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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인지 마스터[7-3]
    작성자 : 절대긍정 | 조회수 : 2223 (2011-12-11 오후 1:02:14)
    레인지 마스터 3권

    목차
    제8장   미궁 그리고 습격(2)
    제9장   오픈 3주년 이벤트, 공성전
    제10장   공성전의 시작과 허무한 결말
    제11장   에고 없는 습격과 재회(1)
     
    제8장   미궁 그리고 습격(2)

    “트리플 샷(Triple shot)!"
     쐐애액!
     활시위를 벗어난 세 개의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목표물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갔다. 그중 두 개의 화살은 맥없이 땅에 처박히고 단 하나의 화살만이 활을 든 몬스터의 머리에 박혀들었다.
     ‘윽. 역시, 실패인가?’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몬스터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던 구멍에 신선을 던졌다.
     활을 든 몬스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시선을 강찬과 경훈에게로 돌렸다. 이미 몬스터를 전부 때려눕힌 두 녀석은 쓰러진 몬스터를 살피고 있었다. 내가 막 꺼내 들어선 화살을 화살통에 수납할 때였다.
     [파티 퀘스트]
     미노타우로스 퇴치. 우두인신(牛頭人身)의 괴물. 복잡한 미로로 얽힌 미궁의 끝에 갇혀있는 흉포한 몬스터,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라!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한다.]
     [알 수 없음.]
     갑자기 일행에게 파티 퀘스트가 주어졌다. 파티의 리더인 혁이 퀘스트 창을 닫으며 말했다.
     “복잡한 미로라…….”
     “뭐해? 어서 가자.”
     불끈 쥔 두 주먹을 맞부딪치며 경훈이 재촉하자, 멍하니 서있던 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방의 문턱을 넘어 오게 된 곳은 거대한 규모를 가진 방이었다. 방의 정중앙에는 거대한 미노타우로의 동상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동상을 받치고 있는 직사각형의 거대한 석상엔 복잡한 룬어가 적혀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석상에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굽혀 룬어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뭐라고 적혔는지 알 수 없었지만 글씨체가 무척 신기했다.
     “얼레? 레드, 너 룬어도 읽을 줄 아냐?”
     룬어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을 때, 강찬이 다가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룬어를 공부하지 않은 내가 어찌 그것을 읽겠냐.
     나는 활을 등에 둘러메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경훈과 혁이 티격태격 싸우는 소리 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거 너무 고요하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두 녀석을 제외하면 말이다.
     “결국에 삐질 것 뭐 하러 시비를 거냐?”
     “시끄러워!”
     경훈의 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혁이 소리쳤다. 혁의 대답을 끝으로 두 녀석은 더 이상 티격태격하지 않았다. 이제 좀 조용하다 싶었다.
     ‘저 두 녀석이 조용하니 적막이 흐르는군. 화제를 돌려볼까?’
     “크흠.”
     화제를 돌리려고 헛기침을 할 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소리.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우리가 들어온 문의 반대편 출구에서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한 오크 나이트가 무리지어 밀려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을 들고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뽑았다.
     “취익! 죽여라!”
     쿠르륵, 취익!
     “크아아!”
     갑작스레 나타난 오크 나이트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오크 나이트라니. 이거 너무한ㄴ군.
     나는 선두로 달려오는 오크 나이트를 겨냥해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났고,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오크 나이트의 목줄기에 정확히 박힌 굵직한 화살. 화살에 맞은 오크 나이트는 그대로 절명했다.
     그것을 본 오크 나이트들은 달려들던 것을 멈추고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선두로 달려들던 오크 나이트가 당하자 섣불리 접근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때 손목을 풀던 경훈이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 오크 나이트 무리에게로 몸을 던졌다. 몸을 날린 경훈이 주춤거리는 한 마리의 오크 나이트에게 다가가 팔을 힘껏 뻗었다.
     “탬핑 어택(Tamping Attack), 피스톨!”
     퍼억!
     못 보던 사이, 경훈의 권술은 대단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타격점 바로 직전에 주먹을 멈춰 파괴력을 높이는 것도 정교했고, 주먹을 통해 공력을 한껏 분출하고 나서도 호흡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반면 경훈의 주먹에 맞은 오크 나이트는 머리통이 한껏 뒤로 젖혀졌다가 가까스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눈이 풀리고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으로 봉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왼발을 축으로 허리의 힘을 이용한 강력한 하이킥!
     경훈의 발차기에 맞은 오크 나이트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쓰러져 절명했다.
     못 보던 사이 절말 강해졌군.
     경훈의 성장에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전과는 달리 잔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전장으로 몸을 날리는 혁.
     “으아아아!”
     기합소리를 내며 오크 나이트 무리에게로 몸을 던지는가 싶더니, 1미터 남짓 되는 거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모닝스타를 움켜쥐었다.
     “매직 미사일!”
     혁의 모닝스타를 중심으로 허공에 은빛 선들이 줄기줄기 형성되기 시작했다. 공기가 응축되고 응축되어 새하얀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내 화살의 형태를 갖춘 매직 미사일 다발이 혁의 모닝스타를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혁이 모닝스타를 휘두르자, 다발의 매직 미사일이 한 마리의 오크 나이트에게 쏜살같이 날아가 마구 구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는 고레벨에 속하는 몬스터. 오크 나이트는 능숙하게 검을 취두르며 매직 미사일을 쳐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닝스타를 움켜진 혁이 오크 나이트에게 몸을 날렸다. 묵직한 모닝스타와 오크 나이트의 헬멧이 충돌하자 묵직한 굉음이 울려 펴졌다.
     콰앙!
     묵직한 중병기의 충격을 헬멧을 통행 머리로 고스란히 받은 오크 나이트.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매직 미사일을 능숙하게 사용하는군.
     매직 미사일로 적의 신경을 분산시킨 뒤, 치명타를 날리는 것이 혁이 나름대로 연구한 전투방법인 것 같았다.
     혁의 모닝스타가 오크 나이트의 안면에 꽂히자 오크 나이트는 그대로 고꾸라져 절명했다. 그리고 티아의 바람의 상급정령에 의해 두 마리의 오크 나이트가 절명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잠시 한눈을 팔던 사이, 오크 나이트 한 마리가 휘두르는 장검이 내 목을 쇄도하기 시작했다.
     “배, 백 스텝(Back Step)!"
     나는 재빨리 백 스텝을 밝고 뒤로 물러났다.
     하마터면 목이 날아갈 뻔했군.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화살 하나를 뽑아든 나는 고개를 돌린 뒤 소리쳤다.
     “루카!”
     왕왕!
     지켜보던 루카가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오크 나이트에게 몸을 날렸다. 루카의 몸통박치기!
     퍼억!
     루카의 몸통박치기에 맞은 오크 나이트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오크 나이트가 주춤하는 사이, 내가 쏜 창과 같은 화살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오크 나이트의 목줄기에 박혔다.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목줄기에 박힌 화살을 움켜쥔 오크 나이트는 좀 버티는가 싶더니 이내 중심을 잃고 쓰러져 숨을 거뒀다.
     “후우. 상대하기 껄끄러운 녀석 중 하나인 오크 나이트가 무리를 지어 오다니.”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
     대부분의 오크 나이가 절명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오크 나이트는 두 마리. 한 마리는 강찬의 화염검에 목이 날아갔고, 다른 한 마리는 경훈의 발차기에 목뼈가 뒤틀려 절명했다. 죽은 오크 나이트들의 시체는 점점 형체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던전 추가 경험치까지 더하니 경험치가 짭짤하군.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후우. 방금 전에 진짜 죽을 뻔했네.”
     방금 전 나의 목을 쇄도해오던 오크 나이트의 장검을 떠올리자 등골이 오싹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얼른 밖으로 나가보자. 오크 나이트 녀석들이 들어온 곳으로 나가면 될 것 같은데.”
     경훈이 허공에 주먹질을 연신 해대며 소리쳤다. 그러자 혁이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모닝스타를 어깨에 들쳐 메고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야, 리더가 앞장선다. 따라와.”
     “얼씨구, 예~ 따라가겠습니다. 리더.”
     경훈이 혁을 비꼬며 뒤따랐다.
     “가자, 루카, 티아.”
     캉캉!
     “응.”
     나는 활시위를 풀며 말했다. 혁을 따라 오크 나이트들이 밀려 들어온 문턱을 넘자 요상한 출입문 네 개를 볼 수 있었다.
     도대체 뭔지?
     출입문 앞에는 또 다른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석상 하나가 있었는데, 그 위엔 돌 위에 쓰인 글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나는 석상 가까이 다가가 돌에 조각된 문서를 보았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한글로 적혀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미궁 미로의 입구. 네 개의 입구 중 하나만 미궁의 끝으로 갈 수 있다. 나머지 네 개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모두 험난한 것은 마찬가지. 미궁을 나가든, 다시 입구를 선택하든 그것은 미궁에 발을 들인 자의 자유이다.]
     “정말 대충 적어놨군.”
     “뭔데 그래?”
     문서를 보고 어이없어 고개를 젓자 혁이 다가와 말했다. 문서를 읽어본 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따로따로 흩어져서 가면 되지 않아? 보스의 방 앞에 도착한 녀석이 대화를 걸면 되는 거고.”
     참 간단하군. 하지만 혁의 말대로 나뉘어서 가면 편하긴 하지만, 혼자서 다수의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좀 무모한 짓이었다.
     “1대일 대면에서는 오크 나이트, 아니 트롤 정도는 나도 거뜬히 잡아낼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다수가 된다면 조금 힘들어진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조금 무모하지 않아? 조금 전처럼 몬스터가 무리지어 나타나면 어쩌게?”
     “그거야 뭐…….”
     혁이 말끝을 흐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강찬이 문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몬스터들이 오크 나이트 정도라면 다수여도 상관없다. 나는 혼자 가겠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
     두 주먹을 맞부딪히며 경훈이 대꾸했다.
     이 녀석들 대체 어디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이지?
     나는 시선을 혁에게 던졌다. 현재 일행 중 가장 약한 혁. 물론 레벨은 나보다 높았지만, 클래스가 조금 까다로운 녀석이라 2차 전직을 하기 전까지 약할 것 같았다. 나의 시선을 받은 혁이 말했다.
     “왜? 내 얼굴에 뭐가 묻었냐?”
     “넌 혼자 갈 수 있겠어?”
     “당연하지!”
     “당연하기. 너는 레드랑 같이 가.”
     옆에서 지켜보던 경훈이 말했다. 또 싸울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혁이 투덜대며 모닝스타를 들었다. 나는 루카를 쓰다듬고 있는 티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티아, 너는 혼자 갈 수 있겠어?”
     “응.”
     “흐음. 걱정되는데.”
     “에이, 난 괜찮은걸?”
     티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남자 친구로서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었다. 비록 나보다 강하다지만 티아는 여자. 이 어두운 미궁을 혼자 다니게 한다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흐음. 그렇다고 내가 티아와 함께 동행을 하게 된다면, 혁이 녀석은 어쩌랴? 나는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아하! 이런 방법이 있었지!”
     나는 피식 웃으며 쭈그리고 앉아 루카와 눈높이를 맞췄다.
     “루카. 네가 티아와 동행해라. 보디가드도 해줄 겸. 어때?”
     캉캉!
     루카도 싫진 않았는지 캉캉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이제 입구를 선택하는 일만 남았군. 나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뿌드득.
     “자, 이제 들어가 보실까?”
     경훈이 손가락 관절을 꺾어 소리를 내며 말했다. 손목을 빙빙 돌리며 경훈이 첫 번째 문으로 향했고, 강찬은 아무 말 없이 세 번째 문으로 향했다.
     “좋아, 그럼 우린 이쪽으로 가자고!”
     혁이 두 번째 문으로 향하며 소리쳤다. 후우, 저 녀석과 동행을 해야 한다니. 앞으로 훤하다.
     “루카, 윈 이쪽으로 가자.‘
     캉캉!
     루카를 쓰다듬던 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전 같았으면 루카를 품에 안고 다녔을 텐데 루카도 많이 자랐다. 나는 혁을 뒤따라가며 크게 소리쳤다.
     “그럼! 보스의 방 앞에 도착한 녀석이 일행에게 알리기다!”
     “오케이!”
     “응!”
     왕왕!
     “좋아!”
                   *    *     *
     끼이익.
     쾅!
     석문의 경첩이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며 거세게 닫혔다. 문이 훑고 지나간 자리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번졌다.
     ‘욱. 먼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앞장선 혁을 뒤따랐다. 미로의 폭은 생각보다 넓었다. 문과 문 사이가 먼만큼, 미로의 폭도 넓은 것이었다.
     ‘미리 활시위를 걸어둬야겠군. 몬스타가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
     나는 등에 멘 활을 들어 활시위를 힘껏 당겨 활 끝에 걸었다. 손가락으로 시위를 퉁기자 시위에서 맑은 울림이 펴져 나왔다.
     “이거 갈수록 어두워지는데? 홀리 라이트(Holy Light)!"
     투덜대던 혁이 간단한 수인(手認)을 맺으며 외쳤다.
     주문영창이 이어지자, 주먹크기만 한 새하얀 구체가 형성되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레벨이 높아진 만큼 제법 쓸 만한 스킬도 많이 입수한 것 같았다.
     루카가 없는 이상 서포트는 혁과 정령에게 맡겨야겠군.
     나는 아까부터 말없이 어깨에 앉아있는 주작에게 말했다.
     “주작, 잘 부탁한다.”
     “네, 마스터!”
     주작의 힘찬 대답을 들으며 나는 혁을 뒤따랐다.
     가면 갈수록 미로의 폭은 점점 더 넓어졌고, 길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세 번째 오게 되었을 때였다.
     “으아아악!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잔뜩 약이 올랐는지, 혁이 모닝스타로 미로의 벽면을 마구 내리찍기 시작했다. 푸훗. 혁의 성격이 여기서 나오는구먼. 나는 혁의 행동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루샤크. 천천히 찾아가보자.”
     “신경질이 나서 못 해먹겠다. 미노타우로스 자식. 아주 소갈비로 만들어주마.‘
     “풋. 자, 저쪽 길은 아직 안 가본 것 같아. 아까부터 간은 곳만 맴돌아서 뭔가 수상했는데, 역시 안 가본 길이었어.”
     “그래? 그럼 빨리 가자.”
     묵직한 모닝스타로 벽을 연신 내리찍던 혁이 어깨에 모닝스타를 들쳐 메고 내가 말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역시 나의 예상은 딱 맞아떨어졌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혁의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군. 나는 왼손에 쥐고 있던 활을 등에 둘러메고 혁과 나란히 걸었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루카가 없으니 왠지 허전했다. 그래도 별 수 있나. 아까보다 수월하게 길을 찾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화들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퀵 스텝을 걸고 오른쪽 벽면으로 몸을 날려 날아오는 물체를 피했고, 혁은 급히 실드를 펼쳤다.
     파팍!
     길쭉한 두 개의 화살이 혁이 펼친 실드에 튕겨나갔다.
     나는 등에 둘러메고 있던 활을 손에 쥐고 허리춤에서 화살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적안(赤眼)을 개안(開眼)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물체의 안광이 희미하게 번쩍였다.
     ‘뭐지?’
     “으앗! 깜짝이야! 뭐야 이 화살은?”
     실드에 둘러싸인 혁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작게 입을 열었다.
     “쉿, 혁 조용히 해봐. 앞에 이상한 물체가 있어. 일단 펼친 실드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 나을 거야. 그리고 홀리 라이트 좀 잠깐 해제해 줘.”
     “음? 그래, 알았다.”
     시선을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정한 채 혁이 대답했다.
     혁이 손짓하자, 주변을 밝게 비추던 홀리 라이트가 안개에 가져지듯 사라졌다.
     주변은 다시 어두워졌다. 하지만 우리의 위치는 이미 적에게 파악 된 상태였다. 또다시 알 수 없는 물체의 안광이 번쩍이면서 또다시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나는 다시 한 번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화살은 교묘하게 나를 빗겨나갔고, 혁의 실드와 충돌했다. 나는 자세를 낮추고 화살 깃을 활시위의 절파에 걸었다. 그리곤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당겼던 시위를 놓자, 화살은 활의 품을 벗어나 대기를 가르며 맹령하게 쏘아졌다.
     푸푹!
     “쿠엑!”
     화살은 번쩍이는 안광 중 하나를 맞추었고, 눈에 화살이 박힌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쩗게 신음을 흘렸다.
     도대체 뭐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또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상대는 절명한 것 같았다. 나는 손에 쥔 활을 다시 등에 둘러메면서 혁에게 말했다.
     “됐다. 이제 실드 거둬도 돼.”
     “그래? 방금 그건 뭐냐? 그럼 이제 홀리 라이트 켜도 되는 거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혁이 실드를 거두며 대답과 질문을 동시해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수인과 함께 혁이 시동어를 외치자 이내 주변이 밝아졌다.
     “근데 방금 화살 쏜 놈의 정체가 뭐냐?”
     “글세, 적안을 개안한 상태에서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멀리에 있어서 잘 모르겠어.”
     혁이 궁금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어왔고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미로는 가면 갈수록 복잡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의 실수를 경함삼아 지혜롭게 헤쳐 나갔다.
     갈수록 조금씩 더 넓어지는 미로의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미로의 벽면이 문처럼 열리더니만 금색의 중갑옷으로 무장을 한 오크 나이트와 커다란 장궁을 가진, 오크 아처가 가진 숏 보우와는 전혀 다른 롱 보우를 든 오크 헌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는 대충 일곱. 오크 나이트 다섯 마리와 오크 헌터 두 마리가 핏발선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크 나이트와 오크 헌터가 모습을 나타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미로의 벽면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마주본 상태에서 오크 헌터가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우리를 겨냥한채 활시위를 당겼다.
     ‘음? 설마 아까 우리를 습격한 것도 오크 헌터인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오크 헌터의 화살이 내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걸고 몸을 날려 화살을 피했다.
     이 자식들, 본때를 보여주마.
     나는 등에 둘러메고 있던 활을 손에 쥐고 화살 두 개를 꺼내들었다. 건방지게 나에게 활을 쏜 오크 헌터 녀석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줄 차례이다.
     나는 두 개의 화살을 활시위의 절피에 걸고 힘껏 당겼다. 곧바로 활시위를 놓자 두 개의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오크 헌터의 가슴팍과 머리를 관통한 채 저만치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오크 나이트들이 투핸드 소드를 치켜들고 나와 혁을 향해 무섭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제길, 정령들을 죄다 소환해겠군. 주문을 외울 동안 혁이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루샤크, 내가 나머지 세 정령을 소환할 때까지 버텨낼 수 있겠어?”
     “대충 얼마나 걸리는데?”
     “조금 걸리긴 해.”
     “으음… 내가 버터보마. 빨리 안 하면 죽을 줄 알아! 매직 미사일!”
     “고맙다!”
     나는 혁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문을 외면서도 나의 시선은 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혁은 매직 미사일로 다가오는 오크 나이트를 견제하고 날아오는 오크 헌터의 화살을 쳐내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1클래스 공격마법인 매직 미사일로 고레벨의 몬스터 다를 완벽하게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순식간에 오크 나이트들이 혁과의 거리를 좁혔고, 혁이 급히 실드를 펼쳤다. 오크 나이트의 장검이 혁의 실드와 충돌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주문영창이 끝나자 이내 세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호, 청룡, 현무였다.
     “마스터!”
     “혀엉~!”
     “오랜만이군.”
     “자, 자. 인사는 조금 이따 하고, 현무! 저기 있는 오크 나이트를 향해, 그리스!”
     “응!”
     현무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혁의 실드를 마구 내리치던 오크 나이트 중 두 마리가 꼴사납게 바닥에 처박혔고, 바닥의 흙먼지가 자욱하게 번졌다. 바닥의 마찰계수가 0이 된 이상 넘어지지 않고 버텨낼 재간이 없던 것이다.
     좋아, 정령의 힘을 빌린다면 비약적으로 강해질 수 있다. 대신 그만큼 마나가 감소하게 된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넘어진 오크 나이트 두 마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을 내게 던졌다. 상당히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성질이 났는지 그 길로 혁의 실드를 부수는 걸 두리ㅗ 제쳐놓고 나에게 달려드는 두 마리의 오크 나이트를 보며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현무, 그리스.”
     벌러덩!
     꽈당!
     한 마리의 오크 나이트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다른 한 마리의 오크 나이트는 재빨리 뛰어올라 현무의 손이 닿는 거리에서 벗어났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오크 나이트. 시퍼렇게 날이 선 놈의 장검이 내 목을 향해 쇄도해왔다. 나는 재빨리 백 스텝을 밟고 뒤로 물러나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주작, 파이어 애로우!”
     화륵!
     예고 없이 급조한 스킬명. 하지만 다행히도 정확하게 알아들은 주작이 화살촉에 불을 붙였다. 나는 재빨리 활을 쏘았고, 화살촉에 시뻘건 화염을 머금은 화살은 오크 나이트를 향해 날아갔다.
     타악!
     “엉? 젠장, 퀵 스텝!‘
     오크 나이트가 사력을 다해 화살을 쳐낸 것을 본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들고 오크 나이트에게 돌질한 나는 오크 나이트의 어깨를 딛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허리춤에 화살을 꺼내들고 재빨리 오크 나이트의 안면에 활을 쏘았다.
     고개를 들고 이쪽을 멍하니 쳐다보던 오크 나이트의 흉측한 면상에 굵직한 화살이 박혔고, 오크 나이트는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그사이 사분히 지면에 착지한 나는 혁의 상황을 살폈다.
     다 부서져가는 실드에서 미간을 찌푸린 채 매직 미사일을 시전하고 있는 혁을 보며 화살 하나를 꺼내들 때였다.
     깜박 잊고 있던 오크 헌터의 화살이 내게 날아왔으나 백호가 펼친 반 구체의 실드에 화살은 맥없이 튕켜나갔다.
     ‘하마터면 화살ㅇ 맞을 뻔했군.’
     화살을 튕겨낸 실드에 검은 액체가툰 것으로 보아 화살촉에 독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독화살을 쓰다니, 생각보다 무서운 녀석들이군.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오크 헌터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윈드 애로우!”
     화살은 전과는 다른 속도로 맹렬히 날아가 오크 헌터의 목에 박혔고, 오크 헌터는 그대로 절명했다.
     현무의 그리스로 인해 넘어졌던 오크 나이트가 다시 중심을 잡고 일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이어지는 현무의 그리스!
     벌러덩.
     나는 중심을 잃은 오크 나이트의 안면에 또다시 화살을 쏘았고 오크 나이트는 그대로 절명했다. 나는 급히 시선을 혁에 던졌다.
     세 마리 오크 나이트의 공격을 받던 실드가 맥없이 깨져버렸지만 미리 시전해둔 매직 미사일로 오크 나이트를 견제한 혁이 재빨리 거리를 두었다.
     1:1로 붙을 경우 혁도 오크 나이트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만 다수인 경우에는 저렇게 손을 쓸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거리를 두며 뒤로 물러나던 혁이 소리쳤다.
     “레드! 서포트 좀 해줘!”
     그에 나는 말없이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    *     *
     “으아앗! 뭐, 뭐야?!‘
     갑작스럽게 나타난 두 구의 스켈레톤 워리어와 세 마리의 구울을 본 경훈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생각보다 어두운 미궁의 미로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몬스터에 깜짝 놀란 것이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경훈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세를 낮추었다.
     “스켈레톤 워리어와 구울이라. 좋아, 혼자서도 충분해. 자, 덤벼랏!”
     경훈이 소리치자 세 마리의 구울이 재빠른 몸놀림을 자랑하며 경훈에게 달려들었다.
     “패스트 워커, 탬핑 어택, 피스톨!”
     보조스킬을 외친 경훈이 주먹을 힘껏 내뻗으며 소리쳤다. 경훈의 주먹은 마치 피스톨을 쏜 것과 같이 구울의 안면에 꽂혔고, 구울의 안면은 흉측하게 터져 피와 뇌수를 뿜어냈다.
     아어 그는 뒤에서 달려드는 구울의 턱을 왼쪽 팔꿈치로 쳐낸 뒤 왼발을 축으로 다른 한 마리의 구울에게 옆차기를 먹였다.
     저레벨의 언데드 몬스터인 구울은 경훈에게 공격을 받고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세 마리의 구울은 그대로 절명했다.
     순식간에 세 마리의 구울을 처리한 경훈이 스켈레톤 워리어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간단한 경갑으로 무장한 스켈레톤 워리어가 느릿느릿 경훈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후우.”
     심호흡을 한 경훈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스켈레톤 워리어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에 쥐고 있던 롱 소드를 경훈의 목에 향해 휘두르는 스켈레톤 워리어. 움직이는 속도는 느렸지만 공격하는 속도는 거의 구울과 다를 게 없었다.
     재빨리 허리를 뒤로 젖혀 스켈레톤 워리어의 장검을 피한 경훈이 젖혔던 허리를 다시 안으로 펴는 것과 동시에 불근 쥔 주먹으로 허공에 반원을 그리며 스켈레톤 워리어의 두개골을 강타했다.
     빠악!
     경훈의 주먹에 맞은 스켈레톤 워리어의 상체가 잔뜩 숙여지자 경훈은 재빨리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발뒤꿈치로 스켈레톤 워리어의 두개골을 내리찍었다.
     스켈레톤 워리어의 머리는 바닥에 처박힘과 동시에 박살났다. 스켈레톤 워리어의 두개골이 박살난 것을 확인한 경훈이 재빨리 고개를 돌려 다른 한 구의 스켈레톤에게 시선을 던졌다.
     검을 쥔 손을 높이 치켜든 채 텅 빈 두개골에서 소름 돋는 안광을 뿜어내는 스켈레톤 워리어. 하지만 놈이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경훈의 주먹이 스켈레톤 워리어의 안면에 꽂혔고 무릎 공경에 갈비뼈가 박살이 난 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후우, 강한 몬스터가 나올 줄 알았는데.”
      경훈의 목소리엔 실망감이 서려 있었다. 순식간에 스켈레톤워리어 두 구를 때려눕힌 경훈은 다시 미로의 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얽히고설킨 복잡한 미로를 비교적 쉽게 지나온 경훈은 이내 작은 규모를 가진 방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기가 미로의 끝인가? 아니겠지? 후우. 좀 쉬었다 갈까?
     텅 빈 방의 문턱을 넘어 들어온 경훈. 경훈은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아 아이템 창을 열고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신 뒤 긴장을 풀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    *     *
     “매직 미사일!”
     혁의 모닝스타를 중심으로 형성된 다발의 매직 미사일.
     혁이 모닝스타를 휘두르자, 다발의 매직 미사일이 한 마리 오크 나이트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혁이 몸을 날려 오크 나이트의 복부에 사력을 다해 모닝스타를 휘둘렀다.
     콰앙!
     묵직한 소음과 함께 오크 나이트가 입으로 검붉은 피를 왈칵 쏟아낸 것으로 보아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혁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혁의 모닝스타는 오크 나이트의 머리에 내리 꽂혔고, 오크 나이트는 그대로 고구라졌다. 남은 두 마리의 오크 나이트가 혁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고, 지켜보던 나는 크게 소리쳤다.
     “현무, 그리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혁을 향해 달려들던 오크 나이트가 그리스에 당해 그대로 벌렁 뒤집어졌고, 지켜보던 혁이 모닝스타로 쓰러진 한 마리 오크 나이트의 대가리를 연신 내리찍기 시작했다.
     그걸 본 나는 즉시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쓰러진 오크 나이트가 일어서기 전에 처리하지 않으면 무방비 상태로 다른 오크 나이트를 공격하는 혁이 당하게 된다. 목표지점에 도착한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보우 어택!”
     콰앙!
     강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장궁이 오크 나이트의 안면을 강타했고, 오크 나이트의 안면은 흉측하게 짓이겨졌다.
     [레벨 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정령 현무(땅)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어라? 업했네?”
     “그래? 좋겠다.”
     나는 레벨업 메시지를 보며 피식 웃었다. 후우, 상태 창 좀 열어볼까?
     “상태 창, 오픈!”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56
     생명력(HP). 650
     마나(MP). 460
     스태미나(SP). 1,060(배고픔 수치 0%/ 갈증 0%)
     힘 137
     체력 65
     민첩 165
     손재주 429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210~320
     방어력 10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5
     바람(백호) Lv. 3.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2.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1.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1. 친화력 100%
     [상세정보]
     ‘흐음. 스탯 포인트를 분배하면 이제 손재주가 430을 넘어서겠군.’
     나는 피식 웃으며 스탯 포인트를 분배했다. 포션을 꺼내 마시던 혁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말했다.
     “허억, 허억. 스태미나가 너무 부족해. 스탯 포인트를 남겨두길 잘 한 것 같아. 체력에 좀 때려 박아야겠어.”
     “음? 전투 클레릭은 스탯 포인트 분배를 어떻게 하는데?”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혁은 포션을 마시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음. 전투 클레릭이란 직업을 선호하는 유저가 얼마 없어서, 이 직업으로 전직하는 사람도 얼마 없지. 그래서 스탯 분배 표준치가 정해져 있지 않아. 나 같은 경우에 함에 3, 지력과 지혜에 각각 1씩 때려 박지. 지금 스탯 포인트 15개를 막 체력에 대려 박았어. 2차 전직을 하게 되면 올렸던 스탯 포인트가 다시 초기치로 돌아가게 되니, 다시 새롭게 분배하면 되겠지?”
     혁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시위를 풀고 활을 등에 둘러맸다.
     그건 그렇고 2차 전직을 하게 되면 스탯 포인트가 다시 초기치로 돌아가는군.
     레인지로 2차 전직을 할 당시에 내 스탯 포인트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뭐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인 것 같긴 하다. 후우.
     티아에게 받은 옷이 먼지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놀라 붉은 조끼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낼 때였다. 어디선가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유저인가?
     나는 미간을 좁히고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혁을 향해 말했다.
     “가보자!”
     “그, 그래.”
     
                   *    *     *
     미궁의 미로 안.
     회색 비츨 내며 사라지는 것을 보아 유저인 것이 분명했다. 혀로 입가를 핥던 트롤이 포효를 하기 시작했다.
     쿠오오오!
     포효를 내지른 트롤의 시선이 벽에 기댄 채 벌벌 떨고 있는 유저에게 고정되었고.
     금발의 긴 생머리에 푸른 사파이어를 연상시키는 눈동자를 가진 여성 유저가 부들부들 떨며 손에 쥔 크로스 보우(Cross Bow:석궁)를 들고 트롤을 겨냥했다.
     “더블 샷(Double Shot)!"
     쐐애액!
     푸푹!
     두 개의 화살은 대기를 가르며 트롤의 복부에 꽂혔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어 큰 충격을 주지 못했는지, 트롤은 아무렇지 않게 팔을 뻗어 유저의 머리를 움켜쥐려 했다.
     “배, 백 스텝!”
     여성 유저가 백 스텝을 밟고 뒤로 물러났지만, 트롤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유저의 두 눈동자는 절망감에 젖어있었다.
     “백 스텝!”
     그녀는 다시 백 스텝을 밟았지만,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즉 방의 구석에 몰린 샘이었다.
     “보, 보우 어택!”
     파악!
     유저는 들고 있던 크로스 보우로 트롤을 공격했지만, 별 충격을 가하지 못한 공격에 트롤은 귀찮다는 듯 아가리를 쫙 벌리고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카아악!
     ‘이 상태로 다른 동료들처럼 마지막 마을로 이동하게 되는구나…….’
     트롤이 팔을 치켜 올리자 그녀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트롤이 치켜들었던 팔로 유저를 내리치려는 순간,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쐐애액!
     콰앙!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스몰 스피어가 트롤의 치켜든 팔을 스치고 거대한 파공음과 함께 벽면에 박혔다.
     스몰 스피어가 훑고 지나간 트롤의 팔의 상처가 말도 안 되는 재생력으로 회복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트롤이 괴성을 지르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파워 샷(Power Shot)!"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성과 함께 또다시 날아오는 스몰 스피어.
     트롤의 복부에 정확히 꽂힘과 동시에 트롤은 벽면에 그대로 처박혀버렸다. 구석에 몰려 있던 여성 유저의 시선은 스몰 피어스가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허, 헌터 아이(Hunter eye's)!"
     그녀가 헌터 아이를 개안하자 먼 곳에 서 있는 한 유저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붉은 빵모자를 뒤집어쓴 검고 긴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평범하게 생긴 소년.
     붉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의 왼손엔 들고 다니기도 벅차 보이는 거대한 장궁이 들려 있었다.
     ‘저, 저게 활인가? 그리고 이것이…….’
     소년의 손에 들린 활을 유심히 바라보던 유저의 시선이 벽면에 박힌 스몰 스피어를 연상시키는 화살로 향했다. 분명 겉보기엔 스몰 스피어와 아주 약간 비슷한 형태였지만, 끝부분에 화살깃이 달려 있었다.
     ‘저런 활을 한손으로 들고 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건가? 도대체 저 유저는…….’
     다시 시선을 거대한 장궁을 쥔 유저에게 던진 유저. 소년은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뽑아들곤 화살을 활등에 대고 화살 깃을 활시위의 절파에 걸고 힘껏 당겼다.
     “파워 샷!”
     거대한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순식간에 트롤의 머리에 박혔고, 트롤의 머리에선 피와 뇌수가 뇌수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소년이 활시위를 풀려는 찰나, 짙은 청록색의 피부를 가진 한 마리의 트롤이 또다시 리젠되어 소년의 앞을 가로막았다.
     “백 스텝!”
     백 스텝을 밝고 뒤로 물러나 화살 하나를 꺼내든 소년화 소년에게 달려드는 트롤.
     자신의 백 스텝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물러나는 소년의 백 스텝을 본 여성 유저의 입이 놀란 나머지 떡 벌어졌다.
     소년은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화살 하나를 쏘아 보냈고, 거대한 화살이 트롤의 오른쪽 팔뚝에 박혔다.
     달려들던 트롤이 공격을 멈추고 자신의 팔에 박힌 화살을 멀뚱히 보고 있을 때, 또다시 거대한 화살이 반대편 어깨에 박혀들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트롤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기 시작하자 소년이 퀵 스텝을 외치며 트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서 활을 쏘면 될 텐데 왜 굳이 접근을 하는 거지?’
     소년의 요상한(?)행동을 지켜보던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백 스텝과 마찬가지로 퀵 스텝을 움직이는 소년의 움직임은 스킬을 시전하기 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순식간에 트롤에게 다가가 내벋은 트롤의 팔을 딛고 뛰어오른 소년.
     높이 뛰어올랐다지만 중력의 법칙은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 상태로 지면에 착지하게 된다면 트롤의 날카로운 이빨이 소년의 목줄기를 물어뜯을 것이 분명했다.
     지켜보던 여성 유저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에 그녀의 두 눈은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지면에 착지하기도 전에 트롤이 소년을 낚아챌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소년이 떨어짐과 동시에 치켜든 활로 트롤의 대가리를 내리찍는 것이 아닌가?
     강한 충격에 트롤의 대가리는 흉측하게 함몰되었고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사뿐히 지면에 착지한 뒤, 다시 백 스텝을 밟고 뒤로 물러났다.
     휘청거리던 트롤이 이내 뒤로 벌러덩 나자빠져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소년이 마지막에 트롤에게 가한 공경은 다름 아닌 보우어택. 봉통 궁수들이라면 멀리하는 스킬이다.
     활이나 석궁이 쉽게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었고 적이 가까이 접근할 경우, 퀵 스텝과 백 스텝이라는 유용한 스킬로 거리를 두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궁지에 몰려 더 이상 거리를 둘 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쓰는 스킬인 보우어택.
     보통 궁수들은 보우어택을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에 수련치가 낮아 보우어택을 사용할 경우 형편없는 공격력으로 그저 적을 움찔하게 만드는 용도로만 쓰인다.
     그렇지만 소년의 보우어택은 달랐다. 가공할 파괴력으로 보아 보우어택의 수련치가 무지 높은 유저로 보였던 것이다.
     “세상에… 근거리에서도 강한 공격이 가능한 궁수라니…….”
     여성 유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고, 순식간에 트롤을 제압한 소년은 그녀에게 다가왔다.
                   *    *     *
     갑작스레 리젠된 트롤을 처리한 나는 방의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여성 유저를 볼 수 있었다. 손에 크로스 보우를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궁수인 것이 분명했다.
     ‘가만.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유저에게 접근했다. 그런 내 뒤로 혁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소리쳤다.
     “휴우. 이 정령들 사람 참 귀찮게도 하는구나.”
     혁에게 매달려 이것저것 묻는 호기심 많은 백호, 주작, 현무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다른 세 정령들과는 달리 청룡은 말이 없었고, 나 이외에 다른 사람에겐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무뚝뚝한 녀석.
     나는 활시위를 풀어 활을 등에 둘러메고 여성 유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거 또 몸이 자연스럽게 굳기 시작하는군.
     “괘,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나요?”
     “예, 괜찮아요.”
     “다, 다행이네요.”
     “어디. 잠시 실례 좀 합시다.”
     모닝스타를 어깨에 들쳐 멘 혁이 유저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부상이 조금 심하군요.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큐어!”
     유저의 부상을 치료하고 힐링으로 생명력을 회복시킨 혁이 흐르는 땀을 팔로 흠치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시 몬스터가 나오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크로스 보우를 등에 둘러메고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우리 언제 본 적 있지 않나요”
     “글쎄요. 어디선 본 것 같기도 하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여성 유저가 입을 열었다.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면 레드 파운? 저, 리아에요! 모르겠어요?”
     “리아?”
     고개를 갸우뚱하며 유저를 빤히 보고 있을 때 정보 보기로 내 호칭을 봤는지 리아가 결정적인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마성의 현자 레온의 동생이요!”
     “아, 레온의 동생이라면 그때 그?!”
     나는 그때의 상황을 되짚었다.
     지금은 무시할 수 없는 마성의 두 번째 현자이자, 5클래스의 마법사인 레온도 고블린에게 구타를 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홉 고블린에게 쫒기던 리아와 고블린에게 구타를 당하던 레온을 도와주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야? 아는 분이었어?”
     혁이 말했다. 나는 시선을 혁에게 던진 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풉, 왜 갑자기 웃음이 나오는 거지?
     혁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백호와 어깨에 앉은 주작, 그리고 혁의 발드에 올라앉은 현무.
