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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인지 마스터 [7_1]
    작성자 : 절대긍정 | 조회수 : 2275 (2011-12-11 오후 12:57:40)
    레인지 마스터 1권

    목차
    프롤로그
    제1장   로그인(Login)
    제2장   레인저
    제3장   엘프의 도시, 아리스 노아(1)
     
    프롤로그

     딩동
     「주인님, 밖에 누가 왔습니다.」
     “음, 그래? 일단 문부터 열어줘.”
     「네.」
     자동식 현관문이 열리자 단정한 차림새의 한 사내와 키가 사내의 허리만 한 작은 로봇 한 대가 들어왔다.
     단정한 차림새의 사내는 남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강현성 씨 맞죠?”
     “네.”
     그런 사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사내는 작은 로봇과 함께 온갖 잡동사니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내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사내를 따랐다.
     사내는 작은 로봇과 함께 요상한 기계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요상한 기계는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내 방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긴 타원형 캡슐이 참 어색했다.
     그런데 캡슐을 이리저리 살피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편지봉투와 기계사용 설명서를 주더니 로봇과 함께 말없이 나가버렸다.
     “에? 그냥 가버리네.”
     나는 의아한 마음에 편지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는 직사각형의 얇은 칩이 있었는데, 재생 버튼을 누르자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할애비다. 오늘 내 손자 현성이의 18번째 생일이더구나. 큰 선물은 아니지만 맘에 들었으면 한다. 요즘 애들이 한다는 가상현실? 머시깽이 게임인데, 설명서 잘 읽고 재밌게 하려무나. 그럼 이 할애비는 하던 일이나 마저 해야겠구나. 사랑하는 손자 현성이에게.」
     

    제1장   Login(로그인)

     내 방 한구석에 떡하니 놓여 있는 가상현실 게임기기와 내 손에 쥐어진 사용 설명서.
     오늘이 2234년 1월 16일, 나의 18번째 생일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선물 공세(?)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는 게임이란 걸 일절 하지 않았다. 그저 십자수나 뜨개질 혹은 기계부품 조립 등 손을 많이 써야 하고 머리 또한 잘 굴려야 하는 그런 짓거리(?)를 좋아하는 내가 게임을 할 리가 없었다.
     “어디 보자.”
     나는 침대에 앉아 설명서를 펼쳤다. 세릴리아 월드? 이름도 참 촌스러웠다.
     “자유도 높은 가상현실 게임 세릴리아 월드, 오픈 3주년 기념 이벤트를 한다? 나랑 관계없으니 패스! 쭈욱 내려가서…….”
     나는 혼잣말을 하며 설명서를 쭉 읽어보기 시작했다.
     “게임기기 사용법, 최첨단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가상현실 게임 세릴리아 월드. 캡슐의 허리 부근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문이 열린다? 오호, 안에 인체공학적으로 만든 게임베드가 있고 헤드셋 착용 후, 신체 조직 일부를 검사하고 홍채인식 후 접속. 뭐야, 간단하잖아?”
     설명서를 쭉 읽어 내려가던 나는 제일 아랫부분에 경고표시와 함께 빨간 문구를 보았다.
     ‘48시간 이상 플레이하실 경우, 강제접속 종료 합니다. 강제 접속 종료 후, 5시간동안 플레이 하실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게임과 담 쌓고 지내던 나였기에 게임으로 보내는 시간이 30분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한참 설명서를 읽던 도중 문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생활직. 생활직이란 방직 또는 천 옷 따위를 만들거나 여러 잡화 등 생활필수품 등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거 솔깃한데.!”
     나는 다 읽은 설명서를 침대 위에 올려두고 잽싸게 캡슐 앞으로 다가가 캡슐의 허리 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위윙.
     철컥.
     듣기 좋은 기계음과 함께 캡슐이 열렸다. 캡슐 안에는 커다란 게임베드와 함께 헤드셋이 놓여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캡슐 안으로 들어와 게임베드에 누웠다.
     “헛! 무슨… 내 침대보다 이게 훨씬 편해!”
     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헤드셋을 머리에 썼다. 그와 동시에 캡슐 문이 기계음을 내면서 서서히 닫혀져 빛을 차단했고, 좁고 어두컴컴한 공간에 혼자 남게 되었다.
     좁아서 답답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캡슐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고 기름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런데 호스처럼 생긴 긴 카메라가 내 몸 이곳저곳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캐릭터 생성에 사용할 스킨을 촬영하는 것 같았다.
     “언제 시작되는 거야?”
     나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기대에 들뜬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상현실 게임. 세릴리아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캐릭터 스킨 촬영은 마쳤습니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3초간 눈을 크게 떠주시기 바랍니다.]
     듣기 좋은 여성의 음성이 내 귓가에 맴돌았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윙.
     찰칵!
     [캐릭터, 생성하시겠습니까?]
     “응”
     칠흑 같은 공간에 내가 서 있었고 내 앞엔 커다란 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른팔을 들어 올리자 거울 안의 소년이 왼팔을 들어 올렸다. 거울 안의 소년은 금세 놀란 표정을 짓더니 팔다리를 시작으로 온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고 새카만 머리카락, 새카만 눈동자.
     “이야, 가상현실이란 게 이런 거구나.”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캐릭터를 설정해주십시오. 외모는 바꿀 수 없으나 머리색, 눈동자색 등은 바꿀 수 있습니다.]
     “무슨 색으로 할까?”
     나는 기대에 들뜬 마음으로 온갖 색을 넣어봤지만 역시 나에게 어울리는 색은 검은색이었다. 캐릭터를 설정하자 또다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정하시겠습니까?]
     “응”
     [캐릭터, 생성되었습니다. 캐릭터의 성과 이름을 지정해주십시오.]
     “음… 성 같은 건 안 지어도 되는 거지?”
     [네, 자유입니다.]
    “음… 로빈훗!”
     [사용 중인 이름입니다.]
     “역시나…….”
     [사용 가능한 이름입니다. 사용하겠습니까?(예/아니오)]
     “아니오!”
     [캐릭터의 성과 이름을 다시 지정해주십시오.]
     “음… 그렇담 성은 파운, 이름은 레드.”
     [사용 가능한 이름입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생성되었습니다.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세릴리아 대륙의 수도 ‘세인트 모닝’으로 이동합니다.]
     파밧!
     나는 순식간에 수도 세인트 모닝에 오게 되었다.
     커다란 분수대 주위에는 많은 유저들이 모여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레어급 아이템 팝니다!”
     “파티 사냥 가실 분 모십니다!”
     어쩌고저쩌고, 왱알앵알.
     마치 놀이동산이라도 온 듯 시끄러운 소리에 차를 떨며 나는 분수대에서 떨어진 먼 곳까지 달려왔다.
     “우아…….”
     나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두 손을 들어 활짝 폈다. 오른손을 뒤집어 왼손으로 오른손 손등을 살짝 내리치자 통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현실에서 느끼는 고통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었다.
     “음, 그러니까, 상태 창 오픈!”
     파밧!
     연한 초록색의 반투명한 직사각형 입체 창이 나오면서 내 능력치가 공개되었다.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없음
     [계급] 평민
     [호칭] 없음
     Lv. 1
     생명력(HP). 50
     마나(MP). 50
     스태미나(SP). 50(배고픔 수치 0%/ 갈증 0%)
     힘 15
     체력 15
     민첩 15
     손재주 15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5~10
     방어력 1
     마법방어력 1
     남은 스탯 포인트: 0
     “우와! 이렇게 상세정보까지 다 나오는 구나.”
     나는 입체 창을 닫고 이번에 아이템 창을 열었다.
     파밧!
     아이템 창은 상태 창보다 좀 컸는데, 아이템 창 아랫부분에 금화 1G라는 단위를 볼 수 있었다.
     아마 이게 돈이겠지? 손을 뻗어 1G라는 단위 옆에 박힌 작은 동전을 잡자 무언가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내 손에는 1G라고 적힌 동전이 쥐어져 있었다.
     “우와!”
     나는 감탄사를 또다시 내뱉으며 동전을 제자리에 넣었다. ‘0G'라고 표시 되었던 단위가 1G로 되돌아왔다.
     “좋아,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거다! 여기 어디에 잡화점 없나?”
     아직 수도 세인트 모닝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나는 하는 수 없이 시끄러운 분수대 광장으로 내달렸다. 역시나 시끄러웠다.
     “오목게임 팝니다! 재미있어요! 단동 50실버!”
     “수제 낚싯대 팝니다!”
     “실드(Shield) 발동되는 레어급 목걸이 삽니다! 급구요!”
     나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펴고 레벨이 높아 보이는 유저에게 다가갔다. 그 유저는 은빛 갑옷을 입고 커다란 검을 들고 있었다.
     “저…….”
     “엥? 볼일 있냐?”
     “혹시 잡화점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을까요?”
     “잡화점? 너도 장난감 만들려고 하냐? 저~쪽에 수염 난 늙은 새끼 보이지? 저 새끼가 잡화점 주인이야. 볼일 다 봤으면 어서 꺼져.”
     ‘이런 미친 새끼… 매너 더럽게 없네.’
     난 속으로 한마디 욕을 내뱉고 싸가지 없는 유저가 알려준 늙은 새끼(?)에게 다가갔다. 늙은이의 머리 위엔 ‘NPC, 벨터’라고 적혀 있었다. 멀리서부터 천천히 걸어온 나를 본 벨터가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맞아주었다.
     “어서 오세요, 필요한 물건 있으십니까?”
     “어떤 물건들이 있나요?”
     “여러 가지 있죠. 예.”
     파밧!
     벨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커다란 입체 창이 생겨났다. 입체 창에는 여러 가지 잡화와 도구들이 있었다.
     “우와! 종이 100장만 주세요. 얼마예요?”
     “한 장 당 1브론즈입니다.”
     벨터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으나 세릴리아 대륙의 화폐에 대해 모르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1브론즈?”
     “아, 아직 화폐 단위를 모르시는군요. 1브론즈가 100개 있어야 1실버, 1실버가 100개 있어야 1골드입니다.”
     “아, 그렇군! 그럼 여기 1실버요!”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1실버를 꺼냈다. 종이 백장을 산 나는 잡화점 근처 바닥에 주저앉아 종이를 접기 시작했다.
     “자, 뭘 접어볼까? 그렇지! 먼저 거북이!”
     한 장의 종이가 내 손을 거쳐 순식간에 한 마리의 종이 거북이 되어 있었다. 늘 해오던 것이기에 손에 익은 나는 거북이 접기 신공(?)을 펼쳤다.
     “우와! 저 사람 봐! 종이 접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야.”
     “어디? 아! 정말이네?”
     “거북이 좀 봐! 예쁘지 않아?”
     언제 왔는지 세 명의 여성 유저가 내 종이접기 신공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종이접기에 한참 몰두한 나는 그 말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네모난 백지의 수는 줄어들고 작고 앙증맞은 종이 거북이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후아~ 다 만들었다!”
     20분 정도 지났을까. 나는 앉은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며 소리쳤다.
    종이 거북이를 몽땅 주워 아이템 창에 쏟아 넣자 한 마리의 종이 거북이가 한 칸의 자리를  차지했다. 종이 거북이 아이콘 오른쪽 아랫부분에는 하얀 글씨로 작게 ‘100’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계속해서 종이를 접었다. 이제 모인 종이 거북이만 1,000마리.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 말했다.
     “휴, 이제, 1,000마리 채웠네.”
     짧게 한마디를 내뱉은 나는 잡화점을 향해 걸었다. 지금껏 말을 걸어본 NPC는 잡화점 주인인 벨터 밖에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것도 20분간 세릴리아에 접속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종이접기였으니 당연했다.
     “오! 레드, 또 왔군요!”
     이제 제법 나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진 벨터가 먼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세릴리아에서는 NPC와 자주 대화하고 마주치다 보면 호감도가 올라가게 되는데, 이 호감도의 수치가 극에 달하게 되면 물건을 아주 싼값에 구입할 수 있고, 또 몇 개 정도는 공짜로 얻을 수 있으며 좋은 정보를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벨터가 이어서 말했다.
     “또 종이를 사려고 하는 건가요?”
     “아뇨, 접은 거북이 수만 해도 1,000마리인데 더 접는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런가요? 허허. 아, 레드 1,000마리를 접었다고 했죠? 그럼 손재주 스탯이 조금 올랐겠네.”
     “손재주? 물건을 만드는데 왜 스탯이 오르나요?”
     나의 물음에 벨터가 다시 한 번 웃으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허허. 무조건 레벨업을 해야 스탯이 오르는 게 아니에요. 만일 전사라면 스태미나가 바닥날 때까지 뛰면 채력 포인트가 약간 상승하고, 힘을 많이 쓰게 되면 힘 포인트가 상승하지요. 레드도 지금까지 손재주가 필요한 일을 했으니 스탯이 증가했을 겁니다.”
     “그런가?”
     나는 벨터의 말을 듣고 상태 창을 열었다.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없음
     [계급] 평민
     [호칭] 없음
     Lv. 1
     생명력(HP). 50
     마나(MP). 50
     스태미나(SP). 50(배고픔 수치 0%/ 갈증 0%)
     힘 15
     체력 15
     민첩 15
     손재주 16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5~10
     방어력 1
     마법방어력 1
     남은 스탯 포인트: 0
     “엇? 정말이네요! 스탯이 1포인트 상승하디니. 그런데 손재주가 높으면 손이 가는 물건들을 더 만들 수 있겠네요?”
     “그렇지요.”
     벨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재주 스탯을 올리고 싶었다. 늘 해오던 것처럼 여러 가지 생활필수품을 만들고 싶었으니까.
     그 후 나의 일상은 완전히 뒤바꼈다. 매일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하는 것은 당연했고, 접속 후 내내 잡동사니들을 만들었다.
     방직 스킬이란 것을 알게 되자, 천 옷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실 같은 것을 주변에서 채집하여 양털이나 거미줄로 옷을 만들었고, 생활필수품인 낚싯대나 국자 같은 것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벌써 세릴리아 월드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야~ 이제 조금만 하면 쿠션이 완성되겠는 걸?”
     나는 양털을 가공해 만든 솜을 토끼 가죽으로 만든 작고 네모난 쿠션 안에 넣고 꿰매고, 쿠션의 윗부분에 십자수로 토끼그림을 박아 넣었다. 이제 조금만 하면 새하얗고 예쁜 쿠션이 만들어진다.
     이런 물건을 만들 때마다 나만의 성취감을 느꼈다. 뭐, 자기 만족이긴 하지만 누가 뭐하고 하나?
     “자, 다 됐군. 이제 이건 아이템 창에 넣어야…….”
     토끼 쿠션을 든 채 아이템 창을 연 나는 아이템 창의 상태를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곳엔 낚싯대, 천 옷, 국자 등 다른 잡동사니들이 지저분하게 가득 차 있었다. 아이템 창 상태로 보아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정하는 것이 우선일 듯했다.
     “팔아버릴까? 좀 아까운데…….”
     나는 혼잣말을 하면서 내 손에 들린 쿠션과 엉망진창으로 늘어져 있는 아이템을 번갈아봤다. 아무래도 팔아치워야 될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좌판 깔 곳이 어디 없나?”
     나는 잡화점 근처를 벗어나 미간을 좁힌 채 시끌시끌한 분수대 광장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분수대 안에 있는 녹슨 동전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분수대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좌판을 깔고 아이템을 파는 유저들을 볼 수 있었는데, 하나같이 목구멍이 찢어져라 떠들어 대고 있었다.
     “싸게 팝니다! 토끼 가죽 팔아요!”
     “레어급 활 팝니다! 단동 10골드!”
     “늑대 어금니 팝니다! 전리품이에요!”
     시끄럽게 떠드는 유저들을 지나치며 내가 한쪽 구석진 자리에 좌판을 깔고 앉으니 반투명한 직사각형의 커다란 창이 생겨났다.
     윗부분에 ‘레드 파운의 개인상점’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아무래도 여기에 아이템을 넣어두면 유저들이 와서 사 가는 것 같았다. 내가 만든 잡동사니를 모두 쏟아 넣자, 개인상점 창이 가득 찼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으려니 심심하군.’
     다른 유저들과는 달리, 사람이 많은 곳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 정도의 배짱이 없는 나는 그저 자리에 앉아 가만히 기다리기를 택했다.
     이윽고 개인상점을 이리저리 살피며 돌아다니던 한 유저가 내 개인상점에 다가오더니 아이템을 쭉 살펴보았다. 그리고 맘에 드는 아이템이 있는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토끼쿠션… 얼마에요?”
     “아, 그 쿠션…이요?”
     여자와 말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얼마에 팔지 생각했다. 생긋 웃으며 바라보는 유저가 어찌나 예쁘던지 결국 나는 단돈 10실버에 토끼쿠션을 팔았다.
     “그럼 많이 파세요!”
     “네, 살펴 가세요.”
     나는 품에 토끼쿠션을 안은 채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유저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놈의 성격도 빨리 고쳐야 할 텐데…….
     그렇게 물건을 팔기 시작한 지 이제 30분 째.
     쿠션과 천 옷들은 전부 팔렸고, 아이템 창에 돈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펴졌다.
     모양이 독특하다며 20실버를 주고 낚싯대를 사 간 유저가 있는가 하면, 다용도 국자를 30실버에 사가는 유저도 있었다.
     처음 경험하는 길거리 장사(?)에서 나는 생각지 못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현재 남은 아이템은 새빨간 망토 하나.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망토를 집어넣고 좌판을 접었다.
     “허걱! 꽤 벌었네? 3골드 20실버라… 망토는 뭐, 아무도 안 사가는 것 같으니 내가 입어야지.”
     나는 아이템 창에서 붉은 망토를 꺼내 입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잡화점으로 향했다.
     까앙까앙!
     잡화점 가는 길에 지나치게 된 곳은 다름 아닌 대장간. 굵직한 땀방울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대장장이가 불에 달궈진 검을 망치로 연신 두드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와, 저렇게 무기를 만드는 거구나.”
     나는 대장간 앞에서 멈춰 대장장이가 무를 어떻게 만드는지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장장이 팔뚝은 두꺼웠고 피부색은 잘 태운 커피색이었다. 탈색된 듯한 연 노란색 머리를 길게 땋은 그는 경험 많은 늙은 대장장이 같아 보였다.
     “응?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시오?”
     열심히 망치질을 하던 대장장이가 달궈진 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나는 대장장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저, 혹시 제련 스킬이라는 거 배울 수 있을까요?”
     “제련 스킬? 알고는 있지만 난 가르쳐주지 않네.”
     “에? 그런 억지가…….”
     “억지가 아니라네. 볼일 없으면 이만 가보게.”
     “…….”
     냉정하게 거절하는 대장장이. 왠지 쪽팔린다. 하지만 나는 제련 스킬을 꼭 배우기로 결정했다.
     제련, 철광석을 철괴로, 금광석을 금괴로, 은광석을 은괴로 만들 수 있는 스킬. 꼭 배우고 싶은 스킬이었다. 하고 싶은 일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이 이번 일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게 꽉 잡고 있었다.
     “좀 가르쳐주세요!”
     “허! 그 사람, 참 말 안 통하네.”
     “튕기지 말고 가르쳐줘요!”
     “안 돼.”
     “가르쳐줘요!”
     “안 된다고 했소.”
     이 할방구, 강적이다.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꾹 누르며 다시 대장장이에게 말을 걸었다.
     “저… 뭐 시키실 일 없으세요?”
     “없네. 그럼 잘 가게.”
     아무리 부탁을 해도 가르쳐주지 않으니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괘씸한 늙은이를 뒤로한 채 투덜거리며 잡화점으로 향했다.
     “그래, 그래서 제련 스킬을 못 배웠다는 거니?”
     “네.”
     잡화점 의자에 앉아 투덜거리는 나에게 벨터가 말했다. 벨터와의 친밀도가 높아져 그는 나에게 반말을 했다.
     걱정해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벨터의 입 꼬리가 씰룩씰룩 움직이더니 이내 배를 부여잡고 껄껄 웃기 시작했다.
     “에? 왜 웃는 거에요!”
     “하하하! 정말 재밌어, 레드. 가끔씩 네 돌방행동에 웃곤 했지만 오늘처럼 웃은 건 처음이구나.”
     “그러니까 왜 웃는 거냐고요!”
     “아, 제련스킬과 같은 생활직 스킬은 대부분 서점에서 스킬 북(Skill Book)으로 팔고 있지. 레드, 이곳에 한 달이나 있었으면서 아직도 그걸 몰랐던 거니?”
     벨터가 여전히 실실거리며 물었다. 뭐, 모르는 게 당연했다.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해서 하는 일이라곤 잡동사니와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웃어재끼다니, 절말 너무하잖아요, 벨터!
     “벨터, 저는 그럼 서점으로 갈래요.”
     “음? 조금 더 놀다 가지 그래?”
     “쳇, 실어요. 그럼 안녕히.”
     왠지 미워 보이는 벨터를 외면하며 나는 잡화점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 순간 벨터가 나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레드, 길은 아니?’라고…….
     “아, 아뇨…….”
     “바로 옆이야.”
     벨터가 오른손 엄지로 서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벨터… 복수하겠다. 크아아!
     나는 벨터에게 짜증을 내고 서점으로 내달렸다.
     서점 문을 열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 NPC가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NPC의 말을 무시한 채 나는 작은 책장을 쭉 훑어보았다. 역사에 관한 소설, 철학에 관한 소설 그리고 무슨 던전에 얽힌 전설 따위의 시시껄렁한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다시 책장을 쭉 훑어보았다.
     “찾았다!”
     스킬 북이 진열된 책장을 찾은 나는 ‘제련’ 스킬 북을 찾아 꺼냈다.
     “‘제련의 모든 것’이라… 유치하구먼.”
     나는 스킬 북을 들고 안내 데스크에 서 있는 NPC에게 다가갔다. 아까는 그냥 지나쳤지만 자세히 보니 꽤 예뻤다. 분홍색 긴 생머리 그리고 사파이어를 박은 것 같은 파란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
     “제련 스킬 북이군요. 70실버입니다.”
     “예… 아, 아이템 창 오픈!”
     [3골드 20실버.]
     나는 70실버를 꺼내 NPC에게 건네주고 서점을 나왔다. 세릴리아 월드의 해도 이제 조금씩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 언제나 보는 거지만 현실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위윙.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접속종료 되었고 캡슐의 문이 열렸다. 나는 헤드셋을 벗고 자리에서 이러나 기지개를 켰다.
     “아아아,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제련을 해봐야지. 컴, 나 게임하는 동안 메시지 온 거 있어?”
     「일반 메시지 2건, 스팸 메시지 1건. 총 3건 왔습니다.」
     “그래? 그럼 스팸 메시지는 삭제하고 일반 메시지 좀 들려줘.”
     「일반 메시지 첫 번째. “현성아, 엄마다. 잘 지내니? 밥은 잘 챙겨 먹고? 엄마는 늘 걱정이다. 늘 덤벙대면서 쓸데없는 물건이나 만드는 내 아들 현성이를 볼 때마다. 그럼 밥 잘 챙겨먹고 나중에 메시지 하나 더 보내마.”」
     “역시 엄마 메시지였군.”
     나는 가족들과 떨어져서 산다. 나 혼자 한국에 남았고, 부모님과 동생은 현재 중국에 가 계셨다. 부모님께선 같이 가자고 말씀하셨지만 난 역시 한국이 좋았기에 남은 것이었다.
    「두 번째 메시지. “현성아! 할애비다. 재밌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둘 다 보관함에 저장해줘. 그리고 컴, 멀티비전 좀 켜줄래?”
     「네.」
     ‘컴’은 인공지능으로 집집마다 있는 시스템이었다. 쉽게 말해서 말하는 집과 산다는 것으로 보면 된다.
     컴이 멀티비전을 켜는 동안 나는 냉장고에서 카레라이스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고, 1분도 채 도지 않아 넓은 그릇에 새하얀 쌀밥과 그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가 덮여 나왔다. 나는 그릇과 수저를 들고 소파로 향했다.
     “컴, 채널 좀 돌려줘. 세릴리아 월드 채널로.”
     「네.」
     컴이 채널을 맞추는 사이,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라이스를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었다. 카레 향이 입 안에 퍼지며 매콤한 맛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가자! 세릴리아 월드’ 채널의 MC인 강성규,”
     “윤미리입니다!”
     “자,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윤미리 씨!”
     “강성규 씨. 오늘은 어떤 직업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네. 오늘은 치명적인 부상률이 높은 장거리 사냥의 명수인 궁수에 대해 알아볼 시간입니다!”
     멀티비전에서 두 MC가 떠드는 동안 나는 카레를 떠먹으며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살살 녹는 밥알과 꼭꼭 씹히는 고기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럼 궁탑의 첫 번째 제자인 ‘로빈훗’님을 찾아뵙겠습니다.”
     남자 MC가 말하자 화면은 세릴리아 월드로 바뀌었고, 리포터가 게임에 접속해 촬영을 하는 웃긴 상황이 벌어졌다.
     “현장에 나와 있는 리포터, 민들레입니다. 자, 지금 제 옆에 계신 분이 로빈훗 씨입니다. 안녕하세요, 로빈훗 씨?
     “네, 안녕하세요, 하하. 지금 방송 나가는 거죠?”
     “네, 몰론 생방송이지요.”
     나는 씹고 있던 카레를 꿀꺽 삼켰다. 궁탑의 첫 번째 제자는 또 뭐지? 궁수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는 밥그릇을 들고 멀티비전에 집중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보랏빛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로빈훗 이란 유저는 기다란 활을 들고 있었다. 아마 저게 롱 보우(Long Bow)인가 보다.
     "아, 정말 긴장되는군요.“
     “긴장하실 거 없어요. 그냥 평소처럼 해주시면 됩니다. 곧 몬스터가 리젠될 시간이죠? 자, 여러분 그럼 저는 인비지빌리티 마법이 발동되는 반지를 끼고 촬영을 하겠습니다. 인비지빌리티!”
     리포터는 안개에 감춰지듯 모습이 사라졌고, 리젠된 오우거 한 마리가 침을 질질 흘리며 로빈훗을 향해 내달렸다.
     로빈훗은 재빨리 화살을 꺼내 오우거에게 쏘았다. 한 발의 화살이 오우거의 눈에 틀어박혔고 다른 화살이 오우거의 복부를 향해 날아갔으나, 질긴 가죽을 뚫지는 못했다.
     눈 하나를 잃은 오우거가 괴성을 지르며 근처에 있는 바위를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지금 오우거가 로빈훗 씨에게 커다란 바위를 마구 던지고 있습니다.”
     “뭐야, 화살이 오우거의 가죽도 뚫지 못하는데 무슨 장거리 사냥의 명수야.”
     오우거를 잡고 있는 로빈훗을 보며 나는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로빈훗은 오우거와 상당한 거리를 둔 채 활시위를 강하게 당겼다. 활을 쥔 그의 팔은 미세하게 떨렸고, 눈은 마치 먹이를 노리를 한 마리의 독수와 같았다.
     “파워 샷(Power Shot)!"
     푸슝.
     쇄애액.
     한 발의 화살이 쏘아지자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가르며 빠르게 날아가 오우거의 복부에 명중했고, 오우거의 육중한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내상을 입었는지 오우거의 입가에서 검붉은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콰우우우!
     “더불 샷(Double Shot)!"
     쐐애액.
     푸욱!
     “이야…….”
     로빈훗이 이어서 쏜 두 발의 화살이 이미 배에 꽂혀 있는 화살을 반으로 가르며 상처 부위에 박혔다. 오우거는 더 이상 발버둥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형체를 잃어갔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인비지빌리티 캔슬(Cancel)! 지금까지 로빈훗 씨의 활약을 지켜보았습니다. 명중률이 정말 높군요?”
     “이 정도야… 저보다 활을 잘 쏘시는 분은 아주 많습니다. 숨겨진 명궁들이 많다고 볼 수 있죠.”
     오우거를 간단하게 제압한 로빈훗이 겸손하게 말했다.
     “아앗!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
     갑작스럽게 리젠된 트롤 세 마리와 오우거 두 마리의 등장에 리포터는 급히 투명화 마법을 발동시켰다. 로빈훗은 침착하게 활을 고쳐 잡고 화살하나를 뽑아들며 뒤로 민첩하게 한 걸음씩 물러나기 시작했고, 새 개의 화살을 활등에 대고 활시위를 당겼다.
     “트리플 샷(Triple Shot)!"
     세 개의 화살이 세 갈래로 나뉘어져 달려드는 세 마리의 트롤의 이마에 한 발씩 박혔다. 그에 세 마리의 트롤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 두 마리의 오우거가 로빈훗에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로빈훗은 화살 하나를 꺼내 왼쪽에서 달려드는 오우거에게 파워 샷(Power Shot)을 먹였다. 오우거는 짧은 신음을 흘리며 육중한 몸이 멀리 밀려났다.
     “더블 샷(Double Shot)!"
     쐐애액.
     푸푹!
     로빈훗이 쏜 두 발의 화살이 반대편에서 달려드는 오우거의 두 눈에 적중했고, 오우거는 앞이 보이지 않아 손에 든 방망이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발악을 해댔다.
     그렇게 두 마리의 오우거를 묶어둔 사이, 세 마리의 트롤이 어느새 로빈훗을 둘러싸고 누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아차.”
     재빨리 화살 하나를 꺼내 활시위를 당긴 로빈훗은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화살 한 발을 쏘아 보냈다.
     “애로우 레인(Arroww Rain)!"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늘 높이 치솟은 화살이 어느새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로빈훗은 재빨리 트롤들에게서 빠져나와 근처의 나무 뒤에 몸을 숨겼고, 트롤은 화창한 날 내리는 화살 비에 목욕(?)을 했다.
     카오오!
     꾸어어엉!
     퀘에액!
     세 마리의 트롤은 각각의 특이한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고 형체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히야, 무슨 화살이 저렇게 빨라? 마법사야, 궁수야?”
     로빈훗의 활솜씨에 반한 나는 서서히 식어가는 밥그릇을 들고 멀티비전이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감탄했다.
     “리포터? 이제 나오셔도 돼요.”
     “에? 하지만 저기 오우거 한 마리가 살아 있는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하하. 걱정 없어요. 숲 밖에서 두 눈을 잃은 오우거는 가까이만 가지 않으면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아요. 지금 저 오우거는 ‘움직이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니까요.”
     겁에 잔뜩 질린 리포터를 안심시키는 로빈훗이 지금 이 순간 나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딱히 궁수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저런 겸손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레? 식었네?”
     나는 손에 들린 다 식은 카레라이스를 다시 퍼먹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리포터 민들레였습니다.”
     “네, 잘 봤습니다. 어땠나요, 윤미리 씨?”
     “아, 처음엔 궁수라는 직업이 그저 약한 직업일 거라고 생각 했는데, 무시 못 하겠는데요.”
     “아, 그렇죠? 자, 지금 멀티비전을 시청하고 계신 여러분! 아쉽지만 ‘가자 세릴리아 월드!’ 벌써 마칠 시간이네요.”
     “아, 너무 아쉬워요. 그럼 다음 주 이 시간에는 파티의 중심이자 제일 중요한 직업! 기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다음에 또 만나긴, 무슨 어린애냐? 컴. 이제 멀티비전 좀 꺼줘.”
     나는 이제는 텅 빈 밥그릇을 싱크대에 던져두고 내 방으로 향했다.
     “야식도 먹었으니 이제 자볼까?”
     「오전 8시, 오늘의 알람은 사계 중 겨울입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컴이 들려주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하게 주무셨나요?」
     “응, 잘 잤어.”
     「오늘도 청결 모드지요?」
     “응.”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욕실로 향했다. 상의만 벗은 채 두 팔을 벌린 나는 최첨단 시스템인 ‘크린 워터 샤워’라는 시스템 덕분에 짧은 시간에 샤워와 세수, 양치까지 모두 끝낼 수 있었다. 욕식에서 나와 내 방으로 가려 했으나, 아침은 꼭 먹으라는 컴의 잔소리에 간단하게 먹고 캡슐을 열었다.
     위잉.
     철컥.
     “좋아, 오늘은 제련하는 날이지?”
     헤드셋을 쓰자 캡슐의 문이 닫혔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5.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들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웅성웅성.
     “여, 레드! 왔구나.”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해 수도 세인트 모닝의 한 지점에 서 있는 나를 제일 먼저 반긴 건 잡화점 주인 벨터였다. 어제 서점 앞에서 로그아웃을 했으니 바로 옆인 잡화점에서 내가 훤히 보이는 게 당연했다.
     “벨터, 안녕하세요~!”
     “삐진 줄 알았더니 아니구먼. 크크.”
     “쳇, 저 오늘 바빠요.”
     “그래?”
     “네. 그럼 가볼게요.”
     나는 제련 스킬 북(Skill Book)을 아이템 창에서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련에 관한 내용과 제련을 습득할 수 있는 퀘스트가 들어 있는 스킬 북이었다.
     [퀘스트, 제련을 하기 위한 첫걸음 대장장이 아세른의 부탁.]
     스킬 북을 정독하자 퀘스트 하나가 날아왔고, 그에 나는 대장간으로 향했다.
     대장간에 도착하자 무기와 갑옷 등을 정리하는 대장장이를 볼 수 있었다.
     “저…….”
     대장장이 아세른에게 말하자 아세른은 어제와 달리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오, 자네가 레드인가? 어젠 미안했네. 제련 스킬을 알고 있지만 가르쳐줄 수 없다는 말의  의미가 뭔지 이제는 잘 알겠지?”
     “네, 이제 알 것 같군요. 스킬 북을 사서 정곡하고 퀘스트를 받아서 오라 이거지요?”
     “이 친구, 눈치 한번 빠르구먼. 껄껄.”
     아세른의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영감탱이가 오늘 왜 이래?
     “자, 여기 이 종이. 관청에 가서 세금 관리인에게 주고 오게나.”
     “관청의 세금 관리인?”
     나는 아세른의 건네주는 종이 한 장을 받으며 말했다. 관천이라면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너무나도 넓은 수도 세인트 모닝.
     어떻게 찾아가라는 건지 아세른은 지도 한 장 주지 않았다.
     “저, 길을 모르는데…….”
     “아, 저기 저쪽에 푸른 섬광이 공중으로 치솟은 게 보이지? 저곳에 관청이 있다는 표시라네. 자, 어서 다녀오게.”
     “아, 네.”
     아세른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 기다란 섬광이 원기둥처럼 공중으로 치솟아 있었다. 나는 아세른이 준 종잇조각을 아이템 창에 넣고 관청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이야, 여기가 관청이야? 무슨 빌딩 아닌가?”
     관청에 도착한 나는 관청의 규모를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유리로 된 고급스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내데스크에 있는 예쁜 NPC가 나를 반겼다.
     “아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세, 세금 관리인 있나요? 지금 대장간에서 시, 심부름 왔거든요…….”
     “아, 그러세요? 제련 스킬 입수 퀘스트를 하고 계신가 봐요?”NPC가 별걸 다 알고 있다니, 참 친기하군. 나는 종잇조각을 내밀며 다시 말했다.
     “NPC이신데도 별걸 다 아시네요.”
     “NPC요? 풋, 안타깝게도 저는 유저랍니다. 여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요.”
     “에! 유, 유저라고요?”
     “다들 그렇게 놀라곤 하죠 자, 이 종이는 제가 다른 NPC를 불러 세금 관리인 NPC에게 가져다주도록 하지요. 그럼 어서 가서 제련 스킬 입수하시기 바랍니다.”
     “아, 예…….”
     NPC인 줄 알았는데 유저라니, 뭐 이런 황당한 일이 다 있나… 잠시 멍하게 서 있던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대장간으로 향했다.
     “좋아, 완수했군. 그럼 제련에 대해 알려주도록 하겠네. 자, 여기 이 철광석 보이지?”
     아세른이 큼직한 철광석 두 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세른이 철광석 한 개를 내게 건네주며 다시 말했다.
     “이걸 철괴로 제련해보겠네.”
     ‘말만 하지 말고 얼른요!’
     속으로 외친 나는 아세른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세른이 용광로에 철광석을 넣고 3초 후에 꺼내자, 녹아 액체로 변한철광석이 부글부글 꿇고 있었다. 물론 그냥 맨손으로 넣어 꺼낸 게 아니라 철광석을 녹일 때 쓰는 아이템이 딸로 있어 거기에 넣어 두고 녹인 것이다.
     “자, 금방 굳어버리니 이 틀에 쏟아 부으면 된다네.”
     “아, 이렇게 하는 거군요.”
     나는 아세른을 따라 철광석을 녹이기 시작했다.
     “앗, 뜨거!”
     “좀 뒤로 물러나서 하게.”
     작은 불씨가 손에 튀었고, 나는 비명에 가깝게 소리쳤다. 그런 나를 보며 아세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세른이 한 것처럼 나도 바닥에 있는 틀에 부글부글 꿇고 있는 철광석을 부었다.
     치이익.
     액체였던 철광석이 금세 굳었다.
     “자, 이제 이렇게 꺼내면 되는 거지.”
     “어떻게요?”
     아세른이 기다란 쇠꼬챙이를 틀의 끝부분에 걸쳐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누르자, 완성된 철괴의 끝부분이 틀에서 떨어져 나왔다. 나도 아세른과 같은 방법으로 쇠꼬챙이를 걸쳐 철괴를 꺼냈다.
     “오, 처음 치고 잘하는군. 좋아, 내 옆에서 앞으로 한 달간 제련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블랙스미스(Blacksmith)'라는 스킬도 알려주겠네.”
     “블랙스미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아세른이 다시 말했다.
     “허허, 블랙스미란, 제련과는 달리 무기를 만드는 스킬이지. 자네가 혹시 잡화점 터주 대감 레드 파운인가?”
     “에?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네. 그럼 오늘 제련할 것이 많으니 꾀부리지 말고 열심히 하게.”
     아세른이 껄껄 웃으며 철광석이 들어 있는 보따리를 풀어해쳤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철광석이 작은 산을 이루었고 나는 그렇게 원하던 제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제련을 하면서 느낀 거지만, 대장장이라는 직업도 나름대로 맘에 들었다.
     시간이 흘러 남들이 빠르면 한 달, 늦으면 세 달에 걸쳐 마스터할 제련 스킬을 난 단 3주 만에 해냈다. 세릴리아 월드를 하기 전부터 늘 해오던 잡동사니 만들기가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긴, 남들이 가상현실 게임을 하거나 밖에서 뛰놀 때, 난 십자수나 뜨개질 혹은 기계부품 조립 등 쓸데없는 짓만 해왔으니 말이다.
     제련 스킬을 마스터하고 이제 블랙스미스 스킬도 거의 마스터 해가던 어느 날이었다.
     “레드, 좀 쉬면서 하게나.”
     “아, 이것만 하구요.”
     나는 휘어진 나무를 깎아 붉은가죽을 덧대고 오우거의 힘줄로 만든 활시위를 엮었다. 이렇게 만든 활은 내 첫 작품인 ‘레드 롱 보우(Red Long Bow)'였다. 활을 만든 다음 질긴 가죽으로 화살통을 만들었고 제련한 철을 녹여 화살촉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블랙스미스 스킬의 마스터로 인정받을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블랙스미스 마스터가 될 실력을 갖추었는지 확인하는 마지막 테스트! 최고의 무기인 힘 스탯을 많이 찍은, 즉 스탯 포인트를 힘에 많이 투자한 검사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두 손 검 클레이모어와 투 핸드 소드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찔려 죽일 수 있는 것만이 검이 아니라네. 검이란…….”
     “알아요. 그러니 이제 그만 집중 좀 합시다.”
     매일 귓구멍에 못이 박혀라 들은 검에 대한 이야기.
     검이란 무엇이고, 사람이 무기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무기가 사람을 택하고, 아세른의 무기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을 때는 그럴싸했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매일같이 먹으면 지겨운 법.
     까앙까앙.
     화르륵.
     까앙!
     그날 대장간에서 하루 온종일 망치질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뜨거운 불 앞에서 내가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검. 드디어 완성이었다.
     “아세른! 둘 다 만들었어요!”
     “그런가? 어디 보자. 음? 오오. 아주 잘 만들었네. 검신이 정말 멋지군. 손잡이도 흔들림 없이 아주 잘 붙었어. 레드, 축하하네. 블랙스미스도 마스터한 것 같으니 말이야.”
     아세른의 대답을 들은 난 너무 들뜬 나머지 약간 맛이 갔다. 그의 두꺼운 팔뚝을 툭툭 건드렸고, 내가 만든 단검을 들고 연신 휘둘러댔다. 지나가는 유저들이 날 보면 아마 ‘지랄한다.’라는 이 육두문자가 생각났을 것이다.
     세릴리아 월드 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덧 석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블랙스미스 스킬을 마스터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투자해 게임을 했어도 나의 레벨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레벨 5. 뭐, 레벨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3개월간 하고 싶은 일을 모두 마친 마는 이제 색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
     “휴, 그럼 가볼까?”
     하얀 깃털이 꽂힌 빨간 마법사 모자를 눌러쓰고 등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 손엔 붉은 가죽을 덧대어 만든 롱 보우를 들었으며 허리춤엔 손잡이 끝에 붉은 구슬이 밖힌 단검을 찼다.
     망토 안에 화살통이 있었으나, 뽑을 수 있는 화살이 망토보다 더 위에 있었기 때문에 화살을 꺼내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세인트 모닝에서 벗어나 초보자 사냥터로 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초보자 사냥터답게 토끼들이 뛰놀고 있었다.
     “귀여워서 죽이기 뭣하네. 그럼 저 얼룩 토끼나 잡아볼까?”
     단검으로 저 귀여운 것들 썰어(?) 죽일 마음이 없는 나는 활을 들었다.
     평소에 활은 활시위를 풀어놓았다. 즉, 활시위가 활의 양 쪽 끝에 묶여 있었는데, 평소에는 한쪽 끝의 활시위를 풀어둔다는 말이다. 계속 묶어두면 활시위가 늘어져 내구력이 떨어지고 공격력도 감소되기 때문에 풀어놓는 것이다.
     나는 활시위를 당겨 활의 한쪽 끝에 걸었다. 무진장 질긴 오우거의 힘줄로 만든 활시위이기에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티잉.
     잘 걸었는지 확인하려고 손가락으로 활시위를 살짝 당겼다 놓자 맑은 음이 들려왔다.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 활등에 갖다 댄채 활시위를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활시위의 성질 때문인지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토끼 한 마리를 조준하고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나아갔다.
     쉬잉.
     푸욱!
     명중! 화살은 토끼의 몸통을 꿰뚫고 저만치 날아갔다. 토기야, 미안해.
     나는 죽은 토끼에게 다가가 단검으로 분해했다. 필요 없는 내장은 버리고 토끼의 가죽과 고기만 아이템 창에 던져 넣었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 차례 토끼를 잡은 결과 단숨에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    *     *
     초보자 사냥터에 한 유저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등에 화살통이 달려 있었고 한 손에는 롱 보우가 쥐어져 있었다.
     “새소리가 참 듣기 좋구나.”
     유저는 롱 보우를 땅에 내려놓고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짹짹.
     나무 바로 위에 있는 새소리가 자장가라도 되는 양, 유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짹짹, 짹짹.
     푸욱!
     툭.
     “엉? 뭐, 뭐야!”
     금세 잠들 것 같던 유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새를 명중시켰고 노래하던 새가 그대로 나무 아래로 덜어진 것이다.
     “뭐지, 이건? 누가 이런 거야?”
     궁수 유저는 롱 보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경계했다. 자신을 햐새 쏘려다 빗나가 새를 맞힌 PK(Player Killer)의 화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붉은 롱 보우를 들고 있는 유저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외쳤다.
     “오! 맞췄다. 맞췄어! 이야, 이거 재밌는데?”
     “엥? 뭐야, 저거?”
     그런데 이때 갑작스럽게 등장한 다른 유저, 바로 현성이었다. 현성은 긴장한 궁수 유저를 무시하고 화살이 꽂힌 새를 집어 들었다.
     “좋아, 명중률이 높아졌군.”
     나무 위에 있는 새를 잡은 현성에게 롱 보우를 든 유저가 말했다.
     “저, 혹시 레벨이 어떻게 되세요?”
     “저요? 이제 10이요.”
     “10? 전적은 하셨나요?”
     “아뇨.”
     “그런가요? 궁수로 전직하면 명중률이 더욱 높아져요. 딱 보니까 활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취미로 활을 가지고 노는 것뿐이에요. 그럼 이만.”
     현성은 새 꼬치(?)를 들고 마을로 향했다.
                   *    *     *
     궁수로 전직하면 명중률이 더욱 좋아진다는 유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궁수로 전직해볼까…….”
     내가 세릴리아 월드를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할아버지가 사주셨고 두 번째, 접속해보니 재밌었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여러 가지 잡동사니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유저의 말을 들은 후부터 자꾸만 ‘궁수’라는 직업이 끌리기 시작했다.
     “여기 토기고기랑 새고기요.”
     “오, 토끼고기 질이 좋군요. 비싸게 사겠어요. 토끼고기가 열다섯 덩어리, 30실버. 새는… 50 브론즈에 사야겠군요. 너무 작아서 말이죠.”
     식당 주인 NPC가 내가 올려둔 고기를 살펴보며 말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고기를 판값 까지 해서 2골드 80실버 50브론즈. 적지 않은 돈이었다. 궁수를 할까 말까 갈등하면서 나는 잡화점으로 향했다.
     “궁수?”
     “네.”
     궁수로 전직하겠다는 말에 벨터가 물었고, 나는 다시 대답했다. 벨터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 내가 말했다.
     “궁수로 전직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궁수? 사냥에 별로 신경도 안 쓰던 녀석이 갑작스레 무슨 궁수를 한다고…….”
     벨터가 잡화점 물품을 정리하며 말했다.
     “음. 아까 이 활로 토끼랑 나무 위를 새도 잡았는데…….”
     “그래? 세릴리아 월드에서 가장 전직하기 힘든 직업이 뭔지 알아?”
     “마법사요?”
     “그래, 웬만한 지식이 없으면 전직하기 힘들지. 또 마법이란 게 복잡한 수인(手認)을 암기해야 하고 말이야. 도 마법 수식을 계산할 줄 알아야 하고 시동어를 외워야 하지.”
     “헉, 그 정도까진 줄은 몰랐는데…….”
     마법사가 전직하기도 힘들고 마법을 익히기도 힘든 직업인 건 알았지만, 벨터가 말한 만큼 어려운 줄은 몰랐다.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벨터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궁수는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하지. 활이라는 게 다루기 쉬운 무기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거야.”
     “에? 쏘면 잘 맞던…….
     “허, 입 다물고 들어.”
     나의 말을 끊으며 벨터가 다시 말을 이었다.
     “원거리에 있는 적을 쏘아 맞히는 원거리 사냥의 명수. 하지만 근거리에선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지. 물론 로빈훗은 좀 다른 녀석이긴 하지만. 궁수로 전직하려면 궁수의 탑으로 가야해. 물론 가서 적성에 맞는지 테스트를 해보는 거야.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지. 로빈훗과 같이 특이한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 ‘궁탑의 제자’라는 호칭을 받게 되지. 첫 번째 제자가 로빈훗, 현재 여섯 번째 제자까지 나왔다고 소문이 있어. 모두들 명궁수야.”
     “궁수도 개나 소나 다 하는 게 아니군요.”
     벨터의 말에 내가 대답했고, 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이미 궁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나는 최고가 될 것이다. 즉, 언젠가 세릴리아 월드 최고의 명궁이 될 것이다.
     “그럼 어디서 전직하는지만 알려주세요.”
     내가 잡화점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벨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세릴리아 월드의 최고의 궁수가 되겠다고 했지? 그럼 이 지도를 보고 궁수의 탑을 찾아가거라.”
     “앗! 감사합니다!”
     내가 두 손을 내밀어 지도를 받으려 할 때, 벨터가 말했다.
     “하지만 그 약속을 못 지키면…….”
     “못 지키면?”
     “내 잡화점 후계자나 해라. 너처럼 잡화 물품을 잘 녀석도 없으니 말이다. 크크.”
     “그럴 일은 없네요.”
     두 손으로 지로들 받으려던 나는 다시 한 손으로 빼앗듯이 벨터의 손에 있는 지도를 낚아챘다. 벨터는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다. 그런 벨터를 뒤로한 채 나는 지도에 표시된 궁수의 탑으로 향했다.
     푸른 들판에 과녁 스무 개 그리고 하얗고 커다란 탑 하나와 탑 근처에 커다란 탁자가 대여섯 개 놓여 있었다.
     “여기가 궁수의 탑인가?”
     나는 벨터가 준 지도의 그림과 궁수의 탑을 비교해보며 자세하게 살폈다. 등에 활을 메고 궁수의 탑으로 들어가는 유저도 있으니 내가 제대로 찾아왔나 보다. 나는 궁수의 탑으로 들어와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는 NPC에게 다가갔다.
     “저, 궁수 지망생인데 궁수로 전직을 하려고 하는데요.”
     “아, 그러세요? 그럼 여기에 이름을 적어주세요.”
     NPC가 종이와 펜을 내밀며 말했다.
     ‘RED Paun(레드 파운)’이라고 적어 건네자 NPC는 카메라를 꺼내 내 얼굴을 촬영했다. 그러자 바로 사진이 나왔고 키메라는 종이 오른쪽 윗부분에 사진을 붙이곤 나에게 주며 말했다.
     “2층에 가셔서 접수를 하시면 됩니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나는 내 이름과 내 사진이 붙은 종이를 들고 2층으로 향했다. 탑이 무지 넓어 계단을 찾는 데 10분이나 낭비해야 했다.
     “에고, 겨우 찾았네. 안내데스크에서 물어볼 걸 괜히 그냥 와가지고…….”
     2층에는 접수원 NPC가 있었는데, 그 앞으로 접수를 하려고 궁수 지망생들이 줄을 서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석궁 혹은 활을 등에 메거나 들고 있었고 대부분 무기점에서 산 숏 보우(Short Bow)를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 줄의 맨 끝에 섰다.
     “이거 접수하고 언제 테스트하는 거야?”
     “글세, 아마도 게임 시간으로 내일쯤에 볼 것 같은데?”
     “그래? 늦는구먼, 이거.”
     내 앞줄에 선 두 유저는 친구인지 무지 친해 보였는데, 둘 다 키도 컸고 얼굴도 잘생긴 편이었다.
     아, 내 자신이 왜 이리 초라해 보이는지.
     내 키는 173센티미터, 이제 고3이 되는 녀석 치고 작은 편이다. 게다가 집에서 잡동사니만 만들고 운동은 도통 하지 않아 호리호리한 몸. 하지만 주눅들 필요는 없었다. 궁수가 키도 크고 얼굴이 잘생겨야 하는 건 아니니까.
     줄은 점점 짧아졌고 이제 한 명만 접수하면 내 차례였다.
     “다음 오세요.”
     “네.”
     나는 접수원 NPC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종이를 받은 NPC는 서랍에서 깨알 같은 글씨가 잔뜩 적힌 종잇조각을 꺼내 내밀며 말했다.
     “이 종이는 꼭 지참하셔야 합니다. 자, 그럼 다음 오세요.”
     “음…….”
     나는 종잇조각을 받아 아이템 창에 넣고 궁수의 탑에서 나와 잡화점으로 향했다.
                   *    *     *
     세릴리아 월드 개발팀의 사무실에서 팀장과 직원들이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 벌써 회원 수가 그렇게 늘었나?”
     “오, 해외로 나간 지 이제 1년, 서버 통합을 한 지 11개월이다 되어가니 당연하죠.”
     “생각지 못한 발전을 했구나.”
     세릴리아 월드 김영수 개발팀이 묻자 직원이 말했다. 김 팀장의 얼굴이 활짝 폈을 때 커피를 마시던 다른 직원이 말했다.
     “팀장님, 한 시간 전 생활직을 하는 유저들을 살펴본 결과, 잡화 물품, 생활필수품, 방직, 천 옷 만들기, 제련, 블랙스미스 이 6가지나 마스터를 한 유저가 있었습니다.”
     “6가지나 마스터를 한 유저? 그래, 레벨은 몇이지?”
     “음, 이제 10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10? 허허. 몇 년간 고생해서 이뤘나 보군.”
     김 팀장이 웃으며 말하자 직원이 이어서 말했다.
     “회원 가입한 지 이제 석 달된 유저입니다.”
     “석, 석 달?”
     “네.”
     김 팀장은 놀란 듯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흐음… 뭐야, 생활직 수련치를 너무 낮게 잡은 거 아냐?”
     “아닙니다. 전부 다 수련치 300%를 잡고 만들었으니…….”
     “혹시 버그를 쓰는 건 아닌지 그 유저를 잘 살펴보도록 해.”
     “네.”
                   *    *     *
     궁수의 탑에서 받아온 종잇조각을 본 벨터가 축하한다면 박수를 쳐주었다. 뭐, 접수한 게 축하할 일인가. 나는 잡화점 의자에 앉아 벨터가 주는 빵을 받아먹으며 입을 열었다.
     “음. 이 빵 참 맛있네요.”
     “그래? 요 앞 식료품점에서 사왔단다.”
     “그래요?”
     벨터가 연장을 꺼내 다용도 국자를 수리하며 말했다. 정말이지 잡화 물품을 다루는 솜씨가 나의 몇 배나 되는 것 같았다.
     “레드, 요리에도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다.”
     “요리요?”
     “요리도 생활직 중 하나야. 예를 들어 사냥터에서 배고픔 지수가 높아진 상태에서 사 온 음식이 없다. 그땐 사냥을 해서 얻은 고기나 숲에서 캔 버섯 등을 요리해서 먹는 거지. 물론 수련치가 낮으면 사람이 먹을 게 못 돼.”
     평소에 요리를 하지 않고 인스터트식품만 먹어왔기 때문에 요리 스킬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빵을 다 먹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옆에 세워둔 레드 롱 보우를 들었다.
     “벨터, 대장간에 좀 가볼게요. 아세른에게도 말해줘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다음에 또 놀러 오거라.”
     벨터가 수리한 국자를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대장간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것은 다름 아닌 마법사 유저였다. 큼직한 안경을 쓰고 갈색 로브를 입은 유저가 스킬 북을 들고 중얼거리며 지나가는 게 마치 범생이 같았다.
     까앙까앙.
     정겹게 들리는 망치소리. 나는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
     “아세른.”
     “오, 레드. 왔는가?”
     “짜잔!”
     “뭔가. 그건?”
     궁수 전직 시험에 관한 내용이 적인 종잇조각을 아세른에게 보여주자, 그는 계속하던 망치질을 멈췄다. 나는 아세른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 내일 궁수 전직 시험을 본답니다.”
     “그런가? 그냥 대장장이나 하지, 궁수는 무순.”
     아세른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마치질을 시작했다. 벨터나 아세른이나 나에게 바라는 점이 하나씩 있었나 보다. 아세른이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가?”
     “아, 아니에요. 크큭.”
     대장간에서 아세른의 일을 도와주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지났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더니 맞는 말인 것 같다. 서서히 해가 뜨고 있으니 이제 출발해야 되겠군. 나는 레드 롱 보우를 들고 아세른에게 말했다.
     “아세른,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래, 좋은 성적 거두길 바라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궁수의 탑으로 향했다.
     “파티 퀘스트 늑대 사냥하실 분 구해요!”
     “상급 바람의 정령석 팝니다! 정령술사님들 어서 오세요!”
     세일트 모닝 분수대 광장. 언제나 그랬듯 활기찬 모습이었다.
     [쪽지가 도착했습니다.]
     작은창에 쪽지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떴고 나는 메시지 함을 열었다.
     <궁구 지망생 유저 분은 지금 즉시 궁수의 탑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좋아.”
     나는 쪽지를 확인하곤 궁수의 탑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궁수의 탑 앞에 교관인 듯한 NPC와 조교로 보이는 NPC 아홉 명, 궁수 지망생 약 100여 명이 서 있었다. 지망생들은 일찍 온 순서대로 10명씩 모둠을 짜 질서정열하게 서 있었다.
     “자, 이제부터 궁수 전직시험을 보겠다. 열 모둠으로 나누어졌으니 흩어져 보겠다. 첫 번째 모둠은 내가 맡겠고, 조교들!”
     “나머지 모둠을 잘 책임져주기 바란다! 이상!”
     “예!”
     어젠 대여섯 개밖에 보이지 않던 커다란 탁자가 10개로 늘었다. 제1모둠에 포함된 나는 교관을 따라 커다란 탁자로 향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우린 교관의 지시대로 탁자에 앉았다.
     “궁수 지망생 여러분, 여기 이 잡화물품에 주목하길 바란다.”
     탁자 가운데 놓인 잡화물품이 든 커다란 상자를 가리키며 교관이 말하자, 모두들 일제히 커다란 상자에 주목했다.
     “궁수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손재주, 그 다음이 민첩함이다. 먼저 여러분의 손재주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아보겠다. 여기 있는 잡화물품을 가지고 능력껏 생활물품을 만들어보길 바란다.”
     교관의 말에 내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늘 해오던 일이라 재밌고, 또 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소를 머금고 가장 먼저 커다란 상자를 뒤져 약간 휘어진 기다란 나뭇가지와 굵은 실 뭉치를 꺼냈다. 그런 다음 허리춤에 매단 단검을 뽑아 나뭇가지를 깎기 시작했다. 다른 궁수 지망생들 역시 잡화물품을 꺼냈다. 굵은 실 뭉치를 풀어 깎은 나뭇가지에 역어 내가 만든 것은 낚싯대였다.
     우리 모둠 모두가 열심히 물건을 만들고 있을 때, 교관이 번호표를 달아주면 말했다.
     “이건 여러분들의 성적에 필요한 번호표다. 전직 시험이 끝날때까지 떼선 안 되며 떼는 즉시 실격이다. 또한 여기 있는 모두가 궁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모둠에서 궁수 전직시험에 합격하는 인원은 총 세 명뿐이다.”
     하지만 나는 교관의 말을 무시한 채 바늘과 질긴 가죽과 색동실, 솜뭉치를 꺼내고는 질긴 가죽을 접어 바늘로 꿰매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솜뭉치를 넣고 봉합했다. 또한 그 위에 색동실로 다람쥐 그림의 십자수를 놓았다.
     “궁수가 활만 잘 쏘면 되지, 뭐 이딴 것을 해야 해? 교관, 재정신이야!”
     이때, 미간을 찌푸림 잡화물품을 만지작거리던 한 유저가 일어나 교관에게 소리쳤다. 그에 교관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자네는 궁수가 활만 잘 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럼 궁수가 사냥터에 가서 이딴 걸 만들고 있어?”
     “나는 활만 잘 쏘면 되는 것이냐고 묻고 있다.”
     “그럼 활만 잘 쏘면 되지, 이런 걸 해서 어따 쓰자는 거야!”
     유저의 말에 교관은 유저에 왼쪽 가슴에 달린 ‘3’이라고 적힌 번호표를 떼며 말했다.
     “아쉽지만 첫 번째 탈락자가 생겼군.”
     “뭐? 이 개자식!”
     유저가 자리에서 일어나 활을 집어 들었지만 교관의 활시위는 이미 유저를 향해 당겨져 있었다.
     “헉!”
     “쏘지는 않을 테니 자네 발로 나가길 바란다.”
     “씨발…….”
     유저는 활을 팽개치고 궁수의 탑을 떠났다. 하지만 우리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물건을 만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까.
     “자, 이제 자신들이 만든 물건을 올려놓게나.”
     탁자 위에 궁수 지망생들이 만든 물건들이 즐비했는데, 모양이 가지각색이었다. 나의 번호는 9번. 번호순으로 검사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대로 검사가 시작되었다.
     “음, 다들 비슷비슷하군. 오! 이 물건 참 독특하군. 뭔가?”
     “나무 그릇입니다.”
     “그렇군.”
     물건들을 쭉 살펴보던 교관이 내 자리에서 멈춰서며 물건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빨간 뜨개질한 목도리와 벙어리장갑, 십자수를 놓은 다람쥐 쿠션, 낚싯대, 다용도국자, 천 옷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살펴보던 교관이 입을 열었다.
     “생활직 스킬 수련치를 열심히 올렸나 보군. 자네는 S를 주지. 그리고 8번은 뺀 나머지는 모두 B. 8번은 A를 주겠다.”
     “앗! 감사합니다.”
     S라… 생각지 못한 큰 점수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검사를 끝난 후, 자신이 만든 물건은 자신들이 챙겼다. 나 역시 내가 만든 물건을 아이템 창에 쏟아 넣었다.
     드디어 다음 시험. 이번 시험은 면접과도 같은 시험으로, 기다란 벤치에 아홉 명이 앉았다. 교관은 벤치 앞을 서성거리며 문제를 내기 시작했다.
     “자네들, 궁수라는 직업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 본다. 그럼 활이란 궁수에게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궁수가 꼭 지녀야 할 무기입니다.”
     1번 번호표를 단 지망생이 말하자 교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궁수가 꼭 활만 쓴다는 법은 없지. 석궁을 쓰는 궁수도 있으니.”
     “궁수에게 활이란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정령술사가 정령과 함께하듯, 궁수도 자신의 무기이자 손인 활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활을 어떻게 다루는…….”
     “아, 됐네. 내가 바라던 답이야. 그래, 궁수에게 활이란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지. 그렇기 때문에 궁수라면 자신의 활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 하네.”
     자신 있게 말하는 도중 교관이 나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일단 교관이 바라던 답이라니 점수는 딴 것 같았다. 교관이 나를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활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아나?”
     “활에는 화살을 쏘아 보내기 위할 활시위가 있습니다. 이 활시위는 활의 다른 한쪽 끝에 고정되어 있으며 또 다른 한쪽 끝에 걸쳐 있습니다. 평상시엔 걸쳐 있는 활시위를 풀어 활시위가 늘어나지 않게 보관합니다. 활을 쓰지 않는 상태에서 활시위가 팽팽하게 고정되어 있으면 활시위가 늘어나 내구력은 물론 공격력도 감소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대답에 교관의 눈빛이 바뀌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아주 잘 알고 있군, 9번 지망생. 다른 지망생들 모두 방금 전 9번 지망생이 말한 것처럼 활은 평상시에 활시위를 풀어놓는다. 그럼 숏 보우와 롱 보우의 장단점도 알고 있는가?”
     “숏 보우는 사거리 내에 있는 적들을 빠르게 잡을 수 있는 반면, 사거리가 짧고 내구력이 빠르게 감소합니다. 롱 보우는 사거리가 길고 멀리 있는 적도 쉽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단점은 활시위를 고정시키는 데 힘들다는 점입니다.”
     8번 지망생이 교관의 물음에 답하자 교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 질문은 석궁과 활의 차이점에 관한 것이었는데, 반은 내가 맞혔고 나머지 반은 8번 지망생이 맞혔다. 자신 있게 대답한 우리는 두 번째 시험에서 나란히 A를 받을 수 있었다.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마지막 시험인 활쏘기. 모두들 자신의 활을 꺼내 활시위를 걸었고 화살을 하나씩 뽑아들었다. 커다란 과녁 앞에 서 있는 교관이 소리쳤다.
     “자, 보다시피 과녁엔 세 개의 원이 그려져 있다. 한가운데 있는 원을 맞추면 10점, 그 밖을 원을 맞추면 7점 그리고 그 밖의 원을 맞추거나 빗나가게 되면 0점이다. 총 다섯 개의 화살만 사용 가능하다! 총점 50점 만점에 최하점 0점!”
     과녁과 우리와의 거리가 상당히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교관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역시 번호 순서대로 화살을 쏘기 시작했는데, 1전 지망생의 첫 번째 화살은 아쉽게도 빗나갔고, 나머지 화살은 맞히나 마나인 제일 커다란 원을 맞혔다.
     “아, 0점…….”
     1번 지망생이 숏 보우를 들고 뒤로 물러나자 2번 지망생이 활을 쏘기 시작했는데, 7점에 두발의 화살이 맞았고, 나머지는 모두 0점에 맞거나 빛나갔다.
     그렇게 모두가 차례가 지나고 내 앞 번호인 8번 지망생의 차례가 되었다.
     “후…….”
     롱 보우를 든 8번 지망생이 한숨을 쉬더니 한 발의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10점 원에 꽂혔다.
     “우와!”
     8번 지망생의 활솜씨를 본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8번 지망생의 나머지 화살은 아깝게도 모두 10점 원을 약간 벗어난 7점의 원에 박혔다.
     ‘드디어 내 차례구나…….’
     나는 마름침을 꿀꺽 삼키며 화살 하나를 꺼내 활시위를 당겼다. 긴장한 나는 심호흡을 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저 멀리에 있는 과녁. 나는 활을 약간 높이 들어 과녁을 노린 채 활시위를 놓았다.
     놀랍게도 내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8번 지망생의 화살을 가르고 10점 원에 꽂혔다.
     “우와!”
     나를 뺀 나머지 여덟 명의 궁수 지망생들이 탄성을 질렀다.
     “엇?”
     정확하게 10점 원 안에 꽂힌 나의 화살.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화살 하나를 꺼냈다.
     쐐애액.
     또다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화살. 화살은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며 10점 원 테두리를 맞추었다.
     그에 기쁜 마음으로 내가 또다시 화살 하나를 꺼내려 할 때였다. 교관이 두 팔을 높게 들어 흔들며 “멈추게!”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입 꼬리가 귀에 걸린 채 우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라벤더 이후 이런 활솜씨는 처음이군.”
     “라벤더?”
     교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자, 합격자 발표를 하겠네. 8번과 7번, 4번 합격. 나머지는 아쉽게도 간발의 차이로 불합격이다. 아, 그리고…….”
     “에? 저, 저는?”
     교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소리치자, 교관이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나를 따라오게. 자, 나머지는 모두 궁수의 탑 1층으로 가서 시험 합격증을 보여주고 불합격된 지망생들은 다음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바란다.”

