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고딩시절 공부를 거의하지 않고 독서실에서 잠과 술로 쩔어 살던 넘인지라
경기도에 있는 모 대학 분교에 운좋게 합격하였습니다.
(당시 수능시험이 처음 열리고 시험도 2번을 봤었죠.
저는 처음으로 5지선다형 문제가 출제되는 통에 찍기실력을 키워 수리영역과 외국어는 70%가량을 찍었으며,
상당히 높은 적중률로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요건 자랑임.)
암튼 저는 고딩시절의 암울함에서 벗어나 밝은 세상의 빛을 담고자 심신수련을 위해 홀로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목적지는 강릉경포대와 오대산이었습니다.
1993년 12월 31일 강릉행기차에 몸을 싣고 1994년 첫해를 보기위해 새벽기차을 타고 산뜻한 마음으로 강릉에 도착한 나는
경포해수욕장에서 일출을 보며, 열심히 살아보자는 각오를 다졌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며,
또한 멋진 영화의 주인공이 된듯이 혼자서 똥폼은 다잡으며, 고독을 자근자근 씹었습니다.
평소에 체력이 좋은 저는 홀로 산에 오를 채비를 하고는 오대산으로 직행하였습니다.
그해에는 눈이 많이 오지 않아서 혼자 산을 오르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지도상 다소 거리가 짧아 보이는 진고개쪽 등산로를 택하였습니다.
버스로 바다구경도 하고 싶었구요(진고개는 강릉에서 속초방향으로 조금더 올라가야 합니다.)
강릉에서 진고개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더군요. 진고개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경이 되었습니다.
산을 오르기에는 다소 늦은시간이었으나 빠른속도로 걸으면 저녁 해떨어지기 전까지는
상원사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휴개소에서 간단한 간식거리와 워크맨건전지(당시 카세트테입을 틀수 있는 워크맨)를 사고 산을 올랐습니다.
뭐 1월1일이라 그런지 사람은 없더군요.
한 1시간 가량 올라가니 동대산이 나오더군요.
동대산에 오르니 산행오신분들이 몇분 보이시더군요. 거기서 어떤 아주머니가 주시는 커피를 얻어마시고는 길을 나섰습니다.
거기서 원래는 동피골 야영장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몸도 가뿐하고 이상하게 의욕이 넘치게 되어 두로봉까지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차피 거기도 사람이 많겠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한 6시쯤이면 비로봉에 도착할 수 있을것 같더군요.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저의 실수였습니다.
이상하게도 빠른걸음으로 걷는데도 앞에 사람이 한명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등산로인데도 말이죠~
분명 등산로는 맞았습니다. 설날이라 그러려니 하고 더욱 걸음을 재촉했죠.
중간에 차돌바위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까지 가니 벌써 해는 뉘엇뉘엇 지고 있었고,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시간은 5시도 안되었는데 말이죠.
솔직히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엄습하기 시작했습니다.
등산로가 있으니 길을 잃지는 않겠지만 혼자서 야간산행을 한다는 것이 무서웠던 거죠.
그래서 차돌바위에서도 쉬지않고 더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타기시작했습니다.
두로봉까지만 가면 쉴곳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요.
근데 저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오대산을 너무 우숩게 본거죠. 산길은 험하지 않았는데 점점 어두워지더니 6시가 되자 깜깜해진 것입니다.
저는 당황하기 시작했고 길이 분명히 있는데도 자꾸 지도를 보면서 현재위치를 점검하는 횟수가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도착했어야하는 두루봉은 보이지도 않고, 나무에 가려져 정상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시계는 7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저는 길을 잃은 것이 아닌지 이 밤중에 텐트도 없이 야영을 해야 하는지, 귀신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별의별 걱정을 하면서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점점 힘이들고 정신적으로는 거의 패닉에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더구나 제대로 갖춰진 장비도 없이
얇은 건전지 두개만 들어가는 후레쉬에 몸을 맏긴채로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그렇게 한 3시간정도 걸었을까요?
시계는 어느덧 10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길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정말 눈물이 나려고 하더군요.