     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령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뭐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리아아게 다시 시선을 고절시킨 채 물었다.
     “그런데 미궁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우리처럼 사냥하려고 왔겠지 이 멍충아.”
     “푸훗…….”
     혁의 대답에 리아가 입을 가리고 소리죽여 웃기 시작했다. 허, 그 자식. 태클하나는 정말 잘 건다. 나는 그런 혁을 무시한 채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다른 동료들은 전부 마지막 마을로 돌아간 건가요?”
     “네.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별 탈이 없었는데, 중형 몬스터 여럿이 있으니 금세 파티가 괴멸되었어요.”
     “도대체 트롤이 몇 마리나 있었기에…….”
     “열 마리 가량 있었는데, 다수의 중형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닌지라…….”
     리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혁이 리아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자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저희와 동행하실래요? 비록 저 녀석보다 약하다지만 지켜드릴 자신은 있습니다.”
     “그, 그래도 될까요?”
     혁을 바라보며 말하는 리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크흠. 뭐지? 이 상황은. 그건 그렇고 혁에게 저런 자상한 면이 있었다니. 그저 싸이코로 알고 있었는데.
     “크흠. 자 이제 더 나가보자. 빨리 미로를 헤치고 나가야 보스 방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을 거 아냐?”
     나의 말에 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자, 같이 가시죠.”
     “네.”
     동행하는 유저가 궁수라니. 원거리에 있는 적을 처리하는 게 더 수월해진 것이다. 나는 앞장서서 커다란 방을 나와 다시 미로의 넓은 길을 걸었다.
                   *    *     *
     ‘이대로 가다간 검신이 무뎌지겠어.’
     달려드는 구울의 머리통을 박살낸 강찬이 붉게 물든 문 블레이드의 검신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무리지어 달려드는 구울에게 시선을 둔 강찬이 두 손으로 문 블레이드를 고쳐 잡으며 소리쳤다.
     “파이어 웨폰!”
     화르륵!
     붉게 물든 검신 위로 시뻘건 화염이 뒤덮었고, 강찬이 검을 휘두르자 검이 대기를 갈라 그 열기가 산산이 흩뿌려졌다.
     끝없이 밀려나온 구울 떼가 강찬을 둘러싸고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개미떼가 바닥에 떨어진 사탕에 모여드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하앗!”
     단발마의 기합소리와 함께 강찬이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은 강찬에게 달려든 구울들이 학살당하는 것이었다.
     애당초 저급 언데드 몬스터인 구울이 아무리 다수라고 해도 이제 2차 전직을 내다보고 있는 유저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시뻘겋게 타오르는 화염검을 든 강찬의 주변엔 갈가리 찢겨진 구울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울들의 시체는 서서히 형체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중형 몬스터라도 나오는 줄 알았더니. 계속해서 구울뿐이네. 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 뭐 그래도 던전 추가경험치까지 합하니 꽤 많은 경험치를 얻은 셈이로군.’
     구울의 시체가 모조리 없어졌고 길이 트이자 강찬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복잡한 미로를 지나 몇 번의 실수를 거듭하는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길을 걸으며 아이템 창에서 육포 하나를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지루함을 달래던 강찬의 눈에 유저로 추측되는 물체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강찬은 문 블레이드를 검갑에 수납하고 쓰러진 유저에게 서두러 다가갔다.
     은빛 풀르레이트 메일엔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움푹파인 브레스트 플레이트 사이로 호버크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극심한 치명상을 입고 미로의 길가에 버려진 유저. 아니, 반대편에서부터 쭉 이어진 핏자국을 보니 도주를 하던 끝에 쓰러진 것 같았다.
     강찬은 유저의 브레스트 플레이트를 벗기고 호버크를 풀어해쳤다. 움푹 패인 브레스트 플레이트가 가슴팍을 짓누르고 있으면 제대로 호흡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상률이 무지 높은 것 같군. 응급치료 스킬의 수련치가 낮아서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강찬은 아이템 창을 열고 파스를 연상시키는 아이템 하나를 꺼내들었다. 응급치료란 파스를 이용해 누구나 쉽게 부상률을 치유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간단한 부상률을 치유하는데 좋은 반면, 극심한 부상률을 치유하려면 꽤 오랜 시간동안 스킬을 시전하고 있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아이템을 유저의 가슴팍에 올려놓은 강찬이 입을 열었다.
     “응급치료.”
     보일 듯 말 듯한 은은한 푸른빛이 유저의 몸으로 구서구석 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부상률을 치유가기 시작했다.
      속도는 매우 늦었지만 착실하게 부상률을 치유했고,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나고 나자 유저의 부상율이 전부 회복되었다. 그와 함께 드디어 데들리(Deadly) 상태에서 벗어나자 유저도 차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강찬은 아이템 창에서 포션을 꺼내 유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 포션 좀 드시고 기운 차리세요.”
     “아, 가, 감사합니다.”
     급히 상체를 일으킨 유저가 목례를 하며 포션을 받아들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브레스트 플레이트를 내려다보던 강찬은 아이템 창에서 여분으로 남겨두었던 브레스트 플레이트도 유저에게 말없이 건네주었다.
     브레스트 플레이트와 호버크를 벗은 유저는 색이 바랜 레더아머 위로 호버크를 착용한 뒤 그 위로 강찬에게 받은 브레스트 플레이트를 착용했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떨어진 롱 소드를 집어든 유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강찬이 물었다.
     “도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강찬이 유저가 도주해온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유저가 힘없이 대꾸하기 시작했다.
     “중형 몬스터를 상대하던 도중, 갑작스레 리젠된 ‘변종 트롤’ 두 마리에게 당한 겁니다.
     ‘역시. 미궁이 만만한 던전은 아닌 것 같아.’
     유저를 빤히 바라보던 강찬이 손을 뻗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유저가 강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유저를 바라보던 강찬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실례지만 레벨이 어떻게 되십니까?”
     “101입니다. 3일 전에 기사로 2차 전직을 했죠.”
     “아하. 그렇군요.”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자신보다 레벨이 더 높은 유저가 이렇게 피떡이 되어 쓰러질 정도면 얼마나 지독한 몬스터가 있다는 것인가?
     강찬이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유저가 되물었다.
     “저도 실례를 하겠습니다. 레벨이 어떻게 되시는지…….”
     “96입니다. 당신과 같은 기사가 아니, 히든 클레스 마검삽니다.”
     “마, 마검사…….”
     강찬의 말에 기사 유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얻기 힘들다던 히든 클레스 그 히든 직업 중에 속하는 마검사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유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강찬이 먼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우선 상황이 어떤지 보죠.”
     “아, 예…….”
     강찬과 기사 유저는 미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벽에 등을 기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궁수 유저를 볼 수 있었다.
     그를 본 기사 유저가 가까이 다가가 이것저것 묻는 것으로 보아 동료인 것이 분명했다.
     ‘역시. 솔플(솔로 플레이)이 아닌 우리와 같은 파티 플레이였군.’
     기사 유저가 건네 준 스태미나 포션을 받아 마시는 궁수 유저. 그때였다. 저축이 울리며 육식 몬스터 특유의 노린내가 서서히 풍겨오기 시작했고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카오오오!
     멀리서 들려오는 포효.
     잠자코 있던 강찬이 문 블레이드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고 궁수 유저를 지켜보던 기사 유저도 손에 쥔 롱 them를 고쳐 들었다.
     잠시 후, 기사 유저의 장검의 검신에 아름답다 못해 신비한 옅은 청색의 오러가 밀려올라오기 시작했다. 기사 유저의 검엔 오러가 충만히 맺혀 있었다.
     강찬도 문 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쿠웅, 쿠웅.
     점점 크게 들려오는 발소리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변종 트롤. 보통 트롤과는 다른 신장과 우람한 덩치. 그리고 검게 물든 피부가 과연 변종다웠다.
     변종 트롤은 코를 벌름거리며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강찬과 두 유저를 발견하고 사납게 포효를 내질렀다.
     캬오오오오!
     “존. 네가 견재해줘.”
     “알았어.”
     기사 유저의 말에 재빨리 일어난 궁수 유저가 풀어진 활시위를 활 끝에 걸고 어깨위로 손을 넘겨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포효를 내지르며 핏발이 선 큼직막한 눈에 궁수 유저가 쏘아보낸 화살이 박혀들자 변종 트롤이 괴성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궁수와 기사의 조합이라. 그런대로 괜찮군.’
     “파이어 웨폰.”
     화르륵!
     두 유저를 지켜보던 강찬은 변종 트롤을 바라보며 외쳤다.
     “갑시다!”
     그러자 기사 유저도 알겠다는 듯 소리를 치며 변종 트롤에게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기사 유저가 오러가 맺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도중에 궁수 유저의 화살이 변종 트롤의 뱃가죽에 적중했지만, 질긴 가죽을 뚫는 것은 무리였다.
     ‘역시 궁수를 사람들이 꺼려하는 이유가 있군.’
     강찬이 문 블레이드를 휘둘러 변종 트롤의 뱃가죽을 베어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검게 그을린 뱃가죽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말도 안 되는 재생력으로 아물기 시작했다. 기사 유저의 공격으로 쫙쫙 갈라져 피를 흘리던 가죽 역시 금세 아물었다.
     ‘뭐 이딴 사기급 몬스터가 다 있지? 안 되겠어. 상처 부위의 신경을 무디게 하는 방법을 쓰는 수밖에…….’
     변종 트롤에게 바짝 붙어 공격을 가하던 강찬이 재빨리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났다. 문 블레이드이 검신이 붉게 타오르던 화염이 안개에 가려지듯 사라지자 강찬이 말했다.
     “프리징 웨폰.”
     화아악!
     순간 문 블레이드가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문 블레이드의 순백색의 검신에서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얼어버릴 것 같은,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크크크.”
     강찬이 입술 사이로 냉소가 비집고 나왔다. 그대로 강찬은 변종 트롤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고, 검이 대기를 가르자 냉기가 산산이 흩뿌려졌다. 시린 한기를 머금은 강찬의 검이 변종 트롤의 팔을 갈랐다.
     서걱.
     방금 전 상황과는 달리 신경이 무뎌져 재생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강찬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문 블레이드는 대기를 갈가리 난도질하기 시작했고, 강찬의 공격을 받은 변종 트롤의 팔은 걸레짝이 되기 시작했다.
     카오오!
     걸레짝이 다 된 팔로 강찬을 움켜쥐려던 트롤의 팔 위로 푸른 빛이 스치고 지나갔고, 푸른빛이 지나간 자리로 붉은 체액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후, 하마터면 저 녀석의 손아귀에 잡힐 뻔했네요.”
     강찬을 등진 채 앞을 가로막으며 장검을 움켜 쥔 기사 유저가 말했다.
     캬오오오오!
     변종 트롤이 부르짖으며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무뎌진 신경이 차츰 되돌아와 상처 부위에 고통이 느껴지시 시작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상처 부위에 화살 하나가 꽂히자 변종 트롤은 이성을 잃고 궁수 유저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크, 백 스텝, 백 스텝, 백 스텝!”
     궁수 유저는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 활을 쏘기 시작했다. 연한 아랫배에 화살이 박히자 변종 트롤이 움찔했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접근한 강찬이 공격을 가했다.
     문 블레이드의 검신이 변종 트롤의 뒷목을 스치는 순간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리고 그 위로 기사 유저의 검이 박혀들었다. 변종 트롤의 목을 뚫고 나온 검엔 푸른 오러가 맺혀 있었다.
     치이익.
     핏방울은 오러에 닿자,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기사 유저는 변종 트롤의 어깨에 올라탄 채 꽂았던 검을 뽑고 검을 거꾸로 집어 들었다. 그리곤 변종 트롤의 머리에 내리 꽂았다.
     푸악!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변종 트롤이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기사 유저는 사뿐히 지면에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빛 무리가 강찬의 몸을 휘감더니 이내 공중으로 치솟았다.
     “축하합니다.”
     “오, 축하드려요!”
     레벨업을 한 것이었다. 두 유저의 축하에 강찬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기사 유저가 말했다.
     “아직 한 마리가 더 남아 있습니다. 마검사님께서 합류하니 상대하는 것이 무지 쉬워졌네요.”
     “하하, 그런가요?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카이루입니다. 마지막 한 마리가 있는 곳을 아신다면 앞장서주세요.”
    *   *   *
     “배고프지, 루카?”
     캉캉!
     티아의 말에 루카는 캉캉 짖기 시작했다. 티아는 아이템 창에서 큼지막한 고깃덩어리를 꺼내 루카에게 던져주었다. 세차게 꼬리를 흔들며 고깃덩어리를 야금야금 먹시 시작하는 루카.
     티아는 쭈그리고 앉아 고깃덩어리를 먹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티아가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실라이론을 소환해 막다른 길이 어딘지 파악하면 미로를 금세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정령이 소환되어 있는 이상 몬스터들이 감히 티아에게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상대가 강력한 몬스터 다수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제아무리 상급정령이라고 해도 수로 밀어붙이는데 어찌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루카가 고깃덩어리를 전부 먹어치우자 티아는 현성이 덮어준 망토로 몸을 가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자 그들은 미로의 중간 부근에 위치한 넓은 방에 도착하게 되었다. 넓은 방으로 들어온 티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커다란 석상이 방의 구석진 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처음 보는 문장이 벽에 새겨져 있었다.
     티아가 정신을 놓고 한참동안 방을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넓은 방 안에 대기가 뒤틀리며 새하얀 빛무리가 일렁이더니 이내 몬스터가 리젠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하급 언데드 몬스터인 좀비와 구울부터 시작해서 오크 나이트 무리가 리젠된 것이었다. 실라이론이 새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재빨리 티아의 앞을 가로막았고, 루카도 낮게 목청을 울리며 티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르르…….
     구울이 재빨리 타아에게 접근했지만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에 몸이 산산 조각난  채 구울의 몸뚱이는 바닥에 흩뿌려졌다.
     아직 오크 나이트를 상대할 수 없는 루카는 좀비와 구울에게 달려들었고, 바람의 상급정령인 실라이론이 오크 나이트 무리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접근하는 좀비들과는 달리 빠른 몸놀림을 자랑하며 루카에게 접근하는 구울들. 하지만 루카는 그보다 훨씬 더 빠른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하며 반격을 가했다.
     루카의 날카로운 이빨이 구울의 목덜미를 물고 흔들어댔다. 그리고 그런 루카의 공격에 구을은 반격도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루카가 구울과 좀비를 해치우고 있는 동안 티아에게 접근하는 오크 나이트 무리를 본 실라이론이 손을 뻗어 손목을 한번 휘젓자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한 마리 오크 나이트의 목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채앵!
     오크 나이트가 들고 있는 투핸드 소드로 바람의 칼날을 쳐내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실라이론이 손바닥을 쫙 펴자 손바닥 위로 바람이 응축되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쏘아지는 에어버스트!
     콰앙!
     응축된 바람이 오크 나이트와 충돌하자 엄청난 파고음가 함께 폭발했다. 에어버스트에 공격당한 오크나이트 주변에 있던 오크 나이트도 폭박에 휘발려 만신창이가 되었다.
     살아남은 오크 나이트 무리는 시라이론에게 섣불리 접근을 못하고 주춤거릴 뿐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취익! 정령…….”
     “오크 나이트 따위가 감히 정령을 입에 담다니.”
     실리이론이 손바닥을 쫙 펴자 바람이 응축되고 응축되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날이 선 새하얀 바람의 검. 실라이론의 몸 주위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오크 나이트들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실라이론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날려 바람의 검을 휘두르자 대기가 갈라지며 오크 나이트의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쭉 금이 가는가 싶더니 이내 잘려진 상반신이 하반신을 파고 주르르 미끄러져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실라이론의 몸 주위에선 여전히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밝은 갈색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실라이론을 바라보던 티아가 루카에게 시선을 돌렸다.
     덤벼들던 구울들을 몽땅 해치운 루카가 느릿느릿 움직이는 좀비들을 일방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했다. 좀비들을 순식간에 해치운 루카가 재빠리 티아에게 달려와 티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주변을 경계했다.
     “실라이론, 모조리 해치워버려!”
     “네, 마스터!”
     실라이론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돌려 티아를 바라보았다.
     바람의 검을 쥐지 않은 왼팔을 뻗어 티아를 향해 손바닥을 펴자 반투명한 흰색의 둥근 막이 티아와 루카의 몸을 감쌌다.
     다시 시선을 오크 나이트에게로 고정시킨 실라이론이 두 손으로 바람의 검을 움켜쥐었다.
     전보다 더욱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바닥에 뿌려진 흙먼지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실라이론의 기세에 오크 나이트들은 투지를 잃은 것이 분명했다.
     놈들의 눈빛엔 절망감이 서려있었다. 가차 없이 휘두른 바람의 검에 오크 나이트 무리가 전멸했고,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듯 휘몰아치던 거센 바람이 사라졌다.
     곧이어 실라이론의 손에 쥐어져 있던 바람의 검도 서서히 형체를 잃어갔다. 티아와 루카를 둘러싼 막이 사라지자 실라이론이 티아에게 다가와 말했다.
     “마스터, 기세를 끌어올리느라 정령력을 거의 소진했습니다.”
     “응. 수고했어, 실라이론. 정려예로 돌아서 정령력을 회복해. 역소환!”
     티아의 말이 끝나자 실라이론은 안개에 가려지듯 사라졌다. 실라이론을 정령계로 역소환 시킨 티아가 입을 열었다.
     “불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을 맺은 나 티아 젠이 그대의 힘을 빌리고자 명하노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샐라임!”
     주문영창이 이어지자 이내 붉은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꽃미남형의 얼구에 온몸이 불로 뒤덮인 소년이 소환되어 타의 앞에 섰다. 불의 상급정령 샐라임이었다.
     티아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샐라임이 타아의 뒤에 섰다.
     “마스터.”
     “좋아, 가자!”
     티아가 소리치며 미로의 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티아의 뒤로 그림자처럼 루카가 따라붙었다.
                   *    *     *
     “헤드, 그 활 좀 제가 들어봐도 될까요?”
     “에?”
     등에 둘러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리아. 나는 빙긋 웃어 보이며 왼손으로 등에 둘러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집어 리아게게 건네주었다.
     리아의 손에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닿는 순간 나는 활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궁수인지라 힘 스탯을 찍지 않은 리아가 두 손으로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간신히 받아들며 말했다.
     “이, 이런 걸 한손으로 들고 쏜 거예요?”
    “네. 좀 무겁지요?”
     나는 다시 손을 뻗어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집어 들었다. 한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활을 등에 둘러메는 나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리아.
     신기하기도 할 테지. 나는 또다시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지켜보던 혁이 말했다.
     “나도 한 번 들어보자.”
     “너는 그냥 거뜬히 들 수 있을 거야.”
     나는 등에 둘러메고 있던 활을 혁에게 휙 던져주었고, 혁은 아무렇지 않게 모닝스타를 쥐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진, 풀어진 활시를 보며 혁이 말했다.
     “흐음. 활시위를 푸니까 연결되어 있을 때보다 조금 더 짧네. 걸 때 무진장 힘들겠다.”
     “응. 오우거의 힘줄로 만든 활시위라 처음엔 무지 고생했지. 뭐 지금은 익숙해.”
     나와 혁 사이에서 오고가는 대화를 듣던 리아가 등에 둘러멘 크로스 보우를 매만졌다. 크로스 보우를 매만지던 리아가 내 머리위에 앉아있는 백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레드, 몸에 붙어있는 그 동물들은 뭐에요?”
     “아, 이 녀석들은 얼마 전에 계약한 정령들이에요.”
     “아…….”
     “하하. 놀라셨나 봐요? 궁수가 정령을 쓰는 것을 보고.”
     “네. 무슨 계기로 정령과 계약을 한 거예요?”
     “그게 말이죠…….”
     나는 정령 계약 퀘스트를 할 때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리스 노아의 정령사의 캠프에서 바람의 정령석을 받아 정령과의 계약을 한 일과 정령 계약 퀘스트를 한 일. 그리고 드워프의 마을인 바론에서 일어났던 일들, 마지막으로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에서 겪은 일 등 부풀림과 거짓 없이 이야기 해주었다.
     “우와. 그런 일이 있었군요.”
     “네가 아울베어를 잡았단 말이야? 캬, 엄청나구먼, 근데 안타깝게도 피니시를 루카가 치다니. 도대체가 소환수에게 스틸당한 주인이라니. 쯔쯧.”
     “뭐… 그럴 수도 있지. 짜샤. 아, 리아. 정령들을 소개해 드릴게요. 제 머리 위에 앉아있는 요 녀석이 바람의 정령인 백호에요. 이중에서 제일 순한 녀석이지요. 그리고 제 어깨 위에 앉아있는 녀석은 불의 정령인 주작이구요. 제일 애교가 많아요. 제 왼팔에 감긴 요 실지렁이 같은 녀석은…….”
     “말조심해라, 마스터. 실지렁이라니.”
     “하하, 미안, 미안.”
     예상했던 청룡의 반응에 나는 찔끔하며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제 팔에 감긴 녀석이 물의 정령인 청룡이지요. 네 녀석들 중 제일 건방지고 싸가지 없어요. 또 과묵해서 말도 잘 안 해요, 애교란 건 전혀 없고…….”
     청룡의 부릅뜬 눈을 본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크흐. 그리고 제 발등에 딱 붙어있는 이 녀석은 땅의 정령인 현무라고 해요. 제일 어린 녀석이죠.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게 저를 형이라 불러요.”
     “그렇군요. 현무라… 너무 귀여워요.”
     한참을 이렇게 잡담으로 때우며 미로를 걸었다.
     이거 한참동안 수다를 떨었더니 슬슬 허기진다. 나는 상태 창을 열어보았다.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56
     생명력(HP). 650
     마나(MP). 460
     스태미나(SP). 900(1,060) (배고픔 수치 70%/ 갈증 40%)
     힘 137
     체력 65
     민첩 167
     손재주 432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210~320
     방어력 10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5
     바람(백호) Lv. 3.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2.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1.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1. 친화력 100%
     [상세정보]
     “배고픔 지수가 70%라니. 스태미나 초대치가 상당히 감소되었군.”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군. 먹을 것 좀 꺼내봐.”
     혁이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미리 사두었던 식량을 꺼냈다. 혁도 자신이 준비해온 음식을 꺼내 자리 잡고 앉았다.
     “리아 씨는?”
     내가 고개를 돌려 리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근데 리아가 요상한(?)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어디서 패왔는지 장작을 꺼내더니 바닥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템 창에서 꺼낸 성냥으로 불을 붙이자 장작이 조금씩 타기 시작했다.
     쯧, 저래서 언제 태우려고
     “주작. 장장에 불 좀 붙여줘.”
     “네엘~ 마스터~.”
     주작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작에 불이 붙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을 보고 생긋 웃으며 감사를 표한 리아는 나뭇가지를 깎아 만든 Y자 모양의 길쭉한 받침대 두 개를 꺼내더니 장작의 양옆에 세우고 커다란 냄비를 꺼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이윽고 아이쳄 탕에서 꺼낸 냄비를 Y자 모야의 틀에 걸치더니 둥근 냄비에 약간의 기름을 둘렀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밥을 냄비에 넣고 온갖 야채를 꺼내 잘게 썰더니 냄비에 쏟아 부었다.
     그런 후 큼직한 고깃덩이를 꺼내 잘게 썬 뒤 냄비에 쏟아 넣고 마지막으로 온갖 조미료를 더해 밥을 볶기 시작하는 리아.
     나무로 된 주걱으로 밥을 휘저으며 능숙한 솜씨로 밥을 볶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게 벨터에게 말로만 듣던 요리스킬인 건가?
     요리에 관심이 없던 나는 흥미롭게 리아의 행동을 살피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밥을 다 볶아낸 리아가 큼직한 접시 세 개를 꺼내더니 밥을 덜기 시작했다.
     “헤헤. 남는 시간동안 요리 스킬 수련치를 좀 올렸거든요. 드셔보세요.”
     얼굴이 붉어진 리아가 밥을 덜어낸 접시를 우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아, 자, 잘 먹겠습니다.”
     “오, 볶음밥이다!”
     혁이 소리치며 접시를 받아들었다. 일단 접시를 받아들긴 했는데, 먹지 않고 그저 눈으로 볶음밥을 바라보는 우리를 보며 리아가 말했다.
     “왜, 왜요? 맛없어 보이나요?”
     “엥? 수저가 없어서요. 맨손으로 먹어야 하나?”
     “아차! 여, 여기요.”
     혁의 대답에 리아가 급히 수저를 꺼내 혁과 나에게 건네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볶음밥은 군침이 돌았다.
     우리는 꺼내놓은 음식을 뒤로한 채 리아의 요리를 맛보기 시작했다. 수저로 한 술 떠 입에 넣자 볶음밥의 열기가 느껴졌고 고소한 냄새가 입 안 가득히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수도 세인트 모닝의 음식점에서 사먹는 것보다 훨씬 더 맛있잖아?
     나는 허겁지겁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맛있게 식사하는 나와 혁을 보며 생긋 웃던 리아가 천천히 자신 몫의 볶음밥을 먹기 시작했다.
     요리 스킬이 이렇게 유용한 스킬인 줄 알았으면 진작에 배워둘 걸.
     그런데 음식 냄새를 맡았는지, 고블린 무리가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보통 고블린보다 조금 더 큰 키에 조금 더 큰 덩치. 그렇다고 홉고블린처럼 짙은 회색의 피부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던전의 환경에 적응해 살다보니 변종 된 녀석들인 것 같았다.
     놈들은 각자 손에 작지 않은 클럽과 도끼, 그리고 날이 상한 숏 소드를 들고 있었다. 이내 우리를 발견한 고블린 무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머, 고, 고블린!”
     식사를 하던 리아가 소리쳤다. 하지만 나와 혁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청룡, 주작, 백호, 현무. 저 녀석들이 식사 방해를 하는데, 처리 좀 하고 와.”
     “흥. 귀찮게. 알겠다.”
     “넹~ 마스터~.”
     “알았어요, 마스터!”
     “알았어, 형!”
     나는 시선을 다시 요리에 두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키에엑!
     쩌적!
     화르륵!
     키엑!
     자잘한 효과음과 함께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로 보아 고블린 녀석들이 호되게 당하고 있나보군. 그제까지만 해도 그저 놀란 눈으로 멍하니 정려들을 보던 리아가 다시 시선을 요리에 고정시킨 뒤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 뒤 우리는 또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눈을 가늘게 뜨자 저 멀리에 미로의 끝이 보였고, 큼지막한 석판을 볼 수 있었다.
     나와 혁, 리아는 재빨리 미로의 끝으로 달려와 석판에 적힌 허무한 문장을 읽었다.
     [두 번째 통로의 험난한 미로를 해치며 미로의 끝까지 온 것을 환영한다. 아쉽게도 오늘의 미궁은 두 번째 통로에 보스이 방이 없다. 보스 방의 위치는 현실 시간으로 하루에 한 번씩 랜덤으로 바뀌게 된다.
     요컨대, 오늘 두 번째 통로에 보스의 방이 있다고 내일도 있다 그런 경우는 희박하다. 미궁을 나가려면 ‘탈출’을 외치고 다시 통로를 선택하려면 ‘재도전’을 외쳐라.]
     “역시… 여긴 아니었나보네.”
     “이 석판을 그냥!”
     버럭 성질을 낸 혁이 모닝스타를 치켜세우더니 석판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석판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후우. 하는 수 없지. 통로 앞에서 기다렸다가 보스의 방 앞에 도착한 녀석이 연락을 줄 때까지 기다리자.”
     “뭐 그래도 경험치는 짭짤했으니. 파티 퀘스트의 보상이 기대 되는 걸?”
     혁의 말을 끝으로 우린 모두 재도전을 외쳤고, 곧이어 새하얀 빛무리가 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다시 통로의 앞으로 오게 되었다.
                   *    *     *
     카오오오오!
     “저, 저 녀석이다!”
     광폭한 포효가 들려오자 ‘존’이라는 궁수 유저가 소리쳤고, 그에 강찬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존이 가리킨 몬스터에게 시선을 던졌다.
     확실히 아까 잡았던 변종 트롤과는 다른 녀석이었다.
     트롤임에도 불구하고 어깨 위에 하나만 있어야 할 머리가 두 개가 붙어있다는 점이 크게 달랐다. 게다가 덩치도 훨씬 더 우람했고 크기조차 더 컸다.
     마치 한 마리의 오우거를 연상시키는 육중한 몸과 거대한 키라니. 그렇게 장장 5미터에 육박하는 크기에 검게 변색이 된 피부가 흉측했다.
     ‘젠장. 저런 녀석이 나오다니… 미궁의 보수는 미노타우로스일 텐데, 그럼 보스인 미노타우로스는 저 녀석보다 더 대단하단 건가?’
     강찬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검을 불끈 쥐었다.
     “카이루 씨. 아까 그 녀석에게 공격할 때 썼던 프로즌 마법을 발동시킨다면 쉽게 해낼 수 있을 겁니다.”
     기사 유저의 말에 강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린 냉기를 뿜어내는 문 블레이드를 고쳐 잡았다. 그러자 기사 유저의 검신에서도 푸른 오러가 밀려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러가 충만히 맺히자 기사 유저가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변종 트롤에게 몸을 날렸다. 강찬도 기사 유저를 뒤따라 몸을 날렸다. 거리를 두고 화살 두 개를 꺼내든 존이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더블 샷”
     쐐애액!
     활시위를 벗어난 두 개의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맹렬히 목표물을 향해 날아갔다. 화살 하나는 변종 트롤의 이마에 맞고 튕겨났고, 다른 하나는 눈에 적중했다.
     그렇게 눈 하나를 잃은 변종 트롤은 괴성을 지르더니, 지축을 울리며 존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강찬이 변종 트롤의 배에 문 블레이드를 찔러 넣었다.
     트롤의 뱃속에 깊숙이 박힌 문 블레이드 강찬은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고 검을 틀어 내장을 헤집어 놓을 작정으로 검을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카아악!
     강찬이 찔러 넣었던 문 블레이드를 뽑고 거리를 두려는 찰한, 거대한 변종 트롤의 주먹이 강찬을 훑고 지나갔다. 강찬은 그대로 공중에 붕 뜨더니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상당량의 생명력이 감소하는 것을 느끼며 겨우 중심을 잡고 일어선 강찬. 아직 신경이 무뎌져 뱃속의 상황을 모르는 변종 트롤이 비틀거리며 겨우 중심을 잡는 강찬에게 느릿느릿 접근하기 시작했다.
     아이템 창에서 포션 하나를 꺼내 마신 강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물러서서 공격할 틈을 노렸다.
     머리가 두 개인 것과 달리 지능이 딸리는 듯한 변종 트롤이었다. 놈들은 무조건 자신을 공격한 이에게만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강찬이 외쳤다.
     “서로 번갈아가면서 공격합시다! 이 녀석은 자신을 공격한 이에게만 반응을 보이는 것 같으니 말이에요!”
     “아, 알겠습니다. 차앗!”
     기사 유저가 대답을 함과 동시에 몸을 날려 변종 트롤의 등을 길게, 깊게 베어냈다. 그러자 갈라진 피부 사이로 붉은 체액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말도 안 되는 재생력으로 아물기 시작했다.
     던전의 환경에 걸맞게 변종이 되었어도 트롤은 트롤. 변종 트롤이 등을 돌려 기사 유저에게 반응을 보이자 강찬이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 부위를 다시 베어냈다. 그러자 신경이 무뎌져 재생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이후로도 강찬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변종 트롤이 또다시 자신을 향해 뒤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변종 트롤보단 훨씬 작은 체구를 이용해 안으로 파고들어 연한 아랫배를 베어냈다.
     카오오오!
     신경이 차츰 돌아오면서 강찬의 공격을 받았던 뱃속의 통증을 느끼며 변종 트롤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기사 유저와 존 둘이서 상대할 엄두도 못 냈던 변종 트롤이 강찬의 합류에 무력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신경이 무뎌져 느린 속도로 재생을 하는 등의 상처. 기사 유저의 오러가 맺힌 검신이 상처 부위를 베어내자 붉은 체액이 분수처럼 뿜어지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악!
     등과 배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쓰러진 변종 트롤. 지켜보던 강찬이 달려들어 문 블레이드를 거꾸로 집어든 뒤 괴성을 지르는 트롤의 머리에 검을 찔러 넣었다.
     콰직!
     푸수쉭.
     찔러 넣었던 검을 뽑아내자 붉은 피가 느릿느릿 치솟기 시작했다. 다른 한 쪽의 머리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고, 기사 유저는 같은 방법으로 오러가 충만히 맺힌 롱 소드를 변종 트롤의 머리에 찔러 넣었다.
     이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변종 트롤은 역겨운 신음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다 그대로 절명했다. 그리고 순간, 다시 한 번 새하얀 빛무리가 강찬의 몸을 휘감고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레벨업을 한 것이었다.
     “축하드려요.”
     “축하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강찬은 상태 창을 열어 스탯 포인트를 분배했다.
     ‘좋아. 2차 전직까지 앞으로 3레벨업.’
     문 블레이드를 검집에 꽂아 넣은 강찬이 기사 유저에게 다가가 말했다.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친구추가를 하는 건 어떤가요?”
     “아, 좋죠.”
     강찬의 말에 기사 유저가 흔쾌히 승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유저를 친구로 등록한 강찬이 존이라는 궁수 유저에게 다가가 친구추가를 권했고, 존도 흔쾌히 승낙했다.
     기사 유저의 이름은 젝, 변종 트롤을 해치우고 나니 더 이상 나타나는 몬스터도 없었다. 그저 복잡한 미로의 연속일 뿐이었다.
     혼자 미로를 헤쳐 나갈 땐 무지 지루했지만, 동료가 생기니 지루하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잘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 끝에 서서히 미궁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쳇. 오늘도 보스의 방엔 못 왔군.”
     활을 등에 둘러메며 존이 투덜댔다. 그런 존을 보며 강찬이 피식 웃었다.
     미궁의 끝에 도달하자 벽엔 커다란 석판이 하나 나타났다. 그 석판에 적힌 글귀를 눈으로 쭉 읽어 내려가던 강찬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반면에 젝과 존은 태연하게 받아들이며 말했다.
     “음. 아무래도 내일 다시 미궁에 와야겠다.”
     “그래야할 것 같아. 야, 얼른 과제 끝내야지. 학점 F나올라.”
     “큭. 그놈의 과제.”
     젝과 존의 대화를 듣던 강찬이 콧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대학생이신가 봐요?”
     “하하. 네. 먹부 대학생이지요.”
     “하하…….”
     존의 대답에 강찬이 피식 웃었다.
     “저희는 이제 가봐야겠네요.”
     존이 활시위를 풀며 말했고 젝이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어보였다.
     “그럼 다음에 또 뵙죠. 로그아웃!”
     “수고하셨습니다. 로그아웃!”
     젝과 존의 모습이 안개에 가려지듯 사라졌고 석판에 시선을 던진 강찬이 글귀를 다시 한 번 쭉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재도전이라고 외치면 되는군.’
     “재도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하얀 빛무리가 강찬의 온몸을 휘감았고, 순식간에 네 개의 통로 입구 앞에 오게 되었다.
     “얼레? 카이루! 네가 선택한 통로에도 보스의 방이 없었나보네?”
     “응?”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강찬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빵모자를 뒤집어쓴 붉은 눈동자를 가진 작은 키의 소년이 있었다. 현성이었다.
     “어라? 레드? 먼저 와 있었네? 루샤크도 있군. 근데 저분은……?”
     “아, 이분은 리아 씨야. 미로를 지나던 도중에 만났어, 나와 같은 궁수지. 마성의 두 번째 현자 레온의 동생이야.”
     “아하, 그렇군. 안녕하세요? 카이루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리아라고 해요.”
     리아가 강찬에게 목례를 하며 대답했다. 두 번째 통로의 입구 앞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다른 녀석들은 아직 멀었나?”
     “글쎄, 좀 더 기다려봐야지.”
     현성이 대답하자 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    *     *
     “으아악! 도대체 어디야? 계속 같은 곳만 맴돌고 있잖아!”
     경훈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소리쳤다.
     “이 좁은 방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 좁은 방에 시선을 던진 경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짚어보자. 분명 여기서… 이렇게 왔으니까…….’
     복잡한 미로로 다시 들어온 경훈이 다시 차분하게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혁과는 달리 차분한 성격을 가진 경훈은 천천히 길을 찾던 끝에, 방금 전까지 헤매던 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제야 만족한 듯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경훈은 폭이 조금 더 넓어진 미로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한걸음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대기가 뒤틀리는가 싶더니만 몬스터들이 리젠되기 시작했다.
     오크 나이트 네 마리와 오크 메이지 두 마리. 순간 경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크 나이트와 오크 메이지의 조합이라. 상당히 곤란한 상황인데…….’
     경훈이 자세를 낮추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미간을 찌푸린 경훈의 시선이 웅얼거리며 주문을 외는 오크 메이지를 향했다. 그러자 이내 쏘아지는 파이어 애로우(Fire Arrow). 경훈은 어깨를 슬쩍 돌려 마법을 가볍게 회피했다.
     그가 오크 메이지의 공격을 피해내기가 무섭게 지켜보던 오크 나이트들이 경훈에게 달려들기 시작했고, 오크 나이트의 후방에선 오크 메이지가 시전한 아이스 애로우(Ice Arrow)가 빠른 속도로 대기를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칫.”
     재빨리 허리를 뒤로 젖혀 아이스 애로우를 피해낸 경훈이 다시 허리를 안으로 강하게 접었다. 중심을 잡은 경훈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오크 나이트 무리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불끈 쥔 주먹이 자신을 향해 들고 있던 장검을 휘두르는 오크 나이트의 턱에 꽂혔다.
     빠악!
     순간, 오크 나이트가 휘청거렸고, 슬쩍 뒤로 물러난 경훈이 왼발을 축으로 허리를 이용해 강력한 발차기를 먹였다.
     “하이킥!”
     퍼억!
     오크 나이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벌렁 넘어졌다.
     오크 나이트 한 마리를 쓰러뜨리고 자신에게 쇄도해 오던 장검을 피하기 위해 경훈은 미로의 벽면으로 몸을 던졌다.
     그 순간, 애석하게도 오크 메이지가 쏘아 보낸 아이스 애로우가 미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경훈의 왼쪽 어깨에 박혀버렸다.
