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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지 마스터[7-7]fal
절대긍정
2011-12-15 오후 3:03:49 Hit. 1990
새로운 초인의 출현(2)
'이익!'
콰앙!
카르토니아는 또다시 손아귀와 두 팔이 얼얼해지는 것을 참
으며 맹렬히 날아드는 붉은 섬광을 쳐냈다. 건틀렛에 가려 보
이진 않았지만 이미 손아귀가 터져 피가 흐르는 상황이었다.
두손으로 검을 고쳐 잡은 카르토니아가 저 멀리서 당당히
서 있는 도전자의 시선을 맞받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뭐, 뭐지? 대관절 저것이 화살이란 말인가?'
이를 악문 카르토니아의 검병을 쥔 두 손에 힘이 들어가자
건틀렛 사이로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손아귀가 터져나간
고토오받 두 팔에서 전해져 오는 얼얼함이 더했다.
'나는 카토 왕국을 대표하는 초인. 그랜드 마스터다. 궁수 따
위에게 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순간 카르토니아의 눈썹이 역팔 자로 휘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검의 검신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의 색깔도 한
층 더 짙어졌다. 카르토니아는 자신이 한낱 궁수에게 이렇게
밀린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카토 왕국에서 지금껏 싸워오면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
었던 그는 자신을 몰아붙이는 궁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카
토 왕구이 유명하지 않던 탓에 찾는 유저들이 거의 없었다)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가 빛을 발하자 도전자의 입꼬리가 슬
쩍 말려 올라가는가 싶더니 무어라 중얼 거리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군'
몇 마마디와 함께 도전자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퍽 꺼져버렸다.
언제 어디서 붉은 섬고아이 쏘아질지 몰랐기 때문에 카르토니아
는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현성은 기척을 죽인 채 허공에 떠 카르토니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도의 무공인 허공답보를 시현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지속적으로 마나가 감소하느나 것을 감안해야 햇지만.
'마나 회복력과 마나의 절대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긴 했지만
중원으 보법들을 마구 쓰니 금세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는군.
이제 슬슬 마무리 지어야겠어.'
지속적인 마나 감소를 느끼며 현성은 허리품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는 재빨리 카르토니아를 겨냥했다.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킨 화살이나 싸이클론 애로우를 쓸 시 카르토니아의 팔
이 날아가거나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었기에 오러를 발현시
키거나 싸이클론 애로우를 쏠 생각은 없었다.
"파워 샷(Power shot)."
이리저리 살피던 카르토니아가 고개를 들어 올리려는 찰나
현성은 당겼던 활시위를 슬쩍 놓았다. 그에 활시위를 벗어난
엄청난 파괴력이 담긴 화살이 중력의 힘을 받아 카르토니아의
왼쪽 어깨를 향해 더욱더 맹렬히 폭사되었다.
푸욱.
"허억."
지켜보던 모두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카토 왕국의 왕실 근
위기사단장이자 카토 왕국을 대표하는 초인 카르토니아가 난생
처음 보는 떠돌이 궁수 도전자에게 패한 것이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다.
활시위를 놓으며 시현하고 있던 허공답보를 바로 풀어버렸기
때문에 현성은 사뿐히 지면에 착지한 채 화살 하나를 꺼녀 또
다시 카르토니아를 겨냥했다.
"계속하기겠습니까?"
"져, 졌다."
카르토니아의 말에 현성은 겨냥하고 있던 활을 내리며 화살
을 회수했다. 그가 화살을 도로 화살통에 꽂아 넣고 막 뒤돌아
서 연무장을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잡아라. 저자는 비겁한 술수를 써 본인을 꺾었다."
카르토니아가 소리쳤다. 그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
검을 뽑아들고 현성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카르토니아의 외침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도대체가 이곳 귀
족이란 족속들은 전부 쓰레기로군.
달려드는 기사들을 보며 퀵스텝을 걸었다. 마나가 거의 바닥
을 보였기 때문에 수적으로 밀어붙이는 기사들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나는 도주를 택했다. 시퍼런 오러를 머금은 기사들의 검
이 사방에서 찔러 들어오는 것을 보며 나느 지면을 박찼다. 그
리곤 허공답보를 시현해 성벽 위에 올라섰다.
"궁수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하라!"
마나가 거의 바닥난 것을 느끼며 극심한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화살을 볼 수 있었다. 사방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그때였다. 백호의 몸을 감쌌던 둥근 막이 사라지며 모습이
순식간에 자라났다. 백호는 루카와 맞먹는 크기로 돌아갔다. 중
급 정령의 본체로 돌아온 백호를 중심으로 흰색의 둥근 막이 생
겨나기 시작했다.
비처럼 쏟아지던 화살이 백호의 실드에 적중하자 화살촉이 뭉그러
지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호오. 녀석. 쓸 만한 걸?
나는 검을 쥔 손아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며 이를 갈고 있
는 카르토니아를 향해 외쳤다.
"그랜드 마스터라고 보기엔 당신이 이룩한 경지는 너무 보잘
것 없군요."
"비천한 평민 주제에 어느 안전이라고 저딴 막말을......"
카르토니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두 눈이 벌겋게 충혈
된 것으로 보아 화가 단단히 난 듯했다. 귀족 녀석들은 이렇게
도발이 잘되는 건가?
바인마하 왕국의 페리안과 비교해봤을 때 저자는 결코 그랜
드 마스터에 미치지 못했다. 패바를 인정하지 않고 비겁한 술
수를 썼다고 우겨대는 모습을 보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디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도대체 내가 어떤 비겁한 술수
를 썼다는 것입니까?"
이어진 카르토니아의 답변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화살에 오러를 불어넣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기에 공간이동이라는 술수를 썼기 때문이다."
허허, 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오는군. 최대한 신법을 발
휘해 빠르게 움직여 나타나는 현상더러 공간이동이라니. 게다가
레인지 마스터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군.
그냥 달아나려던 것이 본래의 계획이었지만 헛소문을 퍼뜨릴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에 난 이대로 물러서지 않고 더 이상
검을 쥐지 못하게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 마나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 이형환위를
전개해 카르토니아의 뒤로 접근한다. 그런 다음 그의 어깨를
향해 오러를 머금은 활을 쏜다면 그대로 팔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아니, 기다릴 필요도 없겠군. 카르토니아의 휘하의 기사들이
이곳까지 올라오지 못하는데다 궁수 부대들의 화살은 이미 백
호의 실드에 가로막혀 무용지물이 된 상태.
아이템 창을 열어 마나 포션을 꺼내 마신 다음 뒤를 노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 현재 카르토니아의 뒤로 어느 정도 공간
이 있었다.
나는 아이템 창에서 마나 포션을 꺼냈다. 마개를 따 시원한
마나 포션을 들이키자 급속도로 회복되면 마나는 이내 절반 이
상 회복됐다.
"백호. 실드를 해제시켜. 그리고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
-네. 마스터.
"퀵스텝."
백호의 실드가 서서히 걷히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퀵스텝을
걸었다. 몸이 비약적으로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카르토니아의
뒤를 노렸다. 저 정도 공간이라면 충분하다.
잠시 기사들이 흐트러지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느 그대로 지면
을 박찼다. 이형환위를 전개해 눈으로 식별하기 힘든 속도로
카르토니아의 뒤에 접근했고 기사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서 화살을 꺼내 활시위에 메겼고 화살촉에
붉은 오러가 발현되었다. 뒤늦게 카르토니아가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
서걱.
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오른
팔이 날아간 카르토니아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뒤늦게 기사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카, 카르토니아 님."
"저자를 죽여라!"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장검이 바람개비처럼 회전하
며 이쪽으로 폭사되는 것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아직 퀵스텝의
지속시간이 끝나지 않았기에 나는 다시 한 번 지면을 박찼다.
휴우. 조금만 늦었더라면 발목이 잘려나갈 뻔했어. 성벽 위에
착지하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면 팔이 날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군요. 당신은 초인이라 부
르기 힘든 자라는 사실을."
꽤나 모욕적인 말투로 말을 내뱉었지만 카르토니아는 대답하
지 않았다. 아직까지 넋을 잃고 잘려나간 오른팔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피를 흘리면 위험합니다. 큐어(Cure)."
언제 나타났는지 궁정마법사로 보이는 노인 하나가 카르토니
아의 팔에 대고 마법을 전개했다. 오러에 의해 입혀진 상처라
그런지 회복이 무척이나 더뎠다. 그런 카르토니아를 뒤로한 채
나는 성벽에서 뛰어 내렸다. 현재 성안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
은 모두 연무장에 있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빠져나가면 되겠군.
백호의 모습이 급격히 줄어든 뒤 둥근 막에 휩싸이는 것을
확인한 나는 퀵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이렇게 달려보는 건 또 얼마 만인가
얼마나 달렸을까. 카토 성의 성문을 벗어난 나는 루카를 불
렀고, 내 부름에 루카가 순식간에 나타났다.
나는 매직 아머에 불어넣은 마나를 회수한 뒤 루카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이대로 바리안 시로 가야겠군. 카토 왕국의 수
도에서 벗어난 나는 외각 지역으로 향했다. 앞으로 이곳 카토
왕국의 수도엔 절대로 들어가지 말아야겠군.
루카를 타고 달리자 금세 카토 왕국의 외곽 지역에 오게 되
었다. 수도와 비교해 발전이 덜 되어 있었지만 오히려 더 정감
가는 곳이었다.
나는 루카의 등에서 내려 커다란 논 사이의 길을 조심히 걸었다.
이거 빠지게 된다면 옷에 진흙이 몽땅 묻겠는걸?
"나으리, 조심해서 건너십시오. 왼쪽 도랑은 물이 깊어 빠지
면 위험합니다."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척이나 순박하게 생긴,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노인
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지만 노인은 아직까지 걱정스런 얼
굴을 하고 있었다. 뭐 이곳에 빠진 이들이 많은가 보지?
나는 빙긋 웃으며 노인에게 말했다.
"저기 할아버지, 혹시 발리안 시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
야 하는지 아세요?"
"발리안 시라면......."
발리얀 시라는 말에 노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의문은 노인의 대답에 곧 풀어졌다.
"발리안 시라면 못된 영주가 다스리는 도시인데 설마 그곳에
가려고 하는 건가요?"
노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못된 영주라. 하긴 기
사를 보내 드워프들을 납치할 정도로 못된 영주였으니 악명도
자자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곳에 갈 생각이에요. 볼일이 있거든요."
"굳이 가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조심하십시오. 저쪽으로
가면 됩니다."
노인이 낫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수도 레비안 시의 반대편
방향을 가리켰다. 그에 나는 웃으며 노인에게 목례를 한 뒤 논
길에서 나와 루카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가자, 루카. 그리고 부득이하게 매직 아머를 다시 착용해야 할
테니 너희들은 발리안 시에 도착하면 몸에서 떨어져야 한다."
-네, 마스터.
-넹~.
-알았어, 형.
-알았다.
나는 정령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달리는 루카의 등에
착 달라붙었다. 루카가 워낙 빠르게 달렸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발리안 시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농노들의 도시인가? 발리안 시에 도착하자 루카는 속
도를 줄여 천천히 걸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좁디좁은 밭을 갈고 잇는 한 농노를 보았
다. 외각의 농노들과는 달리 눈빛엔 희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농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선을
외면하며 떨리는 팔로 밭을 가는 농노를 보며 난 고개를 갸우
뚱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뭐 하나하나 신경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루카에게
발링란 시의 중심부로 향하도록 지시했다.
중심부의 다다랐을 땐 낡고 초라한 다른 집들과는 달리 무려
3층에 달하는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저택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택 입구에는 은빛의 고급스런 풀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한 기
사 둘이 검을 쥐고 서 있었다.
막상 오게 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납치된 드워프들을 몰
래 빼내어 카토 산맥으로 달아날지 아니면 못된 영주를 응징해
주고 가야 할지 고민이 됐다.
루카의 등에서 내려온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등 뒤로 넘겼
다. 이런,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아이템 창에 넣어둔 것을 깜
빡했군.
큰 소란을 일으키기 싫으니 몰래 드워프들을 구출해 가야겠
다. 나는 빙긋 웃으며 내 몸에 붙은 정령들을 보았다.
이제 이 녀석들의 힘을 빌려야겠군.
"백호, 현무, 이곳에 갇힌 드워프들을 찾아줄래?"
-네, 마스터.
-알았어, 형.
대답을 마친 백호가 허공으로 둥둥 떠오르더니 마치 연기처
럼 사라져버렸다. 발등에 붙어 있던 현무도 바닥에 폴짝 뛰어
내리더니 녹아내리듯 땅속으로 사라졌다.
자. 그렇다면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군.
루카에게 적당한 곳에 숨어 있도록 지시한 난 퀵스텝을 걸었
다. 저택의 벽은 카토 성에 비해 현저히 낮았기 때문에 훨씬
더 쉽게 숨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소리를 죽여
벽을 넘어서자 드넓은 정원과 분수대를 볼 수 있었다. 겉보기
에도 발리안 시에 거주하는 농노들이나 평민들의 집과는 완벽
히 다른 저택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 카토 왕국에는 정말 착하고 선한 귀족은 없는 것일까?
드넓은 정원과 그 가운테 펼쳐진 연못을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누구냐?"
"음?"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에 나는 혼
비백산이 될 수 ㅂ밖에 없었다. 길쭉한 바스타드 소드를 찬 기사
하나가 손을 허리춤에 급히 가져가며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검을 막 뽑아든 기사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물덩이가 형성되더니 이내 그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내 왼팔을 감고 있던 청룡이 어느새 본체로 돌아가 기사를
묶어두고 있었다. 뒤늦게 마나가 감소하는 것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들킬 뻔했군."
기사가 기절하자 청룡은 물덩이를 지택하고 있던 힘을 회수
했고, 청년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물덩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흩어져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다시 작은 뱀의 형상으로 돌아온 청룡이 내 왼팔에 감겼다.
"고마워, 청룡."
-그럴 시간에 어서 드워프들이나 찾아봐.
쳇, 까칠하긴.
다른 정령들과 달리 청룡 이 녀셕은 왜 이리 성질머리가 더
러운 것일까? 나는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날려버린 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드넓은 정원에 심어놓은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나는
저택의 정문을 유심히 살폈다. 물론 적안을 개안한 상태로.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하자 이내 시야가 확보되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문을 지키고 잇떤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으흠,
뭐 잘났다고 안면 보호대를 저렇게 열어놓고 다닌담. 투구를
썼으면 안면 보호대를 닫는 것이 정상 아닌가?
정문을 지키고 선 두 기사에게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
다. 적어도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엑스퍼트급 기사들이로군.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으면 저런 기사들을 겨우 집 지키는
데 쓰는 것일까? 엑스퍼트급에 접어든 기사들의 감각은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범인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에 정문으로
출입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뭐 검사 유저들이 마나를 더욱더 실용적으로 사용하고 마나
를 느낄 수 있는 광전사나 기사로 2차 전직하면서 캐릭터의 감
각을 더욱 뛰어나게 만드는 추가적인 요소가 붙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
나는 정문에서 시선을 거두고 주변을 살폈다. 조금 전과 같
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특별히 조심해야 했다. 다행히 모두
아무렇지 않게 경비를 섰고 나는 저택의 뒷문으로 향했다.
정원에 깔린 잔디 밟는 소리가 적막을 깨는 것이 느껴졌다.
뭐 그렇다고 해서 들킬 이유는 없겠지? 이 정도로 작은 소리를
저 멀리서 들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때 드워프들을 찾았는지 현무의 전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형! 이 커다란 집의 지하에 드워프들이 잡혀 있어.
'그래?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음, 지금 형이 서 있는 위치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지하로 들어오
는 비밀 통로가 있을 거야. 잔디에 묻혀서 그냥 찾기는 힘들어.
'그래? 내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지금 알려줄게! 형 앞으로 다섯 발자국 정도 걸어가. 그럼 바닥을
디딜 때 지면의 소리가 다른 걸 느낄거야. 그곳에 이곳으로 올 수 있
는 비밀 통로가 있어.
'그래, 지금 바로 들어갈게.'
현무의 말대로 다섯 걸음을 걸어가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밟
혔다. 푹신푹신한 잔디빝과는 감촉이 다르잖아?
확인차 다시 주변을 살펴본 나는 허리를 숙여 대충 덮어놓은
잔디를 들췄다. 참 그럴싸하게 비밀 통로를 감춰두었군. 나는
통로의 문을 열어젖힌 뒤 소리 죽여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소름 돋는 경첩 소리와 함께 낡은 문이 열리자 퀴퀴한 냄새
가 올라왔다. 나는 조심스레 통로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지하 통로의 길은 매우 비좁았다. 혁과 같이 덩치가 크도(물
론 혁이가 뚱뚱한 것은 아니다) 어깨가 떡 벌어진 장정(?)이라면
들어오는 데 애를 먹었겠지만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나는 지
하 통로를 내려오는 데 별 지장이 없었다.
지하실과 가까워질수록 망치질 소리와 함께 뜨거운 쇠를 물
에 넣었을 때나 날법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계단을 내려
가자 들려오던 소리가 점점 커졌고 이내 지하실과 연결된 문을
볼 수 있었다.
감옥인가? 강철로 만든 듯한 두터운 문과 그 위에 자그마한
창문을 볼 수 있었다. 말이 창문이지 구멍이나 마찬가지로군.
나는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았다.넓다고 볼 수 없는 방
안에서 구멍을 통해 후끈한 열기가 새어나왔다. 작은 체구에서
우람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드워프들이 연신 망치질을 하거나 무언
가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좁은 구멍을 통해 보는 것이라 그런지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갑옷과 액세서리 등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드워프들을 붙잡아다 이런 일을 시키고 있었던 건가?
나는 드워프들에게서 시선을 땐 뒤 두터운 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열쇠도 없고 열 방법도 없어서 부수고 들어가
기로 했다.
"어떻게 부수고 들어간담?"
활을 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였고 그렇다고 보우어택으로
문을 가격하게 된다면 쇠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
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들이 몰려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소리를 죽여 문을 박살내는 방법이라......
나는 문의 여기저기를 살피던 도중 벽과 단단히 붙은 경첩을
볼 수 있었다. 저것을 박살내면 문짝을 때어낼 수 있겠군.
'백호'
경첩에서 시선을 거둔 나는 피식 웃으며 백호를 불렀다. 부
르기 무섭게 허공이 뒤틀리는가 싶더니 작은 고양이를 연상시
키는 백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나요, 마스터?
"이 문의 경첩을 박살내줬으면 해. 최대한 소리 없이. 가능하
겠어?"
-네, 마스터.
백호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 은빛 선들이 줄기줄기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기가 극도로 응축되어 형성된 매직 미사
일 대여섯 발이 빛을 발하며 문의 경첩을 향해 폭사되었다.
매직 미사일이 경첩을 가격하자 방 안의 드워프들이 수군거
리는 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소리 없이 부숴야 했기 때문에 다
닥다닥 붙어있는 경첩을 부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 경첩이 떨어지자 육중한 문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
했다. 워낙 두텁다 보니 쓰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문을 걷어
찬다면 그대로 쓰러질 테지만 문에 가까이 붙어 일을 하고 있
는 드워프가 있을 수도 있었기에 나는 백호를 시켜 방 안을 자
세히 살펴보도록 지시했다.
-문과 가까이 붙어있는 드워프는 없어요. 하지만 문 바로 앞에 작업
대와 연결된 도구들을 세워놨네요.
"그래? 그럼 문을 이쪽으로 밀어줘."
-네, 마스터.
나는 예닐곱 발짝 뒤로 물러나 계단으로 올라왔다. 이내 육
중한 문이 쓰러졌고 방 내부의 열기가 확 올라왔다.
넘어진 문을 밟고 방 내부로 들어서자 물건을 만들고 있던
드워프들이 서둘러 배틀 엑스와 워 해머(War hammer)등의
무기를 집어 들었다.
"당신은 누구요?"
구레나룻과 이어진 턱수염을 탐스럽게 기른 드워프 하나가
워 해머를 고쳐 잡으며 물었다.
"당신들을 구출하러 온 사람이랄까요? 서둘러 달아날 채비를
하세요. 카토 산맥에 머물고 있는 레버크 님을 비롯한 동료들
이 무척 걱정하고 있답니다."
내 말에 경계하고 있던 드워프들의 눈빛이 어느새 변해 있었
다. 그들은 경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눈을 하고 부
르르 떨고 있었다.
"카토 산맥으로 이주한 것인가? 레버크 님은 무사하오?"
드워프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이윽고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인지,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릴 구출하러
왔다니 고맙소. 그건 그렇고 이제 곧 영주와 기사 몇이 들이닥
칠 시간이오. 제대로 작업을 하고 있나 확인하러 올 것이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지하 통로의
문이 열렀다.
"이럴 수가. 여, 영주님, 드워프들을 감금하고 있던 강철문이
박살났습니다."
"뭐라고? 어서 내려가서 방을 살펴보아라."
이윽고 영주로 추측되는 이의 음성과 갑옷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거, 부득이하게 실력 행사를
해야겠군.
드워프들의 눈빛은 암울하게 젖어 있었다. 하긴, 그들의 손에
동료 여럿이 죽었으니 기사에 대한 두려움이 머릿속에 각인되
어 있을 법했다.
"청룡, 주작, 매직 아머를 착용해야겠다."
-쳇, 귀찮게.
-알았어요, 마스터.
청룡과 주작이 몸에서 떨어진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매직 벨
트에 집중했다.
맑은 쇳소리와 함께 검붉은 갑주가 머리를 제외한 전신을 휘
감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매직 아멀르 착용한 나는 허리 뒤춤
에 매달린 드래곤 레드 롱 보우를 풀어 쥐었다.
기사들이 들이닥친 것은 활을 풀어 쥐었을 때였다.
"침입자다."
"어서 죽여!"
먼저 공격을 가해온 것은 기사들이었다. 푸른 오러를 머금은
검이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폭사되기 시작했으나 엑스퍼트
급 기사들의 공격에 별달리 위협을 느끼진 못했다.
"퀵스텝."
퀵스텝을 걸고 검이 지척에 다다랐을 때쯤 몸을 슬쩍 움직여
공격을 피한 뒤 나는 활을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었다.
"보우어택."
드래곤 본으로 제작된 단단한 활등이 안면 보호대가 열린 기
사의 맨 얼굴에 작렬했다.
하얀 이를 옥수수처럼 흩날리며 기사 하나가 뒤로 벌렁 넘어
갔다. 이크, 잠시 한눈을 팔고 있던 사이 오러가 충만한 맺힌
검이 가슴팍을 향해 쇄도해오고 있었다.
급히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난 뒤 허리춤에서 화살을 꺼내
든 나는 재빨리 화살 깃을 활시위에 메기고는 힘껏 당겼다.
"뭐, 뭐야?"
화살촉에 시뻘건 오러 애로우가 맺히자 기사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뭐긴, 오러지.
우스꽝스럽게 변한 기사의 얼굴을 보며 나는 당겼던 활시위
를 슬쩍 놓았다.
활시위를 떠난 붉은 섬광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기사의
머리를 빗겨나가 벽에 틀어박혔다.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빗
나갔기에 투구가 일그러졌고, 기사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는 기사를
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서 떠날 채비를 하세요."
그에 정신을 차린 드워프들이 간단한 정비 도구와 함께 무기
를 손에 쥐었다.
"이런, 젠장!"
언제 왔는지 문 앞에 서 있던 영주로 추측되는 자가 소리치
며 부리나케 달아나기 시작했다.
"현무, 그리스(Grease)."
"으엇."
계단을 통해 달아나던 영주가 마찰 계수가 0이 된 지면에서
벌렁 넘어졌는지 데굴데굴 굴러와 문 앞의 벽과 부딪혔다.
언제 나타났는지 본체로 돌아간 현무가 물에서 솟아나듯 지
면 위로 모습을 반쯤 드러내 있었다. 무척이나 위압감을 풍기
는 모습과는 다른 말투로 현무가 말했다.
-이 녀석이 영주인가 보네. 형, 어떻게 할까?
"묻어버려."
-죽이란 거야?
"아니, 그냥 머리만 남겨놓고 묻어버려."
그에 혼비백산이 된 영주가 소리쳤다.
"나, 날 묻겠다고? 내 휘하의 기사들이 가만 놔둘 것 같나?"
"이봐요, 돈에 눈이 먼 영주님. 방금 전 기사들을 상대해본
결과 실력이 형편없던 걸요."
그에 영주의 눈이 쓰러진 기사에게로 향했다.
안면이 기괴하게 함몰된 채 쓰러진 기사는 미동조차 하지 않
았고 뒷걸음치다 주저앉은 기사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듯 했다.
"이, 이런 빌어먹을."
욕설과 함께 영주의 몸이 순식간에 지면을 파고들기 시작했
다. 곧 영주는 머리만 내놓은 꼴을 한 채 온갖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에 본체로 돌아간 현무, 백호와 주작이 노려보자 영주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그런 영주와 전의를 상실한 기사를 뒤로한 채 나는 드워프들
과 함께 지하 통로를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지하 통로를 나오자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하나같이 검
을 뽑아든 채 살기 띤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부분
이 엑스퍼트급 기사였는지 검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다같이 덤빌 셈인가?
"영주님은 어디 계신가?"
"지하에 고이 묻어드렸습니다. 물론 목숨은 가져가지 않았어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기사들이 검을 고쳐 잡았다. 휴우, 조용
히 처리하려고 햇는데, 아무래도 또다시 실력 행사를 해야겠군.
"너희들은 저 드워프들 좀 지켜줘."
말을 마친 현성은 활을 고쳐 잡았다. 본체로 돌아간 정령들
이 알게 모르게 자신들만의 기세를 끌어올린 채 드워프들의 전
후좌우를 맴돌고 있었다.
'저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이게 다 못된 영주 녀석 때문이
지. 기절만 시킨 뒤 어서 이곳을 떠나야겠어.'
활을 고쳐 잡은 현성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자 기사들이 일
제히 덤벼들기 시작했다. 눈으로 식별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으로 현성을 덮쳐오는 기사들을 보며 드워프들이 몸을
부르를 떨었다.
"퀵스텝."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현성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뭐, 뭐지?"
"찾아라!"
갑자기 사라진 현성을 기사들은 혼비백산해서 찾기 시작했다.
"위쪽이다!"
두리번거리던 기사 하나가 허공에 우두커니 서 있는 현성을
보며 소리쳤다. 허공답보를 시현한 채 허공에 떠 있는 현성을
보며 기사들은 경악했다.
'잠시 한눈을 팔고 있군.'
현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허공을 박찼다. 순식간
에 사라진 현성이 기사들이 한데 운집해 있는 곳에 모습을 나
타냈고 재빨리 활을 휘둘렀다.
기사 둘을 기절시킨 현성이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나자 그
들은 또다시 혼비백산해서 흩어졌다.
'이렇게 가다간 끝도 없겠군. 정령술로 마무리 지어야겠어.
청룡, 저 녀석들에게 아까 썼던 방법대로 속박시켜줘. 그리고
현무, 청룡이 기사들을 속박시키면 그대로 머리만 남겨놓고 묻
어버려.'
현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서 생겨난 대여섯 개의 물
덩이가 기사들의 얼굴을 감쌌다.
부글부글.
하나같이 두 눈이 휘둥그레진 기사들이 손에 쥔 검을 놓친
채 물덩이에 손을 가져갔다.
"지금이야, 현무. 묻어버려!"
쿠구구구.
기사들이 머리만 내놓고 전부 묻힌 것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드워프들과 함깨 저택을 나왔다. 내 부름에 어딘가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루카가 튀어나왔다.
하나, 둘, 셋...다섯 명이군. 영주에게 붙들려온 드워프들의
수를 센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체구가 작은 드워프라
지만 다섯 명이 루카의 등에 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는 카토 산맥까지 걸어가는 것
을 택했다. 아차, 매직 아머를 회수하는 것을 깜빡했군. 나는
허리 뒤춤에 활을 둘러메고는 매직 아머에 불어넣은 마나를 회
수했다.
순식간에 벨트 형태로 돌아온 매직 아머를 드워프들이 신기
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뭐, 아직까지 나도 신기하긴 하니
까. 내친김에 적안을 해제한 나는 드워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밝은 갈색 생머리에 에메랄드를 박아 넣은 듯한 초록색 눈동
자, 우윳빛 뽀얀 피부에 길쭉한 귀를 가진 엘프로 보이는 듯한
여성 유저가 멍하니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무척이나 걱정스런 얼굴을 하
고 있는 이의 정체는 바로 현지(티아)였다.
'왜 이리 늦는 거지?'
현지는 허리를 숙인 채 탁자에 놓인 장식품들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혹시 다치기라도 한 건 아닐까?'
그에 퍼뜩 정신이 든 현지가 굽혔던 허리를 펴자 맞은편에서
장신구를 가지고 놀던 제리코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누, 누나 왜 그래?"
"응? 아, 아냐."
현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어색하다는 걸
알아챈 제리코가 고가를 갸우뚱했다.
"흐음, 누나 형이 나가고 난 뒤부터 좀 이상하단 말이야. 형
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응? 아니 뭐......"
제리코의 물음에 현지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난 레드 형이 별로 걱정 안 돼."
이어진 제리코의 발언에 현지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왜?"
"응? 누나 왜 갑자기 일어서고 그래?"
화들짝 놀란 제리코가 가지고 놀던 장신구를 놓쳤고, 그에
퍼뜩 정신이 든 현지가 자리에 앉았다.
"아, 미안해."
다시 가지고 놀던 장신구를 손에 쥔 제리코가 말했다.
"형이 걱정되지 않는 건 바인마하 왕국에서 보여줬던 엄청난
실력 때문이야. 죽음의 평원을 건너올 때는 막 화살촉에 오러
를 불어넣고 싸웠는데 무투 대회에선 오러를 쓰지 않았잖아."
"그래도 바인마하 왕국의 초인에게 패햇으니까. 카토 왕국의
초인도 그와 동등한 실력을 가지지 않았을까?"
"음, 그래도 레드 형이 새로운 갑옷을 입고 나갔잖아. 엄청난
마법 아티펙트? 아무튼 그게 인챈트 되어 있다는데, 어쨌든 나
는 형이 이겼을 것 같아."
제리코의 말에 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제리코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아, 장신구 가지고 노는 것도 질렸어. 나는 나가서 수련이나
할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제리코가 동굴 밖을 향해 휘적휘적 걸
어 나갔다. 제리코의 뒷모습을 보며 현지도 느릿하게 몸을 일
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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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이제 곧 카토 산에 입산할 수 있겠군요."
"고맙소."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 거요."
드워프들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정령들은
전부 하급 정령 때의 모습으로 돌아와 내 몸에 붙었고 루카는
그림자처럼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드워프들의 체력은 무척이나 뛰어난 편이었다.
한나절을 걷고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니 놀랄 수밖에 없
었다.
물론 난 유저인 데다가 비약적으로 높은 스탯 때문에 지치지
않는다지만 저들은 다르지 않은가.
카토 산에 입산할 때는 날이 저문 상태였다. 이 정도로 어두
워진다면 숲속은 과연 어떨까?
낮에는 보금자리에 있던 몬스터들이 이 시간만 되면 판을 치
고 돌아다녔다.
뭐 일반인들이 들어간다면 위험하겠지만 내겐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숲에 대한 지리를 빠삭하게 알고 있는 다섯 명의 드워프, 루
카와 정령들, 게다가 나는 레인지 마스터라는 반열에 오른 초
인 캐릭터이니 몬스터들은 별로 위협적이지 못했다.
숲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우릴 반긴 것은 다름 아닌 고블린
들이었다. 하나같이 흉성을 내며 경계하는 고블린들을 보며 루
카가 낮게 목청을 울렸다.
크르르......
루카의 기세에 질린 고블린들이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지만
지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했다. 그러다
루카가 몸을 슬쩍 움직이자 뒤로 황급히 물러나는 고블린들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녀석들, 그래도 자존심은 있구나.
"현무, 저 녀석들을 전부 넘어뜨려."
-응
현무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예닐곱 마리의 고블린이 중심
을 잃고 발랑 뒤집어졌다. 대라신선이라도 마찰계수가 0인 지
면에서는 서 있을 수 없는 법이었다.
"반쯤 묻고 지나가자."
-알았어, 형.
나는 고블린들의 하반신이 전부 묻힌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
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드워프들의 거처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서둘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드워프들의 거처에 도착한 나는 동굴 앞의
드넖은 평지에서 반복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활을 쏘는 제리코
를 볼 수 있었다. 녀석, 열심히 수련하는군.
"여어, 제리코."
손을 흔들며 소리치자 이리저리 움직이며 스텝을 밟던 제리
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드 형!"
제리코가 들고 있던 아이언 숏 보우를 등에 둘러메고 이쪽으
로 다가왔다.
"저 사람들은......"
"발리안 시 영주의 집에 잡혀 있던 드워프들이야."
"그렇구나. 맞다, 티아 누나가 형 기다리더라. 형이 나간 뒤
로 멍하게 있는게 아무래도 형을 기다리는 것 같았어."
"그래?"
나는 제리코에게 빙긋 웃어 보인 뒤 동굴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동굴에 다다랐을 때쯤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어여
쁜 엘프 유저를 볼 수 있었다.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
"나 왔어, 티아."
그에 현지가 이쪽으로 달려와 내 손을 잡았다.
"잘하고 온 거야? 다친 데는 없고?"
"응, 괜찮아~.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현지는 걱정스런 눈을
하고 있었다. 현지의 손을 잡고 동굴 안으로 들어와 드워프 노
인...아니 레버크의 방문 앞으로 다가왔다.
똑똑.
노크를 하자 레버크가 문을 열었고, 동시에 두 눈이 휘둥그
레졌다.
"레버크 님."
"돌아왔습니다."
다섯 명의 남성 드워프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자 레버
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음, 감동적(?)인 재회로군.
"고맙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레버크의 솥뚜껑 같은 손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하루 온종
일 연장을 쥐고 있는 손이라 그런지 굳은살이 두텁게 잡혀 있
었다.
"은혜까지야...덕분에 저도 카토 왕국의 초인과 붙을 수 있
게 된 걸요."
그에 정신이 들었는지 레버크의 표정이 변했다.
"대결은 어떻게 되었소?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
가서 마저 얘기하도록 합시다. 자네들도 내 방으로 들어오게.
어이, 로건, 자네는 아래로 내려가 음식을 차려오도록 하게."
"예."
그에 로건이라 불린 드워프가 레버크의 방에서 나와 작업실
로 향했다. 그건 그렇고 음식 준비를 저 로건이란 드워프 혼자
서 다 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앞장서는 레버크의 뒤를 따랐다.
따뜻한 수프와 처음 보는 여러 가지 음식들이 탁자 위에 즐
비하게 놓여 있었다.
배가 고팠는지 제리코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
렇게 조용히 식사를 하며 레버크가 물어왔다.
"그래, 초인과의 대결은 어떻게 되었소?"
"잘 마무리 짓고 왔습니다."
"이, 이겼다는 거요?"
레버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같이 식사를 하던 드워프
들이 경악 어린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뭐 그렇게 놀랄 것
까진 없는데......
"우리가 직접 초인이란 존재를 보진 못했지만 그들은 한 나
라를 대표하는 이인만큼 무척이나 강하다고 들었소. 카토 왕국
의 초인은 지금껏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카르토니아 후작은 그랜드 마스터라고 불리기 힘든 자였습
니다."
나는 레버크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그에 레버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카토 왕국을 대표하는 그랜드 마스터일 텐데....."
"혹시 바인마하 왕국을 아시나요?"
"들어는 봤소."
"그곳에도 바인마하 왕국을 대표하는 초인이 있습니다. 그와
붙었을 당시 무참히 패배했었죠. 그와 카르토니아 후작이 맞붙
게 된다면열이면 열 바인마하 왕국의 페리안 공작이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드 마스터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랜드 마
스터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카르토니아 후작은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허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군."
레버크가 먹던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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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 페리안과의 재대결
다음 날.
우린 이제 슬슬 떠날 채비를 했다. 레버크가 아쉬운 눈으로
우릴 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음에 또 오시오."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이제 이곳을 찾아올 인간은 저희들
외엔 아무도 없을 거에요."
빙긋 웃는 레버크를 뒤로한 채 나는 현지와 제리코 그리고
루카와 함께 카토 산을 내려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직
보금자리로 돌아가지 않은 몬스터들이 많았지만 걸림돌이 되진
못했다.
"오빠, 이젠 어디로 갈 거야?"
나란히 걷던 현지가 물었다.
"우선 파르판 제국으로 돌아가서 레온에게 부탁한 바인마
하 왕국에 설치해둔 공간이동 마법진으로 이동해야지."
"바인마하 왕국은 왜?"
"페리안과 다시 붙어보려고. 티아, 너도 같이 갈래?"
"응, 당연하지."
"나도 갈래."
아기 늑대를 안아든 제리코가 소리쳤다. 그에 나는 피식 웃
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은 원래 파르판 제국에 도착한
뒤 풀어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카토 산을 내려와 마을 어귀에 맡겨놓은 마차를 돌려받은 뒤
우리는 파르판 제국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파르판 제국 시스턴 시의 분수대 광장.
수도인 아르곤 시가 레드 드래곤 로이스케의 침공으로 인해
폐허가 되자 아르곤에 머물던 대다수의 유저들이 자연스레 시
스턴 시로 모이게 되었다.
유저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서로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유저들 간의 PK 행위가 남발하던 수도 아르곤 시의 유저와 그
나마 서로 충돌 없이 얌전히 지내던 시스턴 시의 유저가 섞이
자 의견이 충돌한 것이었다.
유저 한두 명의 시비가 붙은 것이 어느덧 세력을 나눠 싸우
게 되었고 급기야 아르곤 시와 시스턴 시를 대표하는 두 길드
가 맞붙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큰 규모의 두 길드가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면 그 지역이 쑥대밭이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법.
아르곤 시처럼 폐허가 될 경우 복구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두 세력은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
다.
때문에 활기차던 시스턴 시는 분위기가 착 가라앉게 되었고
한기(?)가 흘렀다.
"이거 분위기가 착 가라앚은 것이 마치 아르곤 시에 있는 기
분인데요?"
레온과 함께 길을 걷던 강찬이 허리춤에 찬 문 블레이드의
검병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러게요. 들려온 정보에 의하면 시스턴 시의 유저와 아르
곤 시에서 건너온 유저들이 서로 충돌해 이런 분위기를 만들었
다는군요."
"아하, 그래서 그런 거군요."
레온의 대답에 강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이런저런 이야
기를 하며 걷던 도중 이야기에 심취해 주변에 신경을 쓰지 못
하고 지나가던 유저와 레온의 어깨가 부딪쳤다.
"뭐야?"
"아, 죄송합니다."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눈을 부라리는 유저를 보며 레온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재수가 없으려니, 젠장."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가는 유저를 보며 레온은 웃는 낯을 바
꾸지 않았다. 그에 강찬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가 날 법한데도 웃는 낯을 지우지 않네. 저쪽도 부딪친 건
마찬가지 아닌가?'
고개를 돌려 건들건들 걸어가는 유저를 쳐다보던 강찬이 앞
장서 걷는 레온을 뒤따랐다.
레온과 강찬이 향한 곳은 시스턴 시의 분수대 광장 근처에
위치한 큰 규모의 도서관이었다. 7클래스 마법의 수식도 풀고
강찬에게 수식을 수월하게 풀 수 있도록 지도해줄 겸 도서관으
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파르판 제국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볼 필요가 있
었다.
