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베이터 앞의 소녀

얼마 전 갑자기 아주 추워졌던 날의 일이다.

내가 사는 곳은 20여년 전 지어진 낡은 아파트로

엘레베이터와 그 옆 계단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길게 복도가 나있고

각 복도에 5세대씩 집이 있는 15층 아파트다.

나는 14층에 살며 얼마전부터 운동삼아 계단을 이용하고 있었다.

어느날 새벽 3시가 좀 넘은 시각.

나는 1시 반 쯤 언제나처럼 습관인 밤산책을 나갔다가

평소보다 좀 늦게 돌아오는 길이었다.

늘처럼 계단을 이용해

집까지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낡은 아파트라 15층까지 중 서너군데

계단과 엘레비이터 타는 곳에 불이 안들어오는

컴컴한 층이 몇 곳 있었고

그 중 12층도 그렇게 밤이 되면 컴컴한 곳이었다.

나는 11층에서 잠시 계단 손잡이를 붙들고

가뿐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고르다가 올려다보니

늘 어둡던 12층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엘레베이터가 열리면서 흘러나온 빛이 분명했다.

이 시간에도 드나드는 사람이 있나

나는 좀 의아하게 생각하며

천천히 1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엘레베이터 문은 12층에서 완전히 열려있었다.

밝은 빛이 나오고 있었고

엘레베이터 밖 오른쪽에 붙어있는 열림 버튼 바로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흘깃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가

잘못봤나 하고 다시 한번 버튼앞에 붙어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는

다시 계단으로 올라갔다.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검은 옷을 입은

여고생 쯤의 나이로 보이는 이쁘장한 소녀가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른채

재미있다는 듯한 히죽 웃으며 서 있었던 것이다.

계단을 오르면서 문득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추운 겨울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른 채 웃고 있는 낯선 소녀.

엘레베이터를 탈 것 같지도 않았고 갓 내린 것 같지도 않았다.

어린 애들이 그러듯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 주민들을 약올리려고

버튼을 꾹 누르고 장난을 치는 것같은 모습.

그러나 그 소녀는 그렇게 어리고 철없어 보이진 않았다.

왜 그 시간에 그런 소녀가 그런 짓을 하는 걸까.

게다가 열림버튼은 엘레베이터 밖 바로 오른쪽에 있다.

엘레베이터 안 오른쪽에 있는 감시카메라에는

당연히 그 소녀의 모습이 비치지 않을 것이다.

난 좀 이상한 기분에 계단을 오르다 말고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엘레베이터에서 나오는 불빛은 그대로였고

버튼 쪽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위치라 소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누가 걷거나 타거나 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엘레베이터가 닫혔다면 소리가 분명 났을 것이나 그런 기미도 없었다.

그 소녀가 아직도 그 버튼을 누른 채 웃고 있을 생각을 하니

불현듯 소름이 끼쳐 나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가 앉아있으면서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개운치 않아

아무래도 다시 한번 확인해야겠다 싶어 혼자는 두려워

집에 있는 강아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우선은 강아지를 안고 계단을 조용히 내려갔다.

13층에 내려가니 아래층 불빛이 보였다.

12층은 여전히 엘레베이터가 열려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엘레베이터를 누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자 아까 본 소녀의 모습이 또렷이 떠올라

소름이 끼치며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으나

줄을 채운 강아지를 내려놓고 앞장 세워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다는 듯 12층으로 내려갔다.

엘레베이터 문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그런데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열림 버튼을 확인해 보니 누르면 버튼에 들어오는 불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게다가 엘레베이터 문은 일정 시간이 지나도 닫히지 않고

열린 채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혹시 이번엔 안에 탄 채 버튼을 누르고 있나

나는 내친 김에 열린 엘레베이터 안에 고개를 넣고 좌우를 확인했다.

아무도 없다.

순간 나는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강아지를 안고 계단으로 달음박질쳐 올라가

집으로 들어갔다.

문단속을 여러번 하고 내 방에 들어가 겨우 한숨이 나왔다.

누구였을까.

사람이라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기괴한 장난을 치는 것이 두려웠고

사람이 아니라면 왜 그런 곳에 나타나 그런 짓을 하는 것일까.

그 후 나는 지금까지도 자정 이전에 밤산책을 마치고

계단 아닌 엘레베이터를 이용하고 있다.

가끔 밤에 12층에 엘레베이터가 멈추면 흠칫 놀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