     궁수의 탑에서 시행한 궁수 전직 시험은 모두 끝이 났고, 나는 말없이 교관을 따라갔다.
     궁수의 탑 꼭대기 층으로 올라온 교관과 나. 나는 처음 와보는 궁수의 탑 꼭대기 층이 너무 신기하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똑똑, 철컥.
     금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문을 두드린 교관이 문을 활짝 여니 방 안에는 한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새하얀 백발을 가지런히 빗어 넘겼고 동그란 외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교관을 본 노인이 말했다.
     “무슨 일인가, 교관?”
     “또 한 명의 명궁이…….”
     “오, 그런가? 그럼 자네는 나가 있게.”
     “예.”
     문밖에 서 있는 나를 방 안으로 밀어 넣은 교관은 문을 닫았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가까이 오게.”
     “아, 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전직 시험 마지막 관문이 끝나기도 전에 교관은 나를 궁수의 탑 맨 꼭대기 층으로 데려왔고, 나는 정체 모를 한 모인과 만나게 되었다. 노인이 보던 책을 엎으며 내게 물어왔다.
     “음, 자네가 가지고 있는 활이 혹시 자네가 만든 활인가?”
     “네.”
     “그렇군. 많은 롱 보우를 봐왔지만 그렇게 붉은 가죽을 덧대어 만든 것은 처음 보는군.”
     물음에 내가 짧게 대답하자 노인이 이어서 말했다. 나는 이 노인은 누구이고 여기 왜 왔는지 궁금했다. 빙긋 웃던 노인이 다시 내개 물어왔다.
     “자네, 손재주 스탯이 얼마나 되는가?”
     “손재주… 말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상태 창을 열었다.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없음
     [계급] 평민
     [호칭] 없음
     Lv. 10
     생명력(HP). 100
     마나(MP). 100
     스태미나(SP). 150(배고픔 수치 0%/ 갈증 0%)
     힘 87
     체력 15
     민첩 15
     손재주 300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100~150
     방어력 2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50
     “응?”
     상태 창을 열어본 나는 조금 당황했다. 레벨에 비해 무척이나 높아진 손재주. 그리고 힘은 또 왜 이렇게 오른 거지? 상태 창을 본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그러나?”
     “아, 아닙니다. 손, 손재주가300이네요.”
     “사, 300이라… 첫 제자 로빈훗이 처음 왔을 때보다 더 높군그래.”
     “……?”
     나는 노인이 하는 말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첫 제자라니, 이 노인이 로빈훗의 tm승이라도 된다는 건가? 그럼 난 무엇 때문에 오게 된 거지?
     “로, 로빈훗이 첫 제자라뇨?”
     “아, 여긴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만 오게 되는 곳이라네. 자네가 바로 그들 중 일곱 번째 유저라는 것이고.”
     “무, 무슨 말이죠?”
     “자네가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로 확정되었다는 것이지.”
     나는 노인의 말에 머릿속에 텅 비는 듯했고 날아갈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궁탑의 제자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내가 들떠 있을 때 노인이 다시 말했다.
     “궁탑의 제자는 다른 궁수와는 조금 다르다네. 우선 궁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청각과 시력. 하지만 인간의 시력으로는 멀리 있는 대상을 잘 파악하지 못하지. 그래서 인간 궁수에게 존재하는 동술(瞳術), 헌터 아이(Hunter Eye's)라는 것이 존재하지. 헌터 아이를 개안(開眼)하게 되면 눈동자 색은 파란색으로 변한다네. 하지만…….”
     따뜻한 인상을 주던 노인이 에메랄드와 같은 초록색 눈동자가 루비를 박은 것 같이 붉게 변했다. 어떻게 보면 빨갛고 예쁜 눈동자지만,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마치 귀신의 눈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 눈동자가 붉게 변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궁탑의 제자는 헌터 아이와 다른 ‘적안(赤眼)’이라는 동술을 가지고 있다네. 그리고 보통 궁수들과는 달리 소환수를 데리고 다니지.”
     말을 마친 노인의 눈동자는 다시 초록색으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 소환수라면…….”
     “그렇지. 궁수와 아주 잘 맞는 동물. 새들의 왕자 ‘매’라네. 붉은 깃털은 마치 불에 타는 듯한 인상을 주지. 세릴리아 월드에 단 여섯 마리밖에 없다는 전설의 매라네.”
     “그렇군요.”
     노인은 몹시 흥분한 것 같았다. 어라? 잠깐. 난 지금 일곱 번째 제자가 되는 것. 하지만 전설의 매는 여섯 마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 매가 여섯 마리뿐이라고 했죠?”
     “그렇지.”
     “저는 일곱 번째 제자구요?”
     “물론.”
     “그러니 매를 못 받는 거군요.”
     “그럼, 그럼.”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노인. 하지만 이내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소리쳤다.
     “아뿔싸!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줄 매가 없군. 이거, 궁탑의 제자라면 꼭 가지고 있어야 할 소환수인데 말이야…….”
     “음… 매 말고 다른 소환수가 없는 건가요?”
     노인이 다시 잠잠해지자 내가 말했다. 노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됐군. 대신 이것을 주지.”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뒤에 있는 상자에서 온몸을 뒤덮은 새하얀 털 그리고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를 가지 새끼 강아지를 꺼냈다.
     “에? 이 똥개는 뭐죠?”
     “똥개라니, 말조심하게. 지금까지 어떤 제자에게도 주지 않았던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샤라네.”
     “루니오스 카이샤?”
     “받기 전에 계약은 해야지? 궁탑의 제자가 되겠는가?”
     노인의 말을 들은 나는 까만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는 강아지, 아니 늑대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되겠습니다.”
     “좋네, 그럼 자네를 나의 일곱 번째 제자로 임명하겠네.”
     번쩍!
     노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줄기 빛이 내 몸을 감싸고 돌다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왠지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 이제 나를 소개하지. 수도 세인트 모닝의 레인지 마스터(Ranged Master), ‘로시토’라고 하네. 나의제자가 된 걸 환영하네. 자, 루니오스 카이샤부터 받게나.”
     “예, 그럼.”
     나는 로시토가 건테주는 늑대를 받아 안았다.
     크르르…….
     “에? 왜 이래?”
     왕왕!
     어린 늑대가 성깔은 있는지 왕왕! 하고 짓더니 내 손에서 벗어나 로시토의 뒤에 숨었다.
     “허허… 이거, 먼저 친해지지 않으면 안 되겠구먼, 먼저 퀘스트 하나를 주겠네.”
     [퀘스트.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샤.  루니오스 카이샤와 친해져라!]
     루니오스 카이샤와 친해져라? 나는 갑자기 날아온 엉뚱한 퀘스트를 보고 갑자기 맥이 쭉 빠졌다. 로시토의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나를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 사나워 보이지는 않은 그런 눈빛이었다.
     “허허, 이 녀석은 자네에게 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야.”
     “그, 그런 것 같아요.”
     짧게 대답한 나는 쭈그리고 앉아 루니오스 카이샤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 멍멍아, 이리 온. 쯧쯧.”
     ……?
     “음… 이거 안 되겠군.”
     자신을 부르는 나를 외면한 채 고개를 홱 돌리는 아기 늑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시토에게 말했다.
     “저, 로시토. 이 녀석의 소환자는 이제 저인 거죠?”
     “그렇다네.”
     “좋아, 그럼 제대로 친하게 지내주지.”
     나는 로시토의 뒤에 숨어 있는 늑대를 단숨에 들어 올렸다. 그에 늑대는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생각보다 힘이 매우 억셌다. 뭐, 나도 고집이 있으니 놔주지 않을 거지만.
     캉캉!
     “자, 나랑 좀 놀까?”
     “살살 다루게, 허허.”
     나는 루니오스 카이샤를 품에 안고 로시토의 방에서 나와 궁수의 탑 1층으로 내려와서는 시험장을 지나 수도 세인트 모닝의 넓은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는 유저가 많았는데 특히 커플 유저가 많았다. 벤치에 앉아 닭살을 떠는 유저가 있는가 하면 껴안고 미동조차 없는 유저들도 있었다.
     “아… 부럽다…….”
     캉캉!
     “가만히 좀 있어, 인마.”
     나는 발버둥치는 루니오스 카이샤를 꽉 안으며 말했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커다란 나무 근처에 루니오스 카이샤를 내려놓자, 루니오스 카이샤는 저만치 달아나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흠…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야, 루니오스 카이샤! 이리 좀 와!”
     왕왕!
     하지만 내 말을 무시한 채 짖는 아기 늑대. 늑대라지만 아직 어려 한 마리의 새끼 강아지 같았다. 보면 볼수록 귀엽군. 흐흐. 나는 저만치 떨어져 뒷발로 목을 긁는 루니오스 카이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보”
     파밧!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샤>
     정보: 세릴리아 월드이 단 한 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설의 흰 늑대.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한 전설의 흰 늑대이다.
     현재 상태: 새끼
     Lv. 1
     HP: 알 수 없음.
     MP: 알 수 없음
     상태: 매우 건강
     친밀도: 40
     배고픔: 30% 목마름: 50%
     “오호, 한 종밖에 없다? 늑대는 여럿 있을 텐데 이런 희귀한 늑대가 없다 이건가? 아, 그럼 난 밥이나 먹으러 가야지.”
     나는 루니오스 카이샤를 보며 빙긋 웃었다. ‘늑대도 개와 비슷하니 먹을 것을 주면 친해지겠지?’라는 생각을 하니 저 녀석과 친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나는 멀리서 가만히 앉아 나를 보고 있는 늑대를 뒤로한 채 광장으로 향했다.
     ‘따라오고 있으려나?’
     뒤를 돌아보자 저만치 떨어져 쫄래쫄래 따라오는 한 마리의 강아지가 보였다. 그러다 내가 멈춰 서자 쫓아오던 아기 늑대는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뭐, 자기 딴엔 안 따라오던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겠지.
     나는 모른 척하며 광장을 빠져나와 세인트 모닝의 유명한 식당으로 들어가 한쪽 구석의 테이블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잠시후, 식당 입구에서 고개만 내민 채 내가 어디에 앉았는지 찾아보던 루니오스 카이샤가 곧 나를 발견하고는 테이블 아래로 다가와 배를 깔고 엎드렸다.
     “에? 너 뭐냐?”
     끄응…….
     “왜 이래?”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무언가를 요구하는 눈빛. 이런 아기 늑대가 너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으나 내 손이 다가가기도 전에 아기 늑대는 뒷걸음질 쳤다. 아직 친밀도가 낮아서 내 손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종업원 NPC가 메뉴판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 나는 메뉴판을 받아 맛있게 보이는 음식을 찾기 시작했다.
     “음 쭈욱 내려가서… 오, 튀김이나 먹을까? 아냐, 이건 좀 그래. 음… 아, 여기 돈가스 정식 이걸로 시킬께요. 사이다랑 우유도 가져다주세요. 작은 접시 하나도요.”
     “네.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나는 NPC에게 메뉴판을 도로 주고 테이블 아래 배를 깔고 앉아 하품을 하는 루니오스 카이샤를 보며 말했다.
     “멍멍아, 너 뭐 얻어먹려고 따라온 거야?”
     캉!
     “음냐, 누가 준다니?”
     캉캉!
     “어이쿠! 그래? 누가? 내가?”
     캉!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까만 눈망울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아기 늑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식사 왔습니다.”
     음식은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돈가스와 샐러드, 스파게티 그리고 구운 감자와 사이다와  우유.
     내가 작은 접시에 우유를 따라 테이블 및에 두자 아기 늑대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접시에 담긴 우유를 홀짝홀짝 핥아먹기 시작했다. 자, 그럼 나도 먹어볼까?
     큰 돈가스가 먹기 좋게 썰어져 나왔기에 나는 포크로 돈가스 한 조각을 집어 한입에 넣었다. 입 안에서 살살 녹는 고기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내가 돈가스 한 조각을 포크로 집어 테이블 아래에 두자 아기 늑대는 바닥에 떨어진 돈가스를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호? 이 녀석 봐라? 잘도 먹네.”
     캉!
     “오, 더 달라고?”
     캉캉!
     나는 다시 돈가스 한 조각을 집어 테이블 아래에 두었다.
     “이 녀석, 생각보다 잘 먹는데?”
     나는 돈가스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 아래에 두었다. 뭐, 스파게티도 있으니 돈가스 정도는 줘도 상관없겠지.
     [퀘스트 완료!]
     [루니오스 카이샤가 나를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
     ‘퀘스트 완료’라는 메시지와 함께 또 다른 메시지가 나왔다. 퀘스는 완료하면 이제 이 녀석과 친해진 거군.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갑자기 아기 늑대가 뛰어올라 내 품에 안겼다.
     “에?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래? 정보!”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샤>
     정보: 세릴리아 월드이 단 한 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설의 흰 늑대.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한 전설의 흰 늑대이다.
     현재 상태: 새끼
     Lv. 1
     HP: 알 수 없음.
     MP: 알 수 없음
     상태: 매우 건강
     친밀도: 100
     배고픔: 0% 목마름: 0%
     루니오스 카이샤의 정보를 본 나는 이 아기 늑대가 왜 이러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퀘스트 완료로 인해 친밀도가 100으로 치솟았고 나를 무지 좋아한다는 메시지가 떴기 때문이겠지.나는 내 품에 안긴 아기 늑대를 잠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모자를 벗어 아이템 창에 넣어두었다. 그러자 아기 늑대는 또다시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멍멍아, 배부르냐?”
     캉캉!
     “근데 미리 말하고 안기면 안 되겠니?”
     캉!
     알겠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무조건 짖는 아기 늑대. 나는 이런 아기 늑대를 품에 안고 음식 값을 계산하고 식당에서 나왔다.
     “오, 벌써 친해졌는가?”
     “예.”
     캉!
     나와 동시에 대답한 아기 늑대. 로시토는 그런 우리를 보며 껄껄 웃었다.
     “이름은? 별명은 지어주었는가?”
     웃고 있던 로시토가 말했고 나는 내 품에 안겨 꼬리를 흔드는 아기 늑대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음 별명… 뭐, 계속 멍멍이라고 부르기도 뭣하니까 지어주어야 할 것 같기도 해요.”
     “그런가?”
     로시토의 말에 대답하자 그가 되물었다. 나는 품에 안기 아기 늑대를 두 팔로 번쩍 들어 올렸다.
     “루니오스 카이샤니까, 짧게 줄여서 ‘루카’라고 해야겠군.”
     캉!
     “맘에 드니?”
     캉캉!
     내 품에서 꼬리를 흔들며 짖어대는 아기 늑대, 아니 루카. 나는 들어 올린 루카를 다시 품에 안았다. 루카는 내 품에 안겨 작은 주둥이를 쫙 벌리고 하품을 했다.
     “퀘스트를 무사히 마쳤으니 이제 다른 것을 알려주겠네.”
     “뭔데요?”
     “자네, 정령을 좋아하는가?”
     “정령이요?”
     “궁수도 정령을 쓰나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한번 물어봤네. 정령에 관심이 있다면 정령술사 친구 한 명 정도는 소개시켜줄 수 있네.”
     로시토가 자리로 돌아가 책을 펴고 앉으며 말했다.
     “저 말고도 다른 궁탑의 제자들도 정령을 쓰나요?”
     “자네 사형들 말인가? 뭐, 다들 정령은 필요 없다고 하더군. 정령술사가 아닌지라 하급정령 그 이상은 계약할 수 없으니까.”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소환수가 있으니 정령은 필요 없을 테지. 그래도 나는 정령이란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하급정령과 계약을 하고 싶었다.
     “저, 그럼 정령술사 친구를 소개시켜줄 수 있나요?”
     나의 말에, 앉아서 책을 열중하던 로시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로시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솜털로 만든 붉은 손목 보호대를 내 왼쪽 손목에 끼워주며 입을 열었다.
     “이 손목 보호대는 내가 쓰던 것이라네. 잘 보면 흰 실로 늑대 한 마리가 수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네. 그것은 루니오스 카이샤를 뜻하지.”
     말을 마친 로시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않았다. 나는 로시토가 끼워준 손목 보호대를 빤히 쳐다보았다. 붉은색을 좋아하는 내 입가에 이내 미소가 번졌다.
     “맘에 드는가?”
     “네. 그런데 왜 이것을 저에게 주신 거죠?”
     “그 손목 보호대를 보여주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테지. 계약을 할 생각이 있다면 정령술사의 캠프로 가게.”
     나는 궁수의 탑에서 빠져나와 세인트 모닝 광장으로 나왔다. 뭐, 꼭 지금 정령과 계약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테이머인가?”
     “정말 그러네? 세릴리아 월드에서 강아지를 안고 다니는 건 처음 봐.”
     “귀엽다.”
     내 품에 안기 루카 덕분에 나는 많은 여성 유저들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뭐, 이런 시선을 받는 게 싫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스탯 포인트을 분배 안 했네.”
     캉!
     “넌 뭘 안다고 짖어.”
     캉캉!
     “뭐, 짖는 건 자유지만. 상태 창 오픈!”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궁수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10
     생명력(HP). 320
     마나(MP). 135
     스태미나(SP). 400(배고픔 수치 0%/ 갈증 0%)
     힘 87
     체력 15
     민첩 35
     손재주 330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130~180
     방어력 4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50
     “어라? 민첩이랑 손재주 스탯이 올랐네.”
     상태 창을 살펴본 나는 민첩이 20, 손재주가 30 증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생활직 덕분에 300을 넘어선 손재주에 비해 민첩이 상당히 낮았기에 남은 스탯 포인트를 전부 민첩에 찍었다.
     “전직을 해서 기본 스탯이 증가한 건가?”
     말 한마디를 짧게 내뱉은 나는 활을 꺼내 들고 마을 밖으로 향했다.
     “전부 토끼나 노루뿐이네. 조금 더 강항 녀석들은 없나?”
     캉캉!
     “응? 루카, 왜 그래?”
     크르릉…….
     갑자기 으르렁대는 루카.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루카를 땅에다 내려놓았다. 루카가 응시하는 곳은 큰 나무 두 그루 사이. 자세히 살펴보자 여우 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 저 녀석들을 보고 짖은 거구나!”
     캉캉! 크르르…….
     나는 풀어진 활시위를 활 한쪽 끝에 걸고는 화살 하나를 꺼내 활시위를 당겼다. 목표는 당연히 여우! 여우를 조준한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쐐애액.
     푹!
     명중이었다. 여우의 머리를 꿰뚫은 화살이 여우와 함께 저만치 나가떨어지자 계속 짖던 루카가 여우 떼에게 달려들었다.
     왕왕!
     자신보다 더 큰 여우의 목덜미를 작은 주둥이로 물고 늘어지는 루카. 저러다 당하는 건 아닌가 싶었으나 목덜미를 물린 여우는 꼼짝 못했다. 루카가 목 줄기를 물어뜯자 여우는 반격도 못 해보고 죽어버렸다.
     “오~ 꽤 하는데? 나도 질 수 없지!”
     나는 또다시 화살 하나를 꺼내 여우에게 쏘았고 쏠 때마다 여우는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앗사! 레벨업!”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얼레? 루카도 레벨이 올랐군!”
     루카의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계속해서 여우 사냥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랫동안 사냥을 하다 보니 금세 배고품과 갈증이 느껴졌다.
     “휴, 여우 중 제일 강한 녀석이 이 붉은 여우인가? 이제 이
     녀석들도 별거 아니네.”
     여우도 다 똑같은 여우가 아니었다. 처음에 잡은 녀석들은 갈색 여우. 비선공 몹이라 그런지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덤비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 다음으로 강한 녀석은 회색 여우. 이 녀석들은 적을 인식하지만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절대 갈색 여우처럼 달려들진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붉은 여우. 이 녀석들은 적이 보이면 바로 달려드는 선공 몹으로 처음 상대할 땐 꽤나 애를 먹었지만, 루카의 도움으로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자, 이제 마을로 돌아가자!”
     캉캉!
     또다시 내 품으로 뛰어드는 루카. 덕분에 뒤로 넘어질 뻔했다. 마을로 돌아오자, 날 이 저물어 둥근 보름달 두 개가 검푸른 창공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나는 루카와 함께 음식점으로 향했다.
     “배부르지, 루카?”
     캉!
     레벨업도 했겠다. 루카의 레벨도 올랐겠다. 기분이 좋아 푸짐하게 식사를 마친 나는 슬슬 로그아웃 준비를 했다. 루카와 함께 음식점을 나와 근처의 일반 여관으로 가 방을 잡고 루카를 소환해제시킨 뒤 나의 보물 제 1호 레드 롱 보우를 아이템 창에 넣어두고 로그아웃했다.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위잉.
     캡슐의 문이 열렸고 나는 헤드셋을 벗었다.
     “후, 내일이 새 학기 시작인가.”
     내일은 3월 17일. 이제 고3이 되는 날이다. 하지만 어차피 학교에 가봤자 수업도 3교시만 할 테니 방학 때처럼 게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과는 달리 학벌 위주 사회도 아니었기에 고3이라 해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초조해할 필요가 없었다. 뭐 꼭 대학교를 가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세면실로 들어가 깨끗하게 씻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오전 8시. 오늘의 알람은 사계 중 봄입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컴이 틀어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자리에 일어났다.
    「편하게 주무셨나요?」
     “응. 아, 오늘은 왠지 상쾌한데? 컴, 오늘 알람 듣기 좋았어.”
    「감사합니다. 오늘도 청결모드지요?」
     “응.”
     욕실로 들어가 깨끗하게 씻고 나온 나는 빵과 우유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최첨단 시스템으로 새롭게 바뀐 PDA를 들고 서둘러 학교로 향했다.
     시끌시끌.
     웅성웅성.
     오전 9시 30분, 학교.
     전교생이 모두 모여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이런 시끄러운 자리에서 교장 선생님은 열심히 말씀하고 계셨다.
     이윽고 나는 새롭게 배정받은 3학년 3반 교실로 향했다.
     드르륵, 탁!
     ‘에? 다 모르는 애들뿐이잖아.’
     가족들이 떠난 후 이사를 하고 올해 이 학교로 전학을 온 나. 그렇기에 학교에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맨 뒷자리로 가서 조용히 앉았다.
     “못 보던 애네. 전학 왔냐?”
     나에게 다가오는 한 남학생.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키도 컸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원래 말이 없나 보구나.”
     “응…….”
     “난 한강찬이야. 앞으로 친하게 지내보자.”
     자신을 ‘강찬’아라고 소개한 학생이 내 앞자리에 앉아 손을 내밀며 말했다. PDA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난 강현성이야.”
     “아, 근데 너 혹시 세릴리아 월드라는 게임 알아?”
     “알지, 이미 하고 있는 걸.”
     갑작스레 세릴리아 월드를 하냐고 물어오는 강찬.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강찬이 되물었다.
     “레벨은 몇이야?”
     “낮아, 11.”
     “11? 그렇구나. 나는 두 달 전부터 같은 반 친구들이랑 같이 해서 레벨이 30이고 직업은 히든 클래스 마검사야.”
     “히든 클래스?”
     “응, 숨겨진 직업을 말하는 거야. 우연히 얻게 된 직업이지.”
     “그렇구나.”
     “너는 직업이 뭐야?”
     “궁수.”
     그 말에 강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나는 게임 시작한 지 이제 3개월을 넘어섰는데 강찬은 2개월 만에 레벨 30이란다.
     그에 문득 생활직에서 너무 오래 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래도 궁탑에 제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으니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야, 강찬! 이따 넷룸 고고싱 어때?”
     “고고싱!”
     교실 창문을 열고 갑작스레 나타난 두 명의 남학생이 강찬에게 소리쳤다.
     “넷룸?”
     “아, 우린 가상현실기기가 없잖아.”
     “아, 그래? 어쩔 수 없군. 그럼 가야지 뭐.”
     “얼레? 그런데 재는 누구야? 전학생이야?”
     “응, 강현성이라고 해.”
     내가 누군지 물어오는 한 학생에게 나는 짧게 대답했다.
     “너도 세릴리아 월드 하냐?”
     갈색 머리를 삐죽삐죽 세운 학생이 말을 걸었고 나느 고래를 끄덕였다.
     “그래? 레벨은 몇인데?”
     “11, 궁수야.”
     “음, 아직 낮군. 아, 내 소개를 안 했네, 내 이름은 민혁.”
     “이름 외자야?”
     “응, 성이 민, 이름이 혁,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이 녀석은 최경훈.”
     혁이 가리키며 말하자 경훈이란 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머리색이 가지각색이군. 강찬은 검붉은 머리가 긴 편이었고 혁은 갈색 머리를 삐죽삐죽 세운 상태였으며, 경훈의 머리는 검푸른 색에 거의 단발 수준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평범한 검
    은 색의 약간 긴 머리.
     “아, 오늘 조회 튀자. 어차피 이거 선생도 안 오는데.”
     “쯧쯧, 혁이 이놈은 매일 튀잔 말밖에 안 한다니까.”
     잔득 들떠 떠들어대는 혁을 보며 경훈이 혀를 찼고, 이윽고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강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아… 그럼 오늘도 튈까?”
     “좋은 생각이야!”
     “좋긴 뭐가 좋아, 멍청아.”
     기지개를 켜며 말하는 강찬과 더욱 들뜬 혁. 그런 혁을 향해 욕(?)하는 경훈. 정말 친해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너도 안 갈래?”
     “아, 난 집에 게임기기가 있어서…….”
     “오, 너는 집에 게임기기가 있구나! 뭐, 그래도 같이 가자. 전학 와서 친구도 없을 텐데 우리랑 노는 게 어때?”
     “음… 그럴까?”
     나는 PDA를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 좋아! 가는 거야!”
     “아 이 미친놈아!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면 어쩌자는 거야!”
     경훈의 바로 옆에서 소리치는 혁. 너무 활발한 것 같군. 그런 혁을 보며 경훈이 소리쳤다.
     “풉.”
     “응? 아, 재들 보고 웃는 거구나. 원래 저래.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자, 그럼 넷룸으로 가는 거야!”
     그렇게 나는 강찬, 혁, 경훈과 함께 처음으로 넷룸으로 향했다.
     “현성아, 너 캐릭터 이름은 뭐야?”
     “나? 레드 파운.”
     경훈이 나에게 친절하게 물어왔고 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근처 넷룸을 찾은 혁이 소리쳤다.
     “넷룸이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11 접속 하시겠습니다?(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아, 어제 여관에서 로그아웃했었지!”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레드 롱 보우가 있는지 확인하고 아이템 창을 다았다.
     캉!
     “오! 루카구나!”
     캉캉!
     반갑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루카. 그런데 한 갖 의문점이 생겼다.분명히 로그아웃 전에 소환해제 시켰고 루카를 소환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루카가 나온 걸까?
     “너 어떻게 나왔어?”
     캉캉!
     마냥 좋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폴짝 뛰어올라 내 품에 안기는 루카. 루카는 내 품에 안기 채 계속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늑대의 위엄이란 전혀 없는 하룻강아지처럼.
     “뭐, 그런 건 상관없으니까. 자, 그럼 밖으로 나가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니 여관을 나왔다.
     “레벨이 30이라고 했으니까… 지금쯤 곰 같은 걸 잡고 있겠지?”
     캉캉!
     나는 아이템 창에서 레드 롱 보우를 꺼내 들고 수도 세인트 모닝을 빠져나왔다. 어제 잡던 붉은 여우도 이제 별거 아니었기에 나는 조금 더 강한 몹을 찾아 조금 더 넓고 깊은 숨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크르르…….
     “응?”
     무언가 인식하고 으르렁거리는 루카. 몹이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나는 활시위를 활 끝에 걸고 화살 하나를 꺼냈다.
     그 순간 근처의 수풀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갑자기 커다란 회색 늑대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앗!”
     나는 급히 화살을 쏘았고 내 뒤를 따라오던 루카가 회색 늑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리에 화살을 맞은 회색 늑대가 그대로 균형을 잃고 넘어지자 루카는 기다렸다는 듯 목덜미를 물었다. 하지만 회색 늑대는 루카를 가볍게 밀쳐내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긴장 풀고. 늘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런데 화살을 꺼내기도 전에 회색 늑대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급한 나머지 활로 달려드는 늑대의 머리를 강타했다.
     퍼억!
     회색 늑대가 활에 맞아 저만치 뒤로 물러났을 때,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 재빨리 활시위를 당기며 늑대를 조준해 활시위를 놓았다. 그에 화살은 대기를 가르며 늑대의 이마 꽂혔다.
     푹!
     깨갱!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루카의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와 함께 루카의 몸에 새하얀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얼레? 루카! 이리 와!”
     캉캉!
     “정보!”
     파밧!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샤>
     정보: 세릴리아 월드이 단 한 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설의 흰 늑대.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한 전설의 흰 늑대이다.
     현재 상태: 새끼
     Lv. 10
     HP: 알 수 없음.
     MP: 알 수 없음
     상태: 매우 건강
     친밀도: 100
     배고픔: 0% 목마름: 0%
     “이야… 폭업을 했구먼. 단숨에 레벨 10이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캉캉!
     나는 루카의 정보 창을 닫고 다시 주변을 경계했다. 루카의 반응이 없는 걸로 봐서 아직 어느 누구도 다가오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바로 달려드는 늑대를 활로 쳐냈다는 것. 궁수가 화살만 쏘는 것이 아니라 활로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크르르…….
     “음? 잠시 쉴 틈도 주지 않고 또 뭔가 나타났나 보네. 안 그러니?”
     왕왕!
     큰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회색 늑대를 본 나는 다시 화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가오는 회색 늑대. 아직 활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씩 웃으며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또다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에 늑대는 빠른 반사 신경으로 피하는 것 같았으나 오른쪽 뒷다리에 맞고 쓰러졌다.
     왕왕!
     루카가 사납게 짖으며 달려가 회색 늑대의 앞발을 물어 움직임을 봉쇄했고, 나는 재빨리 화살 하나를 꺼내 쏘았다. 화살은 늑대의 이마를 꿰뚫었다.
     깨갱!
     “좋아!”
     캉캉!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에? 레벨업이군! 음. 궁수가 스탯을 어떻게 찍더라… 손재주에 3, 민첩에 2. 이렇게 찍어줘야겠군.”
     나는 스탯 포인트를 분배하고 다시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갈수록 숲은 더욱 깊어졌고, 꽤나 깊이 들어온 것 같았으나 늑대 새끼 한 마리 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끄응…….
     “왜 그래, 루카?”
     끄으응…….
     꼬리를 흔들며 내 뒤를 쫄래쫄래 쫒아오던 루카가 갑자기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활을  어깨에 걸고 뒤따라오던 루카를 두 팔로 안았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루카. 눈망울이 한없이 맑았다. 그런데 왜 끙끙거린 거지?
     “루카야, 왜 끙끙대고 그래?”
     캉!
     “뭐야? 놀라달라는 거야?”
     캉캉!
     루카라 심심했는지 꼬리를 더욱 세차게 흔들며 짖었다. 나는 근처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루카를 땅에 내려놓았다. 내 다리에 머릴 갖다 대고 한차례 비비더니 뒤로 벌렁 누워 꼬리를 흔드는 루카. 나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깊은 숲에서 길을 잃어서 그런지 계속 불안했다.
     “아 따분해. 뭐 할 거 없나? 아, 그러고 보니 스킬 창을 한 번도 안 열어봤군. 스킬 창 오픈!”
     파밧!
     <Skill>
     레인지 마스터리(Ranged Mastery)
         (1.34/300.00%)
     보우 어택(Bow Attack)
         (0.09/100.00%)
     적안(赤眼)
         (0/100.00%)
     백 스텝(Back Step)
         (0/100.00%)
     크리티컬(Critical)
         (0/100.00%)
     퀵 스텝(Quick Step)
         (0/200.00%)
     “이야… 이런 스킬이었구나. 보우 어택.”
     나는 스킬 창을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스킬 창에 있는 스킬을 한 번씩 써보기로 했다. 물론 루카에게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말을 해두고 말이다.
     “자, 그럼 먼저 보우 어택!”
     빠악!
     커다란 나무를 활로 강하게 후려치자, 나뭇잎 몇 개가 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내려왔다. 나는 활을 고쳐 잡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좋아, 이번에 적안!”
     번쩍
     나는 일정량의 마나가 감소되면서 시야가 확보되어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었다. 뭐, 내 눈동자도 로시토가 적안을 썼을 때처럼 붉어졌겠지?
     캉캉!
     루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앉아서 꼬리를 흔들며 짖었다. 가끔 바보 같았다. 나는 적안을 해제하고 활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외쳤다.
     “백 스텝!”
     샤샥.
     백 스텝을 외치며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나자,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뒤로 빠져나왔다. 아직 수련치가 낮아서 그런지 그리 멀리 빠지진 못했다.
     “오, 이걸 응용하며 어떻게 되는 거지? 한번 해볼까?‘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 활등에 댔다. 그리고 백 스텝을 외치며 뒤로 빠지는 동시에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 커다란 나무에 꽂혔다.
     “오! 이렇게 응용하면 되겠다. 나중에 실전에서 써먹으면 되겠네. 이제 다음 스킬은… 퀵 스텝? 이게 뭐지 퀵 스텝!”
     퀵 스텝을 외치는 순간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큰 나무를 향해 내달려 왼발로 나무를 딛고 덤블링을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빠른 몸놀림이었다.
     “오! 지속시간이 약간 짧네.”
     캉캉!
     캉!
     “오~ 미안, 루카. 잠시 스킬 쓰는 재미에 빠져서. 자, 이제 길을 찾아볼까? 이리 와!”
     캉!
     퀵 스텝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 루카가 직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같이 놀아주길 기다렸나 보다. 내가 루카를 부르자, 루카는 당연하다는 듯 내 품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이게 정말 늑대인가? 이제 슬슬 길을 찾아가려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그림자가 내 몸을 가렸다.
     ‘서, 설마…….’
     크르릉…….
     갑자기 으르렁거리는 루카. 나는 고개를 돌리는 순간 기겁하고 말았다. 나보다 훨씬 큰 붉은 곰 한 마리가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쿠어엉!
     “으, 으악! 백 스텝!”
     갑자기 커다란 앞발을 휘두르는 붉은 곰. 하지만 나는 백 스텝으로 붉은 곰의 공격을 피했다. 루카를 바닥에 내려놓은 나는 활을 고쳐 잡고 화살 하나를 꺼냈다.
     “루카, 지금은 나가지 마. 이 녀석은 뭔가 다르다.”
     왕왕!
     “간다! 퀵 스텝.”
     나는 빠르게 내달려 붉은 곰의 등 뒤로 빠져나와 화살을 쏘았다.
     쇄액.
     푸욱!
     쿠어엉!
     “명중!”
     갑작스레 등에 화살을 맞은 곰이 흥분해 부르짖었다.
     ‘궁수는 근접전에 무지 취약하다. 최대한 뒤로 물러나야 해! 지금 공격은 아주 간지러운 정도일 거야! 아닌가?’
     곰의 표정을 보니 간지러운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레벨에 비해 월등히 높은 나의 손재주 스탯, 레벨 12에 손재주가 336인 유저는 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재빨리 백 스텝을 사용해 뒤로 빠지며 화살 세 발을 쏘았다.
     푹! 푹! 푹!
     쿠어어엉!
     화살 세발을 맞은 곰이 휘청거렸다. 다시 화살 하나를 꺼낸 나는 재빨리 곰의 이마에 쏘았다. 이마에 화살에 맞은 곰은 그 대로 뒤로 벌렁 넘어져 꿈틀거렸다.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캉캉!
     “응? 주, 죽은 건가?”
     캉캉!
     잔뜩 긴장한 채 곰에게 다가갔지만 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죽는 게로군. 나는 허리에 차고 있는 단검을 뽑아 곰을 분해해 쓸 만한 고기를 가져갈까 생각했지만, 누가 곰 고기를 먹겠는가.
     도로 단감을 칼집에 꽂아 넣고 일어섰을 때, 나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마리의 붉은 곰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에? 이거 어느새 나타난 거야!”
     끄응… 쿠어엉!
     “백 스텝!”
     나는 재빨리 백 스텝을 사용해 뒤로 빨지려 했지만, 붉은 곰 한 마리가 재빨리 움직여 내 움직임을 봉쇄했고, 결국 나는 세 마리의 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    *     *
     “강찬아! 일단 생명력 포션부터 받아! 자!”
     “고마워. 그런데 경훈아, 현성이는 어디 있는 거야?”
     “글세, 대화 요청을 할 수 없더라고.”
     강찬과 혁, 경훈은 숲 속에서 숨이 턱 밑에 차도록 달렸다. 붉은 곰 세 마리를 상대하던 도중 세 마리의 붉은 곰이 달아난 것이다. 마검사인 강찬은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은빛 갑옷을 입고 있었고 전투 클레릭인 혁은 한 손에 메이스, 다른 한 손엔 라운드 실드를 들고 있었다. 무투가인 경훈은 두 손에 각각 한 개의 너틀 건틀렛을 착용하고 있었다.
     “여기 발자국만 따라가면 될 것 같아! 어! 저기 보인다!”
     제일 먼저 달려가는 경훈. 그 뒤로 강찬과 혁이 열심히 달렸다. 세 마리의 붉은 곰이 무언가를 포위하고 있었다. 경훈은 빠르게 내달려 붉은 곰 한 마리에게 다가가 외쳤다.
     “미들 킥!”
     퍼억!
     경훈의 정강이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붉은 곰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    *     *
     “아…….”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한 유저의 발차기 한 방에 붉은 곰의 육중한 몸이 멀리 나가떨어졌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활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여기도 끝났다. 생명력도 얼마 남지 않은 녀석들이 왜 도망을 친데?”
     메이스를 어깨에 들쳐 멘 유저가 말했다. 갈색 머리를 삐죽삐죽 세운 유저. 어디서 한 번 본 얼굴이기도 한데…….
     “현성이?”
     손에 바스타드 소드를 그리고 은빛 갑옷을 무장한 유저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이 녀석도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강찬?”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자, 은빛 갑옷을 입고 있는 유저가 다가오며 말했다.
     “현성이 맞네!”
     “뭐야? 현성이었어?”
     갈색 머리를 삐죽삐죽 세운 혁이 메이스를 어깨에 들쳐 메고 건들건들 다가오며 말했다. 혁은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응? 뭐 하는 거야?”
     “상차가 있는지 없는지 살핀다. 없구만!”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던 혁이 내 등짝을 한 대 갈기며 말했다. 뭐, 덕분에 난 헛기침을 해야 했지만.
     “얼레? 뭐야, 이 똥개는? 개도 키워?”
     “개라니, 늑대야, 늑대.”
     “늑대?”
     내 등짝을 후려친 혁이 내 발 옆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는 루카를 발견하고 물어왔고 나는 짧게 대답했다. 이상한 표정을 짓는 혁. 나는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의 유저가 친구들인 것을 확인하고 활시위를 풀었다.
     “곰 세 마리에 포위당한 게 현성이었다니, 이거 곰들을 뒤 쫒지 않았으면 현성이 곰 밥 될 뻔했네. 아! 현성아, 기왕 넷룸 같이 온 거 우리라 같이 사냥하자. 너 레벨 몇이야?”
     메이스를 어깨에 들쳐 메고 건들거리며 혁이 말했다. 현재 나의 레벨은 13. 현재 레벨 30대 이상의 유저들과 다니긴 조금 힘든 레벨이지만 뭐 손재주가 뒷받침을 해주니 당당하게 말해도 될 것 같았다.
     “13”
     “13? 이거 심각한데? 집에 게임기기 있으면서 뭐 한거야? 여태.”
     “하하. 뭐 그냥 이리저리 돌아디면서 구경 좀 했지?”
     혁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손재주 스탯이 내 레벨에 비하면 높단 말이다, 이 녀석들아! “뭐, 그래도 궁수니까 멀리서 견제하면 되겠네. 몹을 유인하면 된다 이거지, 안 그래, 강찬?”
     “그렇지.”
     형제를 잃어가는 곰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경훈이 말하자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일단 메신저 목록에 추가를 해야지.”
     혁이 다가오며 말했다.
     [루샤크 님께서 친구등록 요청을 하셨습니다(승인/거절).]
     “승인.”
     [카이루 님께서 친구등록 요청을 하셨습니다(승인/거절).]
     “승인.”
     [데시카 님께서 친구등록 요청을 하셨습니다(승인/거절).]
     “승인.”
     이렇게 강찬(카이루), 경훈(데시카), 혁(루샤크). 이 세 명의 친구등록 요청을 승인하고 우린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깊은 숨의 어두운 골짜기. 습기가 가득했고 공기가 탁했다. 얕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커다란 바위가 듬성듬성 놓인 작은 시냇가. 낮게 깔린 안개를 헤치며 나와 강찬, 혁, 경훈 이렇게 네 명의 파티원이 잔뜩 긴장한 채 일렬로 천천히 걸었다. 질퍽질퍽한 진흙 밟는 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정적이 흘렀다.
     “네들 이거 알아?”
     정적을 깨며 혁이 입을 열었다.
     “몬스터들 말이지, 고블린 같은 약한 몬스터라도 무시하면 안돼.”
     “왜?”
     혁이 다시 말했다.
     “허접한 인공지능을 가진 동물과는 다르게 몬스터들은 인공지능이 뛰어나. 아직까지 상대해보지 않았지만 뭐, 아무튼 그렇다더라.”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었냐?”
     “홈페이지에서 본 거야, 새까야.”
     경훈이 태클을 걸자 혁이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진흙길을 벗어나 수풀이 깔린 습한 숲에 오게 되었다.
     크르르…….
     “잠깐, 멈춰봐.”
     루카가 주변을 경계했고 선두로 걷던 내가 앞을 막아섰다. 꽤 어두워 잘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풀이 미세하게 흔들린다는 것은 장담할 수 있었다.
     “온다.”
     “뭐? 뭐래, 아까부터?”
     “쉿! 조용히 해.”
     “엉? 아, 그래.”
     나불대던 혁이 입을 다물고 메이스를 꽉 쥔 채 자세를 낮추었다. 강찬은 허리춤에 찬 바스타드 소드에 손을 가져다 놓았고 경훈은 주먹을 불끈 쥔 채 긴장을 풀고 있었다.
     바스락!
     갑자기 수풀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고블린 두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키아악!
     왕왕!
     “온다! 적안!”
     나는 적안을 개안(開眼)한 채 풀어진 활시위를 활 끝에 걸고 화살 하나를 꺼냈다. 경훈이 땅을 박차고 나아가 한 마리의 고블린의 안면에 강철 같은 주먹을 꽂았다.
     “탬핑(Tamping Attack) 어택!”
     퍼억!
     경훈의 주먹에 맞은 고블린은 콧대가 뭉개지며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또한 우리 쪽으로 달려드는 다른 한 마리 고블린의 팔을 잡아챈 다음, 전광석화처럼 재빨르게 자기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겨 팔꿈치로 안면을 강타했다.
     “우와!”
     나는 탄성을 질렀다. ‘무투가’라는 직업에 새삼 놀랐고 그것이 저런 몸놀림과 강한 파괴력을 가진 직업이라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쳇! 우와는 무슨, 무투가가 초반에 좋은 것뿐이야.”
     혁이 투덜대며 말했다.
     투덜대는 혁을 뒤로한 채 우리 일행은 다시 수풀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 아까 본 건데 말이야… 현성이 네 눈동자 색이 붉게 변한 것 같았는데…….”
     “아, 적안이라는 스킬이야. 적안은 헌터 계열의 스킬이고 뭐, 멀리 있는 사물을 보거나 어두운 곳에서 쓰면 조금이나마 밝게 보이는 거지.”
     “그렇구나.”
     눈동자에 대해 묻던 경훈이 나의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캉캉!
     “응? 왜 그래, 루카?”
     끄응…….
     갑자기 일어나 끙끙거리는 루카. 아마도 심심했나 보다. 내가 끙끙거리는 루카를 들어 품에 안자, 루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 품에 머리를 기댔다.
     조금 더 깊은 숲으로 들어오자, 낮게 깔렸던 안개가 사라지고 탁했던 공기도 맑아졌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자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다!”
     캉캉!
     기지개를 켜며 말하자 루카도 꼬리를 흔들며 짖었다.
     “아, 그런데 몬스터는 코빼기도 안 보이냐. 심심하게… 쩝.”
     메이스를 들고 이리저리 흔들며 혁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강찬과 혁이 전투 솜씨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보지 못했다. 아까부터 그들의 기술이 궁금했던 내가 입을 열었다.
     “저어… 혁의 직업은 뭐야?”
     “혁은 전투 클레릭이야.”
     주변을 살피며 걷던 강찬이 웃으며 대답하자 뒤따라오던 혁 역시 입을 열었다.
     “나는 치료랑 신성계열 마법 그리고 전투까지 구사하는 유능한 직업을 가졌지. 캬캬캬.”
     “미치놈.”
     “뭐!”
     혁의 말에 경훈이 말했다. 이 녀석들 또 시작이다. 티격태격하는 둘을 뒤로한 채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강찬, 너는 마검사랬지? 마검사면 마법과 검술 두 가지를 다 해야 하는 거지?”
     “얼추 맞아. 하지만 마법을 쓰는 건 아니야.”
     “그래? 그럼 뭐야?”
     “음, 뭐라고 해야 할까. 무기에 강화 마법 같은 걸 걸어두는 것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구나. 그럼 저 뒤에 따라오는 혁은?”
     “저 녀석은 같은 경우 조금 키우기 힘든 타입이라고 봐야 해. 전투 클레릭. 레벨은 30을 넘었지만 아직 회복, 치료마법 같은건 없어. 즉, 전투 스킬 때문에 보조 스킬 배우는 것이 좀 늦어진다는 거지.”
     크르르…….
     “그렇구나. 아, 잠깐만.”
     “왜 그래?”
     “루카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어.”
     그 말에 뒤에서 티격태격하던 혁과 경운도 싸움을 멈추고 잠자코 있었다. 또다시 수풀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여러 군데가 흔들리기 시작했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으르릉…….
     “아직… 인가?”
     “응, 그래. 루카가 으르렁거리는 동안은 잠자코 있어.”
     쐐애액.
     터엉!
     그 순간 어디선가 화살 하나가 날아와 혁의 가슴팍에 꽂힐 뻔했으나 다행이도 혁이 재빨리 라운드 실드로 막았다.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 활등에 대고 활시위를 당겼다. 방금전 화살이 지나온 자리. 그곳에 화살을 쏜다면 분명 누군가가 맞겠지. 하지만 화살이 지나온 수풀 사이를 찾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기에 나는 수풀 한곳을 겨냥하고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쐐액.
     푹!
     키에엑!
     키아악!
     캬이아!
     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명소리와 함께 수풀에서 고블린 예닐곱 마리가 튀어나왔는데, 모두들 한 손에 작지 않은 클럽을 쥐고 있었다.
     “오! 전투다.”
     “자, 그럼 메이스 좀 휘둘러볼까?”
     강찬이 바스타드 소드를 고쳐 잡으며 말하자, 혁이 어깨를 들쳐 멨던 메이스를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가자, 루카!”
     왕왕!
     루카는 내 머리에서 내려와 한 마리의 고블린에게 달려가 고블린 목 줄기를 물고 마치 악아가 물에서 고기를 찢듯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고블린의 찢어진 목덜미에서 녹색 점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루카가 고블린을 처리한 것을 확인한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 들고 수풀 근처와 거리를 두었다.
     “블레이징 소드!”
     번쩍!
     높이 치겨든 강천의 검신이 붉은 물들었다.
     서걱.
     강찬의 검에 고블린의 목이 달아났다. 메이스로 고블린의 머리를 박살내고 있는 혁의 뒤로 고블린 한 마리가 달려드는 것을 목격한 나는 재빨리 화살을 쏘았다.
     푹!
     명중! 혁의 뒤를 치려던 고블린의 머리에 나의 화살이 정확하게 꽂혔고, 화살과 함께 고블린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경훈의 화려한(?) 주먹질과 발길질에 고블린 두 마리가 나가떨어졌다.
     “자, 이제 남은 건 이 녀석뿐인가?”
     크르르…….
     강찬이 마지막 한 마리의 고블린을 노려보며 말했다. 강찬의 옆에 선 루카도 고블린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고, 그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고블린은 등을 보이며 도망을 쳤다.
     “현성아! 저 녀석 도망간다! 잡아!”
     “OK! 퀵 스텝!”
     퀵 스텝을 사용한 나의 몸놀림은 보통 때보다 빨라져 달아나는 고블린은 추격했다. 화살 하나를 꺼내 고블린에게 쏘자 화살은 고블린의 다리에 꽂혔다.
     “보우 어텍!”
     고블린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활로 고블린의 머리르 강하게 내리쳤다. 하지만 데미지를 별로 안 받았는지 고블린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고블린이 휘두른 클럽이 내 무릎을 강타했고, 무릎에 힘이 풀린 나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런!”
     키에엑!
     다리에 화살이 박힌 고블린이 절뚝거리며 일어나 클럽을 든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고블린의 얼굴엔 살기가 가득했고, 어두운 초록빛 눈동자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그때 고블린의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높이 치켜들었던 클럽이 내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두 눈을 질근 감았다. 아, 맞으면 아프겠지? 이대로 첫 죽음을 맞이하는 건가?