"이곳 파르판 제국에도 초인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레드 그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지네요."
강찬의 말에 레온이 빙긋 웃었다.
"앞뒤 안 가리고 찾아가려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네요."
누가 내 얘길 하나?
나는 달리는 루카의 등에 앉아 한 손으로 귀를 후볐다. 카토
왕국에서 벗어나 마차를 호위하며 루카를 달렸다. 잘 뻗은 도
로 위를 힘차게 달리는 루카는 한껏 신이 났는지 간간히 폴짝
폴짝 뛰었다.
드래곤 본으로 갑옷 및 무기를 제작하고 레온 덕에 아티펙트
아이템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신대륙 아리시아에 존재
하는 모든 초인들과 겨뤄보는 일만이 남았군.
나는 달리는 루카의 등 위에서 광활하게 펼쳐진 지평선에 시
선을 두었다. 카토 왕국이라는 작은 소국의 초인 카르토니아
후작과의 대결이 떠올랐다.
왠지 찝찝함이 남는 대결이었다. 정정당당한 대결에서 승리했
음에도 불구하고 비겁한 술수를 썼다고 우기는 것을 보니 거짓
소문을 퍼뜨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로빈훗과 페리안의 대결에서는 무언가 많이 얻은 것이 있
는 반면, 카르토니아 후작과의 대결에서는 얻은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 압승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쉽게 끝
났으니까. 카토 왕국을 대표하는 그랜드 마스터 카르토니아 후
작은 사실 소드 마스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뭐 지난 일이니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저은 뒤 탁 트인 주변 환경을 구경하며 루카를 달렸다.
숲에서 벗어나 도로를 습격하는 몬스터도 몇 있었으나 전력
질주하는 마차와 루카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한참을 달리던 도중 나는 고개를 돌려 마차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피로도가 쌓였는지 현지는 마차가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잠들어 있었다.
제리코는 신이 나서 마차를 몰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차는 금세 파르판 제국으로 입국할 수 있었고 제국의 외곽
을 지나는 중이었다.
파르판 제국에 들어오기 전과는 달리 마차는 천천히 달렸다.
제국 안에 들어온 이상 몬스터들이 습격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
다. 그에 맞춰 루카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카토 왕국을 떠날 땐 날이 밝았었는데, 파르판 제국에 입국을
하니 날이 어두워졌다. 거의 하루 온 종일 달린 셈이군. 물론
월드 타임 하루겠지만.
날이 어두워지자 외곽 지역의 각 상점에서는 등불을 켜기 시
작했고 사냥을 나가는 유저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메신저 창을 열어본 결과 모두들 나가고 없었다. 아니, 레온
을 제외한 모두가 나가고 없군. 지금까지 있는 걸 보니 7클레
스 마법 공식을 풀고 있는 것 같았다. 대화나 걸어볼까?
[레온 님께 대화를 요청합니다.]
나는 잔잔하게 들려오는 대화 요청음을 들으며 기다렸고 이
내 레온이 응답했다.
-아, 레드?
"네, 저예요. 일단 갑옷 만드는 데는 성공했어요. 정말 멋진
걸요?"
-벌써 카토 왕국에 다녀온 건가요? 아, 내 정신 좀 봐. 월드
타임 하루가 지나가버렸군요. 시간이 되신다면 시스턴 시 광장
에서 한 시간 후에 볼까요?
아무래도 갑옷이 어떤 형태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했나 보다.
레온의 물음에 보이진 않게찌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죠, 뭐."
-네, 그럼 이따 봐요.
[레온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는 달리는 루카에게 마차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라고 지시했다.
"이대로 시스턴 시 광장까지 달리자, 제리코."
"응, 알았어!"
나는 말고삐를 쥐고 소리치는 제리코에게 시선을 뗐다.
두개의 둥근 달이 검푸른 창공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
며 시스턴 시 광장에 다다랐다. 나는 먼저 루카의 등에서 내렸
다.
"형, 이제 뭐할 거야?"
"우선 레온부터 만나봐야지."
루카의 등에서 내리는 제리코에게서 시선을 떼고 분수대 광
장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마시장에 도착했을
때 현지는 로그아웃을 했고 이젠 필요 없어진 말과 마차를 판
뒤 루카의 등을 타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어디보자~. 분수대 앞에 서서 눈동자를 굴려가며 안경 너머
두꺼운 책을 정신없이 읽고 있는 저 자태!
나는 피식 웃으며 레온에게 다가갔다. 지척에 다다랐음에도
불구하고 독서에 한껏 심취해 있어서 그런지 레온은 아무런 반
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디 한 번 놀라게 해줄까?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두 팔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그리고 들어 올린 팔로 레온의 양 어깨를 슬쩍 내리쳤다.
"레온! 얼레?"
레온의 어깨를 내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손에는 아무런 감각이
전해지지 않았다.
힘주어 내리쳤다면 앞으로 고꾸라졌을 것이 분명했다.
책을 읽고 있던 레온의 모습은 마치 물에 탄 기름처럼 뒤죽
박죽이 되더니 이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도대체 이건 뭐지?
그렇게 놀라고 있을 때였다.
"레드!"
우왓,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나는 그대로 몸을 돌린 채 본능적으로 백스텝을
밟고 전투자세를 취했다. 거듭된 전투와 사냥 때문인지 아주
몸에 배어버렸군, 쩝.
정신을 차리고 날 놀라게 한 이에게 시선을 뒀다. 한쪽 팔에
두꺼운 책을 끼고 다른 한 손에는 기다란 고급스런 스태프를
쥔 레온이 피식 웃고 있었다.
"왔군요, 레드."
"아, 안녕하세요. 레온을 놀라게 하려다가 뒤통수를 맞아버렸
네요."
"하하, 멀리서 오는 것을 봤거든요. 그래서 한 번 마법을 부
려봤습니다."
어쨌거나 마법사가 남을 놀리게에도 적합한 직업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녕, 제리코."
"안녕하세요, 마법사 형."
검은 늑대를 안아든 제리코가 레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빙긋 웃어보이던 레온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아이템 제작은 잘된 건가요?"
"물론이죠, 아주 잘됐어요."
"그래요? 어디 한번 볼 수 없을까요?"
허리에 찬 벨트로 시선을 내린 레온을 보며 나는 마주 웃었
다.
"우선 장소를 옮기죠."
인적이 드문 아니, 유저들이 거의 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도
서관 뒷골목에서 레온의 라이트(Light)가 새하얀 빛을 발하여
주변을 비췄다.
"이야. 또 볼 수 있겠다."
제리코가 잔뜩 들뜬 채 구석에 놓인 나무 상자에 걸터앉았다.
제리코의 곁에 선 레온을 보며 나는 매직 벨트에 마나를 주입
했다.
부웅
매직 벨트가 미세한 진동을 남기며 벨트 표면에 새겨진 문양
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촤르르르
그와 동시에 시원한 쇳소리와 함께 검붉은 빛이 감도는 전신
갑주가 머리를 제외한 온몸을 빈틈없이 감쌌다. 제리코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감격에 젖어 있었고 레온은 흉갑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있는지 흐뭇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내친김에 허리 뒤춤에 달린 활을 풀어 쥐었다.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는 달리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드래곤 레
드 롱 보우(Dragon Red long bow)였다.
"갑옷의 외형을 보니 기사들의 플레이트 메일과는 완전히 다
르군요.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하지 않나요?"
그에 나는 가볍게 발을 놀렸다. 그리곤 퀵스텝을 걸고 있는
힘껏 지면을 박찼다. 나는 높이 떠오른 뒤 중력의 법칙대로 서
서히 하강하며 지면에 거의 다다랐을 때 경신법을 응용해 가볍
게 착지했다.
타탓.
"멋지군요. 그것도 레드의 이름에 맞게 온통 붉네요."
"고마워요, 레온."
"뭘요. 동료끼리 당연한 거지요. 아니, 이젠 친구라고 해야겠
군요."
빙긋 웃는 레온을 보며 나는 그간 있던 일에 대해 설명해주
었다. 먼저 파르판 제국에서 벗어나 카토 왕국을 향했던 것과
카토 왕국의 자세한 것은 아니지만 그 나라에 대한 느낀 점과
카토 산맥에 위치한 드워프의 거처에서 일어났던 일들까지.
"그랬군요. 기사들까지 보내가며 드워프들의 작품을 가지려
하는 자가 있었다."
대부분의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엑스퍼트급 기사라는 말에 레
온의 표정이 점점 더 진지해졌다.
카토 왕국의 수도 레비안 시에는 귀족 이외엔 발을 들일 수
없다는 것과 무장을 한 경비병들이 돌아다닌다는 것에 레온은
적잖은 충격을 먹은 듯했다.
"한 나라의 수도에 평민이 발을 들일 수 없다니. 믿겨지지
않는군요"
흐음. 레온이 이 정도로 심각해지다니. 레온의 옆에 앉아 있
는 제리코의 표정은 더 가관이었다.
"그렇다면 화전민은 아예 사람 취급도 안 해주겠네? 할어버
지한테 들은 건데, 화전민은 농노보다 아랫것으로 취급한대."
나이에 안 맞게 이런 심각한 얘기를 잘 이해하고 자신의 의
견을 잘 말하는군. 제리코의 말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별다른 일은 없었나요?"
레온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음, 별다른 일이라........"
"형, 카토 왕국의 초인과 겨뤘던 거! 어떻게 이겼는지 말 안
해줬잖아."
곰곰이 대화하는 것을 듣던 제리코가 소리쳤다. 그에 리온이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카토 왕국이라는 곳에도 초인이 있었나요?"
"네, 카르토니아 후작이라고 카토 왕국을 대표하는 그랜드
마스터라고 하더군요."
"그나저나 그랜드 마스터와의 대결에서 이겼다니 대단한 걸
요? 바인마하 왕국에서 붙었을 때보다 월등히 강해졌군요."
레온의 말에 기분이 좋아지긴 했으나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
다. 오히려 씁쓸한 웃음을 머금자 레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라? 레드, 표정이 왜 그런 거죠?"
"카르토니아 후작이 그랜드 마스터라고 보기 힘든 자였거든
요. 페리안과 비교해보면 그는 결코 그랜드 마스터라고 보기
힘들어요. 바인마하에서 벌였던 무투 대회에서 저와 붙었던 페
이샤라는 소드 마스터를 기억하시나요?"
그에 레온과 제리코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리코 녀석,
무척이나 진지하게 듣고 있군.
"카르토니아 후작은 페이샤와 엇비슷한 실력을 가진 것 같았
어요. 물론 둘이 붙는다면 카르토니아 후작이 이길 테지만, 어
쨌든 제 관점에서는 그래요."
"음, 국가의 위명을 높이기 위해 그랜드 마스터라고 헛소문을 퍼
뜨린 것이군요. 그렇다면 더 볼 것도 없이 순식간에 대결이 끝났
겠네요."
레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순식간에 끝낼 수 있었지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은 자제했죠. 어쨌든 정정당당한 대결을 통해 제가 승리했음
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정하지 않더군요."
"왜죠?"
"중원채널의 상승 경공인 이형환위에 대해 아시죠? 무척이나
빨리 움직여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설하고, 우선 패배를 쉽게 인정하지 않더라고요. 비겁한
술수로 자신을 꺾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더군요. 화
살에 오러를 불어넣는 것과 공간이동이라는 비겁한 술수를 써
자신을 이겼다고요."
그에 레온의 이맛살이 지그시 모아졌다.
"그건 좀 억지 같네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다시는 검을 쥐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레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죽였나요?"
이봐요, 레온....검을 쥐지 못하게 한다고 무조건 죽이는 것
은 아니랍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죽인 건 아니고 오른팔을 날려버렸어요."
"그랬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레온을 보며 나는 앞으로 내가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실 시간으로 내일 공간이동 마법진을 통해
바인마하 왕국으로 이동시켜달라는 이야기였다.
그에 레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승낙했고 그러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레온은 로그
아웃을 했고 나는 제리코, 루카와 함께 도서관 뒷골목에서 나
와 한적한 공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시스턴 시의 분위기가 왜 이렇게 바뀐 거지? 유저나
NPC들이 길거리 이벤트를 하며 반기던 게 월드 타임으로 바
로 어제 같았는데, 어째서인지 분위기가 극도로 흐려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내가 제리코와 함께 공터의 입구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촤앙!
어디선과 쇠와 쇠가 부딪치는 맑은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공
터 중심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두 유저가 서로 맞붙어 싸
우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한쪽은 풀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무장한 기사 유저였
고, 또 다른 한쪽은 무척이나 이국적이고 생소한 차림새의 유
저였다.
빠르긴 하지만 단조로운 몸놀림을 선보이며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는 기사와 달리 그는 무척이나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현
란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적안"
나는 적안을 개안하고 맞붙어 싸우는 두 유저에게 집중했다.
시야가 확보되며 대결을 벌이는 둘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었
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거기에 현란한 검술과 보기
드문 몸놀림. 아무래도 중원채널의 유저가 건너온 모양이었다.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에서 고개를 돌린 나는 제
리코와 함께 공터 어귀의 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리코, 그간 배웠던 것들을 선보여 봐."
"응."
고개를 끄덕인 제리코가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며 몸을 풀었
다. 퀵스텝이 발동되었는지 제리코의 몸놀림은 비약적으로 빨라
졌다.
제리코는 자신만의 기술을 만들었는지 여러 가지 회피동작을
선보이며 빠른 몸놀림을 보여주엇고,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얇
은 나뭇가지에 화살을 명중시키는 등 다채로보고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
나는 아이템 창에서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꺼내 제리코에게
가볍게 대련을 해주고 움직임에 있어 필요 없는 군더더기들을
모두 지적해주었다. 제리코는 내 지적을 금세 알아들었다.
제리코는 가르칠수록 점점 강해졌다. 배우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고 그만큼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머지않아 보우
마스터가 되어 내게 대련을 신청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 비
해 무척이나 낮은 레벨.
가만 있자, 제리코의 레벨이 몇이었지? 나는 피식 웃으며 상
태 창을 열었다.
파밧!
[이름] 레드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레인저 마스터
[Lv.] 82
생명력(HP) : 1102
마나(MP) : 600
스태미나(SP) : 1400 (배고픔 지수 0%/갈증 0%0
힘 137
체력 65
민첩 219 (+30)
손재주 568
지력 15
지혜 26
행운 15 (+10)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310 ~ 440
방어력 10 (+12)
마법방어력 2 (+10)
남은 스탯 포인트 : 0
바람(백호)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제리코(가디언) Lv. 20 호감도 100%
[상세정보]
아직 턱없이 낮군. 언제 한 번 같이 사냥을 가야겠어. 물론
나도 높은 레벨은 아니지만 말이야.
근거리에서 보우어택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쳐 연습하도록 제
리코에게 지시한 뒤 나는 벤치에 앉아 아이템 창에서 할아버지
에게 받은 스킬 북(Skill book)을 꺼냈다.
책을 펼쳐 차례대로 쭉 읽어나가자 아직 모르고 있던 여러
가지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책을 보면 잠이 오는 성격
이지만 왠지 모르게 스킬 북에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다.
기이한 여러가지 보법과 생소한 경공법, 내가 익히고 있는 퀵스
텝은 경신법과 같은 것이니 다른 것은 볼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상황에 맞춰 효과적으로 이 상승무공들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해 읽자 지금껏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과 비효율적
으로 쓰는 것도 적잖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법은 스킬이 아닌 몸으로 직접 체득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
에 나는 책을 들고 발을 맞춰가며 연습했다.
처음 하는 것이라 그런지 무척 어려웠지만 보법도 때에 따라
다르게 쓰인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검에 비해 월등히 길이가 짧은 무기, 각종 기형병기들을 사
용하는 사파나 마교의 무사들이 사용하는 것인데 검에 비해 길
이가 짧은 무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보법이 있었
고, 널리 쓰이는 보법 또한 있다고 했다.
물론 이 책에는 백월문에서 쓰이는 보법이 기록되어 있을 뿐
다른 것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었다.
흐음, 잠시 세릴리아 대륙에 현민이가 건너왔을 때 선보인
보법이 바로 이것이로군.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법에 매
료되어 그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몸을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에서부터 안전하게 뒤로 빠지는
것, 상대의 사각을 파고드는 것까지. 너무나 방대했기 때문에
운동신경이 없는 나로서는 체득하기 어려울 것 같았으나 기본
적인 것은 이제 어느 정도 흉내 낼 수 있었다.
보법을 흉내 내는 동안 제리코도 연습을 끝마쳤는지 구슬땀
을 흘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휴우, 활이 무거우니까 정말 힘들다."
"뭐든지 처음엔 힘든 법이야."
아이언 숏 보우를 등에 둘러메는 제리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빙긋 웃었다.
후우, 오늘은 그럼 이쯤 해야겠군.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위잉.
헤드셋 전원이 꺼지며 캡슐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뒤집어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어 머리맡 고리에 걸어둔 뒤 게
임베드에서 일어나 게임기기에서 나온 나는 즉시 거실로 향했
다.
"으으, 온몸이 뻐근하군."
나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 나오는 괴상한 음성과 함게 기지개
를 켰다. 벌써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이제 방학도 얼마 안 남았군. 친구들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시장기를 느끼며 냉장고를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주인님, 게임을 하시는 동안 2건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
다.]
"그래? 뭔데?"
[일반 메시지 첫 번째. "할애비다. 내손자. 잘 지내고 있는
게냐? 현민이 말론 아주 재밌게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언제 한 번 중원채널로 놀러오고. 몸 건강히 잘 지내거라."]
정말 오랜만에 할아버지의 음성을 듣자 왠지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언제나 챙겨주시던 할아
버지.
"두 번째 메시지는 뭐야?"
[일반 메시지 두 번째. "현성아! 나 강찬이. 방학 얼마 안
남았다! 그건 그렇고 언제 한 번 너희 집에 놀러가도 돼? 뭐,
된다고? 알았어."]
뭐 이런... 강찬의 메시지에 나는 얼이 빠진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할아버지 메시지에 답장 좀
보내드려야겠군.
"컴, 메시지 좀 작성해줄래? 할아버지께 답장해드릴 거야."
[메시지 녹음 준비 완료. 말씀하십시오.]
"크흠, 험험. 할아버지 손자 잘 지내고 있어요. 전에 받은 책
잘 쓰고 있어요. 게임하는 데 많은 도움도 되고 있구요. 언제
한 번 기회가 되면 직접 찾아뵐게요. 게임에서 말구요. 무슨 뜻
인지 알겠지요? 그럼 몸 건강히 잘 지내세요."
[전송 완료되었습니다.]
"참 빠르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내 방으로 달려가 PDA를 집어 들었다. 현
지에게 온 것이로군!
조금 닭살 돋는 멘트의 메시지를 몇 개 보내 놓았다. 나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자을 보낸 뒤 PDA를 책상에 올려두고
거실로 나왔다.
휴우, 요새 너무 게임만 하는 것 같아.
느릿하게 베란다로 걸어 나온 나는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보았
다. 밖은 벌써 날이 져 어두웠고, 새카만 창공 위에 밝은 달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드디어 내일, 페리안과의 재대결이 벌어지는구나. 어느 샌가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분 좋은 소리에 두 눈이 떠졌다. 이런,
이번에도 소파에서 잠들어버렸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고 나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질서 정연하게 차고차곡 쌓인 인스턴트식품 상자들. 그것들을
쭉 훑어보다 제일 눈에 띄는 녀석에게로 손을 가져갔다.
"돈가스, 오늘은 이 녀석이다."
전자레인지에 돈가스를 데우고 순식간에 해치운 나는 기지개
를 켠 뒤 거실로 나와 몸을 풀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자니 몸이 너무 뻐근했기 때문이었다.
"에휴. 이놈의 초인들만 다 꺾어봐라. 이젠 캡슐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잡동사니나 만들어야지."
나는 혼자 투덜대며 몸을 푼 뒤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이 다녔는데 그중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도로에서 에어 바이크를 타고 질주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방으로 들어와 게임기기 옆구리
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고 그와 동시에 캡슐 문이 열렸다.
"웃차."
게임베드에 그대로 드러누운 나는 머리맡에 놓인 헤드셋을
들어 머리에 뒤집어썼다.
위이잉.
푸쉬쉬.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파운 Lv. 82 접속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캉캉!
"후우."
언제나 그랬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했다. 가장 먼저 날 반기는 것은 다름 아
닌 루카였다.
그리고 여전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제리코. 내가 로그아웃
함과 동시에 제리코도 로그아웃되었기 때문인지 전과 같은 모
습을 하고 있었다.
"후아, 힘들다."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는 제리코를 보고 있
을 때였다.
[레온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 (승인/거절)]
"어라? 승인."
-레드, 일찍 접속했군요.
접속하기가 무섭게 레온이 대화를 걸었다.
"네, 레온도 일찍 접속했네요."
-그건 그렇고 언제 마법진을 이용하실 건가요?
"음, 잠시 후에 이용 가능할까요? 아직 할 일이 있거든요."
-뭐 그렇게 하세요. 아 참, 동료들과 이야기하던 도중 레드
가 초인에게 재도전한다는 말을 해버렸네요. 동료들이 알아도
되는 사항이겠죠?
"물론이죠."
-네, 그럼 이따 봐요.
"그래요."
[레온 님께서 대화를 끊었습니다.]
대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제리코에게 시선을 던졌다.
언제부터인가 저 검은 새끼 늑대가 제리코의 뒤를 졸졸 따라다
니기 시작하는군.
아이언 숏 보우를 등에 둘러멘 제리코가 털썩 주저앉아 꼬리
를 흔들며 다가오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에 이름이
레오라고 했었지?
레온과 비슷해서 부르기도 뭐하군. 나는 아이템 창에서 다시
스킬 북을 꺼내 펼쳤고, 어제 연습한 보법을 되새기며 다시 밟
아보기 시작했다.
"형, 그게 뭐하는 거야?"
"아, 이곳 아리시아 대륙 말고 중원이라는 머나먼 대륙에서
사용되는 기술이야."
"아하 그렇구나."
스킬 북에 그려진 대로 보법을 밟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제리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다시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나는 피식 웃고는 내 궁술과 적합한 보법을 밟으며 몸
으로써 익혀 나갔다.
"이렇게, 이렇게 나가서 여길 밟고 이렇게 돌아선 뒤 활을
쏘면 되겠군."
얼마나 연습을 했을까? 이젠 무기를 들고 엇비슷하게 흉내를
내는 수준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뭐 이정도론 실전에서 써먹
을 수 없겠지만.
연습을 하는 동안 꺼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도로 아이
템 창에 넣어둔 나는 제리코, 루카에게 어서 떠날 것을 지시했
다. 레오를 안아든 제리코가 루카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이것 봐라? 이제 아주 자동적으로 타는군. 휘적휘적 걸어가
등에 올라타자 루카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이내 빠른 속
도로 걸었다.
아 참, 현지는 접속했으려나? 나는 급히 메신저 창을 열었다.
오프라인 모드로 되어 있던 현지는 메신저 창을 켜기 무섭게
온라인 모드가 되어 있었다.
"루카, 어제 그 마시장으로 가자."
컹컹.
"자,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옆 가게보다 훨씬 좋은 명마가
이곳에 있습니다!"
"저희 가게는 명마만 취급합니다!"
웅성웅성~.
여느 때와 같이 시끄러운 마시장에 다다르자 제리코는 귀를
틀어막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말굽 소리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들.
어제 이곳에서 현지가 로그아웃을 했으니 접속을 하면 여기
서 시작하겠지?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사이 허공이 뒤틀리며
어여쁜 엘프 소녀 하나가 나타났다.
작은 키에 길쭉한 귀, 밝은 갈색 생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
였다.
"티아 누나다!"
제리코가 손을 흔들며 소리치자 현지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
했다. 나도 손을 들어 흔들었고 현지가 빙긋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응."
나는 피식 웃으며 루카의 등에서 내렸다.
"타."
"응? 오빠는?"
"난 걸어가면 돼. 어차피 광장까지 갈 거니까 금방 갈 거야."
나는 반강제적으로 현지를 루카의 등에 태운 뒤 광장으로 향
했다. 광장으로 향하는 동안 마찰을 일으키는 유저들이 몇 있
긴 했지만 시비를 걸어오는 유저들을 전부 상대했다간 페리안
과의 대결이 늦어지기 때문에 이리저리 피하며 겨우 시스턴 시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스턴 시에 다다르자 분수대 앞에 서 있는 레온을 볼 수 있
었다.
'어라? 다른 녀석들은 어디로 간 거지?'
"레온!"
"앗, 레드, 티아 씨와 제리코도 잇네요."
현지와 제리코를 태운 루카가 연신 꼬리를 흔들며 레온에게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은요? 카이루나 데시카, 루샤크 그리고 리아 양
은......"
"그러고 보니 리아 언니가 어디로 사라졌네?"
루카의 등에서 내린 현지가 두리번거렸다.
"아, 카이루는 마법서를 풀고 있어요. 효과적으로 보조 마법
을 구사하면서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연습한다고 하더군요."
"엥? 그 녀석이 마법서를 풀고 잇다구요?"
고개를 끄덕이는 레온을 보자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개학
후 그 녀석 마법서 푼답시고 홈페이지에서 프린트 해오는 건
아니겠지?
잠시 딴 생각에 빠지려던 찰나 레온이 말을 이엇다.
"리아는 루샤크를 따라 사냥을 갔어요. 요새 둘이 붙어 다니
는 걸 보니 심상치가 않군요."
레온이 장난스럽게 피식 웃엇다. 역시 둘이 뭔가 있을 것 같
더라니.
"자, 이제 이동할까요? 준비는 됐지요?"
"아차, 서둘러 떠나야겠네요. 이번에는 무투 대화에 출전하지
않아도 붙을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군요."
그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옆에 바짝 붙은 현지와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는 루카와
함께 앞장서 걷기 시작한 레온의 뒤를 따랐다.
"자, 이제 완성되었습니다. 바인마하 왕국에 설치해둔 마법진
과 연결시켰으니 발동만 시킨다면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어요."
요상한 각도로 뒤틀어진 문양과 정교하기 짝이 없는 둥근 원
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새겨졌다. 레온이 수인을 맺자 마법진
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와아....."
제리코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위에 올라서면 바인마하
왕국으로 이동한다 이거지? 잔뜩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휘황찬
란하게 빛나는 마법진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이제 모두 마법진에 올라서세요."
레온의 말에 나는 빛을 발하는 마법진에 올라섰다. 그에 현
지와 루카, 제리코도 잇달아 마법진에 올라섰다.
"레온은 안 가나요?"
우두커니 서 있던 레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야죠. 제가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돌아오겠어요?"
말을 마친 레온이 왼발을 마법진 안으로 디뎠다.
우웅.
레온이 마법진 안에 두 발을 모두 들이자 은은하게 빛나던
푸른빛이 점차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레온이 서둘러 수인을 맺었다.
"워프!"
시동어를 외치자 주변 환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아
지랑이가 된 듯 일렁이던 주변 환경이 순식간에 변했고 아지랑
이 현상을 보이던 허공도 점차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푸스스.
빛을 발하던 마법진이 빛을 잃고 그저 바닥에 그려진 요상한
문양의 형태로 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다
소 익숙한, 한 번 둘러본 적이 잇는 바인마하 왕국의 수도 페
리안 시. 레온이 왕궁과 최대한 가까이에 마법진을 설치해둔
모양이었다.
"바인마하 왕국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 만반
의 준비를 하고 들어가세요."
말을 마친 레온이 수인을 맺었다. 아무래도 불시에 쓰일 마
법을 메모라이징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템 창에서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을 꺼내들었다. 물
론 화살통은 꺼내지 않았다.
바인마하 왕국을 떠나기 전, 페리안과 붙을 당시 이 활을 썼
기 때문에 페리안 왕궁에 있던 기사들이 아이언 레드 롱 보우
를 본다면 즉시 알아차릴 것 같아 꺼내든 것이었다.
물론 싸울 땐 매직 아머를 착용할 테지만.
나는 백호를 비롯한 나머지 세 졍령을 모두 소환했고, 만반
의 준비를 끝냈다. 정령을 소환햇는지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
레스타라가 현지의 뒤에 서 있었다. 무척이나 청명한 기운을
발산하는 여성체 엘레스트라에서 눈을 뗀 나는 페리안 왕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페리안 왕궁과 가까이 설치했다고 해도 어느 정도 걸
어야 했기에 10여분쯤 걸어 왕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커다란 성문 앞에 선 기사들이 손에 쥔
랜스를 X자로 교차시켰다.
"1321회 페리안 무투 대회의 우승자 레드 파운이라고 합니
다. 초인 페리안에게 재도전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에 두 기사는 X자로 교차시키고 있던 랜스를 거두고 종을
울렸다.
딸랑딸랑.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함께 성문이 살짝 열렸다.
고개 하나를 겨우 내밀 수 있을 정도였다. 투구의 안면 보호대
를 올린 기사로 보이는 듯한 청년이 고개를 빠끔 내민 채 보초
를 서고 있던 기사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이내 두 눈
이 휘둥그레진 채 고개를 도로 집어넣었다.
"실례했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목례를 하는 기사를 보며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와보는 것 같군.
그렇게 잠시 왕궁의 바깥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 거대한 성문
이 열렸다.
수많은 기사들이 하나같이 은빛 광택을 내는 검을 뽑아든 채
길을 만들었고 그 사이로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는 기사 한 명
이 휘하의 기사들을 대동한 채 걸어 나왔다. 그 뒤로 마법사로
보이는 듯한 노인들도 몇 있었다.
그에 나는 동료들과 함께 천천히 성안으로 걸어갔다. 질서
정연하게 서 잇는 기사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 위압감
을 풍기던 풀플레이트 메일 차림새의 기사가 쓰고 있던 투구의
안면 보호대를 밀어 올렸다.
"레인지 마스터 레드 파운, 다시 페리안 왕궁에 찾아온 걸
진심으로 환영하네."
또렷한 이목구비의 장년층, 바인마하 왕국의 초인 페리안이었
다. 그를 보자 왠지 모르게 들뜨기 시작했다. 어서 매직 아머를
착용한 뒤 맞붙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당신에게 재도전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무척 빠른 시일 내에 찾아온 것 같군. 이럴게 아니라 연무
장으로 향하도록 하지. 따라오게."
페리안을 위시한 기사들과 그를 따라 드넓은 연무장에 다다
르게 된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잘 정리된 연무장에 페리
안과 내가 올라서자 그를 위시하고 있던 기사들이 뒤로 물러나
기 시작했다.
물론 전에도 그랬듯이 기사들이 동료들을 호위하듯 데리고
나갔는데, 레온을 대하는 이곳 마법사들이 어째 그에게 쩔쩔매
는 것 같았다.
동료들이 기사들과 함게 연무장 밖으로 물러나는 것에서 시
선을 뗀 나는 페리안을 응시했다.
"다시 도전할 거란 것은 알고 있엇지만 이렇게 빠른 시일 내
에 찾아올 줄은 몰랐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찾아뵐 줄 몰
랐거든요."
물처럼 고요한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던 페리안이 고개를 끄
덕였다.
그저 바스타드 소드를 지팡이 삼아 땅을 짚고 서 있을 뿐인
데 그에게서 풍겨오는 위압감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럼 시작해볼까?"
왼손을 들어 안면 보호대를 내린 페리안이 검을 고쳐 잡았다.
장검의 검신이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두었다.
그에 검을 고쳐 잡은 페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기를 내리다니, 맨손으로 날 상대할 생각인가?"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이제 매직 아머를 착용할
차례로군.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내 몸에
붙어 있던 정령들이 몸에서 떨어져 둥근 막으로 몸을 감쌌다.
정령들이 몸에서 떨어지니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매직 벨트에
마나를 주입했다.
부웅.
매직 벨트에 음각으로 새겨진 문양이 미세한 진동과 함께 빛
을 발하기 시작했다.
촤르르르.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검붉은 갑주가 도전자의 머리를
제외한 전신을 빈틈없이 감쌌다. 기사들이 착용하는 보편화되어
있는 플레이트 메일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갑주가 도전자의 몸
을 감쌌고, 그와 어울리는 붉은 망토는 여전히 등 뒤로 늘어져
있었다.
허리 뒤춤에 맨 날렵하게 생긴 기다란 활로 왼손을 가져간
도전자는 이내 활을 풀어 쥐고는 풀어진 활시위를 당겨 활 끝
에 걸었다.
그 광경을 본 도전자의 일행을 제외한 모두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전적인 눈빛을 발산하는 붉은 두 눈동자를 맞받던 페리안
이 입을 열었다.
"참 특이한 형태의 갑옷이로군. 실례지만 한 가지만 묻겠네."
그에 도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대와 같은 붉은 갑주를 착용한
궁수에 의해 카토 왕국의 초인이 꺾였다고 하네. 카토 왕국의
초인에게 도전한 적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그렇군."
페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겁한 술수를 써 끝내 팔을 잘라냈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
실인가?"
그에 도전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정정당당한 대결에서 승리한 것뿐입니다. 활에 오러를
불어넣는 것을 비겁한 술수라고 치부하더군요."
"그렇다면 카토 왕구에서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로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말이야."
투구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지만 페리안은 빙긋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비웃음이 아닌 카토 왕국이 퍼트린 거짓 소문에
어이가 없던 나머지 나온 웃음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네. 그랜드 마스터 카르토니아 후작의 무위
는 어땠는가?"
"형편없었습니다. 국가의 위명을 높이기 위해 그랜드 마스터
라고 칭했을 뿐 실력은 결코 그에 미치지 않습니다."
도전자의 말에 페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국가의 위명을 높이기 위해 그랜드 마스터라고 칭했다
라.....하긴, 도전을 회피할 때부터 알아봤지.'
페리안이 검을 고쳐 잡자 도전자도 전투자세를 취했다.
'역시 카르토니아 후작과 비교되는걸? 가만히 서 있을 뿐인
데 빈틈을 찾기가....힘들군.'
현성이 순간적으로 연습 중이던 보법을 떠올렸으나 이내 고
개를 저었다. 이제 겨우 흉내만 내는 수준의 보법이 먹힐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흉내 내는 것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보법을 만들 수 있
었지만 초인을 상대로는 어림없는 소리에 불과했다.
'진즉에 연습해둘 걸 그랬나?'
드래곤 레드 롱 보우의 활등을 움켜쥔 현성이 화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잠깐의 실수로 인해 승패가 갈리기 때문에 신경을 바짝 곤두
세운 현성이 초인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 활은 어떻게 할 셈인가?"
'활?'
페리안의 말에 현성이 손에 쥔 드래곤 레드 롱 보우를 내려
다보았다.
"그대의 발아래 놓인 활 말이네."
'아차.'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바닥에 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던
현성이 재빨리 활을 수습해 아이템 창에 넣었다.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기에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바작에 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부탁한다. 얘들아."
정령들에게 낮게 속삭인 현상이 페리안을 중심으로 원을 그
리며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경전을 벌이며 빈틈을 찾
으려는 것뿐만 아니라 연습하던 보법을 밟아보려는 심산에서였
다.
신경전을 벌이던 사이 현성의 눈이 돌연 빛났다. 매직 아머
덕에 상승무공을 전보다 원활히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퀵스텝."
몸이 비약적으로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 현성이 두 다리로 지
면을 힘껏 박찼다. 사방으로 퍼지는 흙먼지와 함께 현성의 모
습은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무척이나 빨리 움직이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대결을 지켜보던 모두가 사라진 도전자를 찾기 위해 이리저
리 살피고 있었다.
피융.
허공에서 난데없이 맹렬한 파공성이 들려왔다. 정확히 초인을
노리고 날아든 붉은 섬광이었다.
쏘아진 탄환처럼 맹렬히 회전하며 날아든 화살을 보곤 페리
안은 급히 몸을 뒤로 뺐다. 그의 움직임을 읽기라도 한 듯 다
음 발의 붉은 섬광이 그를 향해 폭사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몸을 돌려 화실을 가까스로 피해낸 페리안의 뒤
로 현성이 착지했다. 그에 페리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정확히 반원을 그리며 횡으로 휘둘러진 검에서 눈부
신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충만히 맺힌 짙고 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4미터 길이로 자라
나 현성을 향해 쇄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퀵스텝의 지속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현성은 지면을 힘
껏 박찼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이 높이 솟아올랐다. 가까스
로 페리안의 공격을 피한 것 같았으나 횡으로 베어지던 검이
기괴한 각도로 틀어지더니 이내 공중으로 치솟고 있었다.
'이런.'
그에 현성이 재빨리 허공을 박차며 공격을 회피했다. 그는
허공답보를 거듭 전개해 지면을 디디듯 허공을 디뎌 검을 피해
낸 뒤 백스텝을 밟아 페리안과 거리를 두었다.
'계산에 착오가 있을 줄이야.'
마나가 급속도로 회복되고 있었지만 상당량의 마나가 감소한
것을 느끼며 현성이 활을 고쳐 잡았다.
"무척이나 정교하고 빠른 움직임이로군. 짧은 기간 동안 이
렇게나 달라지다니."
길게 돋아난 오러 블레이드를 가라앉힌 페리안의 검이 시퍼
렇게 물들었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쉼 없이 퍼부어지는 연환
공격이었다. 기이막측한 경로로 파고드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
으로 휘둘러지는 검로를 현성은 대경실색하며 회피하기에 바빴
다.
'으윽.'
백스텝을 밟아 뒤로 미끄러지듯 빠지는 순간 페리안의 검이
현성의 허벅지를 훑고 지나갔다.
갑주가 길게 갈라지며 한 줄기 붉은 선혈이 갑옷을 타고 흘
러내렸다.
'일단 거리를 둬야겠어.'
다리가 타는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문 현성이 백스텝을 연이어
밟으며 뒤로 불러냈다.
백스텝을 밟으며 현성은 페리안을 향해 재빨리 활을 쏘았다.
회전력이 가미된 붉은 섬광이 눈으로 식별하기조차 힘든 속도
로 페리안의 이마를 향해 폭사되었다.
급히 몸을 틀어 피한 페리안의 두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또다시 자신을 향해 맹렬히 회전하며 날아드는 두 줄기의 붉은
섬광이 페리안의 망막에 맺혔다.
'이런.'
오러 블레이드를 자욱하게 머금은 장검이 두 줄기의 붉은 섬
광을 쳐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굵직한 붉은 섬
광은 소나기처럼 사방에서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예측할 수 없는 각도에서 사각을 파고드는 붉은 섬광은 페리
안 정도의 그랜드 마스터조차 쉽사리 당해낼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이것들을 쳐내려니 팔이 얼얼하
군. 두 번 다신 거리를 두면 안 되겠어.'
붉은 섬광을 쳐내던 페리안이 한 손으로 검을 쥔 채 수초 사
이를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사방에서 퍼부어진 붉은 섬광을 피
했다.
허공을 요리저리 디뎌가며 붉은 섬광을 쏘아대던 레드 파운
의 공격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이때다.'
순간적이었지만 페리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마나를 손에
쥔 검에 주입하자 오러 블레이드의 빛깔이 더욱 짙어지며 순식
가나에 길게 자랐다.
그와 동시에 포물선을 그리며 오러 블레이드가 자욱하게 돋
아는 장검이 레드 파운을 향해 폭사되었다.
제37장 보법수련
촤앙!
붉고 푸른 오러가 서로 충돌하며 눈부신 섬광을 일으켰다.
페리안에게 한 번 패한 적이 있는 도전자는 전처럼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그토록 짧은 기간 안에 강해져 돌아온 것이었다. 연무장에서
한껏 공방을 나누고 있는 도전자와 근위기사단장 페리안의 대
결은 그만큼 장관이었다.
