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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인지 마스터 [7-2]
    작성자 : 절대긍정 | 조회수 : 2355 (2011-12-11 오후 1:00:58)
    레인지 마스터 2권

    목차
    제4장   엘프의 도시 아리스 노아(2)
    제5장   정령 계약 퀘스트
    제6장   이벤트, 그리고 첫사랑
    제7장   미궁, 그리고 습격(1)
     

    제4장   엘프의 도시 아리스 노아(2)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말에 나는 눈을 떴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자던 티아의 머리에 내 머리가 포개져 있는 것을 보고 얼른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자고 있는 티아를 흔들어 깨웠고, 추한 자세로 잠을 자고 있는 혁은 발로 툭툭 차며 깨웠다. 경훈은 이미 일어나 마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나와 티아, 혁도 뒤따라 마차에서 내렸고 나도 기지개를 쭉 켰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상쾌하군.
     “여기가 아까 제가 말한 건넛마을인 미리안 부락입니다. 작은 시골마을이죠. 여행자라고 하면 접대를 해줄 테니 들어가서 쉬다 가셔도 좋습니다.”
     마부는 마차를 몰고 우리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미리안 부락이라.
     정말 말 그대로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몇 채 없는 판잣집과 마을 중앙에 있는 작은 우물, 몬스터의 습격을 막기 위해 나무로 장벽을 만들어 마을을 둘러쌌지만, 그다지 안전해 보이진 않았다. 마을을 쭉 둘러본 경훈이 입을 열었다.
     “완전 깡촌이다.”
     “니 얼굴이 깡촌이야.”
     “또 헛소리 한다.”
     태클을 거는 혁. 니 얼굴이 깡촌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가.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마을 사라들로 보이는 NPC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울창한 숲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따스한 햇살이 미리안 부락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저는 미리안 부락의 촌장인 벨이라고 하오.”
     “안녕하세요. 여행자인 데시카입니다. 이쪽은 루샤크, 티아 젠, 레드 파운이고요.”
     “여행자들만 모시는 방이 있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12살가랑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우리에게 손짓했다.
     우리 일행은 어린아이를 따라 비교적 큰 판잣집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나무 침대 두 개와 탁자가 놓인 볼품없는 판잣집이었다.
     “그럼 편히 쉬세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나가는 꼬마. 문이 닫히자 혁이 입을 열었다.
     “으악, 뭐 이래?”
     “그런 그렇고. 우리가 여긴 왜 온 거야?”
     나무 침대에 걸터앉은 경훈이 내게 물었다. 나는 짐을 풀며 입을 열었다.
     “아리스 노아는 꽤 멀어. 아마 며칠은 걸릴 거야, 그러니 가끔 나오는 마을에서 쉬었다 가야해, 더 가면 마을도 없어. 그러면 쉬지 않고 가야 돼.”
     “완전 원정이네. 에고고.”
     경훈이 침대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문 앞에서 루카를 안고 서 있는 티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티아를 데리고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경훈이 누워 있는 침대에 걸터앉아 입을 열었다.
     “세인트 모닝에서 엘프 본 적 있는 사람?”
     “그러고 보니 세인트 모닝에서 엘프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네.”
     탁자 주위를 가웃거리던 혁이 언제 들었는지 재빨리 대답했다. 나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티아에게 물었다.
     “티아는 엘프를 본 적이 있나요?”
     고개를 젓는 티아. 나는 파티를 만들어 파티 창을 띄웠다. 아무래도 파티를 한 상태에서 이동을 하는 게 안전할 것 같았다. 모두가 파티에 가입하자 나는 파티 창을 내렸고 침댕 누워 있던 경훈은 금세 곯아 떨어졌다. 혁도 덩달아 잠들었고 티아는 잠든 루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했으니 내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곧장 떠나야겠군. 나는 판잣집에서 나와 판잣집 근처에 놓인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아이템 창에서 스틸 북과 류트를 꺼내 들고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류트의 맑은 음이 미리안 부락을 가득 메웠다. 수련치가 점점 올라 이젠 연습용 악보 외에 다른 곡들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한창 악기 연주 스킬을 사용하는데 정신이 팔린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류트의 현을 튕겼다.
     한참을 연주하고 스킬 북을 덮는 순간이었다.
     “연주… 참 잘하시네요.”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보았다. 초록색 후드를 뒤집어쓴 티아였다. 나는 재빨리 아이템 창에 류트와 스킬 북을 던져 넣었다. 이런 나를 본 티아가 입을 열었다.
     “제가 방해한 건가요?”
     “아, 아니요. 마침 연주가 끝났어요.”
     티아는 생긋 웃으며 다가와 내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응? 눈동자가 빨간색이네요?”
     “에? 아, 이거…….”
     적안을 해제하는 걸 깜빡했군. 나는 즉시 적안을 해제했다. 그러자 붉은색 눈동자가 다시 원래의 색을 찾으며 검게 변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티아가 고개를 숙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걸까? 나는 몸이 굳은 채 안절부절못했다. 경훈과 혁이 같이 있을 땐 이런 반응 없었는데. 단 둘이 있으니까 또 이런 반응이 나오는가보다.
     우리는 한참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그저 나란히 앉아 딴 곳을 바라볼 뿐.
     그러다가 침묵을 이어가던 티아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레드는 몇 살이세요?”
     “…열여덟 살이요.”
     “저랑 같네요.”
     “티아도 열여덟 살이세요?”
     “네.”
     나와 나이가 같은 티아. 하지만 아무리 같은 나이라도 위아래는 있는 법. 가만히 생각하더 내가 입을 열었다.
     “저는 생일이 빨라 현재 고3이에요. 1월 16일생이구요.”
     “그래요? 저는 8월 14일인데…….”
     “아. 그, 그래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하는 티아. 강현성, 진정해!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 괜찬하요. 하하.”
     “그럼 오빠라고 부를게요.”
     “네, 네. 그, 그럼 말 놓죠? 아니, 노, 놓자.”
     티아는 나를 빤히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들어 서서히 뜨고 있는 달과 붉은 달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했고 주변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    *     *
     그저 나란히 앉아 있을 뿐인데,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푸른 달과 붉은 달이 하늘에 둥둥 떠다녔다.
     “이, 이제 들어가서 조, 좀 쉬자. 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출발해야 해.”
     “응.”
     깊은 밤. 여자와 단 둘이 있는 것이 어색한 나는 말을 자꾸 더듬었다.
     티아와 함께 판잣집으로 들어와 나는 경훈과 혁이 자고 있는 침대에, 티아는 빈 침대에 누웠다. 나무로 만든 침대여서 별로 푹신하지도 않을뿐더러 이 사내 냄새나는 것들하고 있자니 찝찝했다. 그렇다고 티아 옆으로 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상하게 잠도 오지 않았다.
     무언가 얻은 것 같은 느낌. 계속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팔배개를 하고 누워 있는데 혁의 다리가 공중으로 치솟더니 내 복부에 착륙했다.
     “쿨럭! 으… 잠버릇하고는.”
     모두들 잠든 시각인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레드 롱 보우를 꺼내들고 판잣집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집 앞에 켜둔 호롱불과 횃불 말곤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없었다. 하긴, 이곳은 집도 몇 채 없는 깡촌 아닌가.
     부스럭.
     어디선가 나뭇잎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인저로 전직하고 난 다음부터 이상하게 청강이 발달된 느낌이 들었는데 여기서 또다시 느끼게 되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나는 적안을 개안했다. 그러자 시야가 확보되었다. 적안은 멀리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헌터아이(Hunter Eye's)처럼 어두운 곳을 조금이나마 밝게  볼 수 있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적안을 개안한다고 무조건 멀리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먼 곳에 집중을 하면 시야가 확보되는 것이다. 마치 망원경으로 먼 곳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부스럭부스럭.
     사각.
     “응?”
     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가 난 곳을 응시하자 마리안 부락 입구 쪽에서 정체불명의 거구가 몇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마을 입구의 호롱불에 비친 거구의 팔뚝. 연한 녹색의 굵직한 팔뚝. 그리고 손엔 커다란 도 혹은 도끼가 들려 있었다. 나는이 녀석들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오크 도적단.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마을 입구에서 서성이는 거구들.
     멍창한 한 녀석은 횃불을 들고 기웃거렸다. 원걸 사냥의 명수인 궁수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은 자살행위, 나는 재빨리 화살 깃을 활시위의 절파에 걸고 활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활시위를 강하게 당겼다.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며 횃불을 든 멍청한 오크 옆에 서 있는 오크의 이마에 정확히 꽂혔다.
     꿰에게!
     화살에 맞은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고, 다른 오크들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기껏 오크 따위가 나를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걸고 내달렸다.
     판잣집 옆에 자라난 무성한 나무의 나뭇가지를 밟고 마을을 둘러싼 장벽에 올라섰다. 제법 튼실하게 지어 흔들림이 거의 없었지만 잔뜩 긴장이 되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슬금슬금 마을 입구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화살 하나를 꺼내 들고 오크의 머리에 화살을 쏜 나는 재빨리 장벽에서 뛰어내려 땅 위에 착지했다. 그리곤 백 스텝으로 몸을 뒤로 빼 나무 뒤에 숨었다.
     쿠에엑? 취익!“
     쿠륵, 쿠르륵! 취익!“
     오크들만의 언어로 이야기 하는 녀석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절대로 마을 사람들이 다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잠들었다면 큰일이 벌어졌을 테지.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오크 도적의 수는 총 여섯 마리, 두 마리를 죽이고 남은 녀석들이었다.
     이 녀석들도 머리를 썼는지 다들 나무로 된 장벽 뒤에 몸을 숨겼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로 낑낑거리며 기어 올라가 제법 튼튼해 보이는 가지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입구에서 잠깐잠깐 기웃거리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화살을 쏘지 않았다. 일단 방심하게 한 뒤, 쏴 죽일 속셈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입구에서 기웃거려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여섯 마리의 오크 도적들이 마을 입구로 건들건들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기 횃불을 들고 있는 멍청한 녀석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안전하다.
     나는 화살 두 개를 꺼내들었다.
     “더블 샷!”
     쐐애액.
     푸푹!
     꿰에엑!
     한 마리의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쓰러지자 남은 다섯 마리 오크들의 서서히 내 쪽으로 집중되었다.
     “인가! 취익!”
     쿠르륵!“
     이 녀석들도 참 멍청하다. 저 녀석들은 근거리에서만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들고 있고 나는 원거리에서도 공격이 가능한 무기를 들고 있다.
     게다가 나는 저 녀석들과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아니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도망치지 않고 나에게 소리치는 오크들.
     하지만 내가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어두운데다 나뭇잎에 가려졌으니. 나는 또 다시 화살 한 방을 쏘았다. 대륙 공동언어를 쓰며 소리치던 오크의 목에 화살 깃이 간신히 보일 만큼 꽂혔고 다른 오크들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놓칠 수 없지. 나는 나무에서 뛰어내려 재빨리 화살 하나를 쏘아 보냈다. 뒷걸음질 치던 오크 이마에 화살이 꽂혔고 옆에서 구경하던 오크가 커다란 도끼를 내 쪽으로 던졌다. 직선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도끼. 나는 지하 수련장에서 연습했던 그것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퀵 스텝!”
     퀵 스텝을 걸고 몸을 왼쪽으로 날림과 동시에 화살 하나를 꺼냈다. 안전하게 착지. 그리고 재빨리 화살 깃을 절파에 걸고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도끼를 던진 오크의 가슴팍에 꽂혔다.
     머리를 맞출 생각이었는데, 아래로 빗나갔군. 남은 세 마리의 오크들이 내 쪽을 향해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빠른 오크 도적들이었다. 제길, 이럴 때 루카라도 있었으면, 나는 재빨리 화살 한 발을 쏘아 제일 먼저 달려오는 오크의 이마에 꽂았다.
     “퀵 스텝!”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낀 나는 화살을 꺼내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치고 오크 도적들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화살을 쏘았다.
     명중!
     오크의 정수리에 화살이 꽂히는 걸 확인한 나는 다른 오크의 어깨를 딛고 땅으로 착지해 백 스텝으로 거리를 벌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쿠륵, 취익!
     쿠르륵.
     “응? 뭐라는 거야?”
     새삼 느낀 것이지만, 레인저로 전직을 하고 난 후로 명중률이 확실히 높아졌다. 나는 망설임 없이 화살 하나를 꺼내 나은 두 마리의 오크 중 횃불을 들고 있는 오크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도를 들고 있는 오크에게 화살을 쏘았다.
     핏기가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오크는 화살에 맞고 뒤로 넘어갔다. 횃불을 들고 있던 오크가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지르며 마을 안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내가 입구에 서 있었으니, 마을 안으로 달아나는 건 당연했다.
     횃불을 갈바닥에 던지고 달아나는 오크. 나는 오크의 장딴지에 화살을 쏘았다. 당연히 명중!
     오크는 그대로 쓰러져 발버둥 치고 있었다. 왠지 불쌍했지만 저 녀석을 죽이지 않으면 마을사람들이 위험하다.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 남은 오크를 마무리 지었다. 오크가 죽고 오크의 시체가 사라지자, 반짝이는 물건을 볼 수 있었다.
     “응? 뭐지? 아이템인가?”
     나는 얼른 다가가 빛나는 물건을 주웠다. 아이템이었다.
     [생명의 목걸이(오리지널)]
     설명 : 목에 걸면 생명력을 올려주는 목걸이이다.
     방어 2증가
     마법방어 0증가
     생명력 30증가
     “오, 생명의 목걸이라?”
     목걸이는 나름대로 예뻤다. 나는 아이템 창에 생명의 목걸이를 던져 넣고, 활 끝에 걸린 활시위를 풀었다. 그리곤 판잣집을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오크를 상대하고 나니 꽤 피곤해졌다. 피로도가 상당히 증가했고 눈꺼풀이 무거웠다.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    *     *
     “으음…….”
     판잣집의 틈새로 햇빛이 들어와 안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잠에서 깬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우윳빛 피부에 오뚝한 코와 앵두 같은 이술. 그리고 아직 감겨있는 두 눈.
     “헉!”
     나는 기겁을 했다. 아니 그것보다 내가 왜 여기에 누워 있는 거지? 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세울 준비를 했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캉캉!
     “쉿!”
     왕왕!
     미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루카가 짖었고, 그 소리에 티아의 감겼던 두 눈이 떠졌다. 그녀의 밝은 초록색 눈동자와 나의 까만 눈동자가 마주쳤다.
     “꺄악!”
     “아, 아냐! 이건, 고의가 아냐!”
     재빨리 뒤로 물러나 이불로 몸을 가리는 티아. 망했다, 나에게도 봄이 올 줄 알았건만, 루카가 짖지만 않았어도… 아니, 내가 어제 어떤 침대인지 확인만 하고 누웠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를 들은 경훈과 혁도 잠에서 깼다.
     “무, 무슨 일이야?!”
     “뭐야?”
     이불로 몸을 가린 채 벽에 바짝 붙어 있는 티아와 미처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나. 그 침대 아래에서 꼬리를 흔들며 캉캉 짖는 루카. 그리고 이 상황을 지켜보는 경훈과 혁. 안 돼!
     “이, 이건 사고야!”
     “강현… 아니 레드! 너 거기서 뭐해!”
     “지금 저거 무슨 상황이야!”
     두 눈에 이슬이 맺힌 티아. 우윳빛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경훈과 혁을 보았다. 그 녀석들은 부러움 반, 실망 반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정말 이건 사고야! 사고! 누가 나 좀 살려줘!
     나는 정말 필사적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소리쳤다.
     “저, 정말 어제 있었던 일을 다 설명하게! 어, 어젯밤에 티, 티아 너랑 밖에서 이, 이야기를 했잖아! 그 다음 집에 들어와서 이 녀석들이랑 같이 누웠는데, 잠이 안 오는 거야! 그, 그리고 저기 루샤크 녀석 잠버릇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더라고, 그래서 밖에 나갔어. 그런데 오, 오크 도적들이 또 여기에 나타났더라고! 그래서 그 녀석들을 싹 다 해치운 다음 들어왔어. 피로도가 엄청나서 눈꺼플이 감기고 막 몸이 비틀거렸어. 그래서 눕는다는 게 그만…….:
     붉게 상기된 얼굴로 인상을 쓰며 나를 쳐다보는 티아. 나는 티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았나본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티아게게 조심스레 말했다.
     “미안해…….”
     “아냐. 믿을게.”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며 밖으로 나가는 티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그대로 뒤돌아 손으로 혁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반은 네 책임이야.”
     “엥? 왜 내 책임이야?”
     나는 씩씩거리며 판잣집을 나왔다. 이거 왠지 민망했다. 혁과 경훈도 자신들의 짐을 챙겨 판잣집에서 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인지, 아무래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뭐 잘된 일이지.
     나는 앞장서 미리안 부락에서 나왔다. 또다시 오솔길을 터벅터벅 걷게 된 우리. 한참을 걷자 오솔길이 끊기고 수풀이 무성한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슴과 토끼가 뛰놀고 있었고 가끔 여우도 보았다. 여기도 이런 곳이 있었군.
     “배도 고픈데, 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
     “그럴까?”
     숲으로 들어온 우리는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아 아이템 창에서 각자 챙겨온 식료품이나 음식을 꺼냈다.
     “루카, 이리와!”
     캉캉!
     티아의 옆에 앉아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루카는 나의 부름에 재빨리 내가 걸터앉은 바위 위로 폴짝 뛰어올라 앉았다. 나는 익히지 않은 쇠고기 덩어리를 루카에게 주었다. 뭐 늑대니까 먹을 수 있겠지
     마치 소풍을 온 것 같기도 한 분위기다. 우리는 말없이 한 끼식사를 해결했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되지?”
     “아마 북쪽 방향일 거야.”
     나는 자신 있게 앞장서 걸어 나갔다.
     여긴 사슴이 유난히 많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냥터인 것 같기도 했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사슴을 사냥할 사람도 없을 테니 말이다. 다들 소풍 온 기분으로 잘 웃고 떠들며 즐겁게 앞을 향해 나아갔다.
     한참을 걷자 커다란 동굴이 나왔고, 이 동굴을 통해 반대편 출구로 나갈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홈페이지에서 봤을 때 이런 동굴은 없었던 것 같은데… 잠시 머뭇거리자 잠자코 기다리던 경훈이 말을 걸어왔다.
     “레드, 뭐해? 어서 들어가자.”
     “잠깐만.”
     나는 적안을 개안했다. 동굴의 벽은 푸르스름했고, 여기저기 물이 고여 있었다. 혹시 모르니 적안을 해제하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가자.”
     푸른빛을 따는 동굴 벽은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웠다. 습기가 가득한 것만 제외하면, 쉼터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군데군데 있는 물웅덩이는 동굴 벽색을 푸른색 물웅덩이처럼 보였다. 우리는 앞으로 벌어질 일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그저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와아… 예쁘다…….”
     “동굴 벽 색깔이 진짜 끝내준다.”
     “이 물 마셔도 되는 건가?”
     깊고 넓은 동굴 안에서 큰소리로 떠드는 우리의 목소리는 메아리쳤고, 그 위에 다른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꽤 깊이 들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동굴 안은 유난히 밝았다.
     “잠깐, 무 좀 담아가자.”
     “그래.”
     물병을 꺼내든 경훈이 웅덩이로 다가가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을 받으려고 물병을 물에 담그는 경훈.
     그때였다.
     물을 받던 경훈의 몸이 갑자기 웅덩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더니 이내 상반신이 전부 물에 잠겼다.
     “야, 데시카, 장난하지 말고 나와. 인마.”
     갑자기 발버둥치는 경훈,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 낌새를 차린 나와 혁은 경훈의 두 다리를 잡고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상반시이 물에 잠겼던 경훈의 몸이 웅덩이 밖으로 나오자 경훈이 소리쳤다.
     “푸하! 뭐, 뭐야! 웅덩이 안에 몬스터가 있어!”
     “몬스터?”
     이윽고 웅덩이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몬스터가 있었으니, 푸른 비늘이 온몸을 뒤덮고 있는 직립보행 도마뱀 몬스터 리자드맨이었다. 이 녀석들은 주로 늪지에 사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동굴에서 살고 있다니.
     나는 재빨리 활시위를 활 끝에 걸었다. 활등이 휘어질 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시경 쓸 때가 아니다. 여기서 전부 죽게 된다면, 엄청난 패널티와 함께 다시 마을로 되돌아가게 된다.
     혁은 메이스를 들고 숨을 고르는 경훈의 앞에 섰다. 근데 티아는? 나는 고개를 돌려 티아를 찾았다. 다행이 티아의 곁엔 루카가 있었다.
     “조심해! 오크보다 강한 녀석이니까!”
     숨을 고르던 경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물웅덩이에서 또 다른 리자드맨들이 하나하나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거, 싸워야겠군.
     경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투자세를 취했고 혁도 전투 준비를 했다.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멀뚱이 서 있는 리자드맨에게 다가가 발로 복부를 내지르고 재빨리 활을 쏘았다. 화살이 목에 꽂혔음에도 불구하고 일어서는 리자드맨.
     “백스텝!”
     나는 리자드맨과 거리를 두고 또 다시 화살 한 발을 쏘았다. 머리를 관통하자 이제야 죽는 이자드맨.
     [레벨업! 스텟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좋아!”
     그리고 리자드맨이 죽어 없어진 자리에 반짝이는 물건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주울 수가 없었다. 지켜보던 다른 리자드맨들이 달려들기 시작했으니까. 경훈은 빠른 몸놀림으로 리자드맨에게 파고들어 복부에 주먹을 내지르고 뒤로 빠져 왼발을 축으로 옆구리에 강한 미들킥을 먹였다.
     키엑!
     비명을 지르는 리자드맨의 머리에 혁의 메이스가 작렬! 골통이 부서진 리자드맨은 그대로 뒤집어졌다.
     이 녀석들도 레벨업을 했나본지 입가에 미소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무턱대로 달려드는 리자드맨을 상대하기 바빴다.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나를 따라오는 리자맨과 거리를 넓혔다. 지면을 힘껏 딛고 뛰어올라 동굴 벽을 박차고 뒤돌아서 내 쪽으로 달려오는 리자드맨에게 활을 쏘았다.
     명중! …이면 좋았건만 빗나갔다.
     리자드맨은 민첩한 몸놀림을 자랑하며 재빨리 땅으로 착지하는 나에게 다가와 자신이 들고 있던 둔기로 나의 복부를 강타했다.
     “쿨럭!”
     상당량의 생명력이 감소하는 걸 느꼈다.
     제길, 하필이면 빗나가다니. 여기서 죽으면 아리스 노아 원정도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나는 복부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통증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둔기를 치켜든 리자드맨.
     아 아. 이제 죽는구나.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미안하다, 경훈아, 혁아. 그리고 티아…….
     “탬핑 어택, 피스톨!”
     빠각.
     순간 경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다. 내 앞에 서 있는 무투가 유저. 그가 외치며 뻗은 주먹에 리자드맨의 안면이 함몰되어 피를 왈칵 쏟아내었다.
     “괜찮냐?”
     나를 위기에서 구해준 경훈, 짧게 한 마디를 내뱉은 경훈은 리자드맨을 힘겹게 상대하는 혁에게 달려갔다.
     나는 아이템 창에서 생명력 포션을 꺼내 마시곤 다시 일어나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실적에서 100% 먹힌다는 보장이 엇는 나만의 기술. 궁수 특유의 기질을 살려 원거리 공격으로 서포트를 해주는 방법밖에 없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혁과 경훈의 빈틈을 노리는 리자드맨에게 활을 쏘았다. 화살은 리자드맨의 어깨관절에 박혔다.
     화살이 어깨에 박힌 리자드맨은 경훈의 팔꿈치의 산재물이 되었다.
     그 후 나는 고개를 돌려 루카의 상황을 보았다. 낮게 으르렁 거리면서 위협을 하는군. 아직 레벨이 낮아 저 녀석들(리자드맨들)을 상대하긴 힘들 것 같았다.
     [레벨업! 스텟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고생 끝에 리자드맨을 전멸시킨 우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웅덩이에 되도록 접근하지 않으려 했다. 또다시 봉변을 당할 수 도 있을 테니까.
     나는 리자드맨이 드랍한 아이템을 주었다.
     다른 녀석들은 아이템을 드랍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드랍률이 무지 낮은 것 같았다. 근데 이 목걸이는 뭐지? 나는 상세정보를 보았다.
     [마나 펜던프(매직)]
     설명: 예쁜 별 모양의 펜던트. 착용을 하면 마나가 증가된다.
     방어 1증가
     마법방어 2증가
     마나 15증가.
     매직급 아이템이라. 뜻밖의 수확이었다. 방어는 물리적인 공격 방어력을 올려주는 단위, 그리고 보호는 마법 즉, 항마력을 올려주는 단위이다.
     매직급 아이템을 얻은 나는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마나 펜던트 득!”
     “엥? 마나 펜던트라니?”
     “매직급 아이템이야.”
     경훈과 혁, 그리고 티아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마나 펜던트에 집중되었다. 생명의 목걸이와 마나 펜던트. 세릴리아 월드를 하면서 처음으로 사냥을 통해 획득한 아이템들이다.
     내가 잡은 리자드맨에서 나왔으니 내가 가져도 뭐라고 하진 않겠지.
     하지만 꼭 내가 잡았다고 내가 가질 수는 없는 법. 그렇게 따지면 성직자나 다른 보조마법사들은 절대로 아이템을 나눠 가질 수 없다. 이거 어떻게 나눠야 하지?
     내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경훈이 입을 열었다.
     “마나가 오르는 것이라면 난 필요가 없지.”
     “나는 필요해.”
     펜던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하는 혁. 나는 고개를 들어 티아를 쳐다봤지만 필요가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마나 펜던트를 혁에게 건네주었다.
     “오, 정말로 나 주는 거야?”
     “응.”
     “땡큐.”
     받는 즉시 목에 거는 혁. 전혀 어울리진 않았지만 좋다는데 별수 있냐.
     뭐 저깟 펜던트 나도 만들 수 있다. 재료만 있다면.
     그로고 보니 요즘 손이 가는 물건을 만들지 않아 손이 좀 근질근질했다. 내가 잠시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경훈이 입을 열었다.
     “자, 방시마지 말고 계속 전진하지.”
     “그러는 게 좋겠다.”
     나는 경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장서 발걸음을 옮겼다. 동굴은 꽤나 길었다. 게다가 무지 넓었고 웅덩이도 점점 많아졌다.
     “아까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조시…….”
     나는 말을 하다말고 넋을 잃었다. 지금 내 눈은 적안을 개안된 상태. 저 멀리 대 여섯 마리의 리자드맨이 모여 있는 것을 본 나는 말문이 막혔다.
     “왜 그래, 레드?”
     경훈이 물었다.
    “ 저기서 다시 한 번 싸워야겠다.”
     “무슨 말이야?”
     “리자드맨들이 저쪽에 모여 있네. 루카, 네 도움이 필요하다.”
     캉캉!
     “그리고 혁, 너는 티아, 보호 좀 해줘. 부탁할게.”
     나는 혁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예쁜 여성 유저를 보호하라는데 이 녀석이 마다할 리가 없지. 게다가 경험치는 파티원 전원에게 똑같이 분배가 된다.
     고개를 끄덕이며 전혀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혁. 우리는 리자드맨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상당히 좁혀졌을 때,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가자, 루카, 데시카!”
     “좋아!”
     캉캉!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도중 화살 깃을 활시위의 절피에 걸고 내달렸다.
     “루카, 견제해!”
     왕왕!
     루카는 나를 아필러 그나마 맨 앞에 서 있는 리자드맨에게 몸을 날려 목덜미를 물고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슈가가가각.
     갑작스레 나타난 조그만 흰 늑대의 선제공경에 당황한 리자드맨들. 나는 바로 멈춰 서서 화살을 쏘았다. 다른 리자드맨의 무릎 관절을 뚫은 화살. 리자드맨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경훈은 멈춰선 나를 앞질러 쓰러진 리자드맨의 머리를 발뒤꿈치로 내리찍었다. 리자드맨은 그대로 머리가 터져 걸쭉한 뇌수가 흘러나왔다. 경훈은 멈추지 않고 루카의 공격에 목이 너덜너덜해진 리자드맨에게 주먹을 뻗었다.
     “탬팅 어택, 피스톨!”
     경훈의 주먹은 총알 같이 날아가 리자드맨의 옆구리에 박혔다. 지켜보던 리자드맨들이 일제히 경훈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즉시 화살 두 개를 꺼내들었다.
     “더블 샷!”
     쐐애액.
     두 개의 화살은 대기를 가르며 한 마리의 리자드맨의 가슴팍과 목에 꽂혔다. 가슴팍과 목에 화살이 꽂힌 채 발버둥치는 리자드맨의 뒤통수에 경훈의 팔꿈치가 작렬했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어지는 루카의 공격! 그렇게 또 한 마리의 리자드맨이 우리의 경험치가 되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오, 루카도 레벨업인가?”
     루카의 레벨업에 감탄을 하고 있을 때, 루카와 경훈이 다른 리자드맨들을 공격하는 틈을 타 내 쪽으로 달려오는 리자드맨을 볼 수 있었다.
     “으아아! 백스텝”
     빠르게 달려오는 리자드맨과 거리가 상당히 벌어졌다.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기 위해 손을 어깨 위로 넘겼지만 화살은 잡히지 않았다.
     “으아악!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줄행랑을 놓았다. 티아의 옆에 서 있던 혁이 메이슬 고쳐 잡았다.
     “루샤크!”
     “쯧쯧. 화살 개수 좀 확인하고 다녀라.”
     혁은 메이스를 치켜들고 달려오는 리자드맨의 복부에 풀스윙을 했다. 저만치 나가떨어지는 리자드맨. 나는 즉시 아이템 창에서 화살통을 꺼내 교체했다.
     혁은 쓰러진 리자드맨에게 다가가 메이스로 리자드맨의 안면을 내리찍었다. 리자드맨의 안면은 그대로 함몰되어 피와 뇌수가 섞여 콧구멍과 눈에서 주르르 흘러 나왔다.
     “우웩.”
     혁이 헛구역질을 하며 죽은 리자드맨을 발로 걷어찼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직사각형의 반투명한 입체 창을 본 나는 경훈이 있는 곳을 응시했다.
     경훈은 팔을 흔들고 있었다. 루카와 함께 리자드맨을 다 잡은 모양이었다.
     나와 혁, 티아는 경훈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옯겼다.
    *    *   *
     내 이름은 카이루. 본명은 한강찬. 마검사다. 잡아두었던 약속이 취소되어 친구들과 함께 아리스 노아에 가려고 했으나 이미 출발한 모양이다. 뭐 그래도 아리스 노아게 가는 길은 이미 홈페이지로 검색해 보았으니 찾아가기만 하면 되겠지.
     며칠 전 Just주점에서 같이 가자며 부탁을 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메시지를 보내거나 대화를 요청해서 같이 가자고 하고 싶지만, 갑자기 나타나 깜짝 놀라게 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는 대장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장장이 아세른은 여전히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오, 카이루 군. 무슨 일이오?”
     “제 바스타드 소드 칼날을 좀 갈아야겠습니다.”
     “아, 그럼 들어오시오.”
     나는 내 검을 아세른에게 건네주었다. 검의 상태를 살피던 아세른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흐음. 검 상태가 그리 좋지 않군.”
     “무슨 말입니까?”
     나는 아세른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자 아세른이 입을 열었다.
     “내구가 거의 다 되어가는군. 제때 수리를 했어야 하는데, 친구 짝 났군.“
     “친구 짝이라니요?”
     “레드 말일세. 그 녀석 활도 이제 얼마 못쓸 텐데. 자네 검 하나 새로 사지 않겠는가? 방금 태어난 따끈따끈한 놈일세.”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내 검상태가 많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한번 보죠.”
     “자, 이놈일세.”
     투핸디 소드와 비슷한 모양새, 하지만 투핸디 소드보다는 조금 짧았다. 은빛 검갑과 은색 손잡이. 그리고 손잡이 끝에 달린 구슬 안에는 금색 초승달이 박혀 있었다. 겉모습부터 맘에 드는 물건이었다.
     “이게 다가 아닐세.”
     “예?”
     스르릉.
     아세른이 검을 뽑아들었다. 순간 눈부신 빛이 대장간 내부를 가득 채웠다. 때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검신이 따스하게 내리 쬐는 태양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검신에는 음각으로 Moon blade(문 블레이드)라고 작게 새겨져 있었다. 내 맘에 쏙 드는 물건이었다.
     “얼마죠?”
     “8골드만 주게.”
     “예? 이런 검이 고작 8골드밖에 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문 블레이드처럼 길고 견고한 검이라면 적어도 20골드가 넘는다. 그만큼 검이 비싸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 굳이 8골드에 팔아넘기려는 것일까?
     “이런 검이라면 대충 20골드는 넘을 텐데, 굳이 8골드에 파는 이유가 뭐죠?”
     “그래서, 싫은가?”
     “아니오, 싫지는 않지만…….”
     “바스타드 소드 값까지 받는다고 치게.”
     “하지만…….”
     “쉿, 어서 8골드 내게.”
     바스타드 소드 값까지 쳐도 8골드는 너무 쌌다. 이런 기회를 놀칠 수야 없지. 나는 즉시 아이템 창에서 8골드를 꺼내 아세른에게 건네주었다. 아세른은 문 블레이드를 검집에 수납한 뒤 내게 건네두었고 나는 두 손을 문 블레이드를 받아들었다.
     “자네의 은빛경갑과 잘 어울리는군.”
     허리춤에 차기에는 너무도 긴 장검…일 것 같았으나, 허리춤체 차도 그다지 불편하진 않았다.
     나는 아세른에게 목례를 하고 대장간엣 나왔다. 그리고 식료품점에 가서 말린 고기, 물, 그리고 식료품을 사서 수도 세인트 모닝 밖으로 나왔다.
     토끼와 사슴이 뛰놀고 나무 위엔 작은 새가 지저귀고 있다. 정문으로 빠져나와 직진을 하면 산길이 나온다고 했으니 그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면 되겠군.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즐겁게 소풍가는 기분을 내며 걷는 내 앞을 가로막는 간 부은 것들이 있었으니, 바로 고블린 떼였다.
     누렇고 뽀족한 이를 드러내며 위협하는 예닐곱 마리의 고블린, 하지만 그런 겁주기는 초보자들에게나 먹힐 뿐, 나 같은 경험자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고작 고블린 따위가 무섭다면 오크 워리어같은 녀석에겐 손도 못 댈 테니 말이다.
     나는 허리춤에 찬 문 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손잡이가 손바닥에 착 감기는 맛이 일품이었다.
     “어디 한번 휘둘러볼까?”
     검에 보조마법을 걸 필요도 없이 나는 몸을 날려 뭉쳐 있는 세 마리의 고브린의 허리를 베었다.
     그대로 몸이 두 동강나버린 동료들의 모습을 본 고블린들은 겁에 질렸는지 누런 이빨을 더 이상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살려둔다면 또 쫓아와 상대방을 도발시키는 게 이 녀석들의 본능.
     나는 남은 네 마리의 고블린을 살려두지 않고 모졸 베어버렸다. 경험치도 쥐꼬리만큼 주는군. 아니, 거의 주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블린을 순식간에 해치운 나는 문 블레이드를 도로 검갑에 수납했다. 아무래도 어제 떠난 것 같으니 되도록 빨리 가야할 것 같았다.
     나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산들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 갈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정말이지 상쾌한 기분이다. 이윽고 어두운 숲에 도달하게 되었다. 밖은 분명 대낮인데, 이곳은 유난히 어둡군.
     그 후 나는 오솔길을 따라 주변을 경계하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서 강하진 않지만 귀찮은 몬스터가 나올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한참을 걷자 호롱불과 마차로 보이는 물체가 보익 시작했다. 나는 마차 쪽으로 빠르게 달렸다.
     서너 대의 마차와 서너 명의 마부. 아마 NPC일 것이다. 그중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마차에 탑승하시겠습니까? 건너편 마을까지 1인당 1골드입니다.“
     1인당 1골드? 날로 먹는구먼, 하지만 이런 어두운 숲에서 마차를 구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나는 즉시 1골드를 꺼내 마부에게 건넸다. 그리곤 마부가 열어준 마차로 들어가 자리르 잡고 앉았다.
     왠지 모를 기대감에 내 기분은 최고조였다. 마차는 어두운 오솔길을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흔들림이 전혀 없군.
     “마을까지 얼마나 더 가야 도착합니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도착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걸립니까?”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걸리냐고요.”
    “자고 일어나면 도착한다고요.‘
     강적이다. 뭐 이딴 NPC가 다 있지? 나는 팔짱을 낀 채 등을
    기대고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잠깐 눈을 붙였다.
     “도착했습… 으아악!”
     “히히힝!”
     마부의 비명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마차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마부. 말들도 당황했는지 울부짖기 시작했다.
     “무슨 일입니…….”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서 개의 도와 도끼가 맟에 박혔다.
     나는 즉시 문 블레이드를 검집에서 뽑아 든 채 마차의 문을 발로 걷어차고 뛰어나왔다.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은 오크였다.
     고블린부터 오크까지, 별 같잖은 녀석들이 다 시비를 거는군.
     “블레이징 소드!”
     번쩍!
     때 하난 묻지 않은 순백색의 검신이 붉게 물들었고 나는 붉게 물든 검신을 오크의 목으로 찔러 넣었다.
     꿰에엑!
     목에 구멍이 뚫렸는데도 잘도 비명을 지르는군. 나는 오크의 목에 꽂힌 검을 뽑아 목을 베어냈다. 오크의 머리는 몸에서 달아나 땅에 떨어졌다. 마차를 공격하던 오크들은 일제히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나는 문 블레이드를 들지 않은 왼손으로 마차의 문을 닫았고 강한 살기를 띠며 오크들을 노려보았다.
     쿠륵, 취이익!
     “뭐, 이 돼지야.”
     “취익! 쿠르륵. 인간 취익!”
     나는 뭐라고 지껄이는 녀석의 목을 베고 도끼를 쥔 다른 녀석의 틈을 파고들었다. 무릎 관절을 잘라내자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오크 나는 즉시 오크의 가슴팍에 문 블레이드를 찔러 넣었다.
     “따뜻하게 해주지, 파이어 웨폰!”
     화르륵.
     “꿰에에에에에!”
     문 블레이드의 검신에 시뻘건 화염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오크는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지켜보던 오크들이 일제히 나를 덮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오크 따위에게 질 리 있나.
     나는 즉시 몸을 날려 피하고 오크들을 마구잡이로 베어내기 시작했다. 화염검에 팔과 다리가 잘린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목이 베인 오크는 그대로 쓰러졌다.
     “취익! 동료를! 죽여 버리겠다, 인간! 쿠륵.”
     말이 끝남과 동시에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오크. 대체 누가 누구를 죽인다는 건지, 오크를 모조리 해치운 나는 마차 문을 열고 마부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음. 여긴 오크 도적떼가 주로 나오는 곳인가 봅니다. 잘 살펴가세요.”
     “예, 예.”
     마부는 마차에서 내려 말을 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대낮에 습격을 하다니, 간이 부은 녀석들이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팻말에 ‘미리안 부락’이라고 적힌 마을 입구가 보였다.
     한 번쯤은 들르고 싶지만, 여기서 묵게 된다면 먼저 떠난 친구들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 노아에 가서 만난다고 해도 그리 많이 놀 수 없을 테니.
     나는 북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솔길을 한참 걷다 보니 수풀이 무성한 숲이 눈앞에 펼쳐졌고, 조금 전처럼 어둡지 않은 정말 보기 좋은 숲이었다. 여우, 토끼, 사슴이 뛰놀고 새가 지저귀는 숲.
     이런 곳도 있었군.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한 나는 아이템 창에서 말린 고기와 물병을 꺼내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먹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서 먹으니 정말 꿀맛이군.
                   *    *     *
     “이야, 루카가 합세하니까 훨씬 낫다.”
     경훈이 루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루카. 하지만 입가엔 리자드맨의 체액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근처의 물웅덩이에 씻기고 싶었지만, 또 리자드맨이 튀어나오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포기했다.
     “자, 어서 가자.”
     나는 여전히 적안을 개안한 채 앞장섰다. 지긋지긋한 동굴도 서서히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굴에서 나오자 끝없는 초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갈대와 푸른 들판. 제일 먼저 소리치며 달려 나간 것은 다름 아닌 루카였다. 루카는 특히 나비를 좋아했다. 뭐 먹는 게 아니고, 그저 나비를 뒤따라 다니며 뛰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나비를 본 루카는 캉캉 짖으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너무 귀엽다.”
     나비를 쫓아디니며 짖는 루카를 보고 입을 여는 티아. 루카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근데 얘는 왜 후드를 벗지 않는 것일까. 답답해 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후드를 벗은 모습이 정말 궁금했다.