     촤아악!
     이때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아 감았던 눈을 뜨니 루카가 고블린의 목덜미를 물고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루, 루카!”
     고블린의 녹색 점액을 잔뜩 뒤집어쓴 루카가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온몸에 더러운 점액질을 묻히고 내 품에 안기는 건 아니겠…지?’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루카는 점액질에 몸이 흠뻑 젖은 채 내 품으로 뛰어들었고 루카의 털에 송글송글 맺힌 점액질이 뚝뚝 떨어져 내 옷가지를 타고 흘렀다.
     “으윽, 점액을 묻히고 품으로 달려들면 어떡해!”
     캉캉!
     “우웩! 현성아! 옷이 그거게뭐냐? 고블린의 피냐?”
     헛구역질을 하며 다가오는 혁. 그 뒤로 경훈과 강찬이 피식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멋지게 고블린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나는 고빌린에게 죽을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루카가 있었기에 위를 벗아날 수 있었다. 나는 내 품에 안기 루카를 들어 땅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 당분간 안길 생각하지마!”
     캉캉!
     “알아들어?”
     캉캉!
     “전형 못 알아들은 모양인데? 크큭.”
     고블린의 초록색 피가 흥건히 묻은 메이스를 낮게 든 혁이 말했다. 윽, 이 찝찝함. 나는 얼른 물로 씻고 싶어 근처에 흐르는 물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우리가 지나온 곳에 시냇물이 있어서 다행이야.”
     “자자, 얼른 물기 말리고 사냥감 좀 찾아 나서야지?”
     “응, 그래.”
     녹색 점액을 잔뜩 뒤집어쓴 루카를 먼저 씻기고 흐르는 물로 옷에 묻은 점액을 대충 닦아내고 일어나자, 강찬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취익!”
     “응?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인간 냄새가 난다. 취익!”
     “……?”
     크르릉…….
     어디선가 굵은 코맹맹이 소리가 들여왔다. 루카는 작은 이빨을 드러내며 서서히 다가오는 목소리를 경계했다.
     “유저…는 아니겠지?”
     “그렇지.”
     혁의 말에 대답하는 경훈. 우리는 마치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자세를 낮추고 근처의 커다란 나무 뒤로 숨었다. 나는 낑낑 거리며 높이 달린 나뭇가지에 쭈그리고 앉아 활을 고쳐 잡고 화살을 꺼냈다.
     이윽고 등장하는 목소리의 주인공. 키는 2미터가량 되어 보이는 덩치가 크고 녹색 피부를 가진 요상하게 생긴 것들이 가죽 하나로 아래만 가린 채, 손에는 커다란 방망이를 들고 나무 아래로 다가왔다. 날카로운 눈매와 어울리지 않는 돼지 코, 불쑥 튀어나온 아랫니는 요상하게 튀어나왔고 색마저 누랬다.
     “취익! 인간 냄새가 분명히 났는데… 킁킁.”
     “쿠륵.”
     “간만에 인육을 먹나 했더니. 치익!”
     나무 뒤에 숨을 죽이고 있는 강찬과 혁 그리고 경훈… 응? 나무 아래 있던 경훈이 없어졌다.
     “뭘 그렇게 찾아?”
     내 뒤에서 작게 속삭이는 경훈, 어느새 나무 위로 올라왔나 보다. 나는 요상하게 생긴 세 마리의 몬스터에게 활을 겨냥하고 활시위를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나의 활시위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이내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대기를 가르며 나란히 걷는 세 마리의 몬스터 중 가운데 녀석의 머리를 관통했다.
     [레벳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굿!”
     나의 활솜씨에 경훈이 감탄사를 흘리며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팔꿈치로 다른 한 녀석의 정수리를 강하게 내리찍은 경훈은 잽싸게 뒤로 빠졌고, 나무 뒤에 숨어 있던 혁과 강찬이 잽싸게 경훈의 앞을 막아섰다.
     “취익! 인간이다!”
     “도, 동료를 죽였다! 화살로! 인간, 죽여라! 취익!”
     둘 중 한 녀석이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고, 구경을 하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나는 재빨리 화살 하나를 꺼내 쏘았고 화살은 녀석의 눈에 박혔다.
     “역시 오크는 동료가 당하면 강한 반응을 보이는군!”
     “그런 것 같아. 블레이징 소드!”
     “아이언 너클!”
     혁이 눈에 화살이 박힌 오크에게 달려들며 소리쳤고 강찬과 경훈도 혁을 뒤따랐다. 혁의 메이스는 오크의 머리를 강타했고 경훈의 정강이가 머를 숙인 오크의 무류 뒤쪽을 강타했다. 그에 오크는 그대로 쓰러졌고 검신이 붉게 물든 강찬의 검이 쓰러진 오크의 목에 틀어박혔다.
     “쿠에에엑!”
     두 동료가 죽자 남은 한 마리의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방망이를 강하게 휘둘렀다. 오크의 방망이는 혁의 복부를 강타했고, 그에 혁은 저만치 나가떨어져 배를 움켜잡고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혁이 나가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강찬과 경훈은 오크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전투자세를 취했고, 나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땅에 가볍게 착지했다.
     “현성아, 엄호를 부탁할게. 자! 가자, 경훈!”
     “OK"
     강찬이 검신이 붉게 물든 검을 들고 나에게 부탁을 한 뒤 경훈과 함께 내달렸다.
     “루카, 지금 혁이 무방비 상태니까 가서 좀 지켜줘!”
     캉캉!
     나는 쓰러진 혁을 루카에게 맡기고 화살 하나를 꺼냈다. 경훈의 주먹이 오크의 복부에 꽂히고, 강찬의 검이 오크의 방망이를 쥐고 있는 쪽 팔에 꽂히는 걸 본 나는 활시위를 당겼다.
     “적안!”
     나는 적안을 개안(開眼)하고 깊게 심호흡했다. 목표물은 당연히 오크. 적안으로 목표물이 더욱 정확하게 보였다. 활시위를 놓자, 화살이 오크의 목에 꽂혔고 오크는 이내 괴성을 질렀다.
     “쿠에에엑!”
     “으악!”
     왜 하필이면 강탄의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걸까. 오크의 괴성에 놀란 강찬이 꽂았던 검을 뽑으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재빨리 화살 하나를 더 쏘았고, 화살은 오크의 미간에 깊숙이 박혔다. 오크의 미간에 한 줄기 붉은 선혈이 흘렀고 오크의 두 눈은 이내 풀리기 시작했다.
     쿵!
     오크의 커다란 몸뚱이가 쓰러지자 근처의 수풀이 흔들렸다.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헉!”
     나는 오크가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 쓰러진 혁에게 내달렸다. 루카는 혁의 머리맡에 앉아 끙끙거리고 있었고, 혁은 반쯤 감긴 눈을 뜨고 피식 웃고 있었다.
     “뭐야, 괜찮은 거야? 포션이라도 줄까?”
     “쿨럭! 괜찮아, 그리고 부상률 때문에 어차피 포션을 마셔도 소용없어.”
     “그럼 일어날 수 있겠어?”
     “모르겠다. 쿨럭쿨럭!”
     나는 기침을 하는 혁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입을 열었다.
     “강찬아, 혹시 응급치료 스킬 배웠어?”
     “아니.”
     “그럼 경훈이는?”
     “나도 안 배웠지.”
     “……?”
     역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나 보다. 나도 사냥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오늘은 이쯤 하고, 마을로 돌아가자.“
     “그러자.”
     강찬의 말에 경훈이 대답했다.
     파티 리더인 강찬이 마을 귀한 스크롤을 꺼내어 찢자 파티원 전체가 수도 세인트 모닝의 광장으로 이동했다.
     “이런, 외상보다 내상이 심해. 나의 특효약이 없었다면 참 위험했을 거야.”
     힐러집 주인 데니스가 거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혁이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입을 열었다.
     “아! 짜증 나, 오크 그 돼지새끼! 메이스로 그냥 꼴통을 부숴 놓을까 보다!”
     “어허! 얌전히 있어야지, 안 그럼 상처가 덧난다?”
     “이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이런 상관이지.”
     데니스가 누워 있는 혁의 복부를 살짝 툭 건드리자 혁이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데니스가 피식 웃으며 ‘힐러의 말을 듣는 게 좋은 거야.’라고 말했다.
     “자, 이쯤에서 로그아웃하자.”
     경훈의 말에 우린 고개를 끄덕이며 로그아웃했다.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푸쉬쉬.
     헤드셋의 전원이 꺼졌고 나는 헤드셋을 벗어 머리맡에 있는 고리에 걸었다.
     캡슐의 문을 열고나오니 기지개를 쭉 켜는 강찬과 혁이 보였다.
     “아… 오크…….”
     “이미 지난 일이잖아, 크크. 다음에 와서 잡자.”
     혁이 이를 갈며 말하자 강찬이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이야, 현성이 활솜씨 죽이더라? 레벨 13 맞아?”
     “아… 뭐, 그냥 13맞아. 아니, 아까 레벨업을 두 번 했으니
    15지.”
     경훈이 뒤늦게 캡슐에서 나오며 말했다. 넷룸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시계를 보니 캡슐에 들어갔다 나온 지 정확히 3시간. 넷룸의 가격을 자세히 모르는 나는 강찬 일행을 따라 안내데스크로 다가갔다.
     “저… 경훈아, 세 시간이면 얼마나 내야 해?”
     “6천원, 한 시간에 2천원이야.”
     “그렇구나.”
     경훈에게 작은 소리로 묻자 경훈이 대답해주었다 내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안내데스크에 있는 계산대에 갖다 대자, 삐 소리와 함께 요금이 지불되었다. 계산을 끝낸 나와 강찬 일행은 넷룸의 고급스런 자동 유리문을 통해 에스칼레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아, 이제 집에 가서 뭐 하나, 마땅히 할 것도 없는데.”
     혁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말했다. 여기서 현재 게임기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귀를 후비는 혁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경훈이 입을 열었다.
     “현성아, 넌 집에 가면 세릴리아 월드 하겠네?”
     “응.”
     “좋겠다. 우리가 게임기기를 받으려면 앞으로 몇 시간을 해야 하는 거지?”
     경훈은 게임기기가 있는 내가 부러운 듯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혁이 입을 열었다.
     “우린 앞으로 100시간을 더 해야 돼. 아, 이제 집에 가서 잠이나 자자. 난 낮잠은 꼭 자야 해.”
     “아, 이 새끼, 나 따라하는 거 봐라?”
     “뭐, 이 새끼?”
     또다시 시비 붙은 경훈과 혁. 그런 두 녀석들을 뒤로한 채 강찬이 말했다.
     “아 현성아. 이제 슬슬 각자 집으로 가야겠다. 너 어느 방향으로 가?”
     “나? 백화점 가는 방향으로.”
     “그래? 그럼 우리랑 반대 방향이네. 그럼 내일 보자.”
     “그래, 잘 가.”
     나는 오늘 전학 와서 사귄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향했다.
     [레드 파운 Lv. 15.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에휴, 이거 중독됐나…….”
     나는 로그아웃했던 힐러집에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숨을 쉬는 나에게 데니스가 한숨은 몸에 좋지 않다며 잔소리를 했지만 나는 그런 그를 뒤로한 채 힐러집을 나왔다.
     “이제 뭘 할까? 스탯이나 한번 봐야지. 상태 창 오픈!”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궁수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15
     생명력(HP). 440
     마나(MP). 220
     스태미나(SP). 240(배고픔 수치 0%/ 갈증 0%)
     힘 87
     체력 15
     민첩 95
     손재주 345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160~210
     방어력 2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0
     나는 비정상적인 나의 손재주 스탯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는 나는 상태 창을 닫고 궁수의 탑으로 향했다. 궁수의 탑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커다란 활을 등에 메고 어깨에 크지 않은 붉은 매가 앉아 있는 한 유저를 보게 되었다. 새빨간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참 잘생긴 유저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이봐.”
     “……?”
     “흐음… 아닌가?”
     “뭐가요?”
     “음… 아,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유저는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루카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뒤 궁수의 탑에서 나갔다.
     “붉은 매라…….”
     나는 유저의 어깨에 앉아 있던 붉은 매를 떠올리며 궁수의 탑 맨 위층에 있는 로시토의 방으로 향했다.
                   *    *     *
     백발의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넘기고 동그란 외알 안경을 쓰고 있는 한 노인이 커다란 활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노인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온화한 에메랄드빛의 초록색 눈동자가 붉은 루비 색으로 변했고 그는 화살도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후우…….”
     노인이 심호흡을 하자 활등에서 은은한 적색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적색 빛은 활등에서부터 활시위로 이어졌고, 이내 화살촉에 붉은 오러가 형성되었다.
     노인의 붉은 눈동자와 동일한 색의 붉은 오러. 노인이 활시위를 놓자 붉은 오러를 머금은 화살이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허공을 가르며 밖에 있던 나무 한 그루의 몸통을 꿰뚫었다. 찌푸려졌던 노인의 미간이 다시 펴지자, 붉은 루비 색 눈동자가 다시 온화한 에메랄드빛의 초록색으로 돌아왔다. 노인은 활 끝에 걸린 활시위를 풀며 미소 지었다.
     “왔구나.”
     노인이 말 한마디를 짧게 내뱉었다. 복도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내 품에 하얀 강아지를 안은 까만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붉은 가죽을 덧대어 만든 활을 등에 멘 한 소년이 노인의 방문을 열었다.
     소년의 눈은 한없이 맑았다. 물론 소년의 품에 안겨 있는 강아지의 눈도 소년의 눈에 뒤지지 않게 맑았다. 소년이 입을 열었다.
     “로시토!”
                   *    *     *
     “레드? 여긴 무슨 일인가?”
     로시토가 반갑게 맞아주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로시토의 손에 활이 쥐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응? 로시토, 활은 왜 들고 있는 거예요?”
     “아, 활 말인가? 그냥 들고 있었네.”
     황급히 활을 벽에 걸어두며 로시토가 말했다. 나는 내 품에 안긴 루카를 땅에 내려놓았다. 루카는 로시토에게 쫄래쫄래 다가가 그의 발에 머리를 비볐다. 뭐, 간만에 옛 주인을 만났으니 반갑기도 할 테지. 자신의 발에 머리를 비비는 루카를 안아 든 로시토의 눈빛은 마치 친자식이라도 보는 듯 한없이 따뜻했다.
     ‘음,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잘생긴 유저는 누구지? 어깨에 붉은 매가 앉아 있었는데…….’
     나는 잠시 궁수의 탑 입구에서 마주친 유저가 문득 생각나 입을 열었다.
     “저… 로시토, 혹시 여기에 궁탑의 제자 한 명이 왔다 갔나요?”
     “음? 아, 자네의 여섯째 사형이 왔다 갔지.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나?”
     “아까 궁수의 탑 입구에서 봤거든요. 어깨에 붉은 매가 앉아 있는 걸로 봐선 아마도 궁탑의 제자 같아서…….”
     “허허, 그런가?”
     로시토가 루카의 머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로시토의 품에 안긴 루카는 그새 잠이 들었다. 마치 엄마의 품에 안기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방금 전에 왔다 갔던 유저의 이름이 뭔가요?”
     나는 잠든 루카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자 잠든 루카를 조심스레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두며 로시토가 말했다.
     “라벤더, 정말 손재주가 뛰어난 녀석일세. 뭐, 물론 처음부터 자네처럼 손재주가 그리 높지는 않았어. 정말 좋은 녀석이지, 고집이 세다는 것만 빼면…….”
     “그런가요? 아, 그런데 라벤더가 루카를 유심히 보더군요.”
     “아, 그랬나? 라벤더 녀석이 원래 이 늑대를 탐냈지. 뭐, 지금도 탐내고 있을걸세.”
     로시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를 탐내고 있을 줄이야…….
     내가 잠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로시토가 아차 하며 급히 자리로 돌아가 책상서랍을 덜컥 열었다. 너무 급히 연 나머지 책상이 흔들렸고, 그에 곤히 잠들어 있던 루카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이런… 그때 깜박하고 주지 못한 게 있었다네.”
     로시토가 서랍에서 스킬 북으로 보이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에 들린 책 한 권을 보았다.
     “이게 뭐죠?”
     “스킬 북이라네., 이걸 줬어야 하는 건데.”
     “음? 더블 샷?"
     로시토가 내민 스킬 붉을 받아 든 나는 겉표지를 읽었다. 스킬 북은 무지 얇았다. 더블 샷에 대한 여러 가지 가이드가 적혀 있는 스킬 북. 나는 책을 펴 차근차근 읽어 내려갔다.
     “더블 샷. 동시에 두 개의 화살을 쏘아내는 스킬. 응? 동시에 두 개의 화살을 쏜다?”
     “허허, 제일 기본적인 스킬이라네. 그걸 정독해 더블 샷을 터득한 뒤에 실전에서 써보게.”
     “네, 근데 다른 스킬은 없나요? 얼마 전 멀티비전에서 본 건데, 로빈훗이 무지 강력한 스킬을 사용하더라고요.”
     나는 시선을 책에 고정한 채 로시토에게 말했다. 그러자 로시토가 입을 열었다.
     “그 스킬을 마스터하면 오게나. 다른 여러 가지 스킬을 알려줄 테니. 자,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엇 가보게, 나도 급히 제출할 문서가 있어서 말이네.”
     “그래요? 에이, 좀 놀다 가려 했는데 아쉽다. 그럼 가볼게요.”
     나는 스킬 북을 아이템 창에 넣고, 책상 위에 앉아 있는 루카를 품에 안아 든 채 방문을 열었다.
     “에?”
     “비켜.”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이는 아까 궁수의 탑 입구에서 만났던 유저. 궁탑의 여섯 번째 제자이자, 자의 사형인 라벤더가 나를 끄집어내다시피 팔을 잡아당겨 나를 내팽캐치곤 로시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았다.
     “뭐, 뭐야?”
     벽에 등을 기대 간신히 중심을 잡은 나는 말 한 마디를 내뱉고는 복도를 통과해 모퉁이를 돌아 계단을 밝고 내려와 궁수의 탑에서 빠져나왔다.
                   *    *     *
     “응? 아까 사냥한다며 나가지 않았나, 라벤더?”
     “뭡니까, 대체! 루니오스 카이샤는 어떤 제자에게도 주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라벤더가 신경질적으로 로시토에게 소리쳤다.
     라벤더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자리로 돌아가 앉아 깃펜을 손에 쥐고 잉크병 뚜껑을 열었다.
     “라벤더, 그렇게 흥분하지 말게. 자네에겐 전설의 붉은 매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붉은  매는 궁탑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것일세. 바로 나의 애제자라는 거지.”
     로시토는 그렇게 말하며 잉크병에 깃펜을 푹 담갔다 뺐다.
     “…그럼 스승님께서 그토록 아끼던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샤를 넘겼다는 건… 그 자식이 다른 제작들보다 더 아끼는 애제자라는 거군요.”
     “그런 건 아니지. 내 제자들 모두 자식처럼 아끼는 애제자들이야. 그리고 사제에게 그게 무슨 말인가, 그 자식이라니.”
     로시토가 붉게 충혈된 라벤더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 그리곤 말없이 종이 문서 위에 글씨를 써나갔다.
     “후…….”
     로시토가 한숨을 쉬며 깃펜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라벤더, 자네 처음 궁수 전직 시험을 볼 때 손재주 스탯이 몇이었나?”
     “190이었습니다.”
     라벤더가 짧게 대답했다. 충혈되었던 두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190… 로빈훗 다음으로 높았지. 하지만 라벤더, 아까 자네가 밀쳐낸 사제의 손재는 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나?”
     “…100은 넘었을 거라고 봅니다.”
     라벤더의 말에 로시토는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물론 100은 넘었네. 자네는 물론이거니와 로빈훗보다 높았지.”
     “……!”
     “레드 파운, 궁탑의 입곱 번째 제자. 그의 손재주는 300이었다네.”
     “……!”
     “물론 자네와 비교하는 건 아니라네. 그만큼 그 녀석을 믿고 있다는 거지. 하지만 다른 제자들과 차별한다는 것은 아니야. 라벤더, 세릴리아 월드 최고의 명궁수가 되겠다고 했었지? 나는 자네를 믿네.”
                   *    *     *
     “좋아! 정독 완료! 스킬 창 오픈!”
     파팟!
     <Skill>
     레인지 마스터리(Ranged Mastery)
         (3.09/300.00%)
     보우 어택(Bow Attack)
         (0.1/100.00%)
     적안(赤眼)
         (0.92/100.00%)
     백 스텝(Back Step)
         (0.38/100.00%)
     크리티컬(Critical)
         (0.12/100.00%)
     퀵 스텝(Quick Step)
         (0.55/200.00%)
     더블 샷(Double Shot)
         (0/100.00%)
     “좋아! 당장 실험하는 거다!”
     나는 스킬 북을 아이템 창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고 레드 롱 보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기대고 있던 나무에서 일어나 활시위를 활 끝에 걸고 화살 두 개를 꺼냈다. 물론 첫 목표물은 토끼. 나는 화살 두 개를 활등에 대고 활시위를 당겼다.
     “후우, 이거 제대로 나갈지 모르겠네. 더블 샷!”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두 개의 화살이 똑바로 나간다싶더니 이내 땅에 떨어졌다. 한 발의 화살은 꽤나 멀리 날아갔지만 다른 화살은 바로 내 발밑에 떨어졌다.
     “헐…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뭐야!”
     캉캉!
     나는 땅에 떨어진 화살을 줍고 다시 화살 하나를 꺼내 든 다음, 심호흡을 하고 활시위에 두 개의 화살을 걸었다.
     “이번엔 제발 아까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라며…….”
     다시 활시위를 강하게 당기니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블 샷!”
     티잉.
     “…….”
     또다시 발아래 떨어지는 화살과 저만치 날아가는 화살.
     “흐음, 익 왜 이러지? 적안을 개안해야 하는 건가? 적안!”
     나는 적안을 개안한 채 두 개의 화살을 꺼냈다. 이번만큼은 실패를 용납할 수 없었다.
     “후, 이번에도 실패하면… 아니지, 벌써부터 실패할 생각을 하면 안 돼.”
     두 개의 화살을 활시위에 걸고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목표는 토끼! 적안으로 인해 시야가 확보되고 목표물이 더 자세히 보였다. 풀을 뜯는 토끼를 보며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티잉!
     “…….”
     캉캉!
     “…비웃는 건 아니겠지, 루카?”
     캉캉!
     실패였다. 나는 들고 있던 레드 롱 보우의 활시위를 풀고 주저앉았다. 루카는 뭐가 좋은지 벌렁 누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주인은 기운 없어 죽겠는데 저는 좋단다. 나는 루카의 배를 쓰다듬어주었다. 적안을 해제한 나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하늘을 봤다. 그냥 신기해서, 잡동사니를 무한대로 만들 수 있어 시작한 세릴리아 월드. 하지만 지금은 세릴리아 월드 최고의 궁수가 되려고 게임을 한다.
     나는 하늘을 보며 바보처럼 피식 웃었다. 따뜻한 햇살이 나의 콧등을 어루만졌다.
     “아, 현실에서도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커다란 나무와 넓은 숲…….”
     나는 루카를 품에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이렇게 맘 편히 휴식을 취하는 게 얼마만인가.
     “까악!”
     “응?”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에 나는 눈을 떴고 루카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한 유저가 달려오는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적안!”
     나는 적안을 개안했다. 쓰러져 있는 한 유저와 도망치는 여성유저. 금발의 머리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본능 적으로 활시위를 활 끝에 걸고 일어섰다. 여성 유저 뒤엔 고블린과 조금 다르게 생긴, 조금 더 크고 무장까지 한(무장이라고 해봤자 가죽투구와 가죽 아머를 입고 나무방패를 들고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지만) 고블린이 따라오고 있었다. 고블린의 손에는 숏 소드가 쥐어져 있었다.
     “루카, 저거 몬스터 맞지?”
     크르르…….
     루카가 꼬리를 세우고 작은 송곳니를 드러낸 채 저 멀리 있는 몬스터를 경계했다.
     “가자, 루카. 퀵 스텝!”
     왕왕!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 들고 여성 유저를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퀵 스텝을 걸고 뛰었지만  나의 달리기 속도는 루카보다 훨씬 뒤쳐졌다. 루카는 쏜살같이 희미한 잔상을 남기며 여성 유저를 뒤쫓던 고블린에게 달려들었다.
     고블린은 루카의 박치기를 왼손에 든 나무방패로 간신히 막았지만 충격까지 흡수하는 것은 무리였는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나는 꺼내 든 화살을 활등에 대고 홉 고블린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적안을 개안한 상태여서 그런지 목표물이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 하나가 대기를 가르며 홉 고블린에게 날아갔지만, 홉 고블린은 빠른 반사 신경으로 고개를 돌려 피했다. 화살은 홉 고블린의 귀만 꿰뜷은 채 멀리 날아갔다.
     “응? 뭐, 뭐지?”
     내가 당황하며 화살 하나를 꺼내 들 때 여성 유저가 말했다.
     “홉 고블린이에요! 보통 고블린과는 달라요.”
     “그, 그렇군요… 루카! 견제해!”
     왕왕!
     루카는 빠르게 홉 고블린의 등 뒤로 내달렸다 홉 고블린이 뒤돌아서기도 전에 루카는 홉 고블린의 왼쪽 발목을 물고 빠르게 회전했다. 초록색 점액이 튀는 이 장면, 언제 한번 본 적이 있는데…….
     키에에엑!
     홉 고브린이 괴성을 지르며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루카는 쓰러진 홉 고블린의 목덜미를 잽싸게 물고 다시 몸을 회전시켰다. 눈뜨고 보지 못할 끔찍한 광경이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얼레?”
     내가 화살을 쏘기도 전에 루카가 홉 고블린을 쓰러졌고, 레벨까지 증가했다. 홉 고블린을 쓰러뜨린 루카가 캉캉 짖으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입가에 초록색 점액을 잔뜩 묻힌 채.
     “아앗 안 돼! 백 스텝!”
     캉캉!
     내 품에 안기기 위해 뛰어오른 루카를 나는 백 스텝으로 간신히 피했다. 평소에 안기는 것은 좋지만 지금처럼 입가에 뭔가를 잔뜩 묻히고 안긴다면 또다시 마을에 가서 고생을 할 테지.
     “저쪽에 저희 오빠가… 오빠가!”
     “어디요?”
     또다시 소리치는 여성 유저, 사파이어를 박은 듯한 두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아 꽤 겁먹은 것 같았다. 내가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 남성 유저가 쓰러진 채 대여섯 마리의 고블린 클럽에 집단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사용해 재빨리 현장(?)에 도착했다.
     “보우 어택!”
     퍼억!
     나는 유저의 머리를 클럽으로 내려치려던 고블린의 안면을 강타했다. 고블린은 뒤로 나동그라졌고 유저를 구타하던 고블린들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었다. 다들 누렇고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뭘 실실 쪼개, 이 새끼들아! 백 스텝!”
     나는 백 스텝을 밟고 뒤로 물러나 달려드는 한 마리의 고블린의 아리따운 마빡(?)에 화살 하나를 꽂아주었다. 화살과 함께 고블린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나는 다시 화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두 마리의 고블린이 한꺼번에 달려들었지만 나는 침착하게 한 마리의 고블린의 마빡에 화살 하나를 꽂아주고 다른 고블린의 가슴팍을 발로 내지른 다음, 허리춤에 차고 있는 손잡이 부근에 붉은 구슬이 박혀 있는 단검으로 목덜미를 베어냈다.
     [레벳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좋아!”
     레벨업 메시지를 확인할 무렵, 구타를 당하던 유저가 일어났고, 그는 쥐고 있던 스태프로 고블린의 머리를 내리찍곤 외쳤다.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적들을 베리라! 윈드 커터!”
     서걱.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블린의 머리가 몸통에서 달아났다. 게임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보는 마법사였다. 남은 두 마리의 고블린의 시선이 다시 구타를 당하던 유저에게 고정되었다. 유저는 덥수룩한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가졌고, 반 무테의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아까 구타를 당할 때 묻은 것인지 안경알엔 흙먼지가 앉아 있었다.
     “타오르는 화염구가 내 앞에 나타날 지어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순간 두 개의 타오르는 화염구가 그의 주변을 빠르게 회전했다. 그의 손짓에 타오르는 구체가 기염을 토해내며 각자 고블린을 향해 날아갔고, 작지 않은 폭발과 함께 고블린은 시커먼 재가 되었다. 나는 어느새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져 있었다. 그가 갈색 로브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다가와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뭐, 뭘요…….”
     “제가 마법사인지라 근접전에서는 무지 취약하거든요, 게다가 홉 고블린까지 합세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동생을 도와주기로 해놓고 오히려 남의 도움을 받게 되다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가 안경을 벗어 뿌옇게 앉아 있는 흙먼지를 아이템 창에서 꺼낸 안경수건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그때였다. 그의 동생이 금발의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달려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오빠, 괜찮아?”
     “응.”
     “저기… 고맙습니다.”
     “아… 내.”
     여성 유저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해야 했지만. 언제 왔는지 루카가 내 발 옆에 앉아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여전히 입가에 초록색 점액을 묻힌 채로.
     “궁수…로군요.”
     흙먼지를 닦아낸 안경을 끼고 유저가 입을 열었다.
     “네, 진짜 궁수가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요.”
     “음, 이것도 인연인데 친구 추가를 해도 될런지…….”
     “물론 되지요.”
     “감사합니다. 저는 레온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마법사지요. 이쪽은 제 친동생 리아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자신을 ‘레온’이라고 소개한 유저와, 지금 본 거지만 숏 보우를 손에 들고 인사하는 유저. 나는 빙긋 미소 지으며 둘을 메신저에 추가했다.
     “저는 레드 파운이라고 합니다.”
     내가 입을 열자 리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곁에 있던 레온은 동생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리아가 입을 열었다.
     “레드 파운…이요?”
     “네, 네.”
     “호, 혹시… 궁탑의 제자세요?”
     “네.”
     “그렇군요! 어, 어제 전직하면서 봤어요! 궁수의 탑에서! 벽에 걸려 있는 액자에서! 일곱 번째 제자죠? 그리고 이 강아지는… 궁탑의 제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소환수!”
     “아니, 이분이 그렇게 대단한 분이었어, 리아?”
     “응!”
     레온의 말에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은 강아지가 아니고 늑대예요.”
     나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윽…….”
     그러다 갑자기 주저앉는 레온. 그의 입에서 한 줄기 붉은 선혈이 흘렀다. 아마도 고블린에게 구타를 당한 충격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세요?”
     “네… 쿨럭쿨럭.”
     “이런… 빨리 힐러집으로 가봐야겠어요.”
     “또 신세를 지는군요. 쿨럭쿨럭.”
     나는 레온을 부축해 마을 힐러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야, 어디서 굴렀어?”
     “저, 구른 건 아니고…….”
     “아니, 동료가 이렇게 될 때까지 그냥 구경만 한 거야?”
     힐러집 문을 열자, 포션을 제조하던 데니스가 황급히 일어나 소리치며 얼른 레온을 부축해 침대에 눕히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품에 루카를 안은 리아가 레온 곁으로 다가가자 데니스가 입을 열었다.
     “꼬마 아가씨, 도대체 누구한데 당했기에 이렇게 된 거지?”
     “고블린이요, 고블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홉 고블린 때문에…….”
     “홉 고블린? 이런… 그럴 만도 하군. 몸이 쇠약한 걸 봐서이 녀석이 마법사라는 건 알겠지만 이렇게 심하게 당하다니… 어이! 거기 뒤에 궁수, 멍하게 서 있지만 말고 선반에 있는 붕대 좀 가져와봐.”
     “…네.”
     나는 짧게 대답하고 선반 위에 있는 붕대를 집어 데니스에게 주었다. 데니스는 미리 빻아놓은 약초를 레온의 상처에 전부 바른 뒤, 붕대를 감았다.
     “됐어, 이제 좀 누워 있으면 될 거야.”
     “휴…….”
     데니시가 말하자 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더블 샷 스킬을 수련하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저, 리아. 전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하다 만 게 있어서…….”
     “아, 그러세요? 그럼 여기…….”
     리아가 품에 안고 있는 루카를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나는 루카를 받아 품에 안은 채 목례를 하며 힐러집에서 나왔다.
     “아오… 힐러, 성격 참 뭐 같네.”
     나는 굳게 닫힌 힐러집 문을 보며 말했다.
     근처의 우물을 찾아 루카의 입 주변을 씻기고 바가지로 우물을 퍼 한 모금 마시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후… 시원하지?”
     캉캉!
     아직 물이 남아 바가지를 땅에 내려놓자 루카가 꼬리를 흔들며 홀짝홀짝 물을 마셨다. 나는 루카가 물을 다 마신 것을 확인 한 후 바가지를 깨끗이 씻어 우물가에 걸어두었다.
     “자, 그럼 더블 샷 수련을 마저 하러 가볼까?”
     캉캉!
                   *    *     *
     쐐애액.
     푸욱!
     “오! 됐다! 됐어! 근데 화살 하나는 엉뚱한 곳으로 가벼렸네.”
     100번 이상의 시도 끝에 두 개의 화살 중 하나는 토끼를 명중시켰고, 다른 한 발의 화살은 목표물을 한참 지나 땅에 꽂히고 말았다. 하지만 처음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었다. 나는 다시 화살 두 개를 꺼내기 위해 등에 멘 화살통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나의 두 손가락은 허공만 매만질 뿐, 화살 깃의 뻣뻣한 감촉이 없었다.
     “…전부 써버린 건가?”
     이제 겨우 감을 잡았는데 화살이 전부 떨어지다니, 나는 고개를 저으며 활시위를 풀고 다시 수도 세인트 모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 주변엔 언제나 유저들로 붐볐고 시끄러웠다. 나는 광장을 지나 조용한 곳에 위치한 대장간을 찾아갔다. 역시나 대장장이 아세른은 오늘도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아세른.”
     “응? 레드, 오랜만이구만. 엇 오게나.”
     잘 태운 커피색 피부에 탈색된 것 같은 연 노란색의 긴 머리를 길게 땋은 대장장이 아세른이 날 반갑게 맞아주었다. 언제 봐도 그의 팔뚝은 두꺼웠는데, 망치질을 할 때 힘을 주면 더욱 두꺼워졌다. 나는 아세른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음, 화살을 좀 구입하려고요.”
     “응? 아, 화살 때문에 온 건가? 하긴 여태 소식이 없더니만 역시 활 쏘는 연습을 하고 있었나 보군.”
     “뭐, 그렇죠. 음, 제 레드 롱 보우에 맞는 긴 화살이 필요한데…….”
     나는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 나름대로 잘 정리된 무기들을 살펴보았는데, 그중에는 내가 만든 클레이 모어도 있었다. 벽에 걸린 검도 도끼 그리고 다양한 모양의 활.
     “이야…….”
     내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역시 대장장이는 대장장이. 나는 고개를 돌려 길고 짧은 화살들이 잘 정리된 여러 개의 바구니로 발걸음을 옮겼다.
     “깃이 붉은 화살은 없나… 아! 여기 있었군.”
     많고 많은 바구니 중, 내 눈에 제일 먼저 뛴 것은 깃이 붉은 화살이 가득 담겨 있는 바구니였다.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은빛 화살촉과 잘 감긴 더데와 은실 그리고 상사. 화살의 몸통은 곧게 뻗어 있었고 길이도 길었다.
     나는 활시위를 활 끝에 걸고 화살을 활등에 갖다 댄 다음, 활시위에 화살 깃을 걸고 활시위를 당겼다.
     “길이도 딱이군, 아세른! 화살은 가격이 얼마나 하죠?”
     “음, 화살 말인가? 100개에 10실버라네. 하지만 자네에게는 200개에 10실버를 줄 테니 많이 가져가게.”
     “정말요? 아, 감사합니다!”
     나는 화살이 나가지 않게 활시위를 놓고 활 끝에 걸린 활시위를 풀었다 그리고 붉은 망토를 풀어 헤치고 등에 멘 화살통을 벌려 화살이 잡히는 대로 마구 쑤셔 넣었다.
     “음, 이 정도론 적은데? 아세른, 화살통 몇 개만 가져갈게요.”
     “그러게.”
     아세른이 망치질을 하며 대답했다. 나는 화살통 세 개를 더 집어 들어 세 개의 화살통에 화살을 마구 쑤셔 넣고 아이템 창에 조심스레 넣은 뒤, 기존에 가지고 있던 화살통을 등에 메고 붉은 망토를 걸쳤다. 그리고는 망치질을 하고 있는 아세른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아이템 창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응? 뭔가?”
     “1골드요. 너무 많이 넣어서 몇 개인지 세어보는 걸 잊었네요. 하하.”
     “허허. 이 친구, 머리 한번 잘 쓰는구먼.”
     “아, 절대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맘에 드는 화살이 있어서…….”
     아세른의 눈썰미는 대단했다. 나의 잔머리가 들통 나다니,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애써 발뺌했다. 아세른이 나의 행동에 우스웠는지 피식 웃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세르의 망치질을 마치고 붉게 달아오른 검을 물에 담갔다. 김새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럼 아세른, 전 이만 가볼게요.”
     “벌써 가는 건가? 음, 그래. 그럼 다음에 시간 나면 언제든지 오게나.”
     “네. 가자, 루카.”
     캉!
     또다시 오게 된 수도 세인트 모닝 앞 사냥터. 드넓은 들판에 토끼들이 뛰놀고 있었다.
     “아, 토끼들에게 미안한 걸…….”
     나는 별로 미안한 것 같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매번 활 끝에 활시위를 걸면서 느끼는 거지만, 오우거의 힘줄로 만든 활시위라 그런지 질기고 걸기 힘들었다.
     나는 활시위를 걸고 두 개의 화살을 꺼내 활 깃을 활시위에 걸치곤 활시위를 당겼다. 목표물은 풀을 뜯느라 정신이 없는 토끼 한 마리. 미간에 힘을 죽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두 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푹! 푹!
     “이런!”
     아쉽게도 화살은 토끼가 앉은 풀을 뜯는 땅 위에 박혔다. 화살을 수거하기 귀찮아 화살통에서 다시 화살 두 개를 꺼낸 다음, 하나라도 토끼를 맞히길 바라며 화살을 쏘았다. 다행히 나의 바람대로 두 개의 화살은 정확히 토끼의 머리와 몸통에 박힌 채 토끼와 함께 저만치 날아갔다. 성공이었다.
     “오오! 됐다, 됐어!”
     나는 미친 사람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루카야, 이것 좀 봐!”
     루카에게 소리쳤지만, 루카는 낮게 나는 나비를 쫒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또다시 화살 두 개를 꺼내 쏘았다. 이번에도 화살 두 개는 토끼에게 정확히 꽂혔다.
     “이거, 제대로 감잡힌 것 같은데? 스킬 창 오픈!”
     파밧!
     <Skill>
     레인지 마스터리(Ranged Mastery)
         (15.09/300.00%)
     보우 어택(Bow Attack)
         (1.9/100.00%)
     적안(赤眼)
         (1.02/100.00%)
     백 스텝(Back Step)
         (0.99/100.00%)
     크리티컬(Critical)
         (0.12/100.00%)
     퀵 스텝(Quick Step)
         (0..98/200.00%)
     더블 샷(Double Shot)
         (50/100.00%)
     “응? 수련치가 50%가 되어버렸네. 제일 기본적인 공격스킬이라 그런 건가?”
     나는 더블 샷의 수련치를 보며 말하고는 빙긋 미소 지으며 스킬 창을 닫았다. 이제 토끼 말고 조금 더 강한 몹을 상대로 더블 샷을 수련하기로 했다.
     내가 루카를 부르기 위해 고개를 돌리니 루카는 여전히 나비를 쫒고 있었다. 저게 늑대야, 아님 강아지야?
     “루카! 이리 와!”
     캉캉!
     빛나는 연보랏빛 날개에 검은 점이 촘촘히 박힌 예쁜 나비를 열심히 쫒던 루카가 나의 부름에 캉캉 짖으며 달려왔다. 영락없는 강아지의 모습이었다. 내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자 루카는 자연스럽게 내 품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다시 일어나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다지 깊은 숲은 아닌지라 울창한 나무 사이로 따뜻한 햇살이 들어왔다.
     “루카, 더블 샷을 수련하는 동안에는 바닥으로 내져줘. 실수로 삑사리 나면 네가 견제해줘야지, 안 그래?”
     캉캉!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루카는 그저 짖기만 했다.
     내가 적안을 개안하고 눈을 가늘게 뜨자 저 멀리 고블린 무리가 포착되었다. 루카를 바닥에 내려놓은 나는 화살 두 개를 꺼내 활등에 대고 활시위에 걸치 채 자세를 낮추었다.
     “가자, 루카”
     캉!
     “퀵 스텝!”
     고블린 무리를 향해 내달린 나는 그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와 키가 비슷한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는 활시위를 당겼다. 목표물은 현재 클럽 하나를 쥐고 서로 치고받고 있었다.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가늘게 떴다.
     키킥.
     “쉿! 루카, 조용히 해.”
     카아아!
     “조용히 하랬잖아…….”
     나는 킥킥거리는 소리에 신경질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눈 앞에 있는 건 루카가 아니 고블린이었다. 언제 내 뒤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노리고 있는 고블린 무리에 속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고블린이 누렇고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온갖 인상을 다 구겼다. 나는 활시위를 당긴 상태로 내 앞에 있는 고블린을 겨냥했다. 활시위를 놓자 고블린의 어두운 초록색 눈동자에 두 개의 화살이 박혔다.
     키에엑!
     키룩.
     키키키.
     고블린의 비명소리에 수품 너머에 있던 고블린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고정되었다. 수풀에 가려 보이진 않겠지만 아무튼 이쪽을 의식하고 있었다.
     “젠장! 갑자기 왜 이래, 루카!”
     왕왕!
     루카는 두 눈에 화살이 박힌 채 비명을 지르던 고블린을 덮쳤다. 덮친 것까진 좋았지만 발버둥치는 고블린의 숨통을 죄고 있는 모습을 다른 고블린 무리에게 보이고 말았다.
     “망했다!”
     나는 재빨리 화살 하나를 꺼내 저 멀리서 다가오는 고블린들을 향해 쏘았다. 화살은 고블린의 이마나 목에 박혔고 화살에 맞은 고블린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루카, 이 멍창아! 수풀 밖으로 나가면 어떡해!”
     캉캉!
     고블린의 숨통을 끊은 루카가 앉아 꼬리를 흔들며 혀를 내밀고 헥헥거렸다. 도대체 칭찬인지 꾸증인지 구분 못 하는 이 녀석을 어떻게 하면 좋아. 나는 신경질을 내며 죽은 고블린을 발로 걷어찼다.
     “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캉캉!
     “그럼 내일 보자. 소환 해제! 그리고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위잉.
     헤드셋의 전원이 꺼지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윙 하는 기계음과 함께 캡슐의 문이 열렸고, 나는 헤드셋을 벗고 게임베드에서 일어났다. 캡슐에서 나온 나는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했다. 꽤 오랫동안 게임을 한 것 같았다.
     “후아암… 컴, 지금 몇 시야?”
     「오후 9시 30분입니다.」
     “헤에, 벌써? 아, 출출한데 라면이나 먹을까?”
     「이 시간에 먹는 라면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뭐, 만날 먹는 것도 아닌데 한 번만 먹자, 응?”
     「네.」
     “고마워, 컴.”
     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거실로 나오자 어두운 거실에 자동적으로 전등이 켜졌고, 나는 소파에 가서 거의 드러눕다시피 앉았다.
     “컴, 멀티비전 좀 켜줘. 그리고 게임하는 동안 메시지 온 거 있어?”
     「없습니다.」
     “그래? 왠일이지?”
     컴의 대답과 동시에 멀티비전이 켜졌다. 자동적으로 세릴리아 월드 채널이 고정되었다.
     “안녕하세요. ‘가자 세릴리아 월드!’ 오늘도 함께할 MC 강성규입니다! 윤미리 씨는 감기로 오늘 출현하지 못했습니다. 자, 오늘은…….”
     「주인님, 부엌에 라면 준비되었습니다.」
     “아, 고마워.”
     나는 즉시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잘 정리된 싱크대 위에 뚜껑이 덮인 사발면이 놓여 있었다. 나는 젓가락과 사발면을 들고 소파로 조심조심 걸어와 탁자 위에 올렸다 .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했고, 라면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젓가락으로 오동통한 면발을 집어 들었다. 젓가락으로 집어든 라면을 입에 넣자 쫄깃쫄깃한 면발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라는 분이군요, 역시 중수 중에 ‘괴물’이 많군요. 궁탑의 제자라는 호칭을 받은 유저들. 정말 괴물입니다. 현재 일곱 번째 제자까지 있다고 하는군요. 자, 현장에 있는 리포터 민들레씨가 궁수의 탑을 방문하셨다는데요, 민들레 리포터?”
     MC 강성규의 말이 끝나자 화면이 곧 세릴리아 월드 수도 세인트 모닝의 궁수의 탑으로 바뀌었다.
     “네. 현장에 나와 있는 리포터, 민들레입니다! 자, 화면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제가 궁수의 탑에 와 있습니다. 무지무지 넓은 시험장엔 전직시험을 보는 궁수지망생들로 가득하군요.”
     화면으로 보는 궁수의 탑. 궁수 전직시험을 본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궁탑의 제자가 되던 날,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바보처럼 실실 웃으며 다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군요! 자, 그럼 궁수의 탑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리포터 민들레가 궁수의 탑 안으로 쫄래쫄래 뛰어가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았다.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는 NPC에게 궁탑의 제자를 관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자, NPC가 친절하게 대답해주었고, 리포터 민들레는 즉시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쯧쯧, 고생하는구먼.”
     우물우물.
     나는 라면을 먹으며 혀를 찼다. 이윽고 화면에는 로시토의 방이 나왔다. 리포터 민들레는 노크도 하지 않고 로시토의 방문을 활짝 열었다. 로시토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본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가자 세릴리아 월드!’에서 취재하러 왔습니다! 궁탑의 제자들의 스승이신 레인지 마스터 로시토 씨죠?”
     “아, 그렇소만.”
     로시토 급히 책상 주변을 치우며 말했다. 어지럽던 책상이 순식간에 정리되었고, 로시토가 자리에서 일어나 헛기침을 했다. 평소에 깔끔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자, 화면에 나온 이분이 바로 궁탑의 제자들의 스승이신 ‘레인지 마스터 로시토’라고 하네요. 근데 현재 궁탑의 제자는 모두 몇 명인가요?”
     “일곱 명이오.”
     로시토의 얼굴에는 ‘나 긴장했다.’라고 쓰여 있었다. 평소와 달리 딱딱하게 굳은 그의 모습에 나는 라면을 먹다 말고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NPC도 부끄럼을 타나?
     “다, 다들 뛰어난 제자들이오.”
     “아하!”
     “일곱 번째 제자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으려하오.”
     “그렇군요. 제자가 일곱 명이라고 하셨죠?”
     “그렇소.”
     “그럼 그 일곱의 제자 중에 가장 뛰어난 제자는 누구죠?”
     “음. 현재 가장 뛰어난 제자는 역시 첫 제자인 ‘로빈훗’이오.”
     “그렇군요!”
     리포터 민들레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하긴, 방송 직후 로빈훗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나는 남은 국물을 훌훌 마시며 시선을 멀티비전에 고정했다. 시간이 벌써 오후 10시를 넘어섰다.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제자가 있다면 누구인가요? 방금 말씀하신 가장 뛰어난 제자인 로빈훗인가요?”
     “흐음… 다들 기대를 하고 있소. 똑같은 제자인데 어떻게 차별을 하겠소? 하지만 조금 더 기대를 걸고 있는 제자는 일곱 번째 제자인 레드 파운이오.”
     로시토의 말에 나는 뭐랄까, 민망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썩 내키진 않았다. 나는 다 마신 사발면 그릇을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음, 마지막 제자에게 기대가 크시군요.”
     “그렇소, 대개 궁수전직 시험에서 남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가진 자만이 ‘궁탑의 제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 것이오. 다들 남들보다 뛰어난 손재주와 민첩성으로 궁탑의 제자가 되었소.”
     로시토가 콧등에서 미끄러진 외알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레드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손재주가 월등히 뛰어났소. 1레벨10에, 손재주는 무려 300이나 되었단 말이오.”
     “오! 정말 대단한데요? 지금 멀티비전을 시청하고 계실 거라 믿고, 로시토 씨, 일곱 번째 제자에게 한 말씀하세요!”
     로시토가 잔뜩 긴장한 채 카메라를 보고 입을 열었다.
     “크흠, 험험. 어… 그러니까 레드, 먼저 레인지 마스터가 되어 세릴리아 월드를 빛내는 궁수가 되길 바라네, 그리고…….”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생각을 하던 로시토가 이어 말했다.
     “…다음에 보도록 하지.”
     “예예, 그러지요.”
     나는 멀티비전에 대놓고 대답했다. 뭐 여기서 말한다고 들리지도 않겠지만. 나는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방으로 향했다.
     “컴, 멀티비전 좀 꺼줘. 그리고 내일도 아침에 깨워주는 것 잊지 말고.”
     「네.」
     나는 침대로 올라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방금 먹은 라면이여, 제발 내일 아침에 얼굴 붓게 하지 마시옵소서.
     「오전 8시. 오늘의 알람은 사계의 여름입니다.」
     “으음…….”
     여느 때와 같이 컴이 틀어준 알람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깬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으아… 속이 더부룩하다.”
     「어제 저녁에 먹은 라면 때문이군요.」
     한 손으로 배를 부여잡고 중얼거리자, 컴이 바로 말했다. 별안간 엄마가 없으니까 이 녀석이 잔소리를 대신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아, 목마르다.”
     나는 냉장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냉장고 문에 달린 정수기, 나는 식탁 위에 놓인 유리컴을 들고 정수기에 갖다 대고는 냉수 버튼을 꾹 눌렀다.
     쪼르르.
     유리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자 목구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포장되어 있는 야채수프를 냉장고에서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자, 곧 따끈한 수프가 큰 대접에 담겨 나왔다. 나는 허겁지겁 수프를 떠먹고 욕실로 들어가 깨끗이 씻은 뒤, 외출복을 입고 PDA를 챙겨 서둘러 학교로 향했다.
     드르륵, 탁!
     웅성웅성.
     “여… 현성!”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제일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다름 아닌 강찬. 아침을 거르고 왔는지 그의 손엔 기다란 크림빵이 들려 있었다.
     “아, 안녕.”
     “빵 좀 먹을래?”
     “아, 아냐, 괜찮아.”
     “아침 먹고 왔나 보지?”
     “응.”
     “낸 옆자리에 앉아, 그나저나 어제 조회 빠지고 넷룸 갔더니 걱정된다.”
     강찬이 크림빵을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나는 강찬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차! 안경 쓰는 걸 깜빡했네.”
     “음? 아겨도 써써(안경도 썼어)?”
     강찬이 입에 크림빵을 잔뜩 문 채 묻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평소에 잡동사니를 만들 때 끼던 안경. 그동안 게임을 하느라 안경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뭐, 그래도 보일 건 다 보이지만. 그래도 단점이 있다면 어는 정도 거리를 두면 사람들이 눈, 코, 입 없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윽고 같은 반 아이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고 이내 3학년 3반 학생들이 전부 모였다.
