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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인지 마스터[7-6]
    작성자 : 절대긍정 | 조회수 : 1687 (2011-12-15 오후 3:02:54)
    레인지 마스터 6권
    목   차
    제25장 무투 대회! 레드 파운의 존재를 각인시키다
    제26장 대결 전의 휴식
    제27장 레드 파운, 초인 페리안에게 도전하다
    제28장 죽음의 평웡을 향해
    제29장 죽음의 평원에서의 혈투
    제30장 파르판 제국에 발을 딛다
    제31장 파르판 제국의 수도 아르곤을 향해!
    제32장 레드 드레곤 로이스케의 습격
    제33장 드워프들의 거처를 향해
    제34장 새로운 초인의 출현

    제25장 무투 대회! 레드 파운의 존재를 각인시키다

    ‘처음부터 오러를 발현시키는 건가? 그렇다면 그만큼 나를 강자로 인식했다는 것인데.’
     물처럼 고요한 케이의 시선을 맞받던 현성이 읊조렸다.
     이번 상대는 지금까지 겨뤄왔던 상대들과는 달랐다. 처음 붙었던 탈토는 자신을 만만하게 봤기에 빈틈투성이였다. 그 다음 상대인 케이안은 자신에게 섣불리 접근을 했기에 단숨에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달랐다. 그저 오러가 맺힌 검을 늘어뜨린 채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인데, 왠지 모를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분명 눈앞의 케이란 자도 초인에게 도전하기 위해 무투 대회에 출전한 것일 텐데, 출전 선수가 이 정도의 위압감을 풍기면 초인은 과연 어떻다는 것일까?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등을 꽉 움켜쥔 현성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며 기회를 노렸다.
     태연한 겉모습과는 달리 케이는 상당히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지금껏 많은 궁수들을 봐왔지만 저런 패턴의 공격을 가하는 궁수는 처음이야. 소드 엑스터프 유저를 가볍게 누르는 것을 보면 상당한 실력을 가진 자다. 다루는 무기만 다를 뿐, 분명 나와 비슷하거나 더 강할 수도 있다.’
     늘어뜨린 검을 고쳐 잡으며 케이가 말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에 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등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말을 마친 케이가 가볍게 지면을 박차자 그의 신형은 탄환처럼 빠르게 현성을 향해 쏘아졌다.
     푸르스름한 오러를 머금은 검신이 순식간에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폭사되는 것을 느낀 현성이 기겁하며 백스텝을 밟았다.
     말도 안 되는 빠르기로 자신과 거리를 두는 현성을 보며 케이는 흠칫 놀랐지만 상대와 거리를 벌리게 될 경우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기에 급히 거리를 좁혀 나갔다.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빨리 치고 들어오다니…….'
     믿을 수 없는 빠르기로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리는 케이를 보며 현성이 거듭해서 백스텝을 밟았다. 위기감을 느낀 현성은 오른손을 허리춤에 가져가 화살 깃을 움켜쥐었다. 케이가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움찔하게 만들어 약간이나마 시간을 벌 생각에서였다.
     순식간에 화살을 뽑아든 현성은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그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거리를 좁혀오던 케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쐐애액.
     생각할 틈도 없이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마치 한 자루의 창을 연상시키는 굵직한 화살이 케이에게 쏘아졌다. 기겁을 하며 화살을 피해낼 것이라는 현성의 생각과는 달리 케이는 오러를 머금은 검을 휘둘러 자신을 향해 맹렬히 날아드는 활살을 쳐냈다.
     ‘헛!’
     자신의 예상이 빗겨나가자 현성은 허탈감을 느꼈다. 화살을 쳐냄과 동시에 재빨리 거리를 좁혀오는 케이를 보며 현성은 전투 자세를 취했다. 더 이상 거리를 둘 수 없었기에 검을 피하려는 심산에서였다.
     부우웅.
     자신의 몸을 향해 사선으로 그어지는 검을 보며 재빨리 퀵스텝을 건 현성이 그대로 지면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것이 패착을 불러올 줄이야…….
     기다렸다는 듯 케이가 검의 행로를 바꿔 높이 뛰어오른 현성에게 휘둘렀다. 검으로 베어내기엔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기에 케이는 마나를 가득 끌어올렸다.
     그에 3미터에 달하는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케이의 검에서 뿜어져 나왔고, 그것을 본 현성이 대경실색하여 자신의 허리를 쇄도해오는 오러 블레이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장내는 정적이 흘렀다. 케이가 검을 휘두르게 된다면 현성의 허리는 그대로 두 동강 날 상황이었다. 지켜보던 관중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케이에게 도전한 궁수를 동정했다.
     “아, 안 돼!”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제리코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 뒤로 일어난 일로 인해 관중석은 다시 한 번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케이의 검에서 자라난 3미터 남짓 되는 길이의 오러 블레이드가 현성의 허리를 끊어 놓을 것이라는 모두의 생각과는 달리 오러 블레이드가 허리춤에 다다랐을 때 현성은 자신이 익힌 중원의 보법을 떠올렸다.
     허공답보(虛空踏步).
     다행히도 익히고 있던 네 개의 무공 중 허공답보가 있었기에 현성은 지면을 박차듯 허공을 박차 백스텝을 전해해 케이의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
     가볍게 지면에 착지한 현성은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는 말을 몸소 실감할 수 있었다.
     ‘휴우, 하마터면 몸이 두 동강 날 뻔했군.’
     안도의 한숨을 내쉰 현성은 마음을 가다듬고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등을 움켜쥐었다.
     “와아아아!”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를 거둔 케이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현성을 보는가 싶더니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에 케이의 표정을 읽은 현성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활을 움켜쥐었다.
     ‘허공답보로 공격을 회피한 것 때문에 잠깐이나마 어리둥절해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중원채널 고유의 신법이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 도박을 하는 수밖에 없겠군. 장기전을 하기엔 스태미나가 얼마 남지 않았어.’
     긴장을 해 허둥대던 케이안과는 달리 케이는 극도로 차분했다. 이미 지나간 일인지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역시 소드 마스터라는 건가. 길게 뿜어낸 오러 블레이드와 실력을 봐서 틀림없는 소드 마스터다.’
     생각을 마친 현성의 눈이 반짝였다.
     “퀵스텝.”
     퀵스텝을 시전한 현성이 두 다리로 지면을 힘껏 박차자 그의 신형은 거짓말처럼 안개에 가려지듯 푹 꺼져버렸다. 하지만 케이는 사라진 현성의 위치를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외침 때문이었다.
     “더블 샷(Double Shot)!"
     쐐애애액.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작은 창을 연상시키는 두 대의 커다란 화살이 케이를 향해 폭사되었다. 하지만 화살을 피할 필요도 없다는 듯 케이는 시퍼렇게 물든 자신의 롱 소드를 휘둘러 두 대의 화살을 모두 두 동강 냈다.
     그러는 사이 현성은 또다시 허공을 박찼다. 허공답보로 허공을 박찬 뒤 이형환위(以形換位)를 시전하려는 심산에서였다.
     얼만 남지도 않은 마나를 쏟아 붓는 위험한 도박. 극심한 현기증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이미 마나는 모두 소모한 것이 분명했다.
     화살을 쳐내는 케이의 뒤로 순식간에 모습을 나타낸 현성이 순식간에 허리춤에서 화살을 꺼내들고 케이의 목덜미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을 쳐내던 케이가 기척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현성의 모습이 케이의 망막에 맺혔다. 이대로 활시위를 놓는다면 시퍼렇게 날이 선 화살촉이 자신의 목덜미를 꿰뚫을 것이 분명했기에 케이는 안타깝지만 패배를 인정했다.
     한편 현성은 극심한 마나소모 때문인지 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은 신대륙 아리시아. 다른 곳보다 현실성을 조금 더 부여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였다.
     다행히도 현성의 도박은 성공했고, 케이가 패배를 시인하자 경기는 현성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우오오! 퀵스텝!”
     “대단하다!”
     관중석에서는 연이어 탄성이 터져 나왔다.
    *    *    *
     나는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얼른 거두고 화살을 화살통에 도로 꽂아 넣었다. 완전히 바닥을 보였던 마나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는지, 극심한 현기증이 서서히 멎기 시작했다.
     케이가 뭐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관중석에서 쏟아져 나오는 함성과 탄성 때문이었다.
     쳇. 처음엔 궁수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처럼 행동하던 녀석들이… 뭐 그래도 궁수에 대한 시선이 조금은 바뀐 것 같다.
     나는 케이와 함께 나란히 선수 대기실로 향했다. 그건 그렇고, 방금 전의 도박이 실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뭐 그래도 지나간 일이니까 그리 신경 쓰지 안하도 될 것 같았기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선수 대기실을 향했다.
     잠시의 휴식시간.
     관중석은 난데없이 나타난 레드 파운이라는 선수를 주제로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무식하게 큰 활과 왜소한 체격. 처음엔 모두들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조소하는 이도 있었다.
     “저런 투박한 활로 뭘 어쩌겠다고…….”
     “제대로 쏠 수나 있나?”
     하지만 레드 파운과 탈토의 대결에서 레드 파운이 무참히 패배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었다. 바인마하 왕국에서 궁수하고 하면 그저 일대일 맞대결에서는 상당히 불리한, 그저 전쟁을 할 때나 후방에서 다수가 지원을 해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대역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기사와 궁수는 싸움이 될 수 없었다. 빠른 몸놀림으로 화살을 피해내며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면 궁수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으니까.
     두 번째 대결에서는 근거리에 취약하다는 궁수에 대한 고정관념의 벽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소드 엑스퍼트 중급의 기사를 순식간에 쓰러뜨리자 관중들은 레드 파운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방금 전에 있었던 소드 마스터 케이와의 대결.
     역사상 처음으로(물론 바인마하 왕국에서) 소드 마스터를 꺾는 궁수가 나타난 것이었다.
     물론 현성이 중원채널의 상승무공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전무했다.
     티아를 비롯한 현성의 일행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궁수한테 저런 스킬도 있었나.”
     “그, 글쎄.”
     짧은 휴식시간이 끝나자 다음 라운드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현재 현성이 유심히 지켜보는 선수 중 하나인 페이샤와 한참전 라운드에서 승리한 테오라는 선수의 대결이었다. 월등한 실력 차로 순식간에 경기를 끝내버린 테오.
     상당한 실력을 가졌다지만 그런 테오도 소드 마스터 페이샤를 꺾을 순 없었다. 잠시의 신경전과 함께 주고받는 한 치도 밀림 없는 치열한 공방. 하지만 페이샤가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린 뒤 가차 없이 맹공격을 퍼붓자 테오는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한 채 무참히 패했다.
     이전의 9라운드와 10라운드에서 승리한 케미안과 프릴이란 선수는 경기를 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입어 15라운드의 경기가 제외되었기에 부전승으로 결승까지 갈 수 있었던 조는 이제 없었다.
     때문에 무투 대회를 개최한 상류층의 귀족 몇이 지금 상황으로 인해 시간을 다시 짜 맞추는 그런 골치 아픈 일을 해야만 했다.
     잠시의 휴식시간을 갖고 결승전을 개최하자는 의견과 결승을 내일로 미루자는 의견과 서로 충돌했다. 결국 휴식시간을 가진 뒤, 결승전을 개최하자는 결론이 나왔고 무투 대회에 참여한 선수들과 많은 관중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    *    *
     “마스터급의 궁수라. 들어본 적이 없지만 정말 무시무시했습니다. 특히나 그 빠른 움직임 포착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네요.”
     경기가 끝나 대기실로 들어온 뒤부터 늘어지는 케이의 칭찬에 나는 상당히 머쓱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기사들에 비해 상당히 말이 많은 케이. 하지만 그의 실력과 예의바른 행동이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에 곤란할 것은 없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붙게 될 페이샤란 녀석에겐 어떤 식으로 공격을 가해야 할지 모르겠군.
     페이샤의 경기를 지켜보면서 느낀 거지만, 처음엔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다. 공방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즉시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 순식간에 밀어붙이는 패턴.
     생긴 것과는 다르게 상당히 강한 선수였다. 뭐 이미 패턴을 다 파악하고 있었기에 두려울 것은 없었다. 변칙적인 공격만 하지 않는다면야.
     대기실로 들어오면서 케이는 본인을 소개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느냐 하면, 케이는 부유한 귀족층의 자식이 아닌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제대로 된 검술과 마나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줄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소드 마스터가 되었을까? 의문은 이어진 케이의 발언에서 서서히 베일을 벗었다.
     “어릴 때부터 검에 대한 관심이 많았거든요. 친구들과 뛰놀던 도중 우연히 주운 검술교본을 보고 완벽히 매료된 뒤로 한시도 목검을 놔본 적이 없어요. 심지어 잘 때도 안고 잤지요. 하하.”
     그렇단 것은 독학을 했다는 것인데… 독학을 통해 마나를 느끼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될 확률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갈 확률보다 더욱 희박했다.
     케이의 손바닥에 두텁게 잡힌 군살을 보자 나는 그가 얼마나 혹하게 검을 휘둘렀는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어쩐지 예의가 바르고 귀족 특유의 특권의식이 없다 했더니, 농노출신의 소드 마스터라는 건가.
     잠시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경기 시작을 알리는 관중들의 함성이 들려왔고 나는 왼손에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케이에게 말 한마디를 던진 뒤 대기실에서 나와 경기장으로 향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제 1321회 페리안 무투 대회의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진행자의 말과 함께 이어진 엄청난 함성.
     드디어 지루한 무투 대회의 막이 내리는 것이군. 아니, 먼저 페이샤를 쓰러뜨려야 하는 건가? 나는 심판의 지시대로 페이샤와 마주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훨씬 크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는 여태까지 간단한 가죽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달랐다는 것. 풀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을 한 건 아니지만 이전에 입던 가벼운 가죽갑옷보다 두터운 철 재질의 경갑주를 입고 있었다.
     “두 선수 서로 마주 보며 인사하십시오.”
     이어진 심판의 지시에 레드 파운은 고개를 숙여 간단한 목례를 했다. 이전의 경기에서도 건성이긴 하지만 목례를 해왔던 페이샤는 인상을 쓴 채 레드 파운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무투 대회에서 기사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로군. 고작 궁수 하나를 이기지 못해서 결승전까지 올라오도록 만들고 말이야.’
     페이샤의 눈에는 경멸 어린 시선이 가득했다. 그가 이처럼 두터운 경갑주를 입고 나온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지난 경기에서 상대의 활이 휘둘러지는 궤적을 이미 파악했고, 갑옷에 마나를 불어 넣게 되면 화살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사라지는 이상한 재주가 있다지만 놈의 공격은 내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페이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드는 그저 활을 꽉 움켜쥔 채 페이샤에게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페이샤는 내친 김에 상대의 전의를 상실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상대를 자극해 먼저 활을 쏘도록 만들고 자신에게 화살이 통하지 않는 다는 점을 각인시켜주기 위해서였다.
     페이샤가 말했다.
     “거기, 너.”
     “왜요?”
     이어진 상대의 말투에 페이샤의 눈썹이 역 팔자로 휘어졌다.
     ‘역시 배우지 못한 농노 놈들은 윗사람 대하는 법을 몰라. 이 녀석을 이곳에서 즉결처분해야겠어.’
     욱하는 마음에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겨우 추스른 페이샤가 다시 말했다.
     “자, 한 수 물러 주겠다. 활을 쏴 보아라.”
     지극히 상대를 하대하는 말투였지만 레드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자신의 말에 따라 상대가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는 것을 보며 페이샤는 갑옷에 마나를 주입했다.
     삽시간에 은빛의 경갑주가 시퍼렇게 물들었다.
     도대체 무슨 심산에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나에게는 화살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나는 푸르게 물든 페이샤의 갑옷에 시선을 두고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었다. 페이샤도 처음 상대인 탈토처럼 나를 상당히 얕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특권의식을 완전히 깨부숴줘야겠군.
     나는 손에 잡힌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제아무리 갑옷에 마나를 불어넣었다고 해서 화살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상당량의 스태미나와 약간의 마나가 감소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파워 샷(Power Shot).”
     푸슝!
     쐐애액.
     방대한 힘을 머금은 화살이 페이샤에게 쏘아졌고, 화살은 페이샤의 가슴팍과 충돌했다.
     콰앙!
     순식간이지만 페이샤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하, 화살이 먹히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가 꽤나 큰 충격을 먹은 모양이다.
     “큭.”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에 오른 무인답게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 상태가 어떤지 이미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페이샤의 얼굴을 보며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재빨리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기자 상당량의 스태미나와 미량의 마나가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파워 샷.”
     푸슝.
     쐐애액.
     맹렬히 대기를 가르는 화살.
     다시 한 번 쏘아지는 화살을 보며 페이샤는 몸을 돌려 날아오는 화살을 슬쩍 피해냈다.
     도대체 뭐지? 고개를 갸우뚱하자 페이샤가 말했다.
     “내가 물려준 한 수는 이미 끝났다.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실까.”
     “화살이 꽤나 아팠나보군.”
     나는 어울리지 않게 능글맞은 태도로 대꾸했다. 그에 페이샤는 어이없는 듯 웃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처음 세릴리아 월드를 접할 땐 지극히 내성적인 성품을 지녀 심지어 적이라도 이런 태도를 보이지 못했지만, 궁수라는 직업을 갖게 되고 이리저리 여행을 다니다 보면서 강해졌다.
     힘을 얻음과 동시에 자연스레 자신감이 생겼고, 그 자신감은 내성적이고 연약한 성품을 어느 정도 무너뜨렸다. 그렇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잠시 한 눈을 팔아버렸군.
     나는 왼손에 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꽉 움켜쥐었다. 찰나에 선공을 가하는 페이샤의 패턴으로 보아 언제 페이샤의 검이 내 목덜미를 향해 폭사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더욱 신중하게 대처했다.
     지금까지 상대 선수들과 겨뤄오면서 중원 채널의 고도 무공인 이형환위를 계속 전개해왔지만, 극심한 마나소모 때문에 계속해서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일종의 도박이랄까.
     이렇게 페이샤를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타탓.
     지면을 박차며 사선으로 나를 찔러 들어오는 페이샤.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 척 하면서 선공을 가하는 것이로군. 나는 재빨리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났다.
     거듭해서 백스텝을 밟았기 때문에 상당한 거리를 둘 수 있었다. 페이샤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나는 재빨리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거리를 좁혀오는 페이샤에게 활을 쏘았다. 조금 전 파워 샷의 선제공격 효과가 있었는지, 페이샤는 화살을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몸을 날려 화살을 피했다.
     다행히도 상대는 풀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우어택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머리를 공격해 극심한 충격을 받게 되면 십중팔구 기절을 하게 되니까(물론 NPC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고, 이곳은 현실성이 좀 더 부여된 신대륙 아리시아다).
     물론 마스터급의 기사를 기절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방법이다. 오러 애로우를 사용하게 된다면 좀 더 쉽게 겨룰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레인지 마스터의 비기인 오러 애로우를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생각해보라. 모두가 무시하던 궁수가 마나를 다스리는 마스터급의 기사나 대마법사를 꺾는다면 그들이 보는 궁수에 대한 시선이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이 분명했다.
     거듭해서 활을 쏘았지만 페이샤는 소드 마스터라는 명성에 걸맞게 화살을 가볍게 피해내며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퀵스텝.”
     퀵스텝을 시전하자 몸이 상당히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상승무공을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게 휘둘러지는 페이샤의 검을 피해내기 위해서랄까.
     짙고 푸른 오러가 충만히 맺힌 검이 정교한 초식을 뽐내며 맹렬히 대기를 갈랐다.
     부웅, 붕.
     지극히 직선적인 공격. 전부 피해낼 자신이 있었다. 가로로 베어지는 검을 보며 백스텝을 밟아 거리를 두려고 하던 찰나, 페이샤의 검에서 눈부신 폭발과 함께 맺혀있던 오러가 삽시간에 길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오러 블레이드의 발현이었다. 케이 때와 뭔가 비슷한 상황, 부득이하게도 중원의 무공을 사용 해야겠군. 나는 재빨리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지면을 힘껏 박찼다. 그와 동시에 난 허공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어딜!”
     “에잇.”
     검의 행로가 순식간에 바뀌며 날 찔러 들어오기 시작했고, 나는 즉시 허공답보를 전개해 허공을 힘껏 박참과 동시에 백스텝을 밟고 뒤로 물러났다.
     이형환위보다는 비교적 마나가 적게 감소했기에 아직까지 대결하며 쓸 마나는 넉넉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노려보는 페이샤.
     후, 중원의 상승무공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난 패배의 쓴잔을 몇 번이고 들이켜야 했을 것이다. 페이샤의 경기를 유심히 지켜본 덕에 페이샤의 패턴을 꿰뚫어 볼 수 있었기에 비교적 쉽게 상대할 수 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이형환위를 전개하며 상대를 제압했기에 내 공격 패턴이 어떤지는 잘 모를 테고, 거기에 탈토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방심을 하고 있었기에 이런 결과를 초래했는지도 모른다.
     잔뜩 흥분을 해 성이 났는지 페이샤의 눈이 붉게 충혈 되었다. 그러더니 지금껏 마나를 적절히 아껴가며 필요한 순간에만 뿜어내던 소드 마스터의 절기를 잔뜩 뿜어낸 채 검을 종횡무진 휘두르기 시작했다. 나는 말 그대로 혼비백산이 되어 페이샤의 검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과는 달리 페이샤의 손속은 매서웠다. 그것보다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린 채 이렇게 무리하게 된다면 마나가 금세 바닥이 날 텐데.
     물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지금처럼 공격을 한다면 단기전에서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지만 장기전으론 무리가 있다. 그만큼 마나가 빨리 감소하고 체력적인 조건에서도 상당히 뒤처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려했던 일이 벌이고 말았다. 마나가 거의 고갈되어 가는지 오러 블레이드의 빛이 옅어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잔뜩 성이 난 페이샤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종횡무진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마스터급의 기사라면 분명 자신을 다스릴 수 있겠지만 지금 내 눈앞에서 이렇게 검을 휘둘러대는 페이샤는 특권의식으로 똘똘 뭉친 귀족.
     뭐 게임 상이라지만 나 같은 평민에게 이런 굴욕을 당한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마나가 다 고갈되었는지 페이샤가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잠시 멈칫했다. 마나가 모두 고갈되었다는 것은 오러를 끌어 올리 수 없다는 것.
     이젠 보우어택으로 신나게 치고받을 수 있겠군.
     “퀵스텝.”
     나는 잽싸게 지면을 박차고 페이샤에게 접근했다.
     “보우어택!”
     육중한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휘둘러지자 페이샤의 장검이 마중을 나왔다.
     쾅!
     상당히 고급스러운 검인지, 아니면 케이가 한 것처럼 충격을 줄인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지금 공격은 먹혀들지 않았다.
     “백스텝.”
     나는 화살을 꺼냄과 동시에 백스텝을 밟고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재빨리 활을 쏘자 페이샤는 자신을 향해 폭사되는 화살을 검으로 쳐냈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허리춤에서 두 개의 화살을 꺼내들었다.
     “더블 샷.”
     쐐애애액.
     두 개의 작은 창을 연상시키는 화살이 페이샤에게 쏘아졌고 나는 또다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지금 같은 경우엔 중언의 무공을 사용한다고 해서 전혀 도박이 될 이유가 없었다.
     이미 나는 승기를 잡은 상태니까. 화살 깃을 활시위에 슬쩍 건 나는 즉시 퀵스텝을 시전 해 이형환위를 전개한 뒤 두 개의 화살을 쳐내는 페이샤의 등 뒤로 향했다.
     물론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페이샤의 오른쪽 어깨를 겨냥한 나는 이형환위를 전개하며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쇄애액.
     푸욱.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검을 놓친 페이샤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풀썩 무릎을 꿇었다.
     “후우, 드디어 끝이군. 이제 초인을 꺾으면 되는 것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고개를 들어 관중석을 빙 둘러보았다. 고요한 정적.
     간혹 마른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장내는 지극히 조용했다. 도우미로 초빙한 마법사들의 합작인 초거대 라이트(Light)만이 빛을 발하며 경기장을 비출 뿐이었다.
     나는 내 일행이 위치한 곳에 시선을 옮겼다. 시선을 집중하자 마치 망원경으로 보는 것과 같이 모두를 볼 수 있었다. 멍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티아와 넋을 잃은 제리코, 그리고 나머지 동료들.
     특히나 혁은 가관이었다. 입을 쩍 벌린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사진을 찍어 본인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조용히 팔을 들어올렸다. 그에 정신을 차린 심판이 판정을 했다.
     “승자, 레드 파운!”
     와아아아아!
     진행자의 외침에 장내의 정적을 깨고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난생처음 받은 박수갈채. 아, 이런 기분이구나.
     처음엔 비웃음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이들도 지금은 그 눈빛이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평소에 박수를 받아보지 못했기에 이런 박수갈채가 어색한 나는 선수 대기실로 향하기 위해 얼른 등을 돌렸다.
     “레드 파운 선수. 기다려주세요.”
     갑자기 걸려온 제동. 나는 음성이 들려온 곳에 시선을 옮겼다. 심판이었다.
     “잠시 후 수여식이 있을 테니 상금과 함께 대회 우승 기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상금이라…….
     예상치 못한 수확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제26장  대결 전의 휴식

