러니까 가속이 붙은 화살에 회전력을 가마시켜 달라는 말이죠?”
“아, 그래. 그거야!”
다행히 제대로 알아들은 백호가 대답을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침과 동시에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었다. 활시위를 힘껏 당기자 화살촉에 오러 애로우가 맺혀 붉은빛을 강렬하게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기술의 이름을 뭐라고 하지? 토네이딩 애로우(tornading Arrow)? 싸이클론 애로우(Cyclone Arrow)? 에라 모르겠다, 싸이클론 애로우!”
새로 개발한 스킬명을 외치며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붉은 섬광이 쏘아진 탄환처럼 맹렬히 회전하며 목표물을 향해 쏘아졌다.
회전력과 가속이 붙어 더욱 빨라진 화살은 정확히 골렘의 등판에 적중했고, 빠르게 회전하는 오러 애로우를 한껏 머금은 화살이 아이언 골렘의 등판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츄아악!
-크어억!
순식간에 등판을 관통한 화살이 아이언 골렘의 심장을 파괴시켰고, 그대로 동작이 멈춘 아이언 골렘의 동체가 쿵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이언 골렘이 쓰러지자 푹푹 패인 대지가 비명을 질러댔다.
“좋아, 이 상태로 계속 밀고 나가면 되겠어! 루카, 이리와!”
제19장 레인지 마스터, 존재를 각인시키다
“아니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모니터를 통해 아이언 골렘을 하나 둘 쓰러뜨리는 유저를 보는 직원의 안색이 상당히 밝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옆 자리에 앉아 작업을 하고 있던 동료 직원이 옆 모니터에 시선을 옮겼다.
“뭐가 어쨌다는 거야? 아이언 골렘이 상당히 강하긴 하군. 유저들이 이렇게 고전하는 걸 보니.”
“아니, 그것 말고 이걸 보란 말이야.”
직원이 손가락을 뻗어 단신으로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핏빛 광채를 쏘아 보내는 유저를 가리켰다. 그에 동료 직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티, 팀장님! 이, 이것 좀 보십시오.”
팀실의 벽면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모니터를 보며 이벤트를 관전하던 김 팀장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가?”
“여, 여기 이 유저 좀 보세요.”
서두러 두 직원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긴 김 팀장의 시선이 모니터를 향했다. 모니터를 본 김 팀장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이었다.
* * *
“아, 아니 궁수가 화살에 오러를 불어넣을 수 있는 건가?”
“홈페이지에서 본 건데, 레인지 마스터라고 했나? 일종의 히든 클래스라고 했어. 아무튼 그게 되면 화살에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다고 적혀있었어, 루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로 존재하다니…….”
협공으로 아이언 골렘 하나를 쓰러뜨린 두 기사 유저가 오러가 충만히 맺힌 궁을 들고 전장을 누비는 궁수 유저를 보며 나누는 대화였다.
실로 유저는 말도 안 되는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었다.
유저가 쏘아 보내는 핏빛 광채가 쏘아진 탄환처럼 맹렬히 회전을 하며 마법적인 힘이 깃든 아이언 골렘의 강철 동체를 종잇장 찢듯 간단하게 파고들었다.
공격 한 방에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거나, 가슴팍에 적중하게 된다면 그대로 폭발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도대체 몇 레벨 업을 한 거지? 상태 창, 오픈!”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레인지 마스터
Lv. 69
생명력(HP). 700
마나(MP). 490
스태미나(SP). 1,200(배고픔 수치 0%/ 갈증 0%)
힘 137
체력 65
민첩 179(+30)
손재주 520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10)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280~400
방어력 10(+12)
마법방어력 2(+10)
남은 스탯 포인트: 35
바람(백호) Lv. 9.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7.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6.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6. 친화력 100%
[상세정보]
‘지금껏 상당수의 아이언 골렘을 사냥해오면서 총 3레벨업을 했고 정령들도 각자 1레벨업을 했군.’
방금 전, 새하얀 빛이 루카의 몸을 휘감았던 것을 보아 루카도 레벨업을 한 것이 분명했다. 싸이크론 애로우의 효과가 좋긴 했지만, 마나가 전보다 빨리 소모된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무엇이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 지금 이 상황에서 스탯 포인트를 분배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아이언 골렘을 쓰러뜨리는 데 신경을 써야 했다.
나 이외에도 강력한 소드 마스터 유저들과 마법사 유저들이 대부분 아이언 골렘을 파괴시켰기 때문에 이제 남은 아이언 골렘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콰앙!
저 멀리서 강력한 익스플로전이 작렬했고, 아이언 골렘 한 구의 동체가 커다란 충격을 입고 바닥에 처박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지긋지긋한 몬스터 침공 이벤트에도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군.
“음?”
화살 하나를 꺼내들며 주변을 빙 둘러보자 아까 느끼지 못했던 많은 시선이 내게 주목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이언 골렘을 상대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는데, 왜들 이렇게 쳐다보는 걸까? 그 중엔 여성 유저들도 적지 않게 섞여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몸이 굳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루카!”
내 부름에 루카가 쏜살같이 달려왔고, 훌쩍 뛰어올라 루카의 등에 탑승한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아이언 골렘들을 향해 루카를 몰고 달렸다.
* * *
“플레임 템페스트(Flame Tempest)!”
화르륵.
문 블레이드의 검신을 감싼 불길이 더욱 거칠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불길의 길이 또한 길어졌다.
폭발하듯 뿜어진 화염검을 움켜쥔 강찬이 아이언 골렘 한 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마치 불로 이루어진 폭풍이 아이언 골렘의 동체를 감싸는 것을 연상시켰고, 수십 개의 검의 잔영이 형성되어 아이언 골렘의 동체를 감쌌다.
-뭐, 뭐지.
“하앗!”
수십 개의 잔영이 강찬의 기합성과 함께 아이언 골렘의 동체에 틀어박혔고 아이언 골렘의 가슴팍을 관통한 본체에서 뜨겁게 불길을 내뿜기 시작했다.
-크워어어어억.
‘끝인가?’
황급히 문 블레이드를 뽑아내며 아이언 골렘과 거리를 둔 강찬이 검을 늘어뜨린 채 아이언 골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서 있었다. 이내 심장을 파괴당한 아이언 골렘의 동체가 폭발했고, 강철 파편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텅, 터텅.
힘겹게 아이언 골렘 한 구를 처리한 강찬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관청 하나를 둘러싼 궁수 유저들과 몇 안 되는 마법사 유저들. 그리고 이젠 거의 폐허라고 볼 수밖에 없는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
“완전히 폐허가 됐군.”
여기저기 부서진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고, 티르 네티아를 처음 방문할 당시 들렀던 레스토랑 블루 네티아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오우거 녀석들이 날뛰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건 그렇고 다른 녀석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주위를 빙 둘러보자 레온과 동행하는 혁과 경훈, 명석, 티아의 모습이 강찬의 눈에 보였다.
“현성이는… 맙소사, 레, 레인지 마스터란 게 저런 거였나?”
단 한 방에 아이언 골렘의 동체에 치명상을 남기는 현성을 보며 강찬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드 마스터 유저와의 협공으로 마지막 한 마리 아이언 골렘을 간단하게 해치운 난 루카의 등에서 뛰어내려 친구 녀석들이 한데 모인 곳으로 몸을 던졌다.
기분이 안 좋은 것 같던 혁의 얼굴이 상당히 밝아져 있었고, 많은 마나를 소비했는지 레온의 안색이 그리 밝지 않았다.
상당량의 마나가 감소되었을 때 느껴지는 현기증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 융합을 해제한 티아의 안색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고정 된 활시위를 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키고 있는 경훈과 잔뜩 신이 난 혁. 이곳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강찬과 관청에서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로이체.
‘저 녀석, 아직도 게임아웃 안 됐네? 끈질기군.’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개안되어 있는 적안을 해제했다. 화살통의 재고를 확인하고 있을 때, 레온의 음성이 들려왔다.
“레드, 상당히 강해졌군요. 그 아이언 골렘에게 단 한 방에 치명상을 남길 정도로.”
“그, 그런가요? 하하.”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현… 아니, 레드. 화살에 오러를 발현시키다니, 그런 스킬도 있었어?”
스태미나 포션을 몽땅 들이킨 경훈이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내게 물어왔다.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궁탑의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지. 물론 레인저로 2차 전직을 한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야. 일종의 히든클래스라고 봐도 무방하지.”
“호오. 그렇단 말이지? 화살에 오러가 개입되니 궁수도 무시무시해지는구나.”
“오러가 개입되지 않아도 궁수가 무섭다는 걸 보여줄까?”
장난스런 나의 말에 경훈이 손을 내저으며 피식 웃었다.
“그럴 필욘 없어.”
나는 빙긋 웃어보이곤 아이템 창을 열어 화살통을 교체하고, 몇 병 남지 않은 포션의 재고를 확인한 뒤 마나포션 두 병을 꺼내곤 아이템 창을 닫았다.
한 병은 레온에게 주었고, 나머지 다른 한 병을 들고 티아를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티아 너 안색이 별로 안 좋다. 이거 마셔.”
“응. 고마워.”
마나포션을 받은 티아가 마개를 따고 포션을 들이켰다. 그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하던 아이언 골렘 군단도 마스터급의 유저들이 합세하자 순식간에 괴멸되었다.
현재 생존한 유저들은 관청에서 엄호를 맡은 다수의 궁수 유저들과 몇 안 되는 마법사 유저들. 그리고 최상급 소드 엑스퍼트 유저들과 소드 마스터 유저들, 그 외에 다른 히든 클래스를 가진 명 안 되는 유저들이 전부였다.
‘50명은 되려나?’
얼마 남지 않은 유저들을 보자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되었다. 남은 유저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데, 침공해오는 몬스터들이 처음과 같다면 제아무리 약한 오크들이라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수적으로 밀어붙이는데 장사 없는 법.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맘이 편할 리 없었다.
* * *
“허허. 마스터급의 유저들이 합세하니 아이언 골렘 군단도 순식간에 괴멸되었군.”
모니터를 바라보던 김 팀장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토록 자신했던 아이언 골렘 군단이 이토록 쉽게 괴멸되다니…….
“팀장님,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마스터급을 상회하는 데스 나이트 군단과 리치 부대를 침공시킬까요?”
직원의 말에 김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드 마스터 최상급 언저리에 위치한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 군단과 7서클 마스터의 리치 부대를 침공시키도록, 이것들까지 막아낸다면 유저들의 승리다.”
“예. 그럼 추 운영진에게 알린 뒤 몬스터들을 침공시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김 팀장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많아봐야 이제 50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 유저들에게 드레이크나 드래곤, 다크 쉐이드를 침공시킬 수 없었기에 그나마 무난한 몬스터들을 침공시키는 걸 택해야 했다.
‘남은 유저들의 사기는 식을 줄 모르는군. 그것보다 로빈훗 다음으로 레인지 마스터가 된 유저가 조금 걸리는군. 싸이클론 애로우라고 했나? 재미있는 유저야.’
김 팀장은 자리로 돌아가 이벤트에 참여한 레인지 마스터 유저를 유심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제20장 몬스터 침공 이벤트의 종지부
섬광처럼 뿜어진 새하얀 빛.
그 중심점에는 운영자 추가 서 있었다. 나타날 때마다 빛이 번쩍이는군. 처음엔 그럴싸했지만, 세 번째 보니 그리 멋있어보이진 않았다.
폐허가 된 티르 네티아로 나타난 운영자 추가 말했다.
[처음 이벤트를 시작할 때와는 달리 유저의 수가 얼마 남지 않았군요. 아름다운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도 완전 폐허가 되었고요. 이제 몬스터들의 마지막 침공이 시작됩니다. 기존의 몬스터들과 차원이 다르므로 조심해서 상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며 저는 이벤트가 끝난 뒤 이곳에 다시 나타나겠습니다.]
말을 마친 운영자 추가 퍽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유저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침공해올 몬스터가 과연 어떤 몬스터인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레온은 수인을 맺으며 고위급 마법을 메모라이즈하기 시작했고, 경훈은 손목을 빙빙 돌리며 몸을 풀고 있었다. 배틀 해머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혁과 문 블레이드의 검신을 살펴보는 강찬. 그리고 아이템의 재고를 확인하는 명석과 로이체.
티아는 최상급 정령과 융합해 청명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도대체 침공해오는 몬스터들은 어떤 녀석들일까? 의문은 오래 지나지 않아 서서히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갑주 부딪히는 소리가 저 멀리서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시 적안을 개안한 나는 갑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시선을 집중했고, 이내 시야가 확보되었다.
묵빛 풀플레이트 메일 차림의 소름끼치는 안광을 뿜어내는 여덟 명 남짓 되는 기사들과 그 뒤로 로브를 뒤집어쓴 뼈다귀 같은 네 구의 물체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관청에 매복하고 있던 궁수 유저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이내 쏘아진 화살이 비처럼 허공을 빽빽이 메운 채로 몬스터들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로브를 뒤집어 쓴 뼈다귀 한 마리가 입을 웅얼거림과 동시에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이 맥없이 허공에서 튕겨나가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리, 리치인가…….”
레온의 말에 나는 몬스터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레온을 바라보았다. 레온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리치라뇨?”
“쉽게 말해서 마법을 구사하는 언데드 몬스터들이죠. 상당히 고위급의 마법을 구사하는지라 낮은 클래스의 마법사들에겐 천적이나 다름없습니다.”
레온이 두려워할 정도면 저 녀석들이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겠지.
“그럼 기사 유저들이 저 녀석들을 먼저 제거하면 되겠군요.”
“말은 쉽지만 데스 나이트들이 리치를 공격하는 기사 유저들을 가만히 놔둘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유저의 수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최악의 상황이군요. 데스 나이트의 능력이 만일 소드 마스터를 상회한다면,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뭐, 뭐지?”
“화살이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어!”
관청에 매복해 있던 궁수 유저들이 방금 일어난 말도 안 되는 현상을 보곤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에 웅성이던 궁수 유저들 중 한 유저가 소리쳤다.
“리, 리치다! 모두들 조심하세요! 높은 서클의 마법을 구사하는 언데드 몬스터입니다!”
“마법사 몬스터인가?”
웅성웅성.
궁수 유저들은 하나같이 미간을 좁히고 화살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헌터 유저들은 세 개의 화살을 꺼내들었고, 사수 유저들은 한 개의 화살을 꺼내들었다.
물론 자신들의 스킬 중 가장 강력한 스킬을 쓰려는 심산에서였음이 분명했다. 선두로 서 있던 궁수 유저가 외쳤다.
“모두들 맨 왼쪽에 등이 굽은 리치를 겨냥해주십시오. 한 마리라도 먼저 쓰러뜨려야 유리해집니다!”
“예!”
“하아앗!”
기합성을 내지르며 선두로 달려 나가는 기사 유저를 보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들떴다.
유저의 검에선 눈부신 빛이 폭발하듯 뿜어졌고, 이내 검신을 뒤덮는 아름답다 못해 신비한 짙은 청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왔다.
유저는 한 구의 데스 나이트에게 몸을 날렸고, 검을 휘둘렀다. 기다렸다는 듯이 시커먼 묵기가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장검이 마중 나와 소드 마스터 유저의 검과 충돌했다.
촤앙!
강기의 파편이 어지럽게 떨어져 내렸다. 무리지어 유저를 덮어가는 데스 나이트를 보며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재빨리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건 뒤 목표물을 겨냥하자 화살촉에는 오러 애로우가 맺혀 붉은빛을 강렬하게 발산하기 시작했다.
“싸이클론 애로우!”
피융!
쐐애액!
오러를 머금은 화살이 마치 쏘아진 탄환처럼 맹렬히 회전하며 다른 한 구의 데스 나이트를 향해 쏘아졌다.
회전하며 날아간 오러 애로우의 기미를 눈치 챘는지, 소드 마스터 유저에게 모여들던 데스 나이트들이 황급히 몸을 뒤로 빼며 소름끼치는 안광을 뿜어내며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헉? 이 빠른 걸 피해 내다니. 그것도 불시에 가해진 기습인데…….’
“허억.”
잠시 당황한 사이 선두로 달려든 기사 유저의 신응이 울려 퍼졌다. 데스 나이트 한 구의 위력은 소드 마스터 유저 하나 정돈 거뜬히 상대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유저 이외에 소드 마스터 유저 둘이 합세해 데스 나이트 한 구를 겨우겨우 막아내는 것을 보며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소드 마스터 유저 여섯이 두 구의 데스 나이트를 상대하는 동안 다른 나머지 데스 나이트들이 관청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익스플로전!”
“익스플로전!”
“익스플로전!”
콰콰쾅!
동시다발적으로 외쳐진 시동어와 함께 관청으로 향하던 여섯 구의 데스 나이트들이 중심점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데스 나이트들도 마법에 대한 내성이 있었는지, 몸뚱이가 산산조각 나지 않고 걸친 갑주의 파편이 떨어져 나간 것 이외엔 아무런 충격도 입히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상당량의 생명력이 감소했겠지.
나는 한 구의 데스 나이트라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익스플로전에 몸을 내준 데스 나이트 중 가장 부상이 심한 데스 타이트에게 화살 한 발을 쏘아 보냈다. 물론 가속과 회전력이 가미된 화살이었다.
쐐애액.
미처 눈치 채지 못했는지, 화살에 그대로 몸을 내준 데스 나이트의 왼쪽 어깨가 썩은 두부 잘려나가듯 떨어져 나갔고, 팔이 잘린 데스 나이트의 소름끼치는 안광이 나에게로 쏘아졌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내 뒤엔 루카가 철탑처럼 버티고 서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의지해야 하는 것은 정령들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침공해온 몬스터들은 기존의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강력할 뿐만 아니라 지능적으로 상황을 대처했기 때문에 유저들이 꽤나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스터 최상급 언저리에 위치한 능력을 보유한 데스 나이트 혼자 소드 마스터 유저 셋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고, 마법에 대한 내성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6클래스 이하의 마법사 유저들이 상대하기엔 상당히 까다로운 몬스터이기도 했다.
게다가 관청에 매복해 있는 궁수유저들의 화살을 막아내는 리치 부대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 화살을 막아내는 것 이외에 아무런 행동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상당히 위험한 녀석들이었기에 불시에 가해질 공격에 대처해야 했다.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
레온의 손짓에 공기가 응축되어 새하얀 화살이 형상을 띤 매직 미사일이 허공을 빽빽이 메운 채 한 구의 데스 나이트에게 쏘아졌다.
물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수백 발의 매직 미사일에 몸을 내줄 일이 없는 데스 나이트가 능숙한 솜씨로 검을 휘둘러 매직 미사일을 쳐내기 시작했다.
“블링크.”
레온은 공간전이를 이용해 순식간에 데스 나이트의 뒤로 향했다.
“메모라이징, 트윈 싸이클론(Twin Cyclone).”
앞으로 뻗은 두 손바닥을 중심으로 생성된 회오리가 나선형을 그리며 매직 미사일을 막아내는 데스 나이트의 뒤로 쏘아졌다.
콰콰콰콰
혼신을 다해 전개한 마법이었기에 위력은 전보다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그래도 트윈 싸이클론에 적중당한 데스 나이트의 동체가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에 휘말려 들어가자 레온이 급히 두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에 쏘아진 바람이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고 데스 나이트를 머금은(?) 회오리가 높이 치솟자, 레온이 뻗었던 두 팔을 서서히 내리며 외쳤다.
“디스펠(Dispel:해제).”
그에 맹렬히 솟구치던 바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바람에 의해 하늘 높이 솟아올랐던 데스 나이트가 중력의 법칙대로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웅!
거칠게 쑤셔 박힌 데스 나이트는 트윈 싸이클론의 데미지와 바닥에 떨어지며 입은 충격 데미지에 의해 생명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매직 미사일로 신경을 분산시킨 뒤 메모라이즈 해두었던 트윈 싸이클론으로 가한 공격이 먹혀들었고, 이와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날 기미를 보이는 데스 나이트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레온이 익숙한 솜씨로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꽤나 복잡한 동작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5클래스 이상의 마법을 발현시키려는 것이 분명했다.
고오오오.
마나가 재배열되면서 거친 기의 파동이 요동쳤다.
“썬더 블레이크(Thunder Break).”
뒤이어 시동어가 레온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콰르릉!
마른하늘을 쩍 가르며 나타난 벼락이 비틀거리며 일어선 데스 나이트에게 적중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푸른 전류가 데스 나이트를 감싸고 방전했고, 생명력이 전부 감소된 데스 나이트의 몸이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한 구 처리했군. 하지만 방심해선 안 돼. 데스 나이트라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겠지만 리치라니… 아무리 못해도 6클래스 마스터거나 7클래스를 넘나드는 녀석들일 텐데…….’
착잡해진 레온이 수인을 맺어 마법을 메모라이즈하기 시작했다. 리치란 마법사들에게 있어선 상당히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몬스터들이다.
기사라면, 다수의 소드 엑스퍼트 상급의 기사가 합격진을 펼쳐 소드 마스터를 제압할 수 있지만 마법사는 달랐다.
제아무리 낮은 클래스의 마법사가 고 클래스의 대마법사에게 협공을 한다한들. 그 자리에서 디스펠 해 마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5클래스의 마법사 다수가 7클래스의 리치 한 명을 상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현재 6클래스 엑스퍼트 상급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다. 수련치를 조금만 더 올린다면야 7클래스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지만, 아직까진 리치의 상대가 되지 못해. 리치를 상대할 수 있는 건 리치들과 대등한 클래스의 마법사나 기사뿐이다.’
메모라이즈를 마친 레온이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데스 나이트를 막다가 절명한 소드 마스터 유저가 게임아웃 되었고, 상황은 절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묵기가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데스 나이트의 장검이 내 복부를 향해 폭사되는 것이 보였다.
“그리스(Grease)”
내 주문영창이 이어짐과 동시에 일직선으로 공격을 가해오던 데스 나이트가 마찰계수가 0이 된 지면에서 발라당 뒤집어졌다.
나는 즉시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싸이클론 애로우!”
화살촉에 붉은 빛을 강렬하게 발산하는 오러 애로우가 맺혀 반짝였고,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데스 나이트를 향해 맹렬히 쏘아졌다.
피융.
쐐애액.
데스 나이트의 등판 한가운데 화살이 정확히 꽂혔고, 회전력이 가미된 화살에 의해 등판의 갑옷이 처참하게 터져나갔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몬스터들 대부분이 저랬으니까.
“퀵 스텝!”
나는 즉시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순식간에 장검으로 땅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선 데스 나이트에게 도착했다.
“보우어택!”
콰앙!
굵직한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데스 나이트의 투구에 작렬했고, 묵직한 굉음이 울려 펴졌다. 즉시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난 나는 재빨리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저대로 둔다면 생명력을 회복한 뒤 달려들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나는 즉시 데스 나이트에게 활을 쏘았다.
피융.
촤아악!
오러 애로우를 머금은 채 회전하며 날아든 화살에 단단한 데스 나이트의 투구가 종잇장 찢어지듯 허무하게 갈가리 찢어져버렸다.
[레벨 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데스 나이트 한 구를 쓰러뜨리자 레벨업을 했다는 메시지 창이 생성되었다.
“후, 지금 상태 창을 정리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럴 여유는 없군. 퀵 스텝!”
퀵 스텝을 건 나는 즉시 힘겹게 데스 나이트를 막아내고 있는 유저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비켜서세요. 티아.]
[하, 하지만!]
시린 안광을 뿜어내며 다크 오러 블레이드를 한껏 끌어올린 데스 나이트의 장검이 불의 최상급 정령술사의 목덜미를 찔러들어가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의 장검이 유저의 목덜미에 다다랐을 때,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쐐애애액.
어디선가 나타난 붉은 섬광이 데스 나이트의 장검을 정확히 쳐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유저와 티아의 시선이 붉은 섬광이 쏘아진 곳에 던져졌다.
그곳엔 왜소한 채격을 가진 평범하게 생긴 궁수 유저가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철궁을 들고 철탑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궁수 유저의 뒤엔 새하얀 털을 가진 늑대 한 마리가 이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 절망감으로 가득했던 티아의 두 눈이 기대에 가득 차 반짝이고 있었다.
현성의 손짓에 루카가 재빨리 달려들어 넋을 놓고 있는 데스 나이트에게 몸통 박치기를 먹였고, 그와 동시에 또다시 붉은 섬광이 쏘아졌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몸을 뒤로 빼 루카의 몸통 박치기의 파괴력을 상당히 늦춘 뒤 날아오는 화살을 감지해 몸을 돌려 피해냈다.
궁수가 근접전에 취약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데스나이트는 연속적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피해내며 현성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하지만 현성을 뒤로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가오는 데스 나이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불의 최상급 정령술사 유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붉은 섬광을 쏘아내는 궁수 유저가 이상한 것도 있었지만, 가까이 접근하는 상대를 보고 뒤로 물러나지 않고 가까이 접근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는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보통 궁수 유저라면,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나며 화살로 견제를 할 텐데…….]
그에 나란히 서 있던 티아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 그렇지 않은 궁수가 있다는 것도 볼 수 있겠군요. 아, 셋이 같이 덤빈다면 데스 나이트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아직 퀵 스텝의 지속시간이 끝나지 않았군. 도박이 성공할 수도 있겠어!’
데스 나이트와 상당히 가까워진 나는 피식 웃으며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꽉 움켜쥐었다. 예상대로 데스 나이트의 장검이 내 목덜미를 향해 쇄도해 오고 있었다.
나는 즉시 몸을 잔뜩 움츠려 데스 나이트의 검을 피해낸 뒤 지면을 힘껏 박참과 동시에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휘둘렀다.
콰앙!
두 팔이 얼얼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리스를 외치자 데스 나이트가 휘청하더니 그대로 벌렁 넘어졌다. 나는 즉시 화살 두 개를 꺼내들어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백스텝을 밟았다.
“더블 샷!”
쐐애애액.
백스텝을 밟고 물러남과 동시에 더블 샷을 쏘았으나 중심을 잡고 일어선 데스 나이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붉은 섬광 두 개를 쳐냈다.
데스 나이트도 상당히 성가신 녀석들 중 하나군. 스태미나가 거의 바닥난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을 허리춤에 가져갔다. 뻣뻣한 화살 깃이 손 끝에 닿는 것이 느껴졌고, 나는 즉시 그것을 잡아 화살을 꺼내들었다.