     드르륵, 탁!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리따운 여성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짧지 않은 커트머리에 새하얀 피부와 아리따운 이목구비(뭐, 나는 안경을 안 써서 눈, 코, 입이 없는 물체로밖에 안 보이지만). 남학생들을 자극하려고 마음먹었는지 교탁 앞으로 걸어온 여성의 치마는 유난히 짧았다.
     “강현성, 한강찬, 앞으로 나오세요.”
     “젠장, 걸렸나 봐.”
     교탁 앞에 선 여성의 말에 강찬이 낮게 속삭였다. 강찬은 먹다만 빵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나도 자리에서 따라 일어서야 했지만. 강찬과 함께 교실 앞으로 천천히걸어 나가니 아까는 보이지 않아서 몰랐는데 지금 내 앞에 서있는 여성은 무지 예뻤다.
     “어제 조회 시간을 땡땡이쳤죠?”
     “넵!”
     강찬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강찬의 옆에 선 나는 무지 민망했다.
     “흐음… 이따 수업 끝나고 남으세요. 그리고 누가 강탄이고 누가 현성이죠?”
     “제가 강찬이고 얘가 현성입니다.”
     아리따운 여성의 말에 강찬이 또다시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럼 자리로 다시 들어가세요.”
     “넵!”
     생각 같아선 강찬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래도 별수 있나. 내성적인 나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서 딱 굳어버리니 말이다. 심지어 여자 앞에서도 몸이 딱 굳는 정도다. 나와 강찬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강찬은 아까 먹다 만 빵을 또 한 입 베어 물었다.
     “자, 어제 소개한 것과 같이 제가 이번 년도 담임을 맡게 된 이은정이라고 합니다. 음… 여러분과 나이 차이가 별로 없으니 친구 같은 선생님으로 대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첫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담임선생님 말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주머니에서 PDA를 꺼냈다. 인터넷에 접속해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를 켰다.
     “엥? 현성, 수업 안 들어?”
     “응, 공부랑 담 쌓고 살아.”
     “여어… 동지.”
     오른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강찬. 나는 강찬과 악수를 하곤 다시 PDA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수업이 진행되자 강찬은 아예 엎드려 잠을 잤다.
     ‘아이템 등급이 이렇게 나누어지는구나.’
     나는 아직 내가 잘 모르는 것들을 검색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세릴리아 월드의 아이템 등급은 이렇게 나뉘어졌다.
     [오리지날], [매직], [레어], [유니크], [에이션트], [신급]
     ‘그런데 내 레드 롱 보우는 무슨 급일까? 내가 만들었으니 신급? 푸하하!’
     나는 혼자 헛된 망상에 빠져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를 쭉 둘러보았다. 직업도 참 다양했다. 너무 많아서 딱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홈페이지를 구경하는 동안 시간은 총알갈이 지나갔고, 벌써 2시간의 수업 시간이 끝났다.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아까 말한 강찬과 현성, 앞으로 나오세요. 나머진 모두 집에 가도 좋습니다.”
     “와아!”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교실 문을 열고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나는 아직도 자고 있는 강찬을 흔들어 깨웠다.
     “으음… 응? 벌써 수업 끝났어?”
     “응.”
     반쯤 뜬 눈을 껌뻑거리며 강찬이 일어났다. 곧 담임이 내 책상 앞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몸이 굳어버렸다.
     “둘 다 다음부터 아침 조회를 하지 않는다거나 땡땡이를 친다면 용서하지 않겠어. 그럼 오늘은 그냥 가봐.”
     “아, 너희 담임 이은정이라며? 아 좋겠다. 우린 쉰내 나는 노총각이야. 성질도 어찌나 더러운지 괜히 노총각으로 있는 게 아니라니까. 아, 진짜 혼나는데 쉰내가 팍팍 나서 참느라 죽는 줄 알았어.”
     혁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나는 혁의 말에 피식 웃었다. 옆에서 걷던 강찬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왜 웃어, 새끼야.”
     “푸하하! 네 처지가 불쌍해서 그런다.”
     혁이 짜증내며 묻자 강찬이 대답했다.
     학교 교문 문턱을 넘어 큰 도로로 나오니 주변엔 편의점, 백화점 등 큰 건물이 많았다.
     “야, 넷품 가자!”
     “넷룸? 좋아!”
     경훈의 말에 강찬이 대답했다. 게임기기가 없는 이 셋은 넷룸에 가지 않으면 세릴리아 월드를 할 수 없으니 학교 끝나고 그 곳으로 가는 게 당연했다.
     “현성아, 너도 같이 가자. 집에 게임기기가 있다고 우릴 버리
    며 안 돼.”
     “맞아, 부잣집 도련님.”
     경훈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혁이 말했다. 나는 하는 수없이 ‘응.’이라고 대답했다. 우리 넷은 넷룸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강찬이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출출한데 뭐 좀 먹자. 근처 카페에서 팥빙수 먹을까?”
     “그럴까?”
     강찬의 말에 경훈이 대답했다. 그러자 혁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지갑을 꺼내 들었다. 지갑을 열어본 혁이 입을 열었다.
     “음, 난 안 될 것 같다. 넷룸에서 게임할 돈밖에 없어.”
     “그럼 내가 사줄게.”
     혁의 말에 내가 바로 대답하자 혁이 소리쳤다.
     “얼레? 진짜?”
     “응.”
     우리는 근처의 카페에 들어와 팥빙수를 주문했다. 금세 크고 예쁜 유리그릇에 팥빙수가 가득 담겨 나왔다. 모두 열심히 팥빙수를 떠먹기 시작했고, 혁이 입을 열었다.
     “아, 근데 나 1업만 더 하면 힐 볼 배운다.”
     “힐 볼? 그건 뭐야? 힐이나 힐링은 들어봤어도.”
     팥빙수를 수저에 가득 담아 입에 넣으며 강찬이 말했다. 그러자 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힐 볼. 전투 클레릭의 제일 기본적인 공격 스킬인데, 음, 뭐랄까… 힐이 동그란 구체가 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유저들에게 힐 볼을 날리면 회복이 되고, 언데드 계열의 몬스터에게 날리면 신성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거야.”
     “그래?”
     강찬이 묻자 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힐 볼이란 스킬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니. 팥빙수를 순식간에 해치운 우리는 각자 계산을 하고(혁의 빙수 값은 내가 계산했다) 넷룸을 향했다.
     넷룸은 여느 때와 같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 애들이 요즘 거의 다 세릴리아 월드를 하나?”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던 혁이 말했다 넷룸에는 수입 개의 게임기기 캡슐이 질서정열하게 쭉 나열되어 있었다.
     “빈자리가 몇 군데 있으니 찾아서 하세요.”
     “네.”
     [레드 파운 Lv. 16.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어제 로그아웃했던 숲 속. 아직 고블린 무리는 없는 것 같았다.
     “아, 기분 좋다! 일다 루쿠부터 소환해야…….”
     캉캉!
     “얼레?”
     언제 나왔는지 내 앞에 앉아 짖는 루카. 분명 소환해제를 하고 로그아웃을 했는데 자기 맘대로 소환되니.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땅바닥에 앉아 루카를 두 팔로 안아 눈높이를 맞추고 입을 열었다.
     “너 어떻게 나왔어?”
     캉!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루카.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루카를 품에 안았다. 하긴, 자기 맘대로 소환된 루카보다 중요한 건 더블 샷 수련. 나는 레드 롱 보우를 들고 고블린 무리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카이루 님께서 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응? 뭐지, 이건? 승인.”
     파밧!
     -아, 현성아! 나 강찬인데.
     나는 내 눈 앞에 떠 있는 반투명한 직사각형의 입체 창에 적혀 있는 ‘대화. 카이루’라는 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응? 아, 그래. 무슨 일이야? 그보다 이건 무슨 기능이지?”
     -아, 이거? 대화라고 하는 건데 음, 뭐랄까… 귓속말 비슷한 거라고 보면 돼. 그건 그렇고 오늘도 같이 사냥하러 가는 게 어때?
     “사냥? 아, 미안하지만 오늘은 스킬 수련을 해야 해서.”
     -그래? 알았다. 그럼 열심히 해.
     [카이루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강찬이 대화를 끊자, 내 앞에 떠있던 입체 창이 사라졌다.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별수 있나. 일단 스킬 수련치 부터 올리고 봐야 하는데.
     나는 활시위를 활 끝에 걸고 화살하나를 꺼내 든 채 퀵 스텝을 걸고 숲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내가 뛰어다녀야 했기 때문에 내 머리 위에서 졸고 있던 루카는 바닥으로 내려와야 했다).
     한참을 돌아다니자, 곧 대여섯 마리의 고블린이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화살통에서 화살을 한 더 꺼내 들고 활 깃을 활시위에 건 다음, 힘껏 당겼다. 상당히 거리가 멀었기에 나는 적안을 개안했다.
     “좋아! 더블 샷!”
     쐐애액.
     두 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두 마리의 고블린의 머리를 꿰뚫고 저만치 날아갔다. 성공이었다. 수련치가 올라간 만큼 성공률도 높아진 것 같았다.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은 동료를 본 고블린 들이 주변을 경계하며 화살이 나라온 곳을 응시했다. 멀리 있는 내가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내가 다시 화살 두 개를 꺼내 들어 활시위에 화살을 건 채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화살에 맞은 두 마리의 고블린이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이제 남은 고블린은 두 마리. 두 마리의 고블린이 내 쪽을 향해 클럽을 휘두르며 달려오자, 나는 재빨리 화살 두 개를 꺼내 쏘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살은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루카!”
     왕왕!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며 재빨리 루카를 불렀다. 그러자 옆에 앉아 더블 샷을 구경하던 루카가 지면을 박차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한 마리의 고블린의 목덜미를 물었다.
     나는 다른 한 마리의 고블린에게 화살을 쏘았고, 고블린은 가슴팍에 화살이 박힌 채 그대로 벌렁 나자빠졌다. 루카에게 목을 물린 고블린은 말할 것도 없이 머리와 몸이 2등분되어 사라져버렸다.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꽤나 도움이 되는 루카였다.
     “잘했어, 루카!”
     캉캉!
     나의 칭찬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루카가 땅에 벌렁 누워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    *     *
     “좋아, 이제 마지막이다! 탬핑 어택!”
     퍼억!
     “쿠엑!”
     경훈의 마지막 일격에 오크의 안면이 짓뭉개지며 피를 왈칵 쏟아냈다.
     “허억, 허억. 아직 많아!”
     “그래.”
     깅찬이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숨을 몰아쉬며 말하자 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강찬과 경훈, 혁은 상당히 지친 것 같았다. 셋은 지금 오크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취익. 감히 우리 영역에 들어와 동료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쿠륵, 용서할 수 없다! 취익.”
     “미친 소리 하지 마.”
     오크들의 말에 경훈이 차갑게 대답했다. 경훈은 주먹을 불끈 쥐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오크들을 경계했다.
     “블레이징 소드!"
     번쩍!
     강찬의 외침에 검신이 붉게 물들었다.
     “혁! 어떻게 좀 해봐!”
     “뭘 어떻게 해.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지금 현재 우리들 중에 제일 강한 건 경훈 너야.”
     다급하게 말하는 경훈에게 혁이 말했다. 오크들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쿠륵, 죽어라!”
     “큭! 로우킥!”
     갑작스레 달려드는 한 마리의 오크의 허벅지에 경훈의 무쇠 같은 정강이가 꽂혔다.
     그에 오크가 중식을 잃고 휘청거리자, 경훈은 재빨리 팔꿈치로 오크의 안면을 가격하고 무릎을 들어 오크의 명치를 가격했다. 먼저 달려든 오크가 당하자 나머지 오크들은 일제히 경훈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동료를 또다시 상처 입혔다! 취익.”
     “쿠륵. 죽어라!”
                   *    *     *
     [더블 샷(Double Shot) 스킬을 마스터하였습니다!]
     “좋아! 마스터!”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얼레? 단숨에 2레벨업인가? 상태 창 오픈!”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궁수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18
     생명력(HP). 530
     마나(MP). 320
     스태미나(SP). 340(배고픔 수치 0%/ 갈증 5%)
     힘 87
     체력 15
     민첩 97
     손재주 348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165~215
     방어력 4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10
     더블 샷을 마스터하자 단숨에 2레벨업을 하게 되어 기분이 좋아졌다. 민첩 스탯이 드디어 100단위를 넘게 되자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이건 정말 행운이야! 스킬 창 오픈!”
     파밧!
     <Skill>
     레인지 마스터리(Ranged Mastery)
         (15.51/300.00%)
     보우 어택(Bow Attack)
         (1.9/100.00%)
     적안(赤眼)
         (2.10/100.00%)
     백 스텝(Back Step)
         (0.99/100.00%)
     크리티컬(Critical)
         (1.98/100.00%)
     퀵 스텝(Quick Step)
         (2.33/200.00%)
     더블 샷(Double Shot)
         Master
     스킬 창에 ‘Master'라고 적힌 더블 샷. 그에 비해 레인지 마스터리는 너무 안 올랐다. 뭐 하다 보면 오르겠지. 나는 기대에 들뜬 마음으로 어제 강찬 일행과 갔던 오크의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서걱.
     “꿰에에엑!”
     강찬의 검에 팔을 잃은 오크가 소리쳤다. 검을 쥐고 있는 강찬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의 이마엔 식은땀이 흘렀다.
     ‘후우, 오크라… 현재 우리들보단 레벨이 높은 상대인데 이렇게 무리지어 오다니…….’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검을 고쳐 잡은 강찬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제일 위험한 건 경훈이었다. 오크 무리의 2/3가 경훈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강찬과 혁은 재빨리 경훈에게 다가가 등을 맞대고 각자의 무기를 꽉 쥔 채 경훈을 보호했다.
     “으라차!”
     퍼억!
     “꿰에엑!”
     혁의 메이스가 달려드는 오크의 정수리를 강타하자 두개골이 으스러진 오크가 눈이 풀린 채 괴성을 질렀다.
     “시끄러워, 이 돼지 새끼야!”
     빠각!
     혁의 메이스가 오크의 안면에 꽂혔고, 오크는 그대로 벌렁 나자빠졌다. 강찬에게 다가오던 오크는 커다란 방망이를 휘둘러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에 강찬은 경갑으로 무장을 했다지만 자신보다 강한 등급의 몬스터의 공격을 흡수하는 데 무리가 있었다.
     강찬은 오크의 공격에 휘청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방망이를 쥔 오크의 팔뚝을 검으로 잘라버렸다. 이성을 잃은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강찬의 어깨를 물었지만, 오크의 누렇고 못생긴 이빨로는 경갑을 뚫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경훈이 왼발을 축으로 강찬의 어깨를 문 오크의 뒷무릎에 정강이를 꽂았고, 오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강찬은 붉은 기운이 맴도는 자신의 검을 오크의 목에 찔러 넣었다.
     “하아, 하아. 아직인가?”
     “끝난 것 같… 젠장! 점점 더 모여들고 있어!”
     지친 강찬의 말에 경훈이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혁 역시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취익. 저기다!”
     “도, 동료들! 취익. 가만 두지 않겠다! 쿠륵!”
     또다시 등장한 두 마리의 오크 강찬과 경훈 그리고 혁. 이 셋은 지친 몸을 이끌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탬핑 어택!”
     경훈이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젖 먹던 힘을 다해 팔을 내뻗었다. 오크의 인중에 정확하게 꽂힌 경훈의 무쇠 같은 주먹. 단 일격에 오크의 튀어나온 누런 이빨이 모두 부서졌다.
     “쿠에엑!”
     “쿠륵!”
     옆에 있던 오크가 커다란 방망이를 경훈의 머리에 내리 꽂았지만, 운 좋게도 다리가 풀린 경훈은 그대로 쓰러져 오크의 방망이를 피했다. 지켜보던 강찬과 혁도 오크에게 달려들었다. 피가 흥건히 묻은 혁의 메이스가 방망이를 쥔 오크의 팔을 강하게 내리꽂히자 우두둑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팔뚝이 부러졌다. 이어 강찬의 검이 괴성을 지르는 오크의 목을 베었다.
     “쿠에에!”
     “아차, 한 마리가 남았지!”
     이가 몽땅 부러진 오크가 소리치자, 혁이 이를 악물고 들고 있던 메이스로 오크의 안면을 강타했다. 괴성을 지르던 오크의 얼굴이 짓뭉개지고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으라차!”
     혁은 특유의 기합을 넣으며 오크의 정수리에 메이스를 내리 꽂았고, 오크는 두개골이 부서지면서 피와 함께 뇌수가 터졌다.
     “후… 스태미나가 완전히 바닥났어.”
     “나도 포션 마실 틈도 없다니까.”
     혁이 아이템 창에서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 마시자 강찬도 포션을 꺼내 들며 대답했다. 경훈은 완전히 지쳤는지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 저놈 죽겠다. 야, 이 포션이라도 좀 마셔봐.”
     혁이 드러누운 경훈의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는 마시던 유리병에 담긴 스태미나 포션을 그의 입에 쏟아 부었다.
     포션을 마신 경훈이 상체를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아, 죽는 줄 알았어. 오크들이 이렇게 끈질길 줄이야… 무리지어 있는 곳에 함부로 들어왔다간 그대로 로그아웃되겠다.”
     “크크, 마지막 오크는 내 메이스의 제물이 되었다.”
     붉게 무른 메이스를 어깨에 둘러메며 혁이 말했다. 안정을 되찾은 강찬과 경훈, 큰소리를 떵떵치는 혁. 셋은 바닥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    *     *
     “그런데 이거 길을 잘못 든 건가? 왠지 으스스하다. 안 그러니, 루카?”
     끄응…….
     습기가 가득하고 어두운 숲. 이전에 강찬 일행과 함께 갔던 어두운 숲보다 훨씬 울창하고 어두웠다. 눈앞이 캄캄할 정도였으니… 게다가 습기는 얼마나 가득한지 짜증이 날 정도였다.
     “여기가 오크의 숲이 맞긴 한 건가? 흐음… 지도상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약간의 오차가 있는 건가?”
     나는 내 키보다 큰 수풀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수풀을 지나자 이젠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안 그래도 탁한 습기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나는 레드 롱 보우를 등에 메고 허리춤에 찬, 손잡이 끝에 큼직한 붉은 구슬이 박힌 단검을 꺼내 나뭇가지들을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흐음, 이제 오크가 슬슬 나와 줘야 할 텐데.”
     나는 단검을 허리춤에 차고 활을 꺼내 들었다. 내 뒤를 따라 오던 루카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이내 자세를 낮추고 목청을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미세한 진동과 함께 나뭇잎 끝에 맺혀 있던 이슬이 또르르 떨어졌고, 내가 밟고 있는 지면에도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활시위를 활 끝에 걸고 화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쿵쿵.
     점점 더 커지는 발소리. 나는 적안을 개안했다. 어두운 숲 속이 약간이나마 환하게 보였고 시야가 확보되었다. 그리고 멀리서 다가오는 발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젠장, 뒤졌다…….’
     큼지막한 눈 두 개가 얼굴에 박혀 있고 큰 덩치에 손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으며 짙은 청록색 피부를 가진 몬스터가 코를 벌름거리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트롤?’
     왕왕!
     “쉿쉿! 조용히 해, 루카!”
     잠시 긴장을 하고 있는 사이 루카가 트롤을 향해 짖었다. 루카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루카의 목소리를 감지한 트롤이 괴성을 지르며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활을 왼팔에 메고 오른 팔로 루카를 안아 든 채 반대편을 향해 힘껏 내달렸다.
     “퀵 스텝!”
     “쿠어엉!”
     “으아악!”
     퍼억!
     [당신은 죽었습니다. 5초 후 약간의 경험치 감소와 함께 마지막 방문했던 마을로 이동합니다.]
     직사각형의 작은 입체 창에 적힌 메시지가 흐릿해지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자자, 이제 일어나.”
     “으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온몸에 전해지는 포근한 느낌에 눈을 뜨니 힐러 데니스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이 이런 표정도 짓는구나. 아, 그보다 난 죽었었지. 마지막 메시지와 함께 정신을 잃었던지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멀뚱멀뚱 데니스를 쳐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흐음, 머리가 아프다거나 그런 증세는 없어?”
     “아, 머리가 좀 아프네요.”
     “음, 처음 죽어보는 거지?”
     “네.”
     “그럴 만하지. 자, 조금만 쉬었다가 나가보도록 해. 나는 포션을 제조해야 하니까.”
     데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포션 제조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포근한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루샤크 님께서 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응? 승인.”
     -여, 현성! 어디냐?
     갑작스레 대화를 신청해온 혁. 대화를 승인하자 혁이 말했는데,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 힐러집이야.”
     -헐러집? 거긴 뭐 하러 갔어?
     “아, 아까 모르고 트롤의 영역에 들어가는 바람에 트롤한테 맞아 죽었지.”
     -그래? 쯧쯧, 조심하지.
     트롤에게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들은 혁은 어울리지 않게 걱정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근데, 왜?”
     -아, 좀 들어봐. 오크 무리를 나, 강찬 그리고 경훈 셋이서 쓸었다 이거야! 오크가 레벨 50 대급의 몬스터인 거 알지? 크하하! 우린 고작 30대인데 말이야.
     “그래?”
     -뭐야, 반응이 시원치 않네.
     당연했다. 내 레벨은 이제 18. 그런데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레벨이 ‘고, 작 30대’라니! 나는 투덜대며 말했다.
     “뭐야. 그 말 하력 대화 건 거였어?”
     -응? 현성아, 왜 그래? 화났어?
     “아, 아니.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 그럼 그래라. 아, 우리도 마을로 갈 거야, 지금. 포션이 떨어져서 사냥이 안 될 것 같아, 배고픔 지수도 높아졌고, 이건 허기지면 못하니까. 그럼 푹 쉬고, 이따 밥 같이 먹을 거면 음식점으로 와.
     “그래.”
     [루샤크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후우…….”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더블 샷을 마스터해서 기분이 좋았건만 트롤을 만나 죽어버리다니… 참, 경험치도 깎이고 기분도 말이 아니다. 그나저나 루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오니 바닥에 루카가 배를 깔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이 녀석도 같이 힐러집으로 이동한 거군.
     캉캉!
     루카는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며 짖었다. 나는 루카를 품에 안고 힐러집에서 나왔다.
     “으아… 날씨 좋다! 칙칙한 숲에만 있다 나와서 그런지 기분이 좋구나.”
     캉캉!
     “그나저나 이 녀석들, 지금쯤 마을에 도착했겠지? 음식점에 있으려나.”
     나는 루카를 안은 채 음식점으로 향했다. 잠깐, 여기 음식점이 한둘인가? 이 넓은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어느 음식점을 가야 하는 거지? 나는 즉시 혁에게 대화를 신청했다.
     -아, 현성아.
     “혁아, 음식점이 한둘이야?”
     -무슨 소리야?
     “음식점으로 오라며. 어느 음식점인지 말을 해줬어야지.”
     -아, 여기! 그 벨터의 잡화점 근처에 있는 여관 뒤쪽 골목으로 가서 쭉 걸어오다 보면 ‘Just(저스트)’라는 주점이 있어.
     “얼레? 주점? 술 마셔? 언제 음식점이라더니.”
     -맥주 정도는 마실 수 있지. 뭐, 미성년자라 다른 건 못 마셔. 그리고 주점에서도 안주로 파는 음식이 있잖아. 얼른 와.
     “아, 그래.”
     혁과 대화를 끊은 나는 루카를 머리 위에 올려두고 여관 뒤쪽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도 세인트 모닝에 이런 구석진 곳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골목 구석구석에 깨진 돌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고, 흙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세인트 모닝에 이런 곳도 있었군.”
     골목길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으며 내려가자, 거의 다 부서진 벽에 ‘Just'라고 적힌 나무판자가 붙어 있었다. 이게 주점인가? 나는 나무로 된 문 오른쪽 중간에 달린 녹슨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경첩마저 녹슬어 듣기 거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둑어둑한 주점 안에 접시를 닦고 있는 한 노인 NPC와 몇 개 없는 탁ㅈ 중, 한 자리를 차지한 세 명의 유저가 눈에 띄었다. 주점 안은 겉과 다를 바 없이 무지 낡고 허름했다.
     “레드! 여기야!”
     혁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 공적인 장소에선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캐릭터 이름을 부른다. 혁이 내 캐릭터 이름을 부른 이유는 NPC 앞이라 그런가 보다. 아무튼 나는 셋이 앉은 탁자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도 맥주 마실래?”
     “아니, 다른 음료 없나? 사이다나 뭐나.”
     혁이 맥주잔을 들어 보이며 말하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저씨, 여기 사이다 하나만 가져다주세요.”
     “기다리슈.”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사이다를 주문한 경훈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혁이 이렇듯 진지한 것인지… 경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제 필드 몬스터를 잡는 게 좀 질리기도 하고, 그래서 잠시 생각해본 게 있어.”
     “뭔데?”
     “쉿! 놀라지 마, 레드. 아까 마을로 돌아오면서 들은 건데, 지나가던 유저들이 멍청하게도 정보를 흘리고 가서 말이야.”
     “무슨 정보?”
     “어허, 좀 들어.”
     “아, 미안.”
     내가 품에 안고 있던 루카를 바닥에 내려놓자, 루카는 배를 깔고 엎드려 꼬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NPC 노인은 주문한 사이다를 내 자리에 두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접시를 닦았다.
     “지금 우리 레벨로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망자의 무덤’이라는 던전이 있는 곳의 정보를 입수했지.”
     “망자의 무덤? 그게 뭐 하는 곳이야?”
     “모르겠어. 아무튼 던전인데, 한 번 가보는 게 낫지 않을까? 혹시 알아? 강력한 몬스터가 나올지.”
     “음… 그렇군.”
     나는 사이다 병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고 사이다를 마시기 시작했다. 탁자엔 맛있게 보이는 안주가 즐비해 나는 하나씩 손으로 집어 먹었다.
     “개 사료는 서비스요.”
     언제 왔는지 노인 NPC가 개 사료와 우유가 담긴 넓은 그릇을 탁자 밑에 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저 노인네는 접시만 닦는군. 루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우유 위에 동동 떠다니는 개 사료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근데 언제 갈 거야?”
     “배고픔이랑 갈증지수가 0%가 되면 그때 가는 거지. 아, 휴대하기 쉬운 말린 고기나 말린 과일 같은 걸 사가는 게 나을 거야. 물은 필수고.”
     안주를 집어먹으며 묻자 강찬이 대답했다. 순식간에 탁자 위에 놓인 음식들이 사라지고 빈 접시와 빈 병들만 남게 되었다. 강찬과 경훈, 혁이 계산을 하고 각자 비상식량을 구입해 주점에서 나왔다.
     “길은 알아?”
     “길? 알 필요가 있나, 그냥 워프스크롤 사서 북 찢으면 던전 앞으로 가게 되는 건데.”
     “워프스크롤?”
     “아,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쓰는 일회용 아이템이야. 떠돌이 방랑자 성인이 일정 시간만 되면 마을에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데, 그 NPC한테서 사는 거지. 마침 그 NPC가 있어서 워프스크롤을 싸게 구입할 수 있었어.”
     이번에 혁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세인트 모닝 광장 한가운데로 온 우리 일행. 나는 이 녀석들의 파티에 가입하고 레드 롱 보우를 집어 들었다.
     “자, 그럼 간다! 워프!”
     부욱.
     파팟!
     새 하얀 돌들로 이루어진 세인트 모닝에서 어둡고 칙칙한 동굴 앞으로 이동한 우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주변을 살폈다.
     “좋아! 제일 레벨 낮은 사람이 먼저 들어가는 거다.”
     “미쳤냐?”
     혁이 말에 경훈이 대답했다. 뭐, 우리 파티에서 제일 저랩이 나니까 날 두고 한 소리겠지.
     “비켜봐, 내가 먼저 들어가지. 블레이징 소드!”
     번쩍!
     칼에 강화마법을 건 강찬이 제일 먼저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강찬, 경훈, 나 혁 순서로 따라 들어갔다.
     캄캄한 동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었다. 강찬은 자신의 붉게 물든 검신을 횃불 삼아 천천히 나아갔다.
     “윽! 썩은 내.”
     캉캉!
     내가 코를 싸쥐며 말하자 루카도 크게 짖었다. 숨을 쉴 때마다 나는 썩은 내가 현기증을 일으켰다. 나는 활시위를 활 끝에 걸고 화살 하나를 꺼내 든 채 적안을 개안했다. 조금이나마 시야가 확보되어 앞뒤를 분간할 수 있게 되자 마음이 놓였다.
     크르릉…….
     “쉿! 다들 조용히 하고 멈춰봐.”
     루카가 낮게 목청을 올리자, 다들 숨을 죽이고 무기를 꽉 쥐었다. 나는 눈을 감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궁수라는 직업이 헌터 계열이다 보니 다른 직업에 비해 눈과 귀, 코가 발달되어 있었다.
     우어어.
     크으으.
     아주 희미하게 들리는 구역질나는 신음소리. 무언가를 토하는 것 같은 소리라고 해야 정확한 것 같았다.
     “왜 그래?”
     “저 앞에 몬스터가 있는 것 같긴 헌데,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어. 조심…….”
     경훈의 말에 대답해주고 다시 주위를 줄 때였다. 갑자기 우리가 밝고 있는 땅에서 썩은 손이 튀어나와 혁의 발목을 잡았다.
     “뭐, 뭐야!”
     “으아악! 이게 뭐야!”
     모두들 놀라 혁에게서 떨어졌다. 썩은 손이 나온 구멍에서 썩은 면상이 튀어나오더니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카아악!
     “으악!”
     혁은 본능적으로 손에 들고 있는 메이스로 썩은 면상의 안면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짓이겨진 면상으로 괴성을 지르는 몬스터. 혁은 메이스로 다시 한 번 몬스터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썩은 피와 함께 썩은 뇌수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젠장, 좀비잖아!”
     혁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썩은 손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아, 혁! 그러고 보니 더 아까 레벨업 했으니까 이제 힐 볼 수 있지 않아? 게다가 좀비는 언데드 몬스터니까 데미지를 줄 수 있을 거 아냐.”
     “아, 그렇지!”
     경훈의 말에 혁이 소리쳤다. 얼마나 놀랐으면 잠시 자신의 스킬을 잊었을까. 나는 앞장서서 동굴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를 서로 뜯어먹겠다고 싸우는 좀비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대기를 가르며 날아가 한 좀비의 머리를 꿰뚫었다.
     푹!
     끄어어…….
     좀비들의 초점 없는 시선이 내 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내 쪽을 향해 느릿느릿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들었다.
     “힐 볼!”
     우웅.
     성스러운 새하얀 빛이 메이스를 들지 않은 혁의 왼손바닥에 조금씩 모이더니 이내 배구공만 한 구체의 모습을 갖추었다. 혁이 손짓하자 성스러운 구체가 어둠속에 빛 가루를 흩날리며 날아가 좀비의 머리에 부딪혔다. 힐 볼과 함께 좀비의 머리는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오! 이거 좋은데? 다시 힐 볼!”
     혁이 힐 볼을 시전하는 동안 경훈은 땅을 박차고 나아가 좀비의 면상에 강철 같은 주먹을 꽂았고, 강찬도 이에 질세라 좀비의 썩은 머리를 하나씩 두 동강내기 시작했다.
     “더블 샷!”
     두 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좀비의 머리와 가슴팍을 꿰뚫었다.
     왕왕!
     내가 쏜 두 발의 화살이 좀비의 머리와 가슴팍을 꿰뚫자, 루카가 좀비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고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그러자 좀비의 썩은 피가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고, 루카의 새 하얀 털도 썩은 검은 피로 물들여졌다. 더러운 자식…….
     “가랏!”
     힐 볼의 시전을 마친 혁이 외치며 마지막 남은 좀비에게 손짓하자 힐 볼은 쏜살같이 날아가 좀비의 머리를 소멸시켜버렸다.
     “나이스! 음… 그런데 현성아, 저 똥개는 매번 뭘 뒤집어쓴담?”
     “알 게 뭐야, 나도 이제 포기다.”
     좀비를 쓰러뜨린 혁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역시 신성계열의 마법을 쓰는 파티원이 있어서 그런지 망자의 무덤이라는 던전을 처음부터 쉽게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동굴 깊이 들어갈 때마다 좀비의 수는 점점 증가했고 그만큼 더 많이 잡을 수 있었다. 필드에서와는 달리 혁의 활약은 대단했고, 그로 인해 생각보다 빠른 레벨업을 할 수 있었다.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뭐, 이렇게 한꺼번에 한 건 아니고, 사냥을 하면서 3업을 했다는 것이다.
     “오, 얘들아 잠깐만!”
     “왜 그래? 또 레벨업이냐?”
     “빙고!”
     나는 입가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상태 창을 열었다.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궁수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21
     생명력(HP). 530
     마나(MP). 320
     스태미나(SP). 340(배고픔 수치 10%/ 갈증 5%)
     힘 87
     체력 15
     민첩 101
     손재주 354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175~225
     방어력 4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15
     “좋아, 이번엔 스탯 포인트를 분배시켜야겠어. 데미지도 나날이 늘어나는데? 근데 이거 데미지랑 몹 잡는 거랑 별로 비례가 안 되는 거 같아. 뭐 약점만 공격하면 그만인 걸.”
     “멍청하긴. 그나저나 너 최소, 최대 데미지는 몇이야?”
     스탯 포인트를 분배하고 있는 나에게 혁이 물었다.
     “나? 아직 스탯 포인트를 분배 안 했으니까 175~225지.”
     “히엑! 뭐야! 지금 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경훈이도 맥스 데미지가 200도 안 되는데.”
     “그래? 손재주 스탯이 높은 탓인가?”
     스탯 포인트를 분배하고 상태 창을 닫으려는 도중에 강찬이 소리쳤다.
     “잠깐! 우리의 레벨은 지금 30대, 내가 32, 경훈이 34, 혁이 31이지. 현성이 넌… 21이 지?”
     “응, 그렇지.”
     “궁수는 데미지가 손재주 스탯에 비례할 거고, 그럼 손재주 스탯은 몇이라는 거야?”
     이봐, 그렇게 진지하게 물어볼 것까지 없잖아. 강찬의 말이 끝나자 혁과 경훈도 궁금증을 못 참는 호기심 많은 어린 고양이처럼 변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건 혁의 썩소(썩은 미소)였다.
     “아, 저… 그러니까. 이제 스탯 포인트를 분배했으니 손재주가 363이지.”
     나의 대답에 루카를 뺀 나머지 녀석들의 얼굴이 굳었다 뭐, 놀랄 만도 하지. 내가 궁탑의 제자라는 걸 아직 모르고 있을 테니. 이때, 눈치 빠른 강찬이 입을 열었다.
     “혹시, 너… 궁탑의 제자냐?”
     “아! 맞아! 모든 직업을 보면 다 특이한 호칭을 얻게 되잖아!”
     강찬의 말에 혁이 덩달아 소리쳤고, 가만히 듣고 있던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뭐, 다 불어야겠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음, 드디어 밝힐 때가 되었군. 내가 바로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인 레드 파운. 그리고 여기 있는 이 녀석은 궁탑의 제자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전설 속의 동물이지.”
     멋들어지게 설명을 늘어놓은 나는 오른손으로 루카를 가리켰다.
     “저 똥개가?”
     한쪽 다리를 들고 동굴 벽에다 오줌을 갈기는 루카를 손으로 가리키며 혁이 말했다. 아주 주인을 개망신을 주는구나.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꽤 많이 한 것 같다. 요금도 비싼데.”
     강창이 루카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고, 그럼 그렇게 하자.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    *     *
     망자의 무덤.
     레벨 30대의 유저들이 주로 찾는 무대. 하지만 망자의 무덤은 레벨 30대의 유저들이 사냥을 하기엔 너무나도 벅찬 던전이다. 얼마 전, 어느 한 유저가 발견한 2층의 입구. 레벨 30대의 그저 평범한 유저였다.
     좀비 무리의 급습으로 도주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된 2층 입구. 그 입구가 열린 후부터 수많은 유저가 망자의 무덤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망자의 무덤 2층으로 들어갔다 다시 1층으로 살아나온 유저는 없었다.
     “왜일까?”
     집으로 돌아온 나는 멀티비전을 통해 망자의 무덤을 검색해 망자의 무덤에 대한 정보를 볼 수 있었다. 다시 1층으로 살아나온 유저가 없다니… 하지만 기막힌 반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건 바로…….
     “하… 하하, 고작 이런 이유 때문에?”
     고작 이런 이유.
     ‘2층에서 사냥을 하다 보면 1층과는 달리 무지 넓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1층으로 되돌아가느니 차라리 워프 스크롤을 사용해 마을로 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라는 이유였다.
     “에라이, 뭐야! 기대하고 있었구만.”
     나는 푹신한 소파 위에 리모컨을 팽개쳐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컴의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말이다.
    「주인님, 물건을 그렇게 마구 팽개치면 고장이……」
     “아, 알아, 알아. 그리고 소파 위에 던졌으니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컴, 멀티비전 좀 꺼줘.”
    「네, 또 게임을 하실 건가요?」
     “뭐, 그래야지.”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너무나도 익숙한 게임기기. 방 한구석에 쌓인 잡동사니들은 팽개쳐둔 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무지 아끼던 것들인데…….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21.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에”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알 수 없는 차원의 구멍으로 빠지는 느낌 후 접속한 가상현실 세계. 역시 현실보다 더더욱 편한 듯하다. 아, 이 상쾌함…이라고 해야 정상이겠지만, 넷룸에서 로그아웃했던 곳이 하필이면 망자의 무덤. 접속하자마자 썩은 내가 코를 찌르니 시작했다.
     “웩! 더럽다, 정말.”
     캉캉!
     “오잉? 루카, 넌 또 어떻게 나온 거야? 내가 접속하면 이 녀석도 같이 음… 뭐랄까, 아무튼 나오는 건가?
     캉캉!
     “뭐, 어때. 그럼 먼저 적안!”
     적안을 개안하자 확보된 시야. 나는 활을 꺼내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좀비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랐으므로 긴장을 해야 했다. 이때, 한 발자국 앞에서 동굴 바닥을 뚫고 나오는 재수 없게 생긴 면상을 볼 수 있었다.
     “백 스텝!”
     나는 백 스텝을 이용해 재빨리 뒤로 빠진 뒤 좀비의 머리에 화살을 쏘았다. 좀비는 뇌를 손상시키면 죽기 때문에 죽이기 쉬운 사냥감이기도 했지만, 움직임이 느려 더더욱 잡기 쉬웠다.
     뭐랄까, 오크보다 잡기 쉬웠다고 해야 하나? 뭐, 오크가 좀비보다 훨씬 강한 몬스터라 그럴 수도 있었다.
     와르르.
     쾅!
     어디선가 들려온 묵직한 소리. 나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귀에  온 신경을 집중시하고 자세히 듣자, 이 묵직한 소리가 대충 어디서 들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긴가……?”
     퀵 스텝을 이용해 순식간에 목표지점으로 오게 된 나. 그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서로 싸우는 좀비들, 몸싸움을 하다 그들이 무심코 건드린 돌덩이 하나로 인해 동굴 벽의 일부가 와르르 무너졌던 것.
     “허허.”
     나를 놀라게 하다니 벌을 줘야겠군. 아니, 벌을 줄 것이다. 나는 화살 두 개를 꺼내 활등에 대고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는 녀석들의 죽음을 알리는 예고, 나는 활시위를 놓았다.
     쐐애액.
     화살은 어둠을 가르며 날아가 좀비 무리 중, 제일 심하게 치고받는 두 좀비의 머리와 다리에 간신히 보일만큼 꽂혔다.
     카르륵! 우어어!
     치열하게 몸싸움을 하던 두 좀비의 시선이 내게로 고정되었고, 다른 서너 마리 좀비마저 나를 인식하게 되었다.
     “얼레? 안 되겠군. 루카, 심하게 가까이 붙은 녀석들은 네가 처리해줘. 뭐, 거의 가까이 오진 못하겠지만.”
     왕왕!
     크르르…….
     느릿느릿 나에게 다가오는 좀비들. 나는 재빨리 화살을 꺼내 활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목표물은 제일 앞장서 있는 한 녀석. 비쩍 마른 볼, 볼 살이 썩어 없어져 썩은 이빨이 훤히 보였다.
     그럼 잘 가도록.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고, 화살은 이내 좀비의 머리를 꿰뚫었다. 나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좀비들의 머리에 화살을 마구 쏘았다. 좀비는 몇 없었으므로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한 마리가 썩은 면상을 내 얼굴 바로 앞까지 들이밀고 썩은 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카아악!
     “으, 으악! 배, 백 스텝!”
     나는 재빨리 백 스텝으로 거리를 두고는 재빨리 보우 어택으로 좀비를 쳐냈고, 루카는 내 활에 맞아 밀려난 좀비의 목덜미를 물고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좀비의 썩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순식간에 전멸된 좀비들.
     나는 망자의 무덤 깊은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들어가자 뒤엉켜 서로들 뜯어먹는 구울들을 볼 수 있었다. 그에 화살 하나를 꺼내 들어 활시위를 당기려는 순간, 내 맞은편에서 한 유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오르는 화염구가 내 앞에 나타날 지어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순식간에 어둠 속엣 빛을 발하는 네 개의 타오르는 구체가 기염을 토해내며 뭉쳐 있는 구울들을 향해 날아가 폭발했다. 언데드 몬스터에게 신성마법 다음으로 치명적인 것이 화염계열의 마법. 언데드 몬스터 중 약한 측에 속하는 구울들은 네 개의 파이어 볼에 의해 전멸당하고 말았다.
     “라이트!”
     번쩍!
     마법사 유저가 외치자 빛을 발하는 새하얗고 둥근 구체가 시전자 주변을 밝게 비추었다.
     “에? 호, 혹시, 레드 파운 아닌가요”
     “레온?”
     “아, 반가워요.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블링크!”
     레온은 근거리 공간이동 마법으로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고, 나도 손을 내밀어 레온과 악수했다. 레온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혼자 오신 거예요?”
     “네.”
     “마친 잘됐네요.”
     “레온도 혼자 오셨나 봐요? 동생이 없는 걸 보니.”
     “요즘 이래저래 바쁜가 봐요.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으니.”
     오랜만(?)에 만난 레온이라는 마법사 유저. 뭐, 이 넓고 넓은 세릴리아 월드에서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유저 중 한 명이라 그런지 너무 반가웠다.
     “저, 레드. 죄송하지만 먹을 것 좀 없나요? 던전에 좀 오래 있었는데 배고픔 지수가 좀 심하네요. 식량도 전부 떨어져서…….”
     “아, 그럼 이거라도 드실래요? 아이템 창 오픈!”
     파밧!
     나는 아이템 창엣 말린 고기 두 개와 말린 과일 두 개 그리고 물병을 꺼내 레온에게 내밀었다. 레온은 미안한지 표정이 조금 전처럼 밝지 않았다. 뭐, 그래도 잘만 먹네.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레온은 말린 고기와 말린 과일은 물론 물도 반만 남기고 순식간에 해치웠다.
     나는 물이 반 정도 남은 물병을 다시 아이템 창에 넣어두고 레온이 이제 막 만든 파티에 참여했다. 레온의 라이트 마법 덕분에 주변이 환해 혼자 다닐 때보다 긴장이 덜 되었다. 뭐,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망자의 무덤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도 이제 적응이 되었는지 더 이상 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동굴 깊이 들어가면서 레온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레드, 실례지만 던전에 오는 게 이번이 처음인가요?”
     “내.”
     “그렇군요.”
     “저, 레온. 던전에는 원래 언데드 몬스터들이 많은가 봐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이곳이 언데드 몬스터들의 소굴이라 그렇지요, 비록 하급이지만. 뭐, 2층에는 더욱 강한 몬스터들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2층으로 가는 주인데 괜찮겠어요?”
     2층으로 향하고 있다는 레온의 말에 나는 잔뜩 부풀어 올랐다. 왠지 모를 기대감으로.
     “네, 기대되는군요.”
     “아, 이제 거의 다 왔어요.”
     레온이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동굴 벽을 손으로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커먼 동굴 벽에서 조금 특이하게 생긴 튀어나온 돌을 손바닥으로 밀어 넣자, 동굴 벽에 금이 생기더니 이내 쿠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자, 가죠.”
     “아, 예. 가자, 루카!”
     캉캉!
     “타오르는 네 개의 화염의 창이 내 앞에 나타날 지어다, 파이어 랜스!”
     푸푹. 화르륵.
     카아아!
     “레온, 저 녀석들은 뭐죠? 좀비 같은데?”
     “구울입니다. 좀비보단 강한 녀석들이죠. 저 녀석들은 좀비들과는 달리 죽었거나 썩은 시체를 먹지요.”
     2층에서 몬스터들을 찾아 헤맨 지 20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 만난 구울들. 좀비들과는 달리, 옷을 하나도 입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인간의 모습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썩어 없어졌고, 피부색도 어두운 회색에 이빨은 전부 날카로웠다. 움직이는 속도도 좀비보다 빨랐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나는 재빨리 화살 두 개를 꺼내 들고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쳤다. 목표는 방금 전 선제공격을 한 레온에게 달려드는 구울들. 나는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더블 샷!”
     동굴 안에서 내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고, 그와 동시에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며 두 마리 구울의 머리에 하나씩 꽂혔다.
     “실드!”
     쾅!
     캬르르…….
     구울의 시퍼런 손톱이 레온의 몸을 감싸고 있는 새하얗고 둥근 구체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이용해 구울에게 다가갔다.
     “보우 어택!”
     퍼억!
     레드 롱 보우의 활등이 구울의 안면을 강타했다. 그러나 구울은 휘청하기는커녕 썩은 이를 드러내며 당장이라도 내 살점을 찢어발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배, 백 스텝!”
     나는 재빨리 백 스텝을 이용해 뒤로 빠졌다. 역시 좀비와는 다른 스피드였다. 재빨리 피하지 않았더라면 구울의 이빨에 목덜미가 찢겨졌을 테니 말이다. 백 스텝으로 간신히 구울의 공격을 피한 나는 재빨리 화살 하나를 꺼내 들고 다시 백 스텝을 이용해 뒤로 빠르게 빠져 나와서는 재빨리 구울의 이마에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구울의 이마에 깊숙이 박혔고 구울은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요.”
     레온이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실드를 해제하며 말했다. 정말이지. 내 등과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이 방금 전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었다. 나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동굴의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언제 또 구울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면 안 될 것 같았다.
     [파티 퀘스트. 구울 헌팅]
     세체들이 살아 움직인다! 저주받은 망자의 시체가 혼이 빠진 채 이승을 헤매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인간을 증오하고 원한을 가지고 있다. 사악한 좀비와 구울을 퇴치하라!
     잡은 좀비의 수. 0/1000
     잡은 구울의 수. 0/500
     보상. 알 수 없음
     이때 갑작스레 나타난 직사각형의 입체 창과 함께 ‘구울 헌팅’이라는 파티 퀘스트가 주어졌다. 갑자기 파티 퀘스트라니, 이게 무슨…….
     “음… 레드, 아무래도 이거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이 넓은 던전에서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좀비와 구울을 이렇게 많이 잡아야 한다니…….
     “하, 하하. 그, 그러게요. 대충 한 달 이상 걸릴 것 같은데. 아무래도… 뭐, 그래도 퀘스트인데 한번 잡아보죠?‘
     “그럴까요?”
     “네, 오늘은 그럼 여기까지만 해야겠네요. 곧 48시간이 채워질 시간이거든요.”
     “그래요? 그럼 다음에 뵈어요.”
     “네. 로그아웃!”
     레온도 페인의 길을 걷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마법사란 직업은 웬만해선 쉽게 해낼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뭐, 판타지의 꽂은 마법이니까 마법사를 해볼까 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직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나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볼까? 일찍 자두는 것이 좋겠어. 그럼 다음에 보자. 루카.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위잉.
     헤드셋의 전원이 꺼지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게임기기 캡슐의 문이 열렸고 나는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후아암… 아, 잠 온다. 컴, 내가 게임하는 동안 온 메시지는 없지?”
     「네, 없습니다.」
     “응.”
     컴의 말에 짧게 대답한 나는 침대에 푹 쓰러졌다. 오늘따라 왜 이리 침대가 포근하게 느껴지는 걸까. 침대에 누운 나는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나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오늘도 신나게 놀기만 했군. 나는 입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잠들었다.
     

