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07 오후 10:07:09 Hit. 1142
나의 고향은 강원도 산골 이었다. 초등학교는 십리길을 걸어서라도 다닐 수 있었지만 중학교를 다니기에는 우리집이 너무나 외진곳에 있었다. 나는 중학교 뿐 아니라 고등학교,대학교 까지 다니고 싶었지만 부모님은내가 농사꾼으로 남기를 바라셨다."아버지 저 서울로 나가겠습니다. 학비는 안 주셔도 좋아요.제가 나가서 일하면서 공부하겠습니다."아버지는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아들을 떠나는 날 까지 쳐다보시지도 않으셨다.무일푼으로 타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아무것도 모르는 열넷이라는 나이만이 내게 용기를 준 것도 같다."저...아저씨 일자리를 구하는 데요.""..뭐라고 ?너같은 조그만 꼬마가 무슨일을 하려고?너,집나왔구나!"일주일이 가도 같은 결과의 반복이었다. 서울에는 일자리가 많을거라 생각한것이 착오였다. 떠나올때 어머니가 싸주신 누룽지 말린 것과 약간의 돈도 거의 다 써갔다. 마음이 답답했다.열심히 일할 자신이 있었는데....그러던 어느날,여기저기 골목을 헤메고 다니다 작고 허름한 인쇄소 앞을 지나게 되었다."저 일자리 없을까요? 무슨일 이라도 좋아요.아저씨,일하게 해주세요."핑 쏟아지는 눈물."배가 많이 고픈가 보구나 . 울지말고 들어와 보렴."기름 때가 시커멓게 묻어있는 벽, 여기저기 잘린 종이조각들이 널려있는가게안으로 들어갔다.아저씨는 작은 곤로에 라면을끓여 내게 내밀었다.허겁지겁 라면을 먹어 치우자 아저씨는 나에게 이것 저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너, 어디 잘 데는 있니?""...아니요, 놀이터에서도 자고...""음 그러면 우리 인쇄소에서 일을 하거라. 나중에 학자금이 모아지면 낮에는일을 하고 야간에는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주지."김씨라고 불러달라는 그 아저씨 덕분에 그 날부터 나는 인쇄소에서 일을하게 되었다. 그 분이 퇴근하고 나면 나는 캄캄한게 무섭기도 했지만 노래를 부르며 무서움을 이겼다.쌀은 비싸기 때문에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찬 바닥에 스티로폴을 깔고 자야 했지만 조금만 참으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에 충분히 참아 낼 수 있었다.한 달이 지나고 월급을 받았다. 나는 라면 한 상자를 사다놓고 나머지는 몽땅 저금을 했다.나는 신이 나서 일을 했다. 한 달이 또 지나갔다.두 번째 월급을 받기 며칠 전 저녁을 먹기위해 라면 상자에 손을 넣어보니 라면이 두 개밖에 없었다. 나는 그 중에서 한 개를 꺼냈다.다음날이 되었다. 라면 상자에 손을 넣었다. 신기하게도 라면 두개가 그대로있었다."분명히 어젯밤에 하나를 끓여 먹었는데...손에 닿지 않게 숨어 있었나..."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나를 꺼내 끓여 먹었다. 하루가 또 지났다.저녁이 되어 나는 마지막 남은 라면을 먹기위해서 상자에 손을 넣었다.하나만 있어야 할 라면이 또 두 개였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상자를 아예다 열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라면은 두개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 상자에스무개 밖에 안되는 라면을 나는 삼십일이 넘도록 먹은 것이었다.다음 날 나는 하루종일 라면 상자가 있는 쪽에서 일을 했다. 대강은 짐작이갔지만 어째서 라면이 줄어들지 않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저녁 퇴근 시간 무렵, 김씨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동식아, 요 앞 가게에 좀 갔다올래?"나는 인쇄소 밖으로 나갔지만 가게에 가지않고 유리창 너머로 라면상자를쳐다보고 있었다.슬금슬금 눈치를 보시던 아저씨가 라면 상자 쪽으로 걸어가셨다. 그리고는 라면를 한 개 꺼내 상자 속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시며 걸어나오셨다.어린 사남매와 병든 아내 때문에 월세 단칸방에 살고 계신다는 김씨 아저씨.....나는 그날 아저씨의 심부름을 잊은 채 인쇄소 옆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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