     “루카, 이리와!”
     캉캉!
     나의 부름에 나비를 쫓던 루카는 즉시 나에게 달려왓따. 자리에 앉아 연신 꼬리를 흔들고 혀를 쭉 내밀고 헤헤거리는 루카. 티아는 루카를 들어 품에 안았다. 루카가 부럽군.
     “이제 어디로 가면 돼?”
     “음… 좀 더 걷다 보면 또 작은 마을 하나가 나올 거야.”
     동굴 밖으로 나온 우리는 초원을 걷기 시작했다.
     노루가 정말 많았다. 가끔 기린과 코뿔소도 볼 수 있었다. 한참을 걷고 있을 때 혁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저기 봐! 코끼리다.”
     “어디?”
     “저기, 저기!”
     여러 마리의 코끼리가 저 멀리서 떼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그냥 있을 게 나을 것 같았다.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했고 드넓은 초원도 서서히 끝이 보이는가 싶더니 또다시 울창한 숲이 이어졌다. 우리는 날이 저물어 어두워진 숲의 오솔길을 터벅터벅 걸어야 했다.
     “여기서 노숙할까?”
     “몬스터라도 나오면 어쩌게.”
     갑작스런 혁의 발언에 내가 대꾸했다. 그러자 혁이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똥개더러 지키라고 하면 되잖아.”
     “루카가? 저 조그만 게 뭘 지켜.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올 거야.”
     길을 걷던 나는 루카의 정보 창을 열었다.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야>
     정보: 세릴리아 월드이 단 한 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설의 흰 늑대.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한 전설의 흰 늑대이다.
     현재 상태: 새끼
     Lv. 21
     HP: 알 수 없음
     MP: 알 수 없음
     상태: 매우 건강
     친밀도: 100
     배고픔: 5% 목마름: 10%
     루카의 레벨은 이제 21. 하지만 소환수라 그런지 맂드맨에게 중상을 입히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저기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루카의 정보 창을 보고 있을 때 경훈이 입을 열었다.
     나는 즉시 유저가 쓰러져 있는 곳을 응시했다. 상처가 심한것 같아 보이는 유저(이런 곳에 NPC가 쓰러져 있을 일은 없으니 말이다). 그를 본 혁이 잽싸게 달려가 몸 상태를 살폈다.
     “이런, 부상이 심하군요.”
     “응급처치를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런 것 필요 없어. 부상을 치료하는 스킬이 있거든, 큐어!”
     파츠츠츠
     유저의 상처는 금세 아물기 시작했다. 부상이 회복되자 혁은 힐링을 시전해 유저의 생명력을 채웠다.
     “감사합니다.”
     “월요. 실례지만 다음 마을까지 동행해도 괜찮겠습니까?”
     “흐음. 파티 리더인 레드에게 물어봐야겠군요.”
     혁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파티 창을 열었다.
     ‘칼’이 유저의 이름이었다. 파티에 가입하게 되면 ‘어쩌고저쩌고 님이 파티에 합류하셨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뜨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칼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희는 아리스 노아에 가려던 참인데, 칼은…….”
     “오, 저도 마침 아리스 노아에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칼.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악의라고는 전혀 없었다. 혁의 치료를 받은 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와 동행하게 되었다. 함께 길을 걷던 칼에게 혁이 물었다.
     “도대체 어떤 녀석들한테 당하셨나요?”
     “오크 워리어에게 당했습니다.”
     “오크 워리어? 그건 또 뭐죠?”
     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오크 워리어. 오크 산적이나 일반 오크보다 훨씬 강한, 전투구사 능력이 훨씬 뛰어난 녀석들이었다.
     힘, 민첩서, 지능부터가 일반 오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런 오크 워리어게게 당했다는 칼의 말에 혁은 고개만 끄덕였다.
     “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군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이윽고 도착하게 된 마을. 미리안 부락보다는 조금 더 큰 마을이었다. 판잣집 업그레이드버전(?)인 집이 여러 채가 있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마을 중앙에 닭과 칠면조와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어싸. 마을 입구로 나온 한 노인 NPC가 입을 열었다.
     “여행자이신가요?”
     “예. 묵을 방이 있나 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예.”
                   *    *     *
     나는 카이루. 날이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숲을 벗어나자 이상한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굴 안은 유난히 밝았다.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있었고 물은 벽의 푸르스름한 색을 고스란히 받아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이런 동굴도 있었나?”
     나는 동굴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살폈다. 물웅덩이가 예쁘긴 했으나, 너무 많아 거슬리는군.
     순간 내 눈에 띤 것은 웅덩이 안에 무언가 꿈틀거렸다는 것.
     나는 문 블레이드를 뽑아들고 검신을 물에 담갔다. 나는 방심하지 않고 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그때였다. 웅덩이에서 리자드맨의 면상이 보이더니 이내 검신을 잡고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라이트닝 웨폰.”
     순간 검신에 푸른 전류가 형성되어 맹렬하게 방전했다.
     츠츠츠.
     파직파직!
     수면 위로 부옇게 연기가 피어올라 지금 웅덩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웅덩이 안에 있는 리자드맨은 감전사 했을 것이다.
     나는 검을 거두고 앞을 향해 전진했다. 영리하기로 소문난 리자드맨들이 이런 웅덩이에 처박혀 있다가 습격을 하다니. 역시
    몬스터는 몬스터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만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낌새를 차린 나는 뒤돌아섰다. 물웅덩이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리자드맨과 이미 나와서 따라오는 리자드맨. 대충 열 마리가량 되어보였다.
     “튀겨주지. 라이트닝 웨폰!”
     파츠츠츠.
     검신에 스파크를 튀는 푸른 뇌전이 형성되었다. 바스타드 소드를 쓸 떼보다 훨씬 안정감을 주는 문 블레이드. 나는 뒤따라오던 리자드맨들을 향해 내달렸다.
                   *    *     *
     “많이 드십시오. 마침 오늘 촌장님의 생신이라 잔치를 벌이는 중이었습니다. 저녁상을 차릴 때를 맞춰 찾아오시다니, 운도 좋군요.”
     “아, 그럼 염치 불구하고 잘 먹겠습니다.”
     혁이 닭다리를 쭉 찢으며 말했다. 나는 포크를 들고 삶은 돼지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오, 맛있는데?”
     “그치?”
     삶은 돼지고기를 먹던 경훈이 대꾸를 했다. 커다란 밥상이 두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마을사람, 하나는 여행자를 위한 밥상이었다.
     나는 칠면조 다리를 들고 살점을 떼어 루카에게 던져주었다. 루카는 커다란 고깃덩이를 보자 이성을 잃었는지 꼬리를 평소의 두 배 속도로 흔들며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즐거운 식사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빈 방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미리안 부락과 같은 패턴.
     나는 레드 롱 보우의 활시위를 풀고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미리안 부락과는 달리 침대수가 적당했기 때문에 각자 누울 수 있어서 더욱 좋은 것 같았다.
     [아이템 쪽지가 도착했습니다.]
     “응.”
     아이템 쪽지라. 이건 또 무슨 희한한 쪽지인가. 나는 즉시 메신저 창을 열었다 친구목록과 함께 쭉 떠인는 메시지. 그리고 방금 들어온 아이템 쪽지. 나는 쪽지를 열어보았다. 로시토에게서 온 쪽지였다.
     [자네에게 스킬 북을 주는 것을 깜빡했네. 파워 샷 스킬 북이라네. 유용하게 쓰게.]
     짧은 쪽지와 함께 입체 창 안에 들려 있는 스킬 북. ‘파워 샷'이었다.
     파워 샷이라… 나는 전에 로빈훗이 파워 샷으로 오우거의 육중한 몸을 날린 것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멀티비전을 통해서 본 것이지만. 마침내 나도 그 파워 샷을 쏠 수 있다.
     남들은 레벨 100에 2차 전직을 하고서 쓰는 스킬(그것도 사수로 2차 전직을 해야 가능한 일이지만)을 레인저로 전직한 나는 헌터, 사수 가릴 것 없이 2차 스킬이라면 전부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스킬 북을 꺼내 침대에서일어나 침실 바깥쪽에 있는 탁자로 자리를 옮겼다.
     촛불을 켜자 방 안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나는 스킬 북을 펴서 쭉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활시위를 강하게 당겨 쏘아 보내는 것이라 그런지 마나와 스태미나가 동시에 상당량이 감소되는 대신에 강한 파괴력을 지닌 파워 샷 스킬. 점점 더 끌리는 스킬이었다.
     스킬 북을 전부 읽고 파워 샷 스킬을 입수한 나는 침실에서 활을 가져와 밖으로 나왔다. 마을 밖으로 나와 활시위를 활의 양쪽 끝에 걸었다.
     “좋아. 파워 샷이라. 기대 되는 걸? 스킬 창 오픈!”
     <Skill>
     레인지 마스터리(Ranged Mastery)
         (180.23/300.00%)
     보우 어택(Bow Attack)
         Master
     적안(赤眼)
         Master
     백 스텝(Back Step)
         Master
     크리티컬(Critical)
         Master
     퀵 스텝(Quick Step)
         Master
     더블 샷(Double Shot)
         Master
     파워 샷(Power Shot)
         (0/500.00%)
     “이야, 새롭다.”
     마을 밖으로 나온 나는 적안을 개안하고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가로도 아니고 세로도 아닌 대각으로 활을 잡은 팔을 뻗는다. 그리고 화살 깃을 활시위의 절피에 걸고 힘껏 당겼다.
     왼발을 축으로 오른발을 뒤로 뺌과 동시에 오른쪽 어깨를 뒤로 빼며 활시위를 강하게 당겼더니 팔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스태미나가 슬슬 감소하기 시작했다.
     근처의 커다란 나무를 과녁삼아 활시위를 놓으며 외쳤다.
     “파워 샷!”
     푸슝.
     파악!
     굵직한 통나무에 깊숙이 박힌 화살. 방금 쏜 화살은 화살 깃만 간신히 보였다. 아직 수련치가 낮아 관통을 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만족했다. 나는 다시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조금 전처럼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티딕.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뭇가지 불러지는 소리. 파워 샷의 위력에 통나무의 가지가 꺾인 건가? 라고 생각한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푸슝.
     파악!
     방금보단 위력이 약한 파워 샷. 하지만 파괴력은 가공할 만큼 좋았다.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약해진 건가? 나는 레드 롱 보우의 활시위를 풀고 친구들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    *     *
     “휴우. 별 같잖은 것들이라도 단체로 덤비면 힘들군.”
     몰려든 리자드맨들을 해치우고 동굴 밖으로 나와 초원을 걸으며 혼잣말을 했다. 날까지 어두워 드넓은 초원에서 방향을 잃으면 그대로 길을 잃고 만다. 나는 앞만 보고 전진했다.
     “혹시 모느니 바닥에 표시를 해 두어야겠어.”
     나는 문 블레이들 뽑아들고 바닥에 그었다. 당연히 내가 가야하는 방향으로 화살표를 그려 넣은 것이다.
     방금 그린 화살표의 방향대로 걷다가 또다시 거리가 벌어지면 다시 화살표를 하나 더 그린다. 구식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게 다였다.
     한참을 걷자 초원의 끝이 보였고 깊고 어두운 숲의 오솔길을 밝을 수 있게 되었다.
     갑작스레 저 멀리서 크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급히 수풀사이로 몸을 숨겼다. 이런 숲에선 몬스터가 나올 가능성도 적지 않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면 안 되었다.
     “그 녀석은 동행에 성공했다더군.”
     “그래?”
     “이제 아이템만 획득하면 되는 일인데.”
     목소리의 주인공이 유저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수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수풀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나를 보고 몬스터로 착각했는지, 그들은 각자 들고 있는 무기를 고쳐 잡았다. 나는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안심하십시오. 유저입니다.”
     “뭐야, 유저야?”
     “뭐야, 난 또 오크 워리어인 줄 알았지.”
     “아, 그렇습니까? 놀라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할 때였다. 한 유저가 천천히 다가와 내 목에 검을 겨누며 입을 열었다.
     “놀라게 한 값은 내놔야지, 안 그래?”
     “놀라게 한 값이라뇨?”
     나의 물음에 두 유저가 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
     “크크.”
     “이 사람 눈치 한번 참 빠르네.”
     “예?”
     “PK(Player Killer) 모르냐?”
     언제 한 번 이런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되도록 피해가야 서로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꾹 참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좋게 비켜갑시다. 날도 어두운데, 몬스터라도 나오면 어떡합니까.”
     “이 새끼가 말귀를 못 알아먹나.”
     내 목에 검을 겨눈 유저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아무래도 싸워야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즉시 몸을 뒤로 내빼며 문 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그리곤 이렇게 외쳤다.
     “블레이징 소드!"
     번쩍!
     문 블레이드의 검신이 붉게 물들자 두 유저는 처음 보는 스킬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약 유저가 PK라면 죽여도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서슴없이 상대 유저의 목을 베었다.
     채앵!
     내 검을 막는 PK. 그의 두 눈엔 살기가 가득했다. PK란 존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게 돈과 아이템을 가지고 싶으면 사냥을 해서 벌면 되지 않는가.
     힘에서 밀리는 것을 보니 아마도 나보다 레벨이 낮은 것 같았다. 놈은 내 검을 쳐내며 재빠르게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그의 검은 내가 입은 경갑을 뚫지 못했다.
     난 살기를 띠운 채 미소 지었다.
     “프리징 웨폰.”
     문 블레이드의 붉은 검신이 순백색으로 변색되더니 이내 뼛속까지 시린 오싹한 냉기가 검신을 타고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이 시릴 정도였다.
     나는 즉시 상대 유저에게 검을 휘둘렀다.
     또다시 나의 검을 막는 유저. 내가 잠시 방심하는 틈을 타 지켜보던 다른 유저가 자신이 들고 있는 곤봉으로 내 머리를 강타했다.
     상당량의 생명력이 감소되었고 나는 그대로 문 블레이드를 떨어뜨린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피가 이마를 타고 흐른다. 눈앞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입 꼬리가 슬슬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크크크.”
     “뭐야? 이 새끼 머리를 맞더니 정신이 이상해졌나?”
     “한 방 더 먹이면 알아서 죽겠지.”
     곤봉을 쥔 유저가 곤봉을 높이 치켜들고 말했다. 그러자 검을 들고 있는 유저가 그를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
     “잠깐. 이런 검은 시중에 팔면 20골드는 받는다고.”
     허리를 숙여 문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잡아든 유저. 내 오른손은 유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 새끼가 미쳤나? 놔! 안 놔?! 이거 놓으라고!”
     우두둑.
     “으아악!”
                   *    *     *
     이제 막 잠에 들려는 찰나, 칼이 침실로 성급하게 들어오며 소리쳤다.
     “P, PK다!”
     “PK?! 어디!”
     잠들어 있던 경훈과 혁이 잠에서 깨어나 반쯤 뜬 눈으로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나는 아직 잠들지 않았기 때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크르르……
     잠에서 깨어난 루카가 칼을 향해 낮게 목처을 울렸다. 루카가 왜 저러는 거지?
     “P, PK가 나타났어”
     “그러니까 어디에요?”
     내가 소리차자 칼이 입을 열었다.
     “여기.”
     칼은 잽싸게 허리춤에 달린 투척용 단검을 꺼내 경훈의 가슴팍에 던졌다.
     푸욱!
     “으윽!”
     “데, 데시카! 적안!”
     나는 적안을 개안했다. 이번엔 나에게 투척용 단검을 던지는 칼. 나는 퀵 스텝을 걸고 몸을 오른쪽으로 날렸다. 그리곤 허리춤에 달린 손잡이 끝에 붉은 구슬이 달린 단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언제 활시위를 걸고 활을 쏘는가. 고자 퀵 스텝을 걸고 투척용 단검을 피하는 게 전부였다.
     루카가 달려들자 빠르게 몸을 움직여 루카의 공격을 피하고 티아에게 다가가는 칼.
     나는 또 다시 퀵 스텝을 걸고 티아를 향해 내달렸다. 나보다 훨씬 빠른 몸놀림으로 나의 가슴팍을 발로 내지른 칼이 티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윽, 사람 잘못 봤군요.”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지. 어떤 저렙이 오크 워리어 따위에게 맞고 쓰러질까. 상처도 내가 직접 낸 것이고.”
     ‘아무나 덥석 믿는 버릇도 고쳐야겠군.’
     난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칼의 푸른 눈동자는 아까 봤을 때와 180°로 달라져 있었다. 두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런 그가 입을 열었다.
     “자, 그럼 투척용 단검의 제물이 되어…….”
     뻐억!
     “크악!”
     투척용 단검을 던지려는 칼의 왼팔 어깨를 혁이 메아스로 강하게 내리찍었다. 혁이 만들어준 기회다. 나는 즉시 레드 롱 보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려는 순간이었다.
     빠각.
     “응?”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기괴하게 뒤틀려 부러진 활. 아까 파워 샷 연습을 하면서 들었던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활등이 꺾이는 소리였다는 걸 나는 이제야 알아챘다.
     “으악!”
     혁이 뒷목에 투척용 단검이 꽃힌 채 주저앉았다. 혁이 방심한 틈을 타 움직일 수 있는 오른팔로 투척용 단검을 박아 넣은 것 같았다.
     “젠장!”
     “오, 눈동자 색이 빨갛군. 충혈이라도 되셨나?”
     그때였다. 언제 일어났는지 경훈이 재빨리 칼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뻗으며 소리쳤다.
     “탬핑 어택, 피스톨!”
     마치 권총을 쏜 것과 같은 파괴력으로 칼의 가슴팍에 무쇠 같은 주먹을 내지른 경훈.
     칼의 가슴팍은 기괴하게 함몰되었다.
     경훈은 성에 차지 않았는지 팔꿈치로 칼의 정수리를 내리찍고 무릎을 복부에 꽂았다. 말없이 게임아웃 되어버린 칼.
     언제 치료했는지, 혁의 뒷목에 꽂혀 있던 단검이 없어지고 상처도 말끔히 나았다. 하지만 경훈의 가슴팍엔 아직도 치명적인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런 몸으로 사력을 다해 칼을 공격했으니, 생명력도 상당히 감소했을 것이다.
     “이런 멍청한 놈! 그냥 누워 있지! 덕분에 살았지만. 좀 참아라. 큐어!”
     “욱.”
     혁의 치료를 받는 경훈의 표정에서 엄청남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 데시카. 나 때문에…….”
     “괘, 괜찮아. 이게 왜 너 때문이야.”
     “말하지 마, 짜샤. 힐링!”
     혁이 투덜대며 경훈의 상처 치료를 끝내고 감소되었던 생명력을 회복시켜주며 말했다.
     “티아 씨. 많이 놀라셨죠?”
     “조, 조금요.”
     경훈을 회복시켜주던 혁이 고개를 돌려 티아에게 묻자 티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혁은 경훈을 들어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부러진 활을 들고 있는 나를 본 혁이 입을 열었다.
     “…활, 부러져버렸네”
     “응.”
     “어떻게 하냐. 여분으로 남은 활 있어?”
     평소와는 달리 진지하게 사람을 대하는 혁.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나는 활 끝에 고정된 오우거의 힘줄로 만든 활시위를 풀고 덧대어 놓았던 붉은 가죽을 벗겼다. 그리곤 아이템 창에 던져 넣었다.
     뭐 아리스 노아에 가서 새로 활을 만들면 되겠지.
     부러진 활을 주울까 말까 고민하던 끝에 그냥 아이템 창에 던져 넣고 침대에 드러누었다.
     “푹 자자. 그래야지 내일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지.”
     그동안 아끼던 활이 부러져서 그런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런 나의 기분을 아는지 루카가 내 침대 위로 뛰어올라와 내배 위에 올라앉았다. 나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    *   *
    초토화 된 숲 근처의 오솔길. t지가 잘린 채 얼어붙어 있는 유저 둘과 그 가운데서 웃고 있는 한 검사 유저가 있었다.
     검신은 순백색을 띠고 있었고, 시린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혀로 윗입술을 핥은 유저는 들고 있던 장검을 도로 검갑에 수납했다.
     유저의 이마엔 흐르던 피가 굳어 있었다. 눈에 초점이 없는 듯싶었으나 이내 초점을 되찾았다. 그리고 서서히 사라져가는 두 유저의 시체를 보곤 고개를 저었다.
     “또 이렇게 되었군.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올 것 같으니 서둘러야겠다.”
     검사 유저는 좁지 않은 오솔길을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소리. 검사 유저는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의 오른손은 이미 검의 손잡이에 위치해 있었다.
     쐐액.
     허공을 가르는 가느다란 물체. 그 물체는 검사 유저를 향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날아왔다. 검사 유저는 검을 뽑아 가느다란 물체를 쳐냈다.
     ‘뭐지?’
     검사 유저는 바닥에 떨어진 가느다란 물체를 보며 생각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화살이 날아온 곳을 응시하자, 멍청하게서 있는 오크 아처를 볼 수 있었다. 검사 유저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파이어 웨폰.”
     화르륵.
     검사 유저의 검신에 타오르는 화염에 휩싸여 기염을 토해내고 있었다. 화염검을 쥔 검사 유저는 오크 아처를 향해 쏜살같이 달렸다.
     오크 아처가 다급하게 화살을 쏘았지만, 검사 유저는 화살을 가볍게 쳐내고 오크 아처의 목에 화염검을 찔러 넣었다.
     꿰에…….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찔러 넣었던 검을 뽑아 오크의 목을 베어낸 검사는 검을 칼집에 도로 꽂고 오솔길로 걸었다.
     오솔길을 걷던 검사 유저는 곧 작은 마을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마을 이름도 없는, 그렇다고 낮에 본 미리안 부락처럼 작은 마을도 아니었다. 검사는 마을 입구의 장벽에 기대고 하늘에 떠있는 두 개의 달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위험하니 마을 입구로 들어가서 잠깐 실례를 하는 게 좋겠군.”
     마을로 들어 온 검사 유저는 근처의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    *     *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잠이 깬 나. 배 위에 무언가 더운 물체가 있었다. 루카였군. 나는 루카를 들어 옆자리에 두고 상체를 일으켰다. 모두들 일어나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 사이에 밖으로 나가는 혁.
     반쯤 뜬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자 경훈이 빙긋 웃으며 입을로 나가는 혁.
     “오, 일어났네.”
     “응? 내가 제일 늦게 일어난 거야?”
     “응. 너무 곤히 자는 것 같아서 그냥 뒀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상쾌하게 기지개를 켜
    고 있을 때 경훈이 말을 걸어왔다.
     “이제 얼마나 더 가면 돼?”
     “으으…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아마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오, 그래? 근데 너 활 부러졌다며?”
     경훈이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 아리스 노아게 가서 더 좋은 활을 만들면 되니까.”
     “오, 좋은 생각이야.”
     경훈이 빙긋 웃어주며 대답했다.
     “내가 제일 늦잠을 잤군. 가자, 데시카, 티아, 루카.”
     “가자!”
     “응.”
     캉캉!
     나는 판잣집의 문을 열고 나왔다. 먼저 나온 혁이 마을 입구 안쪽의 커다란 나무에 서서 혼자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같이 지켜보던 경훈이 입을 열었다.
     “쟤 뭐하냐?”
     “모르겠어. 나무에 대고 뭐라 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황급히 혁에게 다가갔다. 혁의 목소리는 점점 자세히 들려왔고, 혁 혼자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혁과 대화를 하는 사람이 우리와 너무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강차… 아니, 카이루!”
     “오, 안녕. 레드, 데시카. 그리고 누구……?”
     “티아라고 해요.”
     “아, 반갑습니다.”
     강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무 반가운 친구. 같이 못 갈 것 같다며 아쉬워하던 친구. 그 친구를 여기서 만나다니, 아무래도 혼자 여기까지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런데 그에게서 유독 눈에 띠는 물건이 있었으니,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장검이었다.
     키가 커서 그런지 저런 장검도 허리에 차는군. 키가 작은 내가 허리에 찬다면 칼집을 바닥에 질질 끌고 다녀야 할 것이다. 칼을 바라보던 내가 물었다.
     “그 검은 새로 산 거야?”
     “응. 아세른이 당일에 만든 걸 팔더라고. 안정감도 있고 손잡이가 손바닥에 착 감기는 게 무지 좋아.”
     강찬이 장검의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혁이 입을 열었다.
     “이 새끼가. 글쎄, 아까 상처를 심하게 입고 여기 처박혀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치료 좀 해줬지. 내가 밖에 안 나왔으면 어쩔 뻔했냐. 다 이 형님의 뛰어난 감각이라고나 할까.”
     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경훈이 그의 뒤통수를 살짝 치며 입을 열었다.
     “그게 뭐냐?”
     “몰라, 새기야.”
     “그만하고 출발하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나는 두 녀석을 말리고 일행과 함께 마을 밖으로 나왔다.
     루카는 오늘도 티아의 품에 안겨 있다.
     한참을 걷자 오솔길이 사리지고, 울창한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울창하고 어두운 숲. 이런 숲에서 나타나는 중형 몬스터를 조심하라는 거였군.
     이 숲만 지나면 이제 아리스 노아에 도착하게 된다. 게임시간으로 3일간의 원정(?)이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숲은 생각보다 안전했다. 모두들 긴장을 하고 소리를 죽이며 걸은 결과 중형 몬스터와 대면하지 않고 어두운 숲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이레 가끔은 반전이 있는 법. 둔탁한 파육음과 함께 뒤다라오던 경훈이 나가떨어졌다.
     “크악!”
     세 바퀴 정도 굴러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 쓰러진 경훈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무투가인 경훈을 단 한 방에 나가떨어지게 한 거구는 트롤이었다. 트롤은 누런 침을 질질 흘리며 괴성을 질렀다.
     쿠오오!
     트롤은 괴성을 지르며 손에 쥔 방망이로 강찬을 후려쳤다. 강찬은 피할 겨를도 없이 나가떨어져 근처의 바위에 쳐박혔다.
     트롤은 이번이 두 번째로 보는 것이다. 한 번 트롤에게 맞아 죽은 기억이 있는 나는 트롤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트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고, 트롤은 또다시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재빨리 몸을 날렸다.
     ‘제길, 이럴 때 활이라도 있었으면 눈이라도 맞춰 다 같이 도망이라도 가는 건데.’
     트롤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빨랐다. 나는 근처의 나무를 딛고 빠른 움직임으로 트롤의 공격을 죽기 살기로 피했다. 나를 잡는 것을 포기했는지, 이번엔 티아를 향해 내달리는 트롤. 도망치던 나는 이제 트롤을 향해 돌진했다.
     쿠오오오오!
     메이스를 쥔 혁이 티아의 앞을 막아섰지만, 혁 혼자 트롤을 막아내는 건 무리였다.
     “으아아아!”
     갑자기 기합을 넣는 혁. 기합인지, 발악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디선가 불어온 날카로운 바람과 함께 방망이를 쥐고 있던 트롤의 팔이 어깨에서부터 싹둑 잘렸다. 아무리 회복력이 좋은 트롤이라고 해도 잘려나간 팔은 다시 붙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붙어 있던 팔이 잘려나가자 트롤은 깜짝 놀랐는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또다시 불어오는 날카로운 바람.
     트롤의 목을 가르고 사지를 가른 뒤 온몸을 조각조각 갈라버렸다. 하지만 혁과 티아에게 픽 튀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면, 바람의 장벽 같은 것이 튀는 피를 막아준 것 같았다. 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 나도 같은 표정이었다. 허공에서 흐르던 피가 바닥에 쏟아지고 산산조각 난 트롤의 시체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넋을 놓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혁. 나는 혁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뭐야! 언제 그런 기술을 익힌 거야? 그건 그렇고 일단 카이루와 데시카부터 치료해야지!”
     “아… 그, 그래야지…….”
     혁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혁이 한 것 같진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들어 티아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티아 뒤엔 흰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반투명한 미소녀가 서 있었다.
     “서, 설마…….”
     루카를 안고 있는 티아. 강한 바람이 불더니 티아의 후드를 뒤로 넘겼다. 밝은 갈색 생머리가 바람에 휘날렸고 뽀족한 귀가 드러났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와는 비교도할 수 없이 예쁜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티아.
     그런 티아의 모습을 본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티아가 엘프였다니. 그러고 보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혁을 흔들어 정신을 차리게 했다.
     “루샤크! 데시카랑 카이루를 치료하지 않으면 죽어!”
     “아, 그, 그래!”
     혁이 허겁지겁 일어나며 소리치자, 티아가 입을 열었다.
     “실라이론 소환 해제. 물을 관창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을 맺은 나 티아 젠이 그대의 힘을 빌리고자 명하노니, 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라. 엔다리론!”
     촤르륵!
     그러자 대기의 수분이 모이더니 상체는 인간, 하체는 말의 모습을 한 반투명한 파란색의 어린 소년이 소환되었다.
     “워터 큐어!”
     티아의 말에 두 팔을 들어 올리는 물의 정령. 그러자 강찬과 경훈의 부상이 혁의 큐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부상이 회복되자 티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워터 힐!”
     순식간에 생명력이 회복된 경훈과 강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혁과 나도 입을 다물지 못한 채넋을 잃었다.
     “에, 엘프?”
     뒤에서 천천히 다가오던 경훈이 입을 열었다. 강찬은 아직도 허리가 뻐근한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넋을 잃고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티아, 에, 엘프였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티아.
     나는 티아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분명 초록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초보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엘프에다가 트롤을 간단히 해치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머뭇거리던 티아가 입을 열었다.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접속을 하니까, 아리스 노아가 아닌 세인트 모닝이었어. 그때, 마침 오빠를 만난 거고. 세인트 모닝이 어떤지 둘러보고 버그 신고를 하려고 했었는데, 마침 아리스 노아게 간다고 해서…….”
     흐음. 아무튼 나는 그녀가 고레벨의 정령술사라는 것에 놀랐고 엘프라는 것에 더더욱 놀랐다.
     지켜보던 강찬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
     “엘프치곤 좀 작은 것 같은데?”
     나는 눈치 없이 말하는 혁에게 다가가 살포시 발을 밟아주었다. 물론 입을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티아의 눈빛. 뭔가 미안한 게 있는 것 같은 눈빛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여기서 아리스 노아에 가는 길은 알고 있지?”
     “응…….”
     “그럼 이제 네가 앞장서도록. 엘프니까, 아리스 노아로 가는 지름길은 알고 있을 거 아냐?”
     “응!”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대답하는 티아. 이제 루카를 품에 안은 티아가 앞장을 섰고, 그 뒤로 내가 따라 붙었다.
     얼마 가지 않아 우리는 토끼와 노루가 뛰노는 초보자 사냥터에 도착했다. 아직 레벨이 낮은 엘프 유저들이 토기와 노루를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걷자 어느새 아리스 노아에 도착하였다.
     아리스 노아의 정중앙엔 홈페이지에서만 보았던 커다란 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옆엔 작지 않은 호수의 수면이 은빛을 내며 반짝였다.
     호수 근처의 음식점과 무기점 등 홈페이지에서만 보던 그런 나무로 된 엘프의 도시에 직접 오게 되자 왠지 모를 성치감이 느껴졌다.
     “아, 아리스 노아!”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엘프들은  “인간이다!”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솔질히 엘프 유저라고 해도 현실에서는 엄연히 인가.
     사회생활을 할 때도 사람들을 많이 볼 것이고 우리 말고 다른 인간 유저들도 아리스 노아에는 많이 왔을 것인데.
     나는 우리를 보고 신기해하는 엘프 유저들이 더욱 신기했다. 그나저나 엘프 유저들 중 여성 유저들은 무지 예뼜다. 그때 강찬이 입을 열었다.
     “이야, 라인이 살아 있어.”
     “오, 그건 그래. 제대로 살아 있다.”
     맞장구치는 혁. 여자 이야기만 나오면 강찬과 혁은 이상하게 잘 맞는다.
     “티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는 음성.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명의 엘프 여성 유저들이 광장에서 마을 입구를 향해 쪼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분홍색 머리카락에 파란 눈동자, 하늘색 머리카락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두 엘프 유저.
     둘 다 활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궁수인 것 같았다. 나보다 더 큰 두 엘프 여성 유저.
     강찬과 떠들던 혁이 주책을 떨며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 여자보다 작어서 어쩌… 윽!”
     나는 답례로 혁의 발을 살포시 밟아주었다.
     “어머, 그 강아지는 뭐야?”
     “강아지가 아니고 늑대야.”
     “그래? 귀엽다!”
     인기 많은 루카. 나는 지금것 루카가 이렇게 부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친구들에 비하면 유난히 작은 티아. 하지만 내 눈에는 저 세명 중 제일 예쁘다. 루카를 쓰다듬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헛기침을 했다.
     “크음.”
     “아, 이 늑대 주인인 레드 오빠야.”
     “아, 안녕학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노아라고 해요.”
     티아의 말에 루카를 쓰다듬던 두 유저가 나를 보며 인사했다. 그러자 난데없이 내 앞을 가로막은 혁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전투 클레릭인 루샤크라고 합니다.”
                   *    *     *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다 오게 된 곳은 아리스 노아 중심에 있는 ‘생명의 나무’였다.
     지금 나는 티아와 단 둘이 있다. 강찬, 경훈, 혁은 티아의 두 친구와 함께 방금 전 쉼터로 향했고, 나는 새로운 활을 구하러 티아와 함께 무기점으로 가는 중이다.
     이상하게 둘이 있으면 떨리는군. 나는 루카를 쓰다듬고 있는 티아에게 물었다.
     “무기점은 어디야?”
     “아, 이 나무 옆에 있는 호수 보이지? 저기 저거.”
     “응.”
     “건너편에 보면 다른 상점들과는 다르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넓적하게 생긴 돌로 만든 곳.”
     “아, 저기가 무기점이야?”
     “응.”
     나는 티아와 함께 무기점으로 향했다. 세인트 모닝과 비슷한 구조로 지어진 무기점. 밖은 대장간이고 안에 무기점이 있다.
     나는 티아와 함께 무기점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쪽엔 대장간, 안쪽엔 무기점. 세인트 모닝과 비슷한 구조군.
     무기점으로 들어온 나는 내가 쓸 만한 활을 찾아보았다. 전부 나무로만 만들어진 활뿐이었다.
     안에 있던 젊은 무기점 주인 NPC가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오, 인간이시군요.”
     “아, 예. 여긴 철로 된 활은 없나요?”
     나는 물음에 무기점 주인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엘프들은 나무로 만든 활만 씁니다.”
     “에? 그래요? 이거 직접 만들어야겠네.”
     “재료는 있습니다. 철광석은 충분히 있죠, 예.”
     “노와 모루 좀 쓸 수 있을까요?”
     “예, 돈만 내신다면 얼마든지.”
     나는 빙긋 웃으며 철광석 값과 이용료를 지불하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자아, 이제 슬슬 만들어 보실까?”
     제련과 블랙스미스 마스터이신 이 몸께서 드디어 두 번째 무기를 만든다. 나무를 깎아서 만들어도 되지만, 파괴력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다.
     티아는 대장장이 스킬을 사용하려는 내가 신기한지, 가까이 다가와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참 부담스럽군. 나는 무기점 주인이 가져온 철광석을 녹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가며 점점 철은 제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크기는 전에 쓰던 레드 롱 보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컸다. 내 키보다 조금 더 작은 크기. 가죽을 덧댈 수 있게 활등은 둥글게 만들었다.
     활 끝으로 갈수록 휘어지는 곡선에 나름대로 멋을 부려보았다. 활등의 위쪽에 음각으로 ‘RED Paun'이라 새겨 넣었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모습을 갖추지 않은 활을 다시 불에 달구고 망치질을 하기 시작했다.
     까앙까앙.
     까앙까앙.
     나는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팔등으로 훔치며 열심히 활을 만들었다.
     “티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밝은 갈색 머리카락과 밝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남성 엘프 유저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응? 어 오, 오빠!”
     말을 더듬는 티아. 설마 저 녀석이?
     나는 다시 시선을 활에 고정시키고 망치질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둘의 대화를 듣는 것에도 신경을 쓰면서.
     “이런데서 뭐해?”
     “응? 아, 아는 오빠가 무기를 직접 만든다고 해서 구경하는 중이야.” “그래? 오, 인간 유저시구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도 시선을 거의 다 만들어진 활에 고정한 채 짧게 인사했다.
     “티아, 그동안 어디 있었다? 걱정했잖아.”
     “미안해. 버그 때문에 접속하니까 세인트 모닝이라는 인간들의 도시에 있었는데, 레드 오빠가 데려다 줬어.”
     “그래? 다행이다. 아, 어서 일어나.”
     “응? 왜?”
     티아의 팔을 끌어당기는 유저.
     역시나. 지금껏 허튼 생각을 한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저 둘은 연인 사이인 것 같았다. 저렇게 예쁜 애가 남자친구가 없을리 없잖아?
     훤칠한 키에 잘생긴 그의 외모에 비하면 나는 평범하다. 검고 긴 머리에 검은 눈썹. 그리고 검은 눈동자와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콧대. 그리고 작은 입술.
     감히 갖다 댈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외모에다가 내성적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제 거의 완성된 활을 들어보았다. 생각보다 꽤 무겁군.
     “레드 오빠.”
     옆에 앉아 구경하던 티아가 유저의 팔에 끌려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시선을 활에다 둔 채 입을 열었다.
     “응?”
     “미안한데, 나 가봐야 될 것 같아.”
     “그럼 가.”
     “미안해.”
     “괜찮아.”
     나는 짧게 대답하고 아이템 창에서 붉은 가죽을 꺼내 활등에 덧대었다.
     “그럼 가볼게…….”
     “응, 잘 가.”
     나는 조금 시큰둥했다. 쳇. 내게도 봄이 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아직 너무 이르다.
     하긴 나같이 부족한 점이 많은 녀석이 여자를 사귀어봤자 상처만 줄 게 뻔하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오우거의 힘줄로 만든 활시위를 꺼내 활 끝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나는 새로 만든 활을 한 손으로 들어 보았다. 도저히 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없는 무게였다.
     하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서 모아놓은 스탯 포인트가 있다. 나는 상태 창을 열었다.
     [이름] 레드 파운
     [직업]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52
     생명력(HP). 620
     마나(MP). 400
     스태미나(SP). 500(배고픔 수치 10%/ 갈증 5%)
     힘 87
     체력 15
     민첩 159
     손재주 420
     지력 15
     지헤 15
     행운 15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210~320
     방어력 4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100
     나는 남은 스탯 포인트를 힘에 50, 체력에 50으로 반씩 때려 박았다.
     체력을 찍으면 방어력과 스태미나가 증가하게 된다. 방어는 그다지 필요가 없지만, 스태미나는 정말로 중요하다. 그리고 힘은 새로 만든 이 활을 이전에 쓰던 레드 롱 보우처럼 가볍게 들기 위해 찍은 것이다.
     전사들이 사용하는 웬만한 두 손 검 못지않게 무거운 이 활. 나는 이 활의 이름을 ‘아이언 레드 롱 보우’라고 붙였다. 스탯을 분배하고 나니 이제 활을 쉽게 들 수 있었다.
     남은 스탯 포인트를 손재주와 민첩에 쏟아 부었다면 아무도 이 아이언 레드 롱 보우는 들지도 못 했을뿐더러, 철궁을 만든다고 해도 이런 크기로는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엔 화살을 만들 차례. 아이언 레드 롱 보우에 맞는 화살은 굵직하고 긴 화살. 나는 어떤 화살이 필요할지 생각해봤다.
     ‘음. 기존에 쓰던 일반 화살을 쓰게 되면 너무 빈약해 보여. 그렇다고 창을 화살로 쓸 수도 없고… 응? 창? 아, 그래! 스몰 스피어 정도 크기의 화살을 제작하는 거야!’
     나는 손뼉을 치며 일어났다.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대장간 벽에다 세워두고 무기점으로 들어온 나는 주인 NPC에게 화살을 만들 재료에 대해 설명하고 그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다시 화살 제작에 힘썼다.
     내가 생각해낸 모양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녹이고 또 녹이는 것을 반복해서 나온 화살은 화살촉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고 긴 화살촉(언월도 같이 길다거나 그러지 않았다)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스몰 스피어를 연상시키는 크고 긴 화살. 어떻게 쓸 것이냐고 묻겠지만, 다 쏘는 방벙이 있다 바로 연습!
     실실 웃으며 화살을 만들고 있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많이 익숙한 목소리였다.
     “레드, 뭐해? 응? 스몰 스피어는 뭣 하러 만들어? 활 구한다고 하지 않았어?“
     경훈이었다. 나는 시선을 제작중인 화살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경훈이구나. 쉼터에서 쉬고 있지. 왜 왔어?‘
     “걱정 되잖아. 그건 그렇고 대체 왜 스몰 스피어를 만드는 거야? 음 모양이 그리 창 같지는 않지만. 그리고 길이도 더 짧고 굵직하지도 않고.”