    제2장   레인저

     파티 퀘스트 구울 퇴치를 받은 지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학교에 다녀와서 한 것이라곤 레온과 함께 망자의 무덤을 돌아다닌 것밖에 없었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좀비의 수만 채우면 다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된다. 퀘스트를 하면서 좀비와 구울만 잡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경험치를 얻고 또 많은 레벨업을 할 수 있었다.
     “퀘스트 창, 오픈!”
     파밧!
     [파티 퀘스트, 구울 헌팅!]
     시체들이 살아 움직인다! 저주받은 망자의 시체가 혼이 빠진 채 이승을 헤매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인간을 증오하고 원한을 가지고 있다. 사악한 좀비와 구울을 퇴치하라!
     잡은 좀비의 수. 989/1000
     잡은 구울의 수. 478/500
     보상. 알 수 없음
     “좋아, 레온! 이제 조금만 더 잡으면 될 것 같은데요?”
     “네, 이제 조금만 더 힘냅시다. 라이트!”
     번쩍!
     자, 이제 할 일은 좀비와 구울을 마저 잡는 것. 한 달간 잡았으니 이제 어디서 튀어나올 지는 훤히 알고 있었다. 나는 적안을 개안하고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었다.
     크르르…….
     “레온!”
     “네, 거대한 화염의 장벽이 내 앞의 적을 가로막으리라! 파이어 윌!”
     화르륵!
     레온이 시전한 거대한 불의 장벽 뒤로 대여섯 마리의 좀비가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땅속에 숨어 있다가 기습할 생각이었나 보다. 하지만 이 녀석들보다 앞서서 나와 레온 그리고 루카는 적의 패턴을 꿰뚫어보고 있었으니 통할 리가 없었다. 뭐, 지들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겠지만 말이다. 좀비의 머리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자 루카는 동굴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짖어댔다. 나는 화살 두 개를 꺼내 들고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건 다음,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타오르는 화염이 파도치리니, 파이어 웨이브!”
     “더블 샷!”
     화르륵.
     푸슉.
     레온이 외치자 시전자의 몸 주위에서 커다란 화염이 형성되어 파도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화염이 파도치며 불의 장벽을 뚫고 좀비들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고, 내가 쏜 두 개의 화살은 발버둥치는 한 마리 좀비의 가슴팍과 눈에 깊숙이 박혔다.
     “이제 좀비 다섯 마리만 잡으면 되는군요.”
     “네. 가자, 루카!”
     캉캉!
     좀비들이 모두 죽은 것을 확인한 우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익숙해진 썩은 내, 아니 이제 후각이 마비되어 이 동굴에서 나는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비와 구울이 죽을 때 뿜어져 나오는 썩은 피 냄새는 구별할 수 있었다. 우리는 1층을 돌아다니며 한 마씩 나타나는 좀비들을 해치웠고, 다시 2층으로 내려와 구울을 찾기 시작했다.
     “레온, 잠시 쉬었다 할까요? 허기지기 시작하는데. 갈증 지수도 많이 올라갔고요.”
     “음, 그럼 여기서 잠깐 쉴까요?”
     “네. 상태 창 오픈!”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궁수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38
     생명력(HP). 560
     마나(MP). 350
     스태미나(SP). 370(배고픔 수치 10%/ 갈증 5%)
     힘 87
     체력 15
     민첩 107
     손재주 363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185~240
     방어력 4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85