     바인마하 왕국의 수도인 페리안 도시.
     그곳은 지금껏 전례가 없는, 마스터급의 기사들을 꺾고 당당히 무투 대회에서 우승을 한 거대한 철궁을 가진 궁수의 존재로 인해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수도 페리안의 한쪽 언저리에 위치한 무투 대회장은 지금 우승 수여식과 함께 관중들의 뜨거운 박수갈채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초인에게 도전하시겠습니까?”
     “네.”
     박수소리가 멎자 마법사의 도움으로 목소리가 증폭이 된 진행자가 물었고 대회의 우승자로 보이는 왜소한 체격의 한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에 관중들은 다시 한 번 들뜨기 시작했고 상금과 대회의 우승 수여식이 끝나자 관중들은 하나, 둘 관중석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경기의 진행을 처음부터 쭉 지켜본 것인지 경기장의 천장에 묵묵히 서 있던 유저가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이 보라색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서 그런지 유난히 돋보였다.
     “오러 애로우를 사용하지 않고 소드 마스터를 꺾다니… 다른 사제들에게도 알려야겠는걸. 퀵스텝.”
     말을 마친 청년의 모습은 안개에 가려지듯 사라져버렸다.
    *    *    *
     나는 무투 대회 이후 많은 것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 활을 등에 둘러메고 다니는 나를 보던 이들의 시선이 한층 나아졌다. 비웃음 어린 시선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정령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키지 않아도 소드 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중원의 상승무공의 도움이 컸지만 말이다.
     가난한 농노였던 케이는 무투 대회를 지켜보던 바인마하 왕국의 주력인 페리안 근위기다단의 부단장의 눈에 띄었는지 휘하의 기사로 들어오라고 회유까지 했다.
     하긴, 모두가 거들떠보지도 않던 농노의 자식이 혼자의 힘으로 마나를 다스리는 경지까지 올라 소드 마스터가 되었는데 욕심이 안 난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페이샤도 페리안 기사단의 단원이라고 했다. 그 대문인지 페리안의 기사단장이 일행들에게 향하려는 내게 이렇게 다가온 것이다.
     “우승을 축하하오. 본인은 바인마하 왕국의 페리안 근위기사단의 부단장 폴이라 하오. 궁수가 소드 마스터 둘을 꺾다니. 혹시 페리안 기사단의 레인져 부대에 들어올 의향은 없소?”
     날 회유하려는 건가? 물론 싫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직 할 일이 많고 또 지루한 것은 싫었기에 즉간 거절을 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이만.”
     그에 폴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내일이면 초인과 붙게 된다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상당히 들떴다. 초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적어도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야 하는데, 레벨로 따지면 마스터 레벨인 300에 가까운 캐릭터라고 보면 되려나? 아닐 수도 있겠지만.
     뭐 조금 이따 생각해봐도 나쁠 것은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저은 뒤 대회장의 출구로 향했다.
     잠시 후, 봇물 터지듯 관중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일곱 명의 인영과 은빛의 흰털을 가진 늑대 한 마리가 유독 내 눈에 띄었다. 일행들이로군.
     나는 피식 웃으며 퀵스텝을 걸고 일행들에게 힘껏 내달렸다. 일행들에게 도착하자 제일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루카였다. 나는 꼬리를 느릿하게 흔들며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형 대단해! 소드 마스터를 둘씩이나 이겼어!”
     “언제부터 그렇게 강해진 거야? 대련 한번 해보자.”
     제리코와 혁이 차례로 내게 말했다. 지금까지 경기를 하느라 힘들어 주겠는데 대련은 무슨. 월드 타임으로 아침부터 지금까지 거의 쉬지 않고 경기를 해서 그런지 피로는 극에 달하기 직전이었다.
     내 표정을 읽은 티아가 이쪽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었다. 나름대로 부축을 해주는 셈인가? 나는 팔짱을 낀 티아를 내려다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알게 모르게 웃고 있었다.
     “초인과의 경기는 언제 진행되는 거죠?”
     레온이 물어왔다. 음, 아까 상금과 수여식을 하면서 진행자가 내일 모레라고 했으니 현실 시간으로 내일이 되는 것인가?
     “월드 타임으로 3일 후라고 하던데요? 현실 시간으로 내일일거예요. 오후 12시까지 수도 페리안의 페리안 성으로 오라고 했어요.”
     “그렇군요.”
     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강찬이 말했다.
     “초인이라고 또 이런 허름한 무투 대회장에는 내보내지 않겠다, 이건가?”
     “그렇겠지.”
     경훈의 대꾸에 나는 피식 웃었다. 피로도를 회복시킨 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군.
     월드 타임 3일간 바인마하 왕국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더욱이 둘러볼 곳도 없었다. 조금 머리를 식힌 뒤 다시 접속해 제리코를 수련시켜줘야겠다고 생각을 마친 나는 일행들과 고급 숙소로 향했다.
     외진 마을의 낡은 여관과는 달리 이곳의 숙소는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상금을 받은 기념으로 내가 쏘는 셈이었다. 에헴!
     하지만 2인 1실이란 것은 다를 것이 없었다. 전처럼 방을 나눈 뒤 각자 피로도를 회복하는 대로 로그아웃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티아가 말했다.
     “오빠, 잠깐 나 좀 보자.”
     “응, 그래.”
     그에 나는 루카와 제리코를 방에 들어가라고 지시한 뒤 티아의 뒤를 따랐다. 고급스런 숙소의 로비로 나오면서 앞장섰던 티아가 등을 휙 돌리며 말했다.
     “이따가 로그아웃 한 다음에 뭐 할 거야?”
     “글쎄. 딱히 할 건 없는데.”
     “그럼 우리 만나자.”
     “응? 뭐라고?”
     “만나자고. 헤헤.”
     티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하하, 이전에 본 적은 있는데 막상 만날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들뜨는 기분이었다.
     “그, 그래. 어디서 볼까?”
     “음… 광장 옆 공원 어때?”
     “광장 옆 공원… 그럴까?”
     “응. 그럼 이따가 보자!”
     말을 마친 티아가 쏜살같이 방을 향해 달려갔다.
     그럼 나도 얼른 피로도를 회복시킨 뒤 로그아웃이나 해볼까? 그건 그렇고 몇 시에 만날지 정하지 않았군. 나는 얼른 퀵스텝을 걸고 윗방으로 향했다.
    *    *    *
     “후아암.”
     한숨 늘어지게 잤더니 피로도가 모두 회복된 모양이다. 모두들 로그아웃을 한 모양이군. 좀 전에 티아와 몇 시에 만날지도 정했기에 슬슬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늘어지게 자는 루카와 제리코를 뒤로한 채 로그아웃을 했다.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푸쉬쉬.
     위잉, 철컥.
     “아, 오늘도 한 건 했군.”
     뒤집어썼던 헤드셋을 벗자 머리가 왠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머리맡 고리에 헤드셋을 걸고 게임베드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오러를 발현시키지 않고서도 소드 마스터를 둘씩이나 꺾다니. 물론 힘겹게 이겼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케이 같은 경우는 상승무공으로 도박을 걸어 겨우 이긴 것이고, 페이샤 같은 경우는 방심을 하고 있던 데다가 몹시 흥분한 상태인지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것이니까.
     뭐 그래도 이미 판정으론 내가 이긴 것이고 지나간 일이니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겠다. 게임베드에서 일어나 두 발을 방바닥에 디디자 게임기기의 문이 맑은 기계마찰음을 내며 서서히 닫혔다. 오늘은 게임을 반나절도 하지 않았군.
     얼른 방에서 나와 욕실로 향했다. 물론 욕실로 향하는 동안 컴이 기다렸다는 듯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영양이 부족하다는 둥 어서 식사를 하라는 둥. 거의 매일 듣는 말이라 그런지 이젠 컴의 음서이능을 듣기만 해도 짜증이 날 정도였지만 뭐 별 수 있나.
     욕실로 들어온 나는 온 몸을 깨끗이 씻고 욕실을 나왔다. 그리곤 벽에 달린 전자 달력에 시선을 두었다.
     [2234년 7월 27일]
     요즘 너무 게임에 빠져 사느라 날짜개념이 사라진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약속시간까진 좀 남았으니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만 뭔가를 좀 먹어야겠군.
     나는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긴 뒤 냉장고에서 간식용 소시지 두어 개를 꺼내 껍질을 깐 뒤 우적우적 씹었다.
     나는 내친김에 소파로 달려와 컴에게 멀티비전을 켜달라고 지시했고, 컴은 즉시 멀티비전의 전원을 켰다. 채널을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로 고정시킨 뒤 신대륙 아리시아에 관한 자료를 쭉 훑어보았다.
     “오호. 바인마하 왕국의 무투 대회에 참여한 유저가 괘 많네.”
     나는 느릿하게 소파에 기대어 어제 막 올라온 따끈한 자료를 검색했다.
     “에? 이, 이건 또 뭐야?”
     무투 대회의 우승자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1321회 우승자 ‘레드 파운’이라는 글귀를 보자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아니 무투 대회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홈페이지에 이렇게 업데이트가 된 거지? 게다가 주요 장면은 또 뭐야?
     나는 주요장면을 보기 전에 이 글을 업로드 시킨 작성자가 누군지를 살폈다. 운영진이군… 지금까지 우승자 목록과 주요 장면을 올린 이도 운영진이군. 이런 것까지 죄다 관리하려면 운영자들의 머리가 터지겠네. 뭐 그만큼 운영자도 많겠지만.
     아무튼 나는 내가 치룬 경기의 주요장면을 살폈다. 중간중간 잘라서 묶어 놓은 것이었다. 탈토를 단 한 방에 때려눕히는 장면과 다급하게 달려드는 케이안.
     케이안이 저렇게 안절부절 했었나? 긴장을 해서 자세히 못 본 탓일까? 막상 경기할 당시 많은 관중의 눈 때문인지라 긴장을 안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건 그렇고 중원의 상승 무공을 너무 남발했었네. 민첩 스탯이 극에 달하게 되면 이동속도 증가 스킬을 사용했을 때 이형환위 만큼은 아니지만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른 유저들이 본다면 대체 뭐라고 할 지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케이와 겨룰 땐 정말 가관이었군. 나는 주요장면을 모두 살펴본 뒤 올라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댓글 몇 개를 볼 수 있었다. 세인트 모닝에서 본 적이 있다는 댓글도 있었고, 전직시험을 볼 때 같은 조였다는 댓글도 있었다.
     전직시험이라… 댓글을 보니 처음 궁수로 전직할 때가 떠오르는 걸?
     전직시험 중에 잡동사니 만들기가 있어 신나게 만들던 일과 과녁에 활을 쏘는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일. 그리고 전직시험 교관을 따라 궁수의 탑 꼭대기 층에 간 것과 로시토와의 첫 대면과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가 되게 된 게기. 그리고 지금은 항상 붙어 다니며 절대 떨어지는 일이 없는 루카와의 첫 만남까지…….
     이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루카는 항상 내 오른편에 있었지.
     세릴리아 월드를 하며 있었던 일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럴 게 아니라 무투 대회 우승자 중에서 궁탑의 제자들이 있나 살펴봐야겠군.
     나는 즉시 우승자 검색란에 ‘로빈훗’ 석자를 입력했다.
     역시나,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최초의 궁수 우승자. 지금껏 출전한 궁수 유저 중 최초로 우승을 함과 동시에 초인을 꺾었다는 글귀를 보자 나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둘째와 셋째, 넷째 사형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에 무투 대회에서 어떠한 성적을 거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즉시 로빈훗의 경기 주요장면을 살폈다. 로빈훗의 영상은 이상하게도 길었다. 이때는 지금과는 다르게 출전 선수들이 무지 많았는데, 첫 경기에 나무로 제작된 가느다란 롱 보우를 들고 등장하는 로빈훗을 보며 관주들은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관중들의 야유가 도중에 딱 끊기게 됨과 동시에 나도 입을 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빠른 속도로 휘두르는 배틀 엑스를 가볍게 피해냄과 동시에 붉은 섬광을 쏘아 보내는 것이었다. 물론 화살이 가늘었기에 내가 쏘아내는 붉은 섬광과 굵기가 달랐지만 위용은 가공할만했다.
     극도로 높은 명중률로 상대의 배틀 엑스를 박살낸 뒤 순식간에 상대의 뒤로 돌아가 목덜미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로빈훗.
     역시 페리안의 대장간에서 들었던 궁수 이야기가 로빈훗의 이야기였군. 보라색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 물론 적안을 개안하면 붉은 눈동자가 되지만. 아무튼 인상착의가 비슷했다.
     내 패턴과는 상당히 다른 공격 방식. 기존 궁수들의 공격패턴과 흡사했지만 상황대처 능력이 유난히 뛰어난 로빈훗을 보자 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나를 궁수로 전직하게 만든 이가 로빈훗이었고 지금 내 존재를 제일 먼저 각인시켜주고 싶은 이도 로빈훗이고 또 여러 가지 할 말도 많았다.
     결승전에서도 상대를 가볍게 쓰러뜨리는 것으로 로빈훗의 경기 주요장면은 끝났다. 그건 그렇고 초인과 대결하는 장면은 어떻게 볼 수 없을까나?
     로빈훗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본 결과 아니나 다를까. 이미 초인 몇을 꺾은 뒤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본인이 직접 적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미 초인 몇을 꺾다니…….
     홈페이지를 돌아다니다 시선을 멀티비전의 우측 하단에 위치한 시계로 옮겼다.
     “허억.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컴, 멀티비전 좀 꺼줘.”
     나는 즉시 소파에서 일어나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왔다. 옷장을 뒤져 제일 괜찮은 옷을 챙겨 입고 방 한구석에 위치한 전신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햐, 옷이 날개라더니. 나한테 이런 모습도 있었나?”
     잘생긴 건 절대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나은 모습. 그건 그렇고 이 거울 꽤 오래 쓰는 것 같다. 5년 전에 손수 만든 거울인데 전혀 망가지지 않았군.
     나는 곧장 등을 돌려  PDA를 챙겨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거실로 나와 신발장으로 향했다.
     “어디 보자… 굽이 좀 있는 신발을 신어야겠군.”
     맘에 드는 모양새가 괜찮은 신발을 신고 신발장 벽면에 붙어 있는 거울로 시선을 던진 나는 후줄근한 곳이 있는지 없는지 살폈다.
     “아차, 지갑.”
     나는 헐레벌떡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와 지갑을 챙긴 뒤 다시 현관으로 나와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왔다.
     “후아. 역시 사람은 바깥공기를 맡고 살아야 돼.”
     수많은 사람들이 활보하고 있는 거리. 나는 많은 인파에 끼어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은 언제나 활기찼다. 가상현실 게임기기 추첨 이벤트를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길거리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상현실과는 확연히 다른 현실 모습이다.
     솜사탕을 들고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광장을 가로질러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은 광장과는 달리 조용했다.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은 공원으로 잘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이나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 외엔 거의 사람들이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사람이 적은 건 아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PDA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오후 1시 58분이라…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는군. 그렇게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또각, 또각.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소리. 지나가는 사람이겠지 싶어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PDA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혁이 녀석과 문자 메시지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뭐라 하면 반응이 바로 오는 녀석이라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해야 하나?
     또각.
     낯선 소리가 내 뒤에서 멈췄고 나는 경직이 되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PDA에서 시선을 떼고 뒤로 고개를 돌리자 전에 보았던 예쁘장한 소녀가 서있는 것이 아닌가?
     까만 눈망울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점차 몸이 굳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과는 달리 상당히 예쁘게 차려입은 티아였다. 뭐야, 한동안 안 이러더니 갑자기 이런 증상이 또 나타나네.
     “정말 똑같다.”
     손을 들어 올려 입을 가리고 생긋 웃는 모습이 마치 백송이의 모란꽃이 한꺼번에 만개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너도 똑같네 뭐.”
     머쓱해진 나는 티아의 위아래를 살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본명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뭘 해야 하는 거지? 이런저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면서 내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때 내 손에 있던 PDA를 가져가 무언가를 입력 시키는 티아. 자신의 연락처를 입력시키는 것 같았다.
     “자.”
     나는 PDA를 도로 건네받아 최근에 입력시킨 목록을 살폈다. 최현지? 본명이 현지인가. 현지… 음. 아무튼 현지는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PDA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입력시키라 이거군.
     나는 내 이름과 연락처를 입력시킨 뒤 현지에게 건넸다. 본명을 부르려니 뭔가 어색하군. 뭐 일단 만났으니 놀아야 할 텐데, 이사를 하긴 했지만 18년간 이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이곳에 대한 지리는 빠삭하니 다행이군.
     PDA를 받아든 현지는 피식 웃고 있었다. 세릴리아 월드에 있을 땐 별로 어색한 것이 없었지만 이렇게 막상 보니 왠지 어색했다. 세릴리아 월드에서와는 모습이 달라서 그런가? 뾰족한 귀와 갈색 머리카락, 초록색 눈동자를 제외한다면 별 차이점이 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어색했다. 하지만 그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아 없어졌다.
     “밥은 먹었어?”
     “아니, 아직.”
     내 물음에 티아… 아니, 현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 헷갈려.
     “그래? 나도 안 먹었는데. 뭐라도 좀 먹을까?”
     “응.”
     “돌아다니면서 맛있는 거 파는 집이나 돌아보자.”
     나는 손을 뻗어 현지의 손을 잡았다. 뭐 좀 몸이 굳기 직전의 현상이 나타나긴 했지만 금세 괜찮아지겠지. 무얼 먹을지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끝내 오게 된 곳은 스파게티 전문점이었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곳이었는데 이곳에 들어오면서 현지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여기 좀 비싸지 않아?”
     “그런가?”
     가격대가 다른 곳보다 좀 비싸긴 했지만 서비스와 기타 등등 여러 가지가 다른 곳보다 월등히 좋은 곳이었기에 그냥 이곳에서 먹기로 했다.
     서빙을 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안내를 받아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은 나는 먼저 의자를 빼 현지를 앉혀준 뒤 맞은편에 앉았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예.”
     나는 메뉴판을 받아 무얼 먹을지 골랐다. 전자 메뉴판에 나온 스파게티의 종류는 다양했고 그것을 보자 입가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뭐 먹을래?”
     현지에게 묻자 메뉴판을 살펴보던 현지가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이거.”
     삐삣.
     터치패드가 손가락을 인식했는지 소리를 내며 아이콘을 주문 매뉴얼로 옮겼다. 나는 먹음직스러운 치즈스파게피를 고른 뒤 마실 것을 더 골라 메뉴판을 아르바이트생에게 넘겼다.
     주변을 둘러보던 현지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오빠. 세릴리아 월드에서 말인데.”
     “응.”
     “오늘 정말 멋있더라. 헤헤.”
     현지의 말에 나는 왠지 머쓱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고 있을 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치즈스파게티를 휘적휘적 저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주린 창자가 요동을 치는 것을 느끼며 음식을 씹어 삼켰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뒤 난 현지와 함께 광장으로 향했다. 현지를 세릴리아 월드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설명을 늘어놓고 있을 때였다.
     “여기는 내가 어릴 때부터 쭉 있던 건물이고……”
     “자, 자. 다시 한 번 열린 길거리 이벤트! 무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차근차근 설명을 하던 도중 어디선가 들려오는 커다란 음성이 내 말을 중간에 끊어먹었다. 도대체 뭐지? 나는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정육면체의 커다란 스크린.
     스크린은 나무가 빽빽이 있는 숲과 같은 공간을 비추고 있었고 그 숲에는 카타르를 양 손목에 착용하고 시커먼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자객 차림새의 유저 하나가 서 있었다.
     “무슨 이벤트 하나봐. 우리 가보자.”
     “아, 응.”
     현지의 말에 나는 커다란 음성으로 연신 소리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가상현실 게임기기 두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유저가 플레이 중인지 불어 들어와 있었고(On 모드) 다른 하나는 불이 꺼져 있었다.(Off 모드).
     “자, 세릴리아 월드를 플레이 하고 계신 유저 분들이라면 길거리 이벤트에 참여 가능합니다. 지금 대련 이벤트용 ‘세릴리아 리틀 배틀’에 접속 중인 유저는 상당한 레벨의 기사 유저입니다. 저 유저를 이긴다면 세릴리아 월드 측에서 만든 아이템 복권을 드리겠습니다.”
     이벤트 진행자의 말에 길거리를 활보 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길거리를 활보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릴리아 월드 유저라니. 이것 참.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나는 현지의 손을 꼭 쥐었다. 밀리고 치여서 다치면 안 되니까.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들자 이벤트 진행자가 더욱 크게 소리쳤고 이내 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서서 겹겹이 원을 그렸다.
     “좋아, 내가 시작해볼까?”
     훤칠한 키를 가진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팔을 걷어붙이며 게임기기로 다가갔다.
     “도전해보기겠습니까?”
     “물론이죠.”
     “상품은 아이템 복권입니다. 행운을 빌어요.”
     이벤트 진행자의 말을 들으며 청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게임기기의 문을 열고 들어가 접속을 했고, 이내 청년의 모습이 모니터에 비춰지기 시작했다.
     상대방과 마찬가지로 은빛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하고 있었고, 묵직한 바스타드 소드를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우와, 기사인가 봐. 멋있다.”
     내 손을 꼭 쥐고 현지가 스크린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얘도 게임을 워낙 좋아하는 애니까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간다.
     도전자가 안전하게 로그인 한 것을 확인한 이벤트 진행자가 게임기기 캡슐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선 끝에 달린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아, 아. 지금 접속하고 계신 도전자 분. 들리십니까?”
     [에, 잘 들립니다. 게임기기 전용 마이크를 사용하고 계신가 보네요.]
     “어라? 알고 계시는군요.”
     [전에 이벤트에 참여한 적이 있거든요. 하하.]
     도전자의 대답에 주위에 몰린 구경꾼들이 모두들 큰소리로 웃었다. 이벤트 진행자의 표정이 상당히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크흠. 자, 그럼 시작해 주십시오. 주변의 사물을 이용해도 좋은 자유격투입니다. 그럼 Ready… Statr!”
     이벤트 진행자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전자의 검이 시퍼렇게 물들기 시작했다. 전사 계열의 유저가 기사로 2차 전직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얻게 되는 소드 엑스퍼트의 절기. 오러의 발현이었다.
     빛이 그리 짙지 못한 것으로 보아 소드 마스터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자객은(차림새가 자객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그냥 자객이라고 설명해야겠다) 오러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미 많이 접해봤다는 듯이 오히려 상대의 허점을 잡아내기 위해 빠른 몸놀림을 자랑하며 파고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당히 빠른 몸놀림. 마치 내가 퀵스텝을 걸고 움직이는 듯한 그런 몸놀림이었다. 자객이란 직업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 했기에 나는 그저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도전자의 밑으로 파고든 자객이 손목에 착용한 카타르를 슬쩍 휘둘렀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오러를 머금은 도전자의 검이 마중 나왔고 자객의 카타르와 충돌했다.
     푸캉.
     오러를 머금은 검에 카타르가 맥없이 부러질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검과 카타르가 충돌해 불똥이 튀었다. 자객이 추가공격을 가하려는 찰나, 도전자의 무릎이 자객의 복부를 가격했다.
     “우와!”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구경꾼들 사이에서 연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 도전자 꽤 하잖아?
     하지만 자객의 대처법도 만만치 않았다. 무릎이 복부를 가격하는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춰 지면을 박차 몸을 허공에 맡겼기 때문에 충격을 줄인 채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자객이 사용하는 카타르의 등급이 유니크 이상의 등급임이 틀림없었다. 일반등급의 아이템으로 오러를 머금은 검을 저렇게 쳐내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이미 격투는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뒤로 물러난 자객을 따라잡기 위해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며 검을 휘두르는 도전자의 두 팔이 머리 위로 올라갔을 때 잽싸게 달려들어 겨드랑이 부근에 카타르를 박아 넣은 것이었다.
     푸욱.
     [컥!]
     반대편 손목에 착용한 카타르로 목 부분의 빈틈을 노려 찌르자 도전자는 풀썩 쓰러졌다.
     푸쉬쉬.
     위잉.
     도전자가 쓰러짐과 동시에 게임기기는 Off모드가 되어 자동적으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 그것 참 아쉽게 패배했군요. 다음 도전자 어디 없나요?”
     “나도 해봐야겠다.”
     내 옆에 서있던 난생처음 보는 호리호리한, 툭 치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체구의 한 청년이 게임기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전 도전자는 상당히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목덜미를 연신 문지르고 있었다.
     싱크로율 때문인지 아직까지 얼얼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 도전자는 로브를 걸친 마법사로 보였다. 마법사와 자객의 결투라, 마법사의 마법 클래스가 낮으면 게임이 될 리 없었다.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마법을 캐스팅을 하게 되면 캐스팅을 마치기 전에 자객이 카타르가 목덜미를 파고들 테니까.
     내 예상대로 격투는 순식간에 끝이나버렸다. 거기서 주문을 외서 캐스팅을 해야지 수인(手認)을 맺으면 어쩌자는 거지? 그것도 아주 서툴게 말이다.
     “나도 해봐야겠어.”
     “나도.”
     “나도!”
     도전자들이 상당히 많이 나왔지만 속속히 자객에게 무너졌다. 무투가 유저와 광전사 유저도 말이다. 물론 상대의 패턴을 알고 잘만 대처한다면 이길 수 없을 리가 없었겠지만 모두들 자객의 패턴을 유심히 살펴보지 않은 것 같았다.
     이렇게 모두가 무너져 내리자 섣불리 도전을 하겠다고 나서는 구경꾼이 없었다.
     “아, 이제 다음 도전자는 없는 건가요?”
     이벤트 진행자가 아쉽다는 듯 소리쳤다.
     “오빠가 한번 도전해봐.”
     내 손을 잡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현지가 말했다.
     “내, 내가?”
     “응.”
     고개를 끄덕이며 빤히 날 보는 현지의 눈빛이 왠지 나가서 저 자객을 묵사발 내달라는 그런 뜻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현지 너도 의외로 사악한 면이 있구나…….
     나는 못 이기는 척 나설까 생각을 했지만 주변에 눈이 너무 많았다. 물론 작게 속삭이는 우리의 대화를 들은 이는 없었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그럼 갔다 올게.”
     “응!”
     나는 잡았던 손을 놓고 게임기기를 향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오, 아까부터 서 있던 커플. 남자친구가 도전을 하는군요.”
     “오오~!”
     이벤트 진행자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쏘아지는 것을 느끼며 난 게임베드에 누웠다. 아, 이런 건 정말 싫은데.
     머리맡 고리에 걸린 헤드셋을 머리에 뒤집어쓰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72.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웅성웅성.
     “잠깐만. 저 유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현성이 세릴리아 리틀 배틀에 접속하자 스크린엔 검고 긴 머리칼에 평범한 외모와 왜소한 체구에 거대한 철궁을 쥔 소년이 비쳐졌다. 검은 복장에 붉은 망토를 뒤로 늘린 허름한 차림새에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많은 듯했다.
     “나도 봤어.”
     “궁탑의 제자야!”
     주변은 금세 술렁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것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현지는 스크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 활 한 번 무식하게 크다. 히엑? 저 허리춤에 달린 것 좀 봐. 저게 화살인가?”
     “저걸 쏠 수 있나?”
     “그건 그렇고 궁수에게 자객이란 존재는 천적과도 같은 존재인데 말이야. 제아무리 궁탑의 제자라도…….”
     그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현재 도전자는 레인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초인 캐릭터라는 것을.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했을 때와는 달리 루카와 제리코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특정 직업을 제외한 다른 직업은 추가로 얻은 소환수나 가디언을 소환해낼 수 없는 것 같았다.
     밖에서 볼 때와는 달리 상당히 넓은 이 공간. 마치 수도 세인트 모닝의 성문 앞에 위치한 그런 작은 숲과도 같았다. 듬성듬성 자라난 나무들과 넓게 펼쳐진 들판을 보니 강아지만큼이나 작았던 루카와 함께 뛰놀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아. 들리십니까?]
     잠시 생각에 빠져있을 때 이벤트 진행자의 음성이 허공에서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네.”
     나는 풀어진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며 대답했다. 팽팽하게 고정된 활시위. 흐음. 초인과 겨루기 전에 활시위 좀 갈아줘야겠는 걸?
     [활시위가 팽팽하게 고정되었군요. 자 그럼 준비 됐습니까?]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뭐 밖에서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으니 확실히 낫군. 나는 전투태세를 갖춘 뒤 눈앞에 서있는 자객에게 시선을 두었다.
     “적안(赤眼).”
     적안을 개안(開眼)하자 사물이 더더욱 또렷해졌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하며 전투태세를 갖춘 자객을 노려보았다. 나와 전투를 해본 적이 없으니 거리를 두지 않고 가까이 올 것이 분명했다. 궁수는 근거리 전투에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는 고정관념이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자유격투입니다. 자 그럼~ Ready, Start!]
     “퀵스텝.”
     이벤트 진행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퀵스텝을 걸었다. 상대가 내게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선으로 휘둘러지는 카타르는 분명 내 목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힘껏 휘둘렀다.
     콰앙!
     묵직한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가느다란 카타르의 날이 충돌했다. 순간 자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식으로 방어를 해낼 줄은 몰랐나보지? 자객이 잠시 놀란 틈을 타 나는 다시 한 번 활을 사선으로 휘둘러 공격을 가했다.
     부웅.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거대한 활을 보곤 대경실색을 하며 피해낸 자객이 민첩한 몸놀림을 자랑하며 팔을 쭉 내뻗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카타르가 곧 내 가슴팍에 다다르겠군.
     “백스텝.”
     그에 나는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났다. 물론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드는 거도 잊지 않았다.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다시 한 번 백스텝을 밟은 나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자객에게 활을 쏘았다.
     쐐애액.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좋아, 이때다!
     나는 무투 대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화살을 피해내는 자객이 뒤를 노리곤 이형환위를 전개했다. 지면을 힘껏 디뎌 눈 깜짝할 사이에 자객의 뒤로 이동한 나는 있는 힘껏 활을 휘둘렀다.
     “보우어택!”
     퍼억.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자객이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그건 그렇고 이형환위를 전개해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니. 퀵스텝의 지속시간이 끝났는지, 가볍게 느껴지던 몸도 원상태로 돌아왔다.
     “보우어택!”
     퍼억!
     막 스크린을 통해 벌어진 광경에 주변은 고요해졌다. 마이크를 쥐고 있는 이벤트 진행자마저 딱딱하게 굳은 상황이었다. 현지를 제외한 모두들 하나같이 입을 떡 벌린 채 다물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빨리 정신을 차린 이벤트 진행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도, 도전자의 승리군요. 도전자 분. 드, 들리십니까?”
     [네.]
     이벤트 진행자의 말에 현성이 대답했다.
     [이것도 세릴리아 월드와 같이 로그아웃 하면 되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푸쉬쉬.
     이벤트 진행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게임기기 캡슐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로그아웃을 한 모양인지 스크린은 쓰러진 자객 하나만을 비추고 있었다.
     “후우. 금방 끝냈군.”
     나는 머리에 뒤집어썼던 헤드셋을 벗어 머리맡 고리에 걸었다.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차단되었던 빛이 캡슐 내부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고 난 게임베드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 이건 뭐지? 모두들 넋을 잃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현지만이 생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궁탑의 제자가 된 직후로 날 보면 웅성대는 유저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황에 나는 또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전자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지금 접속한 유저를 회복시킨 뒤 다른 도전자의 도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지금 승리하신 도전자 분. 상품권 받아가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나는 이벤트 진행자가 건네는 상품권을 받아 현지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길 줄 알았다니까.”
     현지가 빙긋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음냐.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고요했던 주변이 다시 웅성이기 시작했고 자객이 회복을 했는지 다음 도전자들이 속속히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현지의 손을 잡고 이곳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내게 집중된 시선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즈넉이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 도시는 이내 가로등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고, 주홍빛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검푸르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낮과는 달리 거리는 조용했고, 에어카와 에어바이크의 미세한 엔진소리만이 고요한 적막을 깨고 있었다. 제아무리 가상현실이 뛰어나다고 해도 현실의 이런 세세한 부분까진 완벽히 흉내 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오빠 시간 많아?”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나란히 걷고 있던 현지가 말을 걸어왔다.
     “나야 남는 게 시간이지 뭐.”
     “그럼 나 집 앞까지만 바래다주라.”
     그에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뭐 사실 이렇게 여자와 단 둘이 다니는 것도 처음인지라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야.”
     그렇게 걷다보니 생각보다 빨리 현지의 집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별로 멀지도 않은 곳에 살았구나. 그에 나는 잡았던 손을 놓고 피식 웃었다.
     “그럼 난 가볼게. 조심해서 가.”
     “응.”
     대답을 마친 나는 가만히 서서 현지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등을 돌려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덜컥.
     현관문을 열자 시원하게 냉방이 되는 거실이 날 맞이했다.
     「많이 걷는 것도 좋은 운동이지요. 주인님, 손을 깨끗이 씻은 뒤……」
     “알았어.”
     나는 반기는(?) 컴의 잔소리를 도중에 잘라먹은 뒤 욕실로 향했다. 손을 깨끗이 씻은 후 거실로 나온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느끼한 음식을 먹었더니 아직까지 속이 느글느글하군.
     별로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컴에게 멀티비전을 키도록 지시한 뒤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로 맞춰줘.”
     「네.」
     컴이 채널을 맞추는 동안 나는 PDA에 시선을 두었다.
     “어라? 메시지가 와있네.”
     짤막한 글귀가 적힌 메시지. 현지로군.
     ‘지금 세릴리아 월드 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보곤 나는 즉시 답장을 날려주었다. 홈페이지에서 여러 가지 자료를 살펴본 뒤 들어가겠다고.
     그러는 동안 멀티비전은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에 채널이 맞춰졌고 나는 PDA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시선을 멀티비전에 두었다. 초인에게서 승리를 거두던 패배의 쓴잔을 들이키던 바인마하 왕국에서 시간을 지체해둘 수는 없기 때문에 다른 곳을 찾아볼 계획이었다.
     리모컨을 집어든 나는 여러 가지 자료를 검색해나갔다.
     “어라?”
     한참을 검색하던 도중 제일 큼지막한 글귀가 내 눈에 들어왔고 나는 즉시 그것을 검색했다.
     “파, 파르판 제국?”
     찾아낸 자료는 다름 아닌 ‘유저들의 성지 파르판 제국’이었다. 파르판 제국은 지금까지 신대륙을 찾아온 유저들이 가장 많이 머물고 있다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때문에 유저들의 성지라는 명칭까지 지니고 있었고, 이따금 여러 가지 메인이벤트를 진행하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좋아, 다음 목적지는 이곳 파르판 제국이다. 밸로 멀지도 않잖아?”
     월드 맵(World Map)을 펼쳐 바인마하 왕국과 파르판 제국의 거리를 살핀 나는 즉시 행로를 검색했다. 뭐야, 왜 이렇게 먼 거지? 게다가 파르판 제국으로 향하는 워프스크롤도 존재하지 않았다.
     쳇, 어떻게 해서든 직접 가야한다는 것이군.
     바인마하 왕국과 사뭇 다른 배경의 파르판 제국에 흥미를 가진 나는 파르판 제국에 대한 자료를 찾았고 그 자료를 하나둘 유심히 살폈다. 으흠. 내가 세릴리아 대륙에서 공성전을 하고 있을 때, 이곳 파르판 제국에서는 신대륙 아리시아에서만 적용되는 메인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군.
     메인이벤트의 스케일이 세릴리아 대륙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진행 방식부터가 달랐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에 완벽히 매료되었다.
     기존 세릴리아 대륙에서 이벤트를 할 시 이벤트를 진행하는 운영자가 나타나 미리 유저들에게 알린 뒤 진행하는 방식이었지만 이곳은 달랐다.
     애초에 운영자가 직접 나타날 일도 거의 없었으며 불시에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이게 진짜 이벤트인가 하고 놀랄 정도라니.
     물론 여기에 적혀있는 것을 읽어봤을 뿐 직접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기대됐다. 목적지도 정했으니 이제 초인만 꺾으면 되는 것이군.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컴에게 멀티비전을 끄라고 지시한 뒤 내 방으로 향했다.
     파밧!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하자 낮선 방으로 로그인 되었고,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자고 있는 제리코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루카를 볼 수 있었다. 아, 아까 로그아웃을 할 때 이곳 고급숙소에서 로그아웃을 했었지.
     [티아 젠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접속하기가 무섭게 대화요청을 하는 현지. 으흠. 이곳에서는 티아라고 불러야하는 건가? 으악 복잡하다. 그냥 끌리는 대로 불러야지.
     “승인.”
     대화요청을 승인하기가 무섭게 가느다란 여성의 음성이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금방 접속했네!
     “응.”
     잡든 제리코와 루카를 보며 나는 최대한 소리를 죽여 대답했다. 곤히 잠든 제리코와는 다리 루카는 한쪽 귀를 쫑긋하며 느릿하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오빠 잠시 로비로 나올 수 있어?
     “있지. 지금 나갈까?”
     -응.
     “그래, 알겠다.”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나는 짤게 대답한 뒤 대화를 끊고 방을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로비로 나온 나는 저쪽에서 손을 흔드는 현지를 볼 수 있었다. 얼른 현지에게 다가간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현지가 생긋 웃으며 뒷짐 지고 있던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 받아.”
     “이게 뭐야?”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현지가 내민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실로 루니오스 카이샤의 형상을 수놓은 붉은 손목 보호대와 사뭇 비슷하게 생긴 물건.
     나는 손을 뻗어 현지가 내민 물건을 받아들었다. 붉은 손목보호대 정중앙에 ‘RED Paum'이란 글귀를 새겨놓은 손목보호대. 이런 걸 다른 곳에서 팔리는 없고 직접 만든 건가?
     “헤헤. 뜨개질이랑 십자수 스킬 수련치를 많이 올려서… 처음 만들어본 건데. 헤헤.”
     겉모습은 볼품없었지만 만든 이의 정성이 듬뿍 담긴 손목보호대. 나는 즉시 오른쪽 손목에 손목 보호대를 착용했다.
     “음. 좋은데? 고마워 잘 쓸게.”
     웃으며 대꾸하자 현지는 기분이 좋아진 듯 고래를 끄덕였다.
     “이거 전해주려고 접속한 거야. 지금 빨리 나가봐야겠다.”
     “그래, 어서 가 봐.”
     “응. 내일 봐.”
     대답을 끝마친 현지의 신형은 안개에 가려지듯 푹 꺼져버렸다. 내일 초인과 맞붙으려면 그만큼 컨디션 조절도 해야 하니 나도 잠을 푹 자둬야겠다.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푸쉬쉬.
     위잉, 철컥.
     “푸후우.”
     게임기기 캡슐의 문이 열린다. 나는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으며 숨을 내뱉었다.
     오늘 정말 소중한 선물을 받게 되었군. 그건 그렇고, 내일 있을 초인과의 대결. 비록 게임이라지만 긴장되는 턱에 괜스레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뛴다.
     신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초인들을 꺾고 궁수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부순 뒤 세릴리아 월드의 레드 파운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훗날의 일을 상상하자 왠지 모르게 흥분되는걸. 초인을 모두 꺾은 뒤엔 세릴리아 대륙으로 돌아와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게임베드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오늘 따라 달빛이 참 환하군. 집의 전등이 모두 꺼지자 환한 달빛만이 고요하게 내 방을 비췄다.
     