퍼펑!
이 때 어디선가 쏘아진 타오르는 구체가 데스 나이트와 충돌하며 큰 폭발을 일으켰다. 시선이 자연스레 구체가 쏘아진 곳으로 향했고, 그곳엔 정령과 융합한 티아와 불의 정령과 융합한 유저가 서 있었다.
역시 혼자 상대할 때보다 셋이 합공하니 훨씬 낫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식간에 내게 다가온 티아가 내 스태미나를 회복해주기 시작했고, 스태미나가 회복된 나는 즉시 데스 나이트를 몰아붙였다.
데스 나이트의 허점이 드러났을 땐 티아와 정령술사 유저가 어김없이 그곳을 공격해 생명력을 깎아냈다.
레온의 익스플로전과 같이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는 불의 정령술사 유저의 마지막 일격에 데스 나이트 한 구를 처리할 수 있었다.
* * *
폐허가 된 티르 네티아.
남은 유저는 얼마 없었지만, 이벤트는 진해되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 네 구가 파괴되자,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던 리치들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 구의 데스 나이트와 네 구의 리치가 가하는 협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마법사 유저들이 기사 유저들에게 버프를 걸어주기가 무섭게 리치들이 디스펠 해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마법사 유저들이 데스 나이트들에게 가하는 공격 또한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관청에 매복하고 있는 궁수 유저들의 화살세례도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기사 유저들만이 리치를 상대할 수 있었지만, 그것조차 데스 나이트에게 가로막혀 전세는 몬스터 측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크악!”
소드 엑스퍼트 최상급 언저리에 위치한 유저가 피를 낭자하게 뿜어내며 게임아웃 되었다. 유저들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어 더 이상 막아낼 이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반전이 있는 법. 네 구의 데스 나이트가 서 있는 중심부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퍼엉!
마법사 유저들 중 마법을 캐스팅한 유저는 없었다. 캐스팅 해봤자 리치에 의해 디스펠 되는 상황인지라 마나만 낭비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연금술사가 대단하다는 겁니다. 크흐흐.”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저들의 시선이 음침한 웃음을 흘린 유저에게 집중되었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구술을 연신 퉁기며 건들건들 발걸음을 옮기는 유저.
데스 나이트들을 향해 구슬이 매서운 속도로 던져졌고, 세 구의 데스 나이트가 황급히 그것을 피해냈다. 다른 한 구는 방금 전 일어난 폭발에 의해 소멸 된 것 같았다.
콰아앙!
구슬이 땅에 적중함과 동시에 익스플로전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눈부신 섬광이 치솟았고, 작은 구슬이 적중한 지면은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구슬의 위력을 단적으로 증명하듯 뻥 뚫린 구멍에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도구를 이용하는 것도 현명한 판단이지.”
유저가 품에 손을 넣자 세 구의 데스 나이트가 머뭇거림 없이 유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 유저들이 나타나 데스 나이트들을 막아냈다.
난데없이 나타난 연금술사 유저에 의해 전과는 달리 싸움의 양상이 딴판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사용하는 것은 도구였기에 리치가 디스펠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리치들은 데스 나이트를 견제하는 마법사들의 마법을 황급히 디스펠하기 시작했으나, 몇 남지 않은 기사 유저들이 그것 또한 가로막았다.
“이 징그러운 뼈다귀 놈들. 이제야 지긋지긋한 이벤트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구나.”
-모, 모두들 연계 마법을 펼쳐라!
리치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구의 리치가 소리치자 리치들이 웅얼거리며 소름끼치는 안광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사 유저들이 그것을 내버려 둘 이유가 없었기에 몇 남지 않은 기사 유저들이 리치들에게 몸을 던졌다.
마법사는 마스터급의 기사들에겐 약한 면모를 보일 수밖에 없다. 대게 마스터급의 유저들이 그리하듯, 신체적인 능력이 향상됨과 동시에 뒷받침 해주는 보조스킬의 기본적인 능력도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캐스팅이 완료되기도 전에 기사 유저들의 검에 목이 날아가게 된다.
불시에 기습을 가한다 해도, 마법이란 마나를 재배열시킴으로써 대자연의 기운을 형상화시키는 것. 클래스가 높아질수록, 기의 파동이 거칠어지기 때문에 미세한 파동마저 잘 잡아내는 기사 유저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왜 이러한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궁금한 이도 있을 것이다.
현재 연금술사 유저 명석을 보호하며 데스 나이트를 견제하는 마법사 유저들의 상황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마스터 최상급 언저리에 위치한 데스 나이트들은 마법 내성이 있어 낮은 클래스의 마법은 통하지 않았고, 높은 클래스의 마법은 캐스팅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상당히 고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으, 으악!”
데스 나이트를 막아내던 마법사 유저 하나가 거무튀튀한 검에 가슴팍이 꿰뚫려 그 자리에서 게임아웃 되었다.
“기사 유저들이 리치를 막는 동안 버프를 디스펠 할 수 없을 겁니다. 버프를 걸어드릴 테니, 마법사 유저들을 도우세요.”
“예.”
레온의 말에 강찬과 경훈, 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지각색의 휘황찬란한 빛이 그들의 몸을 휘감았고, 버프로 인해 스탯 포인트가 비약적으로 상승한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데스 나이트들에게 몸을 날렸다.
촹! 촤촹!
휘둘러지는 거무튀튀한 데스 나이트 장검이 마법사 유저의 목을 채 치기도 전에 시뻘건 겁화로 물든 강찬의 문 블레이드가 마중나왔다.
버프로 인해 비약적으로 강해진 강찬이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며 데스 나이트를 몰아붙였다. 뜨거운 열기로 인해 주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상대가 언데드가 아닌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생명체였다면,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뜨거운 열기였다.
-무기도 없이 데스 나이트에게 덤벼들다니. 어리석은 녀석.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경훈을 보며 데스 나이트가 읊조렸다. 경훈의 주먹이 자신의 가슴팍을 쇄도해왔지만, 데스 나이트는 피하지 않았다.
“하앗!”
퍼억!
데스 나이트의 가슴팍에 발경이 가미된 경훈의 주먹이 꽂혔지만, 데스 나이트는 아무런 충격을 입지 않았다.
언데드였기 때문에 장기는 이미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 그렇기 때문에 데스 나이트의 생명력은 조금도 감소하지 않았다.
보통 상대가 맞은 부위를 움켜쥐고 쓰러지는 것이 태반이었지만 이번 상대는 그러지 않은 것을 눈치 챈 경훈이 재빨리 데스 나이트와 거리를 두었다.
‘발경이 먹히지 않는 상대라… 그렇담 기본 스킬로 겉부분을 철저히 박살내주지.’
버프를 받지 않은 상태라면 이런 식을 접근한다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었지만 버프를 받은 상태인데다 혁까지 합세하니 상황은 딴판으로 흘렀다.
* * *
“지금 상황으로 보아 몬스터 침공 이벤트도 곧 끝나겠군요.”
직원의 말에 김 팀장이 모니터에 시선을 던졌다. 관청이 파괴될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을 뒤집고 유저들이 승기를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저들을 만만히 봐선 안 되겠어. 저토록 잘 막아낼 줄이야.’
김 팀장이 빙긋 웃으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기사 유저들에 의해 리치군단은 괴멸된 상태고, 데스 나이트도 몇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명 남지 않은 데스 나이트만 파괴된다면, 유저들의 승리로 몬스터 침공 이벤트가 끝나게 된다.
김 팀장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소드 마스터 유저에 의해 데스 나이트 한 구가 파괴되었다.
“팀장님, 데스 나이트 한 구가 파괴되었습니다.”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김 팀장이 모니터에 시선을 던졌다. 마지막 한 구의 데스 나이트에게 남은 유저들이 전부 달려들었고, 전부 달려들었기 때문에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데스 나이트는 유저들의 병장기에 난자당했다.
* * *
번쩍!
마지막 데스 나이트를 해치우자, 눈부신 섬광이 티르 네티아 전역에 널리 퍼졌다.
하마터면 장님이 될 뻔했군. 너무 갑작스럽게 펼쳐진 빛무리 세례에 두 팔을 들어 눈을 가렸던 나는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극심한 부상을 입었던 유저들과 거의 탈진 직전까지 가 있던 유저들이 전부 회복이 되어 본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끝난 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다가온 루카가 조심스레 내 볼을 핥았다. 나는 손을 들어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수고했어, 루카. 그리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너희들도 수고 많았다.”
청룡을 제외하고 모두들 수다쟁이인 녀석들이 웬일인지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조용했다. 갑자기 떠들지 않으니까 어색하잖아 이것들아!
그러려니 하고 넘긴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유저들 모두 정상이 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 나도 스태미나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어 상당히 숨이차 괴로운 상태였는데 방금 전 티르 네티아 전역에 뿌려진 빛무리에 의해 스태미나가 전부 회복되었다.
“공성전 때는 게임아웃 돼서 몰랐는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아도 뭐 특별한 건 없나보네.”
경훈이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며 말했다. 하긴 별다른 건 없지. 그에 레온과 강찬, 혁이 이쪽으로 느릿느릿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온 레온이 말했다.
“이제 몬스터 침공 이벤트도 끝났군요.”
“네. 후. 티르 네티아도 완전 폐허가 다 되었군요. 스크린 샷이나 찍어둘까.”
나는 레온의 물음에 대답하며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상처를 입었지만 거의 처음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관청 외엔 전부다 부서져 어디가 어딘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티르 네티아를 침공하는 몬스터들을 막아내는 유저들 중 생존한 유저들이군요. 이번 이벤트는 관청을 지켜낸 유저 측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관청을 막아냈을시 지급되는 아이템과 상당량의 경험치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공성전 때와는 달리 지급되는 보상 아이템이 지정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지 보상 아이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이벤트가 끝났으니 이제 신대륙으로 가는 것만 남았군.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로시토. 신대륙의 초인들을 전부 꺾고 오겠습니다.’
번쩍!
[레벨 업! 스텟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 업! 스텟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백호(바람)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현무(땅)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주작(불)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청룡(물)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백호(바람)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티르 네티아의 구원자’ 배지를 얻었습니다!]
눈앞에 어지럽게 나열되는 메시지 창을 보며 나는 왠지 모르게 만족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백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난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는 고개를 들어 허공에 붕 떠있는 백호에게 시선을 두었다. 새하얀 빛무리에 휩싸인 상태. 루카가 성장할 때와 같이 빛무리에 싸여 몸이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루카가 지금의 모습을 가지기 바로 전과 같은 크기로 몸이 불어나자 백호를 감싸고 있던 빛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정령 백호(바람)의 등급이 중급으로 승급됩니다.]
백호의 모습은 전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이제 제법 호랑이의 티를 갖추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부쩍 자란 모습이 늠름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스터!”
“목소리엔 변화가 없군.”
그 다음으로 이어진 백호의 행동에 나는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부쩍 자라나있던 몸이 원래의 작은 모습으로 되돌아오면서 내 머리 위에 배를 깔고 엎드리는 것이 아닌가?
뭘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의문은 배일 속에 서서히 묻혀갔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얼마나 레벨업을 했을까.
“상태 창. 오픈!”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레인지 마스터
Lv. 72
생명력(HP). 700
마나(MP). 490
스태미나(SP). 1,200(배고픔 수치 0%/ 갈증 0%)
힘 137
체력 65
민첩 179(+30)
손재주 520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10)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280~400
방어력 10(+12)
마법방어력 2(+10)
남은 스탯 포인트: 50
바람(백호)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8.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7.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7. 친화력 100%
[상세정보]
상태 창을 보자 이번 이벤트를 하면서 거의 폭레벨업에 육박하는 레벨업을 할 수 있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무려 9레벨업이나 하다니…….
상태 창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운영자 추의 음성이 잔잔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몬스터 침공 이벤트에 참가해주신 유저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메인이벤트 ‘몬스터 침공’은 이렇게 막을 내리겠습니다. 30초 후 자동 로그아웃이 진행될 것이며, 로그아웃 후 5시간가량 패치가 있을 예정이니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에 업로드 시켜놓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운영자 추의 모습은 안개에 가려지듯 사라졌다. 운영자가 사라진 허공을 응시하던 나는 이내 시선을 허탈한 친구 녀석들에게 던졌다. 다들 나처럼 만족 반, 허탈 반인 표정을 짓고 멍하니 서있었다.
‘이제 신대륙으로 가는 일만 남았군. 분명 신대륙에 가자고 하면 저 녀석들도 따라나설 거야, 어디든 같이 가줄 친구 녀석들이니까.’
“그럼 패치 끝난 후나 내일 보자.”
빙긋 웃으며 말하자 모두들 손을 들어 흔들어주었다. 상당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티아를 보며 빙긋 웃어준 뒤 로그아웃을 외쳤다.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푸쉬쉬.
위잉. 철컥.
헤드셋의 전원이 꺼짐과 동시에 게임기기 캡슐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어 머리맡 고리에 걸어두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몬스터 침공 이벤트는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나, 실용성이 있는 기술 하나를 만들어냈으니 이제 무서울 것이 없었다.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킬 때 감소하는 마나량과 날아가는 화살에 회전력과 가속을 가미한 싸이클론 애로우를 전개할 때 감소하는 마나량, 그리고 보조 스킬을 쓰면서 감소하는 마나량을 생각해보니 상당히 많이 감소하는 쪽에 속했다.
“이거 아이템에 인챈트를 해야 하나?”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게임베드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웬일인지 컴이 잔소리를 하지 않는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내 방 창가로 시선을 두었다.
오늘따라 달빛이 유난히 밝군. 환한 달빛이 내 방을 비추었고, 세릴리아 월드를 접하기 전 만지작거리던 잡동사니들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제21장 신대륙 아리시아! 그리고 오크들과의 첫 대면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푸쉬쉬.
위잉. 철컥.
나는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어 머리맡에 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 잘 자고 있었는데 어제 알람을 맞춰둔 것을 깜빡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혁이 녀석에게 무기를 개조해 준다고 호언장담한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알람을 맞추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밥도 먹지 못 한 채 로그인해 혁의 무기를 개조한 것이다. 물론 재미있는 일이었는지라 개조를 하는 동안은 즐거웠지만, 개조를 끝마치고 로그아웃을 하니 피로가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후아암. 혁이 녀석이 전직시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즉시 신대륙으로 떠나야겠구나. 흐어엄.”
얼른 정신을 차려야 했기에 두 손을 들어 양쪽 볼기짝을 연신 두드리며 욕실로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응?”
거울 안에 익숙한 얼굴을 한 평범하게 생긴 녀석이 반쯤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산발이 된 머리가 어찌나 우스꽝스러웠던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거울 속의 소년도 따라 피식 웃었다.
얼른 크린 워터 샤워기 앞에 선 나는 기기를 작동시켜 온몸을 깨끗이 씻고 몸을 말린 뒤 욕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은 뭘 먹을까~ 흥흥흥~.”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냉장고를 뒤지던 도중 육개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곤 얼른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새하얀 용기에 담겨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육개장. 그릇을 들고 식탁으로 옮긴 뒤 밥통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하얀 쌀밥을 퍼 육개장에 말았다.
흐흐흐, 군침이 절로 도는구나.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들고 후후 불어가며 육개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뚝딱 해치운 뒤 빈 용기를 싱크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얼른 방으로 향했다.
캡슐 허리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누르자 캡슐의 문이 열렸고, 나는 그대로 게이베드에 드러누워 헤드셋을 뒤집어썼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62.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로그아웃을 한 마지막 장소였던 티르 네티아의 대장간. 혁의 배틀 해머를 개조해주면서 친해진 대장장이 레이비크가 운영하는 대장간이기도 했다.
왕왕!
접속하기가 무섭게 짖어대는 루카. 정령들은 역소환 시켜놓은 탓에 조용히 로그인을 할 수 있었다. 팔을 뻗어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을 때, 경훈으로부터 대화 요청이 들어왔다.
[데시카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승인.”
-아 현성아! 나다 경훈이.
네가 경훈인 건 다 알고 있다. 이 녀석아. 경훈의 목소리 톤으로 보아 지금 기분이 상당히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래! 2차 전직을 했는데, 다른 지망생들을 제치고 1등을 먹어주셨다. 흐흐. 다들 발경에 맥을 못 추던걸?
하긴, 세릴리아 대륙의 무투가 유저들이 언제 발경을 접해봤을까? 그런데 그 기술에 반발하지는 않았나?
“그런데 다른 유저들이 발경에 대해 반발하지 않았어?”
-별로 그런 건 없더라고. 내가 무식이겠냐? 기본 스킬에다가 발경을 조합해 썼지 무턱대고 발경만 쓰면 다 들통 났게? 그건 그렇고 혁이 녀석은 2차 전직을 끝냈으려나? 그 녀석만 오면 신대륙으로 출발하는 거 맞지?
“응. 혁이만 오면 가는 거다. 아, 그리고 어제 레온을 꼬드기는데 성공 했어!”
-오, 든든한 아군을 만들어놨군. 난 그럼 네티아 항구로 간다!
[데시카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대화를 마친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이어진 활시위를 푼 뒤 등에 둘러멨다. 이제 티아와 강찬, 혁 그리고 레온만 온다면 신대륙으로 떠날 멤버는 모두 모이게 된 것이로군.
나는 잔뜩 기대에 부푼 맘을 추스르며 네티아 항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흰색 벽돌과 파란색 벽돌로 어우러진 네티아 항구. 커다란 범선들과 작은 나룻배들이 즐비하게 한데 모여 있었고, 햇빛을 받아 희고 푸르게 빛나는 바다는 이제 현실에서 절대 볼 수 없는 옛 모습을 그래도 갖추고 있었다.
현재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환경이 많이 오염되어 저런 것들을 보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며 감상에 젖어있을 때, 루카가 다가오기에 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루카. 저기 저 바다 좀 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에 내 팔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던 루카가 고개를 들어 푸르게 펼쳐진 바다에 시선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경훈이 녀석, 네티아 항구로 온다더니 왜 여태까지 안 오는 거야?
그렇게 한참을 바다 구경을 하고 있을 때, 익숙한 경훈의 음성이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여어~ 오래 기다렸냐?”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거리며 손을 흔드는 경훈이 녀석.
“좀 늦었네.”
“다른 애들은?”
“아직 안 왔어. 곧 올 거야.”
“그래? 아, 이것 봐. 2차 전직을 하고나서 공격 속도가 좀 더 향상됐어.”
경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경훈에게 두었다. 전투 자세를 취한 뒤 연신 주먹을 내뻗는 경훈, 하지만 공격 속도가 평범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아무래도 적안을 개안해서 그런 것 같군. 나는 적안을 해제한 뒤 다시 경훈에게 시선을 두었다.
슈슈슈슉.
상당히 빨라진 경훈의 주먹이 연신 대기를 갈랐다. 뭍가 아니 이제 2차 전직을 했으니 파이터인가? 아무튼 파이터가 되면서 새로운 스킬도 얻었으려나.
“어때? 상당히 빨라졌지?”
주먹질을 멈춘 경훈이 내게 물어왔다.
“응. 무지 빨라졌는데? 새로운 스킬 같은 것도 얻었겠지?”
“아니. 처음엔 새로운 스킬을 얻는 건 줄 알았는데, 기본 스킬이 강화되더라고. 뭐 나로선 대만족이지. 새로운 스킬에 또 적응을 하려면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이야.”
경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하긴, 새로운 스킬에 적응을 하려면 꽤나 귀찮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뭐야, 벌서 와 있었네?”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있을 때, 언제 나타났는지 강찬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데시카, 2차 전직 벌서 끝낸 거야?”
“응.”
“그런데 달라진 건 없다?”
“겉은 달라진 게 없어도 속은 완벽하게 바뀌었지. 신대륙에서 파이터의 힘을 보여주마. 흐흐.”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말하는 경훈에게서 왜 혁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느껴지는 걸까? 정말 이 순간만큼은 경훈이 아닌 혁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웃고 떠드는 동안 티아가 접속해 네티아 항구에 도착했고, 뒤이어 레온도 도착했다. 별로 안 그럴 것 같던 레온도 상당히 들뜬 눈치다.
“루샤크 씨만 오면 이제 아리시아로 떠나는 거지요? 기대되는 걸요?”
초롱초롱 빛나는 레온의 눈동자가 정말 장난감을 선물 받았을 때의 어린아이의 눈과 다를 게 없었다.
“푸흐흐.”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나왔으나 다행히도 레온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휴우, 큰 실례를 저지를 뻔했군. 그건 그렇고 혁이 녀석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나는 너무나도 답답한 마음에 혁에게 대화를 걸었다.
[루샤크 님에게 대화를 요청합니다.]
-어, 현성이냐?
대화요청을 하기가 무섭게 대답을 하는 혁.
“2차 전직시험은 끝났어?”
-아, 전직시험은 끝났는데…….
“그래? 어떻게 됐어? 합격이야?”
-내 말 좀 들어봐.
혁이 짜증내며 말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 합격은 했는데. 무슨 놈의 신성 왕국이 겉만 번지르르 해가지고. 월드타임으로 내일 오전 10시에 국왕에게 직접 작위를 받는다나 뭐래나.
“우와 진짜? 국왕에게 직접 작위를 받는다고?”
아니 대체 팔라딘이 어떤 직업이기에 여타의 직업과는 달리 저런 해택(?)까지 누리는 거지? 정말 내가 2차 전직을 할 때와는 딴판이군.
겨우 로시토에게 레인지로 임명한다는 말을 듣는 것으로 2차 전직을 한 나에 비하면 혁이 녀석은 아주 엄청난 호사를 누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비교되는 걸?
-후우. 아무튼 미안하게 됐다. 아 짜증나 죽겠네. 그럼 그렇게 전해줘. 대화 끊는다.
[루샤크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흐음. 이거 참 난감한데?”
“뭐야, 무슨 일인데?”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팔짱을 끼고 있던 경훈이 궁금한 듯 물어왔다.
“아니 그게, 방금 대화를 했는데, 루샤크가 2차 전직시험에 합격을 하긴 했는데, 또 다른 절차를 밟아서 2차 직업을 얻는 건가봐. 월드타임으로 내일 오전 11시에 신성 왕국의 국왕에게 직접 팔라딘 작위를 물려받아 전직을 한다나 뭐라나.”
“뭐어? 진짜 그런 게 있다고? 그 녀석 여자 구경하느냐고 거짓말하는 거 아냐?”
이건 아니라는 듯 반발을 해오는 경훈에게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상당히 짜증나는 말투로 말하던데?”
“앗. 그럼 진짜군.”
반발을 해오던 경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흐음 월드 타임으로 내일 오전 11시면 아직 시간이 꽤나 많이 남았는데, 그동안 레드 갈레온호나 구경시켜줘야겠군.
나는 손뼉을 쳐서 동료들의 시선을 내게로 집중시켰다. 갑자기 쏘아지는 여러 시선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자, 자. 그럼 신대륙으로 향하는 동안 타게 될 배를 공개하겠습니다.”
“배? 어디 있어? 우리가 타고 갈 신대륙행 배야?”
“물론. 신대륙까지 걸리는 시간은 월드타임으로 4일, 그 험난한 여정을 함께 할 배를 지금부터 공개하겠습니다.”
* * *
세릴리아 대륙의 신성 왕국.
시간은 흘러흘러 어느덧 월드타임 8시 50분이 되어있었다. 신성 왕국은 대 성당을 중심으로 경쾌한 나팔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이런 행사를 하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신성 왕국의 특별한 날이기도 했다.
바로 ‘팔라딘 작위 수여식’이 있는 아주 특별한 날이다. 수여식을 시작하기 전, 축제 행사로 모두들 웃고 떠드는 가운데 혼자 구석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인상을 쓰고 있는 이가 있었다.
삐죽삐죽 세운 갈색의 머리카락과 갈색의 눈동자. 평범한 생김새의 유저는 혁이었다. 배틀 해머를 들쳐 멘 자세로 쭈그리고 앉아 이맛살을 지그시 모으고 있는 혁.
‘후,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빌어먹을 수여식을 끝내고 티르 네티아로 돌아갈 수 있겠다.’
혁은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뜸 들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혁의 성미에 이런 식의 2차 전직이 맞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휴, 귀찮아.”
혁이 몸을 느릿하게 일으키며 말했다. 그렇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지를 후비고 있을 때였다.
“저… 혹시 루샤크 맞나요?”
‘뭐야, 또?’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는 음성이 들려온 곳에 시선을 돌린 혁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펴졌다.
“네, 맞습니다만.”
다가온 NPC가 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친절한 태도로 바꾸는 혁이었다. NPC가 말했다.
“이제 곧 팔라딘 작위 수여식이 시작될 것이니 저를 따라와 주세요.”
* * *
“우와, 이, 이게 정말 네가 만든 배야?”
레드 갈레온호를 본 모두가 경악어린 시선으로 레드 갈레온호와 나를 번갈아가며 보기 시작했다.
“못 믿겠으면 네프에게 직접 물어봐. 지금은 작업시간이 아니라 범선 제작팀이 이곳에 있진 않아서 증인이 없네.”
“아니, 못 믿는 건 아닌데, 와… 정말 대단하다. 이런 걸 다 만들고, 근데 출항은 언제 하는 거야?”
레드 갈레온호의 메인마스트를 보며 경훈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아까의 레온의 눈빛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저 눈빛. 배가 그렇게도 신기한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레드 갈레온호에 몸을 던졌다.
“루샤크가 티르 네티아에 도착하는 즉시 출발할 거야. 자, 모두 배에 타세요.”
그에 모두가 견고한 나무로 만들어진 갑판 위로 올라섰다. 일단 배에 타긴 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배는 누가 조종해?”
궁금한 듯 물어오는 티아의 질문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으악! 조선 스킬 말고도 항해술 스킬에 대해서도 알아봤어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계획이 뒤로 밀리는 거 아닌가?
그렇게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레온의 음성이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배의 조종을 제가 맡아도 될까요?”
“네?”
콧등을 타고 미끄러진 안경을 밀어 올리며 레온이 말했다.
“새로운 마법 수식 공부를 하면서 머리가 아플 때 가끔 심심풀이로 서적에 있는 책들을 읽는데, 항해술 스킬의 스킬 북이 있었기에 수련치를 올렸거든요.”