지켜보는 이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
을 하고 있었다. 왕궁의 레인저 부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핏빛의 붉은 오러를 한껏 머금은 화살을 쏘는 것도 모자라
기이한 몸놀림으로 그랜드 마스터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는
모습은 그들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꿀꺽.
"대장님도 저렇겐 못할 텐데 말이야."
"그, 그러게. 도대체가 화살에 오러를 불어넣는다는 것 자체
가......."
초인과 도전자의 대결을 지켜보는 레인저 부대의 궁수들이
자신의 손에 쥔 롱 보우를 매만지며 대결을 지켜보았다.
한 치도 밀림 없이 겨루는 겉모습과는 달리 현성은 무척이나
지친 상태였다. 이리저리 패인 갑옷 사이로 붉은 피가 흘렀고,
상당량의 생명력이 감소됐다.
스태미나 또한 절반가량밖에 남지 않았기에 숨이 점점 차오
르기 시작했다. 피가 흐를수록 생명력도 조금씩 감소하고 있었
기 때문에 이대로 가다간 생명력이 바닥날 위험도 있었다.
물론 피가 먿는다면 감소되던 생명력도 조금씩 차오르기 시
작하겠지만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장
검이 몸의 여기저기를 훑었다.
갑옷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페리안의 갑옷도 멀쩡
하진 않았다. 어깨 갑주가 패이고 흉하게 일그러진 건틀렛은
이미 손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끊임없이 연쇄 참격을 퍼붓던 페리안이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에 현성도 페리안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심호흡했다.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을 길게 늘어뜨린 페리안이 도전
자에게 시선을 둔 채 피식 웃었다.
'이토록 호쾌하게 싸워본 것이 얼마 만이지?'
투구를 쓰고 있었기에 보이진 않았지만 페리안은 살짝 들떠
있었다.
"이쯤이면 숨을 다 골랐겠지? 그럼 들어가겠네."
'미치겠군.'
아직 심호흡하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페리안이
공격을 하겠다며 이쪽으로 검을 뻗었다. 끈임없이 쇄도하는 연
쇄 참격을 피하는 방법은 오직 거리를 두는 법. 페리안이 펼치
는 연쇄 참격은 무척이나 매서웠다.
"퀵스텝."
퀵스텝을 걸자 몸이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졋다. 페리안의 검
이 가슴팍에 다다랐을 때 나는 허공으로 몸을 띄울 수 있었다.
물론 뛰어오르면서 화살 한 발을 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
나를 많이 잡아먹긴 하지만 효율 면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싸이클론 에로우가 선보여졌고, 쏘아진 탄환처럼 회전하는 화살
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대기를 갈랐다.
콰콰콰콰.
촤앙!
페리안이 화살을 쳐내는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
었다. 화살을 쳐낼 때 잠시 주춤한다는 것이었다. 호오, 이것만
잘 공략한다면....
"으앗!"
페리안의 빈틈을 찾아냄과 동시에 잠시 한눈을 판 사이였다.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포물선을 그리며 이쪽으로 쇄도하는
것이 아닌가?
왼쪽 어깨를 향해 날아드는 오러 블레이드를 보며 나는 즉시
천근추를 썻다.
마치 몸이 무거운 쇳덩이를 단 것처럼 바닥을 향했고, 지면
에 다다르는 순간 퀵스텝을 재시전해 몸을 가볍게 한 뒤 안전
하게 착지했다.
상승무공을 이용해 재빠르게 위치를 바꿨기 때문에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무척이나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중원채
널의 스킬들이었다.
물론 페리안 정도의 그랜드 마스터라면 내 패턴을 읽은 위
몰아붙일 수 있다. 그러니 빈틈을 발견한 이상 빠르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
뒤늦게 이쪽으로 쇄도하는 검을 보며 나는 힘껏 지면을 박찼
다. 지금껏 나를 승리로 이끌어준 꿈의 신법이라고도 일컫는
이형환위.
나는 마치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허공으로 떠
오르게 되었다. 잠시 우왕좌왕하는 페리안을 향해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조금 전 허공에 떠 있던 도전자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검을
휘두르던 페리안은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도전자의 몸이 갑자기 무거워
지기라도 한 듯 지면을 향해 ㅆ노살같이 쏘아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도전자느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얼른 검을 고쳐 잡은 페리안은 주변을 살피다 반사적으로 고
개를 들었다.
"이런."
페리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굵직한 두 줄기의 붉은 섬광이
이미 이쪽으로 폭사되고 있었다.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날아들었기에 페리안은 검에 오
러 블레이드를 진득하게 피워 욜렸다.
콰콰콰콰.
웅혼한 내력이 마치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검극을 타고 밀
려올라갔다.
촤촹!
두 줄기의 붉은 섬광을 쳐냈지만 이어진 것은 끝없이 쏘아지
는 붉은 섬광 세례였다.
몸을 날려 피하려 했으나 화살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날아들렀고 결국 화살을 쳐낼 수밖에 없엇따.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붉은 섬광을 쳐낼수록 손아귀와 팔이
저릿저릿햇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감각은 무뎌져갔다.
그리게를 수차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페리안 정도의 고수
가 손에서 검을 놓쳐버린 것이었다.
채앵!
높이 떠오른 검이 두어 바퀴 회전하며 바닥을 향해 내리꽂혔
다.
댕그랑.
손아귀가 터져 피가 흐르고 잇는 페리안은 목덜미가 서늘해
진 것을 느꼈다. 오러가 맺혀 있진 않았지만 스몰 스피어를 연
상시키는 화살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기 때문이었다.
"져, 졌네."
페리안의 검이 공중으로 솟구치는 순간 장내엔 정적이 흘렀
다. 모두들 페리안이 승리할 서이라 점치고 있었지만 뜻밖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페리안이 패배를 시인하는 순간 현성은 그의 목을 겨누고 있
던 화살을 거뒀다. 그와 동시에 불긍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고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급속도로 회복하고 있긴 하지만 마나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
고 있었고 긴강이 풀리자 지칠 대로 지친 몸을 가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드!"
"오빠!"
"형!"
레온과 티아, 제리코가 동시에 소리치며 현성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기사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물론 강압적으로 그들을 막
은 게 아니라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페리안과 그의 발치에서 주저앉아 숨을 거칠
게 몰아쉬는 현성에게 고풍스런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걸친 노
마법사가 다가갔다.
"잠시 손 좀 봐도 되겠습니까, 페리안 공작?"
금세 평정을 되찾은 페리안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찢어진 페리안의 손아귀를 보던 마법사가 주문을 외자 손아귀
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페리안의 손바닥이 말끔히 치료된 것을 확이낳 노 마법사가
현성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러에 의한 상처라 회복이 무척 더디군요. 신관을 부를 정
도의 상처가 나지 않아 다해입니다."
상처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노 마법사가 다시 말했다.
"잠시 갑옷 좀 벗어보시겠습니까?"
노 마법사의 말에 나는 왼팔의 상처를 살폈다. 거의 아물긴
했지만 아직 상처에서 피가 조금씩 배어나왔다. 게다가 뒤늦게
무척이나 쓰라린 감각이 전신을 관통하기 시작했다.
"크으윽."
상처 부위가 무척이나 후끈거리고 쓰라렸다. 지금 내 앞에
서 잇는 노 마법사의 말대로 매직 아머를 회수하려던 순간이었
다.
"레드, 잠시만 기다리세요."
익숙한 음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다.
기사들의 틈을 비집고 나온 레온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우선 몸부터 치료해야겠네요."
말을 마친 레온이 간단한 수인을 맺었다.
"큐어(Cure)."
눈부신 빛이 상처부위를 감싸기 시작하더니 이내 부상이 말
끔히 치유되엇고, 생명력도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힐링."
또다시 이어진 레온의 한마디에 생명력이 급속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온몸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
다.
"이제 갑옷을 복구해야겠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러고 보니 페리안과 대결을 하는 동안 갑옷이 심하게 망가
져 있었다. 어깨를 보호하느 갑주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
고 아랫부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저기 쩍쩍 갈라져 있는 상태인지라 어딘가에 부딪히기만
해도 부서져버릴 것 같았다. 물론 드래곤 본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번엔 그리 간단하지 않은 수인을 맺은 레온이 뭐라 중얼거
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옷에 붉은 빛무리가 생겨 감싸더니
이내 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빛은 사라지고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갑옷은 언제 그
랬냐는 듯 원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휴우. 복구는 잘 되었군요."
나는 원상태로 돌아온 몸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건
그렇고 갑옷의 효용에 홀닥 반해버리겟는걸? 매직 아머가 없었
다면 이 대결은 무참히 패배했을 것이다.
매직 아머를 착용하고 잇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나가 거의 고
갈 날 때까지 싸웠으니 당연히 그랬겠지.
내가 매직 아머에 집중하자 몸을 감싸고 잇던 갑옷들이 썰물
처럼 밀려나기 시작했고 이내 벨트의 형태로 돌아왔다.
"다시 봐도 신기한 물건이군."
지켜보고 있던 페리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에 나도 마
주 웃어주엇다.
"그동안 로빈훗이란 자를 제외한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다
는 생각에 왕실에서 수련을 게을리한 것 같네. 다음엔 내가 도
전할 수 잇도록 이곳을 찾아주겠나?"
"그렇게 하겠스빈다."
"고맙네."
말을 마친 페리안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으흠, 레
온을 응시하고 잇는 건가?
잠시 레온을 응시하던 페리안이 등을 돌렸고 그에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달려와 그의 두를 따랐다.
그중에 다른 기사들에 비해 덩치가 비교적 왜소한 기사 하나
가 투구의 안면 보호대를 열고는 손을 흔들었다.
"케이?"
무투 대회에서 붙은 적이 있던 농노출신의 소드 마스터 케이
였다. 역시 페리안 기사단이 된 건가? 그것도 왕실 근위기사가
되다니.
멍하니 서서 레온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노 마법사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노인네는 페리안을 따라가지 않고 계속 서 있
는구먼.
"분명 같은 마법사이면서도 경지를 알 수 없군요."
노 마법사의 말에 레온이 빙긋 웃었다.
"하이드 마나 포스(Hide mana force)로 마나의 기척을 감
춰서 그렇습니다."
"하이드 마나 포스를 사용할 수 있다면....."
노 마법사의 얼굴은 삽시간에 경악에 물들었다. 하이드 마나
포스가 높은 클래스의 마법인가?
"젊은 나이에 7클래스에 도달하다니 정말 대단하군요."
"과찬이십니다. 그저 열심히 마법 수식을 푼 것밖에 없습니
다."
그렇게 레온과 노 마법사가 대화를 하고 잇을 때, 현지와 제
리코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물론 루카는 이미 내 옆에 앉아 있
었다.
"오빠, 다친 데는 괜찮아?"
"응, 괜찮아. 레온이 치료해줫는걸."
걱정스런 얼굴로 날 바라보는 현지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기
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사라지는 페리안에게 시선을 두었다.
"후, 이제 가죠. 레온."
"그러죠."
나는 마지막까지 사라지는 페리안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응시
했다. 일단 초인 하나는 꺾은 건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는지 마버사 노인이 허겁지겁 궁으로 향
했다.
"가자, 티아, 루카, 제리코."
"초인 한 명을 꺾었으니 바인마하 왕국에 레드의 이름이 널
리 알려지겠네요."
"그런가요?"
레온의 말에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이름이 알려
진다는 게 썩 좋지만은 않았다. 어딜 가든 시선이 집중된다는
뜻이니까. 궁탑의 제자가 되어 수도 세인트 모닝을 돌아다닐
때도 가끔 시선이 집중되었는데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막상 초인 한 명을 꺾고 나니 왠지 허탈해지는 기분이 들었
다. 목표로 잡고 있던 페리안을 꺾고 나서 그런건가? 하지만
아직까지 내 진짜 목표가 남아 잇는 것을 떠올리며 어깨에 힘
을 주었다.
로시토는 신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초인들을 꺾어달라고 했지
만, 그 많던 초인들은 이제 초인이란 명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했다.
뭐 난 잘 알지 못하겠지만 옆에서 레온이 한창 떠들고 있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6클래스의 마법사, 상급 소드 마스터 유저면 초인이라는 명
성을 부여했었가ㅗ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 유저들과
숨은 고수들의 등장과 동시에 대결에 패한 유저들은 초인의 자
격을 박탈장했다고 해요."
"레온은 별 걸 다 아시네요. 어디서 들은 거에요?"
"홈페이지에 떠도는 기사를 보는 거죠. 현재 초인이라고 일
컫는 자들은 각 왕국의 그랜드 마스터에 해당되는 NPC 몇과
몇몇 유저밖에 없어요."
"그렇군요."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조금 더 서둘러 다른 초인들을 찾
아다녀야겠군. 우리는 잠시 휴식차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
러 가지 먹을거리와 볼거리로 컨디션을 조절했다.
"레온, 혹시 초인이라 일컫는 자들이 누구누구인지는 아세
요?"
꼬치를 먹던 레온이 미간을 좁혔다.
"음, 글쎄요. 가물가물한데, 먼저 바인마하 왕국과 그리 멀지
않은 라무스 왕국의 초인 웰리언 후작, 파르판 자국의 유저 초
인인 도적왕 제로스, 그랜드 마스터 멕시안과 은둔 중인 상위
랭커의 유저들. 그리고 궁탑의 첫째 제자 로빈훗과 그의 사제
둘이라고 하던데요?"
"그렇군요."
레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로빈훗도 초인의
명성을 가지고 있었군. 제일 마지막 목표인 로빈훗도 초인이라
는 사실을 알게 되자 왠지 모르게 힘이 났다.
걸신이라도 들렸는지 수북이 쌓인 꼬치 더미와 아직까지 허
겁지겁 먹는 현지와 제리코를 보자 왠지 모르게 속이 더부룩했
다.
"티아, 맛있어?"
"응, 오빤 안 먹어?"
입술에 기름기를 촉촉하게 묻히고 꼬치를 입에 넣는 현지에
게 웃음으로 답한 나는 제리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양껏 먹었는지 현지와 제리코가 먹는 것을 그만두었다.
"다 먹은 거야?"
현지와 제리코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나는 꼬치 값을 계산
했다.
'페리안을 꺾긴 했지만 앞으로도 꺾을 초인이 몇 존재하는군.'
앞으로도 그런 강자들과 싸운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들뜨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불안했다. 이번 대련도 거의 악으
로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보법을 연마하는 것에 힘써야
할 것 같았다.
"오빠, 왜 그렇게 심각한 거야?"
"응? 아, 아무 것도 아니야."
현지의 말에 빙긋 웃으며 대답해준 뒤 나는 앞서가는 레온의
뒤를 따랐다.
모든 초인들을 꺾은 뒤엔 제리코를 놓아주고 레인지 마스터
레드 파운이 아닌 펠터의 잡화상점 도우미 레드 파운으로 생활
할 것을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수도 페리안 부근에 레온이 설치해둔 마법진에 다다랐다. 일
행은 마법진 위에 올라선 뒤 레온의 워프 마법으로 파르판 제
국에 도착했다.
"저는 다시 들어가 봐야겠군요."
"매번 고맙습니다."
"뭘요."
레온이 빙긋 웃으며 독서실로 향했다. 휴우, 이제 꺽어야 할
초인도 몇 남지 않은 것 같다. 이젠 보법 수련을 한 뒤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좀 더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해야겠군.
기본적인 동작은 거의 마스터한 제리코는 이제 대련 상대만
찾으면 될 것 같았다. 이건 뭐 현지에게 부탁하면 되겠지?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 아닌가 하며 나는 현지에게 시선을
던졌다. 예상외로 말도 다 끝나기 전에 현지는 빙긋 웃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도와줄게."
"미안해, 매번.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아냐! 그냥 오빠랑 같이 다니는 걸로 만족해."
루카와 제리코, 현지와 함께 수련의 단골 장소인 공터에 다
다르게 되엇다. 이젠 기본기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잇는
제리코는 혼자서도 수련에 몰두했다. 근처의 나무를 과녁삼아
활을 쏘고(물론 관리인에게 걸리면 벌금을 내야 된다.) 나름대
로의 스텝(보법)을 밟으며 적응해나갔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받은 책을 꺼내 다시 보법에 대한 기본적
인 동작들을 이해하며 익혀나갔다.
기본기 수련을 모두 끝낸 제리코는 대련을 요청했고 현지는
대련을 승낙했다.
나는 정령과 융합한 제리코와 현지가 친선 대련을 벌이는 것
을 보다 다시 스텝을 밟았다.
퀵스텝을 걸고 지금껏 익힌 보법을 밟자 움직임이 좀 더 부
드럽고 안정적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퀵스텝을 걸고 그냥 아무렇게나 움직였는데 이 보
법을 응용하니 무척 효과적이군!'
왠지 모르게 입가에 자꾸만 웃음이 걸렸다. 좋아, 이대로 보
법을 익혀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 뒤 초인들과 맞붙는다면 그
만큼 이길 확률이 높아지는 거야.
잡동사니를 만들 때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스텝을 밟다보
니 어느새 스태미나가 감소되어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전에 스태미나가 바닥을 기기 시작했는지 몸이 노
곤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이제 제법 몸에 익은 것 같으나 그래도 아직까진 흉내 내기
에 불과했다. 뭐 그래도 전보단 훨씬 나아진 걸 몸소 느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물론 현실 시간) 개학식
을 마치고 무척이나 오랜만에 강찬, 경훈, 혁, 이 세 녀석들과
함께 하굣길을 걸었다.
"엄청 오랜만이다."
"그래, 무지 반갑다야."
강찬의 말에 혁이 맞장구쳤다.
"근데 요새 우리가 너무 따로따로 논다고 생각 안 해봤어?"
"어라? 생각해보니 그러네."
"생각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잖아. 멍청아."
"뭐 인마?"
혁의 대꾸에 경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고 둘은 또다시 티격태
격하기 시작했다. 간만에 봤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여전했다.
점심때가 다 되어가니 배가 슬슬 고파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근처 음식점을 찾아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며칠 전에 새로 생
긴 감자탕집이라고 했는데 무려 한 달가량 밖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 생긴 지도 모르겟다.
"주문하시겠습니까?"
"감자탕 대짜리 둘이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여성이 무척이나 예뻤다. 원래라면
혁이 헤벌쭉 웃고 잇어야 정상인데 리아 양과 붙어 다닌 뒤로
는 그런 게 없어진 것 같았다.
그때 조용히 눈치를 살피던 경훈이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조심스레 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혁아, 너 요새 많~이 이상하다."
"왜?"
"그 여자 분과 다니더니 많이 변했어. 그치?"
"그러게? 이 자식 변태같이 헤벌쭉 웃어야 정상 아니었어?"
강찬이 거들자 혁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무슨 변태야 이 자식아. 이 녀석들이 왜 이래?"
"현성아, 너도 느끼지? 이 녀석 갑자기 실실 안 쪼개는
지?"
"좀 달라진 것 같긴 하다. 리아 양과 다닌 뒤로 버릇이 좀
고쳐진 것 같은데? 둘이 설마....."
피식 웃으며 강찬의 말에 대꾸하자 혁의 얼굴이 점차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오, 야, 이 녀석 얼굴 빨개지기 시작한다. 푸핫핫!"
혁에게 손가락질하며 경훈이 웃기 시작했고 강찬은 옆에서
거들었다.
"둘이 붙어 다니는게 심상치 않더니 그런 사이가 됐구나?"
결국은 폭발해 고함을 지를 것 같던 혁이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런 거."
그에 나는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모두들 나와 같은 생
각인 듯 두 눈이 휘둥그레져 나를 비롯한 서로를 번갈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감자탕이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시켰다.
"와! 드디어 나왔다."
경훈과 혁이 동시에 소리쳤다. 쩝, 참 죽이 잘 맞는다. 강찬
과 혁, 경훈과 내가 마주 앉아 주문한 감자탕에 숟가락을 옮겼
다.
친구들과 헤어진 뒤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편안한 복장으
로 갈아입고 즉시 게임베드에 누웠다. 컴이 뭐라 잔소리를 했
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더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
을 느끼며 헤드셋을 뒤집어썻다.
[레드 파운 Lv.82, 접속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언제나 그랬듯이 세실리아 월드에 접속을 하게 되면 루카와
제리코가 나를 제일 먼저 반겼다. 이 녀석들 왠지 모르게 기분
이 좋아 보이는걸?
두 녀석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나는 지금까지 익힌 보법
을 다시 응용해보기로 했다.
"퀵스텝."
몸이 무척이나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스텝을 밟았고, 처음
연습할 때완 달리 나름대로 완벽한 움직임을 선보일 수 있었다.
일주일 전쯤이었을까? 보법 수련을 하던 도중 제리코가 날
빤히 바라보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곤 퀵스텝을 걸고 내 흉내
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단 한 번 본 동작을 그대로 재연하는 것에 왠지 모를
부러움을 느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제리코에게도 중원의
보법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이젠 나와 엇비슷한 정도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제리코와 대련을 하면서 내 나름대로 갈고 닦은 보법은 원래
백월문의 것이지만 현재 내가 익힌 것은 내게 맞게 변형된 것
이었다.
백스텝을 응용해 재빨리 뒤로 빠지며 활을 쏘는 법과 또 빨
리 치고 들어갈 수 있는 법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었
다.
초인들에게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이랃 써먹어는 봐야겠다.
몇 가지 안 되는 보법들을 모두 선보인 뒤 나는 제리코, 루
카와 함께 근처 식당으로 가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뒤 시스턴
시의 분수대 광장으로 향했다.
레온에게 들은 바로 유저 초인인 '도적왕 제로스'는 가끔 시
스턴 시의 분수대 광장에 모습을 나타낸다고 했는데 이따금 돌
아다니는 암상인 NPC의 스크롤을 구입하기 위해서라고 들었
다.
마침 오늘이 암상인 NPC가 못브을 나타내는 날이었고 나는
이를 ㄹ이용해 공개적으로 대결을 요청하려는 심산이었다.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어색함이 느껴졌
다.
분수대에 가까워지자 유저들이 북적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도적왕이다!"
"어디, 어디?"
한 유저가 소리치자 다수의 유저들이 우르르 몰렸다. 하마터
면 무리(?)에 휩쓸려 크게 다칠 뻔했잖아!
제리코를 등에 태운 루카가 민첩하게 몸을 날려 유저들을 피
한 뒤 이쪽으로 다가왔다.
찾는 데 꽤 애를 먹을 것 같았는데 무척이나 쉽게 찾은 것
같군.
내가 루카에게 손짓하자 뒤를 따랐다. 나는 퀵스텝을 걸고
유저들이 한데 모인 장소로 몸을 던졌다.
"오오! 대련이다! 도적왕과 매의 눈 길드 마스터 페일런트가
맞붙는다!"
나는 작은 신장을 이요해 틈을 비집고 들어가 유저들의 틈에
끼어 고개를 빠끔 내밀려고 햇다. 그러나 유저들의 평균 신장
이 나보다 컸기에 도무지 대결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제길, 키 작은 것이 한이다.'
하는 수 없이 루카의 등에 올라타자 이제야 도적왕 제로스와
페일런트라는 유저의 대결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두 유저
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한데 모인 유저들.
시끄러운 함성 속에서 두 유저가 서로 마주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도적왕 제로스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시커
먼 후드를 뒤집어쓴, 간단한 차림새의 유저였다.
겉보기엔 무척이나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살아 있
었다. 도적왕이란 명성을 가진 유저 초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자는 과연 어떨까?
반면에 페일런트라는 유저는 거의 대부분의 유저가 선택하는
직업인 기사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커다란 클레이모어를 쓴다
는 것이었다.
저 무거운 것을 빨리 휘두를 수 있을까?
블랙스미스(Blacksmith, 대장장이) 스킬로 직접 무기를 제작
해봐서 아는데 기본적으로 널리 쓰이는 롱 소드의 무게는 거의
5~7킬로그램이나 나갔다. 물론 들고 다니는 데는 그리 문제가
없겠지만 휘두르게 된다면 사정이 달라졌다. 원심력에 의해 무
게가 서너 배 이상 증가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힘 스텟에 많이
투자했다면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직업을 개안한 뒤 두 유저들 응시했다. 시야가 확보하
며 두 유저를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저 유저가 정말 초인의 명성을 얻은 유저인가 싶을 정도로
제로스의 겉모습은 무척이나 초라했다.
의류점에서 파는 싸구려 후드를 덮어쓴 것이 전부였다.(물론
로브 속의 사정은 다르겠지?)
반면에 페일런트란 유저는 무척이나 고풍스런 갑주를 입고
있었는데 풀플레이트 메일이 아닌 조금 생소한 갑주였다. 게다
가 익숙한 문양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무척이나 값비싼 갑옷임
이 틀림없었다.
페일런트가 두 손으로 클레이모어를 고쳐 잡자 검극을 타고
시퍼런 오러가 밀려올라가기 시작했다. 페리안의 오러 블레이드
보단 좀 옅은 감이 있긴 했지만 저자 역시 엄청나게 강한 유저
인 듯싶었다.
페일런트가 지면을 박차고 나가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에 제로스가 몸을 플리며 팔을 슬쩍 휘두르자 맹렬한 파공
성이 대기를 갈랐다.
쉬잉.
맹렬히 회전하는 시커먼 표창 하나가 페일런트의 목덜미를
향해 폭사되었다. 하지만 그는 능숙하게 클레이모어를 휘둘러
표창을 두 동강낸 뒤 자세를 고쳐 잡았다.
페리안과 같은 그랜드 마스터를 봐왔기에 강한 기사들에 대
해선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됐으나 제로스와 같은 생소한 직
업을 가진 강자들을 보자 왠지 모를 궁금증이 들었다.
반대로 이번엔 제로스가 선제공격을 가했다. 두 팔을 슬쩍
휘두르자 투척용 단검과 표창 하나가 페일런트의 가슴팍과 목
덜미를 향해 폭사되었고 이것 역시 오러를 머금은 클레이모어
를 휘둘러 양단해버렸다.
"뭐야. 도적왕! 그것밖에 안 돼?"
"장난감 같은 걸 던지지 말고 본래 실력을 발휘해봐!"
여기저기서 유저들의 야유가 들려왔다. 하지만 제로스는 그다
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러다 제로스의 눈빛이 갑자기 변
하더니 조금 전과는 달리 재빨리 무언가를 던졌다.
시퍼런 빛무리에 휩싸인 무언가가 눈으로 식별하기조차 힘든
속도로 페일런트를 향해 폭사되었고 그는 대경실색하며 클레이
모어를 휘둘렀다.
촤앙!
페일런트가 당황하는 사이 두 개의 푸른 빛무리가 폭사되더
니 이내 소매에서 날카로운 네 개의 칼날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발현되었따.
촤앙!
그 뒤론 정말이지 장관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공방을 주고받
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짤막한 무기로 클레이모어를 막아내며
상대의 틈을 파고드는 제로스의 모습에 야유를 하던 유저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무척이나 빠른 몸놀림을 선보이며 빈틈을 노리는 제로스의
모습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와도 같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날카로운 공격을 막아내던 페일런트의 얼
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큰 클레이
모어를 종횡무진 휘두르며 오러를 발현시킨다는 것 자체가 쉬
운 일은 아니었다.
제로스의 마지막 일격에 페일런트는 검을 놓치게 되었고 그
의 클로에 목이 꿰뚫려 게임아웃 되었다. 아무래도 그는 패배
한 상대를 살려두지 않는 것 같았다.
페일런트를 쓰러트린 제로가 막 등을 돌렸다.
'아차, 이러고 잇을 게 아니라 얼른 대련 요청을 해야겠어/'
"루카, 제리코, 여기에 있어야 돼. 금방 돌아올게."
"형, 어디 가는데?"
제리코의 물음에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한 뒤 나는 퀵스텝을
걸고 유저들 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재빨리 근처 건물 뒤
에 숨어 매직 벨트에 집중하자 매직 아머가 머리를 제외한 온
몸을 감쌌고 망토의 카라를 당겨 얼굴의 반을 가린 뒤 광장으
로 몸을 날렸다.
웅성웅성~.
조금 전에 벌어진 도적왕과 매의 눈 길드 마스터의 대결에
시스턴 시의 분수대 광장 근처는 무척이나 어수선했다. 결과는
도적왕 제로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어서 빨리 스크롤을 사 이곳을 벗어나야겠어'
대결을 끝낸 제로스가 막 등을 돌려 유저들이 만든 원에서
벗어나려던 찰나였다.
"잠깐 기다리시오!"
어디선가 들려온 음성에 제로스를 비롯한 유저들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유저들의 시선이 향한 곳엔 비교적 왜소한 체구를 가진, 붉
은 망토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핏빛 갑주로 머리를 제외한 전
신을 빈틈없이 감싼 유저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몸을 돌린 제로스가 유저에게 시선을 두었다.
왼손에 검붉은 활을 쥔 유저가 제로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
다. 그의 몸 주위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
고 있었다.
제로스에게 다가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그가 말했다.
"당신이 유저 초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도적왕 제로스입
니까?"
유저의 물음에 제로스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여기
저기서 비웃는 듯한 어조로 조소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제로스
가 보기엔 그냥 웃어넘길 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았다.
'궁수 도전자인가......'
궁탑의 제자들이 궁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긴 했지만
그 외의 궁수들은 아직까지 신대륙 아리시아에선 거의 무시당
하고 있따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3차 전직을 한 궁수들이라면 환영을 받는다. 하지만 아
직까지 3차 전직을 한 유저들이 무척이나 적을 뿐더러 그 외에
는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때문에 제로스 앞에 나타난 도전자로 보이는 왜소한 체구의
유저가 쥔 무기가 활이란 것을 알자 구경을 하던 유저들은 비
웃음 어린 시선으로 도전자와 도전자의 손에 들린 무기를 번갈
아보았다.
"쯔쯔, 궁탑의 제자들이 궁수들을 다 망쳐놓는다니까."
"그러게."
이미 3차 전직까지 마쳐 스킬의 능력이 보통 유저들과는 격
이 다른 제로스는 다른 유저들에 비해 청각이 무척이나 발달했
다. 때문에 웅성이는 틈에서도 유저들의 말을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도적왕 제로스, 당신에게 대결을 요청합니다."
마지막으로 던져진 도전자의 말에 유저들은 자지러지듯 웃기
시작했다. 유저들 사이에서도 초인이란 존재는 보통 유저들과
궤를 달리하는 엄청난 존재였기에 보통의 경우 초인에게 저런
발언을 하는 일ㄹ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궁수 도전자라. 재밌군. 로빈훗에 이어 다음 도전자인가.....'
비웃는 유저들과는 달리 제로스는 차분하게 도전자의 위아래
를 살펴보았다. 자신에게 도전했던 궁탑의 첫 번째 제자이며
레인지 마스터라는 경지에 오른 궁수 로빈훗.
그때 당시 대결은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도전자와 제로스
모두 치명상을 입고 나가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있떤 일을 되새기던 제로스가 고개를 끄덕였
다.
"그대의 도전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떠들썩하던 유저들이 잠시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작게 웅성이기 시작했다.
소매에서 표창하나를 알게 모르게 꺼내든 제로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단, 저에게 패배할 경우 살려두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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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파운, 도적왕 제로스를 꺾다.
눈빛이 완전히 돌변한 제로스가 이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그것
과도 같았다.
그렇담 나도 실력 발휘를 해보실까? 로빈훗과 페리안의 대결
에서 얻은 것이 많은 나는 지금까지의 군더더기를 모두 떨쳐버
리고 나만의 보법까지 익힌 상태였다.
물론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풀어진 드래곤 레드
롱 보우의 활시위를 활 끝네 걸고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
내들었다.
조금 전의 대결을 보니 상대방의 공격을 흘리며 빈틈을 노리
는 것이 제로스의 패턴 중 한 가지인 것 같았다.
일단 경고 사격을 한 뒤에 진짜 공격을 하는 것이 낫겠지?
나는 화살 깃을 활시위에 슬쩍 갖다 대며 제롯의 시선을
던졌다.
'백호, 윈드 애로우를 부탁할게.'
-걱정 마세요. 마스터.
"시작할가요?"
제로스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나는 재빨리 그를 향해 활
을 쏘았다.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키지 않은 스몰 스피어를 연
상시키는 화살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제로스를 향해 폭사
되었다.
예상대로 제로스는 몸을 돌려 화살을 피함과 동시에 팔을 슬
쩍 휘둘러 무언가를 던졌다.
쉬잉.
"퀵스텝."
이쪽으로 날아드는 표창 한 장을 보며 나는 퀵스텝을 걸었고,
몸을 슬쩍 틀어 백스텝을 밟아 표창을 피해냄과 동시에 제로스
에게 활을 쏘았다. 굵직한 붉은 섬광이 대기를 가리며 목표물을
향해 쏘아졌다.
몸을 돌려 날아든 화살을 피해낸 뒤 표창 하나를 날린 제로
스가 자세를 바로 잡는 순간이었다. 표창을 가볍게 피해낸 도
전자가 거의 순식간에 화살 아니, 굵직한 붉은 섬광 한 줄기를
쏘아 보내는 것이 아닌가?
그에 제로스는 잽싸게 몸을 숙여 붉은 섬광을 피해냈다. 어
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광경이 주마등처럼 제로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저자도 레인지 마스터란 것인가?'
놀랄 틈도 주지 않고 이번엔 두 줄기의 붉은 섬광이 이쪽을
향해 폭사되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재빨리 투척용 단검 두자루를 꺼내 든 제로스가 이쪽으로
날아드는 두 줄기의 붉은 섬광을 향해 단검을 힘껏 내던졌다.
푸른 오러를 머금은 두 자루의 단검이 맹렬히 회전하며 붉은
섬광과 부딪쳤따.
촤앙!
맹렬히 날아들던 붉은 섬광은 너무도 허무하게 퉁겨졌다. 궤
도가 바뀌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 것이었다. 도전자가 화살
하나를 더 꺼내드는 것을 확인한 제로스는 양 손목에 착용한
클로의 날을 세운 뒤 도전자를 향해 몸을 던졌다.
'뭐, 뭐지?'
두 자루의 오러를 머금은 투척용 단검이 화살을 쳐내기가 무
섭게 이쪽으로 몸을 날린 제로스를 보며 현성은 또다시 퀵스텝
을 걸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제로스가 현성의 목덜미를 향해 클로
를 찔러 들어갔고 두 초인들의 대결을 통해 동체 시력이 발달
된 현성은 재빨리 보법을 밟아 몸을 슬쩍 뒤로 뺌과 동시에 활
을 휘둘렀다.
"보우어택!"
카앙!
현성이 제로스의 클로를 쳐냈다. 하지만 재빨리 몸을 돌린
제로스가 반대편 클로를 휘둘렀다. 클로엔 시퍼런 오러가 맺혀
있었기에 이번에도 활로 맞받아친다면 활이 두 동강 날 우려가
있었기에 현성은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허공답보를 시현해 공중에서 다시 한 번 뛰어오른 현성의 모
습이 그 자리에서 퍽 꺼져버렸다.
'뭐지? 갑자기 사라져버리다니.'
제로스는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갑작스럽게 사라져버린 현
성을 찾기 시작했다. 그 무렵 현성은 제로스의 뒤쪽에 서서 활
시위를 힘껏 당기고 있었다.
가까이 붙게 된다면 오럴르 머금은 클로에 당할 우려가 있었
기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것이다.
"싸이클론 애로우."
피융!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를 놓자 쏘아진 탄환처럼 맹렬히 회전
하는 붉은 섬광 한 줄기가 제로스를 향해 폭사되었다.
제로스가 투척용 단검을 던졌으나 맹렬히 회전하는 붉은 섬
광에 너무도 허무하게 퉁겨졌다.
투척용 단검을 던져 붉은 섬광을 무마시키려는 의도였으나
아쉽게도 얄팍한 단검으로 굵직한 붉은 섬광을 무마시키는 건
무리였다.
'도데체 뭐지? 역시 평범한 방법으론 안 되겠어.'
로빈훗과의 대결 당시 그가 쏘아낸 붉은 섬광을 맞받아친 경
험이 있었기에 쉽게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도전자에겐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날아든 붉은 섬광에는 미증유의 거력이 담
겨 있었고,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재주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평범한 방법으로 도전자를 상대할 수 없음을 알아차린 제로
스가 조용히 말했다.
"쉐도우 스텝(Shadow step)."
그와 동시에 제로스의 몸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웅성이며 대결을 관전하던 유저들은 마치 쥐 죽은 듯 조용했
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도전자가 무지막지하게 강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애송이로 치부했던 도전자가 이렇게 강하다니.....
눈으로 식별하기조차 힘든 빠르기로 거리를 좁혀 공격하는
제로스의 클로를 쳐내고 순식간에 거리를 두는 민첩한 몸놀림
과 활에서 쏘아지는 붉은 섬광.
그들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도적왕 제로스와 팽팽히 맞서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
자 조소하던 이들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조용히 대결
을 관전했다.
'이런.'
이것이 쉐도우 스텝이란 스킬인가? 제로스가 말을 마침과 동
시에 연기처럼 사라지더니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선제압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어
디까지나 내 생각이었나 보다.
상대는 유저 초인으로 손꼽히는 실력자였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기에 패착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나는 왼손에 쥔 드래곤 레드 롱 보우를 움켜쥐고는 주변을
살폈다.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만반의 준비를 하
고 제로스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려던 찰나, 뒤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
졌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몸을 돌려 백스텝
을 밟았다.
아니나 다를까, 제로스가 재빨리 치고 들어와 팔을 뻗었다.
슈각.
갑작스런 기습 공격에 나는 왼팔에 가볍지만은 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클로에 오러를 머금고 있었기에 매직 아머를 가
르고 왼쪽 팔을 훑고 지나갔다.
오러에 의해 입혀진 상처라 그런지 무척이나 후끈했따. 예리
하게 갈은 칼날에 베이는 것보다 더욱 고통이 심했고, 피가 베
어나오기 시작했는지 왼팔이 축축해졌다.
기습 공격을 가한 제로스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제길, 이것도 엄연히 밸런스에 맞춰 만들어진 스킬. 분명 약
점이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 계속 서 있다간 또다시 기습 공격에 당할 우려가
높았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이번엔 다리 쪽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지면을 힘껏 박차고 뛰어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갑작스럽게 나타난 제로스의 클로가 대기를
갈랐다.
부웅.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던 제로스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가더니 약 1초 후 또다시 모습을 감췄다.
사기적인 스킬에 딜레이가 1초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1
초의 딜레이 시간을 노릴 수밖에 없는 건가?
나는 허공답보를 시현한 채 허공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
다. 지속적으로 마나가 급속히 감소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쐐액!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파공성에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따. 시
퍼런 오러를 머금은 표창 하나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
가? 그에 나는 허공에서 백스텝을 밟고 몸을 뒤로 뺐다.
그 순간 갑작스레 모습을 나타낸 제로스가 팔을 휘둘러 클로
를 내 목덜미로 찔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마 지상에서 이랬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여긴 현
재 허공이었다.
나는 즉시 천근추를 시현해 순식간에 하강한 뒤 바닥에 착지
하기 전에 천근추를 풀어 가볍게 ㅊ팍지했다.
그리곤 재빨리 화살을 꺼내 무방비 상태에 놓인 제로스에게
붉은 섬광 한 줄기를 쏘아 보냈다.
"싸이클론 애로우!"
피융!
'뭐, 뭐야, 이 유저는.'
제로스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날아드는 붉은 섬광을 있는
힘껏 쳐냈다.
촤앙!