    제27장  레드 파운, 초인 페리안에게 도전하다

     언제나 반복되는 아침. 오늘도 컴의 알람소리에 기분 좋게 잠에서 갰다. 아침에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이 포근한 이불을 쉽사리 떨쳐낼 수 없다는 것. 더 이상 늦잠을 자게 된다면 오늘 초인과 겨룰 수 없었기에 나는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몸을 깨끗이 씻고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뒤 거실로 나와 스트레칭을 했다. 긴장감을 풀기위한 일종의 안정감 만들기라고 보면 되려나?
     “후아아암.”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촉촉해진 눈시울을 소매로 훔치며 내 방으로 향했다. 내 방 한구석에 떡하니 놓인 가상현실 게임기기. 캡슐 옆구리에 위치한 버튼을 누르자 맑은 기계마찰음과 함께 캡슐의 문이 열렸다.
     “웃차.”
     난 즉시 게임베드에 몸을 눕힌 뒤 헤드셋을 뒤집어썼다. 헤드셋을 뒤집어씀과 동시에 캡슐의 문이 스르르 닫히며 외부의 빛을 차단했고, 게임기기 내부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여성의 음성과 눈앞에 나타난 문구.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72.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어라?”
     현실의 강현성에서 가상현실의 레드 파운으로 탈바꿈하는 순간. 나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접속하는 시간에 딱 맞춰 절묘하게 로비로 걸어 나오는 동료들.
     아직 몇 접속을 하지 않아 모두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선두로 걸어 나오던 강찬이 손을 흔들었다.
     “여어, 레드. 지금 접속한 거야?”
     “아, 응.”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으흠. 어디 보자. 강찬, 경훈, 레온, 제리코, 루카. 제리코는 이전에 사주었던 귀공자풍의 고풍스런 옷에서 내가 손수 만들어준 지금 내 복장과 꼭 닮은 옷을 입고 있었다. 등 뒤로 아이언 숏 보우를 둘러메니 제법 폼이 나는데?
     반가운 듯 루카가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다가왔고 레온이 빙긋 웃어주었다.
     “아, 그건 그렇고. 너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에 가봤어? 완전 인기스타던데?”
     팔짱을 낀 채 건들건들 다가오며 혁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인기스타? 도대체 무슨 소리지?
     “무슨 말이야?”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혁의 뒤편에 서 있던 경훈이 대답했다.
     “아, 이번에 페리안에서 열린 무투 대회 영상을 운영진이 찍어서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조회수가 엄청나더라. 댓글도 장난이 아니던 걸?”
     “학교 가서 고생 좀 하겠다? 애들이 가만있을 리 없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모두들 물어올 걸?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라고 했을 때도 웅성댔는데.”
     그에 한 수 거두며 강찬이 맞장구를 쳤다. 쩝 어제 밖에서 돌아다닐 때는 날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잠자코 지켜보던 레온이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레드. 초인과 대결을 할 때도 오러를 발현시키지 않을 건가요?”
     “어?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몬스터 침공 이벤트 때는 붉은 섬광을 쏘아대더니. 이번 무투 대회에서는 단 한 번도 쓰지 않았어.”
     레온의 말에 혁이 맞장구쳤다.
     “음. 글쎄요. 오늘 붙을 상대는 명실상부한 초인인데, 최선을 다해야겠죠? 제아무리 NPC라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인공지능에 캐릭터의 레벨과 능력치를 따진다면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오려와 정령술을 모두 써야 할 것 같아요.”
     “처음부터 강수를 두는 건가요?”
     레온이 빙긋 웃으며 내게 물어왔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뭔가 할 말이 있는데 꾹 눌러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의 제리코. 나는 시선을 제리코에게 옮겼다.
     “제리코, 무슨 할 말 있어?”
     “아… 저, 그게. 형. 궁술은 언제부터 가르쳐줄 거야?”
     아차, 초인을 꺾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것 같다. 나는 얼른 쭈그리고 앉아 제리코와 눈높이를 맞췄다.
     “하하. 미안해 제리코. 형이 깜빡하고 있었다. 이번에 초인을 꺾고 나면 정말로 궁술을 가르쳐줄게.”
     “쳇. 그때도 또 깜빡하면 어쩌려고.”
     제리코가 삐친 듯 내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에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자, 약속할게. 반드시 초인을 꺾고 궁술을 가르쳐주겠다고.”
     “헤헤.”
     기분이 풀렸는지, 제리코가 머리를 긁적이며 작은 손을 내밀었다.
     “자, 도장 꽝.”
     “꽝.”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신대륙 아리시아의 한쪽 끝자락에 위치한 울창한 숲. 숲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 있었고, 왠지 모르게 으스스한 그런 숲이었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결코 혼자 돌아다닐 수 없는, 몬스터들이 우글대는 야생 밀림. 그 울창한 숲을 단신으로 유유히 걷는 한 인영이 있었다. 이런 숲을 아무렇지 않게 돌아니는 것으로 보아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 그런 청년이었다.
     “이쪽…이었나?”
     청년의 독백에 고요한 숲에 흐르던 정적이 깨졌고, 이슬이 맺힌 나무 잎사귀가 파르르 떨었다.
     “피닉스 아무래도 길을 잘못 택한 것 같아.”
     빼액.
     청년의 말에 그의 어깨에 앉아있던 붉은 매 한 마리가 그의 어깨에서 벗어나 높이 날아올랐다.
     ‘넷째 녀석. 취향도 독특하단 말이야. 이런 곳에 거처를 하다니 참.’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기던 청년의 표정이 별안간 진지해지더니 이내 사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멈췄다. 사방이 극도로 조용해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청년은 등에 둘러메고 있던 롱 보우를 집어 들고는 풀어진 활시위를 활 끝에 걸었다. 밝은 보라색을 띠던 청년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뚜둑.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에 청년은 재빨리 몸을 돌린 뒤 손을 어깨위로 넘겨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쿠웅.
     콰우우우우!
     청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숲에서만큼은 감히 그 어떤 몬스터라도 대적할 수 없는 숲의 제왕인 오우거였다. 자신의 영역권임을 알리며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는 듯한 그런 포효였다. 하지만 청년은 지극히 차분했다. 마치 자그마한 동네 강아지를 보는듯한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포효를 내지른 오우거가 재빨리 몸을 날렸다. 육중한 체구가 대기를 가르며 청년에게 쏘아졌다. 그에 청년은 재빨리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었고 화살촉에는 붉은 오러가 맺혔다.
     시위를 놓자 붉은 오러를 머금은 화살이 활시위를 벗어나 대기를 갈랐고,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오우거의 이마를 꿰뚫고 저만치 날아갔다.
     청년을 향해 맹렬히 쏘아지던 오우거의 힘찬 신형이 그대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맨땅에 거칠게 쑤셔 박힌 오우거를 뒤로한 채 청년은 유유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군.”
     오우거 한 마리를 순식간에 쓰러뜨린 청년의 정체는 다름 아닌 궁탑의 첫 번째 제자 로빈훗이었다. 이런 칙칙한 배경을 지닌 울창한 숲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로빈훗이 억지로 이곳에 들어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곳 신대륙에 막내사제가 발을 들였다는 것과 무투 대회에서 우승을 해 초인과 대결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넷째 사제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후우.”
     심호흡을 한 로빈훗이 낡아빠진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요?”
     문 안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로빈훗이 대답했다.
     “나야, 사제.”
     “아, 사형입니까?”
     대답과 동시에 낡은 오두막의 문이 덜컥 열렸다.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취향이 이럴까? 왜 이런 칙칙한 곳을 좋아하는 것일까? 문이 열리자 음성의 주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곳 분위기와는 상당히 상반되는 그런 외모의 소유자. 로빈훗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를 가진 그런 유저였다.
     “들어오십시오.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안 그래도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아.”
     로빈훗이 사제라 불린 미청년의 안내를 받으며 숲속의 작은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혼자 지내기엔 넓지도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작은 공간. 성인 두 명이 있기엔 조금 답답한 감이 있었지만 사제라 불린 청년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방 한족 구석에 놓인 횃대 위엔 로빈훗의 어깨에 앉아있는 것과 꼭 닮은 매 한 마리가 있었다.
     오두막 내부를 빙 둘러보던 로빈훗이 말했다.
     “사제. 혹시 막내사제를 알고 있는가?”
     “막내사제라면 라벤더 말인가요?”
     사제라 불린 미청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역시나,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군. 얼마 전 궁탑에 일곱 번째 제자가 새로 들어왔어.”
     “그런가요?”
     “그래.”
     로빈훗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청년이 다시 말했다.
     “궁탑의 제자는 원래 여섯 명까지 모집하는 것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어찌 일곱째가…….”
     “뭐 스승님의 눈에 띄었다거나 했겠지. 한때는 홈페이지에서도 떠들썩했었는데, 넷째 사제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전혀 없나봐?”
     “하하. 그랬었군요. 근데 그 막내 사제 때문에 이렇게 직접 행차하신 겁니까? 피닉스에게 전선구를 달아 보내시면 편했을 텐데. 아차, 내 정신 좀 봐. 사형,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차를 내올 테니.”
     청년이 급히 일어나 등을 돌려 오두막의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청년이 일어선 빈자리에 시선을 둔 로빈훗은 별안간 떠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로화를 뺀 나머지 궁탑의 제자들이 전부 신대륙에 모인 건가? 재밌어지겠군. 둘째 녀석의 반응이 궁금해지는데?’
    *    *    *
     초인과의 대결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더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걸 몸소 느끼고 있었다. 이제 곧 있으면 약속한 시간이 되어 대련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페리안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시간까지 월드타임으로 약 30분 남짓 남았군.
     담소를 나누며 로비에서 서있는 동안 로그아웃 상태이던 현지와 리아가 접속했고, 우리는 서둘러 페리안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도 페리안에 위치한 페리안 성은 지금껏 봐왔던 다른 성들과는 달리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는 것이었지만 짙은 회색의 거대한 벽돌로 차곡차곡 쌓아 만든 거대한 성벽이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고, 굳게 닫힌 성문은 태풍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을 만큼 굳건했다.
     “휘이~ 성문 한 번 참 크네.”
     “그러네. 세인트 모닝과 견줄 만한데?”
     혁의 말에 경훈이 맞장구치며 페리안 성을 둘러보았다. 성문 앞에는 고풍스런 은빛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기사들이 허리춤엔 롱 소드를 차고 손에는 기다란 장창을 꼬나 쥔 채 보초를 서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을 직접 보게 되니 무척이나 생소했다. 성문에 다다르자 보초를 서고 있던 두 명의 기사가 쥐고 있던 장창을 X자로 교차시켰다.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라… 성질 급한 혁이 베틀 해머를 풀어 쥐려는 것을 본 나는 서둘러 보초를 서고 있던 기사들에게 말했다.
     “저… 이번 무투 대회에서 우승한 레드 파운이라는 선수인데, 초인과 겨루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에 두 기사는 교차 시켰던 장창을 푼 뒤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예를 갖추었다. 초인과 대결을 하기 위해 왔다는 말은 즉, 자신들보다 무위가 높다는 것임을 알아차린 듯했다.
     성문 앞에 서 있던 두 기사가 신호를 날리자 성벽 위에서 대기 하고 있던 한 인영이 성 안쪽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에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고, 페리안 성의 내부가 서서히 공개 되었다.
     뎅! 뎅! 뎅!
     무언가를 알리는 듯한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성안에서 대가하고 있던 가슴팍에 페리안 기사단 문양이 새겨진 갑주를 걸친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성 안에 발을 들인 나를 비롯한 일행들을 둘러쌌다.
     “국왕페하의 암살 혹은 초인의 기습을 막기 위한 대비책이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선두로 서있던 한 노기사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쁜 뜻으로 이러는 건 아니겠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연무장으로 보이는 듯한 성의 중심부를 향해 걸었다. 페리안 성은 밖에서 볼 때와는 달리 상당히 아늑하면서도 편안한 그런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저 성 안에 이곳을 다스리는 국왕이 거주하고 있겠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다른 연무장. 드넓은 대지에 여기저기가 기형적으로 패인 것으로 보아 도전자들과 초인이 엄청난 혈투를 벌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전자를 제외한 모두는 이리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노기사의 말에 뒤따르던 현지와 제리코, 루카를 비롯한 일행들 모두가 기들에게 둘러싸여 연무장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잠깐. 저들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대결 중에 피해를 입지 않고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자리를 옮기는 겁니다. 문제 있으십니까?”
     혹시나 하는 맘에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노기사가 당황한 듯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등에 둘러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왼손에 쥐고 풀어진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었다.
     후, 이제 슬슬 정령도 소환해야겠군. 오랜만인걸.
     “바람을 관장하는 자여…….”
    *    *    *
     “연무장에 서 있는 저 자가 도전자인가?”
     “예, 그렇습니다.”
     페리안 근위기사단의 문양과 바인마하 왕국을 상징하는 문양이 가슴팍에 새겨진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을 하고 있는 한 기사의 물음에 그의 뒤를 따르던 기사 한 명이 대답했다.
     가슴에 새겨진 문양과 그저 가만히 서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오는 절대자의 기세. 현재 바인마하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초인임이 분명했다. 고요한 초인의 시선이 연무장 한 가운데 서 있는 도전자에게 던져졌다.
     들고 있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거대한 철궁과 도전자의 몸에 붙어있는 요상한 물체들, 하지만 초인은 요상한 물체들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도전자의 왼손에 쥐고 있는 거대한 철궁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궁수 도전자라…….’
     초인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분명 웃고는 있었지만 비웃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한때 궁수 도전자에 의해 패배의 쓴잔을 들이킨 이상 궁수를 만만히 보지 않는 것이다.
     그가 도전자가 기다리고 있는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페리안 공.”
     자신을 페리안 공이라 부를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사람. 바인마하 왕국의 국왕뿐이었다. 페리안 근위기사단 정예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초인에게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국왕폐하.”
     바인마하 왕국 페리안 근위기사단 페리안. 이것이 초인의 정체였다. 페리안과 그의 뒤를 따르던 기사들이 공손히 예를 갖추며 국왕을 대했다. 그에 국왕이 입을 열었다.
     “짐은 페리안 공과 도전자의 대결을 좀 더 가까이에서 관전하고 싶어 나왔소.”
     “하, 하지만…….”
     “짐은 충분히 안전하오. 도전자와 그의 일행이 짐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을 리는 없을 것이고, 행여나 그런 일이 있다 한들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수십, 수백 명의 기사와 레인저 부대가 날 호위하고 있소. 게다가 페리안 공도 있지 않소? 짐은 충분히 안전하오.”
     “알겠습니다.”
     공손히 예를 올린 그는 등을 돌린 채 연무장을 향했다.
     도대체 초인이라는 자는 언제 나오는 걸까?
     내 오른쪽 어깨에 앉은 주작의 부리에 손을 가져가며(물론 만져지진 않지만) 지루함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지금까지 봐왔던 기사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한 기사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자가 초인인 듯했다.
     은빛의 고풍스런 플레이트 부츠가 지면을 디딜 때마다 맑은 음향이 들려왔다. 이쪽으로 다가온 초인.
     “그대가 도전자인가?”
     묵묵히 서 있던 초인이 말했다. 투구를 제외한 풀플레이트 메일 차림이었는데, 50대 초반의 장년층으로 보였다.
     “그렇습니다.”
     내 대답에 초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이쪽을 보았다. 아무래도 내 손에 들린 아이언 레드 롱 보우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활을 응시하던 초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의 몸 주변에 있는 것은…….”
     “정령입니다.”
     “궁술과 정령술의 조합이란 건가… 그것으로 무투 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인가?”
     초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무투 대회에선 오직 궁술만 사용했습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초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오직 궁술만으로 소드 마스터 둘을 꺾었단 말이군.”
     “아직 할 말이 더 남았습니까?”
     나는 활등을 강하게 움켜쥐며 초인에게 물었다. 어찌 보면 상대의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지만 초인은 빙긋 웃었다.
     “성질이 급한 친구로군.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네. 내 전에 자네와 같은 궁수 도전자에게 패한 적이 있네.”
     초인이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로빈훗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
     “그는 궁수도 오러를 발현시키는 마스터의 경지가 있다고 했네. ‘레인지 마스터’라고 하더군.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이네. 자네도 레인지 마스터라는 경지에 대해 알고 있는가?”
     “네, 알고 있습니다. 저도 레인지 마스터니까요.”
     그에 초인의 눈빛이 일시적으로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 그럼 무투 대회에서 오러를 썼나?”
     “아니오. 정령은 물론 오러조차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하자 초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오러를 쓰지 않고 소드 마스터를 둘씩이나 꺾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네. 대회 당시 소드 마스터들도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나?”
     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니,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고 해야 맞는 표현일까?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내 대답에 초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에 찬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군. 나와 겨룰 때도 오러를 쓰지 않을 생각인가?”
     “아니오. 쓸 수 있는 비기를 모두 쓸 생각입니다. 어중간한 기술에 당신과 같은 초인이 당할 리 없으니까요.”
     “좋은 각오로군. 좋아, 그대에게 선제공격 3회를 허락하겠네.”
     초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검에서 짙고 푸른 오러가 물밀듯 밀려올라왔다.
     순식간에 시퍼렇게 물든 장검.
     검신에 맺힌 오러가 마치 피를 갈구하는 것처럼 탐욕스럽게 빛났다. 그리고 초인에게서 쏘아지는 기세.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두 개를 꺼내들었다. 초반 견제를 허락하는 것. 즉, 탐색전의 기본적인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초반 기선제압을 해야겠군.
     “백호, 앞으로 3회 선제공격을 가할 거야. 윈드 애로우 부탁 좀 할게.”
     “네, 마스터.”
     “퀵스텝.”
    *    *    *
     “더블 샷!”
     도전자의 외침과 동시에 도전자의 손에 들린 거대한 활에서 굵직한 붉은 섬광 두 줄기가 눈으로 식별하기조차 힘든 속도록 초인을 향해 폭사되었다.
     쐐애애액.
     그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관전하던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저, 저런 것이 가능한가?”
     국왕의 오른편에 서 있던 페리안 기사단 부단장 폴이 말했다. 국왕의 왼편에 서 있던 레인저 부대 대장으로 보이는 한 사수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촤촹!
     하지만 초인은 초인. 흠칫 놀라는 것 같았지만 이내 날아오는 화살의 궤적을 읽고는 시퍼렇게 물든 장검을 휘둘러 붉은 섬광 두 줄기를 쳐냈다. 그와 동시에 부서진 강기의 파편이 어지럽게 떨어져 내렸다.
     활을 쏜 도전자는 지면을 박차고 순식간에 초인의 밑을 파고들었다. 보통의 궁수라면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저 도전자도 정녕 초인이란 말인가? 소드 마스터인 나조차도 화살의 궤적을 뒤늦게야 읽어낼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잘된 건가? 초인들의 대결은 검을 갈고 닦는 기사들에겐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 되니까 말이야. 잘됐군. 도전자가 궁수란 것은 레인저 부대에게도 떨어진 떡고물이나 다름없어.’
     도전자가 궁수라는 말에 페리안 기사단의 레인저 부대도 연무장 근처에 잠입해 도전자와 초인의 대결을 관전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전자와 초인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초인의 밑을 파고들었지만 순식간에 몸을 뒤로 빼고 검을 휘두르는 그의 손속은 매우 매서웠다. 도전자가 접근하다 말고 급히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핏빛의 붉은 섬광이 수차례 초인에게 폭사되었다.
     촤촹, 촹!
     날아든 세 대의 화살을 쳐낸 초인은 검을 늘어뜨린 채 도전자를 응시했다. 3합의 선공이 끝났음을 알아차린 도전자는 초인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초인의 검을 응시했다.
     ‘이런 맹렬한 공격은 오랜만이군. 화살을 쳐내는 데 손목이 얼얼할 정도라니. 공격력 면에선 로빈훗이란 자보다 윗줄이군.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말이야.’
     잠시 심호흡한 초인 페리안이 입을 열었다.
     “자,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젊은 도전자여. 그 전에 그대의 이름이 뭔가?”
     그에 도전자가 손을 허리춤에 가져가며 대답했다.
     “레드 파운입니다. 퀵스텝!”
     “성질 급한 친구로군.”
     도전자가 몸을 날리자 초인이 검을 고쳐 잡았다.
     우측으로 몸을 날린 현성은 지금 이 와중에도 초인의 빈틈을 찾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아 붓고 있었다.
     초인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간격을 두고 탐색을 하던 순간이었다.
     돌연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 초인이 왼발을 슬쩍 빼는가 싶더니 허리와 팔을 회전시켜 검을 휘둘렀다. 그에 순식간에 폭발하듯 뿜어진 오러 블레이드가 3미터 남짓 자라나 현성을 향해 폭사되었다.
     “에잇!”
     천근추를 이용해 재빨리 바닥에 엎어진 현성의 머리 위로 시퍼런 광망을 뿜어내던 오러 블레이드가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빠른 속도로 대기를 갈랐다.
     부웅.
     ‘어이쿠, 턱이야. 경신법을 쓰는 타이밍이 너무 늦었어.’
     재빨리 입 주변을 훔친 현성은 인상을 펴지 않은 채 초인을 노려보았다. 무투 대회에서 붙었던 소드 마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지닌 자였다.
     바닥에 엎어지며 입에 들어간 흙을 다시 한 번 뱉어낸 현성은 활을 고쳐 잡았다.
     ‘로빈훗은 이런 상대를 꺾어단 말인가? 공성전에서 라벤더에게 느꼈던 실력 차이를 여기서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군. 저자를 꺾어야만 로빈훗에게 한 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건 틀림없어.’
     그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도중 페리안이 말했다.
     “자네의 공격은 날카롭고 강한 파괴력을 가졌더군. 하지만 아직 실전 경험이 부족해.”
     페리안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현성은 심호흡을 하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이번에 내가 가겠네.”
     말을 마친 초인이 오러를 머금은 장검을 고쳐 잡고 현성에게 몸을 날렸다. 그에 현성이 대경실색을 하며 백스텝을 밟았지만 초인은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제길.’
     비교적 연무장은 넓은 편이었지만, 계속해서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난다면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인지 현성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렇지!’
     무슨 방법을 떠올렸는지 돌연 현성의 눈빛이 변했다.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리고 소리쳤다.
     “그리스!”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초인이 디딘 지면의 마찰계수가 0이 되어 휘청거리는 순간. 현성은 퀵스텝을 거고 몸을 오른편으로 날렸다. 연습은 많이 했지만 실전에선 거의 써보지 않았던 기술!
     궁수의 탑 지하 수련장에서 익힌 현성만의 기술이 신대륙 아리시아에서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화살을 꺼내들며 우측으로 던져진 몸이 바닥을 뒹군 뒤 순식간에 안정적인 자세를 취해 활을 쏘는, 일반 궁수로서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도,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기술이 선보여졌다.
     순식간에 쭈그리고 앉은 자세를 취한 현성은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아직 페리안은 중심을 미처 잡지 못한 상황. 현성은 자신이 가진 절기를 선보이기로 한 듯 당겼던 시위를 놓으며 소리쳤다.
     “싸이클론 애로우!”
     피융.
     마치 쏘아진 탄환을 연상시키며 맹렬히 회전하는 붉은 섬광이 초인을 향해 쏘아졌다.
     콰콰콰콰.
     대기를 찢어발기며 자신을 향해 맹렬히 솟구치는 굵직한 붉은 섬광을 보며 간신히 중심을 잡은 페리안은 오러 블레이드를 한껏 뿜어낸 채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콰앙!
     오러 블레이드가 충만히 맺힌 검과 오러 애로우를 머금은 창한 자루를 연상시키는 굵직한 화살이 충돌해 눈부신 폭발을 일으켰다.
     조금 전 맹렬히 솟구친 화살을 쳐낸 페리안이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두 팔이 얼얼한 듯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방금 전 그 공격은 뭐지?’
     어찌나 팔이 얼얼한지 손에 쥔 검을 들고 있는 것도 버거울 정도였다.
     두 손으로 장검을 고쳐 잡은 페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난 현성을 경계했다.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이 검이 부서져버렸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가해야겠어.’
     생각을 마친 페리안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선 현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필요할 때만 간간히 끌어올리던 오러 블레이드를 한껏 끌어올린 채 검무를 추듯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아 순식간에 끝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검을 휘두르는 페리안에게는 일절의 망설임도 없었다.
     길이가 3미터에 달하는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이 휘둘러졌다. 그에 현성은 수초 사이를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공격을 유유히 피해냈다. 어찌 보면 쉽게 공격을 빠져나가는 것 같았지만 상당히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치익.
     “큭.”
     오러 블레이드의 끄트머리에 옷깃이 스친 현성은 인상을 쓰며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났다.
     ‘틈을 줘선 안 된다.’
     순식간에 뒤로 빠지는 현성을 보며 페리안은 급히 거리를 좁혔다.
    *    *    *
     푸캉!
     촤앙! 촤촹!
     시실 정도로 짙고 푸른 오러와 핏빛의 붉은 오러가 연신 격돌하며 눈부신 폭발을 일으켰다. 한쪽에서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초인과 도전자의 대결을 관람하던 현성의 일행은 눈을 부릅뜨고 대결을 지켜봐야만 했다.
     강찬과 경훈, 혁,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현성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런 초인과 막상막하로 맞붙을 수 있을 정도라니…….
     제리코는 화살에 오러를 불어 넣는 것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저 마른침만 삼키며 구경하고 있었다.
     “화살에 오러가 개입되니 무시할 수 없게 되는군요.”
     지켜보던 레온이 미간을 찌푸린 채 초인에게 맹공격을 퍼붓는 현성에게 시선을 두었다. 무투 대회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술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오러끼리 서로 충돌해 일으키는 눈부신 폭발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현성이 초인과 비슷하게 싸우는 것 같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승기는 점점 초인에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마나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는지 현성의 안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 것 때문인지 처음보다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마나뿐만 아니라 스태미나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었기에 현성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포션을 꺼내 마실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초인. 그에 안색이 좋지 못한 현성은 억지로 마나를 짜내어 퀵스텝을 시전해 초인의 공격을 피해냈다. 도망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공격을 피해내며 빈틈을 노려 활을 쏘았기 때문에 맹공격을 퍼붓는 초인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초인은 맹공격을 피해내며 현성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현재 그의 레벨은 72. 비록 레인지 마스터의 경지를 이룩한 캐릭터였지만, 캐릭터의 능력이 뒷받침해주지를 못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NPC지만 상대는 적어도 레벨이 200은 족히 넘는 캐리터. 레벨이 높은 만큼 생명력이나 스태미나, 마나와 스탯이 월등히 높다는 뜻이다. 물론 현성도 레벨에 비하면 사기성 짙은 손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스탯과 능력치가 따라주질 못했다.
     따라서 단기전에서는 강하지만 이와 같이 장기전 상대와 겨룰 경우, 포션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리가 풀렸는지 현성이 휘청했다. 그에 틈을 놓치지 않고 페리안이 검을 휘둘렀다.
     스악.
     “허억.”
     시릴 듯이 푸른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장검이 현성의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오러 끝에 스쳤다지만 잘 벼린 칼날에 스치는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생명력을 감소시키면서 부상률까지 남기기 때문에 응급치료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생명력이 복원되지 않기 때문이다(화살에 맞아 부상 가능성이 증가하는 것과 같은 이치).
     오른손을 가슴팍에 가져간 현성은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페리안은 틈을 주지 않고 그를 쫓았다.
    *    *    *
     “아니, 그게 실로 가능하기나 한가요?”
     청년의 물음에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로빈훗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있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거대한 철궁을 한 손에 쥐고 스몰 스피어만 한 화살을 쏘았지.”
     “그것보다 소드 마스터를 꺾었다는 것이 놀랍군요.”
     “사제도 스드 마스터와 맞붙어서 이길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잖아. 명색이 보우 마스터(Bpw Master)인데.”
     그에 청년잉 머리를 긁적이며 찻잔응ㄹ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로빈훗이나 레드 파운과 같이 레인저로 전직을 하게 된다면 궁탑의 제자의 특권인 레인지 마스터리 스킬을 그대로 이어가게 되지만, 레인저가 되기를 포기하고 기본 트리인 헌터나 사수로 전직을 하게 된다면 보우 마스터리 스킬로 변경이 된다.
     물론 일반 궁수들은 처음부터 보우 마스터리 스킬을 가지고 시작하게 되지만 궁탑의 제자들은 달랐다. 궁탑의 넷째 제자인 카일 또한 레인저를 포기한 케이스에 속했다.
     “소드 엑스퍼트 유저를 가볍게 제압하는 것으로 보아 막내 사제도 보우 마스터, 혹은 레인지 마스터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해.”
     차를 들이키는 카일에게 시선을 둔 로빈훗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죽음의 평원에서 레드 드래곤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었느데, 넷째 사제는 알고 있어?”
     “아, 네. 어떤 한 멍청한 유저가 레드 드레곤의 레어를 습격해 해츨링에게 상처를 남겼다더군요. ‘드래곤 슬레이어’ 호칭에 목숨을 건 얼간이들.”
     “이번에 드래곤 사냥에 참가해볼 생각인데. 넷째 사제는 어때?”
     로빈훗의 물음에 카일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저야 당연히 참가하려고 했죠. 호칭엔 관심이 없지만 제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시험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래? 그렇군. 내가 할 얘기는 모두 한 것 같으니 이만 가봐야겠어.”
     로빈훗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에 카일도 덩달아 일어섰다.
     “벌써 가시게요?”
     “둘째도 만나볼 생각이야. 셋째 녀석의 행방을 알아낸다면 쪽지나 전서구를 날려줘.”
     말을 마친 로빈훗은 그래도 등을 돌려 오두막을 나왔다.
    *    *    *
     오러 블레이드가 충만히 맺힌 검이 사선으로 베어져왔다. 나는 몸을 좌측으로 날려 페리안의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바닥난 스태미나 때문인지 풀린 다리로 인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게 되었다.
     부웅.
     풀린 다리 덕에 검은 내 머리 위로 지나갔다. 나는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마를 스친 검풍에 의해 뒤로 발랑 뒤집어졌다. 그렇게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가 싶더니 내 몸을 따사롭게 어루만지던 햇빛을 차단했다.
     “이룬 경지는 대단하지만 체력적인 면에서나 마나의 절대량 면이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것 같군.”
     묵직한 음성에 나는 시선을 페리안에게 고정시켰다. 햇빛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마나가 서서히 회복하면서 현기증도 어느 정도 가시기 시작하는 것 같군.
     나는 두 팔로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주저앉아 드러눕는 사이 백호와 주작이 몸에서 떨어졌는지 내 몸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현기증 때문인지 패배에 대한 공허함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자꾸만 고개가 숙여졌다.
     헌데 이상한 점은 페리안에게 패했지만 패배에 대한 씁쓸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까?
     지금까지 레벨에 비해 비약적으로 높은 손재주와 오러 애로우를 믿고 레벨 업을 중요시 하지 않았다. 레벨이 낮아도 비약적인 공격력으로 몬스터나 다른 유저들을 제압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초인인 페리안과의 대결을 통해 레벨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손재주 말고도 다른 스킬과 능력치가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가 초래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레벨이 지금보다 더 높았다면 마나의 최대치도 지금보다 월등히 높을 것이 분명했기에 장기전도 무리 없이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넋을 놓고 있을 때 무언가 시야로 불쑥 들어왔다. 은빛의 건틀렛. 내 시선은 은빛 건틀렛을 타고 올라가 손의 주인의 얼굴에 닿았다. 페리안이 잔잔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에 나는 페리안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좋은 경험을 했네. 역시 활에 오러가 개입되니 무시할 수 없군. 아까 날아드는 화살을 쳐낼 때 솔직히 손아귀와 손목이 얼얼했네.”
     철컹.
     페리안이 검갑에 검을 수납하며 말했다.
     “다시 도전할 생각이 있는가?”
     그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빙긋 웃어 보인 초인이 등을 돌리자 대기를 하고 있던 페리안 기사단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성으로 향하던 페리안을 호위했고, 지켜보던 일행이 연무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언 숏 보우를 등에 멘 제리코가 허겁지겁 달려와 마나 포션과 스태미나 포션을 내밀었다.
     “고마워.”
     나는 제리코가 건네준 포션의 마개를 따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나와 스태미나가 급속도로 회복되며 노곤했던 몸도 원상태로 돌아왔다.
     대결이 끝나니 몇 마디만 한 채 그대로 성으로 들어가 버리는군. 알아서 나가란 뜻인가? 나는 현지를 한 번 쳐다본 뒤 연무장을 나와 성문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죠, 모두.”
     발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다들 따라오고 있는 모양이군.
     웬일인지 정령들도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제28장  죽음의 평원을 향해

     어두컴컴한 지하 던전.
     묵직한 둔기와 날이 선 검이 휘둘러지는 소리와 함께 섬뜩한 파육음이 울려 퍼지는 것으로 보아 유저와 몬스터 간의 싸움이 시작된 것 같았다.
     퍼억.
     촹, 촤촹!
     “안 되겠어. 블레이징 소드로 버티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 플레임 웨폰!”
     말을 마친 유저의 검신이 시뻘겋게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형태를 갖춘 불기둥이 검에서 솟아나 2미터 길이로 자라났다. 그리고 뜨겁게 타오르는 겁화 주변에는 아지랑이가 피워 올랐다.
     “루샤크, 언데드 몬스터도 몰려오기 시작했어.”
     “알았다.”
     검을 든 마검사 유저의 말에 묵직한 둔기를 쥔 팔라딘 유저가 망치를 고쳐 잡더니 손잡이를 회전시켜 검을 뽑아내듯 뽑아냈다.
     스르릉.
     놀랍게도 커다란 배틀 해머에서 때 하나 묻지 않은 순은색의 롱 소드를 연상시키는 검신이 검갑에서 뽑아지듯 뽑혔다. 그리고 손잡이 거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등에 둘러멘 유저가 검을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파파팟!
     그에 유저의 검에서 금빛의 오러가 폭발하듯 뿜어져 검신을 감쌌다. 여간해서 볼 수 없는 휘황찬란한 금빛의 오러 블레이드, 성기사(팔라딘)들만의 전유물이자 전매특허인 신성력이 깃든 오러 블레이드의 발현이었다.
     “으라차!”
     괴상한 기합과 함께 검이 휘둘러졌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며 휘둘러진 검이 온몸이 온통 검게 물든 다크 스켈레톤을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부웅.
     금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횡으로 베어지면서 검이 지나간 궤적을 그리며 희미한 잔상을 남겼다.
     엄청난 힘을 과시하며 마검사 유저를 밀어붙이던 다크 스켈레톤도 팔라딘 유저의 오러 블레이드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휴, 팔라딘이 되고 나서는 이전과 딴판이잖아? 저런 괴물 녀석들을 혼자서 두셋씩 상대할 수 있다니!’
     “한눈팔지 마, 인마!”
     다크 스켈레톤의 커다란 베틀 엑스를 막아낸 팔라딘 유저가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마검사 유저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금만 더 늦게 공격을 막았다면 마검사 유저는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 미안.”
     그에 전신을 차린 마검사 유저가 검을 고쳐 잡고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가고일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였다.
     쿠와아아아!
     던전 안에서 울려 퍼지는 엄청난 포효. 유저들과 싸우던 몬스터들도 흠칫할 정도로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짙은 남색의 피부에 흉물스런 근육이 꿈틀거리는 팔뚝과 허벅지. 얼핏 보면 인간과 비슷한 체형을 가진 외눈박이 거인 몬스터 싸이클롭스의 등장이었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마검사 유저가 소리쳤다.
     “레드! 싸, 싸이클롭스다!”
     사방에서 달려들던 가고일을 전부 처리하고 마지막 한 마리에게 화살을 명중시킬 무렵 강찬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싸이클롭스가 나타났다는 강찬의 말에 나는 즉시 루카의 등에 탑승한 뒤 싸이클롭스를 향해 달리도록 루카에게 지시했다.
     “제리코, 넌 아직까지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많아. 우선 자주 마주치면서 그런 공포증부터 어떻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돼.”
     나는 루카의 등에 먼저 앉아 있던 제리코에게 말했다. 초인과의 대결이 끝난 뒤 현실 시간으로 일주일간 접속하는 내내 제리코에게 만만의 궁술을 가르쳤다.
     배우는 속도가 신기하리만치 빠른 제리코는 일주일도 안 되어 자신보다 몇 배나 큰 멧돼지나 맹수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느는 제리코를 보며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던 나는 이번에는 대상을 몬스터로 바꾸었다. 지금까지 한 것처럼 잘할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제리코는 오크에게 겁을 먹고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처음엔 오크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어 그런가보다 하고 타깃을 놀로 바꾸었지만 제리코는 오크를 상대할 때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봐주면서 하는 것이었지만 나와 대련을 할 때도 기가 죽지 않았던 건만 몬스터에게는 유달리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제리코는 지금 이곳 바인마하 왕국 근처의 던전에 따라오게 되었다.
     “으, 응.”
     제리코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싸이클롭스에게 다다랐을 때쯤 루카의 등에서 뛰어내려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우선 강력한 공격으로 견제해야 한다.’
     나는 꺼내든 화살을 시위에 걸고 싸이클롭스와 일정한 거리를 둔 뒤 힘껏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바르르 떨기 시작했고, 화살촉엔 핏빛의 붉은 오러 애로우가 발현되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금 싸이클롭스를 상대하게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2주 전, 초인과의 대결에서 패한 뒤 제리코를 가르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곤 죽자고 레벨업에만 매달리게 된 것이다. 물론 제리코에게 적응 훈련을 시킬 겸으로.
     이곳은 신대륙 아리시아.
     손재주만 믿고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은 내 계산 착오였다. 물론 손재주 덕에 이곳에서 이렇게 사냥이 가능했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는 다른 일행보다 뒤쳐졌다.
     다음 목적지인 유저들의 성지 파르판 제국에 가게 되면 지금보다 더 강한 유저들이 많을 것이 분명했기에 가기 전, 지금보다 좀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됐다. 신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초인들을 꺾어 궁수가 약하지만은 않은 존재란 것을 각인시켜야 했으니까.
     마친 레온도 7클래스에 입문한 뒤 파르판 제국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면 잠시 바인마하 왕국에 머무르는 것이 어떨지 제안했고, 일행 모두가 흔쾌히 승낙했다. 이전 세릴리아 대륙과는 다른 강력한 몬스터들이 널린 이곳 신대륙 아리시아를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도 이참에 레벨을 많이 올릴 생각이었으니까.
     마침 마법사길드에서(NPC로 구성된 바인마하 왕국의 마법사길드) 우연히 퀘스트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연구에 쓰일 싸이클롭스의 피와 가죽을 얻어다 달라는 퀘스트였다. 그리하여 지금 이곳 지하 던전에 오게 된 것이다.
     “싸이클론 애로우!”
     피융.
     쏘아진 탄환처럼 맹렬히 회전하는 굵직한 붉은 섬광이 싸이클롭스를 향해 쏘아졌다.
     쐐애액.
     화살은 정확히 싸이클롭스의 가슴팍에 적중했고, 화살에 맞은 싸이클롭스가 가슴팍을 움켜쥔 채 괴성을 질렀다.
     캬오오오오오오!
     싸이클롭스는 가슴팍을 움켜쥐지 않은 오른손을 휘둘렀다.
     부웅.
     거대한 방망이가 휘둘러지자 묵직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대기가 찢어지며 지르는 비명이 던전 내부에 울려 퍼졌다.
     “백스텝!”
     나는 백스텝을 밟아 싸이클롭스의 공격을 피해낸 뒤 화살 두 발을 더 쏘았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근접전은 되도록 피해야했다. 신장이 8미터가 넘는 싸이클롭스를 상대로 궁수가 근접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물론 아이언 레드 롱 보우 덕에 근접전도 무리 없이 굿할 수 있었지만(물론 기사나 다른 근접전투를 하는 직업에 비해 상당히 뒤처진다), 싸이클롭스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커다란 발에 밟힐 것이 분명했으니까.
     두 줄기의 붉은 섬광이 어둠을 가르며 싸이클롭스를 향해 쇄도했고,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붉은 섬광을 본 싸이클롭스는 몸을 돌려 회피동작을 취했다.
     푸욱.
     화살 한 발은 피해냈지만 나머지 한 발이 어깨 깊숙이 박히자 싸이클롭스는 괴성을 질렀다.
     화살촉에 충만히 맺힌 오러 애러우가 격중된 부근의 세포를 과사시키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치이익.
     쿠와악!
     싸이클롭스뿐만 아이라 다른 자잘한 몬스터들까지 상대해야 했기에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언데드 몬스터들을 죄다 쓰러뜨렸는지, 검을 해머에 꽂아 배틀 해머의 형태를 갖춘 뒤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으라차!”
     이쪽으로 달려온 혁은 싸이클롭스의 엄지발가락에 배틀 해머를 내리 꽂았다.
     콰지직.
     무언가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싸이클롭스의 괴성이 던전 내부를 가득 메웠다.
     콰아아아악!
     발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엄지발가락이 손상되자 싸이클롭스는 중심을 잃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마 한 가운데 박혀 있는 큼지막한 눈은 핏발이 잔뜩 서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렇지, 앞을 볼 수 없게 만든다면 더욱 상대하기 쉬워지겠군. 급히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혁을 보며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루샤크, 화살이 저 녀석의 눈에 꽂히면 그대로 맹공격을 가해줘.”
     나는 퀵스텝을 걸고 던전의 벽면으로 달리며 외쳤다.
     “알았다.”
     순식간에 벽면에 다다른 나는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건 뒤 싸이클롭스의 눈을 겨냥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파르르 떨어댔고, 화살촉에는 핏빛의 붉은 오러가 맺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백호, 부탁한다. 싸이클론 애로우!”
     “네, 마스터.”
     나는 백호의 대답을 듣고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탄환처럼 회전하는 붉은 섬광 한줄기가 싸이클롭스의 이마를 향해 쏘아졌다.
     쐐애액.
     이대로 싸이클롭스의 눈에 꽂힐 것이란 내 예상과는 달리 싸이클롭스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을 보고는 팔을 들어 눈을 가린 뒤 몸을 우측으로 슬쩍 틀었다.
     촤아아!
     눈을 공격하는 데 실패했지만 팔에 치명상을 남기게 되었다. 화살이 지나간 자리로 검붉은 싸이클롭스의 핏줄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눈을 공격하는 데 실패했지만 혁은 주저하지 않고 지면을 박찼다. 싸이클롭스를 제외한 다른 몬스터들을 모조리 해치웠는지 화염겸을 쥔 강찬이 혁을 뒤따랐고, 가고일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던 경훈도 들고 있던 것을 팽개치고 루카를 향해 내달렸다. 루카의 등에 탑승한 제리코를 보호하려는 심산이니 것 같았다.
    *    *    *
     같은 시각, 바인마하 왕국의 수도 페리안의 한 독서실.
     레온은 큰 책상 위에 마법사 모자를 올려두고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쳐 마법수식을 계산하고 있었다. 7클래스에 입문하기 위해 기본 적인 마법의 이론을 암기한 뒤 직접 시전을 해봐야 했기에 레온은 신중하게 문제를 풀어나갔다.
     사각사각.
     작은 숨소리와 양피지 위로 깃펜이 지나가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지 심오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온이 깃펜을 손에 쥐고 문제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난해한 룬어(Loon語)와 복잡한 수학 공식, 그리고 여러 가지 도형이 그려진 양피지. 일반인이 본다면 눈이 돌아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잠시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레온은 피식 웃으며 깃펜의 펜촉을 잉크에 찍어 양피지에 줄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됐다. 이론은 완벽하게 알아냈어. 6클래스에 입문할 때 풀었던 문제들이 쉬워 보일 정도인걸. 이런 문제를 낸 운영자들도 머리 깨나 마팠겠군.’
     문제를 풀어낸 레온은 잉크병의 뚜껑을 닫고 아이템 창을 열어 깃펜과 잉크병을 넣었다.
     마법수식을 완벽하게 풀어냈으니 이제 마법을 실현할 순서였기에 레온은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독서실을 나왔다.
     “휴우… 문제 하나 푸는 데 무지 오래 걸렸군.”
     마법서를 팔에 끼운 채 독서실을 나온 레온은 고개를 들어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지는 해를 바라보며 오늘 풀었던 마법수식을 곱씹었다.
     지금까지 풀어왔던 마법수식들과는 전혀 다른,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문제들. 단 한 가지 수식을 풀었을 뿐이었지만 6클래스 마법 수식을 서너 개를 풀어내는 시간과 엇비슷하게 문제를 풀어냈다.
     “슬슬 허기지는군. 간단하게 끼니나 때울까? 그건 그렇고, 레드 일행은 싸이클롭스를 잡았으려나? 며칠 전부터 계속 찾아 헤맸을 텐데.”
     고개를 느릿하게 저으며 발걸음을 옮기던 레온은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추었다. 지나가는 유저들의 대화가 그의 발걸음을 묶어둔 것이었다.
     “이봐, 단토스. 이제 슬슬 파르판 제국으로 가볼까?”
     “왜? 드래곤 출물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리고 죽음의 평원을 지나려면 말까지 구입해야 해. 게다가 오크 군대를 우리 둘로 어떻게 상대해? 아무리 2차 전직을 했어도 수적으로 밀어붙이는 녀석들을.”
     “왜? 네 가공할 마법이라면 녀석들을 능히 날려버리고도 남잖아?”
     유저들이 대화를 낱낱이 듣고 있던 레온은 단토스라는 유저에게 시선을 던졌다. 자신과 같은 마법사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유저들이 점점 멀어지자 레온은 간단한 수인을 맺었다.
     “인비저빌러티(Invisibility).”
     주문 영창과 동시에 레온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퍽 꺼졌다. 그리고 작게 들리는 발소리만이 이야기를 나누는 유저들의 뒤를 따랐다.
     ‘죽음의 평원이라… 좀 더 정보를 얻은 뒤 끼니를 때워야겠어.’
     레온이 피식 웃으며 최대한 발소리를 죽였다. 기척을 죽임과 동시에 모습을 사리지게 하는 마법인 데다 클래스가 높은 레온이 시전한 만큼 효과는 탁월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유저들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나갔다.
     “대신 캐스팅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잖아. 그동안 누군가가 시간을 벌어줘야 하는데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녀석들을 너 혼자 다 막아내게? 그리고 오크 군대뿐만 아니라 중형 몬스터들도 끼어든다는 것도 잊지 마.”
     “아니, 뭐…….”
     “마스터급의 최소 6인으로 구성된 파티만이 그곳을 지나갈 수 있어. 물론 파르판 제국엔 대부분이 마스터급이 유저들이란 거야. 그곳을 뚫고 들어간 거지. 우리 둘론 어림도 없어. 게다가 파티나 끼워줄까? 마법사인 난 그나마 끼워주지만, 아직 마스터급에 미치지 못한 널 누가 끼워주겠어?”
     단토스라는 유저의 말에 클레이 모어를 등 뒤에 멘 기사 유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엿듣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그들은 제갈 길을 가고 있었다. 대충 정보를 얻어낸 레온은 즉시 은폐마법을 해제한 뒤 블링크(Blink, 공간전이)를 시전해 독서실 앞으로 이동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죽음의 평원이라… 독서실에서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어낸 뒤 밥을 먹어야겠군. 마침 잘됐어. 7클래스 마법을 시험해볼겸. 실전 경험도 많이 쌓여야 제대로 된 워 메이지(War Mage)가 될 수 있지. 레드군도 요 근래에 사냥에 몰입해 있으니 정말 좋은 조건이군.’
     알게 모르게 미소를 지은 레온은 다시 독서실로 들어와 여러 가지 서적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죽음의 평원에 대한 서적을 찾아낼 수 있었고, 머릿속에 모든 정보를 집어넣을 수 있었다.
     바인마하 왕국 북문으로 나와 레디안 숲으로 나오면 드넓게 펼쳐지는 들판이 있는데, 그냥 보기엔 온통 초록빛 잔디로 뒤덮인 광활한 대지이다.
     새하얀 뭉게구름과 푸른 하늘, 그리고 드넓게 펼쳐진 푸른 들판.
     분위기에 이끌려 무턱대고 들어간 많은 사람들이 오크군대나 몬스터무리에 의해 도육되어 처참하게 죽어갔다는 그런 내용이 책에 기록 되어 있었다.
     ‘마스터급의 유저들이라… 제리코와 리아를 제외한다면 모두 마스터급을 상회하니까 지나가는 데 별 문제는 없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레온은 책을 덮고 책꽂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쿠우우.
     기성을 내지르던 싸이클롭스가 힘이 다했는지 뒤로 벌렁 넘어졌다.
     쿠웅.
     묵직한 음향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번졌다. 모두가 합공하니 그 강하던 싸이클롭스도 이렇게 무너졌다.
     오우거에 필적하는 힘과 민첩한 몸놀림. 그리고 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신장을 가진 싸이클롭스는 몬스터라기보다 유사인종에 가까운 녀석이었다.
     지능적으로 상황을 대처하면서 일행을 상당히 애먹였다. 루카를 보하며(사실 루카의 등에 탑승한 제리코를) 싸운다는 것을 간파하자 루카에게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겁에 질린 제리코는 루카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물론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샤라는 녀석답게 루카는 싸이클롭스의 공격을 모두 회피했다. 가끔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간신히 공격을 피할 때도 있었지만 우리가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싸이클롭스를 처단할 수 있었다.
     일행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모두들 치명상을 입고 던전 바닥에 주저앉아 있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이템 창에서 파스를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이미 정령들이 소환된 상태. 물론 내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지만 청룡에게 치료를 해달하고 부탁하면 되니까.
     “청룡, 왼팔 치료 좀 부탁해.”
     “…알았다.”
     망할 싸이클롭스 녀석. 왼팔을 쓰지 못하면 활을 쓰지 못할 것이란 걸 인식했는지 날 공격할 땐 왼쪽 팔만 노렸다.
     물론 이 상처는 싸이클롭스의 날카로운 손톱에 의해 생겨난 상처였다. 어깨가 탈골된 혁과 다리가 부러진 경훈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뭐, 응급치료 스킬과 함께 생명력 포션을 마신다면 말끔히 낫겠지만.
     아, 혁이 있으니 굳이 응급치료와 생명력 포션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큐어.”
     주문 영창과 함께 기괴한 각도로 틀어졌던 혁의 어깨가 점차 원래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우득.
     “큭.”
     부상을 치료한 뒤 힐링을 이용해 자신의 생명력을 회복시킨 혁은 돌아다니며 경훈과 강찬을 치료했다.
     “휴우…….”
     나는 던전의 벽면에 기대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며칠 동안 찾아다녔던 싸이클롭스 녀석을 오늘로서 토벌할 수 있게 되었군.
     치료를 마친 혁은 자리엣 일어나 싸이클롭스의 시체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물론 피와 가죽을 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나도 도와야겠군. 물론 저 커다란 싸이클롭스의 피와 가죽을 전부 갈무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싸이클롭스를 향해 휘적휘적 걷는 내 뒤로 루카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휴우… 이런 퀘스트 다신 받지 마. 아까 다리가 무진장 아팠는데. 로그아웃하고 나서 내 다리 괜찮나 살펴봐야겠다.”
     경훈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다가왔다.
     강찬은 플레임 웨폰을 거두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몬스터들이 리젠되어 무방비 상태의 우리들을 공격하게 된다면 골치가 아프니까.
     “형, 팔은 괜찮은 거야?”
     루카의 등에서 내려온 제리코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에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다리를 떠는 것을 보아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싸이클롭스 같은 거대한 대형 몬스터를 접해봤으니 이제 오크 따위의 저급한 녀석들에겐 겁도 먹지 않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제리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됐다. 이 정도면 길드에서 요청한 양과 동일해. 이제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나가자!”
     싸이클롭스의 피와 가죽, 그리고 서비스 겸 이빨과 발톱, 손톱까지(물론 하나씩) 뽑아낸 혁이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쳤다.
     저 싸이클롭스의 시체는 다른 몬스터들의 먹잇감이 되겠지?
     혁이 재료(?)를 모두 갈무리하자 강찬은 플레임 웨폰을 거두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자, 그럼 간다!”
     나는 아이템 창에서 꺼내든 워프스크롤을 들고 부욱 찢었다. 그러자 찢어진 워프스크롤을 중심으로 새하얀 빛 무리가 폭사되더니 일행 모두를 감쌌다.
     우리는 눈 깜짝할 새에 마법사 길드의 로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퀘스트를 청산하자 상당량의 경험치와 함께 돈을 획득할 수 있었고, 그간 사냥을 해오면서 얻었던 경험치에 육박하는 경험치도 얻을 수 있었다.
     [레벨 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 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가디언 제리코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가디언 제리코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가디언 제리코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오호라, 어디 보자.
     “상태 창, 오픈!”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레인지 마스터
     Lv. 77
     생명력(HP). 1102
     마나(MP). 600
     스태미나(SP). 1,400(배고픔 수치 0%/ 갈증 0%)
     힘 137
     체력 65
     민첩 207(+30)
     손재주 550
     지력 15
     지혜 21
     행운 15(+10)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310~440
     방어력 10(+12)
     마법방어력 2(+10)
     남은 스탯 포인트: 10
     바람(백호)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9.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9.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8. 친화력 100%
     [상세정보]
     가디언(제리코) Lv. 17 호감도 100%
     [상세정보]
     “휘유, 많이도 올랐군.”
     상태 창을 확인한 나는 즉시 스탯 포인트를 민첩과 지혜에 분배했다. 단기전에서는 마나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장기전을 겪어본 결과 마나의 절대량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높은 손재주 대신에 지혜에 스탯 포인트를 분배했다. 물론 민첩 3, 지혜 2라는 비율로.
     퀘스트를 청산한 뒤 정령들을 모두 소환해제 시키고 우리는 마법사의 길드 밖으로 나왔다.
     “허기진데 어디서 배나 채우자.”
     혁이 말했다.
     저 녀석들은 레벨 업을 하지 않았나보군. 나는 레벨업을 통해 공복도까지 모두 채워진 상태. 하지만 다른 녀석들의 표정을 보니 모두들 허기진 것 같았다.
     “가까운 식당에 가서 배나 채우자.”
     나는 피식 웃으며 앞장서 걸었고, 그 뒤로 제리코를 등에 태운 루카와 강찬, 혁, 경훈이 내 뒤를 따랐다.
     좁은 골목을 지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로 나온 우리는 식당을 향하던 도중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마법서를 들여다보며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레온이었다.
     “여어, 레온!”
     손을 흔들며 소리치자 레온이 마법서에서 시선을 떼고 이쪽을 보며 빙긋 웃었다.
     “레드, 표정을 보아하니 싸이클롭스를 잡는 데 성공했나보군요.”
     “하하, 네. 며칠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어요. 데시카와 루사크는 다시 지하 던전에 가기 싫다고 하는군요.”
     나는 고개를 돌려 경훈과 혁을 보았다. 혁은 평소의 투덜대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경훈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강찬이 녀석은 요새 왜 이렇게 말 수가 줄어든 것일까?
     “저흰 지금 식당에 가서 배나 채울까 하는데. 레온도 같이 가실래요?”
     잠자코 있던 강찬이 말했다. 그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가까운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늦은 저녁이라 그런지 식당은 한산했다. 몇 안 되는 NPC들과 유저로 추측되는 몇몇 사람만이 널찍이 떨어져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 뒤 시선을 레온에게 고정시켰다.
     “우선 티아 씨와 리아가 오면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먼저 음식부터 주문할까요?”
     “그러죠. 전 고기면 다 좋습니다. 에헴.”
     레온의 말에 혁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레온이 음식을 주문했고, NPC가 주문을 받은 뒤 조리실로 걸어 들어갈 때쯤 현지와 리아가 무언가를 잔뜩 사들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대부분이 의류용품 같은데, 도대체 돈이 어디서 나서 저런 걸 산 것일까?
     나와 눈이 마주친 현지가 후다닥 달려와 내 옆에 앉았다.
     “헤헤. 제시간에 맞춰 온 건가요?”
     “네. 음식은 이미 주문했으니 이따 같이 먹으면 됩니다.”
     티아의 물음에 레온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와, 무슨 옷을 이렇게 많이 사왔어요? 허, 참.”
     혁의 물음에 얼굴이 빨개진 리아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이것저것 사왔어요. 오, 오빠, 색 바랜 로브는 이제 세탁하고 새로 산 옷 좀 입어봐.”
     평소와는 다른 리아의 태도에 레온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으흠, 혁이 녀석 앞에선 이상해지는 리아였다.
     그렇게 혁과 리아를 번갈아가며 보고 있을 때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내 오른팔을 감쌌다.
     “오빠, 퀘스트 받은 건 다 끝난 거야?”
     “응. 요 녀석들이 도와줘서 훨씬 쉽게 끝났어.”
     나는 모두를 둘러보며 제리코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에 제리코느느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탁자 아래 배를 깔고 엎드린 루카의 앞발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제법 친해졌는지 이젠 서로 의지를 할 정도였다.
     나중에 헤어질 땐 무척 아쉬워하겠는걸. 하지만 어쩌겠는가,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것을.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있는 동안 주문한 음식이 즐비하게 식탁 위로 차려졌고, 간만에 푸짐한 음식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음식을 탁자 위에 즐비하게 늘어놓은 점원이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레온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아까 이야기하겠다던 본론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물 필요가 없어졌다는 겁니다.”
     “그, 그렇다면 벌써 7클래스에 입문했다는 건가요?”
     큼지막한 닭다리를 입에 막 집어넣으려던 강찬이 말했다. 그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웠는지 레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요. 아직 완벽한 7클래스 유저(User)라고 보기엔 뭐합니다. 7클래스에 입문한 건 기정사실이지만, 아직까지 이론만 마쳤을 뿐 마법을 발현시키진 않았거든요.”
     그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나 역시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는 터라 2클래스의 마법수식조차 풀지 못했다. 3클래스로 올라가는 고위급 과정(대부분 판타지 소설을 보는 이들이라면 3클래스의 경지를 우습게 보는데, 3클래스의 공격 마법이라면 어지간한 몬스터는 잡을 수 있다)을 보는 순간 마법서를 덮어버렸으니, 그동안 레온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익히 짐작할 만했다.
     배고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보자 나도 모르게 식욕이 생겼다. 그래서 잘 익은 베이컨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오호, 베이컨이 입에서 살살 녹는군.
     “일단 제가 7클래스에 입문했다는 것은 둘째 치고, 레드 일행도 퀘스트를 끝냈으니 이제 파르판 제국으로 떠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레온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흐흐, 드디어 파르판 제국을 향해 갈 수 있는 것이로군.
     잠시 생각에 빠지려는 찰나 또다시 레온이 말했다.
     “아, 그리고 레드 군에게는 정말 좋은 경험이 되겠는걸요? 가는 동안 수없이 몬스터들의 낯짝을 보게 될 테니까요.”
     “그런가요?”
     “네. 우선 이곳 바인마하 왕국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죽음의 평원이란 곳을 반드시 지나야 파르판 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죽음의 평원은…….”
     레온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에 제리코를 제외한 모두가 기대 반 걱정 반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리코는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다.
     죽음의 평원.
     우선 레온이 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전에 있었던 공성전 이벤트에서 레온이 보여주었던 가공할 마법. 강력한 마법이 수없이 모여드는 몬스터들의 중심부에 작렬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레온의 말을 들어보니 7클래스에 입문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진 마법을 발현시켜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강력한 마법을 써야하는 순간에 마법을 발현시키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저, 레온, 이론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냥 출발해도 괜찮을까요?”
     “하하, 걱정할 것 없어요. 이론이 맞았으니 마법은 반드시 발현시킬 수 있습니다. 세릴리아 월드의 마법 조건은 그래요. 아무리 현실감이 또렷하다고 해도 이것은 게임에 불과하니까요. 만약 제가 알고 있는 공식이 잘못된 것이라면 마법은 발현하지 않겠죠. 이미 열 번 이상 다시 풀어본 결과, 이론은 틀리지 않았어요.”
     말을 마친 레온은 빙긋 웃으며 포클르 손에 쥐었다.
     크으, 뭔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군.
     그건 그렇고, 죽음의 평원이라… 파르판 제국으로 향하는 여정이 꽤나 힘들 것 같군.
     파르판 제국을 향해 떠날 것을 생각하니 세릴리아 대륙에서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아리스 노아로 떠나며 있었던 일들까지.
     예전 기억을 떠올리자 왠지 모르게 자꾸 입 꼬리가 올라갔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허겁지겁 음식을 먹던 혁이 물을 들이켠 뒤 말했다.
     “그건 그렇고, 현, 아니 레드 바인마하 왕국의 초인에게 져서 어떡하냐? 레벨 좀 더 올린 뒤에 다시 도전할 거야?”
     “당연하지.”
     “그럼 파르판 제국에 가지 않고 여기서 레벨 업만 죽자고 할 생각이야?”
     “그건 아니야.”
     혁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파르판 제국에서 이곳으로 오겠다는 거야? 그 멀다는 곳에서?”
     “꿀꺽. 그런 건 상관없어요. 제가 이곳에 마법진을 하나 설치 해두면 언제든지 올 수 있으니까요.”
     혁의 물음에 음식을 먹던 레온이 급히 삼킨 뒤 대답했다.
     휴우…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됐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레벨을 올려 아리사아에 존재하는 NPC초인들과 그랜드 마스터에 도달한 유저들과 대마법사들을 꺾고 나머지 사형들과 붙어볼 생각이다. 물론 내 최대의 목표는 로빈훗을 꺾는 것.
     지금보다 더 강해진다는 생각에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풍성하게 차려졌던 식탁이 이제 빈 접시만 남고 모두들 배가 부른 듯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자, 이제 슬슬 파르판 제국으로 떠날 채비를 해볼까요?”
     레온은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나며 말했다. 그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왔다.
     “먼저 말을 구해야 된다고 하는군요. 이곳에 마시장이 있으려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말을 마친 레온은 서둘러 수인(手認)을 맺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오호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시장이 있네요. 자, 저를 따라오세요.”
     먼저 앞장선 레온의 뒤로 일행이 서둘러 따르기 시작했다. 흐흐,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마법사란 직업은 참 편해 보이는 걸. 복잡한 수식 계산만 뺀다면 다 좋은데 말이야. 쳇.
     수도 페리안에 위치한 마시장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크고 작은 말들. 백마와 갈색 마, 흑마가 무수히 많았고, 여기저기서 말 장수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일행과 함께 시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도중 레온이 말했다.
     “말이 적어도 일곱 마리는…….”
     “아, 저는 굳이 말을 구입할 필요는 없어요. 루카를 타면 되니까요.”
     나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제법 덩치가 당당해진 루카, 그렇다고 말처럼 크진 않았지만 속도 면에서는 전혀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여섯 마리만 구입하면 되겠네요? 제리코는 레드 씨랑 같이 루카에게 타면 되…….”
     “저도 말 탈 줄 알아요!”
     리아의 말을 끊으며 제리코가 소리쳤다. 마시장에 오니 말을 타고 싶었던 모양이다. 꼭 붙어 다니던 루카를 두고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보니 말을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응? 말을 탈 줄 알아?”
     “네. 저희 마을이 온전하던 시절 할아버지에게 말 타는 법을 배웠거든요.”
     순간 제리코의 눈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순간적이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저 어린 나이에 오크들에 의해 마을을 잃고 할아버지와 이별을 해야 했으니,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오크들에게 마을이 토벌되던 당시 얼마나 울던 제리코인가?
     나는 고개를 내저은 뒤 제리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말 일곱 마리를 구입하죠.”
     레온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    *    *
     같은 시각, 중원 채널.
     섬서(陝西)의 함양에 자리를 잡은 백월문(白月文)의 연무장.
     촹, 촤촹!
     구슬땀을 흘리는 큰 신장을 가진 한 소년과 늙수그레한 노인이 검을 섞고 있었다. 두 무인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무아지경(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공방을 나누었다.
     “차앗, 백월검법(白月劍法) 제2초, 환영결(幻影決)!”
     소년의 외침에 무수한 검의 잔영이 노인의 사방을 덮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사방에서 활을 쏜 것과도 같았다.
     “웃차.”
     하지만 노인은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검의 잔영을 일일이 깨부수기 시작했다.
     ‘이때다!’
     때를 노린 소년의 검에서 눈부신 빛이 폭발하듯 뿜어졌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검강(劍鋼)이 길게 늘어졌다.
     “응?”
     일일이 잔영을 깨부수던 노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소년의 검에 고정되었다. 노인의 검에서도 눈부신 빛이 폭발하듯 뿜어졌고, 소년이 발현시킨 검강보다 더욱 짙고 긴 검강을 끌어올렸다.
     “에잇!”
     소년이 일격을 날렸지만 노인의 손속은 매서웠다. 종횡무진 휘두르는 검을 모조리 다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두 검이 대기를 갈가리 찢어발기며 격돌을 할 때마다 강기의 파편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촤앙!
     치열한 공방을 나두던 두 자루의 검이 이내 맞부딪혔다. 노인과 소년의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이다.
     두 손으로 검병을 움켜쥔 채 안간힘을 쓰는 소년과 한손으로 비교적 잘 버텨내는 노인. 이 둘의 실력 차이를 눈에 띄게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연무장을 둘러싼 몇몇 유저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둘의 대결을 관전하고 있었다.
     “어떠냐, 민아. 계속해볼 테냐?”
     노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 비웃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친손자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소년의 정체는 바로 현성의 둘도 없는 친동생인 현민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현민은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헤, 헤헤. 이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죠.”
     “그러냐?”
     현민의 말에 노인은 검을 쥐지 않은 반대편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물론 현민이 보지 못하게 뒷짐을 진 채로.
     “자, 간다.”
     “넷?”
     노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뒷짐을 지고 있던 왼손이 매서운 속도로 현민의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내력이 가득 실린 주먹질이었다.
     “헛.”
     그에 현민은 기겁하며 있는 힘껏 신법을 발휘해 노인과 거리를 두었다. 한 번 할아버지의 주먹에 맞아본 현민은 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기분과 함께 그대로 쓰러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피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후후, 녀석.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느는구나. 머지않아 절정(絶頂)의 벽을 깨고 초절정(超絶頂), 즉 화경(化境)의 경지를 이루겠구나.’
     멀리 떨어진 현민을 보며 노인은 빙긋 웃었다.
     물론 게임인 이상 절정의 벽을 깨고 초절정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과정은 없지만 한 단계의 차이는 엄청났다.
     노인과 현민의 레벨은 엇비슷했지만, 이룬 경지(게임 내에서 쌓은 수련치로 보면 된다)가 달랐기에 이렇게 현민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실전 경험 또한 현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았기에 현민이 밀리는 것은 당연했다.
     “앗, 할아버지! 저 내공이 다 떨어진 것 같은데요?”
     “그러냐? 그럼 이쯤에서 그만하도록 할까?”
     검강을 거둔 노인은 검을 허리춤의 검갑에 수납한 뒤 현민을 향해 다가갔다. 순간, 현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이얏!”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노인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가는가 싶더니 새하얀 안개와 같은 것이 노인의 전신을 덮었다.
     노인은 자신을 향해 쇄도해 오던 검을 쥔 현민의 팔을 낚아챈 뒤, 잡기 기술을 이용해 현민을 바닥에 메다꽂았다.
     쿵.
     “으헉, 내 허리.”
     “한 번 속아줬으면 됐지, 몇 번이나 써먹는 게냐?”
     노인이 빙긋 웃으며 현민을 일으켜 세웠다.
     “졌으니 어서 가서 수련이나 더 하고 오거라.”
     “쳇. 한 번 더 보내주는 것도 안 되나요?”
     현민이 뾰로통한 얼굴로 등을 돌린 채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현민과 노인이 붙게 된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현성과 만나기 위해 잠시 세릴리아 대륙으로 건너간 현민은 중원에서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를 보고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형과 만날 수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몬스터라는 것도 사냥을 해보았으니 세릴리아 대륙은 현민의 혼을 쏙 빼놓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그 후 세릴리아 대륙에 재미를 붙인 현민은 한 번만 더 세릴리아 대륙에 보내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고, 그에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한 가지 제의를 했다.
     “네가 화경의 고수가 된다거나 나와 비무를 벌여 이간다면 보내주겠다.”
     “정말요?”
     “그럼.”
     그 뒤로 현민은 연공실에서 죽도록 수련을 했다.
     며칠 동안은 잠자코 수련을 하던 현민. 하지만 수련치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그에 참지 못한 현민이 이렇게 할아버지에게 비무 요청을 했고 그것이 이 대련의 시발점이 된 것이었다.
     “허허, 녀석. 얼마나 가고 싶었으면.”
     물론 오고가는 데 별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현민은 백월의 소문주라는 이유 때문에 정사대전이 한창인 이때 단신으로 문(文) 밖에 나가게 된다면 정사마를 초월한 유저들이 한꺼번에 달려들 게 분명했기 때문에 노인을 포함한 문의 고수들을 대동해야 했다. 현민이 세릴리아 대륙으로 갔을 때는 정사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인지라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노인은 연무장을 나가는 현민을 보다 뒷짐을 쥐고 자택을 향해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을 나온 현민은 연공실로 들어가 수련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에게 패했으니 이젠 싫어도 초절정의 벽을 깨야 했기 때문이다.
     ‘다시 형과 만나려면 화경의 고수가 되어야 한다.’
     현민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겼다.
    *    *    *
     “감사해요~.”
     울상이 된 말 장수에게 눈을 찡긋한 리아와 현지가 말 일곱 마리를 몰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실로 엄청난 흥정 스킬(?)을 보유한 둘이었다.
     “우와, 여기서 말을 타보게 되다니.”
     현지와 리아가 몰고 온 말 중 튼튼한 갈색마의 고삐를 받아쥔 혁이 말의 등 위로 훌쩍 올라탔다. 싱글벙글 웃으며 말에 탑승한 혁의 표정이 별안간 오묘해졌다.
     “엥? 승마 스킬? 이건 또 뭐 해먹는 스킬이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승마 스킬. 수련치가 주어지지 않은 기본적인 스킬이지요. 그 스킬이 있으면 누구나 말을 몰 수 있어요.”
     레온이 리아가 건네주는 말고삐를 받으며 말했다. 레온은 별걸 다 알고 있군. 그리고 현지, 리아에게서 말고삐를 받은 일행은 말의 등 위로 훌쩍 올라탔다.
     히힝.
     제리코의 말은 아직 앳된 말이었는데, 제리코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을 정도로 순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나가는 방향은 알죠, 레온?”
     “물론이죠.”
     내 물음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루카의 등에 올라 타 보실까?
     “다시 부탁한다, 루카.”
     캉캉!
     “웃차.”
     나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루카의 등에 올라탔다. 레온을 선두로 우리 일행은 느릿하게 마시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제29장  죽음의 평원에서의 혈투