레온이 나의 구원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마다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레온이 이 배의 조종을 맡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레드 갈레온호의 내부를 빙둘러보았다. 모두들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시간은 흘러흘러 월드타임 오후 12시가 될 무렵이었다. 이미 레드 갈레온호는 조선소에서 빠져나와 네티아 항구의 선박에서 닻을 내려놓고 있었다.
범선치고 상당히 작은 레드 갈레온호. 네티아 항구의 다른 갈레온호와 비교하면 현저히 작은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뭐, 전에 나루터에 세워둔 나룻배보다 훨씬 더 컸지만.
혁을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강찬과 경훈은 배에서 내가 만들어준 수제 낚싯대로 낚시를 즐기고 있었고, 강찬과 경훈의 곁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레온은 아래층의 서적에서 마법수식 계산 공부를 하고 있었고(정말 징하다. 공부가 그렇게 좋은가?) 티아는 네티아 항구 근처의 식료품점에서 사온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나는 신대륙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기대 반 걱정 반인 상태다. 사형들이 나를 본다면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일까. 신대륙에 존재하는 초인들은 과연 몇 명일까. 몬스터들은 이곳에 비해 훨씬 더 강하다고 했는데, 사실일까.
그렇게 걱정을 하고 있는 도중 혁에게 대화요청이 들어왔다.
[루샤크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승인.”
-야 현성아, 드디어 수여식이 끝났다. 흐흐.
“수여식?”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 혁이 다시 말했다.
-2차 전직이 끝났다고. 이제 이곳에서 티르 네티아로 가기만 하면 돼. 마차 몇 번 갈아타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나는 이어진 혁의 말에 갑자기 궁금증이 물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성 왕국에서는 티르 네티아 워프스크롤이 먹히지 않는 건가? 왜 그 먼 거리를 마차를 타고 힘들게 왔다 갔다 하는 건지.
“혁. 티르 네티아 워프스크롤 없어?”
-아차, 티르 네티아 워프스크롤이 있었지! 이런 젠장. 신성왕국으로 향하는 워프스크롤이 없던 터라 마차를 타고 이동했거든. 이런, 너무 급한 나머지 그 사소한 것까지 잊고 있었어. 지금 어디야?
에휴,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그 편리한 워프스크롤을 잊고 있었을까.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내저으며 말했다.
“여기 지금 네티아 항구에 오른쪽 끝자락에 선박인데, 거기로 와.”
-뭐야 그건 또. 알겠다.
[루샤크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뭐야, 지 할 말만 딱 하고 끊는 건가? 나는 출발하기 전에 여분의 화살이 얼마나 남았는지 재고를 확인하기 위해 아이템 창을 열었다.
파밧!
“으흠. 화살통 여분 3통 중에 2통은 가득 차 있고, 나머지 한 통은 거의 바닥났구먼. 지금 차고 있는 화살통에는… 익 신대륙에 간다면 화살을 더 제작해야겠어.”
그렇게 아이템 창을 살펴보고 있을 때, 선박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뭐야. 여기 있다더니.”
나는 배에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그런데 저게 정말 혁 맞나 싶을 정도로 혁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녀석은 후줄근한 천옷에서 은빛 성기사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풀레이트 메일과는 다른 그런 갑주였다. 물론 적안을 개안했기에 이 높이에서도 자세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가슴팍에 새겨진 문양은 팔라딘임을 상징하는 문양이겠지? 나는 손을 뻗어 흔들었다.
“어이~ 여기야. 얼른 타!”
“헉. 뭐야? 이 배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혁의 시선이 내게 향했고 배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물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얘들아, 루샤크가 지금 막 도착했어.”
나는 고래를 돌려 갑판위에 있는 녀석들에게 소리쳤다.
“정말? 일찍 왔네.”
물론 내 말에 반응을 보이는 것은 티아밖에 없었다. 강찬과 경훈은 서로 낚아 올린 물고기가 더 크다며 티격태격 학 있었고, 루카는 엎드려서 귀만 쫑긋해 보일 뿐이었다.
“크하하. 내가 돌아왔다. 팔라딘이 되어서!”
갑판위로 올라선 혁이 두 먹을 허리춤에 갖다 대고 거만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강찬과 경훈은 티격태격하느라 혁을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푸하하. 왜 이렇게 웃긴 건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혁은 잘났다고 혼자 듣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자랑을 하고 있었고, 강찬과 경훈은 그것을 깡그리 무시한채(아마 못들은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물고기가 잘났다며 소리치고 있었다.
낚아 올린 물고기를 내게 보여주며 강찬이 말했다.
“레드, 이 물고기가 저 녀석 물고기보다 크지 않아? 얼레? 루샤크 넌 언제 왔냐?”
이제야 혁을 봤는지 강찬이 언제 왔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강찬을 뒤따라온 경훈이 혁을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혁의 용모에 놀란 것 같았다.
“이야, 옷이 날개라더니, 이런 추남도 이렇게 입으니까 인물이 살아나는데?”
“어딜 봐서 추남이야, 이 잘생긴 얼굴에 대고.”
푸하하. 내가 볼 땐 둘 다 아니다. 혁은 결코 추남으로 볼 정도로 못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잘생긴 건 절.대.로 아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그런 얼굴이었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위에서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고 있을 때, 갑판 아래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레온이 올라왔다.
“루샤크 씨가 오셨군요. 레드 군. 이제 출발할 건가요?”
“좋아요. 자, 이 배의 선장은 나다. 우하하. 카이루, 닺을 올려! 그리고 티아! 묶인 돛을 풀어줘. 그래야 배가 출항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레온, 잘 부탁드려요.”
강찬은 즉시 들고 있던 물고기를 양동이게 처박아두곤 닻을 올리기 시작했고, 엘프인 티아는 가볍게 메인마스트 위로 올라가 묶인 돛을 풀었다. 경훈은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 여태 낚아 올린 물고기를 살펴보았고. 그렇게 배가 출항을 하려고 할 때였다.
“기다려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는 음서. 리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고개를 갸우뚱 학 있을 때, 레온이 말해다.
“앗, 리아?”
그에 강찬은 끌어올리던 닻을 놓았다. 그에 서서히 출항하던 배가 우뚝 멈춰 섰다. 으흠, 리아도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리아가 합류하게 된다면 티아에게 좋겠지? 같이 신대륙으로 떠나는 녀석들이 모두 남자니까.
배가 멈춰선 사이 리아도 배에 탑승을 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출항을 할 수 있게 되었군.
리아가 탑승하자 강찬은 급히 닻을 끌어올렸고 배는 부는 바람을 타고 서서히 출항을 하기 시작했다. 레온이 키를 북서쪽에 놓자 배는 조용히 바람을 타고 신대륙을 향해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레드 갈레온호를 타고 바다를 달린 지 어느덧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물론 월드타임 3일이다). 이제 하루만 더 달리면 말로만 듣던 신대륙 ‘아리사아’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있던 세릴리아 대륙과는 완전히 다른 신대륙.
앞으로 하루만 더 있으면 도착하게 되는 신대륙을 떠올리자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으흐흐. 기대된다.
3일간의 긴 여정을 겪으면서 역시 바다가 위험하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씨 서펜트(깊은 바다에 서식하는 거대한 바다뱀 몬스터)와 같은 거대 해양 몬스터들의 습격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나타날 때마나 레온의 활약이 돋보였고, 멀리 쫓아낼 수 있었다.
처음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조건 화살을 쏘아댔는데, 레온이 라이트닝 계열의 마법을 작렬하자 씨 서펜트는 바다 속으로 급히 숨어버렸다.
위협적인 것은 해양 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가끔 나타나는 해적들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처음엔 무턱대고 대포만 쏘는 멍청한 녀석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녀석들은 지능적으로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돛에 구멍을 내기 위해 수십, 수백 발의 화살을 쏘아 보냈고, 난생처음 애로우 레인과 같은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 물론 레온의 마법과 티아의 바람의 정령이 화살을 완벽하게 차단했고, 레온의 마법으로 해적들의 배를 침몰시킬 수 있었다.
아리시아에 가까워질수록 현실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3일간 고생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간만에 온몸으로 만끽하는 휴식.
배가 고플 땐 낚아 올린 해산물로 요리를 해(이건 리아의 몫이었다. 미궁에서 요리를 하던 때보다 훨씬 더 발전한 요리 스킬!)먹었고, 모두들 모여 웃고 떠들다보면 시간이 금방금방 지나갔다.
이제 하루만 더 달리면 신대륙 아리시아에 도착하게 된다. 뱃머리 쪽 갑판에 이렇게 홀로 가만히 서서 지평선 끝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오빠, 혼자 여기서 뭐해?”
티아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티아를 보며 빙긋 웃어주었다.
“응, 신대륙에서 뭘 하지 생각 중이었어.”
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옆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에 나는 시선을 저 멀리 펼쳐진 지평선에 던졌다. 티아 하곤 이렇게 말없이 같이 있어도 마냥 좋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밥 많~이 먹었냐?”
“응.”
“살 많~이 찌겠다.”
“뭐?! 아니거든!”
“뭘 아니야, 엄청 먹더만.”
“쳇.”
티아가 삐친 듯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다시 그렇게 말없이 있을 때였다. 바다 밑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가싶더니 이내 커다란 뱀 대가리가 불쑥 튀어 나왔다.
촤아아!
“으앗, 뭐, 뭐야?!”
“씨 서펜트야.”
나는 얼른 티아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났다. 원래 이 녀석들의 행동패턴이라면 배 밑을 공격하는 것인데, 이 녀석은 좀 머리가 좋지 않나보다.
씨 서펜트와 거리를 둔 나는 등에 둘러 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집어 들고 외쳤다.
“씨 서펜트다!”
그에 대 중앙의 갑판에 있던 강찬과 경훈, 혁과 레온이 급히 뱃머리 가판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라이트닝 스피어(Lightning Spear).”
레온의 주문영창이 이어짐과 동시에 형성된 커다란 전격의 창이 씨 서펜트를 향해 쏘아졌다.
콰르릉!
극심한 전기충격에 움찔하던 씨 서펜트. 나는 즉시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고 화살을 꺼내들곤 씨 서펜트의 이마에 활을 쏘았다.
쐐애액.
쏘아진 붉은 섬광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씨 서펜트를 향해 쏘아졌다.
푸욱.
질긴 씨 서펜트의 가죽을 썩은 두부 뚫듯 가볍게 관통한 화살. 뇌를 파괴당한 씨 서펜트는 그대로 거칠게 바다 속으로 쑤셔 박혔다. 레온의 라이트닝 계열 마법이 아니었으면 이런 틈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었으므로 나는 레온에게 목례를 했고 씨 서펜트가 바다 속으로 처박히자 모두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티아는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사람이 너무 깜짝 놀라게 되면 이렇게까지 되는구나. 나는 고정된 활시위를 푼 뒤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둘러메고 티아를 부축해 아래층으로 향했다.
“휴우, 깜짝 놀랐어.”
흉측하게 생긴 트롤이나 오크 같은 몬스터를 아랑곳하지 않고 헤쳐 나가던 티아도 뱀만큼은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 같았다. 씨 서펜트를 보고 놀라 멍해진 것을 보니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지금껏 씨 서펜트와 마주칠 때마다 이랬으니까.
아래층으로 내려온 나와 티아는 좁은 통로를 지나 티아와 리아가 쓰는 작은 침실의 문의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대었다. 아니, 잠깐. 리아가 갑판 위에 없는 걸 보니 여기 있는 것 같은데, 노크를 해야겠군.
똑똑.
“들어오세요.”
역시 내 예상대로 리아가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티아를 부축했다.
“앗? 티아. 레드, 또 씨 서펜트가 나타났나요?”
침실을 정리하던 리아가 화들짝 놀라 달려오며 소리쳤다.
“네. 씨 서펜트가 갑자기 나타나서 상당히 놀란 것 같아요.”
“그래요? 배의 흔들림이 없어서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리 눕히세요.”
“아냐, 괜찮아요.”
“그래도 여기 앉아서 좀 쉬어요.”
나는 티아를 부축해 침대에 눕히는 리아를 보곤 침실을 나와 갑판 위로 향했다.
“레드.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신대륙에 도착하게 됩니다.”
갑판 위에 막 올라 섰을 때, 키를 잡고 있던 레온이 말했다.
“와, 드디어 신대륙에 첫발을 딛게 되는군요.”
“하하, 네.”
레온이 빙긋 웃어보였다. 나는 레온을 뒤로 한 채 지루한 듯 엎드려 있는 루카에게 다가갔다. 나를 보곤 엎드린 상태에서 꼬리를 느릿하게 흔드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자 루카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오, 올라왔네. 레드, 이제 곧 있으면 신대륙에 도착한대.”
“응. 나오면서 레온에게 들었어.”
나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아, 바다낚시도 매일 하니까 질린다.”
“그래도 금방 낚은 걸로 회 떠먹으면 맛있잖아.”
경훈의 말에 혁이 반박을 하며 낚시 줄을 힘껏 당겼다. 나도 녀석들 사이에 끼어 낚시를 하는 사이, 신대륙에 가까워졌는지 바다가 잔잔해졌고 이내 낯선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 육지다!”
혁이 들고 있던 낚싯대를 팽개치며 뱃머리로 달려갔다. 그에 강찬과 경훈도 덩달아 낚싯대를 팽개치고 뱃머리를 향해 달렸다. 무슨 어린 애들도 아니고 쪼르르 달려가는 건 뭘까.
이내 레드 갈레온호는 신대륙 아리시아에 도착했다. 그런데 신대륙치고 너무 발전이 안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선박은커녕 나루터조착 없이 그저 모래사장만 넓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레오이 신대륙에 도착했음을 알리자 모두들 배에서 내렸고, 새하얗게 펼쳐진 모래사장을 밟았다. 겉보기엔 세릴리아 대륙과는 별다른 것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어라? 저기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숲이네? 이곳 원주민들이 살 것 같은데?”
경훈이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에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원주민이라… 경훈이 내뱉은 말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원주민이 있다면 이곳 원주민들은 과연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를 본다면 반겨줄까, 아니면 공격을 할까?
“흐흐흐, 기대되는 걸? 가보자. 이리와, 루카!”
나는 경훈이 손가락질 했던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의 나무가 울창한 숲으로 달렸다.
“어엇, 같이 가!”
그에 경훈이 소리치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이거, 신대륙은 참 재밌을 것 같은데?
* * *
신대륙 아리시아의 동남쪽의 끝자락에 위치한 레디안 숲의 이름 없는 작은 화전민 마을. 본래 화전민 마을은 나라의 손길이 닿지 않는 동떠어진 곳에서 소수의 부족이 도란도란 살아가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하지만 가끔씩은 예외가 있는 법.
“흐흑. 할아버지…….”
“제, 제리코. 어, 어서 달아나거라. 으윽…….”
“할아버지, 할아버지!”
등에 대여섯 발의 화살이 박힌 채 쓰러진 노인을 흔들며 제리코라는 소년이 소리쳤다. 열세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반짝이는 금발과 사파이어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평소에 사랑을 많이 받았을 법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지금 제리코의 둔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악!”
“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 것일까? 의문은 이어진 제리코의 할아버지의 말에서 서서히 베일을 벗었다.
"제, 제리코, 오크 녀석들의 손아귀에 잡힌다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죽는다. 하, 할아비는 곧 뒤쫓아 갈 테니 너, 너라도 멀리 도망가거라.“
“거짓말! 이런 몸으로 어떻게 뒤쫓아 온다는 거예요! 할아버지, 얼른 일어나세요!”
노인의 말에 제리코가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며 노인을 흔들어댔다. 이미 주변은 쑥대밭이 된 뒤였다. 150센티미터의 땅딸막한 체구에 우락부락한 몸집을 가진 유사인종인 오크들에 의해 이름 없는 작은 화전민 마을이 쑥대밭이 된 것이다.
“까악!”
오크의 글레이브가 휘둘러지자 이제 갓 4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의 머리가 터져나갔고 쏟아지는 클레이브 세례에 온몸이 난자당했다. 소녀의 부모는 이미 오크들의 손에 살해당한 뒤였다.
오크란 종족은 그 정도로 호전적이며 잔인했다. 포로는 절대 살려두지 않는 오크들의 손아귀에 잡히면 살아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할아버…지…….”
“하, 할아비 말 안 들을 것이냐! 어서 마을 후문으로 달아나 거라! 후문의 오, 오솔길을 따라 한 시간을 달리면 대피소가 있을 것이다.”
“으아앙!”
제리코가 비명을 지르듯 울며 마을 후문을 향해 뒤도 안 보고 내달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오크들에겐 그 어린 소년 한명조차도 놓아 줄 자비가 없었다.
“꼬마 녀석이 도망간다, 잡아랏! 취익!”
사력을 다해 도주하는 제리코의 뒤를 갑옷으로 무장한 오크전사 둘이 뒤쫓기 시작했다.
‘잡히면 끝장이다.’
후문을 통해 마을을 빠져나온 제리코는 사력을 다해 오솔길을 달렸다.
* * *
숲속엔 꼭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한 오솔길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20분가량 계속 달리기만 했더니 스태미나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도대체가 이놈의 오솔길은 끝이 안 보인다.”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에 뒤따라오던 경훈이 덩달아 주저앉았다.
“후… 20분을 달렸는데, 마을은커녕 사람 한 명도 보질 못했다. 다른 녀석들은 뒤쫓아 오고 있는 것 맞나?”
“그렇겠지. 휴우.”
나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치며 아이템 창에서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 마개를 따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와 나란히 달리던 루카는 전혀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신이나 꼬리를 흔들며 짖기 시작했다.
컹컹.
이렇게 주저앉아 산들산들 부는 바람을 만끽하고 있을 때, 뒤늦게 일행들이 도착했다.
“휴우. 너네는 지치지도 않냐? 뭐가 그렇게 좋다고 달려가, 달려가긴.”
혁이 투덜대며 말했다. 미안하다 이놈아.
“레드, 지금껏 오면서 사람 한 명도 보지 못했나요?”
이제 막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레온이 내게 물어왔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몸을 일으켰다. 신대륙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했더니 몬스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군. 이렇게 허탈해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오솔길엣 땅딸막한 것들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눈매를 좁혀 시선을 집중했다. 시야가 확보됨과 동시에 땅딸막한 키를 가진 꼬맹이 하나와 오크로 추측되는 몬스터 둘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오크들에게 쫓기는 것 같았다. 이걸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저 꼬맹이를 구해준 뒤, 이 근처에 마을이 있는지 캐봐야겠군.
“오케이. 한 건 할 수 있겠다. 모두들 여기서 기다려요.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물론 등에 둘러 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왼손으로 고쳐든 뒤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었다. 팽팽하게 고정된 활시위를 퉁기자 활시위의 맑은 음이 울려 퍼졌다.
“도와줘요!”
순식간에 소년, 오크들과의 거리가 좁혀졌고, 나와 눈이 마주친 소년이 소리쳤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선 뒤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었다.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오러 애로우를 끌어 올릴 필요도 없을 것 같군.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으니까.
쐐애액.
재빨리 활을 쏘자 화살은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한 마리 오크를 향해 쏘아졌다.
푸욱.
정확히 오크의 마빡에 틀어박힌 굵직한 화살. 그대로 대(大)자로 뻗어버린 오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언제 왔는지 내 뒤로 숨는 소년과 내 앞으로 다가온 오크. 검게 썩은 피딱지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더러운 글레이브를 움켜쥔 오크가 말했다.
“취익, 넌 어디서 나타난 인간이냐.”
“이 더러운 몬스터들! 우리 마을에서 당장 사라져!”
으앗! 귀청 떨어질 뻔했네. 오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년이 악을 썼다. 나는 징징대는 소년과 오크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마을에서 당장 사라지라니. 혹시 오크들이 침략이라도 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오크의 글레이브가 내 목을 향해 쇄도해 오는 것을 본 나는 즉시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휘둘러 글레이브를 쳐냈고, 오크와의 거리를 좁힌 뒤 몸을 회전시킴과 동시에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휘둘러 오크의 뺨을 후려갈겼다.
“보우어택!”
퍼억!
육중한 둔기에 맞았을 때나 날법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얼굴이 기괴하게 함몰된 오크가 비틀거렸다. 나는 주저 없이 활을 높이 치켜들고 오크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퍼억!
두개골이 박살남과 동시에 걸쭉한 뇌수가 새어나왔다. 휴우, 이제 이런 걸 하도 많이 봤더니 속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지도 않는군. 나는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다리가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쭈그리고 앉아 소년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물론 적안을 해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꼬마야, 무슨 일이 있던 거야?”
“형. 도와줘요…….”
내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소년. 그에 나는 차분하게 되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자세히 말해봐.”
“지금 시간이 없어요. 오크들이 마을로 쳐들어와서 쑥대밭을 만들어 놨어요. 얼른 가서 도와야 해요, 흑흑…….”
으어어. 어지럽다. 내 멱살을 잡고 이리저리 흔드는 꼬마 녀석. 생긴 것에 비해 히도 어지간히 세군.
“아, 꼬, 꼬마야. 알았으니까 그만 흔들어. 도와줄게. 너희 마을은 어디 있는 거야?”
이제야 소년이 내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것을 멈췄다. 휴우, 이거 골이 다 흔들리는구먼. 소년이 울먹이며 손가락을 뻗었다. 자신이 도망쳐오던 곳으로 뻗어진 손가락. 아무래도 저곳에 마을이 있는 것 같군.
나는 자리에서 이러나 숨을 폐부 가득히 채운 뒤 소리쳤다.
“루카아아!”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내 저 멀리서 새하얀 신형이 이곳으로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루카는 순식간에 이곳에 도착했고 루카를 본 소년은 기겁을 했다. 하긴, 이렇게 큰 늑대로 없으니까. 나는 소년을 번쩍 들어 올려 루카의 등에 태운 뒤 루카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그 전에 쪽지부터 전송해야겠군. 나는 메시지 창을 연 뒤 레온에게 보낼 쪽지를 작성했다.
[레온, 오솔길을 따라 오세요. 마을이 있는 곳을 알아냈는데. 위험에 처한 것 같아요.]
“전송.”
그렇게 쪽지를 전송한 뒤 나는 왼발로 루카의 허리를 슬쩍 건드렸고, 그에 루카가 오솔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 오솔길을 따라 가면 되는 거니?”
“네.”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자 이내 마을로 추측되는 곳을 볼 수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높이 치솟고 있었고,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크들의 습격을 받은 것 같군.
내가 마을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크들이 떠난 뒤였다.
루카의 등에서 내려온 소년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얼마나 서글프게 우는지 내 눈시울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특히 할아버지를 어찌나 부르던지 중원 채널에서 게임을 즐기고 계실 할아버지까지 떠오를 정도였다.
쑥대밭이 된 마을에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죽은 시체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포로를 잡아 끼니를 해결한다는 오크 녀석들, 시체의 상태를 보아 아무래도 몇몇은 이곳에서 잡아먹힌 것 같았다.
나는 통곡을 하는 소년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모르겠어요. 친구들과 잠시 토끼를 사냥하러 갔다 왔는데, 마을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소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게임이다. 이 소년은 NPC이고, 오크들도 NPC이다. 다만 세릴리아 대륙과는 달리 현실성이 과하게 부과된 곳인지라 이런 상황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곳의 역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 권리가 있는 것이 바로 나와 같은 유저. 같은 인간이니 왠지 남 일 같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도와주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꼬마야. 혹시 오크 녀석들의 영토가 어딘지 알아?”
“잘은 모르겠어요. 할아버지가 사냥을 나갈 때 너무 멀리 나가지 말라고 충고하신 적은 있어요. 오크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면 살아서 나오지 못 한다고.”
소년의 말에 나는 오크의 영역이 이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대번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년과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뒤늦게 레온 일행이 도착했다.
“으엑, 이게 뭐야. 시체 천지잖아.”
혁이 주책을 떨며 건들건들 다가오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레온의 물음에 나는 소년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나도 빼먹지 않고 모두에게 말했다. 그에 티아와 리아가 울먹이며 소년에게 다가가 다독여주었고, 혁이 극도로 흥분해 소리쳤다.
“그 말을 듣고서도 그냥 여기 가만히 있던 거야?! 이 녀석들 어디 있어 내가 그냥.”
“가만있어 봐, 루샤크. 네가 화를 낸다고 해서 이미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건 아니잖아.”
평소와는 달리 경훈이 침착하게 혁에게 말했다. 그에 혁도 어느 정도 흥분한 맘을 가라앉혔는지 아무 말 없이 씩씩거리며 묵묵히 서 있었다.
“꼬마야, 이름이 뭐야?”
“제리코에요.”
티아의 물음에 소년이 대답했다.
“나이는?”
“열네 살이요.”
열네 살치고 상당히 작은 신장을 가진 제리코. 뭐 내가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제리코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티아와 리아에게서 시선을 뗀 뒤 강찬과 레온, 경훈과 혁이 서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이 근처에 있는 오크들의 씨를 말려야지 화가 풀린 것 같은데, 다들 어때요?”
내 물음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할까요? 이곳 지리도 익혀둘 겸.”
“출발하죠.”
평소와는 달리 차갑게 대답하는 레온을 보며 나는 당황했다. 아무래도 오크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고 또 제리코가 당한 일 때문인지 레온도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리코에게 다가갔다.
“제리코. 어디로 가면 오크의 영역에 갈 수 있는 거야?”
“설마 오크의 영역에 들어가려고 하는 건 아니죠? 살아서 나오지 못한대요.”
이 녀석 완전 울보네. 또다시 제리코의 눈시울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에휴.
“형이 오크 따위에게 죽을 것 같아?”
“네? 아, 아뇨…….”
손에 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보여주며 제리코에게 묻자 제리코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래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오크 둘을 해치우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을 테니까.
나는 내 뒤에 서있는 레온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는 사람들도 다 형만큼 강해. 그러니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리코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도대체 왜죠?”
“응?”
“형들은 저를 오늘 알았고 아직 서로에 대해서 잘 몰라요. 그리고 형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어째서 목숨까지 걸면서 도와주는 거예요?”
음냐. 목숨을 건다라… 지금 사냥할 갈 몬스터는 끽해야 오크. 뭐 제리코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었기에 나는 차분히 말했다.
“같은 인간이잖아.”
짧게 대답한 나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이곳의 자리를 익혀둘 겸 몸이나 풀러 가보실까? 아차, 방향을 묻는 것을 깜빡했군. 나는 제리코를 내려다보았다.