     “음, 한 달 도안 17업. 하하, 꽤 많이 한 것 같네요. 그럼 아이템 창 오픈!”
     파밧!
     나는 아이템 창에서 준비해온 말린 고기와 물 그리고 말린 과일 등을 꺼냈다. 레온도 자신이 준비해온 식량을 꺼내 동굴의 커다란 돌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말린 고기를 루카에게 던져주자 루카는 질겅질겅 씹어 먹어댔다. 그런데 그때 밥 먹을 땐 캐도 안 건드린다는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구울 한 마리가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얼레? 레온! 구, 구울이 다가오고 있어요!”
     “음?”
     입에 음식을 잔뜩 물고 있는 레온. 마법 캐스팅을 할 수 없는 것 같…았지만 레온은 빠르게 수인(手認)을 맺고 짧게 외쳤다.
     “파이어 버스트!”
     퍼엉!
     커다란 화염구가 기염을 토해내며 어둠을 헤치고 날아가 구울에게 명중했고, 그로 인해 구울의 썩은 몸뚱이가 터졌다. 하지만 뭐, 이쪽도 터진 건 마찬가지. 레온이 입에 음식을 잔뜩 문 상태에서 ‘파이어 버스트’를 외치는 바람에 입 안에 있던 음식물이 80%는 튀어나온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이제 잡은 구울의 수는 479마리, 앞으로 스물한 마리만 더 잡으면 된다. 나는 충분히 베를 채우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카도 배를 채우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앞발을 들고 캉캉 짖어댔다.
     덜그럭.
     덜그럭.
     “……!”
     크르르…….
     덜그럭.
     어디선가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 들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엔 루카가 무턱대고 짖어서 많이 애를 먹었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 있었다. 그저 낮게 으르렁거릴 뿐, 마구 짖어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때, 잠자코 있던 레온이 말했다.
     “스켈레톤이군요.”
     “스켈레톤이요? 저 녀석들, 상대하기 골치 아픈데.”
     스켈레톤은 머리를 정확하게 맞히지 않으면 안 되는, 정말 궁수로서 사냥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뭐, 스켈레톤이 나타날 때마다 레온이 처리했지만(스켈레톤을 처음 본 루카가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어 다리를 문 적도 있었다). 화살통에 도로 화살을 꽂아 넣는 나를 보며 레온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타오르는 화염구가 내 앞에 나타날 지어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파이어볼!”
     레온이 외치자, 타오르는 세 개의 구체가 시전자의 몸 주위를 빠르게 맴돌며 더욱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세 구의 스켈레톤. 레온이 손짓하자 레온의 주변을 맴돌던 화염구 중 하나가 스켈레톤 한 구에게 날아가 몸통에 명중했다.
     퍼엉!
     레온이 다시 손짓하자 나머지 두 화염구가 남은 스켈레톤 두 구를 박살내버렸다. 정말이지 레온이 없었다면 스켈레톤을 잡느라 꽤 애를 먹었을 것이다. 스켈레톤 세 구를 순식간에 처리한 레온은 말없이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자, 루카!”
     캉캉!
     레온을 따라 동굴 안을 한참 걷자. 무언가를 뜯어먹고 있는 여섯 마리의 구울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화살 하나를 꺼내 구울의 머리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대기를 가르며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구울의 머리에 깊숙이 박혔고, 화살을 맞은 구울은 그대로 머리를 땅에 처박고 일어나지 못했다.
     뭘 그렇게 처먹느라 바쁜지 동료가 죽은 것도 모르고 마루 뜯어먹고 있는 구울들. 나는 이번에 화살 두 개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더블 샷을 쏘기도 전에 레온이 갑자기 활을 든 내 왼쪽 팔을 잡고 말했다.
     “제가 한꺼번에 잡겠습니다. 타오르는 네 개의 화염의 창이 내 앞에 나타날 지어다, 파이어 랜스!”
     붉게 타오르는 기다란 화염의 창 네 개가 레온의 몸 주위를 천천히 회전했다. 레온이 손짓하자 타오르는 네 개의 창은 네 마리 구울들의 머리를 꿰뚫고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마리 구울이 뒤늦게 눈치 채고 달아나려는지 황급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내 앞의 적들을 베리라, 원드 커터.”
     서걱.
     레온의 윈드 커터에 구울의 머리는 두 동강나 땅에 내팽개쳐졌다.
     “이야… 멋져요, 레온. 이제 열다섯 마리만 잡으면 되겠군요.”
     “하하, 네. 이제 조금만 더 힘냅시다!”
     캉캉!
                   *    *     *
     “아, 따분하다. 야, 이러지 말고 넷룸이나 가자.”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소년들. 그중 갈색 머리를 삐죽삐죽 세운 소년이 다리를 꼬고 앉아 벤치에 등을 기댄 채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검푸른 색 긴 머리를 가진 소년이 입을 열었다.
     “그럴까? 그러데 요즘 강찬이랑 현성이 이 녀석들은 뭐가 그리 바빠서 한 달 동안이나 놀지 못하는 거야?”
     “몰라, 그냥 우린 넷룸이나 가자!”
     갈색의 삐죽머리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푸른 색 긴 머리를 가진 소년의 팔을 끌어당기며 소리치자, 검푸른 색 긴 머리 소년은 할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넷룸으로 향했다
     
     [데시카 Lv. 46. 접속하사겠습니까?(에/아니요)]
     [루샤크 Lv. 45. 접속하사겠습니까?(에/아니요)]
     “예.”
     “예.”
     파밧!
     파밧!
                   *    *     *
     “마지막 한 마리! 죽어엇!”
     쐐액.
     푸욱!
     쿠에엑!
     [퀘스트 완료!]
     퀘스트 완료, 보상 [구울 헌터 배지]
     경험치 EXP. ???
     마지막 구울 한 마리를 잡자 ‘퀘스트 완료’라는 창과 함께 아이템 창에 ‘구울 헌터’라는 배지가 생성되었다.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배지를 왼쪽 가슴 부분에 달았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배지를 떼어 아이템 창에 넣으려 하자 레온이 입을 열었다.
     “레드, 잠시만! 떼지 말아보세요. 이 배를 달면…….”
     “음? 왜요?”
     “음, 정보 보기를 해봤는데, 호칭이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에서 ‘구울 헌터’로 변경되었네요.”
     “정보 보기? 그건 또 뭐예요?”
     “음, 모르고 계셨군요. 상대방의 정보를 보는 거예요. 완전히 다 보는 것은 아니고 상대방의 이름이나 호칭 같은 그런 간단한 것만 볼 수 있죠.”
     “아하! 레벨이나 직업은 못 보나 봐요?”
     “네, 호칭. 즉, ‘타이틀’과 같은 거예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배지를 떼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파티장인 레온이 직사각형의 입체 창의 퀘스트 완료 버튼을 누르자 번쩍 하는 소리와 함께 듣기 좋은 음성이 들려왔다.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얼레? 이게 뭐야!”
     순식간에 오른 레벨. 소리치는 나에게 레온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레드? 뭐가 잘못됐나요?”
     “아, 아니 잘못된 건 아닌데 레벨이 너무 사기처럼 올라버렸어요. 무려 5레벨업을…….”
     “아하! 아까 그 EXP가 물음표였던 게 랜덤으로 경험치를 분배해주는 건가 봐요. 저도 레벨업을 했는데 3레벨업 했네요. 저도 사기성 짙은 레벨업 때문에 걱정했는데 레드는 더 심하네요. 하하.”
     “그렇군요. 음? 소환수이기 하지만 루카도 파티 인원 중 하나인데… 정보!”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샤>
     정보: 세릴리아 월드이 단 한 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설의 흰 늑대.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한 전설의 흰 늑대이다.
     현재 상태: 새끼
     Lv. 18
     HP: ???
     MP: ???
     상태: 매우 건강
     친밀도: 100
     배고픔: 0% 목마름: 5%
     캉캉!
     “이 녀석도 3레벨업 했네요.”
     나는 오랜만에 루카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아 들었다. 간만에 안아주니까 무지 좋아하는군. 퀘스트를 완료한 나는 레온과 함께 1층으로 올라와 던전 출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때, 갑작스레 땅에서 썩은 손이 튀어나오며 썩은 면상까지 딸려 나왔다. 하지만 레온과 나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좀비들에게 이미 적응된 터라 놀라지 않고 무슨 짓거리를 하나 지켜보았다.
     “구어어… 어?”
     “응? 뭘 봐?”
     캬아아!
     날 보더니 갑자기 기겁을 하며 도로 땅속으로 들어가는 좀비. 나는 영문을 모른 채 진공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듯 좀비가 쏙 들어간 땅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아! 레드! 그 호칭이 좀비와 구울들에게 치명적인가 봐요.”
     “예? 무슨 말씀이세요?”
     “구울 헌터, 즉 좀비와 구울 사냥꾼이라는 거죠. 사냥감이 사냥꾼의 눈에 띄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아! 그런 거군요!”
     나는 멍하니 레온의 말을 듣고 있다 손뻑을 치며 소리쳤다. 언제라도 망자의 무덤에 오게 될 일이 있으면 이 배지를 착용하고 와야겠군.
     “이야~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햇빛이야?”
     캉캉!
     내가 기지개를 키며 소리치자,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루카가 땅으로 폴짝 뛰어내리며 짖었다. 수도 세인트 모닝의 분수대 광장. 언제나 그렇듯 수많은 유저들로 시끌벅적했다. 레온은 급한 볼일이 있다면서 바로 로그아웃을 했다. 뭐, 대학생이니 바쁘겠지. 나는 루카를 품에 안고 오랜만에 궁수의 탑으로 향했다.
     궁수의 탑 앞 운동장엔 궁수 지망생 유저들이 교관과 조교에게 테스트를 받고 있었는데, 마치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뭐, 궁탑의 제자는 더 이상 나오지 않겠지만 말이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궁탑의 제자는 원래 여섯 명까지만 키워야 하는 설정이었는데, 손재주가 유난히 높은 나를 본 로시토가 한눈에 뽕 갔다나 뭐래나. 아무튼 그래서 나를 일곱 번째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궁수의 탑에 들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경비병 한 명이 나를 가로막았다.
     “궁탑의 제자 또는 입장 허가증이 없는 자는 출입할 수 없습
    니다.”
     “얼레? 저는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레드 파운인데요…….”
     “지금 당신의 호칭은 ‘구울 헌터.’ 호칭을 변경해주시 바랍니다.”
     “아.”
     나는 투덜대며 배지를 떼어내 아이템 창에 휙 던져두고 경비병을 밀치며 궁수의 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제일 꼭대기 층으로 올라와 로시토의 방문을 여니, 로시토가 활짝 웃고 있었다. 왜 저런 썩소(썩은 미소)를 짓고 있는 거야?
     “음? 뭐예요, 그 썩소는?”
     “허허. 오랜만이네, 레드. 자네가 요즘 점점 성장하는 것 같아 기쁘군.”
     “그래요?”
     나를 빤히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는 로시토. 에메랄드를 박아 넣은 것 같은 그이 초록색 눈동자가 매우 따뜻하게 느껴졌다. 웃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음? 자네 레벨이 43까지 올랐나? 흐음. 더블 샷은 마스터했군그래.”
     “에?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네. 음, 레인지 마스터리도 많이 수련했구먼.”
     내 레벨과 스킬 상태가 어떤지 꿰뚫어보고 있는 로시토.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뭐, 나의 스승이라 내 정보가 보인다는 억지가 짙은 설정이구먼. 나는 피식 웃으며 스킬 창을 열어보았다.
     “스킬 창 오픈!”
     파밧!
     <Skill>
     레인지 마스터리(Ranged Mastery)
         (120.01300.00%)
     보우 어택(Bow Attack)
         (52.0/100.00%)
     적안(赤眼)
         (88.10/100.00%)
     백 스텝(Back Step)
         (49.49/100.00%)
     크리티컬(Critical)
         (77.78/100.00%)
     퀵 스텝(Quick Step)
         (97.93/200.00%)
     더블 샷(Double Shot)
         Master
     “우와! 스킬 창을 한 달 동안 안 열어봤는데, 그동안 이렇게 올라가 있었네.”
     스킬 창을 본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시토가 많이 올랐다고 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레인지 마스터리가 15%에서 이렇게 늘다니, 이것도 약간 사기성이 짙은 것 같았다.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스킬 창을 훑어보고 있자, 로시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레드, 이제 다른 스킬을 가르쳐줘도 되겠군그래.”
     “음? 다른 스킬이라뇨?”
     “‘트리플 샷(Triple Shot0'이란 스킬일세. 세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쏘는 스킬이지.”
     “더블 샷의 업그레이드 버전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네. 더블 샷이 그냥 쏘는 것의 두 배의 위력을 준다면 트리플 샷은 세 배의 위력을 준다네. 당연히 배우고 싶겠지?”
     로시토의 말에 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심하게 끄덕였다. 왠지 모를 이 기대감. 트리플 샷이라는 스킬이 얼마나 좋은 건지 그리고 얼마나 강한 건지 얼른 시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2차 전직을 하고 나서 배울 수 있는 스킬이라네. 지금 상태론 입수도 할 수 없지.’라고 로시토의 말을 듣자 나는 머리를 뭔가로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2차 전직은 몇 레벨 때 하는 거예요?”
     “150일세.”
     “150이요?”
     “그렇다네.”
     “…….”
     “자네 말고 다른 사형들은 모두 레벨 100을 넘은 지 오래네.”
     “그, 그래요?”
     로시토의 말에 나는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레벨 150에 2차 전직이라니, 어느 세월에 레벨을 올려서 어느 세월에 2차 전직을 할까. 그런 생각으로 시무룩해져 있을 때 로시토가 다시 입을 열었다.
     “2차 전직은 두 종류로 나뉘어져 있네. 헌터와 사수. 헌터는 트리플 샷, 애로우 리볼버, 애로우 레인처럼 그리 강하진 않지만 빠른 공격을 할 수 있다네. 그리고 사수는 파워 파이터라고 볼 수 있는데, 파워 샷, 더블 파워 샷, 애로우 스트라이크 같은 빠르지 않지만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는 공격을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런 말 해봤자 어차피 레벨 150때 2차 전직을 할 수 있는데 지금 알아서 뭐 해요.”
     투덜대는 나를 보며 뭐가 그리 좋은지 로시토는 다시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레벨 150때 할 수 있는 2차 전직만 말했을 뿐이니 그렇게 기죽을 것 없네.”
     “그럼 또 다른 방법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네. 헌터와 사수 말고 또 다른 직업이 있지. 바로 ‘레인저’라는 직업이네. 꼭 150이 될 필요도 없다네.”
     “레, 레인져?”
     나는 로시토의 말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활짝 웃던 로시토의 얼굴이 갑자기 차갑게 변하며 말했다.
     “단, 지금 가지고 있는 1차 스킬을 전부 마스터해야 하네. 그리고…….”
     “그리고?”
     “레벨 300때 하는 3차 전직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
     “3차 전직도 있었나요? 그리고 레벨 300…….”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로시토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3차 전직 후엔 여러 가지 스킬을 쓸 수 있다네. 예를 들어 화살을 꺼내고 활시위를 당기면서 ‘파이어 애로우!’라고 외치면 화살촉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네. 그리고 당겼던 활시위를
    놓게 되면 화살이 날아가면서 불로 뒤덮이는 것이지. 마법사들이 쓰는 파이어 애로우와 좀 다르다네. 그 외에 많은 화려하면서도 강한 공격들을 할 수 있지.”
     “그럼 레인지는요?”
     “2차 전직을 레인지로 하게 된다면 3차 전직을 할 수 없다네.”
     “에이… 뭐예요, 레인지는 왠지 안 끌리네요. 차라리 지금 당장…….”
     “하지만.”
     그의 말에 야유를 하듯 대꾸하는 내 말을 뚝 끊으며 로시토가 다시 말했다.
     “헌터와 사수가 쓰는 스킬 두 가지를 전부 쓸 수 있지. 어때, 해보겠나? 레인저가 되어 레인지 마스터가 되어보겠나?”
     로시토의 말에 나는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레이저가 되어 레인지 마스터가 된다면… 단기간 안에 강해질 수 있지만 후반에 3차 전직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지금 레인저가 되지 않고 레벨을 150까지 올려 2차 전직을 하게 된다면 단기간 안에 강해질 수 없지만 후반기에 3차 전직을 하면서 더더욱 강해 질 수 있다. 나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지만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딱 잘라내지 못하고 있었다.
     “허허. 꽤 우유부단하군, 자네는.”
     로시토의 얼굴은 다시 따뜻하게 변해 빙긋 웃고 있었다. 이놈의 영감탱이는 오늘따라 유난히 썩소를 보여주네. 곰곰이 생각을 하던 나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로시토, 레인저가 되면 레인지 마스터가 되는 건가요?”
     “헌터나 사수로 2차 전직을 하게 된다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레인지 마스터리 스킬은 보우 마스터리(Bow Mastery)로 바뀐다네. 즉, 일반 궁수처럼 된다는 것이지. 단, 호칭은 변하지 않네. 한 번 궁탑의 제자는 영원한 궁탑의 제자니까 말이야.”
     “그렇군요…….”
     아니, 잠깐! 지금 생각난 건데, 얼마 전 멀티비전에서 본 방송. ‘가자, 세릴리아 월드’라는 방송에서 궁탑의 첫 번째 제자 로빈훗을 본 적이 있다. 로빈훗은 헌터와 사수가 쓰는 스킬을 모두 쓰면서 상급 몬스터들을 쉽게 제압했다. 그럼 로빈훗도 레인저일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입을 열었다.
     “로시토, 혹시 로빈훗도 레인저…인가요?‘
     “그렇다네. 첫 제자 로빈훗도 레인저지. 레인지 마스터가 되겠다며 처음부터 엄청난 노력을 했다네.”
     “그럼 저도 레인저가 되겠어요! 레인저가 되어서 로빈훗보다 훨씬 더 먼저 레인지 마스터가 되겠어요!”
     내가 소리치자, 로시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발 옆에서 졸고 있던 루카를 안아 든 채 한 손으로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며 방에서 나갔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로시토를 따라 걷기 시작했고, 그는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1층에 다다르자, 로시토는 궁수의 탑에서 나와 궁수의 탑 벽 아래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를 따라 걸어 내려간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청난 크기의 지하 수련장. 여러 개의 과녁과 커다란 부엌 그리고 수많은 화살들. 나는 입을 또다시 떡 벌린 채 수련장을 둘러보았다. 레드 롱 보우를 들고 달려가 커다란 바구니에 정리된 수많은 화살 중 한 개를 꺼내 들고 활시위를 끌어당겨 활 끝에 걸었다. 그리고 과녁을 조준한 채 화살 하나를 쏘았다.
     한가운데에 명중. 레인지 마스터리 스킬의 수련치가 아주 약간 오른 것 같았다. 여기서 레인지 마스터리, 적안(赤眼), 큇 스텝, 백 스텝, 크리티컬, 보우 어택을 모두 마스터하면 될 것 같았다.
     “와~! 이 넓은 수련장! 로시토, 여기서 스킬을 모두 마스터하면 레인저가 될 수 있는 건가요?”
     “그렇다네. 대신 레벨 최저레벨 50은 되어야 한다네.”
     “50이요? 저는 아직 43인데…….”
     “허허, 걱정 말고 수련치나 올리게나. 그 1차 스킬을 모두 마스터하게 되면 7레벨업 정도는 간신히 할 수 있을 테니. 그럼 수련치를 전부 채울 때까지 루카는 내가 데리고 있겠네.”
     “에? 안 돼요!”
     “허허, 그럼 레인저로 전직시켜주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
     이런 망할 영감탱이. 나는 로시토를 잠시 노려보다 다시 화살을 꺼내 과녁에 신경질적으로 화살을 쏘았다. 로시토는 껄껄 웃으며 지하 수련장의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자, 이제 레인저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수련을 해야 할 때가 되었군. 나는 화살 두 개를 꺼내려다 말고 도로 하나만 꺼냈다. 이미 더블 샷은 마스터했으니 쏴봐야 수련치는 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잠깐! 더블 샷도 화살을 쏘는 것이니 레인지 마스터의 수련치가 오를 텐데… 나는 화살을 한 더 꺼내 당장 더블 샷을 쏘았다. 그리고 스킬 창을 열어보았다.
     파밧!
     <Skill>
     레인지 마스터리(Ranged Mastery)
         (120.01/300.00%)
     보우 어택(Bow Attack)
         (52.0/100.00%)
     적안(赤眼)
         (88.10/100.00%)
     백 스텝(Back Step)
         (49.49/100.00%)
     크리티컬(Critical)
         (77.78/100.00%)
     퀵 스텝(Quick Step)
         (97.93/200.00%)
     더블 샷(Double Shot)
         Master
     역시나 0.01이 올랐다. 그리고 여태까지 더블 샷으로 사냥을 하면서 두 배나 높은 공격력이 나온 게 아니라 두 마리의 몬스터를 잡을 때 썼기 때문에 한곳으로 집중적으로 쏘는 것부터 다시 연습해야 될 것 같았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화살도 넉넉한 이 수련장. 내가 수련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나는 즉시 화살 두 개를 꺼냈다.
     “적안!”
     붉게 변한 눈동자가 시야를 확보시켰고, 그로 인해 목표물을 더욱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나는 손에 든 두 개의 화살을 활등에 대고 활 깃을 활시위에 걸어둔 채 활시위를 당긴 다음, 과녁의 한가운데 부분을 조준… 조준? 활을 들고 조준을 하다니 조금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아무튼 조준을 했다. 그리고 활시위를 잡고 있던 손가락의 힘을 빼자, 두 개의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물 찬 제비처럼 날아가 과녁의 한가운데에 박혔다(과녁에 박힌 화살은 3초 후에 사라졌다).
     적안과 레인지 마스터리의 수련치를 올릴 수 있어 일석이조(一石二鳥).
     나는 세릴리아 월드를 하기 전, 잡동사니를 만들 때처럼 말없이 수련치를 올리는 데 몰두했다.
                   *    *     *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냐고? 지금 우리 길드의 영역에 네놈이 발을 들이지 않았느냐.”
     “여기가 댁들 길드의 영역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여기는 사냥터, 모든 유저가 자유롭게 사냥할 권리가 있는 곳입니다.”
     “허허… 이 녀석, 말이 안 통하는군. 밟아!”
     은빛 갑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바스타드 소드를 손에 쥔 유저를 둘러싼 검은 복장의 유저들. 검은 복장의 유저들이 움직임은 너무도 빨랐다. 세 명의 유저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 올라 투척용 단검을 던졌다. 그러자 은빛 갑옷을 입고 있는 유저는 손에 쥐고 있던 검으로 투척용 단검을 가볍게 쳐냈다.
     “비겁하게 세 명이서 한 명을 공격하는 겁니까?”
     “비겁? 푸하하! 비겁해도 상관없다. 이기는 게 중요하니까.”
     “후, 그렇군요. 블레이징 소드!”
     번쩍!
     은빛 갑옷을 입은 유저가 소리치자 그의 검신에서 붉은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달려드는 검은 복장의 유저의 공격을 재빨리 피한 검사 유저는 피함과 동시에 검을 휘둘러 검은 복장의 유저의 팔을 잘랐다.
     “크악!”
     “파이어 웨폰!”
     검사 유저의 검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화르륵.
     뜨거운 열기는 이내 화염이 되어 유저의 검신을 뒤덮었다.
     “화검기(火劍氣)!”
     서걱.
     화아악!
     “크아악!”
     팔이 잘려나간 유저는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몸뚱이가 반으로 잘려나갔다. 피가 튀기도 전에 두 동강 난 몸에 불이 붙어 활활탔기 때문에 검으로 베이냈다고 할 수조차 없었다.
     ‘이런… 또 죽이고 말았어.’
     검의 검신에 타오르던 화염이 사라지면서 검사 유저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이러지 마세요. 저를 통제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통제? 웃기는 녀석이군. 협공이다!”
     “좋아!”
     “큭… 크으으…….”
     검사 유저는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털썩 쓰러져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크으으…….”
     “오버하지 마, 이 새끼야!”
     “크으으, 흐흐흐흐… 크하하하하하!”
     신음을 토해내는 것 같던 유저가 갑자기 웃어댔다. 하지만 두 눈은 살기로 가득했다. 검사 유저가 자리에서 일어나 혀로 검신을 핥으며 달려드는 두 유저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 유저가 너무나도 느리게 보였다. 검사 유저는 달려드는 두 유저를 어떻게 죽일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산산조각을 낼까, 태워죽일까 잠시 고민을 하던 검사 유저는 자신의 검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프리징 웨폰!”
     순간 검이 부르르 떨었다 이어 오싹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화아아악.
     닿기만 해도 몸이 얼어 붙어버릴 것 같은 냉기였다. 달려드는 한 유저에게 검을 휘두르자 칼날은 대기를 가르며 냉기를 산산이 흩뿌렸다. 공격을 받은 유저는 힘도 써보지 못한 채 맥없이 땅에 처박혔다. 같이 협공을 하려고 달려들던 유저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크크크…….”
     검사 유저는 유저의 머리를 밟아 깨뜨렸다. 혼자 남은 검은 복장의 유저가 기겁을 하면서 달아나자, 재빨리 뒤따라간 검사 유저의 검신에 불이 붙더니 검은 복자의 유저의 몸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또 저질러버렸어…….’
     검사 유저는 검을 허리춤에 차고 유유히 사라졌다.
                   *    *     *
     “혁, 아니 루샤크, 레드(현성)랑 카이루(강찬)가 없으니까 뭔가 허전하지 않아?”
     “그러게, 무지 허전하네. 그동안 사냥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경훈의 말에 메이스를 어깨에 들쳐 멘 혁이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경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의 커다란 나무를 너클을 낀 주먹으로 툭툭 치고 있었다.
     처음엔 천천히 한 대, 두 대 치더니 이젠 난타를 해댔다. 나무의 옆구리를 정강이로 차고 팔꿈치로 나무를 차고 빠른 속도로 나무를 난타하는 경훈에게 혁이 소리쳤다.
     “정신 사나워! 안 그래도 사냥터인데 발각되면 어쩔래?”
     “아, 미안.”
     “아, 아무래도 레드 이놈한테 대화 좀 걸어봐야겠어.”
     “음, 그러는 게 좋겠다. 나는 카이루한테 걸어볼게.”
      투덜대던 혁은 쭈그리고 앉아 현성에게 대화요청을 했다.
     -응? 혁이냐? 무슨 일이야?
     “아, 목소리 참 오랜만에 듣는다. 학교에서도 이번 달 내내 마주치지도 못했는데. 그건 그렇고 지금 어디야?”
     -나? 궁수의 탑.
     “궁수의 탑? 거긴 뭐 하러 갔냐?”
     -뭐, 몰라! 어쨌든 나 바빠! 수련치 올리는 중이란 말이다.
     “뭐야, 싱겁게. 오랜만에 대화하는 친구에게 그런 식으로밖에 말을 못 한다 이거군.”
     -아, 미안, 미안. 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하니까 앞으로 한 달 정도 더 잠적해야 할 것 같다. 너희들도 어서 레벨업 해.
     “안 해도 너보다 높다. 지금 난 45, 경훈이가 46이야.”
     -오, 그래? 그럼 한 달 뒤에 보자고.
     “그래.”
     [레드 파운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현성과 대화를 마친 혁은 시무룩한 경훈을 보았다. 아무래도 강찬과는 연락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혁은 시무룩한 표정의 경훈을 달래며 말했다.
     “자, 이제 그만 하고 가자.”
     “그러자.”
     “로그아웃!”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    *     *
     “더블 샷!"
     팍팍!
     “오예! 명중!”
     몇 시간 꽤 활을 쏘고 있는 나는 이제 더블 샷을 실적에서도 쉽게 쓸 수 있을 듯했고 레인저 마스터리 스킬도 조금씩 마스터 할 수 있을 듯했다. 아무래도 적안을 제일 먼저 마스터하겠지.
     근데 왜 이리 왼발 옆이 허전한 것일까. 평소엔 늘 루카가 꼬리를 흔들면서 옆에 항상 있었는데 갑자기 없으니 너무 허전했다. 얼른 모든 스킬을 마스터하고 루카를 데려와야겠군.
     몇 시간째 활을 쏘아댄 나는 너무 지루해졌다. 아무리 재밌는 놀이라도 너무 오래하면 질리는 법. 나는 활 끝에 걸어둔 활시위를 풀고 화살 바구니 옆에 세워둔 다음, 드넓은 수련장 정중앙으로 가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지하라 그런지 약간 쾨쾨하군.
     “좋아, 퀵 스텝!”
     언제나 그랬듯 퀵 스텝을 사용하게 되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재빨리 벽으로 달려가 벽을 왼발로 딛고 힘껏 디뎠다. 그로 인해 몸은 자연스레 덤블링을 하고는 다시 땅으로 착지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퀵 스텝은 너무 좋은 스킬인 것 같단 말이야. 흐음, 아! 퀵 스텝을 쓰면서 공격하는 법을 익히면… 그래!”
     내가 생각해낸 나만의 공격법. 활을 쓰는 종족인 엘프들과 같이 민첩하게 움직이며 활을 쏘는 것이다. 나는 다시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차 화살 바구니 곁으로 가서 레드 롱 보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등에 메고 있던 화살통의 줄을 풀고 화살 바구니 옆에 세워두고 화살 바구니에서 화살을 가능한 많이 뽑아 화살통에 쑥쑥 집어넣었다.
     화살통이 이내 가득 차자 나는 다시 화살통을 등에 멨다. 그리고는 낑낑거리며 과녁을 벽 근처로 가져가서 각도를 맞추고 세운 뒤, 과녁에서 몇 미터 떨어졌다.
     “좋아, 퀵 스텝!”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 들고 퀵 스텝을 걸었다. 재빨리 눈앞의 벽의 오른쪽 측면으로 달려가 오른발로 벽을 딛고 재빨리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화살은 과녁의 끝 부분을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음, 아무래도 이런 건 엘프들만 가능한 건가… 아, 아니야! 그래도 과녁을 스쳤으니 가능성은 있는 것 같아. 다시 해보자.”
     나는 다시 뒤로 물러서서 퀵 스텝을 걸었다. 그리고는 다시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벽의 오른쪽 측면을 딛고 과녁에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화살은 과녁의 윗부분을 스치고 땅으로 떨어져버렸다.
     “흐음, 일단 활을 쏘는 것보다 퀵 스텝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부터 알아야겠다. 몸을 민첩하게 움직이는 스킬이 퀵 스텝 말고 백 스텝도 있는데 우선 퀵 스텝 먼저다!”
     나는 먼저 퀵 스텝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는 것부터 익혀야겠다는 생각했다. 퀵 스텝으로 몸을 좌우로 날려 피하는 것.
     나는 눈을 감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검 혹은 검풍 또는 마법이나 화살이 나에게로 날아온다. 나는 퀵 스텝을 걸고 몸을 왼쪽으로 날린다.
     퀵 스텝을 걸자, 몸놀림은 정말 웬만한 엘프 못지않게 빨랐다. 하지만 몸을 날리고 나서부터가 문제였다. 운동신경이 전혀 없는 나는(뭐, 게임에선 아무리 운동신경이 없어도 능력치만 좋으면 민첩해진다. 하지만 퀵 스텝을 걸고 이렇게 움직여보지 못한 나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대로 왼쪽 어깨와 팔, 허리, 허벅지, 무릎 등을 맨바닥에 찧고 나동그라졌다.
     “으윽! 젠장! 착지할 때 생각을 안 했네. 무슨 낙법 같은 것이라도 해야 하나… 아! 그래. 피하면서 반격을 하는 거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눈가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왜냐? 당연히 맨바닥에 슬라딩을 해서 아프니까.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나만의 착지법을 익히기 위해 생각에 빠졌다.
     “흐음… 그래, 몸을 날린 다음 재빨리 몸을 말고 착지해서 활을… 아니야, 몸을 날리면서 화살을 꺼내고 안전하게 착지함과 동시에 바로 화살을 쏘는 것. 완벽한 방어가 될 것 같은데?”
     나는 다시 눈을 감고 큇 스텝을 걸고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왼쪽으로 몸을 날려 화살을 뽑아들고 착지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해낼 수 있었다.
     “휴, 힘들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내일은 오른쪽으로 몸을 날리는 것부터 다시 해야겠군. 그럼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위잉.
     철컥!
     “으아… 얼마나 한 거지… 검, 지금 몇 시야?”
     「오후 9시 30분입니다.」
     “그래? 아 한 시간 정도 더 있다가 자야겠다. 컴 멀티비전
    좀 겨줄래?
     「네. 주임님.」
     나는 거실로 가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앉아 리모컨을 들고 멀티비전을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는 세릴리아 월드 사이트로 들어가 아이디아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종족 검색을 해보았다.
     엘프의 전투 동영상을 어느 한 유저가 올려놓았는데, 몸놀림이 너무나도 빨랐다. 엘프에겐 퀵 스텝이라는 스킬이 없어도 원래 몸놀림이 저렇게 빠른가 보다.
     게임에는 밸런스라는 것이 있어 엘프처럼 민첩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인간 궁수들에게 퀵 스텝이라는 스킬을 부여한 듯했다.
     나는 가볍고 빠른 몸놀림과 뛰어난 명중률을 자랑하는 엘프들의 사냥 동영상을 유심히 보며 여러 가지 패턴들까지 빠짐없이 체크했다.
     “음, 저런 방법으로 사냥하는구나. 정말 인간 궁수들과는 달라. 언제 한번 엘프의 마을도 가보는 게 좋겠… 아! 엘프의 마을도 한번 찾아볼까?”
     나는 즉시 리모컨으로 엘프의 마을을 검색했다. 엘프의 도시 아리스 노아. 마을 중앙엔 정말 웬만한 건물보다 크고 둘레도 무지 넓은 긴 나무가 있었다.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나뭇잎은 초록빛이 맴돌았고, 건물은 전부 나무로 지어져 있었다(건물이라기보다 나무에 구멍을 낸 것이라고 봐야 정확했다). 커다란 나무 옆엔 작지 않은 호수가 은빛을 내고 있었다. 근처에는 음식점과 무기점이 있었다. 수도 세인트 모닝 못지않게 큰 엘프의 도시였다.
     “이야… 레인저로 2차 전직을 하면 꼭 놀러 가봐야겠다. 세인트 모닝 못지않게 크고 아름다운 마을이구나. 음, 엘프 유저는 왜 저렇게 하나같이 다 예쁜 거야?”
     마을 풍경에 빠져 있던 나는 동영상에 찍힌 여성 엘프들에게 빠졌다. 풍경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여성 엘프들은 왜 일 예쁜지. 2차 전직을 하면 아리스 노아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멀티비전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들어와서는 컴에게 불을 꺼달라고 부탁한 뒤, 침대에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으음… 너무 오래 잔 것 같은데… 컴, 몇 시야?”
     「오전 10시입니다.」
     “뭐! 10시?”
     「네.」
     “네는 무슨! 지각이잖아! 아, 이거 미치겠네!”
     「오늘의 일정은 가정학습입니다. 요즘 주인님께서 너무 게임만 하는 것 같아 잠이라도 많이 자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아, 그래? 그럼 씻고 밥 먹은 뒤에 게임이나 해볼까.”
     나는 자리에서 이러나 욕실로 들어가 ‘청결모드’로 깨끗이 씻고 간단한 아침을 먹고 방으로 들어왔다. 게임기기 옆의 버튼을 누르자 캡슐이 열리기 시작했고, 나는 게임베드에 드러누웠다. 헤드셋을 쓰자, 캡슐의 문은 굳게 닫혔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43.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다시 오게 된 지하 수련장. 나는 어제 연습했던 것을 되새겨 보았다.
     오늘은 오른쪽으로 몸을 날리는 것부터 해야겠군. 나는 눈을 감고 또다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기 시작했다. 상대의 검품이 나에게로 날아온다. 그에 즉시 퀵 스텝을 걸고 몸을 오른쪽으로 날렸다. 왼쪽으로 몸을 날렸을 때와는 반대로 몸을 움직이자 착지에 성공했다.
     “좋아!”
     몇 시간을 날뛰었을까. 이제 제법 자세가 나온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피하는 것 모두 익숙해졌다. 연습 도우미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했으니 실전에서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흐음, 이제 퀵 스텝을 걸고 나서 움직이는 것에 많이 익숙해진 것 같으니 움직이면서 화살을 쏘는 법도 익혀야겠어. 그리고 적안의 능력을 최대한 살리는 것도 중요할 것 같고.”
                   *    *     *
     훤칠한 키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한 소년이 있었다. 이름은 데시카, 본명은 최경훈. 무투가로서 진정한 격투가의 길을 걷고 있는 유저이다.
     드디어 오늘은 주문해놓은 가상현실 게임기기가 들어오는 날이다. 세릴리아 월드에서 보낸 가상현실 게임기기. 한 사내와 사내의 허리만 한 작은 로봇이 들어와 게임기기를 간단하게 조립하고, 설명서를 건네주고는 말없이 나갔다. 가상현실 게임기기 사용법. 넷룸에서 이미 다 해봤기게 경훈은 설명서를 보지 않아도 사용법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호오, 넷룸에 있는 것과는 다른데? 혁이 녀석도 주문한다고 했는데 들어왔나 모르겠네.”
     경훈은 캡슐의 허리 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위잉.
     철컥.
     듣기 좋은 기계음과 함께 갭슐의 문이 열렸다. 캡슐 안에는 게임베드와 헤드셋이 놓여 있었는데, 넷룸의 게임기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깨끗했다. 경훈은 즉시 게임베드에 누워 헤드셋을 눌러썼다. 그러자 캡슐의 문이 서서히 닫히며 빛을 차단했다.
     “뭐야? 이거.”
     [가상현실 게임 세릴리아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캐릭터 스킨이 등록되어 있는 사용자입니다. 홍재 인식을 시작합니다. 3초간 눈을 크게 떠주시기 바랍니다.]
     듣기 좋은 한 여성의 목소리. 경훈은 즉시 눈을 크게 떴다.
     윙.
     찰칵!
     [데시카 Lv. 46.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이야, 넷룸에서 하는 거랑은 사뭇 다른 느낌이야!”
     경훈은 두 주먹을 서로 부딪치며 입 꼬리를 세우고 씩 웃었다. 두 팔을 들어 상체를 약간 숙이고 전투자세를 취한 경훈은 근처의 나무에 왼팔을 뻗어 가볍게 주먹을 꽂았다. 왼팔이 제자리로 채 돌아가기도 전에 경훈의 오른팔이 나무에 꽂혔다. 그리고 말없이 나무에 주먹을 난사했다.
     투다다다.
     “으아아!”
     투다다닷.
     파악!
     “후, 가끔 한 번씩은 이렇게 나무를 쳐주는 것도 좋구나.”
     이유 없이 나무를 쳐대는 경훈을 누군가 봤다면 틀림없이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하겠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경훈만의 준비운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준비운동을 끝낸 경훈은 사냥터로 향했다. 사냥감은 오크. 가죽옷으로 중요한 부분만 대충 가리고 방망이나 낫 같은 무기를 들고 다니며 상인들을 습격해 물건을 갈취하는 도적떼와 같은 녀석들이다.
     물론 오크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오크 워리어나 오크 아처 같은 경우 이런 녀석들과는 달리 강력했다. 얼마 전, 멋모르고 오크 워리어에게 덤볐다가 그대로 로그아웃된 적도 있었다.
     그 뒤로 몬스터를 보면 바로 달려들던 경훈의 버릇도 고쳐졌다. 경훈은 근처의 커다란 나무 뒤에 서서 오크가 리젠되기를 기다렸다.
     “취익. 배고프다.”
     “인간, 인간고기가 먹고 싶다. 취익!”
     “킁킁. 쿠륵, 어디서 인간 냄새가 난다!” “취익!”
     경훈의 제취를 맡은 오크들은 손에 방망이를 들고 코를 벌름거리며 경훈이 몸을 숨긴 나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경훈은 즉시 쏜살같이 나무 뒤에서 튀어나와 다가오는 한 마리의 오크의 코에 무쇠 같은 주먹을 꽂았다.
     “쿠에엑!”
     코를 싸쥐고 앞으로 고꾸라진 오크. 갑작스런 경훈의 등장에 다른 오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코를 감싸 쥔 자신의 동료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경훈은 다른 오크의 무릎 뒤쪽에 강철 같은 정강이를 꽂았다. 그 바람에 자연스레 오크는 한쪽 무릎이 안으로 접혔고, 오크가 뒤로 쓰러지기 전에 팔꿈치를 휘둘러 뒤통수를 가격했다.
     퍼억!
     “꿰에엑!”
     “쿠륵, 크아아!”
     코가 뭉개진 다른 오크가 소리 지르며 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에 경훈은 재빨리 허리를 숙여 오크의 방망이를 피하고 몸을 숙인 채 오크의 밑을 파고들어 숙였던 몸을 피면서 오른팔을 뻗어 오크의 턱에 주먹을 꽂았다. 그런 다음 재빨리 로 빠져 옆차기로 오크의 명치를 가격하고 재빨리 뒤로 물러나
    오크의 상태를 확인했다. 오크는 둘 다 맥을 못 추고 쓰러져 죽어버렸다.
     “좋아, 아직 나보다 4레벨 정도 높은 녀석들이니 조심해서 잡지 않으면 안 되겠어.”
                   *    *     *
     “후우, 이제 웬만한 기술은 다 쓸 수 있게 되었어!”
     몸을 민첩하게 움직이며 활을 쏘는 기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궁수의 로망(내가 생각하기에는). 크하하! 나는 이제 그것을 실전에서 쓸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레인저가 되기 위해 스킬 수련치를 모두 마스터 하는 것.
     적안, 퀵 스텝, 백 스텝은 지금껏 많이 해왔기 때문에 수련치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레인지 마스터리, 보우 어택, 크리티컬은 좀처럼 오르질 않았다. 뭐, 과녁에 활을 쏘고 활로 단련대를 치면 레인지 마스터리와 보우 어택의 수련치는 쭉쭉 올라가지만. 크리티컬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 갈 때까지 가보자. 뭐, 크리티컬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레인지 마스터리랑 보우 어택은 마스터해야 하지 않겠어?”
     나는 그 뒤로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을 하면 레인지 마스터리와 보우 어택 수련치를 올리는 데만 전념했다. 늘 활을 쏠 때 뒤에서 캉캉거리며 연신 꼬리를 흔들던 루카가 없으니 허전한 것도 있고, 일단 레인저가 되어야 하니까.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보우 어택, 퀵 스텝, 백 스텝, 적안 등 1차 스킬 대부분은 마스터를 한 반면, 레인지 마스터리는 마스터하지 못했다. 크리티컬은 일주일 전에 마스터했다. 크리티컬, 즉 치명타를 날리는 것이다. 일정 확률로 적에게 치명타를 먹이는 것인데, 크리티컬은 자동적으로 알아서 발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활을 쏘다 보면 알아서 치명타를 주게 되니 그저 활을 많이 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스킬 창을 열었다.
     파밧!
     