     푸욱!
     “크윽!”
     약간의 부상률과 함께 생명력이 감소하는 것이 느껴지며 오싹한 냉기가 왼쪽 어깨의 일부를 뒤덮었고, 신경이 서서히 감각을 잃기 시작했다.
     ‘제길.’
     왼쪽 어깨에 박힌 아이스 애로우에서 시린 한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경훈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오크 메이지가 쏘아 보낸 파이어 애로우가 매섭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경훈은 파이어 애로우를 슬쩍 피하며 오크 메이지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들을 먼저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되겠어.’
     오크 메이지와의 거리가 좁혀지려는 찰나, 오크 나이트 세 마리가 경훈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이언 너클!”
     스킬 이름을 외치자 경훈의 팔은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며 오크 나이트의 옆구리에 박혔다.
     경훈의 주먹이 작렬한 오크 나이트의 중갑옷이 움푹 파였고 경훈의 앞을 가로 막았던 오크 나이트의 입에선 검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오크 나이트의 투구를 움켜쥔 경훈은 오크 나이트의 머리를 아래로 강하게 당기며 무쇠 같은 무릎을 오크 나이트 안면에 꽂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오크 나이트들이 성을 내며 일제히 검을 휘두르자 재빨리 뒤로 물러난 경훈에게 파이어 애로우와 아이스 애로우가 쏘아졌다.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마법을 회피한 경훈은 이를 악물고 어깨에 박힌 아이스 애로우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오싹한 한기가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경훈은 그대로 어깨에 박힌 아이스 애로우를 단숨에 뽑아냈다.
     ‘크윽!’
     뽑아낸 아이스 애로우를 바닥에 거칠게 내던진 경훈은 곧이어 자신의 목을 쇄도해 오는 오크 나이트의 장검을 손등으로 막아냈다. 너클 건틀렛을 착용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크 나이트의 장검을 막아냄과 동시에 오크 나이트의 옆구리에 경훈의 같은 정강이가 꽂혔고, 중심을 잃은 오크 나이트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탬핑 어택, 피스톨!”
     피융!
     빠악!
     무쇠 같은 주먹이 오크 나이트의 안면에 꽂히자 오크 나이트의 얼굴은 기괴하게 함몰되었다. 그대로 뒤로 넘어간 오크 나이트는 그대로 절명했다.
     이제 남은 건 오크 나이트 두 마리와 오크 메이지 두 마리, 재빨리 지면을 박찬 경훈은 주문을 외고 있는 한 마리 오크 메이지의 복부에 무릎을 꽂았다.
     그저 헐렁한 로브를 몸에 걸치고 있을 뿐인 오크 메이지가 레벨 80이 넘어선 무투가의 공격을 받고서도 멀쩡할 리 만무했다. 그래도 고구라져 절명한 오크 메이지.
     옆에 있던 오크 메이지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다시 주문을 외기 시작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주문을 외는 도중 경훈의 팔꿈치가 오크 메이지의 안면에 꽂힌 것이다.
     오크 메이지의 목은 그대로 기괴하게 뒤틀리며 목뼈가 부러졌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목뼈가 부러진 이상, 더 볼 것도 없이 그대로 절명한 것이었다.
     남은 오크 나이트 두 마리에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경훈이 말했다.
     “후우. 지긋지긋한 녀석들이 없어졌으니 너희 둘을 상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취익! 죽어랏!”
     커다란 투핸드 소드를 치켜들고 경훈에게 일제히 달려드는 두 마리의 오크 나이트 경훈은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한 마리 오크 나이트에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경훈은 왼발을 축으로 허리를 이용한 매서운 발차기글 오크 나이트의 머리에 작력했다.
     “하이킥!”
     빠악!
     휘청거리는 오크 나이트, 경훈은 틈은 주지 않고 뒤에서 달려드는 오크 나이트의 복부에 발차기를 먹였다. 그리고 오크 나이트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무쇠 같은 경훈의 정강이가 오크 나이트의 옆구리에 박혔다.
     옆구리가 함몰된 오크 나이트가 피를 토해내며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쓰러진 오크 나이트의 형체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보아 죽은 것이 분명했다.
     경훈에게 일격을 허용한 오크 나이트가 정신을 차리고 중심을 잡았다. 커다란 장검을 고쳐 잡고는 낮게 목청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취익, 살려두지 않겠다. 인간.”
     애석하게도 오크 나이트의 뜻과는 반대된 상황이 벌어졌다. 오크 나이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훈의 주먹이 오크 나이트의 가슴팍에 꽂힌 것이었다.
     착용하고 있던 갑옷의 브레스트 플레이트가 흉측하게 파였고, 그것과 동시에 브레스트 플레이트의 안쪽에 착용하고 있던 호버크가 길게 늘어졌다.
     “쿠에엑!”
     검붉은 피를 분수처럼 토해내며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오크 나이트를 뒤로한 채 미로의 끝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경훈의 압가엔 미소가 번졌다.
     이윽고 새하얀 빛무리가 경훈의 몸을 휘감음 공중으로 치솟더니 안개에 가려지듯 사라졌다. 레벨업을 한 것이었다.
     ‘좋아, 81이다.’
     “후우. 그건 그렇고 먼저 어깨의 부상을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아이템 창, 오픈!”
     파밧!
     연한 초록색 직사각형 모양의 반투명한 아이템 창. 경훈은 손을 뻗어 파스를 연상시키는 모양을 한 아이템을 꺼내 상처 부위에 올렸다.
     “응급치료!”
     은은한 푸른 빛무리가 상처부위에 골고루 퍼지며 부상률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그리 심한 부상을 입지 않았기에 금세 부상률이 회복되었고, 경훈은 일회용 파스를 아이템 창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고 아이템 창을 닫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미로는 서서히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로의 끝에 도착한 경훈은 경악했다. 통로를 선택하기 전보다 훨씬 더 거대한 석문이 나타난 것이다.
     거대한 쇠사슬로 친친 감겨진 석문에 그려진 기이한 형태의 벽화. 석문의 사이로 습한 기체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석문의 안에서 들려오는 몬스터의 포효가 경훈을 자극했다. 드디어 보스의 방에 도달한 것이었다.
     “드, 드리어 보스의 방인가?”
     경훈은 급히 메신저 창을 열어 파티 리더인 혁에게 대화를 걸었다.
                   *    *     *
     가만히 앉아 졸고 있던 혁이 갑자기 깜짝 놀라 몸을 움찔하더니만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대화를 신청한 모양이었다.
     ‘벌써 보스의 방을 찾은 건가?’
     나는 벌떡 일어서 언성을 높이며 말하는 혁에게 다가가 어찌된 영문인지를 눈으로 물었다.
     “뭐어?! 보스의 방 앞에 도착했다고?! 이 자식! 그래, 기다려! 너 어디로 들어갔더라?”
     “첫 번째 통로로 들어갔잖아.”
     “아차, 그랬었지!”
     내 대답에 혁이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소리쳤다.
     “그래! 기다려! 먼저 들어가면 죽는다! 응, 그래! 자, 다들 첫 번째 통로로 들어가자고!”
     혁이 들뜬 상태로 모닝스타를 움켜쥐고 소리쳤다.
     잠깐. 티아는 아직 미로를 헤매고 있는 건가? 나는 티아에게 대화요청을 했다.
     [티아 젠 님께 대화를 요청합니다.]
     -응, 오빠 무슨 일이야? 보스의 방을 찾은 거야?
     다행이 티아는 아무 탈 없이 미로를 잘 헤쳐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뭐 나보다 강하니 당연했겠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응. 데시카가 보스의 방을 찾았어. 첫 번째 통로로 가면 되는데. 너 지금 어디야?”
     -나? 지금 미로의 중간지점까지 온 것 같아. 다시 되돌아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은데.
     “그래? 잠시만 기다려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들뜬 상태로 첫 번째 통로의 문을 연 혁에게 소리쳤다.
     “루샤크! 리아 씨랑 카이루랑 셋이 먼저 보스의 방에 가 있어. 나는 티아 좀 기다렸다. 갈게!”
     “그래! 알았다!”
     혁이 소리치며 첫 번째 통로로 들어갔고 혁의 뒤를 따라 강찬이 나에게 눈짓하며 천천히 들어갔다.
     “늦지 않게 조심해서 오세요.”
     뒤늦게 첫 번째 통로에 들어서며 리아가 걱정어린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에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빙긋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가 첫 번재 통로로 들어가자, 통로의 문은 굳게 닫혔다.
     이제 티아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    *     *
     첫 번째 통로에 들어선 혁과 강찬 그리고 리아를 반기는 건 다름 아닌 구울과 스켈레톤 워리어 무리였다.
     경훈이 지나간 뒤 리젠 된 몬스터들을 본 강찬이 귀찮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쳇. 구울과 스켈레톤 워리어라니.”
     “자, 자. 다들 비켜서! 힐 볼, 힐 볼, 힐 볼!”
     간단한 주문영창과 함께 혁의 손바닥 위로 농구공 크기만 한 성스러운 구체가 새하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엔데드 몬스터라면 파티원 중 제일 고레벨인 강찬보다 더 쉽게 잡을 자신이 있는 혁이었다. 묵직한 모닝스타로 허공에 둥둥떠 있는 힐 볼 하나를 힘껏 쳐내며 혁이 소리쳤다.
     “먼저 하나!”
     모닝스타와 힐 볼이 충돌하면서 새하얀 빛가루가 튀었고, 튕겨져 나간 힐 볼이 고무공처럼 미로의 벽면에 마구 튕기기 시작했다.
     새하얀 빛가루를 흩날리며 사방으로 튕기는 힐 볼이 빠르게 달려드는 구울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쏘아진 힐 볼이 소멸되었고 그와 동시에 혁의 모닝스타와 또 다른 힐 볼이 충돌해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힐 볼이 스켈레톤 워리어의 가죽갑주를 스치고 지나가자 가죽갑주가 스르르 녹아 잿더미가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번을 스치고 지나가자, 가죽갑주처럼 스켈레톤 워리어도 서서히 재가 되어 바닥에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순식간에 구울과 스켈레톤 워리어 무리를 간단하게 해치운 혁이 기세등등해져 소리쳤다.
     “쳇. 힐 볼 두 개만 시전 할 것을 괜히 세 개씩이나 시전했나?”
     거만하게 헛기침을 하며 앞장서기 시작한 혁을 보며 강찬이 피식 웃었다.
     리아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의 오빠인 레온도 고위급 마법을 펼치지 않는 이상 이렇게 순식간에 언데드 몬스터들을 소멸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 혁은 농구공 크기의 구체 두어 개를 소환해 순식간에 구울과 스켈레톤 워리어를 소멸시킨 것이다. 손에 쥐고 있던 크로스 보우를 도로 등에 맨 리아의 얼굴이 어느새 불게 달아올라 있었다.
     ‘멋있다…….’
     리아는 서둘러 앞장선 혁을 뒤따랐다.
     그 후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복잡한 미로에서 몇 번이나 막다른 길에 들어서는 시행착오 끝에 폭이 조금 더 넓은 미로에 도착하게 된 강찬과 리아 그리고 혁이었다.
     순간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의 대기가 뒤틀리더니 이내 오크 나이트와 오크 메이지무리가 모습을 나타냈다. 경훈이 지나갈 때와는 달리 꽤 많은 수였다.
     12마의 오크 나이트와 6마리의 오크 메이지.
     강찬과 혁만 있었다면 최악의 상황이었겠지만,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리아가 있는 이상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오크 나이트 10마리가 일제히 리아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원거리 공격을 가하는 유저를 파악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크 나이트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화염검을 쥔 마검사 강찬이 오크 나이트 열 마리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강찬의 뒤엔 빠르게 회전하는 매직 미사일 다수에 둘러싸인 모닝스타를 두 손으로 움켜쥔 혁이 서 있었다.
     콤비플레이로 완벽하게 오크 나이트들을 차단한 강찬과 혁을 본 오크 메이지들이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크 메이지의 파이어 애로우가 오크 나이트 다수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강찬에게 쏘아졌다.
     혁의 매직 미사일 한 발이 오크 메이지가 쏘아 보낸 파이어 애로우와 충돌했고, 매직 미사일과 파이어 애로우는 충돌하는 순간 소멸했다. 허리춤에서 볼트(석궁 전용 화살) 하나를 꺼내든 리아가 석궁에 볼트를 장착했고, 이어 주문을 외는 오크 메이지를 겨냥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푸슉!
     쐐애액.
     날카롭게 날이 선 볼트가 대기를 가르며 오크 메이지의 가슴팍에 박혔다. 주문을 외던 오크 메이지가 그대로 뒤로 벌렁 넘어지며 절명했다.
     “죽어라! 인가, 취익!”
     “단순한 놈들. 차앗!”
     두 손으로 문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움켜 쥔 강찬이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순간 강찬을 둘러싸고 있던 오크 나이트 무리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한 마리 오크 나이트에게 다가간 강찬이 시뻘건 화염을 머금은 검을 거꾸로 집어 들고 오크 나이트의 목에 찔러 넣었다.
     “궤에에!”
     비명을 지르며 오크 나이트가 절명했지만 이어 중심을 잃고 쓰러졌던 다른 오크 나이트들이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혁은 가장 먼저 멀리서 주문을 외는 오크 메이지들에게 매직 미사일 다발을 전부 쏘아 보냈다.
     몇몇 오크 메이지는 급히 실드를 펼쳐 간신히 매직 미사일을 막아냈지만 그렇지 못한 오크 메이지들은 매직 미사일에 몸을 내주고 휘청거렸다.
     리아도 휘청거리는 오크 메이지들에게 재빨리 석궁을 쏘았다. 그러자 리아가 쏘아 보낸 볼트에 맞은 오크 메이지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오크 메이지가 전멸 당했고, 남은 놈들도 혁과 리아가 협공에 순식간에 해치웠다.
     “휴우, 리아 씨 덕분에 최악의 콤비를 쉽게 처리했네요.”
     강찬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문 블레이드에 건 스킬을 취소하자 검신을 뒤덮던 화염이 순차적으로 사그라졌고, 강찬은 문 블레이드를 검갑에 수납했다.
     “궁수가 후방에서 지원을 해주면 사냥이 이렇게 쉬워지는구나. 대단하던데요, 리아?”
     혁이 모닝스타를 어깨에 들쳐 메며 말했다. 그러자 리아의 빰이 붉게 달아올랐다. 리아의 반응에 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보스의 방으로 고고씽! 잘 따라와라, 충직한 조수 카이루.”
     “누가 조수냐! 싸이코 자식.”
     “너 파티 탈퇴 당하고 싶냐? 나 파티 리더야.”
     “풋.”
     혁과 강찬이 나누는 대하를 들으며 리아가 소리를 죽여 킥킥 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일행은 쇠사슬로 친친 감겨 있는 거대한 석문 앞에 도달하게 되었고, 혁 일행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경훈과 재회했다.
     “오, 생각보다 빨리 왔네?”
     “그래. 다 이 형님의 활약 덕분이지. 핫핫.”
     “저 또라이는 무시하고 강찬 그 옆에 계신 분은 누구?”
     “또라이? 야, 너 나 싫어하냐?”
     경훈이 피식 웃으며 혁의 입을 틀어막았다.
     강찬이 말했다.
     “이분은 음, 그러니까…….”
     강찬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혁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경훈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아까 레드랑 같이 미로를 돌다가 만난 유저야, 마성의 현자? 아무튼 두 번째 현자의 동생이래.”
     “아…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무투가인 데시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리아가 공손하게 목례를 했다. 빙긋 웃어보이던 경훈은 보스의 방을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낮선 음성이 들려왔다.
     [미궁의 끝. 보스의 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살아서 갈수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응?”
     “뭐, 뭐야?”
     모두의 시선이 보스의 방에 집중되었고, 순간 커다란 쇠사슬이 순차적으로 풀리기 시작하더니 보스의 방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거대한 석문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흙먼지가 자욱하게 번지고 사그라지며 보스의 방 내부가 공개되었다. 하지만 밖에서 봤을 땐 분명 아무 것도 없는 텅 빈방인 것이 분명했다.
     “들어가자.”
     경훈이 파이팅을 하는 양 두 주먹을 맞부딪히며 앞장서 보스의 방으로 들어갔다. 모두들 그런 경훈을 뒤따라 보스의 방으로 들어갔다.
     보스의 방 내부는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커다란, 아니 커다랗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방에 천장은 높게 치솟아 있었고 방 내부엔 탁한 습기가 가득했다.
     벽면엔 기이한 벽화가 가득했고 멀리서 소가 우는 소리를 떠올리게끔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움머어어.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는 미노타우로스.
     온몸의 밝은 갈색의 털로 뒤덮인 신장 5미터를 넘어선 거대한 몬스터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토록 기다렸던 미노타우로스였다.
     육중한 몸에 꿈틀거리는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미궁의 주인인 우두인신의 흉포한 몬스터 미노타우로스가 광폭하게 포효를 하기 시작했다.
     쿠어어어엉!
     미노타우로스의 기세에 눌린 리아가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면에 강찬과 경훈은 태연하게 기세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아이언 너클.”
     너클 건틀렛에 강화 스킬을 건 경훈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미노타우로스를 경계했다. 가찬도 허리춤에 찬 문 블레이드를 뽑아들고 두 손으로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파이어 웨폰.”
     화르륵.
     시뻘건 화염이 검신에 맺혀 기염을 토해내며 일렁이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한 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매, 매직 미사일!”
     형성된 매직 미사일이 모닝스타를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주저앉은 리아는 일어서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버린 것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보스급 몬스터의 기세에 눌린 이상 평소처럼 행동할 재간이 없었다.
     쿠어엉!
     미노타우로스가 크게 소리치자, 미노타우로스 주변의 대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내 3미터에 달하는 신장과 청록색의 피부를 가진 트롤과 신장 4미터에 달하는 검게 물든 피부를 가진 변종 트롤이 순차적으로 리젠되기 시작했다. 보스를 보호하기 위한 졸개 몬스터인 것이 분명했다.
     “미노타우로스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나? 이거 심각하군.”
     “보스의 졸개 몬스터가 중형몬스터라…….”
     또다시 졸개 몬스터들 사이로 대기가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오크 나이트와 오크 메이지 그리고 오크 헌터, 스켈레톤 워리어와 스켈레톤 나이트, 스케레톤 메이지와 좀비, 구울 무리가 리젠되었다.
     그러한 언데드 몬스터들의 등장에 혁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언데드 몬스터라. 저 녀석들이 중형몬스터를 상대하는 동안 해치우면 되겠군.’
                   *    *     *
     미노타우로스의 기세에 눌린 리아는 자리에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노타우로스의 등장에 이어 자신의 파티의 동료들과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트롤의 등장에 복수심이 불타오른 그녀는 곧 사력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생처음 보는 변종 트롤의 등장에 리아는 또 다시 기가 죽었다. 그리고 연이어 리젠되는 언데드 몬스터들.
     리아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 바로 언데드 몬스터였다.
     언데드 몬스터 중 특히 싫어하는 것은 좀비와 구울. 시각적으로 징그러운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리아로서 천적 중의 천적이었던 것이다.
     근접전에서 맞붙어 싸우는 직업으로 전직할 경우 언데드 몬스터와 맞붙어 싸우게 되는 것이 싫어서 궁수로 전직한 그녀가 아니었던가.
     물론 궁수 말고도 원거리 공격을 가하는 직업은 있었지만 암살자라는 직업은 리아의 성미에 맞지 않았고, 마법사는 더욱이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오누이인 레온처럼 공부를 특별히 잘하는 것도 아닌지라 포기했던 것이다.
     사실 레온를 따라 마법사로 지망을 했던 적이 있던 리아다. 전직 시험에서 최고의 점수로 합격한 레온과는 달리 바닥을 기는 점수로 떨어진 리아는 스탯 포인트를 다시 재분배하고 궁수를 택한 것이었다.
     그렇게 무리지어 달려드는 오크 나이트를 강찬과 경훈이 막아섰다. 처음엔 상당히 일방적인 싸움이었지만, 뒤에서 원거리 공격과 마법으로 견제하는 오크 메이지와 오크 헌터 때문인지라 전세가 역전되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중형 몬스터들이 몸이 굳기라도 한 양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리아 만큼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느릿느릿 다가오는 좀비와 빠른 속도로 지면을 박차고 달려드는 구울을 보며 경악을 하느라 중형 몬스터를 신경 쓸 여력이 없던 것이었다.
     미처 크로스 보우를 들지 못 한 리아에게 구울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아, 구울에게 죽는 건가…….’
     미처 크로스 보우를 꺼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리아는 눈을 감았다. 기세에 눌린 터라 퀵 스텝과 백 스텝을 밝을 생각도 못했던 것이었다.
     리아는 체념을 하고 눈을 감았다. 목덜미에 오싹한 느낌이 들었고, 이내 물어뜯길 것을 각오하고 이를 악물었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퍼억!
     “쿠에엑!”
     둔탁한 소리와 함께 구울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진 것이었다.
     구울의 비명에 놀란 리아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앞엔 새하얀 망토를 휘날리며 묵직한 모닝스타를 두 손으로 불끈 쥔, 갈색 머리칼을 삐죽삐죽 세운 혁이 서 있었다.
     ‘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리아는 풀린 눈으로 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혁의 모닝스타에 안면이 흉측하게 함몰된 구울이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구울을 본 혁이 왼손을 쫙 편 뒤 소리쳤다.
     “힐 볼!”
     우웅.
     농구공 크기의 성스러운 구체가 빛을 발하며 혁의 손바닥 위로 형성되었다. 혁이 고개를 돌려 리아를 보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풀린 눈으로 혁을 바라보던 리아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런 리아를 뒤로한 채 혁이 씨익 웃어보이곤 힐 볼을 힘껏 던졌다.
     성스러운 구체가 빛가루를 흩날리며 전방에서 달려드는 구울들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후방에서 달려드는 구울들은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다. 빠른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기 때문이었다.
     ‘쳇. 하는 수 없군.’
     혁이 재빨리 뒤돌아서 리아를 감싸 안았다.
     “실드!”
     혁이 실드를 펼치자 반투명한 흰색의 구체가 혁과 리아를 감쌌고, 후방에서 일제히 달려들던 구울들이 실드에 튕겨 와르르 무너져 맨따에 처박혔다.
     리아를 감싸 안은 혁이 떼를 지어 와르르 무너지는 구울들을 보며 회심의 미소룰 지었다. 실드를 해제한 혁이 리아를 감싸 안았던 팔을 풀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해해주세요.”
     “네, 네…….”
     리아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떠듬떠듬 대답했다. 다시 한번 시전한 혁의 힐 볼에 쓰러져있던 구울들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하물며 느릿느릿 다가오는 좀비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간단한 매직 미사일만으로도 뇌를 파괴시키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좀비와 구울 무리를 해치운 혁이 모닝스타를 어깨에들쳐 메고 거만하게 소리쳤다.
     “이쪽은 끝. 그나저나 너희들 아직도 쓸데없는 실라이를 벌이고 있구나.”
     오크 헌터가 쏘아 보내는 화살과 오크 메이지, 스켈레톤 메이지가 쏘아 보내는 마법을 피하며 오크 나이트와 스켈레톤 나이트 다수를 간신히 상대하던 경훈이 소리쳤다.
     “야, 이 멍청아! 다 처리했으면 얼른 도와1 으앗, 하이킥!”
     그에 혁이 건들건들 발걸음을 옮기며 소리쳤다.
     “형님이라고 한 번 해봐.”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이 위태로운 상황에 내뱉을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혁이었기에 가능한 말이었으며 또한 진심이었다.
     어쨌든 기어코 ‘형님’ 소리를 들을 때까지 도우지 않기로 마음먹은 혁이었지만, 경훈의 한마디에 즉각 도발되어 돕기 시작했다.
     “무서워서 뒤로 빼는 거지?”
     얼굴이 붉게 상기된 혁이 고함을 지르며 몸을 던졌다. 혁의 묵직한 모닝스타가 스켈레톤 나이트의 투구에 적중했고, 스켈레톤 나이트가 고개를 돌려 시린 안광을 뿜어내며 혁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놈이 노려본다고 해서 한창 잔뜩 열이 오른 혁이 기가죽을 리가 없었다.
     혁이 그대로 힐 볼을 형성해 스케레톤 나이트의 안면에 쑤셔 넣자 스켈레톤 나이트의 두개골이 천천히 삭아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혁이 합세하자 전세가 역전되었다.
     오크 메이지와 스케레톤 메이지가 쏘아 보내는 허접한 마법과 오크 헌터가 쏘아보낸 화살을 혁이 매직 미사일로 막아내며 힐 볼로 스켈레톤 나이트를 견제하는 덕에 사냥이 쉽게 진행이 되었던 것이었다.
     거기에 정신을 차린 리아까지 합세하자 순식간에 오크 나이트와 오크 헌터, 오크 메이지, 스켈레톤 나이트, 스켈레톤 메이지가 순식간에 전멸했다. 지켜보던 미노타우로스가 광폭하게 포효를 내질렀다.
     쿠워어어엉!
     그에 굳어있던 트롤과 변종 트롤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런 침을 질질 흘리며 강찬과 혁 그리고 리아에게 접근하기 시작하는 트롤과 변종 트롤들. 그에 강찬이 피식 웃었다.
     ‘그 방법을 또 써야겠군.’
     문 블레이드의 검신에 맺혀있던 화염이 순차적으로 사그라지더니, 이내 검신이 부르르 떨렸고, 오싹한 한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정령들과 잡담을 나누며 기다리던 끝에 네 번째 통로의 문이 열리면서 티아와 루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티아, 루카!”
     “오빠!”
     캉캉!
     루카가 쏜살같이 튀어와 내 앞에 앉아 꼬리를 흔들었고 그 뒤로 티아가 달려왔다. 몸에 두른 색 바랜 붉은 망토에 상처 하나가 없는 것을 보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어서 가자. 첫 번째 통로에 보스의 방이 있으니까. 뭐 지금쯤이면 루샤크 일행은 벌써 데시카랑 만나서 보스의 방에 들어갔겠다.”
     “내가 많이 늦었나보네…….”
     “아니, 전혀. 자, 어서 가자!”
     나는 티아의 어깨에 팔을 올리곤 첫 번째 통로의 문을 열고 문턱을 넘었다. 구울과 스켈레톤 워리어가 나타났지만, 티아의 상급 정령에 의해 순식간에 전멸되었으니 복잡한 미로만 잘 해쳐 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많이 늦었을라나? 이 녀석들 지금쯤 보스의 방에서 한창 싸움 중이려나?’
     나는 말없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엘프인 티아는 발걸음이 원래 빨랐기에 느긋하게 나와 속도를 맞출 수 있었다.
     “왜 말이 없어?”
     말없이 묵묵하게 걷는 나에게 티아가 말을 걸어왔다.
     “응? 아, 아니. 친구들이 걱정돼서. 잘하고 있겠지?”
     “잘하고 있을 거야. 다들 강하잖아!”
     “그렇지.”
     나는 티아를 보며 피식 웃어주었다. 지금 내 기분을 파악한 것일까, 내 몸에 붙어있는 네 정령들이 시끄럽게 떠들거나 장난을 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정령들이 얌전히 있으니 조용해서 좋군.
     그렇게 한참을 복잡한 미로를 헤매던 끝에 폭이 조금 더 넓은 미로로 오게 되었다. 다 온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군. 흐음…….
     주변을 빙 둘러보고 있을 때, 대기가 뒤틀리면서 몬스터들이 리젠되기 시작했다. 지겹게 봐왔던 오크 나이트 다섯 마리와 오크 메이지 두 마리, 스케레톤 나이트 두 구와 스켈레톤 메이지 한 구였다.
     내가 등에 둘러메고 있던 활을 왼손으로 집어들으려는 순간, 티아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불의 상급정령이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가 정령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뜨거운 열기가 상급정령을 중심으로 아지랑이를 피우며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와 티아, 루카 그리고 네 정령들은 열기에 해를 입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열기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다. 반면 오크 나이트와 오크 메이지의 미간은 찌푸려질 대로 찌푸려졌다.
     “샐라임, 정령력을 모두 끌어올려서라도 처리해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티아의 명령이 끝나자 상급정령의 대답과 동시에 정령의 몸에 붙어있던 불이 순차적으로 늘어나더니, 아까와는 전혀 다른 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오크 나이트가 뒤로 주춤주춤 물어나는 것만 봐도 아까의 기세와는 전혀 다른 기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급정령이 손바닥을 쫙 펴자 상금정령의 손바닥 위로 아지랑이가 길쭉하게 피어오르더니 이내 불이 붙기 시작했고, 클레이모어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불의 장검이 형성되었다.
     상급정령이 손을 내밀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자, 화염검의 검신이 더욱 뜨겁게 타오르며 기염을 토해냈다.
     화르륵!
     저급한 몬스터라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기세였다. 티아의 상급 정령을 보며 감탄을 하고 있을 때, 티아가 말했다.
     “샐라임의 정령력이 급격히 소진되고 있어. 빨리 처리해야 할텐데.”
     “아… 그럼 어서 처리하라고 명령해.”
     “응, 알겠어. 샐라임! 정령력이 급격히 소진되고 있으니까, 얼른 처리해!”
     “지금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상급정령은 안개에 가려지듯 퍽 꺼졌다.
     순식간에 오크 나이트 다섯 마리의 뒤에 모습을 나타낸 상급정령. 아마 기세를 끌어올릴 때 일정 범위에 흘려놓은 열기를 타고 이동을 한 것이었다.
     불의 상급정령이니 가능한 것이겠지.
     놈들은 타오르는 화염검이 대기를 갈가리 갈라놓기 시작했고, 오크 나이트들은 입고 있던 중갑옷의 형태가 누구러든 채 시커멓게 타버렸다.
     흰자위만 뜬 채 뒤로 넘어가는 다서 마리의 오크 나이트. 워낙 뜨거운 열기에 중갑옷이 누그러든 것 같았다. 나는 내 어깨에 앉은 주작과 티아의 상급정령을 번갈아보면서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나는 등에 둘러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집어 들고 활시위를 활 끝에 걸었다. 상급 정령이 빨리 처리하긴 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다. 이렇게 질질 끈다면 보스의 방에 먼저 들어간 녀석들은 어찌하랴?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세 개를 꺼내들고 도박한다는 생각으로 활시위에 세 개의 화살을 걸었다. 활시위를 힘껏 당기자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트리플 샷!”
     쐐애액.
     푸푹!
     빠각!
     명중! 나의 기대와 걸맞게 트리플 샷은 성공적이었다.
     화살은 두 마리 오크 메이지의 가슴팍에 각각 한 개씩 꽂혔다. 스켈렌톤 메이지 한 구의 머리를 박살내었다. 내가 트리플 샷을 쏘는 동안 티아의 상급정령이 스켈레톤 나이트를 전부 처리한 것 같군.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다시 등에 둘러멨다. 어서 빨리 가지 않으면 안 되겠군.
     “서두르자 티아, 루카!”
     “응!”
     캉캉!
     “퀵 스텝!”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나보다는 조금 뒤처지지만 티아가 무리 없이 나를 따랐고, 루카는 나를 앞질러 미로의 끝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상처부위가 벌어진 상태로 나동그라진 트롤 세 마리.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트롤의 말도 안 되는 재생력으로 미뤄 볼 때 상처부위가 벌어진 채 나동그라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었다.
     하지만 그 상식을 깨부순 자가 있었으니, 오싹한 한기를 뿜어 내는 장검을 쥔 강찬이었다.
     두뇌 회전이 빠른 강찬의 이론(?)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신경을 무디게 만들어 재생력을 떨어뜨린다. 트롤은 현재 천적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쿠오오!
     “시끄럿, 탬핑 어택, 피스톨!”
     퍼퍽!
     상처 부위가 벌어진 채 괴성을 지르며 일어선 트롤의 안면에 경훈의 주먹이 적중했고, 손목까지 깊숙이 박혔다. 말할 것 없이 즉사였다. 새하얀 빛무리가 경훈의 몸을 휘감더니 이내 공중으로 치솟았다.
     “좋아! 레벨업! 드디어 82구나!”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켜보고 있던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이 무방비 상태의 경훈과 충돌을 했다.
     퍼퍽!
     “크아악!”
     아무런 준비도 안 돼 있던 터라 그 충격이 엄청날 것이었다.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는 경훈에게 혁의 시선이 고정 되었다. 강찬과 협공을 하며 변종 트롤을 상대하던 혁이 소리쳤다.
     “카이루! 데시카 녀석 좀 손봐주고 와야겠어! 미노타우로스에게 얻어맞았다고!”
     “얼근 가 봐! 리아 씨, 서포트 좀 해주세요! 스태미나나 마나 같은 거 아끼지 말고 마구 쓰세요! 포션 비용은 제가 드릴 테니까!”
     “네, 네! 더블 샷!”
     현재 2차 전직을 하지 못한 리아로썬 더블 샷이 최고의 스킬이었다. 혁이 빠져나가자 변종 트롤의 훨씬 우세해졌다. 리아의 화살이 박히긴 했지만 그리 큰 타격을 줄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칫.’
     변종 트롤을 상대하덕 혁이 재빨리 나동그라진 채 겨우 몸을 일으키는 경훈에게 다가갔다. 다행히도 경훈의 부상률은 얼마 되지 않았고, 대신 상당량의 생명력이 감소되었다.
     생명력이 데들리 거의 직전까지 떨어졌으나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멍청한 놈아, 그러게 주변을 잘 살폈어야지. 나 없었으면 사냥 어떻게 했을까. 큐어!”
     파츠츠츠.
     순식간에 경훈의 부상률을 치료한 혁이 또다시 소리쳤다.
     “힐링!”
     새하얀 빛무리가 경훈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현재 혁이 가지고 있는 보조마법 중 제일 자신 있는 것이 힐링이었고, 순식간에 경훈의 생명력을 회복시킨 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자, 엄살 부리지 말고 가자!”
     “멍청한 자식. 고맙다. 패스트 워커!”
     경훈이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변종 트롤을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는 강찬에게 다가갔다.
     ‘제길, 이러다간 밀리겠어. 마나도 거의 바닥이 났다. 현기증이 느껴지기 시작하는데…….’
     마나가 거의 고갈되어 힘겹게 변종 트롤을 막아내던 강찬의 이마엔 굵직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리고 이내 문 블레이드에서 뿜어져 나오던 오싹한 냉기기가 사그라졌다. 마나가 바닥이 난 것이었다.
     강찬이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하고 있을 때, 변종 트롤의 거대한 주먹이 강찬을 쇄도해오기 시작했다.
     강찬은 정신을 차리고 두 손으로 문 블레이드를 고쳐 잡았지만 강화마법이 걸리지 않은 검으로 변종 트롤을 막아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막아보겠다는 생각으로 검을 쥔 강찬이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신형이 변종 트롤의 주먹을 쳐냄과 동시에 변종 트롤의 가슴팍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움푹 파인 변종 트롤의 가슴팍이 순식간에 회복되기 시작했다. 물론 크나큰 타격을 입은 채로.
     “어서 마나를 채워!”
     퍼억!
     경훈이 변종 트롤의 안면에 발차기를 먹이며 소리쳤다. 재빨리 뒤로 물어난 강찬이 아이템 창에서 포션을 꺼내 복용했다. 휘청거리는 변종 트롤의 머리 위에 혁의 모닝스타가 적중하자 변종 트롤은 그대로 뒤로 벌렁 넘어졌다.
     “좋아, 레벨업! 나도 드디어 80대에 들어섰다!”
     혁이 들뜬 상태로 소리쳤다.
     그때였다. 졸개 몬스터들이 전멸 당하는 것을 보며 기회를 엿 보던 미노타우로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은 지축을 울리며 거대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쿠워어어엉!
     “뒤, 뒤로 물러나!”
     경훈이 급히 소리치며 재빨리 미노타우로스와 거리를 두었다. 움직임이 그리 빠르지 않은 몬스터였지만, 크기가 큰 만큼 다리도 길었고 거리를 좁히는 건 일도 아니었다.
     미노타우로스는 광폭하게 포효하더니 이내 커다란 팔을 내뻗었다. 무방비 상태의 혁을 움켜쥐려는 것이었다. 혁이 급히 몸을 날리려 했지만 워낙 긴박하게 이루어진 기습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미노타우로스의 손아귀에 잡힐 수밖에 없었다.
     미노타우로스가 혁을 움켜쥐려는 순간이었다.
     “실드!”
     혁은 급히 실드를 펼쳤다. 새하얀 구체의 막이 혁을 둘러쌌고, 미노타우로스는 자신의 손에 잡힌 요상한 구체를 자신의 코앞으로 가져와 유심히 살펴보았다.
     큼지막한 눈으로 실드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미노타우로스가 이내 괴성을 지르며 실드를 벽면에 던졌다.
     휘익!
     꽝!
     거대한 보스의 방의 벽에 금 갈 정도의 충격을 받았지만, 실드에는 작은 흠집만 생겼을 뿐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실드 내부의 사정은 달랐다. 둥근 실드 안에 있는 혁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지켜보던 강찬이 프리징 웨폰 스킬을 유지하는 마나를 거두자 냉기가 사그라졌다.
     “라이트닝 웨폰.”
     파츠츠츠츠.
     파직파직.
     문 블레이드의 순백의 검신이 연한 하늘색으로 물들었고, 이어 푸른 뇌전이 형성되어 스파크를 튀며 맹렬한 방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앗!”
     강찬이 기합을 내지르며 지면을 박찼다. 순식간에 미노타우로스와의 거리를 좁힌 강찬이 검을 휘둘렀다.
     맹렬하게 방전하는 뇌전이 형성된 검신이 미노타우로스의 허벅지를 훑고 지나갔다. 허벅지에 따끔한 느낌을 넘어선, 엄청난 충격을 받은 미노타우로스가 화들짝 놀라며 핏발이 선 눈으로 강찬을 노려보았다.
     ‘먹히는군.’
     강찬이 씨익 웃으며 미노타우로스를 노려보았다. 미노타우로스가 강찬을 향해 팔을 내뻗었다. 그러나 강찬은 옆으로 슬쩍 비켜서며 푸른 뇌전이 형성된 맹렬하게 방전하는 문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치익.
     쿠워엉!
     손가락을 살짝 스쳤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미노타우로스가 펄쩍 뛰어올라 뒤로 물러났다.
