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씬한 자본주의
홍일표
상가 대형 유리창은 하루에도 수천 장씩 풍경을 삼키는
대식가다
끝없이 배를 채운다
오토바이, 승용차, 행인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대도
언제나 날씬하고, 뒤가 깨끗하다
배설물도 없고, 기억도 하지 않는다
순간, 순간을 먹어치우는
저 지루한 운명은 쉼 없이 반복된다
내가 노예냐고, 내가 짐승이냐고 따져 묻지 않는다
유리창의 커다란 입에 제물로 바쳐지는
오늘 그리고 내일
저장되지 않는 발자국, 손자국들이 풀풀 먼지처럼 날아다니다가
투명한 유리를 통과하며
간단명료하게 죽음을 완성한다
상가 대형 유리창은 수천수만의 유령이 들락거리는,
뼛조각 하나 없이
텅 빈 유리관만 남은 공동묘지.
차가운 가슴뿐인 유리창은 허연 눈을 희뜩거리며
또 다시 누군가의 그림자를 조용히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