“제리코.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되는 거야?”
“저기요.”
제리코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마을의 정문으로 보이는 작지 않은 문을 볼 수 있었다. 이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나 있었지만 대충 알아볼 수 있었다.
“가죠. 루카, 너도 따라와.”
나는 티아, 리아, 제리코를 뺀 모두와 함께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월드타임 4일간의 지루한 항해를 끝마치고 나서는 첫 사냥. 왠지 기대 되는 걸.
* * *
“제리코, 너 사냥을 할 때 어떤 무기를 쓰니?”
티아의 물음에 제리코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활이요.”
“어머, 활?”
리아가 당황한 척 묻자 제리코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어디 보여줄 수 있어?”
“네. 여기서 기다리세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불타버린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제리코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발걸음을 옮겨 까맣게 타버린 집 앞에 떨어진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화살통을 등에 둘러메고 자신의 키와 맞는 숏 보우를 들고 티아와 리아에게 달려왔다.
“이거에요. 헤헤.”
제리코의 입가엔 미소가 번져 있었지만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것일까. 애써 태연한 척하려는 눈빛이 역력했다.
‘가엾어라. 어린 나이에 가족들을 모두 잃고…….’
그런 제리코를 보자 티아의 두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티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리코. 혹시 정령을 본 적 있니?”
“아뇨. 본 적 없어요.”
그에 티아가 바람의 하급정령 실프를 소환했고, 제리코는 신기한 듯 손을 뻗어 실프를 건드렸다. 작은 요정과도 같은 실프가 그 손을 피하며 제리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리코는 이미 실프에게 완벽히 매료된 상태였다.
* * *
오크들의 영역엔 제리코의 말대로 많은 오크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원초적인 모습을 한 채 사슴을 날로 뜯어먹는 녀석부터 갑옷으로 무장한 녀석들까지. 세릴리아 대륙과는 달리 이곳에 있는 녀석들은 더욱 지능적으로 상황을 대처했다.
원초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아무런 공격도 못 하고 달아날 줄 알았건만, 손톱과 이빨로 공격을 하는 것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힘이 달린다 싶으면 협공을 해왔고, 그것도 먹히지 않는다 싶으면 주저 없이 도주했다.
물론 도주한 녀석들 중 살아남은 녀석은 없었다. 레온의 윈드 커퍼(Wind Cutter)에 목이 달아나거나, 내 화살에 맞아 죽었다.
원초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녀석들은 다른 녀석들에 비해 덩치가 좀 더 작았는데, 아무래도 새끼 오크인 것 같았다. 세릴리아 대륙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이곳 신대륙 아리시아에서는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오크의 영역에 있는 오크들을 섬멸시키며 숲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저 멀리 위치한 오크들의 본거지(?) 같은 것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두터운 중갑주와 시커멓게 물든 지저분한 글레이브를 들고 보초를 서고 있는 오크들이 있는 곳으로 보아 저곳에 오크들의 우두머리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취에엑!”
혁의 일격에 새끼 오크가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말은 새끼지 이미 머리털이 길게 늘어졌고, 날카로운 이빨이 불쑥 튀어나와 덩치만 작을 뿐, 도무지 새끼로 보이지 않았다.
“죽어라, 돼지야!”
퍼억.
새끼 오크의 비명소리를 들었는지, 보초를 서고 있던 오크들이 콧소리를 내며 이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침입자다, 취익!”
“취익, 사로잡아라! 쿠륵.”
달려오는 오크들을 바라보며 레온이 말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전에는 주문을 외워 캐스팅을 한 뒤 시동어를 외쳐야 발현되었던 파이어 볼을 이젠 그저 시동어만으로 발현시키는 레온.
레온의 주문영창이 이어짐과 동시에 배구공만 한 타오르는 구체가 형성되어 시전자의 주변을 빠르게 맴돌기 시작했다.
레온의 손짓에 타오르는 구체가 기염을 토해내며 다가오는 오크 전사 두 마리를 향해 쏘아졌다.
퍼펑!
순식간에 시커멓게 탄 제가 되어 널브러지는 오크 전사. 그에 본거지(?)에서는 글레이브와 카이트 실드, 두터운 중갑주로 무장한 오크 전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오크의 손에는 목이 잘린 인간의 수급이 들려 있었다. 머리 위로 그것을 빙빙 돌리는가 싶더니 이내 이쪽을 향해 던지는 오크. 전의를 상실시키기 위해 한 행동이었겠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왜냐면 그것이 나를 자극했고, 지금 상당히 화가 났으니까.
“이런 개자식들아!”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퀵 스텝을 건 뒤 오크들에게 몸을 날렸다. 여기저기서 찔러 들어오는 글레이브를 전부 회피한 뒤 활을 휘둘렀지만 녀석들은 강철 테로 뒤덮은 카이트 실드를 들어 완벽하게 내 공격을 차단하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백스텝을 밟아 거리를 두고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레드, 피하세요!”
레온의 음성이 귓전에 울려 퍼지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한 번 백스텝을 밟아 거리를 두었다.
“익스플로전!”
콰앙!
불의 속성을 한데모아 일시에 격발시키는 마법이 신대륙 아리시아에서 다시 한 번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폭발점 중심에 있던 오크들은 갈가리 찢어져 형태도 알아 볼 수 없게 되었고, 나머지 오크들은 허공에 높이 치솟았다 이내 맨땅에 고두박질 쳐졌다.
쏟아져 나왔던 오크들이 전멸되는 것을 본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크들의 본거지(?)로 몸을 던졌다.
강찬과 혁, 그리고 경훈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가 지금껏 욕 한 번 하지 않았던 현성이 욕을 하다니…….
하지만 레온의 익스플로전에 의해 들려온 파공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경훈이 소리쳤다.
“아앗, 레드! 혼자 들어가면 어떡해! 패스트 워커!”
경훈이 보조스킬을 외치며 현성을 뒤따랐다. 그에 강찬과 혁, 레온도 질세라 경훈을 뒤따랐다.
“세상에…….”
입구에 들어선 경훈은 입을 떡 벌리고 서 있었다. 현성은 미친 듯이 붉은 섬광을 쏘아내고 있었고, 오크들은 그것에 맞는 족족 픽픽 쓰러졌다. 두터운 타워실드도 종잇장처럼 꿰뚫렸고, 갑옷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현성이 날뛰고 있을 때였다.
“감히 인간 주제에 이곳에서 날뛰는 것이냐!”
어디선가 들려오는 호통. 그에 날뛰던 현성의 시선이 호통이 들려온 방향으로 옮겨졌다. 그곳엔 오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간과 같은 신장을 가진 우락부락한 오크가 검은 털을 가진 기이한 생김새를 가진 늑대를 타고 있었다.
우두머리 뒤로는 우두머리가 타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갈색 털을 가진 늑대를 탄 울프 라이더들이 깨끗하게 날이 선 글레이브와 카이트 실드를 들고 서 있었다.
드디어 우두머리께서 행차하셨군. 잠시 흥분해 날뛰는 사이 나타났나보다.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너희들이지? 화전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공격한 것이.”
“그렇다. 뭐가 잘못됐나?”
당연하단 듯이 대답하는 오크 우두머리를 보자 욱했지만 사력을 다해 속을 추스른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당연히 잘못됐지. 무슨 이유에서 화전민들을 건드린 것이냐?”
“간만에 고기를 즐기고 싶어 그랬던 것이다. 이곳은 내 영토. 내 영토 안에 서식하는 인간을 잡아먹은 것이 도대체 어디가 잘못됐다는 것이냐?”
오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얼핏 맞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는 엄연한 인간. 당연히 인간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난 재빨리 꺼내든 화살의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활시위를 벗어난 붉은 섬광이 오크 우두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허억!”
급히 회피동작을 취했지만, 이미 오크 우두머리의 한쪽 팔이 날아간 뒤였다.
“크아악!”
우두머리가 비명을 지르자 뒤로 대기하고 있던 울프 라이더들이 붓물 새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에 지켜보던 강찬과 경훈, 혁과 레온이 합세해 공격을 해나갔다.
이어진 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우린 모두 2차 전직을 한 상태(레온은 모르겠지만). 오크들을 사냥하는 동안 혁의 활약이 돋보였다. 팔라딘으로 전직하기 전과는 다른 날카로운 공격과 빠른 몸놀림.
배틀 해머에 적중된 오크들은 단 일격에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그렇게 순식간에 오크들의 영역을 초토화시키자 속이 후련 해지는 걸 느꼈다.
“호오. 경험치가 꽤나 짭짤한데? 근데 세릴리아 대륙의 오크들에 비하면 이 녀석들은 무지 강한데? 상대하는데 꽤 애를 먹었어. 오크 따위에게 발경을 가미한 공격을 하게 될 줄이야.” 경훈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루샤크. 너 2차 전직하기 전이랑 너무 다른데?”
강찬의 말에 혁이 등에 배틀 해머를 둘러메며 말했다.
“핫핫핫! 이것이 바로 팔라딘이란 것이다.”
“저런 똘추자식.”
“뭐?!”
혁의 자뻑에 경훈의 태클이 이어졌고, 혁은 즉간 반응을 보였다. 혁과 경훈이 티격태격 하고 있을 때, 레온이 말했다.
“자, 이제 마을로 돌아갑시다.”
레온의 음성은 평소와 같이 되돌아온 후였다.
제22장 새로운 동료
“정말로 오크들을 전부 죽이고 왔어요?!”
제리코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제리코의 어깨에 실프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아 지금껏 실프와 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리코가 말했다.
“오크들을 전부 죽인다고 해서 죽은 마을 사람들이 전부 살아 돌아오진 않지만… 고마워요.”
제리코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벌서 체념한 듯 아까의 울상이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영리한 만큼 체념도 빠른 건가?
그때 티아가 놀란 듯 말했다.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는 나가봐야겠어. 얼른 저녁 준비를 해야 해서요. 먼저 가볼게요. 로그아웃!”
나는 티아가 서 있던 자리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에 리아도 덩달아 소리쳤다.
“맞아. 오늘은 오빠가 식사 당번이네?”
“아차.”
“헤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요, 모두들. 저도 이만 나가볼게요. 내일 오전 10시에 여기서 만나요. 로그아웃!”
시선을 리아가 서 있던 곳에 옮긴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티아와 리아가 이렇게 막가파였다니.
“그러고 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됐네. 아침에 접속한 것 같은데 말이야. 모두 여기까지만 하죠? 나가면 뱃속에서 밥 달라고 날 리가 나겠구먼.”
경훈이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고, 경훈, 혁, 강찬 순서대로 로그아웃을 했다. 하지만 레온은 로그아웃을 하지 않았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우리가 나가게 되면 제리코는 이곳에 혼자 남게 된다. 이 어린 녀석이 혼자 남아 뭘 하겠는가. 밥은 잘 챙겨 먹을까? 그리고 밤이 되면 다른 몬스터들이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일행들을 보며 제리코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온이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레드도 제리코가 걱정되나요?”
“네. 이 어린 녀석을 혼자 남겨두고 갈 순 없잖아요.”
“그렇다면 이 방법을 쓰는 건 어때요?”
“어떤 방법이요?”
나는 레온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레온이 말했다.
“제리코를 가디언으로 삼는 거예요. 이곳 신대륙으로 오기 전, 홈페이지에서 본 것인데 NPC들과의 호감도가 극에 달하면 회유를 할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가디언이라… 제리코를 가디언으로 삼게 되면 내가 로그아웃을 하게 되었을 때, 이 녀석도 같이 로그아웃이 되는 건가? 으아 복잡하다.
“게다가 제리코 정도의 전투력이라면… 회유하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겠군요. 게다가 레드에 대한 호감도도 어느 정도 있을 테니까요.”
레온의 말을 들어보니 왠지 맞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녀석을 가디언으로 삼게 되면 내가 접속을 하지 않게 된다면 이곳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분명 게임이긴 했지만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가상생명체. 게다가 뛰어난 인공지능이 부여되어 있는지라 실제 사람과도 다를 게 없었다.
자유를 빼앗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에 나는 섣불리 결정을 하지 못했다.
“저… 레온. 아무래도 가디언으로 삼게 되면 제리코가 자유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제가 접속하지 않으면 이곳에 존재하지 않게 되니까요.”
그에 레온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시 풀어줄 수도 있으니까, 안신해도 좋아요.”
“풀어준다고 해도, 저 힘도 없는 어린 녀석을…….”
“제리코가 등에 둘러멘 무기… 익숙하지 않나요?”
레온의 말에 나는 시선을 제리코의 등에 옮겼다. 숏 보우. 아, 이제야 레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가디언으로 있는 동안 활을 잘 다룰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건가?
“그리고 가디언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킬을 복사해줄 수도 있지요. 물론 수련치는 0%부터 시작을 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활을 쓸 줄 아는 것으로 보아 제리코는 이미 보우 마스터리(Bow Mastery)스킬을 획득하고 있는 것 같아요. 레드가 가지고 있는 퀵 스텝이라던가, 백스텝, 보우어택 등 다른 스킬을 복사해준다면 나머지는 제리코가 알아서 할 거에요.”
레온의 말뜻을 완벽하게 알아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리코에게 다가갔다.
“제리코. 너도 활을 쓰는구나?”
“네.”
“너 활 좀 쏘니?”
“아, 아뇨. 아직 많이 서툴러요. 배운 지 얼마 안 돼서요. 근데, 형. 아까 오크를 죽일 때 유심히 살펴봤는데, 그런 궁술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으흠. 생각보다 쉽게 넘어오는군. 아무래도 자신을 도와준 것에 대한 호감도가 증가한 것에 자신이 쓰는 무기를 잘 다루는 것에 대한 호감도까지 덮어 쓴 것 같았다.
이제 결론만 말하면 되겠군.
“너도 활을 잘 쏘고 싶지?”
그에 제리코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갈 곳도 없을 덴데, 우리랑 잠시 동행하지 않을래?”
“동행이요?”
제리코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래. 같이 여행을 하자는 거지. 여행을 하는 동안 활을 잘 쏘는 법도 알려줄게. 어때?”
“음…….”
내 제안이 맘에 든 것일까? 잠시 고민을 하던 제리코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NPC제리코'를 회유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 ’NP제리코'의 상태 목록이 상태 창에 추가됩니다.]
“좋아. 상태 창, 오픈!”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레인지 마스터
Lv. 72
생명력(HP). 700
마나(MP). 490
스태미나(SP). 1,200(배고픔 수치 0%/ 갈증 0%)
힘 137
체력 65
민첩 179(+30)
손재주 520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10)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280~400
방어력 10(+12)
마법방어력 2(+10)
남은 스탯 포인트: 50
바람(백호)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8.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7.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7. 친화력 100%
[상세정보]
가디언(제리코) Lv. 3 호감도 100%
[상세정보]
역시 정령들과 계약을 했을 때와 동일하게 제리코의 상태까지 추가되어 있었다. 그런데 레벨 3이라니, 이거 순 맹탕인데? 상세정보를 손가락으로 누르자 제리코의 상세정보가 새로 생성된 작은 입체 창을 통해 공개되었다.
[이름] 제리코 프리우스
[직업] 없음
[계급] 화전민
[호칭] 없음
[Lv.] 3
생명력(HP). 알 수 없음
마나(MP). 알 수 없음
건강산태 양호
으흠 스탯은 표기되지 않는군. 그러고 보니 몬스터 침공 이벤트를 하면서 레벨업 한 뒤 스탯 포인트를 분배하지 않았군. 나는 얼른 스탯 포인트를 분배한 뒤 레온을 바라보았다.
“성공입니다.”
“오, 축하드립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봐야겠네요. 리아가 난리를 칠 테니. 그럼, 로그아웃!”
레온도 덩달아 로그아웃을 했으니 이제 제리코와 나만 남은 셈이군. 나는 제리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리코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라선 안 된다?”
“네.”
“아, 그리고 편하게 말 놔. 내 이름은 레드 파운이야. 레드라고 부르면 돼.”
“응, 알았어. 레드 형!”
“자, 그럼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위잉.
나는 전원이 꺼진 헤드셋을 벗어 머리맡의 고리에 걸고 게임베드에서 일어났다. 후, 오래도 했군. 뱃속에서 밥 달라고 요동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주인님, 공복기간이 상당히 길었습니다. 빨리 식사를 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내 예상대로 컴이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알았어.”
나는 짧게 대답을 하고 게임베드에서 일어났다.
위잉. 철컥.
캡슐 밖으로 나오자 게임기기가 자동으로 닫혔고, 나는 주린 배를 부여잡고 부엌으로 향했다.
“으하~ 배부르다.”
여느 때와 같이 인스턴트식품으로 배를 채운 뒤 거시로 나와 소파에 몸을 묻었다. 히야. 정말 편하군.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탁자위에 다리르 올려 두며 말했다.
“컴, 멀티비전 좀 켜서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에 맞춰줘.”
「네, 알겠습니다.」
나는 소파 위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들고 신대륙에 대한 자료를 쭉 훑어보았다.
“이런, 가다 도중에 다른 경로로 새어버렸네?”
나는 신대륙에 대한 정보를 쭉 훑어보던 도중, 항해에 오차가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신대륙 아리시아에 도착하게 되면 바인마하 왕국의 케리안 항구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데, 방향을 잘못 잡은 탓인지 약간의 오차로 인해 바인마하 왕국과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게 된 것이었다.
“흐음. 원래 도착지가 바인마하 왕국인데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도착하게 되었군.”
나와 일행이 도착한 곳은 몬스터의 숲으로도 불리는 레디안 숲이었다. 으흠. 바인마하 왕국까지 가는 지리까지 살펴봐야겠는 걸?
레디안 숲은 낮에는 보기 드문 몬스터들이 밤만 되면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나와 숲에서 방황을 한다고 한다. 으흠, 아깐 낮이라 오크들밖에 볼 수 없었던 것이로군. 아무래도 바인마하 왕국까지의 여정이 그리 평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바인마하 왕국을 향하면서 제리코에게 내 스킬을 복사해주고 또 그것을 익숙하게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부터 여러 가지해야 할 일이 많군.
레디안 산에 대한 정보를 모두 습득하고 이번엔 우리가 향해야 할 바인마하 왕국에 대한 정보를 훑어보았다. 이 왕국은 근처의 다른 왕국들과 원활한 교류를 하고 있어 상당히 부유하고 살기 좋은 왕국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귀족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귀족 밑의 평민들과 천민들, 화전민들은 노동을 통해 하루하루를 힘겹게 먹고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별로 신경 쓸 것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인마하 왕국에 한 명의 초인이 있다는 글귀가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 초인은 유저가 아닌 NPC. 바인마하 왕국의 기사단에서 뽑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이라는 소개 글과 함께 초인에 대한 정보도 어느 정도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바인마하에 가게 된다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난 뒤, 이 초인을 꺾어야하는 거군.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잔뜩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컴에게 멀티비전을 끄라고 지시했고, 내 방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휴우, 하루 종일 게임만 했더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군. 나는 침대에 대(大)자로 뻗은 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72.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후~ 드디어 접속했군. 모두들 있으려나. 안녕 루카, 제리코.”
“형!”
접속과 동시에 소환된 루카와 제리코가 나를 반겼고, 나는 손을 흔들며 인사해주었다.
“얼레? 내가 제일 일찍 접속한 줄 알았더니 모두들 와 있었네.”
나는 이미 모여 있는 일행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네가 제일 늦었다, 레드.”
“뭐야, 아제 어디로 가는 거야?”
기다렸단 듯이 경훈과 혁이 동시에 외쳤다. 이 녀석들도 어제의 나처럼 상당히 들뜬 모양이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두 녀석들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으흠.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나는 먼저 신대륙에 도착지점이 잘못되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설명해나기 시작했다.
먼저 약간의 오차로 인해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레온이 상당히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찌됐건 레온 덕에 신대륙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바인마하 왕국과 상당히 동떨어진 곳인데, 이 숲의 이름은 레디안 숲이라고 해. 아직은 낮이라 아무렇지 않지만, 밤만 되면 몬스터들이 판을 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상당히 주의를 해야 해. 그렇지 제리코?”
“응.”
제리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바인 머시깽이 왕국까지 가야 한다 이 말이지?”
“그렇지.”
정확하게 알아들은 경훈의 말에 나는 손뼉을 치며 맞장구쳐주었다.
“자, 어서 출발 하죠!”
레온이 소리쳤다. 근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지? 갑자기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바인마하 왕국과 상당히 동떨어진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얼른 제리코와 눈높이를 맞춘 뒤 작게 속사였다.
“제리코, 혹시 바인마하 왕국이라고 알아?”
“응. 옛날에 할아버지가 살던 곳이라고 하셨어.”
“그럼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알아?”
“저쪽.”
제리코가 손을 뻗어 수풀이 무성한 숲을 가리켰다. 확실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제리코가 거짓말을 할 녀석이 아니었기에 나는 믿어보길 했다. 난 얼른 일어나 제리코가 가리킨 수풀이 무성한 숲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자, 이쪽으로!”
“뭐야, 거기가 확실한 것 맞아? 왜 하필이면 그런 곳이야?”
혁이 투덜대며 따라왔다. 나는 수풀을 해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세릴리아 대륙과는 전혀 다른 깊은 숲. 이끼 낀 바위가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었고 커다란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숲이 워낙 험했기 때문에 이동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건 그렇고, 제리코 녀석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왜소한 체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체력 면에서는 전혀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훨씬 더 뛰어나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서서히 날이 지고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깨르르, 깨르르.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 숲은 밤만 되면 몬스터가 판을 친다는데, 날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숲은 한 치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 져버렸다.
“적안(赤眼).”
나는 적안을 개안했다. 적안을 개안하게 되면 이런 어두운 곳도 대낮처럼(사실 대낮처럼은 아니지만)사물을 구분할 수 있으니까.
“오빠. 이제 몬스터들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어.”
티아가 말했다. 세릴리아 대륙과는 달리 현실성이 부여된 곳 인지라(캐릭터의 능력은 전혀 달라지지 않지만)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다행히도 나와 나란히 걷던 제리코가 그 방면(?)에서는 뛰어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밤에는 땅이 평평하고 움직이기 편한 곳에서 시간교대로 서로 보초를 서며 날을 새야 해요.”
“그래?”
제리코의 말에 나는 주변을 빙 둘러 보았다. 마침 그나마 지면이 평평한 곳이 있었다. 나와 일행은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이내 모닥불을 피웠다. 아직까지 피로도의 수치가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티아와 리아, 제리코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이른 뒤, 레온, 강찬, 경훈, 혁과 자리를 지켰다.
레온의 라이트(Light)에 의해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게 보초를 서고 있는 사이 지면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고, 이내 커다란 신장을 가진 실루엣이 모습을 나타냈다. 짙은 청록색의 피부에 3미터에 달하는 신장을 가진 몬스터, 트롤이었다.
쿠오오오!
어이쿠 귀청이야. 녀석이 포효를 내지르는 바람에 잠들었던 제리코와 티아, 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트롤은 처음 보는 것이었는지, 제리코는 겁에 질려 담요를 뒤집어쓰고 벌벌 떨고 있었다.
“제가 할게요.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그리곤 등에 둘러메고 있던 활을 왼손으로 집어든 뒤 활을 힘껏 휘둘렀다.
“보우어택!”
퍼억!
쿼어억!
분명 내가 노린 곳은 머리였지만, 이 녀석이 피하는 바람에 어깨가 박살이 났다. 뛰어난 재생력으로 금방 회복을 하기 때문에 상당히 귀찮은 녀석.
나는 백스텝을 밟아 트롤과의 거리를 둔 뒤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트롤에게 쏘았다.
쐐애액.
마치 창을 연상시키는 한 개의 화살이 트롤의 이마를 향해 맹렬히 쏘아졌고, 대가리에 화살이 틀어박히자 트롤은 그대로 벌렁 뒤집어졌다. 쓰러진 트롤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이내 혀를 길게 빼물고 축 늘어졌다.
“응?”
이제 막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레온이 죽은 트롤의 시체로 다가갔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레온, 지금 뭘 하는 거예요?”
“트롤의 피를 체취하려는 거예요. 이곳에서는 상당히 비싼값에 거래를 할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레온이 아이템 창에서 빈 병을 꺼내 트롤의 피를 채취하며 대답했다. 하긴, 트롤의 피가 포션을 제조할 때 필요하다고도 했으니.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금껏 마셔온 포션에 저런 몬스터의 피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에 나는 속이 역겨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와 모닥불을 쬐고 있으니 담요를 뒤집어 쓴 제리코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와, 형 정말 엄청 강하구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는 제리코. 그에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제리코에게 사냥연습을 시켜야겠군.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간 제리코를 놓아줄 생각이기에 그동안 제리코를 강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가까운 왕국에서 놓아줄 생각이었지만, 바인마하 왕국은 평민마저 인간취급을 안 하는 왕국. 화전민인 제리코는 천민취급도 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바인마하 왕국에서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얼른 제리코를 재운 뒤 주변을 경계했다. 오우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숲은 포식자는 방금 전 사냥한 트롤인 것 같았다. 그런 포식자를 처리한 우리에게 달려들 간 큰 몬스터는 없겠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었기에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렇게 날이 밝아왔다. 잠자리가 그나마 편했는지 잠들었던 세 명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후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제리코가 벌떡 일어나 머리맡에 두었던 숏 보우와 화살통을 집어 들었다. 나를 따라한답시고 허리춤에 화살통을 찬 제리코를 보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배어나왔다.
모두들 떠날 채비를 한 뒤 방향을 잃지 않고 바인마하 왕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하며 주린 배를 채우기도 하고 보초를 섰던 우리는 잠시 잠을 청하기도 했다. 또다시 한참을 걷다가 찾아온 휴식시간.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숲에 자리를 잡은 리아와 티아가 식사를 준비를 했고, 레온은 근처의 큼지막한 바위에 걸터앉아 두꺼운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경훈은 허공에 연신 주먹질을 해대며 나름대로 몸을 풀고 있었고, 혁은 만사가 귀찮은 듯 수풀이 펼쳐진 지면에 대(大)자로 뻗었다.
주위를 빙 둘러보던 나는 조용히 제리코를 불렀다.
“형 무슨 일이야?”
궁금한 듯 물어오는 제리코를 보며 나는 조용히 말했다.