     ‘좋아, 라이트닝 웨폰으로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겠어. 처음 당하는 강한 전기충격에 놀랐을 수도 있겠어. 처음 당하는 전기충격에 놀랐을 수도 있겠군. 하지만 생명력은 별로 감소시키지 못한 것 같아. 따끔하기만 할뿐, 별로 피해를 주지 못하는 걸 놈이 알아챈다면 그땐 정말 도박을 하는 수밖에 없군.’
     지면을 박차고 뒤로 물러난 미노타우로스에게 접근하며 강찬이 속으로 되뇌었다.
     주로 화염계열의 보조마법을 사용해왔기 때문에 파이어 웨폰의 수련치는 이미 마스터를 한 강찬이었지만, 전격계열의 보조마법은 그리 많이 사용하지 못해 수련치가 거의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것은 검신이 선명하지 않은 연한 하늘색으로 물든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미노타우로스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 강찬이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두 손으로 힘껏 문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미노타우로스의 가슴팍에 오른쪽 위에서부터 왼쪽 아래로 줄이 쭉 그어졌다.
     파지직!
     그의 검이 미노타우로스의 가슴팍을 베어내자, 가죽과 살결에 닿은 전류가 스파크를 튀기 시작했고 놀란 미노타우로스가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지켜보던 경훈이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미노타우로스의 큼지막한 눈에 주먹을 꽂았다. 경훈의 주먹은 손목까지 깊숙이 박혔다가가 순식간에 빠져나왔고 그는 곧바로 지면에 가볍게 착지한 뒤, 재빨리 거를 두었다.
     눈 하나를 잃은 미노타우로스가 괴성을 지르며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보스 방의 벽면을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쾅쾅!
     눈 하나를 잃은 미노타우로스는 전과는 달리 직선적인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강찬의 푸른 뇌전이 형성 된 문 블레이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내뻗었고, 마구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죽기 살기로 미노타우로스의 공격을 피해내는 강찬과 경훈. 싸우는 동안에 리아도 연신 크로스 보우의 방아쇠를 당겼지만, 얄팍한 화살은 미노타우로스에게 그리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혁의 매직 미사일도 무용지물이었다.
     성질 급한 혁이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미노타우로스의 엄지발가락에 모닝스타를 내리찍었다.
     쿠어어어어!
     발가락에 극심한 통증을 느낀 미노타우로스가 고개를 숙여 혁을 내려다보았다. 미노타우로스와 혁의 시선이 마주쳤고, 미노타우로스가 반대편 발을 들어 혁을 내리찍었다.
     “으아악!”
     간신히 몸을 날려 미노타우로스의 발을 피해낸 혁이 기어가다시피 뒤로 물러난 벌떡 일어서 모닝스타를 움켜쥐었다. 지금껏 상대해왔던 중형몬스터 트롤과는 정말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강찬은 푸른 뇌전이 형성된 문 블레이드로 미노타우로스의 팔을 슬쩍 그어보았다. 물론 재빨리 뒤로 빠지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광분해서 날뛸 때, 따끔할 뿐 아무런 충격을 주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모양인지, 태연하게 고개를 돌려 강찬에게 시선을 둘뿐, 더 이상 뒤로 물어나지 않았다.
     “쳇.”
     연한 하늘색을 띠던 문 블레이드의 검신이 다신 순백색으로 돌아옴과 동시에 푸른 뇌전이 안개에 가려지듯 사라졌다.
     “파이어 웨폰.”
     검신에 붉게 물들며 시뻘건 화염이 문 블레이드의 검신을 뒤덮었다. 그 사이 크로스 보우의 방아쇠를 연신 당기고 있는 리아를 발견한 미노타우로스가 재빨리 지면을 박찼다.
     “까아아악!”
     놈이 팔을 뻗어 리아의 머리를 움켜쥐려는 순간, 보스의 방 입구에서 튀어나온 알 수 없는 새하얀 물체가 희미한 잔상을 남기며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로 튀어 올랐다.
     금세 미노타우로스의 얇은 귀에 도착한 새하얀 물체가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기 시작했고, 미노타우로스의 귀는 형태를 알아 볼 수 없게 갈가리 찢어졌다. 불시에 가해진 기습인지라 그만큼 충격도 컸을 것이다.
     그리고 지면으로 사뿐히 착지한 뒤 리아의 앞을 가로막는 새하얀 물체.
     쫑긋 세운 귀와 새하얀 털. 순박한 검은 눈동자. 하지만 표정은 일그러져있었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낮게 목청을 울리고 있었다. 제법 늑대의 티를 갖춘 루카였다.
     “루, 루카?!”
     “똥개?!”
     경훈과 혁이 동시에 소리쳤고, 루카의 등장에 강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드는?!”
     강찬이 소리치며 보스의 방 입구로 고개를 돌렸지만 아직 현성은 보이지 않았다.
    ‘이래가지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잖아. 짐만 될 뿐이잖아!’
     방금 전까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심정으로 크로스 보우의 방아쇠를 당기던 리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리아는 또다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계속 가해지는 공격에 미노타우로스의 시선이 리아게게 고정된 것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며 팔을 내 뻗는 미노타우로스. 백 스텝으로 물러난다 해도, 미노타우로스의 손아귀에 잡힐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리아는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질렀다.
     다음 순간, 거대한 미노타우로스의 손이 자신을 움켜쥘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괴성을 지르기 시작하는 미노타우로스가 아닌가. 놀란 리아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다 자란 진돗개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제법 큰 늑대 한 마리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뭐, 뭐지? 이 늑대는…….’
     도대체 늑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실마리는 이어진 경훈의 외침으로 베일을 벗었다.
     “루카!”
     순간 리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카라면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인 레드 파운의 소환수였다.
     현성의 도움으로 받던 지난 날 그녀가 봤던 루카는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작은 아기늑대에 불과했다. 그랬는데 훌쩍 커버린 루카를 보고 리아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사이 또다시 지면을 박차고 튀어나가는 루카. 어지나 바른지 희미한 잔상이 루카의 뒤를 잇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가 내뻗은 팔을 가볍게 피함과 동시에 미노타우로스의 팔에 가볍게 착지한 루카가 팔등을 타고 어깨 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귀찮아진 미노타우로스가 자신의 어깨 위로 손을 가져 갔지만, 이미 루카는 미노타우로스의 머리 위에 착지해 있었다.
     막상 머리 위로 올라왔지만 어디를 공격해야할지 모르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루카의 시선이 미노타우로스이 반대편 귓가로 향했다.
     루카는 재빨리 미노타우로스의 귀를 물고 또다시 몸을 회전시켰다.
     촤르르륵.
     귀를 갈가리 찢음과 동시에 네 다리로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를 박차고 거리를 두려는 찰나,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손이 루카를 움켜쥐었다.
     깨갱!
     “루, 루카!”
     “쳇!”
     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크로스 보우의 방아쇠를 당겼고 미노타우로스와 거기를 두었던 강찬과 경훈이 미노타우로스에게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리아의 볼트는 미노타우로스의 가죽을 뚫지 못했고, 강찬과 경훈은 꽤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에 이대로라면 미노타우로스의 손아귀에 잡힌 루카가 죽을 게 뻔했다.
     그때였다.
     “파워 샷!”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라싸.
     쐐애액!
     푸욱!
     화살촉에 불을 머금은 거대한 화살이 루카를 잡은 미노타우로스의 손목에 깊숙이 박혔다. 동시에 화살촉이 머금은 화염이 미노타우로스의 상처부위를 태우기 시작했다.
     치이익.
     움머어어!
     미노타우로스가 비명을 지르며 루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고, 미노타우로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루카가 재빨리 거리를 두었다. 미노타우로스가 발버둥을 치고 있는 사이 모두의 시선이 보스의 방의 입구로 향했다.
     붉은색과 은색이 어우러진 거대한 장궁을 든 현성이 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왜소한 체격에 호리호리한 몸을 가져 허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의 기세는 거대했다.
     뒤이어 헐레벌떡 달려와 현성의 옆에 선 어여쁜 엘프 소녀가 소리쳤다.
     “샐라임, 파이어 버스트(Fire Burst)!"
     그에 소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불의 상급정령이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고, 농구공 크기의 구체가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쏘아지면서 폭발했다.
     퍼엉!
     옆구리에 강한 충격을 받은 미노타우로스가 휘청했고 미노타우로스의 시선이 티아의 앞에 선 불의 정령에게 고정되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주춤하는 사이, 강찬이 때를 놓치지 않고 미노타우로스에게 달려들었다. 시뻘건 화염을 머금은 문 블레이드의 검신이 미노타우로스의 복부를 찔러 들어갔다.
     푸욱.
     치익.
     쿼워엉!
     치고 빠지기 식의 공격패턴을 이미 읽었는지, 미노타우로스가 뒤로 빠지는 강찬을 재빨리 움켜쥐고 거리를 두었다. 또다시 목포물을 움켜쥔 손을 공격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 같았다. 나는 즉시 활을 강하게 움켜쥐고 외쳤다.
     “퀵 스텝!”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 순식간에 미노타우로스와의 거리를 좁힌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강하게 휘둘렀다.
     “보우어택!”
     퍼억!
     무릎관절에 거대한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적중했고, 미노타우로스가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강찬을 잡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무방비 상태로 지면에 착지하려는 나를 후려쳤다.
     방어력이 낮은 나는 상당량의 생명력이 감소하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제길. 더럽게 아프잖아! 덕분에 티아에게 선물 받은 옷이 바닥에 질질 끌려 엉망이 되었다.
     “오빠!”
     “레드!”
     티아와 미토타우로스의 손에 잡힌 강찬이 소리쳤다. 경훈과 혁이 미노타우로스에 접근했지만 섣불리 다갈 수 없었다. 이미 공격 패턴을 꿰뚫어 보았는지, 벽을 등지고서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저런 멍청한 몬스터도 머리를 쓸 줄 아는군.’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이를 악문 채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미노타우로스를 노려보았다.
     놈이 강찬을 잡아채면 우리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직선적인 공격을 가할 것이다. 미리 예측이라도 해놓았던 것인지 즉시 행동으로 옮겨버린 미노타우로스를 보며 나는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하긴 명색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인데 그 정도는 돼야 사냥할 맛이 나겠지.
     언제 왔는지, 티아가 옆에서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내 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조심하지 그랬어, 이 바보야!”
     소리치는 티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티아의 흔들리는 두 눈을 보았다. 쩝. 티아의 이런 눈빛은 또 처음 본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나는 피식 웃어보였다. 하지만 찌푸려진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통증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미노타우로스에게로 돌렸다. 강찬이 발버둥 쳤지만, 미노타우로스의 손아귀에선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았다.
     리아의 시선은 혁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나는 자연스레 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친구를 구한답시고 매직 미사일을 마구마구 쏘아대는 녀석. 하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미노타우로스는 귀찮다는 듯 팔을 휘둘러 혁을 쫓아낼 뿐이었다.
     미노타우로스의 팔이 휘둘러질 때마다 리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흐음. 혁이가 다칠까 봐 그러는 건가?
     그때, 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이 내 시야를 가렸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생명력 포션이지! 얼른 받아!”
     티아가 소리쳤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티아가 건네 준 생명력 포선을 받아 마셨다.포션을 건네 준 티아가 등을 돌리더니 자신의 불의 상급정령과 함께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쳇. 그냥 회복시켜 줄 걸 괜히 내버려뒀나?”
     내 왼팔에 감긴 청룡이 투덜대며 말했다.
     요 녀석 봐라? 주인이 다쳤는데 치료를 안 해주다니. 나중에 두고 보자. 생명력이 회복된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재빨리 화살 깃을 활시위의 절피에 걸고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주작, 파이어 애로우. 백호, 윈드 애로우.”
     “넹~ 마스터!”
     “알겠습니다, 마스터.”
     두 정령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살촉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음과 동시에 외쳤다.
     “파워 샷!”
     푸슝.
     쐐애액!
     상당량의 스태미나와 마나가 감소하는 걸 느끼며 맹렬히 쏘아진 화살에 시선을 둔 나는 재빨리 퀵 스텝을 걸고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내달렸다.
     방금 전 쏜 화살은 미노타우로스의 아랫배 깊숙이 박혔다. 상당한 충격을 먹었는지, 미노타우로스가 괴성을 지르며 아랫배에 박힌 화살을 움켜쥐더니 힘껏 뽑아냈다.
     미노타우로스가 아랫배에 박힌 화살을 움켜쥠과 동시에 내가 소리쳤다.
     “다 같이 덤벼!”
     그에 경훈이 재빨리 달려들어 강찬을 쥔 미노타우로스의 손에 무릎을 꽂았고, 나는 미노타우로스의 상처 부위에 보우어택을 작렬했다.
     공격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남은 정령력을 모두 끌어올린 티아의 불의 상급정령 샐라임이 형성한 화염검이 내 화살이 뚫어 놓았던 상처부위를 찌른 것이었다.
     정령력을 모두 소지한 샐라임은 그 자리에서 안개에 가려지듯 퍽 꺼졌고,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은 허공을 훑어냈다. 하지만 그러한 공격 때문에 생명력이 상당히 감소했는지, 미노타우로스가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강은 미노타우로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시뻘겋게 충혈이 된 눈으로 아까와는 다른 몸놀림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미노타우로스는 버서커(광전사)와도 같았다.
     강찬의 검이 피부에 상처를 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었고, 내 파워 샷이 적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춤하지 않았다.
     치고 빠지는 형태의 방어를 겸비한 아까의 공격과는 달리 같은 패턴의 직선적인 공격을 가해오는 미노타우로스의 공격 패턴을 읽었지만, 섣불리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후우. 이건 뭐 어떻게 하라는 거지?’
     나는 미노타우로스의 공격을 간신히 피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심장이나 뇌 같은 약점을 파괴하면 아무리 생명력이 가득한 상태라도 한 방에 죽게 된다. 즉, 약점을 가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말은 쉽지만 저렇게 날뛰는 거대한 몬스터를 어떻게 불잡아두고 약점을 가격하겠는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나는 손뼉을 치며 크게 소리쳤다.
     “미노타우로스를 묶어놓고 약점을 공격하자!”
     “이 무식한 놈을 무슨 수로 묶어놔?!”
     달려드는 미노타우로스를 간신히 피해낸 경훈이 소리쳤다. 그에 강찬이 소리쳤다.
     “혹시 다리를 공략하라는 거야?!”
     “빙고!”
     나는 나에게 팔을 뻗어오는 미노타우로스를 피해내며 소리쳤다. 모르는 누군가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면 사냥 참 쉽게 생각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이다. 우리도 필사적이었다.
     우선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내가 먼저 공격을 해야겠군.
     “백 스텝!”
     나는 백 스텝을 밟고 뒤로 물러나 미노타우로스와 거리를 두었다.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든 나는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파워 샷…….”
     상당량의 스태미나와 약간의 마나가 감소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푸슝!
     쐐애액.
     쏘아진 화살은 대기를 가르며 미노타우로스의 발뒤꿈치에 적중했다. 흐음. 사실상 발뒤꿈치보다 좀 위에 박혔으니 아킬레스건에 박혔다고 해야 하는 건가?
     아무튼 화살에 맞은 미노타우로스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두 팔로 땅을 짚어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찬의 화염검이 미노타우로스의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쿠워어엉!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미노타우로스에게 경훈이 접근했고, 나머지 한쪽 눈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푸욱!
     마침내 두 눈을 다 잃은 미노타우로스가 괴성을 지르며 드러누운 채 멀쩡한 한쪽 다리와 두 팔을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모두 뒤로 물러나!”
     경훈이 소리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고, 나는 백 스텝을 밟고 멀찍이 물어났다. 강찬이 빠른 반사 신경으로 미노타우로스가 마구잡이로 흔드는 팔과 다리를 피하며 미노타우로스의 배 위에 올라서는데 성공했다.
     미노타우로스의 두 손이 공중으로 치솟더니 이내 강찬에게 내리꽂혔다. 하지만 강찬은 사력을 다해 가까스로 미노타우로스의 공격을 피해냈다. 덕분에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두 주먹은 자신의 복부를 내리치는 꼴이 되었다.
     쿠엑!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자기 자신이 피를 토할 정도였다. 역시 몬스터는 몬스터.
     강찬은 미노타우로스의 가슴팍에 올라서서 검을 거꾸로 집어들었다.
     “심장 마사지를 해주마, 라이트닝 웨폰!”
     파츠츠츠.
     파직파직.
     문 블레이드의 검신에 푸른 뇌전이 형성되어 맹렬하게 방전했고,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하앗!”
     강찬의 문 블레이드가 미노타우로스의 가슴팍을 뚫고 들어가자 미노타우로스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치이익!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 뒤의 일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너무도 끔찍한 나머지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이다.
     파밧! 하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 창이 떴다.
     [정령 주작(불)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청룡(물)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헛? 미노타우로스를 잡은 건가?”
     생각보다 쉽게 잡힌 미노타우로스. 어찌 보면 조금 허무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미노타우로스의 시체가 사라지면서 떨어진 금화와 액세서리, 그리고 커다란 아이템을 볼 수 있었다.
     이어 미노타우로스의 시체가 형체를 잃고 사라지자 미노타우로스위에 서 있던 강찬은 안전하게 지면에 착지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목걸이를 집어든 강찬이 입을 열었다.
     “허억. 이, 이게 뭐야?”
     “엥? 왜 그래?”
     나는 재빨리 강찬에게 다가가 강찬의 손에 들린 아이템을 보았다.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은색의 줄이 달린 예쁜 펜던트. 아이템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강찬이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옵셥 좀 봐봐.”
     “뭐 대단한 거라도 나왔어?”
     [사파이언 펜던트(유니크)]
     설명: 새파랗고 둥근 사파이어가 박힌 사파이어 펜던트. 목걸이 줄의 재질은 백금이며 펜던트를 열어 사진 따위를 끼울 수 있을 것 같다.
     방어 10증가
     마법 방어20증가
     효과- 마나 1,000증가
           물속성 친화력 30증가
           1클래스 마법 70%확률로 반사 혹은 흡수.
           2클래스 마법 아쿠아 볼 발동.
           3클래스 마법 아이스 포그(Ice Fog) 발동.
     아이템 옵션을 본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니크 아이템이 이런 데서 나올 줄이야. 언제 왔는지 경훈과 혁, 티아와 리아의 시선이 목걸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건 또 뭐지?”
     강찬이 거대한 망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약간 굵고 기다란 손잡이 끝에 달린 원기둥 모양의 거대한 쇳덩어리가 관건이었다.
     망치를 본 혁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성격 참 이상한 녀석이군. 저런 투박한 무기를 좋아하다니. 목걸이에서 시선을 거둔 혁이 강찬에게 쫄래쫄래 다가가 말했다.
     “너 그거 쓸 일 없지?”
     “당연하지, 문 블레이드가 있는데. 게다가 나는 이런 둔기 채질이 아니야.”
     “헤헤. 그럼 이리 줘봐.”
     혁이 빼앗듯 강찬의 손에 들린 거대한 망치를 낚아챘다. 그리고 이쪽으로 또다시 쫄래쫄래 걸어와 말했다.
     “니들도 이거 안 쓰지? 오케이! 그럼 이거 내 거다.”
     쯔쯔 혼자 생쇼를 하는구먼. 나는 혁을 보며 혀를 찼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 아이템을 어떻게 나눌까하는 것이 문제였다.
     리아는 파티원이 아니니까 필요 없다며 뒤로 물러났고 강찬도 펜던트에 별 흥미가 없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후도 마찬가지였다.
     옵션을 보니 욕심이 나기도 했지만, 나에겐 그다지 필요 없는 아이템 같았다.
     흐음. 물속성 친화력이라. 아무래도 정령술사에게 유용한 아이템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티아가 가지면 되겠네?”
     모두들 사파이어 펜던트에 집착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티아의 목에 펜던트를 걸어주었다. 티아와 참 잘 어울리는 펜던트였다.
     “이야, 잘 어울리는데?”
     “정말?”
     “응.”
     티아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던 나는 강찬에게 다가간 경훈에게 시선을 던졌다.
     경훈이 말했다.
     “야, 얼마 나왔냐?”
     “꽤 짭짤한데? 14골드.”
     “히엑?! 야, 돈 나누자.”
     “그럴 생각이었어.”
     “짜식들. 이 형님은 필요 없다.”
     어느새 거대한 망치를 치우고 모닝스타를 어깨에 들쳐 멘 혁이 말하자 강찬과 경후의 입 꼬리가 씩 올라갔다. 수입이 늘었으니 당연했다.
     나야 뭐 보고 싶었던 미궁의 보스를 보았고 그 보스를 쓰러뜨렸으니 아이템이나 돈 따위는 안 받아도 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이러 아이템을 얻으러 온 것도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파티 퀘스트는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모닝스타를 휘두르는 혁에게 다가가 말했다.
     “루샤크. 아까 입구에서 받았던 파티 퀘스트는 뭐 어떻게 된거야?”
     “아차, 파티 퀘스트를 받았었지.”
     혁이 모닝스타를 어깨에 들쳐 메며 파티 퀘스트 창을 열었다.
     파밧!
     [파티 퀘스트]
     미노타우로스 퇴치. 우두인신(牛頭人身)의 괴물. 복잡한 미로로 얽힌 미궁의 끝에 갇혀있는 흉포한 몬스터,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라!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한다(완료).]
     [수도 세인트 모닝의 마법사의 성에 보고한다.]
     혁이 파티 퀘스트 창을 열었고, 파티원 전원의 눈앞에 초록색을 띤 반투명한 직사각형의 입체창이 떴다.
     파티 퀘스트를 쭉 읽어 내려가던 혁이 말했다.
     “세인트 모닝에 가서 보고를 하라?”
     “세인트 모닝 귀환스크롤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어.”
     “아니, 그럴 필요 없이 파티 퀘스트를 받을 때 리더에게 지급된 아이템인 마법사의 성 입구까지 가는 워프 스크롤이 나한테 있으니까.”
     혁이 아이템 창에서 워프 스크롤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혁을 중심으로 나와 티아, 강찬과 경훈 그리고 리아가 섰다.
     “자, 그럼 스크롤 찢는다? 워…….”
     “잠깐!”
     혁이 워프 스크롤을 찢으려는 찰나, 잠자코 있던 경후이 소리쳤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혁이 대꾸했다.
     “뭐야? 갑자기 왜?”
     “리아 씨가 아직 파티에 가입 안 하셨잖아. 워프 스크롤을 찢는 사람의 손이나 어깨를 잡아야 한다고.”
     “아하 그렇군. 리아 씨. 제 어깨에 손을 얹으세요.”
     “네, 네.”
     리아가 조심스레 다가와 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 간다! 워프!”
     부욱.
     혁이 들고 있던 워프 스크롤을 찢자, 우리는 새하얀 빛무리에 둘러싸였고, 순식간에 수도 세인트 모닝의 큰 규모를 가진 마법사의 성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    *     *
     관청과 맞먹는 마법사 성의 큰 규모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벌써 날이 어두워졌군. 월드타임 시간을 보니 오수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검푸른 창공 위에 둥둥 떠다니는 두 개의 달이 새하얀 벽돌로 차곡차곡 쌓아 지은 새하얀 마법사의 성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혁이 고급스런 입구의 문손잡이를 잡으려 말했다.
     “우선 들어가자, 파티 퀘스트 보상은 뭘까?”
     기름칠을 제때 해두었는지, 문을 열 때 거북한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넓은 복도가 보였다. 복도 위엔 붉은 카펫이 깔려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벽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나는 중앙홀의 안내데스크를 볼 수 있었다.
     저쪽에 가서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겠지 싶어 나는 앞장선 혁에게 말했다.
     “루샤크. 저쪽에 안내 데스크가 있는데, 가서 파티 퀘스트 완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자.”
     “그래.”
     우리는 천천히 안내 데스크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말투를 보나 눈빛을 보나 분명한 남성 NPC. 안내 데스크에 앉아있는 NPC에게 건들건들 다가간 혁이 말했다.
     “파티 퀘스트 때문에 왔습니다.”
     “파티 퀘스트 말씀이십니까” “예.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렸거든요.”
     순간, NPC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가 싶더니 이내 원래의 표정을 되찾으며 대꾸했다.
     “아하. 그럼 마법사의 성 2층에 계신 마성의 현자께 가보십시오. 현자님의 방의 위치도 알려드리겠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안내 데스크 뒤쪽 모퉁이를 돌아…….”
     NPC의 말대로 2층에 올라간 우리는 이내 NPC가 말한 마성의 현자의 방 입구에 다다랐다. 앞장선 내가 현자의 방에 노크를 했다.
     똑똑
     “들어오십시오.”
     얼레? 어디선가 들은 듯한 목소리. 나는 문을 열고 현자의 방에 들어왔다. 깜끔하게 정리된 책장과 방 끝부분 중앙에 위치한 책상.
     그런데 책상 앞엔 놀랍게도 레온이 앉아 있었다. 마성의 두 번째 현자 레온을 마법사의 성에서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레온!”
     “앗? 레드?”
     레온이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나를 따라 들어온 동료들을 훑어보던 레온이 말했다.
     “리아?”
     “오빠!”
     “친구들이랑 미궁에 간다더니, 레드 일행이랑 같이 간 거였어?”
     레온이 말했다. 그에 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미궁의 미로 중간 지점에서 우리 파티가 괴멸 당해서 위험에 처했는데, 레드 씨가 구해줬어.”
     “아하, 그렇구나. 고마워요, 레드.”
     나는 레온의 말에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의자에 앉으며 내게 물어왔다.
     “그런데 레드, 마법사의 성엔 무슨 일로…….”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했거든요. 파티 퀘스트 완료 때문에 왔어요.“
     “그래요? 이야, 대단하군요. 그 지독한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리다니…….”
     레온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와 일행을 번갈아봤다.
     “잠시 보고서 작성을 해야겠네요. 실례지만 일행 분들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서 계시지 말고 저쪽 소파에 편히 쉬세요.”
     레온의 말에 나를 제외한 모두가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나는 레온이 무슨 보고서를 작성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책상 가까이 가서 레온이ㅣ 꺼낸 종이에 시선을 두었다.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걸린 시간은 10분.
     그 내용을 최대한 많이 간추려서 이야기하자면, 미궁의 미로를 헤치고 나아가 미궁의 보스를 쓰러뜨린 일행이 있다는 식의 그런 보고서였다.
     보고서 작성을 완료한 레온이 펜을 펜꽂이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파티 리더께서 지장을 찍어 주셔야합니다.”
     그 말을 들은 혁이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혁이 착용하고 있던 흰 장갑을 벗고 엄지손가락을 인주에 문지른 뒤 보고서 싸인란에 지장을 찍을 때였다.
     [퀘스트 완료!]
     흉포한 몬스터,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렸다!
     퀘스트 완료, 보상(미노타우로스 슬레이어 배지)
     금화 10골들
     미스릴 원석 1kg
     경험치 EXP. 870,000
     퀘스트 완료 창이 뜨면서 눈부신 빛이 레온의 방 내부를 가득 채웠다. 보상 아이템이 보잘것없는 반면, 파티원 전원이 레벨업을 할 정도로 많은 경험치를 주었기 때문이다.
     번쩍!
     [레벨업! 스텟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업! 스텟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업! 스텟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백호(바람)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백호(바람)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현무(땅)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현무(땅)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주작(불)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주작(불)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청룡(물)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청룡(물)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허억? 뭐, 뭐야?”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갑작스런 폭업이라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소리치자, 강찬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야, 레드?”
     “아, 아니. 뭔가 잘못된 것 같아서. 카이루 넌 몇 레벨업 한거야?”
     “나는 3레벨업 했지. 드디어 레벨 100이다. 2차 전직을 하는 일만 남았어.”
     “엥? 3업?!”
     강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잠깐. 여기서 의문 하나가 생겼다. 강찬과 같은 고레벨의 유저가 3레벨업 할 저도의 경험치라면 나 같은 저레벨 유저는 5레벨업 정도를 더 해야 정상일 텐데…….
     내가 잠자코 서 있자 강찬이 물어왔다.
     “너는 몇 레벨업 했는데?”
     “나? 3레벨업.”
     “뭐?! 네가 3레벨업? 내가 4레벨업 하고도 경험치를 15%나 더 받았는데?!”
     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으흠. 루카와 정령들의 레벨이 급격히 상승한 것을 보니 내 경험치의 일부를 이 녀석들이 먹는 것 같았다. 계산을 해본 결과 이 상태에서 3레벨업은 적은 게 아니었다.
     남들이 경험치 100%로 레벨업을 하게 된다면 나는 200%의 경험치를 얻어야 레벨업을 하게 된다는 결론이었다. 100%의 경험치를 얻게 되면 나머지 50%의 경험치를 루카와 네 정령들이 10%씩 가져간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들어오는 경험치는 딱 절반.
     이제 이해를 한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머지 절반은 루카와 요 네 녀석들에게 분배된 것 같아.”
     “소환수가 절반 이상을 먹었다는 거군. 쯔쯔.”
     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특별히 정령석으로 태어난 정령들은 다른 정령들과는 달리 레벨업을 하면 하급에서 중급으로 승급을 할 수 있다.
     티아는 정령술사이기 때문에 정령계로 직접 들어가 정령과 계약을 했고, 또 그 정령들은 레벨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이상, 그 이하로 오르거나 떨어지지 않으니 경험치의 일부를 가져가지 않는 것 같았다.
     으악! 뭐가 이리 복잡한 거냐!
     리아는 오빠와 함께 있겠다며 마법사의 성에 남았고 레오과 인사를 마친 우리는 마법사의 성에서 나와 수도 세인트 모닝의 분수대 광장에 나왔다.
     검푸른 창공 한가운데에 둥근 달 두 개가 둥실둥실 떠다니며 밤하늘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분수대에 걸터앉아 있던 강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후우. 내일 학교도 가야 하니 슬슬 마무리 지어야겠다.”
     “나도 슬슬 정리하고 나가봐야겠어. 숙제 안 했거든.”
     경훈이 말하자 혁이 소리쳤다.
     “숙제 있었냐?!”
     “멍청한 자식. 물랐냐? 너 현대 문화의 발상 칩 가지고 우리집에 와. 형이 도와줄게.”
     “오! 그럼 나야 좋지!”
     경후의 말에 혁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소리쳤다. 지나가는 유저가 얼마 없었기에 망정이지 대낮에 이랬다면 어땠을까 나는 고개를 돌려 티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티아 너는?”
     “나도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래?”
     “응. 오빠는?”
     “나는 조금만 더 있다가.”
     “응. 너무 오래 하지는 마.”
     티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을 흐리멍덩한 눈으로 바라보던 강찬이 말했다.
     “그럼 가볼게.”
     “나도.”
     “다음에 봐요, 티아 씨. 내일 학교에서 보자, 레드.”
     “그래. 잘 가.”
     나는 강찬과 경훈, 혁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내 안개에 가려지듯 세 녀석의 몸이 사라졌다. 세 녀석 모두 로그아웃을 한 모양이다.
     뒤이어 티아가 말했다.
     “나도 가볼게.”
     “응? 아, 응. 잘 가…….”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티아를 바라보았다.
     “아차, 이거.”
     티아가 몸에 두르고 있던 색이 바랜 붉은 망토를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내가 막 망토를 받아들려는 참이었다.
     쪽!
     순간 왼쪽 볼에 부드럽고 따뜻한 무언가가 부딪혔다. 나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고, 내 볼에 뽀뽈ㄹ 한 티아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내일 봐.”
     그것을 끝으로 티아의 모습도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서 티아가 입맞춤을 해주었던 내 뺨에 손을 얹고 있었다.
     “하하…….”
                   *    *     *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주위에는 유저 몇몇만이 광장을 활보하고 있었다. 나는 왼손에 들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시위를 풀고 등에 둘러멨다.
     아차, 레벨업을 했으니 상태 창을 열어봐야겠군.
     “상태 창, 오픈!”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59
     생명력(HP). 650
     마나(MP). 460
     스태미나(SP). 1,060(배고픔 수치 0%/ 갈증 0%)
     힘 137
     체력 65
     민첩 167
     손재주 432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210~320
     방어력 10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15
     바람(백호) Lv. 5.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4.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3.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3. 친화력 100%
     [상세정보]
     “으흠. 손재주에 3 민천에 2 이렇게 분배하고… 이제 루카의 상태 창이나 볼까?”
     스탯 포인트를 분배한 나는 루카의 정보 창을 열었다.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야>
     정보: 세릴리아 월드의 단 한 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설의 흰 늑대. 충성심이 강하고 용맹한 전설의 흰 늑대이다.
     현재 상태: ??
     Lv. 35
     HP: 알 수 없음.
     MP: 알 수 없음.
     상태: 매우 건강
     친밀도: 100
     배고픔: 0% 목마름: 0%
     벌써 레벨 35. 나는 먼 곳을 응시하는 루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상태 창과 루카의 정보 창을 닫은 나는 무엇을 할지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벨터의 잡화점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시간이면 벨터가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NPC니까 월드타임에 맞춰 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인적이 드문 공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가 나는 공터의 산책로에서 산책을 하는 유저를 볼 수 없었다.
     산책로는 수풀이 무성한 나무 사이에 작은 오솔길이 있어 낮에는 정말 산책을 하기 적합한 장소이지만, 밤에는 으스스한 분위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거의 드물었다.
     나는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며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주변이 고요했고, 가끔 매미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며 혼자 공상하며 기분 좋게 산책로를 걷던 도중 내 뒤를 따라오던 루카가 멈춰서며 고개를 쳐들고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이내 루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목청을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무언가가 있어요, 마스터.”
     백호가 작게 속삭였다.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거지? 몬스터들이라면 수도 세인트 모닝으로 들어 올 수 없을 텐데……. 이벤트로 인한 몬스터 침공이 아닌 이상, 몬스터가 수도 세인트 모닝에 발을 들인다는 소리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 이유로 몬스터는 아닐 텐데… 뒤늦게 낌새를 알아차린 나는 등에 둘러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잡았다.
     그때였다.
     쉬익.
     누군가가 던진 투척용 단검이 대기를 가르며 쏜살같이 날아왔다. 나는 퀵 스텝을 걸 필요도 없이 몸을 돌려 슬쩍 피했다.
     이미 적안이 개안되어 있는지라 나는 투척요 단검이 날아온 방향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     *
     같은 시간.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마법사의 성에서 나온 리아는 오늘 미궁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어보았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루샤크에게 안긴 채로 실드에 둘러싸인 것이었지만 고개를 저어 상념을 날려버린 리아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루샤크 다음으로 기억에 또렷하게 남는 것은 무지막지한 파괴력으로 몬스터를 상대하는 레드 파운이었다.
     분명 같은 궁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한 공격은 미노타우로스에게 먹혀들었고, 자신이 가한 공격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아 할 뿐이었다.
     도대체 자신과 무엇이 다른 걸까를 한참 생각하던 리아가 트롤에게서 막 구출될 당시를 떠올렸다.
     근거리에서 리젠된 트롤을 보고도 그는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백 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두었다. 물론 뒤로 빠지는 거리는 엄청났다. 백 스텝을 마스터하지 않는 이상 그런 거리는 나오지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더울 놀란 것은 사각(死角)에서 엄청난 일격을 가했다는 것이었다.
     궁수에게 있어서 사각이란 활을 쏠 수 없을 정도로 적이 가까이 붙어있을 때를 말한다. 레드의 보우어택과 자신의 보우어택을 비교해본 결과 그 차이는 너무나도 심했다.
     그녀의 보우어택에 맞은 트롤은 오히려 귀찮아했고, 반면 레드의 보우어택에 맞은 트롤은 대가리가 기괴하게 함몰되어 그대로 쓰러졌다.
     레드가 트롤을 잡을 때를 떠올린 리아가 중얼거렸다.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돼. 궁수라면 본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원거리 공격을 가해야 하는데…….”
     한참을 생각하며 공터에 다다른 리아는 고요한 분위기에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산책로에 발을 들었다.
     “보우어택!”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드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저 두 명과 싸우고 있었다. 리아는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고개만 살짝 내밀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    *   *
     갑작스레 나타난 검은 복면을 뒤집어 쓴 괴한의 습격에 나는 급히 활을 휘둘렀다. 그러자 재빠른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거리륻 두고 투척용 단검 두 개를 던지는 유저와 뒤에서 피할 수 없게 막아서는 유저.
     마치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들은 나를 제압해오기 시작했다. 두 개의 투척용 단검이 내 복부를 노리고 날아왔으나 백호가 펼친 반투명한 흰색의 반 구체 실드에 맞고 맥없이 퉁겨났다.
     “허억?! 실드?”
     투척용 단검을 던진 유저가 재빨리 거리를 두며 말했다. 덕분에 나는 활시위를 걸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내 뒤를 막아섰던 유저가 재빨리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그리스.”
     벌러덩.
     꽈당!
     달려오던 유저가 꼴사납게 나뒹구는 순간을 이용해 나는 재빨리 활시위를 활 끝에 걸었다.
     좋아, 나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퀵 스텝을 걸었다. 비약적으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된 나는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몸을 일으키는 유저에게 한 손으로 활을 휘둘렀다.
     “보우어택!”
     부웅.
     내 활을 보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유저가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고, 그에 내 활은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을 훑었다.
     무거운 활을 강하게 휘둘렀기 때문에 중심을 잡기 위해 재빨리 몸을 회전시킨 나는 화살을 활등에 대고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었다.
     “윈드 애로우!”
     한 개의 화살이 복면을 쓴 유저를 향해 맹렬히 쏘아졌고 유저가 재빨리 피하는가 싶었으나 다리에 화살을 맞고 바닥에 곤두박질 쳐졌다.
     물론 굵직한 화살이 종아리에 박혔으니 움직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다른 유저에게 시선을 던졌다.
     “쉐도우 스텝(Shadow Step)!"
     유저의 모습이 안개에 가려지듯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수풀을 밟는 소리로 그 유저가 내 쪽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루카!”
     크르르.
     루카가 재빨리 허공에 뛰어올라 허공에 무언가를 무는 듯하더니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촤아악!
     “으악!”
     루카에게 어깨를 몰린 유저는 기괴하게 뒤틀려 떨어져 나간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며 그래도 뒤로 넘어갔다. 쇼크로 인한 기절 상태인 것 같았다.
     “후우. 끝난 건가? 근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으며, 또 나를 공격한 이유가 뭐지……?”
