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가 즐겨 부르는 서도민요(西道民謠) 중에 수심가(愁心歌)는 제목부터가 흥미롭다. 수심(愁心) 즉 '근심'을 노래로읊은 민족은 아마도 우리만이 아닐까 싶다.
우리 겨레는 세계 어느 민족도 흉내 낼 수 없는 언어의 독특한 정서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말에 통쾌(痛快)라는 어휘가 바로 그런 유의 하나인데, 통(痛)과 쾌(快)의 상반된 의미의 글자가 합쳐져 어떻게 하나의 새로운 감정을 내포하는 언어가 될 수 있었을까? 괴로움을 통한 웃음의 희열을 말한다면 우리 겨레가 즐겨 부른 수심가(愁心歌)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수심가(愁心歌)의 가락은 글자 그대로 수심에 찬 울음이다. 서러움을 소리로 읊은 수심가의 가락은 울음도 웃음도 아닌 한(恨)을 온몸으로 토해낸 응어리이다. 그래서 어떻게 들으면 복받치는 울분을 토해내는 울음소리로 들리고, 또 어떻게
들으면 기다려도 오지 않는 님을 못잊어 울부짖는 연가(戀歌.)로 들린다. 그런가 하면 애절하다 못해 혼(魂)의 부르짖음 같이도 들린다.
어느 민족이나 민요는 창작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에 가깝다. 그래서 민요는 그 국민의 정서를 대변한다고 한다. 역사와 전통이 풍부한 민족일수록 뿌리 깊은 민요의 가락이 있고, 신화(神話)나 설화(說話)가 가락화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신화나 설화는 민족 형성의 뿌리이기도 하고, 때로는 민족 동질성의 구심점 또는 에너지(Energy)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산업혁명 이후에 등장한 나라들 중에는 과학 문명이 발전하여 물질적으로는 그런대로 대국이 되었지만 신화나 민요의 가락이 없는 경우도 있다 한다. 민요나 신화가 없는 나라는 아무리 물질이 풍성해도 정서적으로 고향이 없는 것처럼 삭막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의 민요야말로 자랑스러운 겨레의 보배 중에 보배라고 하겠다.
돌이켜 보면, 우리 겨레는 역경을 가락으로 읊으며 오늘에 이르렀던 것같다. 그래서 우리 가락은 아픔을 온 몸으로 토해내는 소리가 되었다. 가락으로 민족의 절개(節槪)를 지켜 온 겨레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락이야말로 민족 수난사의 산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 대륙에 접한 우리 한반도는 역사 이래 한 번도 평안할 날이 없을 만큼 침략과 위협의 연속이었다. 대륙의 거대한 정치 세력이 등장할 때마다 동화를 강요당했고,순순히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그들은 우리 민족 말살의 침략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저들의 말굽이 휩쓸었어도 쉽게 굴하지 않고 끈기와 슬기로 이겨 낼 수 있었던 저력의 뿌리가 우리만의 가락이 아니었을까.
근세에 들어와 일본까지도 우리의 언어, 우리의 글, 우리의 성명, 우리의 전통을 말살하기 위해 전대 미문의 탄압정책을 시도했었다. 한 때 일본어가 국어가 되었고, 성이 이름과 바뀌었고, 공용문서가 일본어로 둔갑하는 수난 속에서도 우리 민중 속에 도도히 흐르는 민요의 가락은 잠재울 수 없었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가락은 우리 겨레의 정체성(Identity)이기도 하다.
약 20년 전 어떤 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 겨레는 역사 이래 단 한번도 남의 땅을 넘보거나 침략한 적이 없지만 침략을 당한 것은 무려 973번이었다고 한다. 어떤 근거에서 그런 통계가 나왔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수난의 역사로 점철돼 온
것만은 사실이다. 결국 그 통계를 믿는다면 우리 겨레는 1년 반만에 한번 꼴로 침략을 당한 셈이다.