“자, 지금부터 너에게 내 궁술을 고스란히 물려줄 거야.”
“정말?!”
“응.”
“우와, 신난다!”
제리코가 폴짝폴짝 뛰며 소리쳤다.
“쉿. 자, 그럼 지금부터 스킬을 전수해 줄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봐.”
“응!”
나는 잔뜩 들뜬 제리코에게 제동을 건 뒤 상태 창과 스킬 창을 열었다. 스킬 창의 아이콘을 집어 제리코의 상세정보 창에 넣으면 되는 건가? 레온에게 가서 물어봐도 되지만, 방해하긴 싫었기에 나는 스스로 시도를 했다.
먼저 ‘퀵 스텝(Quick Step)' 아이콘에 손을 가져가 움켜쥐자 낯선 문구의 메시지 창이 생성되었다.
[가디언(제리코)에게 이 스킬을 복사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오호, 이런 식으로 문구가 뜨는구나. 예.”
그러자 휘황찬란한 빛이 제리코의 몸을 휘감고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렇게 백스텝, 보우어택, 더블 샷을 복사해주었다.
인간 궁수에게 있어 중요한 다른 한 가지, 동술(胴術)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과연 적안이 복사가 될 것인지, 그리고 궁탑의 제자들만의 특권인 적안을 이렇게 뿌려도 되는 것인지.
하지만 이내 그런 고민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유는 레인지 마스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궁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기 위해 온 것. 그러기 위해선 레인지 마스터의 흔적을 남겨야 했기 때문에 제리코가 적안을 개안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가디언(제리코)에게 이 스킬을 복사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다행히 적안도 복사가 가능했다. “예,”를 외치자 또다시 휘황찬란한 빛이 제리코의 몸을 휘감으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나는 자신의 몸을 휘감는 빛을 보며 어리둥절해하는 제리코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늘어놓았다.
처음엔 어리둥절해 하며 스킬을 소화해내지 못했던 제리코였지만, 자신도 나와 같이 스킬 명을 외치며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이내 깨닫고 스킬을 하나씩 사용하기 시작했다.
“퀵 스텝.”
조용히 스킬 명을 외친 제리코가 지면을 힘껏 박찼다. 아직 수련치가 낮았지만 효과는 뛰어났다. 제리코는 평소보다 좀 더 빨라진 자신의 몸을 신기한 듯 내려다보며 백스텝을 밟았다.
순식간에 뒤로 빠지는 것이 신기했는지 제리코는 연신 백스텝을 밟으며 천진난만하게 웃어재꼈다.
‘저 상태로 가다간 마나가 바닥날 텐데.’
“어, 형. 근데 익 계속 쓰니까 어지럽다.”
천진난만하게 웃던 제리코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그렇게 스킬을 남발하니까 마나가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고 마나가 급격히 감소함으로써 현기증을 느끼게 된 것임을 설명하자 제리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앞으론 막 사용해선 안 되겠다.”
그렇게 제리코에게 스킬을 복사해주는 사이 식사준비를 끝마친 티아와 리아가 우릴 불렀고 나는 제리코, 루카와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 접시를 받아들었다.
버터를 바른 베이컨과 약간의 치즈 그리고 우유.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각자 접시를 깨끗한 시냇물로 헹군 뒤 리아에게 반납했고, 짐을 싸는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 바인마하 왕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제23장 바인마하 왕국의 수도 페리인에 도착하다
그렇게 이틀(월드타임)을 걷자 레디안 숲도 서서히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레디안 숲에서 벗어나 이제 평탄한 여정이 시작되리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보아하니 평민들 같은데… 너희들끼리 저 레디안 숲을 건너온 것이냐?”
귀찮게도 현성 일행은 특권의식에 찌든 귀족과 마주친 것이다. 은빛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무장하고 수행기사로 보이는 기사들을 거느린 것으로 보아 자유기사의 직분을 가진 귀족임은 분명했다.
현성 일행 중 기사와 동일한 풀레이트 메일을 입은 강찬도 있었지만, 기사는 강찬을 그저 평민으로 인식했다.
기사의 물음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일행들과 함께 바인마하 왕국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일행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을 때, 기사의 음성이 모두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감히 기사가 말을 하고 있는데 몸을 돌리다니… 네놈들은 지금 즉결처분을 받아도 모자라지 않을 중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기사의 호통에 현성은 자연스레 발걸음을 우뚝 멈췄고, 선두로 걷던 현성이 멈춰 서자 모두들 자연스레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기사에게 고정시켰다.
다른 일행들은 괜찮았지만, 혁은 상당히 귀찮다는 듯 인상을 쓰며 기사를 노려보았다. 그런 혁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기사가 말했다.
“감히 내게 인상을 써? 교육받지 못한 평민이라 어쩔 수 없군. 멍청한 녀석아, 귀를 파고 잘 들어라, 네놈은 나에게 지금 엄청난 무례를 저질렀다. 기사에겐 의당 재판 없이 평민을 처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법. 이제 네놈이 얼마나 크나큰 잘 못을 저질렀는지 알겠느냐?”
당장 인상을 펴고 무릎을 꿇을 것이란 기사의 생각과는 달리 혁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이런 무례한 놈! 네놈을 이곳에서 즉결처분을 하겠다.”
기사가 허리춤에 꽂힌 고풍스런 문양이 새겨진 롱 소드에 손을 가져가려는 찰나, 혁이 등에 둘러메고 있던 배틀 해머를 풀어 쥐곤 슬쩍 휘둘렀다.
콰앙!
제법 두터운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을 했지만 이런 묵직한 둔기에도 강한 것은 아니었기에 상당한 충격을 입은 기사는 그대로 우스꽝스럽게 벌렁 뒤집어졌다.
“평민 주제에 감히 시가를 쳐?”
재빨리 롱 소드를 뽑아든 기사가 검신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색이 그리 짙지 않은 것으로 보아 소드 엑스퍼트 중급 정도의 실력을 가진 기사임이 분명했다.
“뭐야, 꼴에 오러도 발현시킬 수 있는 거야? 쳇, 귀찮구먼.”
혁이 고개를 느릿하게 내저으며 배틀 해머의 손잡이를 잡고 회전시켰다.
철컥.
왼손으로 배틀 해머의 막대를 잡고 손잡이를 잡은 오른손을 쭉 들어 올리자, 때하나 묻지 않은 은빛의 검신이 모습을 나타냈다. 개조된 혁의 배틀 해머를 보며 일행들은 상당히 놀란 눈치였지만, 모두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혁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뭐, 뭐라고?”
상당히 치욕적인 혁의 발언에 자존심이 더럽혀진 기사가 오러가 맺힌 검을 종횡무진 휘두르며 혁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도와줘야겠어.’
아무리 배틀 해머에서 검을 꺼내들었다고 하지만 저런 오러까지 막아낼 수 없었기에 강찬은 문 블레이드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기사의 검을 막아내지 못하리라는 강찬의 예상과는 달리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혁의 검신에서 휘황찬란한 금빛의 오러가 폭발하듯 뿜어졌기 때문이었다.
“저, 저건 또 뭐야?”
혁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이 동시다발적으로 외쳤다. 지금껏 보지 못한 금빛의 오러 블레이드. 팔라딘의 전매특허인 신성력이 깃든 오러 블레이드의 발현이었다.
기사의 검이 지척에 와서야 혁의 검이 마중 나가 기사의 검을 쳐냈다. 투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기사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평민 주제에 오러를 자유자재로 끌어올리다니.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일방적인 구타였다. 말만 번지르르 하게 해대던 기사는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얻어맞던 기사가 의식을 잃었는지 축 쳐졌고 곁에 있던 수련 기사들은 걸음아 나살려라 줄행랑을 놓았다.
그렇게 특권의식에 눈이 먼 귀족 하나를 처리한 우리는 쓰러진 기사를 뒤로한 채 바인마하 왕국으로 향했다. 물론 제리코를 제외한 모두가 혁이 새로운 모습에 놀랐다.
물론 나도 팔라딘이란 직업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었기에,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대단한 걸? 처음엔 혁이 상당히 고전하리라 생각했지만 혁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 오러 브레이드를 보고 상당히 놀랐다.
혁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렇게 한참을 걸어 우리는 바인마하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커다란 성문과 그 앞을 지키고 있는 NPC들.
경기병 NPC들은 하나같이 우람한 덩치와 함께 매서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게임 내에서 다시 한 번 홍채 인식을 하면서(아무래도 유저인지, NPC인지 알아보려는 의도 같다) 입국을 할 수 있었다.
바인마하 왕국에 도착한 우리 앞에 말로만 듣던 중세시대의 배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세릴리아 대륙의 수도 세인트 모닝, 엘프의 도시 아리스 노아,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와는 다른 신대륙의 바인마하 왕국.
이곳은 수도와 조금 떨어진 외각 지역이었기에 신분이 낮은 농노들의 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모두들 하나같이 기계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엔 희망이 없었다. 뭐 당연하겠지. 수확한 작물 중 80%를 세금으로 걷어가는 귀족 녀석들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인마하 왕국의 수도로 향하던 도중 그렇게 날이 저물기 시작했고, 우리는 한 허름한 숙소로 향했다.
1층은 식당, 2층은 여관으로 식당과 여관을 겸비한 이곳.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는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바로바로 나오는 세릴리아 대륙과는 달리 이곳은 좀 오래 걸리는군.
“막상 신대륙에 도착을 하긴 했는데 말이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의자에 등을 기댄 경훈이 말했다. 뭐, 아무런 계획 없이 따라왔으니 할 일도 없겠지. 그 때, 잠자코 있던 혁이 말했다.
“나는 혼자 신성 왕국으로 떠나 볼 생각이야.”
“신성 왕국은 왜? 전직까지 했는데 또 무슨 볼 일이 있는 거야?”
경훈의 무음에 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의 신성 왕국에서 정규 팔라딘의 직분을 얻고 많은 팔라딘과 대련을 해보려고 별다른 의도는 없어.”
“그렇군.”
경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레드, 앞으로 넌 뭘 할 거야?”
“나는 신대륙 전역을 돌아다녀 볼 생각이야. 이곳에 와 있는 사형들도 만나보고, 여러 초인들과 대결도 해보고.”
경훈의 물음에 대답을 했을 때, 레온이 말했다.
“레드. 초인들과 대결을 하려는 건 무슨 이유가 있는 거죠?”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냥 모든 이들이 궁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고정관념을 깨부수기 위해서랄까요.”
“그렇군요.”
레온이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피로도가 극에 달했는지, 리아와 티아는 눈이 반쯤 감긴 상태였다. 어쩐지, 낮에는 재잘재잘 자란 떠들던 둘이 조용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리아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저희는 먼저 올라가 있을게요.”
“네, 그러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리아를 따라 몸을 일으킨 티아가 내게 손을 흔들며 리아를 뒤따라 2층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고, 배고픔지수가 극에 달한 나는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먹었다.
옆자리에 앉은 혁이 베이컨을 게걸스럽게 집어 먹고 있었고, 경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까부터 말이 없던 강찬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레온도 이곳에 온 목적이 있을 텐데, 실례지만 들을 수 없을까요?”
“하하. 저도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대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랄까요. 이상하게도 세릴리아 대륙엔 마법을 익힐 수 있는 마법서가 6클래스의 마법서까지 밖에 없더군요. 홈페이지에서 조사해본 결과, 7클래스 이상의 마법을 익히려면 신대륙으로 건너와야 한다는 글귀를 보고서 오게 된 거죠. 물론 6클래스 마스터가 된 뒤 올 생각이었는데, 마침 레드 군이 신대륙으로 향한다기에 따라온 셈이죠.”
그에 강찬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다시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모두 마친 우리는 2층으로 향했고, 각자 방을 잡았다. 이곳 여관은 2인실밖에 없었기에 경훈과 혁, 레온과 강찬, 나와 제리코, 루카 이렇게 나뉘어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2인실치고 꽤 넒은 방 안을 둘러보며 나는 등에 둘러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방의 구조는 간단했다. 한 칸짜리 방의 양쪽 벽에 침대와 탁자가 하나씩 위치해 있었다.
수도와 조금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이곳의 시설은 세릴리아 대륙에 비하면 상당히 좋지 못했다. 그래도 별수 있나.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루카를 쓰다듬어주는 제리코를 빤히 보았다.
루카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는지 아까부터 루카와 절대 떨어지지 않는 제리코를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제리코에게 스킬을 복사해주긴 했지만, 아직까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가르치지 못한 것이 맘에 걸렸다.
수도에 도착하게 된다면, 그곳에 머무르면서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기술을 가르쳐야겠군. 물론 제리코에게 가르칠 실전 기술은 내 것과 동일한 기술이었기에 새로운 활을 만들어 주어야 되고.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끝에 제리코에게 손짓했다.
“제리코, 이리 와봐.”
“응? 왜, 형?”
루카를 쓰다듬던 제리코가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나는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한 손으로 집어 제리코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한 번 들어 볼래? 들 수 있겠어?”
“음… 한 번 들어볼게.”
제리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내밀었다. 과연 들 수 있을까? 제리코의 두 손에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올려둔 뒤 슬쩍 손을 떼자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두 손으로 받아든 제리코의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활을 든 두 손이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곧 떨어뜨리겠군. 나는 얼른 활을 집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제리코가 뒤로 벌렁 주저앉았다.
“와… 그런 활을 한손으로 들고 쏜 거였어? 대단하다.”
아직까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제리코가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산해내기 시작했다. 으흠.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서 키가 작은 편이지만 힘은 좀 더 앞서는 것 같군.
수도에 도착하게 돈다면, 제리코가 쓸 만한 무기를 제작해야겠다. 근거리에서도 꿀리지 않으려면 철로 된 단단한 활을 사용해야 하니까, 제리코에게 맞는 그런 철궁을 만들면 되겠군.
그러는 사이 제리코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고개를 내게 향한 뒤 입을 열었다.
“형, 형에게 받은 새로운 기술은 있는데,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야?”
제리코의 물음에 나는 스킬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러니까, 퀵 스텝은 제한된 시간동안 일시적으로 몸을 비약적으로 가볍고 빠르게 하는 스킬이야. 꼭 필요한 상황에서 쓰이는 스킬인데, 앞으로 내가 가르칠 궁술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스킬이지.”
알아들었다는 듯 제리코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스텝은 궁수에게 있어선 가장 중요한 스킬이기도해. 상대방이 활을 쏠 수 없을 정도로 거리를 좁혀 왔을 때, 백스텝을 이용해 거리를 두어 활을 쏘는 거야. 물론 내가 가르칠 궁술에서도 유용한 스킬이기도 해. 그리고 보우어택은 보통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그러니까 궁지에 몰렸을 때 사용되는 스킬이지. 물론 큰 충격을 주는 건 불가능해. 자칫 잘못하면 활이 부러져버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집어든 뒤 말을 계속 이었다.
“이런 활을 쓰게 된다면 상황은 딴판으로 흐르게 되지, 보우어택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줄 수 있으니까. 내가 네게 가르칠 것은 활만 잘 쏘는 것이 아닐, 근접전투에서도 전혀 꿀리지 않을 그런 기술을 가르치려는 거야. 물론 수도에 도착한 뒤에 네게 맞는 무기를 제작해 줄 거고, 그 스킬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줄게.”
상당히 길고도 지루한 내용이었지만 제리코는 하나도 빼먹지 앉고 귀담아 듣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잠이 올 법한 내용이었지만, 제리코의 두 눈은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아무래도 훗날 엄청난 괴물로 성장할 것 같은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 활은 어디서 구한 거야? 형이 살던 곳에서는 모든 궁수들이 다 형처럼 그런 활을 쓰는 거야?”
몹시 궁금했는지 제리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물어왔다.
“이건 내가 직접 제작한 거야. 그리고 내가 살던 곳의 궁수들도 이곳의 궁수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궁수에 대한 모든 이의 시선이 다 그렇잖아? 근거리에선 취약하고, 마나를 다루는 이들에겐 화살이 통하지 않고, 후방지원에만 쓸 만한 존재라고 인식하지. 그 고정관념을 깨부수기 위해 이런 활을 제작하게 된 거야. 다시 말해서 이런 활을 쓰는 사람은 아직까지 나 하나밖에 엇다 이거지.”
“와, 대단하다!”
제리코가 상당히 들뜬 듯 소리쳤다. 뭐 솔직히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제작하게 된 이유는 기존에 쓰던 레드 롱 보우가 부러져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다 생각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뭐 어때.
뒤이어 나는 적안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고 그 즈음 피로도가 점점 높아지자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활을 탁자 위에 올려둔 뒤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늦었으니 이제 슬슬 자자. 그래야 내일 일찍 수도에 도착할 수 있거든.”
“응.”
제리코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월드타임 새벽 12시. 한잔 꺾는 이들을 제외한 여관의 모든 이들이 잠든 시각이었다.
끼이익.
한쪽 구석진 곳에 위치한 방문이 스르르 열림과 동시에 녹슨 경첩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작은 실루엣이 모습을 나타냈다.
145센티미터 남짓 되는 신장에 윤기가 흐르는 금발과 사파이어 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제리코가 실루엣의 정체였다.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루카가 제리코의 뒤를 따랐고, 제리코는 1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층엔 아직까지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 술을 마시고 있는데, 저런 맛없는 술을 뭐가 맛있다고 저렇게 계속 먹느냐는 듯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제리코가 얼른 식당 밖으로 나왔다.
“으흠. 과녁 삼을 만한 것이 어디 없을까?”
주변을 빙 둘러보던 제리코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주변이 상당히 어두웠기 때문에 조금만 거리를 둔다면 과녁으로 삼을 만한 물체가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제리코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좀 전에 레드가 설명하던 적안(赤眼). 주변을 빙 둘러보던 제리코가 피식 웃으며 나지막이 외쳤다.
“적안.”
그에 사파이어를 연상시키던 온화한 제리코의 푸른 눈동자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확보된 것을 느낀 제리코가 신이 난 듯 폴짝폴짝 뛰며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적안을 개안하기 전보다 주변이 좀 더 밝아졌고, 한곳에 시선을 집중하자 마치 망원경으로 먼 곳의 물체를 보듯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물론 제리코가 망원경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관 근처의 커다란 통나무를 과녁으로 삼은 제리코가 풀어진 활시위를 활 끝에 걸고 손을 어깨위로 넘겨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심호흡을 한 제리코가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백스텝을 밟음과 동시에 재빨리 활을 쏘았다.
쐐애액.
화살은 대기를 가르며 통나무를 향해 쏘아졌다. 목표지점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 화살이 틀어박히자 제리코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쉽지는 않구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제리코가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제리코가 이렇게 활 쏘는 것에 몰두하는 동안 루카는 곁에서 배를 깔고 얌전히 구경을 하고 있었다.
쐐액.
푹.
쐐액.
푹.
“아 진짜 잠도 없나.”
아까부터 계속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에 잠이 깬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도대체가 아니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야밤에 활을 쏘는 것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름한 커튼을 넘기며 창문을 열었다. 상당히 어두워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적안.”
그러나 적안을 개안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이 대낮같이 보였고 나를 깨운 소리의 주인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작은 신장에 윤기가 흐르는 금발을 가진 소년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커다란 흰 늑대.
제리코와 루카였다. 이 밤에 혼자 몰래 연습을 하고 있었다니… 아무래도 내가 레인지로 전직하기 전에 지하 수련장에서 했던 수련과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백스텝을 밟으면서 활을 쏘는 조금 까다로운 기술. 열심히 연습하는 제리코를 보며 나는 한시라도 빨리 무기를 만들어주고 싶어졌다. 시선을 집중하자 제리코의 목덜미에 땀이 주륵주륵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루카는 도대체 왜 나간 걸까? 아무래도 제리코를 보호하려는 의도였나 보다. 나는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뒤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등에 둘러메고 방을 나왔다.
1층에는 아직까지 한잔 꺾는 이들이 많았다. 그 중 유저로 보이는 서너 명의 남성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가 내 발목을 잡았다.
월드타임, 앞으로 3일 후 바인마하 왕국의 수도 페리안에서 무투 대회가 열린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물론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만한 내용이었지만 다음으로 이어진 말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이 무투 대회에서 우승을 할 경우, 초인과 맞붙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군.”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무투 대회에서 우승한 자만이 자신을 상대할 자격이 있다고 그랬대.”
“오, 대단한데? 나도 출전해볼까?”
‘무투 대회라…….’
그 무투 대회가 언제 어디서 열리는지 모두 귀담아 들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식당을 나왔다. 아무래도 이번에 열리는 무투 대회에 참여해야겠군. 초인과 맞붙을 수 있는 기회.
모두가 무시하고 있는 궁수란 존재가 한 명의 초인을 꺾는다면 그건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모두가 무시하던 존재가 어느 날 강자가 되어 돌아온다면 무시해오던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
식당을 나오자 엎드려 뻗은 다리 위에 고개를 얹어놓고 있던 루카의 귀가 쫑긋하더니 고래를 돌려 시선을 내게 던졌다. 이내 꼬리를 흔들기 시작하는 루카. 반면에 제리코는 활을 쏘느라 정신이 없었다.
쐐애액.
파악!
“오! 드디어 맞췄다!”
목표지점에 화살이 꽂혔는지 상당히 기뻐하는 제리코를 보자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것 봐, 루카!”
제리코가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나는 급히 백스텝을 밟아 여관의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저렇게 연습하던 도중 내가 나타나면 흥이 깨지겠지? 자기 딴엔 몰래 연습한답시고 한 것을 내가 알아버린다면 저 녀석도 실망을 할 테니까.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얼른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와 식당을 가로질러 2층으로 올라왔다.
“푸하하.”
제리코가 유난히 대견스러워지는 날이었다.
다음날.
짹짹.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이 깬 나는 자면서 눌린 머리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게까지 활 쏘는 연습을 한 제리코. 보통 아직까지 늘어지게 자고 있어야 정상이지만 언제 일어났는지 녀석은 루카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만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저렇게 친해진 걸 보면 참 신기하다.
“어? 형 일어났네. 다들 일어나서 아침 먹으러 내려갔어.”
이제야 일어선 나를 보았는지, 제리코가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왜 안 내려가고?”
“형이랑 먹으려고. 헤헤.”
제리코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으며 활을 등에 둘러멨다.
“우리도 밥 먹으러 가자.”
“응! 가자 루카!”
뭐가 저렇게 좋은지, 루카와 함께 방을 나서는 제리코를 보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가상 생명체이지만 얼마 전 할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을 잃어 꽤나 기운이 없을 텐데 일부러 티를 내지 않기 위핸 저러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신나서 1층으로 향하는 제리코의 뒤를 따랐다. 식당의 한쪽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식사를 하는 일행들. 식사를 하던 티아의 시선이 내게 옮겨졌다.
“어, 오빠! 지금 일어난 거야?”
“응, 좀 전에. 다들 잘 잤나요?”
“하하, 네. 레드 군, 어서 앉으세요. 제리코 군도 어서 오세요.”
나는 티아의 옆자리에 앉아 등에 둘러멘 활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제리코도 뚜벅뚜벅 걸어와 내 옆자리에 앉았고, 음식을 새로 주문했다. 쳇, 이곳에선 내가 좋아하는 돈가스도 먹을 수 없군.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우리는 얼른 떠날 채비를 하고 여관을 나왔다. 처음엔 내게 꼭 붙어 다니던 제리코가 이제는 루카와 붙어 다녔고, 점점 활발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도와 가까워질수록 주변 환경은 점점 발전된 모습을 갖추었고, 지금까지 둘러보던 농촌의 풍경과는 다른 그런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바인마하 왕국의 수도 ‘페리안’이었다.
거리엔 화려하게 치장한 마차가 여럿 다녔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귀족이었다. 귀족의 뒷바라지를 하는 하인들도 볼 수 있었고, 여기저기서 작은 이벤트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상당히 살기 좋은 왕국 바인마하. 물론 귀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분명했다. 농노들이 열심히 일해 수확한 작물의 80%를 여기 있는 귀족들이 전부 거둬가는 셈이로군. 이런 도시에는 처음 와보는지, 제리코의 고개가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바빴다.
“농도들과 귀족들의 삶이 이렇게 다르군요.”
레온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힘들게 하루하루를 먹고사는 농노들의 희망 없는 눈빛과는 달리 귀족들의 눈은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중세 시대의 도시는 전부 이랬을까.
광장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 자유 시간을 갖기로 했다. 모두들 광장에 도착했으니 하고 싶은 일도 많겠지?
자유 시간을 틈 타 티아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할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리아와 함께 쇼핑을 한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그럼 우리는 다녀올게요.”
리아가 손을 흔들며 외쳤고 그 뒤를 티아가 달렸다.
“도대체가 여자들은 이해를 할 수 없다니까. 그 지루한 쇼핑이 뭐가 좋다고.”
혁이 투덜대며 말했다. 모든지 부정적인 녀석.
잠자코 서있던 레온이 말했다.
“저는 잠시 마법사의 길드에 들러봐야겠군요. 이런 도시라면 마법사의 길드가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요,”
“저, 레온. 저도 같이 가 봐도 될까요?”
“네.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어요.”
강찬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애초에 마법에 관심이 있던 녀석인지 레온과 짝이 잘 맞는 강찬이 녀석. 레온과 강찬이 자리를 뜨자 혁이 소리쳤다.
“우리는 세릴리아 대륙과 이곳 신대륙의 여자들이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보러 가자!”
“오! 그거 좋은 생각인데?”
혁의 말에 경훈이 맞장구치며 소리쳤다. 도대체가 이 녀석들은 언제 철이 들려나. 내게도 같이 가자고 제안을 했지만 나는 거절을 한 뒤 제리코, 루카와 함께 대장간을 찾아 나섰다.
“휴. 도대체가 이곳은 왜 대장간이 없는 거지?”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이곳 수도 페리안에서는 대장간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럼 도대체 이곳 기사들은 수리를 어디서 하는 걸까? 설마 날이 상했다고 쓰던 무기를 버리고 비싼 돈을 주고 새로운 검을 사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던 끝에, 광장과는 좀 동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한 대장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람 좋게 생긴 대장장이가 연신 담금질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젊은 대장장이를 볼 수 없었지만, 이곳만큼은 달랐다. 많이 잡아봐야 4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장년층의 한 남성이 대장간에 들어선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여행자이시니가요?”
