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18 오전 12:27:38 Hit. 1036
그 무렵 우리가 세들며 살던 옆방엔 공단의 여공들이 여러 명 자취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때때로 작업을 마치고 주인집 옥상에 올라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곤 했다. 대개는 고향 얘기였지만 그녀들은 열악한 작업 현장의 얘기라든지 밀린 봉급 얘기, 야근을 할 때 졸지 말라고 바늘로 여공들을 찌르는 작업 반장의 얘기를 하곤 했다. 그 여공들 중에 시골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한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늘 단발머리를 하고 낯빛은 창백했다. 그러나 병적 이리만치 창백한 얼굴 모습과는 딴판으로 언제나 쾌활하고 마음 씀씀이가 착했다. 다른 여공들과는 달리 한가할 때는 우리들의 작업복을 빨아 주기도 하고 남자들끼리 밥해 먹는 것이 딱해 보였는지 손수 밥을 지어 주거나 밑반찬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 소녀가 어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다고 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소녀는 어머니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것으로든 모자라는 오빠의 학비도 보태고 있는 눈치였다. 그녀의 오빠는 의과 대학생이어서 졸업을 하면 의사가 된다고 했다. 그 소녀는 오빠가 대학교를 졸업해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하루의 일과가 조금도 피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소녀가 앓기 시작한 것은 그해 장마가 한창일 때였다. 우기는 그녀가 앓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있다가 그녀의 얼굴이 퉁퉁부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알았다. 그녀가 자기의 몸이 아픈 것을 숨기고 있었던 탓이었다. 어느 일요일. 우리는 옆방의 여공들과 함께 돈을 모아서 과일꾸러미를 사들고 그녀의 병문안을 갔다. 뜻밖에 그녀의 병세는 위중했다. 얼굴이며 온몸이 퉁퉁 부어 있었을 뿐 아니라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가 병문안 온 것을 몹시 고마워하며 침대에 서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우리가 억지로 눕게 했는데 그래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하루 빨리 일어나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병실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대학생인 그녀의 오빠와 어머니가계셨다. 그녀가 잠이 들자 그녀의 오빠는 그녀가 자기의 학비를 보태기 위해서 라면 두 개로 하루의 끼니를 때운 적도 있다고 했다. 지난 겨울 모처럼 동생이 자취하는 방을 찾은 그는 한눈에 그녀가 영양 실조에 걸린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걸 알면서도 그 흔한 링거 주사 한 번을 놔주지 못하고 계란 두 줄을 사서 놓고 나올 때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고 울먹였다. 그해 여름이 가기 전에 그녀는 꽃다운 나이로 고달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가 걸린 병은 영양실조가 아니라 납중독이었다. 그녀가 다니던 공장은 납을 많이 취급하는데 공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죽은 다음날. 태양이 중천에 떠서 이글거리고 바람 한 점 없이 무더웠던 그날, 그녀의 오빠가 그녀의 셋방을 정리하기 위해 왔다. 그녀는 소지품도 단출했다. 앉은뱅이 책상 한 개와 몇 권의 책. 비키니 옷장 하나가 그녀의 소유품 전부였다. 우리는 그녀의 오빠가 짐 정리하는 것을 돕기 위해 그 방에 갔는데 주인 없는 앉은뱅이 책상 앞에는 '바르게 살자'라는 글귀가 서툴게 쓰여진 흰 종이가 초라하게 붙어 있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다섯 글자를 읽는 순간 나는 갑자기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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