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이 늦어졌다. 자정이 넘어서야 짐을 챙겨 경찰청을 나섰다. 몸이 늘어지고 흐느적거리는 게 영 운전하기가 싫었다. 결국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기로 하고 택시를 기다렸다.
언제부턴가 난 택시를 탈 때 ‘개인택시’는 타지 않게 됐다. 그리고 '회사택시'를 주로 타고
있다. 전에 한 친구로부터 들었던 얘기에 전적으로 공감하기 때문이다. 친구 논리는 이랬다.
“솔직히 개인택시를
운행하시는 분들은 먹고 살만큼 사시는 분들이 많지 않겠어. 그분들이 내 연봉보다 더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회사택시를 운행하시는 분들의 경우 분명
나보다 연봉도 적고 일도 힘들다고 생각해”라며 “내가 회사 택시를 이용하는 것은 고객의 권리이자 또 사회봉사라고도
생각한다”
라고 얘기했었다.
당시 친구가 하는 말에는 대부분 공감할 수 있었지만 ‘사회봉사’라는 말에는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더니 친구는
“야, 사회봉사가 별 거 있어. 나보다 힘든 사람 도울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야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지. 어렵게
봉사단체 찾아다니며 봉사하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지 뭐” 그랬다. 친구는 역시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그 뒤로 난 회사택시의 마니아가 될 수 있었다. 아무튼 어제도 회사 택시를 기다렸다 타게 되었고, 어느
때처럼 인사를 건넨 뒤 늘 하는 얘기를 꺼냈다.
“기사님, 돈 많이 버셨어요? 벌써 1시인데 10만원은
버셨나?”라며 나의 눈은 요금 계산기 쪽으로 향했다. 순간 당황했다. 지금까지 찍힌 금액은 고작 ‘1만7천원’
순간 미안하단 생각이 들어 ‘괜히 얘기했구나’ 라고 후회했다.
그걸 아셨을까. 짧은 스포츠머리에 흰머리 기사님은
“아뇨. 오늘도 공쳤어요. 이제 이것 벌었는데요”라며 내가 조금 전 훔쳐(?)봤던 요금 계산기의 금액을
가르쳤다.
“아니 왜요, 손님이 그렇게 없어요?”라고 묻자 “제가 늦둥이를 둬서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놈이 있는데 그 놈 여름방학 숙제가 숲 속인가, 소양림인가를 다녀오는 거라고 해서 갔다 왔어요”라며 미소 지어
주셨다.
“아, 수목원요. 거기 좋죠. 그래도 막둥이 덕분에 휴가도 다녀오셨네요. 늘 도심에서 매연에 고생만 하시다
하루 나갔다 오시면 좋죠 뭐”라고 말을 건넸고 ‘다행이구나’라고 안도했다.
택시기사는 “그러는
선생님은 휴가 다녀오셨어요?”라고 되물었다.
“저요, 아직 못 갔습니다. 요즘 경찰관들 휴가 가기
힘들어요. 잘 아시잖아요. 그런데 무슨 제가 선생님입니까. 보아하니 기사님의 큰 아들 나이밖에 안 될 거
같은데요.”
기사님은 소리 없는 웃음으로 나를 힐끔 쳐다보셨다. 그리곤 “저는 지난 7월 말에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사실 사는 곳이 남원인데 형제가 열입니다. 올 해 모인 인원이 족히 오십 명이 되더군요. 학교 다니는 얘들은 많이 못
왔는데도 그렇더라고요”라고 얘기하셨다.
나는 기사님께 집안 얘기에 대해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보고 나면 그만일 사람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풀어 가시는 모습에 조금은 당황했다. 사실 내가 했던 얘기들은 대부분 형식적으로 건네는
말들이었다.
“내 나이 이제 낼모레면 육십인데 아직 부모님이 살아 계시죠. 아버님은 여든 아홉, 어머니는 여든
둘이시죠. 그런데 아직 건강하세요”라며 자랑스럽게 힘주어 말씀하셨다.
깜짝 놀랐다. 가족이 그렇게 많은 것도
그렇고 ‘요즘 같은 때 온 가족이 그렇게 모일 수 있을까?’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이 있어요.
우리 큰 형님이 이제 예순 아홉이신데, 아니 이 양반이 비실비실거려요. 공무원으로 평생을 다니시다 정년퇴임하셨는데 여러 병명으로 고민이
많습니다.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서울에서 근무를 했었거든요. 그런 형이 우리 동생들은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는데
말이죠”라며
“사실 저야 국민학교 졸업장도 없슈, 어려서 시골에서 머슴 살면서 소 꼴이나 베러 다니고
그러다 서울에 올라와서 이것저것 해보다 지금은 택시를 하고 있죠”라며 조금은 부끄러운 듯 말씀하셨다.
아마도 자신의
부끄러운 면보다는 형을 자랑하고 싶어 하셨을 거다. 자신을 낮추고 형을 높이는 기사님의 모습은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택시기사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아니, 그런 형이 왜 그렇게 비실거리는지, 전 이제 우리 큰 형님을 미워할 겁니다. 아, 글쎄 이번
모임 때 부모님께서 형님의 모습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창준(가명)아, 너 죽으면 우리 두 내외도 따라 죽는다. 알아서 해.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야 혀, 아 이놈아 우리만큼은 살아야지’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어찌나 맘이 아프던지…….”그리고 기사님은 말씀을
이어가지 못하셨다.
그리고 한참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댁은 형제 중에 아픈 사람 없소? 그럼 우리 사정을 알
텐데”라고 물었다. “아뇨, 저희 가족 중에는 아직 그렇게 아픈 사람은 없네요. 부모님들도 모두
건강하시고요.”
택시기사는 “그럼 세상에서 제일 부자고 행복한 거요”라며 짧게
말했다. 나는 한참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차는 집 앞에 도착했다.
잔돈을 건네던 기사님은 이 말도 함께 건넸다.
“첨 보는 사람에게 괜한 얘기를 많이 했네요. 저도 손님들이 말하기 전에는 별로 얘기를 안 하는 편인데, 아무튼 즐거웠소. 그리고
가족 늘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오”라며 큰 웃음을 지어 주셨다.
나는 감사하단 말도 못하고 등을 돌렸다. 집으로
들어오는 어둠이 너무도 평온하게 느껴졌다. ‘오늘 만큼은 우리 집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고 행복하구나’ 라고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