도전자가 또다시 화살을 꺼내드는 것을 확인하며 제로스는
재빨리 지면에 착지한 뒤 쉐도우 스텝을 이용해 모습을 감췄다.
'무척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입이구나. 대체 궁수에게 저
런 스킬이 있었던가?'
활에 오러를 발현시킨 뒤 미증유의 거력을 담아 쏘아대는 것
까진 본인의 실력으로 어떻게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전
자의 신랄한 몸놀림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제로스였다. 그대
로 클로만 찔러 넣는다면 도전자는 게임아웃 될 상황이었으나
지면으로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바닥에 내리꽂힌 도전자를
보며 당황하는 사이 또다시 미증유의 거력이 담긴 화살이 자신
에게 폭사되었다.
'평범한 방법으론 안 된다. 쉐도우 스텝과 여러 가지 스킬을
조합해서 단숨에 끝장내야겠어.'
미간을 찌푸린 제로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현재 모습을 감추고 있었기에 도전자는 당황한 채 주변을 살
피기 시작했다. 제로스는 소매에서 투척용 단검 하나를 꺼내들
곤 힘껏 던졌다.
오러를 한껏 머금은 투척용 단검이 도전자를 향해 폭사되었
고 제로스는 도전자가 회피하는 방향으로 내달려 그의 턱에 발
차기를 먹였다.
빠악!
"큭!"
갑작스런 일격에 도전자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자세
를 바로 잡았지만 상당한 충격을 먹었는지 약간이나마 휘청거
렸다.
제로스는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클로에 길게
자라난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린 채로 도전자의 가슴팍을 향
해 팔을 내뻗었따.
푸학!
손끝에서 목표물을 꿰툻었을 때나 느낄 수 있을 법한 감촉이
전해졌다.
"크아아악!"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내긴 했지만 치명상만을 피해냈을 뿐이
었다. 왼쪽 옆구리에 틀어박힌 오러 블레이드에 의해 살갗이
시커멓게 죽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생명력이 급속도로 감소되기 시작했는지 몸에서 힘이 쭉 빠
져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패할 것이 분명했기에 무슨
수라도 써야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백스텝을 밟았다.
촤아.
옆구리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끄으윽."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고통이 온몸을 훑고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제로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얄밉게도 제로스는 또다시 모습을 감춰버렸다.
'청룡, 회복 좀 부탁해.'
-알았다. 상처를 회복하는 동안 심하게 움직이면 회복이 더디니
조심해라.
청룡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청룡의 치료가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아려오던 상처 부위가
무언가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편안해지기 시작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만히 서 있을 때나 그랬다.
제로스가 어디서 나타날지 몰랐기에 나는 지면을 박차고 뛰
어올라 허공답보를 중첩시켜 단 한 번의 도약으론 뛰어오를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올라섰다.
이 정도 높이에선 밸런스 때무에 공격을 할 수는 없지만 그
래도 기습을 당할 우려가 없었다.
"휴우, 그래도 투척 무기를 던질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해야
겠어.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어째서 도적왕이란 명성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입의 유저였다.
간간히 날아든 투척 무기를 피해내며 얼마의 시간이 지나
자 나는 상처가 전부 아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 청룡."
나는 즉시 천근추를 시현해 지면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
을 받으며 순식간에 내려올 수 있었고, 적절한 순간에 천근추
를 풀어 착지했다.
조금 전 투척 무기를 던지는 타이밍이 일정한 것으로 보아
쉐도우 스텝은 시전 시간이 일정하게 정해진 것 같았따. 그것
을 노려 공격한다면 제로스를 쓰러뜨릴 수 있겠지?
나는 퀵스텝을 걸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우선 현무에게 내 근처 지면에 그리스(Grease)를 걸어두도
록 지시했고, 백호에게는 언제든지 싸이클론 애로우를 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물론 이렇게 된다면 나도 마찰계수가 0이 된 지면에 넘어져 버릴
테지만 상승무공을 사용한다면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나가 절밤ㄴ도 남지 않은 상태였따.
나로서는 거의 도박 수준이었다. 급속히 마나가 회복되기는
했지만 그만큼 소비되는 마나량이 훨씬 많기 때문이었따.
그리스가 펼쳐진 지면에 발을 들였는지 제로스가 헛바람을
들이키며 넘어졌다. 그에 재빨리 화살을 꺼내 화사리 깃을 활시
위에 걸려던 찰나의 순간 제로스가 던진 투척용 무기가 이쪽으
로 날아들었다.
나는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투척용 무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활을 쏘았고, 맹렬히 회전하던 붉은 섬광은 지면에
깊숙히 박혔다.
화살에 스쳤는지 붉은 핏방울이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바닥
을 굴러 빠져나갔는지 잠시 쉐도우 워커를 해제한 제로스가 피
가 흐르는 어깨에 손을 얹고 이쪽을 노려보았다.
나는 현무에게 그리스를 거두도록 지시한 뒤 지면에 착지했
다. 초인인 이상 같은 수법을 두 번 걸리지 않을 우려가 컸기
때문이었따.
아무래도 페리안 공작에게 썼던 방법대로 상대로 해야겠군.
그것은 페리안 공작을 무릎 꿇게 만든, 공중을 마구 뛰어다
니며 화살을 폭사시키는 신기술이었다.
마나가 어느 정도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어깨를 움켜쥔 상태
로 공기 중으로 스며들듯 사라진 제로스가 서 있던 자리에 시
선을 두었다.
상대는 지면에 그리스르 거뒀다는 사실을 모른 채 더 이상
달려들지 않았다. 제법 넓게 그리스를 펼쳤던 터라 쉽게 접근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면 정확했다.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탓에 투척 무기가 날아오는 속도가
전보다 확실히 줄었고 때문에 쉽게 피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마나가 어느 정도 회복된 적절한 순간이 왔다.
'제길, 왼쪽 팔만 멀쩡했더라면.....하필 다친 곳이 왼팔이라
니......'
제로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갑작스레 나타난, 이름도 없는
유저와의 대결에서 초인인 자신이 이렇게 궁지로 내몰리게 될
것이라곤 생각도 못한 제로스였다.
"퀵스텝."
나지막이 들려오는 음성과 동시에 도전자의 모습은 그 자리
에서 퍽 꺼져버렸다.
왼팔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사실상 쉐도우 워커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위치가 쉽게 발가될 수 있었지만 제로스는 쉐도우
워커 스킬에 부여된 이동속도 증가 효과 때문에 사용하고 있었
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허공에서 들려오는 파공성. 그저 스쳤을
뿐인데 자신의 왼팔을 망쳐 놓은 파멸의 기운을 머금은 화살이
폭사되고 있었다.
"에잇."
제로스가 재빨리 몸을 움직여 피했지만 자신을 향해 쏘아진
붉은 섬광은 한둘이 아니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것은 아니었지
만 연속적으로 퍼부어지는 화살 세례는 마치 붉은 폭풍을 연상
케 했따.
쐐애애애액.
콰콰콰쾅!
제로스가 피해낸 창대와도 같은 화살이 바닥에 박힐 때마다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지켜보는 유저들은 처음과는 달리 그저 말없이 마른침만 꿀
꺽 삼키고 있었다.
사각으로 날아드는 화살이 왼쪽 다리를 훑고 지나가자 제로
스가 휘청하며 자신의 어깨로 폭사되는 한 줄기 붉은 섬고아을
보았다. 간신히 몸을 굴려 피해내긴 햇지만 틈을 주지 않고 붉
은 섬광이 날아들었다.
'이거 오늘 체면이 말이 아니군. 더 이상 피할 힘이 없어....
제기랄......'
쉐도우 워커가 헤제되었는지 제로스의 모습이 나타났고 한
줄기 붉은 섬광이 몸을 일으키려는 그의 발치에 틀어박혔다.
자신의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언제 지면으로 내려왔는지 도전자가 제로스를 내려다보고 있었
다.
오러를 머금지 않은 시퍼렇게 날이 선 창날과도 같은 화살촉
이 목덜미에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져, 졌다."
제로스의 말에 유저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휴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화살을 거두었다. 이로써 두 명
의 초인을 꺾은 셈이로군.
나는 유저들이 웅성이는 틈을 타 몸을 빼기로 마음먹었다.
아이템 창을 열어 마나포션을 꺼내 돌이켠 뒤 퀵스텝을 걸고
이형환위로 순식간에 허공으로 뛰어올라 허공답보를 중첩해 밟
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유저들의 눈에 띄지 않게 재빨리 근처 건물 뒤에 몸을 숨긴
뒤 매직 아머를 해제하자 갑옷은 벨트 형태로 돌아왔다.
그건 그렇고 무척이나 힘든 대결이었다. 항상 끝은 도박으로
끝나는군. 이번에도 도박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패배의 쓴잔을
들이켰을 터였다.
잠시 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광장으로
향했다.
많은 인파 사이에서 빠져나온 제리코와 루카가 보였다. 제리
코를 등에 태운 루카가 이쪽으로 순식간에 달려왔다.
"형! 정말 대단했어! 근데 몸은 괜찮은 거야?"
"응, 괜찮아."
제리코의 물음에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제로스에게 당했던 옆구리가 피로 흥건히 젖어 피비린내가 올
라왔다.
다행히 입고 있는 옷이 검은색이어서 축축해졌다는 것 이외
엔 티가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근처 의류점에서 옷을 사 입어
야 할 것 같았다.
파르판 제국의 시스턴 시는 의문의 궁수에 의한 도적왕 제로
스의 패배로 떠들썩해졌다. 대결에서 패한 제로스는 말없이 자
리를 떠났고 유저들이 뒤늦게 도전자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그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렇게 며칠 후.
소문은 유저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파르판 제국 전역에 번
지게 되었다. 의문의 궁수 유저를 찾기 위해 세릴리아 월드 홈
페이지 게시판이 하루가 멀게 게시글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일에 싸였을 것 같던 의문의 도전자의 정체는 생각
보다 쉽게 밝혀졌다. 바로 바인마하 왕국에서 활동하는 유저들
에 의해서였다.
현재 바인마하 왕국의 초인인 페리안 공작과의 대결로 인해
이 왕국에선 레드 파운이란 궁수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모든 궁수들의 우상이 되어버린 레드 파운. 그는 엄청난 크
기의 철궁을 들고서 무투 대회에서 궁수에 대한 고정관념을 박
살내버린 장본인이었다.
톱클래스의 NPC 초인 중 한 명인 바인마하 왕국의 페리안
공작을 꺾고 당당하게 초인이랑 명성을 가져간 떠오르는 신인.
현재 세릴리아 월드 신대륙은 레드 파운이란 유저에 의해 뜨
겁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팀장님, 레드 파운이란 유저 아시죠? 이거 보통내기가 아
닌데요?"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를 살펴보던 운영진의 말에 김 팀장
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 유저? 잘 알지. 근데 무슨 일인데 그래?"
"이 유저를 지켜본 결과 엄청난 활약상을 남기고 있는 것 같
습니다."
김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영진이 레드 파운의 신상 정
보 창을 띄우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물론 이것은 운영진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동안 타인에 의해(소문에 의해) 기록된
정확한 정보만을 볼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오, 그래, 이 유저. 처음에 이 유저 때문에 떠들썩했지. 여
섯 가지의 생활직 스킬을 순식간에 마스터하고 예정엔 없었던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가 된 그 유저구면."
김 팀장은 아무 말 없이 신상 정보를 읽어 내려갔따. 그가
알기로 이자는 공성전 당시에도 활약을 하고 몬스터 침공 이벤
트에도 엄청난 활약상을 남긴 뒤 신대륙으로 건너 간 유저였다.
"이 유저는 어딜 가든 활약상을 남기는군. 허허, 무투 대회
예선전 우승을 한 뒤 초인 페리안 공작에게 도전 후 패배. 그
리고 재도전 후 승리라...."
"최근엔 두 명의 초인을 더 꺾었다고 합니다. 카토 왕국 담
당인 최 운영진의 말에 의하면 카토 왕국의 초인인 카르토니아
후작도 변변찮은 힘도 쓰지 못한 채 패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에게 패한 나머지 한 명은 또 누구인가?"
"도적왕 제로스 아시죠?"
그에 김 팀장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아, 제로스....."
제로스도 한때 홈페이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적이 잇었기
에 김 팀장이 이런 반응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제로스마저 레드 파운에게 패했다 이거군."
김 팀장이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곰곰히 생각하던
김 팀장이 조용히 말했다.
"은둔 중인 진정한 초인 유저들과 현재 랭커 된 초인 유저들
이 맞붙는다면 과연 누가 이길지 궁금하군."
"당연히 현재 랭커 된 초인 유저들이 이기겠지요?"
운영진의 말에 김 팀장이 피식 웃었다.
"한 가지 재미잇는 생각이 떠올랐어. 원래는 신대륙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 우리의 일이었지만 이번 기회에
잠깐 간섭을 해보는 것도 좋겠어. 기획팀원들 전부 불러오게."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김 팀장을 보며 운영진은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이내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우리 일행은 한자리에 모두 모였다. 시스턴 시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낡은 호프에서 만났는데 모두들 멋지게 변
한 것 같았다.
"모두들 뭐하고 지낸 거야?"
내가 빙긋 웃으며 묻자 강찬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나는 뭐 그냥 평소처럼 지냈지."
"데시카 넌?"
"나는 뭐, 네 동생이 전수해준 기술을 갈고닦느라 정신없었
지.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이제 흩어지지 말고 다 같이 다녔으
면 좋겠어."
경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역시 따로따로 다
니는 것보다 모두 모여 함께 동행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좋
으니까.
호프 안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떠들썩했다. 우리는 그동안 있
었던 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고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왁자
지껄 떠들어재꼈다.
"그래서 세실리아 대륙까지 같이 갔다 왔다는 거야?"
"뭐, 그렇단 거지."
리아 양의 2차 전직을 위해 세릴리아 대륙까지 함께 다녀왔
다느 ㄴ혁의 말에 모두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에 리아
양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혁은 아무렇지 않게 맥주를 벌컥
벌컥 들이켰다.
음, 아무래도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지만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안주로 나온 소시지를 집어 입에 넣었다.
호프에 와본 것이 처음인지 제리코는 처음엔 어리둥절해 하
더니 이내 맥주와 함게 나온 음료와 안주를 집어먹으며 품에
안은 아기 늑대의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이젠 루카가 찬밥인 걸?
"루카."
루카에게 커다란 소시지 하나를 던져주자 기다렸다는 듯 꼬
리를 흔들며 큼지막한 소시지를 입에 물고 야금야금 씹기 시작
했다.
"그건 그렇고 요새 레드 파운 하면서 떠들썩하던데 무슨 일
이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닭다리 하나를 통째로 들고 우적우적 먹던 강찬의 물음에 나
는 고대를 저으며 대답했다.
요새 유저들의 관심이 내 쪽으로 집중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좋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헐뜯는 유저들도 적지 않을
거란 생각 때문인지 집어먹는 안주에도 별 맛을 느끼지 뫃샜다.
하지만 간만에 동료들과 모인 자리에 계ㅒ속 침울해 잇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오랜만에 단합도 할 겸 다 같이 근처 던전에나 한번 가볼
까?"
"그것도 좋겠는데? 요새 하도 마법서만 파서 몸이 좀 뻐근했
거든."
"나도 찬성."
예상대로 강찬과 경훈은 신나서 찬성을 했고, 나머지 동료들
도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옆에 앉은 현지는 알게 모르게
빙긋 웃고 있었다.
"그럼 오랜만에 던전이나 가볼까요?"
"우리 오랜만이 아니죠? 리아."
"아, 네."
혁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리아를 보자 마치
옛날의 현지와 나를 보는 것 같아 자꾸 웃음이 나왔다.
"뭘 그렇게 웃어?"
"아냐, 쿠쿡."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우리 일행은 맥주를 마시고 안주를 집
어 먹으며 지금껏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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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 이리시아의 파르판 제국에서 열릴 이벤트 예고
세릴리아 월드 개발팀실.
김 팀장을 비롯한 개발팀 팀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김 사장에게 허가 받은 작업이기에 더욱 완성도를 높이기 위
해서였다. 김 팀장이 말했다.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이건 유저들이 즐길 수 있는 이벤
트여야 합니다. 그리고 신대륙에 머무는 유저들은 다른 유저들
과는 달리 별다른 제약이 없는 곳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벌이든 제동을 걸지 않고 지켜봐야 합니다."
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이벤트는 단 한 명의
유저에 의해 급조된 것이었다. 물론 그 한 명을 위한 이벤트가
아닌 모든 유저들이 즐길 수 있는 이벤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럼....."
운영진과 직원들은 김 팀장의 지시에 따라 각자 할 일을 맡
아 분주하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죄다 언데드 몬스터야?"
플레임 웨폰을 발현시킨 강찬이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달려드
는 구울을 양단시키며 소리쳤다. 하수도 던전 입구의 대여섯
마리의 구울을 상대하며 모두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혁이야 신성력이 담긴 오러 블레이드로 쉽게 언데드 모슨터
들을 한 줌의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지만 다른 일행들은 그것
이 불가능했고, 이곳 몬스터가 다른 곳의 몬스터완 격이 달랐
기 때문에 구울을 상대하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데서 여태까지 놀았딴 말이야? 장한데?"
"여기가 뭐 어때서? 웃차!"
막 구울의 머리통을 박살 낸 경훈의 물음에 혁이 대답하며
달려드는 두 마리 구울을 가로로 양단했다. 두 토막 난 구울이
한 줌의 재로 화해 바닥에 흩뿌려졌고 입구를 막고 있던 구울
들이 사라지자 우리는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하수도 던전 내부는 꽤나 으슥했고 아름다운 시스턴 시의 지
하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레온의 라이트와 혁의 홀리 라이트가 주변을 밝게 비췄고,
하수도 던전의 길을 잘 알고 있는 혁이 앞장섰다.
비교적 방어가 약한 레온이 일행의 중심에 섰다. 하수도 던
전의 가장자리엔 물이 흘렀고 고약한 냄새가 올라왔지만 던전
내부의 분위기가 냄새에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나와 제리코는 일행의 후방에서 서서 주변을 살폈다.
적안을 개안했는지 제리코의 푸른 눈동자는 어느덧 붉게 물
들어 있었다. 나도 적안을 개안한 채 던전 내부를 살폈다. 하수
도의 수로에서 무언가 검은 음영이 드리워지더니 이내 흉측한
몰골의 언데드화 된 리자드맨이 모습을 나타냈다.
원래는 아름다운 푸른빛을 띠고 있어야 할 비늘이 시커멓게
삭아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고, 썩어버린 동체의 군데군데
에 시커멓게 물든 뼈가 훤히 드러났다.
"웨엑."
리자드맨의 모습에 제리코가 헛구역질을 했다. 그 정도로 흉
측한 몰골의 리자드맨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냈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이 경험치 보따리 녀석들."
혁이 빙긋 웃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흔빛 검신에선 금빛 오
러 블레이드가 솟구쳐 올랐고 아이언 크로스 보우 건을 든 리
아가 리자드맨을 겨냥했다.
"으랏차!"
리자드맨에게 몸을 날린 경훈이 주먹을 힘껏 내뻗었다.
빠악!
경훈의 강철 주먹이 리자드맨의 안면에 꽂히자 머리 전체가
터져나갔다. 뒤이어 날아든 레온의 룬 프레이어(Rune flare)에
머리통을 꿰뚫린 리자드맨이 도로 수로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따. 사방에서 구울을 비롯한 리
자드맨이 속속 모습을 나타냈고 이내 우리 일행을 에워쌀 정도
로 수를 불렸다.
"이거 재밌어지는데? 플레임 웨폰(Flame weapon)!"
강찬의 검에서 불꽃이 솟아오르자 몬스터들이 우리 일행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전방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들은 혁의
금빛 오러 블레이드에 가로로 양단되어 재로 화했고, 남은 몬
스터들은 리아가 화려한 사격 솜씨를 뽐내자 머리통에 구멍이
하나씩 뚫리며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정령과 융합한 현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을 가진 물로
된 구체를 만들어 구울들에게 쏘아 보내고 있었다.
이런, 남들 싸우는 것을 지켜볼 게 아니라 이쪽으로 달려드
는 구울들이나 해치워야겠군.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제리코의 뒤를 덮치
려는 구울의 머리에 활을 쏘았따.
쐐애액!
붉은 섬광이 머리통에 박히자 구울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
다. 오랜만에 하는 사냥이라 그런지 왠지 모르게 신이 났다. 제
리코는 제법 능숙하게 활을 다루며 현지를 서포트 해주었다.
"모두들 잠시만 뒤로 물러서세요!"
보우어택으로 리자드맨의 머리통을 후려치려던 순간 레온이
소리쳤다. 그에 나는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났고 우리 일행
은 한데 모여 자세를 가다듬었다.
"라그나 블라스트(Lagna Blast)!"
레온의 외침에 사방에 역오망성의 마법진이 새겨지더니 이내
불기둥이 치솟기 시작했다.
솟아오른 네 구의 불기두잉 자아가 있는 생명체인 양 뱀처럼
마구 꿈틀거리며 구울과 리자드맨들을 덮쳐나갔다.
카아악!
여기저기서 구울과 리자드맨의 비명이 터졌고, 그것들(?)을
태우던 불기둥이 사라지자 구울과 리자드맨은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절명했다.
레온의 7클래스 마법의 가공할 위력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
했따. 전에 선보였던 라그나 블라스트보다 훨씬 더 위력이 증
가했다고 봐야 정확할 듯 싶었다.
강찬을 제외한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레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김 팀장님, 은둔 중인 전대 초인 유저들과 연락해본 결과
이벤트에 모두 참가할 의양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이제 유저들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해야겠어."
김 팀장이 턱을 매만지며 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러운 게 아닙니까?"
"그렇진 않을 거야. 현재 싸우곻 싶어 안달난 유저가 한둘
이 아닐테니까."
평소에도 PVP가 아닌 PK가 난무하는 신대륙 아리시아였고
김 팀장은 누구보다도 유저들의 심리를 잘 꿰고 있었다. 자신
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안달이 난 유저가 한둘이 아니었기에
잘만 하면 대 히트를 터뜨릴 수도 있는 기회였다.
"한 시간 후에 공지 사항을 유저들에게 알리고 자세한 사항
은 내일 오후 12시에 띄우게. 물론 게임 플레이를 하는 유저들
이 모두 볼 수 있게 말이야."
"블러드 윔까지 나올 줄이야....."
블러드 윔을 세로로 양단한 강찬이 안도의한숨을 내쉬며 문
블레이드를 늘어뜨렸다. 그에 검신에 맺혀 있던 불꽃이 순차적
으로 사그라졌다.
이제 화살도 몇 개 남지 않았군. 아이템 창에 화살이 가득
찬 화살통이 몇 개 더 있지만 이런 곳에서 낭비할 수 없었다.
"휴우 적절한 순간에 던전의 끝이 보이는구나."
배틀 해머를 어깨에 들쳐 맨 혁이 말했다. 던전을 지키는 보
스는 없는 건가?
"뭐야, 이게 끝이야? 보스 몬스터는 없는 거야?"
"아, 그러려면 중간쯤에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로 갔어야 했
는데 어차피 단합을 하려고 모인 거잖아."
경훈의 물음에 혁이 대답했다. 쩝, 그럼 반대편 출구로 가는
건가? 혁을 따라 조금 더 걷자 처음에 입구에서 볼 수 있었던
구울 몇 마리를 볼 수 있었고 그것들을 해치운 뒤 계단을 오르
자 시스턴 시의 공터로 나오게 되었따.
단지 반대편 출입구로 나오는 것이었는데 월드 타임 하루 하
고도 반나절이란 시간이 지나있었다.
양 출입구의 거리가 먼 것도 있지만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의
수도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상대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나 보다.
어두컴컴한 던전에서 악취를 맡아가며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
들을 상대하느라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현지는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괜찮아?"
"응. 오빠는 단친 데 없어?"
"내가 다칠 턱이 있나."
현지의 물음에 나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여기 던전, 좋긴 한데 다신 오지 않을 거야."
"나도. 루샤크 저 녀석은 뭐가 좋다고 이런 던전에서 죽치고
산 거야?"
강찬과 경훈이 야유를 보내듯 말했지만 혁은 싱글벙글했다.
그건 그렇고 전투 클레릭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
력해진 혁의 모습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따.
우리 일행은 공터의 한쪽 자리에 배치된 휴식터(나무로 만들
어지 원두막 형태의 휴식처)로 향했따. 휴식터는 무척이나 넓었
고 오늘따라 이용하는 유저도 없었기에 모두들 다리를 펴고 드
러누웠따. 나는 등에 둘러메고 잇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머
리맡에 놓은 뒤 벌렁 뒤집어졌다.
"후아....."
상쾌한 산들바람이 불어와 이마를 스쳤다. 요즘 들어 게임을
하면서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기분을 받는 것 같았다.
잠시나마 이렇게 쉬는 것도 정신적으로 좋겠지?
나는 팔베개를 한 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기분 좋게 잠이 들려던 순간이엇따.
"근데 레드 너 요새 인터넷 게시판에서 떠들썩하더라."
"응? 뭐가?"
"그새 페리안에게 재도전해서 꺾고, 얼마 전엔 도적왕 제로
스까지 꺽었다고 아주 떠들썩해. 동영상까지 있던데?"
강찬의 말에 경훈이 거들었다. 하도 도촬(?)당하다 보니 이젠
만성이 되어 아무렇지 않았따. 나중에 홈페이지 가서 어떻게
싸웠는지 관찰해봐야겠군.
피곤햇는지 현지느 옆자리에 누워 잠들었고 건녀편에 누운
제리코는 대자로 뻗어있었다.
"고블린에게 죽을 뻔했던 녀석이 이젠 초인 유저들을 상대하
고 다닌다....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혁의 장난스런 말에 잠들지 않은 일행 모두가 웃어재꼈다.
레온과 눈이 마주치자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이내 천장으로 시
선을 던졌다.
그렇게 잠시의 휴식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특수 이벤트 담당 운영자 백이라고 합니다.
신대륙에서 플레이하는 유저 분들은 갑작스런 공지 사항에
놀라지 마시고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운영자의 음성에 나는 감았던 눈을 떴
다. 신대륙 아리시아에서 운영자가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상체를 일으켜 세운 것은 레온과 강찬이었다. 나
도 상체를 뒤늦게 일으켜 세우자 뒤따라 경훈과 혁, 그리고 리
아와 현지도 상체를 일으켰다.
"신대륙 아리시아에서 운영자가 나타나다니, 도대체 이건...."
레온이 말했다. 모두가 어수선해지는 분위기를 틈타 또다시
운영진의 잔잔한 음성이 들려왔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안녕하십니까. 특수 이벤트 담장 운영
자 백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런 공지 사항에 놀라지 마시고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특수 이벤트? 그건 또 뭐야?"
"그러게.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잇는 건가?"
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강찬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
으며 대꾸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심각한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따.
특수 이벤트라고 했으니 신대륙 아리시아에서 아주 이따금
열리는 이벤트를 일컫는 말 같았다. 그런데 어떤 이벤트일까?
또다시 내 특유의 호기심이 궁금증을 자극했고 나는 곧 들려
올 운영자의 음성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이번에 저희는 유저 여러분의 힘과 능력을 시험해볼 수 있
는 기회를 드리고자 이벤트를 마련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내
일 오후 열두 시 정각에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세릴리아 월
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이상으로 운영자 백이었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운영자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따.
힘과 능력을 시험해볼 수 있는 이벤트라....설마, 무투 대회 같
은 것은 아니겠지?
만일 이번에 개최되는 이벤트가 무투 대회라면 나는 참여할
생각이었다.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보고 싶은 것도 있
었고 유저들과의 대결을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잇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잠자코 앉아 있던 경훈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왠지 무투 대회 같은 걸 개최할 것 같은데? 신대륙 유저들
은 틈만 나면 PK질이잖아."
"그러게. 만일 무투 대회 같은 걸 개최하면 참여해봐야겠어."
강찬이 문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대꾸했다. 레온도
약간이나마 기대하고 잇는 것 같았다. 반면에 리아와 현지는
별 감흥이 없는 듯 했다.
유저끼리 싸우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현지에겐 달갑지
않은 이벤트일 것이다. 그리고 리아도 현지와 비슷한 부류(?)인
것 같았다.
개발팀실에 위치한 가상현실 게임기기 캡슐의 문이 열리면서
한 남성이 머리에 뒤집었느 헤드셋을 벗으며 몸을 일으켰다.
"팀장님, 유저들에게 알리긴 햇으나 미리 이벤트에 관한 내
용을 알린 뒤에 시작하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물로 신대륙이 아닌 다른 곳에선 그게 정상이지. 내일 공지
와 동시에 이벤트를 시작하면 많은 유저들이 신청하기 위해 시
스턴 시의 시청으로 모여들겠지. 그 와중에도 서로 먼저 하겠
다며 싸움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나? 예선전을 시작하기 전에
속된 말로 군더더기들이 떨어져 나간다면 더욱 수월하게 이벤
트를 진행할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김 팀장이 찻잔을 들고 잔에 든 내용물을 벌컥벌
컥 들이켰다. 그에 직워은 김 팀장의 말에 일리가 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이번 이벤트를 통해 유저들이 재량을 맘껏 뽐내겠군. 대결
못브을 세릴리아 월드 채널에 방영한다면 더욱 인기를 끌겠어.'
빈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김 팀장이 소파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그럼 내일 봐요."
마지막으로 리아와 레온이 손을 흔들며 로그아웃을 했다.
NPC아니, 가디언인 덕에 제리코는 운영자의 음성을 듣지 못
한채 아기 늑대를 안고 곤히 잠들어 있었고, 루카는 그런 제
리코의 옆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오빠는 언제 갈 거야?"
"너 가는 거 보고 갈 거야."
나는 현지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
댔는데 단둘이 이렇게 있는 것도 꽤 오랜만인 것 같았다.
"이번에 개최될 이벤트가 뭐지 궁금하지 않아?"
"음....궁금하긴 한데, 너무 뻔한 것 같아. 무투 대회 같은
걸 개최할 것 같은데?"
전혀 기대감이 없는 어조로 현지가 대답했다.
"음....티아 넌 PVP엔 별로 관심이 없구나?"
"응. 같은 유저끼리 싸운다는 게 좀 그래. 오빠가 유저들과
맞붙을 때도 다치지 않을까 계속 조마조마한단 말이야."
현지는 반대편 손을 들어 내 다리를 살짝 내리쳤다. 다치면
레온이나 혁이 치료해줄 텐데 그래도 내가 다칠까 봐 걱정한다
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왜 웃어?"
"아냐, 아무것도."
"피. 바보."
세릴리아 월드에도 어느덧 해기 지기 시작했다.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현지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다가 뒤늦게 로그아웃
하게 됐군. 나는 뒤집어쓴 헤드셋을 벗어 머리맡 고리에 건 뒤
게임베드에서 일어나 게임기기 밖으로 나왔다.
하루 종일 몸을 눕히고 있었떠니 절로 기지개가 켜지는군.
"끄으윽!"
[주인님, 공복도가 깁니다. 식사를 해주십시오.]
괴성을 지르며 기지개를 켜자 컴이 말했다.
"응, 알았어."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냉장고를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먹을
만한 인스턴트 식품을 찾던 끝에 호박죽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린 뒤 거실로 가지고 나왔다,
"냄새 한번 기가 막히는군."
멀쩡한 식탁을 내버려 두고 소파에 앉아 밥을 먹는 건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뜨거운 호박죽을 후후 불어가며 먹은
뒤 빈 용기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는 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벌써 오후 8시가 다 되었군.
컴에게 멀티비전을 켜도록 지시한 뒤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
지에 접속했따.
"어디 도촬(?)당한 동영상이나 감상해보실까?"
리모컨을 들고 검색어에 '레드 파운'을 입력하자 수많은 자료
들이 줄줄이 나열됐다. 나에 대한 자료가 뭐 이리 많은거지?
일일이 다 보고 넘어갈까 생각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자료일 것 같았기에 동영상 목록으로 넘어갔다.
"레드 파운 VS 도적왕 제로스. 이거네."
제로스와 맞붙던 당일 날 촬영한 누군가가 바로 홈페이지에
올린 모야이었다.
내가 동영상을 틀자 거실의 불이 모두 꺼졌다.
오직 멀티비전의 화면만이 거실 내부를 밝게 비추기 시작했
다. 영상에서 페일런트와 제로스의 대결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나타난 붉은 갑주를 차려 입은 궁수 유저가 보였다.
"나다!"
나는 쿠션을 안고 벌렁 드러누워 멀티비전에 시선을 두었다.
제로스와의 대결을 보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지금까지의 상대 중에서도 무척이나 까다로운 클래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사들돠 많은 대결을 한 나는 같은 직업인 대부분의 초인
유저나 NPC들을 상대하기가 더 수월했다. 때문에 제로스와 같
은 생소한 클래스의 유저를 상대하는 건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기사들과의 대결에선 갑작스럽게 사라진다거나 암기를 던지
는 일이 없었다.
때문에 솔직히 말해 제로스와의 대결에선 약간 짜증이 치밀
어 오르기도 했었다.
모습을 드러낸 채 맞대결을 하지 않고 자꾸만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었다. 그 스킬은 제로스만의 특권이겠지만 다른 시각으로
볼 땐 무척이나 얍삽한(?) 기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어쨌거나 제로스를 이겼던 건 운이 좋아서였다고 볼 수 있었
다. 얼떨결에 가한 공격이 상처를 입히고 쉐도우 워크를 사용
해 모습을 감추더라도 핏방울이 바닥을 적시는 것마저 감출 수
없었기에 금세 위치가 탄로 난 덕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페리안을 꺾을 때 썼던 기술로 제로스를 제압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직까지 기술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뭐가 좋을까? 애로우 스톰(Arrow storm)? 이건 좀 아니
야. 마치 붉은 폭풍을 연상시키는데?"
나는 자리에 누워 쿠션을 끌어안은 채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 내 캐릭터 이름을 따서 레드 스톰(Red storm)이라고
하면 되겠군! 이름 좋은데?"
그럴싸한 이름을 지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대결은 끝났
다. 레드 스톰에 무릎 꿇은 제로스의 목에 화살촉을 겨누며 대
결 동영상은 끝났고, 거실에 순차적으로 불이 들어왔다.
"이참에 제로스의 패턴을 전부 분석해봐야겠어. 또 그런 유
저와 만난다면 좀 더 효과적으로 맞붙을 수 있게 말이야."
나는 리모컨을 들어 리플레이로 다시 대결 영상을 재생시킨
뒤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상을 보며 유의해야 할 점 몇 가지를 알아본 뒤에야 나는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오전 8시. 오늘의 알람은 사계의 봄입니다.]
"으음....."
얼마 잔 것 같지 않은데 벌써 컴의 음성과 잔잔한 알람 소리
가 들려왔다. 나는 피로에 찌든 몸을 일으켜 반쯤 뜬 눈으로
욕실을 향했다.
욕실로 들어와 깨끗이 씻은 뒤 거실로 나와 냉장고에서 물통
을 꺼내 그대로 들이켰다.
"캬아. 시원하다."
나는 물통을 도로 냉장고에 넣고 인스턴트 단팥죽을 꺼내 전
자레인지에 돌렸다. 전자레인지 앞에 서서 단팥죽이 데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입안에 군침이 고였다.
단팥죽이 완전히 데워졌는지 전자레인지에서 소리가 났고, 나
는 단팥죽을 꺼내 식탁에 앉아 입김을 불어가며 입에 넣었다.
"음, 맛있다."
나는 순식간에 단팥죽을 해치운 뒤 빈 용기를 휴지통에 넣고
방으로 들어와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PDA를 챙긴 뒤 학교로
향했다.
교실 문을 살짝 열자 시끄러운 소음(?)이 쏟아져 나왔다. 나
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렸다. 그
에 나는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뭐지? 고개
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반장 명석이 녀석이 이쪽으로 달려와
내 손을 잡았다.
"현성아! 너 홈페이지에서 완전 인기 스타더라?!"
"엥?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와 동시에 회장 윤경이 이쪽으로 걸어왔고 나머지 반 친구
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를 둘러쌌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날
벼락인가?
갑작스럽게 몰려든 친구들이 더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녀석, 몬스터 침공 이벤트가 끝난 뒤로 세릴리아 월드에
서 보이지 않는 다 싶더니 그새 신대륙으로 건너갔었구만!"
"조용해봐! 현성아, 바인마하 왕국에서 있었던 무투 대회에서
정말 멋졌어!"
"초인 둘을 꺾다니 진짜 엄청나다. 같은 궁수로서 네가 자랑
스럽다. 근데 벌써 초인들을 상대할 만큼 레벨을 올린 거야?"
"아니 뭐......"
"현성아, 너 때문에 우리 반 애들 전체가 신대륙 아리시아로
건너갔어! 지금 어디서 활동하고 있어?"
영호의 질문에 답하려던 순간 명석이 끼어들어 내게 물었다.
"파르......"
"파르판 제국 시스턴 시에서 활동하고 잇지. 물론 이 몸도
같이 말이야."
언제 왓는지 강찬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너도 안 보인다 했더니 같이 건너간 거였어? 치사한 것들."
명석이 잔뜩 흥분한 듯 소리쳤다.
"귀 따가워 이놈아. 근데 여기 계속 서 있을 거야? 일단 자
리에 가서 앉자."
강찬이 나를 둘러싼 친구들의 틈을 비집고 나가는 것을 보며
나도 얼른 뒤따랐다. 곧 모두들 각자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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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이벤트, 유저 무투 대회 예선전 개막
방과 후.
여느 때처럼 나는 강찬과 경훈, 혁과 함께 하굣길을 걸었다.
"열두 시에 이벤트 시작이라고 한 것 같은데. 몇 시지?"
경훈의 물음에 나는 즉시 주머니에서 PDA를 꺼내 들었다.
시간을 보자 나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헉! 11시 50분인데?"
"이런 망할! 얘들아 일단 흩어지고 세릴리아 월드에서 보자!"
말을 마친 경훈이 후다닥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들 중 운동
신경이 제일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듯 녀석은 높은 벽을 그대
로 뛰어 넘는 것ㅇ르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췄다.
"무식한 놈. 멀쩡한 길 내버려두고 벽을 넘어가네. 야, 그럼
세릴리아 월드에서 보자!"
경훈이 사라지자 혁이 투덜대며 내달렸다.
"짜식들 급하긴. 현성아 그럼 우리도 이만 흩어지자."
"응,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뒤 강찬이 달리는 것을 보곤
집으로 힘껏 내달렸다.
"허억 허억. 컴, 지금 몇시야?"
[오전 11시 59분 입니다. 주인님의 숨결이 거칩니다. 심장
박동 수가 비정상적입니다. 휴식으로 안정을 취해주십시오.]
"허억, 응? 아냐, 괜찮아. 후우......"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세차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단 9분 만에 집에 오게 될 줄이야.
나는 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는 것도 잊은 채 가상현실
게임기기의 문을 열어 게임베드에 몸을 눕힌 뒤, 헤드셋을 뒤
집어썻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82. 접속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오, 레드 왔구나."
모두들 먼저 접속했는지 휴식처에 앉아 있었다. 이쪽으로 다
가온 현지가 팔짱을 꼈다.
"오빠 안녕!"
"응. 안녕. 모두들 언제 접속한 거에요?"
"우리도 접속한지 얼마 안됬어요."
레온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아직까지 운영자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시간
에 접속한 것 같았다.