자신으로부터 하여금 남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대장장이의 얼굴에서 벨터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네. 혹시 노와 무루 좀 쓸 수 있을까요?”
나는 마주 웃어주며 대장장이에게 말을 건넸다. 그에 대장장이가 도로 담금질을 하며 내게 물어오기 시작했다.
“오, 무기를 제작하려는 건가요?”
“네. 여기 있는 이 녀석에게 무기를 만들어주려고요.”
“오, 참 잘생긴 소년이로군요. 노와 모루를 쓰는 데는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혹시 재료는 준비하셨나요?”
다시 내게 물어오는 대장장이. 참, 마음씨 좋은 사람 같았다. 노와 모루를 쓰는데 돈을 안 받는다니. 이건 어디서나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다. 그에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재료는 이곳에서 구해야죠, 음. 질 좋은 철광석과 오우거로 힘줄로 제작된 활시위가 필요한데요.”
“활을 만들려고 하시나보네요. 그러고 보니 등에 멘 무기가 활이지요? 직접 만드셨나요?”
“네, 직접 만들었지요.”
담금질을 하던 대장장이가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 활시위와 질 좋은 철광석 네 덩이를 꺼내오며 내게 물어왔다.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대장장이 덕에 모르는 사람 앞에선 말을 하지 않던 나도 이렇게 말이 많아졌다.
대장장이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제리코는 신기한 듯 대장간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대장장이에게 받은 철광석과 활시위를 받아들곤 팔을 걷어붙였다.
“자, 슬슬 제작해보실까?”
까앙, 까앙!
까앙, 까앙!
이마에 맺혀 있던 땀이 뺨을 타고 주르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해보는 망치질인가? 나는 흥에 겨워 망치질을 했고, 제리코는 곁에서 신기한 듯 구경을 하고 있었다.
제리코가 쓰던 숏 보우는 제리코의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직접 만들어주신 보물이라고 했다. 척 보아도 다른 숏 보우와는 다른 그런 형태를 가지고 있어 제리코가 다른 숏 보우를 쓰게 된다면 상당히 어색할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제리코가 쓰던 숏 보우를 본 따 새로운 활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숏 보우보다 좀 더 크게 디자인한 활이 점점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여러 번의 담금질을 통해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손잡이 부근에 붉은 가죽을 덧대자 드디어 활의 90% 완성되었다.
“좋아, 이 활의 이름은 이제부터 아이언 숏 보우(Iron Shot Bow)다.”
아이언 레드 숏 보우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었지만, 이 활은 내가 쓸 무기가 아닌 제리코가 쓸 무기였기 때문에 레드는 빼기로 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활의 한쪽 끄트머리에 활시위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 작업은 꽤나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작업이었기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세밀하게 해야만 했다. 이윽고 완성된 아이언 숏 보우!
“자, 들어 봐.”
나는 아이언 숏 보우를 제리코에게 건넸다. 아이언 레드 롱 보우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축에 속하는 아이언 숏 보우. 아이언 숏 보우를 받아든 제리코가 무리 없이 휘둘러보였다.
“우와! 이거 정말 나 주는 거야?”
“응.”
천진난만하게 웃는 제리코를 보며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질 좋은 철광석으로 제작했으니, 내리친다면 메이스에 육박하는 데미지를 줄 수 있겠군. 활을 받아든 제리코가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건 뒤 연신 당겨대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장장이에게 요금을 지불하며 말했다.
“저, 혹시 3일 후에 열릴 무투 대회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무투 대회요?”
“네.”
“혹시 무투 대회에 참여하시려는 겁니까?” “물론이죠.”
대장장이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음, 궁수가 이번 무투 대회에 참여하는 건 당신이 다섯 번째로군요.”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껏 열린 무투 대회에서 궁수가 출전한 일이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뭐 당신을 뺀 나머지 네 명의 궁수 모두가 우승을 해 초인을 꺾은 건 아니고, 처음 출전한… 음, 그러니까 대출 보라색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롱 보우를 쓰는 궁수가 있었죠. 그 궁수는 신기하게도 화살촉에 붉은 오러를 발현시켜 쏘더군요.”
보라색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 그리고 화살에 붉은 오러를 발현시킨다? 그렇다면 그자는 100% 궁탑의 첫 번째 제자인 로빈훗임이 분명했다. 레인지 마스터만이 화살촉에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고, 또한 인상착의가 로빈훗과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뭐 아무튼 지금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대장장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 말이 다른 곳으로 샜군요. 뭐 아무튼 궁수가 참여하는 전례는 거의 드뭅니다. 대부분이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는 기사들이니까요. 참여를 하시려면 광장에 위치한 관청에 가셔서 신청서를 제출하시면 됩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나는 대장장이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대장간을 나왔다.
광장에 다시 모이는 시간까지 월타임으로 약 두 시간 가량남아 나는 제리코와 함께 근처의 고급스런 의류점으로 향했다. 곱상한 외모와는 상반되는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제리코에게 옷을 사주려는 의도에서였다.
의류점 내부는 상당히 고급스런 옷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옷을 사준답시고 반강제적으로 제리코를 이곳에 데려오긴 했는데. 무엇을 사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형, 이런 곳은 좀 비싸지 않아?”
“괜찮아. 나는 돈이 많으니까. 입고 싶은 것 없어?”
“아니, 난 괜찮은데…….”
“이놈아. 지금 네 옷이 허름해져서 다 닳아 가는데 그걸 입고 여길 돌아다니겠다고? 좋은 옷 한 벌 사줄 테니까, 어서 골라봐.”
“음… 뭘 입지.”
싫지는 않았는지 제리코가 빙긋 웃으며 의류점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사냥을 하거나 전투를 할 때 입을 옷과 평상시에 입고 돌아다닐 옷을 구분지어 두 벌을 사줄 생각이었기에 나는 아이템 창을 열었다.
[40골드 30실버]
이정도 돈이면 되겠지? 이곳에서 20실버라면 식구가 넷인 한 가정이 한 달을 먹고 살 돈이라고 했으니(물론 이것은 농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이 정도 돈이면 옷을 사고도 남을 게 분명했다.
나는 주인에게 제리코에게 잘 어울리는 옷으로 코디를 해달라고 부탁한 뒤 다른 복장을 쭉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전투할 때 입을 옷은 내가 직접 만들어주는 게 낫겠군.
그렇게 의류점 안을 쭉 둘러보고 있던 제리코가 마음에 드는 의상을 택했는지, 의류점 주인이 말했다.
“손님, 이 옷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는군요.”
옷이 날개라고 했던가? 허름한 옷을 입고 있을 때완 전혀 다른 제리코의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새하얀 남방에 금발과 잘 어울리는 금빛의 노란조끼를 걸치고, 노란 칠부바지에 구두를 신으니 마치 잘 사는 귀족 집의 귀공자와도 같았다.
“얼마죠?”
“3골드 20실버입니다.”
옷의 가격에 눈살이 찌푸려질 뻔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빙긋 웃어보였다. 농노들의 한 달 치 생활비보다 훨씬 더 비싼 옷값. 나는 나머지 옷감을 사 제리코가 입을 편한 복장을 만들었고 그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지금 내 복장과 비슷한 복장을 입고 싶다는 제리코의 말에 나는 내 것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제리코가 보관할 수는 없으니 만든 전투복은 내 아이템 창에 넣어두었고, 자유 시간이 끝날 무렵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빠! 앗, 얘는 누구야? 헉, 설마 제리코?”
티아가 내게 쪼르르 달려오며 외쳤다. 쇼핑을 한다더니, 티아도 한껏 치장을 한 모양이다. 누구 여자 친구인지는 몰라도 참 예쁘군. 허허.
“아이고, 내 뺨이야.”
“푸하하. 그러다 내가 한 대 맞을 줄 알았어.”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며 울상이 된 혁과 그 옆에서 자지러지게 웃는 경훈이 나란히 걸어왔다. 아무래도 이곳 여자에게 집적대다가 한 대 맞은 모양이다.
울상이 되어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혁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알절부절 하지 못하는 리아. 흐음.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모두들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고 있을 때, 강찬과 레온이 이쪽으로 손을 흔들며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 모두 모인 셈이군.
“하하. 운 좋게도 이곳의 마법사 길드에서 7클래스 마법 입문서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분이 좋은 듯 너털웃음을 날리며 레온이 말했다. 강찬의 손에도 작은 책이 쥐어져 있었는데, 1클래스 마법 입문서라고 적혀 있었다.
웬일로 마법서를 들고 있는 걸까?
“어라? 카이루. 그건 뭐냐?”
“아, 1클래스 마법 입문서. 심심할 때 읽어보려고 구입했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강찬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강찬도 나와 같이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는 타임인데, 온갖 복잡한 수식으로 도배되어있는 마법서를 과연 읽을런지…….
모두들 자유 시간에 겪은 일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도 그간 있던 일을 말했고, 제리코의 손에 쥐어진 아이언 숏 보우를 보며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에 제리코가 한술 더 떠 옷까지 만들어줬다는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티아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주지 못했는데. 하지만 티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런데 갑자기 급 까칠해지는 건 뭘까. 도대체가 여자들은 속을 알 수가 없다.
아차, 이렇게 웃고 떠드는 동안 제일 중요한 것을 잊을 뻔했군. 나는 티르 네티아에서 했던 것처럼 손뼉을 쳐 시선을 집중시켰다.
“크흠. 저, 월드타임 3일후에 이곳 수도 페리안에서 무투 대회가 열린다고 했는데…….”
나는 3일 후 열릴 무투 대회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하게 전부 털어놓았다. 그리고 무투 대회에서 우승할 경우 초인과 맞붙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물론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누구든 초인이라고 불리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초인이 되려면 모두에게 인정받을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 모두 초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같은 소드 마스터라도 그간 쌓아온 수련치와 경험의 면에서 차이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레드, 이곳에서 궁수를 보는 눈이 다른 곳과는 달라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레온이 말했다. 레온의 말에 담긴 속뜻을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까 대장장이도 제가 무투 대회에 참가한다는 말에 흠칫하는 눈치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무투 대회에 참가해야 합니다.”
그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요. 아, 마법사의 길드에서 흘러들은 말이 있는데, 이곳의 관청에 가서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네. 관청에서 신청서를 작성해야지요.”
모두와 함께 관청 앞에 서게 된 나는 일행에게 관청 앞에서 기다리라고 부탁한 뒤 나 홀로 관청 안으로 향했다.
엄청난 규모를 가진 관청. 이곳 수도의 모든 것을 담당하는 구역이기도 했으니 당연했다. 새하얀 벽돌로 깔끔하게 장식된 관청은 얼핏 보면 수도 세인트 모닝의 건물들과 비슷했다.
“우와, 정말 크군.”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지각색의 무기를 쥔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들 무투 대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겠지? 그중 유저도 몇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반가움은 도대체 뭘까?
NPC로 가득한 이곳 신대륙에서는 유저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뭐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우락부락한 덩치에 배틀 엑스를 들쳐 멘 한 대머리 남성에게 다각 말했다.
“저, 혹시 이 줄에서 무투 대회 신청서를 작성하는 건가요?”
“그래. 설마 너도 참여하려고 하냐?”
대머리 남성의 말에 나는 상당히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웃으며 대답해야지, 별수 있나.
“네.”
“푸하하! 게다가 활? 허허. 아무튼 무투 대회에서 만나게 된다면 잘 해보자.”
기분 나쁘게 뒷목을 툭툭 치는 녀석. 그리고 뒤이어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들. 두고 보자.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무투 대회 출전 신청서를 작성하고 관청에 넘기자, 관리인의 표정이 상당히 오묘해졌다.
아무래도 궁수라고 표기된 직업란을 보고 저런 표정을 짓는 모양이다. 이곳에서 어중간한 실력을 가진 궁수들은 아주 멸시를 당하는 모양이다.
‘로시토, 이곳 신대륙 아리시아의 수도 페이란이 레인지 마스터의 존재를 각인 시킬 시발점이자 첫 무대가 되겠군요.’
난 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무투 대회에서 우승을 해 초인을 꺾겠다고.
제24장 무투 대화, 레드 파운의 존재를 각인시켜라!
“방학을 하고 나니까 시간이 금방금방 지나가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아무 것도 못 해보겠어.”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집으로 향했다. 요새 너무 집에 틀어박혀 게임만 했더니 왠지 모르게 답답한 감이 있었다. 물론 게임을 하는 동안은 답답한 것이 없지만 로그아웃을 했을 때 느껴지는 후유증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가끔은 이렇게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
나는 횡당보도를 건너 맞은편에 위치한 편의점으로 가 샌드위치와 카스타드 파이, 우유로 끼니를 때운 뒤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문인식이 후 현관문이 열렸고 얼른 신발을 벗어던진 나는 내 방으로 향했다.
“후아, 밖에 나갔다 오니까 상쾌하다. 컴, 나 나갔다 오는 동안 메시지 온 것 있어?”
「일반 메시지 2건. 총 2건이 있습니다.」
“그래? 전부 들려줘.”
그에 컴은 내게 온 메시지를 읊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온 메시지와 경훈에게 온 메시지. 떨어져 살기 때문에 늘 걱정이신 엄마.
“아직까지 날 어린애로 생각하시네.”
나는 피식 웃으며 게임기기 허리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위잉.
철컥.
“곧 무투 대회가 시작한댔지? 얼른 접속해봐야겠다.”
나는 얼른 게임베드에 몸을 눕힌 뒤 머리맡에 있는 헤드셋을 집어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에 캡슐의 문이 서서히 닫히며 빛을 차단했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72.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웅성웅성.
수도 페리안 광장의 뒤편에 위치한 커다란 규모의 투기장.
그 안에는 수많은 관객들과 선수들로 가득했다. 투기장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랐고, 선수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와아아!”
뒤늦게 왜소한 체구에 붉은 망토를 두른 한 소년이 커다란 늑대의 등에 탑승한 채 투기장 안으로 향했다.
“이런, 늦겠다. 제리코, 너는 루카와 같이 일행들이랑 있어야한다.”
“응, 알았어.”
투기장 안으로 도착한 현성은 얼른 루카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려 선수대기실로 향했고, 제리코는 루카의 등에 탑승한 채 관람석으로 향했다.
현성의 일행이 1등석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제리코는 무리 없이 1등석으로 향할 수 있었다. 루카와 제리코가 도착하자 모두들 현성이 늦지 않게 접속했음을 인식하고 제리코를 반겨주었다.
“제리코, 어서 와! 레드 오빠는?”
“레드 형은 지금 선수대기실로 막 갔어.”
“휴, 늦지 않았군.”
늦지 않게 선수대기실에 도착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기실의 한쪽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출전을 하게 된 선수들은 대부분 인상이 험악하게 생긴 괴인들이었다.
모두들 우락부락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고(가끔 그렇지 않은 자들도 보였지만)인상이 더러웠다. 나처럼 키가 작고 왜소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활이라는 무기를 소유한 자는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그렇게 선수 대기실에 있을 때였다.
“지금부터 수도 페리안의 제 1321회 무투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음성.
“와아아아!”
그에 선수대기실까지 울릴 법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경기는 대충 이렇게 시작되었다. 각자에게 번호표를 지급해준 뒤 마구잡이로 섞는다. 그렇게 제비를 뽑아 토너먼트 식으로 경기를 하게 되는 무투 대회.
그렇게 무투 대회가 시작되었다. 예선전 같은 건 싸그리 무시하고 출전하겠다는 스무 명의 선수들을 그대로 뽑아 출전시키는 무투 대회. 정말이지 이곳은 이해를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렇게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어디선가 내가 거론된 듯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나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던졌다.
“네 상대가 저기 있는 저 애송이냐? 최대한 살살해야겠군. 푸하하.”
“그렇지 않아도 손 좀 봐줄 생각이었어. 감히 이 무투 대회에 활을 들고 들어오다니 말이야. 크하하.”
역시나. 신청서를 작성할 때 봤던 그 재수 없는 대머리였다. 친구로 보이는 한 괴팍한 인상의 사내와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르게 화가 났지만, 뭐 내 차례가 왔을 때 실컷 두들겨 패주면 되니 지금은 참아야겠다.
재수 없는 대머리의 친구로 보이는 괴팍한 인상의 사내는 요상한 철퇴를 무기로 쓰는 것 같았다.
“제 1라운드! 출전 선수는 출전 번호 1번의 케이 그리고 출전번호 2번의 하레스!”
“와아아!”
아무래도 경기가 시작할 모양이다. 나를 비웃던 대머리의 친구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케이? 못 들어보던 이름인데. 아무튼 다녀오마. 결승에서 만나자고, 탈토.”
“크크. 잘 다녀와라, 하레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경승에서 보자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일까? 그건 그렇고 저 녀석의 이름이 하레스로군. 나는 고개를 돌려 뻥 뚫린 벽면을 통해 경기장을 내다보았다. 물론 하레스라는 녀석과 함께 나가는 케이라는 선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작지 않은 신장과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선수. 움직이기 편한 천옷에 롱 소드 한 자루를 허리춤에 찬 케이와 우락부락한 덩치에 묵직한 철퇴를 들쳐 멘 하레스가 경기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모두들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는 적안을 개안한 채 그 둘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심판이 서로 마주보게 대치를 시키고 서로에게 인사를 시켰는지 케이란 작라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지만, 하레스란 자는 벌레 보듯 내려다볼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덩치로 본다면 하레스란 자가 100% 이길 그런 게임이었다. 하지만 케이라는 자가 최소한 소드 엑스퍼트의 경지에 들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그가 소드 엑스퍼트의 경지에 들었다는 보장은 없었기에 나는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심판이 소리치자 거대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고 장내는 장적이 흘렀다. 롱 소드를 뽑아든 케이가 두 손으로 검을 고쳐 잡은 뒤 느릿하게 하레스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레스가 뭐라고 웅얼거렸지만 귀까지 적안 같은 효과를 낼 수 없었기에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이내 철퇴를 머리 위로 빙빙 둘리기 시작하더니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 케이에게 철퇴를 내리 꽂았다. 그 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케이의 이쑤시개와도 같은(멀리서 봐서 그런지 철퇴에 비교되어 그런지 상당히 가늘었다) 가느다란 검신에 푸른색의 화려한 오러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더니 지척에 다다른 철퇴를 반으로 쪼갠 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하레스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시작 전과는 달리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경직된 하레스의 꼴이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와아아아!”
순식간에 하레스를 제압한 케이를 보며 관중석에선 열렬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물론 이곳 선수대기실에서도 모두들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저 정도로 짙은 오러를 쉽게 끌어올리는 것으로 보아 낮게 잡아서 소드 엑스퍼트 상급 이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1라운드가 끝이 났고 잠시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휴, 긴장되는구먼. 나는 벽면에 기댄 채 활을 정비하는 동안 따가운 시선을 느껴야만 했다. 얼른 내 차례가 와야 할 텐데.
“저 정도면 소드 마스터일 가능성도 적지 않아.”
하레스를 순식간에 제압한 케이를 가리키며 강찬이 말했다. 그에 곁에서 구경하던 경훈이 소리쳤다.
“저 사람이 우승을 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거네?”
“그렇지.”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경기장을 내려다보던 티아가 걱정스런 눈으로 선수대기실에 시선을 던졌다.
관중석과는 달리 선수 대기실은 1층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야만이 경기장으로 빨리 모습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레드 오빠가 잘해야 할 텐데.’
잠시의 휴식시간이 끝나자 제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2라운드를 시작하겠습니다! 출전 선수는 3번 선수 마로스와 4번 선수 마렉스!”
“와아아!”
이번에는 한 덩치 하는 선수들의 싸움이었다. 한 선수는 육중한 배틀 엑스와 메이스를 양손에 쥐고 있었고, 다른 한 선수는 소드 브레이커(Sword Breaker)를 들고 있었다.
칼날 부분이 톱니처럼 되어 있어 상대방의 날이 선 무기의 이를 닳게 만들며, 또한 이 검에 베이게 되면 보통 검과는 달리 살갗이 뜯어져 나가게 도니는 그런 잔인한 기형병기였다.
저런 무기를 쓰는 선수도 있었군. 중병기를 갖춘 자의 이름이 마로스, 소드 브레이커를 가진 자의 이름이 마렉스인가보다. 이름이 비슷해 형제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는 것으로 보아 형제로 보이지는 않았다. 가끔 보면 이름이 비슷한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경우인 것 같았다.
심판이 지시했지만 그것을 무시한 채 서로에 대한 인사를 하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예도 갖추지 않는 험악한 인상의 두 괴인들. 경기가 시작함과 동시에 그 둘은 경기장을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빈틈이 보였는지 마로스가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왼손에 쥔 메이스를 힘껏 휘둘렀다.
부웅.
촹!
묵직한 메이스를 자신의 검으로 쳐낸 마렉스가 그대로 몸을 회전시킴과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마로스가 급히 거리를 두었지만 가슴팍을 슬쩍 훑고 지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보통 검에 베인다면 기다란 자상만이 남았을 테지만, 상대의 무기는 톱날이 선 소드 브레이커. 가슴팍의 살점이 뜯어져 나가자 상당히 고통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는 마로스였다.
이 무투 대회는 상대를 제압하던 죽이던 승자의 자유였는데, 아무래도 마렉스는 상대를 죽일 생각으로 덤빈 모양이었다. 그에 비하면 1라운드의 케이는 신사로군.
마로스가 주춤하는 사이, 마렉스가 몸을 던졌고 재빨리 검을 휘둘렀으나 육중한 배틀 엑스가 마중 나와 검을 쳐냈다. 그와 동시에 몸을 돌려 메이스로 추가적인 공격을 가하려 했지만, 마렉스는 호락호락 당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상반신이 피로 붉게 물든 마로스. 극심한 출혈 때문인지 눈이 풀린 듯 말 듯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마렉스란 녀석, 정말 잔인하군. 꼭 죽여야 이기는 건 아니잖아?’
나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둘을 경기를 지켜보았다. 이곳의 관중들도 잔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렉스의 소드 브레이커가 마로스의 가슴팍을 슬쩍 훑고 지나갔을 때 피가 뿜어져 나오자,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보자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우와!”
다시 한 번 횡으로 베어 들어오는 마렉스의 검을 배틀 엑스의 면으로 쳐낸 뒤 모을 회전시켜 메이스로 상대방을 내리찍는 추가적인 공격이 성공했는지, 관중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기괴하게 함몰되어 피를 줄줄 흘리는 어깨를 움켜쥐고 벌렁 뒤집어진 마렉스. 상체가 피로 범벅이 된 마로스가 메이스를 뒨 손을 치켜들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마렉스와는 달리 상대를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는지 그대로 등을 돌려 선수대기실로 돌아오는 마로스의 걸음걸이가 처음과는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과도한 출혈 때문에 눈까지 풀린 상태인지라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거의 비틀거리다시피 선수대기실로 들어와 내 옆자리에 풀썩 고꾸라져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마로스.
이 때 허공이 뒤틀리며 익숙한 인상착의의 한 인영이 나타났다. 레온이었다.
“앗, 레온?”
“관중석에서 지켜보았는데, 출혈이 상당히 심하더라구요. 그냥 지켜볼 수 없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잠시 실례 좀 하다가 가겠습니다.”
레온이 모두에게 양해를 구한 뒤 마로스의 가슴팍에 손을 갖다 대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큐어.”
주문 영창이 이어지자 레온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마로스의 상처를 감쌌다. 순식간에 상처가 치유된 마로스의 안색이 극도로 밝아졌고 겨우겨우 몰아쉬던 숨결도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다.
“힐링.”
마지막으로 힐링을 시전하자 마로스의 생명력이 회복되었는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레온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하하, 뭘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요.”
마로스에게 빙긋 웃어 보인 레온이 내게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레드, 방금 전 경기에서 보았듯이 상대를 죽이려는 선수들도 있는 것 같으니 조심하세요.”
“네.”
레온의 조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간단한 수인을 맺자 레온의 모습은 다시 그 자리에서 퍽 꺼졌고, 마로스를 치료하는 동안 휴식시간이 끝이 났고 제 3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미니안과 케이안이라는 선수의 대결이었는데, 둘 다 모두 검을 쓰는 검사였다. 치열한 접전 끝에 케이안의 승리로 경기는 끝이 났고 지루한 휴식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기다리던 내 차례가 되었다.
선수 이름을 지명하자 관중석에선 또다시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울려 펴졌고, 선수 대기실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장으로 향하던 도중 뒤통수를 뭔가 묵직한 것에 맞는 듯한 느낌을 받고 고래를 돌릴 뒤 위로 올려다보았다.
재수 없는 대머리 녀석이 비웃음 어린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이 내 뒤통수를 친 것 같았다.
“앗! 레드 형이다!”
제리코가 소리치자 티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티아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제리코가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경기장으로 나오는 두 선수는 체격부터 엄청난 차이가 났다.
173센티미터의 신장과 왜소한 체격을 가진 현성과 2미터 10센티미터에 달하는 거구에 우람한 덩치를 가진 탈토. 마치 어린아이와 어른이 같이 걸어 나오는 것을 연상시키며 경기장 중아에 선 현성과 탈토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보기 드문 궁수의 등장에 관중석은 떠들썩해졌다. 모두들 탈토에게 응원을 하는 듯했다.
“푸하하! 아니 이 무투 대회에 활의 가지고 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탈토! 뭉개 버려!”
그에 1등석에 앉아있던 현성 일행 중 티아와 제리코가 질세라 소리쳤다.
“오빠! 꼭 이겨야 돼!”
“형! 그 대머리에게 지면 안 돼!”
“자, 두 선수 서로 마주보고 인사 하십시오.”
현성은 최소한의 예의라도 갖춰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지만 탈토는 거만하게 웃고 있었다.
“으흐흐흐흐.”
‘상당히 기분 나쁜 녀석이네.’
탈토를 노려보며 읊조린 현성이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등을 꽉 움켜쥐었다. 심판의 지시대로 일정한 간격을 두었고 경기는 시작되었다.
“으흐흐흐흐.”
괴아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상대방을 자극하기 시작하는 탈토. 일종의 신경전인 셈이었다. 하지만 현성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탈토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신을 놨나? 왜 저렇게 웃는 거지?’
“워!”
배틀 엑스를 치켜들고 몸을 슬쩍 움직여 발로 땅을 내리 찍으며 소리치는 탈토 겁을 주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 같았지만 현성은 한심하다는 듯 탈토를 노려볼 뿐이었다.