     <Skill>
     레인지 마스터리(Ranged Mastery)
         (180.23/300.00%)
     보우 어택(Bow Attack)
         Master
     적안(赤眼)
         Master
     백 스텝(Back Step)
         Master
     크리티컬(Critical)
         Master
     퀵 스텝(Quick Step)
         Master
     더블 샷(Double Shot)
         Master
     이런 것이다. 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지하 수련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외알 안경을 콧등에 걸친, 에메랄드와 같이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세릴리아 월드의 단 한 명밖에 안 되는 ‘레인지 마스터’ 로시토였다.
     “로시토!”
     반가움 마음에 소리치자 로시토가 빙긋 웃으며 계단을 밟고 천천히 내려왔다. 그가 안고 있는 새하얀 털을 가진 강아지. 까만 눈망울에 빛나는 샛별이 가득했다. 로시토의 팔에서 나오려고 발버둥 치며 꼬리를 연신 흔드는 아기 늑대.
     캉캉!
     “루카!”
     이름을 부르자, 루카는 로시토의 팔을 뿌리치고 땅으로 내려와 나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펄쩍 뛰어올랐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레드 롱 보우를 팽개치고는 루카를 안았다.
     캉캉!
     “루카! 오랜만이다!”
     왕왕!
     나를 빤히 바라보며 짖는 루카. 뭐가 그리 좋은지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는 이 녀석의 모습은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그렇게 좋냐? 나도 좋다.
     “레드, 궁수가 목숨보다 소중한 활을 그렇게 내팽개치면 어떻게 하나. 자신의 손과도 같은 것인데.”
     지켜보던 로시토가 말했다. 하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비록 떨어진 지 한 달밖에 안 되었지만 그동안 루카가 로시토의 방에서 창문을 바라보며 끙끙거렸을 게 뻔했다.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다가온 로시토. 그가 디시 입을 열었다.
     “레드, 미안하지만 레인지 마스터리 스킬은 마스터를 하지 않아도 된다네. 그저 자네의 끈기를 시험해보려 말해본 걸세. 그래도 레인지 마스터리 와에 모든 스킬을 마스터하고 올리기 힘든 레인지 마스털 스킬을 그렇게 많이 올리지 않았는가.”
     “어쩐지… 잘 안 오르더라고요.”
     나는 로시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루카를 바닥에 내려놓고 팽개친 레드 롱 보우를 집어 들었다. 드디어 레인저가 되는 순간이구나. 한참 감격을 하고 있을 때 로시토가 입을 열었다.
     “레드, 레벨은 몇인가?”
     “레벨이요? 상태 창 오픈!”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궁수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50
     생명력(HP). 560
     마나(MP). 350
     스태미나(SP). 370(배고픔 수치 10%/ 갈증 5%)
     힘 87
     체력 15
     민첩 107
     손재주 363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185~240
     방어력 4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145
     상태 창을 본 나는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50이요.”
     “50. 그렇군. 그럼 레인저로 전직해도 되겠군. 자, 레드 따라오게.”
     “네.”
     나는 루카를 안아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로시토를 따라갔다.
     지하 수련장에서 나와 오랜만에 보는 햇빛. 비록 한 달이긴 했지만 한 달도 퍽 긴 시간이었다(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하면 늘 지하 수련장의 형광등 빛만 쬐었기 때문이다).
     “로시토, 어디로 가는 거예요?”
     “따라오게.”
     나의 물음에 짧게 대답한 로시토. 그에 따라가니 궁수 전직시험을 보기 위해 궁수 지망생들이 궁수의 탑 앞에서 열심히 잡화 물품을 만들고 있었다. 또다시 옛 생각이 나는군.
     잠시 후, 그들은 잡화물품 만드는 시험이 끝났는지 모두 석궁과 활을 들고 과녁 근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관, 나 조 보게.”
     “앗, 로시토 님!”
     로시토가 궁수 지망생들에게 열심히 설명을 늘어놓던 교관을 불러 주러지주저리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기대들을 하고 있을 것이니 궁수 지망생들 모두 설레는 맘으로 전직시험을 보겠군. 그런데 그들 중 한 명이 화살을 꺼내 들더니 자신이 들고 있는 롱 보우의 활등에 화살을 갖다 댔다. 그리고는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활시위를 힘껏 당기는 궁수 지망생. 활을 조금 치켜들고 활시위를 단단히 붙잡고 있던 손가락의 힘을 빼자,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과녁의 10점의 원 한가운데 박혔다.
     “우와!”
     아직 시험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먼저 활을 쏜 궁수 지망생. 손재주 스탯이 꽤 높은지 쉽게 10점의 원에 화살을 꽂았고, 그에 모두들 탄성을 질렀다.
     이거, 언제 내가 겪은 일 같기도 한데…….
     그때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유저들 중, 한 유저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었다. 그에 나와 시선이 마주친 유저가 소리쳤다.
     “저… 혹시 궁수세요? 헛! 님들아, 이분 정보 보기 해보세요! 호칭이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예요!”
     “엇! 어디, 어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궁수의 탑 앞 훈련장. 조교들의 말을 무시한 채 모두들 나에게 모여들었다. 갑자기 많은 유저가 모여들자, 루카는 내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손재주는 몇이에요?”
     “호칭 그거 말고 또 뭐 있어요?”
     “레벨은 몇이에요? 2차 전직하셨어요?”
     “그 강아지는 뭐예요?”
     “우와! 그 활 직접 만든 거예요?”
     “활 한번 쏴보세요!”
     나는 자연스레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궁수 지망생들 중, 예쁜 유저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나, 세릴리아 월드를 처음 할 때, 물건을 팔 때도 여성 유저에게 토끼 쿠션을 헐값에 판 기억이 난다. 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활 한번 쏴보겠습니다.”
     “와!”
     모두들 또다시 탄성을 질렀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내가 움직이자 모두들 움직여 길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손에 쥔 레드 롱 보우의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고, 활시위에 손가락을 건 채 살짝 당겼다 놓았다.
     티잉.
     ‘역시, 한 달간 수리를 안 하고 썼더니 소리가 그다지 맑지 않아.’
     나는 속으로 혼잣말을 한 채 화살을 꺼내 들었다. 지하 수련장에 있을 때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과녁들. 굳이 적안을 개안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화살 깃을 활시위의 절파(화살 꽂는 곳)에 걸고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활을 치켜들자 모두들 기대 된다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고 활시위를 잡고 있던 손가락의 힘을 뺐다.
     쐐애액.
     화살은 레드 롱 보우에서 벗어나 허공을 가르며 궁수 지망생이 쏜 화살을 가르며 10점의 원에 박혔다.
     “우와!”
     언제나 똑같은 진해. 이젠 슬슬 지겹다. 늘 대가 쏘면 남의 화살을 뚫고 10점에 박힌다 내가 무슨 로빈훗도 아니고.
     “또 쏴보세요!”
     “맞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성 유저의 목소리. 또 몸이 굳는다. 이거 안 되겠군. 나는 이번엔 화살 두 개를 꺼내 들었다. 또다시 나오는 한숨.
     “더블 샷!”
     두 개의 화살이 활의 품에서 벗어나 빠르게 날아가는가 싶더니 이내 바닥에 꽂혔다.
     ‘…어라?’
     “앗! 실패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궁탑의 제자도 실수는 하는구나!”
     나는 다급히 레드 롱 보우의 상태를 확인했다. 활등의 붉은 가죽을 들추자, 활등에 금이 간 것이 보였다.
     “자, 궁수 지망생들! 다시 모이도록!”
     로시토와 대화를 끝마친 교관이 소리쳤다. 그러자 나를 둘러싸고 있던 궁수 지망생들은 교관에게로 다시 우르르 몰려갔다.
     “레드, 왜 그러나? 표정이 별로 좋지 않군.”
     로시토가 내 일그러진 표정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덧댄 가죽을 벗긴 레드 롱 보우를 로시토에게 보여주었다. 활등에 금이 간 것을 본로시토가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런, 활등의 내구가 다 된 모양이군.”
     “이거 아세른에게 가서 수리해야겠어요.”
     “잠깐 이리 줘보게나.”
     내가 다급하게 말하자 로시토가 차분히 말하며 손을 건넸다. 내가 활을 넘겨주자 로시토는 활등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말했다.
     “이거 상태가 별로 좋지 않군. 자네 주기적으로 활 상태가 어떤지 살피지 않았나?”
     “…….”
     “흐음… 이 활, 아무래도 다시 쓰긴 힘들 것 같네.”
     “네? 뭐라고요?”
     로시토의 심각한 표정과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말에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레드 롱 보우, 내 손으로 직접 만들었기에 더욱 애착이 가는 무기. 이 무기를 다시 쓸 수 없다니… 나는 로시토의 손에 들린 활을 빼앗듯 가져와 활시위를 풀었다.
     “고, 고치면 되죠.”
     “힘들거세.”
     “아, 그건 그렇고 레인저 전직은 언제 하는 거죠?”
     나는 로시토의 말을 무시한 채 말을 돌렸다. 로시토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로 나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 미소를 지었다. 왜 웃는 거지?
     “레인저. 레인지 마스터가 되기 위해 꼭 선택해야 하는 직업. 정말로 레인저가 되겠는가?”
     “네.”
     “그렇군. 그럼 자네를 이제부터 레인저로 임명하겠네.”
     “예?”
     갑작스레 어이없는 말을 내뱉는 로시토. 무슨 전직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레인저로 임명한다니,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갑작스런 로시토의 발언에 나는 멍해졌다.
     “왜 그러나, 레드? 어디 아픈가?”
     “아, 아뇨. 지, 지금 뭐예요, 이거? 2차 전직을 하는 것 아니었어요?”
     “아, 2차 전직을 하는 것이 맞네. 허허… 이제 솔직히 말할 때도 된 것 같군. 레드, 부디 화를 내진 말아주게. 사실 레인저로 2차 전직을 하려면 레벨만 50이 되도 된다네. 나는 자네가 정말로 레인지 마스터가 되기 위해 기본적인 인내심이 있나 시험해본 걸세. 정말로 1차 스킬을 전부 마스터하다니. 훌륭하네. 정말 닷 봤네.”
     그렇게 말하며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려주는 로시토. 루카는 뭐가 좋은지 앞발을 들고 캉캉 짖었다.
     “자, 그럼 다시 말하겠네. 자네를 레인저로 임명하겠네. 레인저로 2차 전직하겠나?”
     “예.”
     번쩍!
     로시토의 물음에 대답하자 내 몸 주위에서 새하얀 빛이 번쩍 하는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퍼졌다.
     [2차 전직! 직업명 ‘레인저’로 변경됩니다.]
     [레인저 익스퍼트(하급)가 되었습니다.]
     [기본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순식간에 내 눈 앞에 나타난 세 개의 직사각형의 입체 창.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레인저가 된 것이다.
     “축하하네. 레드.”
     “이얏호!”
     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자 영문을 모르는 루카도 덩달아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목표를 달성하고 나서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만 아는 그 성취감. 그리고 모든 걸 다 가진 듯한 이 기분! 강현성! 역시 넌 천재야! 좋아서 펄쩍펄쩍 뛰는 동안 로시토가 말을 이었다.
     “레인저가 됐으니 이제 레인지 익스퍼트가 되었을 걸세, 물론 하급이겠지만.”
     “네! 근데 레인지 익스퍼트는 또 뭐예요? 게다가 하급이라니?”
     “레인지 마스터 도달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네.. 쉽게 말해 기사들도 소드 익스퍼트라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네. 그리고 그 경지에 오르게 되면 오러를 검신에 맺히게 할 수 있지. 고레벨의 기사들을 보면 알게 될걸세. 검신에 아름답다 못해 신비한 푸르스름한 기운. 하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정말 무서운 것이라네. 갑옷도 두부 썰듯 싹둑싹둑 잘라낼 테니. 그리고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에 오르게 되면 오러 블레이드라는 색이 더 짙고 강력한 강기를 뿜어낼 수 있다네. 소드 익스퍼트가 끌어올린 오러 와는 차원이 다르지.”
     “그럼 그 오러 블레이드라는 건 어떻게 끌어올려요?”
     로시토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내가 묻자 로시토가 또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마나를 이용하는 걸세. 정말이지 소드 마스터란 존재는 참 무서운 존재라네. 아직 대륙엔 소드 마스터가 얼마 없지만 말일세. 검신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는 오우거의 가죽도 쉽게 잘라낸다고 들었네.”
     “엄청 강하네요. 기사도 무서운 직업이었네요.”
     나는 기사라는 직업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저 칼만 휘두르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그런 기술이 있었다니…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시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드 익스퍼트도 하급, 중급, 상급의 경지가 있다고 들었네.”
     “궁수는 뭐 그런 것 없나요? 오러 블레이드 같은 걸 끌어올리고…….”
     내 말이 끝나자 로시토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로시토가 이렇게 웃는 건 나도 처음보는 것이었다.
     “푸하하! 레, 레드! 그거 농담은 아니겠지? 크크… 푸흐…….”
     분명 농담은 아니다. 진심이다. 근데 왜?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렇게 웃는 거지? 궁수는 오러 블레이드를 못 끌어올리는 건가? 궁수도 마나가 있는데!
     “로시토! 왜 그래요!”
     “아아, 미안하네. 크크큭.”
     내가 소리치자 로시토가 배를 움켜쥐며 겨우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음, 험험! 오러 블레이드란, 기사들이 검신에 맺히게 하는 걸 오러 블레이드라고 한다네. 검강(劍剛)이라고 들어봤나?”
     “네.”
     “그게 바로 오러 블레이드라네. 그리고 소드 익스퍼트 유저들이 사용하는 것. 검강보다는 약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검기(劍氣). 그게 바로 오러라네.”
     “아, 그렇군요. 그럼 레인저 익스퍼트도 그 검기 비슷한 걸 끌어올릴 수 있나요?”
     “레인지 익스퍼트가 되면 치명타를 꽂을 확률이 올라가게 된다네. 상급에 가까워질수록 명중률과 함께 치명타율이 급격하게 올라가게 된다네. 그리고…….”
     “그리고?”
     “레인지 마스터가 되면 화살촉에 붉은 기운을 맺히게 할 수 있는데, 이걸 ‘오러 애로우’라고 한다네.”
     “오러 애로우? 오러 블레이드랑 비슷한 건가요?”
     나의 물음에 로시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오러 애로우는 갑옷과 오우거의 가죽도 쉽게 뚫을 수 있다네. 심지어 드래곤의 비늘에 흠집을 내거나 화살을 꽂을 수도 있지.”
     드래곤의 비늘이 얼마나 단단한지는 모르겠지만 드래곤에 비유라는 걸 보니 정말 대단한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레인저가 된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호기심.
     “로시토.”
     “왜 그러나?”
     “로시토는 대륙에 한 명밖에 없는 레인지 마스터죠?”
     “그렇다네.”
     “그럼 오러 애로우를 사용할 수 있겠네요?”
     “물론.”
     나의 입 꼬리가 올라간 것을 본 로시토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내가 이어서 말했다.
     “쏴보세요!”
     “지금 활이 없지 않은가.”
     “제 활로 쏴보시면 되잖아요.”
     “자네 활은 지금 망가진 상태 아닌가?”
     “그래도! 한 번 정도는 쓸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알았네. 그럼 딱 한 번만 쏴보겠네.”
     로시토가 쩔쩔매며 내가 건네주는 활을 받아들었다. 물론 화살도 건네주었다.
     로시토는 능숙한 솜씨로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고 화살 깃을 절피에 건 뒤,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레드 롱 보우의 활등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활등에 금이 간 상태에서 무리를 하고 있으니 곧 부러질 것 같았다.
     로시토의 따뜻한 초록색 눈동자가 이내 붉게 변했다. 적안을 개안한 로시토.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에 은은한 붉은빛이 맴돌기 시작했고, 붉은빛은 순식간에 화살촉으로 옮겨갔다. 궁수와 같이 뛰어난 시력과 판단력이 없다면 그저 붉은빛이 화살촉에 맺힌 것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오러 애로우는 이내 화살촉에 은은한 붉은빛을 강렬하게 발산하기 시작했다. 적안의 붉은색과 동일한 붉은 기운. 로시토가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과녁을 향해 날아갔는데. 마치 붉은 섬광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것과 같아서 화살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붉은 레이저 빔을 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저 화살촉에만 맺혀 있던 오러 애로우가 활에서 벗어나 허공을 가르며 목표물을 향해 질주할 땐 화살촉에서부터 화살 깃까지 맺혀 목표물을 관통하고, 목표물 뒤에 있던 애꿎은 벽을 뚫고 날아갔다. 목표물은 물론 과녁이었다.
     “활이 망가져서 그런지 그리 잘 날아가지 않았군. 레드, 활을 소중히 다루게나.”
     “아, 예…….”
     나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로시토가 건네주는 활을 받아 들었다. 로시토가 쏜 화살이 관통한 과녁과 벽은 원상복구 되었다.
     요컨대 유저와 유저가 PVP(Player VS Player: PK(Player Killer)를 하다 소드 익스퍼트 경지에 오른 기사가 오러가 맺힌 검을 휘둘러 건물을 손상시켰다거나, 마법사 유저
    가 강력한 마법으로 건물을 손상시키면 도로 복구가 된다. 즉, 이벤트로 인한 전쟁이 아닐 경우, 건물 파괴나 NPC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로시토는 활을 나에게 건네주곤 빙긋 웃으며 궁수의 탑으로 올라갔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아세른에게 레드 롱 보우를 맡기고 다른 일을 해야지. 먼저 대장간이다! 가자, 루카!”
     캉캉!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궁수의 탑에서 무기점으로 내달렸다. 퀵 스텝을 마스터하자 지속시간이 약간 더 길어졌고, 속도도 증가 했다. 루카가 전속력으로 달리는 속도와 비슷했지만, 여전히 내가 느렸다. 루카가 그만큼 빨랐다는 것이다. 다리도 짧아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아기 늑대. 말이 아기지, 힘은 꽤 억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무기점에 오게 되었고, 망치질을 하고 있는 아세른과 눈이 마주쳤다.
     “오, 이거 레드 아닌가?”
     “안녕하세요.”
     캉캉!
     목소리는 다르지만 말투는 너무나도 똑같은 아세른. 로시토와 똑같다는 것이다.
     “아세른, 이 활 좀 맡길게요. 활등에 금이 가서…….”
     “음? 활등에 금이 가다니, 어디 한번 보세.”
     망치질을 하던 아세른이 망치를 내려놓고 내 활을 받아들었다. 활등에 덧댄 붉은 가죽을 들추자 로시토가 활을 쏘기 전보다 더 많이 금이 가 눈에 띄게 벌어져 있었다.
     “아니, 활이 왜 이런가? 허허. 활로 소라도 때려잡았나?”
     “아, 그건 아니고요, 한 달간 관리를 안 하다 보니…….”
     “흐음. 내가 힘써보겠네. 상태가 매우 심각하군그래.”
     “그럼 부탁드릴게요. 언제 찾아오면 되죠?”
     “음… 대충 사흘은 걸릴 것 같네.”
     “3일… 네, 그럼 부탁드려요.”
     나는 허리 숙여 인사한 뒤, 터벅터벅 분수대 광장으로 향했다.
     끄응…….
     “응?”
     수많은 유저가 북적이는 광장 한가운데, 갑자기 루카가 끙끙 거린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봤는데 별로 쓰다듬어주지도 못했군. 나는 루카를 품에 안았다. 루카는 꼬리를 흔들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언제 봐도 귀여운 강아지 같은 녀석이다.
     띠링, 띠딩.
     어디선가 들려오는 악기소리, 상대방을 매혹시키는 맑은 음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타 비슷하게 생긴, 기타보다 짧은 악기를 들고 연주를 하는 한 유저. 갈색의 넓은 챙 모자와 갈색 로브를 입고 있는 유저는 앞머리가 눈을 가려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저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연주하는 곳으로 유저가 하나하나 모이기 시작했다.
     “이야, 저 사람 좀 봐.”
     “멋있다. 로맨틱해…….”
     특히 여성 유저들이 악기 연주를 하고 있는 유저에게 많이 모여들었다. 부러운 녀석, 남자인 내가 봐도 꽤 멋있었다. 여기서 잠깐, 게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은데 내 취향은 남자가 아니라 아리따운 여자다.
     수많은 여성 유저들에게 둘러싸여 연주를 하고 있는 유저를 빤히 보고 있던 나는 잡화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루카는 여전히 유저들의 눈길을 끌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나를 테이머로 오래하기도 했으니. 이윽고 잡화점 앞 탁자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밸터가 보였다. 나는 왼팔로 루카를 안아 들고 오른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벨터!”
     “앗? 레드?”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물론 잘 지냈죠.”
     “그래, 궁수가 되더니만 요새는 잘 찾아오지도 않는구나.”
     “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나는 벨터에게 다가가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아 루카를 무릎에 올려둔 채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그래서 너도 레인지 마스터가 되겠다는 거니?”
     “네, 첫째 사형인 로빈훗보다 먼저 레인지 마스터가 될 거에요.”
     “그렇구나. 그래, 궁수가 되고 나서 저주받은 망자의 무덤도 가봤고, 배지도 얻었고. 참 다양한 경험을 했구나.”
     “네. 제가 궁수 스킬 중에 간단한 스킬 하나 보여드릴게요.”
     “무슨 스킬을 말하는 거냐?”
     “뭐 일어서지 않고 여기 앉아서 쓸 수 있는 스킬이에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빙긋 웃는 벨터.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혹시 눈동자 색이 변한다는 그 스킬은 아니냐?”
     “에?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놀라서 묻자 벨터가 다시 말했다.
    “얼마 전에 어떤 궁수가 와서 먼 곳을 볼 때 쓰더구나. 눈동자가 파랗게 변했어. 헌터 아이(Hunter Eye's)라고 하던가?”
     “적안(赤眼)!”
     예상을 깨고 붉게 변한 내 눈동자를 본 벨터의 표정이 싹 변했는데, 마치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아니, 레드 너는 눈동자가 붉게 되는구나.”
     “네, 궁탑의 제자들은 다른 궁수들과는 달리 눈동자가 붉게 변한대요. 뭐, 전 헌터아이라는 스킬을 본 적이 없으니.”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비록 NPC라지만, 밸터와 함께 있으면 왠지 맘이 편했다. 그리고 서로 취미(?)도 같아서 서로 대화를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나는 오랜만에 벨터와 같이 잡화물품을 손질했다. 너무 정겨운 잡화물품들… 세릴리아 월드를 하게 된 이유가 이 녀석들 때문인데 지금은 활만 쓴다.
     뭔가 좀 이상하군. 분해된 핸드키트(여러 가지 잡화를 담을 수 있는, 들고 다니기 편한 아이템)를 쉽게 조립하는 나를 본 벨터가 입을 열었다.
     “오, 잡화물품 다루는 솜씨는 여전하구나. 역시 너는 잡화점 주인이 됐어야 했는데.”
     “에이, 농담하지 만세요.”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라 그런지 기분이 좋았다. 나는 유저들이 수리를 맡기고 같이 잡화물품을 수리했다. 벨터 혼자 하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닐 테니. 벨터와 함께 잡화물품을 한참 손질하고 있을 무렵, 한 사내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벨터. 루트 손질 좀 하러 왔어요.”
     “아, 이게 누군가, 음유시인 네오 아닌가?”
     나는 고개를 들어 음유시인 네오라는 유저를 보았다. 엥? 아니 그런데 이게 누구야? 아까 광장 분수대에 걸터앉아 악기연주를 하던 그 유저가 아닌가? 제일 인상적이었던 건 그가 연주를 할 때, 관중을 매혹시키는 연주 실력이 아니라 주변에 꼬이는(?) 여성 유저들이었다. 쳇, 벼로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인기가 꽤 많은 모양이다. 네오에게 류트를 받아 든 벨터가 류트를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음, 상태는 괜찮군요. 악기를 소중히 잘 다루는군요, 네오.”
     “음, 손 볼 곳이 없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예, 그럼 수고하세요.”
     류트를 돌려받은 네오는 광장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악기 연주 스킬이라, 왠지 또 끌리기 시작한다. 또한 저 류트라고 하는 악기의 생김새도 꽤나 독특해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벨터, 저도 악기 여주 스킬을 배우고 싶은데 서점에서 스킬 북을 사면되는 건가요?”
     “예? 이제 악기 연주까지 배우고 싶니? 참 너란 녀석은, 후후.”
     벨터가 나지막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 류트라는 악기는 내가 직접 만들 것이지만. 나는 쏜살같이 잡화점 옆에 위치한 서점으로 들어가 악기 연주 스킬 북을 사 들고 닷 잡화점으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허허. 녀석, 뭐가 그리 급한지…….”
     “아, 빨리 배우고 싶어서요.”
     “악기 연주 스킬이 손재주에 비례한다는 거 알고 있니?”
     “악기 연주가요?”
     “그래,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말이다.”
     벨터의 말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크크, 안 그래도 이 높은 손재주, 악기 연주를 할 때도 유용하게 쓸 수 있다니 정말 나는 운이 좋다. 기대에 잔뜩 부푼 나는 스킬 북을 읽기 시작했다.
     “악기 연주 스킬, 류트편 맞네. 류트는 16세기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유행했던 발현악기로, 바닥은 얕고 앞면에 ‘로자’라고 하는 상아조각으로 된 둥근 울림구멍이 있다. 통은 만돌린을 크게 한 듯한 모양으로 되어 있고, 얇고 작은 나무토막을 붙여 만들었다. 오호, 이렇게 만드는 거구나. 근데, 만돌린은 또 뭐야?”
     나는 흥미롭게 스킬 북을 쭉 읽어 내려갔다.
     “폭이 넓은 지판(指板)에는 금속으로 된 반음률(半音律)의 플랫이 있고, 현을 감은 곳은 직각으로 뒤로 구부러졌다. 현은 가로로 다섯 쌍 외에 한 줄이 더 있는 11현이 표준이다. 조현은 일반적으로 저음부로부터 G, C, f, a, d', g'가 표준이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음, 이런 거구나. 악보 보는 방법도 자세히 다 적혀 있네.”
     나는 스킬 북을 읽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앞으로 이 스킬 북은 팔에 끼고 다녀야겠군.
     캉캉!
     “왜 그래, 루카?”
     캉!
     “배고파?”
     캉캉!
     얌전히 있다가 짖는 루카, 아무래도 배가 고픈 모양이다. 루카의 모습을 본 벨터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잡화점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손에 먹을 것을 잔뜩 들고 나왔다. 커다란 빵 한 조각을 떼어 루카에게 던져주자 루카는 빵조각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아. 고마워요, 벨터.”
     “아니, 뭘. 자, 레드. 너도 먹어라.”
     벨터가 빵 한 조각을 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나는 빵을 받아 입에 물고 스킬 북을 덮었다. 입에 문 빵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나는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하품을 하는 루카를 쓰다듬어주며 벨터에에 말했다.
     “벨터, 혹시 류트 만들 재료 없나요?”
     “류트 만들 재료라… 있긴 한데 그냥 사는 게 나을 덴데. 굳이 만들 필요 없어.”
     “그래도 제가 만든 악기를 쓰고 싶어요.”
     “그래? 그럼 재료를 줄 테니 한번 여기서 조립해보거라.”
     “예.”
     벨터가 다시 잡화점에 들어가더니 재료를 들고 나왔는데, 재료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설명서와 함께 탁자 위에 놓인 류트 만들 재료. 나는 설명서를 보며 신중히 하나하나 조립하기 시작했다. 조립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5시간. 그만큼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물건이라 그런지 쉽게 만들 수 없었다. 류트를 들고 류트의 현을 손가락으로 튕겨보았다.
     띠링.
     오, 좋아! 소리가 제법 맑았다.
     “음, 처음 만드는 물건 치고는 제법 소리가 맑구나. 내가 만
    들어 놓은 류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지만 말이야.”
     “그래요? 그럼 이제 악기 연주 수련치를 올리는 것만 남았네요. 크크.”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연습용 악보는 스킬 북에 들어 있으니 굳이 악보를 사러 갈 필요도 없었다. 빈 악보야 벨터가 팔지만, 작곡이 되어 있는 악보는 유저들이 펼쳐놓은 개인상점에서 사야 하니까.
     나는 스킬 북을 탁자 위에 펼쳐놓고 악보대로 류트의 현을 튕겼다. 맑은 음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오가 연주할 때만큼 감미로운 곡은 아니었다. 뭐, 사실 연주라기보다 기초를 닦는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류트 특유의 맑은 음은 정말이지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류트 연주소리에 루카는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벨터가 잡화물품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악기 연주 스킬의 수련치를 올렸다. 수련치를 올리는 방법은 오로지 연주를 계속하는 것.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저물어가고 세릴리아 월드의 하늘은 점차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푸른 달과 함께 붉은 달도 뜨기 시작했다.
     “허허, 벌써 날이 저물기 시작했구나.”
     “그러게요. 악기 연주 스킬이란 거, 꽤 재미있는 것 같아요.”
     “녀석, 참 특이하구나.”
     “아이템 창 오픈!”
     파밧!
     나는 아이템 창에 류트를 조심스레 넣고 그 옆에 악기 연주 스킬 북을 둔 다음, 아이템 창을 닫았다. 그리고 바닥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루카를 조심스레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터, 저는 이제 가볼게요.”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꾸나. 그리고 가끔 놀러오거라. 오랜만에 보조가 있어서 일을 빨리 끝냈구나.”
     “그래요? 크크.”
     나는 루카를 안아 들고 여관으로 향했다. 일반고객 방 하나를 잡은 뒤, 침대 위에 루카를 올려두고 나도 그대로 드러누웠다. 참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는 것 같았다. 침대 위에서 대(大)자로 뻗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레인저가 되면 가보기로 했던 엘프의 도시 아리스 노아! 숲으로 이루어진 대도시. 언제 홈페이지에서 본 적도 있다. 레인저가 되었으니 활을 돌려받는 즉시 경훈과 혁 그리고 강찬과 함께 가봐야겠군.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    *     *
     늦은 시간. 어두컴컴한 숲에 한 명의 검사 유저가 바스타드 소드를 손에 쥐고 주변을 경계했다. 검붉은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띄고 잘생긴 외모. 키도 훤칠했다.
     크르르…….
     숲에서 이내 모습을 드러낸 놀(머리가 하이에나처럼 생긴 직립보행을 하는 몬스터) 떼. 힘으로만 따지면 오크보다 더 강력한 녀석들이었다. 대여섯 마리의 놀이 검사 유저를 포위한 채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사 유저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파이어 웨폰!”
     화르륵.
     검사 유저의 검신에 시뻘건 화염이 뒤덮였다. 유저가 손에 쥔 화염검은 어둠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카아!”
     선제공격을 하는 놀 떼. 검사 유저는 왼발을 축으로 몸을 반바퀴 회전시키며 제일 먼저 달려든 놀의 몸통을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재빨리 뒤로 물러나 ‘프리징 웨폰!’이라고 외치자 검신엔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흘렀고,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다른 한 마리의 놀의 목을 베어낸 검사 유저. 냉기가 흐르는 그의 검신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선 피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잘린 상태로 얼어버린 것이다.
     또다시 검신에 화염을 형성한 검사 유저는 놀 떼를 마구 베어냈다. 그에 순식간에 전멸한 놀 떼. 검사 유저는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입가엔 미소가 번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혀로 검신을 핥은 그는 먹잇감을 찾아 깊은 숲 속으로 향했다.
     “취익, 인간이군.”
     “오크? 크크. 오크 워리어로군.”
     갑옷으로 무장한 오크 워리어와 마주친 검사 유저는 선제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땅을 박차고 나아가 검을 휘둘렀고, 그의 검은 오크 워리어의 목을 베어나갔다. 오크 워리어는 재빨리 검을 들어 검사 유저의 검을 막아냈다. 서로 부딪힌 검은 쇠의 맑은 음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간만에 좋은 먹잇감이로군. 취익!”
     “누가 먹잇감인지는 봐야 알지. 안 그래? 블레이징 소드!"
     번쩍!
     검사 유저의 검신엔 붉은 기운이 맺혔다. 붉은 기운을 머금은 검은 오크 워리어의  팔뚝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크 워리어도 만만한 몬스터는 아니었기에 검사 유저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냈다.
     채앵!
     검사 유저는 민첩하게 뒤로 물러났다.
     “제법이군, 갑옷 입은 돼지새끼.”
     “취익, 벌레만도 못한 인간 주제에 잘도 지껄이는군. 쿠륵.”
     “구워주지. 파이어 웨폰!”
     화르륵.
     “크크크… 크하하하하!”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검사 유저. 하지만 여전히 두 눈에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덩치는 오크 워리어보단 작았지만, 기세만큼은 훨씬 거대했다. 그가 재빨리 달려들어 오크 워리어의 머리를 베어내려 했지만 오크 워리어는 재빨리 검사 유저의 검을 쳐냈다.
     “취이익!”
     “화검기(火劍氣)!”
     검사 유저는 오크 워리어의 반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해 나갔다.
     채앵!
     채앵!
     오크 워리어의 검이 검사 유저의 목을 베어나가자 그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피한 뒤, 빈틈을 보인 겨드랑이 사이에 검을 찔러 넣었다.
     “꿰에에엑!”
     충격이 상당히 컸는지 오크 워리어는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겨드랑이 부분에 화염검을 찔러 넣었으니 충격은 엄청날 것이다. 오크 워리어의 겨드랑이에 박힌 검을 뽑은 검사 유저는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반 바퀴 회전시킴과 동시에 오크 워리어의 목을 베어냈다.
     하지만 오크 워리어의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크 워리어가 두 눈에 핏발을 잔뜩 세운 채로 검사 유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때 검사 유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지? 누가 벌레보다 못한지.”
     푸쉬익.
     검사 유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크 워리어의 목에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땅에 떨어졌다. 오크 워리어를 단숨에 꺾은 검사 유저는 검신에 묻은 피를 혀로 닦아냈다.
                   *    *     *
     유리창을 관통한 따스한 햇살이 내 얼굴을 내리쬐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후아암… 벌써 아침인가? 엥? 그대로 잠들었었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자 꽤나 상쾌했다. 게임 상에서 잠을 자다니. 게다가 이렇게 상쾌하다니, 참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루카는 몸을 둥글게 말고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루카, 일어나봐. 이제 나가야지.”
     루카는 한쪽 귀를 쫑긋 세운 채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또다시 기지개를 켰다.
     “아, 활을 맡겨서 사냥도 못 가고… 혁이랑 경훈이를 불러서
    아리스 노아에 가볼까?”
     나는 루카를 안아 들고 여관 밖으로 나왔다. 왠지 허기진다. 나는 곧장 음식점으로 향했다. 음식점에 들어온 나는 근처에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루카는 음식냄새를 맡았는지 캉캉 짖기 시작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아… 예. 도, 돈가스 정식 하나만 주세요.”
     “돈가스 정식이요? 네, 감사합니다.”
     하필 알바생이 여자라니, 겨우 입을 연 나는 애꿎은 루카만 발로 툭툭 건드렸다. 뭐, 루카가 장난으로 받아주니 다행이었지만.
     음식을 주문한지 정확히 30초 만에 가져온 알바생. 싱긋 웃으며 내 탁자 위에 돈가스 정식을 놓고 가는 여성 유저. 나는 또다시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이런 이상한 버릇도 빨리 고쳐야겠어. 주문한 음식을 반반 나누어 루카와 나눠 먹은 나는 음식 값을 지불하고 음식점에서 나왔다. 루카는 배가 불러 기분이 좋은지 수도 세인트 모닝을 휘젓고 다녔다.
     “루카! 이리 와!”
     캉캉!
     너무 심하게 뛰어다니는 바람에 길을 가던 유저들에게 부딪혔고, 심지어 넘어지는 유저도 있었다. 지그이라도 불렀으니 망정이지, 분수대 광장에 있는 유저들에게 민폐를 끼칠 뻔했다.
     “어디 보자… 지금 이 녀석들이 접속을 했을지 모르겠네.”
     나는 메신저 창을 열어 경훈과 혁이 접속한 것을 보고 대화를 신청했다.
     [데시카 님께 대화를 요청합니다.]
     -응? 현성이냐?
     “응. 경훈아, 오랜만이다.”
     -그래. 딱 한 달 만이다. 잘 지냈어?
     “응. 너는?”
     -나도 뭐 잘 지냈다면 잘 지냈지.
     “아 근데 옆에 혁이도 있지?”
     -응.
     “그래? 너희 둘 엘프의 도시 ‘아리스 노아’라고 알아?”
     -아리스 노아? 거긴 이디야? 게다가 엘프의 도시라고?
     경훈이는 엘프의 도시 아리스 노아에 관한 것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또 착한 내가 설명해줄 시간이 온 것이다.
     “수도 세인트 모닝에는 우리 인간들이 살잖아. 아리스 노아에는 엘프를 선택한 유저들이 모여 사는 곳이야. 같이 가보자.”
     -그래? 그런데 길은 알아?
     “뭐, 홈페이지에서 뒤져봐야지. 근데 너희 둘 지금 어디야?”
     -우리? 지금 오크 사냥 좀 하다가 쉬고 있지.
     “그래? 그럼 사냥이 끝나면 쪽지 보내줘.”
     -응.
     나는 대화를 끊고 잡화점으로 향했다.
                   *    *     *
     “쉿! 가만 있어봐.”
     커다란 나무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 속에 무투가 유저와 전투 클레릭 유저가 수풀 뒤에 몸을 숨긴 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다보고 있는 방향에 놀 떼가 리젠되었다 여태까지 오크만 사냥하던 이 두 유저는 처음 보는 몬스터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혁. 저 녀석들 생긴 것 좀 봐, 하이에나 같이 생긴 놈들이
    직립보행 한다.”
     “그러네. 오크보다 강한가?”
     “한번 사냥해보자.”
     수풀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경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놀 떼에게 다가갔다. 그 뒤엔 메이스를 손에 쥔 혁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놀 한 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이내 이빨을 드러내며 냄새가 나는 방향을 경계하자 다른 놀들도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걸렸나 본데.”
     경훈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있던 혁이 말했다. 그러자 경훈은 수풀이 무성한 지면을 박차고 놀 떼에게 달려들었다.
     “탬핑 어택!”
     퍼억!
     선재공격을 받은 놀이 안면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함몰되었다. 그러자 예닐곱 마리의 놀 떼가 경훈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경훈은 상체를 숙이고 왼발을 축으로 제일 먼저 달려드는 놀에게 하이킥을 먹였다.
     놀을 공격했던 다리를 재빨리 원위치 시킨 경훈이 상체를 숙이고 공격했던 놀에게 파고들어 어퍼컷을 날렸고 놀은 피를 토해내며 쓰러졌다. 두 마리의 놀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경훈은 후방낙법으로 격을 재빨리 피한 뒤, 다시 전투자세를 취했다.
     뒤늦게 뛰쳐나온 혁은 손에 쥔 메이스로 경훈을 공격하려는 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린 숲. 예닐곱 마리의 놀 떼는 전부 혁과 경훈의 경험치를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처음 상대하는 몬스터를 쉽게 제압한 경훈이 함박웃음을 띤 채 입을 열었다.
     “뭐야! 되게 멍청하잖아!”
     “그러게, 하이에나가 뭘 하겠어.”
     널브러진 놀의 시체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현재 혁의 레벨은 51, 경훈의 레벨은 52이다. 한 달 동안 꾸준히 사냥한 결과 많은 레벨업을 할 수 있었다.
     “아, 근데 아까 현성이 녀석이 엘프들의 도시 아레스 노아? 뭐, 아무튼 거길 가자는데, 어떻게 할래?”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경훈이 말했다. 그러자 어깨에 메이스를 들쳐 메고 있던 혁이 경훈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엘프? 당연히 가야지! 엘프가 얼마나 예쁜지 모르지? 캬! 그냥 쭉쭉빵빵이야.”
     “넌 어째 머리가 그런 쪽으로만 잘 돌아가냐?”
     “유전이다, 짜샤.”
     혁이 경훈의 팔을 살짝 치며 말했다. 주저앉아 있던 경훈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 아무래도 한번 가보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해.”
     “왜? 내 말을 들으니까 솔깃하냐?”
     혁이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건 싸늘한 반응뿐.
     “내가 너냐, 이 변태 새끼야!”
     “변태라니! 같은 남자끼리 터놓고 말하자. 너 여자 좋아, 안 좋아?”
     “안 좋아.”
     “안 좋다고? 불알 떼버려라, 새끼야.”
     혁이 투덜거리며 대답하자 경훈이 재미있는 듯 실실 웃었다. 투덜대던 혁이 귀환 스크롤을 꺼내며 말했다.
     “아, 이제 슬슬 마을로 돌아가자. 너무 오랫동안 사냥했더니 지겨워 죽겠다.”
     “그래.”
     경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혁이 들고 있던 귀환 스크롤 북을 찢었고 이내 새하얀 빛이 그 둘을 감싸더니 이내 모습을 감췄다.
                   *    *     *
     “그래서 아리스 노아에 가겠다는 거냐?”
     “네.”
     나는 내 무릎 위에 배를 깔고 엎드린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벨터는 부럽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엘프, 특히 여자들이 무지 예쁘단다. 구경 잘하고 와.”
     “엥? 갑자기 무슨 소리 하세요?”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 벨터에게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벨터가 입을 열었다.
     “응? 여성 엘프들. 구경하러 가는 거 아니었니?”
     “아니, 저 그냥 활을 잘 다루는 종족의 사냥법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음… 그래?”
     벨터도 민망하긴 민망한가 보다. 하지만 뭐, 어떻겠나? 정말 엘프들의 사냥법을 알고 싶어서 가는 것뿐인데. 벨터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잡담을 하다 고개를 돌리자 왠지 익숙한 녀석들이 눈에 띈다. 검푸른 색 긴 머리에 약간 잘생긴, 검은 복장을 하고 손에 무언가를 착용하고 있는 유저와 갈색 머리를 삐죽삐죽 세운 평범한 생김새의 훤칠한 키, 경훈과 혁이었다. 저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두 녀석.
     “음, 왜 그러냐? 레드, 아는 사람들이냐?”
     “네, 친구들이에요.”
     “그렇구나.”
     대화를 하다 말고 고개를 돌린 나에게 벨터가 말했고 나는 들뜬 상태로 대답했다. 경훈과 혁은 금세 잡화점 앞으로 다가왔다.
     “요, 여기서 뭐 해?”
     “그냥 벨터랑 대화중이었어.”
     “아, 안녕하세요? 몇 번 뵌 적 있지요?”
     어깨에 메이스를 들쳐 멘 혁이 벨터에게 아는 척을 했다. 벨터가 손님을 대할 때, 상대방으로부터 하여금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미소를 지으며 대다했다.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하하! 그건 그렇고 현, 아니 레드. 그 뭐냐, 엘프의 도시 아레스 노아? 거기 언제쯤 갈 거야?”
     “아레스 노아가 아니라 아리스 노아야.”
     “어쨌든 새끼야.”
     혁이 기대에 들뜬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이 녀석도 혹시 벨터처럼 엘프 여성들을 구경하고 싶어 그러는 건 아니겠지? 혁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까 벨터의 눈빛과 흡사하다. 쯧쯧.
     “벨터. 저는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래, 다음에 또 놀러오너라.”
     “네. 데시카, 루샤크, 가자.”
     “응.”
     “엥? 어디 가, 인마!”
     내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경훈이 짧게 대답하며 뒤따라왔다. 혁은 온갖 폼을 다 잡다 뒤늦게 쫒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공터를 천천히 걸었다. 품에 안긴 루카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음? 공터에도 유저들이 꽤 많네.”
     “응. 홈페이지에서 본 적은 있는데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곳이야. 나는 오늘 처음 왔어.”
     공터를 쭉 둘러보던 경훈이 말했고 내가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매사에 진지한 경훈이 녀석. 얼굴도 약간 잘생겼지만, 매너까지 좋아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스타일이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왠지 한 명이 부족한 것 같은 느낌. 그러고 보니 강찬이 없었다. 나는 뒤따라오는 경훈에게 말했다.
     “근데 요즘 강찬이가 잘 안 보인다.”
     “그러게, 우리도 연락을 거의 못 했어. 무슨 일 있는 것 아닌가…….”
     경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 많던 혁도 강찬이 애기를 꺼내자 잠자코 있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근처 벤치에 앉은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때, 입담꾼 혁이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시무룩해. 그 녀석도 나 못지않게 여자 밝히니까 엘프의 도시에 간다고 하면 사냥터에서 여기까지 냅다 달려올 녀석이야. 내가 대화 걸어볼 테니까 너희 둘은 언제 아리스 노아에 갈 건지나 정해놔.”
     “아, 그러는 게 좋겠다. 현성아, 여기서 얼마나 먼 거야?”
     “흐음… 얼마나 먼지 모르겠어. 아무튼 이틀 후에 출발할 거야, 그때 수리 맡긴 활을 받거든. 이따가 너희들도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자료를 찾아봐.”
     “음, 그래야겠네.”
     경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류트와 스킬 북을 꺼내 들고 아이템 창을 닫았다.
     “응? 뭐야 그 류트는? 너 악기 연주 스킬도 올리고 있어?”
     “아, 그냥 재미로 올리는 거야.”
     “그래? 잠깐, 가만 있어봐. 악기 연주 스킬이 손재주에 비례 한다던데, 맞아?”
     “응. 근데 처음에만 그렇지 나중엔 안 그럴걸? 음유시인들이 지력, 지혜, 손재주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도 있고.”
     나는 스킬 북을 펼쳐놓고 류트의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류트의 맑은 음이 바람을 타고 흐르는 물처럼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연습용 악보를 연주하는 것이었지만, 류트의 아름다운 소리에 모두들 넋이 나갔다. 꾸벅꾸벅 졸던 루카도 어느새 깊은 잠이 들었다.
     “강찬아, 요새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야?”
     강창이 혁의 대화신청을 승낙했나 보다. 혁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응, 애들 다 잘 지내. 아, 우리 아리스 노아에 갈 생각인데, 여기가 또 엘프의 도시야. 너도 한번 가보자. 엘프가 그냥 쭉쭉빵빵 죽여줘. 여기? 세인트 모닝 공터지. 응, 그래. 빨리 와!”
     강찬이 이곳에 오기로 했는지 혁의 표정이 매우 밝았다. 뭐, 평소에도 밝고 말이 많은 녀석이지만. 내가 연주하는 류트소리를 들으며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경훈과 혁. 나는 피식 웃으며 계속해서 류트를 연주했다.
     “오랜만이다. 현성, 경훈, 혁!”
     어디선가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나는 류트연주를 멈추고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붉은 색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꽃미남형의 잘생긴 얼굴과 큰 키, 은빛 경갑을 입고 허리춤에 바스타드 소드를 찬 검사 유저, 강찬이었다. 전보다 얼굴이 훌쭉해졌고, 눈 밑에는 옅은 다크 서클이 조금 있었다.
     “어엇! 강찬!”
     제일 먼저 일어나 강찬에게 달려가더니 헤드락을 거는 혁.
     “이 녀석아! 그동안 얼만 걱정했다고!”
     “아아, 미안, 미안! 살려줘!”
     “어어! 저놈이 사람 팬다!”
     경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며 혁의 엉덩이를 걷어차자, 혁이 강찬에게 걸었던 헤드락을 풀곤 엉덩이를 감싸며 비명을 질러댔다.
     “아악! 이 새꺄! 또 둘이서 날 다굴한 셈이냐!”
     “푸하하! 이번엔 네 차례다!”
     크게 웃으며 혁에게 헤드락을 거는 강찬. 나는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강찬에게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다른 유저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어린애처럼 장난치는 세 녀석. 내년이면 성인데 아직도 저러고 놀다니.
     “그만 하고 이제 벤치로 와.”
     “그러는 게 좋겠다. 크큭.”
     내가 소리치자 경훈이 킥킥 웃으며 벤치로 다가왔다. 강찬과 혁은 어깨동무를 하고 벤치로 걸어왔다.
     “못 본 사이에 많이 핼쑥해졌다.”
     “그래? 한긴, 요새 너무 레벨업만 하러 다녀서 잠도 제대로 못 잤거든.”
     “레벨 몇인데?”
     “67.”
     강탄의 한마디에 우리는 경악했다. 67이라니, 대체 어디서 사냥을 했기에 저런 레벨이 나올까. 강찬이 벤치에 걸터앉았고, 우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동안 못 나눴던 대화를 나누었다. 강찬은 새로운 스킬을 얻게 된 이야기와 자신보다 강한 몹을 쓰러뜨린 일, 던전에서 죽다 살아난 일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나도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이야… 그래서 현성이 넌 벌써 2차 전직을 한 거야?”
     “응. 로시토라고 궁탑의 스승이 있는데, 대륙에 단 한 명밖에 없는 레인지 마스터야. 1차 스킬을 모두 마스터해야 레인지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난 그걸 믿고 한 달 동안 죽어라 수련치만 올렸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 인내심을 시험해본 거래.”
     “그랬구나. 근데 2차 전직은 레벨 100때 하는 건데, 너 레벨 100이야?”
     2차 전직을 했다는 나의 말에 강찬이 물어왔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50. 근데 레벨 150때 2차 전직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모든 직업 다 레벨 100때 2차 전직을 하고, 200때 3차 전직. 그리고 마스터 레벨이 300이야.”
     낚였다. 나는 로시토에게 제대로 낚인 것이다. 그래도 내 끈기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 중에 제일 기대가 큰 나를 레인저로 전직시켜 레인지 마스터가 되게 하려는 로시토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레벨 50에 2차 전직을 하다니, 궁수는 원래 그런 거야?”
     “아니, 나는 궁탑의 제자라… 궁탑의 제자가 아닌 다른 궁수들은 레인저로 2차 전직을 할 수 없고 레벨 100에 헌터나 사수로 2차 전직을 할 수 있다나 봐.”
     “그런 거구나.”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다했다.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 있던 혁이 입을 열었다.
     “야, 이제 우리도 조금만 더 하면 2차 전직을 하는 거구나, 경험치는 더럽게 안 오르는데.”
     “그나저나 강찬아, 너도 갈 수 있어? 아리스 노아에.”
     경훈의 말에 강찬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말했다.
     “갈 수야 있지. 언제 가는 거야?”
     “이틀 후에. 현성이 수리 맡긴 활이 다 고쳐질 때쯤?”
     “이틀 후? 이틀 후엔 안 될 것 같은데… 약속이 있어서.”
     강찬이 미안해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약속이 잡혀 있다면 할 수 없지. 경훈은 강찬의 등을 두드리며 나중에라도 가자고 위로해주었다. 나는 스킬 북과 류트를 아이템 창에 던져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틀 후에 여기서 만나는 거야. 그동안 다들 아리스 노아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자.”
     경훈과 혁이 고개를 끄덕였고 강찬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강찬을 보며 빙긋 웃어주었다.
     “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오랜만에 만났으니 주점에 가는게 어때?”
     “주점? 좋지!”
     혁이 소리치자 경훈이 맞장구치며 소리쳤다. 혁은 강찬의 팔을 끌어당기며 일으켜 세웠고 나는 루카를 안아 들고 녀석들을 따라 주점으로 향했다.
     주점으로 도착한 우리는 제일 구석진 자리를 택했다. 뭐, 이 주점은 저번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주점이기도 하고 미성년자가 출입할 수 있으니 아무 데나 앉아도 상관없긴 하지만.
     주문을 하자 늙은 주인장이 맥주 네 병과 안주를 가져왔다. 윽. 나는 술을 못하는데.
     “자, 모두 뚜껑을 따고.”
     뻐엉!
     제일 신이 난 혁이 맥주병이 오자마자 바로 병따개로 뚜껑을 땄다. 뭐, 기분이다. 간만에 만난 강찬도 있으니. 이깟 맥주 하나 못 마시랴. 나도 병따개로 병뚜껑을 따 건배를 했다.
     “개 사료는 서비스요.”
     주점 주인인 노인장 NPC는 우유와 개 사료가 담긴 넓적하고 큰 그릇을 탁자 밑에 두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나는 맥주병의 끝을 소매로 닦은 뒤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역시 내 입엔 맞지 않았다.
     “이야, 현성이 너 술 안 마시는 줄 알았는데 잘 마시네?”
     “큭! 간만에 강찬이도 왔고 해서 그냥 참고 마시는 거야.”
     맥주를 한 모금 마신 경훈이 말하자 나는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안주는 샐러드와 삶은 오징어, 육포가 나왔다. 루카는 아까 밥을 먹었을 텐데 개 사료를 잘도 먹는다. 나는 포크로 샐러드를 집어 입에 넣었다.
     “음… 맛있네.”
     “야, 육포 맛있다.”
     혁이 육포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그런데 강찬의 눈빛이 매우 고독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사실 너희들에게 해줄 말이 있는데…….”
     고독해 보이던 강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에 맥주를 마시던 경훈과 혁과 내 시선이 강찬에게 집중되었다.
     “사람 죽여본 적 있냐?”
     뜬금없이 사람을 죽여본 적 있냐고 묻는 강찬. 우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육포 하나를 집어 들고 입을 열었다.
     “실제로?”
     “아니, 게임 상에서.”
     “아아. PK라면 뭐 없어. 난.”
     “나도.”
     “나도 없어.”
     강찬이 피식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이거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지는군.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너희들 호칭 하나씩 가지고 있지?”
     “호칭? 아직까진 없는데.”
     삶은 오징어 다리를 입에 문 경훈이 대답했다. 나는 아이템 창을 열고 배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너희들 내 정보 보기를 해서 내 호칭이 뭐지 봐. 봤어?”
     “응.”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맞아.”
     나는 배지를 가슴팍 왼쪽에 달고는 빙긋 웃으며 닷 말했다.
     “이제 다시 정보 보기로 내 호칭이 어떻게 됐는지 한번 봐.”
     “구울 헌터?”
     “뭐여, 이거?”
     반응이 가지각색이군. 나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크험험. 이건 말이야, 호칭을 바꿔주는 배지인데, 저번에 저주받은 망자의 무덤에서 받은 파티 퀘스트 구울 헌팅을 수행완료해서 받은 배지야.”
     “나도 한 번만 달아보자.”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한 혁에게 나는 배지를 뗑 건네주었다. 혁이 가슴팍 왼쪽에 달고 상태 창을 열어보더니 신기한 듯 소리쳤다.
     “오오! 이것 봐! 나도 구울 헌터야!”
     “초딩아, 좋냐?”
     “풉.”
     혁의 말에 경훈이 대꾸했고 맥주를 마시던 강찬이 피식 웃었다. 늘 저렇게 티격태격 다투면서 친한 게 신기했다. 삶은 오징어를 집어 입에 넣고 내 상태 창을 열었다.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50
     생명력(HP). 560
     마나(MP). 350
     스태미나(SP). 370(배고픔 수치 10%/ 갈증 5%)
     힘 87
     체력 15
     민첩 137
     손재주 393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195~300
     방어력 4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145
     ‘어라? 스탯 포인트가 145개나 모였네.’
     나는 45개의 포인트를 3:2 비율로 손재주와 민첩에 투자하고 100개는 남겨주었다. 혹시 모르니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맥주 한 병을 비운 강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 피곤하다. 난 가서 자야겠어.”
     “나도 그래.”
     혁이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대꾸했다. 뭐, 나도 슬슬 잠이 오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릇을 싹 비운 루카는 이미 곯아 떨어졌고 경훈도 기지개를 켜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다들 몸 상태가 안 좋은가 보군.
     “에고. 그럼 이틀 후 공터 벤치에서 보는 거다. 강찬아, 혹시라도 약속이 취소되거나 하면 너도 와.”
     “응.”
     “그럼 나 먼저 갈게. 로그아웃!”
     파밧!
     우잉.
     “후아… 24시간 게임만 한 건 이번이 처음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헤드셋을 벗었다. 게임베드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주인님, 요즘 들어 게임을 너무 오래 하십니다.」
     “괜찮아, 괜찮아. 컴, 나 게임하는 동안 메시지 온 거 있어?”
     「일반 메시지 1건, 스팸 메시지 2건. 총 3건 왔습니다.」
     “그래? 그럼 스팸 메시지는 삭제하고 일반 메시지는 누가 보낸 거야?”
     「어머니께서 보내셨습니다. 들려드릴까요?」
     “응.”
     「일반 메시지, 첫 번째. “현성아, 요새 메시지를 자주 보내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우리 아들, 식사는 거르지 말고 제때 잘 챙겨 먹어야 된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게임기기를 보내주셨다면서? 게임 적당히 하고, 나중에 메시지 더 보내마.」
     “음, 보관함에 저장해줘. 그리고 불 좀 꺼줘, 컴. 나 한 숨 자야겠다.
     「네.」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컴, 멀티비전 켜서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에 접속 좀 해줘. 찾아볼 게 있어.”
     나는 아리스 노아로 가는 길을 검색해보았다. 지금 알았지만 세릴리아 월드의 대륙은 지구와 1:1 비율로 만들어진 정말로 거대한 대륙이었다. 이런 맵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아리스 노아는 제법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길 중간, 중간에 작은 마을이 하나씩 있었고, 가끔 오크 도적떼가 출몰한다는 글도 있었다. 고레벨의 PK들이 가끔 등장하니 조시마라는 내용이 제일 걱정되었다.
     엘프의 마을까지 가는 것의 거의 원정을 하는 수준이었기에 식량과 준비물을 꽤 많이 챙겨야 할 것 같았다. 마차를 대여할 수 있지만 아리스 노아까지 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게 비쌌기에 그냥 걸어가는 쪽을 택해야 했다. 가끔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중형 몬스터가 출몰하니 조심하라는 글도 적혀 있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리스 노아에 가는 법을 쭉 읽어보곤 컴에게 멀티비전을 꺼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뒤, 방으로 들어왔다. 게임기기 허리 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누르자 캡슐의 문이 열렸고, 나는 캡슐 안으로 들어가 게임베드에 누웠다. 헤드셋을 쓰자 기계음과 함께 캡슐의 문이 닫혔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50.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여기는 ‘Just'라는 주점 안. 어제 이곳에서 로그아웃을 했었지. 나는 주점에서 나와 세인트 모닝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엔 수많은 유저들로 북적였다. 루카는 옆에서 꼬리를 흔들며 캉캉 짖고 있었다.
     “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한 유저. 초록색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 쓴 유저. 우윳빛 피부에 키가 160센티미터 정도 되는 여자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이 버릇은 언제쯤이면 고쳐질까. 밝은 초록색 눈동자와 오뚝한 코, 앵두 같은 입술이 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지금껏 여자를 봐오면서 몸이 굳는 현상 이외에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나는 하려는 말이 목에 걸려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군. 고작 한다는 대답이 네? 하나야? 그러자 초록색 후드를 뒤집어쓴 유저가 입을 열었다.
     “저어… 죄송하지만 여기가 어디에요?”
     초보자인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는 세, 세릴리아 월드. 이, 인간 유저들이 사는 수도 세인트 모닝이라는 도시에요.”
     복장이나 접근을 두려워하는 걸로 보아 아마도 초보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심장을 세차게 뛰게 한 여자. 지금도 내 심장박동수가 증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여성 유저의 눈동자는 한없이 맑았다. 수많은 별이 들어 있는 듯한 눈. 의지하고 싶어 하는 듯한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내 심장을 더욱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 친절하게 대답해주자 여성 유저는 생긋 웃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짧게 한마디를 내뱉으며 뒤돌아서는 유저.
     “자, 잠깐만요.”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한마디에 여성 유저가 다시 뒤돌아섰다. 왜 불렀냐는 눈빛. 하지만 싫어하는 내색은 아니었다. 왠지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유저. 확실히 내가 오버하는 것 같지만 그 만큼 간절했다. 여기서 무슨 개소리냐고 묻는 이가 있겠지만, 인생 18년을 살면서 여자와 일대일 대면을 했을 때, 몸이 굳는 증상 외에 이렇게 심장이 콩닥거리는 증상은 처음이었다.
     “부르셨어요?”
     하지만 ‘친추(친구 추가) 해도 될까요?’ 하는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꺼낸 한마디.
     “로브 색이 참 예쁘네요. 하하.”
     “그래요? 고마워요.”
     강현성. 넌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흑흑. 나는 다시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저기, 죄, 죄송하지만 친추 해도 될까요?”
     나는 극단적인 생각 때문인지 불쾌해하며 거절할 것 같았던 유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되요. 안 그래도 세인트 모닝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요.”
     “아, 그, 그러세요?”
     “네. 그런데 실례지만… 같이 다녀도 될까요?”
     “아, 예. 괜찮으시다면…….”
     뭔가 어색하기도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처음으로 여자와 동행하는 것 때문인지 어색한 기분이 더 들었다. 막상 같이 다니기로 했지만 뭘 먼저 해야 할까 하는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바로 세인트 모닝을 쭉 둘러보면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는 것.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세인트 모닝 좀 둘러보실래요? 워낙 큰 도시라 볼거리가 많은데.”
     “좋아요.”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것 같아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분수대 광장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광장에서 조금 벗어나 좌판을 깔고 물건을 파는 벼룩시장에 다다랐을 때, 유저가 신기한 듯 입을 열었다.
     “여기도 이렇게 물물거래를 하는구나…….”
     “예?”
     “아, 아니에요. 다른 곳도 설명해주세요.”
     “아, 예. 가자, 루카.”
     캉캉!
     꼬리를 흔들며 쫄래쫄래 따라오는 루카. 그런 루카를 본 유저가 입을 열었다.
     “응? 이 강아지는 뭐예요?”
     강아지, 강아지, 강아지, 강아지. 늑대에게 강아지라니…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건 제 소환수인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샤라고 해요. 별명은 루카예요.”
     “너무 귀여워요. 강아지 같아.”
     혀를 내밀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루카에게 다가가 품에 안아 든 유저. 루카도 싫어하진 않았다. 저 녀석도 남녀차별을 하는 것인가, 처음에 날 만났을 땐 그렇게 싫어하더니.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딱 맞는 말이었다. 루카를 품에 안고 얼굴을 부비는 유저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이, 이제 다른 곳도 쭉 둘러보셔야죠?”
     “네.”
     나와 나란히 걷는 유저. 누가 본다면 커플로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뭐, 단순히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나는 왠지 모르게 행복했다.
     커다란 건물에 다다르자 유저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로 세인트 모닝에서 가장 큰 건물인 관청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여긴 관청이라고 해요. 다른 상점에서 세금을 내는 곳이지요. 개인상점을 열 때, 관청에서 허가증을 받아야 해요. 저는 처음에 그런 것도 모르고 물건을 판 적이 있었는데.”
     “정말 크네요. 우와…….”
     역시 초보자인가 보다. 이런 건물에 감탄사를 내뱉다니. 하긴, 나도 처음엔 이랬던 것 같다. 이게 관청이야, 빌딩이야? 하고 착각할 정도였으니. 나는 관청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준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워낙 큰 도시이기 때문에 나도 가보지 못한 곳이 있었고 또 아는 것도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가 어떤 곳인지 설명해줄 지식은 있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늘어놓을 때마다 유저는 신기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쭉 둘러보았고, 재미있다는 듯 빙긋 웃기도 했다. 뭐, 그럴 때만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지만. 그렇게 내가 아는 것은 거의 다 설명해주었고 이제 다른 소재로 넘어가야 할 때, 우리는 무기점에 다다랐다. 무기점에 무기 진열대를 정리하는 아세른을 볼 수 있었다.
     “아세른!”
     “아, 레드 아닌가? 마친 무기 수리가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활을 돌려주려고 했었네.”
     “아, 그래요? 저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제 물건 좀 금방 돌려받고 나올게요.”
     “네.”
     나는 루카를 안고 있는 유저에게 조심스레 말하고 무기점으로 들어왔다. 이틀 만에 보는 것이지만 정말 반가운 레드 롱 보우. 활을 건네주는 아세른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어두웠다. 나는 그런 아세른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갑자기 왜 그러세요?”
     “레드, 심각하게 들어주길 바라네.”
     갑자기 심각하게 말하는 아세른. 매사에 진지한 아세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유난히 진지했다.
     “자네의 레드 롱 보우 말일세, 상태가 너무 악화되었네. 되도록 활을 쏘는 것 이외에 활등으로 공격을 가하는 것은 자제하게. 더 이상 무리를 하면… 여영 못 쓰게 된다네.”
     나는 머리를 쇠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궁수는 활을 자신의 손처럼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것이거늘, 나는 그러지 못했다. 활 수리를 하지 않고 무조건 수련치 올리는 데 매달렸고, 무슨 일이 생기면 아무렇지 않게 활을 내팽개쳤다.
     난 쓴 웃음을 지으며 활을 수리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무기점을 나왔다. 활을 등에 메고 나오자 루카를 안고 있는 유저는 기다렸다는 듯 반가워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많이 늦었죠? 죄송해요.”
     “아니에요. 여기가 무기점인가 봐요?”
     “네, 세인트 모닝 최고의 대장장이 ‘아세른’이 운영하고 있는 무기점이에요. 무기점은 안에 있고 지금 밖은 마치 대장간처럼 보이죠?”
     “네.”
     “음. 아직 한 군데 더 남았는데, 가 보실래요?”
     “네, 가요.”
     잡화점을 향해 나와 나란히 걷는 유저. 아차, 이름 묻는 걸 깜박했다. 그리고 내 이름은 지금 말을 말해야 하나, 아니면 좀 이따가 해야 하나. 그렇게 고민을 하던 나는 잡화점에 거의 다다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저는 레드 파운이라고 해요. 레드가 이름이고 파운은 성이에요. 그냥 레드라고 부르시면 되요.”
     ‘어쩌라고요?’라고는 하지 않겠지. 내 말에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도 입을 열었다.
     “저는 티아 젠이에요. 이름이 티아, 성이 젠.”
     “이, 이름 참 예, 예쁜네요. 하하.”
     “고마워요.”
     나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잡화점 앞에 오게 된 티아와 나. 잡화점 앞 탁ㅈ에서 잡화물품을 만지자거리던 벨터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 레드! 요즘 자주 오는구나.”
     “네, 시간이 많이 남아서요.”
     “응?”
     내 옆에 선 티아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벨터. 그러자 티아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티아 젠이라고 해요.”
     “아, 아. 반갑습니다. 저는 세인트 모닝 잡화점 주인 벨터라고 합니다. 레드, 잠깐 이리 와주겠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티아에게 빙긋 웃으며 벨터가 대답했다. 나는 벨터에게 다가갔고 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자 친구냐?”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어라? 이 녀석, 얼굴 빨개진 것 봐라.”
     “우씨.”
     나는 벨터를 살짝 밀쳤다. 그러자 벨터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서 있지만 말고 여자분과 같이 앉아라. 차와 음식을 내올 테니.”
     “아, 안 그러서도…….‘
     “내 성의를 무시하는 거니?”
     나는 고래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자 벨터가 빙긋 웃어 보이더니 잡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탁자 앞에 놓인 의자를 빼내며 말했다.
     “저… 티아, 여, 여기 앉으세요.”
     “네.”
     평소와는 다른 나의 행동에 루카가 빤히 쳐다본다. 뭘 봐, 인마! 나는 티아의 옆자리에는 앉지 못하고 맞은편에 앉아 다리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금세 차와 음식을 내온 벨터가 탁자 위에 놓인 잡화 물품을 쓸어내리고 음식을 올려놓았다.
    *   *   *
     “야, 남은 하루 동안 뭘 하지?”
     “글쎄… 마땅히 할 것도 없는데.”
     “낚시나 하자.”
     “그럴까?”
     갈색 머리를 삐죽삐죽 세운 유저가 낚시를 하잔 말에 검푸른색 긴 머리를 가진 유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들은 낚싯대를 사기 위해 잡화점으로 향했다.
     “얼레? 야, 경훈아. 저거 현성이 아니냐?”
     “어디? 엥? 맞는 것 같은데? 가운데 뻘건 활을 등에 메고 있으면 100% 현성이야.”
     “근데 옆에 초록색 후드를 뒤집어쓴 녀석은 누구냐?”
     “내가 아냐?”
     