     “화살이야.”
     “뭐, 뭐? 화살?”
     깜짝 놀라 소리치는 경훈. 뭐가 잘못 됐나? 나는 고개를 들어 경훈의 얼굴을 보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망치질을 했다.
     화살촉을 만들어 날카롭게 갈아야겠군. 화살촉을 갈고 있을 때 경훈이 물었다.
     “그럼 활은 어디 있어?”
     “활? 저기.”
     “…….”
     할 말을 잃은 경훈. 벽에 새워진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집어든 경훈이 활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내 키보다 조금 작은 활. 큰데다 무겁기까지 할 텐데. 경훈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근데 궁수가 사용할 정도의 무게는 아닌데? 다시 만들어야 하는 거 아냐?”
     “나만 쓸 수 있는 거야.”
     “뭐 그런대로 괜찮네. 예저에 쓰던 활보다 파괴력도 훨씬 강할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다시 갈던 화살촉으로 고정시켰다. 몇 시간 동안 나의 말상대가 되어준 경훈. 화살 제작을 한지 서너 시간 만에 똑같은 화살 100개를 만들 수 있었다.
     휴우, 이제 좀 쉬어야지. 아니,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화살통을 제작해야 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지금 당장 만들면 되지.”
     나는 또다시 두꺼운 가죽을 구입해 화살통 제작에 나섰다. 화살통 제작은 비교적 빨리 끝났다. 이걸 등에 메고 화살을 꺼내
    는 것은 불가능하겠군.
     나는 왼쪽 허리춤에 화살통을 착용하고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아이템 창에 던져 넣었다. 이렇게 해서 새 무기가 완성디었다.
     “좋아, 완성이다! 이제 쏘는 연습만 하면 돼.”
     ‘오, 구경해도 될까?“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구경을 마친 경훈이 건네주는 활을 받았다.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든 나의 모습을 본 무기점 주인은 경악을 했다. 그렇게 큰 활을 어떻게 쓸 것이냐 놀라 했다.
     뭐, 다 방법이 있다. 나는 목례를 하고 대장간에서 나왔다.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등에 메고 걷는 동안 많은 유저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뭐 소리 없이 뒤를 따라오는 루카 때문인 것도 있ㅇ었다.
     “아, 레드. 먼저 쉼터로 가자.”
     “응? 왜?
     “아,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잖아. 그건 그렇고 뭔가 부족한 것 같았는데. 티아 씨는 어디로 갔어?”
     “티아?”
     그녀의 이름을 듣자 갑자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른 채 입을 열었다.
     “나, 남자친구랑 어디 갔어.”
     “뭐? 남자친구랑?”
     “응. 그렇게 예쁜 애가 남자친구가 없을 리가 있어? 게다가 그 유저 키도 크고 잘생겼었어. 나랑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러자 경훈이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라고 했어?”
     “아니, 그래 보였어.”
     “이 자식. 생각하는 게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뭐가?”
     “너 티아 씨 좋아하지?”
     경훈의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 경훈이 빙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용기를 내서 고백하는 거야.”
     “그래도 남자친구가 있잖…….”
     “아, 거 참. 확실하지도 않은 것 가지고 왜 그래. 내가 말한대로 해봐.”
     나는 다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쉼터다.”
     “그래? 아이템 창 오픈!”
     파밧!
     “응? 갑자기 왜 아이템 창은 열고 그래?”
     “아니, 활 완성된 건 비밀로 하려고 너도 지켜. 안 그럼 활 쏘는 거 안 보여준다.”
     “알았어.”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화살통을 아이템 창에 넣고 아이템 창을 급히 닫았다.
     두 엘프 여성 유저와 웃고 떠드는 강찬과 혁, 혁이 오늘처럼 행복해 하는 건 처음이었다. 변태 같은 새끼.
     “오, 레드 왔어?”
     “응.”
     실실 웃던 혁이 입을 열었다.
     “야, 이제 강제접속 종료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다. 48시간 게임만 한 것 같아.”
     “…….”
     48시간. 나도 폐인이 다 됐군. 나는 웃고 떠드는 녀석들에게 입을 열었다.
     “아, 그건 그렇고 아리스 노아에 언제까지 있을 셈이야?”
     “아마 며칠 묵을 것 같아. 로그아웃 하고나서 다섯 시간 뒤에 다시 여기서 보는 거다.”
     강찬의 대답에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난 먼저 가볼게.”
     “벌써 가게?”
     나의 말에 경훈이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남은 시간 동안 좀 자두려고.”
     “아, 나도 그래야겠다. 야, 이 변태새끼들아. 레드하고 이 형님은 지금 가보련다. 적당히 하고 꺼.”
     “알았다. 인마.”
     경훈의 말에 짧게 대답하는 혁과 고개를 끄덕이는 강찬.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위잉.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듣기 좋은 기계음과 함께 캡슐의 문이 열렸다. 나는 헤드셋을 벗고 기지개를 켰다.
     “으아~ 다섯 시간 동안 잠 좀 자볼까?”
     나는 게임베드에서 일어나 캡슐 밖으로 나와 곧장 침대에 드러누웠다.
     “컴, 다섯 시간 후에 깨워줘.”
     「주인님, 식사는 하셔야……」
     “아, 이따 일어나서 먹을게. 깨워줘.”
     「네.」
                   *    *     *
     「오늘의 아람. 비명소리.」
     끼아아아아아악!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뭐야, 벌써 다섯 시간이 지난 거야?”
     「네. 어서 식사하시고 조금 더 자는 것을 권장합니다.
     “아, 아. 약속이 있어서 안 돼.”
     나는 거실로 급히 나와 냉장고를 뒤져 인스턴트식품을 아무거나 하나 꺼내 전자렌지에 돌렸다.
     하얀 쌀밥 위에 매콤한 카레가 덮인 카레라이스
     나는 즉시 전자레인지에서 꺼내 식탁으로 가져와 허겁지겁 먹었다. 물 마시는 것도 잊은 채 방으로 달려온 나는 캡슐 허리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눌러 캡슐의 문을 열고 게임베드에 누웠다. 그리고 헤드셋을 썼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52.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쉼터의 벤치에 앉아 있는 경훈, 아무래도 경훈이 제일 먼저 왔나보다. 나는 경훈을 놀리기 위해 슬금슬금 경훈에게 다가갔다.
     “놀라게 할 생각 하지 마.”
     “쳇.”
     이미 알아차린 경훈. 나는 경훈의 옆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애들은?”
     “아직 안 온 것 같다.”
     경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찬이 접속했다. 그리고 뒤이어 혁이 접속했다.
     “응?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네.”
     강찬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니들 또 그 여자 분들이랑 놀아야지?”
     “당연하지!”
     크게 소리치는 혁. 이 녀석 사람 되긴 글렀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난 마을 밖에 좀 가봐야겠다.”
     “나도.”
     경훈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자 혁이 입을 열었다.
     “어디 가게?”
     “신경 끄고 여자나 만나라. 가자, 레드.”
     “응.”
     우리는 혁과 강찬을 뒤로한 채 쉼터에서 나와 마을 밖으로 향했다.
     쉼터에서 벗어난 나는 아이템 창에서 활과 화살통을 꺼냈다. 화살통을 허리춤에 차고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왼손으로 들었다. 경훈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했다.
     “이야, 다시 봐도 멋지단 말이야. 쏘는 거 한 번 보고 싶다.”
     “이제 지겹게 볼 거다.”
     마을 밖으로 나오자 초보자 사냥터에 많은 엘프 유저들이 있었다. 대부분 궁수였고 가끔 정령술사가 보였다. 정령이라… 티아도 정령술사였지.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
     “아냐.”
     갑자기 고개를 젓는 나를 보고 묻는 경훈. 짧게 대답한 나는 허리춤에서 기다란 화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굵기는 일반 화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굵었지만, 더블샷을 쏘는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아, 잠시 잊고 있었군.
     나는 화살을 바닥에 내려두고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었다. 전보다 훨씬 힘들었다.
     “활줄 걸었다, 풀었다. 그거 귀찮아서 어떻게 사냥해?”
     “난 이미 익숙해.”
     신기한 듯 바라보며 말하는 경훈. 나는 대답과 함께 바닥에 내려 두었던 화살을 주웠다. 그리고 화살 깃을 횔시위의 절피에 걸었다. 그런 후 활을 가로도 아니고 세로도 아닌 대각으로 비스듬하게 들었고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목표물은 사슴. 토끼를 쏘게 된다면 그냥 터질 것이 뻔했다.
     “이야, 기대된다.”
     경훈이 옆에서 말했고 나는 빙긋 웃었다.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났다.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고, 화살은 사슴의 목에 꽂혔다. 아니, 사슴의 목에 박힌 채 사슴과 함께 저만치 날아갔다.
     “허얼. 뭐야 이거?”
     “음? 생각보다 잘 되네.”
     화살이 100개 밖에 없는지라 주워서 쓰는 게 나을 것이다. 화살을 주우러 가고 있을 때 목에 화살이 박힌 채 쓰러진 사슴을 본 엘프 유저가 소리쳤다.
     “누가 창으로 죽여 놨어?!”
     나는 말없이 다가가 사슴의 목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죽은 사슴은 서서히 사라졌고 커다란 화살을 뽑아든 나는 엘프 유저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았다.
     이제 더블 샷을 쏴 볼 차례. 나는 화살 하나를 더 꺼내 든 뒤 활시위에 걸었다. 그러자 멀리서 경훈이 다가오며 소리쳤다.
     “이번에 두 개를 쏘려고?”
     “응.”
     이번에도 목표물은 당연히 사슴. 나는 사슴을 향해 활을 쏘았다.
     쐐애액.
     파팍!
     명중!
     두 개의 화살은 사슴의 몸통에 박힌 채 보기 좋게 날아갔다. 스태미나가 빠르게 감소하는 것만 제외하면 이전에 쓰던 레드 롱 보우보단 훨씬 나은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경훈에게 말했다.
     “야, 우리 오크나 놀 같은 거 잡으러 가자.”
     “뭐? 지금?”
     “응.”
     “나는 상관없지만 지금 방금 쏜 게 그 녀석들한테도 먹힐까?”
     경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요즘 들어 루카가 참 조용해진 것 같았다. 그저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루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루카는 꼬리를 더울 빠르게 흔들며 짖었다.
     캉캉!
     나는 쭈그리고 앉아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슴을 맞추었던 두 개의 화살을 뽑아들고 경훈, 루카와 함께 숲으로 향했다.
                   *    *     *
     깊은 숲. 대여섯 마리 정도 되는 오크 무리가 숲을 방황하고 있다. 고블린들이 쉬고 있던 자리를 빼앗은 오크들은 가금씩 나타나는 고블린 따위에게 겁을 주어 달아나게 하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대 멋도 모르고 수풀을 헤치고 들어온 엘프 유저. 복장을 보나 무기를 보나 아직 레벨 50대의오크를 잡는 것은 무리인 유저였다.
     오크들의 시선이 엘프 유저에게 고정되었고 오크들은 입맛을 다시며 일어섰다.
     “취익, 엘프라도 먹는 거다, 쿠륵.”
     “칼 갈아! 쿠륵.”
     “이런.”
     엘프 유저는 그대로 뒤돌아 줄행랑을 놓았다. 인간과는 달리 빠른 몸놀림이 부여된 엘프 캐릭터. 그런 엘프 캐릭터가 오크 따위에게 잡힌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잠시 후 사냥감을 놓친 오크들은 허탈하며 숲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비록 게임이라지만, 이들에게 하나하나 인공지능이 부여된 캐릭터인지라 놈들은 신경질을 내며 걸어갔다.
     푸욱!
     "쿠에엑!“
     어디선가 날아온 창이 가슴팍에 박혔고, 가슴팍에 창이 박힌 오크 한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리고 또다시 날아오는 창. 비교적 잛은 창이었지만 파괴력만큼은 가공할 만했다.
     이번엔 다른 오크의 머리를 관통한 창.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서너 마라의 오크가 죽은 동료를 보고 괴성을 지르고 있을 때, 수풀 사이에서 흰 물체가 잔상을 남기며 튀어나왔다. 그리곤 다른 한 마라의 오크에게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고 모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오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남은 오크들이라고 이런 상황에서 침착할 리 없었다. 줄행랑을 놓으려 할때, 제일 먼저 달려가던 오크의 머리에 또 하나의 창이 날아와 박혔다.
     “취익! 누, 누구냐1 쿠륵.”
     “동료들이 다 죽었다. 취익!”
     남은 두 마리의 오크가 안전부절못하고 있을 때, 수풀 사이에서 검은 신형이 튀어나왔다. 무릎공격으로 오크의 복부를 내지르고 팔꿈치로 두개골을 격파!
     공격을 당한 오크의 머리에서 피와 뇌수가 뿜어져 나왔다. 오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다른 한 마리의 오크는 또다시 날아온 창에 가슴팍이 꿰뚫리며 쓰러져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이야! 뭐 쐈다 하면 백발백중이냐?”
     “하하. 이게 노력의 결과다. 그건 그렇고, 루카는 레벨 21인데 오크 한 마리는 거뜬히 잡네?”
     “소환수라 그럴 수도 있지.”
     캉캉!
     나는 지금것 쏘았던 화살을 회수해 화살통에 넣으며 기분 좋게 이야기를 했다. 루카의 입가엔 오크의 피가 묻어 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뭐 조금 지나면 사라지겠지만.
     화살의 개수를 확인하고 있을 때 경훈이 소리쳤다.
     “아이템이다!”
     “어디? 뭐 나왔는데?”
     나는 화살의 개수를 세다 말고 경훈에게 다가갔다. 반지였다. 옵션이 뭘까?
     [구리반지(매직)]
     설명: 구리로 만들어진 반지. 평민들이 주로 끼고 다니는 액세서리의 일종.
     방어 1증가
     보호 1증가
     효과. 실드 마법 발동.
     “오, 매직급 아이템이다!”
     반지의 옵션을 본 내가 신이 나 소리쳤다. 하지만 나에게 실드 마법이 발동되는 반지는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경훈이 끼지도 않을 것이다. 반지를 빤히 보던 경훈이 입을 열었다.
     “이거 혁이 주는 게 어때?”
     “응? 그 녀석한테?”
     “응.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솔직히 우리 중 제일 약하잖아. 게다가 자신의 몸 정도는 보호할 수 있어야지, 안 그래? 매일 뒤따라 다니면서 사냥, 치료 같은 거 다 해주는데 이 정도 선물은 줘야 하잖아.”
     생각해 보니 경훈의 말에 일리가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옵션은 어떻게 됐을까?
     뭐 내가 만들어서 훤히 다 알고 있지만, 옵션을 본다고 뭐 잘 못될 건 없으니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옵션 창을 열어보았다.
     [아이언 레드 롱 보우(RED Paun 제작)]
     설명: 철로 만든 커다란 장궁. 무게는 투 핸드 소드나 클레이모어 같은 두 손 장검 못지않게 무겁다. 하지만 가공할 파괴력 만큼은 웬만한 크로스 보우에 굴하지 않는다.
     최소 공격력 100증가.
     최대 공격력 200증가.
     내구력 50/50
     뭔가 부실한 설명. 그래도 정말 웬만한 석궁 못지않게 강하다. 그것만은 내가 장담한다. 게다가 내가 만들어낸 화살의 무게도 엄청나기 때문에 파괴력이 더 추가되는 것.
     나는 조금 더 욕심을 내어 입을 열었다.
     “아, 우리 트롤 같은 거 한번 잡아볼까?”
     “트, 트롤? 재정신이야? 강찬이도 단 한 방에 나가떨어졌어.”
     기겁을 하며 소리치는 경훈.
     뭐 나도 솔직히 트롤이 무섭다. 아니, 두렵다. 하지만 기습을 해서 못 잡을 건 없다. 단순히 숨어서 파워 샷을 쏘아 중상을 입히면 되는 것.
     뭐 트롤의 재생력이 뛰어난 건 알지만, 경훈과 루카가 합세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루카, 넌 어때?”
     캉캉!
     “좋아, 이것 봐. 루카도 좋다 그러잖아.”
     “뭐?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에이, 그러지 말고 한번 해보자. 정 안 되면 튀면 되잖아. 너 무투가니까 이동속도 늘리는 스킬 정도는 있을 거 아냐?”
     나는 경훈을 구슬렸다.의외로 귀가 얇은 경훈은 잠시 곰곰이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끝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딱 한 마리만 잡고 다시 오크 잡는 거다?”
     “좋아!”
     캉캉!
     내가 소리치자 루카가 폴짝폴짝 뛰면서 짖기 시작했다.
     드디어 복수를 할 수 있다. 예전에 트롤에게 당한 적이 있다. 그것도 단 한 방에. 뭐 여기서 잡으려고 하는 트롤에게 당한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트롤은 트롤.
                   *    *     *
     우리는 더욱 깊은 숲으로 들어왔다. 습기가 가득했고 어둡기까지 했다.
     나는 적안을 개안하고 주변을 살폈다. 심심찮게 고블린이 가끔식 나타나긴 했지만, 화살을 쓸 필요도 없이 그저 보우어택으로 고블린의 두개골을 박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휴식을 취하는 트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장 3미터는 기본으로 넘는 트롤. 나는 작게 말했다.
     “야, 경훈아, 루카. 이리와.”
     슬금슬금 기어오는 경훈과 루카. 우리는 현재 커다란 바위 위에 있다. 그리고 바위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트롤. 손에 상반신이 없는 고블린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식사중인 것 같았다.
     “내가 파워 샷으로 저 녀석의 머리를 강타할 거야. 그럼 너는 루카랑 같이 저 녀석의 몸으로 찾지해.”
     “아니, 잠깐만. 저 녀석이 화살을 뽑고 위를 쳐다보면 어떡하지? 재생력이 워낙 뛰어나서 생명력이 금세 회복될 것 같은데.”
     경훈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트롤이 아무리 재생능력이 좋다고 하지만 두개골이 뚫리면 살수 있을까 하고. 뼈대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굵직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런 높이에서 밑으로 쏘는 화살의 힘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화살 하나를 꺼내 들고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었다. 나는 활시위를 힘껏 당기며 입을 열었다.
     “파워 샷…….”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스태미나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마나도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으윽. 쏘면 바로 달려드는 거다. 간다!”
     떨리는 팔로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식사를 하고 있는 트롤의 어깽 제대로 박힘과 동시에 트롤의 머리가 땅에 처박혔다.
     쿵!
     쿠오오오오!
     들고 있던 고블린의 하반신을 부리치고 괴성을 지르기 시작하는 트롤.
     자리에서 일어난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으려고 팔을 머리 위로 들 때였다.
     경훈이 몸을 날려 트롤의 어깨에 박힌 화살을 강하게 딛고 땅에 착지했다. 물론 루카도 경훈을 따라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쿠아아아아!
     트롤이 괴성을 지르며 근처의 바위를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다간 경훈과 루카가 위험하다.
     나는 또다시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활시위를 강하게 당겼다. 이번에도 날리는 파워 샷!
     현재 트롤은 내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의 머리에 박힌 화살을 딛고 나타난 경훈을 인식하고 바위를 던질 뿐,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파워 샷!”
     쐐애액.
     푸악!
     이번엔 트롤의 목을 관통! 공기를 부리던 트롤이 서서히 잠잠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래도 두면 말도 안 되는 재생능력으로 회복을 하게 된다.
     나는 바위에서 뛰어내려 활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보우어택!
     지켜보던 경훈과 다가와 스킬을 사용한다.
     “탬핑 어택!”
     빠악!
     무쇠 같은 경훈의 주먹이 트롤의 머리를 작렬! 그리고 뒤이어지는 무시무시한 보우어택!
     강철로 만든 활이라 보우어택의 위력은 메이스로 내려치는 것과 맞먹는다. 재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함몰되어 있는 트롤의 대가리. 많은 양의 경험치를 얻었을 때였다.
     [소한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몸에 변확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변화?”
     나는 고개를 돌려 루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루카의 몸을 순식간에 뒤덮는 새하얀 빛. 루카의 몸이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완전한 아기 늑대에서 이제 조금 큰 강아지의 크기로 자라더니 루카의 몸을 감싸고 있던 새하얀 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오, 경훈아! 이것 봐! 루카가 조금 커졌어!”
     “어디? 응? 우와!”
     꼬리를 세차게 흔드는, 전보다 더 커진 루카. 하지만 아직 푸에 안을 수 있다 나는 루카의 정보 창을 열어 보았다.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야>
     정보: 세릴리아 월드의 단 한 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설의 흰 늑대.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한 전설의 흰 늑대이다.
     현재 상태“ 새끼
     Lv. 22
     HP: 알 수 없음.
     MP: 알 수 없음.
     상태: 매우 건강
     친밀도: 100
     배고픔: 0% 목마름: 0%
     정보 창으로는 변한 것은 없다. 아직까지 새끼라는 것이 제일 눈에 띠었다. 나는 활을 등에 메고 루카를 안아 들었다. 전보다 조금 무거워진 루카.
     몸이 커졌지만 까만 눈망울은 변하지 않았다. 지극히 순해 보이는 두 눈동자. 혀를 내밀고 헤헤거리는 모습이 아직까진 영락없는 강아지다.
     “그렇게 종냐?”
     “당연하지 임마, 루카가 자랐는데! 다 크면 얼만할까?”
     나느 루카를 품에 안고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런 탈 없이 트롤을 잡은 것과 루카가 성장한 것. 나는 지금 기분이 무지 좋다. 나는 루카를 바닥에 내려놓고 화살을 회수했다. 또 떨어져 있는 아이템. 나는 아이템을 주워 정보를 보았다.
     [트롤의 피]
     포션을 제조할 때 유용하게 쓰이는 트롤의 피다.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 흠이다.
     “트롤의 피라.”
     유리벼에 든 액체. 경훈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혹시 모르니 아이템 창에 넣어두었다.
     “경훈아. 한 마리만 더 잡아 볼까?”
     “그럴까?”
     좀 전과는 달리 이제 적극적인 경훈. 나는 입가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현성아.”
     “응.”
     숲을 걷는 도중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경훈.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자 경훈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말인데, 이런 곳에서 트롤 말로 오우거를 만나게 된다면 도주는 그냥 포기해라.”
     “…….”
     오우거.
     무시할 수 없는 몬스터 중 하나. 지상 몬스터 중 먹이사슬 상위에 위치하는 녀석이다. 숲의 폭군이라고도 불리는 오우거는 정말 숲에서 만큼은 대적할 자가 없었다.
     트롤조차 감히 들이댈 수 없는 완력과 뛰어난 순발력. 게다가 오우거는 그 육중한 몸으로도 나무를 잘 타기 때문에, 기척 없이 사냥감에게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에 멀티비전에서 오우거를 잡는 로빈훗을 볼 수 있었는데, 솔직히 그건 좀 아니라고 본다.
     손아귀의 힘으로 사람의 몸 정도는 가볍게 으스러뜨리는 가공할 악력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공포였다. 그런 오우거를 이런 깊은 숲에서 만나게 된다면 정말 도주고 뭐고 그냥 죽는 수밖에 없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재,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하긴 오우거가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해.”
     오우거 이야기에 나는 갑자기 긴장했다. 그때 경훈이 팔로 내 앞을 가로막으며 입을 였었다.
     “쉿, 트롤이다.”
     “어디?”
     “저기, 저쪽.”
     나는 경훈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재수 없는 오크 녀석이 하필이면 트롤에게 걸려 쥐어 터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쿠오오오!
     “쯧쯧. 오크가 불쌍해 보이는 건 또 처음이다.”
     “그러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경훈이 말하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 잡게?”
     “당연하지. 저렇게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기습하기 가장 좋은 때야.”
     화살을 꺼내 활시위에 걸 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포효.
     콰우우우우!
     포효하던 틀롤이 잠잠해졌다. 그리곤 저 멀리서 나타나는 육중한 몸의 오우거. 육중한 몸과는 어울리지 않게 빠른 속도로 나무를 타며 포효했다.
     트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오우거를 관찰했다. 우리가 있다는 건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핏발이 선 두 눈동장엔 살기가 가득했고, 쭉 찢어진 아가리와 뾰족한 이빨을 보자 절로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크기는 대충 4~5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아 보였다.
     오크를 피떡으로 만들고 있던 트롤은 그대로 땅에 처박혔고 처박힌 트롤을 잡은 오우거가 또다시 포효를 하며 커다란 주먹으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피가 튀었고, 뼈 부서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트롤을 뜯어먹기 시작하는 오우거. 나는 화살을 도로 화살통에 꽂아 넣고 경훈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야, 야. 그냥 가자. 활 쐈으면 크일 날 뻔했어.”
     “그, 그래. 가자.”
     “루카, 이리와!”
     캉캉!
     우리는 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신속하게 숲에서 빠져나왔다.
     “결국엔 한 마리밖에 잡지 못했네.”
     “응.”
     힘없이 오솔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을 때였다. 수풀엣 부스럭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놀 떼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르르…….
     놀 떼를 본 루카가 자세를 낮추고 낮게 목을 울렸다. 안 그래도 오우거 때문에 트롤을 잡지 못 했는데 잘됐군. 너희가 우리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야겠어.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며 말했다.
     ‘경훈아, 저 똥개들이랃 잡자.“
     안 그래도 오우거 때문에 잔뜩 화가 나 있었는데 앞을 가로막는 똥개들을 보자 속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왕왕!
     갑자기 짖기 시작하는 루카. 아직 어린 늑대지만, 기세만큼은 앞에 서 있는 똥개자식들보다 훨씬 거대했다. 전보다 더욱 늑대 같이 행동하는 루카.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새하얀 이빨을 드러낸 채 놀 떼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활시위에 걸었다.
     파워 샷으로 깔끔하게 처리하길 마음먹은 나는 왼팔을 뻗어 왼팔을 축으로 오른발을 뒤로 뺐다. 그리곤 활시위를 잡고 있는 오른팔의 어깨를 뒤로 뺐다. 완벽하게 잡힌 파워 샷 자세.
     “파워 샷!”
     터엉!
     푸악!
     창과도 같은 커다란 화살이 놀 떼에게 날아가 선두로 서 있는 놀에게 꽂히자, 뒤에 있던 놀들은 볼링 핀처럼 와르르 뒤로 넘어갔다.
     “허얼. 이건 사기야.”
     곁에서 지켜보던 경훈이 입을 열었다. 그때 지켜보던 루카가 쓰러진 놀에게 다가가 목덜미를 물고 힘껏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지살처럼 놀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리곤 고기를 찢듯이 고개를 마구 흔드는 루카. 목덜미가 찢어진 놀은 그대로 죽어버렸다.
     그때 쓰러졌던 놀들이 일어나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뭐 처음부터 떼라고 해봤자 예닐곱 마리였으니, 서너 마라의 놀들만 남은 것이다.
     나는 화살을 하나 더 꺼내들었다.
     “패스트 워커!”
     경훈이 외치며 뒷걸음질하는 놀들에게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순식간에 놀에게 접근한 경훈이 놀을 쥐어 패기 시작했다.
     “호오, 그냥 무식하게 때려 패는구나!”
     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허공을 가르며 한 마리 놀의 대가리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꽂혔고, 화살을 맞은 놀의 대가리가 땅에 처박혔다.
     전보다 신속하게 몬스터를 잡는 루카.
     내가 보기엔 조그만 강아지 같은데, 벌써부터 늑대의 습성이 나타났다. 뭔가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남은 놀을 모조리 해치운 루카와 경훈. 나는 화살을 회수하기 위해 서서히 사라져가는 놀들의 시체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 이 아템은 또 뭐냐?”
     [모닝스타(매직)]
     설명“ 우아한 이름과는 상관없이 무지막지하게 무식한 둔기. 철구 끝에 강철로 만든 가시가 돋안 있다. 맞으면 매우 아플것 같다.
     최소 공격력 50증가
     최대 공격력 400증가
     효과. 1크레스 마법 매직 미사실 발동.
     내구력 80/80
     “또 매직급 아이템이 떴는데?”
     “어디?”
     가까이 다가와 아이템 옵션을 보는 경훈. 효과르 보더니 어이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 같은 아이템이라도 아이템 등급에 따라 효과가 다르구나. 근데 이런 둔기에 매직 미사일이라니, 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다.”
     “나도 그런 것 같아.”
     잠깐. 둔기를 사용하는 녀석이 우리 일행 중에 한 명 있다. 메이스를 사용하는 혁. 혁이 모닝스타를 마다할 리 없다. 주면 좋다고 펄쩍펄쩍 뛰겠지? 게다가 마법발동 효과까지 있으니 더욱 좋아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한 나는 경훈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모닝스타 혁이 주는 건 어때?”
     “오, 나도 그 생각했는데. 그 자식 무지 좋아하겠다.”
     “그렇지?”
     나는 모닝스타를 아이템 창에 던져 넣었다. 구리반지는 경훈이 가지고 있고. 이건 뭐 사냥하러 왔다가 혁이 아이템만 구한 것 같았다.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 마신 경훈이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마을로 돌아가자.“
     “그러자, 애들이 기다리겠다. 루카, 이리와!”
     캉캉!
     꼬리를 흔들며 뒤따라오는 루카. 나는 활을 등에 메고 루카를 안아 들었다.
     오솔길을 따라 걷자 초보자 사냥터가 나왔고 금세 아리스 노아에 도착했다. 생명의 나무 근처에는 엘프 유저가 수없이 많았다.
     오수에서 낚시를 하는 유저, 닭살을 떨며 솔로들을 염장 지르는 유저 등 세인트 모닝 못지않게 활기찼다.
     나는 경훈과 함께 쉼터로 향했다. 물론 아이템 창에 활과 화살을 숨겨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쉼터는 나무로 만든 작은 집같이 생겼는데, 지붕과 그 지붕을 받쳐주는 네 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늘 안에 여러 개의 벤치가 있었다.
     쉼터에 도착한 우리는 벤치에 앉아 있는 강찬, 혁, 티아, 티아의 친구들 그리고 티아의 남자친구로 보이는 녀석을 볼 수 있었다. 우리를 본 강찬이 반갑게 맞으며 입을 열었다.
     “오, 레드, 데시카! 어디 갔다 오는 거야?”
     “그냥 밖에 좀 둘러보고 왔어.”
     경훈이 강찬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이템 창을 열어 구리반지를 꺼내더니 혁에게 건데주었다. 그러자 반지를 건네받은 혁이 입을 열었다.
     “음? 이게 뭐냐?”
     “그냥 더 주려고 구해왔다.”
     “오, 매직급 아이템이네? 이야, 실드! 좋아.”
     손가락에 반지를 끼며 좋아하는 혁. 이버에 더 좋게 해주마. 나는 혁의 옆자리에 앉아 아이템 창을 열고, 혁에게 말했다.
     “너, 메이스 극 쓸 만하냐?”
     “아직까진, 왜?”
     “그 메이스이제 처분해.”
     “뭐? 무슨 소리야, 난 무기가 이것밖에 없는데.”
     갑자기 흥분하는 혁. 나는 아이템 창에서 모닝스타를 꺼내 혁에게 건네주었다. 모닝스타를 건내받은 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입이 쩍 벌어졌다.
     입 좀 다아라. 보기 흉하다.
     “매, 매직급 모닝스타? 마법발동 효과까지 있는 거잖아? 뭐야, 니들 이거 구하려고 여태까지 돌아다닌 거였어?”
     “그래. 너 인마, 너무 약해서 사냥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더라. 그래서 아이템이라도 좋은 거 쓰라고 주는 거야.”
     “으… 고맙다.”
     기다란 벤치가 사각형으로 서로 마주보게끔 배치되어 있느 우리의 자리.
     한 자리에는 나와 혁, 강찬, 경훈이 앉아 있었고, 다른 자리에는 티아의 친구인 노아와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엘프가 앉아있었다. 또 다른 벤치에는 티아와 잘생긴 엘프 유저가 앉아 있었다.
     나는 티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티아는 초록색 로브를 벗고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치마가 무지 짧은 편이었다.
     티아의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뭔가 미안해하는 것 같은 표정.
     나는 그런 티아의 시선을 외면하고 품에 안은 루카만 쓰다듬었다.
     ‘레드. 언제까지 아리스 노아에 머물 생각이야?“
     루카의 머리르 쓰다듬고 있던 나에게 말하는 혁.
     “음… 모르겠어. 나는 아직 더 둘러볼 게 많아.”
     “그래?”
     “응.”
     나의 대답에 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티아의 옆에 앉아 있던 남성 엘프 유저가 일어나 나에게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인사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로이체라고 합니다.”
     “레드 파운입니다.”
     걸어오는 인사를 피할 수 없는 나는 그냥 악수를 하며 짧게 대답했다. 로이체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티아가 신세를 많이 졌다면서요?”
     “예? 그다지.”
     “그런가요?”
     나는 일부러 짤막하게 대답했다. 갓 앉지 왜 말을 거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
     그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자식이 티아의 남자친구라고 생각하니 왠지 상대하기가 싫었다.
     악수를 하곤 다시 티아의 옆에 앉는 로이체.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 레드, 어디 가게?”
     강찬과 툭툭 치고 놀던 경훈이 자리에서 일어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경훈의 말을 무시한 채 쉼터에서 빠져나왔다. 아리스 노아의 중앙에 있는 생명의 나무.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커다란 호수.
     나는 루카를 바닥에 내려두고 근처의 작은 돌맹이를 하나 주워 호수에 던졌다. 어릴 때 물가에서 돌맹이를 던지면서 자주 놀았는데, 세릴리아 월드에서 다시 물가에 돌맹이를 던질 줄은 몰랐다.
     엘프의 사냥방법을 관찰하기 위해 왔는데, 막 좋아학 된 여자와 그 여자의 남자친구처럼 보이는 녀석을 질투하다니.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한참동안 호숫가에 앉아 낚시를 하는 엘프 유저들을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요! 레드. 여깃 뭐해?”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훈이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호수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쉼터에서 놀지. 뭐 할 왔어?”
     “그냥. 멍청한 친구 놈이 걱정 돼서 왔다.”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경훈. 내 옆에 털썩 주저앉은 경훈이 다시 말하기 시작해싸.
     “나랑 강찬이랑 혁이는 게임시간을 내일 아침에 마을 귀한 스크롤로 세인트 모닝에 갈 거야. 너는?”
     “나는 좀 더 머물다 갈 생각이다. 아직 엘프의 사냥법에 대해 연구도 못 했어… 그리고 아리스 노아에서 떠나기 전에 꼭 내가 찾아야 할 게 있어서.”
     “그래? 그럼 내일 가지 않겠다는 말이군그래.”
     나의 대답에 경훈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빙긋 웃던 경훈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잠깐. 꼭 찾아야 할 게 혹시…….”
     “티, 티아는 아니야!”
     “누가 뭐래?”
     이런 반응이 나올 거란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경훈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제5장   정령 계약 퀴스트

     다음날.
     강찬, 경훈, 혁은 수도 세인트 모닝으로 돌아갈 준비를 끝내고 기념품(엘프들의 수공예품)을 구입하고 생명의 나무 앞 광장에 모였다.
     나는 티아, 티아의 친구들과 함께 이제 세인트 모닝으로 떠나는 녀석들에게 인사할 준비를 했다.
     뭐 준비라고 해봤자 앞에서 손 흔드는 일밖에 없다.
     “레드. 적당히 놀다가 와.”
     “응. 그래야지.”
     강찬의 말에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혁이 녀석은 모닝스타를 들고 실실 웃고 있었고 경훈은 연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 막상 헤어리져 하니 뭔가 씁쓸했다.
     “티아 씨.”
     “네?”
     “언제 한번 세인트 모닝에 또 놀러오세요! 그땐 혼자 오지 마시고.”
     “음?”
     경훈이 웃으며 말했다. 티아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곁에서 빙긋 웃고 있던 강찬이 세인트 모닝 귀한 스크롤을 꺼내들고 외쳤다.
     “갑니다! 워프!”
     부욱.
     강찬, 경훈, 혁이 새하얀 빛에 휩싸이더니 이내 모습을 감춰버렸다. 나는 세 명이 사라진 곳을 빤히 보며 씁쓸히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친구들고 갔으니 엘프들의 사냥법을 자세히 관찰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화살의 개수는 100개. 평범한 화살은 활의 크기 때문에 쓸 수가 없다.
     메신저 창을 열자 친구목록과 함께 쪽지 창이 보였다. 나는 아이템 쪽지 창을 열어 화살을 올ㄹ두고 머릿속으로 경훈에게 보낼 쪽지 내용을 떠올렸다. 그러자 쪽지 창에 내가 생각하는 내용이 한자씩 적히기 시작했다.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경훈아, 잘 도착했지? 부탁 하나만 하자. 이 화살, 아세른에게 주면서 이런 화살을 되는대로 많이 만들어 달라고 전해주라. 돈은 낸다고. 그럼 이만 줄일게.’
     다 쓴 쪽지를 막 보내려던 때였다.
     “레드 오빠.”
     “응?”
     밝은 갈색의 긴 생머리를 풀어헤친 티아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짧게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나한테 화났어?”
     “응? 무슨 화?”
     “아니… 그때 무기점 앞에서…….”
     “아, 아. 그건 괜찮아. 설마 내가 그런 걸로 화났을까 봐 그러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 그럼 나는 사냥터에서 엘프들이 어떻게 사냥하는지 관찰해야겠다.”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는 순간 티아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응?”
     “이따 붉은 달이 뜰 때쯤에 생명의 나무에서 무도회가 열리는데…….”
     “무도회?”
     내가 묻자 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티아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이 보이는 데 내 착각인 걸까? 아무튼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가, 같이 가지 않을래?”
     갑자기 무도회라니. 뭐 그래도 티아가 가자니까 가는 수밖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응. 그래, 갈게.”
     나는 나지막이 생긋 웃는 티아의 얼굴을 보곤 뒤돌아서 사냥터 밖으로 빠져나왔다.
                   *    *     *
     밝은 갈색의 긴 생머리, 우윳빛 피부. 그리고 에메랄드를 박아 넣은 것 같은 초록색 눈동자와 오똑한 코,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진 여성 엘프 유저가 마을 밖으로 나가는 인간 유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엘프 유저의 얼굴이 알게 모르게 붉게 달아올랐다. 곁에서 지켜보던 분홍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유저가 입을 열었다.
     “티아, 얼굴 빨개졌다?”
     “으, 응? 뭐가?”
     “얼굴 빨개졌다고.”
     “맞아.”
     티아에게 집중공격(?)을 하는 두 친구.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던 유저가 입을 열었다.
     “너 로이체 오빠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응?”
     “그 오빠도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둘이 그렇게 오래 다녔으면서 여태까지 안 사귄 게 신기하다니까.”
     유저의 말에 티아가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세인트 모닝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로이체 오빠 볼 때마다 막 설레고 그랬는데, 지금은 별로 그런 게 없어…….”
     “레드 파운이라고 그랬었나?”
     “응.”
     “키도 작도 얼굴도 평범하고 허약해 보이는데 뭐가 좋다고 그래 차라리 로이체 오빠가 훨씬 났다. 키도 크지, 잘생겼지, 또 강하잖아. 그리고……”
     티아가 친구가 주저리주저리 말을 하고 있었지만, 티아의 시선은 아리스 노아의 입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을 밖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티아가 입을 열었다.
     “우리 무도회 준비하자. 아리스, 노아.”
     “응.”
     “뭐야, 내가 한 말 듣지 않은 거야?”
     “노아, 그만해.”
     티아가 째려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 노아와 아리스, 노아는 생명의 나무 뒤쪽에 위치한 의류점으로 향했다.
     같은 시간, 레드는 커다란 나무의 튼튼한 가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오크를 사냥하고 있는 엘프 유저들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에 남을 편하게 해주는 까만 눈동자가 루비를 박아 넣은 것 같은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고, 평소와 달리 매우 차가운 눈빛이었다.
     “와… 저렇게 빠른 몸놀림으로 사냥을 하는구나.”
     오크를 유인하고 재빨리 뛰어올라 근처의 나무를 딛고 오크에게 활을 쏘는 엘프.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오크의 목에 꽂혔고 땅에 착지한 엘프 유저는 재빨리 뒤로 빠져 화살 한 발을 더 쏘았다. 화살은 오크이 이마에 꽂혔고 오크는 그대로 쓰러졌다. 레벨업을 했는지 새하얀 빛이 엘프 유저의 몸을 감싼 뒤 사라졌다.
     “호오.”
     엘프의 사냥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빠른 몸놀림을 이용해 적과의 거리를 둔다거나 빠른 반사 신경으로 적의 공격을 피한다.