이쪽으로 다가온 루카가 내 몸에 머리를 부비기 시작했고 나
는 손을 들어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제리코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방긋 웃으며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벤트가 언제 시작 되려나......"
"곧 시작할 거야. 어, 이제 12시다."
[안녕하십니까? 특수 이벤트 담당 운영자 백입니다.]
현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 운영자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에 근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제의 공지 사항대로 유저 분들이 참여하실 이벤트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본 이벤트는 신대륙 유저들에게만 주어진
이벤트로써 개개인의 능력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번에 개최할 이벤트는 '유저 무투 대회'로 자신이 얼마나 강한
지 시험해볼 수 이쓴 기회가 주어지게 됩니다. 지금부터 모두
에게 이벤트 참가증을 나눠드리겠습니다.]
파밧!
운영자의 말에 눈앞에 직사각형 입체 창이 생겨낫다.
[유저 무투 대회 참가증.]
본 무투 대회는 운영진들의 회의를 통해 만들어진 이벤트이
며, 신대륙 아리시아에서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누구든지 참여가
가능하다.
어떤 수를 써서 이기든 상관엇는 무제한 무투 대회에 참여하
려면 '참여'를, 참여하지 않고 관람을 하고 싶은 경우에는 '관
람'이라고 외쳐 주십시오.
"참여!"
어떤 수를 써도 상관 없다라....이렇게 나온다면 비겁한 수를
쓰는 유저들이 있을 테지만 실력으로 제압할 자신 있었기에 나
는 참여를 외쳤다.
"레드 저녀석은 바로 참여하는군. 이참에 우리도 참여할까?"
"그러자. 참여!"
경훈의 물음에 강찬이 소리쳤다. 뒤이어 경훈과 혁, 그리고
레온도 참여를 외쳤다.
"아직까진 동료지만 이벤트가 시작되는 순간부터는 꺾어야
할 상대가 되는 건가?"
"그렇지. 안 봐줄 거야."
경훈이 두 주먹을 맞부딪쳤고 나는 빙긋 우승며 대꾸했다.
그렇게 일행들과 웃고 떠들고 있을 때 또다시 운영자의 음성이
들렸다.
[생각보다 이벤트에 참가하는 유저의 수가 적은 것 같군요.
하지만 그에 상관하지 않고 이벤트는 진행될 것입니다. 본 이
벤트에서 우승을 하게 되면 상금 일천만 골드와 함게 '세릴리
아 월드를 대표하는 초인' 호칭을 얻게 됩니다. 준우승과 5위
를 한 유저들에게는 차례대로 상금 700만, 500만, 300만,
100만 골드와 함께 '사천왕' 호칭이 부여될 것입니다. 이벤트
에 참여하시는 유저들께서는 잠시 후 오후 4시까지 수도 아르
곤 시의 무투 대회장에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특수
이벤트 담당 운영자 백이었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운영자의 음성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세릴리아 월드를 대표하는 초인이라.....이것이 바로 내가 목표
로 하는 것이고 로시토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누구보다 강하다고 생각되는 일행 모두가 대회 예선 적으로
만날 테니까. 그렇게 내가 잠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아르곤 시라면 레드 드래곤 로이스케가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곳 아냐?"
"운영자들이 거기에 새로 무투 대회장을 세웠겠지. 영자들이
생각이 없겠냐? 멍충아."
"뭐 인마?"
혁이 소리치자 경훈이 대꾸했고 또다시 둘은 티격태격했다.
저 둘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는 것도 무척 오랜간만인걸?
레온을 선두로 우리 일행은 파르판 제국의 수도 아르곤 시로
향했다.
"생각보다 참여하는 유저들의 수가 적군."
모니터를 통해 참여하는 유저들의 수를 본 김 팀장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약 5천명가량의 유저가 참가했지만 신대륙
에서 활동하는 수를 미루어 볼때 턱없이 적었다.
미간을 좁힌 김 팀장이 참가한 유저들의 목록을 보며 피식
웃었다.
"PK 전적이 어마어마한 유저들이 대거 참여했군."
"재미잇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은둔 중인 전대 초인 유저들과
현대 초인 유저들이 대결한다니. 왠지 모르게 기대되는데요?"
"맞아. 그리고 레드 파운 유저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실험
해볼 수도 있고 말이야."
직원의 말에 빙긋 웃으며 대답한 김 팀장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차 한대를 구입해 아르곤 시를 향해 달리기를 몇시간.
드디어 아르곤 시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운영자들에 의해
깔끔하게 복원된 아르곤 시는 이전의 못브을 완전히 갖추고 있
었다.
마차의 창문으로 혁이 고개를 뻐끔 내밀었다.
"그 똥개는 지치지도 않냐?"
"말도 안지쳤는데 루카가 지칠 것 같아?"
"하긴."
내가 피식 웃으며 소리치자 혁이 고개를 내저으며 내민 고개
를 도로 집어넣었다. 나는 다른 일행들과 달리 마차가 아닌
루카의 등을 타고 달렸다. 갑갑한 마차 안보다는 루카의 등에
타는 것이 훨신 좋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마차나 자신의 소환수를 타고 아르곤 시
에 들어서기 위해 줄을 서있었다. 무투 대회가 시작되지 않았
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며 싸우는 유저들을 뒤로한 채 우리 일
행의 마차는 점점 성문과 가까워졌다.
차례를 기다려 이제 막 일행들과 성문으로 들어서려던 순간이
었다.제법 덩치가 큰 흑마를 탄 유저 하나가 우리의 앞길을
막아섰다.
"어이, 실례 좀 하자."
거만하게 우리를 쓸어다본 유저가 말 머리를 돌려 성문 안으
로 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마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화를 참지 못한 혁이 문을 열고 나가려고 발버둥을 쳤고, 그
런 혁을 강찬과 경훈이 막고 있었다.
"쩝, 아무튼 저 녀석은 울컥하는 성격이 문제야."
그렇게 성문을 통과해 아르곤 시로 들어온 일행은 가까운 마
시장에 마차를 팔아넘긴 뒤 무투 대회장으로 향했다. 아직까지
시간이 넉넉했기에 우리 일행은 가까운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주문했고,
곧 음식이 탁자 다리가 휘어질 만큼 채워지기 시작했다.
"아직 시간이 넉넉하니까 천천히 먹고 갑시다. 참, 이건 제가
쏘는 거에요."
레온이 빙긋 웃으며 닭다리를 쭉 찢어 입으로 가져갔다.
"와! 역시 레온은 쿨 하다니까요. 잘 먹겠습니다!"
잔뜩 신이 난 경훈이 스파게티 접시를 끌어당긴 뒤 포크로
휘적휘적 저어 입에 쑤셔 넣었다.
"잘 먹을게요, 레온."
"레드도 많이 들어요."
레온이 대답했다.
푸짐한 식사를 마치고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사이 어느
덧 현실 시간은 오후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드디어 네 시가 되었군. 참가한 유저들은 과연 어떨까요?"
나는 잔뜩 들뜬 어조로 말했다.
"제 생각엔 심성이 거친 유저들이 많이 참가했을 거라고 생
각되요. 어떤 방법을 써도 된다고 했으니 PK를 못해 안달 난
유저들에겐 정말 경사가 난 셈일 거에요."
진지한 레온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최대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겠군. 물론 바인마하 왕국의 무투
대회에서 그랬듯이 초반부터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초반 상대가 초인인 경우엔 부득이하게 오러
애로우를 사용해야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벌써 오후 4시가 됐군요. 지금부터 무투 대회에 참여하시는
유저들에게 번호표를 전송하겠습니다. 번호표를 받으신 참가자
들은 즉시 무투 대회장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관람객 유저
들은 무투 대회장 관람석에 앉아 계셔도 좋습니다. 이벤트는
이틀을 거쳐 예선전을 끝내고 본시합을 진행. 그리고 준결승전
과 마지막 결승전이 있을 예정입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운영자 추와는 다릴 백이란 운영자는 말이 참 많은 것 같았
다. 운영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번호표가 아이템 쪽지로 전
송되었다.
[참가자 번호표.]
예선 4조.
참가자 : 레드 파운.
참가번호 : 4091번.
4091번. 나는 쪽지 창에 담긴 번호표를 꺼내들었다. 레온을
비롯한 셋 모두 쪽지 창에서 번호표를 꺼내들었다.
"카이루, 넌 몇번이야?"
"난 1412번에 예선 2조. 너는?"
"난 4933번에 예선 5조."
"어라? 난 3502번에 예선 4조인데."
강찬은 1312번, 경훈은 4933번, 혁은 3502번이로군. 녀
석들의 번호를 머릿속에 새겨두고 있을 때 경훈이 물었다.
"레드, 넌 몇번이야?"
"난 4091번. 예선 4조."
"그렇군. 레온은요?"
"전 510번에 예선 1조네요."
번호표에 표기된 예선 조를 보니 경훈을 제외한 모두를 예선
에서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였다. 대회에 참가하
지 않는 리아와 현지, 제리코, 루카는 먼저 대회장 관람석으로
향했고 남은 우리는 무투 대회장으로 향했다.
무투 대회장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운영자들이 여럿 자
리 잡고 있었다. 그런 운영자들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유저가 잇는가 하면, 운영자에게 공격을 가하는 유저도 있었
다.(물론 순식간에 제압당한 뒤 밧줄에 꽁꽁 묵였다.)
무투 대회장의 한쪽에 선 운영자가 소리쳤다.
"예선 1조는 이곳으로 모여주십시오!"
"저는 저쪽으로 가봐야겠네요."
레온이 손을 흔들며 자신의 번호가 포함된 곳을 향해 발걸음
을 옮겼다.
"레온! 예선에서 탈락하면 안돼요! 본선에서 봐요!"
레온의 모습이 많은 인파에 가려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준 뒤 나는 강찬, 경훈, 혁과 함께 섰다.
잠자코 있던 혁이 말했다.
"예선에서 떨어지면 가만 안둔다. 꼭 본선에서 보기야."
"너야말로. 우리 모두 본선에서 보기다."
"예선에서 떨어지는 녀석은 졸업식 날까지 점심 사기다."
경훈이 대꾸했고, 강찬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미 두명의 초인을 꺾은 몸. 너희들이나 조심해. 그
럼 이따가 보자."
말을 마친 우리는 각자 번호가 호명되는 곳으로 향했다. 경
훈과 나는 같은 조였기에 함께 담당 운영자에게로 향했다.
"모두 1000명. 5조 유저 모두가 모였군요. 예선전에서 살
아남을 유저는 총 네 명입니다. 이 조에서도 네 개의 분조로
나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4001번부터 4250번까지가 1분
조, 4251번부터 4500번까지가 2분조 이런 식으로 네 개의 조
로 나뉘게 될 것이빈다. 지금부터 일렬로 서주시기 바랍니다."
다행히도 경훈과 예선전에서 만날 일은 업을 것 같았다. 일
단 같은 조이긴 했지만 다른 분조로 나뉘었기 때문에 예선에서
만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나는 1분조 줄에 서서 예선전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예
선전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각 분조에서 무작위로 섞어
짝을 지은 뒤 대결을 벌이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예선전이었
지만 유저들의 실력은 수준급니었다.
거의 대부분이 마스터급 유저였기에 기사 유저라면 오르 블
레이드를 발현시켰고, 다른 클래서의 직업을 가진 유저들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했따.
그렇게 예선전은 진행되었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4091번 레드 파운 선수와 4249번 카코 선수는 입장해주시기
바랍니다."
내 이름이 호명되자 1분조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홈페
이지에 하도 떠다니다 보니 이젠 내 이름을 모르는 유저가 없
는 모양이었다.
휴우, 예선전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긴장이 되는군. 운영자의
지시대로 경기장 안으로 들어선 나는 상대 선수를 살펴보았다.
카코란 이름을 가진 선수였는데, 은빛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
을 빈틈없이 감싼 기사 유저였다. 가장 상대하기 쉬운 클래스
인 기사 유저라니.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건 뒤
전투자세를 취했다.
바스타드 소드를 고쳐 잡은 카고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의
검신에서 이내 푸르죽죽한 오러가 발현되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오러와는 달리 무척이나 혼탁한 색을 띠고
있었다.
"레드 파운이라....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생각보다 허
약하게 생겼는데? 진짜로 초인 둘을 꺾은거 맞어?"
오러를 머금은 장검을 손에 쥔 카코가 히죽거렸다. 같잖은
도발로 방심하게 만들려는 셈인가? 하지만 나는 저따위 저질
도발에 넘어가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디 한번 오러 애로우 없이 상대해보실까?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려던 순간 피식 웃어 보인 카코가 이쪽
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혼탁한 오러를 머금은 장검이
가슴팍을 향해 쩔러 들어오고 있었다.
"백스텝!"
나는 즉시 백스텝을 밟아 거리를 둔 뒤 퀵스텝을 걸고 높이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재빨리 화살을 꺼내 어리둥절해 하는
카코를 향해 활을 쏘았다.
스몰 스피어를 연상키는 화살 한 대가 맹렬한 파공성을 흘
리며 대기를 갈랐다.
오러를 발현시키지 않았기에 화살은 카코의 검에 맥없이 양
단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나는 허공답보를 시현해 허공에서
순식간에 위치를 바꿔 더블 샷을 쏘았다.
레드 스톱을 응용한 연사 공격! 예닐곱 대의 화살이 카코를
향해 쏘아졌고 그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화살
을 모두 두 동강 냈다.
"이따위 실력으로 초인을 이겼다는 거야?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군."
'지금까지 실껏 떠들어놓고 말이 안 나온다는 게 말이 되나?'
나는 방심하는 틈을 노려 즉시 허공을 박차고 상대의 뒤로
향했다. 꿈의 신법인 이형환위를 전개하자 절반 이상의 마나가
감소되었고 그 대가로 순식간에 상대의 뒤로 이동할 수 있었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횡으로 휘둘렀
다. 뒤늦게 카코가 헛바람을 들이키며 회피하려 했으나 이미
활은 종이 한 장 차이로 카코의 안면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져, 졌다."
카코의 말에 현성은 활을 거둔 뒤 등을 돌렸다. 상대를 게임
아웃 시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경기장을 내려오려던 순간, 푸르죽죽한 오러
블레이드를 진득하게 피어올린 카코가 현성의 등판을 찔러 들
어가기 시작했다.
'멍청한 녀석, 내가 호락호락하게 항복할 것 같으냐!'
등에서 전해져오는 싸늘한 감각에 현성은 걸음을 멈췄다.
"퀵스텝."
말이 끝나는 순간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카코의 검이 현성
의 등판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카코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상
대를 찔렀을 때 전해져야 할 손맛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 잔영?!"
여기까지가 카코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현성의 활이
정확히 카코의 정수리를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우와, 어떻게 저런게 가능하지?"
1분조의 예선 대기 중인 유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동
영상으로만 봐왔던 갑자기 사라지는 재주를 직접 눈으로 본 게
신기한 듯 저마다 말소리가 들렸다.
이벤트 시작과 동시에 예선전이 시작되었다.
총 다섯 개의 조에서 다시 네 개의 분조로 나뉘어져 유저들
이 예선전에서 실력 발휘를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예선 1조의 3분조 예선전에선 마법사 유저가 활
약하고 있었다. 여타의 마법사들과 궤를 달리하느 마법 운용
능력에 유저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선 1조엔 세릴리아 월드를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모르는 유
저가 없을 정도로 거물들이 참가했다. 궁탑의 첫 번째 제자인
로빈훗과 넷째 제자인 카일 그리고 마성의 두 번째 현자인 레
온의 등장에 관람석은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예선에 참가하는 유저의 수가 무척이나 많았기에 각각 따로
경기가 진행되었고, 실력 차가 많이 나는 유저들의 대결은 순
식간에 끝나버렸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5분조의 경기에 시선을 던졌다. 막 경훈
의 경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양손에 각각 클로를
착용하고 있는 어쌔신 유저였는데, 마스터급의 유저라는 것을
증명하듯 클로는 푸른 오러에 의해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어쌔신 유저는 경훈에게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던졌다. 무척이나 빠른 움직임으로 경훈에게 접근한 어쎄
신 유저가 클로를 마구잡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경훈은 그런 마구잡이 공격을 유유히 피해내고 있었
다. 더욱 놀라운 것은 눈을 감고 피해내는 여유를 보인다는 거
였다.
적안을 개안하고 있던 나는 둘의 대결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자신을 상대로 여유를 부리는 모습에 화가 났는지
어쌔신 유저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순간 갑작스럽게 눈을 뜬 경훈이 몸을 돌려 어쌔신 유저의
공격을 회피함과 동시에 회전력이 가미된 돌려차기를 먹였다.
퍼억!
경훈의 발차기는 정확히 유저의 안면을 가격했다. 현란한 몸
놀림을 선보이던 어쌔신 유저가 단 한 방에 자리에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경훈이 녀석도 무척이나 강했군. 본선에서 만나게 된다면 무
시할 수 없겠는걸?
"다음 경기를 진행하겠습니다. 4091번 레드 파운 선수와
4122번....."
경훈의 경기에 빠져 있는 사이 순식간에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장으로 향했다.
예선 4조의 3분조에서는 현재 혁의 경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PVP 경험이 거의 없는 혁은 상대의 맹공격에 잔뜩 움
츠러들었다.
상대 유저는 기사였는데 혁과는 달리 실전 경험이 많았던 터
라 오러를 발현시키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를 몰아넣고 있었다.
'우씨. 계속 밀리니깐 열 받네.'
다혈질의 확 터지는 성격을 가진 혁은 밀리면 밀릴수록 은근
히 열이 받기 시작했다. 육중한 배틀 해머를 마치 가벼운 막대
기 다루듯 현란하게 움직여가며 기사 유저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하지만 공격을 척척 받아넘기는 사
이 혁 자신도 모르게 조금식 상대하기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놀란 쪽은 기사 유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변환 공격에 놀라 막기에만 급급했던 상대가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니 놀라지 않을리 만무했다.
육중한 배틀해머와 얄팍한 롱 소드가 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뭐지?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혁과 공방을 주고받던 기사 유저의 눈빛이 돌변하면서 그의
검에서 눈부신 오러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에 화들짝
놀란 혁이 배틀 해머를 급히 회수하며 공격을 피하기 시작했다.
저것과 맞닿는다면 배틀 해머가 그대로 두 동강 날 것이 분
명했다. 재빨리 손잡이 부분을 회전시킨 혁은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와 동시에 배틀 해머에서 뽑혀져 나온 은빛 광택을 내는
검신에서 화려한 금빛 오러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배틀 해머를 등에 둘러멘 혁이 횡으로 쇄도해오
는 유저의 검을 막아냈다.
강기와 강기의 충돌에 스파크가 튀었다. 순간적인 힘으로 상
대의 검을 퉁겨낸 혁의 검이 유저의 목젖에 우뚝 멈춰섰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유저와 눈이 마주친 혁이 피식 웃었다.
대결을 하는 동안 상당히 애를 먹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혁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휴, 겨우 이겼네.'
"계속할래?"
"졌다."
우리 분조의 마지막으로 지목된 유저들의 대결이 끝나고 휴
식시간이 찾아왔다. 워낙 많은 유저들이 참여했기에 각각 분
조로 나뉘어 선수들이 경기를 치르는 동안 시간이 꽤 지나 있
었나 보다.
아직 예선전이라 그런지 바인마하 무투 대회 때처럼 엄숙한
분위기는 없었고 그저 시끄러운 시장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관람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현지와 제리코, 리아가 내려왔고
오늘의 예선전을 끝마친 일행이 이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레드, 어떻게 됐어?"
"응? 난 이겼어. 상대가 방심한 것을 노리고 순식간에 끝냈
거든, 너는 어때?"
"나도 단숨에 끝장을 냈지! 라고 말하면 오버고, 좀 고전했
어. 이곳 유저들 실력이 장난 아니던데?"
말을 마친 강찬이 피식 웃으며 과일 음료를 들이켰다. 저 녀
석 저건 또 어디서 사온거지?
나는 여느때와 같이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않고 있는 레온
에게 다가갔다.
"레온은 당연히 이겼겠지요?"
"네, 상대가 방심했기에 이겻다고 볼 수 있겠지요?"
레온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볼 땐 압도적인 실력 차
로 단숨에 상대를 제압했을 것 같은데....
"루샤크, 넌 어땠어?"
"초반엔 장난 아니었어. 질 줄 알았다니깐. 근데 후반에는 그
냥 발랐어."
"그래? 이겼다니 다행이다. 지고 질질 짤 줄 알았거든."
"뭐 인마? 한판 뜰까?"
"덤벼 짜식아."
또다시 티격태격하는 경훈과 혁을 보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저 둘은 세월이 흘러도 저렇게 티격태격할 것 같다.
혁의 경기는 보지 못했지만 경훈의 경기는 정말이지 충격 그
자체였다. 맨주먹과 다리로 마스터급 유저를 순식간에 제압하는
모습이 지금까지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그때 레온이 말했다.
"다들 예선 탈락은 하지 않을 것 같네요."
"물론이죠! 이대로 쭉 본선까지 진출할 겁니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경훈과 혁을 부추기던 강찬이 소리쳤다.
그리곤 음료를 들이키려는 순간 현지가 강찬에게 다가갔다.
"근데 카이루 씨, 그 과일 음료는 미리 챙겨둔 건가요?"
"아, 이거 저쪽에서 유저들이 팔던데요? 맛이 괜찮은 걸로
봐서 요리 스킬의 수련치가 제법 높은 것 같네요."
강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지가 이쪽으로 쪼르르 달려왔
다. 눈빛을 보아하니 강찬의 손에 들린 과일 음료를 보고 자신
도 사달라는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과일 음료 사줄게, 가자. 다들 오세요. 오늘은 제가 쏠게요."
"정말? 고마워!"
현지가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하나 더 먹고 싶었는데 사준다면 고맙게 먹어주지."
빈 컵을 구겨 쥔 강찬이 말했다. 강찬을 앞장세운 우리 일행
은 유저들이 연 길거리 음식적으로 향했다.
"보통내기가 아닌데요? 대체 어디서 저런 기술을......"
"긴장하는게 좋을 거야. 카일."
카일이라 불린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유저의 손에는
생김새가 다른 롱 보우가 들려 있었고 어깨에 붉은 매가 각각
한 마리씩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궁탑의 제자가 분명했다.
적안을 해제했는지 붉게 물들었던 로빈훗의 눈동자가 이내
보랏빛으로 되돌아왔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둘째랑 셋째 녀석이 참가한 것 같아."
"그건 알고 있어요. 여섯째 사제도 참가한 줄 아는데요?"
"라벤더 말인가? 아, 저기 있네. 이쪽으로 오고 있군."
로빈훗이 저쪽으로 턱짓했다.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수려하게 생긴 남성 궁수 유저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던 카일이 빙긋 웃으며 라벤더에게 달려갔다.
"사제! 엄청 오랜만이야!"
"안녕하세요, 사형. 무척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카일의 손을 맞잡으며 라벤더가 빙긋 웃었다.
"첫째 사형도 무척 오랜만이네요."
라벤더의 말에 로빈훗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잡고
있던 카일의 손을 놓은 라벤더가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작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셋째 사형이 이번 대회에 참여한 것 같아요."
"그래, 이 기회에 혼쭐을 내줄 생각이야. 궁탑 제자들의 이름
에 먹칠을 하다니."
셋째 제자가 언급되자 빙긋 웃고 있던 로빈훗의 낯빛이 변했
다. 살갑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무표정하게 바뀌어
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참, 사제. 막내 사제 알지?"
"아, 예. 요새 홈페이지에서 엄청나게 언급하던 걸요. 최근엔
도적왕 제로스까지 꺽었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것을 느낀 카일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래. 홈페이지에 가면 동영상으로 대결 장면을 볼 수 있어.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번 무투 대회에 막내
사제도 참가했어. 알고 있어?"
"그런가요?"
라벤더가 화들짝 놀라며 묻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대기 시간을 틈타 대겨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보통내
기가 아니더라고."
"그리고 막내와 동행하는 마법사 유저도 무시할 게 못 돼.
다른 분조라 서로 마주칠 일은 없지만 그 유저 또한 실전경험
이 많은 유저인 것 같다."
"아, 막내와 동행하는 유저라면 저도 잘 알아요. 공성전 이벤
트 때 한 번 본적 있거든요. '마성의 두 번째 현자'인 걸로 알
고 있는데."
"마성의 두 번째 현자라....그래서 그랬던 것인가?"
로빈훗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둘째 녀석을 만나러 가자."
"역시 난 복숭아가 제일 맛있어."
"난 파인애플."
"오빠, 이거 맛 좀 봐봐."
현지가 들이민 컵에 입을 대고 살짝 맛을 보았다. 상큼한 복
숭아의 맛과 향이 느껴졌다. 이번엔 내 컵을 현이의 입에 가져
갔다.
"자, 너도 맛 좀 봐라."
그에 현지가 빙긋 웃으며 과일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야, 뜨겁다 뜨거워. 앞에서 알짱거리지 좀 마."
장난스런 경훈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경훈과 나란히 걷
던 혁이 마시던 컵에서 입을 떼고 레온과 나란히 걷고 있는 리
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눈이 마주친 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혁은 머쓱한듯 머리를 긁적였다.
"풉."
"왜 웃어 인마."
"아냐, 아무것도."
혁의 물음에 나는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앞을 향했다.
휴식시간은 금세 끝나고 또다시 예선전이 시작되었다. 이틀
안에 예선전을 끝내야 했기 때문인지 휴식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예선전에 참가하지 않는 현지와 리아, 제리코는 관람석
으로 올라갔고 루카는 내 뒤를 따랐다.
강찬과 혁, 레온은 각자 자신이 속한 분조로 향했고 나는 루
카, 경훈고 함께 예선 5조로 향했다.
"4091번 레드 파운 선수, ....번 라몬 선수 입장해주시기 바
랍니다."
휴식 시간이 끝나자 예선전은 시작했고 내 차례가 되었다.
소규모로 경기장 아래쪽에서 루카가 어슬렁거리며 대기하고 있
었고 나는 운영자의 부름에 경기장 위로 올라섰다.
이번에 상대하게 된 라몬이란 유저는 나와 같은 궁수 유저였
다. 사수로 2차 전직을 했는지 무척이나 기다란 기계식 석궁을
들고 있었는데 위압감이 엄청났따.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등을 곽 움켜쥔 채 상대의 위
아래를 살폈다. 무어라 중얼거린 라몬의 검은 눈동자가 이내
푸르게 물들었다.
나도 적안을 개안한 뒤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 때였
다. 석궁을 들어 이쪽을 겨냥한 라몬이 방아쇠를 당기자 수십
발의 볼트(Bolt, 석궁에 쓰이는 화살)가 이쪽으로 폭사되었다.
그에 나는 퀵스텝을 건 뒤 즉시 이형환위를 전개했다. 이번
엔 상대의 뒤가 아닌 공중으로 뛰어올라 허공답보를 시현한 채
화살을 메긴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그리 높이 뛰어오른 것이
아니었기에 공중에 뜬 상태로도 공격이 가능했다.
"파워 샷......"
미량의 마나와 상당량의 스태미나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기계식 석궁에 틀어박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지면에 착지했다. 석궁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무기
를 잃은 라몬은 전투불능이 되어 나의 승리로 경기는 끝났다.
나느 ㄴ경기장을 내려오며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등 뒤로 둘
러맨 뒤 루카와 함께 선수들이 대기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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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 진출
시간은 흘러 예선전이 시작된 지도 이틀이었다. 현재 예선 4
조 1분조에서 본선 진출을 위해 마지막 예선전을 치렀다. 조금
전 내 상대는 무척 상대하기 까다로운 패턴을 가진 마법사 유
저였는데 아티펙트 아이템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때문에 경기 시작 전, 정령들을 소환한 뒤 전투에 임했다. 마
법으로 견제한 뒤 블링크(Blink, 공간전이)로 위치를 바꾸고
곧바로 인비저빌리티 마법을 사용해 모습을 감추는 유저였다.
거기까진 어떻게든 이해가 되지만 인비저빌리티 사용 도중에
도 공격을 하니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처음엔 무척이나 고전하며 매직 미사일과 파이어 볼 세례에
무작위로 얻어맞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다.
청각과 반사신경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었다.
제로스와 달리 모습을 감춘 상태에서도 공격 마법을 쐈기에
나는 대결에 집중하며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전념했다.
여러번 놓쳤지만 오기가 생겨 더욱 찾는데 집중했고 결국
엔 위치를 파악하는데 성공해 화살에 오러를 불어넣어 쏘았다.
백호의 윈드 애로우 효과를 받아 속도는 더욱 증가했기 때문
에 정확히 어깨를 맞춰 상대를 무릎 꿇렸다. 그리고 지금.
본선에 진출할 유저들만을 뽑아 소개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벤트 진행자가 나와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진출하는 유저들을 발표하
겠습니다."
그에 관람석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1조는 로빈훗, 카일, 라벤더, 레온 유저가 합격하게 됐고...."
합격자 명단에 반가운 이름이 둘이나 있었기에 나는 예선 1
조가 위치한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로빈훗과 레온, 넷째 사형
인 카일과 라벤더가 한자리에 서 있었다.
"사제!"
나와 눈이 마주친 카일이 손을 크게 흔들며 소리쳤다. 그에
나는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든 뒤 다시 진행자의 말에 집중했다.
"예선 2조에서는 제로스, 카이루, 멕시안, 켈리안 유저가, 3
조에서는 현민, 백서, 창웅, 케로스터 유저, 4조엔 케인, 페일
류트, 페로스, 루샤크 유저, 마지막으로 5조에 레드 파운, 현군,
데시카, 헤르만 유저가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예선전을 모두 마치며 바로 내일 오후 12시에 무투 대회 본선
을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진행자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그에 관
중석이 시끄럽게 웅성이기 시작했다.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은
현민이 녀석도 무투 대회에 참가했다는 것이었다.
저 멀리서 훤칠한 키에 잘생긴 한 녀석이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마주 흔들며 빙긋 웃어주는 것을 마
지막으로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와, 다들 본선에 진출했어!"
잔뜩 신난 제리코가 소리치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에 나는
제리코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일행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모두들 본선에 진출할 줄 알았다니깐."
"너 인마, 마지막 경기 때 지는 줄 알았어."
강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처음엔 본선에 친출 못하나 싶었어. 와, 아티펙트 아이
템을 그렇게 잘 사용하는 유저는 또 처음인 것 같아."
"이제 우리도 이 녀석처럼 인기 스타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따. 핫핫, 게다가 난 잘생겼으니 단숨에 뜨겠는걸?"
유저들이 북적이는 곳에서 혁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에
지나가던 유저들의 반은 쿡쿡 웃었고, 나머지 반은 미친 사람
보듯 혁의 위아래를 훑으며 지나갔다.
내가봐도 저 녀석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이를 보고 있던
경훈이 혁의 뒤통수를 살짝 후렸다.
"우씨, 뭐야?"
"유저들이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는데 넌 창피한 걸 모르냐?
그리고 네가 잘생겼다는게 말이 돼?"
경훈이 뭐라 하든 혁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말만을 늘어
놓았다. 오늘도 늦게까지 예선전을 치러서 그런지 피로가 몰려
왔다.
"아, 오늘 이상하게 피곤하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레온의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피곤해서 못 참겠다. 티아, 오늘은 먼저 가볼게."
"응, 알았어. 얼른 가서 쉬어!"
현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마주 웃어주는 것으로 답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로그아웃을 말했다.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정신적인 피로가 극에 달했는지 만사가 귀찮아지는 것을 느
끼며 헤드셋을 벗었다. 나는 헤드셋을 머리맡 고리에 걸어두는
것도 잊은 채 게임배드에서 일어나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눈
을 감자 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다음 날.
어제 일찍 잠이 들어서 그런지 컴이 알람으로 잠을 깨워주기
도 전에 일어났다. 시간을 보니 늘 일어나던 시간보다 두 시간
먼저 일어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좀 일찍 일어났네. 일어난 김에 일단 씻고 학교 갈
준비부터 할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을 향했고, 얼른 샤워를 끝마친
뒤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내친김에 녹차까지 타 마셨다.
평소보다 느긋하게 학교 갈 준비를 끝낸 뒤 PDA를 챙기는
것을 마지막으로 등교 시간에 맞춰 학교로 향했다.
교실은 오늘 열릴 무투 대회 본선을 주제로 시끄러웠다.
250:1 경쟁률을 뚫고 본선에 진출한 유저가 반에 둘씩이나 있
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는지 오늘따라 유난히 시끄러웠다.
"현성아, 강찬아. 오늘 관람석에서 우리 반 애들 모두 가기로
했어. 응원할게!"
시끄러운 와중에 회장 윤경이 다가와 말했다. 반 친구들 전
체가 관람객이라....왠지 부담감이 훨씬 늘어버린 것 같다. 나
는 시선을 강찬에게로 돌렸다. 강찬은 부담감이라곤 전혀 없는
지 하품을 하며 그대로 책상에 고꾸라졌다.
"이 녀석은 학교에 와서 잠만 잔다니까. 반평균 브레이커 2
인조 대장다워."
윤경이 팔짱을 낀 채 강찬을 내려다보았다. 반평균 브레이커
2인조(한 명은 나인 것 같다)라....강찬을 내려다보던 윤경이
이쪽으로 시선을 두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그럼 이따가 보자."
"아, 응. 이따가 보자."
마주 웃으며 대답하자 윤경이 자리로 돌아갔고 시끄럽게 떠
들던 반 녀석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나
는 자고 있는 강찬의 등판을 흔들었다.
방과 후.
오늘도 본선 경기를 치르기 위해 세 녀석(강찬, 경훈, 혁)과
하굣길에서 흩어진 뒤 즉시 집으로 돌아왔다. 본선에 늦지 않
기 위해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했다.
무투 대회 본선 당일이라 그런지 유저들은 무척이나 많았다.
관람석엔 예선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관중이 많았
고, 더 시끄러웠다.
"휴, 시간에 맞춰 접속했네."
아직까지 본선 경기는 시작되지 않았고 선수들은 선수 대기
실로, 관람객 유저들은 관람석으로 향했다.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현지를 비롯한 모두가 모여있었다.
아무래도 먼저 접속해 날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레드, 늦지 않게 왔군요. 어서 선수 대기실로 갑시다."
"아, 네."
레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빠, 잘해야 돼."
"형, 파이팅!"
"응, 꼭 우승할 테니 두고 봐!"
현지와 제리코의 응원을 들으며 나는 일행들과 함께 선수 대
기실로 향했고 현지와 제리코, 리아는 관람석으로 향했다.
관람석은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경기장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했다며 신이 난 제리코가 후다닥 달려갔다.
상당히 들뜬 관람석 분위기와는 달리 선수 대기실의 분위기
는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 외 선수가 다 적이었기에 경계해야
했고, 또 이곳 유저들은 상당수가 심성이 거친 자라고 들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신경이 거슬리게 된다면 경기가 아니더라
도 즉시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조용히 앉아 있죠."
우리는 구석에 위치한, 경기장이 훤히 보이는 창가 쪽에 자
리를 잡고 앉았다. 정오를 알리는 신호탄이 터졌는지 경기장의
구멍이 뻥 뚫린 천장에서 폭죽이 터졌다.
"지금부터, 유저 무투 대회 본선 개막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진행자의말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경기장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나팔소리와 함께 북 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이건 무슨 축제 분위기도 아니고.....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생소했는지 루카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경쾌하게 울려 퍼지던 나팔과 북소리가 서서히 멎기 시작하
더니 이내 진행자의 음성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출전한 선수들의 출전표가 출력되었습니다. 잠시 후 첫 경
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선수들은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진행자의 말에 선수 대기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일행들과
눈빛을 교환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걸어오기 있
었다. 현민이었다.
"형! 전에 왜 그냥 갔어?"
"오, 현민아!"
"안녕하세요."
현민이 공손하게 일행들에게 인사했고 일행 모두가 그를 반
겼다. 참, 아직 레온은 현민을 모르는구나.
"레온, 이쪽은 제 동생 현민이에요."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현민과 레온이 서로 악수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아리시아에 온게 된 거야? 할아버지 허
락은 받은 거야?"
"응, 할아버지가 내준 과제를 전부 끝냈거든."
"과제?"
"화경의 벽을 깨면 마음껏 돌아다녀도 된다고 하셨거든. 결
국은 깨버렸지롱."
현민의 말에 나는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는 게 좀 힘겨울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강하던 녀석이 화경의 벽을 깼다니.....
"근데 형, 요새 홈페이지에서 난리도 아니더라. 도대체 언제
그렇게 강해진 거야?"
"응? 아, 그냥 열심히 노력해서 그렇게 된 거지 뭐....."
현민의 말에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운영자 하나가 선수 대기실에 모습을 나타냈고
출력된 출전표를 벽에 서너 개가량 붙여놓았다.
현민을 비롯한 우리 일행은 출전표로 다가갔다.
"어라? 내가 제일 먼저 출전하네."
강찬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첫 경기 출전에 부담을 느
꼈는지 표정이 좋지 못했다. 내 첫 상대는 라벤더였다.
'로시토, 이곳에서 로화를 제외한 사형들을 전부 만나게 되었
네요. 사형들ㅇ르 비롯한 초인들을 꺾은 뒤 아리시아를 대표하는
초인이 되어 반드시 궁수의 탑으로 돌아가겠어요.'
나는 고개를 들어 구멍이 뻥 뚫린 벽면으로 하늘을 바라보았
다. 오늘따라 세릴리아 월드의 햇빛이 유난히 따사로웠다.
"첫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번 카이루 선수와 2번 헤르만
선수 입장해주시기 바랍니다!"
진행자의 말에 또다시 함성이 경기장 내부를 뜨겁게 달궜다.
"그럼 먼저 다녀올게."
"잘하고 와."
자리에서 일어난 강찬이 웃으며 경기장으로 향했다. 넓은 선
수 대기실 저 끝에 앉아 있던 상대 선수도 경기장으로 향했다.
경기장과 선수 대기실은 제법 거리가 있었기에 둘은 빠른 걸
음으로 경기장으로 향했다.
나는 미리 개안해둔 적안으로 둘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두 선수는 서로 마주 보십시오."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강찬은 상대 선수에게 시선을 두었다.
상대 선수는 완벽하게 무장을 하고 있었다. 전신을 빈틈없이
감싼 풀플레이트 메일 그리고 투구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안광.
상당히 강해보이는 유저였지만 강찬은 주눅 들지 않았다.
'상당히 강해보이는 유저야. 과연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두 주먹을 움켜쥐고 상대방과 기세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강찬아! 파이팅!"
어디선가 들려온 익숙한 함성에 강찬의 고개가 돌아갔다. 정
확히 관람석의 맨 앞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자신을 응원하는 이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왔구나.'
손을 흔들어주며 강찬이 빙긋 웃었다. 같이 세릴리아 월드를
플레이하는 반 친구들의 응원에 자신감이 넘치기 시작했다.
"자 그럼 경기를 시작해주십시오!"
말을 끝낸 진행자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에
강찬은 문 블레이드를 뽑았다. 은빛 검신에서 유난히 광택이
났다. 뽑아든 헤르만의 검이 시퍼렇게 물이 들었다.
"플레임 웨폰(Flame weapon)."
강찬의 검신도 잇달아 붉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뜨거운 화염
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화염검의 열기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유저라면 제법 놀랄 법했지만 헤르만은 전혀 당황
하지 않았다. 이미 세릴리아 대륙에서 있었던 몬스터 침공 이
벤트에서 강찬의 활약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보다 더욱 숙련된 화염이로군.'