    제3장   엘프의 도사, 아리스 노아(1)

     잡화점에 다다른 경훈과 혁. 혁은 현성의 등짝을 후리며 소리쳤다.
     “여기서 뭐 해!”
     “으악! 뭐, 뭐야!”
     갑작스런 선제공격(?)에 현성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그런 현성의 반응을 본 혁이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혁이 쓰러져 웃고 있을 때 경훈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근데 옆에 후드 뒤집어쓴 분은 누구야?”
     “아, 그게…….”
     음식과 차를 맜있게 먹던 티아가 고개를 들어 뒤돌아보았다.
     티아와 눈이 마주친 경훈은 새삼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억! 현성이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다니!’
     “안녕하세요, 레드의 친구 분이신가 봐요?”
     “아, 예. 데시카라고 합니다.”
     “전 티아 젠이에요. 티아라고 불러주세요.”
                   *    *     *
     배꼽을 잡고 웃던 혁도 티아의 얼굴을 보자 금세 태도가 바뀌었다. 이 녀석들, 흑심을 품고 있는 거 아냐? 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혁이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능력 좋다."
     “그, 그런 거 아니야!”
     나는 혁을 밀치며 소리쳤다. 어찌나 세게 밀쳤는지 혁이 잡화물품을 쌓아둔 곳에 쳐박혀버렸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니면 아니지, 왜 밀치냐!”
     “미, 미안.”
     혁이 허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경훈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쯧쯧, 촐싹대니 그런 꼴이 되는 거야.”
     “뭐, 인마?”
     이런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는지 티아가 집어든 쿠키를 입에 넣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재, 재들은 원래 저렇게 티격태격해요.”
     “응? 그래요? 전 또 싸우려고 하는 줄 알았어요.”
     조심스레 쿠키를 한입 베어 먹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티아의 볼이 붉어지며 내게 말했다.
     “응?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아니에요.”
     나는 즉시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뻗어 탁자 위 접시에 놓인 쿠키를 집어 들었다. 너무 빤히 쳐다봐서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경훈이 입을 열었다.
     “아, 레드 활 내일 돌려받는다고 하지 않았어?”
     “응? 아, 활? 그냥 수리가 빨리 끝났다고 해서 받아왔지.”
     “그래? 그럼 아리스 노아에 언제 갈 거야?”
     내가 막 대답을 하려는 순간, 티아가 입에 물고 있던 쿠키를
    떼며 소리쳤다.
     “아리스 노아에 가실 거예요?”
     “아, 예. 레드가 며칠 전부터 가자고 해서요.”
     갑작스런 티아의 반응에 경훈이 다급히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티아는 무언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활 수리도 끝났으니 오늘 가볼까?
     아리스 노아까지 가려면 적어도 며칠은 걸릴 것이다. 하루 일찍 출발한다고 해서 해가 될 건 없다고 생각한 나는 쿠키를 와작와작 씹어 먹으며 입을 열었다.
     “뭐, 오늘 갈까?”
     “가자, 가자!”
     혁이 오두방정을 떨며 소리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찬밥이 된 벨터. 벨터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잡화물품을 조립하고 있었다.
     “아, 벨터. 갑자기 소란 피워서 죄송해요.”
     “아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오히려 놀러 와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걸.”
     나는 벨터에게 미안한 나머지 조심스럽게 말했고, 그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먹은 찻잔과 접시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잡화물품을 조립하던 벨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그냥 두고 가거라. 내가 치울 테니.”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신세만 지고 가요.”
     티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벨터는 빙긋 웃어 보이곤 찻잔과 접시를 들고 잡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벨터를 따라 잡화점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이며 고맙단 인사를 했고, 그는 자주 놀러오라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잡화점에서 나온 나는 잡화점 앞 탁자에서 티아와 대화를 하는 경훈과 혁을 목격했다. 혁이 녀석은 평소와 달리 진지했다.
     “자, 이제 준비하고 가자.”
     “그래.”
     “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경훈과 혁. 티아도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뭐, 한 번 같이 가보는 것도 좋겠지.
     우리는 식료품점에 들러 필요한 만큼의 식료품과 물을 샀다. 그리고 무기점에 들러 화살을 충분히 사고 모든 정비를 끝낸 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길은 대충 알고 있다. 세인트 모닝의 정문으로 빠져나와 앞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산길이 나온다. 고블린 도적떼나 오크 도적떼, PK와 중형 몬스터만 조심하면 된다.
     세인트 모닝에서 벗어나자, 왠지 모를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레인저가 되기 위해 지하 수련장에 갇혀 수련치를 올린 지난 한 달을 생각하니 정말로 끔찍했다.
     루카를 안아 든 티아는 내 옆에 바짝 붙어 나와 나란히 걸었고, 그 뒤로 혁과 경훈이 나란히 걸었다.
     “티아는 세인트 모닝 밖으로 나오는 건 처음이죠?”
     “네.”
     뒤따라오는 경훈의 말에 이리저리 둘러보던 티아가 짧게 대답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앞머리와 얼굴이 조금 보이는 티아, 생각 같아선 후두를 뒤로 넘겨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깊고 어두운 숲에 도착했다. 밖은 대낮이었지만 이 숲만은 저녁이나 다름없었다.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도중 멀리서 밝은 호롱불이 보였다.
     “저게 뭐지?”
     “그러게.”
     “어디 한번 보자. 적안!”
     적안을 개안하고 저 멀리 있는 호롱불에 집중하자, 시아가 확보되며 서너 대의 마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적안을 해제하며 입을 열었다.
     “마차가 서너 대 서 있는데?”
     “탈 수 있으면 타자. 오래 걸었더니 다리가 아프다.”
     메이스를 어깨에 들쳐 멘 혁이 투덜대며 말했다. 나는 내 옆에서 걷고 있는 티아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리 안 아프세요?”
     “괜찮아요. 그런데 조금 지치네요.”
     힘들다는 거군. 우리는 곧 마차가 세워진 곳에 오게 되었고 NPC로 보이는 사내 네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마차에 탑승하시겠습니까? 건넛마을까지 1인당 1골드입니다.”
     1인당 1골드, 차비치곤 꽤나 비싼 돈인 것 같았지만 나는 아이템 창에서 4골드를 꺼내 NPC에게 건넸다.
     “자, 이쪽으로 타십시오.”
     나는 재빨리 마차 위에 올라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티아는 한 손으로 루카를 안고 다른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티아가 올라탄 것을 확인한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혁이 입을 열었다.
     “얼레? 저놈 봐라. 우린 안 잡아주냐?”
     “알아서 올라와.”
     내 대답에 혁이 투덜대며 마차에 올라탔고 경훈도 혁을 따라 올라탔다.
     우리가 다 올라타자, 마부로 보이는 NPC가 마차의 뒷문을 닫고 말을 몰기 시작했다. ack는 빠른 속도로 좁지 않은 오솔길을 질주했다. 이거, 마치 시골 기차를 탄 기분이군.
     마차 창문으로 보이는 나무들. 요즘엔 거의 볼 수 없는 나무와 풀이 무성하게 자나란 숲. 창문 밖을 바라보던 경훈이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아… 기대된다. 엘프의 도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홈페이지 안 가봤어? 나만 가본 건가… 건물 전부 나무로 되어 있더라. 나무를 깎아 만든 게 아니라 그냥 나무에 구멍이 난 정도?”
     나의 대답에 경훈의 눈빛엔 기대감이 가득했다. 얌전히 있던 혁이 아이템 창에서 삶은 달걀을 꺼내 우리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이 녀석이 웬일로 먹을 것을 다 나눠주지? 그리고 내 눈에 포착된 것. 달걀껍질을 벗겨서 티아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고맙습니다.”
     “뭐, 이런 걸로 고마워하세요.”
     으으… 끓어오른다. 하지만 이런 내 맘을 알았는지 잠자코 지켜보던 경훈이 입을 열었다.
     “루샤크, 왜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냐.”
     “시끄러!”
     또다시 투덜대며 달걀껍질을 까는 혁. 아무리 티격태격 싸우는 사이라도 말발은 경훈이 한 수 위였다.
     그리고 보니 나도 배가 고프군. 나는 아이템 창에서 귤 서너 개를 꺼내 혁과 경훈에게 건제주고 귤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훈이 입을 열었다.
     “얼레? 티아 씨는 안 줘?”
     “응? 까드리려고.”
     티아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런 나를 본 경훈은 나지막이 웃었고 혁은 계속 투덜댔다.
     “이거 드세요.”
     “고마워요.”
     티아에게 귤을 건네주자 그녀는 내가 깐 귤을 하나씩 입에 넣고 먹기 시작했다. 정말 먹는 모습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도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럴 때 연주 수련치만 높았다면 류트를 꺼내 연주라도 할 텐데. 나는 귤껍질을 까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차는 울창한 숲의 오솔길을 쉬지 않고 달렸다.
     히히힝!
     “으, 으악!”
     그런데 갑자기 느닷없이 멈춰서는 마차. 그와 동시에 마부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고 그 순간, 나와 티아의 머리 사이로 커다란 도(刀)가 쑥 밀려 들어왔다.
     “까악!”
     갑자기 튀어나온 도에 놀란 티아가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숙
    였다.
     나는 등에 메고 있던 레드 롱 보우를 손에 쥐고 풀어진 활시위를 활 끝에 걸었다. 그리고 화살 하나를 꺼내 들고 적안을 개안한 뒤에 마차에서 내렸다.
     무투가인 경훈과 전투 클레릭인 혁도 뒤따라 내렸다. 마부를 위협하는 오크 도적단.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민간인들에겐 정말로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마차 위에 착지했다. 그리고 재빨리 화살 깃을 절피에 걸고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목표물은 마부의 목에 도를 찔러 넣으려는 오크! 손으로 쥐고 있던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맹렬히 대기를 가르며 오크의 머리에 꽂혔다.
     마차 아래에서 둔탁한 파육음이 들려왔다. 빠른 몸놀림으로 오크 도적을 구타하는 경훈과 메이스로 꼴통을 부수는 혁. 나도 질세라, 화살 두 개를 꺼내 들고 퀵 스텝을 걸었다. 마차에서 뛰어올라 근처의 큰 나뭇가지에 착지한 나는 두 개의 화살을 활시위에 걸치고 외쳤다.
     “더블 샷!”
     두 개의 화살이 마차에 들어가려던 오크의 머리와 목에 박혔고, 나는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생각해보니 마차 안에는 루카가 있으니 티아는 안전할 것 같았다.
     오크 도적단을 단숨에 해치운 나와 혁과 경훈. 경훈은 마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마차의 앞쪽으로 내달렸다. 혁은 오크 도적들이 모두 죽었는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마차 안으로 들어와 티아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이 많이 놀랐을 분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녀의 품에 안긴 루카가 나를 보자 꼬리를 흔들며 캉캉 짖기 시작했다. 이 녀석, 아직 어린지라 상황 파악을 못한 것 같았다.
     “괜찮아요?”
     “네.”
     티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마차에 박혀 있던 도가 쑥하고 뽑혀져 나갔다. 다행히도 이번 오크 도적들이 경험이 부족했는지 마차에 도가 꽂힌 것 이외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말도 다치지 않았고 마부도 곧 진정되어 우리 일행이 마차에 탑승하자마자 마차는 다시 오솔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경훈이 오크가 사용하던 도를 들고 신기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 오크가 이런 무기를 쓰는구나.”
     “그딴 것 그냥 버리지, 뭐 하러 가지고 들어왔어?”
     “길가에 버리고 가면 PK나 인간형 몬스터들이 주울 가능성이 높다고.”
     도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경훈에게 혁이 따졌지만, 경훈의 말 한마디에 혁은 잠잠해졌다. 바닥에 도를 살며시 내려놓은 경훈이 입을 열었다.
     “저기, 마부 아저씨. 얼마나 더 가야 다음 마을에서 내릴 수 있을까요?”
     “앞으로 한 시간만 더 달리면 됩니다.”
     “네.”
     이제 오크 도적단이 나올 일은 없겠지? 준비해온 음식을 먹고 조금 움직였더니 다들 잠이 오는 모양이었다. 혁은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힌 채 입 벌리고 자고 있었다. 경훈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잠들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졸음을 못 이겨 꾸벅꾸벅 졸고 있을 무렵, 갑자기 나의 왼쪽 어깨를 뭔가가 짓눌렀다.
     화들짝 놀라며 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또다시 몸이 구고 심장박동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잠든 티아가 내 어깨에 머리를 댄 것이다. 이건 절대 고의가 아닌, 잠들어서 아무것도 몰랐던 상황.
     루카 빼고 다들 자고 있군. 모두들 잠든 사이, 나 혼자 이 순간을 즐기며 실실 웃었다.
     
                                     <2권에 계속>       
     
                                                 -By.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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