     엘프 캐릭터는 인간 캐릭터보다 시력, 청각이 발달되어 있었다. 물론 인간 캐릭터가 궁수일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시력 같은 경우 헌터 아이(또는 적안)를 쓰게 되면 엘프들보다 시력이 조금 더 좋아지게 되고, 청각 같은 경우 엘프보다 약간 뒤처지지만 다른 인간들과는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엘프 유저의 사냥법을 지켜보던 현성이 피식 웃었다.
     “음. 생각했던 것보다 단순하네. 역시 홈페이지에 있는 것과 별반 다른 게 없군.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고레벨 유저들의 사냥터에 가볼까?”
     현성은 퀵 스텝을 걸고 근처의 나뭇가지를 향해 뛰었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나뭇가지를 딛고 트롤 사냥터로 온 우리는 사냥터를 질주하는 엘프 유저를 볼 수 있었다. 손에 단검을 쥐고 퀵 스텝을 건 레드는 엘프 유저의 뒤를 밟았다.
     엘프 유저는 화살 두 개를 꺼내들더니 지면을 박차고 펄쩍 뛰어올랐다. 나는 근처의 나무에 몸을 숨긴 채 엘프 유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    *     *
     나는 한쪽 팔에 루카를 안아든 채 트롤을 사냥하고 있는 엘프 유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루카도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았다.
     엘프 유저는 트롤의 뒤통수에 활을 쏘았다. 그러자 누런 침을 질질 흘리던 트롤이 괴성을 지르며 엘프 유저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프 유저의 빠른 몸놀림을 따라잡기엔 턱없이 모자란 속도였다.
     엘프 유저는 재빨리 뒤로 빠짐과 동시에 화살 한 발을 더 쏘고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엘프 유저가 쏜 화살은 트롤의 한쪽 눈을 궤뚫었고 화사을 맞은 트롤은 포효를 하기 시작했다.
     쿠오오오!
     엘프 유저는 지면을 박차고 뛰어롤라 낮은 나무의 굵은 나뭇가지를 한 손으로 잡고 허리를 안으로 접어 한 바퀴 돈 뒤, 그 위에 앉았다. 전광석화와 같은 솜씨였다.
     “우와…….”
     엘프의 몸놀림을 본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까 오크를 상대하던 엘프 유저와는 다른, 더욱 더 안정된 움직임이었다.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은 엘프 유저는 다가오는 트롤에게 화사를 마구 쏘기 시작했다.
     “더블 샷!”
     쐐애애액.
     파파팍!
     두 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트롤의 이마에 꽂혔다. 트롤이 괴성을 지르며 이마에 꽂힌 화살을 뽑아내자 화살촉과 함께 뻘건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트롤의 이마는 말도 안 돼는 재생력으로 아물기 시작했으나, 미처 아물기도 전에 엘프 유저가 쏜 화살이 다시 이마에 박혔다.
     상처 위에 화살이 꽂히자 트롤이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근처의 바위를 집어 들어 엘프 유저에게 던졌지만, 바위는 엘프 유저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 아래로 떨어져 데굴데굴 구를 분, 엘프 유저를 맞추지 못했다.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린 엘프 유저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었다. 활시위를 강하게 당기기 시작하는 것이 아무래도 ‘파워 샷’을 쏠 것 같았다.
     엘프 유저의 팔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엘프 유저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트롤을 보고 있었다.
     “파워 샷!”
     푸슝.
     파악!
     화살은 활시위에서 벗어나 허공을 갈랐다. 뭔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던 화살이 트롤의 이마에 깊숙이 박혔다. 트롤은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우와…….”
     입에서 절로 나오는 감탄사. 나는 루카를 바닥에 내려놓고 아이템 창엣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화살통을 꺼냈다.
     “저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겠지? 뭐, 퀵 스텝을 걸어야 하겠지만.”
     나는 허리춤에 화살통을 차고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왼손에 쥐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단검은 아이템 창에 던져 넣었다. 좋아, 이제 붉은 달이 뜰 때까지 사냥을 하면 되겠군.
     나는 엘프 유저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스틸을 한다거나 사냥하는데 방해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리와, 루카!”
     캉캉!
     먼저, 사냥을 편하게 하려면 근처에 경쟁을 하는 유저가 없어야 한다. 나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오크 워리어들이 뭉쳐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곳. 바로 오크의 숲.
     나는 들뜬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일단, 제일 쉬운 사냥방법 1단계. ‘기습’이다.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걸고 근처의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사박.
     수풀이 흔들리면서 경갑으로 무장한 한 오크 워리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 없이 오크 워리어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활시위를 당긴 오른팔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오크 워리어도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난 상태였다. 오크 워리어가 쓰고 있는 투구를 꿰뚫으며 오크 워리어의 머리에 박힌 화살. 오크 워리어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버렸다.
     “나이스!”
     캉캉!
     “좋아, 루카. 잠자코 있어.”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나는 상체를 숙이고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수풀을 헤치고 나갔다. 취익! 하는 콧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꽤 많은 오크 워리어를 볼 수 있었다.
     ‘아차, 화살을 회수하는 걸 깜빡했네.’
     나는 허리춤에 달린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며 생각했다. 뭐, 저 녀석들을 다 잡고 회수를 해도 나쁠 것은 없다.
     현재 활시위에 걸린 화살을 제외한 화살의 개수는 97개. 하나는 경훈에게 아이템 쪽지로 보냈고, 다른 하나는 바닥에 꽂혀있다(죽은 오크 워리어의 시체가 사라졌으니, 바닥에 꽂혔을 것이다).
     나는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약간의 마나와 상당량의 스태미나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활시위는 전보다 더 팽팽하게 당겨져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뭉쳐 있는 오크 우리어들을 노렸다.
     한 마리가 날아가면서 다른 녀석들과 부딪혀 스플래쉬 데미지를 줄 수 있고, 또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떨리는 팔로 간신히 버티며 입을 열었다.
     “루카, 파워 샷을 쏘면 저 녀석들이 몽땅 넘어질 거야. 그 때 기습을 하자!”
     캉캉!
     “파워 샷!”
     푸슝.
     창과 같은 커다란 화살이 수풀을 헤치고 날아가 한 마라의 오크 워리어의 복부를 경갑 채로 꿰뚫었다. 오크 워리어와 함께 다른 오크 워리어들이 볼링 핀처럼 와르르 넘어지자 루카가 수풀을 가로지며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나도 질 수 없지.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수풀을 헤치며 달려갔다. 재빨리 화살 두 개를 꺼내 쓰러지지 않은 다른 오크 워리어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고,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오크 워리어의 복부와 목에 하나씩 꽂혔다.
     루카는 나름대로 두뇌 플레이를 했다. 경갑이 닿지 않는 발목 부분을 공격했고, 루카의 공격을 받은 오크 워리어는 맥없이 쓰러졌다. 물론 쓰러진 오크 워리어는 화살의 사제물이 되었다.
     “쿠에에에!”
     화살을 거내기도 전에 내게 다가오는 오크 워리어. 오크 워리어의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이 내 목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백스텝으로 오크 워러어의 공격을 피했다. 오크 워리어의 도는 허공을 갈랐다.
     지금 오크 워러어는 빈틈투성이.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치켜들고 외쳤다.
     “보우어택!”
     콰앙!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오크 워리어가 쓰고 있는 투구가 커다란 소음을 내며 부딪쳤다. 나는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고 재빨리 화살 하나를 꺼내 오크 워리어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오크 워리어의 안면에 꽂혔고 화살을 타고 붉은 피와 걸쭉한 뇌수가 흘러내렸다.
     “아이템은? 있군!”
     금으로 된 팔찌에 작은 루비가 촘촘히 박힌 액세서리. 나는 액세러리를 아이템 창에 재빨리 던져 넣고 주변을 살폈다. 나름 대로 생각이 있는지 오크 워리어들은 몸을 숨긴 상태.
     나는 퀵 스텝을 걸고 화살을 회수했다. 그만큼 여유가 있는 것이다. 쏘았던 화살을 전부 회수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루카, 이 녀석들 냄새를 맡아봐.”
     캉!
     고개를 들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하는 루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낮게 목청을 울리기 시작했다.
     근처에 몸을 숨겨봤자 루카의 후각과 나의 두 눈을 속일 수 없었다. 게다가 루카는 늑대인 만큼 청각이 발달되어 있었고, 나는 궁수인 만큼 시각이 발달되어 있다.
     부스럭.
     수풀엣 부스럭 소리가 나자 루카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루카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화살을 꺼내 활시위를 당겼다.
     ‘크크. 네깟 놈들이 머리를 굴러봐야 한계가 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수풀에 박혔다. 아니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오크 워리어에게 박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레베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업 표시와 함께 새하얀 빛줄기가 내 몸을 두세 바퀴 휘감더니 공중으로 치솟았다. 감소되었던 스태미나와 마나가 레벨업으로 이내 모두 회복되었다.
     왕왕!
     매섭게 짖으며 수풀 사이로 몸을 날린 루카.
     왕왕! 왕왕!
     수풀 밖에선 루카가 짖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려왔다. 금세 수풀 안으로 돌어오는 루카와 함께 오크 워리어 세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하, 유이을 하러 들어갔다 나온 거군. 나름대로 머리를 쓴 루카. 나는 재빨리 화살 두 개를 꺼내들어 루카를 향해 선두로 달려오는 오크 워리어에게 더블 샷을 쏘았다.
     오크 워리어의 안면에 꽂힌 커다란 두 개의 화살. 오크 워리어는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내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던 루카가 재빠리 달려가 다른 한 마리의 오크 워리어의 주위를 맴돌더니 재빨리 몸을 날려 발목을 물고 악어가 먹이를 찢듯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촤르르르.
     벌건 피가 튀었고 루카는 오크 워리어의 피를 뒤집어썼다. 쓰러지는 오크 워리어와 내게로 달려오는 다른 한 마리의 오크 워리어. 나는 재빨리 백스텝으로 달려드는 오크 워리어와 거리를 두었다.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건 채 키가 작은 나무의 굵은 가지를 잡고 힘껏 지면을 박찼다. 허리를 안으로 접자 나의 몸은 자연스럽게 나뭇가지를 잡은 손을 축으로 허공에 붕 뜨게 되었다.
     나뭇가지 위에 착지한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오크 워리어에게 쏘았다. 그러자 들고 있던 도끼로 화살을 쳐내는 오크 워리어.
     “오호. 이것도 칠 수 있으면 쳐 보… 으악!”
     화살을 쳐내고 재빨리 달려와 내가 앉은 나뭇가지를 들고 있던 도끼로 힘껏 내려치는 오크 워리어.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나뭇가지에서 떨어졌다.
     오크 워리어는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건들건들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난 전혀 두렵지 않았다.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있으니까.
     촤르르르!
     “쿠에엑!”
     루카의 공격에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오크 워리어.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화살을 들고 오크 워리어의 목에 힘껏 내리 꽂았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루카의 레벨이 증가했다는 메시지 창과 함께 내 눈에 포착된 것은 수풀 사이로 도망치는 아까 미처 처리하지 못한 오크 워리어였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화살을 꺼내 오크 워리어의 장따지를 맞쳤다.
     “꿰에엑!”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는 오크 워리어.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오크 워리어를 향해 빠르게 달렸다.
     “보우어택!”
     콰앙!
     “보우어택!”
     콰앙!
     “보우어태액!”
     콰앙!
     사력을 다해 내리치는 보우어택에 오크 워리어가 쓰고 있던 투구가 함몰되었고 피와 함께 뇌수가 쏟아져 나왔다. 뭐 시간이 지나면 시체와 함께 피가 깨끗이 사라져 버릴 테지만.
     “휴우. 생각보다 쉽게 끝냈어.”
     나는 화살을 회수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얻은 아이템의 옵션을 보지 못했군.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아까 얻은 팔찌를 꺼냈다.
     
     [하급 정령의 팔찌(매직)]
     내용: 금으로 만든 팔찌에 작은 루비가 촘촘히 박힌 예쁜 팔찌. 아이템의 이름처럼 하급 정령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방어 1
     마법방어 1
     효과. 정령 친화력 스탯 포인트 1 상승
     “응? 정령 친화력 스탯은 뭐지?”
     나는 팔찌의 옵션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스탯은 힘, 체력, 손재주, 민첩, 지력, 지혜, 행운 총 7개일 텐데, 정령 친화력 스탯이라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이템 창에 던져 놓었다. 정려을 쓰지 않는 나에게 필요한 아이템은 아닌 것 같아싸. 아, 그러고 보니 로시토가 말한 정령사의 캠프에 가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군.
     “루카, 이리와! 이제 다른 녀석들도 잡으로 가보자.”
     캉캉!
     루카가 짖으며 달려올 때였다. 미세한 진동과 함께 지면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달려오던 루카가 멈뭐서 목청을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쿠오오오!
     크르르…….
     “이 괴성은…….”
     쿠오오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트롤이었다.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번처럼 공포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새로 만든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성장한 루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화살 깃을 할시위에 걸고 힘껐당겼다. 파워 샷 자세를 취했고 트롤은 이쪽을 향해 누런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파워 샷!”
     푸슝.
     푸악!
     달려오던 트롤의 복부에 꽂힌 채 저만치 날아가는 화살. 물론 틀롤도 몸이 반으로 접힌 채 화살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왕앙!
     “잠깐! 가만있어, 루카!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트롤을 향해 내달렸다. 쓰러져 있던 트롤이 자리에서 일어나 복부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자 붉은 피가 왈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즉시 화살 하나를 꺼내 트롤의 상처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허공을 가르며 트롤의 상처 부위의 바로 위쪽에 박혔다.
     “이런, 백스텝!”
     트롤을 향해 달리던 나는 백스텝으로 다시 거리를 두었다. 고개를 돌려 루카를 보고 트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루카는 땅을 박차고 쏜살같이 트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상처 부위 바로 위에 박힌 화살를 뽑아들고 괴성을 지르는 트롤.
     상처 부위는 말도 안 되는 재생력으로 벌써 아물기 시작했다. 역시, 파워 샷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루카가 트롤을 도발했고 나는 또다시 화살 하나를 꺼내 파워 샷 자세를 잡았다.
     자신을 도발한 루카를 따라 질주하는 트롤. 하지만 루카를 잡기엔 역부족이다. 나는 힘껏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고, 화살은 틀로의 다리에 박혀 움직임을 봉했다.
     “나이스!”
     카오오!
     “더블 샷!”
     순식간에 화살 두 개를 뽑아든 나는 트롤을 향해 더블 샷을 쏘았다. 활시위를 벗어난 두 개의 화살은 트롤의 목과 머리에 박혔다. 나는 또다시 두 개의 화살을 꺼내 들었다.
     트롤에게 다가가 보우어택으로 머리를 찍어도 되지만, 트롤의 손아귀에 잡히면 그대로 끝장 날 것이다.
     오우거보다 훨씬 뒤처지는 힘이라지만 인간의 목을 기괴하게 비틀어 놓을 만한 힘을 가진 녀석이기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더블 샷!”
     두 개의 화살이 트롤의 두개골을 관통하자 많은 양의 경험치 획득과 함께 무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물론 아이템을 줍기 전 화살을 회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 요새 아이템이 잘 나오네. 어디 보자.”
     [투척용 창(매직)]
     내용: 일반적으로 창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것이다. 던지기 쉬운 투척용 창. 던진 후엔 다시 주워 쓰든지 해야 할 것이다.
     최소 공격력 50
     최대 공격력 80
     효과. 던질 경우 1클래스 마법 파이어 발동.
     내구력 30/30
     “투척용 창? 그냥 던지기만 하면 되는 건가?”
     내 화살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실히 다른 창. 우선 길이부터가 달랐다.
     내 화살보다 조금 더 긴 길이에 던지기 쉽도록 만들어진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 창.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등에 메고 투척용 창을 손에 들었다.
     “한번 던져보는 것도 괜찮겠지? 가자, 루카.”
     캉캉!
     사라지는 트롤의 시체를 맴돌던 루카가 나의 부름에 총알같이 달려왔다. 오크의 숲에서 조금 더 걷자 활을 들고 주변을 배회하는 오크 아처들을 볼 수 있었다.
     몬스터의 레벨은 보통의 오크들보단 높았지만, 실제로 맞붙는 다면 보통의 오크들에게 그냥 질 녀석들이다.
     이 녀석들의 레벨이 더 높은 이유는 단체로 기습공격을 하기 때문에 보통의 오크들보다 위험성이 더 높아서였다.
     하지만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기습을 하기 저에 들려오는 소리와 루카의 뛰어난 후각으로 다가오는 저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투척용 창을 세게 쥐었다. 루카는 몸을 잔뜩 숙인 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여덟 마리군.”
     여덟 마리의 오크 아처들이 숏 보우를 들고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나는 수풀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오크 아처들의 상황을 살폈다.
     지금은 다들 그저 정해진 루트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기습을 할 좋은 기회였다. 나는 투척용 창을 들어 그나마 제일 가까이에 있는 오크 아처에게 던졌다.
     던질 경우 1클래스 마법 파이어 발동.
     창날에 시뻘건 화염이 뒤덮였고 창은 오크 아처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하지만 오크 아처를 맡추기는커녕 근처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바닥에 꽂히는 투척용 창.
     나는 재빨리 수풀로 몸을 숨겼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투척용 창을 발견한 오크 아처들은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제길. 실패군.’
     나는 등에 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들고 화살 하나를 뽑아들었다. 현재 창이 날아온 방향을 감지하지 모산 녀석들은 잔뜩 긴장했을 것이다.
     나는 수풀 사이에서 활을 겨눈 채 방금 잡으려고 했던 오크 아처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오크 아처 같은 경우, 오크 워리어와 같이 경갑으로 무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수풀 밖으로 날아가 오크 아처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쿠엑!
     “취익! 저기서 화살이 날아왔다!”
     오크 아처들은 일제히 이곳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 채 루카에게 말했다.
     “가자.”
     캉캉!
     루카는 쏜살같이 수풀 밖으로 뛰쳐나가 오크 아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질세라, 퀵 스텝을 걸고 수풀 밖으로 빠져 나옴과 동시에 화살을 꺼내 당황한 오크 아처에게 화살을 쏘았다.
     명중! 화살은 오크 아처의 머리를 관통했고 오크 아처는 중시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나는 재빨리 내달려 보우어택으로 다른 오크 아처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오크 아처의 두개골이 부서졌는지 피와 함께 뇌수가 뿜어져 나왔다.
     활을 쏘기 위해 거리를 두는 오크아처들과 이미 나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한 마리의 오크 아처. 루카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오크 아처의 팔뚝을 문 채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꿰에게!
     오크 아처의 괴성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피와 살점.
     나는 망설임 없이 거리를 두고 있는 오크 아처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두 개의 화살을 꺼내들고 활시위를 당기며 외쳤다.
     “더블 샷!”
     쐐애액
     파악!
     두 개의 화사이 퍼지며 한 마리 오크 아처의 가슴팍에, 다른 오크 아처의 다리에 꽂혔다.
     다리에 화살을 맞은 오크 아처가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먼저 공격했던 오크 아처를 처리했는지 루카가 달려와 비명을 지르는 오크 아처의 목덜미를 물고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슈가가가각!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루카의 레벨업! 나는 메시지 창을 힐끗 보곤 화살 하나를 꺼내 마지막 남은 오크 아처의 머리에 활을 쏘았다. 이 녀석들은 도통 아이템을 뱉지 않는 거지였다. 그렇다고 돈을 뱉는 것도 아니었다. 마 그대로 ‘땅그지’였다.
     “이런, 거지같은 놈들. 아이템 하나를 안 뱉네.”
     나는 화살을 회수하며 투덜댔다.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했는지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마을로 돌아가야 할 것 같군. 화살을 모두 회수한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등에 메고 루카를 품에 안았다.
     왼쪽 팔로 루카를 안아들고 땅에 박힌 투척용 창을 뽑은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투척용 창과 활, 화사통을 던져 넣었다.
     “휴, 이제 아리스 노아로 가자.”
     캉캉!
                   *    *     *
     웅성웅성!
     “세 시간 후 생명의 나무 안에서 무도회가 열립니다!”
     “무도회에 참가하실 분들은 준비하세요!”
     아리스 노아 새영의 나무 앞 광장에서 엘프 유저들이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루카를 바닥에 내려놓고 아리스 노아를 쭉 둘러보기 시작했다.
     생명의 나무 뒤쪽에 위치한 잡화점. 잡화점은 의외로 컸다. 세이트 모닝의 벨터가 운영하는 잡화점과는 달리 규모가 큰 잡화점. 나는 잡화점의 나무로 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앗 이간 유저시군요.”
     “아, 예.”
     NPC의 ‘인간 유저시군요’라는 말 한 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이런 시선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고개를 푹숙인 채 물건을 즐비하게 진열해 놓은 진열대로 다가갔다.
     “앞으로 세 시간.”
     나는 혼자 주얼거리며 잡화물품을 쭉 둘러보기 시작했다. 세인트 모닝에 없는 나무로 조각한 여러 가지 잡화물품들. 이곳이 순식간에 내 남을 사로잡았다.
     ‘오, 여기서 뭔가를 만들어도 되겠다! 쿠션이나 만들어볼까?’
     나는 부드럽고 새하얀 가죽과 실, 바늘, 그리고 십자수 도구, 솜을 골라 값을 지불한 뒤 잡화점 안쪽에 놓인 탁자로 향했다.
     커다란 탁자에 둘러 앉아 잡화물품을 손질하는 유저들. 하나 같이 우윳빛 피부에 귀가 뽀족했다.
     나는 빈자리로 가 앉았다. 루카도 순순히 따라와 내 발 옆에 배를 깔고 엎드려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간만에 쿠션이나 만들어봐야겠군’
     나는 새로 산 도구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가죽을 접어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솜을 넣고 완전히 봉합을 해놓고, 십자수 도구를 이용해 새하얀 털을 가진 루카의 모습으로 수를 놓았다.
     십자수를 놓는 동안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꽤 부담스럽군.
     “인간 유저야.”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무시한 채 십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루카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흰 늑대로 십자수를 놓았고, 푹신한 쿠션 위에 완성한 십자수를 박았다.
     정사각형의 푹신한 가죽으로 된 쿠션. 그 위에 있는 루카를 닮은 늑대모양의 십자수가 귀여움을 한층 더했다.
     쿠션을 만드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아이템 창에 쿠션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자.”
     나의 말에 졸고 있던 루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잡화점에서 나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날이 지고 푸른 달과 함께 붉은 달이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슬슬 준비해야겠다. 근데 옷을 이렇게 입고 가도 되나?”
     형편없는 나의 복장. 세릴이아 월드를 처음 할 때부터 입었던 옷. 그리고 붉은 망토는 이제 색이 거의 바랬다.
     “이런 옷을 입고 무도회장에 가는 건 좀 아니겠지?”
     나는 혼잣말을 하며 떠들썩해진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엘프 유저들이 나름대로 옷을 쫙 빼입고 광장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확식히 세인트 모닝과는 다른게 예쁜 여성 유저들이 많았다. 뭐 나도 남자니까 예쁜 여자들에게 눈이 가는 건 당연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유저들을 둘러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왼쪽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벌어졌던 입이 금세 다물어지며,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흰색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드레스와같은 화려한 옷을 입은 티아. 묶어 올린 밝은 갈색 머리카락과 하장을 한 얼굴이 또다시 내 심장을 세차게 뛰게 했다.
     “오빠.”
     “응? 아, 안녕.”
     “왔구나.”
     “으, 응.”
     또다시 말을 더듬기 시작하는 나. 티아가 생긋 웃더니 나의 팔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에? 어, 어디 가는 거야?”
     “응. 그냥 와 보면 알아.”
     거의 끌려가다시피 오게 된 곳은 호수 근처에 위치한 의류점 앞이었다. 그곳엔 티아의 두 친구와 로이체가 있었다.
     내 시점에서 티아의 두 친구도 무지 예뻤지만, 티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뭐 다른 사람이 보더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 거슬리는 녀석이 있었다. 바로 롱체. 티아에게 끌려오면서 나는 알게 모르게 웃고 있었지만 로이체를 보는 순간 입가에 맴돌던 미소는 사라져버렸다.
     로이체는 갈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큰 키에 잘생긴 외모, 멋지게 차려입은 옷이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멋졌다. 나는 로이체를 보다가 나의 차림새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주눅이 들었다.
     “티아, 레드 씨도 같이 가는 거였어?”
     “응.”
     로이체의 말에 나의 표정은 싹 굳어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나는 의류점 안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미리 주문이라도 해놓았는지 새하얀 반팔 와이셔츠에 붉은 조끼, 그 위에 붉은 빵모자와 붉은 칠부 바지, 그리고 붉은 신발을 의류점 주인 NPC에게 받아 나에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거, 입어! 보니까 빨간색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미리 맞춰놨어. 음 사이즈가 맞을지 안 맞을지는 모르겠다. 작지는 않을거야.”
     나는 티아가 건네주는 옷을 받아들었다. 나는 티아에게 받은 옷을 두 팔로 든 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왜 안 입어? 맘에 안 들어?”
     “응? 아, 아니. 고마워서…….”
     “응. 히히. 얼른 가자 갈아입고 와. 곧 시작하겠다.”
     “응…….”
     의류점 안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탈의실. 나는 탈의실로 걸어가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티아가 쪼그리고 앉아 따라 들어온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과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구질구질한 옷을 벗고 티아가 준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아이템 차에 옷을 넣어두고 빵모자를 팔에 낀 채 탈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벌써 나왔네? 잘 어울린다!”
     “그, 그래?”
     루카를 쓰다듬던 티아가 다가와 내가 팔에 끼고 있던 빵모자를 꺼내 내 머리에 씌워 주었다. 그리곤 빤히 바라보는 티아. 나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티아는 또다시 나를 끌고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안에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예쁜 엘프 소녀와 붉은 빵모자를 뒤집어쓴 검은 머리카락과 차가운 붉은 눈동자를 가진 평범하게 생긴 인간 소년이 서 있었다.
     거울에 비친 엘프 소녀는 입가에 웃음이 번져 있었고 인간 소년은 알게 모르게 피식 웃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잘 어울리는 한 쌍. 하지만 그 둘이 어울려 보이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갑자기 거울에 비친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를 가진 엘프 청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 레드 씨. 잘 어울리네요.”
     “감사합니다.”
     로이체의 말에 나는 짧게 대답했다.
     “가자.”
     로이체는 버티는 티아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티아는 할 수 없다는 듯 말없이 로이체를 따라 나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티아. 왠지 잡아달라는 눈빛이었다.
     ‘왠지 잡아달라는 것 같은데. 아닌가? 뭐 내 착각일 수도 있겠다. 잘 어울리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뭐.’
     나는 혼자 속으로 말하며 로이체와 팅를 뒤따라 나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생명의 나무 앞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시야가 확보되어 마치 망원경으로 보는 것 같이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생명의 나무 아랫부분에 작은 문이 열리면서 유저들이 하나둘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생명의 나무를 보고 있을 때 티아의 친구 중 한 명이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티아가 잡아달라고 레드 씨에게 눈길을 주네요.”
     “네?”
     “어서 가서 잡으세요.”
     “…남자친구가 옆에 있잖아요.”
     나의 대답에 피식 웃던 티아의 친구가 입을 열었다.
     “생각이 너무 극단적이시네. 남자친구 아니니까, 어서 가서 잡으세요.”
     “하지만…….”
     “지금 놓치면 앞으로 다신 이런 기회가 없을 거예요.”
     나의 말문을 막으며 멀찍이 떨어지는 티아의 친구. 나는 믿어 보기로 했다. 앞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티아와 로이체. 나는 걸음 속도를 높여 티아에게 다가가 티아의 팔을 붙잡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가자.”
     나의 말에 티아의 얼굴은 활짝 피어 있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로이체가 티아를 보고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티아, 둘이 가.”
     “그래도 돼?”
     “응.”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로이체. 좀 전에는 강제로 끌고 나가다시피 했는데 지금은 왜 이러는 건지, 저 양반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티아의 손에 이끌려 생명의 나무로 향했다.
     생명의 나무 안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무지 넓었다. 속을 이렇게 파헤쳐 놨음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멀쩡히 살아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무도회가 벌써 시작했는지, 자리에 앉아 있던 유저들은 모두들 가운데로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날 밤, 무도회로 아리스 노아는 떠들썩했다.
     
                   *    *     *
     무도회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평소에 입던 옷으로 갚아입고 아리스 노아 쉼터의 벤치에 걸터앉았다.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세인트 모닝을 돌아가기 전에 찾아야 할 것의 반을 찾았다고 생각하니 그냥 가만히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끄응…….
     “왜 그래, 루카?”
     캉캉!
     “음?”
     꼬리를 세차게 흐들며 갑자기 짖기 시작하는 루카. 아무래도 놀아달라는 것 같았다. 나는 발로 루카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루카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 장난스럽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귀를 쫑긋 세운 루카는 꼬리를 연신 흔들고 있었다.
     “어쭈?”
     나는 루카를 두 팔로 번쩍 안아든 채 입을 열었다.
     “꼬리 안 아픈?”
     캉캉!
     대답이라도 하는 양 더욱 세차게 꼬리를 흔들며 짖는 루카. 나는 루카를 품에 안고 쉼터에서 나왔다.
     “야, 정령사의 캠프로 갈까?”
     “가자.”
     “좋아! 정령술사로 전직하는 거야!”
     나는 수미터에서 나오며 지나가는 두 유저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정령사의 캠프라…… 로시토가 언제 한번 말해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정령사의 캠프
     나는 정령사의 캠프로 향하는 두 유저의 뒤를 밟았다.
     생명의 나무 뒤쪽 잡화점을 지나 초록빛 잔디가 무성하게 자란 오솔길을 걸어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근처의 나무와 수풀색과 잘 어울리는 초록색 천막이 있었다.
     나름대로 크게 지어놓은 천막. 두 명의 유저가 천막 안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왜냐고? 여럿이 있으면 복잡하니까. 그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투덜대며 나오는 두 유저. 나는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물론 루카를 안아들고 숨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씨. 뭐 이래. 그냥 궁수나 하자.:
     “그래. 하급정령? 버려, 그냥.”
     ‘하급 정령?’
     투덜대며 정령사의 캠프에서 나가는 유저들. 나는 두 유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천막 안은 밝았고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젊은 엘프를 볼 수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가 푸른색 눈동자. 잘생긴 외모의 엘프 청년이었다.
     “음? 루니오스 카이샤? 당신,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왔나?”
     “예?”
     “루니오스 카이샤라면, 인간 중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친구 ‘로시토’의 소환수일 텐데?”
     내 품에 안긴 루카를 빤히 쳐다보며 말하는 엘프 청년. 엘프 청년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젊은 청년이 그 늙은 로시토의 친구라고?“
     “당신,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온 건가? 그리고 그 루니오스 카아샤는…….”
     “아, 예. 로시토의 일곱 번째 제자입니다.”
     “그렇군. 무슨 일로 온 건가?”
     나를 경계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신으로부터 하여금 남을 편하게 햊는 미소를 지으며 엘프 청년이 물었다.
     흠. 늙은 로시토의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젊어 보이는 엘프 청년.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패스. 나는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없을까요? 비록 궁수지만 그래도…….”
     나는 말끝을 흐리며 이름도 모르는 엘프 청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자 엘프 청년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령과 계약을 하고 싶은가?”
     “예.”
     “인간이라면 하급 정령과 계악을 하는 것도 힘들 텐데. 게다가 정령 친화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그래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그러자 엘프 청년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루니오스 카이샤를 받은 것을 보니 그만큼 많은 잠재력이 있다는 것.”
     붉은 매가 모자라서 루카를 준 것인데 무슨 잠재력?
     내가 고개를갸우뚱하고 있을 때, 엘프 청년이 흰색의 작은 조약돌을 내게 던져주며 입을 열었다.
     “그 돌의 옵션을 보게.”
     “음?”
     [하급 바람의 정령석]
     내용“ 바람의 하급 정령이 잠들어 있는 정령석. 정령을 깨월 계약을 할 수 있다.
     효과: 정령을 깨월 계약에 성공할 경우, 정령 친화력 포인트 5증가(정령 친화력이 없을 경우, 정령 친화력 스탯 추가:.
     “얼레?”
     하급 바람의 정령석이라. 나는 효과를 보고 피식 웃었다. 하지만 현재 나는 정령 친화력 스탯이 1포인트도 없다. 이 정령과 계약을 함으로써 새롭게 정령 친화력 스탯이 추가되는 것이군.
     효과를 보고 피식 웃자, 엘프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순한 성격을 가진 제일 계약하기 쉽다는 바람의 하급 정령이다. 먼저 그것과 계약을 하고 계약에 성공했을 시, 정령과 함께 오도록. 자, 그럼 나가보게.”
     “아, 예.”
     나는 손에 들린 조약돌을 움켜쥐고 천막에서 나왔다. 품에 안고 있던 루카를 바닥에 내려놓고 정령사의 캠프에서 빠져나와 생명의 나무 앞 광장으로 향했다.
     “1클래스 마법 파이어 효과 인챈트 된 활 팝니다!”
     “액세서리 다 삽니다! 급구요!”
     어쩌고저쩌고!
     웅성웅성!
     시끄럽게 떠는 유저들. 세인트 모닝이나 아리스 노아나 광장의 분위기는 같군. 나는 메신저 창을 열어 티아에게 대화신청을 했다.
     정령술사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무엇보다 타아의 목소리도 듣고 싶었다.
     [티아 젠 님께 대화를 요청합니다.]
     -응, 오빠!
     “티아. 잠깐 물어볼게 있어서 그러는데, 지금 어디야?”
     -의류점이지. 왜? 무슨 일인데?
     “시간 있어?”
     -응!
     ‘의류점에서 뭘 하는 걸까? 뭐 아무튼.’
     “그럼 생명의 나무 옆 호수에서 보자. 조약돌 쌓인 곳에서 기다릴게.”
     -응, 금방 갈게!
     나는 대화를 끊고 퀵 스텝을 걸었다. 그리곤 호수가로 재빨리 내달렸고 꼬리를 흔들고 있던 루카도 재빨리 나를 따라 달렸다. 티아보다 먼저 도착한 나는 조약돌을 주워 호수에 던졌다.
     첨벙!
     조약돌을 하나 더 집어 들려는 순간이었다.
     캉캉!
     “응?”
     루카가 짖었다. 나는 루카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던 티아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팔을 들어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이야?”
     “아, 이것 때문에 그러는데.”
     티아가 웃으며 물어올 때, 나는 작고 흰 조약돌첢 생긴 정령석을 보여주며 말했다. 정령석을 빤히 쳐다보던 티아가 입을 열었다.
     “아, 정령 계약 때문에 불렀구나. 정령과 계약을 하려면 일단 정령석에 봉인된 정령을 깨워야 해.”
     “그래? 어떻게 깨워야 하는데?”
     “자, 따라애.”
     “응.”
     티아의 말에 나는 짧게 대답했다. 티아는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바람을 관장하는 자여.”
     “바, 바람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을 맺고자 그대를 깊은 잠에서 깨우노니.”
     “그대와 계, 계약을 맺고자 그대를 깊은 잠에서 깨우노니.”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나 레드 파운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나 레드 파운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빠각.
     번쩍!
     어설픈 주문영창. 난생 처음 주문을 외워보는 나는 어설프게 소리쳤다. 그러자 정령석에 금이 가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상당량의 마나가 감소하면서 은은한 바람이 내 몸 주위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망토가 약한 바람에 펄럭이기 시작했고 이내 새하얀 털에 초록색 줄무늬를 가진 반투명한 작은 호랑이, 아니 호랑이라기봐 고양이에 가까운 작은 바람의 정령이 소환되었다.
     “후아암. 잘 잤다.”
     “서, 성공인가?”
     고개를 돌려 티아를 보며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시선을 하급 바람의 정령에게 고정시켰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던 하급 바람의 정령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었고 이내 입을 열었다.
     “나를 깨운 게 인가?”
     “그, 그렇다.”
     정령과 처음 대면하는 나였기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이상하게 입 꼬리가 자꾸만 올라왔다. 나는 들뜬 기분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계약을 했으면 해서.”
     “계약?”
     “응.”
     정령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루카와 같은 까만 눈망울을 가진 아기 호랑이와 같은, 아니 고양이처럼 생긴 바람의 정령이 말하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실프 하급 바람의 정령. 당신과 계약을 하겠습니다. 앞으로 불릴 제 이름을 지어주세요.”
     갑자기 존댓말을 하기 시작하는 실프 그냥 실프라고 부르기도 뭐해서 나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너는 이제부터 ‘백호’야.”
     “네, 마스터.”
     번쩍!
     [정령과의 계약에 서공했습니다. 상태 창에 정령 친화력 스탯이 추가됩니다. 바람의 정령 ‘백호’의 정보가 추가됩니다.]
     [클래스가 변경됩니다.]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클래스가 변경되었다는 메시지가 뜨게 되었다. 나는 즉시 상태 창을 열었다.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53
     생명력(HP). 620
     마나(MP). 450
     스태미나(SP). 1,000(배고픔 수치 10%/ 갈증 5%)
     힘 137
     체력 65
     민첩 159
     손재주 420
     지력 15
     지헤 15
     행운 15
     (정령 친화력 5)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210~320
     방어력 10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5
     바람(백호) Lv. 1. 친화력 100%
     [상세정보]
     상태 창이 크게 바뀐 것을 느낀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냥 레인저도 아닌 스피릿 레인저. 게다가 마나량은 50증가 되어 있었고, 백호의 정보도 추가 되어 있었다.
     나는 즉시 백호의 상세 정보를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다.
     [이름] 백호
     [속성] 바람
     [등급] 하급.
     [계약자] 레드 파운. 친화력 100%
     [Lv] 1
     생명력(HP) 200
     마나(MP) 레드 파운
     “얼레? 마나에 왜 내 이름이 있는 거지?”
     나는 상태 창을 전부 닫고 백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바닥에 배를 깔고 앉아 앞발을 혀로 햝고 얼굴을 문지르는 녀석. 나는 백호를 안아 들었다.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끄응…….
     “음?”
     갑자기 끙끙거리는 루카. 내 품에 안긴 백호를 보며 끙끙거리는 것 같았다. 이 녀석, 질투 하는 건가?
     “오빠, 루카가 질투한다. 너무 귀여워~.”
     “엥? 질투? 백호, 너 날 수 있지?” “네.”
     나의 물음에 대답하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백호. 정령이니까 가능한 거겠지.
     백호가 내 품에서 벗어나자 이제야 안심이 되는지 루카가 꼬리를 흔들며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품에 안았다.
     계약에 성공을 했으니 백호와 함께 정령사의 캠프로 가야겠군. 나는 옆에 있는 티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정령사의 캠프에 있는 엘프가 정령계약에 성공하면 와 보라고 했거든. 같이 갈래?”
     “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티아. 나는 티아와 함께 생명의 나무 뒤쪽에 있는 정령사의 캠프로 향했다.
                   *    *     *
     “이렇게 빨리 계약을 할 줄이야. 역시 루니오스 카이야를 받을만해.”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엘프 청년. 내 머리 위에 올라앉은 백호를 본 그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 그리고 한 가지 알려주지. 정령석에서 깨어난 정령은 주인과 마나를 공유한다. 정령의 레벨이 올라 등급이 올라가면 소환할 때 감소하는 마나의 양도 증가하지.”
     “등급?”
     나의 말에 엘프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령의 등급이 올라간다니, 그럼 하급에서 중급으로 중급에서 상급으로 올라간다는 말인가?
     엘프 청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당신 같은 경우는 정령 친화력 스탯이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정령석에 봉인되어 잠들어 있는 정령을 깨월 계약을 한 것이라네. 그리고 이 정령석은 구하기가 무지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군요.”
     “한 가지 더. 정령의 등급은 중급 그 뒤로 올라가지 않는다. 당신에게 준 특별한 정령석에서 태어난 녀석들이올릴 수 있는 레벨은 10. 그 이상 오르지 않는다. 즉, 레벨 10 때 중급 정령이 된다는 것. 그리고 계약자의 마나가 전부 바닥나면 정령은 정령계로 강제 역소환 된다.”
     나는 엘프 청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티아가 입을 열었다.
     “상급가지 못 가는구나.”
     “저기, 혹시 다른 정령석은 없나요? 바람은 있으니까. 물, 불, 땅이요.”
     티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엘프 청년에게 말했다. 글자 엘프 청년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정령석이라. 아쉽게도 내가 갖고 있던 건 바람의 정령석 하나뿐이네.”
     “그래요? 그럼 어디서 구할 수 있죠?”
     “퀘스트를 줄 테니 직접 돌아다녀 보는 것도 좋지.”
     [퀘스트]
     정령석을 구해라! 아리스 노아와 항구도시 티를 네티아를 경계선으로 퍼진 세 개의 정령석. 정령석을 찾아 잠든 정령을 깨워 계약에 성공하자!