     나는 화살이 다리에 박힌 채 뒤로 느릿느릿 기어가는 유저에게 시선을 던졌다.
     “히에엑!”
     나와 눈이 마주친 유저가 기겁을 하며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뒤로 물러나는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으, 으악1 오지 마!”
     두 팔을 휘젓는 유저를 보며 나는 말했다.
     “갑자기 나타나 습격을 한 이유가 뭡니까?”
     “에잇!”
     유저가 품에서 투척용 단검을 꺼내 내게 던졌지만 무용지물이었다. 퀵 스텝 제한시간이 끝나지 않아 슬쩍 피해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앗!”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합소리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낀 나는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재빨리 뒤돌아선 나는 기습을 가한 유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루카가 재빨리 내 앞을 가로막으며 낮게 목청을 울렸다.
     크르르……
     전신을 은빛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하고, 한 손에는 바스타드 소드, 다른 한 손에는 카이트 실드를 쥔 유저. 유저의 검엔 시릴 듯한 푸른 오러가 짙게 서려있었다.
     밤이라 그런지 푸른빛을 뿜어내는 오러의 빛깔이 상당히 예뻤다. 도대체 기가 유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실마리는 이어진 유저의 독백에서 서서히 베일을 벗고 있었다.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티르 네티아에서 당한 것을 되돌려주겠다.”
     티르 네티아에서 당했다라…….
     나는 피식 웃었다. 왜냐하면 기사 유저의 정체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정령계약 퀘스트를 할 때 만났던, 그 유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기사 유저가 재빨리 지면을 박차며 나에게 오러가 맺힌 검을 찔러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백 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두고 화살 하나를 쏘아 보냈다.
     날아오는 화살을 재빨리 카이트 실드로 막아내는 유저. 화살을 막아냄과 동시에 오러가 맺힌 검을 휘둘러 내 허리를 베어오기 시작했다.
     “그리스!”
     “어엇?!”
     꽈당!
     검을 휘둘러오던 유저가 현무의 그리스에 마찰계수가 0이 된 지면에서 중심을 잃고 꼴사납게 넘어졌다.
     “분명 궁수일 텐데?!”
     유저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를 두며 소리쳐싸.
     “맞아. 궁수.”
     “그런데 어째서 궁수 따위가 마법을…….”
     “마법이 아니라 정령술이다.”
     기사 유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저, 정령술?!”
     “궁수에 대한 지긋지긋한 고정 관념들.”
     “뭐, 뭐?!”
     “근거리에선 취약하다? 퀵 스텝!”
     말을 마친 나는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기사 유저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기사 유저가 검을 휘둘렀지만 나는 재빨리 두 다리로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돈 뒤, 기사 유저의 뒤에 착지했다. 그리곤 힘껏 활을 휘둘렀다.
     “보우어택!”
     콰앙!
     기사 유저의 플레이트 메일과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충돌하며 작은 불똥이 튀었다.
     “크윽!”
     기사 유저가 뒤돌아 선 채 재빨리 거리를 두고 섰다. 일격을 가한 나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화살은 마나를 다루는 이에게 통하지 않는다? 백 스텝, 더블 샷!”
     나는 재빨리 백 스텝을 밟고 뒤로 물러나며 허리춤에서 화살 두 개를 뽑아들고 더블 샷을 쏘았다.
     두 대의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기사 유저를 향해 맹렬히 쏘아졌다. 두 대의 화살이 기사 유저를 향해 날아가는 사이 나는 재빨리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어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낮게 속사였다.
     “윈드 애로우. 파워 샷…….”
     상당량의 마나와 스태미나가 감소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그러나 날아오는 두 개의 화살을 오러를 머금은 검으로 갈라버린 기사 유저는 그 뒤로 엄청난 파공성을 흘리며 날아오는 화살을 보며 급히 카이트 실드로 들어 막았다.
     카이트 실드의 테두리에 옅은 오러가 맺혔으나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채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화살의 충격은 흡수할 수 없었는지 화살과 카이트 실드가 충돌하자 기사유저는 중심을 잃고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기사 유저가 꼴사납게 넘어지는 것을 보며 말했다.
     “다들 그러더군. ‘궁수란 존재는 근거리에선 취약하고, 마나를 다루는 이에게는 화살 따위는 통하지 않으며 후방지원에서만 쓸만하다.’라고.”
     또다시 화살 하나를 꺼내든 나는 기사 유저를 노려보았다.
                   *    *     *
     투구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기사 유저가 절망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궁수 유저를 보며 읊조렸다.
     ‘뭐, 뭐지?! 저 녀석은… 그 짧은 기간에 이렇게 강해지다니…….’
     유저가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정말 지긋지긋한 고정관념들이야.”
     현성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에 주저 앉아있던 기사 유저가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고정…관념? 웃기지도 않는 소리. 비록 내가 하급 소드 엑스퍼트인지라 갑옷에 강기를 주입하지 못하고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릴 수 없기 때문에 너의 저급한 술수에 당한 것이다. 궁수 따위가 소드 마스터를 당해낼 수 있을 것 같냐?!”
     “…….”
     “할 말을 잃었나보군. 크크크.”
     “아니, 할 말을 잃은 게 아니라, 네 꼴이 불쌍해서 그런다.”
     “뭐, 뭐라고?! 이 자식!”
     현성에게 도발당한 기사 유저가 손에 쥔 오러를 머금은 검을 현성의 목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현성은 재빨리 거리를 둠과 동시에 화살 하나를 쏘아 보냈다. 가까스로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낸 기사 유저가 주춤하는 사이 현성이 입을 열었다.
     “그리스!”
     현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사 유저가 꼴사납게 벌렁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재빨리 쏘아 보낸 화살이 기사 유저의 오른쪽 손목에 박혔고, 그에 검사 유저는 오러를 머금은 검을 놓쳤다.
     곧이어 날아든 화살이 기사 유저의 오른쪽 어깨에 박혔다.
     그것을 본 현성은 누군가를 향해 기가 유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청룡, 아쿠아 볼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아직 무리다, 마스터. 레벨 10이 되어 중급정령으로 등급이 올라가지 않는 이상 할 수 없다.”
     “그래? 아쉽군.”
     현성이 화살 하나를 더 꺼내들었을 때 어깨에 박힌 화살을 움켜쥐고 인상을 쓰던 기사 유저가 소리쳤다.
     “정령에게 의존하지 않았으면 상대로 안 됐을 것이다! 별 같잖은 녀석이 정령에 의존해서…….”
     “웃기고 있네.”
     그에 현성이 기사 유저의 말을 끊었다.
     “아까 네 녀석에게 가까이 접근해 가했던 공격도 정령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나?”
     “…나는 지금 나를 바닥에 넘어뜨릴 때 쓴 걸 말하는 것이다.”
     기사 유저의 말에 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기 시작했다.
     “후우. 한 가지만 묻자. 도대체 나를 기습한 이유가 뭐야? 그것도 저기 저쪽에 쓰러진 두 유저와 함께. 그리고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이런 한적한 곳까지 찾아와서 공격을 가해오는거야?”
     “그건 바로 네놈이 척…….”
     기사 유저가 말을 하던 도중 안개에 가려지듯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48시간 이상 플레이를 해 강제 로그아웃이 된 것이었다.
     “에휴.”
                   *    *     *
     말을 하던 도중 사라지는 기사 유저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휴식을 취하려는데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힘없이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시위를 풀어 등에 둘러멨고 적안을 해제한 뒤, 청룡, 주작, 백호, 현무를 역소환 시키고 루카와 함께 산책로를 빠져나가기 위해 뒤돌아서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산책로를 빠져나와 공터에 발을 내딛었을 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레드 씨.”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아?”
     리아가 산책로에서 나오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분명 아깐 마법사의 성에 남아 있었는데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 나는 느릿느릿 걸어오는 리아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아, 그냥 답답해서 산책도 좀 할 겸 나왔어요. 헤헤.”
     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혹시 내가 싸우는 걸 본 건 아닐까? 혹시나 하는 맘에 말을 걸려는 순간, 리아가 입을 열었다.
     “레드 씨. 물어볼게 있는데요…….”
     “네? 뭔데요?”
     리아의 말에 나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고, 리아가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혹시 그 활 레드 씨가 직접 만든 건가요?”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제가 만들었지요.”
     “그럼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무슨 부탁이요?”
     잠시 머뭇거리던 리아가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저도 제 몸 정도는 보호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싶어요. 크로스 보우도 레드 씨의 활처럼 강력했으면 좋겠고요.”
     “흐음… 무기 정도야 만들어 드릴 순 있어요. 그리고 강해지고 싶다라… 그건 일단 리아 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요. 그러니까…….”
     리아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수도 세인트 모닝의 광장에 다다르게 되었다.
     후우, 결국 내일 무기 하나를 제작하게 되었군. 물론 리아의 공격 스타일을 보면서 이것저것 지적해주는 것도 잊지 않아야했다. 이거 내일 티아와 놀 시간도 없겠군. 아니, 티아도 동해하면 될 것이다.
     광장에 다다를 무렵, 이야기를 마친 리아는 먼저 가보겠다며 로그아웃 했다.
     나도 이제 슬슬 로그아웃해야겠군.
     검푸른 창공위에 둥근 두 개의 달이 서쪽으로 슬슬 지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벌써 새벽이군.
     나는 달이 지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푸쉬쉬.
     위잉.
     철컥.
     헤드셋의 전원이 꺼지자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헤드셋을 벗어 게임베드에 올려두는 걸 잊지 않았다. 게임베드에서 일어난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컴, 지금 몇 시야?”
     「오후 9시 30분입니다.」
     “어라? 벌써? 시간 참 빨리 가는구나.”
     하루 종일 게임을 했더니 피로가 쌓이는군. 나는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잠을 청했다.
                   *    *     *
     수도 세인트 모닝의 공터 안의 산책로에서 대기가 뒤틀리더니 이내 화려한 붉은 옷을 차려입은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저들이 사용할 수 없는 능력을 힘들이지 않고 사용하는 것을 보니 운영자 같았다.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레드 파운 군. 일단 동영상을 찍긴 했는데, 협조를 해줄지 모르겠군.’
     운영자의 가슴팍엔 ‘GM카린’이라고 적힌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운영자 카린이 피식 웃으며 수인을 맺었고, 수인을 맺는 것을 마치자 그의 모습은 안개에 가려지듯 사라져버렸다.
     

    제9장   오픈 3주년 이벤트, 공성전

    「오전 8시. 오늘의 알람은 사계 중의 가을입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컴이 들려주는 알람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졸린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키자 컴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주인님, 얼른 씻고 아침 식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학교에 늦지 않게 등교를 하셔야지요.」
     “응.”
     나는 반쯤 뜬 눈을 껌뻑이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비실거리며 냉장고로 향해 냉장고에서 레토르트식품 하나를 꺼내 그것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려 데웠다.
     잠시 후 밥 반, 미트볼 반이 담겨진 커다란 접시를 들고 식탁으로 온 나는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지 못하는 비몽사몽 상태로 밥을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욕실로 들어가 청결모드로 깨끗이 씻고 났더니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
     “후우. 어라? PDA가 어디 갔지?"
     외출복을 차려입은 나는 PDA를 찾기 시작했다.
     아차, 방 책상 위에 올려두었는데 깜빡했군.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 책상 위에 놓인 PDA를 주머니에 넣은 뒤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집에서 나와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탁.
     웅성웅성.
     시끄러운 교실 안.
     교실 안으로 들어온 나는 빙긋 웃으며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교실 안은 세릴리아 월드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우리반 반장인 명석이 말했따.
     “이거 알아? 다음 주에 세릴리아 월드 오픈 3주년 이벤트를 한대.”
     “정말? 무슨 이벤트인데?”
     명석의 말에 회장인 윤경이 궁금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고, 명석이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무슨 이벤트냐면… 아직 공지사항엔 안 떴는데, 오늘 중으로 뜰 것 같아. 한국 채널의 모든 유저들이 수도 세인트 모닝에 모이겠는 걸? 인간, 엘프 할 것 없이 말야.”
     “와아… 대단한데?”
     명석과 윤경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한국 채널의 모든 유저들이 수도 세인트 모닝으로 온다고? 라 그렇다면 레벨 200을 넘어선 괴물 유저들도 온다는 거겠네. 이건 뭐…….
     잠시 생각에 빠져있을 때 교실의 문이 열리면서 검붉은 머리칼에 훤칠한 키, 잘생긴 외모의 한 학생이 입에 빵을 문 채 들어왔다. 강찬이었다.
     “오, 강찬이다! 야, 강찬아! 너도 이번에 열리는 오픈 3주년 기념 이벤트에 참가 할 거냐?”
     “엥? 그건 또 뭐야?!”
     명석의 코끝으로 미끄러진 무테안경을 밀어 올린 뒤,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몰랐구나.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열리는 대규모 이벤트!”
     “오호. 별 희한한 이벤트를 다 하네. 나야 뭐, 참가할 거다.”
     “그래, 역시 넌 뭔가를 아는 놈이야.”
     명석이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말을 마친 강찬이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안녕, 현성아.”
     “응.”
     “너도 오픈 3주년 기념 이벤트에 참가할 거야?”
     “글세, 일단 그 이벤트가 생활직에 관련된 거라면 참가할 생각이야. 그렇지 않으면 잠깐 고려해볼 생각이고.”
     “그래? 생활직 그 지긋지긋한 걸 좋아하다니. 너도 참 신기하다.”
     “나는 그 재밌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이해가 안 가.”
     “이상한 녀석. 크크.”
     강찬이 피식 웃으며 다시 손에 쥔 빵을 먹기 시작했다.
     세릴리아 월드의 인기는 정말이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여타 가상현실 게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맴봐 자유도를 자랑할뿐더러, 더더욱 놀라운 것은 NPC와 몬스터들 하나하나에 뛰어난 인공지능을 부여했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그들은 또 하나의 가상의 생명체나 다름없었다.
     이리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마침 내가 PDA를 통해 세릴리아 월드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해 여러 가지 정보를 훑어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딩동~ 딩동~.
     오전 10시.
     이제 1교시 수업이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았다.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는 나는 종소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그저 PDA만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20분이 지난 후에도 담임선생님은 오지 않았다. 어디 편찮으신가?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았던 지라 교실은 시끌벅적했다.
     완벽한 방음 시스템 때문에 우리가 떠드는 소리가 교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기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교장실에서 교장선생님이 바로 달려왔을 게 분명했다. 이건 뭐 놀이동산도 아니고…….
     그렇게 한참을 놀고 있을 때였다.
     “잠깐 줘봐.”
     “안 돼!”
     “치사하다.”
     “떨어뜰면 큰일 난단 말이야!”
     “좀 만져보자, 응?”
     “안 돼, 어엇?!”
     타악!
     빠각!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시끄러웠던 교실이 잠잠해졌다.
     “으앙 뭐야 이게! 울 아버지한테 혼나겠다, 흐잉……."
     “아, 미안해.”
     이내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
     나는 무슨 상황인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거리가 좀 있는 곳인지라 자세히 보고 싶었기에 순간 적안을 외칠 뻔했다.
     후우, 나도 폐인이 다 되었군.
     “어떻해! 울 아버지가 아끼시는 건데…….”
     “미, 미안해…….”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여학생과 그런 여학생을 달래는 남학생.
     나는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데다가 인맥 쌓는 법을 잘 못했기 때문에 흔하디흔한 반 친구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조차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릴리아 월드라는 게임에 푹 빠져 강찬과 경훈, 혁이랑만 놀았기 때문이었다. 반장 명석이와 회장 윤경이의 이름은 언제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내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망가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요즘에 나온 인공지능 미니로봇이었다. 미니로봇이란, 인공지능을 부여한 작은 생명체라고 할 수 있는 로봇이었다.
     저렇게 크기가 작은 걸 보면 작아서 찾기 힘든 물건을 찾는데 쓰인다거나 할 것이다. 또한 크기가 작은 만큼 내부의 부품이 복작하게 조립되어 있었다.
     아마도 저런 미니로봇이라면 수리를 할 때 꽤나 애를 먹을 것이다. 저런 것의 부품이라면 나도 조립해 본 적이 있는데…….
     나는 울고 있는 여학생에게 다가가 망가진 미니로봇을 살폈다.
     외관상으로 멀쩡한 것을 보니 내부의 엇갈린 회로만 연결시키면 될 것 같다. 부품에 이상이 있다면 그 부품 하나를 끄집어내 분해시킨 뒤 다시 조립하면 그만이다.
     이 정도 고장의 수리는 잡동사니 만들기와 기계부품 조립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가진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미니로봇을 주워들었다.
     “내가 고쳐줄게.”
     “훌쩍, 훌쩍. 응? 현성이? 그걸 네가 무슨 수로 고쳐…….”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여학생. 반면에 나는 이름조차 모른다. 그저 얼굴만 기억하고 있을 뿐. 왠지 미안하지만 명찰에 달린 이름을 보면 되기 때문에 이름을 알아내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이미예…….’
     “미예야 혹시, 미니로봇 공구 세트 있어?”
     “으, 응. 내 가방 안에 있어. 잠시만 기다려. 내가 꺼내올게.”
     울음을 그친 미예가 자리에서 일어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기자리로 걸아가 가방에서 작은 플라스틱가방 하나를 꺼냈다. 미니로봇의 공구 세트였다.
     나는 빈자리에 앉아 미예가 건네 준 공구 세트를 받아들고 공구 세트를 개봉했다.
     윙.
     철컥.
     공구 세트 안에는 일자 드라이버 등 여러 가지 공구가 들어 있었고, 왼쪽 윗부분에 작은 버튼이 위치해 있었다. 버튼을 누르자 홀로그램이 뜨면서 미니로봇의 세세한 부분을 검색할 수 있도록 설명서가 떴다.
     설명서를 보면 관절의 움직임과 몇 번 부품의 위치와 각 회로들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이야, 이런 편리한 시스템이 부착되어 있구나. 내가 조립할땐 이런 시스템이 없어서 하나하나 외워야 했는데. 뭐 전부 외우진 못했지만, 쩝.’
     나는 드러이버로 미니로봇을 분해한 뒤 엇갈린 회로를 바로잡았다.
     이들에게 있어선 핏줄과도 같은 소중한 회로를 집게로 조심스레 들춰 위치를 맞춘 나는 부품의 이상이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 홀로그램의 버튼을 눌러보았다.
     미니로봇의 다리 부근에 위치한 부품이 약간 손상된 상태였다.
     “야, 여기 와봐! 현성이가 이런 걸 다 조립한다!”
     “어디, 어디?!”
     순식간에 반 친구들 열 명가량이 내가 앉아 있는 책상을 둘러쌌고, 모두의 시선을 받은 나는 또다시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거 큰일이군. 내성적인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누군가가 보고 있는 것을 인식하면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집중하지. 집중하면 저 녀석들의 존재 자체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빠져들게 되니까.’
     나는 단순하게 미니로봇을 고치는 데에만 집중했다. 다리를 분해시킨 뒤 세세한 회로를 조심스럽게 벌려놓고 작은 부품 하나를 꺼낸다.
     부품을 완전히 분해시키고 안에 엇갈린 미세한 부품을 다시 재결합시킨 뒤, 부품을 조립하고 다시 조심스럽게 별러놓은 회로 사이에 부품을 부착한다.
     벌려놓은 회로를 무조건 막는다면 회로에 손상이 가니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신경을 써야 하는 복잡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이 재밌었다.
     이윽고 수리가 완료 된 미니로봇. 분해했던 미니로봇을 조립하자 누워있던 미니로봇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예에게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와! 저 복잡한 걸 고쳤어!”
     “울 아버지도 고치다 포기하고 A/S 센터에 맡겼는데!”
     “신기하다!”
     모두들 나를 다시 봤다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으악! 적응이 안 되는군.
     “고마워, 현성아.”
     “아니, 뭐 이정도 가지고.”
     휴우. 이것 하나 고치는데 투자한 시간이 무려 한 시간 남짓되었다.
     미니로봇 공구 세트를 정리한 내가 자리엣 일어나려고 할 때 미예를 포함한 다른 친구들이 말을 걸어왔다.
     “현성아, 너도 세릴리아 월드 하니?”
     “응.”
     “오, 역시 너도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레벨은 몇이야?”
     “59.”
     “허어. 현성이 네 레벨이 우리 반에서 미예 다음으로 제일 낮다.”
     “그런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나는 그저 짤막하게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나를 보며 미예가 말을 걸어왔다.
     “현성아, 넌 직업이 뭐야?”
     “궁수.”
     “그렇구나. 캐릭터 이름은?”
     나는 내가 캐릭터 이름을 말하기 전까진 모두가 경악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레드 파운.”
     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던 녀석들이 입이 쩍 벌어졌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아주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친구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레드 파운이면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아니야?!”
     “가자, 세릴리아 월드 채널에서 궁탑의 스승인가? 아무튼 그 로시토가 말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일곱 번째 제자가 현성이 너야?!”
     “하하…….”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 때였다. 나를 둘러싼 친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명석이가 소리쳤다.
     “오오! 우리 반에 히든 클래스를 가진 강찬이 말고도 이렇게 대단한 녀석이 있었다니!”
     시끌시끌.
     웅성웅성.
     왱알앵알.
     “같은 궁수로서 참 부러울 따름이다. 나는 그저께 사수로 2차 전직 했는데. 그건 그렇고 현성이 넌 손재주 스탯이 몇이나돼?”
     “손재주?”
     미예의 미니로봇을 실수로 망가뜨린 남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슬쩍 녀석의 명찰에 시선을 던젔다. 영호라…….
     “나는 2차 전직을 하면서 손재주에 스탯 포인트가 20추가 돼서 이제 손재주 스탯이 335야. 생활직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아서 못 하겠더라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영호.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 손재주는 말야…….”
     “몇인데? 몇이야?”
     “아 좀 조용히 해봐.”
     명석의 말에 영호가 짜증을 내며 대꾸했다.
     “441.”
     “뭐?! 레벨 59에 손재주가 441이라고오?!”
     무슨 합창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를 둘러싼 열 명가량 되는 녀석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    *     *
     나는 강찬과 경훈, 혁과 함께 교문의 문턱을 넘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주저리주저리 말하기 시작했다. 그에 경훈이 대꾸했다.
     “그 레벨이 손재주가 441이면 진짜 뭐냐? 괴물이네. 그런데 손재주란 궁수에게 있어서 활의 데미지를 올려주는 용도잖아. 실제로 유저와 유저끼리 대련을 하게 되면 데미지보다 상황 판단력을 따질 텐데.”
     “에고, 모르겠다.”
     나는 경훈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나는 내리쬐는 뙤약볕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강찬이 넌 이제 뭐 할 거냐?”
     “나는 이제 레벨 100이 되었으니 2차 전직 퀘스트를 받아야지.”
     “히든 클래스라 전식시험을 보는 곳이 따로 없지 않아?”
     “운영자가 직접 퀘스트를 주겠지?”
     “아하.”
     강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백화점 건물 앞 초대형 스크린이 번쩍이면서 불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도시가 깜깜해지면서 초대형 스크린의 스피커가 울리기 시작했다.
     둥둥, 두둥!
     효과음가 함께 울려 퍼지는 고요한 목소리.
     「세릴리아 대륙의 평화로운 영토.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엄청난 이벤트가 시작된다.」
     두둥 두두둥!
     북소리가 이어짐과 동시에 스크린은 수도 세인트 모닝 밖의 숲을 비추고 있었다.
     은빛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무장한 기사들과 활이나 크로스 보우를 든 궁수들, 그 사이로 마법사도 종종 있었다.
     기사 유저들이 방패를 치켜세우고 수도 세인트 모닝의 정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른 함성 소리가 수도 세인트 모닝 주변 숲속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으와아아!」
     성문에 마법사가 쏘아 보낸 화염구가 기염을 토해내며 부딪혔다. 그러자 세인트 모닝의 성벽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궁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일제히 활을 쏘기 시작했다.
     성문을 부수고 세인트 모닝에 잠입하는데 성공한 기사들이 장검에 오러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에 세인트 모닝을 지키던 기사들이 일제히 성문을 부수고 쳐들어온 기사들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익스플로전(Explosion)!」
     마법사의 주문영창이 이어지자, 불의 속성을 한데모아 일시에 격발시키는 마법이 성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기사들에게 작렬했다.
     퍼펑!
     무지막지한 파공음과 함께 수많은 기사들이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이내 바닥에 처박혔다. 보는 이로부터 하여금 심장이 떨릴 정도로 엄청난 영상이었다.
     곤두박질쳐진 기사들을 밟고 나타난 기사가 마법사를 노려보며 손에 쥔 장검을 고쳐 잡았다.
     순간, 다른 기사들의 옅은 하늘색 오러와는 다른, 짙고 푸른빛을 띤 아릅답다 못해 신비한 오러 블레이드가 장검의 검신을 타고 밀려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야, 소드 마스터다!”
     강찬이 놀라며 소리쳤다. 대륙에 얼마 없는 소드 마스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소드 마스터와 마법사가 서로 거리를 둔 채 마주보는 것을 끝으로 초대형 스크린이 까맣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큼직하고 새하얀 글씨가 순차적으로 새겨지기 시작했다.
     [2234년 6월 20일.
     세릴리아 월드 오픈 3주년 기념 이벤트.
     ‘공성전’
     자세한 사항은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를 참조하세요.]
     그것을 끝으로 초대형 스크린이 껴졌고,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도 이내 밝아졌다. 지난번에 참가했던 소규모 이벤트와는 다른 대규모 이벤트인 공성전의 광고였던 것이다.
     기대에 들 뜬 강찬이 소리쳤다.
     “6월 20일이면 지금으로부터 딱 이주일 후네? 일주일 내에 2차 전직을 하고 새로운 스킬을 모두 익힌 뒤 공성전에 참가해야겠어.”
     “아까 스크린으로 본 건데, 수성을 할 수도 있는 건가?”
     “그거야 모르지, 일단 가서 홈페이지에서 자세한 사항을 찾아보자고.”
     경훈의 물음에 나는 짧게 대답했다.
                   *    *     *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제일 먼저 컴에게 멀티비전을 켜라고 한 뒤 세릴리아 월드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리고 보니 좀 출출하군. 잠시 홈페이지 메인화면을 켜둔 상태로 소파에서 일어난 나는 냉장고로 향했다.
     “뭘 먹을까, 뭘 먹을까… 아, 피자나 시켜 먹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컴에게 피자 주문을 시켰고, 피자는 주문을 한 지 5분도 채 안 되어 배달되었다.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피자를 탁자에 올려둔 나는 한 조각을 집어 들고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앉았다.
     리모컨으로 공지사항을 선택하자 여러 가지 매뉴얼이 질서정열하게 나열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중 이벤트를 선택했고, 이벤트를 선택하자 제일 위쪽에 ‘세릴리아 월드 오픈 3주년 기념 이벤트, 공성전’이라고 적힌 매뉴얼을 볼 수 있었고 매뉴얼을 선택한 나는 이것저것을 살펴보았다.
     이벤트는 생각보다 쉽게 진행되는 것이었다.
     공성을 하는 유저들과 수성을 맡은 유저들로 나뉘고, 공성을 하는 유저들은 수도 세인트 모닝을 침략해 세인트 모닝을 초토화 시키면 되는 것이었다. 반대로 수성을 맡은 유저들은 공성을 하는 유저들을 모조리 섬멸시켜 성을 지켜내면 되는 것이다.
     수도 세인트 모닝에 애착이 많은 나로서는 공성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무래도 수성을 맡는 것이 낫겠군. 벨터의 잡화점과 아세른의 대장간이 망가지는 꼴을 볼 순 없어. 그리고 궁수의 탑도.”
     대충 이벤트를 훑어본 나는 ‘수성’의 매뉴얼로 넘어가 수성 성공시 지급되는 아이템을 보았다.
     아직까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정령술사들에게 있어서 꿈과 같은 정령석. 빛의 정령석과 이동속도를 늘려주는 유니크 부츠 등 여러 가지 액세서리와 아이템이 각 한 개씩 한 명에게 랜덤으로 분배된다는 것이 관건이었다.
     세릴리아 월드를 플레이하는 유저가 몇 명인데, 고작 열 개도 채 안 되는 아이템을 분배한다니…….
     나는 이번 이벤트에 흥미를 느끼며 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파자 치즈가 쭉 늘어나며 피자 특유의 고소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피자 한 판을 몽땅 먹어치운 나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컴에게 멀티비전을 끄라고 지시했다.
     “후우, 배부르다. 그럼 먼저…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해볼까?”
     방으로 들어온 나는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가상현실 게임기기의 허리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위잉.
     철컥.
     맑은 기계음과 함께 캡슐의 문이 열렸고 나는 게임베드에 드러누웠다. 헤드셋을 착용하자 캡슐의 문이 서서히 닫히며 빛을 차단했고 헤드셋에 불이 들어왔다.
     이윽고 들려오는 여성의 음성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59.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수도 세인트 모닝의 분수대 광장.
     따스한 햇살이 수도 세인트 모닝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분수대에 잠긴 녹슨 동전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늘빛의 물줄기가 햇빛을 받아 더없이 아름다웠다.
     수많은 유저들이 북적이고 있었고, 지나다니면서 날 보며 수군거리는 유저들도 몇 있었다. 궁탑의 제자니 뭐니. 이제는 적응이 되어 그런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캉캉!
     “오, 루카! 안녕?”
     나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광장은 공성전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러고 보니 티아는 아직 접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입 꼬리가 절로 귀에 걸렸다.
     광장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즉시 잡화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벨터!”
     “오, 레드 오랜만이구나.”
     잡화물품을 정리하던 벨터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잡화점 앞 탁자로 다가가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벌터, 혹시 옷 세탁 가능한가요?”
     “세탁? 세탁이야 가능하지. 빨아야 할 옷이 있니?”
     “네. 잠시만요. 아이템 창, 오픈!”
     파밧!
     나는 아이템 창에서 색이 바랜 붉은 망토와 내가 즐겨 입던 검은 옷을 꺼냈다.
     왼쪽 손목에 착용하고 있는 붉은 손목보호대와 이번에 미궁에서 더러워진 조끼도 벗어 탁자 위에 올려두고 붉은 빵모자도 벗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빨래거리가 참 많구나.”
     “네.”
     벨터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벨터가 말했다.
     “자, 잠시만 기다리려무나.”
     옷가지를 젊어지고 잡화점 안으로 들어가는 벨터.
     벨터가 세탁을 하러 들어간 사이, 나는 내리쬐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느새 현실보다 가상현실에 더 익숙했다.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을 본다면 모두 그럴 것이다. 현실보다 가상현실에 더욱 익숙하고, 더욱 편하다.
     잠시 눈을 감고 공상에 빠져 있을 때, 입체 창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나는 즉시 눈을 떴다. 직사각형의 반투명한 입체 창에 새겨진 글귀.
     [아리샤 님께서 친구등록 요청을 하셨습니다(승인/거절).]
     “응? 뭐지? 승인.”
     [아리샤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친구등록을 승인하자마자 아리샤라는 유저가 즉시 대화를 걸어왔다.
     도대체 누구지? 나는 즉시 대하를 승인했다.
     -현성아. 나야 미예.
     “아, 미예구나. 안녕.”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같은 게임하니까, 친구등록이라도 했으면 해서, 에구. 나는 사냥하러 가봐야겠다. 대화 끊을게. 심심하면 연락해!
     “그, 그래.”
     [아리샤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갑작스런 친구등록 신청에 놀란 나는 메신저 창을 닫았다.
     그때 세탁을 끝냈는지, 새 옷처럼 변한 옷가지들을 짊어지고 나온 벨터가 탁자 위에 한 장씩 차곡차곡 갠 뒤 올려놓았다..
     "자, 요금은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고마워요, 벨터.”
     “뭘, 이런 것 가지고 자, 루카 이리 오거라.”
     벨터가 큼지막한 소시지 하나를 꺼내들고 루카와 눈높이를 맞췄다. 루카의 까만 눈망울이 큼지막한 소시지로 향했고 루카는 이내 꼬리를 흔들며 벨터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벨터가 주는 소시지를 야금야금 받아먹는 루카를 보던 나는 벨터가 정성들여 갠 옷들을 아이템 창에 넣어두었다. 아차, 옷 좀 갈아입어야겠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잡화점 안으로 들어와 티아에게 선물 받은 옷을 벗고 즐겨 입던 검은 옷을 아이템 창에서 꺼내 입기 시작했다.
     옷을 다 입은 후 마지막으로 무릎에 은빛 광택 나는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검은 부츠를 신은 뒤 빨간 망토를 둘렀다. 그리고 허리춤에 화살통을 차고 망토 안쪽으로 활을 둘러멘 뒤 소매를 걷어 올렸다.
     잡화점에서 나온 나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는 벨터를 볼 수 있었다.
     “옷 갈아입고 나온 거니?”
     “네. 움직일 땐 이 복장이 제일 편해요.”
     “하하. 그렇구나.”
     루카는 벌렁 드러누워 벨터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벨터와도 상당히 친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아이템 창에서 로시토에게 받은 붉은 손목 보호대를 꺼내서 왼쪽 손목에 착용했다. 손목에 착 감기는 느낌이 이루 말 할 수 없이 좋다.
     그러고 보니 오늘 리아에게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주고 전투방식을 새롭게 다시 기초부터 다지게 해줘야 하는데…….
     나는 루카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벨터에게 다가가 말했다.
     “벨터,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오늘 급히 할 일이 있어서요.”
     “음, 그래? 그럼 조심히 가거라. 다음에 또 놀러오는 것도 잊지 말고.”
     “네, 안녕히 계세요.”
     나는 벨터에게 공손히 목례를 한 뒤 대장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루카, 이리와!”
                   *    *     *
     [카이루 Lv. 100.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파밧!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한 강찬은 분수대 광장 앞에 도착했다. 그의 은빛 풀레이트 메일이 햇빛을 받아 광택을 내고 있었다.
     ‘이제 2차 전직을 하면 되는구나. 일주일 안에 2차 전직을 하고 2차 스킬에 익숙해져야 해.’
     강찬이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운영자와 약속한 장소에서 만가기 위해서였다.
     직업이 히든 클래스인지라 1차 전직을 할 때도 전직 시험을 보지 않은 강찬이었다. 분수대 광장에서 꽤 멀리 떨어진 인적이 드문 장소에 도착하게 된 강찬이 입을 열었다.
     “혼자 왔습니다.”
     그에 대기가 뒤틀리면서 붉은색과 노란색이 어우러진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운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네요, 카이루 님. 정확시 몇 달만인가요?”
     “글세,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마검사는 이렇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화염의 마검사, 전격의 마검사, 음한의 마검사. 물론 이 모든 것을 마스터한 대마검사라는 직업도 있지요. 어떤 것으로 2차 전직을 하시겠습니까?”
     운영자의 말에 강찬이 피식 웃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대마검사라는 게 모든 스킬을 다 익힌 것이로군.’
     속으로 읊조린 강찬이 망설임 없이 말을 내뱉었다.
     “화염의 대마검사.”
     강찬의 말에 운영자가 흠칫 놀라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화염의 대마검사……?”
     “주로 화염 계열의 보조마법을 구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1차 스킬들도 버릴 수 없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대신 패널티가 좀 있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패널티 따위야.”
     강찬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에 운영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찬의 몸 주위로 새하얀 빛무리가 형성되더니 이내 강찬의 몸을 감싸고돌기 시작했다.
     [클래스가 변경 되었습니다.]
     [2차 전직 완료! 직업명 ‘화염의 대마검사’로 변경됩니다.]
     [플레임 웨폰(Flanme Weapon)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파이어 볼(Fire Ball)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파이어 윌(Fire Wall)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파이어 실드(Fire Shield)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전직 퀘스트는 없는 건가요?”
     “앞으로 일주일 후, 공성전 이벤트가 시작됩니다. 공성전 이벤트 때문에 이것저것 바쁜 관계로 카이루 님의 2차 전직 퀘스트를 생성해니지 못하게 되었지요.”
     획득한 스킬을 보며 강찬이 말하자 운영자가 대답했다.
     “그렇군요.”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에 운영자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스킬에 대해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스킬 창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스킬 창, 오픈.”
     운영자의 말에 강찬이 스킬 창을 열며 대답했다. 강찬이 스킬 창을 연 것을 확인한 운영자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플레임 웨폰. 파이어 웨폰과 같은 불의 속성을 가진…….”
     “플레임 웨폰.”
     파이어 웨폰과는 전혀 다른, 더욱 짙고 새빨간 화염이 마치 오러 블레이드와 같이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1.5미터 가량 되는 불꽃이 아지랑이를 피우며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성격 참 급하시군요. 하하. 자, 파이어 웨폰이 화검기(火劍氣)라고 치면 플레이 웨폰은…….”
     “화검강(火劍剛)이란 말이죠?”
     타오르는 불꽃을 머금은 문 블레이드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강찬이 대답했다. 그에 운영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소드 마스터가 뿜어내는 오러 블레이드와 맞먹는 강도를 지니고 있지요. 명색이 히든 클래스인데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요? 자, 그럼 이제 화염의 오러 블레이드를 거둬주시기 바랍니다.”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킬을 취소하자, 문 블레이드에 맺힌 화염이 순차적으로 사그라졌다. 그와 동시에 화염이 뿜어내던 열기도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이번엔 파이어 볼에 대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자, 일단 파이어 볼을 발동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파이어 볼.”
     강탄이 주저 없이 말했다. 약간의 마나가 감소하는 것을 느끼며 검신에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검신의 끝으로 옮겨져 붉은 구체의 형태를 갖추었다.
     “오호.”
     뜨겁게 타오르는 구체를 보며 강찬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금 검신의 끝에 형성 된 화염구를 날리고 싶은 쪽으로 검을 휘둘러보시기 바랍니다.”
     강찬이 피식 웃으며 뒤로 몇 거음 물러나더니 운영자를 향해 문 블레이드를 휘둘렀고, 타오르는 구체가 기염을 토해내며 운영자를 향해 쏘아졌다. 그에 운영자의 모습이 안개에 가려지듯 퍽 꺼지더니 즉시 강찬의 뒤로 모습을 나타냈다.
     “장난이 심하시군요.”
     그에 강찬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좀 장난이 심한 편입니다. 아,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스킬은 제가 알아볼 테니 운영자님께서 어서 이벤트 준비를 하러 가보세요.”