헤르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강찬과 신경전을 벌
이던 헤르만이 먼저 몸을 날렸다. 시퍼렇게 물든 장검이 대기
를 쪼개며 강찬에 쇄도했다.
강찬이 민첩하게 움직여 쇄도해오는 헤르만의 검을 받아쳤다.
플레임 웨폰의 뜨거운 열기에 잠깐 주춤하던 헤르만이 거리
를 두었다. 열기가 상상 이상이었기에 오랫동안 검을 섞는다면
뜨거운 열기 때문에 검을 놓칠 우려가 있었다.
'어쩔 수 없군.'
헤르만이 검을 고쳐 잡자 장검의 검신에서 시퍼런 오러 블레
이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검에서 1미터 이상 자라난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피를 갈구하며 빛을 발했다.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린 헤르만이 강찬에게 몸을 날렸고
그렇게 둘은 서로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길게 자라난 오러 블레이드로 거리를 두며 검을 섞자 전보다
좀 나아진 것을 느끼며 헤르만은 종횡무진 검을 휘둘렀다. 기
본적인 초식 면에서는 헤르만이 한 수 위였다.
화염을 머금은 문 블레이드에서 뿜어지는 열기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강찬은 피를 쏟아내며 나가 떨어졌을 테지만 뜨거운 열
기에 헤르만은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 블레이드에서 뿜어지는 열기가 아니었으면 벌써 승부가
낫겠군. 정말 강하다.'
열기 때문에 접근을 못하고 잇었지만 대결은 헤르만이 우위
를 점했다. 파격적으로 몰아붙이는 맹공격에 강찬은 지금껏 반
격도 한 번 하지 못한 채 급급히 막아내는 것이 전부였다.
헤르만의 공격을 막아내며 강찬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기본적인 실력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어. 그렇다면 마검사
스킬의 혜택을 받아야 하는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오러 블레이드가 허벅지를 훑고 지나갔
고 강찬은 퍼뜩 정신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거야!'
두 손으로 문 블레이드를 고쳐 잡은 강찬이 있는 힘껏 풀 스
윙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에 헤르만이 고개를 갸웃하며 거리를 두었다. 공격을 잘
막아내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상대가 왠지 모르게 수
상했기에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다. 검을 고쳐 잡은 강찬이 피
식 웃으며 말했다.
"프리징 웨폰(Freezing weapon)."
그와 동시에 검신에 맺혀 있던 화염이 순차적으로 사그라졌
고 시뻘겋게 검신이 새하얗게 물들더니 이내 뼛속까지 시릴 듯
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투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뜨거운 열기를 받으며 싸우던
헤르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뜨거운 열기에서 갑자기 시릴 듯
한 냉기를 접하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전신을 감쌌다.
상대가 가까이 접근할수록 그 고통은 배가 되었다.
'이건 대체 뭐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강찬이 검을 휘둘렀다. 차가운 한기
때문인지 헤르만의 움직임이 상당히 무뎌졌다. 하지만 헤르만은
당황하지 않고 강찬의 공격을 척척 받아넘겼다.어느 정도 한기에
적응한 헤르만이 맹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좋아, 한기에 적응되는 것을 노리고 있었다.'
"플레임 웨폰."
나지막한 강찬의 음성과 함께 냉기를 내뿜던 문 블레이드에
서 뻘건 화염이 돋아나더니 뜨거운 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또다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헤르만이 주춤하는
사이 강찬의 검이 대기를 갈랐다.
헤르만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장검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다 이
내 맥없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플레임 웨폰을 거둔 강찬의 검이 헤르만의 목 부근에서 멈춰
섰다. 화염의 검강을 거두었지만 문 블레이드의 검신에서는
아직까지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져, 졌소."
헤르만이 항복을 선언하자 관람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진행자가 나타났고 두 사람을 떨어트렸다.
"1번 카이루 선수 승!"
"와아아아!"
관객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강찬은 선수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휴우, 겨우 이겼네."
대기실로 돌아온 강찬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아, 고마워."
어디서 가져왔는지 현민이 물을 건넸고 그것을 받아든 강찬
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가기 전에 몰랐는데 나가니깐 완전 긴장되더라. 근데 바
로 긴장감을 없애주는 요소가 있어."
강찬이 잔뜩 신이 나서 말했다.
"뭐야, 뭔데 그래?"
"이 다음이 네 경기니깐 나가보면 알 거야."
"말 해주면 덧나냐?"
"아니, 그런 건 없는데 직접 겪어보는 게 훨씬 좋잖아."
혁이 투덜대자 강찬이 웃으며 대꾸했다.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났는지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펴졌다.
"계속해서 다음 경기가 진행되겠습니다! 3번 루샤크 선수와
4번 페로스 선수 입장해주십시오!"
"아 씨, 내 차례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놀란 혁이 배틀 해머를 들쳐 멨다. 긴
장하는 기색은 없었으나 왠지 모르게 혁의 표정이 어색했다.
페로스라는 유저는 멋들어진 흑의에 곱상하니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나는 턱을 궤고 앉아 경기장으로 가는 혁을 바라봤
다. 저 녀석, 나가서 엉뚱한 짓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은 뭐지? 복장으로는 도통 직업을
알 수 없잖아?'
배틀 해머의 손잡이를 꽉 움켜쥔 혁이 자신과 맞붙을 상대
유저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경기장 위로 올라섰다.
페로스라 불린 유저는 곱상한 외모와는 상반되는 차가운 눈
빛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방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혁이 신경질적으로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페로스를 노려봤다.
맞질하라는 진행자의 지시에 혁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상대
도 진행자의 말을 무시한 채 혁을 빤히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이 자식, 볼수록 재수 없네.'
경기가 시작되기 무섭게 강찬은 들쳐 메고 있던 배틀 헤머를
고쳐 잡고는 지면을 박찼다. 페로스를 향해 몸을 날린 혁이 배
틀 헤머를 힘껏 휘둘렀다.
'이런.'
배틀 헤머가 지척에 닿기도 전에 상대는 연기처럼 사라져버
렸다. 혁이 고개를 돌리자 뒤에서 페로스가 피식 웃고 있었다.
"정말 둔한 움직임이로군요."
'이 자식, 자객인가?'
상대의 이죽거림에 성질이 난 혁이 다시 배틀 해머를 힘껏
휘둘렀다. 육중한 배틀 해머를 가볍게 피해낸 유저의 입에서
주문영창이 이어졌다.
"파이어 볼."
"뭐?"
순식간에 생겨난 화염구가 혁의 복부에 폭발을 일으켰다. 연
기가 걷히자 허연 먼지를 뒤집어쓴 혁의 모습이 나타났다.
불시에 가해진 공격에 큰 충격을 먹었는지 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시선을 두었다.
일반 파이어 볼이라면 혁에게 이 정도의 충격을 줄 수 없었
다. 이제야 상대방의 직업이 뭔지 파악한 혁이 피식 웃었다.
"아아, 귀때기에 찬 해골 귀고리를 보고 짐작했어야 했는데,
네 녀석 흑마법사지?"
"잘 알아 맞추셨네요."
"내가 상대할 수 잇는 최적의 상대로군. 물론 맞지만 않는다
면 말이야."
배틀 헤머의 손잡이를 회전시켜 검을 뽑아든 혁이 해머의 잔
해를 등에 둘러멘 뒤 검을 고쳐잡았다.
"순식간에 끝장을 내주마."
말을 마친 혁의 검신에서 금빛 오러 블레이드가 폭발하듯 뿜
어져 나왔다. 그에 페로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저 거대한
망치를 주 무기로 삼는 멍청한 기사 유저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자신과 상극인 존재와 맞닥뜨리다니......
서로 상성인 팔라딘(성기사)과 흑마법사는 정 반대인 속성에
의해 서로에게 입는 데미지의 차이가 무척이나 컸다.
단기전을 벌인다면 먼저 강력한 공격을 가한 쪽이 승리를 하
겠지만 장기전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장기전에서 생명력과 스태
미나가 떨어졌을 때, 팔라딘은 자체 회복 스킬을 사용해 몸을
회복했다. 하지만 흑마법사는 회복 계열 스킬을 사용할 수 잆
었기에 장기전일 경우 유리한 것은 팔라딘이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페로스가 혁과 거리를 두며 아이템 창에서
스태프 하나를 꺼내들었다. 요상한 문양이 새겨진 스태프 끝엔
해골이 달려 잇었는데 무척이나 섬뜩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다크니스 핸드!"
주문영창이 이어지자 혁의 발아래 순식간에 마법진이 새겨지
더니 이내 커다란 시커먼 손이 마치 자아를 가진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그를 움켜쥐려 했다.
다크니스 핸드를 피해내려 했지만 발아래에서 갑작스럽게 생
겨났기 때문인지라 쉽지 않았다. 높은 클래스의 마법이었기에
다크니스 핸드에 당한다면 큰 타격을 입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커먼 손이 혁의 몸을 감싸 쥐자 페로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대방을 꽉 움켜쥐어야
할 다크니스 핸드에서 금빛 광채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엔젤릭 실드(Angelic Shield)!"
금빛 휘황찬란한 실드가 혁의 몸을 감쌌다. 다크니스 핸드는
엔젤릭 실드에 의해 재가 되어 바닥에 흩뿌려졌다.
"이, 이럴수가....."
페로스가 당황하는 사이 혁의 검이 그의 가슴팍에 박혔다.
"커헉!"
"뒈져라. 재수 없는 녀석."
가슴팍을 관통당한 페로스는 게임아웃이 됐고 경기를 끝낸
혁이 검을 배틀 해머에 꽂은 뒤 대기실을 향해 유유히 걸었다.
강찬의 경기완 달리 순식간에 상대를 게임아웃 시킨 혁이 투
덜거리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기실 안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유저들 모두의 시선이 혁에게 고정되었다.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 한 방에 끝장을 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혁이 자리에 앉아 연신 투덜댔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그 녀석 생긴 게 재수 없어서."
혁의 대답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저렇게 화를 낸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잠시의 휴식 시간 동안 나는 현민과 못 나눈 이야기를 나누
며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시간이 지나고 경기가 진행됐다.
이번엔 경훈과 신검 현군이라는 자의 대결이었다. 왠지 중원
채널에서 건너왔을 법한 복장에 요상한 가면을 쓰고 있어 정
체를 알 수 없는 유저였다.
나는 적안을 개안한 채 둘의 대결에 집중했다. 경기가 시작되
자 경훈은 스텝을 밟으며 상대를 살폈고 현군은 허리춤에 찬 검
도 뽑지 않은 채 서서 경훈을 지켜봤다.
그에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경훈이 주먹을 날렸으나 현군은
고개를 살짝 트는 것으로 공격을 간단하게 흘려버렸다. 그와
동시에 경훈의 강철 같은 무릎치기가 가해졌으나 현군은 몸을
재빨리 뒤로 빼 충격을 줄인 뒤 가볍게 지면에 착지했다.
"와, 저 현군이란 유저 대단한데?"
"저게 보여?"
"응."
나는 강찬의 물음에 대꾸한 뒤 경기에 집중했다. 경훈이 무
작위로 공격을 가했지만 현군은 가볍게 공격을 모두 피해냈다.
공격을 피해내던 현군의 다리가 높게 올라가더니 이내 경훈
의 머리를 타격했고, 큰 충격을 입은 경훈은 그대로 쓰러졌다.
아무래도 큰 충격에 기절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경훈의 경
기가 끝나 버렸다.
"말도 안돼.....데시카가 단 한방에 끝장났어."
경훈이 단 한방에 끝장났다는 말에 혁이 벌떡 일어났다.
"뭐? 진짜?!"
"응, 단 한 방에 쓰러져버렸어. 저 현군이라는 유저, 아무래
도 중원채널에서 건너온 것 같아. 현민아, 누군지 알겠어?"
"아니, 현군이라는 이름은 나도 들어본 적이 없어."
"그래?"
현군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저에게 경훈이 단 한 방에
쓰러진 것은 우리 일행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러
는 사이 시간은 흘러 벌써 내 차례가 되었다.
"7번 라벤더 선수와 8번 레드 파운 선수 입장해주십시오."
"내 차례군. 갔다 올게."
진행자의 부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잘하고 와."
"네 사형이랑 붙는 거네. 꼭 이겨야 돼!"
현민과 강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기실 밖으로 나서려
던 순간 레온이 말했다.
"매직 아머를 착용하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아차, 깜빡했네요."
긴장한 나머지 매직 아머를 착용하는 것도 잊었다. 나는 아
이템 창을 열어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넣어둔 뒤 매직 벨트에
집중했다. 매직 벨트에 마나가 집중되자 진동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검붉은 갑주가 머리를 제외한 몸을 감쌌다. 나는
매직 아머가 몸을 빈틈없이 감쌌음을 확인한 뒤 밖으로 향했다.
나는 저 멀리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라벤더에게 시선을 던졌
다. 복장이 제법 화려하게 변한 라벤더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손을 흔들어줬다. 나도 손을 흔든 뒤 경기장 위로 올라섰다.
예전의 나는 상대도 되지 못할 만큼 강했던 라벤더. 다시 맞
붙는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오, 재미있는 경우로군요. 궁탑의 제자끼리 서로 맞붙게 되
었습니다."
진행자의 말에 관중석이 시끄럽게 웅성이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니 긴장이 됐다. 하지만 이어진 외침에
긴장감은 씻은 듯 사라지고 가슴속 깊이 든든함이 자리 잡았다.
"현성아! 파이팅!"
관중석에서 반 친구들이 모두 일어나 소리치고 있었다. 적안
으로 친구들의 얼굴을 전부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는 현지와 제리코,
리아 양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어준 뒤 라벤더를 바라봤다. 그가 드래곤 레
드 롱 보우를 꺼내 활시위를 활 끝에 막 걸 때였다.
"그럼 경기를 시작해주십시오!"
진행자의 외침과 동시에 라벤더의 몸이 순식간에 좌측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빠른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현성이었다.
상대는 미동조차 없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라
벤더는 상관 않고 손을 어깨 위로 넘겨 화살 하나를 뽑았다.
그리곤 재빨리 우두커니 있는 현성을 향해 활을 쏘았고, 화살
은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대기를 갈랐다.
화살이 지척에 다다랐을 때, 무어라 중얼거린 현성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퍽 꺼져버렸다. 하지만 라벤더는 당황하지 않고
몸을 돌린 뒤 백스텝을 밟았다. 그간 현성과 초인의 대결 영상
을 보며 그의 패턴을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당황하는 쪽은 현성이었다.
'이런, 도촬 당한 동영상 때문인지 공격 패턴을 알고 있구나.'
보우어택으로 다리를 공격해 움직임을 둔하게 하려던 작전은
물거품이 되었다. 언제 쐈는지 세 발의 화살이 현성을 향해 폭
사되었다. 급히 몸을 틀어 화살을 피해낸 현성이 침착하게 허
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아주 오래 전이지만 라벤더와는 붙어본 경험이 있었기에 현
성 또한 상대의 패턴을 어느 저도 간파하고 있었다.
'화살로 움직임을 봉쇄한 뒤 단숨에 잡는다!'
라벤더의 움직임이 상당히 빠르긴 했지만 현성은 그보다 더
욱 효과적으로 움직이며 거리를 좁힌 현성이 재빨리 활을 쏘았고,
붉은 섬고아이 라벤더를 향해 폭사되었다.
라벤더는 즉시 백스텝을 밟아 붉은 섬광을 피해냈지만 그것
으로 끝이 아니었다. 재차 날아든 붉은 섬광이 자신을 향해 폭
사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의 쉴 틈도 주지 않고 날아든
붉은 섬광에 라벤더는 다시 한 번 백스텝을 밟아 거리를 두었
다. 순간 활을 쏘던 현성의 모습이 지워지듯 사라져버렸다.
"아차!"
라벤더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백스텝을 밟은
상태라 몸은 뒤로 빠지고 있었다.
재빨리 땅을 디뎌 몸을 뺄 수도 있었지만 그럴 틈도 없었다.
활을 치켜든 현성이 바로 뒤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보우어택!"
라벤더의 손에 들려 있던 활이 두 동강 나며 잔해가 바닥에
뿌려졌다. 지면에 착지한 현성이 화살을 꺼내 그를 겨냥했다.
"휴, 상대도 안 되는군. 졌어, 사제."
빙긋 웃으며 패배를 선언한 라벤더를 보며 난 괜한 짓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궁수에게 있어서 활이란 손
이나 다름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부숴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라벤더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정말 강해졌군. 아무래도 사제가 내 대신 스승님의 바람을
이뤄줘야겠어."
말을 마친 라벤더가 조용히 선수 대기실로 향했다. 뒤늦게
날아온 붉은 매가 라벤더의 어깨 위에 앉았다.
"아아, 사제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8번 레드 파운, 승!"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나는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으며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로 돌아왔을 땐 언제 회복했는지 경훈도 일행들 사이
에 끼어 있었다.
"레드, 넌 뭐 그렇게 경기를 재미없게 하냐?"
"맞아, 아주 순식간이구만."
강찬과 혁이 야유를 보내듯 말했다. 물론 장난이겠지만.
"그래도 질질 끄는 것보단 훨씬 낫잖아. 짜식들아."
나는 강찬과 혁에게 장난스럽게 대꾸한 뒤 자리에 앉았다.
휴우, 이번에도 경기하는 동안 너무 성급했던 것 같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한다면 나는 더 이상 활을 쥐지 않을 생
각이었다. 세릴리아 월드를 대표하는 초인 호칭을 얻은 뒤 궁
수에 대한 지긋지긋한 고정관념을 깨고 로시토의 바람대로 레
인지 마스터의 존재를 모두에게 각인시킨 다음 세릴리아 대륙
으로 돌아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나만의 잡화점을 세워 여
러 유저들을 상대하고 내가 만든 물건을 파는 일이었다.
잠시 곰곰히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덧 레온의 차례가
다가왔다. 레온의 상대는 도적왕 제로스였다.
유저 초인답게 제로스도 본선에 올라온 모양이었다.
레온과 함께 경기장에 올라선 그는 처음과 같은 모습이었다.
저 후드 안에는 투척용 무기가 무척이나 많이 숨겨졌겠지?
진행자의 지시로 서로에게 인사를 한 뒤 경기는 시작되었다.
경기의 시작과 동시에 제로스는 쉐도우 스텝을 사용했는지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에 레온도 인비저빌리티 마법을
썼는지 모습이 지워지듯 사라져버렸다.
"뭐야? 왜 둘 다 없어져?"
지켜보던 혁이 소리쳤다.
"아무래도 이번 경기가 무척이나 재밌을 것 같아."
쉐도우 스텝의 지속시간이 끝났는지 제로스가 모습을 나타냈
고 그와 동시에 레온의 모습도 보였다. 레온이 모습을 나타냄
과 동시에 몸 주변에 은빛 화살 형상을 한 약 열여덟 발의 매
직 미사일이 형성되더니 제로스를 향해 폭사되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매직 미사일 세례에도 제로스는 당황한 기
색을 보이지 않고 양 손목에 찬 클로를 휘둘러 모조리 쳐냈다.
그사이 제로스의 뒤로 접근한 레온의 손바닥 위로 뜨겁게 타
오르는 화염구가 형성되어 쏘아졌다. 제로스는 재빨리 투척용
단검을 꺼내 화염구에 던졌고, 시퍼렇게 물든 단검과 파이어
볼이 충돌해 폭발을 일으켰다. 단검을 던짐과 동시에 레온에게
몸을 날린 제로스가 클로에 오러를 발현시킨 채 팔을 휘둘렀다.
그에 레온이 급히 실드를 펼쳤고, 제로스의 클로는 실드에
의해 가로막혔다.
펼쳐진 실드 안에서 레온이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7클레스
대마법사의 전매특허인 더블 캐스팅이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실드 내부가 안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제로스의 공격에 실드에
금이 그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제로스의 공격에 실드엔
흉측하게 금이 갔고 그러다 맥없이 박살나버렸다. 하지만 이미
캐스팅을 마친 레온이 재빨리 뒤로 빠지며 마법을 발현시켰다.
"익스플로젼!"
불의 속성을 한데 모아 일시에 격발시키는 마법이 제로스가
서 있는 지면 위에 작렬했다.
엄청난 대폭발과 함께 눈을 뜨지 못할 섬광과 열기가 치솟아
올랐다. 제법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레온은 실드 발동이 가
능한 레어 아이템과 더블 캐스팅을 통한 실드를 합쳐 총 세 겹
의 실드로 몸을 감사고 있었기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연기가 걷히자 경기장 바닥이 시커멓게 그슬렸다. 파괴되지
않도록 설계했는지 7클래스 대마법사의 익스플로전이 작렬했음
에도 불구하고 그을린 것 외에 경기장은 온전했다.
연기가 걷혔음에도 불구하고 레온은 펼쳐둔 실드를 거두지
않고 수인을 맺었다. 펼쳐진 범위 내에 마나를 가진 생명체가
있다면 위치를 알아낼 수 있는 마법 마나 스캔(Mana scan)을
펼친 레온의 감각에 마나를 가진 생명체 하나가 반응했다.
정확히 자신의 뒤에서 반응이 오고 있었기에 레온은 생각할
것도 없이 블링크를 이용해 실드에서 빠져나왔다. 뒤늦게 제로
스의 오러를 머금은 클로가 실드를 파고들었다.
세 겹이나 덧씌운 실드였지만 익스플로전을 막아내는 동안
겉에 두른 실드와 중간에 두른 실드는 박살이 났고 제일 안쪽
에 두른 실드는 흉측하게 금이 가 있었기 때문에 제로스의 클
로가 쉽게 파고든 것이었다.
'즉시 블링크를 쓰지 않았다면 패할 뻔했군.'
에이비에이션(Aviation, 비행) 마법으로 공중에서 조금 전까지
두르고 있던 실드를 내려다보던 레온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레온은 인비저빌러티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채 리버스 그래비티(Reverse gravity)
마법을 이용해 천천히 하강했다.
투명화 마법을 풀지 않은 상태에서 레온이 수인을 맺었다.
물론 캐스팅이 완료된다 하더라도 투명화 마법을 풀지 않는 이
상 공격할 수 없었기에 빠르고 강한 공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캐스팅을 마친 레온은 제로스가 나
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제로스도 나름 머리를 쓰고 있었다. 쉐도
우 워커로 모습을 감추며 이리저리 이동하고 있던 것이다.
지속시간 제한이 없는 투명화 마법(지속시간 동안 마나는 계
속해서 감소한다)과 달리 쉐도우 워커는 시간이 지나면 풀려버
리기 때문에 레온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중 쉐도우 워
커의 지속시간이 끝났는지 제로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썬더 브레이크(Thunder break)!"
투명화 마법을 푼 레온이 시동어를 외쳤다. 마른하늘이 쩍
갈라지며 굵직한 번개 한 줄기가 경기장에 정통으로 꽂혔다.
순식간에 목표물에 내리꽂힌 번개는 아직까지 힘이 남아 맹
렬히 방전하고 있었다. 썬더 브레이크에 적중당한 제로스는 그
대로 뒤집어져 게임아웃 되었다.
"9번 레온 선수 승!"
"오오오! 멋지다!"
"마성의 두번째 현자답다!"
레온의 승리로 경기가 끝나자 관중석은 또 뜨겁게 달궈졌다.
레온과 제로스의 대결에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따. 7클래
스 대마법사의 위용에 놀란 것은 물론이거니와 레온의 마법 응
용 능력에 큰 충격을 먹었다. 제로스를 상대하면서 가장 애를
먹게 했던 쉐도우 워커의 파훼법을 단번에 찾아낸 뒤 고클래스
마법으로 상대를 단숨에 끝장내다니....
레온과 같은 사람들을 보고 숨겨진 고수라고 하는 것 같았다.
경기를 끝마치고 돌아온 레온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와 현민이 건네주는 물을 받아 마셨다.
레온의 경기가 끝난 뒤로 경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다
음 경기는 로빈훗과 유저 초인 켈리안의 대결이었다.
켈리안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든 유저라고 했는데
처음엔 로빈훗을 궁지로 밀어붙이는 강한 파괴력을 선보였다.
내가 볼 때 로빈훗은 상대의 패턴을 알아내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다가 상대의 패턴을 외운 뒤 맹공격을 가한 것 같았다.
순식간에 상대의 패배 선언을 들은 로빈훗은 조용히 대기실
로 돌아왔다. 대기실이 제법 넓었고 우리 일행이 머무는 곳과
는 제법 떨어져 있었기에 마주치지 못하고 있던 것 같았다.
그 다음 경기는 현민과 멕시안의 대결이었다.
'멕시안이라....레온이 말한 그랜드 마스터 유저 초인이었나?'
경기장에 오른 현민과 멕시안은 진행자의 지시가 끝나기 무
섭게 검을 섞었다. 오러의 강도나 힘은 호각을 이루었으나 기
본적인 초식이나 몸놀림은 현민이 앞서고 있었다.
단순하고 우직하며 쾌도적인 멕시안의 검술과 달리 현민의
검술은 무척 부드럽고 화려했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는
엄청난 힘이 숨겨진 것 같았다. 그이 패도적인 검술에 현민의
부드러운 검술은 한 치도 밀리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기본적인
초식으로 대등하게 맞붙던 현민이 멕시안과 거리를 뒀다.
현민의 백월검법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려고 마음먹은 모양이
었다. 하지만 멕시안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백월
검법의 제 1초와 2초를 막아낸 것이었다. 그러나 제 3초식에
멕시안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현민이 정확히 빈틈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경기를 마치고 온 현민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정말 신나는 경기였어. 무슨 공격을 해도 척척 받아넘기니
깐 제대로 싸울 맛이 나더라."
"잘했어. 들어가서 쉬어."
"응."
나는 현민의 어깨를 두드러준 뒤 다시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금세 짧은 휴식 시간이 지나고 다음 경기가 시작되었다. 아무
래도 강찬의 경기 이후로 경기가 제법 빨리 끝났기에 점심시간
이후 꽤나 많은 횟수의 경기를 치른 것 같았다.
"15번 케로스터 선수와 16번 페일류트 선수 입장해주십시오!"
진행자의 말에 따라 또다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케로스터
라는 선수는 나와 같은 궁수였는데 그래선지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반대로 상대는 레온과 같은 7클래스의 대마법사였다.
"페일류트라는 유저가 정말 7클래스 마법사인가요?"
"네, 마성의 첫 번째 현자가 바로 페일류트거든요."
"엥? 진짜요?"
"네, 제 선배님입니다."
레온의 선배라면 그만큼 실력 있겠지? 나는 잠자코 둘의 대
결에 집중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페일류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투명화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것 같았다. 하지만
케로스터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화살 세 개를 꺼내들었다.
엥? 잠깐, 세 개? 아무튼 화살을 뽑아든 케로스터가 화살 세
개를 활시위에 메긴 뒤 힘껏 당겼다. 허공을 겨냥한 세 대의
화살이 활시위를 놓자 대기를 가르며 목표물에게 날아갔다.
갑자기 사라진 페일류트는 투명화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것
이 아니라 경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높이 치솟아 있던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거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알았을까?
어쨌든 놀랄 겨를도 주지 않고 페일류트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퍽 꺼져버렸다. 순식간에 경기장으로 내려온 페일류트를 향해
케로스터가 활을 쐈다.
로빈훗과 라벤더만큼이나 활을 빠르게 쏘는 유저는 처음인
것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점은 활을 쏘기 전 유저의
화살촉에 붉은 화염이 발현되는 것이었다.
"저자도 정령을 쓰는 건가요? 화살촉에 불을 붙여 쏘다니."
"아뇨, 정령을 쓰는 것 같진 않아요. 주작의 파이어 애로우라
면 화살촉에만 살짝 불이 붙거든요. 하지만 저 유저의 화살을
보세요. 제가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킨 뒤 활을 쏠 때처럼 불꽃
이 화살을 전부 뒤덮네요."
"아,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레인저로 전직하기 전 로시토의 말에
갈등하던 것이 생각났다. 헌터와 레인저 중 무엇으로 전직할까
고민하던 옛 기억과 함께 3차 전직에 대한 내용도 떠올랐다.
이번 경기도 카이루 때의 경기처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
것도 단순히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숨 막히는 접전을
벌이면서 두 유저 모두 아슬아슬하게 버텨내고 있었다.
"이제 알겠네요. 저자는 3차 전직을 한 궁수 유저 같아요."
"벌써 3차 전직을 한 유저가 있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네, 같은 궁수로서 무척이나 자부심이 느껴지네요."
레온과 얘기를 나누며 관전하는 동안 경기는 슬슬 끝이 보이
기 시작했다. 멀리서 견제하던 케로스터가 빈틈을 노리고 쏜
라이트닝 애로우에 페일류트가 적중당했다. 거기다 라이트닝 애
로우의 특수 효과인 스턴 효과까지 발동해(물론 아주 적은 확
률로 발동한다) 페일류트는 꼼짝달싹 못하고 굳어버렸다.
무시무시한 공방을 벌이던 중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
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케로스터가 패배 선언을 한 상대 유저의 목덜미에 활
을 쏜 것이었다. 그에 레온이 주먹을 쥐고 움찔했다. 그 순간
경기 시작 후에 느끼고 있던 자부심이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패배 선언을 한 유저를 게임아웃 시키다니......"
"저 유저 제정신이야?"
"미쳤군."'
강찬과 혁과 경훈이 차례대로 말했다.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이어졌지만 케로스터는 피식 웃고 있었다. 푸르게 물들어 있던
그의 두 눈동자가 곧 검게 물들었다.
진행자는 관중들의 야유 속에서 케로스터의 승리를 선언한
뒤 경기를 진행했따. 이번에는 창웅과 케인이라는 유저의 대결
이었다. 창웅이란 유저는 척 보아도 중원채널에서 건너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 창신 창웅이다."
경기를 지켜보던 현민이 말했다.
"중원채널에서도 유명한 사람이야?"
"아니, 그리 유명하지 않은데 창을 꽤 잘 다루더라고."
현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기에 집중했다. 케인은
커다란 타워실드와 노멀 소드를 다루는 기사 유저였다. 이 둘
의 대결도 장관이었다. 창웅이 공격에 능하다면 케인의 방어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푸른 강기를 머금은 창날과 푸
르게 물든 타워실드가 충돌하며 숨 막히는 공방을 벌였다.
지금까지 대결을 보면서 느낀 거지만 기본적인 초식으로는
신대륙 아리시아의 초인급 유저들보다 중원채널의 유저들이 훨씬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민과 멕시안의 대결에서도 그랬듯이 창웅과 케인의 대결에
서도 창웅이 기본적인 초식 면에서도 훨씬 우위를 점했다.
오러를 머금은 노멀 소드와 장창이 충돌해 스파크가 튀었다.
지금껏 타워실드로 공격을 잘 막아내다 갑작스럽게 노멀 소드
를 내민 것이 케인의 패착을 불러 일으켰다. 빠른 속도로 파고
든 창웅의 창날이 케인의 목에 우뚝 멈춰서는 순간이었다.
케인이 패배 선언을 하자 경기는 창웅의 승리로 끝났다.
이번 경기도 끝은 무척이나 허무했다. 잠깐의 실수로 인해
승패가 갈리는 진정한 고수들의 대결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드디어 10번재 대결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무언가 색
다른 경기가 진행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잔뜩 들뜨게 됐다. 사형
들의 대결에서 건져낼 거리를 찾아낼 수 있을 뿐더러 더욱 효
과적으로 싸우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때
문에 나는 다른 대결을 지켜볼 때보다 더욱 집중했다.
경기장 위에 올라선 두 궁탑의 제자는 왼손에 활을 쥔 채 서
로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에도 궁탑 제자간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경기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습니까 그럼 경기를 시작해주십시오!"
진행자의 말이 끝나자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 퍼
졌다. 경기가 시작했지만 두 선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둘 모두 롱 보우를 쥐고 있었고 활에는 각각 다른, 무척이나
생소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사형과는 오랜만에 붙는 것 같군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무뚝뚝하다니까. 퀵스텝!"
화살 하나를 꺼내든 카일이 백을 향해 재빨리 활을 쏘았다.
활을 쏠 때 활에 새겨진 문양에서 순식간으로 빛이 나는 것을
보아 아티펙트 무기임이 틀림없었다.
화살촉에 시커먼 독기를 머금은 화살이 백을 향해 쏘아졌다.
카일의 전매특허인 포이즌 애로우(Poison arrow, 독화살)는
정확히 백의 이마를 향해 폭사되고 있었다.
그에 백은 화살 하나를 꺼낸 뒤 몸을 살짝 틀어 백스텝을 밟
아 뒤로 물러나면서 카일를 향해 활을 쏘았다. 두 유저 모두
활을 쏘는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었다.
백의 활에서 쏘아진 화살이 카일을 향해 폭사되었고 카일도
백과 마찬가지로 가볍게 화살을 피해냈다.
백이 쏘아낸 화살은 냉기를 머금었는데, 이것은 백의 전매특
허인 프로즌 애로우(Frozen arrow, 냉기화살)였다.
서로 신경전을 벌이던 두 유저의 몸놀림이 조금 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서로 상대의 빈틈을 노려 활을
쏘았고, 화살을 이용해 상대의 퇴로를 차단하는 등 상상을 초
월하는 활솜씨와 빠른 몸놀림을 선보였다.
그에 지켜보고 있던 현성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이템의
힘을 빌리지 않고(아티펙트 활 제외) 저런 파괴력과 몸놀림을
선보일 수 있다니... 넋을 잃고 있던 현성이 고개를 내저으며
경기에 집중했다. 둘의 대결에서 건져낼 만한 것이 한두 가지
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서로 공방을 주고받으며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
껏 신이 나 공방을 주고받던 도중 백의 화살이 카일의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이런.'
놀랄 틈도 주지 않고 여섯 대의 화살이 사방에서 쏘아졌다.
카일은 반사 신경을 최대한 이용해 화살의 틈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다리에 상처를 입어서 몸놀림은 눈에 띄게 둔해졌다.
냉기화살은 카일의 다리에 부상률은 남긴 것뿐만 아니라 둔화
까지 시켜버렸다. 하지만 카일은 침착하게 몸을 움직였다.
'역시 둘째 사형이로군. 실력을 숨기고 있었어. 봐주면서 했
다는 건가?'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화살을 피해내던 카일이 백스텝을
밟으려던 순간이었다. 자신이 몸을 빼려던 그곳에 순식간에 날
아든 화살이 바닥에 꽂혔다. 그에 퀵스텝을 걸고 재빨리 옆으
로 몸을 흘려낸 카일의 시선이 지면에 착지하는 백에게 던져졌
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백히 활을 들어 카일을 겨냥했다.
"졌습니다."
카일이 패배를 선언한자 경기가 종료됐다.
"와아, 진짜 다른 궁수들과 비교되는 실력인데?"
혁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렇지? 저 사람들이 내 사형이야."
"정말 대단하다. 말로만 듣던 궁탑의 제자의 실력을 직접 보
게 되다니."
강찬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둘의 대결에서 나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이동 경로를 차단하고 빈틈을 노려서 활을 쏜
다라... 물론 궁수라면 당연히 선보일 수 있는 기술이었지만 상
황에 따라 다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곰곰히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다음 경기가 진행되었다. 나는
출전표에 시선을 던졌다. 본선에 진출한 스무 명 선수 중 열
명이 남았고, 출전표에 따라 강찬과 혁이 대결하게 되었다.
"호오, 루샤크와의 대결인가?"
"네 녀석과 언제 한 번 붙고 싶었는데, 잘됐다."
"너라고 해서 안 봐줄 거야."
"마음대로."
강찬과 혁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경기장으로 향했다. 확실히
전투 클레릭 때의 혁과 팔라딘이 된 지금의 혁은 달랐다. 둘이
경기장에 올라서자 관중들의 환호 속에 경기가 진행됐다.
강찬이 문 블레이드를 뽑아들자 혁이 배틀 해머를 고져 잡았다.
"플레임 웨폰."
문 블레이드의 검신이 붉게 물들면서 시뻘건 화염이 뒤덮었
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기세로 타오르는 화염 위로 아지랑이
가 피어올랐다.
"시작할까?"
"각오하는게 좋을 걸? 간다!"
말을 마친 혁이 육중한 배틀 해머를 고쳐 잡고 몸을 날렸다.
다가오는 혁을 향해 뻗어진 화염검이 마치 질주하는 전차처럼
대기를 가르고 배틀 해머와 부딪쳤다.
커다란 충격에 강찬이 뒤로 두 걸음 물러난 반면, 혁은 자리
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일 합에 서로의 힘의 차이가 나타났다.
강찬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문 블레이드를 고쳐 잡았다.
'혁이 녀석, 전투 클레릭 때완 전혀 딴판이다.'
"이얍!"
단발마의 기합과 함께 혁이 강찬에게 몸을 던졌다. 그 뒤로
한 치의 빈틈을 보이지 않으며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육중한 배틀 해머의 체중을 흘려보내며 공격을 척처거 받아내
던 강찬의 문 블레이드가 혁의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갑옷으
로 몸을 감쌌기에 큰 데미지는 입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고통
은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혁이 힘으로는 우위를 점했지만 속도
면에선 강찬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어우 씨."
강찬의 문 블레이드가 몸을 몇 번 훑고 지나가자 혁이 신경
질적으로 배틀 해머를 휘둘렀다. 풀 스윙으로 휘둘렀기에 강찬
은 검으로 막아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났다.
손잡이를 회전시켜 검을 뽑아낸 혁이 등 뒤로 배틀 해머를
둘러멘 뒤 재차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검신에선 금빛 오러
가 순식간에 뿜어져 나와 일정한 형태를 갖췄다.
파워는 많이 감소했지만 움직임이 상당히 빨라진 혁이 강찬
의 공격을 척척 받아넘겼다. 하지만 혁은 현재 헤르만이 겪었
던 뜨거운 열기에 신경이 분산되고 있었다.
'윽, 열기 때문에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다.'
배틀 해머로 맞붙을 때까지만 해도 열기가 이렇게까지 뜨겁
지는 않았다.
'안 되겠어. 거리를 두고 견제를 해야겠군.'
자신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강찬의 공격을 피해낸 혁이 재빨
리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얄밉게도 강찬은 틈을 주지 않고 순
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문 블레이드에서 전해지던 열기는 순식
간에 사라지고 어느새 시린 냉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형용키 힘든 고통에 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때를 노린 강
찬이 검을 후려쳤고, 혁은 검을 놓침과 동시에 고꾸라졌다. 문
블레이드에서 뿜어지는 냉기가 멎음과 동시에 혁의 몸을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쳇, 졌다."
문 블레이드를 거둬 검갑에 수납한 강찬이 손을 내밀었다.
그에 혁은 강찬의 손을 맞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깝다. 저 멍청한 녀석은 왜 저기서 검을 놓쳐?"
경기를 지켜보던 경훈이 소리쳤다.
"카이루가 열기와 냉기를 적절히 이용해 놓치게 만든 것 같아."
"아, 어쨌든 아깝다."
말을 마친 경훈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윽고 강찬과
혁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이 녀석 완전 변태야."
"뭐? 이게 어째서 변태야?"
혁의 말에 강찬이 반발했고 그에 둘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이
자지러지듯 웃기 시작했다.
그게 뭘 어쨌다고 변태가 되는 거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
다. 벌써 내 차례였다. 그렇게 내가 창밖을 내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을 때였다.
"이번 상대 만만치 않더라. 내가 단 한 방에 나가떨어질 줄은
몰랐어. 조심해, 레드."
"그래, 알았다."
경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벽에 세워둔 드래곤 레드
롱 보우를 집어 들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정령들을 소환했다.