     [땅의 정령석을 구한다.]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대답할 트을 주지 않고 떠버린 퀘스트 창.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엘프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엘프 청년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라면 구할 수 있겠지.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는 아리스 노아에서 벗어나면 나오는 도시일세.”
    “아, 아니. 저는 퀘스트를 받는다는 말은 아직 안 했는…….”
     “어차피 네 가지 원소 정령들과 게약을 할 생각 아니었나?”
     내 말을 뚝 끊으며 말하는 엘프 청년. 퀘스트라.
     뭐 까짓 거 그냥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넓은 곳에 널리 퍼져있는 작은 정령석을 무슨 수로 찾으라는 거지?
     내가 묻기도 전에 엘프 청년이 이상한 낡은 종이를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자, 이건 아리스 노아와 티르 네티아까지 표기 된 지도야. 지도를 펼쳐보면 당신의 위치와 정려석의 위치가 표시 되어 있을 것이니, 잘 찾아가면 되네.”
     나는 엘프 청년의 말을 들으며 지도를 펼쳐보았다. 정말로 커다란 지도에 아리스 노아의 풍경이 그대로 그려져 있었고, 현재 나의 위치는 정령사의 캠프에 작고 검은 점으로 찍혀 있었다.
     갈색으로 깜박이는 점이 아마도 땅의 정령석인 것 같았다. 현재 갈색 점이 깜빡이는 곳은 버려진 탄광이라고 적힌 광산이었다.
     지도상의 거리를 보니 꽤 멀었다. 지도를 쭉 보던 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지금 당장 출발하는 거다! 티아, 같이 갈래?”
     “응!”
     “잠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티아. 하지만 엘프 청년이 제동을 걸었다. 나와 티아의 시선은 엘프 청년에게 고정되었고 우리 둘의 시선을 받은 엘프 청년이 입을 열었다.
     “버려진 탄광 근처엔 드워프의 마을이 있다. 그곳에 잠시 들러 쉬었다 가는 것도 좋지. 지도엔 ‘바론’이라고 표기돼 있네.”
     나는 얼른 지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내가 볼 땐 바론 안에 버련진 탄광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지.
     어쨌든 나는 엘프 처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천막에서 나왔다. 갑자기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앞을 가로막는 티아. 나는 고개를 꺄우뚱했고 티아는 내 품에 안긴 루카를 가져가 자신의 품에 안아들었다.
     유난히 루카를 좋아하는 티아였기에 나는 그냥 피식 웃었다.
     
                   *    *     *
     나와 티아는 아리스 노아에서 나와 바론으로 향했고, 가끔 나타나는 오크 워리어들은 티아의 상급 정령에게 처차하게 죽어나갔다.
     “그러저나 언제 도착하지? 지금 이 지도로 봐서는 고작 요만큼밖에 못 왔어.”
     나는 지도를 티아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러자 티아는 지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네.”
     나는 즉시 내 머리 위에 앉은 백호에게 입을 열었다.
     “백호.”
     “네.”
     “어디 지름길 없어?”
     “지름…….”
     쿠오오오오~
     그때였다. 백호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트롤이 포효를 하며 달려왔다.
     “이런.”
     나는 무의식 적으로 왼쪽 허리춤에 오른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지금 활과 화살은 아이템 창에 들어 있다.
     나는 재빨리 퀵 스탭을 걸고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엘프인 티아는 원래 날렵했기 때문에 몸을 가볍게 오른쪽으로 날려 달려드는 트롤의 공격을 쉽게 피해낼 수 있었다.
     “대지를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을 맺은 나 티아 젠이 그대의 힘을 빌리고자 명하노니, 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라. 노에스!”
     티아의 외침에 대지가 파도치며 갈색의 긴 머리를 가진 반투명한 소년이 나타났다. 땅의 상급 정령인 노에스가 소환되는 즉시 계약자인 티아의 앞을 막아선 채 포효를 하는 트롤을 노려보았다.
     “그리스.”
     벌렁.
     꽈당!
     타아의 말 한 마디에 벌러덩 나자빠지는 트롤. 나자빠진 트롤이 일어서기도 전에 수십 개의 대지의 창이 트롤의 몸을 꿰뚫고 나왔다.
     하지만 트롤을 처리한 기쁨도 잠시, 서너 마리의 트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거, 산 너머 산이군. 나는 즉시 아이템 창을 열어 활과 화살통을 꺼내 들었다.
     화살을 허리춤에 차고 활을 왼손으로 강하게 움켜쥔 나는 백스텝을 이용해 재빨리 뒤로 빠져 티아의 앞을 막아섰다. 내 옆에 서 있는 노에스는 나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나는 즉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쿠오오오!
     캬오오!
     쿠오오!
     “티아, 일단 이놈들부터 처리하고 보자.”
     “응!”
     “퀵 스텝!‘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걸고 앞을 향해 내달렸다. 트롤들과 거리를 두고 멈춰선 나는 트롤을 향해 활시위를 강하게 당기며 외쳤다.
     “파워 샷!”
     푸슝.
     순간 약간의 마나가 감소하면서 날아가던 화살에 가속이 붙었다. 화살은 트롤의 복부에 박힌 채 저만치 날아갔다.
     “우와. 마스터가 궁수인줄은 몰랐어요.”
     “그래? 방금 전에 화살에 속도를 높인 게 너지?‘
     “네.”
     나는 피식 웃으며 화살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쓰러졌던 트롤이 괴성을 지르며 일어났고 복부에 박힌 화살을 뽑아냈다. 화살이 뽑히자 왈칵 쏟아지기 시작한 피. 하지만 피가 채 흐르기도 전에 또 하나의 화살이 상처 부위에 정확히 꽂혔다.
     백호 덕분에 명중률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을 느낀 나는 들뜬 상태로 화살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티아가 있는 곳에선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방심하고 있던 사이 화살이 복부에 박힌 트롤이 근처에 바위를 내 쪽으로 집어던졌다.
     바위를 피하려고 퀵 스텝을 걸려는 순간 반 구체의 반투명한 흰색의 막이 형성되어 내 앞을 가로막았고, 날아오던 바위는 반투명한 흰색의 막과 충돌해 산산조각이 난 실드와 함R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위험할 번했네요.” “고마워.”
     자신이 던지 바위가 날아가다 말고 허공에서 튕겨져 나간 것을 본 트롤이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을 때, 굵직한 화살은 트롤의 이마를 꿰뚫었다.
     쿠에에엑!
     빠드득!
     트롤의 비명소리와 함께 뭔가 부러지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틀롤의 비명소리가 들린 곳에 시선들 두었다. 키괴하게 꺾인 트롤의 허리. 허리가 뒤쪽으로 ‘ㄱ’자로 꺾인 트롤은 땅에 반쯤 묻혀 있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루카의 레벨이 증가했다는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타아게게 다가갔다.
     “루카가 레벨업을 했네. 뭐 아이템 나온 건 없지?” “응.”
     “티아, 미안한데 나 화살 좀 회수하고 와야겠다. 홠ㄹ이 얼마 없거든.”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등에 메며 말했다. 그러자 두 눈이 휘둥그레진 티아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 그게 활이야? 그리고 저 창 같은 것이 화살이고?‘
     “응. 잠시만 기다려 금방 회수하고 올게.”
     나는 놀란 티아를 뒤로한 채 트롤의 시체가 사라지자 땅에 박힌 화살을 뽑아 화살통에 집어넣었다.
     화살을 전부 회수한 나는 티아와 함께 바론으로 향했고 바론으로 향하는 동안 몬스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울창한 숲에서 나오자 온통 갈색의 바위로 이루어진 이상한 길로 오게 되었다.
     길을 걸으며 주변을 살폈지만, 몬스터라곤 한 마리도 없는 것 같았다.
     “후우. 그늘이 없으니까 너무 덥다.”
     이마에 땀이 맺힌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백호가 바람을 일으켜 주겠다고 했지만, 마나를 아껴야 했기 때문에 괜찮다고 해주었다.
     “티아, 이제 루카도 내려놓아야겠다. 덥지 않아?”
     “응. 좀 더워.”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티아가 루카를 땅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루카는 꼬리를 흔들며 내 뒤를 졸졸 따라오기 시작했다.
     “후우. 너무 덥다. 노에스, 돌아가. 바람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을 맺은 나 티아 젠이 그대의 힘을 빌릭자 명하노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실프!”
     “실프, 윈드.”
     티아의 말에 시원한 바람이 내 몸을 이리저리 훑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을 더 상쾌하게 해주었다. 나는 엘프 청년에게서 받은 지도를 꺼내들었다.
     “후우. 조금만 더 가면 바론이다. 근데 왜 하필이면 광산에 정령석이묻혀 있는 걸까?”
     “아무래도 그쪽에 뭔가 연관성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가?”
     나는 티아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꺄우뚱하며 대답했다.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우리는 더위를 느끼지 못했다. 한참을 더 걷자 가파른 언덕이 나왔고, 우리는 거의 기어오르다시피 언덕을 올랐다.
     언덕을 오르는 순간 내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그곳엔 110센터미터를 조금 넘기는 키에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는, 얼굴에 수염이 잔뜩 나 있는 드워프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신 무장을 하고 있었고, 손에는 들기조차 벅차 보이는 커다란 도끼를 쥐고 있었다.
     그들의 심각한 표정을 보자 이내 내 입가에서도 미소가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눈엔 근심이 가득했다.
     나는 드워프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
     잔뜩 긴장한 채 나를 경계하는 드워프들. 그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아, 인간이군요. 현제 바론은 공예품을 만들지 못 하고 있습니다. 위험하니까, 돌아가 주십시오.”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드워프. 나는 적안을 해제했다. 적안을 해제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차가운 이미지 때문이다. 그리고 드워프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저기 있는 광산이 ‘버려진 탄광’이라는 광산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지도를 보니까, 저곳에 정령석이 있는 것 같군요. 잠시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지도를 들어 드워프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지도를 보던 드워프들 중 한 명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광산엔 몬스터가 있습니다. 웬만해서 저의 드워프들이 상대할 수 있는 그런 몬스터인데, 그 녀석들을 지휘하고 있는 녀석이 있습니다.
     “지휘하고 있다니요?”
     말을 하다말고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드워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실프를 어깨에 앉힌 티아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엘프와 드워프는 서로 증오하진 않지만 사이가 좋지 않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물론 유저인 엘프들은 드워프들을 싫어한다거나 그런 건 없지만, NPC인 드워프들은 엘프를 경계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드워프가 타 종족에게 호의적이고 될 수 있는 한 남을 도와주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엘프 유저라고 하더라도 쉽게 호감도를 높일 수 있었다.
     “아, 저의 일행입니다. 피해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니 안심하세요. 그럼 저 광산에 들어가 봐도 되겠지요?”
     나의 물음에 드워프들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티아, 너는 여기 남아서 이 드워프들을 좀 지켜줘. 나는 과산에 들어가 봐야겠다. 가자, 루카.”
     캉캉!
     “혼자 괜찮겠어?”
     루카와 함께 달리려던 나는 자시 멈춰 대답했다.
     “루카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럼 드워프들 잘 지켜! 가자, 루카! 적안, 퀵 스텝!”
     나는 적안을 개안하고 퀵 스텝을 걸었다. 그리곤 재빨리 광산의 입구로 내달렸다. 내 뒤를 따라오던 루카가 신났는지, 나를 추월해 먼저 광산의 입구로 들어가 버렸다.
     광산의 입구에 들어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꽤 넓은 광산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내리막ㄱㄹ이 있었고 벽에 달린 횃불 덕분에 그다지 어둡진 않았다. 나는 광산의 안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없는 화살을 아껴야 하니까, 루카와 백호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겠군.’
     나는 손에 들린 지도를 두 번 접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내리 막길을 다 내려오자 탁한 공기가 느껴졌다.
     “후우. 몬스터랃 나오려는 건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쟈칼의 얼굴을 가진, 120~130센티미터를 조금 넘는 신장에 허술한 가죽으로 중요한 부분만 살짝 가린 채 몽둥이와 곡괭이, 낡은 검을 가진 서너 마리의 몬스터가 슬글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몬스터였기 때문에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몬스터인데. 뭐지?”
     “코볼트라는 몬서터에요. 대충 홉고블린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 그럼 루카 혼자서도 싹쓱이 할 수 있겠군. 루카, 쓸어!”
     왕왕!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카는 쏜살같이 코볼트들에게 다가갔다. 빠르게 달리던 루카가 방향을 틀어 오른쪽 벽으로 튀어올라 벽면을 딛고 한 마리 코볼트의 목 줄기를 물었다.
     코볼트의 목 줄기를 문 루카는 재빨리 몸을 회전시켰고 코볼트의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코볼트 한 마리를 처치한 쿠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남은 코볼트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빨을 드러낸 채 낮게 목을 울리는 루카의 꼬리는 빳빳하게 세워져 있었다.
     크르르…….
     그때, 몽둥이를 들고 있던 코볼트가 루카에게 재빨리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몽둥이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 루카는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허공으로 뛰어오른 루카는 직선으로 내려오며 코볼트의 뒷목을 물고 땅으로 착지했다. 코볼트는 자연스레 몸이 앞으로 고구라졌고 코볼트의 목 줄기를 물고 있던 루카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코볼트가 죽은 것을 확인한 루카는 물고 있던 목 줄기에서 입을 떼고 혀로 주중이를 핥았다. 남은 두 마라의 코볼트가 전의를 상실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등에 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손에 쥐었고 화살 하나를 꺼내 도주하고 있는 코볼트 중 한 마리를 향해 활시우리르 당겼다.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달아나던 코볼트의 가슴팍에 박힌 채 저만치 날아갔고, 다른 코볼트는 루카의 경험치가 되었다.
     “이야, 루카 상당히 강해졌는데? 아직 새끼인데도 저렇게 억세면 다 크면 뭐가 되는 거지? 괴물?”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화살을 회수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화살을 회수한 나는 다시 광산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투를 할 때와는 영 딴판이 되는 루카.
     루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캉캉 짖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응시했다.
     “놀과 코볼트 무리가 있네. 놀은 한 마리에요.”
     “그래? 먼저 놀부터 처리한 다음에 나머지는 루카에게 맡겨야겠어.”
     등에 멘 활을 쥔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놀과 코볼트 무리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간 나는 놀을 향해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약간의 마나와 상당량의 스태미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나는 놀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파워 샷!”
     푸슝.
     파악!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날아간 화살은 놀의 머리에 박힌 채 날아가 벽면에 박혔다. 벽걸이(?)가 된 놀의 모습을 본 코볼트들이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정령 백호(바람)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호오. 백호의 레벨이 증가했군. 루카, 남은 녀석들을 몽땅 슬어버려!”
     왕왕!
     루카는 쏜살같이 코볼트들에게 달려갔다. 루카가 코볼트들을 상대하고 있는 사이, 나는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지도를 꺼내 현재 위치를 살폈다.
     “흐음. 동굴 내부의 모습까진 안 나오는군.”
     나는 다시 지도를 접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소한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루카의 레벨업 메시지가 떴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코볼트 무리를 해치운 루카가 저 멀리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루카에게 다가가 벽에 깊숙이 박힌 화살을 꽉 움켜쥐었다.
     “이게 빠릴라나 모르겠네. 우라차!”
     나는 두 손으로 화살을 잡고 허리를 숙인 채 두 발을 벽에 붙이고 화살을 힘껏 잡아당겼다.
     “으그그극! 바져라!”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화살을 뽑아냈다. 하지만 화살이 뽑히면서 나는 그대로 벌렁 뒤집어졌다.
     이거 스타일 구기는군.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훍먼지를 털고 있을 대 백호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스터.”
     “응?”
     “이대로 쭉 전진하면 곧 내리막길이 나올 거예요.”
     “그래?”
     옷을 털던 나는 벽 모퉁이를 돌아 앞을 향했다. 광산의 끝으로 향하는 동안 한두 마리의 코볼트가 튀어나오긴 했지만, 보우어택으로 간단히 해치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물체가 있었으니, 놀 떼였다. 뭐 내 눈엔 직립보해을 하는 똥개로 보일 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가리는 하이에나의 대가리이지만.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백호, 윈드”
     “네, 마스터.”
     예닐곱 마리의 놀 주변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나가 조금씩 감소하는 게 느껴졌고 이내 강한 바람이 놀 떼의 정신을 분산시켜놓았다.
     나는 재빨리 한 마리의 놀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고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놀의 가슴파을 꿰뚫었다.
     “루카!”
     왕왕!
     강하게 불던 바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자 놀들은 어리둥절 한 표정을 지었다. 루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놀의 뱃가죽을 물었다.
     루카의 공격은 단순했다. 그저 물고 몸을 회전시키기. 다른 기술은 없는 것일까.
     나는 놀을 공격하는 루카를 보며 잠시 쓸데없는 생각에 바져들었다.
     “마스터, 놀 한 마리가 다가오고 있어요!”
     “아! 백스텝!”
     나는 재빨리 백스텝으로 거리를 벌려두었고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거내들었다. 나는 다가오는 놀에게 재빨리 화살 하나를 쏘아 보냈고 화살은 놀의 가슴팍에 박혀 저만히 날아갔다.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놀들에게 다가가 보우어택으로 닥치는 대로 때리기 시작했고 보우어택에 맞고 나가떨어진 녀석들은 모두 루카에게 죽임을 당했다.
     화살을 회수해 화살통에 담고 광산 안쪽으로 조금 더 걷자 이내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는 동안 내내 루카는 들릴 듯 말 듯 목청을 낮게 울렸다. 나는 귀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 채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위층가는 다르게 천장의 높이가 무지 높고 무척이나 넓은 광산 안에 코볼트, 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생긴 몬스터가 있었다.
     어찌 보면 올빼미처럼 생기기도 했지만 곰과도 비슷했다. 아마도 저 녀석이 광산의 출입을 제엏시키고 몬스터들을 지휘하는 녀석인 것 같았다.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아울 베어…….”
     “아울 베어?”
     “네.”
     “저 녀석의 이름인가?”
     “네, 마스터.”
     나는 백호의 말을 듣곤 아이템 창에서 투척용 창을 하나 꺼내들었다. 아울 베어. 큰 덩치에 흉측하게 생긴 몬스터가 이내 포효하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려 아울 베어에게 투척용 창을 던졌고 날아가던 투척용 창의 창날에 1클래스 마법 파이어가 발동되었다.
     운 좋게도 아울 베어의 어깨에 박힌 투척용 창. 그리고 발동된 마법이 상처를 태우기 시작했다.
     카오오오!
     "드디어 시작이군. 가자, 루카!“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걸었다. 그리곤 화살 두 개를 꺼내들고 어깨에 박힌 투척용 창을 뽑아낸 아울 베어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더블 샷!”
     두 개의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허공을 가르며 아울 베어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아울 베어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재빨리 화살을 피했다.
     “허억? 뭐지, 이건?”
     아울 베어는 괴성을 지르며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루카는 이빨을 드러낸 채 목청을 올렸고 이내 쏜살같이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울 베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루카를 노려보며 돌진했다. 루카와 아울 베어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고 거리가 좁혀지자 아울 베어는 날카로운 부리로 루카를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루카는 말도 안 되는 반사 신경으로 재빨리 몸을 날려 아울 베어의 부리를 피한 뒤, 땅에 착지함과 동시에 뛰어올라 아울 베어의 옆구리를 물었다.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는 루카!
     루카에게 공격당한 아울 베어의 옆구리에서 피가 튀었다. 찬스! 나는 이 찬스를 마다하지 않았다. 재빨리 화살 하나를 꺼내들어 아울 베어를 향해 활시위를 강하게 당겼다.
     상당량의 스태미나와 약간의 마나가 감소하는 것을 느낀 나는 루카가 아울 베어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한순간 기다리다가 당겼던 활시위를 놓으며 작게 말했다.
     “파워 샷.”
     푸슝.
     터엉!
     아울 베어의 어깨에 깊숙이 박힌 굵직한 화살. 화살이 박히자 아울 베어는 큰 덩치와는 안 어울리게 뒤로 나가떨어졌다.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아울 베어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 벽을 향해 내달리는 것이었다.
     루카는 나가떨어진 아울 베어에게 다가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상대를 도발 시켰다. 아울 베어가 괴성을 지르며 앞발을 휘둘렀지만, 아쉽게도 아울 베어의 앞발은 루카가 서 있는 곳에 닿지 않았다.
     카오!
     갑자기 벌떡 일어서는 아울 베어. 나는 화살 두 개를 꺼내들고 아울 베어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나는 활시위를 놓았다. 두 개의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아우 베어에게 빠른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본 아울 베어는 가볍게 몬을 날려 화살을 피해버렸다.
     “젠장. 저딴 식으로 화살을 피하면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는 불만을 토하며 화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울 베어는 루카의 도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놈의 두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흉측한 부리가 쫙 벌어지더니 또다시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광산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시끄러운 소음. 목에 마이크라도 달아 놓은 건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아울 베어.
     아울 베어의 앞발이 내 쪽으로 휘둘러지는 것을 본 나는 재빨리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는 동안 아울 베어의 날카로운 발톱이 내 가슴팍을 훑고 지나갔다.
     “커헉!”
     상당량의 생명력이 감소하는 것을 느낀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걸었다. 서둘러 아울 베어를 향해 활시위를 당긴 나는 달려드는 아울 베어에게 화살을 쏘았다.
     빗나가는 화살. 아니, 빗나간 것이 아니라 아울 베어가 피한 것이었다.
     뭐 이런 사기 몬스터가 이쓴 거지? 아울 베어의 날카로운 부리가 내 가슴팍을 향해 날아오자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땅에 착지하는 순간 아울 베어의 앞발이 내 복부를 향해 내리 꽂히는 것을 본 나는 재빨리 몸을 굴려 아울 베어의 공격을 피한 뒤 일어섰다. 그리곤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었다.
     ‘후우.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 화살을 쏘면 전부 피하고고.’
     “마스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혼자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백호가 말을 걸어왔고 나는 짧게 대답했다.
     백호가 실드로 막아주면 아울 베어가 가하는 한 번의 공격은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실드는 금이 갈 것이고 두 번째 공격에는 맥없이 깨져버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실드를 부수고 들어온 공격에 몸을 내주는 셈이 된다.
     아울 베어의 동작이 느리다면야 실드가 도움이 되겠지만, 여기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레벨이 낮은 백호의 실드는 강한 아울 베어의 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트롤이 던진 바위에도 금이 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잠시도 고민을 할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드는 아울 베어. 나는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고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재빨리 아울 베어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며 외쳤다.
     “백호 화살의 속도를 증가시켜줘!”
     “네, 마스터!”
     “윈드 애로우!”
     나는 급조한 스킬이름을 외치며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전보다 더 빠르게 아울 베어를 향해 날아갔다. 아울 베어가 화살을 간신히 피하긴 했지만 날카로운 화살촉이 뒷다리를 훑고 지나간 뒤였다.
     또다시 상처를 입고 괴성을 지르기 시작하는 아울 베어.
     괴성을 지르는 동안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에 화살을 피할 틈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재빨리 화살 하나를 쏘았다. 물론 백호의 도우을 받아 쏜 ‘윈드 애로우’였다.
     왼쪽 눈에 큼직한 화살이 박히자 아울 베어는 뒤집어져 발버둥치기 시작했고 루카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울 베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격하게 발버둥을 치는 아울 베어에게 루카는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나는 또다시 화살 하나를 꺼내 아울 베어에게 쏘았다. 복부에 박힌 화살. 복부에선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눈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며 일어서는 아물 베어는 남은 한쪽 눈으로 나를 꼭 죽이고 말겠다는 눈빛을 발산했다.
     그때 백호가 아울 베어의 주변에 바람을 일으키자 바람에 있던 흙먼지가 자욱하게 번졌다. 하지만 아울 베어는 흙먼지 따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화살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아울 베어에게 윈드 애로우를 쏘았다. 아울 베어는 재빨리 몸을 빼 화살을 쳐내고 내 쪽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앗! 젠장, 백스텝!”
     [삐. 마나가 모자랍니다. 포션이나 휴식으로 마나를 채울 것을 권장합니다.]
     “뭐라고?”
     마나가 모자란다는 메시지와 함께 아울 베어의 부리가 내 복부에 꽂혔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큰 고통에 나는 비명을 질렀고 상처 부위와 입에서 붉은 선혈이 흘렀다.
     순간 나는 사력을 다해 활을 휘둘러 아울 베어의 면상을 후려쳤다. 아울 베어의 대가리의 왼쪽이 약간 함몰되었고 아울 베어도 조금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고통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눈앞이 새하얗게 보였고 이마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복부에선 피가 여전히 흐르고 있었고, 거의 바닥난 생명력이 조금씩 감소하고 있었다.
     왕왕!
     루카가 매섭게 짖으며 비틀거리는 아울 베어에게 몸을 날렸다. 머리의 한쪽이 함몰된 아울 베어는 달려드는 루카의 공격을 피할 겨를이 없었다.
     루카는 아울 베어의 목 줄기를 물고 몸을 재빨리 회전시켰다. 피와 살점이 튀었고 아울 베어는 괴서을 지르며 쓰러졌다.
     쓰러져 비틀거리기 시작하는 아울 베어. 나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 화살 하나를 꺼내 들고 아울 베어에게 기어가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화살을 높이 치켜들고 아울 베어의 목을 찌르려 했지만, 팔에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맥없이 땅에 처박히는 화살과 팔. 나는 숨을 헐떡이며 다 죽어가는 아울 베어를 노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백호가 안 보이는군. 마나가 전부 바닥났을 때 강제 역소환 된 것 같아.’
     나는 아울 베어의 목을 물고 마구 흔드는 루카를 보았다.
     번쩍!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서항수 루니오스 캬이샤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루카의 레벨업 메시지와 함께 루카의 몸을 휘감는 새하얀 빛을 볼 수 있었다.
     새하얀 빛에 둘러싸여 점점 커지는 루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무언가에 질질 끌려가는 것을 느끼며…….
                   *    *     *
     “안정을 취해야해.”
     “이리 오게!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 하네.”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음. 아리스 노아 힐러집으로 이동한 건가…….’
     나는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와 소리치는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를 들으며 눈을 떴다.
     “오빠!”
     나는 고개를 돌려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티아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고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까만 벽돌로 된 집의 내부. 그리고 아까 보았던 드워프들.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뭐야 이건? 어떻게 된 거야? 분명 난 죽었을 텐데?”
     “아까 생명력이 너무 감소해서 데들리 상태까지 갔었어. 데들리 상태가 되면 정신을 잃게 되잖아. 부상도 무지 심했고. 기절한 오빠를 루카가 질질 끌고 나오더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친 나에게 티아가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일을 열었다.
     “그나저나 루카는?”
     “저~기.”
     손가랑로 루카를 가리키는 티아. 나와 눈이 마주친 루카는 엎드린 채 꼬리를 흔들었다. 제법 늑대의 모습을 갖추 루카. 이제 안고 다닐 수 없을 만큼 커진 상태였다.
     성견이 된 진돗개보다 조금 더 작은 크기라고 해야 할까나? 제법 늑대의 모습을 갖춘 루카를 보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루카, 이리와!”
     캉캉!
     루카는 여전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 쏜살같이 달려왔다. 나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차! 땅의 정령석!”
     내가 소리치자 방 안에 있던 드워프 중 한 명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혹시 이것을 말씀하신 겁니까?”
     드워프의 손바닥엔 작은 갈색의 조약돌처럼 생긴 정령석이 들려 있었다. 나는 정령석을 두 손으로 받으며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감사합이다!”
     “허허. 뭘요.”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한 이미지를 가진 드워프 남성들. 비록 NPC라지만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긴 좀 답답하다. 밖으로 나갔으면 좋겠어.”
     나의 말에 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들의 체형에 맞추어 지은 집이기 때문에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 말 듯했다.
     드워프들의 집에서 나온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완전 무장을 하고 있던 드워프들은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전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대장간으로 보이는 곳에서 연신 망치질소리가 들려왓다.
     “뭘 만드는 거지?”
     나는 대장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루카는 내 뒤를 성큼성큼 따라오기 시작했다.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심하게 만든 공예품과 무기들. 그것들을 본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활, 자네가 만든 건가?”
     다른 드워프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연륜이 느껴지는 한 드워프가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들고 말을 걸어왔다.“
     “아, 예. 그런데…….”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활이 휘어지는 부분에 붉은색으로 도색을 해 은색과 붉은색이 어우려진, 더욱 광택이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 거디가 붉은 가죽을 덧댄 활등에 손잡이 표시를 해 두었다.
     “내 이름은 로퍼라고 한다네.”
     “아, 예.”
     “감사의 표시로 활을 강화시켰네. 버려진 탄광의 몬스터를 처리해 주었으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이 활, 인간 치곤 꽤나 정교하게 만들었군.”
     “…….”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드워프가 건네주는 활을 받아 들었다. 활을 받아 들고 풀어진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건 나는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전보다 훨씬 더 나아진 활.
     역시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종족. 드워프였다.
     “저기, 죄송하지만 제 화살들은 어디에 있죠?”
     나는 활 끝에 걸린 활시위를 풀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로퍼가 화살통을 가져와 내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만든 것을 흉내 내서 만들어 봤는데, 한 번 보겠는가?”
     “예?”
     나에게 화살통을 건네준 로퍼가 자신의 뒤쪽에 쭉 세워진 화살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화살통엔 내가 만든 것과 똑같은 화살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
     “화살이 얼마 없는 것 같아서 좀 만들어 보았네. 이제 광산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로퍼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군. 나는 퀘스트 창을 열었다.
     [퀘스트]
     정령석을 구해라! 아리스 노아와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를 경계선으로 퍼진 세 개의 정령석. 정령석을 찾아 잠든 정령을 깨워 계약에 성공하자!
     [땅을 정령석을 구한다(완료).]
     [불의 정령석을 구한다.]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이제 불의 정령석을 찾으면 되는군. 완료 표시를 본 나는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로퍼가 만들어 준 여분의 화살통을 아이템 창에 넣어두고 먼저 쓰던 화살통을 허리춤에 차고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등에 멨다.
     이제 슬슬 불의 정령석을 찾으러 가야겠군. 내가 등을 돌리는 순간 로퍼가 말을 걸었다.
     “날도 저물고 있는데 하룻밤 묵고 가게나.”
     “예? 하지만…….”
     “그냥 가면 서운하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하는 로퍼.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쪽에서 푸른 달이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    *     *
     “후우. 이제 혼자서도 트롤을 상대할 수 있겠다.”
     허리춤에 달린 검갑에 검을 꽂아 넣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유저가 있었다.
     검붉은 색의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꽃미남 유저. 그는 강찬이었다.
     강찬은 쓰러진 트롤의 시체 위에 올라서 있었고 그 밑으로 경훈과 혁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던 혁이 입을 열었다.
     “야. 혼자 상대하는 게 아니라 다 내 보조마법 덕분이잖아.”
     “게다가 내 도움이 없었어봐라. 너 지금쯤 세인트 모닝에 가 있을 거다.”
     “그런가?”
     트롤의 시체 위에서 뛰어내림 강찬이 말했다. 트롤의 시체는 이내 사라졌고 반짝이는 아이템이 생겨났다.
     “이번에도 그지네? 돈 말고 다른 아이템 좀 뱉지. 더러운 새끼.”
     트롤이 사라진 곳에 시선을 둔 혁이 욕설을 했다. 혁은 모닝스타를 꽉 움켜쥐고 입을 열었다.
     “매직 미사일!”
     주문 영창이 이어지자 허공에 은빛 선들이 생겨났다.
     공긱가 웅축되고 응축된 은빛 선들이 금세 화살형상으로 변했다. 여덟 발의 매직 미사일이 혁의 모닝스타의 주변을 빠르게 맴돌기 시작했다.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는 혁을 보며 경훈이 말했다.
     “저 녀석, 모닝스타 생기고 나서 틈만 나면 매직 미사일 캣팅하네?‘
     “좋은가보지.”
     강찬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두워진 숲에 나뭇잎 사이로 푸른 달빛이 강찬과 경훈, 혁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주변을 빙둘러보던 강찬이 이내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가자.”
     “그래, 스크롤 꺼낸다.”
     강찬의 말에 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혁은 아이템 창에서 세인트 모닝 귀환 스크롤을 꺼내 북 찢었고, 새하얀 빛에 둘러싸인 세 명은 수도 세인트 모닝으로 이동했다.
     “님들아! 소드 엑스퍼트 중급 기사와 4클래스 마법사가 대련을 한다는데요!”
     “어디, 어디서요?!”
     “저기 저쪽! 분수대 광장 옆에!”
     “대련?”
     마을에 도착한 강찬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모닝스타를 어깨에 들쳐 멘 혁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 마법사란 직업이 무지 희귀할 텐데."
     “그러게. 한 번 보러 가자.”
     경훈이 맞장구쳤고, 강찬과 혁은 앞서 간 유저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두 유저를 크게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유저들.
     기사로 뵈는 유저는 은빛 플레이트 메일에 투구를 쓰고 있었고 손에는 바스타드 소드와 같은 커다란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기사의 맞은편에 서 있는 마법사는 덥수룩한 갈색의 더벅머리에 갈색의 동자를 가진 평범하게 생긴 외모를 하고 있었고 반무테안경을 끼고 갈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기사 유저와는 달리 평범한 차림새였다.
     외관으로는 기사 유저가 훨씬 강해 보였다. 수많은 유저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강찬과 혁과 경훈은 고개를 빼들고 두 유저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키로 본, 덩치로 보나, 차림새로 보나 기사가 이기는 쪽에 10실버 건다.”
     “그래도 4클래스 마법사라는데. 나는 마법사가 이기는 쪽에 10실버 건다.”
     혁이 주책 떨며 말하자 경훈이 대답했다. 강찬은 잠자코 기사 유저를 지켜보았다. 은빛 플레이트 메일을 멋지게 차려입은 기사 유저가 마법사 유저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시작하시겠습니까?”
     “그러지요.”
     은빛 플레이트 메일을 차려입은 기사 유저가 검을 고쳐 잡았다. 검신에는 아름답다 못해 신비한 푸른색의 오러가 맺혔다.
     마법사 유저는 그저 묵묵히 오러를 머금은 기사 유저의 장거믈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빠른 몸놀림을 자랑하며 기사 유저가 지면을 박찼고, 오러를 머금은 장검의 검신이 마법사 유저의 목을 찔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화염의 장벽이 내 앞의 적을 가로막으리라, 파이어윌!”
     갑자기 생겨난 거대한 불의 장벽을 본 기사 유저가 잠시 멈칫하더니 손에 쥔 장검을 휘둘러 불의 장벽을 갈랐다. 불의 장벽을 가르긴 했지만, 이미 마법사 유저가 시야에서 벗어난 후였다.
     “타오르는 화염구가 내 앞에 나타날 지어다, 파이어볼, 파이어볼, 파이어볼!”
     기사 유저는 고개를 돌려 마법을 캐스팅하는 마법사 유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마법사 유저의 몸 주변에는 타오르는 화염구가 시전자의 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마법사 유저가 손짓하자 타오르는 구체가 기염을 토해내며 기사 유저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기사 유저는 재빨리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화염구를 반으로 갈랐고, 그와 동시에 몸을 날려 마법사 유저를 향해 내달렸다.
     기사 유저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본 마법사 유저가 손짓하자 그의 몸을 맴돌던 두 개의 화염구가 동시에 기사 유저에게 날아갔다. 예상과는 달리 기사 유저가 밀리고 있었다.
     “쯧쯧.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지. 상대는 마법사인데 기사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원거리에 있으니까 기사가 밀리는 겆, 근거리에 있어봐!”
     “근거리 결투를 할 수 없으니까 하는 말이다. 멍청아.”
     경훈의 말에 혁이 반발했지만, 겨정적인 경훈의 한마디에 혁은 잠자코 기사와 마법사 유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날을 겨우 피해내고, 열여덟 발의 매직 미사일 중 두어 개만 쳐낸 뒤 몸을 내준 기사 유저는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물론 지친 것은 마법사 유저도 마찬가지였다. 상당량의 마나가 감소되어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마법사 유저가 방심을 한 사이 기사 유저가 오러를 머금은 장검을 휘둘러 마법사 유저의 가슴팍을 베었다. 하지만 마법사 유저가 재빨리 몸을 뒤로 빼 큰 상처를 입힞 못했다.
     “에이, 아깝다.”
     “시린 한기를 머금은 구체가 내 앞에 나타날지어다. 아이스 볼!”
     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법사 유저는 시린 한기를 내뿜는 아이스볼을 형성한 뒤 또다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기사 유저가 거리를 둔 채 주문을 외기 시작하는 마법사 유저에게 몸을 날렸다. 하지만 마법사 유저의 마법이 발동한 후였다.
     “바닥의 마찰이 본질을 무시할지어다, 그리스!”
     달려오든 기사 유저가 중심을 잃고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 이미 승부는 결정 난 것 같았다.
     “끝이군.”
     경훈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기사 유저가 쓰러지자 마법사 유저는 재빨리 수인을 맺으며 외쳤다.
     “아이스 스피어!”
     뺏속까지 시린 한기를 내뿜는 얼음이 창이 쓰러진 기사 유저의 가슴팍에 꽂혔고, 대련은 마법사 유저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대련이 끝나자 두 유저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생명력이 모두 회복된 기사 유저가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한 번 붙어보고 싶습니다.”
     마법사 유저는 말없이 빙긋 웃어보였다. 대련이 끝나자 커다란 원을 만들어 두 유저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유저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10실버 내놔.”
     “치사한 놈. 꼭 받아야겠냐?”
     “받을 건 받아야지. 안 그러냐, 강찬?”
     “응? 아, 응.”
     “치사한 놈.”
     혁이 투덜대며 아이템 창에서 10실버를 꺼내 경훈에게 내밀었다.
                   *    *     *
     달그락
     “이야~ 잘 먹었다.”
     나는 깨끗이 비운 크림수프 접시에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드워프들이 한 음식을 먹게 될 줄이야. 맞은편에 앉은 티아는 포크로 샐러드를 떠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타아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음식 맛이 괜찮나요?”
     “예.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드워프 여성이 다가와 말했고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빨리 정령석을 찾고 퀘스트를 완료해야 할 텐데… 너무 질질끄는 것도 안 좋은 것 같다. 오늘 바론에서 좀 쉬다가 나머지 두 개를 찾아내야겠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워프들이 정해준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루카는 소리 없이 따라와 침대 옆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티아는 드워프들이 따로 정해준 방에서 쉬면 되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피로를 느끼며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캉캉!
     나는 왼쪽 볼에 찝찝한 느낌을 받으며 잠에서 깼다. 루카가 침대 위에 앞발을 올린 채 내 볼을 핥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오늘은 쉴 틈이 없겠어.”
     캉캉!
     나느 루카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오자 드워프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티아를 볼 수 있었다.
     “일어나셨네요. 아까 깨우려고 했는데 곤히 잠드셔서 깨울 수가 없더라군요. 게다가 그 ‘특대’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었고요.”
     “아, 그런가요?”
     나는 드워프의 말에 대답을 하며 식탁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아니 잠깐. 방금 저 드워프가 루카에게 ‘특대’라고 했다. 이제 강아지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만큼 컸다는 것이군. 나는 뭔가 서운하면서도 뿌듯함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드워프들이 차려준 음식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나와 티아와 루카는 드워프의 집에서 나왔다.
     “편히 쉬었는가?”
     장작을 지고 지나가던 로퍼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물었다.
     “예. 덕분에 잘 쉬고 갑니다.”
     “그래. 오늘부터 모두들 바쁠 테니 배웅은 하지 않겠네.”
     “괜찮습니다.”
     “음. 그럼 다행이군. 그럼 원하는 걸 모두 찾길 바라네.”
     “예.”
     나는 로퍼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곤 등을 돌렸다. 호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자 붉은 반점이 깜빡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 먼 곳은 아니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군.
     나는 고개를 돌려 티아에게 그것을 설명했다.
     “티아, 이 근처에 불의 정령석이 있는 것 같아.”
     “정말?”
     “응. 자, 빨리 찾아내고 그동안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싶어. 자, 가자!”
     나는 가파른 언덕을 조심스럽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파른 언덕에서 내려와 지면에 발이 닿는 것을 느낀 나는 지도를 펼쳐들었다.
     까만 반점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붉은 반점이 매우 바른 속도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갈색의 바위로 이루어진 길에서 빠져나오자 곧 깊은 숲에 도착하게 되었다.
     “불의 정령석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찰나, 루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응? 루카, 무슨 짓이야?”
     크르르…….
     “응?”
     갑자기 자세를 낮추고 목청을 낮게 울리는 루카. 몸을 돌려 내가 가려고 하던 방향을 응시한 채 꼬리를 빳빳하게 세운 채 크게 짖었다. 그러자 수풀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투핸디 소드를든, 중갑으로 전신을 무장을 한 오크 나이트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낮게 목청을 울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등에 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손에 들었다. 활시위를 걸기도 전에 루카는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오크 나이트에게 돌진했다.