‘저런 녀석을 상대해야 한다니.’
“에휴.”
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더니 이내 눈을 번뜩이며 탈토를 노려보았다.
“퀵 스텝.”
퀵 스텝을 외침과 동시에 현성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푹 꺼져버렸다. 그에 탈토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고 이내 등 뒤로 전해져 오는 싸늘한 감각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거기까지가 탈토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퍼억.
묵직한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머리에 작렬하자, 탈토는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져버렸다. 가볍게 지면을 착지한 현성은 등을 돌려 선수 대기실로 향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등 뒤로 늘어뜨린 붉은 망토가 휘날렸다.
탈토가 쓰러지자 장내는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레드 파운이라는 선수가 아무런 힘도 못 쓰고 질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로 마주 보는 식으로 대치해 있던 도중 레드 파운의 몸이 안개에 가려지듯 그 자리에서 퍽 꺼졌고, 어느새 탈토의 등 뒤로 나타나 무식하게 큰 활을 휘둘러 기절시킴과 동시에 선수 대기실로 유유히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던 티아가 풀린 눈으로 배시시 웃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현성이 그 누구보다 멋있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무시했지만 전혀 기죽지 않고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한 뒤 유유히 사라지는 현서에게 완벽히 매료된 것은 티아뿐만이 아니었다.
제리코 또한 상당히 들뜬 상태였다.
‘어떻게 한 거지? 분명 거리를 두고 활을 쏠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상대의 뒤로 가서 활로 쳐냈네.’
자신에게 궁술을 가르쳐줄 스승(?)이 저렇게 강하다니… 제리코는 뿌듯한 가슴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이미 현성은 제리코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 * *
“붉은 눈동자… 그리고 거대한 철궁… 말로만 듣던 막내 사제인가.”
투기장의 천장에서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한 인영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보라색의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그리고 등 뒤로 둘러 멘 롱 보우와 어깨에 앉아있는 붉은 매.
궁탑의 제자의 상징인 붉은 매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내는 궁탑의 제자임이 분명했다.
‘보우어택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다니. 막내 사제도 이곳의 초인들을 꺾으라는 스승님의 지시를 받고 온 건가¨¨.’
* * *
선수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 대기실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선수들의 시선이 경기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별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던 선수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고, 행여나 눈이라도 마주치면 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뭐 신경 쓸 필욘 없겠지.
나는 아까 앉아 있던 구석진 자리로 돌아와 벽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았다. 그러고 보니 활시위를 고정시키지도 않았군.
솔직히 방금 경기를 하면서 보우어택만으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상당히 나를 깔보듯대했고 그만큼 방심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였으니까.
덕분에 절반 이상의 마나가 감소되었다. 퀵 스텝을 시전함과 동시에 이형환위를 전개해 탈토의 뒤로 순식간에 이동했으니까.
탈토와 같이 나를 비웃던 하레스란 자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지금 경기로 인해 궁수에 대한 비웃음 어린 모두의 시선이 조금씩은 달라졌으면 좋겠는데, 과연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휴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경기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뒤로 이어진 경기들은 모두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경기였다. 대부분이 실력이 뛰어난 검사들이었기에 팽팽한 신경전부터 치열한 접전까지 모두 관전하는 사람으로부터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그렇게 7라운드가 시작 되었고 두 선수가 경기장 내부로 입장했다. 13번 선수인 칼푸스와 14번 선수인 페이샤의 대결. 둘 다 모두 큰 신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덩치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체력이 딱 잡혀있는 칼푸스와는 달리 페아샤는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전혀 뒤지지 않았다.
심판의 지시대로 서로 인사를 한 뒤, 서로 거리를 두고 마주보았다. 둘 다 소드 엑스퍼트 경지는 능히 능가하는지 경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둘의 검신에선 짙은 푸른 오러가 물밀듯 밀려 올라왔다.
신경전이 시작되었는지, 서로를 노려보며 경기장 주변을 느릿하게 맴돌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빈틈을 전혀 찾아 볼 수없는 것이로군. 신경전이 끝난다면 이제 서로 검을 맞대고 싸울 테지?’
팽팽한 신경전 끝에 칼푸스가 몸을 날렸고 페이샤가 검을 고쳐 잡았다.
촹! 촤촹!
푸른 오러가 서린 검이 세 번 격돌하는 동안 눈부신 섬광이 뿜어져 나왔고, 뒤늦게 강기의 파편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래, 이런 게 바로 진정한 무투 대회인 것이다. 나는 두 선수의 경기를 지켜보며 지금껏 경기를 해오던 선수들과는 다른 경기를 보며 상당히 들떠버렸다.
아직까지 둘 다 실력이 비슷한 것 같았다. 민첩한 몸놀림을 자랑하며 두 선수의 검은 대기를 갈가리 난도질해댔다.
팽팽했던 두 선수의 대결은 시간이 흐를수록 한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했다. 체력과 마나가 고갈되어 가는지 칼푸스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페이샤가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오러가 짙게 서린 페이샤의 검에서 또다시 눈부신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소드 마스터의 전매특허인 오러 블레이드의 발현이었다.
순식간에 검신의 길이보다 더 긴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와 일정한 형태를 갖추었고,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페이샤는 더욱더 맹렬하게 상대를 밀어붙였다.
채앵!
오러가 짙게 서린 검 한 자루가 빙글빙글 돌며 허공을 날아오르더니 이내 맨땅에 고두박질 쳐졌다. 그와 동시에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체력과 마나가 고갈 되었는지 칼푸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페이샤가 오러 블레이드를 발현시킨 검을 늘어뜨린 채 철탑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7라운드는 페이샤의 승리로 끝을 맺었고, 이내 점심시간이 시작되어 관중들이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으로 주어진 시간은 1시간 30분. 나는 선수 대기실을 빠져나와 관중석으로 향했다.
관중석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수많은 관중들의 따가운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좋지 않은 시선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내가 막 일행들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오빠!”
관중석에 앉아있던 티아가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멋있었어!”
티아의 말에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언 숏 보우를 등 뒤로 둘러 멘 제리코도 티아를 뒤따라 내게 달려오며 소리쳤다.
“형! 최고야!”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나머지 일행들을 보았다. 손가락을 치켜든 강찬과 경훈, 너무들 띄워주네.
“식사 해야죠? 투기장 근처에 음식점 하나를 알아봤는데, 거기서 식사나 합시다. 제가 쏠게요.”
레온의 말에 경훈과 혁이 신나서 방방 뜨기 시작했다.
“예? 그래도 되나요?”
나는 또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레온에게 물었지만 레온은 괜찮다는 듯 고래를 끄덕였다. 레온이 간단한 수인을 맺음과 동시에 워프를 외치자, 우리 모두는 수도 페리안의 한 고급스런 음식점에 도착했다.
역시 농노들이 거주하는 곳과 이곳은 음식점부터 상당히 비교가 되었다. 허름한 나무로 된 문이 아닌 깨끗하고도 깔끔한 문양이 새겨진 나무 문.
거기에 음식점 내부는 이전에 들렀던 음식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풍스러웠다.
투기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관중들도 몇 볼 수 있었고, 내게 손가락질으를 하는 사람들도 몇 있었다. 다른 건 다 좋지만 손가락질을 당하니 기분은 그리 좋지 않군.
레온을 따라 창가에 배치된 탁자에 자리를 잡고 우리는 요리를 주문시켰다.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지만 레온은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음식을 주문하자 금세 주문한 요리가 나왔고, 우리는 주문한 요리를 먹으며 오늘 열린 무투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우리 테이블은 상당히 떠들썩해졌다.
“나는 이번 7라운드가 제일 재밌었어.”
닭다리를 뜯으며 경훈이 말했다. 그에 혁이 맞장구쳤다.
“무지 재밌었지. 처음엔 팽팽하더니, 시간이 좀 지나니까 칼푸스랬나? 아무튼 그 녀석이 점점 밀리는 게 눈에 띄더라.”
둘의 대회에 피식 웃으며 나는 스테이크를 한 조감 썰어 입에 넣었다. 입 안 가득 퍼져가는 육즙의 향긋한 향기를 음미하며 부드럽게 고기를 씹었다.
“아참, 레드. 1라운데 참여했던 케이라는 자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것 같아요.”
“네. 순식간에 오러를 끌어올리는 것으로 보아 소드 마스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상당히 들떠 있던 제리코는 이것저것 요리를 집어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전민들이 이런 고급스런 음식을 언제 먹어봤겠는가.
하지만 혼자서 다 먹는 것은 아니었다. 탁자 밑에 배를 깔고 엎드린 루카에게 음식을 던져주고 있었다. 흐음. 계속 준다면 루카의 버릇이 나빠질 텐데 말이지.
그렇게 고급스런 식사를 마친 뒤 레온이 요금을 지불했고, 워프를 이용해 다시 투기장으로 돌아왔다.
일해들과 헤어지니 자는 다시 선수 대기실로 들어왔고 전처럼 등에 둘러메고 있던 활을 손에 쥐고 벽에 등을 기댔다. 벽면이 뚫려있어 경기를 구경하기가 이토록 좋을 수 없었다.
점시시간이 끝나감을 알리는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펴졌고, 이내 다음 라운드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8라운드의 경기는 7라운들의 경기에 비해 썩 재밌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볼만한 경기였다. 클레이모어를 사용하는 스베니아란 청년과 레이피어(Rapier)를 사용하는 여검사 이릴의 대결이었다.
이 둘은 모두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는 경지의 검사들이었는데, 7라운드 때와 같이 치열한 접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스베니아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쯔쯔. 저런 식으로 계속 가다간 지고 말 텐데.’
나는 혀를 차며 스베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역시, 내 예상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던 스베니아가 이릴리의 일격에 빈틈을 공격당해 패했다.
그 다음 두 라운드의 경기는 각 선수의 실력 차가 월등했기 때문에 즐기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냥 끝이나 버렸다.
“후아암. 따분하군.”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경기장을 내다보았다. 내 차례를 기다리며 이렇게 구경을 하는 것도 좋지만, 하루 종일 이렇게 앉아있으려니 상당히 따분했다. 그래도 뭐 별수 있나.
그렇게 지루하게 경기장을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제 11라운드, 출전번호 1번 케이, 출전 번호 3번의 마로스의 대결이 시작 됩니다!”
“와아아아!”
또다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고 선수 대기실 안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케이와 마로스는 서로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건넸고, 심판의 지시대로 일정한 간격을 두었다.
이번 경기의 승자는 누가 뭐래도 케일 것이 분명했다. 케이는 소드 마스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경기에 오른 검사였고, 마로스는 그저 치고받는데 능한 용병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오러를 끌어올려 경기를 끝낼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케이는 오러를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상대가 마나를 다스릴 수 없을을 인식하고 같은 조건에서 서로의 병장기를 부딪혀가며 신나게 치고받기 시작했다.
육중한 배틀 엑스와 메이스가 빠른 속도로 휘둘러졌지만, 케이는 현란한 몸놀림으로 모두 피해내거나 자신의 검으로 상대의 무기의 행로를 바꿔버리는 고난이도의 검술을 선보였다.
“와… 검으로 저런 것까지 가능하구나.”
나는 케이가 선보이는 검술에 완벽히 매료되어 둘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고 파고드는 날카로운 공격. 두 선수 모두 구슬땀을 흘리며 자신의 병기를 맘껏 휘두르고 있었다.
자신의 목을 향해 횡으로 휘둘러지는 배틀 엑스를 보곤 급히 허리를 숙여 피해낸 케이가 얼른 검을 휘둘러 마로스의 목덜미에 겨누었다.
마르게 마로스가 패배를 시인했고, 11라운드는 케이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다음이 내 차례인가…….”
나는 아이템 창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음식점에서 몰래 담아온 물로 목을 축인 나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현성의 생각대로 잠시의 휴식시간이 끝나자 곧바로 1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휴, 무투 대회를 하루 안에 끝내려는 심산인가? 뭐 이런 곳이 다 있자?”
현성이 고개를 내저으며 경기장으로 향했다. 현성과 나란히 향하는 케이안은 간편한 가죽갑옷을 걸치고 있었고, 신장 또한 현성에 비해 상당히 컸다. 하지만 케이안은 상당히 긴장한 눈치였다.
‘순식간에 이동하는 것을 보면 마법사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활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궁수다. 그런데 저렇게 무식하게 큰 활을 쓰는 궁수는 거의 볼 수 없었다. 과연 내게 어떤 공격을 가해올까?’
지금껏 많은 검사들과 대결해온 케이안이었지만 지금 상대는 검사가 아닌 궁수였다. 그 때문에 케이안의 심기는 상당히 좋지 못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경기장의 중앙에 도착한 두 선수가 서로를 마주보며 인사를 했고 심판의 지시에 따른 뒤 시합을 시작했다.
현성은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건 뒤 케이안이라는 선수에게 시선을 두었다.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등을 꽉 움켜쥔 채 허리움에서 손을 가져가 화살 깃을 집으려는 순간이었다.
‘이 때다!’
순간 빈틈을 보인 것이라고 생각한 케이안이 짙고 푸른 오러가 맺힌 검으로 현성에게 찔러 들어갔다. 그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관중석에 앉아 무투 대회를 관람하는 관중들이 제대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유저들에겐 해당되지 않않다).
그 츰을 타 순식간에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난 현성이 활을 휘둘렀고, 묵직한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대기를 갈랐다.
부웅.
급히 몸을 뒤로 젖힌 케이안이 활들짝 놀라며 거리를 두었다.
“퀵 스텝.”
퀵 스텝을 걸자 현성의 몸놀림은 비약적으로 빨라졌고, 급히 거리를 두는 케이안과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혀나갔다. 케이안이 검을 휘둘렀지만, 현성은 검의 행로를 읽곤 가볍게 피해냄과 동시에 또다시 활을 휘둘렀다.
‘이런. 가까이 접근할 수 없잖아. 활은 근거리에선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무리라고 들었거늘!’
케이안이 인상을 쓰며 급히 거리를 둘 때였다. 현성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 재빨리 화살을 꺼내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그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그저 활시위를 당겼는데 화살이 생겨난 듯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켰다. 관중석에서는 침 삼키는 소리가 연달아 들여왔다. 궁수에 대한 일반 상식을 깨는 현성의 등장에 모두들 넋을 놓고 경기를 관람했다.
‘아차!’
활에 맞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었지만 케이안은 뒤늦게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방이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궁수와 거리를 둔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법. 현성이 당겼던 활시윌르 놓자 화살은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케이안을 향해 쏘아졌다.
“헛.”
정확히 자신의 이마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보곤 기겁을 하며 사력을 다해 몸을 틀어 화살을 피해낸 케이안.
‘뭐 이런 경우가…….’
탈토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까지가 케이안이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력을 다해 화살을 피해내는 동안, 순식간에 자신의 뒤로 접근한 현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퍼억.
묵직한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작렬하자 케이안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상대가 기절했음을 확인한 현성은 활 끝에 걸린 활시위를 풀곤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등 뒤로 둘러멨다. 그리곤 느릿한 발걸음으로 선수 대기실로 향했다.
지켜보고 있던 심판마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쓰러진 케이안과 선수 대기실로 향하는 현성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껏 출전한 궁수들과는 전혀 다른 공격 패턴. 급히 내정을 찾은 심판이 승자의 이름을 외치자 넋을 잃고 경기장을 내려보던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번 라운드로 인해 투기장의 관중석은 정말 뜨겁게 달궈졌다. 지금까지 출전했던 궁수들과는 달리 근접전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현성에게 모두들 매료되었다.
“우오오오오!” “레드 파운!”
경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관중석에서는 현성의 이름을 끝없이 외쳤다.
* * *
세릴리아 월드 개발팀실.
몬스터 침공 이벤트가 끝난 뒤로 조금 한가해진 운영진들과 직원들은 신대륙에 자그마한 이벤트를 하나씩 만들며 모니터를 통해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한 운영진이 우연히 신대륙의 첫 왕국인 바인마하 오아국의 수도 페리안에서 열린 무투 대회를 지켜보던 도중 다소 낯익은 유저를 보게 되었고, 그 유저가 레드 파운임이 밝혀지자 쉬고 있는 동료들을 불렀다.
“어이, 이것 좀 봐. 전에 팀장님께서 주시하던 그 유저야.”
그에 소파에서 널브러져 있던 동료들이 급히 몸을 일으키며 운영진의 모니터에 시선을 던졌다.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상댕방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며 모두들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와… 레드 파운 유저의 상세정보를 통해 스탯을 살펴봤는데, 엄청나군. 생활직의 힘인가.”
“팀장님 말씀 못 들었어? 궁수 전직을 할 당시 손재주 스탯이 300이었잖아.”
“뭐어? 전직시험은 레벨 10때 볼 텐데, 그동안 생활직에 매달렸다는 거야?”
레드 파운 유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운영진들은 경기가 순식간에 끝나자 모두 아쉽다는 듯 자리로 향했다.
* * *
무투 대회는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 되었다. 관중석에서 경기장을 내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경기장이 어두워지자, 무투 대회의 도우미로 초빙한 마법사들이 라이트(Light)마법을 발현시켜 장내를 밝게 비추었다. 그러자 날이 저물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지켜보는데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흐음. 여자고 뭐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구먼.”
나는 장시간 펼쳐진 14라운드 경기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소드 마스터 페이샤와 여검사 이릴의 대결이었는데, 기본적인 검술에서나 오러의 강도에서나 페이샤가 월등히 우세한 조건에서 경기는 진행되고 있었다.
이릴에게 패한 스베니아와는 달리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페이샤를 보며 나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금은 살살해야 할 거 아냐?
페이샤가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냄과 동시에 이릴의 검을 두동강 내자 이릴은 전투불능으로 패하게 되었고, 그렇게 페이샤의 승리로 경기는 끝이 났다.
경기가 끝나자 나는 또다시 들뜨게 되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온 것이다. 이번에 맞붙을 상대는 ‘케이’라는 소드 마스터로, 레인지 마스터가 된 후로 소드 마스터와 붙어본 적이 없었깅 긴장이 되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상당히 설레었다.
물론 케이를 상대로 처음부터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처음부터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키게 된다면 그만큼 경기의 흥이 깨질 뿐만 아니라, 근거리 결투를 즐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투 대회에 참가한 이유가 우승을 하게 도니다면 초인과 맞붙을 수 있고, 또 초인을 꺾어야만 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곳 사람들의 궁수에 대한 시선도 바꿔놓으려는 의도도 있다. 궁수는 근거리에서 취약하고 후방지원에서만 쓸 만하다는 그런 이곳 사람들의 편견을 확실히 깨부술 작정이니까.
짧은 휴식시간이 끝나고 진행자의 부름에 나와 케이는 나란히 경기장으로 향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케이가 빙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에 나도 마주 웃으며 케이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고 경기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나와 케이의 등장에 관중석에서는 또다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고, 심판의 지시대로 케이와 인사를 나눈 뒤 일정한 간격을 두었다.
풀어진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시위를 활 끝에 걸고 왼손으로 활등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강자와의 대결 전에는 일어나는 현상일까?
경기가 시작되자 장내는 정적이 흘렀고 케이와 나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케이가 뽑아든 검을 늘어뜨렸다. 늘어뜨린 검신에서 짙고 푸른 오러가 밀려올라와 일정한 형태를 갖추었다. 한 치의 빈틈도 찾아볼 수 없는 케이를 보며 나도 전투자세를 취했다.
<6권에 계속>
외전 팔라딘
따스한 햇살이 푸르게 빛나는 초목들과 드넓은 대지를 감싸 안았다. 물론 나 역시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휴우, 이제는 현실보다 가상현실에 더 익숙해져서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가상현실인지 잘 모르겠구먼.”
심드렁해진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귀지를 후비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현성이 녀석은 일찍 접속해서 내 배틀 해머를 개조해 준다더니, 아직까지 꿈나라 여행중인가보다.
몬스터 침공 이벤트가 끝난 다음 날,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하자마자 대화를 걸던 현성이 녀석이 다짜고짜 신대륙 아리시아에 대해 말을 늘어놓더니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승낙을 했고, 현성이 녀석은 신나서 웃어재꼈다. 그 와중에 한 가지 빼먹은 것이 있다면 나와 내 단짝인 경훈은 2차 전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원의 권술을 익힌 경훈이는 2차 전직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비약적으로 강해졌지만, 전투 클레릭인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전보다 강해지긴 했지만 아직까진 트롤을 상대하는 것조차 벅차다.
솔직히 말해서 전투 클레릭이라는 직업을 왜 했을까 하는 생각도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이 직업이 그리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고, 이 직업을 선택함으로써 얻는 이득도 없었으니까.
전투 클레릭.
전투를 하는 성직자를 뜻한다. 물론 직업명은 거창하지만 전투력 면에선 여타의 직업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한다. 물론 신성 마법 면에서도 보통 성직자들보다 상당히 달리기도 하다.
그런 걸 잘 알면서도 왜 하필 전투 클레릭으로 전직을 했느냐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이도 있을 것이다. 평소에 아무리 생각 없이 사는 나라지만 이런 것까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것이니 궁금하면 지금부터 이어질 내 이야기를 쭉 보기만 하면 된다.
어젯밤, 팔라딘으로 2차 전직을 하는 과정을 뒤져보던 나는 너무나도 복잡한 전직 과정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신대륙에 위치한 신성제국에서 2차 전직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세릴리아 대륙에 위치한 작은 신성 왕국에서 수련 성기사라는 2차 직업을 가지고 신대륙 아리시아에 위치한 신성 제국에서 다시 한 번 전직시험을 본 뒤 정식 성기사로 뽑혀야 한다나?
아무리 팔라딘으로 전직을 하는 사람이 적다고 한들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운영자들의 머릿속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쳇, 귀찮게.
아무튼 수련 성기사가 되어도 2차 전직을 완료한 것이지만, 기왕 할 것이면 정식 성기사가 낫지 않은가?
아무튼 홈페이지를 뒤져본 뒤 여러 가지 정보를 습득한 나는 곧장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해 신성 왕국으로 향했다. 물론 전직시험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신성 왕국은 여타의 다른 마을과는 달리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갖추어진 왕국이었다. NPC 하나하나가 실로 살아있는 인간과 같이 행동했고,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가도록 해야겠다. 말하기도 귀찮으니까.
그리하여 도착하게 된 곳은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새하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커다란 신전이었다. 나와 같이 전투 클레릭인 유저도 한둘 있었고, 대부분이 NPC였는데 이 NPC들과 전직시험을 같이 본다는 우스운 설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뽑는 수련 성기사는 단 한 명.
운이 좋으면 전직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운이 나쁘면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충 묻어갈 생각이었지만 단 한 명밖에 뽑지 않는다니, 죽기 살기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직시험 신청서를 작성하고 전직시험에 필요한 준비물에 대한 글귀를 읽던 나는 다시 한 번 이맛살이 지그시 모아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이제부터는 묵직한 둔기가 아닌, 날이 선 검을 사용하라는 것이 아닌가?
나를 제외한 두 명의 전투 클레릭은 드디어 둔기에서 벗어났다며 손뼉을 쳤지만, 애초에 검과 같은 흉기(?)보다 묵직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둔기를 애용하던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검을 사용하지 않으면 전직시험을 볼 자격마저 박탈당하는데.
다시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로 돌아온 나는 친구 녀석들에게 하소연을 했고, 마침 할 것이 없다고 내 하소연을 들어주던 현성이 녀석이 기막힌 생각을 한 것이었다.
‘너는 둔기를 쓰고 싶은데 쓰지 못한다는 거지? 뭐 전적시험을 볼 때만 검을 사용하면 되는 거니까… 아하! 기발한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내일 아침 대장간 앞에서 보자! 네 배틀 해머를 기발한 무기로 개조해줄게!’
이것이 일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찍 접속했지만, 현성이 녀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새벽 같이 일어나 접속하던 강찬이도 오늘만큼은 보이지 않는군. 쩝. “으아, 이놈들 오늘 짜고 날 골리는 건가? 왠지 불안한데?”
지금쯤 접속했을까 하는 맘에 메신저 창을 열자, 여느 때와 같이 리아 양의 쪽지가 와있다. 미궁에서 만난 뒤로부터 이렇게 자주 쪽지를 주는 리아 양.
어째서인지 그녀는 날 피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쪽지를 자주 보내니 이거 도대체 속을 알 수가 없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굴이 빨갛게 달아롤라서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리아 양.
…얘기가 왜 여기까지 흘렀지.
“에휴, 현성이가 올 때까지 이곳저곳 돌아다녀봐야겠다.”
나는 배틀 해머를 어깨에 들쳐 멘 뒤 티르 네티아의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인트 모닝과 아리스 노아와는 달리 티르 네티아는 인간, 엘프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유저들이 머무는 커다란 항구도시였다. 게다가 이곳의 유저들은 패션 감각도 뛰어나 항상 내 눈을 즐겁게 해준다. 물론 여성 유저들이다.
“음… 쟤는 좀 아니야. 오! 저건 천사군. 쪼가 빠졌는데?”
할 일이 없을 땐 광장에 나와 눈요기(?)를 하다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신나게 구경을 하고 있을 때, 드디어 기다리던 메시지 창이 눈앞을 가렸다.
[레드 파운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오호!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승인!”
-아, 혁아! 미안하다. 늦잠을 자버렸네.
대화 승인을 하기가 무섭게 소리치는 현성. 다른 녀서과는 달리 워낙 내성적이라 여성 유저들이 많은 곳에선 돌처럼 굳어 버리는 녀석. 늦은 벌로 이곳에 데려올까 생각도 해봤지만, 오늘 내 무기를 개조해줄 녀석이었기에 한 번 정도는 그냥 넘어가기로 해야겠다.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늦잠을 자버렸다니까. 그건 그렇고, 넌 어디야?
“나? 천국이지. 흐흐흐.”
-이 자식 또 헛소리 하네. 뭐 또 광장에서 여자라도 구경하고 있냐?
현성이의 말에 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강찬, 경훈, 현성이 녀석은 나에 대해 뭐 이리 잘 아는지. 나참, 둘러대기도 귀찮으니 그냥 대답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 인마. 너는 어디냐?”
-역시, 안 봐도 비디오다. 나도 지금 광장인데. 시계탑 앞으로 올래?