     두두두두.
     예닐곱 마리의 말과 어디서나 볼 수 없을 듯한 커다란 흰 늑대가 숲의 오솔길을 지나고 있었다.
     로브를 입은 마법사 유저의 말 머리를 선두로 오솔길을 달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현성과 그의 일행이었다.
     “한참을 달렸는데도 아직 여기까지 밖에 오지 못했군.”
     현성이 주변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워낙 빨리 달리고 있었기에 붉은 망토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한참을 달렸지만 말들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물론 루카는 그야말로 신이 나서 달리고 있었다.
     ‘루카 녀석. 상당히 신난 것 같은데? 하긴, 언제 이렇게 달려봤을까. 성체가 되고난 뒤로 처음인 것 같군.’
     현성은 피식 웃으며 달리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산책을 하는 개처럼 혀를 내밀고 내달리는 루카. 그런데 신나게 달리던 루카의 안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작게 목청을 울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몬스터가 감지된 것이었다.
     “주변에 몬스터가 있는 것 같아요.”
     현성이 등에 둘러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손에 쥐며 말했다. 그에 제리코도 등에 둘러메고 있던 아이언 숏 보우를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야속이라도 한 듯 현성과 동시에 풀어진 시위를 활 끝에 걸었다.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놀 무리였다.
     끼루룩, 끼루룩.
     하이에나의 형상을 가진 직립보행 몬스터.
     녀석들은 두 발로 대지를 박차며 말과 일행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쐐애액.
     선두로 달리던 레온을 덮치려던 놀의 어깻죽지에 가느다란 화살이 틀어박혔다. 어깨에 화살을 맞고 나가떨어진 놀은 레온의 말을 뒤따르던 다른 말들의 말굽에 짓밟혔다.
     “나이스!”
     활을 쏜 제리코가 신나서 소리쳤다.
     “웃차!”
     콰앙!
     혁의 배틀 해머에 머리가 짓뭉개진 놀이 피를 뿜으며 나가떨어졌고, 굵직한 화살을 머리에 꽂은 채 나가떨어지는 놀도 있었다.
     푸슉, 푸슉!
     리아의 크로스 보우 건(Cross Bow Gun)에 두 마리의 놀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신속하게 볼트를 쏠 수 있었기에 마상 전투에선 그토록 좋을 수 없었다.
     말이 전력으로 질주하는 속도를 놀이 따라잡을 리 만무했기 때문에 나머지 놀들은 우두커니 서서 멀어져가는 일행을 지켜보았다.
     “이쯤에서 좀 쉬었다 갈까요?”
     레온이 말의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 그에 모두 동의한다는 듯 말의 속도를 늦췄고, 루카 또한 달리는 것을 멈췄다.
     이 녀석, 신나게 달려서 그런지 기분이 꽤나 좋아 보이는데?
     말들이 지친 기색을 보이고 있었기에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루카의 등에서 내렸고, 일행은 말을 한데 모아 풀을 뜯게 했다. 물론 덮쳐오는 몬스터가 있을 수도 있었기에 주먹을 움켜 쥔 경훈이 말들의 근처에 섰다.
     “간단한 식사라도 할까요?”
     리아가 아이템 창에서 보따리를 꺼냈다.
     먹을 것을 꺼내려나보군. 전에 미궁에서 요리 실력을 발휘했던 리아지만 이곳에서 요리를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냄새를 맡고 몬스터들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육이나 마른 과일 따위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큼지막한 육포 하나를 집어든 제리코의 고개가 뺨이라도 맞은 듯 휙 돌아갔다.
     “앗.”
     육포를 입에 문 제리코가 이언 숏 보우를 손에 쥔 채 수풀 사이로 몸을 던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제가 따가 가볼게요.”
     식사를 하는 일행을 뒤로한 채 나는 제리코를 따라 수풀 사이로 몸을 던졌다.
     “응?”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대여섯 마리의 고블린과 상처를 입은 까만 털을 가진 새끼 늑대였다. 아무래도 어미를 잃은 새끼인 것 같았다.
     제아무리 늑대라 해도 무리지어 달려드는 고블린을 막아낼 수 없는 노릇.
     제리코는 새끼 늑대를 둘러싼 고블린들에게 활을 쏘았다.
     쉬잉.
     푸욱.
     한 마리 고블린의 목덜미에 화살이 틀어박혔고, 고블린은 그대로 바닥에 거칠게 쑤셔 박혔다. 그에 고블린들의 시선이 제리코에게 향했다.
     “퀵스텝!”
     퀵스텝을 건 제리코가 고블린 무리에게 몸을 던졌다.
     “보우어택!”
     퍼억.
     제리코의 아이언 숏 보우에 머리를 맞은 고블린의 콧대가 짓뭉개지며 녹색 피가 뿜어졌다. 그대로 코를 싸쥐고 드러누워 몸을 데굴데굴 굴리는 고블린에게서 시선을 거둔 제리코가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며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키루룩.
     사냥에 방해를 받은 고블린들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제리코를 향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제리코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건 채 고블린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해내며 날렵하게 활을 쏘는 제리코.
     고블린들은 적수가 아님을 느꼈는지 덮어놓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도주하던 고블린 한 마리가 손을 뻗어 새끼 늑대를 낚아챘다. 사냥감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새끼 늑대의 목덜미를 움켜쥔 고블린의 팔은 어깨에서 떨어져나갔다.
     흐흐, 간만에 고블린에게 활을 쏘아보는군.
     굵직한 창 한 자루에 팔이 달아난 고블린이 어깨를 움켜쥔 채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바닥을 나뒹굴며 기성을 내지르던 고블린이 별안간 조용해졌다. 제리코의 화살이 머리에 틀어박힌 것이었다.
     “휴우… 하마터면 아기 늑대가 당할 뻔했어.”
     입에 물고 있던 육포를 손에 쥔 제리코가 쓰러져 끙끙대는 새끼 늑대에게 다가갔다.
     “어미를 잃었나봐.”
     활시위를 풀어 등에 둘러 멘 제리코가 저항할 기력도 없는 새끼 늑대를 안아들었다.
     그건 그렇고 귀도 참 밝군. 어떻게 소리를 들은 것일까?
     나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제리코를 보며 등을 돌려 수풀을 헤집고 나왔다.
     “그건 또 웬 똥개냐?”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던 혁이 제리코의 품에 안겨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새끼 늑대를 보며 말했다.
     “형, 얘 좀 치료해주세요.”
     “허허, 수풀 사이로 뛰쳐나가더니 똥개 한 마리를 구해온 거야? 이러 줘봐.”
     혁은 제리코에게서 새끼 늑대를 받아들었다.
     “거의 맛이 갔구먼. 조금만 참아라. 큐어(Cure).”
     혁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형성되더니 새끼 늑대의 상처 부위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상처는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힐링(Healing).”
     치료를 마친 혁은 새끼 늑대를 제리코에게 건넸다.
     활기를 되찾은 새끼 늑대가 꼬리를 흔들며 제리코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을 구해준 걸 알고 있는 듯 꼬리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레드, 저 녀석 마치 옛날 루카 같지 않아?”
     강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루카에게 시선을 던졌다. 나와 눈이 마주친 루카는 그저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루카도 저렇게 작을 때가 있었다. 항상 내 품에 안기던 녀석.
     처음엔 내 손을 거부하던 루카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빠 것도 챙겨놨어. 이거 먹어.”
     “응, 고마워.”
     나는 현지가 건네주는 마른 바나나 네 개와 육포를 받아들었다. 새끼 늑대를 쓰다듬고 있는 제리코에게 루카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곤 킁킁 냄새를 맡은 루카를 보며 나는 마른 바나나를 입에 넣었다.
     오도독.
     말린 바나나의 맛이 이렇구나.
     바나나의 향이 남아 있어 먹는 데 지장이 없었고, 맛 또한 괜찮았다.
     “제리코, 그 아기 늑대 데리고 갈 거니?”
     현지가 쭈그리고 앉아 제리코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응. 데리고 가야지. 이것 봐. 이렇게 잘 따르는걸. 아무래도 어미를 잃은 것 같아. 어미가 있었다면 즉시 어미를 찾아 갔을 테니까.”
     그에 현지는 손을 뻗어 아기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름은 뭐라고 지을 거야?”
     “음… 글쎄, 뭐라고 지을까? 음… 좋아, 정했어. 넌 이제부터 레오야.”
     제리코의 말에 육포를 씹던 레온이 시선을 제리코에게 던졌다. 자신과 이름이 비슷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푸흐흐, 왜 이렇게 웃긴 거지?
     말들도 충분히 휴식을 취했고, 배도 어느 정도 차자 레온이 출발할 준비를 하라고 재촉했다.
     일행은 즉시 자신들이 말에 올라탔다.
     제리코는 아기 늑대가 다칠세라 조심스레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한 손으로 늑대를 안아들고 말고삐를 쥐었다.
     내가 루카의 등에 훌쩍 올라타는 것을 마지막으로 레온이 말고삐를 힘차게 내리치자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히히힝.
     레온의 뒤로 일행이 뒤따랐고, 느릿하게 걷기 시작하던 루카도 이내 지면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울창한 숲을 나와 드넓은 들판을 볼 수 있었다.
     숲이 끝나자 모두들 달리던 말을 세웠다. 넓게 펼쳐진 대지위로 푸른 잔디가 돋아나 있었고, 여기저기에 언덕이 있었다. 뭉게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푸른 하늘과 그토록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이곳이 죽음의 평원이라는 곳입니다.”
     레온이 말했다.
     이름과 상반되는 드넓은 들판.
     이곳이 바로 죽음의 평원이라는 곳인가? 몬스터가 전혀 나올 것 같지 않은데 말이지.
     “몇 가지 마법을 메모라이즈해 놓아야겠군요. 혹시 모르니까요.”
     레온이 재빨리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7클래스의 대마법사답게 마나가 순식간에 재배열되었다.
     “갑시다.”
     레온의 말이 걸음을 옮기자 모두들 레온의 뒤를 따랐다.
     따사로운 햇살이 드넓은 대지를 가득 안았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군.
     한참을 달렸지만 평원은 끝을 볼 수 없었다. 뭐야? 몬스터들이 나온다더니 말짱 헛소리에 불과했나?
     넋을 놓고 주변 배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 신나게 달리던 루카가 별안간 낮게 목청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에 나는 적안을 개안한 채 루카의 시선이 향한 곳에 시선을 던졌다.
     시야가 확보되며 저 멀리서 다가오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몬스터 침공 이벤트 때나 볼 수 있었던 울프라이더들이 떼를 지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크들이에요. 반수 이상이 울프라이더군요.”
     해괴한 생김새를 가직 늑대의 등에 올라탄 오크들.
     뿌우우.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저 멀리 언덕에서 무리지어 달려오는 울프라이더들을 볼 수 있었다.
     “점점 가까이 오고 있어요.”
     내 말에 레온이 말에서 뛰어내린 채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울프라이더들이 다가오고 있는 방향에 선 그는 간단한 수인을 맺으며 소리쳤다.
     “메모라이징. 익스플로전(Explosion)!”
     공성전 당시 공성 측의 유저들을 대거 날려버린 공포의 마법이 발현되었다. 불의 속성의 마나와 대자연의 마나가 반응하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앙!
     폭발 중심부에서는 눈을 뜨지 못할 섬과과 열기가 치솟았다. 실로 전율이 느껴지는 마법이었다.
     ‘대단하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울프라이더들을 일격에 날려버린 레온에게 시선을 두었다. 실로 엄청난 마법사였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군요.”
     레온이 또다시 마법을 캐스팅하며 말했다. 익스플로전에 의해 푹 파인 바닥을 피해 울프라이더들이 접근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평원에서는 울프라이더의 위력이 배로 증가하기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말을 한데 모은 뒤 묶어놓았다. 울프라이더들에게 말을 타고 접근하면 승산이 없다. 울프라이더가 타고 있는 거대한 늑대가 말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질 때 늑대의 등위에 올라탄 오크의 글레이브가 말에 탑승한 자의 목을 날려버릴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캐스팅을 마친 레온이 소리쳤다.
     “마법이 한 번 작렬한 뒤 모두들 전투에 입해주세요. 갑니다. 블리자드(Bilzard)!”
     쿠르릉.
     레온의 주문 영창과 함께 햇빛이 쨍쨍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모이기 시작했다. 따뜻하던 바람도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콰콰콰콰.
     울프라이더들의 중심부로 거센 눈보라가 일어났고 달려오던 울프라이더들의 반수 이상이 눈보라에 휘말려 들어갔다. 지금껏 봐왔던 마법 중 제일 가공할 만한 마법. 이것이 바로 7클레스의 마법이란 것인가?
     두 팔을 벌리고 있던 레온이 팔을 거두자 언제 그랬냐는 듯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사라지고 다시 쨍쨍한 햇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새하얗던 눈보라가 사라지자 눈보라에 휘말렸던 울프라이더들이 바닥에 거칠게 쑤셔 박혔다.
     몇 남지 않은 울프라이더들이 등을 돌리고 도주를 하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레온을 바라보았다.
     “응?”
     모두의 시선을 느꼈는지 레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방금 쓴 블리자드라는 마법이 7클래스의 마법인가요?”
     경훈의 물음에 레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마법수식을 계산하느라 머리가 좀 아팠었죠.”
     도주할 줄 알았던 울프라이더들이 수많은 오크대군을 대동한 채 이곳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에 모두들 경악 어린 시선으로 뿔 나팔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레드가 바라던 것이 이런 것이죠? 사냥감이 원 없이 쏟아져 나오는 곳.”
     “물론이죠.”
     레온의 말에 나는 루카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달려, 루카!”
     현성은 루카의 등에 올라탄 채 반대편 언덕에서 물밀듯 밀려오는 오크대군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 자식, 치사하게 혼자 가는 건가? 가자, 얘들아.”
     등에 둘러메고 있던 배틀 해머를 손에 쥔 혁이 현성의 뒤를 따랐다.
     “좋아. 몸 좀 풀어보실까?”
     손목을 빙글빙글 돌리던 경훈이 지면을 박찼다. 움직이는 속도를 일시적으로 증가시키는 스킬을 사용해 순식간에 혁을 추월한 경훈이 더욱 힘껏 달렸고, 지켜보던 강찬이 피식 웃으며 문 블레이드를 뽑아들고 몸을 날렸다.
     “융합(融合)!”
     물의 최상급 정령 엘레스트라를 소환한 현지는 즉시 융합 스킬을 사용했다. 밝은 갈색의 긴 머리칼이 짙은 하늘색의 머리칼로 변했고, 피부를 제외한 눈동자와 눈썹이 푸르게 변했다.
     한없이 맑고 청명한 기운을 내뿜던 현지도 전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너희 둘도 준비해.”
     레온이 수인을 맺으며 말했다. 그에 리아와 제리코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레온을 쳐다보았다.
     “보조 마법을 걸어줄 테니까, 쉽게 싸울 수 있을 거야. 제리코. 그 아기 늑대는 말들과 같이 둬. 결계를 쳐서 저 녀석들이 못 보도록 하면 되니까.”
     “말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아기 늑대에게 실드를 쳐두면 실수로 밟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레온의 말에 제리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기 늑대를 말들이 한데 모인 곳에 두었다.
     “실드(Shield),”
     초록빛의 둥근 막이 아기 늑대를 감쌌다. 실드로 늑대를 감쌈과 동시에 말들이 한데 모인 곳에 결계를 쳐 모습을 사라지게 한 레온은 리아와 제리코에게 차례차례 보조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스트렝스(Strength), 헤이스트(Haste), 스톤스킨(Stone skin), 프로텍션(Protection).”
     휘황찬란한 빛이 제리코와 리아의 몸을 휘감기 시작하더니 이내 스며들었다.
     “제리코, 보조 마법을 걸어줬으니 레드와 비슷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자신의 몸을 휘감던 빛이 몸속으로 스며들자 제리코는 몸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화전민 마을에서 살던 그가 언제 이런 보조마법을 접해봤을 리가 있겠는가?
     몸을 움직여본 제리코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와아, 고마워요.”
     상당히 신이 난 듯 펄쩍 뛰어오른 제리코가 퀵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그가 아이언 숏 보우의 활시위를 단단히 고정시킨 채 오크 대군을 향해 달리는 모습을 보며 레온이 말했다.
     “제리코를 보니 마치 작은 레드 파운 같군. 안 그래, 리아?”
     “응. 우리도 어서 가자.”
     ‘이거, 생각보다 꽤 난감한데? 세릴리아 대륙의 오크들과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혼비백산이 되어 사방에서 날아드는 글레이브 세례를 피해내고 있을 때 뒤에서 경훈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조심해!”
     글레이브를 치켜든 오크가 늑대에서 뛰어내려 이쪽을 향해 몸을 던져다. 백스텝을 전개해 공격을 피해내려던 순간,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쐐애액.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이 오크의 이마 정중앙에 틀어박혔고, 이쪽을 향해 날아들던 오크의 신형이 그대로 바닥에 거칠게 쑤셔 박혔다. 몸을 던진 채 절명한 것이었다.
     “응?”
     나는 급히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지손가락을 치켜 든 제리코가 보였다. 그 뒤로 울프라이더의 커다란 늑대가 덮여오는 것도 모른 채.
     “조심해!”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재빨리 꺼내들었다. 하지만 늑대가 덮쳐오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늑대가 제리코의 어깻죽지를 낚아채려는 찰나 어디선가 새하얀 신형이 늑대를 향해 쏘아졌다. 보통 늑대에 비해 비약적으로 덩치가 큰 울프라이더의 늑대를 덮친 것은 다름 다인 루카였다. 루카의 덩치는 그보다 더 컸다. 실로 루카만 한 늑대를 세릴리아 월드에서 본 적이 없으니까.
     루카는 늑대의 목덜미를 악문 채 몸을 회전시켰다.
     촤아악!
     시뻘건 핏줄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자신을 향해 튀는 피를 본 제리코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몸을 뒤로 뺐다.
     몸놀림이 비약적으로 빨라진 것을 보아 아무래도 레온의 보조마법을 받은 것 같군.
     그런 제리코를 뒤로한 채 나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울프라이더들을 향해 활을 쏘았다. 물론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킨 채.
     퍼어억.
     혁의 배틀 해머에 적중당한 오크 보병 둘과 울프라이더 하나가 피를 토해내며 훨훨 날아갔다.
     오크 보병과 울프라이더의 늑대는 그대로 두개골이 박살나 절명했지만, 라이더(늑대의 등에 타고 있는 오크)는 가까스로 살아나 몸을 일으켜 무작정 앞으로 기어나갔다.
     그때 라이더의 눈앞에 시커먼 무언가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흑의를 걸친 경훈이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으며 라이더를 벌레 내려다보듯 보고 있었다.
     “핫!”
     경훈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대로 다리를 높이 치켜세운 뒤 그대로 라이더의 정수리를 내리 찍었다.
     부웅.
     퍼억!
     그와 동시에 라이더의 눈알이 튀어나오며 코에선 시뻘건 피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짙고 걸쭉한 흰색의 액체가 섞여 나온 것으로 보아 뇌에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진 것이 분명했다.
     경훈의 주먹질 단 한 방에 늑대들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발경이 가미된 펀치를 맞고 버터 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강찬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었다. 몰래 연습을 했는지 어디서나 볼 수 없는 고급 검술의 초식을 응용해 검무를 추듯 플레임 웨폰을 머금은 문 블레이드를 휘둘러가며 다가오는 울프라이더와 오크 보병들을 몰살시키고 있었다.
     “이얏!”
     철컥.
     쐐애액.
     레온에게 버프(Buff, 보조 마법)를 받은 리아는 민첩하게 움직이며 크로스 보우 건을 능숙하게 쏘고 있었다.
     크로스 보우 건.
     그녀는 미궁에서 현성을 만난 뒤 강해지기 위해 현성에게 무기 제작을 부탁했다. 그 크로스 보우 건은 현재 세릴리아 월드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아이템인 만큼 오크들이 접해보지 못한 무기 중 하나였기에, 오크들은 빠르게 난사되는 화살에 맞아 픽픽 쓰러졌다.
     “후우…….”
     리아는 퀵스텝을 건 뒤 재빠르게 움직이며 탄창에 볼트를 끼워 넣었다. 레온의 마법에는 다수의 오크들이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이내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말 그대로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크들은 포기할 줄 모르고 끈임 없이 달려들었다.
     화살 한 방에 줄을 서고 있던 오크 여럿이 절명했다. 화살이 머금은 핏빛 오러 애로우가 오크들의 두꺼운 몸통을 가볍게 뚫고 날아갔기 때문이다.
     처음에 빙해 오크들의 수는 눈에 뜨게 줄어 있었다.
     “체인 라이트닝!”
     파츠츠츠.
     콰르르릉!
     레온의 체인 라이트닝에 다수의 울프라이더와 오크들이 감전되어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하더니 곤두선 머리털이 끝부터 타들어갔다.
     ‘끝이 없구먼.’
     나는 물밀듯 밀려오는 오크들을 보며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등을 움켜쥐었다.
     이곳이 왜 죽음의 평원이며 6인 이상으로 구성된 파티가 안전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아무리 약한 오크라도 이렇게 물밀듯 밀려오며 험난한 난전 속에서 교활하게 뒤를 노리는 오크들의 손속은 무척이나 매서웠다.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나며 잠깐 주위를 살폈다.
     저쪽에서 무언가 커다랗고 둥근 불덩이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강찬이 파이어 실드를 전개한 모양이로군.
     모두가 고전하는 이런 난전 속에서 혁은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었다.
     팔라딘(Paladin, 성기사)으로 전직한 뒤 한층 더 강해진 혁은 배틀 해머를 능숙하게 사용했고, 묵직한 둔기가 휘둘러질 때마다 대여섯 마리의 오크와 늑대들이 피를 낭자하게 뿌리며 훨훨 날아갔다.
     나는 사냥을 하던 도중 얼마 전 멀티비전에서 본 로빈훗의 전체 공격 스킬을 떠올렸다.
     애로우 레인(Arrow Rain).
     거의 마법에 가까운 이 스킬은 쏘아낸 하나의 화살이 즉시 공중으로 치솟은 뒤 수십 발로 불어나 비처럼 쏟아진다.
     오러 애로우를 머금은 핏빛의 붉은 섬광을 그렇게 쏘아낼 수 있다면 이런 전장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을 테지만, 나와는 별개인 이야기였다. 결정적으로 애로우 레인 스킬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주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뒤에서 느껴지는 예기에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검은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는 오크의 글레이브가 이쪽으로 쇄도해오고 있었다.
     나는 즉시 자세를 낮춰 오크의 글레이브를 피해낸 뒤 아가리를 벌린 채 머리를 들이미는 늑대의 얼굴에 보우어택을 먹였다.
     퍼억.
     기괴하게 함몰된 늑대가 피를 뿜으며 넘어졌다.
     파이어 실드를 거둔 강찬은 문 블레이드의 검병을 움켜쥔 채 사방에서 달려드는 오크들을 막아냈다.
     ‘부득이하게 그 스킬을 써야 할 땐가…….’
     이런 난전 속에서 엄청난 위용을 과시할 수 있는 스킬. 하지만 사용하게 될 경우 피를 탐하는 살귀(殺鬼)로 변모하게 되기 때문에 사용을 꺼리는 스킬이었다. 엄청난 위력을 지닌 만큼 그에 따르는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양날 검과도 같은 스킬이지. 맞을 때 통증을 느끼지 못하지만 스킬을 해제하고 나면 한꺼번에 통증이 느껴지는…….’
     게다가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공격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파티 플레이를 할 때 매우 적합하지 못한 스킬이었다.
     끝도 없이 밀려들어오는 오크 떼를 보며 강찬은 끝내 숨겨둔 스킬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버서크(Berserk).”
     무미건조한 음성이 강찬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그와 동시에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크크크크…….”
     창백하게 변한 강찬의 얼굴에 괴소가 떠올랐다. 플레임 웨폰의 길이도 한층 더 길어졌고 위력도 강화되었다. 방금 달려든 울프 라이더를 통째로 반으로 갈라놓은 것으로 보아 의심할 나위 없는 버서커였다.
     버서커(Berserker).
     말 그대로 싸움에 미쳐버린 전사를 뜻한다. 버서크 스킬이 발동되자 강찬의 공격력은 배로 증가하는 대신 방어력이 배로 감소했고 생명력과 마나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몸에 상당한 무리가 갈 정도로 움직임 또한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글레이브 세례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염검을 종횡무진 휘두르며 피보라를 일으켰다.
     촤아아.
     피를 낭자하게 뿜으며 오크의 머리통 하나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머리가 없는 몸통에서는 피가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왔고 몸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시야로 새하얀 바탕에 붉은빛을 띠고 우글거리는 적들이 들어왔다.
     강찬은 닥치는 대로 도륙을 해나갔다.
     “크하하하하!”
     피를 잔뜩 뒤집어쓴 그는 영락없이 피를 탐하는 살귀의 모습이었다.
     강찬의 문 블레이드의 검신에 솟아오른 화염은 피를 갈구하며 더욱 세차게 기염을 토해냈다. 그의 기세에 기가 질렸는지 무턱대고 달려들던 오크들도 잠시 주춤할 정도였다. 하지만 강찬은 머뭇거리는 오크들에게 바람처럼 몸을 날려 살수를 펼쳤다. 평소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근처에서 오크들을 휩쓸던 혁의 시선이 강찬에게로 꽂혔다. 강찬의 상태가 매우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저 녀석?’
     강찬이 걱정된 나머지 가까이 다가가려 했으나 섣불리 다가설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오크대군의 수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오크들의 수는 눈에 뜨게 줄기 시작했다.
     나는 미쳐버린 광인(狂人)처럼 오크들을 도륙해 나가는 강찬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찬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레온의 강력한 마법에 한데 운집해 있던 오크들이 폭발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러기를 한참, 드디어 물밀듯 밀려오던 오크들은 없었고 대신 푸른 잔디 위에 죽은 오크들이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고 있었다.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날 정도로 지친다.
     오크를 유독 두려워하던 제리코는 아무렇지도 않게 목이 떨어진 오크의 몸뚱이에 걸터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맞은편에서는 안색이 창백해진 리아가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키고 있었다.
     모두가 녹초가 되어 쉬고 있는 상황. 안색이 극도로 창백한, 게다가 두 눈마저 붉게 충혈 된 강찬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크크큭.”
     난데없이 괴소를 흘리며 다가오는 강찬. 전신이 피에 물든 모습은 마치 살귀를 떠올리게 했다.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다가오던 그의 붉게 충혈 된 두 눈이 어느덧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그는 풀썩 쓰러졌다.
     “저 녀석, 갑자기 왜 저러지?”
     마시고 있던 스태미나 포션의 유리병을 아무렇게나 팽개친 혁이 쓰러진 강찬에게 몸을 날렸다. 그건 그렇고, 오크들과 싸우던 도중 현지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다.
     나는 급히 몸을 일으킨 뒤 주변을 살폈다. 안색이 창백해진 현지가 이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는데, 걸음걸이가 무척이나 위태로웠다.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 뒤 현지를 부축했다.
     “괜찮아?”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현지를 보았다. 괜찮기는. 딱 보아도 힘들어 보이는데. 정령이 없어진 것을 보아 마나가 바닥이나 정령계로 강제 역소환 된 것 같았다.
     “휴… 치료는 끝냈다. 무식한 녀석.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상처를 입은 거지?”
     강찬을 부축한 혁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모두 정말 상태가 말이 아니로군.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오크들은 모두 죽어 달려들지 않았지만 또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랐기에 어서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른 몬스터들이 출몰하기 전에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겠네요.”
     레온의 부축임에 모두 오크들의 시체가 이룬 산을 벗어나 말을 묶어두었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라? 말들이 죄다 어디로 사라진 거야?”
     “놈들이 볼 수 없게 결계를 쳐놨지요. 결계를 해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배틀 해머를 등에 둘러맨 혁이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살피자 레온이 결계를 해지하며 말했다. 그에 허공이 뒤틀리며 묶어놓은 말들과 그 사이에 반투명한 초록색 실드에 둘러싸인 까만 아기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리코는 말들 사이로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아기 늑대를 감싼 실드를 통째로 안아 들었다.
     나는 현지를 부축한 채 말들이 한데 묶인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나가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했는지, 현지의 안색이 점점 나아졌다. 나는 아이템 창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 현지에게 건넸다.
     “고마워.”
     마나 포션을 받아든 현지가 빙긋 웃으며 포션의 마개를 딴뒤 푸른 액체를 들이켰다. 치명적인 부상과 바닥난 생명력이 회복되자 창백하던 안색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도대체 뭘 했기에 그렇게 피를 뒤집어쓰고 상처를 입은 거야?”
     혁이 강찬의 어깨를 후리며 말했다. 그에 강찬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조금 전 오크들을 때려눕히던 강찬은 마치 피에 굶주린 살귀와도 같았다. 전쟁(?)이 끝난 뒤 레온을 제외한 일행의 옷에는 하나같이 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클린(Clean).”
     레온의 주문영창과 동시에 일행의 복장은 전과 같이 깨끗해졌다. 우리는 서둘러 말에 몸을 실었다.
     