     오크 나이트는 손에 쥔 검을 휘둘렀지만 루카의 움직임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재빨리 몸을 날려 오크 나이트의 검을 피한 루카는 오크 나이트의 뒤쪽으로 재빨리 빠졌다. 아무래도 빈틈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크 나이트에게 빈틈이란 없었다. 나는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고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쿠륵, 하찮은 인간이군. 게다가 엘프까지 있다니.”
     “저 녀석 말고 더 있는 건가?”
     “그런가봐. 불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을 맺은 나 티아 젠이 그대의 힘을 빌리고자 명하노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샐라임!”
     티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티아의 머리 위로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하얀 피부에 잘생긴 외모를 가진, 저신이 불로 뒤덮인 반투명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그럼 백호를 소환해볼까? 바람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을 맺은 나 레드 파운이 그대의 힘을 빌리고자 명하노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백호!”
     약간의 마나가 감소하는 것과 내 몸을 휘감는 은은한 바람을 느꼈다.
     내 몸을 휘감던 바람이 내 머리 위에서 새하얗게 뭉치더니 이내 초록색 줄무늬를 가진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마스터!”
     “좋아. 티아, 쓸자.”
     “웅!”
     오크 나이트의 빈틈을 찾지 못했는지, 루카는 재빨리 내 앞으로 달려와 나를 가로막았다. 오크 나이트의 접근을 막으려는 것 같았다. 나는 오크 나이트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적안!”
     적안을 개안한 채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고, 화살은 대기를 가르며 오크 나이트의 더러운 면상을 향해 날아갔다. 오크 나이는 재빨리 몸을 돌려 화살을 피했다.
     “취익! 그 땨위 화살에 맞을 것 같냐! 쿠륵.”
     “그 따위?”
     나는 화살 두 개를 꺼내들고 외쳤다.
     “퀵 스텝!”
     나는 지면을 박차고 오크 나이트에게 다가가 활시위를 당겼다.
     “더블 샷!”
     두 개의 화살은 오크 나이트의 면상으로 날아갔지만 오크 나이트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화살을 피했다.
     나는 낮은 나무의 가지를 오른손으로 움켜잡고 가지를 잡은 팔을 축으로 몸을 날려 굵직한 나뭇가지 위에 착지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활시위를 강하게 당겼다.
     “백호!”
     나의 부름에 백호는 재빨리 내 머리 위에 앉았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동안 상당량의 스태미나와 약간의 마나가 감소하는 것을 느낀 나는 활시위를 놓으며 외쳤다.
     “파워 샷!”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오크 나이트의 중갑을 꿰뚫고 복부에 박혔다. 화사에 맞은 오크 나이트는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꿰에에에에!
     오크 나이트가 비명을 지르자 수풀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수많은 오크 나이트와 오크 메이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 메이는 허름한 로브를 걸치고 손에는 짤막한 완드를 쥐고 있었다. 하지만 오크 메이지를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무턱대고 달려오는 오크 나이트와 멀리서 마법을 견제하는 오크 메이지는 나름대로 환상적인 콤비였다.
     내 화살을 맞은 오크 나이트의 면상에 굵직한 화살을 꽂아준 나는 재빠리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렸다.
     “보우어택!”
     강철로 만들어진 활로 오크 메이지의 뒤통수를 후려치자 오크 메이지의 뒤통수가 함몰되면서 피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루카는 기다렸다는 듯 오크 메이지의 목덜미를 물고 빠르게 회전시켰다.
     촤르르르.
     오크 메이지의 목은 처참하게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티아의 상황을 살폈다.
     티아의 앞을 가로막은 불의 상급 정령이 팔을 치켜들자 커다란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더니 세 갈래로 나뉘며 다가오는 오크 나이트들의 머리로 떨어졌다.
     숲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몬스터의 검붉은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냥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무장을 하지 않은 오크 메이지는 나와 루카가 잡았고, 전신무장을 한 오크 나이트는 티아의 불의 상급 정령이 해치웠다.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정령 백호(바람)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레벨업 메시지와 함께 백호의 레벨이 증가했다. 오크 나이트와 오크 메이지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템 두세 개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본 나는 백호를 시켜 아이템을 회수했다.
     “이 녀석들 때문에 정령석 찾는 시간이 늘어나버렸어.”
     나는 투덜대며 백호가 회수한 아이템을 쭉 살폈다.
     
     [프랜시스카(오리지널)]
     내용: 크기가 작은 투척용 도끼. 겉모습과는 달리 꽤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던진 후엔 다시 주워 쓰던지 해야 할 것 같다.
     최소공격력 30
     최대공격력 50
     내구력 10/10
     [번개모양 귀고리(레어)]
     내용: 순금으로 만들어진 번개모양의 귀고리. 값이 비싼 만큼 귀족층이 애용하는 귀고리인 것 같다.
     방어 5증가
     마법방어 3증가
     마나 200증가
     효과. 1클래스 마법을 30% 확률로 반사
     마나 소비량 1.5배 감소.
     [브로드 소드(오리지널)]
     내용: 날의 폭이 넓은 장검. 노련한 장인의 손에서 만들어진 만큼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최소공격력 80
     최대공격력 120
     내구력 8/8
     “앗! 레어 아이템이다.”
     “정말?”
     나는 번개모양 귀고리를 집어 들고 말했다. 효과가 상당히 좋은 것 같았다.
     번개모양 귀고리의 효과를 본 티아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내 입을 열었다.
     “효과가 좋다. 마법사들이 쓰면 좋을 것 같아.”
     “이거 너 가져.”
     나는 번개모양 귀고리를 티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하지만 티아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냐, 오빠가 가져.”
     “괜찮으니까 받아.”
     “…….”
     “받아.”
     “미안한데…”
     억지로 손에 쥐어주자 티아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거 받을 때 미안해하지 말고 고마워해야 하는 거야.”
     “응…….”
     나는 나머지 쓸데없는 아이템을 아이템 창에 던져 넣고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시위를 풀어 등에 메고 지도를 펼쳐들었다. 불의 정령석이 정말 가까운 곳에 있군.
     “이 근처에 불의 정령석이 있다. 가자 티아, 루카.”
     “응.”
     캉캉!
     지도상에서 붉은 점이 깜빡이는 곳으로 향하자 깊은 숲에 희한하게 생긴 재단이 있었다. 그 위에 놓인 붉은색의 작은 조약돌. 아마 저게 불의 정령석인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제단으로 달려가 제단 위에 놓인 불의 정령석을 집어 들었다.
     쿠구구구구.
     정령석을 집어 들자 지면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제단이 우측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단이 완전히 비켜나자제단이 위치했던 곳에 사람 한 명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구멍을 본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뭐지?”
     루카는 구멍으로 다가가 코를 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나는 퀘스트 창을 열었다.
     [퀘스트]
     정령석을 구해라! 아리스 노아와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를 경계선으로 퍼진 세 개의 정령석. 정령석을 찾아 잠든 정령을 깨워 계약에 성공하자!
     [땅의 정령석을 구한다(완료).]
     [붉의 정령석을 구한다(완료).]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에 도착한다.]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흐음. 항구 도시 티르 네티아에 도착한다. 이 구멍을 통해서 가라는 건가? 난데없이 구멍이 왜 열린 거지?”
     “혹시 모르니까, 한 번 들어가 보자.”
     나는 티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먼저 들어가 볼까?”
     나는 지도를 펼쳐들고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깊이는 약 2미터 정도 되어 보였는데, 구멍 안은 전혀 답답하지가 않았다.
     내가 들어오고 낫 티아가 들어왔고 그 뒤를 루카가 훌쩍 뛰어들어 왔다.
     나는 펼쳐든 지도를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까만 반점은 항구 도시 티르 네티아로 향하고 있었다.
     “이런 통로였구나. 이 통로로 오지 않았으면 산을 몇 고개 더 넘어야 했는데.”
     “들어오길 잘했지?”
     “응.”
     나는 티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참을 걷자 통로도 끝이 보였고 검은 반점은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나는 말 한 마디를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제단이 막고 있던 구멍의 크기와 동일한 크기의 구멍. 구멍은 뚫려 있었다.
     나는 퀵 스텝을 걸고 몸을 날려 구멍 밖으로 나와 주변을 빙 둘러 보았다. 하지만 구멍 근처에 커다란 건물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티를 네티아의 풍경을 볼 수 없었다.
     나는 작은 골목을 걸어 나왔다.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엔 수많은 유저들로 가득했고 다들 고레벨의 유저였다(내가 생각하기엔). 검사 유저들은 하나같이 다 은빛 광택을 내는 풀 플레이트메일을 입고 있었고 드물게 마법사 유저도 볼 수 있었다.
     석궁을 들고 다니는 궁수들과 활을 들고 다니는 궁수들도 수없이 많았다.
     “이야, 유저가 엄청 많구나……!”
     “오, 왔어?”
     “응.”
     언제 나왔는지 티아가 입을 다무지 못하고 티르 네티아 광장을 바라보았다. 티르 네티아엔 인간, 엘프 할 것 없이 수많은 유저들로 이루어진 대도시였다. 수도 세인트 모닝보다 넓을까나?
     아무튼 나는 티아, 루카와 함께 항구도시의 광장으로 향했다.
     웅성웅성.
     시끌시끌.
     “금방 낚아 올린 대어 팝니다! 요리사 분들 어서 오세요!”
     “최고급 낚싯대 팝니다! 미끼 공짜로 드려요!”
     “나룻배 제작해드립니다!”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는 전혀 들어볼 수 없는 말들.
     나는 나룻배 제작이라는 말에 솔깃했으나 정령계약 퀘스트를 빨리 끝내야 했기 때문에 나룻배 제작에 관한 이야기는 접어두어야 했다. 나는 퀘스트 창을 열었다.
     
     [퀘스트]
     정령석을 구해라! 아리스 노아와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를 경계선으로 퍼진 세 개의 정령석. 정령석을 찾아 잠든 정령을 깨워 계약에 성공하자!
     [땅의 정령석을 구한다(완료).]
     [붉의 정령석을 구한다(완료).]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에 도착한다(완료).]
     [물의 정령석을 구한다.]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흐음. 물의 정령석을 구한다. 지도를……”
     나는 지도를 펼쳐들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푸른 반점이 티르 네티아의 한 지점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지도에 집중한 채 쭉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이거 놓으세요.”
     “튕기기는. 우리랑 좀 놀자. 응?”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 삼류 액션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대사와 함께 나는 지동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하필이면 티아의 손목을 잡은 한 유저.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지도를 접어 호주머니에 넣고 티아의 손목을 잡은 유저에게 다가갔다. 후우. 당연한 대사가 목구멍에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기, 손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넌 뭐냐?”
     “일행인데요…….”
     이미 적안이 개안되어 있는 나의 두 눈. 나의 말투와는 달리 상당히 차가운 이미지를 발산하단.
     티아의 손목을 잡은 은빛 광택이 나는 갑옷으로 무장을 한 유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흐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아, 이 새끼 이거, 몇 달 전에 세인트 모닝에서 잡화점이 어디냐고 물어본 그 쥐콩만 한 새끼 아냐?”
     몇 달 전이라…….
     나는 셀리리아 월드를 처음 시작할 때를 떠올렸다. 여러 가지 손이 가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잡화점의 위치를 찾아야했다.
     광장에서 레벨이 높아 보이는 유저를 아무나 붙잡고 잡화점의 위치를 물어본 기억이 났고, 그때의 그 싸가지 없던 유저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유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 오랜만이군요. 개 싸가지 님.”
     “뭐야, 아는 놈이냐?”
     “아, 몇 달 전에 나한테 잡화점이 어디냐고 물어보던 새낀데, 많이 컸네 벌써 티르 네티아에 오고. 처맞고 울지 말고 꺼져라.”
     난테없이 나타나 시비를 거는 유저. 나는 황당했다. 티아의 앞에서 굴욕을 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입을 열었다.
     “누가 처맞을지는 두고 봐야 알죠.”
     나의 말에 흥분을 한 유저가 내 멱살을 잡았다.
     “이런 개 뭐만 한 새끼가.”
     “크르르…….”
     유저가 내 멱살을 잡자 곁에서 지켜보던 루카가 송곳니를 드러낸 채 목청을 올렸다. 이전과는 다른, 제법 늑대의 티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유저라면 움찔할 것이다.
     내 멱살을 쥐고 있던 유저는 손을 놓으며 허리춤에 차고 있는 커다란 검을 뽑아들었다. PK라도 할 생각인가? 나의 생각과는 달리 대련 요청을 하는 유저. 그가 입을 열었다.
     “네놈이 지면 신경 끄고 할 일 해라.”
     “당신이랑 대련을 해 줄 시간이 없는데요?”
     “상당히 쫄았구먼. 잡화점에서 장난감이나 만들던 놈이 대련이나 해봤을까. 밸터 그 미친 늙은이랑 소꿉장난이나 했냐?”
     유저의 말에 나는 발끈했다. 나와 밸터를 모욕하는 말투. 나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을 집어 들고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티아. 루카 좀 붙잡고 있어줘.”
     “그냥 가자. 응?”
     “잠시만. 붙잡고 있어 줘.”
     대련 요청을 승낙하자 푸른빛이 내 몸을 감쌌다. 유저의 몸에도 푸른빛이 둘러싸였다.
     “궁수 따위가 소드 엑스퍼트 하급 기사를 이길 수 있을까?”
     궁수 따위라… 유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저의 검엔 옅은 푸른색의 오러가 맺혔다.
     나도 엑스퍼트는 엑스퍼트이다. 레인지 엑스퍼트 하급.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갑니다.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대부분 궁수가 근거리에선 사족을 못 쓰는 걸로 알고 있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재빨리 방향을 틀어 유저가 휘두르는 검을 피한 뒤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고 화살을 쏘았다. 재빨리 몸을 움직여 화살을 피하는 유저.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광장에 있던 유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저는 재빨리 달려와 검을 휘둘렀으나 나는 백스텝으로 피할 수 있었다.
     백스텝으로 거리를 둔 채 화살 하나를 꺼내 들 때였다. 언제 왔는지 내 목으로 검을 찔러 들어오는 유저.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걸고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땅에 착지함과 동시에 유저를 겨냥하고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허공을 가르며 유저를 향해 날아갔다.
     가까스로 화살을 피한 유저가 또다시 내 쪽을 향해 내달렸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었다. 틈을 주지 않고 치고 들어오는 유저.
     검을 활로 쳐낼 수만 있다면 그랬겠지만, 유저의 검에는 오러가 맺혀 있다. 오러가 맺힌 이상 활은 분명 두 동강이 날 것이고 대련에서 패배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내 가슴팍으로 들어오는 유저의 검.
     터엉!
     빠가각.
     약간의 마나가 감소하면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흉측하게 금이 간 반투명한 흰색의 반 구체의 실드가 보였고 인상을 쓰는 유저를 볼 수 있었다.
     “궁수가 실드도 쓰는군.”
     말 한 마디를 내뱉고 재빨리 물러서는 유저.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백호가 실드를 발동한 것 같았다.
     상대는 상당히 강했다. 레벨이 높은 만큼 대련도 많이 해왔을 것이고, 그만큼 경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저줄 생각이 없다.
     비록 NPC라지만 벨터를 모욕했고 궁수를 만만하게 본 것, 그리고제일 화가 난 건 티아를 건드렸다는 점. 유치하긴 하지만 아무튼 무조건 이길 생각으로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백호. 윈드 애로우다.”
     “내, 마스터!”
     나는 재빨리 달려오는 유저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으며 외쳤다.
     “윈드 애로우!”
     약간의 마나가 감소하는 것을 느껴졌고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전보다 빨리 날아갔다. 가까스로 피하긴 했지만 유저의 팔을 훑고 지나간 화살의 크기가 큰 만큼 패해도 컸을 것이다.
     유저의 팔에 화살촉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붉은 선형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나 감소가 심해지지만, 그만큼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윈드 애로두’. 나는 화살을 꺼내들고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었다. 유저와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유저들.
     백스텝으로 거리를 둔 채 화살을 꺼낼 때였다.
     “궁탑의 제자야!”
     “정말이네?”
     현재 나는 나와 기사 유저를 둘러싼 유저들. 나는 그들을 무시한 채 퀵 스텝을 걸고 기사 유저를 향해 내달렸다.
     오러가 맺힌 그의 검이 내 다리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뛰어올라 유저의 턱을 걷어찼다. 하지만 큰 충격은 줄 수 없었다.
     ‘생각보다 강하네.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어. 젠장. 퀘스트를 하러 와서 이게 무슨 꼴이람.’
     나에게 턱을 걷어차인 것에 화가 났는지 유저의 두 눈엔 살기가 가득했다.
     “저 따위 것이 내 턱을 걷어 차? 아주 토막을 쳐주지.”
     ‘잔인한 놈. 그럼 난 고스도치를 만들어주겠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심호흡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저의 오러를 머금은 푸르스름한 검신이 내 목을 노리고 있었지만, 백호가 검의 궤도를 바꾸었다. 유저의 검은 현재 내 머리 위로 올라간 상태. 옆구리가 텅 빈 상태였다.
     중갑을 입고 있다지만 겨드랑이 부분은 완전히 가리지 못했다.
     나는 주저 없이 활을 휘둘렀다. 보우어택! 강하게 한 방 얻어 맞은 유저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나는 활을 고쳐 잡고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윈드 애로우!”
     재빨리 활시위를 당겨 유저를 향해 화살을 쏘았지만, 유저는 믿을 수 없는 반사 신경으로 화살을 피해냈다. 하지만 전보다 움직임이 둔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대련 도중에는 생명력 포션을 마시거나 힐링이나 큐어 같은 회복, 치료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저에게 오른팔를 쓸 수 없는 패널티가 주어진 것이었다.
     왼손으로 검을 쥔 유저. 왼손으로는 검을 잘 다루지 못 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매섭게 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오러를 머금은 검이 내 눈 앞에서 휘둘러 질 때 마다 간담이 사늘해졌고 나는 죽기 살기로 피했다.
     ‘젠장, 파워 샷이라도 쏠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을 텐데!“
     나는 이를 악 물고 백스텝으로 유저의 검을 간신히 피했다.
     “도망치는 것은 일품이군. 쥐새끼 같은 놈.”
     “그래도 두 방 먹였는걸.”
     “이 새까가!”
     내가 도발시키자 즉각 반응하는 유저. 흥분을 했는지 그의 공격엔 전과 같은 날카로움이 없었다. 그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낸 나는 재빨리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었다.
     확실히 대련에 대해 경험이 많은 유저인 것 같았지만,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상대로 많이 싸운 유저인 것 같았다. 정말로 대련을 통해 많은 것을 얻은 유저라면 이 따위 도발에는 넘어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나는 화살 두 개를 꺼내들고 유저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면 외쳤다.
     “더블 샷!”
     두 개의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허공을 가르며 유저에게 날아갔다.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하긴 했지만, 한 개의 화살은 유저의 어깨를 관통했다.
     마치 창과도 같은 화살이 왼쪽 어깨에 깊숙이 박혔고, 유저는 더 이상 무기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상대방이 전투 불능이 되면 대련은 끝나게 된다. 가까스로 대련에서 승리하게 된 나는 왼쪽 어깨에 화살이 박힌 채 쓰러진 유저를 내려다보았다.
     나와 유저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려졌다. 레벨로 따지면 무려 50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스탯으로 따진다면 내가 더욱 유리할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생산직 스킬 보너스로 인해 비약적으로 상승한 손재주 스탯은 무려 400이 넘는다. 즉 내 공격이 더 날카로웠다는 것이다. 대련에서 패한 유저가 몸을 일으킨 채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씨발.”
     욕을 내뱉던 유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마도 로그아웃을 한 것 같았다.
     “궁탑의 제자가 이겼어!”
     “사실 아까 그 유저 살짝 밥맛이었어.”
     “맞아, 맞아. 게임 상에서만 깝치는 또라이야.”
     가까스로 대련에서 이긴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등에 메고 아이템 창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대련이 끝나면서 스태미나는 회복이 되었지만, 갈증은 회복이 되지 안핬기 때문이었다.
     유저가 로그아웃을 하자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유저들은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이겼군.”
     나는 티아와 함께 자리를 피했다. 기사 유저와 대련을 하면서 경험하게 된 것은,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 유저들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었다.
     아까 겨룬 유저는 나를 상당히 깔보고 있었기 때문에 방심을 해서 패한 것이 확실했다.
     방심만 하지 않았다면 대련 경험이 전혀 없는 나로썬 아무리 날카로운 공격을 할 수 있어도 대련에 잔뼈가 굵은 유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타아와 나란히 걷던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서 나란히 걷던 티아가 말을 걸어왔다.
     “이제 남은 정령석은 하나뿐이지?”
     “응. 아, 잠시만 지도 좀 펴 봐야겠다.”
     나는 얼른 호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펼쳐들고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검은 반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푸른 반점이 깜빡이고 있었다.
     “오, 가까운 곳에 있다!”
     “정말?”
     “응. 얼른 가보자. 따라와 루카!”
     캉캉!
     나는 티아, 루카와 함께 물의 정령석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항구도시라는 명칭을 증명하듯 넓게 펼쳐진 나루터에 커다란 여객선과 작은 돛단배가 질서정열하게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야. 사람 정말로 많다.”
     “응. 무지 많은 것 같아.”
     나의 감탄사에 맞장구쳐주는 티아. 나는 피식 웃으며 지도를 펴쳐 들었다.
     ‘바로 옆이군.’
     나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 방파제 끝부분에 박혀 반짝이는 푸른 물체를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저게 물의 정령석인 것 같았다.
     “티아, 루카. 잠시만 여기 있어봐. 얼른 가서 물의 정령석을 가져 올게.”
     “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티아. 티아의 옆에 앉아 있는 루카는 알았다는 듯 연신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퀵 스텝”
     혹시 모르니 퀵 스텝을 걸고 방파제 위로 올라온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날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방파제 끝부분에 도착한 나는 반쯤 박힌 물의 정령석을 볼 수 있었다.
     단단히 박혀 있는 물의 정령석. 그냥 꺼낼 수는 없는 것 같다.
     “이봐! 위험해!”
     “음?”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배틀엑스를 쥐고 은빛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유저가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것인지, 나는 자살하려는 게 아니라 정령석을 가져가려고 하는 것인데.
     그런 유저의 말을 무시한 채 나는 단단히 박힌 정령석을 뽑아 내기 위해 등에 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들고 방파제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보우어택!”
     터엉!
     끝부분이 부서지는 방파제. 그와 동시에 물의 정령석이 박힌 파편이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다. 나는 재빨리 팔을 뻗어 파편을 잡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파제로 향했다. 끝부분이 부서진 방파제는 곧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카아악!”
     어디선가 들려오는 괴성. 나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흉측하게 생긴 면상에 아랫니가 불쑥 튀어나온, 사람의 몸(팔 다리가 전부 달려 있었다)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기괴하게 생긴 몬스터가 손에 창을 꼬나 쥔 상태로 나를 노려보았다.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드는 몬스터. 나는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었다. 호주머니에 물의 정령석이 박힌 돌맹이를 쑤셔 넣고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손에 쥔 나는 서둘러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재빨리 뒤로 빠진 나를 멍하니 보고 있는 몬스터. 기회였다. 나는 뒤를 이어 멍하니 서 있는 몬스터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고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몬스터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화살은 몬스터의 머리를 관통했고 방파제의 끝부분에 깊숙이 처박혔다. 물론 화살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도 방파제의 끝부분에 처박혔다. 몬스터를 처리하고 아이언 레드 롱 보오를 등에 멘 나는 얼른 방파제에서 나왔다.
    대리석 계단 위에서 위험하다고 소리치던 유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유저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퀘스트 때문이었다.
     
     [퀘스트]
     정령석을 구해라! 아리스 노아와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를 경계선으로 퍼진 세 개의 정령석. 정령석을 찾아 잠든 정령을 깨워 계약에 성공하자!
     [땅의 정령석을 구한다(완료).]
     [붉의 정령석을 구한다(완료).]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에 도착한다(완료).]
     [물의 정령석을 구한다(완료).]
     [땅, 불, 물의 정령과 계약에 성공한다.]
     [알 수 없음.]
     “오, 이제 정령과 계약하는 일만 남았군.”
     나는 피식 웃으며 호주먼에 쑤셔 넣었던 땅의 정령석을 꺼내들었다. 내 머리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백화와 같은 정령들이 생긴다니.
     땅의 정령석을 꺼내 든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땅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을 맺고자 그대를 깊은 잠에서 깨우노니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나 레드 파운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빠각.
     번쩍!
     나의 주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령석에 금이 가더니 이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상당량의 마나가 감소하면서 지면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갈색의 등딱지를 가진, 큼지막한 눈을 가진 작고 귀여운 거북이의 모습을 한 땅의 정령이 소환되었다. 이상하게 얇고 긴 꼬리가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으아! 잘잤다!”
     “음?”
     “응? 나를 깨운 게 너야?”
     “으, 응. 그렇다.”
     백호와는 달리 막가파의 성격을 가진 땅의 정령. 땅의 정령은 이제 대여섯 살 정도 된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나를 자극했다. 외모나 목소리나 정말로 귀여운 땅의 정령.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봐. 거북이. 나랑 계약을 하는 게 어때?”
     “계약?”
     “응. 내가 너의 마스터가 되는 거지.”
     “싫어.”
     “응?”
     “마스터 말고 친구는 어때?”
     옆에서 깔깔 웃는 티아. 땅의 정령의 반응에 나는 황당했다. 친구라니. 땅의 정령의 태도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친구라… 그러는 게 좋겠다.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 그리고 네 이름은 이제부터 ‘현무’야.”
     “좋아!”
     현무는 땅속을 헤어치듯 다가와 내 발 위로 올라왓따.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했습니다! 정령 친화력 스탯이 5증가합니다. 땅의 정령 ‘현무’의 정보가 추가됩니다.]
     “귀엽다!!”
     “재는 누구야?”
     티아의 말이 끝나자 티아를 빤히 쳐다보는 현무. 나는 현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 동료야. 아, 현무.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이 녀석은 백호라고 해. 너보다 먼저 태어난 바람의 정령이야.”
     나는 머리 위에 앉은 백호를 안아 들고 땅에 내려다 놓았다. 백호와 눈이 마주친 현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스터. 이 녀석은 아직 어린 녀석인 것 같은데요?”
     “그래? 정령도 나이가 있나……?”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저보다 어린 것은 확실해요.”
     “그럼 누나네? 백호 누나.”
     현무의 어이없는 반응에 나는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불의 정령석을 꺼냈다. 이번엔 과연 어떤 녀석일까. 정령석을 꺼내든 나는 입을 열었다.
     “불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을 맺고자 그대를 깊은 잠에서 깨우노니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나 레드 파운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또다시 정령석에 금이 가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갈라진 정령석 사이에서 시뻘건 화염이 기염을 토해내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햇다.
     상당량의 마나가 감소되고 내 마나는 거의 고갈되었다. 현기증을 느꼈지만 나는 꾹 참고 불의 정령의 모습을 상상했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 사신수가 된다면 좋을 텐데.’
     나의 기대에 부흥하기도 했는지, 시뻘건 화염은 이내 작은 매의 형상을 했고 새빨간 깃털과 공작처럼 긴 붉은색의 꼬리깃털을 가진 반투명한 붉은 매 한 마리가 작지 않은 날개를 펄럭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인가요? 나를 깊은 잠에서 깨운 자가.”
     “응.”
     “인간이로군요!”
     “그래. 인간이지. 계약을 했으면 해서.”
     “좋아요! 앞으로 불러 주실 이름을 정해주세요, 마스터.”
     티아와 같은 10대 후반 여성의 목소리.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애교가 많은 그러 타입이엇다.
     현무를 볼 때와는 달리 티아의 시선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나는 불의 정령을 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 네 이름은 지금부터 ‘주작’이다.”
     “네. 마스터!”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했습니다! 정령 친화력 스탯이 5증가합니다. 불의 정령 ‘주작’의 정보가 추가됩니다.]
     재빨리 날아와 내 어깨에 앉는 주작. 나는 마지막 남은 물의 정령석을 꺼내들었다.
     ‘이 녀석의 모습도 저 녀석들처럼 사신수의 모습을 했으면 좋겠는데……’
     “티아, 혹시 마나 포션 있어?”
     “응. 여기”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템 창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 낭게 내미는 티아. 나는 티아가 건네준 마나 포션을 마셨다.
     “좋아, 이번엔 물의 정령석이다. 물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을 맺고자 그대를 깊은 잠에서 깨우노니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나 레드 파운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빠각.
     후두둑.
     번쩍!
     다른 정령들과는 달리 훨씬 더 많은 양의 마나가 감소하면서 대기의 수분이 내 몸을 휘감았다. 자칫하면 정신을 잃을 정도의 마나가 감소되고 있었고 하마터면 정신을 놓을 뻔했다.
     “허억, 허억.”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물의 정령을 보았다. 다른 녀석들 보다는 조금 더 큰, 사슴의 뿔에 푸른 눈동자 그리고 푸른 비늘을 가지고 입에 여의주를 문 동양의 용의 형태를 한 반투명한 푸른색의 정령이었다.
     “나를 소환한 게… 너냐?”
     “그, 그래.”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당돌한 녀석. 아니 싸가지가 없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기세를 봐도 다른 녀석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머리 위에 앉은 백호와 내 왼쪽 어깨 위에 앉은 주작, 그리고 발등 윙에 엎어져 있는 현무를 훑어보던 물의 정령이 말했다.
     “나까지 포함해 4원소 정령이군. 잠에서 깨운 용건은?”
     “그야 계약을 하기 위해서지.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물의 정령이 말했다.
     “그래? 나는 쉽게 계야을 해주지 않는 타입이라… 하지만 다른 세 놈의 정령들이 있는 걸로 봐서 네놈은 믿어도 되겠군. 좋다. 앞으로 내가 불릴 이름을 말해라.”
     “청룡.”
     “이름도 참 구닥다리 같군. 청룡이라…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마스터가 정한 이름이니. 좋다. 앞으로 내 이름은 청룡이다, 마스터.”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했습니다! 정령 친화력 스탯이 5증가합니다. 물의 정령 ‘청룡’의 정보가 추가됩니다.]
     네 정령들과의 계약에 성공하자 나는 날아갈 듯 기뻤다. 입  꼬리가 자꾸만 위로 올라갔고 마구마구 날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퀘스트 창을 열었다.
     
     [퀘스트]
     정령석을 구해라! 아리스 노아와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를 경계선으로 퍼진 세 개의 정령석. 정령석을 찾아 잠든 정령을 깨워 계약에 성공하자!
     [땅의 정령석을 구한다(완료).]
     [붉의 정령석을 구한다(완료).]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에 도착한다(완료).]
     [물의 정령석을 구한다(완료).]
     [땅, 불, 물의 정령과 계약에 성공한다(완료).]
     [아리스 노아 정령사의 캠프로 돌아가 보고한다.]
     “얼레? 티르 네티아에 온 지 d마나 됐다고 벌써 돌아가라는 거야? 쳇. 할 수 없군.”
     “아리스 노아 귀환 스크롤이라면 나한테 있어.”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티아. 아이템 창에서 아리스 노아 귀한 스크롤을 꺼낸 티아가 스크롤을 북 찢었다. 그러자 드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와 초록색 풀잎이 우거진 커다란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나 있는 아리스 노아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아리스 노아에 도착한 나는 티아, 루카와 함께 정령사의 캠프로 향했다. 천막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엘프 청년. 우리가 천막안으로 들어오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 정령석을 모두 찾아냈나보군. 게다가 계약에 모두 성공하다니 말야. 정령석에 잠들어 있는 물의 정령은 계약을 하기가 힘들 텐데.”
     “그, 그런가요?”
     “그래. 좋다. 보고는 받았다.”
     [퀘스트 완료!]
     퀘스트 오나료, 보상(하급 정령술사 배지).
     정령 친화력 스탯 10증가.
     경험치 EXP. ???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인지 엑스퍼트(중급)가 되었습니다.]
     “오! 레벨업!”
     퀘스트를 완료하자 레벨업과 동시에 하급 정령술사 배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게다가 레인지 엑스퍼트 중급! 나는 씩 웃으며 상태 창을 열었다.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55
     생명력(HP). 620
     마나(MP). 450
     스태미나(SP). 1,000(배고픔 수치 10%/ 갈증 5%)
     힘 137
     체력 65
     민첩 159
     손재주 420
     지력 15
     지헤 15
     행운 15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210~320
     방어력 10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5
     바람(백호) Lv. 3.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1.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1.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1. 친화력 100%
     [상세정보]
     나는 남은 스탯 포인트를 손재주와 민첩에 3:2로 찍었다.
     “대단하군. 이렇게 빨리 정령 계약 퀘스트를 끝낼 줄이야. 역시 루니오스 카이샤를 받을 만한 인재야.”
     “음? 루카는 그냥 붉은 매가 없어서 받는 거예요. 자, 이제 퀘스트도 끝났으니 가 봐도 되겠죠?”
     나의 말에 엘프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티아, 루카 그리고 정령들과 함께 정령사의 캠프에서 나왔다. 그토록 원하더 정령들이 전부 모이자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뻤다.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백호, 왼쪽 어깨에 앉아 있는 주작, 왼쪽 팔목에 몸을 감고 있는 청룡과 내 왼쪽 발등에 꼭 붙어 있는 현무.
     하지만 아직 갖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내 옆에 서 있는 티아였다.
     나는 네 정령을 모두 역소환 시켰다. 그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저기 티, 티아. 할 말이 있는데…….”
     “응? 무슨 할 말?”
     “그게…….”
     나 너 좋아해. 라는 말이 맘속에서만 메아리 칠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런 상황에서 고백을 하게 된다면 정말 뭐랄까, 어색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럴 것 같았다.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루, 루카 정말 많이 커진 것 같지 않아?”
     “응. 근데 왜 그래? 갑자기 말을 더듬고.”
     “아, 아하하… 안 아뭇것도.”
     애꿎은 루카로 화제를 돌린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숨을 내쉰 나는 루카를 보았다.
     이제 늑대의 티를 갖춘 루카. 긴 주둥이와 이전 같지 않은 날칼운 눈매. 하지만 눈망울은 여전히 까많고 순했다.
     다 큰 진돗개만 한 루카. 정령계약 퀘스트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정령계약 퀘스트가 끝나면 정말로 하고 싶었던 잡동사니 만들기가 떠올랐다.
     한동안 안 했더니 손이 근질근질(?)하는군.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잡동사니를 마들 생각이었다. 바로 티아에게 고백할 물건들. 나는 티아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뒤 입을 열었다.
     “강제 접속종료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네.”
     “나도.”
     나를 빤히 보며 티아가 대답했다. 나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그럼 접속종료 하고 이따가 보자.”
     “응!”
     “먼저 갈게. 로그아수!”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위잉.
     “후우. 강현성. 넌 왜 이 모양이냐.”
     나는 한숨을 쉬며 헤드셋을 벗었다. 게임베드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르륵.
     48시간 내내 게임만 했더니 배가 고프군. 나는 주린 배를 부여잡고 거실로 나왔다.
     “흐음… 뭐 먹을 만한 게 없나?”
     냉장고 문을 연 나는 먹을 것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내 눈에 포착된 것은 육개장! 나는 얼른 육개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었다.
     “아차, 육개장엔 하얀 쌀밥이 제 맛인데.”
     나는 즉시 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쌀밥을 퍼냈다. 시간만 맞춰두면 알아서 배달 오는 쌀을 밥솥에 넣어두면 컴이 밥을 짓기 때문에 언제나 따뜻한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삐삐.
     전자레인지에서 들려오는 반가운(?)소리. 육개장을 꺼낸 나는 육개장과 새하얀 쌀밥이 담긴 밥그릇, 수저를 들고 거실로 향했다. 탁자에 육개장과 쌀밥을 올려둔 나는 소파에 편히 앉아 입을 열었다.
     “컴, 멀티비전 좀 틀어줘. 그리고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로 맞춰줘.”
     「네, 주인임.」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육개장에 말았다. 입에서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흐흐 이제 맛있게 먹는 일만 남았군.”
     3일 굶은 되지새끼마냥 수저로 허겁지겁 밥을 퍼먹던 나는 멀티비전에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가 뜬 것을 확인하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어라? 이벤트?”
     세릴리아 월드 홈페잊 이벤트란에 새로운 이벤트가 등록된 것을 본 나는 즉시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이번 이벤트에 관한 내용이 쭉 나열되었다.
     “그리 큰 이벤트는 아닌데… 참여할 사람만 하는 건가?”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개최하는 생활용품 만들기 대회.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리 큰 이벤트는 아니지만 같은 취미를 가진 유저들과 경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나는 즉시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창의력, 실용도 그리고 관람하는 유저들의 반응에 따라 점수가 매겨지는 그런 대회였다. 이벤트가 열리는 시간은 현실시간으로 내일. 2234년 6월 13일. 오후 12시.
     이벤트 내용을 모두 읽은 나는 남은 육개장을 마저 퍼먹기 시작했다. 돼지새끼처럼 한참을 퍼먹던 나는 텅 빈 밥그릇과 냄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에 밥그릇과 냄비를 던져두고 방으로 들어온 나는 침대에 누웠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멀티비전은 컴이 알아서 끄겠지…….
                   *    *     *
     다음날.
     학교 수업을 마친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PDA를 침대 위에 팽개쳐두고 캡슐 옆구리 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위잉.
     철컥.
     캡슐의 문이 열렸고 나는 게임베드에 누웠다. 아까 학교에서 강찬에게 들은 건데. 내가 아리스 노아에 남아 있는 동안 강찬, 경훈, 혁은 새로운 던전을 얼떨결에 찾아내 그곳에서 사냥을 하고 있단다. 하지만 오늘 있을 이벤트가 나에겐 더욱 중요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헤드셋을 머리에 썼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55.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정령사의 캠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어제 로그아웃을 했던 장소였다. 로그인하자 루카가 내 옆에서 꼬리를 흔들며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강아지의 티가 없어졌지만 나에겐 한없이 귀여운 루카였다.
     ‘흐음…….’
     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소환했다. 계약을 할 때만큼 마나가 감소되지 않았지만 네 녀석 모두를 소환했기에 내 마나는 거의 고갈되기 직전까지 감소되었다.
     “음. 불렀군.”
     “마스터!”
     “왜 이제 부르셨어요.”
     “형!”
     “자, 오늘은 갈 곳이 있다. 엘프의 도시 아리스 노아가 아닌 인간의 도시. 수도 세인트 모닝으로 갈 거야.”
     “그게 뭐야?”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유난히 호기심이 많은 현무가 내게 물어왔다. 나는 루카와 함께 광장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엘프의 도시 아리스 노아라는 곳이야. 나는 인간이고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수도 세인트 모닝이라는 곳에서 시작했어.”
     “왜?”
     “나야 모르지.”
     “바보네.”
     누가 누구한데 바보라는 건지, 광장에 도달한 나는 유저들이 펼쳐놓은 개인상점을 쭉 둘러보았다.
     운 좋게도 서너 장의 세인트 모니 워프 스크롤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아리스 노아 마을 귀환 스크롤도 구입했다. 이벤트를 마치고 아리스 노아에 돌아올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루카, 오랜만에 세인트 모닝에 가는 건데. 어때?”
     캉캉!
     “좋지?”
     왕왕!
     나는 씩 웃으며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하는 짓은 강아지군.
     나는 아이템 창에 세인ㅌ 모닝 워프 스크롤 한 장을 제외한 나머지 스크롤을 전부 넣어두고 세인트 모닝 워프 스크롤을 북찢었다.
     푸른 잔디와 사계절 푸른 잎사귀를 가진 커다란 나무로 된 아리스 노아의 풍경에서 새하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빽빽하고 드넓은 광장에 커다란 분수대가 있는 수도 세인트 모닝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이야… 오랜만이다.”
     분수대 광장 근처에는 수많은 인간 유저들로 가득했다.
     “잡화점으로 가자, 루카.”
     잡화점으로 발걸음으로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레드!”
     “음?”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흰색과 붉은색으로 어우러진 화려한 마법사모자에 갈색 뿔테안경. 흰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화려한 로브를 입고 기다란 스태프를 쥐고 있는 유저였다.
     “누구… 엥? 레, 레온?!”
     “네. 레온입니다. 하하. 복장이 많이 변해서 못 알아보신 것 같군요.”
     분명 레온이었다. 레온이라면 전에 홉고블린과 고블린 무리에서 내가 구해준 적이 있고, 또 구울 퇴치 퀘스트를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때 그의 복장은 너무 허름한 복장이었다. 갈색의 반무테 안경에 갈색의 덥수룩한 더벅머리, 갈색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 같지 않은 초보틱한 복장이었는데 지금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우와. 대체 그 복장은… 그동안 뭐하고 지내셨나요?”