흐흐, 역시나 여성 유저들이 없는 곳에 대피해 있었군.
“그래 알았다. 기다려라 곧 가마.”
[대화를 끊었습니다.]
대화를 마친 나는 다시 한 번 여성 유저들을 빙 둘러보며 시계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시계탑. 이제 다 자란 똥개와 현성이 녀석이 보인다. 나는 팔을 뻗어 손을 흔들어주었다.
“여기다!” “오, 루샤크!”
한걸음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녀석. 나는 그대로 등으로 돌려 대장간으로 향하며 말했다.
“무기 개조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리냐?”
“글세, 잘 모르겠네. 꽤 걸릴 것 같아. 그동안 넌 쉬고 있어.”
그것보다 어디서 쉬느냐가 문제잖아 이놈아. 배틀 해머가 없으면 폼이 나지 않아 광장에 가 여성 유저들을 구경할 자신감마저 없어져버리기 때문에 뭐라도 들고 있… 아차, 그러고 보니 내가 아끼던 모닝스타가 있었지.
그동안 배틀 해머에만 신경쓰다보니 모닝스타는 점점 아이템 창 속으로 묻혀가는 신세가 되었다.
“히야, 이제 너랑 경훈이만 2차 전직을 하면 신대륙으로 건너갈 수 있겠다. 신나는 여행이 될 것 같은데?”
어제부터 현성이 녀석 입에선 신대륙에 대한 이야기 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놈의 신대륙.
“신대륙이 그렇게 재밌는 곳이냐?”
“그래. 직접 가보면 알게 돼. 이곳과는 다른, 판타지 중세 시대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아리시아 대륙! 거의 현실과 흡사한 곳이지.”
녀석의 눈을 보니 상당히 들뜬 상태였다. 저 상태에서 자극을 주게 된다면 금방 흥분해 날뛰게 될 녀석이었기에 나는 그냥 침묵을 하기로 결정했다. 쳇, 나한테 말하지 말라는 것은 숨 쉬지 말라는 것과도 같은 뜻인데.
그렇게 대장간에 다다르게 되었다. 역시 대도시에 걸 멎는 규모를 자랑하는 대장간이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반짝반짝 빛나는 대머리에 근육질의 몸매를 가진 늙수그레한 대장장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대장간에 일가견(?)이 있는 현성이 앞으로 나섰다.
“노와 모루 좀 쓸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음… 강철도 좀 필요해요. 무기를 개조하려고 하거든요.”
그 뒤로 이어지는 현성의 말에 대장장이를 자극했는지 둘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련과 블랙스미스 스킬 마스터라는 현성의 말에 대장장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성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한 것이겠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어른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만 한 강철 서너 개를 들고 나오는 대장장이와, 또 그것을 받아 녹이기 시작하는 현성을 보며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현성이가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나? 별걸 다 할 줄 아는군. 녀석은 뭔가 얇고 둥그런 검신을 만드는가 싶더니 이내 게게 손을 뻗었다.
“그 배틀 해머 줘봐.”
그에 나는 군말 없이 배틀 해머를 건네주었다.
“이제 무슨 일을 하던 그냥 있어야 된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으악!”
그런데 녀석이 갑자기 대답도 채 하기 전에 배틀 해머의 손잡이 부분을 댕강 잘라내는 것이 아닌가? 순간 하늘이 발끈한 나는 목구멍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그걸 자르면 어떡해!”
하지만 뒤로 이어진 현성의 말에 나는 도로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개조한다고 했잖아. 개조하기 싫어? 전직시험을 보려면 어쩔 수 없잖아. 도로 붙여서 줄 테니까 그냥 검 하나 사서 써.”
“아, 미, 미안.”
상당히 뻘줌해진 상태에서 저놈의 똥개가 비웃는 듯 나를 꼬나보고 있다. 뭘 봐 인마! 똥개 녀석의 까만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녀석은 눈을 내리깔 생각이 없는지 끝까지 날쳐다보고 있었다.
“에휴, 똥개 눈싸움 이겨서 좋을 게 뭐 있다고 내가 이러고 있지. 그럼 현성아, 맡길 테니 다 하면 불러줘. 나는 광장에 좀 가 있을 테니.”
“그래! 나도 간만에 재밌는 일이 생겨 신이 난다.”
까앙! 까앙!
연신 망치질을 하면서 신이 난 녀석을 뒤로한 나는 아이템 창에서 모닝스타를 꺼내 어깨에 들쳐 메곤 시계탑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아~ 역시 눈요기하겐 이곳만 한 곳이 없다니까.”
나는 광장의 한쪽 가장자리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지나다니는 여성 유저들을 하나 둘 살펴보며 점수를 매겼다.
“꼭 못생긴 것들이 겉멋만 들었다니까.”
한 무더기(?)로 지나가는 오크(?) 떼를 보며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석궁과도 비슷한, 철로 제작을 했는지 은빛의 광택을 내고 있는 무기를 든 여성 유저를 볼 수 있었다.
긴 금발의 머리칼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사파이어를 박은 듯한 푸른 두 눈동자. 순간 나는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흐흐, 누군지는 몰라도 참 예쁘군. 복장을 보니 이제 중레벨의 티를 벗은 듯했다. 아니 잠깐, 정신을 차리고 유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나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리, 리아 양?”
허참, 옷이 날개라더니. 미궁에서 봤을 때와는 딴판인 그녀의 모습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경악을 했다고 봐야하나?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리아 양이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여어~ 안녕하세요.”
티르 네티아에 처음 오는 것인지, 조심스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그녀의 시선이 내게 옮겨왔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고개를 푹 숙이는 리아 양을 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말 걸지 말 걸 그랬나. 아무래도 내가 싫어서 피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아, 안녕하세요.”
머뭇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꼴 보기조차 싫진 않은 모양인지 대답은 해주었군.
“티르 네티아에는 무슨 일이세요?”
“그, 그냥 레벨도 좀 오, 로르고 해서요.”
여전히 말을 더듬는다. 흐음. 눈을 마주치려 핮 않는 것을 보면 피하는 것 같지만 매일 쪽지를 보내고 꼬박꼬박 대답을 하는 것을 보면 또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나 참, 뭐 어찌하라는 건지.
“몬스터 침공 이벤트로 인해 유저들의 레벨이 상당히 많이 올랐다죠?”
“네.”
“허허. 버그 쓴 거랑 다를 게 없구먼. 리아 양은 레벨이 몇이세요?”
또다시 머뭇거리는 리아 양. 으악 속 터진다!
“93이요…….”
“오, 7레벨업만 하면 2차 전직을 하는군요.”
“네.”
이 이야기를 시발점으로 리아와 난 그간 쪽지로 밖에 나누지 못했던 말을 늘어놓았다.
리아 야은 우리와 달리 수도 세인트 모닝으로 침공하는 몬스터들을 막아냈고, 중형 몬스터들이 무리지어 오자, NPC들도 나서서 유저들을 도왔다고 한다. 어찌 보면 티를 네티아보다 재밌을 것 같았지만, 몬스터들은 형편없었다.
틀로의 등장에 기겁을 하는 유저가 있는가 하면, 벽 뒤에 숨어서 꼼짝도 하지 않는 유저도 있었다고 하니,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현성이로부터 쪽지 하나가 날아왔따.
[혁아, 무기가 완성 됐다! 어서 와서 확인해봐!]
대화로 말하면 편할 것을 쪽지를 보내다니, 소심한 녀석.
“그래서 저희 쪽 몬스터 침공은 무승부로 결정이 났어요. 관청도 파괴 외었고, 몬스터도 모두 섬멸시켰고.”
쪽지를 확인하는 동안 리아 양이 쉬지 않고 말을 했던 탓에 끝 부분 중 중간은 잘라먹은 셈이 되었다. 이거, 끝 부분에서라도 장단을 맞춰줘야 하는군. 젠장.
“하하, 무승부라. 웬만해서 그럴 일이 없죠. 아 그건 그렇고 저는 이제 대장간으로 가봐야겠네요.”
“그, 그래요?”
자리에서 일어서자 리아도 덩달아 일어서며 물었고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리아 양은 뭐 바쁘세요?”
“아, 아뇨. 시간은 많아요. 헤헤.”
“그럼 같이 대장간이나 가요. 하던 이야기마저 하면서.”
“그래요.”
먼저 대장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리아가 옆으로 바짝 붙어 걷기 시작했다. 근데 걷는 게 왠지 부자연스럽군. 아깐 잘만 걷더니 도대체 알 수 없는 여자다.
대장간에 다다르자 현성이 손을 흔들고 있었고, 빌어먹을 똥개 녀석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앗? 리아? 오랜만이네요! 크로스 보우 건을 아직 쓰고 계셨네요!”
“앗! 레드 씨? 안녕 하세요! 어머, 저게 루카에요? 히엑. 정말 많이 컸다!”
나와 이야기할 땐 저렇지 않았는데 으흠. 역시나 날 피하는 건가? 리아 양이 루카에게 다가가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사이 현성에게 다가간 나는 녀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야, 혹시 리아 양이 너한테도 매일 쪽지 하고 그러냐?”
“아니. 안 오는데?”
“그래? 으흠.”
“음? 뭐야. 너한테는 매일 쪽지하고 그러는 거야?”
“몰라, 인마.”
내빼려고 몸을 일으키자 현성이 작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왜, 자세히 말 해봐. 리아 양 태도를 보니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흐흐.”
“뭐?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인마. 나를 피하는 것 같다니까. 그건 그렇고 배틀 해머는 어떻게 된 거야?”
“배틀 해머? 아, 여기. 잘 봐 이 손잡이 부분은…….”
휴우, 말발이 약한 내가 이렇게 상황을 돌리는 것은 또 처음이다. 그래도 대충 배틀 해머를 둘러대는 것이 먹혀들었는지 현성이 녀석이 개조가 완성된 배틀 해머를 들고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뭐야, 듣고 있는 거야?”
“아, 미안. 다시 설명 좀 해주라.”
“음냐. 다시 처음부터 설명한다? 그러니까 이 손잡이 부분있지? 이곳을 이렇게 돌려주면 돼.”
기다란 손잡이를 붙잡고 에어바이크 시동을 걸듯 회전시켜주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와 배틀 해머의 막대 부분의 사이가 벌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뽑으면.”
스르릉.
손잡이 부근을 잡아당기자 마치 검갑에서 검을 뽑아내는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검을 배틀 해머에 꽂아 넣으면 그대로 둔기로 사용할 수 있고, 이렇게 검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를 해준 것이로군.
때 하나 묻지 않은 순은색의 검신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눈부신 빛이 대장간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것을 본 나는 경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개조를 해준다기에 배틀 해머를 검으로 만들어줄 줄 알았건만, 이렇게 실용적으로 만들어 놓다니…….
“아주 넋을 잃었네. 어이, 정신 차려. 자, 이제 손에 익히도록. 전직 시험은 언제 보는 거야?”
현성이 건네주는 배틀 해머를… 아니 이제 무기의 이름이 뭐 어떻게 데는 거지? 아무튼 그것을 받아들었다.
“월드타임 오늘 오후 9시까지 도착해야 하는 거니까, 슬슬 출발해야 된다.”
현성이 했던 것과 반대로 검신을 배틀 해머의 막대 부근에 꽂아 넣고 손잡이를 회전시키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배틀 해머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냥 겉모습만 본다면 영락없는 배틀 해머였다. 좋아, 정말 맘에 드는 무기이다.
“으아~ 그럼 얼른 가봐. 그 신성 왕국이랑 이곳이랑 거리가 꽤나 먼 것 같은데. 워프스크롤 같은 것도 없잖아. 어서 출발해야 하지 않아?”
늘어져라 기지개를 켜는 현성을 보며 피식 웃어 보인 나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보자 레드. 리아 양, 저는 이만 전직시험을 보러 가봐야겠네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가봐야겠습니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루카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수줍은 듯 웃으며 대답하는 리아 양.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신성 왕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마차를 몇 번 갈아타야 하는 거지? 전직시험만 아니었다면 그딴 곳엔 가지 않았을 것이다. 팔라딘만 되 봐라. 그딴 곳에 다신 가나!
* * *
두두두두.
몸을 마차에 맡긴 채 어딘지 모를 길을 달리는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다. 소박한 마차에 달린 커튼을 열자 저기 숲속에 고블린 무리가 보인다. 물론 그 고블린 무리에게 달려드는 유저들도 볼 수 있었다.
마차를 타고 얼마나 달린 걸까? 티르 네티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임을 틀림없었다.
“아 귀찮아.”
나는 귀지를 후비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거울을 본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거울 속에서 잘 생긴 한 소년이 날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푸흐흐. 언제 봐도 나의 유머감각은 뛰어나다. 물론 내 유머감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훈이 녀석이 들었다면 온갖 욕설을 퍼부었겠지.
벌써 세 번째 갈아타는 마차. 이 마차의 종점이 신성 왕국에 위치한 마구간이니 그곳에서부터 걸어가면 되겠군. 출출함을 느낀 나는 아이템 창에서 미리 사둔 삶은 계란 두어 개를 집어 들었다.
마차에서 까먹는 계란의 맛은 일품이다. 못 믿겠으면 직접 해보던가. 껍질을 전부 벗긴 계란을 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으며 밖을 내다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마차는 금세 신성 왕국에 도착했고. 대금을 지불한 나는 마차에서 내려 대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신성국은 대낮처럼 밝았다.
“딱 맞춰 왔군.”
나와 비슷한 차림새를 한 어제 본 전투 클래릭 유저 두 명과 나머지 전직시험을 보는 NPC들을 따라 대 성당의 레드카펫을 밟고 높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왕국의 수많은 국민 NPC들이 대 성당 주변에서 두 손을 모으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참, 이런 건 별로 내키지 않는데 말이지.
전직 시험을 보는 이들은 나까지 합쳐 도 합 일곱 명 남짓 되는 NPC와 유저들이었다. 화려한 대성당의 문턱을 넘어 들어오게 된 곳은 전직 시험소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화려한 배경을 가진 성당 내부였다.
워낙 넓었기에 터벅터벅 걷는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였다. 참, 이런 곳에서 전직 시험을 보게 될 줄이야.
“하나 둘 셋 넷… 일곱 명이로군. 반갑다. 나는 신성 왕국의 성기사단의 단장인 ‘젝’이라고 한다. 현재 정식 성기사로서 신성 왕국을 위해 힘쓰고 있지. 물론 여러분들의 전직교환이기도 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음성. 갑주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내 시선은 자연스레 갑주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으로 옮겨졌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를 가진 전직교환 NPC 젝. 은빛 광택이 나는 갑옷을 걸친 그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후, 전직시험을 시작하기로 하겠다. 먼 곳에서 이곳까지 온 자도 있을 테니 잠시 안식을 취하기 바란다.”
말을 마친 젝은 팔짱을 끼고 나를 포함한 전직시험생 전부를 빙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를 훑어보며 굴러가던 눈동자가 내게로 우뚝 멈춰 섰다.
“결의로 가득 찬 눈빛이군. 자네 이름이 뭔가?”
결의로 가득 차? 이놈 시 쓰나?
“루샤크입니다.”
반박을 할 경우 전직 시험을 못 볼 가능성이 있었기에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어진 젝의 물음에 나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팔라딘으로 전직하려는 거지?”
“예?”
아니, 2차 전직을 하면 강해지니까 2차 전직을 하지 왜 한다는 말이냐? ‘괜찮은 녀석이다.’라는 첫인상과는 달리 희한한, 마치 미지의 세계에서 건너온 요상한 존재로 보이는 이 녀석.
“시간이 다 되었군. 지금부터 전직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팔라딘이란 주신의 뜻을 가진 이들을 보필하며 약한 자를 돕고¨¨.”
이 녀석도 기사도 정의 나부랭이였군. 아니 잠깐, 그럼 나는 기사도 정의 나부랭이로 전직하러 오는 건가? 젝이란 녀석의 지루한 말을 울며 겨자 먹기로 듣던 나는 녀석의 말이 끝날 때 마다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란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주신에 대한 믿음. 지금부터 팔라딘(Paladin, 성기사)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능력부터 시험하겠다.”
드디어 지루한 이야기가 끝이 나고 본론으로 넘어가는군.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별 볼일 없는 지루한 것이 팔라딘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능력이었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대자연의 기운. 즉 마나를 신성력으로 바꾸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바꾸느냐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이가 없진 않을 것이다.”
젝은 말을 하다말고 자신의 뒤편에 위치한 탁자에서 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들고 와 나를 비롯한 나머지 팔라딘 지망생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것은 성수(聖水)가 담긴 포션이다. 그것을 마셔 마나가 신성력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팔라딘으로 전직할 자격이 애초에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부터 아무 말 없이 성수를 복용하도록.”
반발하고 싶었지만, 전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포션의 마개를 따곤 성수를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그 뒤로 벌어진 일에 나는 더욱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성수를 복용하셨습니다. ‘상태 창’의 마나를 신성력으로 변환합니다. 변환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당연한 걸 묻나? 신성력으로 변환하지 않으면 팔라딘으로 전직할 수 없다는데.
“예.”
번쩍!
대답과 동시에 상태 창을 열어본 결과 마나는 신성력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역시 팔라딘으로서 자질을 갖춘 자는 몇 없군. 신성력으로 변환되지 않은 자는 알아서 이곳을 나가주기 바란다.”
젝의 말에 세 명의 NPC가 한숨을 푹 내쉬며 성당을 빠져나갔다. 참 냉정하군. 나를 비롯한 두 명의 유저가 남은 것을 보니 대상이 유저라면 성수의 효과는 100% 먹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나라지만 어깨에 힘이 빠져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이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도와줄 수도 없었기에 그저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NPC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 젝의 음성이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루샤크라고 했던가? 분명 전직시험 지침서에서는 날이 선 검을 가져오라고 했을 텐데.”
고개를 돌려 다른 팔라딘 지망생들을 보니 모두들 허리춤에 고풍스런 롱 소드나 바스타드 소드를 차고 있었다. 그에 나는 들쳐 메고 있던 배틀 해머를 두 손을 잡고 손잡이 부근을 회전시켰다.
철컥.
스르릉.
“됐습니까?”
날이 선 순은색의 검신을 보여주며 묻자 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를 신성력으로 전화시키기까지 했는데 설마 검이 엇다고 자격박탈을 시키려는 의도에서 물은 건 아니겠지?
다른 지망생들이 신기한 듯 내 배틀 해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크흠. 미안하게 되었군.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어버렸군. 자, 그럼 첫 번째 시험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잠시 말을 끊었다. 젝이 다시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신성력은 마나와는 조금 다른 기운이다. 하지만 신성력을 운용하는 것은 마나를 운용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운용이 된다. 여러분 모두 전투 클레릭일 당시 마나를 이용해 신성마법을 발현시켰을 것이다. 지금부터 주어질 첫 번째 시험은 신성력을 이용해 힐 볼을 시전 하는 것이다.”
뭐야 별거 아니잖아? 마나 게이지가 신성력 게이지로 바뀌었다고 해서 신성마법을 발현시키지 못할 것이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피식 웃으며 왼손을 들어올렸다.
“힐 볼.”
우웅.
내 손바닥에서 뿜어진 빛무리가 허공으로 붕 뜨더니 이내 둥그런 구체의 형태를 갖추며 반짝반짝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좋아 훌륭해. 너희들도 어서 시전해 보도록.”
나를 제외한 나머지 지망생들이 쭈뼛쭈뼛 손을 들어 올리며 힐 볼을 시전했다. NPC 지망생은 나와 동일한 농구공만 한 구체를 형성해 냈으나, 나머지 두 유저는 배구공보다 좀 더 작은 크기를 가진 힐 볼을 형성해냈다.
“그쪽 둘은 수련이 부족한 모양이로군. 여기서 점수를 먹이도록 하겠다. 아차, 번호표를 붙이는 것을 깜빡했군.”
이전보다 더욱 밝아진 힐 볼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젝이 다가와 가슴팍에 번호표를 붙여주며 말했다.
“1번과 4번은 A, 나머지 2, 3번 둘은 C를 주겠다.”
젝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숙여 내 가슴팍에 붙어있는 번호표를 보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 가슴팍에 붙어있는 번호표는 4번.
첫 점수부터 높게 받았군. 역시 난 다재다능해. 핫핫.
자화자찬을 하며 감탄하고 있을 때 점수를 먹이던 젝이 다시 말했다.
“이번엔 힐 볼에 신성력을 좀 더 불어넣어 강화시키는 법을 알려주겠다.”
[홀리 볼(Holy Ball)스킬을 알게 되었습니다.]
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홀리 볼이라는 스킬의 키워드를 획득했고, 키워드를 획득하기가 무섭게 또다시 젝이 말했다.
“형성된 힐 볼에 신성력을 붙어 넣는 방법으로 강화를 시키는 것이다. 자, 시도해 보도록.”
정말 막무가내인 전직시험이었지만 내 성격 또한 막무가내였기 때문에 주어진 문제에 반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힐 볼에 신성력을 주입하라고? 어떤 방법을 이용하면 될까?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나는 잔머리를 굴리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게임 스킬에는 정해진 한도가 있다. 물론 스킬을 조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유저들을 낚다니. 운영자들도 참 가지가지 한다.
“홀리 볼.”
홀리 볼을 외치자 펼치고 있는 손바닥 위로 새하얀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미 형성 된 힐 볼을 디스펠 시킨 뒤 배구공만 한 크기를 가진 구체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홀리 볼(Holy Ball) 스킬을 입수했습니다!]
쳇, 알게 된 스킬의 스킬 명만 말하면 되는 것을 문제를 꼬아서 낸다는 식이었군. 완성 된 홀리 볼은 기존의 힐 볼과는 달리 뿜어내는 빛이 더욱 짙었다.
“우와.”
홀리 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이렇게 빨리 홀리 볼을 형성시키다니. 4번 지망생에겐 S를 주도록 하겠다. 이제 신성마법을 거두어도 된다.”
젝의 말에 폈던 손을 움켜쥐자 홀리 볼은 물풍선 터지듯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렸다. 나머지 지망생들도 곧 홀리 볼을 형성해냈고 전직시험은 계속해서 진행 되었다.
두 번째 시험에선 둔기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검을 더욱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지금껏 배운 기본 검술로 대련을 시켰다.
아쉽게도 두 번째 시험에서는 B라는 점수를 얻게 되었다. 죽기 살기로 했건만 NPC 지망생이 워낙 검을 잘 썼기 때문에 당해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 이번 시험은 신성력을 이용해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오러를 검에 맺히게 하는 시험이었다. 이건 입수한 스킬을 그냥 사용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가볍게 A라는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그 후 기다리고 기다리던 마지막 관문! 오러를 쉽게 끌어올리는 것에 감탄한 젝이 반짝이는 눈을 하며 말했다.
“팔라딘은 소드 마스터와 일대일로 붙어도 지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부터는 신성력을 이용한 실드를 펼치는 법을 알려주도록 하겠다. 이것을 할 수 없다면 팔라딘이라 불릴 수도 없을 것이며, 이번 전직시험에서 떨어지게 된다.”
온 신경을 집중해 젝의 말을 듣고 있을 때, 난데없이 나타난 메시지 창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따.
[퀘스트. 엔젤릭 실드 스킬을 획득하라!]
엔젤릭 실드 스킬을 입수했으나, 아직까지 연습중인 단계이다. 신성력을 이용해 엔젤릭 실드를 발현시키면 엔젤릭 실드 스킬을 정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보상. 엔젤릭 실드(Angelic Shield) 스킬 획득.
나 참, 전직시험을 보는 도중에 퀘스트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오늘따라 운영자 녀석들이 원망스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스킬 창을 열어 목록을 쭉 살펴보았다. 역시 ‘연습 중’이라고 표기 되어 있군.
나는 배틀 해머에서 뽑아든 검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엔젤릭 실드.”
그에 느릿하게 형성 된 새하dis 둥근 막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빛이 옅고 희미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연습 중인 스킬을 사용했으니 그런 것 같았다. 이것의 수련치를 채우면 퀘스트를 완료하는 것이 되겠군.
잠시라도 신경이 흐트러지게 되면 몸을 감싸고 있던 둥근 막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야 했다.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난생처음 진지한 태도로 일에 몰두했다.
엔젤릭 실드를 전개하는 동안 신성력은 계속해서 감소되었고 마나가 급격히 감소될 때처럼 현기증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빠져나가는 허전한 느낌이 적잖게 있었다. 이맛살을 지그시 모은 채로 온 신경을 집중하던 끝에 옅었던 둥근 막이 점점 색이 짙어지는가 싶더니 노랗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엔젤릭 실드의 색은 금색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이내 반짝이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신성력이 거의 바닥날 때쯤이 돼서야 반가운 메시지 창이 눈앞에 형성되었다.
번쩍!
[퀘스트 완료!]
퀘스트 완료.
보상 엔젤릭 실드(Angelic Shield) 스킬 획득.
완성시킨 엔젤릭 실드를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다른 지망생들을 살펴보았다. 아직까지 새하얀 둥근 막의 형태밖에 잡지 못한 지망생도 있었고 나와 동일한 금색의 엔젤릭 실드를 전개한 지망생도 볼 수 있었다.
“아니 벌써 엔젤릭 실드를 전개시킬 수 있게 되다니… 정말 놀라워. 3번 지망생과 4번 지망생에게 A를 주도록 하겠다. 아직까지 엔젤리 실드를 전개하지 못한 지망생들은 불합격. 보나마나 신성력이 전부 바닥이 났을 것이다. 3번 지망생과 4번 지망생의 점수를 계산해본 결과 4번 지망생이 더욱 높은 점수를 거두었기에 4번 지망생을 팔라딘으로 임명한다.”
젝의 말에 다들 부러운 눈빛을 머금은 채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흐흐흐 디디어, 드디어 팔라딘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원래라면 번쩍! 하며 전직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생긴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젝에게 물었다.
“저… 팔라딘으로 임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전직이 되지 않는 거죠?”
“그게 궁금했던 것인가? 전직은 월드타임으로 내일 오후 12시. 팔라딘 시상식을 통해 국왕에게 직접 작위를 물려받음과 동시에 전직을 하게 될 것이다.”
그에 나는 좌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직시험이 끝나자마자 바로 2차 전직을 하는 줄 알았더니 귀찮은 절차를 밟아야 하다니!
<외전-팔라딘 마침> -by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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