     “저는 2차 스킬을 설명해 드려야 하는 임무를…….”
     “파이어 윌.”
     강찬이 파이어 윌을 시전하자 타워실드 크기의 볼의 벽이 형성되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시전하는 파이어 윌보단 작은 크기였다.
     “후우. 알겠습니다. 어려운 사항이 있다거나 막히는 분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운영자는 몇 마디를 남긴 채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파이어 윌을 해제한 강찬은 문 블레이들 이리저리 휘두르더니 이내 두 손으로 검자루를 움켜쥐고 외쳤다.
     “파이어 실드!”
     화르륵!
     순간 문 블레이드를 중심으로 구체의 거대한 화염이 형성되어 강찬을 둘러쌌다. 전투 시에 사용한다면 거의 완벽한 철벽방어가 될 수 있는 듯한 스킬이었지만 게임에서 밸런스라는 것이 존재한다. 운영자가 말한 패널티 같은 것이 그래서 존재하는 것.
     그것은 바로 쓸 만한 스킬인 만큼 마나 소모가 극심하다는 것. 스킬을 시전하고 있는 동안 상당량의 마나가 지속적으로 감속되는 것을 느낀 강찬이 즉시 파이어 실드를 거두었다.
     “쓸 만한데 마나감소가 너무 극심하군. 그대로 만족스럽다. 앞으로 일주일 내로 이 스킬을 전부 익숙하게 쓸 수 있도록 해야겠군.”
                   *    *     *
     대장간에 도착한 나는 화살촉을 만들고 있는 아세른을 볼 수 있었다. 세세한 부분까지 정성들여 만들고 있는 터라 말을 걸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집중하고 있느라 내가 온 걸 눈치 챈 줄 모를 줄 알고 있었을 때 아세른이 말했다.
     “레드, 무슨 일인가?”
     “아, 안녕하세요. 아세른, 무기 제작하러 왔어요.”
     “음. 네 실력이라면 구입하는 것보다 직접 만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그래, 무슨 무기를 만들려고 하나?”
     아세른이 화살촉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말했다. 그에 나는 대장간 안으로 발을 들이며 대답했다.
     “크로스 보우요.”
     “크로스 보우? 이제 활은 질린 건가?”
     “그건 아니고요. 무기 제작을 부탁한 사람이 있어서요.”
     “그런가? 크로스 보우 제작은 꽤나 복잡할 텐데…….”
     “괜찮아요.”
     대답을 마친 나는 철광석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을 발견하고 철광석 몇 개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불순물이 많으면 제아무리 철제 크로스 보우라고 해도 쉽게 손상되기 마련이었다. 이전에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제작할 때 아리스 노아에서 구입했던 철광석은 불순물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기 때문에 이처럼 단단하고 내구력도 강했다.
     아세른이 취급하는 철광석도 아리스 노아에서 구입했던 철광석 못지않게 불순물이 거의 함유되어 있지 않았다. 역시 아세른이야.
     감탄을 하고 있을 때 화살촉 제작을 끝낸 아세른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레드. 자네 무투가 친구가 저번에 스몰 스피어와 흡사한 화살을 맡기고 갔다네. 똑같은 모양 그대로 100여개를 만들었다네.”
     “정말요?”
     아세른의 말에 나는 들고 있던 철광석을 도로 내려놓은 뒤 아세르에게 다가갔다. 아세른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장간 안쪽 무기점으로 들어가 아이언 레드 롱 보우 전용 화살이 들어있는 화살통을 내게 건내주며 말했다.
     “호오. 등에 둘러멘 활로 이런 무식한 화살을 쏘는 게로군. 레드 롱 보우는 어떻게 됐나?”
     아세른의 말에 나는 씁쓸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레드 롱 보우라면… 부러졌습니다.”
     “그렇군.”
     아세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물 제 1호였던 레드 롱 보우. 왠지. 왠지 그리워진다. 하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저어 상념을 날려버린 뒤 철광석을 되는대로 집어 들었다.
     힘 스탯에 스탯 포인트를 투자하지 않은 리아가 들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작지만 견고하게 만들어야 했다.
     흐음. 이거 골치 꽤나 썩겠는 걸? 그 즉시 나는 철광석을 철괴로 제련하기 시작했다.
     까앙 까앙!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철은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현재 리아에게 만들어주려는 크로스 보우는 최대 아홉 발까지 연사가 가능한 크로스 보우 건(Cross Bow Gun)이었다.
     피스톨 형식으로 방아쇠를 당기면 탄창이 회전하며 볼트가 발사되는 식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아세른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제작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 정도로 손을 많이 써야 하고 머리 또한 많이 굴려하는 작업이었다.
     리아… 나중에 밥값 못하기만 해봐라.
     그렇게 월드타임으로 해가 기웃기웃 질 시간이 되었다. 기존의 스몰 크로스 보우보다 약간 더 작은 크기의 아이언 크로스 보우 건. 이 정도 크기라면 아무리 무거운 철로 제작된 크로스 보우 건이라 해도 움직일 때 지장이 없을 것이다.
     나는 볼트를 장착하지 않은 채 방아쇠를 당겨보았다.
     철컥. 철컥.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탄창이 회전하는 것을 보니 제대로 조립이 된 것 같았다. 약간 뻑뻑한 감이 있으니 조금 더 부드럽게 해야겠군. 손가락에 무리가 가지 않게 말이야.
     “후우. 도대체 누구에게 줄 아이템이기에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면서 만드는 건가?”
     아세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크로스 보우 건의 탄창을 탈착시킨 뒤 기름칠을 해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고 다시 크로스 오우 건에 탄창을 장착했다.
     탄창에 쉽고 빠르게 볼트를 넣을 수 있도록 제작했으니 사용하는데 불편함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탄창에 볼트 아홉 개를 넣은 뒤 무기점 안 쪽 벽에 부착된 과녁을 겨냥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푸슉.
     쉬잉!
     파악!
     조준점을 정확히 만들었기 때문에 잘만 겨냥한다면 백발백중일 것이다.
     “후우. 드디어 완성이군.”
     다행히도 볼트 제작은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스몰 크로스 보우에 사용하는 볼트가 아이언 크로스 보우 건으로 쓰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아세른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대장간에서 나와 수도 세인트 모닝에 도착한 나는 아이쳄 창에 아이언 크로스 보우 건과 볼트가 담긴 화살통 서너 개를 넣어두었다.
     어느덧 밤이 된 세릴리아 월드.
     검푸른 창공 위에 붉고 푸른 둥근 달 두 개가 밤하늘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원래 이시각이면 사냥을 간다거나 원래 없어야 할 유저들도 분수대 광장에 모여 공성전 이벤트 준비로 떠들썩했다.
     루카와 함께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유저들 사이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운영자 GM카린 님께서 대화릉 요청하셨습니다(예/아니오).]
     ‘허억? 운영자? 난데없이 운영자가 왜 대화를 요청하는 거지?’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마른침을 삼키며 대화 요청을 승낙하자 운연자 GM카린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세릴리아 월드 운영자 GM카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레드 파운 회원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예? 무슨 부탁이요?”
     휴우. 난 또 내가 무슨 잘못을 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레드 파운 회원님께서 현실시간으로 어제 오후 9시경에 PK 세 명을 제압하던 일을 동영상으로 촬영을 했습니다. 몰래 촬영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예? 아니 뭐 그런 걸 가지고…….”
     GM 카린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공성전 이벤트가 끝나면 궁수라는 직업을 널리 홍보하려고 하는데, 이 자료를 사용해도 되는지 의사를 묻기 위해 이렇게 직접 대화를 걸었습니다.
     흐음. 자료라면 나를 촬영한 것을 말하는 것이군.
     “저… 이런 질문해도 될까 모르겠네요…….”
     -편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무슨 이유로 궁수라는 직업을 홍보하려는 건가요?”
     그에 GM카린이 구체적으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현재 세릴리아 대륙에 소드 마스터와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가 등장한 뒤로부터 궁수를 꺼려하는 유저들이 많아져서 말이지요. 솔직히 말해 궁수라는 직업이 근접전에 취약할뿐더러 PVP를 하게 될 경우 3차 전직을 하기 전까지 마나를 다루는 유저들에게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뭐 레드 파운 회원님은 그 범주에서 벗어났지만요. 그래서 궁수가 약한 직업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함이랄까요.
     운영자의 말을 들은 나는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흐음.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기간은 회원님 자유입니다.
     “네. 그럼 생각해보고 그때 가서 결정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 되시고,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운영자 GM카린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후우. 또 복잡한 일이 하나 생겼군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싸우던 모습을 광고한다는 대에 벼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광고를 하게 되면 또다시 많은 유저들이 손가락질하며 수군댈 것 뻔했기 때문이었다.
     뭐 나쁜 뜻으로 그러는 건 아니겠지만, 내성적인 나에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리아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걸까? 얼른 무기를 전해주고 공성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금과는 달리 자신의 몸 정도는 보호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나는 고개를 돌렸고 목소리의 주인에게 시선이 닿자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티아!”
     얼른 달려와 안기는 티아.
     얘가 오늘 왜 이러지? 뭐 싫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이러면…….
     “오늘은 뭐 할 거야?”
     에멜랄드를 박은 듯한 초록색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티아의 두 눈동자는 마치 잔잔한 호수와도 같았다 그에 나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 글쎄 뭐할까?”
     광장에서 몇몇 유저들의 시선이 나를 찌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수도 세인트 모닝에 난데없이 나타난 어여쁜 엘프 유저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 그녀가 끌어안고 있는 나를 본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내 속내를 알아챘는지 티아가 내 목에 감고 있던 팔을 풀며 팔짱을 끼었다.
     뭐 아까보단 낫지만 시선이 부담스럽군.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내성적인 나로썬 이런 시선이 정말 부담스럽다.
     그렇게 티아와 광장 주변을 천천히 걷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나타나는 혁을 볼 수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녀석은 귀에 입이 걸릴 정도로 씩 웃고 있었다.
     “레드! 티아 씨!”
     “루샤크!”
     나는 혁에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금세 이쪽으로 다가온 혁이 말했다.
     “크크크. 아 접속해서 아이템 창을 열어봤는데, 어제 미궁에서 얻은 아이템이 정말 맘에 든단 말이야.”
     실실 웃으며 아이템 창에서 거대한 망치를 꺼내는 혁을 보던 절로 내 시선이 타아의 목 근처로 내려갔다. 내가 걸어준 사파이어 펜던트가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고,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시선을 혁에게 던졌다.
     “이 망치 옵션 좀 봐.”
     나는 혁이 건네주는 거대한 망치를 한손으로 받아들었다. 힘 스탯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배틀 해머(오리지널)]
     내요: 중병기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배틀 해머이다. 굵직하고 긴 막대 위엔 불순물이 전혀 함유 되지 않은 강철로 만들어진 마치가 달려있다. 맞으면 무지 아플 것 같다.
     파괴력이 대단한 만큼 무겁고 다루기 힘든 둔기.
     최소 공격력 180증가
     최대 공격력 600증가
     내구력 100/100
     “최대 공격력이 압권인데? 600 증가라…….”
     나는 배틀 해머를 혁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배틀 해머를 받아든 혁이 모닝스타를 아이템 창에 조심스레 넣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모닝스타는 아이템 창에 고이 모셔두고 앞으론 이 배틀 해머를 쓸 작정이다.”
     “아, 그건 그렇고 티아, 루샤크. 너희 둘 공성전 이벤트에 참가할 거지?”
     “당연한 거 아니냐?”
     “응 참가할 거야.”
     혁과 티아가 대답했다.
     예상대로 둘 다 참가하는군. 나는 다시 말했다.
     “나는 수성을 택했는데 너희는?”
     “오빠가 수성이면 나도 수성을 할래. 공성 성공 시에 지급되는 아이템이랑 수성 성공 시에 지급되는 아이템이랑 별반 다를게 없었거든.”
     “음. 나는 뭐 너희들 하는 쪽으로 하련다. 공성이든 수성이든, 난 즐기기만 하면 돼.”
     혁이 대답을 들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른 애들은?”
     “카이루는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했고, 데시카 녀석은 접속을 안 해서 모르겠다.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야, 공성 쪽으로 하자. 마음에 안 드는 NPC도 죽일 겸.”
     “그럴까? 수도 세인트 모닝에 박살내고 싶은 곳이 한둘이 아니야.”
     고레벨은 아니지만 중레벨 정도 되어 보이는 유저 둘이 시끄럽게 떠들며 우리 곁을 지나갔다.
     마음에 안 드는 NPC도 죽일 겸이라… 꽤나 잔인한 녀석들이군. 쯧쯧.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데 하필 시선이 향한 곳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 강찬이었다. 정말 우연도 이런 우연은 없을 것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강찬이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여어~ 카이루!”
     “안녕하세요!”
     “안녀, 레드. 안녕하세요, 티아 씨.”
     강찬이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티아에겐 간단한 목례를 했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은 공성과 수성 중 뭘 하려나?
     “카이루, 넌 공성 수성 중 뭐 할 거야?”
     “글세, 아직 정해놓질 않아서 말이지. 공성이나 수성이나 보상으로 지급되는 아이템이랑 경험치는 비슷비슷하던 걸? 그런데 광장으로 걸어오면서 대충 유저들이 하는 이야길 들어보니 거의 공성 쪽을 택할 것 같더라.”
     “그래?”
     강찬이 차근차근 대답했다. 대부분이 공성이라…….
     잠시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강찬이 내게 말했다.
     “레드, 넌 공성이야, 아님 수성이야?”
     “나는 수성이지. 수도 세인트 모닝이 망가지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서.”
     “그렇군. 특히나 궁수의 탑이나 잡화점, 대장간은 더더욱 그렇겠네?”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강찬과 이야기를 하는 사이, 세릴리아 월드에도 서서히 동이트기 시작했다. NPC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상점의 문을 열기 시작했고 유저들도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헛? 저, 저 사람이 세인트 모닝에는 어쩐 일이지?”
     광장에 모여드는 유저들 중 새카만 복면을 쓴, 어쌔신 풍의 옷을 입은 유저 본 강찬이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말했다. 도대체 누구기에……?
     “뭐야, 누군데?”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강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티르 네티아에서도 이름 좀 날리는 ‘자객단’이라는 길드의 길드 마스터인데, 특이한 건 그 길드의 구성원들이 전부 어쌔신이라는 점이지. 개개인은 약한데, 무리지어 협공을 하면 꽤나 골치 아프지. 어찌할 방법이 없어. ‘클라우드’라고 지금은 해체되고 없는 길드인데, 저 길드에 의해 없어졌다고 하던데? 척살령을 내렸었나와.”
     흐음. 그렇게 대단한 길드인가? 아마도 공성전 때문에 온 것 같군. 나는 적안을 개안했다. 강찬이 말한 유저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유저에게 집중하자, 시야가 확보되어 마치 망원경을 멀리 있는 사물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자객단 길드 마스터를 볼 수 있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눈빛 하나는 지금껏 봐왔던 유저들과는 달랐다. 순간 나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화들짝 놀라 적안을 해제하고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에 던졌다.
     “오빠, 왜 그래?”
     “응?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잔뜩 굳은 채 시선을 다른 곳에 던진 나를 보며 묻는 티아에게 짧게 대답한 나는 허리춤의 화살 깃을 매만지고 있었다.
     후우, 다행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강찬은 2차 전직을 했으려나?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어 물었다.
    “카이루, 2차 전직은 한 거야?”
     “방금 전에. 그건 그렇고 너희들 앞으로 일주일 동안 뭐 할거냐?”
     짭게 대답을 한 뒤 되묻는 강찬. 앞으로 일주일 동안이라… 나는 우선 며칠 동안 리아에게 효율적인 전투방법을 알려주고 생활직에 다시 손을 댈 생각이었다.
     “나는 이 배를 해머를 손에 좀 익혀야겠어. 우선 저레벨의 몬스터나 야생동물들에게 시험해봐야지.”
     “그렇군. 레드 너는?”
     “나야 뭐. 그냥 잡화무품이나 만들까 생각중이야.”
     “그래? 공성전 준비는 안 하는 거야? 일주일간이라도 더 강해져야지.”
     “흐음…….”
     강찬의 말을 들으니 갈등되는군. 나는 고개를 돌려 티아게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티아, 넌 뭐할 거야?”
     “나는 오빠가 하자는 거 할 거야.”
     티아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아까 의견 그대로야.”
     “그래? 역시. 넌 특이한 녀석이야. 푸하하.”
     강찬이 웃으며 말했다.
     이후 혁은 배틀 해머를 손에 익히겠다며 수도 세인트 모닝 밖으로 나갔고, 강찬도 새로운 스킬에 적응을 해야 한다며 워프 스크롤을 찢어 어딘가로 사라졌다.
                   *    *     *
     공성전 이벤트의 영향인가?
     세인트 모닝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엘프 유저들이 하나 둘씩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이한 모양의 나무 활을 든 유저. 정령술사 유저 그리고 몇 안 되는 마법사 유저 등 엘프 유저들이 광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초보자들은 매우 신기하다는 듯 엘프 유저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리아가 접속해 이쪽으로 헐레벌떡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리아 씨군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리아가 인사를 했고, 나와 티아도 답례를 해주었다.
     아차, 무기를 줘야겠군.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아이언 크로스 보우 건을 꺼내 리아에게 건네주었다.
     “부탁하신 무기입니다. 연사가 가능한 보우 건이에요.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거예요.”
     “아, 아. 감사합니다. 크기도 적당하네요. 별로 무겁지도 않고.”
     리아가 아이언 크로스 보우 건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등에 둘러메고 있던 크로스 보우를 아이템 창에 넣은 리아. 나는 아이템 창에서 볼트가 담긴 화살통을 꺼내 리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스몰 크로스 보우에 쓰이는 볼트를 쓰면 되는 거예요. 아세른과 제가 심혈을 기울인 합작입니다. 탄창이 보이시죠? 거기에 볼트를 한 발씩 넣고 쏘면 되는 거예요. 두어 발 남겨두고 다시 볼트를 충전해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에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화살통을 허리춤에 찼다.
     “정말 마음에 드는 무기네요. 얼마죠?”
     “에? 괜찮습니다. 돈이라면 안 주셔도 돼요.”
     “에…그래도…….”
     “자, 이럴 시간에 어서 빨리 무기를 손에 익혀야죠? 자, 자. 갑시다. 가자, 티아.”
     그래서 오게 된 이곳은 수도 세인트 모닝의 밖.
     우리는 먼저 붉은 여우들의 소굴로 오게 되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구먼.”
     나는 붉은 여우들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첫 무기인 레드 롱 보우를 들고 지금은 많이 자랐지만 작은 루카와 함께 붉은 여우를 사냥하던 때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여우는 유저가 눈에 보이면 바로 공격을 해오는 선공 몹이어서 그런지 우리가 자신들의 영역에 발을 들이자 무턱대고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수라도 개미는 사람을 이길 수 없는 법. 뭐 사람은 아니지만 루카가 재빨리 몸을 날려 우리에게 접근하는 붉은 여우들을 물어죽이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공격을 해오던 붉은 여우들의 루카의 가세에 눌려 섣불리 접근을 하지 못하게 되자 리아가 크로스 보우 건을 들고 붉은 여우를 겨냥했다.
     그녀가 조준점을 보며 방아쇠를 당기자 볼트가 대기를 가르며 붉은 여우에게 박혔다. 강력한 데미지 때문인지, 볼트가 여우에게 박힘과 동시에 여우는 저만치 날아갔다.
     리아는 다시 한 발을 쏘았고, 볼트는 또다시 붉은 여우에게 적중했다.
     “우와, 기존의 크로스 보우보다 정확도가 훨씬 더 높네요.”
     빠른 적응력이군. 벌써부터 쏘면 백발백중이라니. 하긴, 조준점만 정확히 잡으면 백발백중이니까.
     우리가 다시 장소를 옮긴 곳은 고블린 무리가 출현하는 수풀이 무성한 숲이었다.
     그제야 문득 티아가 지루해하진 않을까 싶어진 나는 고개를 돌려 티아를 보았다. 다행이 별로 지루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내가 만들었다는 무기에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는 것 같았다.
     “레드, 아무래도 전투 방법은 제가 알아서 개선해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뭔가 잘못 되었다거나 군더더기 같은게 보이면 지적해주세요.”
     “괜찮겠어요?”
     “네, 우선 무기부터 손에 익혀야겠어요.”
     “하하. 네.”
     “그럼 무기 잘 쓰겠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리아가 고블린 무리가 있는 수풀로 몸을 던지며 말했다 흐음. 뭔가 허무한 감이 있군.
     나는 티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갈까?”
     “응!”
     나는 티아와 함께 다시 수도 세인트 모닝으로 돌아와 공터로 향했다.
                   *    *     *
     수도 세인트 모닝. 궁수의 탑.
     궁수의 탑 옆에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커다란 활과 커다란 크로스 보우를 등에 둘러멘 유저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등에 활을 둘러 멘 유는 붉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잘생긴 미남형의 유저였고, 왼쪽 어깨 위엔 보기 드문 붉은 깃털을 가진 매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매의 부리 근처에 유저가 손가락을 가져가자 매가 눈을 질근 감은 뒤 부리로 손가락을 살짝살짝 깨물기 시작했다.
     커다란 크로스 보우를 등에 둘러 멘,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고 긴 생머리와 연한 초록색 눈동자, 오뚝한 코와 앵두 같은 입술에 우윳빛피부를 가진 여성 유저가 생긋 웃으며 바라보다가 자신의 어깨 위에 앉아있는 붉은 매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사형은 이번 공성전 때 공성과 수성 중 어디를 택할 생각이야?”
     “나는 스승님의 말씀대로 수성을 택할 생각이야. 사제는?”
     활을 등에 둘러멘 유저의 말에 어여쁜 여성 유저가 대답과 함께 되물었다.
     “스승님이 뭐라던 나는 공성을 할 생각이야. 아무래도 공성쪽에 유저들이 많이 모일 것 같거든.”
     “훗. 여전히 고집이 세구나, 라벤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할 뿐이야. 설마 내가 궁수의 탑까지 파괴하려 든단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다섯째 사형.”
     라벤더의 말에 로화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물론 아니지.”
     그에 라벤더는 피식 웃으며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건 그렇고, 다른 사형들은 참가하려나?”
     “글세, 다른 사형들은 이미 신대륙으로 넘어가서 사냥하느라 바쁠 텐데. 궁탑의 제자 중에 공성전 이벤트에 참가하는 사람은 다섯째 사형이랑 나뿐일 것 같아.”
     “막내 사제도 참가하려나?”
     “분명 하겠지?”
     “막내 사제 말인데…….”
     로화가 말끝을 흐리자 라벤더가 궁금한 듯 되물었다.
     “막내 사제가 왜?”
     “티르 네티아에서 ‘검은 혼돈’길드에서 척살령을 받았다는데.”
     “후우, 검은 혼돈이라면… 얼마 없는 소드 마스터 중 한명을 보유하고 있다는 그 길드?”
     “그래. 길드 마스터의 직업이 관건이지. 히든 클래스 ‘사신’이라고들 하던데.”
     “근데 지금 그 길드의 마스터의 직업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도대체 왜 척살령이…….”
     라벤더가 걱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로화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셋째 사형 일 때문에 한 번 붕괴 위기까지 처했던 길드잖아. 그래서 소드 마스터를 영입한 거고. 뭐 그게 주요한건 아니지만 소문으론 이래. 티르 네티아에서 검은 혼돈 길드원과 막내사제가 시비가 붙어서 대련을 했는데 막내 사제에게 패했고, 궁탑의 제작에게 두 번씩이나 길드 이름을 먹칠 당했으니 척살령이 내려졌다는 소문.”
     “길드이름을 먹칠했고 척살령을 내려?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리고 대전에서 패한 게 먹칠을 당한 건가?”
     라벤더가 미간을 찌푸린 채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전부터 맘에 안 드는 길드였는데, 아무래도 어떻게 손 좀 써 봐야겠어.’
      라벤더는 주먹을 움켜쥐며 속으로 되뇌었다.
     “에휴, 공성전 이벤트 때문에 당분간 그 길드도 날뛰진 못 할거야. 요 몇 주간 운영자들이 접속해 있을 테니까.”
     “그럼 다행이지. 나는 그럼 분수대 광장에 가봐야겠어, 사형.”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던  라벤더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또 사고나 치지 마.”
     로화의 말을 마지막으로 라벤더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등을 돌려 분수대 광장으로 향했다.
                   *    *     *
     평소엔 텅 비어 있었을 공터도 많은 유저들로 북적였다.
     “와아… 다들 티르 네티아에서 왔나봐.”
     “그러게. 공성전까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벌써 모이는 건가?”
     티아가 감탄하며 말했고, 그에 나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똑같은 복장을 한 다수의 유저가 있는가 하면, 등에 거대한 베틀 엑스를 메고 있는 유저가 있었고, 철퇴 비슷한 무기를 가진 장한의 사나이도 있었다.
     별 희한한 무기가 다 있군. 나는 특이한 모양새를 가진 무기들을 흥미롭게 둘러보았다.
     ‘아, 조금 더 불러보다가 잡화점으로 가야겠어.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까지 생활직을 더 연습하고 싶으니까.’
     나는 빙긋 웃으며 티아와 함께 분수대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 많은 유저가 북적였다.
     “와아, 아리스 노아에서 온 유저들도 많다.”
     티아가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분수대 광장을 지나 잡화점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레드 파운.”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 나는 낯선 음성이 들려온 쪽으로 반사적으로 고래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궁탑의 여섯 번째 제작이자 나의 여섯째 사형인 ‘라벤더’였다.
     한 손에는 기다란 롱 보우가 쥐어져 있었고 그의 어깨에는 붉은 깃털을 가진 전설의 매가 앉아 있었다. 전과는 달리 환하게 웃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군. 막내 사제.”
     “예, 오랜만이네요.”
     “누구야?”
     나도 라벨더를 마주보면 빙긋 웃어주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티아가 물어왔고, 나는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궁탑의 제자야. 여섯 번째 사형인 ‘라벤더’라고해.”
     “아~”
     티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에 라벤더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막내 사제. 이번 오픈 3주년 기념 이벤트 공성전에 참가할 생각이야?”
     “네, 물론이죠.”
     전과는 다르게 편한 옆집 형처럼 대하는 라벤더. 정말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해오는 라벤더를 보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저번에 날 밀칠 때와는 딴판이군.’
     “막내 사제라면 역시나 수성이겠지?”
     나는 라벤더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내가 수성을 할 거란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라벤더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어떻게 알았지? 하는 표정이군. 이번에 다섯 째 사형도 공성전에 참가할 거야. 다른 사형들은 지금 신대륙에 있으니 공성전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고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다섯 째 사형도 너와 같은 수성이다. 하지만 난 공성이지. 미리 말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아,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라벤더가 공성이라… 그럼 라벤더와 맞붙어 싸울 확률도 있다는 거군.
     “혹시나 둘이 마주치게 되면 정정당당하게 겨뤄보자. 막내 사제의 실력을 알고 싶어.”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한 번 빙긋 웃어 보이던 라벤더가 등을 돌려 많은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정말 착한 사람인 것 같아.”
     많은 인파 사이로 사라진 라벤더를 보며 티아가 말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좋은 사람이야.”
     잡화점에 다다른 나와 티아를 반겨주는 건 역시 벨터였다.
     “레드! 티아 씨도 같이 왔군요.”
     “안녕하세요. 벨터!”
     “안녕하세요.”
     티아가 허리를 숙여 벨터에게 인사했다. 루카는 꼬리를 흔들며 벨터에게 다가가 앞발을 들어올렸다.
     “오, 루카구나.”
     캉캉!
     앞발을 든 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루카. 앞발을 드니 벨터와 키가 같아졌다. 티아를 의자에 앉히고 탁자 위에 쌓인 잡화물품에 손을 대려고 할 때 벨터가 제동을 걸었다.
     “레드, 이미 정리 된 물건이니 손 안 대도 된단다.”
     “그래요? 오늘은 빨리 끝났나보네요.”
     “그래. 그건 그렇고 레드, ‘가구 제작’이라는 스킬을 알고 있니?”
     “가구…제작이요?”
     벨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구제작이라… 말 그대로 가구를 만드는 건가?
     내가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을 때 루카를 쓰다듬던 벨터가 잡화점 안으로 들어가 스킬 북(Skill Book) 하나를 가져와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 너라면 흥미를 가질 거라고 생각하고, 방랑 상인이 왔을때 구입해 두었다.”
     “아, 감사합니다.”
     나는 벨터에게 건네받은 스킬 북의 겉표지를 내려다보았다. ‘어렵지만은 않은 가구 만들기’라.
     책장을 열자 반투명한 직사각형 모양의 입체 창이 떴고, 입체 창에 뜬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정독하시겠습니까?]
     뭐 일주일간 생활직에 손을 댈 생각이었으니 배워두는 것도 좋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외쳤다.
     “예.”
     파밧!
     [‘가구 제작’스킬을 알게 되었습니다.]
     “좋아!”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스킬 북을 던져 스킬 창을 열었다. 뒤늦게 알아챈 거지만, 스킬 창을 열었을 때 전투 목록과 생활직 목록이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얼른 생활직으로 넘겼다.
     [Skill]
     방직(Weaving)
         Master
     천옷 만들기(Tailoring)
         Master
     잡화물품 제작(Handicraft)
         Master
     생활필수품 제작
         Master
     블랙스미스(Blacksmith)
         Master
     악기 연주(Playing Instrument)
         (78.49/300.00%)
     가구 제작(Furniture production)
         (0.00/300.00%)
     “와아…….”
     생활직 스킬 창을 본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련치가 300%나 되는 것을 몽땅 마스터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수련치가 300%나 되는구.
     그렇게 한참을 스킬 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 언제 가지고 나왔는지 벨터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와 탁자 옆에 두었다.
     “자, 이게 서랍이 두 개 달린 기본적인 작은 옷장을 만들 재료다. 서랍에 문양을 새겨 넣는다거나 옷장의 손잡이를 색다르게 만든다던가, 네 자유다.”
     “우와!”
     벨터의 말에 나는 즉시 스킬 창을 닫고 벨터가 가지고 나온 상자로 걸어갔다.
     흐흐. 기본적인 서랍이 두 개 달린 옷장이라. 이것도 내 취향대로 만들어야겠는 걸?
     상자 안에서 굵직한 나무판자를 꺼내든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티아에게 던졌다. 탁자에서 팔을 괴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생긋 웃는 티아.
     나도 그녀에게 씨익 마주 웃어주며 다시 시선을 옷장 재료에 두었다.
     벨터가 건네 준 톱과 망치, 줄자, 그리고 못과 설계도(?). 나는 설계도에 적힌 대로 줄자로 길이를 잰 뒤 톱을 꺼내 조심스레 나무판자를 잘라가기 시작했다.
     “레드, 그곳에선 너무 힘을 주면 안 되고 힘을 빼고 여러 번 갈라줘야 한단다. 그 부분은 약해서 손상되기 쉽거든.”
     “아, 그래요? 그럼…….”
     벨터의 지적을 받으며 나는 나무판자를 잘라나가기 시작했다.
     정확히 정사각형 모양으로 잘라진 나무판자. 나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잘려진 나무판자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잘라내고 남은 나무판자의 멀쩡한 부분에 다시 톱질을 하기 시작했다. 후우, 톱질이라니. 이거 정말 어려운데?
     “그러고 보니 레드, 톱질은 처음해보는 거지?”
     “후우. 네.”
     나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팔로 훔치며 대답했다.
     같은 방식으로 다섯 개의 정사각형 모양의 나무판자가 생겼고, 나는 그것들을 정육면체 모양으로 포개어 못질을 하기 시작했다. 뭐 위쪽이 뻥 뚫려있어 정육면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서랍 하나를 더 만든 나는 서랍을 열고 닫을 때 필요한 손잡이를 만들기 위해 상자에서 나무토막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 크게 만들 게 아니니까 나무토막 하나면 충분하겠지.
     나는 아이템 창에서 손잡이 끝부분에 붉은 구슬이 밝힌 단검을 꺼내들곤 나무토막을 깎기 시작했다.
     금세 오나성된 별 모양의 손잡이와 토끼얼굴을 연상시키는 모양의 손잡이.
     서랍에 손잡이를 부착시킨 나는 이제 서랍을 끼워 넣을 수 있는 옷장을 제작하기 위해 상자에서 다른 나무판자를 꺼내들었다.
     후우, 등에 둘러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허리춤에 단 화살통을 아이템 창에 조심스레 넣고 꺼내든 나무판자를 설계도에 적힌 데로 톱질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완성 된 작은 옷장이 탁자 앞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아기자기한 것이 아기들 옷을 보관하는 작은 서랍장 같았다. 완성된 작은 옷장을 본 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와아, 귀엽다!”
     쪼그리고 앉아 서랍의 손잡이를 당겨보는 티아를 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잘 만든 건가? 내가 빙글빙글 웃으며 벨터를 쳐다보자 그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처음이라 치면 잘 만들었구나. 역시 생활직에 기초가 잡혀 있어서 그런지 척척 잘 해내는 구나. 정말 잘 만들었다, 레드.”
     “헤헤, 고마워요.”
     벨터의 칭찬을 들은 나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작은 옷장을 하나 더 만들고 잡화점에서 벨터, 티아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갔고, 세릴리아 월드에도 해가 지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노을이 하늘을 물들였고, 또다시 금세 하늘은 검푸르게 변했다. 시간 참 빨리 가는군. 나는 피곤해 보이는 벨터를 보며 말했다.
     “벨터, 피곤하죠?”
     “조금 피곤하구나.”
     벨터가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나와 티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터가 쉬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후우, 나도 슬슬 로그아웃 하고 좀 쉬어야겠군.
     “벨터, 그럼 우리 가볼게요.” “그래, 잘 가고 언제든지 오너라. 티아 씨도 또 놀려오세요.”
     “네, 편히 쉬세요.”
     벨터가 빙긋 웃어 보이며 잡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벨터가 잡화점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티아에게 시선을 두었다.
     “티아 나도 이만 가봐야겠다.”
     “가려구?”
     “응.”
     “잠깐만.”
     그렇게 말한 티아가 다가오니 말없이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내게 안겼다.
     이럴 땐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안절부절 못하던 끝에 조심스레 팔을 들어 티아를 안아주었다.
     이렇게 부둥켜안고 몇 분이 지났을까. 내 허리를 감싸 안았던 티아가 팔을 풀었고 나도 티아를 감싸 안았던 팔을 풀었다. 티아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헤헤. 이제 가도 돼.”
     “응? 아, 응.”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티아가 생긋 웃어보였다.
     “오빠 나가면 나도 바로 로그아웃할래. 먼저 나가.”
     “으, 응. 그래. 먼저 그럼 가볼게.”
     티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로그아웃을 외쳤다.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파밧!
     푸쉬쉬.
     위잉.
     철컥.
     헤드셋 전원이 꺼지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나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헤드셋을 벗고 게임베드에서 일어난 나는 제일 먼저 컴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주인님, 밖같에 나가서 운동이라도 좀 하시는 게……」
     “앞으로 일주일간은 안 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걱정마, 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최경훈 님으로 부터 온 메시지 1건 있습니다.」
     “그래? 읽어줘.”
     「일반 메시지 첫 번째. “현성아, 나, 경훈이. 아무래도 난 숙제 때문에 못 들어 갈 것 같다. 혁이 녀석은 숙제거리 가지고 온다더니 게임하나보네. 정말 대책 없는 녀석이야. 그럼 게임 재밌게 해라. 답장 꼭 주고.” 이상입니다.」
     혁이 녀석. 아까 숙제거리 가지고 경훈이네 간다더니 결국엔 안 갔나보군. 대책 없는 녀석.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컴, 답장 좀 작성해줘. ‘혁이 녀석이 원래 대책이 없잖아. 그건 그렇고, 이번에 오픈 3주년 기념이벤트 공성전 있지? 모두들 수성 쪽을 택했는데, 너도 웬만하면 수성을 해. 그럼 숙제 열심히 해라.’라고.”
     「메시지 작성 완료. 전송 중입니다.」
     “참 빠르구나.”
     「전송이 완료 되었습니다.」
     “그래 좋았어. 근데 지금 몇 시야?”
     「오후 8시 30분입니다.」
     벌서 오후 8시 30분이라니. 게임도 별로 한 것 같지 않았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간 것 같다.
     오늘은 별로 한 것도 없는 피곤하군.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오늘따라 유난히 포근하다는 걸 느끼며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제10장   공성전의 시작과 허무한 결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늦장을 부려서 아침을 걸렀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냉장고에서 인스턴트식품을 아무거나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린 뒤 허겁지겁 먹어치운 나는 그제야 부른 배를 두드리며 한숨을 돌렸다.
     거실로 나온 나는 컴에서 멀티비전을 켜달라고 부탁하고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앉았다.
     오늘이 바로 2234년 6월 20일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릴리아 월드 공성전이 시작하는 날이다
     가구 제작 스킬에 푹 빠져 지내는 동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간 것이었다.
     물론 가구 제작 스킬의 수련치도 꽤나 많이 올랐다. 300%중 100%를 일주일 만에 채웠으니 생활직을 하는 유저라면 화들짝 놀라겠지?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공성전 이벤트가 언제 시작하는지가 관건이었다. 멀티비전으로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에 접속한 나는 공성전 이벤트를 검색했다.
     오후 12시에 시작하는군.
     이벤트 오픈 시간을 확인한 나는 즉시 컴에게 멀티비전을 꺼달라고 부탁한 뒤 내 방으로 들어와 캡슐의 문을 열고 게임베드에 누운 뒤 헤드셋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레드 파운 Lv. 59.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웅성웅성.
     수도 세인트 모닝의 분수대 광장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수많은 유저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한 시간 후, 시작되는 공성전 때문일 것이었다.
     먼저 접속해 있었는지, 분수대 근처에 강찬과 혁, 경훈과 티아아, 그리고 리아가 서 있었다.
     “어라? 모두들 벌써 접속해 있었어?”
     “네가 제일 늦게 온 거야, 이놈아.”
     혁이 배틀 해머를 어깨에 들쳐 메고 버럭 소리를 쳤다. 모닝스타를 들쳐 메고 있을 때완 달리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는 혁이었다.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화살통을 꺼내 화살통은 허리춤에 차고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건 뒤 왼손에 쥐었다.