     “그냥 이것저것 하고 지냈지요. 하하.”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하자 레온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나는 얼른 정보보기를 이용해 레온의 호칭을 살폈다. 순간 내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의 호칭은 ‘마성의 현자’라는 호칭이었다. 궁수의 탑에서 뛰어난 궁수들을 ‘궁탑의 제자’라는 호칭을 부여하는 것처럼 마법사의 성에서도 ‘마성의 현자’라는 호칭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라는 걸 알게 된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냐하면 마법사란 직업이 다른 직업에 비해 너무나도 힘들다는 점이었다.
     마법 수식을 계산하고 수인을 맺는 법도 익혀야 하며 복잡한 룬어를 외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마, 마성의 현자…시군요.”
     “아, 제 호칭을 보고 놀라신 건가요? 하하. 레드는 궁탑의 제자인 걸요. 놀랄 필욘 없어요. 그건 그렇고 어디 가세요?”
     “아, 이번에 열리는 이벤트 있죠? 그 생활용품 만들기인가? 그 이벤트에 참여하려고요.”
     “그래요? 저도 그 이벤트 관람을 하러 가는 중이었는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죠.”
     “네. 그런데 잡화점 먽 들러봐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저야 뭐 남는 게 시간이니까요. 하하.”
     나는 레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잡화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에 수많은 유저가 나와 레온을 보며 수군거렸다.
     하긴. 궁탑의 제자와 마성의 현자 둘이 광장에 나타났으니 그럴 테지.
     

    제6장   이벤트, 그리고 첫사랑

     잡화점으로 향하던 도중 내 머리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백호와 왼쪽 어깨 위에 앉은 주작, 왼팔을 감고 있는 청룡, 내 발등 위에 붙어 있는 형무를 흥미 있는 눈길로 바라보던 레온이 입을 열었다.
     “정령인가요?”
     “아, 예. 현실시간으로 어제 이 녀석들과 계약을 했죠. 하하.”
     “호오… 그런데 그 늑대는…….”
     “루카에요. 많이 자랐죠?”
     “헉? 벌써 이렇게 커지다니. 게다가 등에 메고 있던 활까지 다라졌군요?”
     “하하. 레온도 많이 바뀐 것 같은데요? 복자이 화려해진 걸보니.”
     “음… 조금 변했다고 봐야겠죠? 얼마 전에 5클래스에 들어서서 마성의 현자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죠.”
     “그렇군요. 그런데 마법사는 마법 수련 같은 걸 어떤 식으로 하나요?”
     “음 수련이라…….”
     나의 물음에 레온이 피식 웃으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룬어부터 외워야 하죠. 그리고 대부분 수련은 마법수식 계산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수식 계산이 맞았다면 마법이 실현되는 것이고 계산을 잘못하고 캐스팅을 하게 되면 마법이 실현되기는커녕 계산을 안 한 것만도 못 하게 되죠 4클래스에 도달했을 때까지 했던 수련 방식은 마법 수식을 계산하고 마법을 시전하면 수련치가 올랐는데, 4클래스에서 5클래스로 깨달음을 얻는 수련법이 조금 달랐어요. 마법 수식을 계산하고 마법을 시전하는 것까진 똑같았는데 새로운 수련법이 나왔죠. 유저들과의 대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방법으로 말이죠.”
     “그, 그래서 대련을 했나요?”
     “네. 소드 엑스퍼트 중급 유저와 대련을 했어요. 그 결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5클래스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죠.”
     “그렇군요.”
     레온과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잡화점에 다다랐고 벨터가 정말 반가운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레드! 오랜만이구나!”
     “네.”
     “머리 위랑 어깨, 팔뚝 발등에 붙은 동물들은 다 뭐니? 히에엑? 설마 저게 루카는 아니겠지?”
     벨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쪼르르 달려가 벨터를 빤히 바라보며 꼬리를 흔드는 루카. 아리스 노아로 떠날 당시 루카는 분명 작은 강아지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벨터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놀란 얼굴을 하고 루카의 머리를 한번 쓸어내린 벨터가 루카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그래. 아리스 노아는 잘 다녀왔니?”
     “네. 거기서 많은 것을 배우고 얻을 수 있었어요. 무기도 바꾸고, 정령계약도 하구요.”
     “그렇구나… 그 녀석들의 이름은 뭐니?”
     벨터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정령들을 쭉 흝어보며 말했다. 나는 그런 벨터를 보곤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 멀 위에 있는 녀석은 백호에요. 바람의 정령이구요. 제 어깨에 있는 녀석은 주작. 불의 정령이에요. 그리고 제 왼쪽 팔뚝에 감겨있는 이 녀석은 청룡. 물의 정령이구요. 마지막으로 제 왼쪽 발등에 찰싹 붙어 있는 이 녀석은 현무에요. 땅의 정령이죠. 정령 계약 퀘스트를 하느라고 고생도 좀 했어요.”
     “그렇구나. 음? 레온? 복장이 바뀌어서 못 알아봤군요.”
     멋지게 차려입은 레온을 보며 벨터가 놀란 듯 말했다. 그러자 레온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네. 늘 허름한 갈색 로브를 입고 다니던 사람이 그렇게 차려입고 다닐 줄이야… 잘 어울리는군요.”
     “감사합니다.”
     벨터의 말에 레온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 후 오후 12시에 이벤트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참가할 유저들은 지금 즉시 수도 세인트 모닝 분수대 광장으로 모여주시기 바라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운영자의 음성. 운영자의 음성을 들은 벨터가 입을 열었다.
     “오, 이제 곧 시작하는가 보구나. 레드 어서 가 보거라.”
     “네. 그럼 다음에 봐요, 벨터.”
     “그래. 자주 놀러 오거라. 레온도 자주 놀러 오세요.”
     “네.”
     나는 다시 한 번 벨터의 얼굴을 보곤 몸을 돌려 분수대 광장으로 향했다.
     웅성웅성.
     광장엔 의외로 유저가 많았다. 나와 같은 궁수 유저도 몇몇 있었고, 대부분 생활직 스킬만을 꾸준히 올린 유저들 같았다. 복장이나 들고 있는 아이템을 본다면 누구나 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나까지 합해 20여명의 유저가 참가한 소규모 이벤트. 운영자로 보이는 한 유저가 화려한 복장을 하고 모습을 나타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열리는 소규모 이벤트담당자인 운영자 추(秋)입니다. 이번 이벤트는 사냥을 하지 않는 유저들을 위한 이벤트입니다. 1등 상품은 업데이트 될 예정인 ‘집’을 가질 수 있는 티켓과 손재주 보너스 20, 2등 상품도 업데이트 될 예정인 ‘집’을 가질 수 있는 티켓과 손재주 보너스 10, 3등은 재봉틀 세트와 손재주 보너스 5입니다.”
     운영자가 말을 마치자 이벤트에 참가하는 유저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1, 2등은 괜찮다 쳐도 3등은 너무한 것 같았다. 1, 2등은 집을 구입할 수 있는 티켓인데 3등은 재봉틀 세트라니. 내가 고개를 젓고 있을 때 운영자가 입을 열었다.
     “이벤트, 오픈.”
     번쩍!
     운영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분수대 광장엔 20여개의 세로로 갈라놓은 집과 집안에 여러 가지 잡화물품이 들어 있는 커다란 상자가 생겼다.
     “우와!”
     “저것 좀 봐!”
     탄성을 지르는 유저들. 물로 나도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지금 세워둔 것은 이번 업데이트에 쓰일 ‘집’을 셀로 가라 놓은 것입니다. 생활필수품을 만들어 관람하는 유저들의 반응에 따라 순위가 매겨집니다. 그러 지금부터 이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좋아!”
     동그란 무테안경을 쓴 여성 유저가 팔을 걷어 올리며 정중앙에 세워진 집으로 달렸다. 그러자 다른 유저들도 각자 맘에 드는 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서 가봐요, 레드. 저는 여기서 응원하고 있을게요.”
     “하하… 네. 퀵 스텝!”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제일 우측에 위치한 집으로 달리는 나를 보며 다른 유저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궁탑의 제자다!’ 이런 식이었다. 2층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
     중앙에 위치한 벽난로 때문인지 집은 무지 아늑해 보였다.
     “손이 근질근질한데? 뭐부터 만들까나? 우선 활이랑 화살은 아이템 차에 넣어둬야겠다. 아이템 창, 오픈!”
     파밧!
     나는 등에 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허리춤에 찬 화살을 아이템 창에 조심스레 넣어두고 아이템 창을 닫았다. 루카는 집 앞에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무기를 아이템 창에 넣은 무방비 상태에 습격하는 적들을 대비하는 것 같았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루카였다. 나는 그런 루카를 보며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고맙다. 루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머리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던 백호가 말을 걸어왔다.
     “마서트, 이제 뭘 하는 거예요?”
     “응? 아, 이제 잡화물품으로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너희들 잠시 저쪽에 가서 놀고 있을래?”
     “네.”
     “그러지.”
     “네~.”
     “나는 구경할래.”
     내 몸에서 내려와 다른 곳으로 가는 다른 정령들과는 달리 구경을 하겠다며 내 머리 위로 올라오는 현무. 나는 피식 웃으며 잡화물품이 쌓인 상자로 다가갔다. 비늘과 실, 가죽, 솜 등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잘 정리된 상자에서 나는 굵고 붉은 실과 새하얀 굵은실, 그리고 질긴 붉은 가죽을 꺼냈다.
     “좋아. 나무로 된 바닥 위에 붉은 카펫을 까는 거야.”
     나는 바늘구멍에 새하얀 굵으실을 조심스레 끼워 넣고 온 신겨을 지중시켜 바느질을 해나갔다. 로시토에게 받은 손목 보호대와 비슷하게 만들 카펫. 붉은 바탕에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샤를 새겨 넣을 생각이었다.
     커다란 가죽을 넓게 펼쳐 그 가운데에 새하얀 굵은 실로 루카의 형상을 만들어 나갔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빠르게 바느질을 해 나가는 나를 보며 현무가 입을 열었다.
     “우와. 형 그림 그리는 거야?”
     “아니. 이건 바느질이라고 하는 건데, 생활 스킬 중 천옷만들기에 속한 거야. 부분적으로 Ep 와서 이런데다가 쓸 수도 있지.”
     “이야!”
     현무의 감탄사를 들으며 나는 빠르게 바느질을 해 나갔다. 회색의 실과 검은 실까지 총동원해 카펫이 정중앙에 루카의 모습이 새겨졌다.
     까만 눈동자와 새하얀 털. 쫑긋 세운 귀. 길쭉한 다리와 멋진 꼬리. 루카의 모습을 완성시킨 나는 붉은 실을 꺼내 바느질하기 시작했다. 바탕색을 칠하든 나는 열심히 바느질을 해나갔다.
     이내 완성 된 붉은 카펫. 붉은 카펫 위에 놓일 사람 한 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쿠션이 필요했다. 카펫 위에 소파를 놓는 건 이제 너무 식상한 것 같았다.
     나는 상자엣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 정리된 토끼의 가죽을 최대한 많이 꺼내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대충 쿠션의 형태를 잡은 뒤 양털을 가공해 만든 솜을 가득 채운 뒤 솜이 빠져나오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꿰맸다.
     등을 기대고 편히 쉴 수 있는 쿠션. 나는 내가 만든 쿠션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이야~ 편하다. 이 정도면 됐어. 세 개 정도 더 만들고 루카 같은 애완동물(?)이 쉴 쿠션도 만들어야겠는 걸?”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가죽을 꺼내 바느질을 해나갔다. 사냥을 하는 것보다 더 재밌고 더 신났다.
     “좋아. 이제 솜을 넣어볼까?”
     순식간에 같은 모양의 쿠션을 세 개나 더 마든 나는 솜을 가득 채우고 솜이 빠져나오지 않게 꿰맸다. 루니오스 카이샤가 새겨진 붉은 카펫 위에 새하얀 쿠션 네 개를 올려둔 나는 뭔가 부족한 것을 느꼈다. 도대체 뭐가 부족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시선을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루카에게로 고정시켰다. 루카가 깔고 앉을 쿠션을 잊고 있었군. 나는 즉시 부드러운 토끼 가죽을 꺼내 넓적하게 꿰매기 시작했다.
     솜을 너무 넣으면 루카가 깔고 앉을 수 없기 때문에 솜을 얇고 평평하게 깔아 넣고 최대한 푹신푹신하게 만든다. 솜이 빠져 나오지 않게 꿰맨 나는 벽난로 근처에 두었다.
     ‘루카를 앉혀보는 건 어떨까?
     나는 밖에서 주변을 배회하는 루카를 보며 생각했다. 한 번 앉혀보는 것도 괜찮겠지? 나는 자라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루카! 이리와!”
     내 목소리를 들은 루카는 총알처럼 튀어와 나를 빤히 보고 앉아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저 쿠션에 앉아봐.”
     내가 손짓하자 루카는 꼬리를 흔들며 벽난로 옆에 둔 쿠션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넓적하게 만들어 루카에게 딱 맞는 쿠션. 쿠션이 포근한지 루카는 앞다리에 코를 묻고 눈을 감았다.
     대충 거실을 꾸민 나는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부엌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에 뭘 만들까? 곰곰이 생각을 하던 나는 잡동사니가 잘 정리된 상자로 달려가 나무토막과 천을 꺼냈다. 그리고 아이템 창에서 손잡이 끝에 붉은 구슬이 박힌 단검을 꺼내 나무토막을 깎아 다용도국자를 만들고 천에 십자수를 놓아 귀여운 토끼얼굴이 수놓인 행주를 만들었다.
     “음… 또 뭘 하면 좋을까?”
                   *    *     *
     “레이어. 티르 네티아에서 궁탑의 제자에게 패했다는 게 사실이냐?”
     “…마, 맞습니다. 마스터.”
     커다란 낫을 든.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얼굴엔 실눈을 뜨고 미소 짓는 새하얀 고양이 가면을 쓴 유저의 말에 기사 유저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유저가 입을 열었다.
     “네가 최초로 길드의 이름에 먹칠을 했구나.”
     “죄, 죄송합니다…….”
     “그 녀석의 이름은 알고 있나?”
     “이름은 모르고 있습니다. 커다란 활을 쓰고 흰 늑대를 데리고 다니는 키가 작은 유저입니다.”
     “그렇군.”
     기사 유저의 말에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유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사유저는 고개를 숙인 채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몸이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유저에게 느끼는 공포심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티르 네티아에 있는 길드원 전원에게 알려라.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를 착살하라고.”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창 집을 꾸미고 있을 때, 운영자 추가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얼레? 벌써?’
     한참을 재밌게 꾸미고 있는 나에겐 별로 반갑지 않은 한 마디였다. 거실은 붉은 카펫과 쿠션으로 잘 꾸며져 있었고 부엌은 국자와 행주, 그리고 선반과 작은 잡화물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벽에 걸 액자를 열심히 만드는 도중에 슬슬 마무리 지으라니, 이건 좀 너무 하잖아! 나는 만들고 있던 액자를 서둘러 완성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지금까지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심사를 하겠습니다. 관람을 하는 유저들의 반응과 생활필수품의 실용성을 보고 순위를 매기도록 하겠습니다.”
     운영자 추의 말에 소규모 이벤트에 참가한 유저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다른 유저들이 만든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아무리 손재주 스탯이 높다고 해도, 전문적으로 여러 생활직을 다루는 유저들의 디자인과 배치도를 비교하면 내 작품은 아직 그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하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 이벤트에서 상을 못 받는다고 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고 직접 생활필수품으로 집을 꾸몄다는 성취감만으로도 만족했다. 나의 예상대로 나는 순위권에 들지 못 했고, 화려하게 꾸민 세 유저가 상품을 받으며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음? 소규모 이벤트라 그런지 조금 허무하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벤트용으로 꺼내 놓았던 세로로 갈라놓은 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루카와 네 정령들은 이벤트가 끝나자 쏜살같이 나에게 다가왔다.
     당연하단 듯이 내 머리 위에 올라앉는 백호와 내 왼쪽 팔뚝에 자신의 몸을 휘감는 청룡, 그리고 내 왼쪽 어깨 윙 새빨간 깃털을 가진 주작이 앉았고 현무는 지면위로 헤엄치며 내 발등 위에 올라앉았다. 새하얀 털을 가진 루카는 까만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수고 했어요, 레드.”
     멀리서 지켜보던 레온이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생활직을 전문적으로 하는 유저들과는 비교할 수 없네요. 배치도나 디자인 면에서나…….”
     “그래도 제가 볼 땐 훌륭한 작품이었어요. 멋지던 걸요.”
     “하하. 그런가요?”
     레온의 칭찬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벤트도 끝났으니 이제 악기연주 스킬 수련치만 올리면 되겠군. 나는 아이템 창에서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화살통을 꺼냈다. 화살통을 허리춤에 차고 활을 등에 메고 있을 때, 레온이 급히 말하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성에서 호출이 왔네요. 그만 일인 것 같아요.”
     “그래요?”
     “네. 다음에 뵈요, 레드. 워프!”
     반짝이는 새하얀 빛이 레온을 둘러쌓자 레오의 몸은 새하얀 빛에 뒤덮여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이벤트도 끝났으니 악기연주 스킬이나 올리면 되겠군.
     나는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공터에서 악기연주 스킬을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왜냐면, 시끄러운 광장보다 조용한 공터에서 류트의 맑은 음을 들으며 연주 스킬 수련치를 올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터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레드 파운! 당신에게 대련 신청을 합니다!”
     “네?”
     나는 낯선 음성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손에는 자신의 몸에 비해 큰 롱보우가 들려 있었고 등에는 화살이 넉넉히 들어 있는 화살통을 메고 있는,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 같은 앳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였다.
     난데없이 대련신청을 하는 유저, 나는 당황한 채 입을 열었다.
     “응? 대, 대련?”
     “네!”
     자신의 롱 보우의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건 어린 유저가 화살 하나를 꺼내들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소년의 까만 눈동자가 사파이어를 박은 것처럼 차갑고 새파랗게 변했다. 아마도 헌터 아이인 것 같았다.
     헌터 아이는 적안과 비슷한 스킬로, 먼 곳의 사물을 집중적으로 보거나 빠른 움직임을 자세히 포착할 때 쓰이는 스킬이었다. 소년의 몸집은 작았지만 기세만큼은 여느 성인 유저보다 거대했다. 이미 대련할 준비를 다 갖추고 덤벼들 것만 같은 유저. 거절을 하기엔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난감하군.’
     나는 하는 수 없이 대련을 승낙했다. 대련을 할 때 유저의  몸을 둘러싸는 푸른빛이 어린 유저와 내 몸을 뒤덮자, 소년의 입꼬리가 알게 모르게 올라가 있었다.
     ‘빨리 끝내고 스킬이나 올리자.’
     나는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나의 화살을 본 소년의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하긴, 창인지 화살인지 대충 훑어보면 분간하기 어려운 게 내 화살이니까.
     나는 등에 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들고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활시위를 살짝 튕기자 활시위의 맑은 음이 들려왔다.
     “시작하자.”
     “네! 퀵 스텝!”
     대련을 시작하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면을 박차고 다가오는 어린 유저. 순식간에 나에게 다가온 유저가 활을 휘두르며 외쳤다.
     “보우어택!”
     터엉!
     소년의 활은 내 몸에 채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벽과 충돌했다. 약간의 마나가 감소된 것으로 보아 백호가 실드를 형성한 것 같았다. 소년은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백스텝을 이용해 거리를 두었다.
     ‘호오… 실전을 통해 경험을 많이 쌓은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나도 궁수와 붙는 건 처음이군. 방심하면 안 되겠어.’
     나는 어린 유저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것을 알아챘다. 방금 전에도 백호가 아니었다면 선제공격에 몸을 내주는 상황이 되었을 테니까. 나는 긴장을 풀고 외쳤다.
     “퀵 스텝!”
     나는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었다. 활시위는 소년을 향해 당겨져 있었고,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소년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아앗! 백스텝!”
     재빠리 백스텝으로 내 화살을 피해낸 소년. 피할 것을 미리 예측한 나는 재빨리 화살 두 개를 꺼내 활시위를 당겼다.
     “더블 샷!”
     쐐애액.
     터텅!
     지면에 깊숙이 박힌 세 개의 화살.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유저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궁탑의 제자와 어린 궁수 유저가 대련을 한다고 외치며.
     갑자기 개미 떼처럼 모여든 유저들의 시선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빨리 지면에 착지한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스터, 화살의 속도를 올리까요?”
     “아니. 저대로 그러지마. 너희들 절대로 나서면 안 된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백호의 말에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정령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 실력으로 승부하고 싶었던 나는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건채 퀵 스텝을 걸고 소년에게 빠르게 내달렸다.
     “적안!”
     적안을 개안하자 시력이 확실히 달라진 것을 느꼈다. 근시를 가진 사람들이 안경을 꼈을 때와 끼지 않았을 때의 차이점이랄까? 소년과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나는 재빨리 소년에게 화살을 쏘았다.
     그가 화살을 피해 어느 쪽으로 튀어나올 것인지 미리 예상한 나는 다시 퀵 스텝을 걸고 재빨리 몸을 날려 활을 휘둘렀다.
     “보우어택!”
     퍼억!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어린 유저의 안면을 강타했고, 어린 유저는 그대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안면이 심하게 함몰되어 있었고 피까지 흘러나오는 상황이었다. 이것으로 상황종료.
     소년과 내 몸을 둘러싸고 있던 푸른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흉측하게 함몰되었던 소년의 얼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곱상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쓰러져 있던 소년이 급히 사체를 일으키며 소리쳤다.
     “아앗! 져버렸다!”
     “멋진 승부였다. 꼬마야.”
     나는 어린 유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소년이 내 손을 잡고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꼬마가 아니에요. 미토라는 멋진 이름이 있다구요.”
     “오호. 멋진 이름이구나. 처음에 백호가 실드로 네 공격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네가 이겼을 거야. 궁수가 처음부터 그렇게 치고 들어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
     “어쩐지, 내 활이 형의 몸에 채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무언가와 충돌하더라고요. 역시 궁탑의 제자는 못 당하겠군. 이런 식으론 로빈훗을 따라잡는 것도 무리겠어.”
     “로빈훗을 따라 잡아?”
     소년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소년이 고개르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럼 저는 가볼게요. 고마웠어요. 퀵 스텝!”
     자기 할 말만 하고 많은 인파 사이로 사라져버린 어린 유저. 어린 유저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등에 메고 화살을 회수했다.
     대련이 허무하게 끝나자 지켜보던 유저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안 봐도 뻔한 결과였다면서. 화살을 전부 회수한 나는 조용한 공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터엔 유저가 몇 없었다.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유저,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커플 유저, 근처의 호수에서 낚시를 즐기는 유저 등 몇 안 되는 유저들만이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일을 뿐이었다.
     나는 근처 적당한 벤치에 앉아 아이템 창을 열어 류트를 꺼냈다 옅은 붉은빛을 띤 류트가 햇빛을 받아 광택을 내고 있었다. 스킬 북을 꺼내 연습용 악보를 펼쳐놓은 나는 류트의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띠링. 띠리링.
     류트의 맑은 음이 바람을 타고 공터에서 메아리쳤다.
                   *    *     *
     고 레벨의 유저 여럿이 파티를 맺어야 순조롭게 사냥이 가능한 지하 던전.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더더욱 강한 몬스터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던전도 던전 나름이고 보스 몬스터는 다른 법이다.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지역의 깊은 지하 던전 ‘미궁’.
     “아악! 안 돼!”
     퍼퍽!
     “쿼워어어엉!”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주먹에 제물이 된 은빛 플레이트 메일 차려입은 유저. 게임오버가 되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시체는 보기 흉하게 함몰되어 있었다. 피를 잔뜩 뒤집어 쓴 미노타우로스에게 감히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제길, 이럴 때 마법사라도 있었으면!”
     부들부들 떨며 소리치던 유저가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5m에 달하는 육중한 거구가 괴성을 지르며 유저에게 다가갔다.
     유저의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미노타우로스의 가슴팍을 맞추었지만, 미노타우로스는 끄떡하지 않고 거대한 손으로 궁수유저를 집어 들고는 자신의 아가리에 넣고 씹었다. 미노타우로스의 이빨 사이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정말 끔찍한 광경이었다.
     “지원군들은 왜 안 오는 거야! 그나마 잘 나간다는 유저들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다니. 유저들의 벨런스가 맞지 않아서 그런 건가?”
     광폭해져 있는 미노타우로스에게 섣불리 접근을 하지 못하고 던전의 방 한 구석에 모여 있었다. 이대로 로그아웃을 한다고해도 다시 미궁의 보스 방에서 부활을 하게 될 것이고, 던전의 보스 방에서는 마을 귀환 스크롤이나 워프 스크롤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함부로 개인행동을 하지 못했다.
     결계가 쳐져 있는 보스 방의 문.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땐 별 지장이 없으나,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보스가 쓰러진다면 결계는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보스가 리젠 되다면 또 다시 결계가 쳐지는 것이다.
     쿠워어어어어어!
     “지원구운!”
     보스 방의 한쪽 구석에 모여 있는 유저들에게 미노타우로스가 괴성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고 공포에 떨던 유저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바닥의 마찰이 본질을 무시할지어다, 그리스!”
     어디선가 들려온 잔잔한 음성. 그와 동시에 유저들에게 달려들던 미노타우로스는 바나나껍질을 밟기라도 한 듯 뒤로 벌렁 넘어져 버렸다.
     모두의 시선은 보스 방 입구로 집중되었다. 흰색과 붉은색으로 어우러진 마법사 모장 갈색 뿔테 안경을 끼고 흰색과 붉은색으로 어우러진 로브를 걸치고 긴 스태프를 들고 있는 마버사유저였다.
     “지, 지원군인가?!”
     “호, 혼자?”
     “마, 마법사야!”
     “마, 마성의 현자다!”
     궁지에 몰려 있던 유저들의 두 눈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미노타우로스가 고개를 돌려 마법사 유저를 응시했다.
     움머어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미노타우로스가 괴성을 지르며 마법사 유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화염의 장벽이 내 앞의 적을 가로막으리라, 파이어 월!”
     미노타우로스가 마법사 유저에게 가가이 다가가기도 전에 시전된 파이어 윌. 갑자기 생겨난 불의 장벽에 미노타우로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불의 장벽을 경계했다. 마법사 유저는 어리둥절해 하는 미노타우로스를 보며 재빨리 마법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화염구가 내 앞에 나타날 지어다, 파이어볼, 파이어볼, 파이어볼, 파이어볼!”
     네 개의 황염구가 시저자의 몸을 빠르게 맴돌기 시작했고 마법사 유저가 손짓하자 타오르는 네 개의 구체가 기염을 토해내며 표적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화르륵.
     퍼퍼퍼펑!
     “나 레온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불길이 솟아나리라, 블레이즈! 헤이스트!”
     네 개의 타오르는 화염구가 미노타우로스를 맞추기가 무섭게 또다시 시동어를 외친 마법사 유저가 보스 방을 가로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마법사 유저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불길이 형성되었고 보스 방엔 어느 새 타오르는 불길로 가득하게 되었다.
     어리둥절해 하던 미노타우로스가 정신을 차리고 마법사 유저에게 팔을 뻗었다.
     “아앗!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내 앞의 적들을 베리라, 윈드커터!”
     서걱.
     미놑우로스의 거대한 손목을 잘라버린 바람의 칼날. 미노타우로스의 잘려나간 손목에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사 유저를 지켜보던 유저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른손이 달아나자 미노타우로스는 더욱 더 흉포해졌다. 불길을 무시한 채 마법사 유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고 불의 장벽까지 헤치고 들어와 남아 있는 왼손으로 마법사 유저를 낚아채 손아귀에 힘을 강하게 쥐었다.
     손아귀에 힘을 잔뜩 주던 미노타우로스가 손바닥을 펼치자 미노타우로스의 손엔 아무 것도 없었다.
     “멍청한 소야. 그건 미러 이미지다.”
     미노타우로스와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마법사 유저가 스태프를 들고 팔짱을 낀 채 피식 웃고 있었다. 또다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미노타우로스를 보며 마법사 유저가 팔짱을 풀고 왼손을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편 채 입을 열었다.
     “이제 끝장을 내야겠구나. 휘몰아치는 바람의 광산이 내 앞의 적을 찢어발길 지어다, 윈드 캐논!”
     푸슝!
     휘오오.
     쫘아아악!
     “쿠에엑!”
     미노타우로스의 머리에 명중한 윈드캐논.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갈가리 짖겨져 버렸다.
     “휴우.”
     머리가 사라진 미노타우로스는 더 이상 일어서지 못했다. 미노타우로스가 죽은 것을 확인 한 마법사 유저가 구석에 모여 있던 유저들에게 근거리 공간이동마법을 사용해 다가가 입을 열었다.
     “마법사의 성에서 지원군으로 보내오게 된 마성의 두 번째 현자 레온이라고 합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    *     *
     악기 연주 스킬을 수련치를 얼마나 올리고 있었을까. 연습용 악보 정도는 이제 안 보고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늘어나 있었다.
     “마스터,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것 같아요!.”
     “그래? 고맙다, 주작.”
     “아이! 고마울 것 깐진 없는데!.”
     주작의 애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류트의 맑은 음을 들으며 배를 깔고 엎드려 잠이 든 루카. 나는 잠시 류트를 벤치에 올려놓고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여운 놈…….”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던 나는 류트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제법 연주 실력이 늘었으니 음유시인 유저들이 직접 작곡한 곡들을 연주해 보는 것도 좋겠군.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류트와 연습용 악보를 던져 넣고, 아이템 창을 닫고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주받은 망자의 무덤에 가실 검사분 구합니다! 렙제 15이상, 40이하요!”
     “오크의 숲에 가실 성직자 유저 구해요! 랩제 30이상이면 다돼요!”
     어쩌고저쩌고!
     웅성웅성!
     수많은 유저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분수대 광장. 나는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 좌판을 깔고 아이템을 파는 유저들이 모여 있는 벼룩시장으로 향했다.
     광장보다 더더욱 시끄러운 벼륙시장. 서로 아이템을 팔겠다고 소리치는 유저들. 소리를 지르지 않더라도, 좌판을 깔고 앉아 있으면 머리 위에 직사각형의 입체 창에 뜨게 된다. 자신이 팔물건에 해당되는 것들을 적어두면, 알아서 사갈 것을 저렇게 팔다니, 이거야 원.
     벼륙시장을 쭉 둘러보고 있을 때, 류트로 보이는 악기를 들고 있는 유저가 좌판에 앉아 시무룩하게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음유시인 같아 보이는데, 악보를 팔려나?’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유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오렌지색의 긴 생머리에 깃털이 꽂힌 하얀 고깔모자를 쓰고 잘 다려진 흰 천 옷을 입고 있는 여성 유저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유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미도조차 하지 않았다.
     “저, 저기요…….”
     “네, 네?!”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화들짝 놀라며 말하는 여성 유저. 새까만 눈동자에 오뚝한 코, 작고 아담한 입술과 뽀얀 피부를 가진, 귀엽게 생긴 유저였다(티아보다 예쁘지 않다). 나는 또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악보 같은 거 파나요?”
     “네, 네. 저는 악보만 취급하거든요. 손님이 하도 오지 않아서 잠시 졸고 있었는데, 놀라셨죠?”
     “아, 아뇨…….”
     나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내 앞에 작지 않은 직사각형의 입체 창이 뜨면서 여러 가지 악보가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많은 악보를 다 혼자 작곡한 건 아니겠지? 정신없이 악보를 훑어보고 있을 때,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어떤 종류의 악보를 찾으세요?”
     “음… 그냥 가슴이 뭉클해지는 곡이라고 해야 되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때 쓸 곡을 찾는 거죠?”
     내가 뜸을 들이며 대답을 할 때 여성 유저가 재빨리 대답했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성 유저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 제 말이 맞았나 봐요? 음 제가 추천해 드릴 곡은 이 곡이에요. ‘너만 있으면’이라는 곡인데 뭐랄까. 가슴이 뭉클해지면서도 뭔가 감동적인 곡이라고 해야 할까요?”
     여성 유저가 입체 창에서 분홍색 악보를 꺼내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나는 여성 유저가 건네주는 악보를 받아 쭉 훑터보기 시작했다. 연습용 악보보다 훨씬 어려운 곡이었지만, 연습만 하면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악보를 쭉 훑어보며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여성 유저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야 머리엔 고양이, 어깨엔 새, 팔엔 뱀? 어머, 뱀치고 되게 귀엽다? 그리고 발등에 거북이랑 뒤에 있는 진돗개! 테이머 이신가요?”
     “아하하… 뭐 거의 그런 셈이죠…….”
     내 몸에 붙어 있는 청룡, 주작, 백호, 현무 그리고 내 옆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루카를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는 여성 유저. 다른 건 이해가 가지만 진돗개라니.
     나는 피식 웃으며 진돗개라니.
     “얼마죠?”
     “음… 제가 꽤 정성들여 쓰기는 했지만, 제 악보를 처음 사가는 유저시니 싸게 40브론즈에 드릴게요.”
     “헉? 너, 너무 싼 거 아닌가요?”
     “아, 아. 괜찮아요. 악보 파는 것 말고도 다른 일로 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 어서 주세요. 40브론즈.”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이템 창을 열었고 40브론즈를 꺼내 유저에게 건네주었다. 돈을 받은 유저가 생긋 웃으며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쳤고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악보를 사면서 느낀 거지만, 여성 유저에게 처음 말 걸때 이외엔 몸이 굳지 않았다. 선천적인 ‘여자 공포증’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잡화점으로 향했다.
                   *    *     *
     세릴리아 월드 사장실에서 사장과 개발팀장, 그리고 이번 소규모 이벤트를 개최한 추정익 운영자(운영자 추(秋)와 다른 몇몇의 운영진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세릴리아 월드의 총 책임자이자 사장인 김민재 사장이 입을 열었다.
     “추 운영자님. 아까 이벤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럭저럭 잘 되었습니다. 소규모 이벤트라 그런지 스무 명도 채 되지 않는 유저들이 참가했고요.”
     “그렇군요.”
     운영자 추정익군의 말에 김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김 사장이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실 때 운영자 추적익군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이벤트에 김여수 팀장님께서 주시하라는 유저가 참가했습니다.”
     “주시하라는 유저라뇨?”
     차를 마시던 김 사장이 추 운연자의 말에 즉시 대답해꼬, 표정이 심각하게 굳은 김 팀장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세릴리아 월드에 가입한 지 세 달 만에 방직, 잡화물품, 생활필수품, 천옷만들기, 제련, 블랙스미스 이 여섯 가지스킬을 마스터한 유저가 있었습니다. 혹시 버그를 쓰는 건 아닌지…….”
     “세, 세 달 만에 여섯 가지 생활직을 마스터했다구요? 그 유저의 이름이 뭡니까?”
     “레드 파운이라고 합니다. 아까 이벤트를 개최했을 때 참가한 유저들을 모두 살펴봤거든요.”
     김 팀장의 말에 김 사장이 놀라서 물었고, 추 운영자가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김 사장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레드 파운이라… 또 다른 특별한 건 없습니까?”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였습니다. 게다가 레벨에 비해 손재주 스탯은 월등히 높았습니다.”
     “레벨은 몇이고 손재주는 몇이었죠?”
     김 사장이 주저 없이 내던지는 질문에 추 운영자는 대답하느라 바빴다. 추 운영자가 입을 열었다.
     “레벨 55에 손재주 스탯이 429였습니다.”
     추 운영자의 말에 사장실에 있던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김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 그래. 그래서 이번 이벤트에서 1등을 한 유저가 레드 파운인가 하는 유저냐?!”
     “진정하세요, 김 팀장님. 레드 파운은 순위권에 들지 못했습니다. 디자인이나 다른 겉.보기 면에서 말이죠. 그가 제작한 아이템의 내구도와 다른 유저들이 제작한 아이템의 내구도를 비교했을 때 그 차이가 심했습니다. 레드 파운 유저의 아이템 내구도가 압도적을 높았습니다. 아,그리고 버그 같은 건 전혀 쓰지 않는 성실 유저였습니다.”
     “허허.”
     김 팀장이 자리에 앉으며 헛기침을 했다. 김 팀장이 자리에 앉자, 김 사장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지금 여기 계신 팀장님과 여러 운영진분들은 세릴리아 월드가 어떤 곳인지 알고 계시지요?”
     “자아를 가진 NPC들이 살아가는 또 다른 세계… 맞죠?”
     김 팀장의 대답에 김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세릴리아 월드를 또 다른 세계라고 가정하면 운영진 분들은 그 세계의 신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NPC와 몬스터들은 그 세계를 창조한 신들의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듯, NPC와 몬스터들은 세릴리아 월드에서 자신들의 정해진 삶을 자유롭게 살고 있습니다. 현재 수많은 왕국과 제국들이 세릴리아 월드엔 가득 할 겁니다. 우리의 피조물이 아닌 제 3자인 유저들이 우리가 창조한 세릴리아 월드에서 역사를 바꿔놓는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김 사장의 말에 사장실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 사장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말이 길어졌네요. 아무튼 소규모 이벤트가 잘 끝나서 다행입니다. 이번에 패치한 ‘집’의 호응이 좋아서 다행이군요.”
    *    *    *
     “그래서, 순위군에 못 들었다는 얘기구나?”
     “네.아쉽긴 하지만 뭐 괜찬하요. 제가 직접 집을 꾸몄다는 성취감이란 게 있었거든요. 아, 그리고 이제 연습용 악보 없이도 류트 연주를 할 수 있어요.”
     “그렇구나.”
     벨터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까 구입한 ‘너만 있으면’이라는 곡을 잡화점 앞 테이블에 펼쳐놓고 류트의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첫 연주는 엉망이었다. 평소에 인상을 쓰지 안흔 벨터가 인상을 쓸 정도로. 게다가 저령 녀석들은 한 술 더 떴다.
     “마스터…….”
     “형! 연주 되게 못한다. 크크크.”
     “마스터! 그만하면 안 돼요오~?” “그딴 식으로 연주할 거면 그냥 때려 치워라.”
     왕왕!
     백호와 현무, 주작과 청룡이 각자 한마디씩 내뱉었고 곁에서 지켜보던 루카도 신경질적으로 짖었다.
     “청룡, 주작, 백호, 현무! 니들 다 강제 역소환! 그리고 루카, 너 조용히 안 하면 혼난다?”
     끄응… 캉캉!
     네 정령들을 모두 강제 역소환 시키고 루카를 따끔히 혼내준 나는 또다시 악보를 보며 류트의 현을 튕겼다.
     처음엔 무지 듣기 괴로웠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아졌고,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듣기 거북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악기연주 연습에 몰두해 있을 때였다.
     [티아 젠 님께서 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어라?”
     티아가 걸어온 대화. “승인”이라고 외치기가 무섭게 티아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빠! 어디야?
     “응? 나 지금 세인트 모닝인데, 왜?”
     -으응. 아니. 내가 조금 늦게 접속한 것 같아서… 숙제 좀 하느라고 늦었는데 용서해 주세요~ 응?
     “응. 그, 그래.”
     갑작스레 애교를 부리는 티아. 뭐 그만큼 친해졌다는 거겠지. 내가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또 다시 티아가 말하기 시작했다.
     -아리스 노아에는 언제 올 거야?
     “음… 글쎄. 모르겠다.‘
     -우웅… 그래? 그럼 난 친구들이랑 사냥하고 있을 테니까, 아리스 노아에 오면 대화 좀 걸어주기다?
     “응, 그래.”
     -응~.
     [티아 젠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대화를 끝마치고 류트를 잡자 벨터가 말을 걸어왔다.
     “허허. 누구랑 대화하기에 그렇게 웃으면서 하는 거냐?”
     “몰라도 돼요. 크크.”
     벨터의 말에 짧게 대답한 나는 류트의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이제 제법 나이진 악기연주. 내가 연주하는 류트의 맑은 음에 매료되어 계속해서 류트의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이 곡을 악보 없이 연주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연습을 해야겠군.
     한참 연습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레드!”
     “음? 왜요, 벨터?”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대답정돈 해 줘야 되지 않겠니?”
     “음? 뭐가요?”
     “내가 너를 세 번 정도 불렀다.”
     “아, 그래요? 죄송해요.”
     나는 류트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벨터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할 것까지야. 레드 열심히 하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무리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네.”
     “연습 하던 것 마저 하거라. 그건 그렇고 오늘 하루 안에 악보를 외우고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겠니?”
     “물론이죠.”
     자신감이 넘치는 나의 대답에 벨터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시선을 악보에 고정시킨 채 류트를 집어들고 열심히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악기연주를 마스터 할 생각은 없다. 그저 이 곡을 악보 없이, 아주 완벽하게 연주할 정도까지만… 오늘 하루라는 시간 안에 연습을 끝마칠 생각으로 독하게 연습을 할 것이다.