    제30장  파르판 제국에 발을 딛다

     “지독한 놈들이었어.”
     미간을 찌푸린 채 손목을 어루만지던 경훈이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독한 놈. 도주하는 몬스터를 끝까지 추격하다니. 덕분에 경험치는 잘 받았다.”
     경훈의 말에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여보였다. 오크대군과의 혈투가 끝나고 서둘러 몸을 회복한 뒤 자리를 피해 나온 일행은 안전지대로 보이는 듯한 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또다시 파르판 제국을 향해 말을 달렸다.
     파르판 제국을 향하는 여정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오크대군 이후로 달려드는 중형 몬스터 무리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크들처럼 수로 밀어붙이진 않았지만 중형몬스터 하나하나가 막강했기 때문에 꽤나 애를 먹어야 했다.
     난생처음 보는 몬스터인 맨티스(거대한 사마귀의 형상을 하고 있는 중형 몬스터)의 맹공격에 애를 먹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와이번과 같은 공중 중형 몬스터들의 협공은 정말이지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지긋지긋했다.
     지능적으로 치고 빠지는 녀석들. 마치 차륜전을 벌이듯 치고 빠지는 덕에 강력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나와 현지, 레온이 꽤나 애를 먹어야 했다.
     물론 애를 먹긴 했지만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토벌할 수는 있었다. 나는 도주하는 와이번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격추시켰다. 이를 악물고 활을 쏘아댄 결과 도주하던 세 마리의 와이번을 추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싸이크론 애로우에 와이번의 피막형 날개가 찢어지다 못해 기괴하게 뒤틀린 채 바닥에 추락했다. 아마도 경훈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방금 벌인 혈투로 인해 제리코의 레벨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그만큼의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나자 모두들 부상을 치료하며 자신들의 장비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손에 착용한 너클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경훈이 너클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손목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제리코는 능숙하게 활시위를 정비했고 혁과 강찬은 자신들이 병기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상처는 괜찮아?”
     마개가 뽑힌 생명력 포션의 유리병을 들고 현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매우 걱정스런 눈을 하고 내게 말을 걸어오는 현지를 보자 와이번의 발톱에 스친 상처에 대한 아픔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응 괜찮아.”
     나는 현지가 건네주는 포션을 받아 마신 뒤 유리병 바닥에 내려놓았다. 현지의 안색은 전보다 나아졌다. 요새 많이 신경써주지 못해 미안하네.
     나는 빙긋 웃으며 현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저, 레드 씨. 이것 좀 봐주실래요?”
     보우 건이 망가졌는지 리아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방아쇠를 당겨도 탄창이 회전을 하지 않는군. 보우 건을 받아든 나는 무기의 상태를 살폈다. 탄창이 미세하게 엇갈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나는 탄창의 위치를 바로 잡은 뒤 방아쇠를 당겨보았다.
     철컥, 철컥.
     “탄창이 약간 엇갈려 있었네요. 조심해서 쓰도록 하세요.”
     “고마워요.”
     보우 건을 건네받은 리아가 빙긋 웃으며 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무기의 장비가 끝났으면 서두릅시다. 곧 있으면 날이 저물게 되고 더 많은 몬스터들이 배회하게 됩니다.”
     말을 보호하기 위해 걸어둔 결계를 해지하며 레온이 말했다. 그에 모두들 서둘러 말에 탑승했다.
     루카의 등에 탄 채 한참을 달리던 끝에 죽음의 평원의 끝 지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내 지나왔던 숲과 비슷한 숲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선두로 달리던 나는 루카를 멈춰 세운 뒤 느릿하게 말을 모는 일행들을 쭉 훑어보았다. 사람이나 말이나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군요.”
     “이제 좀 쉬었다 갈까요?”
     레온의 말에 나는 루카의 등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그에 레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출출한데, 밥이나 먹고 가요.”
     말에서 뛰어내린 리아가 아이템 창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허공을 뒤적였다. 정말이지 모두들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군. 잠시 쉬는 동안 제리코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다른 일행들과는 달리 팔팔한(?) 제리코를 불렀다.
     “형 왜 불렀어?”
     검은 털을 가진 아기 늑대를 안아든 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제리코를 보았다.
     “제리코 네가 원하는 알려줄 테니까 잠시 아기 늑대는 루카 근처에 두고 와.”
     “내가 원하는 거?”
     “궁술.”
     마지막에 내던진 한 마디에 제리코의 얼굴이 활짝 폄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건 뭐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걸. 그러고 보니 궁술을 배우기 위해 날 따라다니는 것이었지.
     왠지 모르게 제리코에게 미안해지고 있었다. 스킬을 복사해주긴 했지만 제대로 가르친 것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제리코는 전보다 나아졌다며 신이 나 있는 상황이지만, 내가 볼 때는 아직 미숙한 단계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제리코가 아이언 숏 보우를 들고 내 앞에 기세등등하게 서 있었다. 풋.
     “왜 웃어?”
     “아냐.”
     제리코의 물음에 고개를 가볍게 저은 뒤 대답해준 나는 제리코에게 몇 가지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말을 듣는 제리코의 두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    *    *
     “이, 이거 무지 힘든데?”
     활을 휘두르던 제리코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이내 뒤로 주저앉는 것을 보아 무지 힘들었나보다.
     “처음이니까 힘든 거야.”
     “형도 처음엔 힘들었어?”
     제리코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유저인지라 스탯이란 것이 존재했고 힘 스탯에 포인트를 분배했기 때문에 힘들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제리코가 힘을 낼 수 있게 선의의 거짓말을 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지금까지 제리코에게 가르친 것은 다름 아닌 근접 공격 대처법이었다. 대충 이론(?)만을 설명해준 뒤 여러 가지 기본 동작을 습득하게 한다.
     그런 다음 퀵스텝과 백스텝을 이용해 치고 빠지는 것과 상대의 안으로 파고드는 그런 기술을 몸소 터득하도록 화살을 슬슬 휘두르면 제리코는 배운 대로 행했다.
     말이 화살이지 거의 스몰 스피어와 맞먹는 크기와 굵기를 가진 것을 보고 누가 화살이라 생각하겠는가? 처음엔 제리코도 약간 겁을 먹은 듯했지만 금세 적응을 하고 치고 빠지거나 빈틈을 파고드는 공격을 추가적으로 가했다.
     이 녀석, 전부터 느낀 거지만 배우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군, 금방금방 알아먹고 금세 따라하니 가르칠 맛이 나는군.
     이렇게 제리코에게 근거리 전투법을 전수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오빠, 제리코! 밥 먹어.”
     현지였다.
     “밥이다!”
     지쳐서 주저앉아 있던 제리코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녀석, 배가 몹시 고팠나보다. 나는 그런 제리코를 보며 피식 웃으며 현지의 손을 잡고 일행들에게로 향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일행은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파르판 제국을 향해 말을 달렸다. 숲의 좁은 오솔길을 벗어나자 이내 드넓은 대지가 광활하게 펼쳐진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적안을 개안한 채로 지평선 끝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동안 시야가 확보되며 희미하게나마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끝에 파르판 제국이 있는 것 같아요.”
     “에? 레드 눈에는 저 끝에 있는 것이 보이나요?”
     “네. 희미하게 보이는 거지만 뭐. 파르판 제국밖에 더 있겠어요?”
     놀란 눈을 하는 레온을 보며 나는 왼발로 달리는 루카의 허리를 슬쩍 쳤다. 그에 루카가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일행들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말을 더욱 빨리 달렸고 한참을 달린 끝에 이전에 보았던 바인마하 왕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를 가진 성벽을 볼 수 있었다.
     성벽 위에는 간편한 가죽갑옷을 걸린 궁수들이 활을 들고 경계를 하고 있었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크기를 가진 성문 앞에는 상당히 강해 보이는 기사 여럿이 서 있었다.
     기다란 랜스를 들고 있는 기사와 배틀 엑스를 들고 있는 기사 그리고 고풍스런 롱 소드를 뽑아든 기사들이 성문을 향하는 일행을 가로막았다.
     “멈춰라.”
     말투나 행동을 보니 NPC인 틀림없군. 조용히 루카의 등에서 내린 나는 기사에게 느릿하게 다가갔다. 바인마하 왕국에 입국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홍채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유저인 우리는 괜찮지만 제리코가 걸릴까 조마조마했지만 제리코도 무사히 통과를 하여 파르판 제국에 입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성문을 열어라!”
     기사가 소리치자 굳건히 닫혀있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사람 둘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성문이 열렸고 일행은 아무 말 없이 성문을 지났다.
    *    *    *
     “아, 따분해. 어디 새로 굴러들어오는 신참 놈이 없을까?”
     도르만은 파르판 제국 성문 앞에 걸터앉아 성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요새 신참 녀석들이 도통 들어오질 않는단 말이야.”
     도르만은 소드 마스터 중급 언저리에 위치한 실력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유저가 많은 유저의 성지인 파르판 제국에 머무는 유저 중 한 명이었다.
     실력은 좋지만 성격은 실력과 상반되는 무척이나 좋지 못한 성격을 가진 도르만은 이미 파르판 제국에 입국하는 신참 유저들을 여럿 골탕 먹인 경험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일을 즐기는 듯했다.
     “오.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더니. 딱이로군.”
     도르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던 끝에 신참 유저들이 입국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약 예닐곱 명가량 되는 보이는 신참 유저들이 무리지어 들어오자 도르만은 쾌재를 부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선두로 걸어오는 거대한 철궁을 가진 유저를 보고 잠시 놀라긴 했지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미 수많은 궁수 유저를 때려눕힌 그였기에.
     ‘웬 떡이야? 신참 중 여자가 둘씩이나? 하나는 그럭저럭 예쁜 편이고 저 엘프년은 참. 저렇게 예쁜 여자가 왜 저런 구질구질한 녀석들과 다니는 거지? 이참에 내가 접수 해야겠군.’
     입맛을 다시며 도르만은 신참 일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드디어 도착하게 됐군요.”
     기다란 스태프를 지팡이 삼아 바닥을 짚으며 걷던 레온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 적당한 마시장에 말을 파는 일만 남았군.
     레온이 이곳에 마법진을 설치해 둔다면 말을 탈 필요 없이 마법진을 타고 공간이동을 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말을 타고 다시 돌아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기뻐하며 걷고 있을 때 저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반쯤 풀린 눈에 색기가 가득했고, 인상 또한 좋지 못했다. 뭐 인상이 좋지 못하다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냥 조용히 지나칠 것이라 생각하고 일행은 아무생각 없이 걸음을 옮겼다. 유저들이 가장 많이 머문다는 수도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유저로 보이는 사내는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입… 백스텝.”
     갑작스레 휘둘러지는 검을 보며 나는 백스텝을 밟아 재빨리 거리를 두었다. 검에 푸른 오러가 맺힌 것으로 보아 상대는 의심할 수 없는 마스터급의 유저였다. 하긴, 파르판 제국에 머무는 유저들이 대부분 마스터급의 유저들이라고 들었으니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일종의 신고식이라고 생각해라.”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상대는 코웃음을 치며 건들건들 다가올 뿐이었다. 아무래도 한 판(?) 벌여야겠군. 등에 둘러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왼손에 쥐고 풀어진 활시위를 활 끝에 걸려는 찰나, 레온이 막아섰다.
     “레드. 내게 맡겨요.”
     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활을 도로 등에 둘러멨다. 레온도 무슨 생각이 있기에 저러는 것이겠지. 우리 일행 중 제일 현명한 이가 레온이니까.
     나는 레온을 제외한 일행들을 이끌고 뒤로 물러났다. 혁이 배틀 해머를 들고 자신이 싸우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것을 나, 경훈, 강찬 셋이서 겨우 말린 뒤 레온을 지켜보기로 했다.
     “뭐야. 마법사냐?”
     “마법사라고 봐야겠죠?”
     “이상한 녀석이네. 그렇다고 보는 건 또 뭐야?”
     말을 마친 유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검을 휘둘렀다. 무척이나 빠른 검 놀림이었다.
     터엉.
     레온의 목을 향해 빠르게 쇄도하던 검이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아니 부딪혀 튕겨 나갔다고 봐야 정확했다.
     레온이 펼친 실드에 공격이 가로막힌 유저의 눈썹이 급격히 휘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유저의 검에서 눈부신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소드 마스터의 전매특허인 오러 블레이드의 발현이었다.
     3미터 남짓 되는 길이로 자라난 오러 블레이드가 레온의 실드를 향해 빠르게 폭사 되었다. 이대로라면 레온의 실드를 가르고 상처를 입힐 것이 분명했지만 레온은 철탑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콰앙.
     이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가 실드를 가르고 레온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레온의 실드는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냈다. 물론 흉하게 금이 가긴했지만.
     그에 검을 휘두르던 유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서, 설마.”
     “매직 미사일.”
     유저의 말에 레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동어를 외쳤다. 7클래스의 대마법사답게 마나가 순식간에 재배열 되어 허공에 은빛의 화살 형상을 갖춘 매직 미사일 다발을 발현시켰다.
     수십 발의 매직 미사일이 시전자 주위를 빠르게 맴돌았다. 그리고 레온의 손짓에 매직 미사일이 순식간에 유저를 향해 폭사되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촤앙!
     유저는 능숙하게 검을 휘둘러 매직 미사일로 토막 냈다. 그때 레온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푹 꺼져버렸다. 유저가 수십 발의 매직 미사일을 전부 다 토막을 쳐 놓았을 때쯤 뒤늦게 레온이 유저의 뒤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와 동시에 레온의 입에서 낭랑한 음성이 비집고 나왔다.
     “라그나 블라스트(Lagan blast).”
     콰콰쾅!
     나지막한 주문영창과 함께 유저의 발아래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크아악.”
     유저의 비명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한줌의 잿더미가 되어 바닥에 흩뿌려지기 때문이었다.
     “휴우. 끝났군요.”
     레온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그에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레온을 쳐다보았다. 나쁜만 아니라 다른 일행도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무투 대회 당시 레드가 써먹던 기술을 응용해봤어요. 더블 캐스팅을 하느냐고 마나를 무척이나 많이 잡아먹었네요.”
     레온이 빙그레 웃었다. 그건 그렇고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내는 실드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레온. 어떻게 실드로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낸 거죠?”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자 레온이 대답했다.
     “7클래스로 넘어오면서 기존에 익혔던 마법들의 효과가 증가했거든요. 그때문인 것 같네요.”
     레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유저를 꼭 죽일 필요는 없었는데… 하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자고 덤빌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아예 흔적조차 없애버리는 게 나은 방법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마을 외곽에 위치한 마시장에 가 말 세 필을 판 뒤 마차(馬車) 한 대를 구입했다. 일곱 명 이상이 탈 수 있을 정도로 큰 마차를 구입했는데, 마차에는 고급스런 장식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곳은 제국의 외각. 수도로 향하는 거리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차를 사게 된 것이었다. 물론 레온이 제안한 일이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게 된다면 여정이 다소 편해질 거예요.”
     이 때문에 비싼 돈을 주고 마차를 구입하게 된 것이었다. 경훈은 마차 안은 답답하다며 밖에서 마차를 몰겠다고 했다.
     “유저들 대부분이 마스터급의 유저라니. 정말 안 믿겨져.”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은 현자가 말했다.
     “나도 별로 안 믿겨져.”
     그에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이곳에서 레벨을 많이 올릴 수 있을 지가 의문이었다. 막상 오긴 했으나 죽음의 평원에서 레벨업을 그다지 많이 할 수 없었다.
     지금 상태로 초인들과 겨루게 된다면 백이면 백 패할 것이 뻔했다.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바닥을 내려 보고 있을 때 익숙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반투명한 초록색을 띤 직사각형의 입체 창이 떴다.
     [레드 무슨 일 있나요? 표정이 좋지 못하네요.]
     레온이 전송한 쪽지였다. 아무래도 내 심각한 표정을 읽은 것 같았다.
     [아뇨.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에요.]
     [얼굴에 심각한 일이 있다고 쓰여 있는 걸요. 무슨 일이죠? 제가 알면 안 되는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니에요. 사실 지금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거든요.]
     나는 자초지종을 전부 설명했다. 그에 레온이 빙긋 웃으며 쪽지 하나를 더 전송했다.
     [아, 그런 일 때문이군요. 그럴 경우 아이템의 득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아이템의 득이라뇨?]
     [제작법이 꽤나 복잡해 비싸긴 하지만 인챈트 스크롤이란 것을 이용해 아이템에 인챈트를 하는 방법이지요. 아니면 사냥을 통해 다른 좋은 등급의 아이템을 얻는 방법도 있어요. 레벨만 높다고 능사가 아니에요. 아이템이 뒷받침 해주지 못한다면 말짱 꽝인 셈이 되어버려요.]
     그렇군. 레온의 말에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아이템을 구하러 다녀야 하나?
     어느덧 해가지기 시작했는지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가까운 여관에 마차 전용 주차장에 마차를 주차시킨 뒤 일행은 여관으로 들어와 방을 잡았다. 이상하게도 이곳 여관은 1인 1실의 좁은 방밖에 없었다.
     일행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를 여관의 로비로 나와 한 자리에 모였다. 그러자 레온이 말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까지야……."
     강찬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에 혁은 졸린 듯 눈을 비비고 있었고 경훈 또한 마찬가지였다. 캐릭터의 피로도가 증가한 것 때문이리라.
     충분한 수면을 취한 뒤 로그아웃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우리 일행은 캐릭터의 피로를 깨끗이 날려버린 뒤 현실 시간으로 내일 이곳에 모이기로 약속한 뒤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풀어 탁자 위에 올려두고는 침대에 몸을 묻었다. 침대 옆에는 루카가 배를 깔고 엎드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너도 많이 피곤한가보구나. 하긴 하루 종일 날 태우고 달렸으니까.”
     캉캉.
     루카가 괜찮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짖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바닥에 파뭍고 잠들어 버렸다. 제아무리 체력이 좋은 루카라지만 오늘은 너무 무리를 한 것 같았다.
     나는 밀려오는 피로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했다.
     “으음……."
     그리고 얼마 후 피로가 전부 회복 되었는지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깰 수 있었다. 피로가 회복되었으니 이제 슬슬 로그아웃을 할 차례로군.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푸쉬쉬.
     위잉.
     캡슐의 문이 열렸다. 나는 헤드셋을 벗어 머리맡 고리에 걸어두고 게임베드에서 일어나 캡슐 밖으로 나왔다. 휴우, 오늘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설렌다. 드디어 목표로 삼았던 파르판 대륙에 입국을 했으니까.
     그곳에서 많은 유저들과 대련을 해보고 실전 경험을 쌓은 뒤 초인들에게 도전하는 쪽으로 나가야겠군. 우선 낮은 레벨을 대처해 줄 아이템부터 맞춰야겠는데. 아무래도 새로운 아이템 하나를 제작해야 할 것 같다.
     “컴. 식량 재고는 충분하지?”
     「네. 충분하지요. 요새 주인님의 공복 기간이 전보다 길어졌습니다. 어서 식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알았어, 컴.”
     컴의 말에 짧게 대답을 한 뒤 냉장고로 발걸음을 옮긴 나는 냉동식품 하나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허겁지겁 식사를 마친 나는 얼른 거실로 달려와 소파에 앉았다.
     파르판 대륙 내부의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리모컨을 집어 들고 컴에게 멀티비전을 켜라고 지시한 뒤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에 접속을 해 파르판 대륙에 대한 정보에 대해 검색했다.
     “지금 우리가 머무는 곳이 수도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구나. 대체적으로 고수라 일컫는 유저들이 수도 중심부에서 활동을 하는군.”
     대륙의 정보를 찾던 도중 나는 이곳 파르판 제국에서 유저들간의 PVP가 다른 곳에 비해 많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로가 마스터급의 유저인 만큼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겠지?
     아무튼 본인의 힘을 과시하거나 타인이 걸어오는 시비를 참지 못하고 대련을 하는 것이 다반사라고 한다.
     마침 대련 상대를 찾던 도중 잘된 일이로군.
     