     지난 일주일간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공성전이 드디어 시작한 다니. 나는 기대에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분수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온 루카가 유심히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꼬리를 흔들며 티아에게 다가갔다. 티아는 허리를 숙여 루카와 눈높이를 맞춘 뒤 다정하게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레드, 그동안 잘 지냈나요?”
     “네, 잘 지냈지요. 리아 씨는요?”
     “저도 잘 지냈어요. 이제 이 크로스 보우 건도 손에 익숙해졌는걸요! 헤헤.”
     손에 쥔 크로스 보우 건을 들어 올리며 리아가 소리쳤다.
     지난 일주일을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아의 모습이 일주일 전과는 달라진 것을 느꼈다.
     겉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일주일 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뭐 새로운 전투 방법을 개선하기라도 한 건가?
     “생각보다 유저들이 꽤 많군. 절반 정도가 공성이려나?”
     허리춤에 찬 문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쓰다듬던 강찬이 주변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수성에 성공할 수 있으려나…….”
     경훈이 팔짱을 낀 채 주변을 둘러보며 조금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에이,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면 어떡해. 잘될 거야.”
     나는 그런 경훈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대꾸했다. 그러자 경훈이 제법 풀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공성 쪽에 골치 아픈 녀석들이 좀 있어. 특히 제일 골치 아픈 녀석들로 구성된 ‘자객단’이란 길드가 공성에 있다는 게 관건이지.”
     “후우. 그런 녀석들을 적으로 돌려 상대해야 한다니. 앞이 훤하다.”
     경훈의 말에 혁이 혀를 내두르며 대꾸했다. 도대체 어떤 녀석들이기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어디서 나타난 한줄기의 새하얀 빛이 모두 유저들의 시선을 잡았다.
     도대체 무슨 빛이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새하얀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대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나는 적안을 개안했다. 적안을 개안하고 눈을 가늘게 뜨자 시야가 확보되었고 빛줄기에 둘러싸인 자의 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공성전 이벤트 담당을 맡은 세릴리아 월드 운영자 GM추(秋)입니다.]
     “위족이다!”
     “어디어디!”
     “저기 저쪽!”
     역시나, 소규모 이벤트를 개최했던 운영자 추였다.
     “복장이 꽤나 특이한데?”
     “저 옷 참 멋있다.”
     “저런 옷은 처음 봐!”
     “공성전 때문에 나타난 건가봐!”
     웅성웅성.
     시끌시끌.
     어쩌고저쩌고.
     왱알앵알.
     운영자 추는 웅성거리는 유저들을 말없이 내려 보다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개최하는 이벤트는 저희 세릴리아 월드에서 준비한 오픈 3주년 기념 이벤트 ‘공성전’입니다. 예상대로 많은 유저분들이 참석해주셨군요. 덕분에 이벤트를 준비한 저희로써는 기쁠 따름입니다. 공성전은 정확히 한 시간 뒤에 시작하니,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공성을 택하신 유저는 수도 세인트 모닝의 북문으로 나가주시고, 수성을 택하신 유저는 분수대 광장에 그대로 남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는 한 시간 후에 다시 이곳에 오겠습니다.]
     스슥.
     새하얀 빛줄기와 함께 사라지는 운영자를 마지막으로 공성을 선택한 유저들이 우르르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절반 이상이 나가고 나니 분수대 광장이 텅 빈 느낌이었다. 평소보다 유저가 많은 편이었지만, 공성을 택한 유저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우리도 이제 슬슬 준비하자.”
     “좋아! 공성 쪽 유저들을 묵사발 내자고!”
     경훈이 팔짱을 풀고 두 주먹을 맞부딪치며 힘차게 소리쳤다. 그에 혁이 배틀 해머를 치켜들고 대답했다.
     나도 화살통에 담긴 화살을 점검하고 아이템 창을 열어 화살통 여분이 남았는지 살펴보았다.
     넉넉하게 있군. 다행이었다. 힐러의 집으로 가서 스태미나 포션과 마나 포션을 좀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오빠다! 오빠야! 여기야, 여기!”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마법사 모자와 로브를 걸친 레온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마성의 두 번째 현자. 레온.
     혹시 레온도 수성인가? 레인이 손을 흔들며 분수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성의 두 번째 현자다!”
     “어디?!”
     “저기, 저쪽! 5클래스 마법사래!”
     “히엑, 5클래스?”
     “저쪽엔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도 있는데?”
     유저들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것 참 시선 한번 부담스럽군. 레온이 분수대 앞에 다다르자 리아가 레온에게 헐레벌떡 달려가 안겼다.
     나는 레온에게 물었다.
     “레온도 공성전에 참가하는 거였어요?”
     “하하. 네.”
     “공성이에요, 수성이에요?!”
     “수성입니다. 마법사의 성이 파괴되는 걸 보기 싫거든요.”
     후우, 다행이었다.
     레온과 같은 고 클래스 마법사가 공성을 하게 된다면 분명 상위 클래스 마법으로 건물들을 순식간에 파괴시킬 것이 분명했기에 순간 간담이 서늘했지만 수성을 할 거라는 그의 대답에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가 가벼워졌다.
     모두들 50분 뒤에 이곳에서 만나기로 하고 공성전에 쓰일 포션과 아이템 등을 정비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힐러의 집으로 가서 대용량 스태미나 포션과 소용량 마나 포션을 돈이 되는 대로 가능한 많이 구입했다.
     뭐 그렇다고 전 재산이 바닥날 때까지 돈을 쓴 건 아니었다. 적당히, 필요한 만큼만 산 것.
     50분이란 시간이 물 흐르듯 지나갔고 분수대 앞에 도착한 나와 모두가 이벤트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여태까지 잠자코 있던 레온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이제 조금만 있으면 공성전이 시작되겠군요.”
     레온이 한숨을 내쉬다니. 의외인데? 잠자코 있던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걱정이 되나요?”
     “조금은요. 공성을 하는 유저들의 수가 월등히 많은 것 같으니까요. 뭐 그냥 이벤트이니 그냥 즐기면 되는 건데, 너무 현실과 흡사하다보니 이런 걱정까지 하게 되네요.”
     레온의 말처럼 나도 걱정이 되기는 했다.
     여기 있는 유저들이 무슨 작전을 가지고 싸우는 것도 아닐 테고 공성전이 시작하면 다들 각자 싸우거나, 몇몇 사람만 뭉쳐 싸울 것이 분명했다.
     후우, 진짜 전쟁을 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통솔을 해준다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련의 초조함과 걱정 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뭐 일단 수성을 하는 유저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나와 같은 궁수 유저들은 세인트 모닝 북문의 성벽에 올라섰고 기사 유저들과 같이 근접전투를 하는 유저들은 성문 앞에서 잔뜩 긴장한 채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고 있어었다.
     나도 성벽 위로 올라가봐야 하나?
     성벽 위로 올라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팟!
     빛? 나는 빛줄기가 뿜어진 곳에 시선을 두었다. 내 예상대로 그곳엔 운영자가 서 있었다.
     [세릴리아 월드 운영자 GM추입니다. 생각보다 빨리 한 시간이 지났군요. 잠시 후, 공성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나는 성벽 위로 올라가서 성문이 부서지기 전에 한명이라도 더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얘들아! 아무래도 나는 성벽으로 가봐야겠어! 다른 궁수 유저들처럼 성으로 침투하는 적들을 막아야겠거든!”
     “그럼 저도 같이 가죠.”
     기다란 스태프를 손에 쥔 레온이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리아는 혁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군. 나는 레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티아, 그럼 이따가 보자!”
     “응!”
     “루카, 넌 따라오지 말고 티아 좀 지켜줘!”
     캉캉!
     “갑시다, 레온. 퀵 스텝!”
     “그럽시다. 헤이스트(Haste)!"
     내가 티아와 루카에게 말을 하는 동안 수인을 맺어둔 레온이 헤이스트를 시전했다.
     퀵 스텝과 헤이스트가 동시에 발동되는 순간부터 움직임이 비약적으로 빨라졌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순식간에 성벽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성벽에 선 궁수 유저들이 밑을 내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공성에 유저들이 많았다.
     근거리 공간이동마법으로 순식간에 내 옆으로 이동한 레온이 말했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다수의 병력으로 순식간에 몰살시키는 것도 가능하니 기죽지 마세요.”
     “넨.”
     개미떼처럼 성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공성 유저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레온의 말에 대꾸했다.
     레온의 활약이 기대되는군.
     그때 나지막한 운영자의 음성이 모두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지금부터 공성전 이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순간, 유저들의 함성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함성소리는 수성보다 공성 쪽이 훨씬 거대했다.
     수성에도 400~500명 정도 되어 보이는 유저가 있었지만 공성에는 그보다 더 많은 유저들이 성문을 치고 들어올 기세였다.
     함성소리와 함께 공성 유저들이 성문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은빛 풀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무장한 기사들과 기이한 형태의 무기를 쥔 전사들이 개미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수성을 맡은 궁수 유저들이 성벽에서 일제히 활을 쏘기 시작했다.
     슈슈슉!
     쐐애애액.
     푸악!
     “크악!”
     “으아악!”
     화살에 맞은 유저들 몇몇이 쓰러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고 들어오는 유저들.
     동료가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료를 발판삼아 밀려오는 유저들을 보며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성문을 통해 침락할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검은 복장을 한 다수의 유저들이 날카로운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돌리더니 이내 능숙한 솜씰 성벽에 던지고 있었다.
     휘리릭.
     터엉.
     날카로운 갈고리가 성벽에 단단히 박히자 검은 복장을 한 유저들이 밧줄을 타고 성벽을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쳇.”
     성벽에 올라선 나는 꺼내든 화살의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목표물은 당연히 밧줄을 타고 올라오는 유저.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중력의 힘을 받아 더더욱 매섭게 쏘아졌다.
     쐐애액.
     미처 피하기도 전에 창과도 같은 굵직한 화살이 유저의 안면에 박혔고, 밧줄을 놓친 유저는 중력의 법칙대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홈페이지에서 본 것인데, 한 번 죽은 유저들은 다시 접속을 할 수 없었다. 다시 접속을 시도하더라도 ‘게임아웃’이 되어 공성전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홈페이지에서 관전만 가능한 것.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리의 예상을 깨고 빠르게 성벽 위를 올라오는 유저들을 밀어내느라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공성을 맡은 기사 유저들이 성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러가 맺힌 그들의 검이라면 성문을 박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유저들 말고도 플라이(Fly)마법으로 성벽 위를 올라오는 마법사 유저도 몇 있었다. 하지만 인기가 없는 직업이니만치 마법사라는 직업을 택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마법사도 몇 없었다.
     플라이 마법으로 성벽을 오른 마법사 유저가 시동어를 외쳤다.
     “파이어 볼.”
     순간, 농구공 크기만 한 타오르는 구체가 기염을 토해내며 궁수 유저들에게 쏘아졌다.
     “플라이 마법으로 공중에 뜬 상태에서도 공격이 가능한가? 벨런스라는 게 있을 텐데!”
     내가 어이없다는 식으로 말하며 화살 두 개를 꺼내들자 레온이 대꾸해주었다.
     “저 마법사 유저가 손목에 찬 아이템 보이죠? 제 것과 같은 팔찌. 레어급 아이템으로 2클래스 마법 파이어 볼이 발동 가능한 팔찌에요. 기본적으로 저런 액세서리를 착용하지요.”
     “그렇군요. 더블 샷!”
     레온이 차근차근 설명해주었고 나는 꺼내들었던 두 개의 화살을 공중에 떠오른 마법사 유저를 향해 쏘았다.
     두 개의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마법사 유저의 가슴팍에 박히려는 순간, 흰 빛을 띤 반투명한 구체의 막이 마법사 유저의 몸을 감쌌다.
     “저건 아이템에 의한 2클래스의 저급한 실드군요. 제가 파괴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레온이 복잡한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수인을 맺으면서 마법수식을 계산하고 있는 거겠지?
     레온의 주변으로 마나가 재배열되기 시작하면서 기의 파동이 거칠어짐을 느꼈다.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이런 파동을 느끼게 되다니. 나도 상당한 경지에 오른 건가……?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성문을 부수는데 성공한 유저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전원, 공성군을 막아라!”
     “와아아아!”
     공성군 못지않게 수성을 맡은 유저들의 기세도 엄청났다. 곳곳에서 각종 병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간간히 비명소리도 터져 나왔다.
     성문이 부서지자 성벽을 올라오려던 검은 복장에 복면을 쓴 유저들이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문이 부서졌으니 굳이 성벽을 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캐스팅을 마친 레온이 왼팔을 뻗어 손을 쫙 편 채 나지막이 시동어를 외쳤다.
     “파이어 캐논(Fire Cannon)."
     순간, 레온의 손바닥 앞에 배구공 크기의 구체가 형성되더니, 이내 시뻘겋게 타오르는 화염이 광선처럼 쏘아졌다.
     쏘아진 파이어 캐논이 마법사 유저의 실드와 충돌했고, 실드를 간단하게 깨뜨린 파이어 캐논이 마법사 유저의 몸을 휩쓸었다. 보나마나 게임아웃이 될 상황.
     하지만 순간 성문이 부서져 공성군이 수도 세인트 모닝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으악! 공성 쪽에 공탑의 제자가 있다! 전원 방패를 들고 몸을 보호하라!”
     누군가가 소리치자 모두들 일제히 커다란 방패로 앞을 가렸다. 공성에 참가한 궁탑의 제자라면… 라벤더일 텐데.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성벽을 내려왔다.
     “레온! 제가 공성에 참가한 궁탑의 제자를 맡을 동안 수성에 참가한 유저들 좀 도와주세요!”
     “걱정 마세요, 레드!”
      레온의 대답을 끝으로 성벽을 내려온 나는 적안을 개안했다.
     곧 길게 늘어뜨린 붉은 목도리를 휘날리며 빠른 몸놀림으로 활을 쏘아 보내는 유난히 눈에 띠는 인간 유저가 보였다. 바로 라벤더였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사형과의 대련이라…….
     나는 정령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현재 나와 사형의 실력이 얼마나 차이나는 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공간전이로 순식간에 성벽을 내려온 레온이 수성군 전원은 아니지만 선두로 공성군을 막고 있는 유저들에게 걸어줄 보조마법을 캐스팅하더니 이내 시동어를 외쳤다.
     “스트렝스, 헤이스트, 스톤스킨(Stone Skin)!"
     주문영창이 이어지자, 힘겹게 공성군을 막아내던 수성군이 우세해졌다. 레온의 보조마법 덕에 힘과 민첩성 그리고 방어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상당량의 마나를 소모한 레온이 아이템 창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 마시곤 또다시 복잡한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    *     *
     “더블 샷!”
     쐐애액.
     푸푹.
     “으악!”
     방패에 가려지지 않은 부분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라벤더를 보며 치를 떨던 수성군 중 한 명이 화살에 맞아 절명했다. 이미 퀵 스텝과 같은 보조스킬들을 전부 마스터했는지, 움직이는 속도 또한 빨랐다.
     그런 라벤더를 놀라게 한 것이 있으니, 바로 내가 쏘아 보낸 굵직한 화살이었다.
     갑자기 날아든 스몰 스피어를 뛰어난 순발력으로 피해낸 라벤더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었다. 나는 라벤더를 보며 씨익 웃어주었다. 그에 라벤더도 마주 웃어주었다.
     지금은 1:1로 맞붙을 상황이 안 될 것 같았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볼 때랑은 상황이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들이 1:1로 맞붙을 수 있게 놔둘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갑자기 나타난 유저가 검을 휘둘러왔고, 재빨리 검을 피해낸 내가 활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으앗! 보우어택!”
     콰앙!
     “으악!”
     궁수가 근접에서 약한 면모를 보이는 줄 알았겠지만, 나에게 접근한 유저는 헛다리를 짚어도 제대로 짚은 것이었다. 나에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묵직한 아이언 레드 롱 보우에 맞고 나가떨어진 유저는 더 이상 일어서지 못했다. 내가 이런 반격을 가해올 거란 생각을 못한 채 방어할 생각도 없이 접근했기 때문에 일격을 허락한 것이었다.
     “자, 자객단이다!”
     “으앗! 모두, 협공을!”
     “그, 그럴 상황이 아니야! 저쪽부터 막아!”
     채챙!
     채앵!
     그 순간 내 눈에 검은 복면을 쓴 채 투척용 단감이나 수리검을 던지며 치고 들어와 제작기 손에 착용한 카타르와 파타를 휘두르는 유저들이 보였다.
     대여섯 명이 한 조로 구성되어 협공을 하는 어쌔신들. 자객단 길드원인 것이 분명했다. 수성을 맡은 유저들이 놀라 외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소드 엑스퍼트 중급 유저를 협공으로 무너뜨린 유저들이 타겟을 바꿔 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넓은 공간을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백 스텝을 밟았다.
     “백 스텝, 백 스텝!”
     백 스텝을 두 번 밟자 꽤나 멀리 물러날 수 있었다.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오는 대여섯 명의 유저들.
     ‘좋아, 모험이다.’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왼손으로 고쳐 잡고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접근해오는 한 명의 유저를 향해 활을 쏘아 보냈다.
     그는 사력을 다해 화살을 피하긴 했지만, 창과 같은 화살의 화살촉이 유저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주춤하더니 이내 진을 짜고 협공해 오는 유저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어쌔신들이 카타르와 파타로 나를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무기에 오러가 맺히지 않은 이상 두렵지 않았다. 왜냐? 나도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휘두르면 그만이니까.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제일 먼저 접근한 유저에게 활을 휘둘렀다.
     “보우어택!”
     퍼억!
     “으악!”
     모두들 흠칫 놀라며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거리를 두었다.
     근거리에서 이런 공격을 가해올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는 것처럼. 아니, 활로 상대를 가격하는 궁수도 있었지만 이처럼 강력한 파괴력으로 근거리의 상대를 제압하는 궁수는 아마 내가 처음일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한 가지 실수를 했다. 궁수와 거리를 둔다는 것은 활을 쏠 시간을 벌게 해준다는 것. 나는 재빨리 허리춤에서 화살 두 개를 꺼내들고 지면을 박찼다.
     그 사이 간간이 표창과 수리검, 투척용 단검이 날아왔지만 마스터한 퀵 스텝이 발동된 이상 피하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재빨리 투척용 무기를 피해낸 나는 잠시 주춤거리는 어쌔신에게 두 개의 화살을 쏘아 보냈다.
     쐐애액!
     화살은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대기를 갈랐다.
     푸푹!
     “크악!”
     두 개의 화살이 유저의 어깨와 가슴팍에 박힌 채 유저와 함께 저만치 날아갔다.
     그제야 거리를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어쌔신들이 또다시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나는 씨익 웃으며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고쳐 잡았다. 그에 거리를 좁혀오던 어쌔신들이 흠칫하며 멈춰 섰다.
     거리를 좁히면 무식한 활에 공격을 당할 것이고, 그렇다고 거리를 두면 창과 같은 화살이 그들의 몸을 꿰뚫을 것이다. 이도저도 안 되는 상황에 어쌔신들은 몹시 난감해 하고 있을 것 분명했다.
     “덤비세요.”
     나지막한 나의 음성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    *     *
     “김 팀장님, 수성군이 밀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잘 막아내고 있는데요?”
     “그런가요?”
     “네.”
     운영진 중 한 명이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커피를 마시고 있던 김 팀장이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유저들을 보았다.
     공성전은 뜨겁게 열이 올라 있었다. 수성군이 수로 밀리기는 했으나 잘 막아내고 있는 것이 관건이었다.
     “아니? 잠깐. 플라이 마법을 시전하는 상태에서 다른 마법도 사용이 가능한가요?”
     “예? 그거야 당연히 불가능하지요. 밸런스라는 게 있으니까요.”
     직원의 말대로 게임엔 밸런스라는 게 있어 플라이나 인비지빌리터 같은 마법을 시전한 상태에서는 다른 마법을 사용하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모니터 화면에 나온 마법사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저 마법사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김 팀장이 화면의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엔 수도 세인트 모닝의 성벽보다 조금 더 높이 뜬 상태에서 파이어 볼과 아이스 볼을 난사하는 마법사들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아아, 저것은 아이템 덕분에 가능한 겁니다. 마법사 유저들이 착용한 액세서리들이 보이시죠? 액세서리에 인챈트 된 아티팩트 마법으로 3클래스 이하의 마법을 사용 가능케 하는 아이템이 있거든요.”
     직원의 자세한 설명에 김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하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다른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적은 수의 마법사가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지만, 성벽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로 인해 하나 둘씩 바닥에 곤두박질 쳐졌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박진감 넘치는군.”
     김 팀장의 말을 끝으로 운영진들이 하나 둘씩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섣불리 접근하지도, 그렇다고 거리를 두지도 못하는 어쌔신들.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이도저도 못 하는 어쌔신 중 우선 둘을 먼저 해치운 나는 나머지 세 명의 어쌔신을 보며 주변을 경계했다.
     다들 한창 싸우느라 여기까지 신경을 쓰지 못한 모양이군.
     나는 그 즈음 상당량의 스태미나가 감소되어 있는 걸 알아챘다. 숨이 가빠지고 몸이 나른해지는 것이 그제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역시 수로 밀어붙이는 데 장사 없다는 말이 이렇게 증명되고 있었다.
     ‘제길, 하지만 포션을 꺼내는 사이에 놈들이 협공해 온다면 그대로 게임아웃이다.’
     이 때 어디선가 날아온 배구공만 한 화염구가 기염을 토해내며 어쌔신과 충돌하자 작게 폭발했다.
     퍼엉!
     “으악!”
     나는 화염구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온몸이 불로 뒤덮인 반투명한 미소년과 그 소년의 옆에 서 있는 새하얀 털을 가진 늑대. 그 뒤에는 어여쁜 엘프 유저가 서 있었다. 티아였다.
     ‘티아? 휴우. 적절한 때에 맞춰 티아가 와 주었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는데 말이야.’
     루카와 티아의 상급정령이 나머지 두 어쌔신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 어쌔신을 해치운 루카와 상급정령.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스태미나 포션 하나를 꺼내 마셨다.
     “오빠, 빨리 수성군을 도와!”
     “응? 무슨 일인데 그래?”
     “공성 쪽에서 소드 마스터가 나타났어!”
     티아의 말에 나는 마시던 스태미나 포션을 뱉어낼 뻔했다.
     소드 마스터가? 스태미나 포션을 다 마신 나는 유리병을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뒤 앞장선 티아를 뒤따랐다.
                   *    *     *
     공성 측 소드 마스터 유저의 등장으로 전세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공성 측이 훨씬 유리해진 것이었다.
     소드 마스터 유저가 끌어올린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검이 소드 엑스퍼트 유저들이 끌어올리는 오러가 맺힌 검과 함께 갑옷까지 송두리째 베어냈다.
     그는 몸놀림 또한 다른 기사 유저들과 달랐다.
     갑작스런 마스터의 등장에 모두들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소드 마스터를 막아서는 자가 있었으니, 마성의 두 번째 현자 레온이었다.
     물론 소드 마스터 유저가 더욱 우세하긴 했지만 레온은 그동안 치러 온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공격을 잘 막아낼 수 있었다.
     5클래스의 깨달음을 얻은 레온은 이제 3클래스 이하의 마법은 캐스팅을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시동어만으로도 마법을 발현시킬 수 있었기에 약하지만 빠르고 신속한 마법으로 공격을 가할 수 있던 것이었다.
     소드 마스터 유저와 5클래스 마법사 유저가 맞붙기 시작하자 공성 측 유저와 수성 측 유저의 시선은 자연스레 사투를 벌이는 두 유저에게 고정되었다. 두 유저의 1:1 전투로 인해 공성전이 잠시 중단된 것이었다.
     소드 마스터 유저가 거리를 좁히며 치고 들어오면 블링크로 거리를 다시 벌려놓는 식으로 레온이  소드 마스터 유저를 묶어 놓자, 다시 전세는 비슷해졌다.
     하지만 수성 측은 소드 마스터로 인해 엄청난 타격을 입어야 했다.
     “허억, 허억.”
     “대단하군요. 상당히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 같아 보이는데…….”
     “과찬이십니다. 아직 미숙한 실력입니다. 마법사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실력을 가진 유저일 뿐입니다.”
     거리를 둔 채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검을 고쳐 잡은 소드 마스터 유저가 말했고 그에 레온이 대답했다.
     아무리 레온이라고 해도 5클래스의 마법사가 소드 마스터를 완벽하게 막아낸다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드 마스터 유저가 우세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차앗!”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소드 마스터 유저의 장검이 레오의 목을 쇄도해 오기 시작했다.
     “블링크!”
     재빨리 공간전이로 소드 마스터 유저와 거리를 둔 레온이 소리쳤다.
     “매직 미사일!”
     순간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다발의 매직 미사일이 레온의 몸을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회전하는 다발의 매직 미사일에 가려져 레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좋아, 이 상태로 또다시 블링크로 뒤에서 기습을 하는 거다.’
     재빨리 블링크를 이용해 소드 마스터 유저의 뒤로 향한 레온이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5클래스의 마법을 캐스팅하는 것이 분명했다.
     클래스가 높아질수록 기의 파동이 거칠어지기 마련.
     이미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유저는 자신의 뒤에서 거친 기의 파동을 느끼며 황급히 등을 돌렸다. 분명 매직 미사일에 둘러싸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신의 뒤로 이동해 있다니…….
     소드 마스터 유저가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검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미리 발현시켜놓은 매직 미사일이 소드 마스터 유저를 향해 맹렬히 쏘아졌다.
     화들짝 놀란 유저가 재빨리 플레이트 메일에 강기를 주입하자 푸른 오러가 풀 플레이트 메일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충격은 흡수할 수 없었는지 소드 마스터 유저는 짧게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1클래스 마법이라고 해도 5클래스 마법사 유저가 시전을 한다면 그 위력이 배로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캐스팅을 마친 레온이 시동어를 외쳤다.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파츠츠츠.
     파지지직
     파지지직.
     레온의 손바닥 위로 주먹만 한 전하덩어리가 형성되어 맹렬한 방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가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는 주먹만 한 전하덩어리를 소드 마스터 유저에게 쏘아 보냈지만, 이미 정신을 차린 유저는 재빨리 레온의 마법을 피해냈다.
     애석하게도 레온의 체인 라이트닝은 공성 측 유저 중 한 명에게 적중했고, 체인 라이트닝이 유저에게 적중하자 전류가 공성 측 유저 다수에게 옮겨 붙는 것과 동시에 맹렬한 방전을 일으켰다.
     파지지지직
     츠츠츠츠
     “으아악!”
     “흐어억!”
     체인 라이트닝에 맞은 유저들은 시커멓게 타버렸고, 머리카락이 끝부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남은 마나를 전부 끌어올려 발현시킨 마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레온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 털썩 주저앉았다.
     “와아아아!”
     공성 측 유저들이 함성을 지르며 수성 측 유저에게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그에 투지를 잃은 수성 측 유저들이 힘겹게 공성 측 유저를 막아내기 시작했다.
     “저의 승리군요. 그럼.”
     소드 마스터 유저가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검을 치켜들었다 체념을 했는지 레온은 눈을 감았고 유저의 장검이 레온의 목을 향해 쇄도해오기 시작했다.
     “플레임 웨폰.”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 뒤로 폭풍 같은 기세가 휘몰아치며 소드 마스터 유저의 검을 막아냈다.
     “화검강(火劍剛)!”
     피잉!
     강기와 강기가 충돌해 불똥을 튀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자신의 검을 막아낸 유저에게 시선을 고정 시킨 소드 마스터 유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와 비슷한 형태에 타오르는 화염을 머금은 장검을 쥔 유저가 거기에 서 있었다. 바로 화염의 대마검사 카이루였다.
     “아니… 저런 형태의 오러도 있었던가…….”
     소드 마스터 유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뒤늦게 전장에 도착한 나는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유저의 검이 레온의 목을 향해 쇄도하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며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레온이 당한다면 수성 측에선 상당한 피해를 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내가 활시위를 당길 때면 이미 유저의 검에 레온의 목이 달아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엔 반전이 있는 법.
     갑자기 나타난 검사 유저의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를 연상시키는 화염이 뿜어져 나오더니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낸 것이었다.
     레온을 구해준 유저는 놀랍게도 강찬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2차 전직을 했다고 하지만 마스터가 뿜어낸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내다니…….
     강찬이 시간을 버는 사이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나 포션을 마신 뒤 실드를 펼쳐 뒤에서 치고 들어오는 유저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강찬과 레온 둘이 덤빈다면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쉽게 막아내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시간을 흘러흘러 공성 측 유저들은 세인트 모닝에 전부 쳐들어오는데 성공했고, 건물을 하나씩 파괴하기 시작했다.
     건물을 파괴하기 시작하는 공성 측 유저들을 막아내랴, 그러는 사이 뒤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내랴 수성 측에서는 죽을 맛이었다.
     방금 유저 둘을 때려눕힌 나는 약간의 시간을 이용해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아직은 서툴지만 능숙하게 크로스 보우 건을 사용하며 자신의 몸을 지켜내는 리아와 강력한 상급정령을 이용해 다수의 유저를 막아내고 있는 티아.
     빠른 몸놀림으로 자신보다 강한 유저에게 치고 빠지는 식의 공격을 가하는 경훈과 무식한 배틀 해머로 무식한 배틀 엑스를 휘두르는 광전사 유저를 힘겹게 막아내는 혁.
     소드 마스터 유저를 힘겹게 상대하는 강찬과 레온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소드 마스터 유저가 우세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승리의 저울추는 강찬과 레온에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유저들이 게임아웃 된 상황이었다.
     상대 유저의 수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함성소리를 더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양측 다 물러설 생각 없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섬뜩한 파육음이 들려왔다.
     나는 파육음이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소드 마스터 유저의 가슴팍에 강찬의 문 블레이드가 꽂혀있었다. 레온과 강찬이 사력을 다해 협공하던 끝에 소드 마스터 유저를 해치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소드 마스터 유저가 게임아웃 되자 수성 측의 유저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투지를 되찾은 수성 측 유저들이 함성을 지르며 공성 측 유저들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소드 마스터 유저가 게임아웃이 된 것을 시작으로 전세는 역전 되었다. 수성 측의 유저들이 공성 측의 유저들을 막아서며 시간을 버는 사이 레온은 고 클래스의 마법을 캐스팅을 끝마친 것이었다.
     캐스팅을 끝낸 레온이 시동어를 외쳤다.
     “익스플로전(Explosion)!”
     불의 속성을 한데 모아 일시에 격발시키는 마법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성 측 유저들에게 작렬했다.
     퍼엉!
     “으아악!”
     수십 명의 유저들이 허공으로 치솟더니 이내 바닥에 처박히기 시작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강력한 마법에 공격당했으니 살아있을 리 만무했다.
                   *    *     *
     “팀장님, 공성 측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뭐, 뭐라고요?!”
     직원의 말에 김 팀장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평균적인 레벨은 공성 측이나 수성 측이 비례되었지만, 수적으로는 공성 측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이었다. 시선을 모니터로 돌린 팀장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허억!”
     마법사 유저의 익스플로전이 작렬하자 열 명이상의 유저가 폭발에 휩쓸려 게임아웃 되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저런 마법을 구사하는 유저가 있다니… 설마 그 복잡한 수식을 계산했다는 건가?”
     김 팀장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저 유저라면 얼마 전에 마성의 현자라는 호칭을 얻은 두 번째 유저입니다. 이름은 레온. 현재 5클래스의 마법사지요.”
     직원의 말에 김 팀장이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김 팀장을 보며 직원이 말했다.
     “다수의 병력을 상대할 경우나 원거리에서는 마법사의 효용이 월등히 높습니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마법이니까요.”
     “과연… 엄청나군. 그런데 저 유저는…….”
     “히든 클래스, 마검사 유저입니다. 현재 2차 전직을 해 화염의 대마검사라는 직업을 가졌지요.”
     “허허.”
     김 팀장은 마검사 유저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    *     *
     공성 측 유저들을 거의 섬멸시킨 것 같아 안심할 무렵, 그때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던 ‘자객단’길드의 유저들이 속속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두들 하나같이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움직이기 편한 얇고 검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무기는 파타나 카타르와 같은 어쌔신 전용 무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길드원 개인의 레벨은 중레벨에 미치지만, 이들이 가하는 합공은 가공할 만했다. 소드 엑스퍼트 중급 유저를 쉽게 쓰러뜨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수십 명의 자객단 길드원은 한데 모여 공성 측의 유저들이 괴멸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수성 측의 유저들이 공성 측의 유저를 전부 괴멸시키고 나서 긴장이 풀렸을 때쯤 기습을 할 생각 이유에서였다.
     잠시 후 그들의 바람대로 공성 측의 유저들이 하나 둘 게임아웃 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혼자서 기사 유저를 상대하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거대한 철궁을 쏘는 왜소한 체격을 가진 유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객단 길드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을 주시하고 집중 공격한다. 길드원 여섯이 덤볐지만 어떻게 된 건지, 협공이 먹히지 않았다.”
     그에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앗!”
     서석
     “흐악!”
     강찬의 문 블레이드가 공성 측의 기사 유저의 복부를 갑옷 째로 꿰뚫었다. 말할 것도 없이 즉사였다.
     그냥 찔러 넣었다면 기사 유저가 가하는 반격에 당했겠지만, 문 블레이드의 검신에는 오러 블레이드를 연상시키는 화염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저의 몸에서 검을 뽑아낸 강찬이 주변을 살피었다. 힘겹지만 모두들 잘 버텨내고 있었다.
     와아아아!
     “공성 쪽의 궁수 유저들, 모두 활을 쏴라!”
     공성 쪽의 기사와 근접전투를 구사하는 직업을 가진 유저들이 수선 측의 맹공격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을 때, 후방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공성 측의 궁수 유저들이 일제히 활을 치켜세우고 화살을 메긴 활시위를 당겼다.
     이대로 활시위를 놓는다면 수십 개의 화살이 수성 측의 유저들에게 비처럼 쏟아질 것이었다.
     선두에서 활을 쏘라고 지시한 유저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궁수 유저들은 활을 채 쏘기도 전에 거대한 폭발에 휩쓸려야만 했다.
     수성 측의 마법사, 레온의 5클래스 마법 익스플로전이 다시 한 번 궁수들에게 작렬한 것이었다.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궁수 유저들은 익스플로전으로 인해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이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마, 마법사들은!”
     공성 측의 마법사들이 손을 써봤지만, 기껏해야 2, 3클래스의 마법사들이 5클래싀 마성의 현자를 당해낼 수 없는 법이었다.
     이어진 것은 세인트 모닝의 성벽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수성 측 궁수들의 화살비 세례였다.
     수십 개의 화살이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며 성벽 아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무리지어 이동하는 철새를 연상 시켰다.
     “모, 모두 방패를 들어라! 화살을 막아라!”
     “난 방패가 없… 흐악!”
     방패를 사용하지 않은 유저들은 그대로 화살에 몸을 내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기사 유저들이라면 오러가 맺힌 검으로 저항을 하긴 했으나,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일일이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이번 공성전 이벤트에 참가한 모든 유저들은 궁수가 전쟁 시원거리에선 효용이 월등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궁수가 다수일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제 아무리 소드 엑스퍼트 상급 유저라고 해도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화살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이, 이 무슨…….”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공성 측의 유저들이 허탈했다. 얼마 남지 않은 공성 측의 유저들이 서서히 괴멸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괴멸되기 직전에 두 명의 유저가 모습을 나타냈다. 기습을 노리던 자객단 유저들이 아닌. 은빛 광택을 내는 풀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무장한, 두 명의 유저가 단신으로 전장에 뛰어든 것이다.
     공성 측 유저들은 이제 거의 포기한 상태. 언뜻 보기에는 자포자기를 한 두 유저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전장에 뛰어든 걸로 보였지만 그게 아니었다.
     두 유저의 장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오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두 명의 소드 마스터 유저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    *     *
     기사 유저를 겨우 게임아웃 시킨 나는 갑자기 등장한 두 유저가 수성 측의 유저들을 간단하게 해치우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찬과 레온이 사력을 다해 협공하던 끝에 이길 수 있었던 소드 마스터가 둘씩이나 나타나다니…….
     공성 측의 유저들은 거의 괴멸되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수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으니 괴멸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수성에 성공하는 줄 알았으나 예상을 뒤엎고 갑작스레 나타난 두 명의 소드 마스터 유저가 전세를 뒤엎기 시작한 것이었다.
     강찬과 레온이 급히 다려들어 한 명의 소드 마스터 유저를 막아내는 동안. 다른 한 명이 전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왜 강찬과 레온밖에 보이지 않는 거지? 티아, 경훈, 혁. 루카 그리고 리아는……?’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티아와 혁, 리아를 금세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훈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게임아웃 된 것 같았다.
     ‘다 이긴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소드 마스터 유저의 공격을 힘겹게 피해내며 겨우겨우 막아서는 티아와 혁 그리고 리아와 다른 수성 측의 유저들.
     나는 얼른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지면을 박찼다. 너무 멀어도, 그렇다고 너무 가까워도 안 되기에 일정한 거리를 둔 나는 파워 샷을 쏠 기세로 화살깃을 활시위에 걸었다.
     “응?”
     쐐애액.
     활시위를 당기려고 할 때, 어디선가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경고 사격이었는지, 나와 1미터 남짓 되는 거리에 떨어지는 화살.
     내 시선은 자연스레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향했고 방금 날아온 화살의 주인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잘생긴 외모. 라벤더였다.
     아직 살아 있었나보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라벤더의 표정을 응시했다. 악의란 전혀 없는 그런 눈빛.
     ‘아차, 기회가 주어진다면 1:1로 맞붙기로 했었지…….’
     나는 활을 고쳐 잡았다.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최선을 다해 라벤더를 꺾은 뒤, 소드 마스터 유저를 힘겹게 상대하는 수성 측 유저들을 도울 생각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지면을 박찼다. 그에 라벤더가 재빨리 화살을 쏘아 보냈고 나는 어깨를 슬쩍 돌려 화살을 피해냈다. 순간 라벤더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라벤더를 향해 화살을 쏘아 보냄과 동시에 화살 두 개를 더 꺼내들고 퀵 스텝을 건 뒤 거리를 좁혀 나갔다.
