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행로
홍일표 그늘만 찾아다니며 몸을 의탁하는 잔설이 있다 구석으로 몰려다니며 그늘을 파먹고 사는 주둥이 몸 가벼운 잔설이 그늘에 둥지를 트는 것은 끝까지 남아 전할 말이 있는 것 검은 사제복을 입은 그늘이 흰 그림자를 끌어안고 오래 귀 기울인다 몸을 옹송그리고 단단히 얼어붙은 이마에 숭숭 뚫리는 분화구 용암처럼 끓는 그늘의 숨구멍이다 그늘을 독파한 잔설, 햇볕 한 줌 끌어다가 슬며시 제 몸을 지우고 먼 길을 떠나는 늦은 오후 애면글면 한 말씀 흘려 놓고, 홀연히 새 한 마리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