    제31장  파르판 제국의 수도 아르곤을 향해

     “음냐, 음냐.”
     왠지 모를 불편함에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났다. 이런, 소파에서 잠들어버렸군.
     「주인님. 어서 씻고 아침 식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응.”
     컴의 잔소리를 들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깨끗하게 몸을 씻고 밖으로 화장실을 나온 뒤 냉장고에서 육포 몇 개를 꺼내 간단하게 배를 채운 나는 내 방으로 향했다.
     캡슐의 허리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누르자 기계의 맑은 마찰음과 동시에 캡슐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나는 게임베드에 몸을 눕힌 뒤 헤드셋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와 동시에 캡슐의 문이 서서히 닫히며 외부의 빛을 차단했고, 냉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는지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77.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후. 레드 파운 등장!”
     캉캉.
     “안녕, 루카.”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을 하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나는 루카에게 인사를 건네고 방에서 나왔다. 다른 일행들은 접속을 했으려나?
     역시나, 내가 제일 늦었군. 문을 열고 나오자 일행들이 손을 흔들며 날 반기고 있었다.
     “오빠. 아침에 메시지 보낸 거 못 봤어?”
     현지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응? 메시지?”
     “못 봤나보네. 하여튼 매일 늦어.”
     현지가 빙긋 웃으며 내손을 잡았다.
     “오늘은 수도인 아르곤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수도로 가면 유저들도 많을 것이고 좋은 구경거리도 많을 겁니다.”
     레온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레온의 의견에 따르면서 좋으면 좋았지 안 좋은 일이 벌어진 경우가 거의 없었으므로 모두들 레온의 의견에 따랐다.
     “수도엔 여자가 많으려나?”
     “그만 좀 밝혀. 변태 같아 놈아.”
     “뭐 인마?”
     요새 말이 없어 잠잠한가 싶더니, 혁과 경훈 두 녀석이 또 시작했나보다. 그에 리아를 제외한 모두가 배를 잡고 웃으며 여관을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으흠. 혁을 보는 리아 양의 시선이 요새 좀 이상하단 말이야.
     여관에서 나와 마차에 몸을 실은 우리는 수도를 향했고 마차에 있는 동안 리아와 현지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레온은 이미 익숙한 듯 등 받침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고 강찬은 어울리지 않게 1클래스 마법서를 꺼내 읽고 있었다.
     제리코는 마차의 가운데 엎드린 루카의 옆에 앉아 ‘레오’라고 칭한 아기 늑대를 쓰다듬고 있었다. 혁이 녀석은 뭔 바람이 들었는지 마차 안이 답답하다며 경훈이 앉아있는 앞자리로 나가 앉아 있었는데, 둘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군.
     그렇게 조용히(?) 수도를 향하던 도중 갑자기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며 말이 놀라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히히힝.
     “뭐, 뭐야?”
     우렁찬 혁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마차의 문을 박차고 마차에서 내렸다. 물론 등에 둘러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손에 쥔 채.
     NPC와 유저가 많은 거리에서 난데없는 습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땅에 바닥을 뚫고 나온 굵직한 검은 나무뿌리 같은 것이 튀어 나와 마차의 앞을 가로 막았고 마차 뒤에는 요상한 생김새의 마물 같은 것이 피막형의 날개를 쫙 펼치고 있었다.
     도대체 뭘까?
     나는 급히 풀어진 활시위를 잡아당겨 활 끝에 걸었다.
     “젠장, 뭐야?”
     마차에서 내린 혁이 배틀 해머를 손에 쥐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저 녀석들이냐?”
     “그래, 맞아.”
     “저 따위 녀석들에게 당한 거야?”
     마물 뒤에 선 유저들의 대화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오호, 자세히 보니 어제 시비를 걸어오던 그 유저 녀석도 있군.
     복장이 어제와 판이하게 달랐지만, 투구를 쓰지 않고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전형적인 플레이트 메일의 차림새였지만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옆엔 마물과 나무뿌리를 소환해낸 장본인으로 보이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유저 하나와 커다란 배틀엑스를 들쳐 멘 우락부락한 덩치의 유저 하나가 있었다.
     그렇게 상대를 살피고 있을 때 기사 유저의 미간이 좁혀지며 손가락을 뻗어 이쪽을 가리켰다.
     “저 녀석이야.”
     나는 고개를 돌려 유저가 지시한 이를 쳐다보았다. 언제 마차에서 내렸는지 레온이 스태프로 땅을 짚고 서 있었다.
     “중하급 마물 쉐이드와 검은 나무뿌리라. 높은 클래스의 네크로멘서 유저 하나가 있군요.”
     레온이 작게 말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유저가 손짓하자 쉐이드라 불린 마물이 활짝 펼쳤던 피막형 날개를 접고 뒤로 물러났다.
     “너희들. 파르판 대륙에 온 지 얼마 안 된 신참 녀석들이 맞지?”
     아무리 게임상 이라지만 기본적인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게 아닌가? 상대를 지극히 하대하는 말투로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유저가 말했다.
     대답을 하려던 찰나 혁이 소리쳤다.
     “신참이고 나발이고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혁의 말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유저가 대답했다.
     “기가 산 놈들이군. 아무래도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야.”
     “알게 뭐야. 꼬우면 덤비던가. 어떤 놈이 싸울래?”
     들쳐 메고 있던 배틀 해머를 고쳐 잡은 혁이 사납게 으르렁 거리며 소리쳤다. 유저들은 기가 찬 듯 웃어재꼈다.
     “지난번에 이곳을 지났던 신참 녀석들 중 저런 녀석 하나가 있었지. 아주 떡이 돼서 이곳을 나갔지만 말이야.”
     “일단 매가 약이지. 저 녀석 일행들 중 여자 둘이 있는데 이 녀석들을 모두 족친 뒤에 재미 좀 보자고 이봐, 어제 그 엘프년은 어디 갔지?”
     시비를 걸어왔던 어제 그 유저의 마지막 한 마디에 나는 가슴속에서 무언가 묵직한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건 정도가 지나치잖아?
     “대답이 없군. 조져 버리자!”
     유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쉐이드 한 마리가 날개를 쫙 펼친 채 이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끼아아아!
     소름끼치는 기성을 내지르며 날아오는 쉐이드를 보며 나는 백스텝을 밟고 물러섰다. 하지만 혁은 고쳐 잡은 배틀 해머를 들고 철탑처럼 버티고 서 있을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얍!”
     쉐이드가 지척에 다다랐을 때 혁의 묵직한 배틀 해머가 휘둘러졌고 무언가 부서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쉐이드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기사 유저의 오러가 충만히 맺힌 검이 혁의 가슴팍을 향해 폭사되고 있던 것이다.
     나는 재빨리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활을 쏘았다.
     쐐애액.
     핏빛의 붉은 섬광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대기를 갈랐다.
     콰앙!
     화살은 혁의 가슴팍을 쇄도해오던 유저의 검의 옆면을 정확히 때렸고 유저는 중심을 잡기 위해 몸을 한 바퀴 돌렷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혁의 배틀 해머가 유저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퍼억.
     “헉.”
     옆구리를 움켜잡고 신음을 흘리며 유저 하나가 나가떨어졌다. 그 사이 날개 하나가 기괴하게 뒤틀린 쉐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혁의 뒤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화검강(火劍剛).”
     촤악.
     뜨거운 겁화를 머금은 문 블레이드가 쉐이드의 목을 훑고 지나가자 쉐이드의 머리통은 몸에서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뭐야. 제법 한가락 하는 녀석들이잖아?”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유저가 수인을 맺으며 말했다.
     “네크로멘서면 흑마법사로군. 저 녀석은 내가 맡을게.”
     혁이 배틀 해머의 손잡이를 회전시키며 말했다.
     철컥.
     스르릉.
     배트 해머에서 검을 뽑아내자 은빛의 검신이 태양빛을 받아 반짝였다. 배틀 해머의 나머지 부분을 등에 둘러 멘 혁이 검병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금빛의 오러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뭐야, 설마 팔라딘?”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유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혁이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검을 휘둘렀다.
     네크로멘서 녀석은 혁이 알아서 처리 하겠지. 혁이 배틀 해머에 옆구리를 강타당한 유저가 몸을 일으킨 채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유저와 겨루는 혁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나는 화살 하나를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유저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바닥에 쑤셔 박혔다.
     콰앙.
     마치 창을 연상시키는 화살을 바라보던 유저의 시선이 이쪽으로 던져졌다.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퀵스텝을 걸었다.
     조용하던 거리가 몇 명의 유저로 인해 떠들썩해졌다. 지나가던 NPC와 유저들이 그 주위를 둥글게 둘러쌌고, 이내 웅성이기 시작했다.
     리아와 티아는 마차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채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제리코는 안절부절 못하며 마차 안에 앉아 있었고 마부석에 앉아있던 경훈도 마차에서 내려 레온의 옆에 섰다.
     “왠지 저도 나가서 싸우고 싶어지는데요?”
     두 주먹을 맞부딪히며 경훈이 말했다. 그에 레온이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그냥 지켜보도록 하죠.”
     말을 마친 레온의 시선이 어제 시비를 걸다 자신의 라그나 블라스트에 소멸된 기사 유저와 맞붙는 현성에게 던져졌다.
     “이런 개자식.”
     오러 블레이드를 잔뜩 끌어올린 채 종횡무진 휘둘러지는 유저의 검을 유유히 피해내던 현성이 재빨리 틈을 파고들었다.
     “보우어택!”
     묵직한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유저의 다리를 후려쳤고, 그에 중심을 잃은 유저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틈을 놓치지 않은 현성이 재빨리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어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그와 동시에 화살촉에는 붉은 오러가 맺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구, 궁수가 어찌 오러를…….”
     “궁탑의 첫 번째 제자인 로빈훗을 잘 알고 있겠지? 나도 로빈훗과 같은 궁탑의 제자이며 레인지 마스터거든.”
     말을 마친 현성이 활시위를 놓았다. 순식간에 붉은 오러를 머금은 굵직한 화살이 유저의 안면에 쑤셔 박혔다.
     ‘뭐야, 순 맹탕이잖아? 이전에 맞붙었던 NPC 케이가 훨씬 더 강한 것 같군.’
     “화염검이라. 요상한 물건을 쓰는군. 아이템에 인챈트라도 한거냐?”
     “알게 뭐야.”
     배틀 엑스를 쥔 유저의 말에 강찬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히든 클래스 마검사가 끌어올리는 화염의 오러 블레이드였지만 알려진 바가 없었기에 마검사의 존재를 여부를 아는 유저는 강찬과 그의 일행 외에는 별로 없었다.
     강찬의 대답에 배틀 엑스를 쥔 유저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네놈에게 광전사의 무서움을 각인시켜주마.”
     “관심 없어.”
     “버서크(Berserk).”
     유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눈이 붉게 충혈 되었다. 그와 동시에 비릿한 냉소를 흘리며 미친 듯이 배틀 엑스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촤앙!
     유저의 배틀 엑스와 강찬의 문 블레이드가 서로 충돌을 해 불똥이 튀었다.
     ‘웃. 엄청난데?’
     유저의 배틀 엑스를 막아낸 강찬이 두 팔이 얼얼해지는 것을 느끼며 막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유저의 공격을 피하며 틈을 노리기 시작했다.
     버서크. 자신도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었기에 그 스킬의 단점을 알고 있던 터라 빈틈을 노려 공격을 시도하려 했지만 버서크의 탁월한 효과는 일대일 대결에서는 단점을 보완하고도 남았다.
     ‘부득이하게 나도 스킬을 발동시켜야겠군.’
     잽싸게 공격을 피해내던 강찬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에 공격을 가하던 유저가 소리쳤다.
     “흐흐흐. 뭐야, 빼는 거냐? 그렇겐 안 되지.”
     이쪽으로 다가오는 유저를 보며 강찬이 나지막이 스킬 명을 외쳤다.
     “버서크.”
     강찬의 두 눈이 급속도로 충혈 되기 시작하더니 안색이 극도로 창백해졌다. 그와 동시에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고,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크크크.”
     문 블레이드에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맺혀있던 플레임 웨폰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유저의 배틀 엑스가 정확히 강찬의 목덜미를 향해 폭사되었다. 강찬의 붉게 충혈 된 눈동자가 휘둘러지는 배틀 엑스를 포착했고 그와 동시에 활활 타오르는 화염을 머금은 문 블레이드가 마중 나왔다.
     촤앙!
     두 병기가 서로 충돌하자 스파크가 튀었다. 강찬은 멀쩡히 서 있는 반면에 광전사 유저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광전사 유저는 어느 정도 이성이 남아 있는 반면, 강찬은 완벽하게 이성을 잃은 듯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저 피를 탐하는 완벽한 살귀의 모습을 한 채 강찬은 광전사 유저를 목표로 종횡무진 문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뭐, 뭐야! 이 자식!”
     “크핫핫핫!”
     채앵!
     휘리릭.
     광전사 유저의 배틀 엑스가 공중으로 치솟더니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철그렁.
     “아, 안 돼!”
     배틀 엑스를 놓친 유저가 뒷걸음질을 쳤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강찬이 가만히 놔둘 리 만무했다. 그대로 몸을 날려 문 블레이드를 새로로 그었고 유저에게 정확히 머리에서부터 몸통아래까지 붉은 선이 그어졌다.
     쫘악.
     “꺄악!”
     유저의 몸통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자 마차 안에서 구경을 하던 티아와 리아 그리고 제리코가 헛바람을 들이마셨고, 구경을 하던 이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무척이나 참혹한 광경이었다.
     목표가 죽자 강찬은 고개를 돌려 다음 타깃을 찾았다.
     “크크크.”
     그때였다. 광소를 흘리며 마차를 향해 걷던 강찬이 갑자기 머리를 싸쥐고 주저앉았다.
     “크으윽. 으아악!”
     그렇게 한참을 나뒹굴던 강찬의 안색이 급속도로 안정을 찾더니 이내 붉게 충혈 되었던 눈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혁을 상대하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네크로멘서 유저는 상당히 고전을 하고 있었다. 기사 유저와 광전사 유저가 거의 동시에 나가떨어졌지만 유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큰소리치던 둘이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한 채 나가떨어져 로그아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녀석들. 겨우 신참들에게 나가떨어지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군.’
     그저 방심을 했기 때문에 어이없게 패했다고 생각한 그는 재빨리 수인을 맺어 쉐이드 둘과 최상급 구울 셋을 소환해냈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최상급 구울답게 놈들이 빠른 몸놀림을 자랑하며 혁을 에워쌌지만 금빛 광채를 뿜어내는 오러를 머금은 검이 휘둘러지자 어렵게 소환해낸 최상급 구울 세 마리가 한줌의 잿더미로 화해 바닥에 나동그라졌으며, 쉐이드 둘도 얼마 못 버티고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강철마저도 꿰뚫는다는 쉐이드의 손톱도 신성력이 깃든 오러에는 맥을 못 추고 잘려나가 한줌의 재로 화했다. 이어 네크로멘서 유저가 다시 수인을 맺자 혁의 발아래에서 굵직한 나무뿌리 두어 개가 솟아나 혁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엔젤릭 실드(Angelic shield)"
     번쩍!
     혁의 몸에선 눈부신 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둥근 막이 형성되어 몸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물론 시커먼 나무뿌리는 엔젤릭 실드에 닿는 즉시 재로 화해 바닥에 흩뿌려졌다.
     ‘아, 안 돼.’
     유저의 얼굴엔 절망감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혁의 검이 유저의 가슴팍을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크어억.”
     신음을 흘리던 유저의 모습이 안개에 가려지듯 푹 꺼져버렸다. 유저 하나를 처리한 혁이 검에 맺힌 오러를 거두고 등에 둘러메고 있던 배틀 해머를 손에 쥐고 검을 꽂아 넣었다.
     철컥.
     손잡이를 돌려 고정시킨 뒤 배틀 해머를 등에 둘러 멘 혁이 마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덤벼들던 유저들은 거의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제일 먼저 기사 유저를 쓰러뜨린 나는 다른 녀석들을 도울까하는 심산에 주변을 살폈지만 상대는 거의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홈페이지에서 읽은 글대로 싸우게 되는군. 신대륙의 특성상 PK를 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기 때문에 캐릭터에 해가 가지 않아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한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언제 이렇게 구경꾼들이 몰려온 거지? 덤벼들던 세 유저를 간단히 처리한 우리는 마차로 향했다. 지켜보던 경훈과 레온도 마차에 올라탔고 강찬과 혁이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제일 늦게 마차에 올랐다.
     “대단하던걸요? 거의 동시에 세 유저가 나가떨어지는 상황.”
     레온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에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혁을 바라보는 리아의 눈빛이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음.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게 분명해.
     이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마차는 수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자코 앉아있던 레온이 말했다.
     “레드. 수도에 도착하면 바로 초인들과 맞붙을 건가요?”
     “아뇨. 바인마하 왕국에서 초인과 붙어본 결과 지금 이대로 붙는다면 패할 게 뻔해요. 다른 유저들과 겨루면서 실전 경험을 쌓고 사냥을 통해 레벨업을 하고 또 좋은 아이템을 구한 뒤 완전 무장을 하고 싸워야할 것 같아요.”
     “그렇군요. 힘이 닿는 대로 돕겠습니다.”
     “나도!”
     레온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앉아있던 현지가 소리쳤다. 그에 나는 빙긋 웃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티아 씨는 수도에서 뭘 하실 건가요?”
     “음. 저는 일단 리아 언니랑 같이 이곳저곳 둘러 볼 생각이에요. 레드 오빠랑도 같이 돌아다니고 싶은데 요샌 놀아주지도 않네요.”
     현지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같이 돌아다니는 시간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동안 너무 소홀했던 것 같군. 그러면서도 잡고 있는 손을 절대 놓지 않는 현지를 보니 왠지 모르게 고마웠다.
     “저놈은 또 추태야.”
     늘어지게 잠자며 코를 고는 혁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강찬이 말했다.
     “풋.”
     그에 리아를 제외한 모두가 혁의 자태(?)를 보며 웃었다. 리아는 그런 혁의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벌게진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파르판 제국의 수도 아르곤.
     평소와는 달리 아르곤 내부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유저들 모두가 전신 무장을 한 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조그만 소리에도 크게 반응을 나타냈고 이유가 어찌 됐건 최대한 서로 싸우는 것을 피했다.
     아르곤의 중앙 광장에 위치한 시계탑 꼭대기에 서 있는 한 유저가 먼 곳을 응시한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라색의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 그의 어깨 위엔 붉은 매 한 마리가 앉아 있었고 왼손에는 기다란 롱 보우가 들려 있었다.
     궁탑의 첫 번째 제자 로빈훗. 그것이 바로 유저의 정체였다. 로빈훗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셋째 녀석. 그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지만 상상 이상인데?’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로빈훗은 기분이 픽 상하는 것을 느꼈다.
     현재 셋째는 궁탑의 제자들과 연락을 끊은 채 거의 잠적을 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에 파르판 제국을 침공해올 레드 드래곤에 관한이 이야기를 적어 쪽지를 전송했지만 셋째의 대답은 짤막했다.
     ‘관심없습니다.’
     그간 소문으로 들어오던 셋째에 대한 이야기 중 좋은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신대륙 전역에 퍼질 정도로 셋째의 악명은 엄청났고. 그 때문에 신대륙에서는 궁탑의 제자들을 꺼려했다. 궁탑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거래마저 거부하는 이들이 다반사였다.
     대표적으로 피해를 본 것은 다름 아니 로빈훗이었다. 궁탑의 제작들을 대표하는 첫 번째 제자인 만큼 셋째로 인한 타격이 엄청났다.
     물론 지금은 레드 드래곤이 언제 침공해올지 모르는 비상사태인지지라 파르판 제국에서 활동하는 유저들과 잠시 단합이 된 상황이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무척 좋지 못했다.
     ‘레드 드래곤을 막아낸 뒤 셋째 녀석을 찾아가야겠어.’
    *    *    *
     한참을 달리던 끝에 마차는 파르판 제국의 수도인 아르곤에 다다르게 되었다. 제국의 다른 곳과는 달리 수도인 아르곤은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홈페이지에서 보았던 활기찬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모두들 잔뜩 긴장한 채 병장기를 꼬나 쥐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수도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마차와 말을 모조리 판 뒤 수도의 중심부로 걸음을 옮겼다.
     “홈페이지에서 본 것과는 딴판인데요? 무척이나 활기찬 곳이라고 들었는데.”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무슨 일이 있는지 한번 알아봐야겠어요.”
     함께 걷던 레온이 자리에서 이탈하자 모두가 걸음을 멈췄다. 마갑을 착용한 말에 탑승한 채 기다란 랜스를 쥔 유저에게 다가간 레온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안면보호대가 닫혀있어 유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심각한 것 같았다. 대화를 하는 레온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을 보아하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대화가 끝났는지 레온이 목례를 하곤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래요?”
     팔짱을 끼고 서 있던 경훈의 물음에 서둘러 걸어오던 레온이 말했다.
     “지금 레드 드래곤이 침공해올 기세라 모두가 비상사태라네요. 수도가 아닌 제국의 외각 지역에선 이러지 않았는데.”
     레온의 말에 나는 얼마 전 홈페이지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 어느 유저들에 의해 레드 드래곤의 해츨링이 죽었으며 그에 분노한 레드 드래곤이 제국에 침공을 한다던 그 이벤트.
     물론 세릴리아 대륙처럼 운영자가 직접 나타나서 이벤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가진 레드 드래곤이 해츨링을 잃고 분노해 유저들을 징벌하러 오는 것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도 이벤트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뭐 아무튼 레드 드래곤 한 마리 때문에 이렇게 모두들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로군. 물론 드래곤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는 알고 있지만 이 많은 마스터급의 유저들이 한꺼번에 덤빈다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먼저 개인적인 볼일을 보고 이곳에서 모이도록 할까요?”
     “그럽시다.”
     레온의 말에 제일 먼저 대답한 것은 다름 아닌 혁이었다. 쯔쯔. 이 녀석이 뭘 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나는 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 녀석, 신난 것 같진 않았다. 왠지 모르게 진지한 혁을 보자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개인적인 볼일을 본 뒤 약 2시간 뒤에 이곳에서 다시 모이기로 약속을 하고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자리를 뜬 것은 혁이었다. 혁의 단짝인 경훈이 즉시 혁의 뒤를 따랐다. 레온 이곳의 지리를 살펴보다 인적이 드문 장소에 마법진을 설치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제리코는 쇼핑을 하러 가겠다는 현지와 리아를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정말? 그럼 제리코가 우릴 보호해주면 되겠네?”
     리아의 장난스런 말에 제리코가 가슴을 쫙 폈다.
     “에헴. 제가 보디가드도 할 겸 뒤따르죠.”
     이런 제리코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현지와 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같이 가자. 참, 오빠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제리코에게 대답을 마친 현지가 내게 물어왔다.
     “음. 먹고 싶은 거야 많지. 베이컨이랑 빵이랑 치즈 등등. 말린 고기도 먹고 싶고.”
     “오케이! 그럼 이따가 봐~.”
     “응.”
     손을 흔들며 현지는 리아, 제리코와 함께 많은 인파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레드 넌 뭐 하러 갈 거야?”
     “글쎄. 막상 오니까 할 게 없다. 그냥 아르곤 광장이나 돌아볼까?”
     내 대답에 내게 질문한 강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의 지리도 익힐 겸 돌아다녀보자.”
     “좋아, 따라와 루카.”
     캉캉.
    *    *    *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군. 드래곤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까.’
     시계탑 꼭대기에 서 있던 로빈훗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눈을 감기 전 보라색을 띠고 있던 눈동자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자 적안(赤眼)이 되었고 눈매를 지그시 좁혀 먼 곳을 다시 한 번 응시한 로빈훗이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확인 차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드래곤이 나타날 기미는 전혀 없었다.
     “후, 오늘은 여기서 철수해야겠군.”
     한숨을 내쉬며 로빈훗이 말했다. 시계탑에서 내려가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 순간이었다.
     “일곱째?”
     칠흑의 검은 머리칼에 지극히 평범한 외모. 조금 짙은 눈썹 아래에 위치한 눈동자는 적안이었다. 그리고 칠흑의 검은 복장에 붉은 망토를 늘어뜨린, 손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거대한 철궁을 쥐고 있었고 그의 뒤로는 어디서나 볼 수 없는 흰 늑대가 따랐다.
     일곱째 사제 레드 파운의 완벽한 인상착의를 한 유저가 로빈훗의 망막에 맺혔다.
     “역시나, 파르판 대륙에 모습을 나타냈군. 일곱째 사제.”
     말을 마친 로빈훗이 빙긋 웃으며 시계탑 아래로 몸을 던졌다.
    *    *    *
     “그렇군. 그럼 초인들을 전부 꺾고 난 뒤에는 뭘 할 거야?”
     “음… 그냥 평범한 일을 하고 싶어. 초인을 모조리 꺾게 되면 궁수로서의 일은 모두 끝난 걸로 봐야겠지?”
     “뭐야, 그럼 또 다시 생활직을 하려는 거야?”
     “뭐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자 강찬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도대체 생활직이 뭐 어떻단 거지? 집중할 수 있어서 좋은데 말이야. 아직까지 못 해본 생활직도 몇 있었기에 나는 초인들을 전부 꺾고 나면 다시 생활직에 손을 댈 생각이었다. 아직 마스터하지 못한 가구 제작 스킬을 마스터하는 것이 우선이겠지?
     그렇게 강찬과 대화를 하며 시계탑 광장에 다다랐다.
     “우와, 티르 네티아의 시계탑이랑 비교도 안 된다.”
     “규모부터가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데?”
     강찬이 시계탑의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티르 네티아의 시계탑 광장에 있는 시계탑보다 훨씬 더 고풍스런 모양새를 하고 있는 시계탑. 역시 신대륙은 달랐다.
     “앗. 꼭대기에서 유저 하나가 뛰어내렸어.”
     “어디?”
     강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맙소사, 강찬의 말대로 정신 나간 유저 하나가 시계탑 광장에서 뛰어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저 유저가 경신법을 익히고 있다면 사뿐히 착지해 아무런 데미지를 입지 않겠지만 저 유저가 경신법을 익혔을 확률은 미지수였다.
     나는 뛰어내린 유저가 바닥에 곤두박질 처질 것을 예상하고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상황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흘렀다. 가볍게 지면에 착지한 유저.
     보라색 머리칼에 적안을 가진 유저였다. 그의 손에는 기다란 롱 보우가 쥐어져 있었고, 뒤늦게 날개를 퍼덕이며 붉은 매 한 마리가 그의 어깨에 앉았다.
     아니 잠깐, 보라색 머리카락에 적안. 그리고 붉은 매라면…….
     “반갑다.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레드 파운 맞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상대가 말을 걸어왔다.
     “앗! 이, 이자는 로빈훗?”
     “절 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궁탑의 첫 번째 제자인 로빈훗입니다. 사제의 동료인가보네요.”
     이쪽으로 다가온 로빈훗이 빙긋 웃으며 강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에 강찬이 손을 뻗었다.
     “예, 반갑습니다. 카이루라고 합니다.”
     가볍게 악수를 끝낸 로빈훗의 시선이 이쪽으로 던져졌다.
     “역시 소문대로군. 무지막지한 철궁에 스몰 스피어를 연상시키는 화살. 사제도 스승님의 당부를 따라 초인들을 꺾으러 온 건가?”
     멀티비전으로 봤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의 로빈훗. 강찬과 비슷한 신장을 가지고 있었고 왠지 모를 위압감마저 풍기고 있었지만 로빈훗의 얼굴을 보자 왠지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마지막 목표로 삼고 있던 로빈훗을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로빈훗을 보자 몸속의 피가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활을 들고 비무를 펼치고 싶을 정도로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참. 내가 사제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이곳에 왔다면 분명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을 거야. 사제는 보우 마스터인가?”
     “아니오. 레인지 마스터입니다.”
     로빈훗의 물음에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에 로빈훗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렇군. 막내 사제도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어. 그건 그렇고 이곳에는 파르판 제국에는 무슨 일이지?”
     “물론 초인들을 꺾으러 왔죠.”
     로빈훗의 물음에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렇군. 그런데 좋지 못한 시기에 왔어.”
     “레드 드래곤이 침공할 기미를 보여서 그런 거죠? 어느 한 멍청한 유저가 해츨링을 죽였기 때문에.”
     나는 로빈훗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그에 로빈훗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고 있었군. 그래.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개월 전 화이트 드래곤 한 마리가 이곳을 침공했던 적이 있지. 드래곤 중 가장 약하다고 일컫는 녀석이었지만 드래곤의 위력은 가공할 만했다. 이 넓은 수도 전역이 쑥대밭이 되었지. 하지만 이번에 침공해오는 녀석은 드래곤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레드 드래곤이지. 한 번 맛본 자들만이 드래곤의 위력을 알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모두들 잔뜩 긴장을 하고 있지.”
     로빈훗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강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근차근 친절하게 말을 이어가는 로빈훗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저어, 로빈훗. 실례지만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붙어볼 수 있을까요.”
     붙어볼 수 있을까요… 어감이 상당히 이상했지만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가던 로빈훗이 빙긋 웃었다.
     “비무를 하자는 건가?”
     “예. 실력 차가 얼마나 많이 나는지 알아보고 싶었거든요.”
     그에 로빈훗의 눈이 물처럼 고요해졌다. 말없이 나를 한동안 쳐다보던 로빈훗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막내 사제의 부탁이니 들어줄 수밖에. 비무를 원한다면 날 따라와.”
     그에 나는 루카, 강찬과 함께 로빈훗의 뒤를 따랐다. 로빈훗을 따라 도착하게 된 곳은 다름 아닌 드넓은 연무장과 비슷한 곳이었다.
     “유저들이 공식적인 대련을 할 때 이곳을 자주 이용하지. 하지만 공식적인 대련을 할 때만이야. 대부분 PK를 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유저는 거의 없어. 사제도 알고 있지? 이곳에선 PK에 대한 패널티가 전혀 없다는 것을.”
     “예.”
     “그럼 시작해볼까?”
     로빈훗의 말에 붉은 매는 로빈훗의 어깨에서 벗어나 한참 뒤에 위치해 있는 횃대에 앉았다. 자신의 소환수가 횃대에 앉은 것을 확인한 로빈훗이 롱 보우의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었다. 나는 루카와 함께 저만치 떨어져 앉아 구경을 하는 강찬을 보곤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시위를 활 끝에 걸었다.
     이제 정령을 소환할 차례로군.
     “바람을 관장하는 자여…….”
     주문영창과 함께 네 정령들이 모습을 나타냈고 각자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부탁한다, 얘들아.”
     -네, 마스터.
     -알았어요~ 마스터.
     -응, 형!
     -알았다.
     “그럼 시작할까?”
     “예. 퀵스텝.”
     나는 전투 자세를 취하는 로빈훗을 보며 심호흡을 한 뒤 전투 자세를 취했다. 마스터한 퀵스텝이 발동되자 몸이 비약적으로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제32장  레드 드래곤 로이스케의 습격

     “크윽. 져, 졌네요.”
     붉은 오러가 충만히 맺힌 화살촉이 내 이마를 향해 겨냥되어 있는 것을 느낀 나는 패배를 선언했다. 압도적인 실력 차로 순식간에 패했으니 이건 졌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빈훗은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초인의 경지에 오른 유저였다.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싸이클론 애로우도 무용지물이었다. 제아무리 강한 파괴력을 가졌다 해도 맞추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
     게다가 이형환위를 전개해 보우어택을 가하려 했지만 로빈훗의 순간 판단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의 뒤에 모습을 나타냄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퀵스텝을 걸고 몸을 날려 피하는 것이 한두 번 싸워본 솜씨가 아니었다.
     화살을 거둔 로빈훗이 화살통에 화살을 도로 꽂아 넣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로빈훗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까지 사제에겐 실전경험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
     로빈훗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이었다. 나만의 전투법을 개량해내긴 했지만 실전에서 써먹은 것이 거의 없었고 타인에게는 무척이나 생소했기 때문에 먹혀든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여러 유저들과 맞붙어 싸우며 실전 경험을 쌓는 것이 우선이었다.
    *    *    *
     같은 시각.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유저들은 더더욱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날 몬스터들이 빈번하게 침공을 해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몬스터들의 습격이 없었고 시위가 고요했다.
     그때였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무언가 붉은 반점이 반짝이더니 이내 아르곤 시를 향해 빠르게 폭사되기 시작했다.
     쐐애액.
     집채만 한 불덩이가 시계탑 광장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콰앙!
     광장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고 있던 유저들은 당연히 게임아웃이 되었고, 근처에 위치해있던 유저들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채 자리에 나동그라졌다. 뒤이어 수차례 집채만 한 불덩이가 광장을 쑥대밭을 만들어놓았다.
     “드, 드래곤이다!”
     한 유저가 소리치자 아르곤 시는 떠들썩해졌다. 말로만 듣던 최강의 드래곤인 레드 드래곤의 거대한 동체가 서서히 하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핏빛의 붉은 비늘이 달빛을 받아 광택을 내고 있었는데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나 레드 드래곤 로이스케는 파르판 제국에 존재하는 인간들을 징벌하러 왔다. 본좌는 이곳에 존재하는 인간들을 깡그리 섬멸시키려고 한다. 그에 대한 이유는 합당하다. 위대한 종족 드래곤의 해츨링이 이곳 파르판 제국의 인간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로이스케라 소개한 레드 드래곤의 손아귀에서 타오르는 푸른색의 구체가 형성되었다. 9클래스의 궁극의 마법인 헬 파이어(Hell fire, 지옥의 겁화)가 순식간에 발현되었고 이내 유저들을 향해 쏘아졌다.
     콰앙!
     “크아악!”
     한데 모여 있던 유저들이 헬 파이어에 적중되어 한줌의 재로 화했다. 그에 대기 하고 있던 유저들 중 무위가 뛰어난 유저들이 속속히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3내지 4미터에 달하는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린 기사 유저를 비롯한 유저들이 로이스케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    *    *
     로빈훗과 막 헤어지려던 찰나 귓가에 무언가 전음 같은 것이 울려 퍼졌다.
     -나 레드 드래곤 로이스케는 파르판 제국에 존재하는 인간들을 징벌하러 왔다. 본좌는 이곳에 존재하는 인간들을 깡그리 섬멸시키려고 한다. 그에 대한 이유는 합당하다. 위대한 종족 드래곤의 해츨링이 이곳 파르판 제국의 인간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다.
     마침내 유저들이 두려워하던 레드 드래곤이 파르판 제국을 침공한 것이었다.
     “분명 오늘 나타날 기미가 없었는데.”
     로빈훗이 폭발을 일으킨 광장의 중심부에 시선을 던지며 소리쳤다.
     저기 저 공중에 떠 있는 도마뱀 같은 것이 드래곤이겠지?
     난생처음 보는 드래곤의 모습은 완벽 그 자체였다. 활짝 펼친 날개와 달빛을 받아 광택을 내는 붉은 비늘이 그리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드래곤을 처리할 거면 같이 가지, 사제.”
     “예. 가자. 루카, 카이루.”
     나는 서둘러 시계탑 광장으로 달리는 로빈훗의 뒤를 따랐다. 갑주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것을 보니 강찬도 내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프리징 웨폰(Freezzing).”
     강찬의 주특기는 화염 계열의 보조마법을 구사하는 것이었지만 레드 드래곤의 특성상 불에 대한 면역이 워낙 뛰어났기에 강찬은 프리징 웨폰을 시전한 것 같았다.
     로빈훗, 강찬 그리고 루카와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건물 여러 채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나 있었다.
     땅에 내려선 레드 드래곤과 그와 맞붙는 다수의 유저들. 하지만 드래곤이 월등히 우세한 그런 싸움이었다.
     꼬리치기 단 한 방에 다수의 유저들이 게임아수 되었고 드래곤이 펼친 실드에는 소드 마스터 유저들의 오러 블레이드도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그 상식을 깨는 유저들이 있었으니 이른바 ‘초인’이라는 명칭을 얻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유저들이었다.
     5미터 가량 뿜어진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검이 휘둘러지자 실드는 허무하게 갈라져버렸고, 단단한 드래곤의 비늘마저 종잇장 찢어지듯 손쉽게 갈라버렸다.
     “그럼 이따가 보자, 사제. 반드시 살아야 한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드래곤을 향해 몸을 날리는 로빈훗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다른 일행들은 전부 살아있는 건가? 혹시나 하는 맘에 모두에게 같은 내용을 쪽지를 보냈고 다행히 일행 모두가 살아있는지 즉시 답장이 날아왔다.
     “강찬아, 다행이도 모두가 게임아웃 되지 않은 것 같아.”
     “그래? 다행이다. 우리도 저 유저들을 돕자.”
     강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드래곤에게 몸을 던졌다.
     지면에 착지해있던 드래곤이 펼치고 있던 실드를 거두고 서서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궁수 유저들이 쏘아 보낸 화살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 발의 화살이 로이스케의 몸에 적중했지만 아무런 상처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유저들은 포기하지 않고 화살을 쏘아 보냈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이 귀찮은 듯 로이스케가 포효를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드래곤 피어(Dragon Fear, 마법과는 무관한 드래곤들만의 능력. 자신의 기세로 상대를 제압하는 능력)가 발동 되었는지 레벨이 뒤처지거나 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못한 유저들이 쓰러져 머리를 싸쥐었다.
     그때 머리를 싸쥐고 나뒹구는 유저들 사이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애로우 레인(Arrow rain)!”
     그와 동시에 가느다란 붉은 섬광 하나가 공중으로 치솟더니 이내 수십 수백 발로 불어나 이륙을 하고 있는 로이스케의 등판에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캬아악!
     로빈훗이 쏘아낸 붉은 섬광은 드래곤이 비늘을 뚫고 들어가 심각한 상처를 주었다. 화살 비를 맞은 로이스케가 서둘러 날개 짓을 해 공중으로 치솟았다.
     ‘질 수 없다.’
     로빈훗의 활약을 눈여겨본 현성이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재빨리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현성이 겨냥하고 있는 목표물은 레드 드래곤 로이스케. 정확히 눈 부근을 겨냥하고 있던 현성이 소리치며 활시위를 놓았다.
     “싸이클론 애로우!”
     핏빛의 붉은 섬광이 쏘아진 탄환처럼 맹렬히 회전하며 로이스케의 오른쪽 눈을 향해 폭사되었다.
     푸악.
     -캬아아악!
     굵직한 화살이 눈알을 파고들자 날아오르던 로이스케가 힘을 잃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지는가싶더니 이내 중심을 잡고 다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굿! 대단한데?”
     강찬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한 현성이 허리춤에서 화살 두 개를 꺼내들고 우측으로 몸을 날렸다. 기다란 파이어 랜스 하나가 이쪽으로 폭사되었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의 위력은 정말 가공할 만했다. 아르곤 시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유저의 삼분지 일이 벌써 전멸당해 게임아웃 된 것이 드래곤의 위력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대부분이 마스터 급의 유저들이었지만 너무도 어이없게 그들은 게임아웃 당했다. 게다가 드래곤을 상대로 마법사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마법의 조종인 그들은 인간과는 달리 무지 높은 클래스에 도달해 있었고 결정적으로 인간 마법사와는 달리 용언(龍言)마법이라는 것이 있다. 캐스팅을 하지 않고 의지만으로 마법을 발현시킬 수 있다는 데에서 큰 차이점을 두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드래곤이 마법의 조종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인간들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이벤트를 할 때마다 돋보이는 활약을 했던 레온도 이번만큼은 기대를 할 수 없었다.
     “헬 파이어다. 모두들 피해!”
     한 유저의 말에 모두들 경악어린 시선으로 드래곤의 손바닥 위에서 발현되고 있는 타오르는 푸른 구체를 보곤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큼지막한 불덩이가 전장을 향해 쏘아졌다. 그것은 바스타드 소드를 쥐고 엄청난 활약을 하던 한 그랜드 마스터 유저에게 쏘아졌다.
     “핫!”
     오러 블레이드가 충만히 맺힌 그의 검이 대기를 갈랐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헬 파이어를 정확히 반으로 쪼갠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드래곤이 공중에 떠 있는 상황이었기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익스플로전.
     낭랑한 주문영창과 함께 유저들이 운집해있는 중심부에서 불의 속성을 한데 모아 일시에 격발시키는 마법이 작렬했다.
     콰앙!
     폭발의 중심부에 서 있던 유저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가리 찢어졌고, 폭발의 외각에 서 있던 유저들은 상당량의 생명력이 감소되었다.
     심지어는 데들리(Deadly)상태가 되어 기절을 한 유저들도 있었다. 드래곤이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고 공중에서 시간을 기다렸다. 마법으로만 공격을 하게 된다면 유저들은 전부 게임아웃을 당하고 성지인 파르판 제국이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유저들의 얼굴에는 점점 절망감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엄청난 폭발로 인해 다수의 유저가 게임아웃이 되었다. 정말이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공할 파괴력이었다. 지금껏 레온이 전개해왔던 익스플로전과는 질적으로도 달랐다.
     약 반경 50미터의 범위 안에서 대폭발을 일으키는 것이 레온의 익스플로전이라면 조금 전 레드 드래곤이 발현시킨 익스플로전의 폭발범위는 200미터는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저따위 것을 어떻게 잡는다는 거지?”
     검신이 순백색으로 물든 문 블레이드를 쥐고 서 있는 강찬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 블레이드에서는 시릴 듯한 냉기가 연신 뿜어져 나왔지만 그것 또한 무용지물이었다.
     중원채널의 유저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천상제(天上濟)라던가 능공허도(凌空虛道)와 같은 상승 신법을 펼쳐 공중에 떠 있는 레드 드래곤에게 접근한 뒤 일격을 가했겠지?
     나는 서서히 낮게 비행을 하는 래드 드래곤을 보곤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손에 마나 포션 하나를 쥐고 해야 할 엄청난 도박.
     나는 생각해낸 것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아이템 창을 열어 대용량 마나포션 하나를 꺼낸 뒤 아이템 창을 닫았다.
     “강찬아. 잠시 루카 좀 맡아줘.”
     “응? 왜?”
     “잠시 도박을 하려고.”
     “엥? 웬 도박?”
     “그럼 부탁한다. 퀵스텝.”
     강찬에게 루카를 맡긴 나는 퀵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비약적으로 가벼워진 몸을 이끌고 유저들이 한데 운집해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지금 생각해낸 도박은 대충 이렇다.
     허공답보(虛空踏步)를 여러 번 전개 해 최대한 레드 드래곤에게 가까이 접근한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졌을 때는 이형환위를 전개해 드래곤의 머리 위나 등판 위로 이동한 뒤 날개에 오러 애로우를 머금은 활을 여러 발 쏘아 바닥에 곤두박질 쳐지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봐, 거기로 가면 위험해!”
     한 유저가 소리쳤다. 그에 다른 유저들이 손을 뻗어 날 잡아채려 했지만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려 유저들의 손을 모조리 피해냈다.
     망토를 잡힐 뻔했으나 필사적으로 움직인 결과 유저들이 운집해있는 곳에서 벗어나 드래곤의 뒤로 향할 수 있었다. 현재 드래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공중에 떠 있는 상황.
     나는 망설임 없이 다시 한 번 퀵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그리고 허공을 박차며 드래곤을 향해 접근을 시도했다.
     이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잖아? 감소되는 마나의 양이 상상 이상이었고, 허공답보를 이용해 이런 식으로 적에게 접근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직까진 실수투성이었다.
     조금 전에는 바닥에 곤두박질칠 뻔했으니 상황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진 것을 확인한 나는 즉시 이형환위를 전개했다. 허공답보로 허공을 박차고 드래곤의 등판을 향해 몸을 날린 나는 순식간에 드래곤의 붉고 거대한 동체에 몸을 실을 수 있게 되었다.
     “크윽.”
     한꺼번에 많은 양의 마나가 감소되자 현기증이 밀려왔고, 나는 즉시 손에 쥔 포션의 마개를 딴 뒤 벌컥벌컥 들이켰다. 포션을 마심과 동시에 마나가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현기증이 가신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제 막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려던 순간이었다. 드래곤의 목이 홱 돌아가더니 이쪽을 보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놀랐기에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벌렁 뒤집어질 뻔했다.
     나를 노려보던 드래곤이 입을 열었다.
     -내 눈 하나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로군.
     말을 마친 드래곤이 몸을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이 녀석의 몸에서 떨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화살 깃을 활시위에 재빨리 건 나는 드래곤의 등판을 겨냥한 뒤 활시위를 놓았다.
     푸욱.
     -캬악!
     화살이 드래곤의 등판에 박히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곧장 화살을 잡았다. 드래곤의 등에 단단히 박힌 화살을 움켜쥐었다. 상당히 격하게 발버둥 치는군.
     계산했던 것과는 많은 착오가 있었지만 그래도 신경을 분산 시키는 일을 했으니 큰일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드래곤의 신경을 분산시키고 있을 때였다.
     “애로우 레인!”
     나지막한 주문영창과 함께 한줄기 가느다란 붉은 섬광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한 줄기의 붉은 섬광이 불어나 이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고, 드래곤의 왼쪽 날개와 왼팔에 모조리 틀어박혔다.
     피막형의 날개가 엉망이 되자 레드 드래곤의 거대한 동체가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아래에는 오러 블레이드를 잔뜩 끌어올린 유저들이 이를 갈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반대편 날개를 겨냥한 채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화살촉에 붉은 오러를 발현시킨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싸이클론 애로우!”
     쐐애액.
     한줄기 굵직한 붉은 섬광이 쏘아진 탄환처럼 맹렬히 회전하며 대기를 갈랐다. 회전력이 가미된 화살이 레드 드래곤의 피막형 날개를 무참히 찢으며 날아가자 레드 드래곤이 하강하는 속도가 전보다 상승했다.
     서서히 하강하던 레드 드래곤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날 노려보는 것을 보아 금방이라도 덮칠 기세였다.
     “백스텝.”
     재빨리 백스텝을 밟고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예상했던 대로 드래곤이 고개를 쭉 뻗어 허공을 깨물었다.
     터업.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지 않았다면 저 커다란 입에 물렸을 것이 분명했다. 이거 왠지 소름이 돋는걸.
     드래곤이 지면에 착지하자 유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한 유저가 쏘아낸 그물포가 활짝 펼쳐지며 이쪽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본 나는 재빨리 퀵스텝을 걸고 드래곤의 등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물포의 등급이 높았는지, 레드 드패곤을 속박하게 되었다. 레드 드래곤은 그저 발버둥을 칠 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유저들의 병장기가 레드 드래곤의 동체에 난자하기 시작했다. 가공할만한 공격력을 가진 유저들이 쉬지 않고 공격을 했지만 드래곤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못한 듯했다. 그저 외부의 자상이 생겨 피가 흐를 뿐 치명적인 상처는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미 화살 하나를 꺼내 활시위에 건 나는 한 유저가 남긴 상처를 겨냥하고 활시위를 놓았다. 물론 백호의 도움을 받아 날리는 싸이클론 애로우를 쏘아낸 것이었다.
     쐐애액.
     맹렬히 회전하는 붉은 섬광이 레드 드래곤이 생살을 파고들었다.
     푸욱.
     -캬아아악!
     그대로 엎어져있던 드래곤이 몸을 벌떡 일으키자 앞뒤 안 가리고 공격을 하던 유저들이 혼비백산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드래곤의 발에 밟힌 경우 그대로 게임아웃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오러를 머금은 화살이 맹렬히 회전하며 생살을 파고드는 것을 처음 경험하는지 레드 드래곤의 안면이 팍 일그러졌다.
     -미티어 스트라이크(Meteor strike, 운석 소환마법).
     낭랑한 주문영창과 함께 까마득한 창공에서 무언가 큼지막한 것이 이쪽을 향해 폭사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운석이다!”
     “드래고이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전개했어.”
     “달아나!”
     모두가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로빈훗의 말대로 이들 모두 화이트 드래곤이 전개했던 미티어 스트라이크에 당해본 기억이 있는지 사색이 되어 자리를 피해내기 시작했다.
     유저들을 따라 달리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은빛의 새하얀 털을 가진 늑대 한 마리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루카였다.
     나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루카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순식간에 내 앞에 도착한 루카의 등에 훌쩍 올라탔고 루카는 빠르게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달리던 유저들을 추월하고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멈춘 루카가 뒤돌아섰고, 나는 자연스레 거대한 운석 하나가 아르곤 시 중심부에 작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콰앙!
     이크. 파괴력 한번 엄청나군. 거대한 운석을 소환해낸 드래곤이 또다시 날아오를 기미를 보였다. 날개는 형편없이 망가졌지만 비행마법을 이용해 떠오르려는 심산인가보다.
     “루카, 달려.”
     나는 루카에게 달리라고 지시했다. 루카는 빠르게 지면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떠오르려는 기미를 보이는 레드 드래곤을 보며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든 난 재빨리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부르르 떨기 시작했고 이내 시퍼렇게 날이 선 화살촉에 붉은 오러가 발현되었다.
     “백호, 싸이클론 애로우!”
     쐐애액.
     회전력이 가미된 붉은 섬광이 맹렬히 회전하며 드래곤의 비늘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서서히 날아오르던 드래곤의 동체가 다시 지면으로 착지했다.
     -놈, 온갖 방해를 다 하는구나.
     레드 드래곤 로이스케의 거친 음성이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역시 제아무리 강한 드래곤이라고 해도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선 유저들의 합공에는 맥을 못 추는군.
     거대한 운석을 피해내기 위해 잠시 거리를 두었던 유저들이 또다시 물밀듯 밀려와 드래곤을 둘러쌌다. 물론 선두로 달려드는 유저들은 드래곤의 발에 짓밟히거나 꼬리에 맞아 게임아웃 되거나 치명상을 입고 나가떨어졌다.
    *    *    *
     “이야, 대단하군.”
     쏘아낸 탄화처럼 맹렬히 회전하는 굵직한 붉은 섬광을 보며 로빈훗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래곤에게 직접적인 충격을 줄 정도로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 전 비무를 벌였을 때 저것을 맞았다면 그대로 패배의 쓴잔을 들이켰겠군.’
     로이스케가 잠시 주춤하는 틈을 보이자 수많은 유저들이 물밀듯 드래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고, 로빈훗도 그 틈에 끼어 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자자, 다들 이쪽으로 오십시오. 헤이스트(Haste), 스트랭스(Strength), 스톤 스킨(Stone skin), 프로텍션(Protection).”
     레온의 버프를 받은 유저들이 비약적으로 강해진 채 모두 드래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따.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유저들은 레온의 곁에 있는 물의 최상급 정령 엘레스트라와 융합을 한 티아에게 상처를 치료 받은 뒤 또다시 드래곤에게 몸을 날렸다.
     분명 전투불능으로 만든 유저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와 덤벼드니 로이스케로선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인간이란 존재는 매우 약한 존재였지만 다수가 힘을 합치게 된다면 자신과 같은 에이션트 드래곤까지 위협할 정도로 무서워졌다.
     다른 유저들의 공격은 참아낼 만 했지만,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유저들과 저 멀리서 흰 늑대에 탑승한 채 붉은 섬광을 쏘아내는 유저의 공격은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을 느낀 로이스케가 숨을 힘껏 들이마셨다. 대기에 분포되어있는 마나와 공기가 순식간에 로이스케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숨을 전부 들이마셨을 때 한 유저가 소리쳤다.
     “브레스다!”
     유저들이 뒤로 빠지려던 찰나, 로이스케가 숨결을 토해냈다.
     드래곤의 공격 기술 중 최고봉에 속하는 브레스(Breath). 각 드래곤마다 토해내는 브레스의 종류는 가지각색이었다. 불의 속성을 띤 로이스케와 같은 레드 드래곤은 원추형의 화염 브레스를 뿜어낸다.
     로이스케가 브레스를 토해내자 유저들이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브레스에 적중당한 유저들은 그대로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물론 레온의 도움을 받아 멀리 공간이동을 한 유저들도 적잖게 많았다. 현재 주력인 몇 안 되는 그랜드 마스터 유저들이 레온의 도움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버프를 걸어주는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까지…….”
     그에 레온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서로 돕고 살아야죠.”
     한참동안 브레스를 토해내던 레드 드래곤이 브레스를 토해내는 것을 멈췄다. 그 많던 유저들 중 반수가 브레스의 제물이 되어 시커먼 재로 화했다. 자신의 작품(?)에 희열을 느끼고 있을 때 허공이 뒤틀리며 기사 몇과 마법사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 뒤로는 잠시 뒤로 빠졌던 유저들이 물밀듯 몰려오고 있었다.
     -끝이 없군.
     레온의 버프를 다시 한 번 받은 기사 유저들이 로이스케에게 몸을 날렸다. 물론 얄밉게 상처부위만 노리는 궁수 유저도 모습을 나타낸 채 활을 쏘아대고 있었다.
     -브레스에 휘말려 죽은 줄 알았더니 아니었군.
     궁수 유저는 집요하게 기사 유저들이 남긴 상처에 활을 쏘았다. 그 때문에 로이스케가 느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반드시 저 녀석을 갈아 마셔주겠다.’
     하지만 그것은 로이스케의 바램일 뿐이었다. 마스터급이 유저들이 합공으로 인해 생명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드래곤의 습격을 한 번 받았던 적이 있던 터라 지혜롭게 상황을 대처하는 유저들을 보며 로이스케는 한편으론 겁이났다.
     ‘이쯤에서 몸을 빼야겠어. 이대로 가다간 위험하다.’
     뒤늦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로이스케가 날개를 활짝 폈지만 구멍이 뻥뻥 뚫린 날개론 거대한 자신의 동체를 날아오르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랜 시간 브레스를 토해냈기 때문에 당분간 마법을 쓸 수 없는 실정이었다(물론 게임 내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조정된 것이다).
     위험을 느낀 로이스케가 재빨리 꼬리를 휘둘렀지만 인간 마법사의 버프를 받은 유저들은 가볍게 꼬리치기를 피해냈다. 심지어는 공격을 피해낸 뒤, 꼬리를 공격하는 유저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얄미운 궁수놈이 상처 부위를 공격했고 데미지를 고스란히 받은 로이스케는 끔찍한 고통을 온몸으로 느껴야했다.
     생명력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의식의 흐려진 로이스케가 마구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그에 유저들은 또다시 혼비백산이 되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안 되겠어. 레어를 지키고 있는 가디언들을 모조리 소환하는 수밖에.’
    *    *    *
     드래곤이 몸을 비틀거리며 몸부림치는가 싶더니 이내 드래곤이 몸 주위로 허공이 뒤틀리며 은빛광채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은빛 광채가 사라졌을 땐 그곳엔 강철로 된 동체를 가진 아이언 골렘 네 구와 브론즈 골렘 다섯 그리고 스톤 골렘 열과 트윈 헤드 오우거를 비롯한 중형 몬스터가 대거 모습을 나타냈다. 아무래도 자신의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들을 모조리 소환해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유저들. 트윈 헤드 오우거를 비롯한 중형 몬스터들이 우리에게 위협을 할 수 없었으며 움직임이 다소 느린 스톤 골렘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브론즈 골렘과 아이언 골렘은 특유의 빠른 몸놀림을 자랑하며 드래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강한 브론즈 골렘이라 해도 다수의 합공에는 장사가 없는 법.
     어느 정도 버티던 브론즈 골렘들이 하나둘 파괴되기 시작했다. 브론즈 골렘과는 달리 아이언 골렘은 마스터급의 유저들에게도 충분히 위협이 되는 존재들이었다. 그것은 몬스터 침공 이벤트에서 몸소 깨달은 것이었다. 저들을 단숨에 파괴시킬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싸이클론 애로우.
     나는 루카에게 아이언 골렘에게 가까이 접근하라고 지시한 뒤 화살을 활시위에 메긴 뒤 힘껏 당겼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는 것을 본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물론 싸이클론 애로우를 쏘아낸 것이었다.
     쐐애액.
     맹렬히 회전하는 붉은 섬광이 아이언 골렘의 등판에 틀어박혔다.
     콰콰콰콰.
     회전력이 가미된 화살이 아이언 골렘의 등판을 종잇장 찢듯 관통해 골렘의 심장을 파괴하자 아이언 골레의 거대한 동체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제가 아이언 골렘들을 맡겠습니다! 드래곤을 공격하세요!”
     악을 질러가며 소리친 나는 나머지 세 구의 아이언 골렘을 차례대로 파괴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생명력이 바닥을 보이는 레드 드래곤 혼자였다.
     하지만 가디언들을 상대하는 그 짧은 틈을 타 자신의 날개를 회복시켰는지 날개에 뚫려 있던 구멍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후였다.
     이내 날개를 퍼덕이며 레드 드래곤 로이스케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미개한 인간들이라도 힘을 합치니 엄청나군. 다음을 기약하며 오늘은 떠나겠다.
     드래곤이 날아오르며 말했다. 후후. 드래곤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인간들을 징별하러 왔다고 했을 땐 언제고 이제야 다음을 기약한다고?
     하지만 레드 드래곤은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이행하지 못했다. 낌새를 알아챈 기사 유저 하나가 드래곤의 아랫배를 길게 갈랐기 때문이었다.
     -으헉.
     엄청난 충경으로 인해 레드 드래곤의 거대한 동체가 잠시 숙여졌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활을 쏘았다.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레드 드래곤의 피막형 날개를 뚫고 뒷목에 틀어박혔다.
     게다가 잠시 숙여진 드래곤의 몸뚱이에 올라탄 유저들이 연신 칼질을 해댔기 때문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레드 드래곤의 거대한 동체가 무너져 내렸다.
     쿠웅.
     드래곤이 쓰러지자 유저들은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유저들의 무기가 레드 드래곤의 단단한 비늘을 마구 가르기 시작했다. 루카의 등에 탑승한 채 재빨리 쓰러진 레드 드래곤에게 다가온 나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반쯤 뜨인 레드 드래곤의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희망이 없는 눈빛. 이제 영원한 안식을 안겨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나는 꺼내든 화살을 활시위에 건 뒤 활시위를 당겼다.
     “그럼 잘 가라. 파워 샷(Power shot).”
     약간의 마나와 상당량의 스태미나가 감소되는 것을 느끼며 나는 활시위를 놓았다.
     푸슝.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굵직한 붉은 섬광 한줄기가 레드 드래곤의 이마를 향해 폭사되었다.
     콰콰콰콰.
     맹렬히 대기를 가르며 레드 드래곤의 이마로 쏘아진 화살이 이마에 틀어박히는 순간이었다.
     번쩍.
     드래곤이 동체에서 눈부신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새하얀 빛줄기가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뜨지 못할 섬광이 번쩍였기 때문이었다.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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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령 청룡(물)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가디언 제리코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가디언 제리코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가디언 제리코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
     :
     5레벨 업이라… 게다가 정령들은 이제 모조리 레벨 10에 도달해 중급 정령으로 승급이 되었고, 제리코의 레벨은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되었다.
     나만 이런 것이 아니라 다른 유저들도 그런 것이겠지?
     눈을 뜨자 유저들이 드래곤의 시체가 있던 곳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아 풀리게 되었다. 한 유저의 외침 때문이었다.
     “오오! 에이션트급 아이템을 드랍했어!”
     안 그래도 새로운 아이템을 찾던 중이었는데 잘됐군. 나는 재빨리 드래곤의 시체가 있던 곳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템이 유저들의 아이템 창으로 굴러 떨어진 뒤였다.
     “에휴. 결국 아이템을 얻지 못하는 건가?”
     왠지 모를 허탈감을 느끼며 나는 유저들이 한데 모인 곳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무언가가 발에 밟혔고 나는 즉시 발을 들어올렸다. 검붉은 빛을 띤 요상하게 생긴 뾰족한 것이 서너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꽤나 큼지막한 크기를 가진 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드래곤의 이빨로 추정되는 물건이었다.
     쳇, 기념품으로 이것들이라도 챙겨야겠군.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기념품(?)을 넣어두고 아이템 창을 닫았다.
     “에라이. 너 때문에 늦어서 아이템도 못 얻었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이야?”
     “게임아웃 당할 여성 유저 하나 챙긴답시고 뭐야 이게?”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 나는 익숙한 음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익숙한 음성의 주인공은 경훈과 혁이었다. 주변에 레온과 리아 그리고 현지도 있었다.
     “휴우. 오랜만에 폭레벨업을 했네.”
     언제 왔는지 강찬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쪽에 일행들이 있네. 가보자.”
     “그래.”
     나는 강찬과 함께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좋은 아이템 좀 얻었나요?”
     “엉? 레드 너 왔냐.”
     “레드.”
     “오빠!”
     웃는 낯으로 일행들에게 다가가자 모두가 날 반겨주었다. 특히 현지가 달려와 안기는 바람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의 등 위에 올라간 뒤로 안 보여서 게임아웃 된 줄 알았어. 걱정했네.”
     “미안해.”
     나는 손을 뻗어 현지의 등을 두드려주며 대답했다.
     “레벨업은 많이 했어?”
     “응.”
     “아이템은?”
     “못 건졌어. 좀 멀리 떨어져서 상처 입은 유저들을 치료해줬거든. 오빠는 아이템 얻은 거 있어?”
     현지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음. 그냥 기념품 몇 개 얻었지. 쓸모는 없는 것 같아.”
     “많이 아쉽겠다.”
     현지가 감싸 안은 손을 풀며 말했다. 뭐 별로 아쉬울 건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 폐허가 되어버린 아르곤 시. 아무래도 파르판 제국의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길 것 같았다. 다시 아르곤 시를 건설하려면 꽤나 오래 걸릴 테니 말이다.
     세릴리아 대륙 같았으면 운영진이 발 뻗고 나서서 복구를 했을 테지만 이곳은 그것과 무관한 곳이니 뭐. 이곳에 사는 NPC들이 알아서 복구를 시키겠지?
     순식간에 끝이 나긴 했지만 드래곤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꼬리치기 단 한 방에 마스터급의 유저들을 죄다 게임아웃 시켰다는 것이 가장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드래곤 두 마리가 침공을 하게 된다면 아주 제국 하나가 나아갔겠군.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다시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드래곤이 죽자 드래곤에 의해 게임아웃 당했던 유저들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다들 표정이 좋지 못하군.
     레벨 업을 했으니 상태 창이나 열어볼까?
     “상태 창, 오픈.”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레인지 마스터
     Lv. 82
     생명력(HP). 1201
     마나(MP). 640
     스태미나(SP). 1,500(배고픔 수치 0%/ 갈증 0%)
     힘 137
     체력 65
     민첩 207(+30)
     손재주 550
     지력 15
     지혜 21
     행운 15(+10)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310~440
     방어력 10(+12)
     마법방어력 2(+10)
     남은 스탯 포인트: 35
     바람(백호)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10. 친화력 100%
     [상세정보]
     가디언(제리코) Lv. 20 호감도 100%
     [상세정보]
     레벨 82. 역시 폭 레벨업을 했군. 불어나 있는 스탯 포인트를 보자 왠지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이걸 모두 지혜에 때려 박아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레온의 말대로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면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했으니 다섯 개만 지혜에 분배한 뒤 나머지는 손재주와 민첩에 분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스탯 포인트를 모두 분배한 나는 스탯 창을 닫았다.
     “파르판 제국에 처음 오신 분들인가 봐요?”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커다란 타워 실드와 노멀 소드를 쥔 풀 플레이트 메일 차림새의 한 기사 유저가 말을 걸어왔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럼 처음이라 잘 모르시겠네요. 이곳은 이제 더 이상 수도로 삼지 못해요. 유저들이 얼마나 모이느냐에 따라 수도가 어느 곳인지 결정되거든요. 쉽게 말해서 광장이라고 보면 되겠죠?”
     유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잘해주었기에 약간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아르곤 시의 바로 옆 동네인 시스턴 시로 이동을 해야 할 거예요. 화이트 드래곤이 침공했을 때도 이런 일이 있었거든요. 이동을 하는 유저들이 보이시죠?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유저가 목례를 하며 무리지어 떠나는 유저들의 뒤를 따랐다.
     “레온, 어떻게 할까요?”
     “우선 유저들의 뒤를 따르도록 하죠.”
     레온에게 묻자 레온은 유저들의 뒤를 따르자고 했고 그에 일행들 모두 시스턴 시로 이동하는 유저들의 뒤를 따랐다.
     나는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드래곤을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보였던 로빈훗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는군. 내게 다시 한 번 아직 모자라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장본인.
     반드시 강해져서 모든 초인들을 비롯한 로빈훗을 꺾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며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폐허가 되어버린 수도 아르곤을 떠나 시스턴 시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어라… 한 발 늦어버렸군.”
     하늘하늘 거리는 새하얀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유저가 롱 보우를 쥐고 폐허가 되어버린 아르곤을 빙둘러보며 말했다. 그때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늦었군, 넷째.”
     “첫째 사형.”
     “뭐 하다가 이렇게 늦은 거야? 레드 드래곤은 벌써 유저들의 경험치가 되었어.”
     “그렇군요. 으. 제가 너무 게을러져서 큰일이네요.”
     머리를 긁적이는 넷째 사제 카일을 보며 로빈훗이 빙긋 웃었다.
     “오늘 막내 사제를 보았어. 역시 소문대로 무식하게 큰 철궁을 들고 다니더군.”
     “그래요? 막내 사제는 어땠나요?”
     “그도 나와 같은 레인지 마스터였어. 붉은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키는 것을 보면 의심할 여지없는 레인지 마스터야.”
     “그렇…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게다가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공격력 면에서는 나보다 윗줄인 것 같더라고. 단 한 방에 아이언 골렘에게 치명타를 남기니까 말이야. 막내 사제도 스승님의 당부를 이행하기 위해 신대륙으로 건너왔다고 하더군.”
     그에 카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 말도 안 돼. 공격력 면에서는 사형보다 강하다는 건가요? 그, 그렇담 초인들을 모조리 꺾으러 왔다는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로빈훗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도 게을리 수련했다간 언제 막내 사제에게 패할지 몰라. 초심을 찾아. 그리고 다시 열심히 수련을 해.”
     “으흠. 알았어요.”
     로빈훗의 말에 카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온갖 생각이 다 들어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제33장  드워프들의 거처를 향해