-마스터, 너무 매정한 거 아니에요?
주작의 말을 시발점으로 오랜만에 소환된 정령들이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다들 조용! 너희들 내가 페리안, 제로스와 대결했을 때 날
도왔던 거 기억하지?"
-네.
-물론이죠.
-응.
-그래.
뜻은 같았지만 제각기 다른 대답을 하는 정령들을 둘러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이번에도 너희들이 도움이 필요하다. 잘 부탁해."
정령들과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눈 깜짝할 새에 휴
식 시간이 끝났다.
"다음 경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6번 현군 선수와 8번
레드 파운 선수 입장해주십시오!"
"다녀올게!"
"이기고 와라!"
일행들의 응원을 들으며 나는 경기장으로 향했다. 왠지 이번
경기는 무척이나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강한 자와 맞붙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드래곤 레드 롱 보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상대는 나보다 먼저 경기장 위에 올라 서 있었다. 나보다도
작은 체구. 하지만 경훈을 일격에 쓰러뜨렸기에 무시할 수 없
었다. 게다가 요상한 가면을 쓰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을 뿐더러 엄청난 위압감이 날 압박하기 시작했다.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을 비집고 많이 익숙한 음성이 터
져 나왔다. 반 친구들의 응원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선 현지와 제리코가 자리에서 일어나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그럼 경기를 시작해주십시오!"
진행자의 말에 나는 상대가 검을 뽑아드는 것을 확인하고는
전투자세를 취했다.
'생소한 복장과 가면, 중원채널에서 건너온 게 틀림없어.'
전투자세를 취한 현성과 현군이란 유저의 신경전이 시작되었
다. 현성도 이번만큼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랜드 마
스터와 대결해본 경험은 있지만 상대와 같은 중원의 실력자와
는 맞붙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나올지 견제해볼까?'
현성이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가려던 순간이었다. 순식간
에 지면을 박차고 들어온 현군이 현란하게 검을 움직였다.
"퀵스텝!"
반사적으로 퀵스텝을 건 현성이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른 뒤
허공에서 백스텝을 밟고는 공중제비를 돌아 가볍게 착지했다.
또다시 치고 들어올 것이란 생각에 다시 한 번 백스텝을 밟
아 거리를 둔 현성이 활등을 꽉 움켜쥐었다.
아직까지는 신대륙의 그랜드 마스터들과 별다를 것 없었지만
이제 시작이기에 현성은 잔뜩 긴장한 채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판사판이다. 나도 저들의 무공 중 하나인 보법을 익히고
있으니까 최대한 많이 움직이면서 활을 쏴봐야겠어.'
현성이 재빨리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자 현군이 순식간에 거
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아직 퀵스텝의 지속시간이 끝나지 않
았기에 현성은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를 수 있었다.
현성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화살을 활시위에 메긴 뒤 쏘려던
찰나 현군도 높이 뛰어올랐다.
'뭐, 뭐야?'
하지만 현성은 침착하게 백스텝을 밟고 거리를 좁혀오는 상
대에게 활을 쐈다. 쏘아진 붉은 섬고아이 맹렬히 대기를 갈랐다.
상대가 허공에서 몸을 틀어 붉은 섬광을 피하는 동안 현성은
천근추를 시전해 지면에 착지한 뒤 재차 활을 쏘았다. 보통 유
저였다면 손에 쥔 무기를 이용해 붉은 섬광을 쳐냈겠지만 상대
는 보법에 능한 중원채널의 유저. 현성과 같이 허공을 박찬 뒤
순식간에 지면에 착지했다.
'검만 휘두르는 이곳의 그랜드 마스터들과는 전혀 딴판이군.'
자신과 같은, 아니 자신보다 더 능숙하게 보법을 선보이는
중원채널 유저는 현성에게 있어 상당히 골치 아픈 상대였다.
거리르 벌리면 바로 치고 들어왔기에 활을 쏠 틈조차 없었다.
'보통 보법으론 안되겠어.'
생각을 마친 현성이 즉시 화살 두개를 꺼내들고는 지면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현성의 모습은 퍽 꺼지듯 사라져버렸다.
"더블 샷!"
허공에서 들려오는 상대의 음성에 현군은 즉시 고개를 돌렸
다. 쏘아진 탄환처럼 맹렬히 회전하며 날아드는 붉은 섬광이
이쪽을 향해 폭사되고 있었다.
'이곳의 다른 유저와는 다르군.'
쇄도하는 붉은 섬광의 속도가 상상 이상이었기에 현군은 쳐
내기로 마음먹었다. 검을 힘껏 휘두름과 동시에 눈부신 빛이
솟구쳐 올랐다. 하얀 강기가 순식간에 일정한 형태를 갖췄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검강이 번뜩였다.
기세 좋게 날아들던 두 줄기의 붉은 섬광이 맥없이 튕겨나갔
다. 가면에 가려져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붉은 섬광을 쳐낸 현
군의 표정도 좋지만은 않았다.
'최대한 힘을 흘려 쳐냈음에도 불구하고 손아귀가 얼얼하군.'
미간이 좁혀진 현군에게 다시 두 줄기 붉은 섬광이 쏘아졌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무시무시한 공방이었다.
날아드는 붉은 섬광을 쳐낸 현군이 상대의 위치를 파악해내
고 즉시 몸을 던졌다. 하지만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즉시 거리를 두고 활을 쏘는 것을 보아 한두 번 싸워본 솜씨
가 아니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궁수임에도 불구하고
근접전투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군은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을 것이고, 오러를 발현
시키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활과 검이 충돌하며 불똑이 튀었다.
단 일 합에 힘의 우열이 가려졌다. 현군의 힘에 밀려난 현성이
재빨리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현성은 기죽지
않고 보법을 선보이며 현군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필요할 때만
강기를 발현시키던 현군의 검에서 새하얀 검기가 발현되었다.
상대의 실력이 만만치 않은 것을 직감한 것이었다. 상대의
검에 새하얀 오러가 맺힌 것을 알아챈 현성도 그에 대비했다.
현성은 현무의 정령술을 이용해 상대방의 움직임을 둔화시켰다.
현성은 현군이 발을 딛을 때 순간적으로 그리스를 깔아 잠시
주춤하게 만든 뒤 맹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놀라운 반사 신
경으로 현군은 날아드는 붉은 섬광을 피하며 거리를 좁혔다.
붉은 섬광이 어깨를 슬쩍 훑었고, 옷이 터져나가며 붉은 선
혈이 솟구쳤다. 하지만 현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현성과 거리를
좁혀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에 당황한 것은 현성이었다. 페리안 공작이 선보였던 연환
공격과 무척 흡사한 공격. 하지만 페리안이 선보였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연환공격이었다. 게다가 난생처음
접하는 변초와 허초에 잔뜩 당황한 현성은 허겁지겁 공격을 피
하기 급급했다. 강기를 머금은 검이 허벅지를 훑고 지나갔다.
보통의 오러라면 드래곤 본만으로도 충분히 무마시킬 수 있
었겠지만 상대의 검에서 발현된 것은 다름 아닌 검강이었다.
종잇장처럼 갈라진 갑주 사이에서 붉은 선혈이 흩뿌려졌다.
그 뒤로도 현군의 연환공격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어도 상대는 금세 거리를 좁혀왔으며 거의 다리를 노
리는 공격이었기에 쉽사리 보법을 밟을 수도 없었다.
'이건 상상을 초월하잖아? 제길, 화살뿐만 아니라 활에도 오
러를 발현시킬 수 있었다면....'
하지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임 내엔 밸런스라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검이 활을 쥔 왼팔을 훑었
다. 통증과 함께 활을 놓칠 뻔했지만 현성은 꾹 참았다.
'그리스!'
처음엔 상대의 움직임을 방해했던 그리스도 이젠 통하지 않
았다. 바닥에 뿌려진 마나를 감지한 현군이 즉시 자리를 바꿔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상대의 패턴을 익히는 수밖에 없어.'
힘겹다. 이대로 쓰러질 것 같다. 하지만 로시토의 바람과 궁
수의 진정한 힘을 모든 이에게 각인시켜주려면 무너질 순 없다
는 생각에 나는 이를 악물고 상대의 검에 시선을 집중했다.
오래 공격을 피하다 보니 이제 상대의 패턴도 몸에 익기 시
작했다. 검이 다리를 쇄도해오는 것을 느끼곤 즉시 지면을 박
차고 뛰어올라 텅 빈 오른쪽 어깨를 향해 활을 힘껏 휘둘렀다.
그에 현군이 움찔하며 거리를 두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연
환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공격을 피해내느라 스태미나가 상당히 많이 감소되
었는지 숨이 차올랐다. 반면 상대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온몸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상대
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상대의 패턴만 완벽하게 파악한다.
면 굳이 활을 쏘지 않고 활만으로도 상대할 수 있을 듯했다.
물론 상대의 검과 부딪치기 않게 최대한 빈틈을 노려야만 가
능한 것이었다. 이참에 무모한 도전을 해봐야겠군.
나는 활등을 움켜쥔 채 현군에게 몸을 던졌다. 퀵스텝을 걸
었기 때문에 움직임이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상대의 검이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쇄도해오는 것을 느끼며
허리를 뒤로 젖혀 피해낸 뒤 반동을 이용해 파고들었다. 하지
만 상대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역으로 이쪽으로 파고들었고 나
는 지면을 힘껏 박차고 뛰어올랐다.
'나보단 작은 유저와 싸워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힘들군.'
물론 제리코와 대련을 한 적은 있지만 상대는 제리코와 비교
도 할 수 없는 고수였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김에 레드 스톰을
써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살을 활시위에 메겼다.
"레드 스톰!"
공중으로 치솟은 상대의 음성이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들려
왔다.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상대는 위
치를 옮긴 뒤였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붉은 섬광 세례였다. 마치 쏘아낸 탄환처럼 맹렬히 회전하며
날아드는 붉은 섬광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상대방의 빈틈을 노리고 날아드는 붉은 섬광 세례에 현군은
무척이나 당황한 상태였다. 새하얀 검강을 진득하게 피워 올린
채 막아내기에만 급급했다.
이형환위를 전개해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대는 그럴 틈조차
주지 않았다. 내공으로 손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손아귀에서 느
껴지는 통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게 재차 날아드는 붉은
섬광을 쳐내려던 순간이었다.
상대방이 쓰는 요상한 기술이 바닥에 뿌려졌고 현군이 서 있
는 지면은 마찰계수가 0이 되어 서 있을 수 없었다.
"허억."
날아들던 붉은 섬광이 가면을 박살냈다.
가면이 박살나며 유저의 얼굴이 드러났다. 유저는 전혀 당황
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살포시 웃고 있을 뿐이었다.
잽싸게 자리에서 벗어나 거리를 둔 현군이 손을 들어 올렸다.
"졌다."
상대의 패배 선언에 나는 지면에 착지했다. 급격히 밀려오는
현기증 때문인지 중심도 잡기 힘들었다. 눈앞이 뿌옇게 보였다.
좋은 기술이기는 하나 마나와 스태미나가 급격히 감소한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었다. 매직 아머를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나 감소가 무척이나 심했으니 매직 아머가 없었다면 꿈도 꾸
지 못할 기술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대가 가까이 있었
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무척
낯익은 얼굴,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녀석, 그동안 변한게 없구나."
패턴을 어느 정도 알아챘다고 생각한 뒤 덮어놓고 공격을 했
는데 상대가 할아버지였다니.....
진행자의 판정이 끝난 뒤 선수 대기실로 돌아가면서도 할아
버지와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나는 세릴리아 월드를 하면서 그
동안 겪은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았고,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감
탄사를 내뱉으며 어깨를 두드려주셨다.
"현민이 녀석에겐 비밀로 하고 왔는데, 가면이 부서져버렸으
니 어쩔 수 없이 밝혀야겠구나."
"죄송해요, 근데 지금쯤이면 정사대전이 한창일 텐데 어떻게
나오신 거에요?"
"이번에 터진 대전은 생각 외로 빨리 끝났단다. 당분간은 잠
잠할 것 같아 현민이 녀석을 이곳으로 보낸 뒤 뒤따라왔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선수 대기실에 다다르게 되었고
할아버지와 함께 우리 일행이 머문 곳으로 향했따. 현민은 갑
작스런 할아버지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다.
"할아버지?! 도대체 그 복장은 뭐예요? 게다가 현군이라는 이
름은 또 뭐고....."
"욘석아, 이곳에는 생각보다 강한 유저들이 많구나. 네 형에
게 졌으니 말이다."
현민이 경악 어린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긴
현민의 말로 할아버지는 백월문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강하다고 했다. 그런 할아버지를 꺾었다는 것에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친할아버지라는 말에 쉬고 있던 일행들이 전부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고 할아버지는 한 명씩 돌아가며 인사를 받아주셨다.
그렇게 주어진 잠시의 휴식 시간 동안 할아버지와 현민을 비롯
한 우리 일행들은 또다시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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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혀지는 케로스터의 실력과 그의 정체
현재 신대륙 아리시아의 파르판 제국 수도 아르곤 시에서 열
린 유저 무투 대회장은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뒤늦게 접속
한 유저들이 모여들었지만 경기장의 자리는 모자라지 않았다.
휴식시간이 끝났는지 진행자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다시 경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대회장을 채웠다. 진행자가 궁탑의 첫
번째 제자 로빈훗과 마성의 두번째 현자 레온을 호명했다.
두 선수의 이름이 호명되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만
큼 유명한 유저들의 대결이었기에 객석의 기대감은 엄청났다.
로빈훗이야 궁탑의 첫째 제자로 레인지 마스터가 된 최초의
유저였기에 모르는 이가 없었지만 갑작스럽게 등장한 마성의
두번째 현자 레온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타의 마법사들과 궤를 달리하는 마법 응용 능력 때문인지
늦었지만 많은 유저들이 레온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유저들의 기대에 보답이라도 해주듯 두 유
저의 화려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며 붉은
섬광을 쏘아내는 로빈훗과 무척 빠른 캐스팅을 선보이며 각종
마법을 난사하는 레온의 모습에 유저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엄청나다! 저런 유저들을 가지고 초인이라고 하는 거였어!"
"이런 대결을 보게 될 줄이야!"
유저들은 하나같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경기에 집중했고 숨
막히는 공방은 계속되었다. 둘 모두 원거리 공격을 하는 유저
였기에 어지럽게 움직이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관중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경기를 진행 중인 로빈훗은 그야
말로 신이 나서 활을 쏘고 있었다. 상대가 생각보다 훨씬 강했
기 때문이었다.
'7클래스의 마법사라. 무청 강하다. 자칫하면 질 수 있겠어.'
게다가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상대의 공격에 무척이나 애를
먹으면서도 로빈훗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공격을 가했다.
로빈훗을 상대하고 있는 레온도 상대의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허를 찌르는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요리조리 피
해냈으며 사각을 파고드는 붉은 섬광에 화들짝 놀랐다.
상대의 움직임이 빨랐기 때문에 레온은 낮은 클래스의 빠르
고 신속한 공격마법으로 견제를 하며 고급 마법을 캐스팅했다.
7클래스의 대마법사의 전매특허인 더블 캐스팅이었다.
열여덟 발의 매직 미사일이 로빈훗을 향해 폭사되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집요하게 따라붙는 매직 미사일 세례에 로빈
훗은 또다시 현란한 몸놀림을 선보이며 피했다.
그때였다. 매직 미사일이나 윈드 커터와 같은 빠른 공격이
가능한 바람 계열의 낮은 클래스 마법을 난사하던 레온의 손바
닥에서 이내 붉은 구체가 형성되었다.
"플레임 캐논(Flame Cannon)!"
구체에서 일직선으로 쏘아진 프레임 캐논이 번개처럼 대기를
갈랐다. 경기장 밖 지면이 터져나가며 먼지가 자욱하게 번졌다.
마나 실드로 몸을 감싼 레온이 마나 스캔을 펼쳤다. 표정이 좋
지 못한 것으로 보아 상대는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모습을 나타낸 로빈훗은 오른쪽 다리에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바지 밑단이 터져 나갔고 다리는 피로 범벅이 되어 있
었지만 로빈훗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씨익 웃어보인 로빈훗이 다시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비교적 가느다란 붉은 섬광이었지만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
다. 뒤쪽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보고 헤이스트를 건 레온이 몸
을 돌렸지만 화살이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붉은 섬광이 레온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몸을 덮은 마
나 실드가 손산되며 상당량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손상된 부분을 채우는 데도 마나를 소비한 레온이 다시금 경기
에 임했다.
"우와, 마법사란 직업이 저렇게 강하구나. 중원의 술사들보다
도 강한 것 같아요. 그렇죠? 할아버지."
현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할아버지가 로빈훗과 레온
의 경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레온과 로빈훗의 대결을 지
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엄청나게 스릴을 느끼게 해주었다.
팽팽한 맞대결을 보이는 듯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로빈훗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지 레온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몸에 상처를 입긴 않았지만 생명력 대신 마나를 감소시키는 마
나 실드로 몸을 감싼 상태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는 공격
에 당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때문에 경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온의 패배 선언으로 끝났다.
경기가 끝난 뒤 두 사람이 악수했고 그 자리에서 로빈훗의
상처를 치료해준 뒤 나란히 걸어오던 둘은 서로 갈라졌다.
"레온! 정말 잘 싸웠어요."
나는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 레온에게 소리쳤다. 그에 레온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무척이나 애먹은 경기였네요."
레온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레온의 이마
에 맺힌 땀방울은 그동안 경기에서 얼마나 힘이 들었는가를 여
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레온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출전표를 바라봤다.
다음은 현민의 경기였다. 이번 경기는 맨 마지막 조가 부전
승으로 결승에 올라가게 되어 있었는데 덕분에 중간에 낀 조들
만 고생하게 생겼다.
레온의 경기를 끝으로 식사시간 및 휴식시간이 제공되었고
우리 일행은 전부 대회장 밖으로 나왔다. 물론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관전하던 현지와 리아, 제리코도 뒤따랐다.
"저분은 누구야?"
"응, 우리 친할아버지셔. 원래는 중원채널에서 활동하시는데
이번 대회에 참가하신 거야."
"안녕하세요, 티아 젠이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전 리아라고 합니다."
"저는 제리코에요."
아직 할아버지를 모르는 셋에게 소개시켜준 뒤 우리는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제리코는 유독 할아버지를 잘 따랐다.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그의 쾌활한 성격이 할아버지의 마음에 들었
는지 마치 날 대하듯 제리코를 대해주셨다.
식당에는 경기를 관전하던 유저들로 가득했다. 한 가지 편안
한 점은 선수들이라고 해서 유저들이 우르르 모여 구경하지 않
는다는 거였다. 덕분에 우리는 편히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곧 주문한 고급 요리가 탁자 위에 차려졌고 우리 일행은 음
식을 집어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이야기는 레온과 할아버지가 거의 이끌어나가는 식이었다. 할
아버지의 입에서 술술나오는 중원채널 이야기를 모두들 흥미
진진하게 들었다. 현민에게 들은 것보다 더 자세하고 장황한
설명에 듣는 동안에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말주변이 좋을 뿐더러 신세대다운 우리 할아버지의 재치에
모두들 자지러지듯 웃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 현성이의 여자 친구라고 하셨나요?"
"네, 말씀 놓으세요."
"그럼 편한 대로 해야겠군. 아무튼 별일이야, 주변머리도 없
는 녀석이 여자 친구가 다 생기고."
"맞아요, 주변머리도 없는데다가 또 소심해요."
할아버지의 말에 혁이 맞장구쳤다. 그에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할아버지가 함께 계신 자리인지라 큰소리도 치지
못한 채 먹을 것으로 속을 삭혔다.
두고 보자, 민혁!
그렇게 즐거운(?) 식사 시간을 끝마치고 일행은 다시 대회장
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와 경훈, 혁과 레온은 이미 경기에서
패했기 때문에 현지들과 함께 관중석으로 간다고 했다.
"어차피 손자 녀석에게 패했기 때문에 선수 대기실에 있는
것은 의미가 없어."
뭐 할아버지와 같은 강자가 보디가드로 나선다면 큰 문제가
될 일은 없었기에 나머지 일행은 선수 대기실로 돌아왔다.
긴 휴식 시간이었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기다리던
현민의 차례가 다가왔다.
"그럼 다녀올게."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경기 시작부터 말없이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던 루카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녀석, 많이 지루한 모양이다.
대기실의 기다란 의자에 등을 깔고 누운 강찬이 잠시 잠을
청하는 동안 나는 적안을 개안하고 경기장을 바라봤다.
경기장 위로 올라선 현민이 심호흡을 한 뒤 상대에게 시선을
두었다. 상대는 무척이나 냉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활? 이자도 궁수로군. 이곳에서 말하는 초인들은 중원의 무
사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긴장해야겠어.'
현민은 뽑아든 검을 늘어뜨린 채 상대방에게 시선을 두었다.
눈이 마주친 상대가 피식 웃었다. 그에 현민은 등골이 시림과
동시에 오싹함을 느꼈다.
'기분 나쁜 유저야.'
얼른 고개를 저은 현민이 검병을 꽉 움켜쥐었다. 경기를 진
행하라는 진행자의 지시가 떨어지게 무섭게 케로스터가 급히
몸을 뒤로 빼냈다. 그와 동시에 현민의 검에서 눈부신 빛이 폭
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하얀 검기가 검신을 뒤덮었고 동시에
현민의 신형이 쏘아진 화살처럼 케로스터를 향해 폭사되었다.
현민은 중원채널의 유저답게 현란한 보법으로 거리를 좁힌
뒤 검을 휘둘렀다. 수십 개의 잔영이 케로스터의 몸을 덮었지
만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몸을 뒤로 빼냈다. 그와 동시
에 화살 세 개를 꺼내 순식간에 쐈다.
"헛!"
헛바람을 집어삼킨 현민이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화살을 쳐
냈다. 두 토막 난 세 대의 화살이 맥없이 곤두박질쳤다. 처음엔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케로스터가 재빨리 거리를 두고 활을 쏘
기 시작했다.
"파이어 애로우 레인!"
순식간에 공중으로 치솟은 화살이 이내 비처럼 쏟아지기 시
작했다. 시뻘건 불화살이 비처럼 내렸다.
'뭐, 뭐지 이건?'
경기장 전체를 뒤덮고 쏟아지는 불화살 세례에 현민은 호신
강기를 잔뜩 끌어올린 채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케로스터의
손속은 매서웠다.
그는 마치 기계식 크로스 보우를 난사하듯 활을 쏘기 시작했
고, 현민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상대방의 몸놀림이 상상 이상이야. 불규칙한 동작을 보면 따
로 보법을 익힌 것 같지는 않은데.'
애로우 레인의 지속시간이 끝났는지 더 이상 불화살 비는 내
리지 않았다. 호신강기를 거둔 현민이 미간을 좁힌 채 검에
내 공을 밀어 넣었다.
웅혼한 내력이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검극을 타고 올라갔다.
짙고 기다란 검강이 발현되었다. 약 2미터가량 자라난 검강을
머금은 검이 현란히 움직이며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쳇, 이래서 중원 유저들이 골치 아프다니까.'
상대의 생소한 공격에 케로스터의 미간이 좁혀졌다. 새하얀
검강을 머금은 검의 잔영이 사방을 뒤덮기 시작했고, 이내 온
몸에 상처를 입혔다. 생살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에 케로스터
가 즉시 화살 하나를 꺼내 쐈다.
"라이트닝 애로우!"
시퍼렇게 방전하는 전기를 머금은 화살이 쏴졌지만 라이트닝
애로우는 현민의 검에 맥없이 양단되었다. 하지만 케로스터는
미련을 버리지 않고 공격을 피하며 라이트닝 애로우를 쐈다.
화살은 날아가는 족족 현민의 검에 가로막혔다.
'자포자기인가? 자꾸 전류가 흐르는 화살만 쏴대니.'
상대의 공격을 완벽하게 차단하던 현민이 갑자기 온몸이 굳
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검을 쥔 채로 우뚝 멈춰 섰다. 그와 동
시에 검으로 통해지던 내공이 단절되어 검강도 사라져버렸다.
'뭐, 뭐지?'
움직이려 안간힘을 썼지만 도무지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저 상태 이상의 신호가 울릴 뿐이었다.
'설마, 저 유저가 이걸 노린건가?'
현민이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사이 케로스터는 활시위를 힘
껏 당겼다. 현민은 몸을 움직여보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도무
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검강을 타고 올라간 전류에서 스턴 효
과가 나타났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 곧 몸이 조금씩 움직여지려던 찰나였다.
"애로우 익스플로전!"
케로스터의 외침과 동시에 쏘아진 화살이 현민에게로 폭사되
더니 이내 대폭발을 일으켰다. 정확히 빈틈을 노리고 쏘아진
화살이었다. 약점 부위에 틀어박혀 대폭발을 일으켰는지 매캐한
연기와 함께 현민이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순간적으로 호신강기를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으나 데미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케로스터는 3차 전직을 끝마친 궁수의 힘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상대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케로스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이전 경기에서도 상대를 게임아
웃 시킨 그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전투 불능이 된 상대를
향해 걸음을 옮긴 그가 손에 쥔 화살을 높이 들어올렸다.
"꽤 강하긴 했지만 아무 것도 아니로군. 그럼 잘 가라. 난
나에게 패배한 유저는 살려두지 않거든. 크흐흐흐."
케로스터는 높이 들어 올린 화살을 현민의 목에 힘껏 내리
꽂았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부드러운 살을 파고들려던 찰나 맹
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굵직한 붉은 섬광 한 줄기가 화살을 박살내며 저만치 날아갔
다. 그에 화들짝 놀란 케로스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 뭐야?"
그와 동시에 목에서 서늘한 감각을 느끼곤 눈동자를 굴려 아
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붉은 눈동자를 가진 평법
한 생김새의 유저가 자신의 목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처음엔 당황한 듯한 얼굴을 했으나 이내 케로스터의 입가엔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이거 그 유명한 궁탑의 일곱째 제자 레드 파운 아닌가?"
하지만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즉시라도 활시위를 놓을 기
세로 케로스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스승님이 사형에게 활을 겨누라고 가르치셨나?"
케로스터의 말에 상대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영문을 몰
랐을 때나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네 셋째 사형이 바로 나야. 크흐흐흐흐."
케로스터가 웃음을 흘리자 화살촉에 붉은 오러가 발현되었다.
"크윽."
오러의 끄트머리에 닿은 살이 시커멓게 죽어 들어갔다.
"그딴 건 필요 없고 내 동생한테서 떨어져."
"동생.....?"
케로스터가 눈동자를 굴려 아래를 내려다보려던 순간 진행자
가 공간 전이를 통해 나타났다.
"시합 도중에 싸움을 일으키면 실격 처리됩니다. 화살을 거
두고 활을 내려놓으십시오."
그에 상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화살을 거둬 화살통에 꽂아
넣은 뒤 현민을 일으켜 세우곤 대기실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만 해도 시끄러웠던 대회장에 적막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고마워."
"고맙긴 뭘."
현민의 말에 대꾸한 나는 녀석을 부축한 채 대기실로 향했다.
한때 유저들을 떠들썩하게 했던 셋째 사형의 첫인상은 무척이
나 좋지 못했다. 하지만 길드 하나를 가볍게 박살낸 뒤 신대륙
으로 건너왔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현민
정도 되는 강자를 쓰러뜨렸으니까.
궁탑의 제자들의 이름에 먹칠을 한 적이 있다던 말도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아직까진 상대를 게임아웃 시키는 것 외
에 다른 행동을 보이진 않았으나 그냥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형..... 조금 전에 케로스터라는 유저가 사형이라는데
그렇게 무례하게 굴어도 괜찮은 거야?"
"이미 안 좋은 소문들로 가득한 녀석이야. 사형 대우를 해줄
필요가 없는 녀석이지."
"그래도 사형인데... 쳇, 아깝게 져버렸어. 괜히 상대의 기를
죽이려고 공격을 일부러 차단했나봐."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현민이 말했다. 내가 네 몫까지
더해 반드시 우승할 테니 이 형만 믿어라.
대기실로 돌아오자 언제 돌아왔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혁이 이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뭐야, 이 녀석 괜찮은 거야?"
현민은 이쪽으로 걸어오면서 경기장에 쓰러져 있을 때보다
눈이 더 풀려 있었다. 아무래도 지속적인 생명력 감소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았다.
치료 마법이라면 레온보다 훨씬 뛰어난 혁이 손을 뻗어 현민
의 가슴팍에 갖다 대었다.
"음... 부상률이 장난이 아니구먼. 생명력은 또 쥐꼬리만큼
남았어. 큐어!"
혁의 손에서 빛이 발했고 이내 은은한 금빛이 현민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부상률이 회복되기 시작했는지 현민
의 혈색이 돌아오며 점점 편안한 얼굴이 됐다.
"힐링."
힐링으로 생명력을 회복시키자 현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허, 무슨짓이야? 누워 있어. 치료된 직후에 바로 움직이
면 부상률이 일정량 증가하게 된다."
그에 현민은 울상을 짓고 도로 누워버렸다.
"그건 그렇고 갑자기 그렇게 뛰쳐나가더니. 운영자가 뭐라고
하지 않았어?"
"시합 도중에 싸움을 일으키면 실격 처리 된다기에 게임아웃
시키려다 말았어. 그런데 넌 언제 내려온거야?"
"아니 저 위쪽에서 보면 잘 보이긴 하는데 하고 귀가 따가워
서 그냥 내려왔지."
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정말 혁이 다운 발상이로군. 현민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이쪽으로 다가온 강찬이 말했다.
"이 강한 녀석을 쓰러뜨릴 정도의 괴물들이 도대체 몇 명이
나 되는거야?"
그러는 사이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음 경기가 진행되었다.
이번에 승리하게 되면 부전승으로 결승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
의 기회를 갖게 되는 경기였다.
이번 경기에는 둘째 사형이 출전했다. 상대는 그랜드 마스터
케인을 쓰러뜨린 중원채널의 유저 창웅이었다.
이번 대결은 왠지 박진감이 넘칠 것 같았다.
경기가 시작되자 창웅이란 유저는 창을 고쳐 잡고는 상대방
에게 시선을 뒀다. 사형은 특유의 몸놀림을 선보이며 활을 쏘
았고, 창웅은 현란하게 창을 움직이며 공격을 모두 맞받아쳤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창날엔 오러조차 맺혀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사형이 쏘는 화살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창날을
내밀어 교묘하게 각도를 틀자 궤도가 바뀐 화살이 엉뚱한 곳으
로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에 나는 입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경기를 관전했다.
사형은 무척 당황스런 얼굴이었다. 그러다 작전을 바꿨는지 사
형은 이내 몸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십 발의 새하얀
한기를 머금은 화살이 창웅을 향해 폭사되기 시작했다.
순간 창웅의 눈빛이 돌연 변하더니 현란하게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사각을 노리고 쏘아진 화살도 맥없이 퉁겨
나고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어찌할 수 없는
천적을 만나게 된 셈이었다.
"어떻게 저런게 가능하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강찬이 말했다.
"아무래도 현성이네 할아버지 말씀이 사실인 것 같아."
"엥? 무슨 말씀?"
내가 되묻자 혁이 차근차근 설명을 해나갔다.
"이번 경기에 은둔 중인 전대 초인 유저들이 몇몇 출전한다
고 하셨거든. 그중 한 명이 네 할아버지야. 그리고 지금 네 둘
째 사형이란 사람과 싸우는 자도 창으론 적수를 찾아볼 수 없
는 은둔 중인 전대 초인 유저라고 하더라."
혁의 말에 몸을 일으킨 현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만약 결승전까지 올라가게 된다면 저 유저와 맞붙어야 된다는
말인데....
경기를 지켜보는 사이 시합은 막바지에 치달았다. 현란한 보
법을 선보이며 다가간 창웅이 사형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변변찮은 힘조차 써보지 못한 채 사형은 패배 선언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번 경기에서 창웅은 오러조차 발현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창웅의 승리로 경기가 끝나자 대회장의 열
기는 뜨겁게 치솟기 시작했다.
"둘째 사형이 제대로 힘조차 써보지 못한 채 패했어."
모두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얼굴로 고
개를 끄덕여 보이던 강찬이 이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저 창웅이란 유저와 맞붙을 자신이 없
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야. 현성아, 각오해."
"응? 무슨말이야?"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며 강찬에게 묻자 손가락을 뻗어
출전표를 가리켰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출전표를 향했고 강찬
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바로 다음 경기가 강찬과
의 대결이었다. 그에 나는 빙긋 웃으며 강찬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봐주지 않을거야."
"내가 할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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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본선 경기와 로빈훗의 분노
박진감 넘치면서도 무척이나 지루한 경기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준결승전이 시작하기 전까지 쭉 연달아 할
생각인가 보다. 이번 경기와 로빈훗과 케로스터의 경기가 끝
난 다면 오늘의 경기는 종료될 것 같았다. 얼른 경기를 끝내고 쉬
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2번 카이루 선수와 8번 레드 파운 선수, 입장해주십시오!"
갑작스런 진행자의 말에 나와 강찬은 동시에 화들짝 놀랐다.
"잘하고 와라. 아무나 이겨. 이기는 놈이 내 편이야."
촐싹대는 혁을 뒤로한 채 나는 강찬과 함께 경기장으로 향했
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동안 관중석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가 들려왔다. 반 친구들은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얼
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경기장에 올라선 뒤 강찬과 나란히 서자 진행자가 급히 달려
왔다.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목례를 한 뒤 경기에 임했다.
"자, 간다. 플레임 웨폰."
강찬의 문 블레이드에서 자욱하게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사
방을 뒤덮었다. 열기와 직접 대면을 해보니 상대 선수들이 왜
맥을 못 추렸는지 알게 되었다.
마치 불가마 사우나에 들어앉아 있는 것처럼 뜨거운 열기로
인해 숨조차 쉬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을 거야? 공격한다?"
"아,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강찬의 문 블레이드가 이쪽으로
쇄도해오기 시작했다. 뜨거운 화염이 용트림하며 대기를 갈랐고
문 블레이드가 가까워질수록 뜨거운 열기는 배로 증가하기 시
작했다.
"퀵스텝!"
나는 퀵스텝을 걸고 즉시 지면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뽑아
든 화살을 활시위에 메긴 뒤 강찬을 겨냥했다. 미리 부탁해놓
은 윈드 애로우를 쏘아내자 붉은 섬광은 맹렬히 대기를 갈랐다.
파공성을 들었는지 혁이 즉시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냈다.
나는 천근추를 이용해 재빨리 지면에 착지한 뒤 활을 쏘아 보
냈다. 재빨리 몸을 회전시키며 문 블레이드를 휘둘러 공격을
차단한 강찬이 이번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강찬의 눈빛이 변하며 문 블레이드에서 뿜어지던 화염이 더
욱 높게 치솟아 올랐다. 오러 블레이드를 길게 내뿜는 것과 같
이 길게 자라난 화염검이 내게로 폭사되었다.
몸을 틀어 피하려 했으나 기가 막히게 경로가 바뀐 화염검이
재차 내 몸을 향해 쇄도해왔고 나는 즉시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났다.
"파이어 볼!"
즉시 플레임 웨폰을 거둔 강찬이 문 블레이드의 끝에 맺힌
화염구를 내게로 던졌다.
"주작, 파이어 월!"
일정량의 마나가 감소되는 것을 느끼며 커다란 불의 장벽이
형성되어 강찬의 파이어 볼을 막았다.
"좋았어!"
내가 외치는 순간 파이어 월을 가르며 강찬이 모습을 나타냈
다. 이런, 좋긴 개뿔!
퀵스텝의 지속시간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챈 나는 즉시 몸
을 틀어 강찬의 공격을 피해냄과 동시에 몸을 회전시켜 활을
힘껏 휘둘렀다. 하지만 강찬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녀
석은 순식간에 몸을 돌려 피해낸 뒤 자세를 바로 잡았다.
'후우, 강찬이 강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못 보던 사이 강찬은 무척이나 강해져 있었다. 바인마하 왕
국의 무투 대회에서 맞붙던 소드 마스터들과 비교도 할 수 없
을 만큼 강해진 상태였다. 강찬도 지금의 대결이 무척이나 재
미있었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과 가까이 있으니 뜨거워서 미치겠구먼.
그 어떤 공격을 하더라도 착착 받아낼 정도였기 때문에 나는
마음 놓고 공격을 퍼붓기로 했다. 나는 즉시 거리를 두며 활을
쐈고, 붉은 섬광이 맹렬히 대기를 갈랐다.
백스텝을 밟은 뒤 움직임이 멈추는 지점에서 즉시 퀵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물론 화살 하나를 뽑아드는 것은 잊지 않
았다. 이번엔 공중으로 뛰어오른 것이 아니라 강찬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지금까지 너무 공중전(?)에만 치중을 한 것 같아 이번엔 육
탄전으로 싸워볼 생각이었다. 검을 고쳐 잡은 강찬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등을 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듯.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신나는 공방전이었다. 어떤 각도로 활
을 쏴도 척척 받아내는 강찬을 보며 신이 나 활을 쏘았고, 강
찬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공격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마치 야구를 하며 노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엄연히 시합이였
기에 이쯤에서 끝내야 했다. 싸이클론 애로우를 개발해내면서
써오지 않았던 기술을 여기서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힘껏 박찼다. 이형환위를 전개했기에 강찬은
내가 어디로 이동했는지조차 모를 것이 분명했다.
이동하면서 뽑아든 화살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몸이
중력의 힘을 받아 서서히 착지하는 와중에도 나는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파워 샷(Power shot)!"
상당량의 스태미나와 미량의 마나가 감소되는 것을 느끼며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미증유의 거력이 담긴 붉은 섬광이 강찬을 향해 폭사되었다.
문 블레이드의 검신이 머금은 화염이 더욱 뜨겁게 타오르기 시
작했고 강찬이 힘껏 문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갑작스럽게 파괴력이 증가한 것에 놀랐는지 강찬이 어리둥절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갑작스럽게 증가한 파괴력에 의
해 강찬의 자세가 흐트러진 뒤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이형환위
를 전개해 강찬의 뒤로 착지했고, 목에 활을 겨냥했다.
"강찬아, 내가 이긴 것 같다."
갑작스런 등장에 놀랐는지 강찬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아오, 깜짝이야!"
나는 겨누고 있던 화살을 거둬 화살통에 꽂아 넣었고, 강찬
의 패배 선언으로 경기는 끝났다.
뜨겁게 달궈지는 대회장에서 유저들의 함성을 들으며 나는
강찬과 함께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로 향하는 동안 나는 강
찬과 함께 경기 중에 느꼈던 점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웠다.
"휴우, 싸우는 걸 볼 땐 몰랐지만 직접 겪어보니 상대방의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아주 번쩍이야."
"그게 뭐야."
나는 강찬의 등판을 치며 크게 웃었다.
"아무튼 문 블레이드에서 뿜어지는 열기 때문에 숨도 쉬기
힘들었어. 근데 그런 검을 들고 넌 왜 아무렇지도 않냐?"
"나야 뭐 열기에서 제외된 대상이라 그렇지. 시전자에겐 아
무런 해도 끼치지 않아."
"그렇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대기실에 다다른 우리는 자리에
앉아 현민이 건네주는 물컵을 받아 물을 들이켰다.
"후아, 살 것 같다. 고마워, 현성아."
"현성이가 이긴 거지? 이 녀석이 내 편이다. 강찬아 아쉽지
만 넌 안 되겠다."
"야, 고마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강찬의 마지막 한마디로 우리는 배를 잡고 웃어재꼈다.