    *   *    *
     유저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수도 세인트 모닝의 작은 주점 ‘Just(저스트)’.
     좁고 어두운 주점 안에 접시를 닦고 있는 NPC와 작고 초라한 테이블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데 명의 유저가 있었다. 세유저 모두 맥주잔을 들고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갈색의 머리를 삐죽삐죽 세운 혁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이제 곧 2차 전직을 하겠군. 그치?”
     “음. 그렇지. 강찬이가 제일 먼저 할 것 같은데?”
     검푸른 색의 단발 수준의 긴 머리에 미남형의 외모를 가진 경훈이 대답했다. 그러자 강찬이 맥주를 들이켜고 이을 열었다.
     “혁아. 지금 네 레벨이 몇이지?”
     “79지.”
     혁이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대답했다.
     “얼른 분발해서 80대에 들어와야지?”
     “시끄러 이 새끼야. 지도 이제 막 80이 된 주제에.”
     경훈이 약 올리자 혁이 짜증내며 대답했다. 그것을 즐기는 듯 또 다시 경훈이 입을 열었다.
     “어라? 소심한 A형? 삐졌네? 얼른 1업해라.”
     “아우! 그냥! 지금 여기서 한 번 붙어 볼래? 대련 한 번 할까?”
     바닥에 내려두었던 모닝스타를 집어든 혁. 잔뜩 흥분했는지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경훈아, 혁아. 그만 해. 여기까지 와서 싸우기냐?”
     강찬의 말에 혁은 모닝스타를 바닥에 내려두고 자리에 앉았다. 화가 풀리지 않았나본지, 혁은 계속해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지켜보던 강찬이 입을 열었다.
     “이제 사냥터를 바꿔야겠어. 내일부터 미궁에 가는 게 어때?”
     “미궁? 우리 레벨로 가능할까?”
     옆에서 지켜보던 경훈이 묻자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가능하지. 든든한 후원자 현성이만 동참해준다면.”
     “그 녀석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경훈이 짧게 대답했다. 이제 좀 화가 풀렸는지 혁이 포크로 샐러드를 집어 한 입 먹더니 입을 열었다.
     “니들 2차 전직은 뭐로 할 거냐?”
     “나는 화염계열 대마검사.”
     “나는 파이터.”
     혁의 물음에 강찬과 경훈이 대답했다. 2차 전직 이야기가 나오자 강찬과 경훈은 극도로 진지해졌다. 아주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고, 정적을 깨며 경훈이 입을 열었다.
     “혁이 넌?”
     “난 팔라딘.”
     “팔라딘?”
     “응.”
     “사제 계열의 직업이 팔라딘으로 갈 수 있는 거야?”
     “자는 전투 클레릭이잖아. 검사들이 전직하는 팔라딘과는 조금 다른 팔라딘이지.”
     “그렇구나.”
     혁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현성이랑 대화 좀 해야겠다. 월드 타임(세릴리아 월드 시간)으로 내일 시간 되는지.”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강찬이 입을 열었다. 강찬의 대화 요청이 승인되었는지, 강찬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현성아. 오랜만이다.”
     -오, 강찬. 무슨 일이야?
     “월드 타임으로 내일 시간 되냐?”
     -응? 될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근데 왜?
     “미궁이라고 알아?”
     -미궁?!
     강찬이 피식 웃으며 말했고 현성은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갑작스레 대화를 건 강찬. 게다가 미궁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류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입을 열었다.
     “거기가 어딘데?”
     -내일 가보면 알아. 아무튼 시간 돼, 안 돼?
     “끄응… 뭐, 일단 돼.”
     -그래? 그럼 내일 월드 타임으로 오후 9시에 티르 네티아에서 만나자.
     “그래. 알았다.”
     나는 짧게 대답을 하고 대화를 끊었다. 미궁이 뭔지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현재 악기연주가 더 급했다. 이젠 악보 없이 눈을 감고도 연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다만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지 않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붉은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자 하늘은 붉게 물들었다.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류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됐다. 이 곡. 완벽하게 마스터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테이블 밑에서 품에 코를 박고 잠을 자던 루카가 일어났는지 밖으로 나와 개처럼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노을. 지는 태야의 빛을 받아 새하얀 도시 세인트 모닝은 붉게 물들고 있었고, 유저들은 하나 둘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류트와 악보를 던져 넣고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화살통을 꺼내 활은 등에 화살통은 허리춤에 차고 어질러진 테이블을 정리했다.
     “후우. 이제 궁스의 탑에 가볼까?”
     나는 잡화점 안으로 들어가 서류를 정리하는 벨터를 볼 수 있었다. 갈색의 잛은 머리에 이마에 미세한 주름 한 줄기. 큼지막한 눈과 높은 콧대, 그리고 콧수염과 굳게 다문 입. 벨터의 시선은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고 표정은 무지 심각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벨터?”
     서류를 응시하던 벨터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었고, 심각했던 벨터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밝아졌다. 벨터가 말했다.
     “음? 벌써 연습을 끝낸 거니?”
     “예, 이만 가보려고요.”
     “그래. 나는 밀린 서류 정리를 해야 해서 조금 바쁠 것 같구나. 그럼 다음에 또 놀러 오거라.”
     벨터의 말에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잡화점 문을 열고 나와 궁수의 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로시토도 만나 봐야하고, 게다가 받아야 할 스킬 북도 있었다. 바로 ‘트리플 샷'
     넓은 들판에 전보다 더 많아진 과녁과 탁자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위치한 새하얀 탑.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고 궁수의 탑으로 입구로 들어가 맨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크흠.”
     꼭대기 층에 위치한 로시토의 방 앞에서 나는 헛기침을 하고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게나.”
     오랜만에 듣는 정겨운 목소리. 나는 두 손으로 문을 힘껏 밀었다.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로시토. 가지런히 빗어 넘긴 새하얀 백발의 머리, 콧등에 걸친 외알 안경, 에메랄드 빛 눈동자. 나는 재빨리 로시토의 커다란 책상 앞으로 내달렸다.
     “레드? 오랜만이네.”
     “로시토!”
     얌전히 나를 따라오던 루카도 로시토를 보자 꼬리를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루카가 폴짝 뛰어올라 로시토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음? 루니오스 카이샤인가? 정말 많이 자랐군.”
     “헤헤. 로시토, 이거 보세요.”
     나는 등에 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들어 로시토에게 보여주었고, 로시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활인가?”
     “네. 힘 스탯을 찍지 않았더라면들지도 못 했을 걸요? 제 나름대로 개성 있게 만든 거예요.”
     “그, 그렇군. 허리춤에 매단 게 화살…이군. 음. 음.”
     로시토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그런 로시토의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나는 웃음을 참느라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활을 다시 등에 메고 말했다.
     “로시토. 전에 말하던 정령사 친구도 만나봤어요. 정령계약도 모두 했구요.”
     “오오 참 많이 성장했군. 레드 어디보자… 곧 있으면 상급 레인지 엑스퍼트가 되겠군. 역시, 기대할만 해.”
     로시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로시토의 방 안을 빙 둘러 보았다. 변한 것 없이 깔끔한 로시토의 방. 로시토의 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 로시가 말을 걸어왔다.
     “아, 레드. 파워 샷은 유용하게 쓰고 있는가?”
     “예. 실용성 있고 좋던 걸요. 그런데 트리플 샷 스키 북은 어제 주실 건가요?”
     “트리플 샷. 아차. 트리플 샷 스킬 북을 줬어야 했는데 파워 샷을 줘버렸군. 미안하네.”
     로시토가 책상서랍을 열며 대답했다. 서랍 속을 뒤져보더니 얇고 깨끗한 책 한 권을 꺼내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세 개의 화살을 쏘는 법. 트리플 샷’이라는 제목의 스킬 북이었다. 나는 로시토가 건네준 스킬 북을 받아 쭉 훑어보기 시작했다.
     ‘으흠. 더블 샷이랑 비슷하군.’
     [정독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파밧!
     [트리플 샷(triple Shot) 스킬을 알게 되었습니다.]
     “좋아. 스킬 창, 오픈!”
     파밧!
     <Skill>
     레인지 마스터리(Ranged Mastery)
     (207.44/300.00%)
     보우 어택(Bow Attack)
     ** Master******
     적안(赤眼)
     ** Master******
     백 스텝(Back Step)
     ** Master******
     크리티컬(Critical)
     ** Master******
     퀵 스텝(Quick Step)
     ** Master******
     더블 샷(Double Shot)
     ** Master******
     트리플샷(triple Shot)
     (0/200.00%)
     파워 샷(Power Shot)
     (80.52/500.00%)
     스킬 창에 떡하니 자리 잡은 트리플 샷 스킬. 나는 매우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로시토에게 말했다.
     “이야. 고마워요, 로시토.”
     “고맙긴. 잘 쓰게.”
     “네. 루카, 이제 내려와.”
     나는 로시토의 대답을 들으며 책상 위에 올라앉은 루카에게 말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카는 책상에서 폴짝 뛰어내렸고 dia전히 내 우측에 앉았다. 창밖을 보자 이미 태양은 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푸른 달과 함께 붉은 달이 동쪽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똑똑.
     갑자기 들려온 노크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문에 고정시켰다.
     “들어오게.”
     로시토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고, 붉은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뽀얀 피부에 연한 초록색의 눈동자, 오똑한 코와 작고 붉은 입술을 가진 여성 유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유저의 왼손에는 기다란 석궁이 들려 있었고 허리춤엔 볼트(석궁 전용 화살)가 담긴 화살통을 차고 있었다. 어깨에 앉아 있는 붉은 매로 보아 궁탑의 제자인 것 같았다.
     “로화. 어서 오게.”
     “안녕하세요.”
     ‘로화?’
     나보다 더 큰 키에 늘씬한 몸매를 가진 로화라는 유저. 유저의 시선이 낭게 고정되었고, 유저가 입을 열었다.
     “누구?”
     로화라는 유저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자동적으로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이놈의 고질별. 악보 살 때까지만 해도 안 이랬거늘.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입을 열었다.
     “레, 레드 파운이라고 합니다.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구요.”
     “아~ 네가 막내 사제구나? 귀엽게 생겼다?”
     내가 짧게 대답하자 생긋 웃으며 오른손으로 내 볼을 꼬집는 유저. 그러자 얌전히 앉아 있던 루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낮게 목청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에게 해를 주고 있는 것으로 잘못 인식한것 같았다.
     크르르…….
     루카가 여성 유저를 경계하자, 여성 유저는 내 볼을 꼬집던 손을 도로 가져갔다.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던 여성 유저인 시선이 루카를 응시했다. 나는 즉시 입을 열었다.
     “루카. 그만해. 얌전히 앉아 있어.‘
     끄응…….
     이빨을 드러내며 경계를 하던 루카. 루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맑은 눈망울을 한 채 얌전히 내 우측에 앉았다. 여성 유저가 무안했는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크흠. 이거 실례했네. 반가원. 나는 궁탑의 다섯 번째 제자 로화하로 해. 직업은 사수.”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로화. 나는 로화의 손을 잡았다. 또다시 몸이 굳는 것을 느끼며 악수를 한 나는 헛기침을 했다.
     “로화 무슨 일이가?”
     지켜보던 로시토가 말했다. 그러자 로화가 로시토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 셋째 사형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이거 큰일이군.”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는 로시토. 아무래도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둘의 대화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게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방에서 나왔고 궁수의 탑에서 빠져나와 여관으로 향했다.
    *    *    *
     “그래. 그래서 찾지 못했다는 건가?”
     “네.”
     로시토의 말에 로화가 고개를 푹 숙이며 짧게 대답했다. 로시토는 매우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궁수로 전직하러 올 때가지만 해도 그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가 있는지…….”
     “티르 네티아에서도 많은 유저가 피해를 봤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멀리 떨어진 왕국에 침략해서…….”
    “됐네, 그만하게.”
     로시토가 로화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로시토의 오른손은 이마를 짚고 있었고 매우 근심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로시토는 잠시 곰곰이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로화. 지금 자네의 실력으로 ‘그 녀석’을 이기는 건 무리일 테니 이제 그만 가서 쉬게. 할 일을 하게.”
     “네, 스승님.”
     로시토의 말에 로화는 짧게 대답하고 등을 돌린 채 방을 빠져나갔다.
    *    *    *
     띠링, 띠리링.
     류트의 맑은 음이 여관의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오늘 연습한 ‘너만 있으면’이란 곡을 연주하고 있다. 나는 류트의 현을 튕기며 눈을 감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이 곡. 내일 티아게게 들려 줄 곡이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자연스럽게 감미롭게 연주가 잘 되는지 점검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연주를 했다. 이제 내가 듣기에도 충분히 부드럽게 자연스러운 연주.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류트를 조심스레 집어넣고 등에 메고 있던 활과 화살통을 아이템 창에 던져 넣었다. 그리곤 침대에 드러누워 몸을 대(大)자로 뻗고 눈을 감았다. 과연 티아의 반응이 어떨지, 나는 기대에 들뜬 마음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티아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일단 로그아웃하고 월드 타임으로 내일 다시 접속하자.’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위잉.
     로그아웃을 하자 눈앞에 캄캄해지면서 접속종료 되었고 캡슐의 문이 열렸다. 나는 헤드셋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게를 키고 몇 발자국 안 떨어진 침대 위에 벌렁 뒤집어졌다.
     꼬르륵.
     오랫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게임만 했더니 배가 고프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고 간단하게 먹을 인스턴트식품을 찾았지만, 웬만한건 다 먹고 없었다. 남은 식량은 맛없는 건량뿐이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건량이 든 봉지를 꺼냈다.
     “흐음… 식료품 주문을 해야겠는 걸? 밥은 있는데 반찬이 없으니 이거야 원. 어디보자… 어라? 달걀도 없네?”
     건량이 든 봉지를 들고 냉장고 안을 다시 한 번 쭉 둘러 본나는 한숨을 내쉬며 냉장고 무을 닫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몸을 던졌다. 나는 소파에 드러누운 채 봉지를 뜯어 건량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와드득.
     정말 맛이 없군. 나는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컴. 멀티비전 좀 켜줄래?”
     「주인님. 요새 너무 집에만 계시는 것 같습니다. 바Rd서 산책도 좀 하는 것이……」
     “급해서 그래. 우선 멀티비전 좀 켜줘.”
     「알겠습니다.」
     역시나. 엄마 대신 컴이 잔소리를 하는군. 나는 컴의 잔소리를 끊으며 말했고 컴은 군말 없이 멀티비전을 켰다.
     “리모컨은?”
     「탁자 밑에 있습니다.」
     “오, 여기 있네.”
     나는 소파에 매달린 채 팔을 뻗어 탁자 밑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미궁에 대해 검색을 하자 미궁에 대한 정보가 자세하게 설명되었고, 보스 몬스터가 무엇인지, 어떤 공격을 하는 지도 알 수 있었다.
     강찬이 말하던 미궁이 던전이었군. 보스 몬스터인 미노타우로스. 신장이 5미터 가까이 되는 거구에 머리는 소, 몸은 인간인 반인 반수의 괴물. 설마 저것을 잡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고레벨의 기사 유저가 미노타우로스를 사냥하는 동영상도 몇개 올라와 있었지만 나는 흥미를 붙이지 못 하고 엘프의 도시 아리스 노아를 검색했다.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화려하지 않지만 속이 탁 트이는 시원함을 주는 크지 않은 폭포와 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 그 주변엔 서너 명의 사람이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평평한 평지라 아무 것도 깔지 않고 털썩 주저앉아도 불편함이 전혀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그런 곳이었다.
     “호오. 이 장소가 적합하려나?”
     대충 길을 외운 나는 하루 종일 연습한 악기연주의 음을 되새겨 보았다. 작은 이벤트와 함께 들려줄 악기연주. 그리고 고백. 왠지 모르게 기분이 오묘해진 나는 고개를 저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컴에게 멀티비전을 꺼달라고 부탁하고 내 방으로 향했다.
     가상현실 게임기기의 문을 열려는 순간 세릴리아 월드를 하기 전에 늘 만지작거리던 잡동사니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 조립을하다만 기계부품.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캡슐의 허리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위잉.
     철컥.
     캡슐의 문이 열렸고 나는 게임베드에 누워 헤드셋을 머리에 썼다. 지금쯤이면 세릴리아 월드에선 날이 밝았겠지? 헤드셋을 쓰자 캡슐의 문이 닫히면서 주변이 어두컴컴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55.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침대 위에 대(大)자로 뻗어 있는 나. 나는 상체를 일으키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침대 옆으로 시선을 고정시키자 루카가 혀를 내민 채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안녕, 루카.”
     캉캉!
     “그러고 보니 루카의 상태를 안 본 지 꽤 됐구나. 정보!”
     파밧!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야>
     정보: 세릴리아 월드의 단 한 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설의 흰 늑대.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한 전설의 흰 늑대이다.
     현재 상태: ??
     Lv. 31
     HP: 알 수 없음.
     MP: 알 수 없음.
     상태: 매우 건강
     친밀도: 100
     배고픔: 0% 목마름: 0%
     레벨 31의 루카. 나는 루카의 정보 창을 닫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아이템 창을 열어 아리스 노아에 있을 때 티아가 선물해 준 옷을 꺼내 갈아입고 류트와 아리스 노아 귀환 스크롤을 꺼냈다.
     “후후. 드디어 시작이군. 힘내자, 강현성. 파이팅!”
     나는 귀환 스크롤을 북 찢었고 이내 엘프의 도시 아리느 노아에 오게 되었다.
     생명의 나무 앞 광장에는 수많은 엘프 유저들이 줄지어 다니고 있었다. 아직 새벽이라 그런지 약간 캄캄한 면이 있긴 했지만, 경치는 여전히 좋았다. 나는 즉시 생명의 나무 뒤쪽에 위치한 잡화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잡화점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잡화점 주인 NPC와 눈이 마주쳤고, 나와 눈이 마주친 주인 NPC가 입을 열었다.
     “앗, 얼마 전에 뵌 적 있는 것 같은 인간이시군요.”
     “아하하… 네 맞아요. 안녕하셨어요?”
     잡화점주인 NPC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림자처럼 내 두를 졸졸 따라오던 루카는 얌전히 내 우측에 앉아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촛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진열대 앞으로 발걸음을 옮겨 진열대를 쭉 훑어보았다. 역시나, 없었다. 내가 방황을 하고 있을 때 지켜보던 잡화점주인 NPC가 말을 걸어왔다.
     “찾으시는 물건 있습니까?”
     “네. 양초를 찾고 있습니다.”
     “아, 양초요. 저기 저쪽 커다란 나무상자에 가든 있습니다.” 
     잡화점주인이 친절하게 말을 해주었다. 나는 한쪽 구석에 놓인 커다란 상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자 안에는 새하얀 양초가 무수히 많았다. 양초 한를 주워든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잡화점주인 NPC를 보며 말했다.
     “양초 하나에 얼마죠?”
     “1브론즈입니다.‘
     ‘이야. 생각보다 사네. 1브론즈라.’
     나는 500개의 양초를 구입한 뒤 잡화점에서 나왔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 밝지는 않았다.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하기 전, 홈페이지엣 검색했던 장소로 발걸음을 옮긴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고 정말 좋은 찬스였다.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양초를 바닥에 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하트모양. 300개의 양초를 정성들여 놓은 나는 하트 밖으로 나와삐뚤어지지 않았는지 살폈다. 이만하면 됐군. 양초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여문을 모르는 루카는 그저 고개만 갸우뚱할 뿐이었다.
     나는 나머지 200개의 양초로 하트모양의 양초로 오는 길을 만들었다. 이제 양초에 불을 붙이면 되겠군.
     “불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을 맺은 나 레드 파운이 그대의 힘을 빌리고자 명하노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주작!”
     나는 주작을 소환했다. 시뻘건 화염이 모이더니 이내 붉은 깃털과 긴 꼬리깃털을 가진 반투명한 매의 모습을 갖추었다.
     “우웅… 부르셨어요, 마스터?”
     “응. 저 양초에 불 좀 붙여줄래?”
     “네!”
     나의 오른쪽 어깨에 앉은 주작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300개의 양초의 심지에 불이 붙었다. 처음 만들었지만 정말 예쁜 하트 모양이었다.
     ‘음… 이제…….’
     [티아 젠 님께 대화를 요청합니다.]
     -응, 오빠!
     대화 신청을 하기가 무섭게 대답하는 티아.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티아, 지금 아리스 노아에 올 수 있어?”
     -응! 나 지금 아리스 노아에 있어. 사냥은 아까 다 끝났고. 히히. 어디로 가면 돼?
    *    *    *
     “생명의 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아디다. 루카를 보낼 테니 루카만 따라와. 너 지금 어디에 있어?
     -생명의 나무 앞!
     “그렇군. 루카, 생명의 나무 앞으로 가성 티아 좀 데리고 와줄래?”
     캉캉!
     “고마워.”
     바닥에 배를 깔고 길게 하품을 하던 루카가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생명의 나무로 내달렸다.
     나는 흐르는 시냇물에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어깨에 앉아 있는 주작과 붉은 빵모자를 뒤집어쓴, 이젠 많이 길어진 검은 머리, 그리고 평범하게 생긴 얼굴과 까만 눈동자, 높지도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콧대. 살짝 미소 짓고 있는 입.
     단추가 엇가리지 않았는지 확인한 나는 입을 열었다.
     “티아, 루카를 따라서 수풀이 우거진 곳에 도착했을 때쯤에 눈감아.”
     -응? 왜?
     “일단 r마아봐. 그리고 내가 말하는 방향으로만 오면 돼.”
     -응. 알았어.
     옅은 붉은 색의 류트를 들고 있는 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환하게 불이 켜진 하트 모야의 양초 안으로 들어와 수풀이 우거진 곳에 시선을 두었다.
     이내 수풀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흔들리는 수풀 사이로 새하얀 신형이 튀어나와 재빨리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 뒤로 눈을 감은 티아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면 돼?“
     “응 이제 앞으로 천천히 걸어와. 세 걸음 정도 앞에 돌매이가 있으니 넘어지지 않게 조시매.”
     -응.
     나는 내말을 믿고 그대로 따라주는 티아를 보았다. 나의 심장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고 이내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티아가 양초로 만든 기에 다다랐을 때, 나는 대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서와.”
     나의 말에 눈을 뜬 티아. 정성들여 만든 양초의 길과 하트.
     “아…….”
     티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멍하니 서 있는 티아에게 손짓했다. 티아는 양초의 길을 지나 내가 서 있는 하트로 들어왔다. 나란히 서게 된 나와 티아.
     나는 이미 한참 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실눈을 뜨고 떨리는 손으로 류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띠링.
     맑은 류트의 음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나의 류트에선 가슴이 뭉클한 감동적인 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이미 눈치를 챈 티아는 감동을 받았는지 풀린 눈으로 류트를 연주하는 나를 바라 볼 뿐이었다.
     서서히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고, 연주를 끝낸 나는 눈을 떴다.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티아, 왠지 모르게 이번만큼은 몸이 굳지 않았다. 나는 요기를 내어 부드러운 눈길로 티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티아, 나 너 좋아해.”
     “…….”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티아. 나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나를 보았다. 타아의 얼굴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티아의 눈빛.
     나는 하려는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나랑… 사귀자.”
     기다렸던 말이 나오자 티아는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 하는 거 봐서!”
     그대로 몸을 돌린 티아는 그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멀뚱히 서있던 나는 티아를 뒤다라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디가?!”
     티아를 뒤따라 달리는 내 입가엔 미소가 가득 번졌다.
    *    *    *
     동이 트자 태양은 아리스 노아를 밝게 비추었다. 나는 티아의 손을 잡고 생명의 나무 앞 광장에 오게 되었다.
     생명의 나무 앞 광장에는 수많은 유저들이 모여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생명의 나무 안족에 위치한 엘프들의 관청엣 자릿세를 내고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팔고 있는 유저, 자신이 만든 잡화물품을 파는 유저 등 많은 유저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었다.
     “오빠. 저기 가보자.”
     “응?”
     티아가 손짓한 곳은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파는 유저가 있는 곳이었다. 티아도 먹을 것을 정말 좋아하나보군.
     나는 티아가 말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보지 못한 음식들이 즐비하게 놓인… 이런 걸 포장마차라고 해야 하나? 아, 즐비하게 놓인 개인 음식점. 두 엘프 유저가 땀을 흘리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요리를 하던 한 명의 유저가 우리를 보고 물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드릴까요?”
     “뭐 먹을래?”
     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음식들을 쭉 두러보는 티아에게 묻자 타아는 고기와 야채가 줄줄이 꽂힌 기다란 꼬챙이와 버섯이 동동 떠다니는 야채수프 그릇을 집어 들며 대답했다.
     “이거.”
     “얼마죠?”
     “아리스산 버섯 수프 20브론즈, 양고기 야채 모둠꼬치가 40브론즈입니다.”
     나는 아이템 창엣 1실버를 지불하고 꺼내 티아가 고른 것과 똑같은 모듬꼬치를 집어 들었다. 1실버를 받은 유저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맛있게 드세요.”
     “네, 많이 파세요.”
     대답을 끝마치기 무섭게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티아. 나는 피식 웃으며 꼬치의 맨 위에 달린 양고기를 입에 넣었다.
     끄응…….
     “응?”
     아차. 루카를 완전히 잊고 있었군. 나는 꼬챙이에 달린 고기 몇 점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루카는 꼬리를 흔들며 바닥에 떨어진 고기를 허겁지겁 주워 먹기 시작했다.
     주작은 정령이니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겠지?
     티아와 아리스 노아를 한참동안 돌아다녔더니 어느덧 월드 타임 오후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강찬은 오후 9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군. 나는 벤치에 앉아 내 왼쪽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타아에게 말을 걸었다.
     “티아. 티르 네티아에 한 번 가볼까?
     “티르 네티아?”
     “응. 이따가 친구들도 마날 겸 쭉 둘러보게. 퀘스트 때문에 가보기만 했지 자세히 둘러보진 못 했잖아.”
     “그럴까?”
     티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데 티르 네티아 귀환 스크롤이 없구나…….‘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할 때 팅가 종잇조각을 들어 펄럭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몇 개 구입해 뒀지롱.”
     “음…….”
     “가자!”
     “자 잠깐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티아는 티르 네티아 귀환 스크롤을 북 찢었다.
     순식간에 수많은 인가 유저와 엘프 유저들이 북적이는 커다란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에 오게 된 나는 주변을 빙 둘러 보았다.
     역시 수도 세인트 모닝이나 아리스 노아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출항하는 배를 보며 나와 티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커다란 배와 작은 돛단배. 여러 종류의 배가 오가고 있었고, 세릴리아 대륙과는 다른 대륙의 물건을 운반하는 선원들을 볼 수 있었다.
     자셓 보기 위해 나는 적안을 개안했고 눈을 가늘게 뜨자 세릴리아 대륙에서 볼 수 없었던 온갖 종류의 무기와 장신구, 그리고 여러 아이템이 들어오고 있었다.
     [데시카 님께서 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어라? 승인.”
     한참을 말없이 구경하고 있을 때, 경훈이 걸어온 대화. 나는 대화를 승인했고 짐을 나르는 배를 구경하던 티아의 시선이 나에게 놓여 있었다.
     -오, 아직 있었구나.
     “응. 데시카. 왜?”
     -그냥. 잘 살아 있나 해서. 그건 그렇고 전에 찾겠다는 건 찾았냐?
     “음? 무슨 소리야?”
     경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경훈이 다시 말했다.
     -크크. 네 놈이 아리스 노아엣 찾겠다고 했던 거 있잖아.
     “아차, 찾았지.”
     -그래? 짜식. 축하한다. 나중에 한턱 쏴.
     “알았다. 크크. 다른 애들은?”
     -이따가 접속한다면서 나갔어. 지금 나 홀로 티르 네티아를 방황중이시다. 넌 어디냐?
     “나도 티르 네티아야!”
     “누구야?”
     “테시카 누군지 알지? 그 무투가 친구.”
     “응.”
     티아의 물음에 답한 나는 티아의 손을 잡았다.
     -음? 옆에 누구 있어.
     “응. 티아.”
     -그렇군. 티르 네티아면 광장으로 와라. 시계탑 근처에 있을 테니.
     “그래.”
     [데시카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나는 직사각형의 입체 창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티아에게 말했다.
     “데시카가 광장으로 오라는데, 가지.”
     “응.”
     나는 티아와 나란히 시계탑 광장으로 향했다. 내 뒤로는 그림자처럼 루카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제7장    미궁, 그리고 습격(1)

     광장에 다다른 나는 티아와 함께 시계탑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시계탑에 다다랐을 때, 검푸른 긴 머리키락에 짙은 눈썹과 검은 눈동자에 미남형의 유저가 눈에 띄는 검은색의 움직이기 편한 복장을 하고 팔짱을 낀 채 시계탑을 향해 나란히 걷고 있는 나와 티아에게 시선을 두었다.
     경훈과 눈이 마주치 나는 손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그러자 팔짱을 끼고 있던 경훈이 입을 열었다.
     “빨리 왔네, 레드.”
     “데시카!”
     “안녕하세요.”
     “티아 씨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네.”
     나는 경훈에게 소리쳤고, 티아는 경훈에게 목례를 했다. 현성으 뒤로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루카를 본 경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억? 루, 루카?”
     루카는 경훈을 알아보는지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경훈은 루카에게 다가가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경훈의 볼을 핥는 루카.
     루카를 쓰다듬던 경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얼레? 짜식. 애인 생겼다고 이제 옷을 쫙 빼입고 다니는데? 그건 그렇고 그 커다란 활은 어디 갔어?”
     “활? 아, 아이템 창에 있지. 아이템 창, 오픈!”
     파밧!
     나는 아이템 창에서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화살통을 꺼냈고, 등에 메고 있던 류트를 아이템 창에 넣었다. 활을 등에 메고 화살통을 허리춤에 차자 경후이 입을 열었다.
     “호오. 역시 넌 다른 것보다 활을 가지고 있는 게 제일 잘 어울린다.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레드 파운.”
     “흐음. 그래? 그럼 앞으로 쭉 활만 들고 있어야겠군. 크크.”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가 현재 티르 네티아에 발을 들였습니다. 마스터.”
     “혼자 있나?”
     “아뇨, 고레벨은 아니지만 중레벨 정도로 보이는 유저 둘과 같이 있습니다.”
     “잘 살펴보도록.”
     “예, 마스터.”
     손에는 짧은 완드를 들고 있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저가 시계탑 뒤에서 현성을 관찰하고 있었다. 후드 사이로 살짝 보이는 입은 살기를 띤 미소를 짓고 있었다. 피식 웃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저는 시계탑 뒤로 사라지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    *    *
     “어라? 레드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네 어깨에 앉아 있는 그 반투명한 붉은 새는 뭐냐?”
     “이거? 이번에 정량 계약 퀘스트를 하면서 계약한 ‘주작’이라고 해. 불의 하급정령이지.”
     경훈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 오른쪽 어깨에 앉은 주작을 바라보며 말했고 나는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나는 개안 했던 적안을 해제하고 활을 등에 메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계속 있을 거야? 다른 곳이라도 둘러보자.”
     “이 근처라도 둘러볼래? 저쪽 언덕에 올라가다보면 조잡한 퀘스트가 조금씩 나오는데, 무지 재밌어. 황당하기도 하고.”
     “흐음. 재밌겠는데?”
     경훈이 말한 조잡한 퀘스트에 흥미를 느낀 나는 빙긋 웃으며 티아에게 말했다.
     “티아, 한번 가보자.”
     “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티아. 나는 경훈에게 앞장서라고 한 뒤 경훈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시계탑 광장에서 빠져나와 개인상점을 거쳐 오게 된 언더. 언덕 주변엔 집으로 보이는 건물이 무수히 많았다. 아무래도 NPC들이 살고 있는 집이겠지?
     간간히 상점도 보였고, 음식점도 볼 수 있었다. 나는 티르 네티아의 풍경에 흥미를 가지고 계속 두리번거렸다. 언덕에서 왼쪽으로 빠지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경훈. 나는 경훈을 따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왔다.
     인적이 드문 장소라 그런지 여기저기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커다란 드럼통이 서너 개가 놓여 있었다. 앞장서서 걷던 경훈이 갑자기 뒤돌아서며 말했다.
     “나는 먼저 했던 퀘스트라 내가 가면 네가 즐길 수 없게 돼. 티아 씨랑 같이 가봐.”
     과연 어떤 퀘스트이기에 저러는지.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티아와 함께 골목길을 계속 걸어갔다. 골목길을 지나오자 조금 넓은, 공터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건물들로 가려진 공터가 나왔다. 그곳엔 불량배로 보이는 NPC가 대여섯 명이 있었고 가자 손에는 롱 소드나 나무 방망이 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퀘스트]
     뒷골목의 불량배.
     금품을 갈취하는 불량배를 혼내주자.
     경훈이 말한 대로 정말 조잡한 퀘스트였다. 퀘스트 창을 다으며 고개를 젓는 나에게 대여섯 명의 불량배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호, 이 새끼 능력 좋다? 가진 거 다 내놔.”
     “흐흐. 거기 이쁜 누나. 우리랑 좀 놀자, 응?”
     “흐흑, 잘못했어요!”
     “손 똑바로 안 들어? 활로 한 대 더 맞아볼래?”
     내 앞에 무릎 꿇고 손을 들고 있는 불량배들. 역시 이런 녀석들은 매가 약이다. 그 중 한 명이 반항하고 일어서서 말했다.
     “우씨, 우리가 왜 이딴 걸 해야 하냐고? 앙?”
     크르르…….
     “음.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잘못을 했구나.”
     온갖 똥폼을 잡고 일어선 불량배 NPC. 루카가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목청을 울리자 불량배는 바로 무릎을 꿇고 손을 들었다. 이만하면 퀘스트 완료인가?
     [퀘스트 완료!]
     퀘스트 완료, 보상(뒷골목의 수호자 배지).
     EXP. 30
     퀘스트 완료 창이 뜨면서 보상으로 ‘뒷골목의 수호자’하는 우스꽝스러운 배지를 얻게 되었다. 이 배지를 달게 되면 호칭이 변할 테지. 퀘스트를 끝낸 나는 뒤돌아서 티아와 함께 공터에서 빠져나왔다.
     좁은 골목.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경훈.
     “진짜 조잡한 퀘스트다. 크크, 무지 재밌는데?”
     “호. 벌써 끝냈나보네.”
     “응 티아, 아까 그 녀석들 봤지?”
     “응. 무지 웃겼어. 제일 마지막에 있던 애는 루카를 보고 완전히 쫄던 걸.”
     티아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지켜보던 경훈이 벽에서 등을 떼며 말했다.
     “아, 퀘스트를 하러 간 사이에 카이루랑 루샤크에게 연락이 왔는데, 지금 접속했다더라.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야.”
     “그래?”
     경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레드 오랜만이다?! 티아 씨도 계셨군. 앗?! 저거 뭐야?! 우리 똥개 아냐? 무지 많이 컸는데?”
     어깨에 모닝스타를 들쳐 메고 새하얀 망토를 입고 있는 혁이었다. 혁은 건들건들 다가오며 말했다. 혁의 뒤론 강찬이 두 손을 흔들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루카를 향했던 혁의 시선이 나와 손을 잡고 있는 티아에게 고정되었다.
     “얼레? 오호. 둘이 이제 그렇고 그런 사이구먼.”
     “크크. 부럽냐?”
     “그래. 인마.”
     혁의 말에 맞장구쳐주자 혁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자, 이제 가볼까?”
     “가자. 오랜만에 몸도 좀 풀 겸.”
     뿌드득.
     강찬의 말에 경훈이 손가락의 관절을 꺾어 소리를 내며 말했다. 다들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군. 나는 모닝스타를 휘두르고 있는 혁에게 말했다.
     “루샤크. 너 지금 레벨이 몇이야?”
     “79.”
     “히엑? 벌써?”
     “그래. 아직 우리 셋 중에서는 제일 낮아. 데시카는 80이고 카이루는 96이야.”
     혁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티아에게 물었다.
     “티아, 너는?”
     “82.”
     “그, 그렇구나… 하하.”
     “너는 몇이냐?”
     휘두르던 모닝스타를 도로 어깨에 들쳐 멘 혁이 물어왔고 나는 작게 입을 열었다.
     “55.”
     “흠. 우리 중에 레벨이 제일 낮군. 이번에 미궁에 가서 레벨업 좀 쭉쭉 하자고.”
     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찬은 들고 있던 워프 스크롤을 북 찢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이상한 고대 문자가 가득 적힌 벽으로 둘러싸인 이상한 곳에 오게 되었다.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느껴졌고 처음 듣는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강찬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아들었고 경훈은 손에 착용한 너클 건틀렛을 정비했다. 나는 잡고 있던 티아의 손을 놓고 등에 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들고 풀어진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었다.
     활시위를 살짝 튕기자 활시위의 맑은 음이 들려왔다. 활 정비를 끝낸 나는 적안을 개안했다.
     “허억? 잠깐만. 레드, 그게 활이야?”
     “응. 왜?”
     혁이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혁이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허리춤에 그 이상한 게 화살이군. 아까 등에 뭔가를 메고 있어서 또 이상한 걸 만든 줄 알았는데. 우선 파티부터 가입해.”
     [루샤크 님의 파티에 가입하셨습니다.]
     우리가 잡담을 하고 있을 때, 미궁의 입구에서 좀비 무리가 스르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주받은 망자의 무덤에서 보았던 좀비. 밝은 곳엣 보니 더더욱 구역질이 났다.
     비틀거리며 신음소리를 내는 좀비무리를 보며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을 때, 혁이 앞장서서 모닝스타를 들지 않은 왼손을 치켜들며 외쳤다.
     “힐 볼!”
     농구공만 한 구체가 혁의 손바닥 우로 생겨났다. 전보다 더 짙어진 힐 볼. 혁이 농구공처럼 바닥에 힐 볼을 몇 번 튕기더니 다가오는 좀비들을 향해 힐 볼을 던졌다.
     새하얀 빛을 발하는 성스러운 구체가 빛 가루를 흩날리며 벽면으로 마구마구 튕기며 좀비들을 스치기 시작했다. 힐 볼에 스치자 좀비들은 한줌의 재가 되어 바닥에 흩날리기 시작했고 이내 다가오던 좀비들은 한줌의 재가 되어 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나이스. 들어가지.”
     모닝스타를 들쳐 멘 혁이 앞장서 미궁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꺼냈던 화살을 도로 화살통에 넣고 조용히 혁의 뒤를 따랐다.
     조금 더 내려가자 작은 방 하나에 도착하게 되었다. 위층보다 더 시린 한기가 몸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옷을 얇게 입고 있는 티아가 벌벌 떠는 모습을 본 나는 아이템 창에서 붉은 망토를 꺼내 티아에게 덮어주었다.
     “고마워.”
     “고마울 것까지야.”
     짧게 대답한 나는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방의 구멍 사이로 활을 든, 얼굴엔 흉측한 문신을 한 인간과도 같은 몬스터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던 몬스터들은 이내 이빨을 드러내며 각자 화살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저것들은 뭐지?”
     나는 즉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가자! 파이어 웨폰!”
     “아이언 너클, 패스트 워커!”
     강찬과 경훈이 지면을 박차고 몬스터들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지만 강찬은 화염검으로 귀찮은 화살을 몯 쳐냈고, 경훈은 빠른 몸놀림으로 화살을 피하며 몬스터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몬스터들에게 접근한 강찬이 시뻘건 화염이 뒤덮인 문 블레이들 휘두르며 외쳤다.
     “화검기(火劍氣)!”
     시뻘건 화염검은 기염을 토해내며 뭉쳐 있던 몬스터들을 베어냈고 뭉쳐 있던 몬스터들은 머리와 팔, 허리, 다리 등이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화살을 피하며 뒤늦게 도착한 경훈은 자신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몬스터의 밑으로 파고들어 턱에 강철 같은 주먹을 꽂음과 동시에 무릎으로 복부를 내질렀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아직 구멍에서 나오지 않은 몬스터 한 마리가 경훈을 겨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을 본 나는 재빨리 화살을 쏘았다.
     창가 같은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구멍 속엣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몬스터의 머리를 정확히 꿰뚫고 벽면에 박혔다. 몬스터의 머리는 화살에 박힌 채 벽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루카!”
     왕왕!
     내 뒤를 따라오던 루카가 강찬의 뒤를 노리고 있던 몬스터에게 쏜살같이 달려가 목 줄기를 물고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목가 머리가 이등분 되면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몬스터. 나는 화살 세 개를 꺼내 들었다.
     ‘좋아, 트리플 샷이다!’
     세 개의 화살을 꺼내든 나는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3권 계속>     -by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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