그런가 하면 지구에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싸움이 완전히 멎고 평화가 깃들인 날은 겨우 2년 6개월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아담과 이브의 첫아들 가인이 아벨을 죽이면서 시작된 인간의 역사는 먹히고 먹는 혼돈으로 점철돼 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소유하고 지배하고 정복하는 탐욕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용서와 화해로 가교를 놓았고, 고타마싯타르타는 이승을 고해(苦海)로 정의하고 해탈(解脫)의 세계를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민요의 가락은 한(恨)을 소리로 읊은 울음이다. 그 중에도 수심가는 애환을 소리로 읊은 대표적인 한(恨)풀이이다. 물론 수심가 외에도 애환(哀歡)을 가락으로 읊은 것이 많다. 이를테면, 타령(打令)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창부 타령, 한강수 타령, 경복궁 타령, 자진 타령, 방아 타령, 몽금포 타령, 매화 타령 등 모두가 한이 빚은 가락이다. 그 외에도 우리가 즐기는 사물놀이의 징소리도 울음이다. 신라가 자랑하는 에밀레종의 울음소리는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었다. 현대에 와서 서양의 재즈와 더불어 부르는 유행가의 가락도 마찬가지이다. 눈물, 이별, 고향, 타향을 주제로 한 가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애달픈 가락에 슬픈 가사를 읊어야 흥겨운 것이 우리의 정서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슬픈 가락을 읊어야 했을까? 돌이켜 보면, 우리 겨레는 한과 더불어 살아온 민족이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참을 수 없는 울분을 가락으로 달래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가락은 즐거움의 노래가 아니라 일종의 울음이었다.
일찍이 서양 사람들은 새(Birds)들이 지지배배 우짖는 소리를 노래(Sing)한다고 들었지만, 우리는 운다(Mourn)라고 들었다. 여치가 운다, 귀뚜라미가 운다, 딱따구리가 운다, 매미가 운다, 닭 소 말 등의 소리를 포함하여 모든 생태계의 소리까지도 운다고 했다. 심지어, 생명력이 없는 물리 현상의 소리도 운다고 했다. 예를 들면, 문풍지 소리도 운다고 했고, 물레방아 소리, 나무에 부딪치는 바람 소리, 질그릇의 둔탁한 소리도 운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정말로 우는 울음 소리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울기 때문에 울음소리로 들릴 뿐이었으리라.
자고로 우리는 웃고 즐겨야 할 노래도 애절한 가락으로 애수(哀愁)에 젖어야 했다. 우리의 현실은 항상 가락으로 한을 삭여야 했기 때문이다.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후련하게 뚫리고, 그 뚫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가슴을
풀어 헤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눈물이 마를 때까지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어야 했다. 온 세상이 한눈에 들어 찰때까지 울어야 했다. 울다 지쳐 이제 그만 울어야겠다고 생각이 들 때까지 실컷 울고 난 다음 정신을 새로 가다듬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한(恨)은 무엇일까? 그것은 민족의 허리를 두 동강으로 자른 이데올로기와, 그것이 조직한 모순된 질서와, 그 가치관이 만들어 낸 지배 수단이다. 이데올로기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을 수단화한 공산주의와 물신(物神)에 사로잡힌 부패한 자본주의가 아닐까? 인간의 존엄을 저버린 지배 이데올로기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 비인간적인 질서가 바로 현대의 악마이다. 현대의 악마들이 만들어 내는 기만성과 야만성이 뒤엉킨 모순 덩어리의 사회환경, 바로 그것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이 시대의 과제요, 한이다.
그 동안 우리는 유물론에 바탕을 둔 공산주의 변증법과 그 사상이 정치 권력으로 연계되어 조작해 내는 허무주의적 인간상과, 그 가치관에서 비롯된 인간의 수단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이 시대의 한(恨)인 것이다. 그 외에도
현대의 한(恨)은 얼마든지 있다.
실컷 먹고 실컷 즐겨야 하는 마취 문화에 도취된 현대인들, 무한대의 생산과 무자비한 소비로 하여금 인간을 생산 수단화한 산업문화 역시 경계해야 할 한(恨)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씻어내야 할 한의 대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 도사려 있는 모순 덩어리의 질서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속에 자리잡은 양심 도덕 사랑 계산되지 않는 삶의 가치 의식이다.
그러므로 울음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만큼 절박한 요구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지면 길은 항상 열려 있다. 우리 모두가 실컷 울어 버리면 된다. 다만 문제는 움켜잡고 놓지 못하는 소유가 너무 많아 쉽게 울음을 터트리지 못하는 데에 있다.
큰 소리로 실컷 울고 난 다음 텅빈 마음의 소리는 의로운 하늘의 소리가 될 것이다. 그 하늘의 소리가 온 누리에 어우러질 때 우리의 울음은 슬픔이 아니라 새 역사의 에너지가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날 우리의 울음을 승화시킨 것이
3.1절이고, 4.19 혁명이다. 그러므로 울음을 이름하여 회개(悔改)라 해도 좋고, 해탈(解脫)이라 해도 좋고, 기도나 반성이라 해도 좋다. 다만, 목이 터져라 실컷 울기만 하면 된다. 실컷 울어 버림으로써 우리 마음 속에 정의가 강같이 흐르고 사랑이 넘치는 날 무등사회(無等社會)가 이룩될 것이다.
울음을 통한 하늘의 소리가 온 누리에 어우러지는 날 우리의 가락은 세계가 우러러 보는 혼의 가락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