왜 그때 두로봉까지 갈 생각을 했을까? 도대체 왜 그때 객기를 부렸나?
저는 벌써 5시간이 넘도록 쉬지도 않고 걸었습니다. 그동안 물도 간식도 먹지 않은채로 말이죠.
한순간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다리는 후둘거려서 쉬지않고 떨고 있었고, 나도모르게 이를꽉물어 그런지 턱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방은 빛조차 없이 깜깜했으나 하늘엔 별이 찬란히 떠있더군요.
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않아 혼자서 흐느꼈습니다.
근데 제가 우는것이 더 무섭더군요. 미칠것 같았습니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주저않아 한 10분을 넘게 쉰것같았습니다.
생각을 가다듬고 일단은 두루봉까지는 아니 아무 봉우리나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안전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다시 힘을 내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한참을 걷고 있던 이길이 길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나뭇잎이 수북하고, 잡목이 발에 자주 걸리는 것이었죠. 언제부턴지 길이 아닌곳을 걷고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오르막을 기어오르다 시피하면서 걷는 저를 발견하고는 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완전히 산에 갇히게 된거죠.
그것도 12시가 넘은 시간에 말입니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숨조차 쉬지 못하겠더군요.
이렇게 밤에 길을 헤매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이곳에서 잠을 청하고 해가 뜨면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 순간 피곤이 몰려오더군요.
다행히 날씨는 많이 춥지 않으니 죽지는 않을것 같구 해서
주변에 나뭇잎이 많이 쌓여있는 곳을 찾아 나뭇잎을 파헤치고 침낭을 깔았습니다.
침낭속에 들어가 있으니 그 고요함이 너무 무섭더군요.
그래서 가지고 있던 워크맨에 조그만 스피커를 꼽고 음악을 크게 틀었습니다.(DJ.DOC의 노래였슴다.)
조금 마음이 풀리면서 어느새 잠이 든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잤을까?
잠결에 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감은눈 사이로 빛이 느껴졌습니다.
"이봐요"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부시시하게 일어났습니다. 너무 깊이 잠들어있었는지 당시에는 몽롱하게 느껴지더군요.
"아니 젊은사람이 죽으려구 환장을 했나~ 여기서 자면 어떻해요? 일행은 있어요?"
저는 순간 벌떡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여기가 어디죠?"
눈을 뜨니 아직 깜깜한 밤이었고 그사람이 후레쉬를 제얼굴에서 치우자 그사람얼굴이 보였습니다.
나이는 한 30대 중반정도 되어 보이는 탄탄한 체격의 건장한 남자였습니다.
"이봐요. 보아하니 학생같은데 이런 길도 없는데서 잠을 자면 어떻해요. 얼어죽을려고 작정한 거요?"
"아니요. 제가 두로봉에 가려다가 길을 잃어서 헤메다보니 그만... 저도 무서워 죽는줄 알았어요."
"에구~~ 암튼 카세트 소리가 당신 살린줄 아쇼. 음악소리가 들려서 야간산행하다가 길도 없는 여기까지 왔으니깐.
난 처녀귀신이라두 있는 줄알고 왔더만 무슨 시꺼먼 남학생이네 그려 허허"
"여기 날씨가 추운데 잘도 잤구먼.
여긴 갑자기 눈이라도 오는 날엔 당신은 바로 행불자 처리되고 여기가 무덤이 될 자리였수.
서울사람인 모양인데 얼른 짐챙기고 일어나시요. 나랑 같이 갑시다."
"예. 감사합니다."
저는 주섬주섬 침낭을 챙기고 그사람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그때 시간이 새벽 3시반정도 였습니다.
보니 정말로 하늘에서는 희끗희끗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고마움에 저는 그 아저씨께
"감사합니다. 정말 아저씨 아니면 큰일 날뻔 했겠어요."
"..."
아저씨는 앞서가면서 아무말이 없이 묵묵히 앞장서 걸어가시더군요.
저는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저역시 말없이 그 아저씨를 따라 나섰죠.
한 20-30분정도 걸었나?