     떠나는 유저들의 뒤를 따라 월드 타임으로 반나절을 걷자 시스턴 시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걷던 도중 현지와 리아가 다리가 아프다며 주저앉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루카의 등에 태웠다. 그렇게 반나절을 걸어 이곳 시스턴 시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수도였던 아르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큰 규모를 가진 도시. 물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여기 저기 작은 분수가 설치되어 있었고, 마차도로 대신 넓은 수로(水路)가 설치되어 있어 배를 타고 이동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우와, 물이다!”
     넓은 수로에 다다르자 현지가 루카의 등에서 뛰어내려 수로로 달려갔다. 다리가 아프다더니 잘만 뛰는구먼. 정령을 소환한 현지가 수로로 몸을 던졌다.
     첨부덩!
     하며 빠질 것이란 내 예상과는 달리 현지는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아무래도 엘레스트라의 도움을 받아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청룡.”
     -기대하지 마.
     “넵.”
     나쁜 자식. 중급 정령으로 승급이 되었으니 저런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아니냐! 나는 신이 나서 물 위를 달리는 현지를 보자 왠지 모르게 부러웠다.
     중원의 보법 중에 물 위에 둥둥 떠 있을 수 있는 보법이 한 가지 있긴 했다. 무력답수(無力踏水). 물을 밟고 둥둥 떠 있는 경공의 한 가지인데, 이 녀석을 익히지 못해 쓸 수 없다는 것이 흠이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신기한 보법들이 많았지만 우선 지금 익히고 있는 네 가지 보법에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수로 위에는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다리 하나가 세워져 있었는데, 배 멀리를 앓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마침 다니는 배도 없으니 저곳으로 이동을 하면 되겠군.
     “아무래도 다리를 건너야 할 것 같네요.”
     다리를 건너는 유저들 사이에 끼어 우리는 다리를 건넜고, 현지는 여유롭게 수로를 건넜다. 청룡 이 자식, 잊지 않겠다.
     한참 싸우고 나서 반나절 정도 걸었더니 왠지 허기지는군. 일행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두들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근처 음식점으로 가서 뭐라도 좀 먹읍시다.”
     “그러죠.”
     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음식점을 찾아 돌아다니던 우리는 이내 큰 규모를 가진 레스토랑에 오게 되었다.
     가장 탁 트인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는 웨이터 NPC가 나눠주는 메뉴판을 받아 음식 메뉴를 쭉 살펴보았다.
     대부분이 해산물이었는데 육류도 적잖게 많았다. 각자 자신의 맘에 드는 음식을 시키자 음식은 오래 지나지 않아 나와 탁자 위를 가득 채웠고 우리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이건 회잖아?”
     나는 포크로 얇게 썰린 생선회를 집어 입에 넣었다. 무엇으로 간을 했는지 맛이 오묘했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육류 또한 맛이 일품이었다.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고 고기를 씹었을 때 배어나오는 육즙이 식도락에 취미가 있는 날 황홀하게 만들었다.
     “내놔, 내가 먼저 눈독 들였어.”
     “내가 먼저 집었는데 무슨 소리야?”
     하나 남은 회를 가지고 경훈과 혁이 큰 소리로 싸우기 시작했다. 아침시간도 점심시간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대라 손님들이 별로 없었기에 망정이지 시스턴 시에 오자마자 망신을 당할 뻔했다.
     음식을 먹던 도중 레온이 말했다.
     “레드는 뭐 얻은 아이템 없나요?”
     “얻기는 했지만 별로 쓸모는 없는 것 같아요.”
     나는 큼지막한 조개 요리를 한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무슨 아이템을 얻었는데요?”
     “에으드에오에 이아이오(레드 드래곤의 이빨이요).”
     “뭐라구요?”
     “꿀꺽. 레드 드래곤의 이빨이요.”
     잘 못 알아 들었는지 되묻는 레온을 보며 나는 음식을 삼킨 뒤 대답했다. 그에 레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드래곤 본을 얻었단 말이에요? 그것도 가장 단단한 부분인 이빨을?”
     무슨 큰일이라도 되는지 레온이 낮게 속삭였다.
     “네. 꽤 컸는데 서너 개 정도 얻었어요.”
     “그렇군요. 그렇담 그것을 가공해서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면 되겠네요.”
     “이걸로 아이템을 만들어요?”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드래곤 본은 드워프들의 마법의 불꽃에 녹여 아이템을 가공하게 된다면 무척이나 좋죠. 게다가 마법에 대한 면역도 있어서 저와 같은 마법사들과 대련을 하게 된다면 무지 좋을 거고요.”
     나는 음식을 먹으며 낮게 속삭여오는 레온의 말을 계속 들었다.
     “이암에 무기도 하나 새롭게 바꾸는 것도 어때요? 제가 아이템에 인챈트할 수 있는 스크롤을 만들어 드릴 테니 완성된 아이템을 저에게 가져오시면 돼요. 마나 증가와 마나 회복력을 증가시키는 기능을 인챈트 하면 마나가 모자라는 단점을 보완하고도 남을 거예요. 어때요?”
     마지막으로 이어진 레온의 말에 나는 솔깃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마나에 대한 문제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지 않았는가?
     “음…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나는 먹던 것을 중지하고 잠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장비로 무장을 한 채 실전 경험을 쌓아 초인들에게 도전을 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괜찮은 방법일 것 같았다. 상승 무공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니까.
     “그리고 초인들의 레벨이 무조건 다 높은 것은 아니에요. 아이템의 득을 적절히 보는 이들도 많다는 거지요. 물론 보통 아이템에 순수한 실력으로 초인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실력과 뒤를 받쳐 주는 아이템의 득을 봐 초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음…….”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럴 의도가 있다면 저는 즉시 인챈트 스크롤을 제작해서 레드의 아이템에 새겨드릴게요.”
     레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아이템 하나를 제작하는 쪽으로 가야겠어. 이참에 드워프들의 제련 실력을 다시 한 번 감상해야겠는 걸?
     나는 거의 다 비워져가는 접시를 들고 음식을 마저 입에 들이 부었다.
     “꺼억, 잘 먹었다.”
     혁이 부풀어 오른 배를 두드리며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을 했다. 경훈도 혁과 같은 자세를 취한 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이제 다들 무얼 할 건가요? 신대륙에 도착했으니 각자 목표로 삼은 것이 있을 텐데요.”
     식사를 마친 레온이 말했다. 물론 재미삼아 하는 말 같았다.
     “저는 신성 제국으로 넘어가려 합니다.”
     그에 혁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마 전에 말했듯이 정규 팔라딘의 직분을 얻기 위해 건너가는 것이겠지? 아무래도 저 녀석의 목표는 최고의 팔라딘의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그냥 날 따라온 것 같은데. 뭐 저 녀석들도 각자의 목표가 있겠지?
     나는 부른 배를 두드리다 레온에게 낮게 말했다.
     “저, 레온. 레드 드래곤 본으로 아이템을 제작해야겠어요. 인챈트 스크롤을 만들어주세요.”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이제 슬슬 일어나도록 할까요?”
     레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레온도 뒤따라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슬슬 일어나죠.”
     “웃차. 저 먼저 나가봐야겠네요. 오늘은 부모님의 일을 도와야 하거든요.”
     자리에서 일어난 경훈이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그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고 모두에게 인사를 한 경훈이 로그아웃을 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지를 후비던 혁이 리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리아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저기 리아 씨. 시간 있으면 저랑 같이 사냥이나 가죠?”
     “예?”
     갑작스런 혁의 제안에 리아가 화들짝 놀라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왜 이렇게 재밌는 거지? 흐흐. 감격 반 당황 반인 얼굴로 혁을 바라보는 리아의 표정이 무척이나 우스웠다.
     “시, 시간은 있어요.”
     “언데드 몬스터가 잔뜩 나오는 던전이 어디 없으려나?”
     혁의 말에 리아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혁이 발현시키는 금빛이 오러 블레이드 앞에서 그 어떠한 언데드 몬스터라도 위협적이지 못했다.
     “시간만 있으면 뭐해요. 갈 거죠?”
     “네, 네.”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둘이 잘 됐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데. 혁이 녀석이 눈치가 워낙 없으니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럼 저는 방을 잡고 인챈트에 필요한 아티펙트 문양을 그리고 공식을 작성해야겠네요. 완성되면 연락할게요, 레드.”
     “네.”
     “카이루 씨, 시간이 된다면 저와 같이 가도록 하죠. 1클래스 마법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해드릴게요.”
     “그럼 저야 고맙죠.”
     순식간에 해산이군. 뭐 어차피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러 있을게 뻔하니 이제 평소처럼 개인적인 행동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레온과 강찬 그리고 혁과 리아가 레스토랑을 나갔다.
     “자, 이제 우리도 슬슬 나가볼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어느 분이 계산하시겠습니까?”
     어느새 직원으로 보이는 NPC가 다가와 계산서를 내밀며 내게 말했다. 나는 계산서에서 시선을 떼고 남은 일행을 빙 둘러보았다. 현지에게 내게 할 수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제리코는 돈을 한 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루카는 연신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뭐야, 결국 돈은 내가 내야하는 거야?
     결국 식사비용은 내가 전부 지불을 했고 그렇게 레스토랑에서 나오게 되었다.
     “둘이 다니는 거 되게 오랜만인 것 같다. 그치?”
     “응.”
     현지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걷던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리 뒤론 아기 늑대를 안아 든 제리코와 루카가 따르고 있었다.
     레온이 인챈트 스크롤을 제작하는 동안 잠시 이곳의 지리도 익힐 겸 오랜만에 현지와의 데이트를 하기 위해 시스턴 시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뒤에 제리코와 루카가 따랐지만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제리코는 마치 친동생과도 같았고 루카는 언제나 내 뒤를 따라다녔으니까. 현지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시스턴 시는 볼거리가 참 많았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면 넓은 수로 위에 많은 종류의 배가 다녔고 그 위에서 낚시를 즐기는 이도 볼 수 있었다.
     건물의 색 또한 흰색과 푸른색이 잘 어우러져 있어 눈도 즐거웠다.
     “오빠, 저기 봐봐.”
     현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종이었는데, 모양새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야, 저런 것도 있었네.”
     “종소리가 참 예쁠 것 같아. 그치?”
     “응. 올라가서 한 번 울려볼까?”
     “아냐 됐어.”
     현지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우와, 여기 액세서리 좀 봐.”
     현지가 보석상점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현지가 가리킨 것은 물방울 모양이 새겨진 투명한 반지였는데 반지의 테두리에 푸른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었는데 그토록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아주 반지에 빠져들었구먼. 현지의 시선은 정확히 반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줄까?”
     “아냐, 됐어.”
     현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 보니까 가지고 싶어 하는 것 같구먼.
     “잠깐만 있어봐. 제리코, 티아 누나 좀 지켜.”
     “오케이! 알았어.”
     후다닥 달려오는 제리코를 보며 나는 액세서리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
     문이 열리자 문에 달린 종이 서로 부딪쳐 소리를 냈다.
     “어서 오세요.”
     순박한 인상의 중년의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창밖에서 현지가 빤히 바라보고 있는 반지를 가리켰다.
     “저거 얼마에요?”
     “저 반지 말인가요? 4골드 30실버입니다. 시스턴 시 내에서 몇 없는 반지인지라 보기보다 비싸요.”
     그냥 장식용 아이템 치고는 꽤나 비싼 편이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반지를 가리켰다.
     “그걸로 하나만 주세요.”
     그에 중년의 여인이 빙긋 웃으며 반지를 꺼내 내게 주었고 나는 아이템 창에서 돈을 꺼내 여인에게 지불했다.
     “감사합니다. 잘 살펴 가세요.”
     “네, 많이 파세요.”
     나는 웃는 낯으로 목례를 하고 상점을 나왔다.
     “안 사줘도 되는데…….”
     현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풋. 얼굴에 갖고 싶다고 쓰여 있는걸 뭐.
     “손 줘 봐. 내가 끼워줄게.”
     그에 현지가 왼손을 내밀었다. 나는 현지의 가느다란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를 끼워주자 현지는 손을 쫙 펴고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쳐다보았다. 생긋 웃는 걸 보니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보였다.
     “잘 어울린다.”
     “고마워.”
     만족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현지를 보자 왠지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가자. 제리코, 루카.”
     현지는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자꾸 쳐다보았다. 그렇게 좋은가?
     시스턴 시는 수로 말고도 볼 것이 많았는데 길거리 이벤트나 유저들이 직접 개설한 길거리 상점 또한 구경거리 중 하나였다.
     곡마단을 만들어 서커스를 하는 NPC들도 있었고 길거리 이벤트를 통해 상품을 나눠주는 일을 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현지와 함께 촛불로 장식된 길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파앗! 파앗!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색색의 꽃가루가 어지럽게 떨어져 내렸다.
     “촛불의 거리를 걷는 500번째 커플이 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나와 현지는 폭죽을 터뜨리며 축하(?)를 해준 유저들에게 목례를 하며 촛불의 길거리를 나와 곡마단이 공연을 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와, 서커스다.”
     곡마단의 공연을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외발자전거를 타는이와 줄을 타는 이, 재주를 넘는 이가 나와 온갖 신기한 묘기를 부렸고 큰 덩치에 우람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장정들이 나와 강철을 구부리는 차력 등을 선보였다.
     루카의 등에 걸터앉은 제리코는 그야말로 신이 나서 소리를 질러댔다. 이런 곳에서도 서커스를 보게 될 줄이야. 오히려 수도였던 아르곤보다 볼 것이 많은 시스턴 시였다.
     “오빠 저것 좀 봐. 곰이 춤을 추고 있어.”
     “어라? 정말이네?”
     현지의 말대로 곰 두 마리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이라고 보기엔 엉성한, 그저 두 발로 일어서서 간신히 몸을 흔드는 것이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추는 춤이리라.
     현지도 곡마단이 부리는 서커스에 완전히 매료되었는지 제리코와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구경을 했다. 그렇게 한창 서커스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레온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어라? 레온이군. 승인.”
     -레드. 인챈트 스크롤이 거의 완성 되었어요.
     “정말요?”
     -네. 약 30분 뒤에 시스턴 시의 분수대 광장 앞에서 보도록 하죠.
     “네. 그래요.”
     [레온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대화가 끊겼음을 확인한 나는 다시 서커스에 시선을 던졌다.
    *    *    *
     같은 시각.
     혁과 리아는 시스턴 시의 하수도 던전에 대한 정보를 얻어낸 뒤 던전의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하수도 던전은 제법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시스턴 시의 중심부에서 꽤 오래 걸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하수도인지 뭔지 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겠군.”
     건들건들 걷는 혁의 뒤로 리아가 따랐다. 막상 혁을 따라오긴 했지만 혁이 관심을 보이지 않아 리아는 왠지 모르게 답답했다. 그렇게 혁이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리아 씨는 이제 뭘 하실 거예요?”
     “네?”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 거예요?”
     “아. 그, 그게…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
     이상하게 말을 더듬는 리아. 하지만 혁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리아의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서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말을 몇 마디 나누었지만 착 가라앉은 분위기는 전환될 줄을 몰랐다.
     ‘너무 어색해…….’
     리아가 아쉬운 듯 손에 쥔 아이언 크로스 보우 건을 매만졌다.
     “오, 드디어 찾았군. 하수도의 입구!”
     상당히 많은 유저들이 모인 장소를 가리키며 혁이 소리쳤다.
     “자, 어서 갑시다.”
     혁이 리아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건틀렛 때문에 혁의 체온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리아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 이제 파티를 구하면 되는 건가? 이봐요. 팔라딘 유저와 궁수 유저 둘을 끼워 줄 파티 구합니다!”
     하수도의 입구에 도착한 혁이 소리쳤고, 혁의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에 레벨이 좀 되는 듯한 유저 하나가 혁에게 다가왔다.
     “진짜 팔라딘 유저이신가요?”
     “그럼 가짜 팔라딘이겠습니까?”
     유저의 물음에 혁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찌 들으면 상당히 기분 나쁜 혁의 말투였지만 하수도 던전의 몬스터 대부분이 언데드 몬스터였기에 던전을 돌기 위해서는 프리스트나 팔라딘 유저가 한 명씩은 있어야 했기 때문에 혁의 거친 말투는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저희 파티와 같이 사냥하시겠습니까?”
     “현재 파티원이 총 몇 명이죠?”
     “저까지 합쳐서 두 명입니다. 저희도 같이 동행할 파티원을 구하고 있었거든요.”
     유저의 말에 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같이 다니죠. 파티 창을 띄워주세요.”
     “네.”
     유저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저의 머리 위에는 파티 창이 떴고, 혁과 리아가 파티에 가입했다는 메시지가 뜨자 유저는 파치 창을 닫았다.
    *    *    *
     “아, 재밌었어.”
     막을 내리는 곡마단의 공연을 보며 제리코와 현지가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거의 20분 가까이 진행되던 공연은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성과 함께 막을 내렸고 곡마단원들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분수대 광장으로 가자 얘들아.”
     공연이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쉬운지 제리코가 주변을 정리하는 곡마단원들을 보며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다음에 또 보러 오자.”
     “정말이지?”
     “응.”
     현지가 제리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역시 애는 애인가보다. 또다시 촛불의 길을 지나 다리를 건너고 여러 가지 구경거리들을 다시 한 번 지나친 우리는 분수대 광장에 다다랐고, 저 멀리서 레온이 손을 흔들었다.
     종이 뭉치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저것이 인챈트 스크롤인가 뭐인가 하는 것 같았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분수대 앞에 다다랐다.
     “드디어 완성인가요?”
     “네. 한번 구경해보시겠어요?”
     나는 레온이 건네주는 돌돌 말린 인챈트 스크롤을 받아 활짝 폈다. 꽤 멋진 문양과 함께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느껴지는 기호와 공식들이 적힌 인챈트 스크롤. 그에 나는 얼마 보지 못하고 인챈트 스크롤을 돌돌 말았다.
     “우와, 되게 복잡하네요.”
     “그런가요?”
     레온이 빙긋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인챈트 스크롤에 새겨진 문양을 아이템에 음각으로 새기는 거예요. 그러면 효과가 바로 나타나겠지요. 그리고 이것은 드워프들의 거처로 향하는 지도입니다. 물론 파르판 제국 밖으로 나가야되는 것 아시죠?”
     “음. 드워프들의 거처로 가야하는군요.”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편지를 드워프들에게 전해주세요. 그들의 언어로 적은 편지에요. 어떻게 제작을 해야 되는지 써 놓았죠.”
     “아, 고맙습니다.”
     “뭘요. 그리고 이것들을 건네주는 걸 잊지 마세요.”
     레온이 품속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세 개를 더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난 아이템 창을 열어 조심스레 넣어두었다. 총 네 장의 인챈트 스크롤. 두 개는 효과가 뭔지 대충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두 개의 효과가 뭔지 잘 몰랐기 때문에 궁금하긴 했지만 뭐 아이템이 완성된 후 직접 효과를 확인해보면 되는 것이었기에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흐흐. 드디어 새로운 아이템을 얻게 되는 건가?
     “카이루는 어디 있나요?”
     “도서관에서 마법서의 수식을 풀고 있어요.”
     “예? 카이루가 공부를 한다고요?”
     너무 황당한 나머지 나는 언성을 높였다. 그에 레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반응을 보니 카이루 씨가 평소에 공부를 안 하나 봐요?”
     “안 하고말고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공부를 하는 거지.”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저으며 아이템 창을 닫았다. 강찬이 녀석. 어울리지 않게 공부라니.
     “자, 저는 그럼 가서 나머지 7클래스 공식들을 전부 풀어봐야겠군요.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니까 말이에요.”
     “네, 열심히 하세요. 드워프들의 거처에 도착하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인을 맺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모습은 안개에 가려지듯 퍽 꺼져버렸다.
     “아까 그건 뭐야?”
     “아, 인챈트 스크롤이라고 이번에 새로 제작할 아이템에 새겨 넣을 스크롤이라고 보면 돼.”
     “응. 그런데 드워프의 거처? 파르판 제국을 나가야 된다니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나는 현지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나갔다.
     레드 드래곤이 드랍한 드래곤 본으로 아이템을 제작 하려면 드워프들이 물건을 제련할 때 쓴다는 마법의 불꽃에 녹여야 한며, 인간보다 월등히 섬세한 드워프들만이 아이템을 만드는 도중에 아티펙트 문양을 새겨 인챈트를 할 수 있다는 것까지.
     드래곤 본이라는 말에 현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드래곤 본이 그만큼 휘귀한 아이템인가 보다.
     “크기는 얼마만 해?”
     “글쎄. 에이션트급 드래곤의 이빨이라 그런지 무지 크더라. 서너 개 정도 드랍을 했는데, 몽땅 주웠지.”
     “와아 그랬구나. 그럼 드워프들의 서식지에는 언제 갈 거야? 나도 갈이 가도 돼?”
     현지의 물음에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면 나야 좋지. 아무래도 제국 밖으로 나가게 되면 혼자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다녀야 하니까.”
     “훗. 내가 뒤에서 어시스트를 해줄게. 오빠가 가니까 제리코도 당연히 따라가겠네?”
     “그렇지. 이 녀석도 레벨 업을 해야 하니까.”
     나는 제리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같이 다니다보니 이젠 정이 많이 들어 나중에 풀어줄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그럼 슬슬 출발 해보도록 할까?”
     “응.”
     “형 제국 밖으로 나가면 어디로 가야되는 거야?”
     제리코가 루카의 등에 올라타며 내게 물었다.
     “음. 지도를 보면 알겠지?”
     나는 레온에게 받은 지도를 펼쳤다. 우리의 위치와 목적지가 표기된 지도. 이것과 비슷한 지도를 본 적이 있었지. 지도를 보자 갑자기 옛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현지와 함께 정령석을 찾으러 돌아다니던 때에 이것과 같은 효과를 지닌 지도를 가지고 돌아다닌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티아, 이것 봐. 이 지도 왠지 익숙하지 않아?”
     “어디?”
     지도를 빤히 보던 현지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아, 이거. 오빠가 움직이면 지도 안에 표기된 작은 반점도 이동을 하는 거잖아! 오와, 되게 오랜만이네.”
     “그렇지? 뭐 일단 출발 하자.”
     나는 지도를 보고 방향을 찾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시스턴 시가 제법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기에 걸어서 가게 도니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마차였다. 인원이 적었기 때문에 값싸고 작은 마차를 구입하면 되었기에 우리는 마시장으로 향했다.
     마시장에 도착한 우린 적당한 마차 하나를 골랐다. 말 한 마리가 끄는 작은 마차. 제리코와 루카가 타자 앉을 자리가 없었다. 뭐 난 루카를 타고 가면 되었기에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붕이 없는 마차라서 마차에 타고 있는 현지와 제리코를 볼 수 있었다. 물론 마차의 조종은 제리코가 맡았다.
     마차를 구입하자 금세 시스턴 시에서 빠져나와 반 폐허가 된 아르곤을 지날 수 있게 되었고 수도 밖으로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이쪽 동네는 시비를 거는 유저들이 괘 많았는데, 아무 일 없이 그냥 지나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제국의 외각 지역에 올 수 있게 되었다. 무척이나 넓은 제국이었기에 거의 한나절을 달린 것 같았다.
     마차가 달릴 때 부는 바람에 현지의 밝은 갈색 머리칼이 보기 좋게 휘날렸다. 외각 지역은 거의 시골 농촌과 같은 배경을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잠시 쉬어갈 겸 말에게 풀을 뜯게 해주었다.
     나는 아이템 창에 묵혀두었던 커다란 육포 하나를 꺼내 루카에게 던져주었고 빵과 치즈를 꺼내 현지, 제리코와 함께 나눠 먹었다. 그렇게 잠시의 휴식을 취한 뒤 제리코와 현지를 마차에 오르게 했고 나 또한 루카의 등에 올라탔다.
     루카를 타고 달리던 도중 지도를 꺼내 위치가 맞는지 수시로 확인을 했고 우린 이내 제국의 성문에 다다르게 되었다. 출국을 한다는 말에 경비들은 아무런 불평 없이 문을 열어주었고 우리는 열린 성문을 통해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잘 정리된 도로 위로 마차 한 대와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달리는 모습은 대체 어떨까? 지도를 보며 드워프들이 거주한다는 카토 산맥. 그리 멀지 않았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토 산맥이 둘러싸고 있는 카토 왕국이라는 작은 소국도 볼 수 있었는데 이곳에도 초인 하나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에 나는 아이템이 완성되면 제일 먼저 이곳을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정리된 도로의 끝이 보였고 이곳부터는 마차가 다닐 수 없었기에 말을 풀어줄까 생각도 해봤지만, 나중에 다시 파르판 제국에 돌아갈 때를 생각해 카토 왕국에 입국한 뒤 적당한 마구간에 마차를 맡겨두고 카토 산맥에 오르는 것을 택했다.
     “으흠. 다시 빙 돌아가야겠네.”
     “얼른 가자.”
     기분이 좋은지 현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정령 녀석들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심심하면 질문을 했던 현무도 말이 없었다. 중급정령으로 승급되고 난 뒤 제법 무뚝뚝해진 녀석들.
     “백호.”
     -네, 마스터.
     “이 녀석들 왜 이렇게 말이 없는 거야?”
     -아마도 자고 있나 봐요.
     백호의 대답에 나는 루카의 등에서 떨어질 뻔했다. 잠을 자고 있어서 말이 없던 것이로군. 잘 거면 정령계로 돌아가서 자도록! 나는 피식 웃으며 정령들을 모두 역소환 시켰다.
     이윽고 카토 왕국에 다다르게 된 우리는 입국할 때 밟는 절차를 다시 한 번 밟고 카토 왕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외각 지역이 그렇듯 이곳도 밭과 논이 드넓게 펼쳐진 시골의 풍경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을 찾는 유저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나으리~.”
     밭을 갈던, 농노로 보이는 NPC가 인사를 했고 그에 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곳 외각 지역과 카토 산맥이 가깝군. 우리는 가까운 농가의 마구간에 들러 말과 마차를 잠시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고, 마음씨 좋은 NPC는 흔쾌히 승낙을 했다.
     그렇게 카토 산맥을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여행자이십니까?”
     기다란 창을 든 용병으로 보이는 NPC 둘이 서로의 창을 X자로 교차시켜 길을 막아섰다.
     “예, 그렇습니다만.”
     “이곳은 카토 산맥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카토 산맥에 오른 여행자들이 대부분 몬스터의 밥이 되곤 합니다. 가까운 용병길드에 가셔서…….”
     등에 둘러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손에 쥐자 용병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게다가 현지가 소환해낸 물의 최상급 정령 엘레스트라를 본 용병들이 서둘러 X자로 교차시켰던 창을 거두었다.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만한 분들이시군요. 지나가도 좋습니다.”
     얼마나 위험하면 용병들을 고용해 지나가라는 말을 할까? 작은 오솔길을 지나자 나무가 울창한 숲이 이어졌다.
     “저쪽에 고블린 무리가 있어.”
     현지가 손을 뻗어 한데 운집해있는 고블린 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처리할게.”
     안고 있던 아기 늑대를 땅에 내려놓은 제리코가 등에 둘러메고 있던 아이언 숏 보우를 손에 쥐고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고정시켰다.
     고블린 무리에게 다가간 제리코는 어느 정도 일정한 간격을 둔 뒤 재빨리 활을 쏘았다.
     쐐애액.
     빠른 속도로 대기를 가르며 고블린을 향해 쏘아진 화살이 한 마리 고블린의 뒤통수에 틀어박혔다.
     푸욱.
     그에 고블린들의 시선이 제리코에게 집중되었다. 제리코는 틈을 주지 않고 활을 쏘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두세 마리의 고블린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서너 마리의 고블린이 제리코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제리코는 날카로운 이빨과 흉성을 드러내는 고블린들에게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키엑!
     참지 못하고 고블린 한 마리가 제리코에게 몸을 던졌다. 그때였다. 제리코가 몸을 슬쩍 틀어 고블린의 공격을 피하는가 싶더니 이내 들고 있던 활을 휘둘러 고블린의 등판을 가격했다.
     “보우어택.”
     퍼억!
     등판에 묵직한 아이언 숏 보우가 작렬하자 고블린은 그대로 나가떨어져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척추가 부러진 이상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노릇. 동료가 전투 불능이 되자 고블린들은 일제히 제리코를 향해 몸을 던졌다.
     제리코가 백스텝을 밟으며 활을 쏘자 한 마리 고블린이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제법인걸.
     제리코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나머지 고블린들을 모두 처리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제리코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 저거 다 오빠가 가르친 거야?”
     “난 이론만 설명해줬을 뿐인데 본인이 다 저렇게 응용을 하더라.”
     “대단하다.”
     혼자서 고블린 무리를 순식간에 해치운 제리코를 보며 현지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여기서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나는 다시 지도를 꺼내 위치를 확인했다. 서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되는군.
     숲을 지나는 동안 중형 몬스터도 간간히 나왔지만 우리의 앞길을 막지는 못했다. 붉은 섬광이 번뜩임과 동시에 나가떨어져 절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서야 우리는 카토 산맥에 위치한 드워프들의 거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거처에 발을 들이자 드워프들이 경계를 했다. 게다가 방문자 중 엘프까지 끼어 있었기에 드워프들은 더욱 경계를 했다. 드워프와 엘프의 사이는 별로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론에서도 그랬듯이 드워프들은 온후한 성품을 가져 상대가 엘프건 인간이건 금방 친해지기 때문에 악의가 없다는 것만 증명하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우락부락한 덩치의 드워프 하나가 완전 무장을 한 채 들기 버거워 보이는 배틀 엑스를 쥐고 나타났다.
     “카토 왕국의 인간인가?”
     “예?”
     두 손으로 배틀 엑스를 고쳐 잡은 드워프가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에 나는 두 손을 저었다.
     “아뇨, 저희는 카토 왕국의 인간이 아니에요. 이곳에서 장비 제작을 부탁하려고 왔습니다.”
     “정말인가?”
     “네. 맹세코 저희는 카토 왕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장비 제작을 부탁하러 왔을 뿐이에요.”
     “장비 제작?”
     내 대답에 드워프 하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네. 드워프들만이 가고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왔거든요. 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중무장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 무슨 심각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아, 아니오. 그런데 무슨 재료이기에…….”
     나는 드워프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작게 속사였다.
     “드래곤 본이요.”
     그에 드워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륙에 존재하는 금속 중 가볍고 월등히 강한 강도를 가진 드래곤 본은 미스릴을 비롯한 금속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봉에 드는 물건이었다.
     “사, 사실이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템 창을 열어 커다란 드래곤의 이빨 하나를 꺼냈다. 검붉은 빛을 띠는 드래곤의 이빨을 보며 함께 나온 드워프들이 소리쳤다.
     “말로만 듣던 드, 드래곤 본이야.”
     “그것도 가장 단단한 부위인 이빨을…….”
     하지만 감탄을 하면서도 드워프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보통 드워프들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방문자들을 반기는 걸로 알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우리가 가토 왕국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확인한 드워프들이 자신들의 마을로 우릴 안내했다.
     드워프들의 마을은 인간이 사는 곳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은 산맥에 위치한 동굴 안에 서식하고 있었는데 동굴 벽면에는 그들이 장식한 장식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동굴 벽 옆면에 또 다른 커다란 구멍 하나가 더 뚫려 있었는데 그곳이 그들이 광석을 채집하는 광산이라고 했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주십시오. 드래곤 본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아니 잠깐. 드워프 본인들도 어떻게 할 수 없다니 그 말에 나는 적잖은 충격을 먹을 뻔했지만 이어진 드워프의 말에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장로님과 그의 동료들은 오래 전, 화이트 드래곤의 뼈를 가공해 물건을 만든 경력이 있으십니다. 그 분을 모셔오도록 하지요.”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리코와 현지는 동굴 안을 돌아다니며 벽에 주렁주렁 매달린 장신구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벽에 걸린 무구들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무척이나 고급스런 검과 도끼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무기들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무척이나 잘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제련과 블랙스미스를 마스터한 나도 저렇게는 만들 자신이 없었다. 물론 드워프들이 비법을 전수해준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그렇게 무기들을 감상하고 있을 때 한 연륜이 느껴지는 드워프가 젊은 드워프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대가 우리 마을의 방문자요?”
     “네. 그렇습니다.”
     “귀한 물건을 가지고 왔다고 들었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템 창을 열어 커다란 드래곤 본 네 개를 꺼냈다. 내 손에 들린 드래곤 본 하나를 가져간 드워프 노인이 물건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드래곤 본이 맞구려. 그대는 이것을 어떻게 얻은 거이오?”
     “파르판 제국을 습격한 레드 드래곤을 통해 얻게 되었습니다.”
     “드래곤을 사냥하다니… 참 대단하구려.”
     드워프 노인이 잔잔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아차, 적안을 해제하는 것을 깜빡했군. 따뜻한 인상을 주기 위해 적안을 해제해야 했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깜박한 것 같았다.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이템 창에서 인챈트 스크롤 네 개와 레온이 전해주라던 편지를 드워프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펴지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한 드워프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우리들의 언어로 적힌 편지로군. 당신이 쓴 것이오?”
     “아뇨. 제 친구가 써주었습니다.”
     그에 드워프 노인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인챈트 스크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꽤나 고급스런 아티펙트로군. 시중에 나가면 엄청난 값어치를 자랑하겠구려.”
     인챈트 스크롤을 살피던 드워프 노인이 감탄하며 다시 편지에 시선을 두었다.
     “좋소. 제작해드리겠소. 날 따라오시오.”
     “티아, 제리코, 루카. 가자.”
     나는 벽면에 장식된 장식품들을 정신없이 구경하는 제리코와 현지를 부른 뒤 드워프 노인을 뒤따랐다.
     드워프 노인을 따라 오게 된 곳은 대장간으로 보이는 곳이었는데 꽤 많은 드워프들이 담금질과 망치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커다란 용광로에는 초록색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저것이 마법의 불꽃인가?
     “물건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아, 예. 여기.”
     활활 타오르는 초록색의 불꽃에 매료되어 나는 드워프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드래곤 본을 넘겨주었다. 그나저나 저 불꽃 정말 색이 예쁘군.
     언제 가져왔는지 드워프 노인이 줄자로 내 키와 가슴둘레, 허리둘레 등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흐음 신장 173센티미터에 허리둘레는 넉넉잡아 28인치. 가슴둘레는…….”
     말을 이어나가던 드워프 노인이 조수(?)들을 불러 드래곤 본을 건네주었다. 드워프 노인의 지시대로 드래곤 본을 마법의 불꽃에 녹인 그들이 가공을 하기 시작했다.
     “음흠. 잠시 그 활 좀 보여줄 수 있겠소?”
     “예. 물론입니다.”
     드워프 노인의 말에 나는 등에 둘러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건넸다. 활은 왜 달라고 하는 것일까?
     “흐음. 제법 잘 만들어진 활이구려. 어디서 구했소?”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그에 드워프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이오?”
     “예. 이런 일에 제법 조예가 있거든요.”
     드워프 노인의 반응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    *    *
     오래 지나지 않아서 마법의 불꽃에 녹은 드래곤 본은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건틀렛부터 시작해서 부츠와 정강이 보호대, 브레스트 플레이트(Breast plate, 胸鉀)를 비롯한 머리를 제외한 온 몸을 감싸 보호할 수 있는 갑옷이었다.
     기사들이 입고 다니는 플레이트 메일과는 사뭇 다른 형태를 갖춘 그런 갑옷이었다. 하지만 현성은 거의 완성되어 가는 자신의 아이템을 볼 수 없었다. 드워프들이 드래곤 본을 가공하는 사이 드워프 노인을 따라 대장간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현재 현성은 드워프 노인의 방으로 추측되는 곳에서 드워프 노인과 마주 앉아 있었다.
     드워프 노인이 말했다.
     “약속대로 드래곤 본을 가공해주긴 하겠소.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조건이라니요?”
     “잘 들으시오.”
     드워프 노인의 입에서는 신세한탄을 비롯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현재 이곳 드워프들은 카토 왕국과의 교류를 일체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를 말하는, 이어진 드워프 노인의 말에 현성의 미간이 지그시 좁혀졌다.
     현재 카토 왕국에서는 드워프들이 가공한 액세서리가 엄청난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을 타고 있다고 했다. 처음엔 정상적인 교류를 하던 귀족들이 시간이 지나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왔고 종국에는 기사들을 보내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귀족들이 보낸 기사들에 의해 동료가 여럿 죽었소. 무척이나 순박한 녀석들이었는데. 반항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그들을 죽였소.”
     급기야 드워프 노인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모자라 드워프들의 장식품을 모조리 털어갔고 드워프 몇을 노예로 잡아갔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종종 기사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드워프들은 이곳 카토 산맥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듣던 현성이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쾅.
     “조건이 노예로 잡혀간 드워프들을 찾아달라는 거지요?”
     그에 드워프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럼 물건이 완성되는 즉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소.”
     드워프 노인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현성의 손을 잡았다.
     그때였다.
     땡땡땡땡!
     비상 종소리로 추측되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드워프 노인의 방문이 덜컥 열렸다.
     “레버크 님. 카토 왕국의 발리안 시의 영주가 보낸 기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에 드워프 노인의 얼굴은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현성이 소리쳤다.
     “기사들이 몇이나 됩니까?”
     “네 명 가량 됩니다. 모두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는 엑스퍼트급 이상의 기사들입니다.”
     완전무장한 드워프의 말에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죠.”
     현성이 등에 둘러메고 있던 활을 풀어 쥔 채 앞장 서 가는 드워프를 뒤따랐다. 방을 나서는 현성을 보는 레버크라 불린 드워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보이지 않아 오랫동안 찾아 헤맸는데 이런 곳에 꼭꼭 숨어있었구나.”
     검을 뽑아든 기사 하나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기사의 검신에 맺힌 푸른 오러를 보며 드워프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얼마 전 오러에 의해 동료들이 무참히 토막 난 것이 떠올랐는지 급기야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지지 않겠다는 듯 배틀 엑스를 비롯한 해머를 들고 기사들을 막아섰다. 이들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또다시 자신들의 물건을 털어갈 것이 분명했고, 이들의 손에 동료들이 죽어나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나 혼자 처리할게. 너희들은 안으로 들어가서 물건을 모조리 털어와. 반항하는 녀석은 죽여도 좋으니까. 이것은 영주님의 명령이야.”
     그에 검을 쥔 기사들이 동굴의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데 운집해있던 드워프들이 동굴 입구로 향하는 기사를 막아서는 순간이었다.
     “이것들이?”
     기사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지며 검에서 푸른 오러가 밀려 올라왔다. 기사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 검이 한 드워프의 목을 쇄도하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기에 그들은 피해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쐐애액.
     동굴 입구에서 날아온 스몰 스피어 하나가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안면을 향해 빠르게 쇄도해오자 기사는 기겁을 하며 날아드는 창 한 자루를 토막 냈다.
     “뭐야?”
     잔뜩 성이 났는지 기사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동굴에 시선을 던졌다.
     저벅저벅.
     동굴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는지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그가 기사의 검을 쳐낸 장본인인 것 같았다.
     왼손에 거대한 철궁을 쥔 소년이 태연하게 동굴에서 나왔다. 드워프의 동굴에서 인간이 나온 것이 이상할 듯도 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감히 기사에게 창을 던지다니. 네놈의 소행이냐?”
     현성은 아무 말 없이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뭐야. 기껏해야 소드 엑스퍼트 중급 정도 되는 녀석들이잖아?’
     현성은 기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질문을 던졌던 기사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감시 기사가 말하는데 웃어? 네놈을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하겠다.”
     “좋을 대로.”
     “이런 개자식.”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기사는 현성에게 몸을 날렸다. 그의 몸놀림은 무척이나 빨랐다. 어떻게 인간의 몸놀림이 저렇게 빠를 수 있을까?
     “퀵스텝.”
     눈으로 식별하기 힘든 속도로 오러를 머금은 검이 현성의 목을 향해 폭사되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검이 지척에 다다랐을 때 몸을 슬쩍 틀어 검을 피해내자 지가는 자연스레 중심을 잃었다.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현성은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활을 휘둘러 기사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보우어택!”
     콰앙.
     극심한 충격이 투구를 통해 머리에 고스란히 전해지자 기사는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기사가 쓰고 있는 투구는 기괴하게 함몰되어 있었다. 기사의 입과 코에서 나온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일격에 기사 하나를 쓰러뜨린 현성을 보며 드워프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나머지 네 명의 기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 뭐지?”
     기사들이 술렁이고 있는 틈을 타 현성은 재빨리 화살 하나를 꺼내 기사들에게 활을 쏘았다. 그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기에 그들의 눈으로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날아든 스몰 스피어를 연상시키는 굵직한 화살이 자신들의 지척에 틀어박히자 기사들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렇게 큰 활을 순식간에 쏘아 내다니…….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단 일격에 동료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에잇.”
     기사 넷이 검에 잔뜩 오러를 끌어 올린 채 현성을 향해 몸을 던졌다. 현성을 품(品)자로 에워싸 검을 찔러 들어가려는 순간, 현성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퍽 꺼져버렸다.
     “뭐, 뭐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 서 있던 궁수 하나가 갑자기 사라지자 기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페리안, 로빈훗 이 두 초인과의 대결을 통해 현성의 상황 판단력은 한층 더 완숙해진 상태였다.
     재빨리 이형환위를 전개해 지면을 박차고 울창한 나무의 가지에 몸을 숨긴 현성을 이들이 찾아내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욱 힘든 일이었다.
     기사들이 술렁이고 있을 때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콰직.
     “허억.”
     날아든 화살이 기사의 갑옷을 뚫고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파워 샷을 쏘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저쪽이다!”
     동료가 화살에 맞아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기사 하나가 오러가 충만히 맺힌 검을 힘껏 던졌다.
     슈가각.
     시릴 듯이 푸른 오러를 머금은 검 한 자루가 맹렬히 회전하며 굵직한 나무 가지들을 훑고 지나갔고 오러에 베인 나뭇가지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활을 쏜 장본인은 그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이봐.”
     위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그들은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허공에 우뚝 멈춰선 채 자신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랄 틈도 주지 않고 굵직한 화살이 기사 하나의 안면에 틀어박혔다. 그때 다른 기사가 틈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지만 현성은 허공을 박차고 몸을 피한 뒤였다.
     “웃차.”
     사뿐히 지면에 착지한 현성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기사들에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소년이 거대한 철궁을 들고 스몰 스피어와 맞먹는 크기의 화살을 쏘아내며 소드 엑스터트급의 기사들을 가지고 놀 듯 죽여 버리니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너, 넌 누구냐?”
     이곳까지 함께 왔던 동료 셋이 죽자 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현성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물처럼 고요한 눈으로 기사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현성의 붉은 눈동자를 쳐다보는 기사의 초록색 눈동자가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으아앗!”
     기사 유저는 그대로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성은 재빨리 몸을 날려 기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오러를 머금은 검이 대기를 갈랐다. 현성은 자신의 가슴팍을 향해 쇄도해오는 검을 보며 몸을 슬쩍 틀은 뒤 기사의 발목을 걷어찼다.
     중심을 잃은 기사는 그대로 넘어졌고 손에 쥔 검을 놓쳤다.
     “당신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습니까?”
     무미건조한 현성의 음성이 쓰러진 기사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에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을 퉤 뱉었다. 넘어지면서 입에 흙이 한 주먹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나는 카토 왕국의 발리안 시의 영주를 모시고 있는 정규기사이다. 영주님의 명령을 받고… 커억.”
     기사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내자마자 현성이 활을 휘둘러 기사의 안면을 가격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기사 넷을 해치운 현성이 드워프들에게 다가갔다.
     “이곳의 위치를 알아낸 기사들을 모두 죽였으니 당분간 이곳을 찾아오는 인간은 없을 거예요.”
     기사드을 막아내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나온 그들은 기사들을 마주하고도 자신들이 살아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사 넷을 순식간에 해치운 현성을 보는 눈이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제34장  새로운 초인의 출현