웃고 떠드는 중에 휴식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우상이었고 지금은 반드시 넘어서야
할 존재인 로빈훗과 상종하기조차 싫은 케로스터의 경기가 시
작되었다. 현민도 케로스터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그를 바라보
는 시선이 그리 좋지 못했다.
눈앞에 서 있는 케로스터를 보며 로빈훗은 활등을 강하게 움
켜쥐었다. 그토록 찾아다니던 셋째 사제를 무투 대회에서 만나
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 엄청난 악명을 남기며 궁탑의 제자들
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사제를 보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두 선수, 서로를 보며 인사해주십시오."
화가 났지만 로빈훗은 예의상 목례를 했다. 하지만 케로스터
는 비웃음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케로스터."
"오랜만이네요, 사형. 흐흐흐."
"네놈에겐 사형이란 말도 듣기 싫다."
"그렇담 이름을 불러드려야겠군요. 그렇지? 로빈훗."
그에 속에서 묵직한 것이 치미는 것을 느꼈지만 로빈훗은 꾹
눌러 참았다. 경기 중에 혼쭐을 내주면 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악명을 떨치고 다닌 거야?"
"악명을 떨치긴. 난 그저 내 힘을 과시하고 다녔을 뿐이야.
약한 녀석들은 강한자의 발에 밟힌다. 이것이 바로 내 정의야."
케로스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최대한 속을 추스
른 로빈훗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와 동
시에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진행자의 말에 로빈훗의 모습이 거의
없어지듯 케로스터의 뒤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쏘아진 붉은
섬광이 케로스터의 등판을 향해 폭사되었다.
그에 케로스터가 몸을 틀어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나려 했
으나 로빈훗의 손속은 매서웠다. 그는 상대가 몸을 빼려는 곳
을 향해 활을 쏘아 퇴로마저 차단했다.
조금 전 이죽거리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케로스터의
얼굴엔 당혹감만이 남아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잽싸게 몸을 틀어 겨우 공격을 피해낸
케로스터가 이를 악물고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3차 전직을 마친 궁수답게 활을 쏘는 속도는 로빈훗과 견주
어도 될 만큼 무척이나 빨랐다. 화염을 머금은 화살이 로빈훗
을 향해 폭사되었다. 그는 가볍게 공격을 회피함과 동시에 활
을 쏘았다.
신대륙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로빈훗의 실력은 상상을 초
월했다. 케로스터는 대경실색하여 공격을 피해내기에 급급했다.
궁탑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사형제 간의 싸움은 없어야만 했고
사제가 사형에게 대드는 일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알려진 바가 없지만 케로스터는 넷째 사제와 둘째 사제에게
큰 상처를 입힌 적이 있었다. 물론 로빈훗에게 알려져 크게 혼
쭐이 났는데 그 뒤 궁탑의 제자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길드 하
나를 박살낸 뒤 신대륙으로 건너와 악명을 떨친 것이었다.
그의 악행은 계속되었다. PK가 무성한 신대륙 아리시아의
파르판 제국에서 PK 행위로 악명을 떨친 유저를 손꼽으라면
항상 케로스터가 1위로 꼽혔다. 덕분에 궁탑의 제자들의 위명
은 바닥을 기게 되었다.
그 뒤 그는 로빈훗을 꺾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유저와 맞붙어
오던 도중 갑작스럽게 열린 무투 대회에 로빈훗이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참가한 것이었다. 그는 지금 실력이라면 로빈훗을
꺾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맞붙어 보니 그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호되게 당하던 그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고 반격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급히 케로스터와 거리를
둔 로빈훗이 허공에 화살을 쏘아 보냈다. 높이 치솟은 붉은 섬
광이 이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유저들과 대결하며 써먹지 않았던 기술이 선보여지자
케로스터는 죽을힘을 다해 공격을 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
킬의 숙련도가 무척 높았기에 쏟아져 내리는 화살 수는 자신의
애로우 레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방대했다.
수십 발의 붉은 섬광에 온몸이 난지당한 케로스터는 그대로
게임아웃이 되었고 경기는 로빈훗의 승리로 끝났다.
너무 일방적인 승부에 관객들은 입조차 뻥끗하지 않았다. 그
저 고요한 침묵만이 대회장 내부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로빈훗의 일방적인 승리로 경기가 끝나자 오늘의 경기가 종
료됐음을 알리는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와 동시에 관중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대기실에 있
던 선수들마저 모두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우리 일행이 제일
늦게 대회장에서 벗어나게 됐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어."
모두들 하루 종일 경기를 관전하거나 참여하느라 녹초가 되
어 있었다. 뒤풀이도 하지 못한 채 로그아웃 하게 생겼군. 레온
과 리아는 먼저 로그아웃을 했고 뒤이어 경훈과 강찬, 혁이 로
그아웃 했다.
"그동안 정말 많이 컸구나."
"에이, 현민이에 비하면 큰 것도 아니죠. 중국으로 갈 당시
저보다 작았던 녀석이 저렇게 훌쩍 커버렸으니까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빙긋 웃으며 제리코와 함께 루카를 쓰
다듬은 현민을 가리켰다.
"그래, 혼자 지내는 동안 외롭거나 하진 않았니?"
"괜찮아요. 정말 친한 친구들도 사귀었고, 옆에 이렇게 여자
친구도 있고요. 할아버지가 주신 생일 선물 덕분에 많은 걸 얻
게 됐어요."
"그렇구나."
할아버지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성이 녀석이 많이 소심해서 답답할 때가 있지?"
"아니에요. 정말 잘해주는 걸요."
할아버지의 장난스런 물음에 현지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쩝, 왠지 공감하는 듯한 저 얼굴은 뭘까?
"아참, 할아버지는 언제 중원채널로 돌아가세요?"
"네가 경기를 치르는 것을 모두 보고 갈 생각이다. 왜, 빨리
갔으면 좋겠냐?"
"아, 아뇨! 할아버지. 그런 섭섭한 말씀을."
"허허, 농담이었다.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 보거라."
"할아버지 먼저 로그아웃 하시는 거 보고 저도 끌거에요."
"녀석, 고집하고는."
빙긋 웃어 보인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현민에게 말했다.
"민아야, 이제 가자꾸나."
"네? 벌써요?"
"내일 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할아비와 함께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아, 사실 할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었어요!"
즉시 자리를 박차고 할아버지의 옆에 선 현민이 실실 웃기
시작했다. 현민에게 있어선 엄청난 협박인 셈이로군.
나는 할아버지와 현민이 로그아웃 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뒤 현지와 제리코, 루카와 함께 남게 되었다.
"루카, 이리와."
제리코를 등에 태운 루카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오랜만
에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티아, 이제 우리도 가보자."
"응, 오빠 먼저 가."
"아냐, 피곤하다며. 먼저 가. 먼저 갈 때까지 로그아웃 안 한다?"
"풋, 바보."
빙긋 웃어 보인 현지가 이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럼 먼저 갈게."
연기처럼 사라지는 현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도 로그아웃
을 했다.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게임기기의 문이 전부 열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헤드셋을 벗
어 머리맡 고리에 걸어두었다. 나는 게임베드에서 일어나 거실
로 나와 기지개를 켰다.
"이제 결승전만 치르면 신대륙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세릴리아 대륙을 대표하는 초인 호칭만 얻게 된다면 로시토
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나는 오기로라도
우승할 생각이었다.
정신적인 피로가 쌓여 배가 고픈 것도 잊은 채 나는 도로 침
대로 돌아왔다. 그리곤 옷을 갈아입는 것도 잊은 채 그대로 수
마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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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릴리아를 대표하는 초인
다음 날.
학교에 있는 동안에도 무투 대회에서 있었던 일로 교실은 떠
들썩했다. 특히나 강찬과 나의 대결을 주제로 시끄럽게 떠들었
고, 심지어는 대결 동영상까지 PDA에 옮겨온 친구도 있었다.
아무튼 어제부터 시끄러운 하루의 연속인 것 같다.
방과 후 세 녀석들(강찬, 경훈, 혁)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나는 즉시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했다. 오늘은 조금 늦어서 그
런지 대회장 앞이 무척이나 북적거렸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대회장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늘 준결승전과 결승전이 있는 날이네. 반드시 우승해라.
레드."
"응, 그래.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강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녀석, 자만하지 말고 차분하게 경기에 임해라."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일행 모두가 관중석으로 올라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선수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은 거의 텅텅 비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저의 수가 적었다.
3명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럴만도 했다. 대기실의 저쪽 끝에
창을 벽에 세워둔 창웅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로빈훗이 앉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로빈훗이 빙긋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준결승에서 막내 사제와 맞붙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운 걸?"
"그런가요?"
나는 로빈훗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멀티비전에서 보았던 로빈훗을 떠올렸다.
그때 당시 내 우상이 되었고 목표로 삼았던 자가 내 앞에 있
다. 그리고 준결승전의 상대로 만나게 되었다는 것에 왠지 모
를 성취감을 느꼈다.
"사제는 대회가 끝난다면 무얼 할 생각이지?"
"저는 우선 대회에서 우승을 해 세릴리아 월드를 대표하는
초인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그걸 이루게 된다면 다시 세릴리
아 대륙으로 돌아가 로시토를 만나 그의 바람을 이루었다는 것
을 보여줄 거에요."
"그게 다인가?"
로빈훗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형에게 그런 것도 못 말해주는 거야? 나 혼자만 알고 있
을 테니 알려주면 안 되겠어?"
나는 고개를 들어 로빈훗을 보았다. 빙긋 웃고 있는 모습에
는 장난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궁수가 되기 전에 했던 생활직들을 마저 할 생
각이에요."
정확히는 벨터와 함께 잡화점 일을 하면서 잡동사니를 만들
며 휴식을 즐기는 것이었지만 나는 전부 털어놓지 않았다.
"초인과 생활직이라... 뭔가 매치가 되지 않지만 괜찮네. 만
약 스승님의 바람을 이루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셈인가?"
마치 자신을 꺾지 못해 우승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인
지에 대해 묻는 것 같군.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시 죽어라 수련을 한 뒤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강자가 되
어 돌아올 생각입니다."
그에 로빈훗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자리에 앉았다.
"좋아, 사나이라면 그 정돈 돼야지. 다른 사제들은 너무 물러
터졌어. 둘째는 뭐든지 귀찮아하고 셋째는 사고나 치고 다니고
또 넷째는 수련을 게을리하고 있고....."
로빈훗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준결승 경기를 알
리는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유저 무투 대회의 준결승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
니다! 로빈훗 선수와 레드 파운 선수 입장해주십시오!"
진행자의 음성이 대회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이내 관중
들의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잘 부탁하네, 사제."
"네, 잘 부탁해요. 루카, 넌 여기서 기다려."
나는 로빈훗과 나란히 대기실에서 나와 경기장 위에 올라섰
다. 어제완 사뭇 다른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두 선수 서로에게 인사를 해주시고!"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나는 로빈훗에게 목례를 했다.
"경기~시작해! 주십시오!"
"와아아!"
유저들의 함성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내 몸 주위
에 둥둥 떠다니는 정령들을 쭉 훑어본 뒤 드래곤 레드 롱 보우
를 꽉 움켜쥐었다.
나는 먼저 로빈훗이 케로스터에게 가했던 공격을 선보일 생
각이었다. 자신의 기술을 그대로 카피해 쓴다면 과연 어떤 반
응을 보일까?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든 뒤 조용히
말했다.
"선제공격 들어가겠습니다."
"퀵스텝!"
단발마의 외침과 함께 현성의 모습은 퍽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에 로빈훗은 즉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살폈다.
지금까지 현성의 패턴이 그래왔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로빈훗의 뒤에서 모습을 나타낸 현성은 그대로 활을
쏘았다. 쏘아진 탄환처럼 맹렬히 회전하는, 미증유의 거력이 담
긴 싸이클론 애로우가 로빈훗의 등판을 향해 폭사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
그에 로빈훗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백스텝을 밟았다. 갑작
스런 공격에 화들짝 놀란 로빈훗은 다시금 퇴로를 차단하며 날
아드는 붉은 섬광을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이건....'
현성의 말도 안되는 상황 응용 능력에 로빈훗이 피식 웃으
며 몸을 바닥으로 굴린 뒤 벌떡 일어났다.
'먹혔다!'
자신의 공격이 로빈훗을 당황하게 한 것을 알아챈 현성은 다
시 한번 지면을 박찼고 그와 동시에 그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
라져버렸다.
감각을 잔뜩 끌어올린 채 주변을 살피던 로빈훗이 화살 하나
를 꺼내들었다. 현성의 위치를 파악하진 못했지만 만약을 위해
꺼내둔 것이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들려왔
다. 그에 로빈훗이 급히 백스텝을 밟아 몸을 뒤로 뺐다. 물론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후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이 없는지를 철
저하게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상대가 나
타나난다는 것은 예측하지 못했다. 로빈훗의 뒤로 모습을 나타낸
현성이 강하게 활ㅇ르 휘둘렀다.
보우어택!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활등이 로빈훗의 무릎을 향해 휘둘
러졌으나 그는 말도 안되는 반사 신경으로 몸을 뺐다. 하지만
현성의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퍼억!
아이언 레드 롱 보우에 비하면 무척이나 얄팍해 보이는 드래
곤 레드 롱 보우였지만 파괴력만큼은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견줄 수 없을 만큼 강했다. 복부에 일격을 허락한 로빈훗이 뒤
로 물러나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아 내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에 현성의 얼굴엔 미안한 표정이 떠올랐으나 이
내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로 꺾을 수 없는 강자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지금까지 그와 겨뤘던 초인들을 무릎
꿇게 한 최후의 비기, 레드 스톰(Red storm)이었다.
사방에서 사각을 노리고 들어오는 연속적인 공격이 아직 속
을 추스르지 못한 로빈훗에게 가해졌다. 미증유의 거력이 담긴
붉은 섬광을 겨우겨우 피해내던 도중 사각을 파고든 붉은 섬광
이 로빈훗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일부러 맞추지 않고 최대한 각도를 틀어 쏘았기 때문에 로빈
훗이 다칠 일은 없었다. 하지만 회전력이 가미된 붉은 섬광에
스친 것만으로도 엄청난 데미지가 전달되었다. 다리가 풀린 로
빈훗이 그대로 풀썩 쓰러졌고 현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가
와 쓰러진 그를 향해 활을 겨누었다.
"이런... 순식간에 끝나버렸군... 졌다."
로빈훗의 패배 선언과 함께 대회장 내부엔 우레와 같은 함성
이 터져 나왔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로빈훗을 겨냥하고 있던 화살을
거둔 뒤 화살통에 도로 꽂아 넣었다.
거의 연속적으로 공격을 가했기에 그만큼 스태마나와 마나가
감소되었는지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매직 아머 덕에 마나는 급속도로 차오르고 있는 반면 스태미
나는 매우 느린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나는 로빈훗을 부축해 대기실로 향했다. 그사이 진행자는 다
시금 대회를 진행되고 있었다.
"순식간에 경기가 끝나버렸습니다. 아아, 새로운 신인이 초
인의 자리를 거머쥘 것인가, 아니면 자리를 지켜낼 것인가! 잠
시 후 결승전이 계속됩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진행자는 잔뜩 흥분해 소리쳤고 관중들은
함성으로 대답했다. 대기실에 다다랐을 때 로빈훗이 말했다.
"사제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것 같아. 선제공격을 하게 나뒀다
는 것이 정말 큰 실수였어. 반드시 웃으해 스승님의 바람을 이
루길 바랄게."
"네, 사형. 결승전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응원해주세요."
대답과 동시에 로빈훗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무래도
로그아웃을 한 것 같았다. 휴식 시간 내내 대기실에 앉아 루카
를 쓰다듬으며 정령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시간은 금세
지나가버렸다.
드디어 결승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경
쾌한 나팔소리가 대회장을 가득 채웠다.
"휴우, 잠시 생각할 틈도 주지 않는구나. 다녀올게, 루카."
캉캉!
배를 깔고 엎드린 채 꼬리를 흔들며 답하는 루카에게서 시선
을 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기실의 반대편 끝에 앉아 운
기 조식을 하고 있던 창웅이란 유저가 조용히 눈을 뜬 뒤 자리에
서 일어나 벽에 세워둔 창대를 잡아들었다.
"드디어 유저 무투 대회의 결승전이 시작되겠군요. 관중 여
러분 모두 이번 경기가 기대되십니까?!"
"네!"
"와아아아!"
진행자의 물음에 관중들의 대답과 함성이 울려 퍼졌고 긴장
감을 북돋는 북소리가 들렸다.
"8번 레드 파운 선수와 17번 창웅 선수 입장해주십시오!"
경쾌한 나팔소리를 들으며 나는 창웅과 함께 경기장 위로 올
라섰다. 가까이서 보니 창웅은 장년층에 접어든 아저씨 유저
같았다.
경기장에 올라서자 경쾌한 나팔소리가 멎었고 장내는 술렁이
기 시작했다. 결승전이라 그런지 아니면 상대가 막강한 전대
초인 유저라서 그런지 다른 때보다 유난히 긴장을 많이 했다.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서로 목례를 한 뒤 창웅이 무기를 고
쳐 잡는 것을 보곤 나도 전투자세를 취했다. 물론 화살 하나를
꺼내드는 것은 잊지 않았다.
"결승전에 올라선 이상 초인임이 틀림없었습니다! 두 초인 중
누가 승리할 것인가! 결승전, 시작해주십시오!"
진행자의 외침과 동시에 장내엔 정적이 흘렀다. 그와 동시에
묘한 긴장감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이내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상대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 뒤로는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그는 창대를 고쳐 잡
고 우두커니 서 있을 뿐임에도 전혀 빈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NPC초인인 페리안도 저 정도의 기세를 뽐내진 못했다. 창웅은
둘째 사형과 대결할 때와는 달리 창날에 오러를 발현시켰다.
하긴, 둘째 사형을 상대할 때와 같이 오러를 덮어씌우지 않
은 창날을 들이댔다간 창날이 그대로 박살 날 것이 분명했다.
상대가 상대니만큼 처음부터 강수를 두지 않으면 안되겠군.
'백호, 처음부터 싸이클론 애로우를 부탁해.'
-네, 마스터.
백호에게 신신당부를 해놓은 뒤 나는 창웅의 반응을 살펴보
기로 마음먹었다. 꺼내든 화살을 잽싸게 화리위에 매겨 창웅에
게 쏘아 보냈다.
피융!
미증유의 거력이 담긴 회전력을 머금은 붉은 섬광이 쏘아낸
탄환처럼 회전하며 창웅을 향해 맹렬히 폭사되었다. 화살을 궤
도를 바꿔 흘려보낼 생각이었는지 창웅이 창대를 슬쩍 들어 올
렸다가 급히 창날을 거두었다. 상대가 잠시 당황한 틈을 타 나
는 퀵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육탄전에 재미가 붙었기에
즉시 창웅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붉은 섬광을 쏘아 보냈다.
쌔애액, 촤앙!
붉은 섬광을 쳐낸 창웅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무래도 손아귀
가 얼얼한 모양이군. 나는 이 기세를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붉은 섬광을 쏘아 보냈다.
자신을 향해 폭사되는 붉은 섬광을 쳐내던 창웅이 급히 몸을
돌려 피해낸 뒤 이쪽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검보다 월등히 사
거리가 길었기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즉시 백스텝을
밟아 거리를 두었으나 이내 3미터 가까이 자라난 오러 블레이
드가 내 다리를 향해 쇄도해오고 있었다.
줄넘기를 하듯 재빨리 뛰어올라 오러 블레이드를 피해낸 뒤
지면에 착지하려던 찰나였다. 궤도를 바꿔 가슴팍을 향해 날아
드는 오러 블레이드를 보며 대경실색한 나는 허공답보를 이용
해 허공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상대는 틈을 주지 않았다. 즉시 각도를 틀어 퇴로를
차단했고, 그에 나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한 채 왼쪽 어깨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크윽!"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매직 아머
를 종잇장처럼 가르고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어깨에서 타는 듯한 고통과 함께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올라
오더니 이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상대의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허벅지를 베어 들어왔고 나는 급히 몸을 돌려 회피하긴 했지만
완벽하게 피해낼 수는 없었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다리에서
엄청난 통증과 함께 붉은 선혈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오러 블레이드를 보고는
안간힘을 다해 지면을 힘껏 박차고 뛰어올랐다. 이형환위를
전개했기에 창웅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상처가 심하다. 치료를 해야겠다.
청룡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냐, 안돼. 그럴 시간이 없어. 상대는 이곳의 그랜드 마스
터들과는 다르게 빠른 몸놀림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잠시의
틈을 줘선 안 돼."
청룡에게 신신당부를 한 뒤 나는 천근추를 이용해 내리꽂히
듯 지면에 착지했다. 지척에서 천근추를 풀었기 때문에 가볍게
착지할 수 있었다.
기척을 느꼈는지 창웅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
는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을 꾹 참으며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분명 빈틈이 있을거야. 빈틈을 노리자.'
화살을 꺼내듦과 동시에 창웅이 또다시 창을 고쳐 잡고 이쪽
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에 나는 이형환위를 전개하려 했으
나 다리의 통증을 느끼곤 그대로 엎어져버렸다. 오른발로 지면
을 박차던 것이 습관이 되어 다친 다리로 지면을 박차려니 크
나큰 통증이 엄습해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휘둘러지는 창웅의 창날을 피할 수 있었다. 나는 퍼
뜩 정신을 차리고 즉시 몸을 일으켜 왼발로 지면을 박차 백스
텝을 밟았다.
거리를 두지 않을 생각인지 창웅이 즉시 창을 휘둘렀고 시퍼
런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창날이 이쪽을 향해 쇄도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지면을 박차 이형환위를 전개했다.
즉시 창웅의 뒤로 모습을 나타낸 뒤 활을 쏘았고, 싸이클론
애로우는 그의 등판을 향해 폭사되었다. 바로 위치를 바꿨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등판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는 동안 나는
다시금 붉은 섬광을 쐈다. 창웅이 현란하게 창을 휘두르며 날
아드는 붉은 섬광을 쳐내는 동안 나는 쉬지않고 활을 놀렸다.
창웅이 붉은 섬광을 쳐내는 동안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
나가는 것이 있었다. 바로 강찬과의 대결에서 써먹었던 오러
에로우를 발현시킨 파워 샷 공격이었다.
현재 상대는 쉼 없이 날아드는 붉은 섬광을 쳐내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때문에 날아드는 화살에 어느 정도의 힘이 깃들
었는지 파악하는 것을 잊고 있을 터.
나는 즉시 창웅과 거리를 둔 뒤 파워 샷을 쏠 자세를 취했다.
아직까지 쏘아낸 화살이 많았기에 창웅은 화살을 쳐내느라 정
신이 없었다. 마지막 한 대의 화살을 쳐내는 순간을 이용해 나
는 싸이클론 애로우와 파워 샷을 조합해 쏘았다.
"싸이클론 애로우!"
마치 포탄을 쏘았을 때와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고 미증유의
거력이 담긴 붉은 섬광이 맹렬히 회전하며 대기를 찢어발겼다.
창웅은 영문도 모른 채 창을 휘둘렀고 오러 블레이드를 진득
하게 머금은 그의 창날과 쏘아 보낸 붉은 섬광이 충돌하며 커
다란 폭음이 울려 퍼졌다.
순간 눈을 뜨지 못할 섬광이 순간적으로 경기장 내부를 감쌌
다. 나는 즉시 눈을 가려 시각을 보호한 뒤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렸다.
싸이클론 애로우와 충돌한 창웅의 창날은 처참하게 박살 나
있었고 순간적인 섬광 때문에 잠시 시력을 잃은 그가 눈을 감
고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때다!'
나는 즉시 퀵스텝을 걸고 창웅을 향해 내달렸다. 이미 마나
가 바닥났기에 이형환위를 전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힘껏 내달리며 활을 쏘았고 오러를 머금지 않은 굵직한 화살이
창날이 없는 창대와 충돌했다.
창대를 놓친 창웅이 그래도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동안 나는
그의 목덜미에 활을 겨누었다.
"허억, 허억."
시력을 되찾았는지 무기를 잃은 환웅이 눈을 껌뻑이며 날 내
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잠시 동안 서 있던
창웅의 패배 선언과 동시에 장내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유저 무투 대회 결승전에서 레드 파운 선수가 승리했습니다!"
관중석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을 들으며 나는 매직 아머가 회
수되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마나가 전부 고갈되어 매직 아머를
유지하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령들도 이미 오래전에 전부 강제 역소환 된 것 같다.
그와 동시에 중심을 잃고 풀썩 쓰러지려 했으나 창웅이 부축
을 해주었다.
"괜찮습니까?"
"아, 네. 고, 고맙습니다."
나는 창웅의 부축을 받으며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로 향하
던 도중 나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언제 내려왔는지 우
리 반 녀석들이 대기실 앞에 서 있었고, 그 바ㅗ 옆엔 일행들
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일행들과 반 친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나는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 다다르자 기다리고 있던 반 친구들이 날 들어 올렸고
난생처음 헹가래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공중에 붕 떠올랐다 다시 받쳐지는 동안 온몸에 통증이 엄습
해왔지만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목표를 이루었다는 성취감
에 뿌듯함을 느끼며 커졌다 작아졌다 반복하는 하늘에 빙긋 웃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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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끝
상처 입은 몸을 치료한 뒤 시상식이 이어졌다.
우승을 한 나는 '세릴리아 월드를 대표하는 초인'이라는 호칭
과 함께 상금 일천만 골드를 받았다. 이상하게도 관중들이 모
두 떠난 뒤 순위권에 드는 선수들만 남아 시상식을 마쳤다.
순위권 안에 든 유저들은 '사천왕'이라는 호칭과 함께 각자
순위에 맞게 상금을 받는 것으로 시상식은 끝났다.
시상식이 끝나기를 기다린 일행들 중 할아버지와 현민은 내
게 축하해준 뒤 공간이동 문서를 이용해 중원채널로 떠났다.
대회장에는 우리 일행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이야, 곰 세마리와 고블린 한마리에게 죽을 뻔했던 녀석
이 세릴리아 월드를 대표하는 초인이 되다니, 소감이 어때?"
혁의 장난스런 물음에 나는 빙긋 웃었다.
"글쎄, 도무지 실감이 안나."
"이제 신대륙에서 할 것도 없다. 평화로운 세릴리아 대륙이
그리워, 너희들은 어때?"
"나도 그래."
"나도."
경훈의 물음에 강찬과 혁이 대답했다. 물론 목적을 이루었으
니 나도 신대륙 아리시아에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나는 내친김에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세릴리아 월드를 대표하는 초인
[Lv.] 82
생명력(HP) 1102
마나(MP) 600
스태미나(SP) 1400 (배고픔 지수 0%/ 갈증0%)
힘 137
체력 65
민첩 219 (+30)
손재주 568
지력 15
지혜 26
행운 15 (+10)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310~440
방어력 10 (+12)
마법방어력 2 (+10)
남은 스텟 포인트 : 0
바람(백호)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제리코(가디언) Lv. 20 호감도 100%
[상세정보]
낯간지러운 호칭과 함께 지금까지 게임을 플레이하며 올려두
었던 능력치가 공개되었다. 그건 그렇고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적
당한 곳에 제리코를 놔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 녀석은 우리
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때문에 녀석과 세릴리아 대륙
으로 함께 가기로 마음먹었다.
"저도 신대륙에선 더 이상 볼일이 없는 것 같아요. 내친김에
세릴리아 대륙으로 떠날까요?"
레온의 물음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형, 세릴리아 대륙이 어디야?"
"응, 우리가 원래 활동하던 대륙이야."
"와아... 그럼 나도 거기에 가는 거야?"
"물론, 너도 우리 일행이니까."
그에 제리코가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나는 운영진에게 지급받은 특수 워프스크롤을 꺼내들었다.
물론 시상식 도중 나의 부탁에 운영자가 급조하여 만든 수도
세인트 모닝을 목표로 한 스크롤이었다.
"자, 그럼 갑니다!"
일행 모두가 동의했고 나는 워프스크롤을 꽉 쥐었다. 이것을
찢기 전에 주변을 빙 둘러본 나는 곧 망설임 없이 찢어버렸다.
순식간에 주변 환경이 변하며 무척이나 정겨운 수도 세인트
모닝의 분수대 광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엇, 궁탑의 제자와 마성의 현자다!"
한 유저의 외침에 유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정겨운 수도 세인트 모닝을 둘러보니 세릴리아 월드를 처음 접
하던 일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나는 제일 먼저 일행들과 궁수의 탑으로 향했다. 참, 궁탑의
제자가 한시라도 활을 놔선 안되지. 나는 아이템 창에서 아이
언 레드 롱 보우를 꺼내 등에 맨 뒤 궁수의 탑으로 향했다.
훈련소를 지나 궁수의 탑 입구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경비가
입을 열려던 찰나 나는 손가락을 뻗어 성체가 된 루카를 가리
켰고 그에 경비들이 즉시 탑의 문을 열었다.
"와, 정말 오랜만에 와본다. 정겨운 궁수의 탑."
나머지 일행도 나와 동행으로 궁수의 탑으로 들어올 수 있었
고 나는 로시토의 방을 향해 내달렸다.
항금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문 앞에 서자 왠지 모르게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처음 궁수로 전직하게 됐을 때의 기분
이 이랬을까?
나는 잔뜩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새하얀 백발을 가지런히 넘긴, 에메랄
드를 연상시키는 초록색 눈동자에 둥근 외알 안경을 낀 로시토
를 볼 수 있었다.
"레, 레드?!"
캉캉!
오랜만에 만나는 로시토가 반가웠는지 루카가 책상을 훌쩍
뛰어넘어 로시토를 덮쳤다.
"어이쿠! 루카가 이만큼 성장했다니."
루카를 진정시킨 로시토가 몸을 일으켰다.
"레드, 벌써 신대륙 전역을 돌아보고 온 건가?"
"아니오, 하지만 로시토의 바람을 이루고 왔어요. 제 정보를
볼 수 있죠? 한번 보세요."
나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쫙 펴며 대답했다. 그에 로시토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 세상을 대표하는 초인....."
"로시토의 바람대로 레인지 마스터의 존재를 모든 이에게 각
인시키고 로시토의 무학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입증하고 왔어요.
물론 중간에 변질된 면이 있긴 했지만요."
감동을 먹었는지 로시토가 달려와 나를 얼싸안았다.
"자네 같은 제자를 두어 정말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야."
로시토는 연신 내 등을 두드렸다. 쩝, 일행들이 전부 지켜보
고 있는데 낯간지럽구먼. 내가 궁수의 탑에 온 이유는 로시토
의 바람을 이루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다른 이
유도 있었다.
"저기 로시토, 일행이 지켜보고 있는데요....."
그에 날 얼싸안았던 로시토가 뻘쭘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날
밀쳤다. 거 노인네 힘 한번 세군요. 나는 제리코에게 손짓해 이
쪽으로 오도록 지시했고, 제리코가 빙긋 웃으며 달려왔다.
"로시토, 여행을 하는 동안 만난 녀석인데요. 궁술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서요. 앞으로 제가 바빠질 것 같아 이 녀석을 좀
맡기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나의 말에 로시토가 제리코에게 시선을 두었다. 제리코를 빤
히 바라보던 로시토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제리코의
눈동자와 팔다리를 살펴보던 로시토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내 바람을 이루어준 제자의 부탁을 어찌 거절하겠
는가?"
나는 쭈그리고 앉아 제리코와 눈높이를 맞췄다.
"제리코, 앞으론 여기서 지내도록 해."
그에 제리코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나완 죽어도 떨어지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에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널 두고 간다는 게 아냐. 하루에 한 번씩 만나러 올 거고,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할 거야. 어때? 괜찮겠어?"
"응! 그런 거면 괜찮아!"
"그래."
나는 제리코의 대답을 듣곤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리곤 몸을 일으킨 뒤 시선을 로시토에게 던졌다.
"로시토,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아직 둘러볼 곳이 많거든요."
"그러게."
검은 아기 늑대를 안고 로시토와 함께 서서 손을 흔드는 제
리코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일행들과 궁수의 탑을 내려갔다.
['가디언 제리코'를 자유롭게 놓아주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가디언 제리코'의 상태 목록이 상태 창에서 제거되었습니
다.]
나는 시야를 가리는 메시지 창을 제거한 뒤 일행들과 훈련소
에서 나와 광장에 다다랐다. 모두들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일을 끝냈으니 모두 흩어지도록 해요."
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현지를 제외한 모두가 순서대
로 로그아웃 했다.
"티아, 괜찮겠어? 이제 대장간이랑 잡화점에 들를 생각인데."
"응, 난 괜찮아."
현지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 이리와!"
캉캉!
나는 다 자란 루카와 함께 대장간으로 향했다. 대장간에 다
다르자 망치를 연신 두드리던 NPC 아세른의 두 눈이 화등잔
만 하게 커졌다.
"아니, 이게 누군가. 레드 아닌가?! 그리고 저게 루카인가?!"
"네, 오랜만이에요. 아세른."
망치를 팽개친 아세른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세른의 우람한
덩치는 여전했다.
아세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나와 현지는 잡하점으
로 향했다. 무척이나 정겨운 잡화점을 살펴본 뒤 나는 조용히
입구로 다가갔다.
여느 때와 같이 잡화 물품을 정리하던 벨터가 말했다.
"어서 오세요. 필요한 물건이 있으십니까?"
쩝, 상대방의 눈을 보고 말해야 정상이지만 뭐가 그리 바쁜
지 벨터는 연신 잡화 물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디 오랜만에
장난 한번 쳐보실까?
"아뇨, 필요한 물건 없어요."
장난스런 대답에 현지가 옆에서 쿡쿡 웃기 시작했고 잡화 물
품을 정리하던 벨터가 몸을 홱 돌렸다.
"네? 아니, 이게 누구야? 레드?!"
"오랜만이에요, 벨터. 보고 싶었어요."
그에 벨터가 후다닥 달려와 내 손을 맞잡았다.
"정말 오랜만이다. 벌써 신대륙 전역을 돌아보고 온 거니?"
"네."
사실은 전역을 돈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히엑? 저, 저 커다란 늑대가 설마 루카는 아니겠지?"
"루카 맞아요. 이라와, 루카!"
나의 부름에 다가온 루카가 바닥에 앉아 꼬리를 흔들었다.
"이럴 게 아니라 차라도 내오마."
"네? 아니에요. 장사하셔야죠."
"오늘 장사는 끝났어. 티아 씨, 저쪽 의자에 앉아 계세요. 금
방 차를 내올테니."
벨터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던지곤 잡화점 안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벨터를 보며 나
는 현지와 함께 자리에 앉았고 벨터가 금세 차를 내왔다.
"그래, 내가 이것저것 묻고 싶은게 많구나. 먼저 목적은 달
성했니?"
"당연히 달성을 했으니까 돌아왔죠."
나는 벨터가 차와 함게 내온 비스킷을 집어먹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앞으로 뭘 할 생각이야?"
"벨터가 허락하신다면 함께 잡화점에서 일할 생각이에요."
그에 벨터가 박수를 치며 흔쾌히 승낙했다.
"물론이지, 정말 잘 생각했다."
벨터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현지와 함께 그동안 신대륙에서
겪었던 일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고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
고 이야기를 했다.
**********************************************************
**********************************************************
에필로그
잡화점 창문을 통해 따사로운 햇살이 잡화 물품을 어루만졌
다.
"후아암, 잡화공구만 벌써 10개째군. 흐아! 뻐근하다,"
함께 일을 하자던 벨터는 가끔 내게 일을 전부 맡기곤 대장
간에 놀러가곤 했다.
오늘도 잡화점에 혼자 남아 잡화 물품을 손보며 주문이 들어
온 공구를 제작했다.
3개월 전, 여행을 끝마치고 세인트 모닝으로 돌아와 잡화 물
품을 만들 땐 재미있었으나 이것이 이랏ㅇ이 되니 이젠 사냥이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었다.
언제나 잡화점을 찾는 유저들이 많았고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또 나를 초인의 자리로 이끌
어준 매직 벨트는 직접 제작한 유리관 속에 넣어 잡화점에 전
시를 해놓았고, 아이언 레드 롱 보우는 대장간에 넘겼기 때문
이었다.
때문에 아세른의 대장간을 찾는 유저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경을 끼고 뜨개질을 하고 있는 현지
에게 시선을 던졌다.
"으으, 좀만 쉬다가 할까?"
"응? 아니, 오빠 먼저 쉬어. 난 이것만 하고 쉴게."
"그래."
나는 잡화점에서 나와 배를 깔고 엎드려 이곳을 지키고 있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곳에 있는 루카를 보기 위해 많은 유저들이
잡화점 앞으로 모여들었을 텐데 왠일인지 오늘은 한산하기만
했다.
밖에도 별 볼일이 없는 것 같아서 내가 잡화점 안으로 들어
서려던 찰나 왜소한 체구의 유저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
다.
아직 초보티를 벗어내지 못한 아니, 한눈에 보아도 딱 초보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유저가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우뚝 멈춰
섰다.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웃어보였다.
"어서오세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저, 저기... 종이 백 장만 주실 수 있나요?"
"종이 백 장이요?"
유저의 물음에 나는 잡화상점 창을 열었다.
NPC들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유저들이 사용할 수 있는 창
으로써 잡화점에 있는 물품을 손쉽게 꺼내 쓸 수 있는 창이었
다.
나는 조이 백 장을 꺼내 유저에게 내밀었다.
"여기 종이 백 장이요. 총 100브론즈입니다."
"100브론즈요?"
유저는 조심스럽게 아이템 창을 열고는 내게 100브론즈를 건
네주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 아이템 창에 넣었다.
종이 100장이라...
유저를 보자 갑자기 옛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
다. 나도 처음엔 이곳에서 종이를 접었는데.
자리에 주저앉아 종이 거북이를 접는 유저를 보며 나는 잡화
상점 창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낸 뒤 잡화점 앞에 설치된 탁자로
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종이 거북이를 접었다.
완성된 종이 거북이를 보며 옛 추억에 잠겨 있을 때 저 멀리
서 유저들이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하며 직접 접은
종이 거북이에게 시선을 두었다.
따스한 햇살이 예쁘게 접힌 종이 거북이를 포근하게 감싸 안
았다.
<레인지 마스터 완결>
Lv.3 / 이등병 . 절대긍정 (magryan100)
( 17 / 400 ) 4%
포 인 트 : 117 P
가 입 일 : 2011-12-10 오후 7:15:53
최종접속일 : 2011-12-15 오후 3: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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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진급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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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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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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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진급 축하드립니다.
하드때문일지도... 저도 확인해보고 싶어지는...
할짓이 그렇게 없니?
또 나타났네
깔끔한 게시판을 보니 기분이 좋습니다.
케이블 이상인줄 알고 케이블 교체를 했는데 ...
켜 본지 오래되었는데 테스트 해봐야겠네요. ...
orasun님이 (2024/10/09 23:34)에 삭제 하였...
오늘 그 타이틀 넣고 혹시나 했는데 구동이 ...
맨날 복붙 하면서 알아보기는
다시 왔네요. 같은 사람이라면 노력은 대단합...
뭘 하면 되는데?
ㅅㅂㄴㅇ.................
좀 ㄲㅈㄹ
고맙습니다. ^^
완전 잘못 알고 계시네요
한때 게임 파일 다 가지고 있었는데 무슨 바...
ㅅㅂㄴㅇ 그만해라.
하고 싶으면 혼자 하시는걸 추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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