갑자기 머리가 현기증이 나면서 어지러웠습니다.
"아저씨 잠시만요. 머리가 쫌 아프네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눈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그 아저씨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분명 앞에서 4-5발자국 앞에 가던 그 아저씨가 말입니다.
순간 저는 온몸의 세포들이 미쳐 날뛰는 것을 간신히 추스렸습니다.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그 아저씨는 뭐야? 귀신이었나?'
너무 무서웠는지 아니면 머리가 어지러워서인지 갑자기 구토와 함께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기절할것 같았습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주위를 살폈습니다.
스산한 안개와 진눈개비가 날리고, 주위는 안개로 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생각같아서는 마구 달려서 빨리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있다가 주위를 살펴보니 어렴풋이 표지판이 보이더군요.
응복산 XXkm, 진고개XXkm
그렇습니다!!
등산로였던 것입니다.
저는 재빨리 지도를 꺼냈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있던 곳은 두루봉을 넘어 구룡령 근처까지 온것입니다. (알아보시면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저는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과 그 정체모를 아저씨에 대한 무서움에 그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리 멀어보이지 않는 차소리가 들리더군요. 보이지는 않았지만 반가웠습니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
하지만 다시 길을 잃을 것 같아서 발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저는 그곳에서 그냥 날이 새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이젠 잠도 오지 않더군요.
그리고 그 아저씨가 혹시나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찬찬히 생각해보니 음악소리에 저를 찾아왔다고 했는데
과연 제 워크맨의 스피커로 그렇게 멀리까지 소리가 들릴지 궁금했습니다.
저는 워크맨의 소리를 최대로 하고 얼마나 멀리까지 들리는지 실험해 보려고 워크맨을 꺼내는 순간!!!
정말 기절하는줄 알았습니다.
워크맨에 들어있던 테잎이 무한 반복 설정이 안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즉, 워크맨 테잎은 한면이 다 돌아가면 꺼지도록 되어 있어서
내가 잘때 켜둔 워크맨이 그시간까지 음악이 나올 수는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내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깨어났다쳐도 음악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또 카세트는 저를 기준으로 아저씨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에 아저씨가 고의로 끄지 않았을 것 같고,
실제로 내가 깨어났을때는 음악소리가 안들렸었거든요.
그럼 그 아저씨가 말한 음악소리가 들려서 왔다는 말은 어찌된걸까?
그 아저씨는 음악소리를 듣고 와서 2시간동안 자고 있는 내 얼굴을 쳐다보다 깨운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음악소리를 내고 있었을까?
(아저씨가 처녀귀신이라도 있는줄 알았다는 말... - 분명 테이프에는 여자목소리가 없다.)
아니면 그 아저씨가 귀신이었을까?
저는 추위와 무서움은 둘째 치고 그 아저씨의 정체가 더 궁금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점점 날이 밝아지자 안개는 있지만 눈은 그쳤습니다.
저는 제가 자고 있던 곳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찾아가보려고 왔던길을 다시 내려갔습니다.
분명 차길이 없었기 때문에 차길이 있는 능선 반대편으로 걸어내려갔고,
한 10분 정도 내려가자 대략 내가 있었던 위치 근처인 것 같았습니다.
주변은 깍아지르는 절벽같은 골짜기가 많더군요.
더이상은 힘들고 지쳐서 다시 산을 내려왔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가 왔던 곳은 산세가 험하여 난이도가 높은 코스이며, 각종 실종사고가 많은 지역이라고 합니다.
또한 절벽이 많아서 낙상위험도 높은 곳이었구요.
밤에는 갑자기 찾아오는 폭설이나 한파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은 곳이라고 합니다.
정말 죽다 살아난 거죠.
그 아저씨에 관한 건 미스테리입니다.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 카세트 테이프 건도 그렇구요.
분명 그 아저씨는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도움을 준 건 맞는 것 같더군요. 몰랐는데 그날 밤에 엄청 추웠나봐요. 내려오는 길은 눈온곳이 얼어있더군요.
그리고 그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안개속을 걷다가 추락사 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