     “저, 정말 고맙소.”
     “감사하오.”
     “아뇨, 어차피 죽여 없애버려야 할 자들이었어요.”
     감동 먹은 듯한 드워프들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웃는 낯으로 대답해주었다. 정말이지 특권의식에 젖은 귀족 녀석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들이다. 그건 그렇고 세릴리아 월드를 하면서 내 성격도 무척이나 많이 바뀐 것 같다. 기사들을 죽이면서도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동굴 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방 안에 있을 줄 알았던 드워프 노인이 동굴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기사들은 전부 죽은 것이오?”
     “예. 이곳의 위치를 알았으니 살려두면 안 될 것 같아 모조리 죽였습니다.”
     그에 드워프 노인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드워프 노인이 등을 돌리며 말했다.
     “아직 물건이 완성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소. 물건에 아티펙트를 새겨 넣는 작업이 그리 쉽지 않으니 말이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오.”
     “예.”
     뒤돌아서 대장간으로 향하는 드워프 노인을 뒤로한 채 나는 벽에 장식된 장식품들을 구경하는 현지와 제리코에게 다가갔다.
     “오빠 왔구나. 그런데 방금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 없었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아무 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사들과 싸웠다는 말을 하면 다치지 않았냐며 걱정할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에 나는 기사들과 싸운 사실을 감췄다.
     “오빠 이것 봐봐.”
     현지가 투명한 수정구 안에 채워진 깨끗한 물 안에 오색 빛의 보석이 둥둥 떠다니는 보석을 가리켰다. 둥근 수정구 안에 물을 채우고 저런 것을 넣은 것은 무척이나 어려울 것인데 그와 똑같은 것이 열 개가 전시되어 있었다. 역시 타고난 장인들이로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웃통을 벗은 당당한 덩치의 드워프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물건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요?”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물건이 완성 됐대. 너희들도 같이 가자.”
     “응.”
     “우와, 무슨 물건인데?”
     현지와 제리코가 각기 다른 대답을 하며 내 뒤를 따랐다.
     대장간에 도착했을 때는 드워프 노인도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여타의 드워프들 보다 더욱 우람한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 대 맞으며 아주 가겠는 걸?
     “왔소? 자, 한 번 착용 해보시구려.”
     드워프 노인이 검붉은 벨트를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런데 물건은 이게 다인가? 벨트를 건네받은 나는 이리저리 살폈다.
     고풍스런 장식이 된 벨트 가운데엔 ‘RP'라는 영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테두리엔 요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이템은 이게 다에요?”
     그에 드워프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커다란 이빨 네 개를 녹여서 겨우 이거 하나를 만들었다는 건가? 뭐 그만큼 효과가 좋겠지?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벨트를 착용했다.
     붉은 망토와 제법 잘 어울리는 벨트. 착용을 했건만 기본적인 캐릭터의 능력치는 변화가 없었다. 드워프들이 사기를 칠 리는 없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음. 매직아머(Magic Amor, 魔身鉀)의 사용법을 아직 잘 모르는가 보구려.”
     “매직아머요?”
     드워프 노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대체 매직아머가 무엇이기에 그러는 걸까? 의문은 이어진 드워프 노인의 발어에 서서히 베일을 벗었다.
     “착용하고 있는 매직 아머에 마나를 주입해보시오. 아, 그 전에 등에 메고 있는 활은 바닥에 내려두는 것이 좋을 것이오.”
     마나를 주입하라고? 드워프 노인의 지시에 따라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바닥에 내려놓은 나는 아이템의 정보를 열었다.
     파밧!
     [매직 아머]
     설명: 매직 아머가 깃들어 있는 벨트.
     내구력 무제한
     뭐야? 사용법은 아이템의 정보에도 없었다. 그저 마나를 주입하라는 건가? 나는 오러 애로우를 발현 시킬 때처럼 착용하고 있는 벨트에 집중했다. 그러자 벨트에 음각으로 새겨진 문양에서 빛이 발하더니 이내 벨트가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부웅. 촤르르르.
     그와 동시에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며 핏빛의 검붉은 갑주가 온 몸을 감싸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핏빛의 검붉은 갑주는 순식간에 내 온몸을 감쌌다.
     기사들의 플레이트 메일과는 사뭇 다른 외형. 더욱 근사하다면 근사했지 나쁠 것은 없었다. 흉갑(胸鉀)에 새겨진 문양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묵직한 건틀렛은 손을 움직이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고 갑옷 또한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우와!”
     “와아!”
     현지와 제리코가 거의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어떻게 이런…….”
     내 몸을 둘러싸고 있는 갑주가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눈을 힐끗 하며 어깨 뒤를 살폈다. 어개엔 여전히 붉은 망토가 붙어 있었고, 뒤쪽 허리춤에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매우 흡사하지만 더욱 더 날렵하게 생긴 활 하나가 비스듬히 둘러 메여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 멘 활을 풀어 쥐었다. 묵직한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는 달리 거이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활. 나는 망설임 없이 정보 창을 열었다.
     “정보.”
     파밧!
     [드래곤 레드 롱 보우(에이션트)]
     설명: 매우 구하기 힘든, 금속의 왕이라 불리는 드래곤 본으로 제작된 활. 드래곤 본으로 제작되어 무척이나 가볍고 그만큼 내구성도 뛰어나다.
     가공할 파괴력은 여타의 활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다.
     최소 공격력- 500 증가
     초대 공격력- 1000 증가
     내구력 무제한
     무려 에이션트급 아이템! 게다가 아이템 이름 또한 내 맘에 쏙 들었다. 드래곤 레드 롱 보우(Dragon Red long bow). 이것들을 가지고 초인을 상대하는 것이로군. 나는 풀어진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었다. 무척이나 질긴 활시위.
     나는 팽팽하게 고정된 활시위를 손가락으로 퉁겨보았다.
     팅.
     활시위의 맑은 음이 바람을 타고 귓전을 맴돌았다.
     “마음에 드시오? 추가적으로 설명을 더 해드리겠소. 브레스트 플레이트에는 마나 증가와 마나 회복 증가 아티펙트가 인챈트 되어 있소. 그리고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져 있어 마법에 대한 내성이 강할뿐더러 7클래스의 대마법사가 새긴 대마법 방어진이 새겨져 있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조심해야 하오.”
     이토록 대단한 물건이 존재한다니. 대부분의 초인들도 이런 물건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드래곤 레드 롱 보우의 고정된 활시위를 풀고 다시 허리춤에 둘러멨다.
     어떻게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왼쪽 허리춤에 채워진 붉은 가죽으로 만든 화살통에는 기존에 쓰던 굵직한 화살과 동일한 형태의 화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매직 아머를 원래 형태로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드워프 노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불어넣은 마나를 회수하면 원래 형태로 돌아올 것이오.”
     그에 나는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마나를 회수했다. 그러자 머리를 제외한 온 몸을 감싸고 있던 핏빛의 검붉은 갑주들이 시원한 쇳소리와 함께 벨트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촤르르르.
     정말 맘에 드는 물건이로다. 그럼 이제 약속대로 카토 왕국의 발리안 시에 노예로 잡혀간 드워프들을 구해주면 되겠군. 나는 빙긋 웃으며 드워프 노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럼 약속대로 노예로 잡혀간 드워프들을 구해오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카토 왕국에도 초인이라 불리는 무인이 있나요?”
     그에 드워프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있소. 부유한 국가는 각 나라마다 초인을 한 명씩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소. 카토 왕국의 왕실 근위기사단장 카르토니아 후작이 카토 왕국을 대표하는 그랜드 마스터라고 들었소.”
     카르토니아 후작이라. 후작이라면 귀족이로군.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무인(물론 NPC겠지만)도 귀족 특권의식에 젖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카토 왕국의 초인과 대결을 해본 뒤 결과가 어떻든 곧장 발리안 시에 가서 못된 영주를 벌하고 드워프들을 구출해오면 되는 것이군. 위험한 일이 벌어질 지도 몰랐기에 나는 현지와 제리코에게 이곳에 남아있으라고 했다.
     현지는 날 어시스트 해주겠다며 따라온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잘 타이른 탓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럼 꼭 조심해야 돼.”
     “응, 조심할게.”
     물론 루카는 내 뒤를 따라야했지만. 말을 마친 나는 즉시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집어 든 뒤 루카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목적지는 다름 아닌 카토 왕국의 수도 초인이 머물고 있는 왕실이 목적지이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루카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게 자세를 낮춘 나는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을 느끼며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들에게 활을 쐈다. 붉은 섬광이 번쩍임과 동시에 몬스터들은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지능이 매우 낮은 것들이라 그런지 동료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덤벼드는 녀석들도 있었다.
     순식간에 숲을 벗어나 오솔길에 도착한 나는 카토 왕국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길을 잘 모르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야겠군.
     나는 소를 몰고 길을 걷는 농노에게 다가갔다.
     “저기 죄송한데 길 좀 묻겠습니다.”
     “아이고, 말씀 낮추십시오. 나으리. 어떤 길을 물으시나요?”
     “저보다 훨씬 연장자이신데 말을 낮출 수는 없죠. 음. 이곳 카토 왕국의 수도는 어디에 있나요?”
     그에 농도 NPC가 웃는 낯으로 자세히 설명을 해나갔다.
     “…입니다. 수도 레비안 시에는 카토 왕국의 자랑거리인 카토 성이 있지요. 그럼 잘 살펴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한 뒤 다시 루카의 등에 몸을 실었다. 지리에 대한 설명을 무척이나 잘해주는군. 나는 루카의 등에 올라탄 채 레비안 시를 향했다.
     수도인 레비안 시와 가까워질수록 집의 규모와 거리의 형태가 점점 고급스러워졌고 마침내 수도에 도착했을 때는 바인마하 왕국의 페리안 시와 무척이나 비슷한 배경의 건물들이 듬성듬성 세워져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엔 석상 하나가 세워져 있었는데 카토 왕국의 자랑거리인 초인 카르토니아 후작의 석상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한 번 붙어보면 알겠지.’
     내친김에 발리안 시로 가는 길을 알아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나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를 붙잡고 길을 물었다.
     “뭐야? 평민이야? 이봐! 경비! 평민이 레비안 시에 들어왔어! 안 잡고 뭐하는 거야?”
     NPC가 소리치자 무장한 경비병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젠장. 이곳이나 저곳이나 평민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건가? 나는 재빨리 루카의 등에 올라탄 뒤 루카에게 달아나라고 지시했다. 루카가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느려 터진 경비병들이 루카를 잡는 것은 밤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손쉽게 경비병들을 따돌린 나는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왔다.
     “휴우, 이곳의 귀족들이란 족속은 정말 쓰레기만도 못한 것 같아. 안 그래 루카?”
     루카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꼬리를 연신 흔들었다. 도대체가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수도엔 평민이 발을 들이지 말란 법이 있는 국가는 이곳밖에 없을 것이다. 뭐 발리안 시는 초인과 대결이 끝난 뒤에 찾아봐야 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래도 지금 즉시 카토 성인가 나발인가 하는 곳에 찾아가봐야겠군.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왼쪽 허리춤에 멘 화살통을 푼 뒤 바닥에 내려두었다.
     “그렇담 매직 아머를 착용해볼까?”
     나는 벨트 형태의 매직아머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촤르르르.
     순식간에 머리를 제외한 전신 갑주가 내 몸을 감쌌다.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화살통을 넣어둔 뒤 아이템 창을 닫았다.
     “카토 성으로 가자, 루카.”
     나는 루카의 등에 훌쩍 올라타며 말했다. 농노 NPC도 수도에는 와보지 못했는지 카토 성의 존재 여부만 말했을 뿐 가는 길을 말해주지 않았다.
     직접 찾아보는 게 낫겠지. 루카의 등에 탑승한 채 경비의 눈을 피해 레비안 시를 누비는 것도 꽤 괜찮았다. 시스텐 시보다는 아니었지만 볼거리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특권의식에 빠진 돼지 같은 귀족들이라는 것이 흠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끝에 카토 성이라 커다란 성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페리안 성 맞먹는 규모에 성문 앞에는 최상급 엑스퍼트로 간주되는 기사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물론 성 안은 엄청나게 많은 기사들이 지키고 서 있겠지.
     ‘정령들을 소환한 뒤 바로 침입을 해야겠군.’
     나는 정문을 통해 성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분명 이곳에도 궁수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실력발휘를 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몰래 난입하는 쪽으로 생각을 해두었다.
     “바람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을 맺은 나 레드 파운이 그대의 힘을 빌리고자 명하노니, 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라. 백호.”
     낭랑한 주문영창과 함께 바람의 중급정령 백호가 모습을 나타냈다. 나는 이어 주작, 현무, 청룡을 소환해냈다.
     -마스터, 갑옷에서 드래곤의 기운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네요.
     백호가 말했다.
     “그게 왜?”
     -그 갑옷을 입고 있는 이상 마스터의 몸에 붙어있을 수가 없어요.
     “엥? 붙어있지 않으면 정령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거야?”
     -물론 그건 아니지요.
     “뭐야, 놀랐잖아.”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정령술이 필수였기에 정령술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그럼 그 귀여운 모습을 한 채 둥둥 떠다니는 거야?”
     그에 백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싫으시다면 이런 방법도 있어요.
     순간 반투명한 흰색의 둥근 막이 백호를 감쌌다. 그와 동시에 주작의 몸은 반투명한 붉은색의 둥근 막이, 현무에게는 갈색, 청룡에게는 파란색의 반투명한 둥근 막이 형성되어 몸을 감쌌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반투명한 둥근 구체가 둥둥 떠다니는 것으로 보였기에 나쁠 것은 없었다.
     “좋아, 맘에 들어.”
     나는 둥근 막에 씌워진 정령들을 보며 박수를 쳐주었다. 루카에게 탑승한 채 몰래 침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적당한 장소에 몸을 숨기라고 지시한 뒤 나는 퀵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이형환위를 전개해 성벽 위로 오른 나는 일정량의 마나가 감소되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되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제한적이지만 매직아머를 착용하기 전에 비해 마음껏 중원의 상승 경공을 사용할 수 있겠군.
     성벽 위를 오른 나는 성안으로 뛰어내렸다. 소리 없이 뛰어내렸기 때문에 기사들은 내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기척을 죽이고 카토 성의 중심지로 향했다.
     성의 중심지엔 또 다른 높은 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국왕이 사는 곳인 만큼 경비도 삼엄했고 또한 철저했다. 하지만 나보다 무위가 낮은 NPC들이 기척을 숨긴 채 돌아다니는 날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척을 죽인 뒤 또 하나의 작은 성문 앞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였다.
     “침입…….
     퍼퍽!
     “헉.”
     “흐억.”
     성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경비 둘을 활등으로 후려쳐 기절을 시킨 나는 성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들립니까, 카르토니아 후작. 본인은 그대와 겨루기 위해 카토 왕국에 들어온 레드 파운이라고 합니다. 어서 나와 실력을 겨뤄봅시다!”
     그러자 성을 경비하는 수십 명의 기사들이 나를 에워쌌다.
     “아니, 이자는 누구지?”
     “기척도 없이 이곳에 들어온 건가?”
     기사들이 웅성이고 있을 때 작은 성문이 열리며 대 여섯 명의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카르토니아 후작이 모습을 타나냈다. 광장에 세워진 석상에 비해 좀 늙었군.
     “무슨 소란이냐?”
     카르토니아 후작이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당신이 카르토니아 후작이오?”
     “그렇다.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당신을 꺾기 위해 세릴리아 대륙에서 온 레인지 마스터 레드 파운이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과 겨뤄보고 싶소.”
     나는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그에 카르토니아 후작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카토 왕국을 대표하는 초인인 내게 도전하겠다? 좋다. 대신 내게 패한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감히 내게 도전한 대가로 말이다.”
     카르토니아 후작의 말에 나는 찔끔했다. 패하게 된다면 목숨을 가져간다니. 물론 게임아웃을 당하게 된다면 다시 로그인을 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토니아가 소리쳤다.
     “좋다. 연무장으로 가도록 하지. 날 따라와라.”
     나는 기사들의 경계 속에서 카르토니아 후작의 뒤를 따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도전을 흔쾌히 승낙을 하다니. 역시 초인은 초인인가보다. 페리안도 그랬으니까.
     카르토니아를 따라 연무장에 도착하게 됐을 때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뼈다귀만 남은 시체들이 연무장의 구석진 자리에 팽개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패한다면 네 녀석도 저런 꼴이 될 것이다.”
     카르토니아를 따라 연무장에 오게 된 현성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석진 자리 이곳저곳에 뼈다귀만 남은 시체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진 카르토니아의 말에 현성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허리춤에 둘러 멘 드래곤 레드 롱 보우를 풀어 쥐고 풀어진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고정시켰다.
     “그럼 시작하지.”
     드디어 그토록 갈구해왔던 초인과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카르토니아의 검신에는 푸른 오러가 물밀듯 밀려와 일정한 형태를 갖추었다. 조금 전 드워프의 거처에서 상대 했던 기사들이 끌어올렸던 오러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건 그렇고 궁수였나?”
     “궁수면 초인에게 도전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그에 카르토니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런 법은 없지. 하지만 궁수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기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카르토니아 후작의 말에 현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이곳도 궁수를 멸시하는군. 바인마하 왕국에서도 그랬듯. 이곳에서도 궁수가 어떠한 존재인지 각인시켜줘야겠어.’
     생각을 끝마친 현성이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와 동시에 카르토니아가 지면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고 카르토니아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현성이 급히 백스텝을 밟아 거리를 두자 카르토니아의 검에선 눈부신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4미터 남짓 되어 보이는 오러 브레이드가 현성의 목을 향해 폭사되고 있었다.
     “퀵스텝.”
     ‘끝이다.’
     검을 휘두르는 카르토니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상대의 목을 베고 지나가려던 찰나의 순간 상대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퍽 꺼져버렸다. 상대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카르토니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상대는 놀랄 겨를도 주지 않았다.
     “싸이클론 애로우.”
     허공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카르토니아는 난생처음 보는 붉은 섬광이 맹렬히 회전하며 자신에게 폭사되는 것을 보고 사색이 되어 검을 휘둘렀다.
     콰앙!
     핏빛의 붉은 오러 애로우와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서로 충돌해 눈부신 폭발을 일으켰다. 붉은 섬광을 쳐낸 카르토니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 뭐지? 이건? 방금 날아든 것이 정녕 화살이란 말인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어.’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카르토니아를 향해 또 하나의 맹렬히 회전하는 붉은 섬광이 폭사되고 있었다.
     
                        <7권에 계속>    -by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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