     라벤더도 퀵 스텝을 마스터했는지, 움직임이 매우 빨랐다. 물론 레벨이 높은 만큼 민첩성도 나보다 높을 것이 분명했다.
     공격의 날카로움이나 몸놀림이 라벤더에게 뒤처지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기죽지 않고 최선을 다해 공격했다. 그러나 거리를 좁히려 하면 전광석화와 같이 뒤로 물러나며 활을 쏘는 라벤더 때문에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나는 라벤더가 가해오는 날카로운 공격을 피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실력 차이를 좁힐 만한 히든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정령.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응? 사제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나? 왜 갑자기 멈춰 서는 거지?’
     현성이 갑자기 공격을 하지 않고 멈춰 서자 라벤더는 공격을 멈추고 현성을 지켜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자 조금 먼 거리에 있는 현성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뭔가 웅얼거리는 현성의 몸 주위로 약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나본지, 망토가 약한 바람에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초록색 줄무늬를 가진 반투명한 흰색의 고양이로 추측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소환되어 현성의 머리 위에 앉았다.
     ‘저건 뭐지?’
     라벤더는 유심히 현성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입을 웅얼거리기 시작하는 현성의 몸주위로 자신의 붉은 매와는 다르게 생긴, 타오를 것 같은 붉은 깃털과 기다란 꼬리 깃을 가진 반투명한 붉은 매가 소환되어 현성의 왼쪽 어깨에 앉았다.
     뒤이어 푸른 비늘을 가진 동양의 용을 연상시키는 반투명한 자그마한 뱀과 갈색의 등딱지를 가진 거북이 역시 소환되어 현성의 팔에 감겼고 발등 위에 착지했다.
     현성은 더 이상 웅얼거리지 않고 허리춤에 달리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에 라벤더는 손을 어깨 위로 넘겨 화살 두 개를 꺼내들었다.
     ‘뭐야, 나는 또 사제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고 걱정했는데, 아니었군. 그런데 저건 뭐지… 정령인가?’
     두 개의 화살의 활살 깃을 활시위에 건 라벤더가 활시위를 힘껏 당기며 되뇌었다.
     ‘정령을 소환할 동안 공격을 가해올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사제라고 배려해주는 건가…….’
     나는 네 정령들을 소환할 동안 나를 지켜봐준 라벤더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정말 사람 좋은 녀석이군.
     막 퀵 스텝을 걸었을 때, 라벤더가 쏘아 보낸 두 개의 화살이 맹렬히 파공성을 흘리며 내 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화살을 피해내며 말했다.
     “자, 이제 너희들의 힘을 빌릴 차례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하는 것 봐서.”
     “네, 마스터!”
     “알겠어용~.”
     “형, 힘내!”
     나는 가지각색의 대답을 들으며 라벤더에게 활을 쏘았다. 화살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라벤더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백호의 힘을 빌린 윈드 애로우였다.
     이대로 밀어붙이면 되겠군.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두 개를 꺼내들었다.
     “파이어 애로우!”
     화르륵.
     화살촉에 붉게 타는 화염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나는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라벤더를 겨냥했다.
     내가 더블 샷을 쏠 것이란 걸 알아챘는지 라벤더가 지면을 박차고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두는 라벤더.
     나는 즉시 당겼던 활시위를 놓으며 외쳤다.
     “윈드 애로우!”
     쐐애액!
     두 개의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라벤더에게 쏘아졌다. 전과는 비약적으로 빨라져 날아오는 화살을 보곤 라벤더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뒤로 젖혀 화살을 피해냈다.
     나는 재빨리 라벤더에게 접근해 활을 휘둘렀다.
     “보우어택!”
     부웅!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허공을 훑었다. 백 스탭을 밟고 뒤로 재빨리 뒤로 몰러났기 때문이었다.
     재빨리 중심을 잡은 내가 화살 하나를 꺼내들려고 허리춤에 손을 가져갈 때였다.
     백 스텝을 밟고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쏘아 보낸 라벤더의 화살이 내 얼굴 앞까지 날아오는 것을 보곤 나는 황급히 외쳤다.
     “실드!”
     파악!
     반 구체의 반투명한 흰색의 막이 형성되어 라벤더의 화살을 막아내었다.
     “궁술과 정령술의 조합이라. 대단하구나 사제.”
     라벤더가 빙긋 웃어 보이더니 매섭게 화살을 쏘아 보냈다. 나는 재빨리 화살을 꺼내들고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라벤더가 연달아 쏘아 보낸 화살이 화살을 쳐내기가 무섭게 날아왔고 나는 왼손에 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휘둘러 화살을 쳐낼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정령이 아니었으면 아까 라벤더가 쏘아 보낸 화살이 내 이마에 박힐 뻔했군. 나는 월등한 실력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라벤더 말고 다른 사형들은 도대체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나의 목표인 로빈훗은…….’
     잠시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세 개의 화살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쐐애액!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하지만 화살을 완벽하게 피해낼 수는 없었다. 두 개의 화살이 내 왼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크윽!”
     하마터면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놓칠 뻔했군.
     나는 붉은 선혈이 흐르는 왼쪽 팔을 보다 이내 시선을 라벤더에게 고정시켰다. 강한 상대와의 전투 중에 한눈을 팔게 되면 즉시 일격을 허용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청룡, 워터 힐.”
     “알겠다.”
     청룡의 대답과 함께 화살이 훑고 지나간 왼팔의 상처 부위에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감소되었던 약간의 생명력이 회복된 것을 느낀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지면을 박찼다.
     이번엔 라벤더에게 파상적인 공격을 가할 샘이었다. 화살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나는 꺼내든 화살을 라벤더에게 쏘아 보냈다. 물론 윈드 애로우였다.
     쐐애액!
     라벤더가 흠빛 놀라며 화살을 피해낼 때를 맞춰 또다시 화살을 쏘아 보냈다. 틈을 주지 않고 가하는 날카로운 공격에 라벤더가 반격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상태로 계속 공격하게 된다면 마나가 금세 고갈 될 것이었다. 이미 절반 이상의 마나가 감소된 것을 느낀 나는 공격을 멈추었다.
     제길, 라벤더가 반격할 틈을 줘버렸군.
     나의 예상대로 라벤더는 매섭게 치고 들어와 활을 쏘았다. 보어우택으로 화살을 쳐낸 나는 현무의 도움을 받아 라벤더와의 거리르 좁혔다.
     “헛?!”
     순식간에 거를 좁히는 나를 보며 라벤더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보우어택!”
     “배, 백 스텝!”
     부웅!
     묵직한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휘둘러졌고, 찢어진 대기가 울부짖었다.
     ‘제길, 또다시 허공만 때렸다…….’
     백 스텝으로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활을 쏘는 라벤더의 공격 패턴 중 하나를 알아챈 나는 재빨리 몸을 돌린 뒤 백 스텝을 밟았다 그리곤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라벤더에게 쏘았다.
     너무 정령에게 의존하다보니 마나는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닥을 드러낸 마나를 보고 잠시 주춤하는 사이 라벤더가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회였다. 그것도 전세를 뒤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리스!”
     휘청.
     “어엇?!”
     꽈당!
     내게 빠르게 접근해오던 라벤더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것같았으나 재빨리 중심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찰계수가 0이 된 이상 아무리 중심을 잘 잡는 오뚝이라도 버틸 수 없는 법.
     라벤더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 처졌다.
     “백호 윈드!”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호가 일으킨 바람이 흙먼지를 자욱하게 번지게 만들었다. 그 사이 화살 하나를 꺼내든 나는 라벤더의 이마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흙먼지로 인해 눈을 감고 있던 라벤더가 서서히 눈을 떴고 자신을 향해 당겨진 활시위를 보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령의 힘을 빌리고 흙먼지로 상대의 시야를 가리는 비겁한 수법을 쓰긴 했지만 나의 승리였다.
     “…졌군. 정말 대단해, 사제. 훌륭했어.”
     “라벤더…….”
     내 본 실력이 아닌, 정령의 힘을 빌린 것과 비겁한 수법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라벤더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나는 뭔가 뭉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 하지만 라벤…아니, 사형. 이건 제 본 실력이 아닌 정령술…….”
     “정령술과 궁술을 조합해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스킬 조합. 그게 바로 네 실력이야, 사제. 자, 어서 수성 측의 유저들을 도와. 나는 수성 측의 유저들에게 손대지 않고 알아서 게임아웃하겠다.”
     “…….”
     “다음엔 지지 않게 더욱 분발해야겠는 걸?”
     그 말을 끝으로 라벤더는 로그아웃을 했나본지 안개에 가려지듯 사라졌다.
     정령술과 궁술의 스킬 조합이 내 실력이라…….
     잠시 동안 가만히 멈춰서 있던 나는 얼른 고개를 저은 뒤 시선을 전장으로 향했다.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소드 마스터 유저의 장검이 혁의 가슴팍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순간 혁의 가슴팍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루샤크!”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아이템 창을 열어 마나 포션을 꺼내 마신 나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소드 마스터 유저의 뒤를 노렸다.
     “보우어택!”
     하지만 상대는 이미 초인의 영역에 발을 들인 유저. 몸을 슬쩍 돌려 나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재빨리 중심을 잡고 뒤로 물러나 가슴팍을 베인 혁에게 다가갔다. 혁은 극심한 부상률을 입어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청룡, 워터 큐어.”
     “전쟁 중에 쓰러진 동료를 신경 쓰다니.”
     나는 낯선 음성이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1.5미터 길이의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장검이 나를 쇄도해 온 것이다.
     재빠리 피하지 않았다면 분명 목이 달아났을 상황이었다.
     나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소드 마스터 유저를 노려봤다. 그리고 알았다. 정령까지 합세한다고 해도 이길 수 없는 그런 유저였다.
     현무의 그리스로 넘어뜨린다 해도 아직까지 오러 애로우를 사용하지 못하는 내가 소드 마스터를 이긴다는 건 무리였다 그는 내뿜는 기세부터 남달랐다.
     제길, 나도 빨리 레인지 마스터가 되어야 하는데…….
     수성 측에도 이젠 남은 유저가 얼마 없었다.
     극심한 부상을 입고 쓰러진 혁과 정령력을 거의 소진한 바람의 상급정령과 티아, 소드 마스터 유저의 기세에 눌려 스탯이 감소 된 리아.
     물론 스탯은 영구적으로 감소되는 것 아니라 마스터의 기세에 눌린 거뿐이라 마스터가 기세를 거두거나 일정거리를 두지 않는 이상 스탯이 감소된 상태가 유지된다.
     마지막으로 다른 한 명의 소드 마스터 유저와 힘겹게 사투를 벌이고 있는 강찬과 레온과 이제 몇 안 되는 궁수 유저와 기사 유저들.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    *     *
     “오호. 우리 공성 측에 소드 마스터가 둘씩이나 남아 있었다니.”
     검은 복면을 쓴 자객단 길드원 중 한 명이 말했다.
     소드 마스터 유저의 등장으로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전장이 충분히 정리될 거라고 생각해 상황 정리를 해버린 것이었다.
     그때 다른 복면인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한 유저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에서 투척용 단검 하나를 꺼내더니 휘리릭 휘리릭 돌리기 시작했다.
     휘리릭, 휘리릭.
     덥석.
     손에서 회전시키던 단검을 움켜쥔 유저가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상한 스킬을 쓴 기사와 마법사라… 소드 마스터가 밀리고 있군. 슬슬 나서서 전장을 정리하자.”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의 말에 나머지 길드원 전원이 대답했다.
     잠시 후, 길드 마스터까지 포함해 약 스무 명 가량 되어 보이는 유저들이 수도 세인트 모닝에 속속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소드 마스터를 상대하는 두 유저에게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하는 자객단 길드원들. 모두들 마법사 유저를 향해 일제히 투척용 단검과 표창을 던졌다.
     쉬잉!
    *    *   
     “블링크!”
     공간전이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투척용 단검과 표창을 피해낸 레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검은 복면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저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자신을 공격해오는 것을 보아 공성 측 유저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레온이 캐스팅을 할 필요도 없이 시동어를 외쳤다.
     “아이스 볼, 아이스 볼, 아이스 볼!”
     대기의 수분이 응축되고 응축되어 이내 오싹한 냉기를 뿜어내는 얼음 덩어리가 되어 레온을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레온이 손짓하자 아이스 볼 하나가 자객단 유저들을 향해 쏘아졌다. 뭉쳐있던 자객단 유저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레온이 재빨리 다른 두 개의 아이스 볼을 날렸다.
     자객단 유저들은 레온이 쏘아 보낸 아이스 볼을 가볍게 피해내고 모두들 투척용 무기를 레온에게 던졌다. 재빨리 실드를 펼쳐 투척용 무기들을 전부 막아낸 레온에게 자객단 길드원 열 명가량이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더블 캐스팅이라면 7클래스 이상 되어야 할 텐데. 아직 5클래스에 멈춰선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군.’
     재빨리 실드를 거둔 레온이 외쳤다.
     “블링크!”
     레온의 모습이 안개에 가려지듯 그 자리에서 퍽 꺼졌다. 순식간에 레온과 거리를 좁혀오던 자객단 길드원들이 자리에 멈춰서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레온은 수인을 맺으며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레온을 중심으로 기의 파동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상당히 먼 거리에서 캐스팅을 했기에 소드 마스터 유저들도 기의 파동을 느끼지 못했다.
     캐스팅을 끝마친 레온이 손바닥을 쫙 편 채 시동어를 외었다.
     “체인 라이트닝.”
     파츠츠츠
     파직파직!
     강력한 전기 충격으로 다수의 적을 쓰러뜨렸던 체인 라이트닝이 다시 한 번 모습을 나타냈다. 레온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체인 라이트닝을 전장으로 쏘아 보냈다.
     콰르릉!
     목표물은 합공을 하던 자객단 유저들. 체인 라이트닝이 적중하자 주변에 있던 다른 아홉 명의 자개단 길드원에게 푸른 뇌전이 옮겨 붙기 시작하더니 이내 맹렬히 방전하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지직!
     “크아아악!”
     “으아악!”
     온몸이 시커멓게 타버린 자객단 유저 10명이 그대로 게임아웃 되어버렸다. 그저 숫자로 밀어붙이며 합공하는 그들로썬 레온을 이길 확률이 현저히 낮았고, 당연한 결과였다.
     레온은 힘겹게 소드 마스터 유저를 막아내고 있는 강찬에게 다가갔다.
     “하앗!”
     피잉!
     피잉!
     강기와 강기가 서로 부딪혔고, 강기의 파편이 어지럽게 떨어졌다. 강찬과 소드 마스터 유저는 처음엔 엇비슷하게 맞붙는가 싶더니 점점 강찬이 눈에 띄게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재빨리 뒤로 물러난 강찬이 플레임 웨폰을 거두고 외쳤다.
     “파이어 볼!”
     그에 배구공만 한 화염구가 문 블레이드 검심 끝에 맺혀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차앗!”
     배구공만 한 화염구가 기염을 토해내며 소드 마스터 유저에게 쏘아졌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 유저는 가볍게 화염구를 가라낸 뒤 강찬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칫, 역시나 소용없는 짓이군. 플레임 웨폰!”
     화르르륵.
     문 블레이드의 검신을 타고 시뻘건 화염이 아지랑이를 피우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찬은 화염을 머금은 문 블레이드를 종횡무진 휘두르기 시작했고 소드 마스터 유저는 강찬의 공격을 여유 있게 막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여유도 잠시뿐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리고 그 뒤로 일어난 일은 소드 마스터 유저가 생각지도 못 한 결과를 초래했다.
     “슬로우(Slow)."
     아무리 여유를 부리고 있다지만 강찬을 상대하고 있었기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낮은 클래스의 저급한 마법에 걸려든 것이었다.
     일시적으로 몸의 움직임이 상당히 느려진 것을 느끼며 소드 마스터 유저가 외쳤다.
     “이, 이런!”
     소드 마스터 유저가 주춤하는 사이, 강찬이 화염을 머금은 문 블레이드를 소드 마스터 유저의 가슴팍을 향해 찔러 넣었다.
     “하앗!”
     푸푹!
     “크헉…….”
     소드 마스터답지 않게 허무한 게임아웃이었다.
                   *    *     *
     나와 티아, 리아, 루카와 다른 한 명의 수성 쪽 유저가 them 소드 마스터 유저를 막아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령력을 모두 소진한 티아의 상급 정령이 정령계로 강제 역소환되었고, 루카는 섣불리 소드 마스터 유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리아의 크로의 보우 건도 소드 마스터가 끌어올리는 강기 앞에선 무용지물이었고, 나의 파워 샷은 충격을 줄 순 있으나 소드 마스터 유저가 파워 샷을 쏠 기회를 주지 않고 치고 들어왔다.
     ‘이제 남은 건 소드 마스터 유저 한 명뿐인가?’
     나는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중상을 입고 쓰러진 혁에게 접근하는 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검은 복면의 유저들이 눈에 띄었다.
     자객단 길드 마스터와 같은 복장의 유저들. 제각기 무기를 들고 접근하는 것을 보아 공성군임이 분명했다.
     “루카! 루샤크를 지켜!”
     왕왕!
     루카가 희미한 잔상을 남기며 쏜살같이 혁에게 내달렸다. 그리고 접근하는 자객단 유저에게 몸통 박치기를 먹임과 동시에 혁을 등지고 서서 이빨을 드러낸 채 낮게 목청을 울리기 시작했다.
     리아도 루카를 돕겠다며 퀵 스텝을 걸고 자객단 유저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는 사이 수성 측에서 우리와 함께 소드 마스터 유저와 맞서던 기사 유저가 소드 마스터 유저의 검에 일격을 허용하고 절명했다.
     ‘제길, 저런 괴물을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검을 치켜들고 기세를 끌어올리는 소드 마스터 유저를 며 머리를 쥐어짰다. 소드 엑스퍼트 유저들과는 달리 갑옷에까지 강기를 주입해 화살이 먹혀들지 않으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파워  을 먹인다면 치명타와 함께 극심한 부상률을 남겨줄 수는 없으나 충격을 주어 생명력을 깎을 순 있다. 하지만 저 유저가 내가 파워  을 쏘도록 내버려 둘 양반이 아니었기에 나는 더욱 머리를 쥐어짰다.
     일단 움직임이라도 봉할 수만 있다면…….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나는 소드 마스터 유저 묶어둘 획기적인 기술을 생각해두었다, 바로 현무의 그리스!
     나는 피식 웃으며 활시위를 풀고 활을 등에 둘러멘 뒤 소드 마슽 유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현무, 너만 믿는다!
     전투 중에 해서 안 될 짓을 하는 나를 보며 소드 마스터 유저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간이라면 전투 중에 무기에 손을 때지 않는 게 정상일 텐데.”
     나는 소드 마스터 유저를 비웃으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유저와 2미터 남짓 되는 거리에서 우뚝 멈춰선 나는 유저의 투구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안광에 신선을 두었다.
     “오빠! 어서 뒤로 물러나!”
     티아가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티아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하급정령의 그리스에 소드 마스터가 넘어질지가 의문이기도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스.”
     “뭐?”
     소드 마스터 유저가 ‘뭐?’ 하는 사이 현무가 그리스를 발동시켰고, 현무의 그리스에 소드 마스터 유저가 휘청하더니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소드 마스터에게도 현무의 그리스가 먹히는가보군. 나는 백 스텝을 밟고 뒤로 멀찍이 뒤로 물러섰다.
     “저급한 술수를 쓰다니. 궁수가 어찌 마법을…….”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법이 아니라 정령술이다.”
     그러는 사이 소드 마스터 유저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쥔 장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고 지면을 박찼다.
     “정령술이고 나발이고, 죽어랏!”
     “그리스!”
     벌러덩~!
     꽈당~!
     식으로 전개 될 줄 알았으니 소드 마스터 유저가 휘청하는가 싶더니 이내 중시을 잡고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마찰계수가 0인 지면에서 넘어지지 않다니,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똑같은 수법에 두 번씩이나 걸려들지 않는다.”
     “으악, 배, 백 스텝!”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장검이 휘둘러지는 것을 본 나는 재빨리 백 스텝을 밟고 뒤로 물러났다.
     “소용없다!”
     “으, 으악! 백 스텝, 백 스탭, 백 스태엡!”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사력을 다해 소드 마스터 유저의 검을 피했다. 별것 아닌 녀석이 이렇게 자신을 도발시키오니 슬슬 열이 받은 모양이다.
     놈은 전과는 같은 날카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인의 영역에 발을 들인 유저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낼 순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장검이 내 왼쪽 다리를 훑고 지나갔고, 그에 나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오러 블레이드가 훑고 지나간 상처 부위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윽!”
     나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겨우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겨우 일어섰을 때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내 목을 쇄도해오는 소드 마스터 유저의 장검이었다.
     “앗!”
     나는 눈을 감았다. 극심한 통증이 목을 엄습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빠아!”
     뒤에서 들려오는 티아의 목소리.
     티아, 미안하다.
     체념을 하고 눈을 감았을 때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드!”
     나는 즉시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강찬과 함께 소드 마스터 유저를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는지, 어느새 나타난 레온이 나를 공격해오는 소드 마스터 유저에게 일격을 가한 것이었다.
     소드 마스터 유저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쳇, 낮은 클래스의 마법이라 기의 요동을 눈치 채지 못했군.”
     소드 마스터 유저가 말을 늘어놓는 사이 또 하나의 타오르는 화염구가 쏘아졌다. 재빨리 날아오는 파이어 볼을 반으로 갈라낸 소드 마스터 유저가 레온에게 시선을 두었다.
     레온이 매직 미사일과 파이어 볼, 아이스 볼을 난사하기 시작했고, 소드 마스터 유저는 그것을 일일이 하나하나 쳐내기 시작했다. 정말 놀라운 검놀림이었다.
     나는 재빨리 백 스텝을 밟고 뒤로 물러나 등에 둘어멘 활을 손에 쥐고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걸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었다.
     ‘좋아, 기회다! 파워 샷을 먹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야!’
     나는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윈드 애로우, 파워 샷…….”
     나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았고 화살은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대기를 갈랐다.
     쐐애액!
     자신을 향해 쏘아진 화살의 파공성을 들었나본지 소드 마스터 유저는 재빨리 뒤돌아 화살을 쳐낸 뒤 레온이 난사하는 마법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    *     *
     레온과 함께 소드 마스터 유저를 쓰러뜨리는데 성공한 강찬은 즉시 루카와 리아에게 파상적인 공격을 가하는 자객단 길드원들에게 몸을 날렸다.
     ‘다수가 저렇게 덤벼드니 버텨낼 재간이 없지. 한 놈, 한 놈 보면 별것 아니데 말이야.’
     강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파이어 볼.”
     문 블레이드의 끝에 맺힌 배구공만 한 화염구가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강찬이 검을 휘두르자 타오르는 구체가 기염을 토해내며 자객단 유저들을 향해 쏘아졌다.
     퍼엉!
     “흐억!”
     “뭐, 뭐야?!”
     어디선가 날아온 파이어 볼에 일격을 허용한 자객단 길드원중 한 명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나동그라졌으나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객단 길드원들의 시선은 파이어 볼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았고, 곧 파이어 볼을 쏘아 보낸 유저가 그들의 사야에 들어왔다.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강찬에게 달려들기 시작하는 자객단 유저들. 열 명 가량 되는 유저가 강찬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둘러싸기 시작했다.
     강찬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풋. 플레임 웨폰.”
     화르륵.
     문 블레이드에 1.5미터 가량 되는 타오르는 화염이 밀려올라 왔고 강찬은 지면을 박차고 자객단 길드원 한 명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푸욱!
     “컥!”
     볼 것 없이 즉사였다. 그렇게 단 일격에 동료가 허무하게 나가떨어어지는 것을 본 자객단 길드원들이 성난 얼굴로 모여 진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 길드원을 이렇게 쉽게 제압하다니.”
     “하나하나 상대하면 별것 아닌데, 여럿이서 달려들어 유저들이 당하는 것일 뿐. 너희가 강하다고 착각하지 마.”
     자객단 길드 마스터의 마에 강찬이 대답했다. 그러자 자개단 길드 마스터가 말했다.
     “훗. 그런 말은 많이 듣지.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역겨운 변명이라고.”
     “그건 니들 생각이지. 덤벼라.”
     “지금 우리 열 명은 정예 중의 정예다. 가자!”
     검은 복면의 유저들이 지면을 박차고 튀어 올라 투척용 무리글 던짐과 동시에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각자 손목에 착용한 카타르와 파타에서 칼날을 뽑아낸 뒤 강찬을 찔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방 어디에도 빠져나갈 구멍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강찬의 입가엔 미소가 번져있었다. 굳이 피하지 않아도 막아낼 방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강찬이 외쳤다.
     “파이어 실드!”
     화르륵!
     그러자 순간, 강찬의 몸을 중심으로 시뻘겋게 타오르는 둥근 구체의 막이 형성되더니만 외부의 공격을 전부 막아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형성된 둥근 화염에 복면을 쓴 유저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뭐, 뭐지?”
     “설마 실드인가?”
     모두들 당황해 하고 있을 때 강찬이 파이어 실드를 거두고 풀레임 웨폰을 시전했다.
     “말했잖아. 너희들 별거 아니라고.”
     “뭐? 이 자식!”
     강찬의 말에 도발당한 한 유저가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 손목에 찬 파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멈춰! 돌아와!”
     길드 마스터의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찬에게 종횡무진 파타를 휘두르는 유저.
     강찬은 유저의 공격을 모두 막아낸 뒤 검을 힘껏 휘둘러 유저의 왼쪽 어깨어서 오른쪽 허리에 줄을 그었다. 그대로 몸이 반토막이 난 유저는 게임아웃이 되었다.
     남은 여덟 명의 유저가 강찬에게 합공을 가하기 시작했고 강찬은 힘겹게 막아내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은 약하지만 이렇게 여럿이 치고 들어오는 데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강찬에게 일격을 허용하는 유저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강찬이 점점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크악!”
     “흐억!”
     강찬의 검에 단번에 두 명의 유저가 마저 나가떨어져 게임아웃 되었고, 이제 남은 유저는 길드 마스터와 세 명의 유저뿐이었다.
     자객단 길들의 길드 마스터의 두 눈엔 절망감이 서려 있었다.
     자신의 길드 최고 정예가 단 한명의 유저에게 이렇게 무너지다니…….
     그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화살이 자객단 유저들 중 한 명의 가슴팍에 박혔다. 그에 모두들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로스 보우 건을 들고 복면을 쓴 유저들을 겨냥하고 있는 리아. 리아가 또다시 방아쇠를 당기자 볼트가 대기를 가르며 자객단 길드원 중 한 명에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날아오는 화살을 보며 재빨리 몸을 던지는 유저. 하지만 몸을 던짐과 동시에 어디선가 나타난 흰 늑대에게 목덜미를 물리고 말았다.
     “정예 중의 정예가 이렇게 무너졌군.”
     강찬의 입에서 냉소가 비집과 나왔다.
     자객단 길드 마스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공성전 성공 시 보상 받을 아이템에만 눈이 멀어 기습을 하려고 했던 그에겐 참담한 결과였다.
     “그럼, 잘 가라.”
     유저가 허탈해 하고 있을 때 강찬의 문 블레이드가 유저의 목을 베었다. 남은 한 명은 겁을 집어먹고 로그아웃을 했는지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렇게 자객단을 순식간에 섬멸시킨 강찬의 날카로운 시선이 소드 마스터 유저와 힘겹게 맞붙어 싸우고 있는 레온과 현성에게 향했다.
                   *    *     *
     여기저기 부서진 건물이 눈에 띠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서포트해주지 않는다면, 소드 마스터 유저가 레온에게 파상적인 공격을 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또다시 허리춤에서 꺼내든 화살의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파이어 애로우, 윈드 애로우, 파워 샷……."
     푸슝!
     쐐애액!
     화살촉에 화염을 머금은 커다란 화살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소드 마스터 유저에게 날아갔다. 그는 난사되는 레온의 마법에 내 화살을 쳐낼 재간까지는 없었는지, 갑옷에 강기를 끌어올려 날아오는 화살을 그냥 몸으로 받았다.
     콰앙!
     “크윽!”
     상당한 충격이 엄습했는지 소드 마스터 유저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빠르게 날아든 매직 미사일 다발과 대여섯 개의 화염구가 소드 마스터 유저의 몸에 적중했다.
     퍼퍼퍼펑!
     퍼펑!
     소드 마스터 유저를 중심으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레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혁이 헐레벌떡 달려와 내게 물어왔다. 나느… 잠깐, 혁?! 나는 고개를 돌려 혁을 바라보았다. 핏자국은 선명했지만, 가슴팍에 상처는 깨끗하게 아물었다.
     언제 치료한 거지? 아무튼 지금은 소드 마스터 유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더욱 중요했다.
     “공성 측의 유저는 저 소드 마스터 유저밖에 안 남았어. 저 유저만 잡으면 수성에 성공하는 거야!”
     “그래? 그럼 우리가 최후의 생존자라 이거군. 좋아, 간닷… 켁켁, 무, 무슨 짓이야!”
     무턱대고 달려드는 혁의 뒷덜미를 잡은 나는 차분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지금 상대는 소드 마스터야, 이 바보야. 생각 좀 하고 달려들어. 또 아까처럼 당하면 어떻하게. 운이 좋아서 그 정도였지 하마터면 게임아웃 될 뻔했다, 너.”
     “으흠. 생각해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배틀 해머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뒤로 한걸음 물러난 혁이 말했다.
     그러는 사이 연기가 걷혔고, 투구가 벗겨진 채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소드 마스터 유저를 볼 수 있었다. 잔뜩 열이 올랐는지 유저의 두 눈에선 살기가 느껴졌다. 그와 함께 밀려오는 폭풍 같은 기세!
     나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유저가 지면을 박차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내 복부에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장검을 찔러 넣으려는 순간,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낸 강찬이 소드 마스터 유저의 검을 막았다.
     피잉!
     강기와 강기의 충돌로 인해 강기의 파편이 어지럽게 떨어져 내렸다
     “카이루!”
     “후우, 조금만 더 늦었으면 레드, 네 복부에 이 유저의 장검이 꽂힐 뻔했어.”
     나는 강찬의 말을 들으며 백 스텝을 밟고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혁이 녀석도 방해가 되지 않게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그때였다.
     “카이루 비켜서세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레온의 목소리. 그에 강찬이 뒤로 재빨리 물러났고 레온의 주문영창이 이어졌다.
     “썬더 브레이크(Thunder Break)!"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이런 데서 유래된 것일까?
     뭉게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하늘에 새파란 뇌전이 일렁이더니 이내 굵직한 번개가 큰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콰르릉!
     파직파직.
     썬더 브레이크가 작렬하자 소드 마스터 유저의 몸은 새카맣게 타버렸고, 머리카락이 끝부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쿨럭.”
     소드 마스터 유저가 기침을 하자 붉은 선혈이 왈칵 쏟아졌고, 조금 버티는가 싶더니 이내 고꾸라졌다.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광경이 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부서진 건물이 눈에 띄었고, 남은 유저는 얼마 없었다. 나와 티아, 혁, 강찬, 레온, 루카, 리아…….
     기분은 좋았지만 끝이 무지 허무했다. 치고받는 사이 여러 유저가 게임아웃 되었고 같이 힘을 합해 싸우던 유저들도 게임아웃 되었다.
     허탈감을 느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마른하늘에 새하얀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보나마나 운영자겠지. 나는 고개를 들어 운영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안녕하세요. 운영자 추입니다. 공성 측의 유저들을 섬멸시키고 남은 생존자분들이군요. 이번 이벤트는 수성군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수성 성공 시 지급되는 아이템과 경험치를 분배해 드리겠습니다. 아이템은 홈페이지에 표기 되었던 아이템 중 하나를 자동적으로 분배시켜 줄 것이며 상당량의 경험치를 분배해 드리겠습니다.]
     ‘드디어 끝이구나.’
     허탈감이 커서 그런지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레벨업! 스텟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업! 스텟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업! 스텟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인지 엑스퍼트-(상급)가 되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백호(바람)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현무(땅)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주작(불)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정령 청룡(물)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수도 세인트 모닝의 수호자 배지를 얻었습니다.]
     레인지 엑스퍼트 상급이라.
     나는 연달아 뜨는 메시지 창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제 곧 레인지 마스터가 될 수 있겠군.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나지막한 운영자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자동 로그아웃이 진행되었다.
     [공성전 이벤트에 참가해주신 회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오픈 3주년 기념 이벤트 공성전, 이렇게 막을 내리겠습니다. 30초 후 자동 로그아웃이 진행될 것이며 자동 로그아웃 후 약 5시간가량 패치가 있을 예정이니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에 가보시기 바랍니다.]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제11장   예고 없는 습격과 재회(1)

     푸쉬쉬.
     위잉
     철컥.
     캡슐의 문이 열렸고 나는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어 머리맡에 두곤느 게임베드에서 일어났다.
     오픈 3주년 기념 이벤트 치고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난 공성전. 하지만 수성에 성공하고 지급되는 아이템과 경험치를 얻었으니 불만은 없다.
     레인지 엑스퍼트 상급이 된 것이 관건이긴 하지만… 흐흐, 3레벨업 했으니 내 레벨은 이제 62인가?
     친구들에 비해 너무 낮은 감이 있긴 했지만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후우. 패치하는 동안 뭘 하지?”
     캡슐에서 나온 나는 세릴리아 월드를 하기 전, 만지작거리던 잡동사니가 잘 정리된 상자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차, 안경을 껴야지. 나는 책상 위에 올려둔 안경을 끼고 저번에 조립하다 만 기계부품을 꺼냈다. 그동안 얼마나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 먼지가 이렇게 다 쌓여 있을까?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설명서와 함께 나머지 부품을 꺼냈다.
     “이거 안 만진 지 꽤 돼서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할지 모르겠네.”
     나는 기계부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패치를 하는 동안 넉 달 전에 만들다 만 인공지능 미니 모형 비행기부터 조립을 할 생각이었다.
     뭐 인공지능 시스템까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있는 것을 조립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 생각났다. 꽤나 복잡해서 관두려다 만 그 골칫덩어리 비행기였군.”
     나는 부품 하나하나 구별해가며 나사와 드라이버를 동원해 비행기를 조립해나가기 시작했다.
     미니로봇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손을 많이 써야 하고 그만큼 머리를 굴려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모터와 엔진을 조심히 다루면서 다른 기계 부품들을 맞춰 끼워 넣는 것을 반복해 꽤 긴 시간 끝에 비행기는 완성 되었다.
     “후우. 지금 시간이 몇 시지?”
     나는 방 안에 걸린 전자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군. 앞으로 4시간 후면 패치가 끝날 시간이었다. 한 시간 정도 걸려 완성 된 비행기.
     나는 완성된 비행기를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패치가 끝날 때까지 잠을 자 둘 생각이었다. 내일은 토요일이니 학교에 안가는 날이니까, 밤샘을 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컴. 이따 4시간 후에 나 좀 깨워줘.”
     「네, 알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중원(중국 채널).
     오픈 3주년 기념 이벤트는 세릴리아 대률(한국 채널)에서만 했기 때문에 다른 유저들은 게임 플레이가 가능했다.
     중원의 한 숲속 오솔길을 두 유저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중 한 유저는 희끗희끗한 머리와 허연 수염이 늘어진 노인이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백색의 도포를 걸친 노인은 참으로 순박한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두 눈에서 뿜어지는 안광과 툭튀어나온 태양혈이 그가 이룬 무의 성취를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
     노인과 나란히 걷고 있는 유저는 입고 있는 흰 무사복과 잘 어울리는 까맣고 긴 머리와 짙고 검은 눈썹과 흑진주를 연상시 키는 까만 눈,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한 소년이었다.
     큰 키에 비해 앳되어 보이는 소년은 아무데서나 볼 수 없는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척 보면 절세미남(絶世美男)이란 단어를 연상시킬 정도로 뛰어난 용모를 가진 소년이었다.
     소년의 두 눈에서도 노인 못지않게 형형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노인과 나란히 걷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왜 부르느냐?”
     소년의 말에 노인이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의 눈치를 보던 소년이 조심스레 말을 잇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세릴리아 대륙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궁금하지 않나요?”
     소년의 말에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세릴리아 대륙에 가보고 싶은 게냐?”
     “네!”
     소년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과 나란히 걷던 노인이 고개를 들어 잔잔한 눈빛으로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친자식 보듯 애정 어린 눈빛으로 소년을 올려다보는 노인. 노인과 소년은 조부 관계임이 틀림없었다.
     노인이 말했다.
     “가서 사고치지 않을 자신 있느냐?”
     “피, 제가 무슨 사고뭉치인가요.”
     소년이 뽀로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노인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고뭉치는 아니더라도 걱정이 되는구나.”
     “걱정 마세요. 저도 이제 다 컸다구요.”
     “허허, 녀석.”
     소년을 보고 웃던 노인이 다시 시선을 정면을 향한 채 입을 열었다.
     “형도 만나볼 생각이냐?”
     “네. 못 본 지 꽤 됐잖아요. 형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노인의 말에 소년이 대답했다. 그에 노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따 가보거라. 지도 하나 구해줄 테니 알아서 잘 찾아가야 한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마인데, 세릴리아 대륙에서 누가 시비를 걸어온다 한들 가급적이면 피하거라.”
     “예!”
     소년이 힘차게 대답했다.
                   *    *     *
     벌써 4시간이 지났나?
     나는 컴이 들려주는 알람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졸음이 쏟아졌지만 오늘은 밤새 게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게임기기 허리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눌러 캡슐의 문을 열었다.
     게임베드에 누운 뒤 헤드셋을 뒤집어쓰자 캡슐의 문이 닫혔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62.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우와, 깔끔하게 복구시켜놨네!”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한 나는 깔끔하게 정리 된 수도 세인트 모닝을 빙 둘러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캉캉!
     내가 접속할 때 자동적으로 소환되었는지, 루카가 내 옆에서 꼬리를 흔들며 캉캉 짖고 있었다. 나는 내친김에 상태 창을 열었다.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62
     생명력(HP). 700
     마나(MP). 490
     스태미나(SP). 1,190(배고픔 수치 15%/ 갈증 6%)
     힘 137
     체력 65
     민첩 173
     손재주 461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260~380
     방어력 10
     마법방어력 2
     남은 스탯 포인트: 15
     바람(백호) Lv. 6.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5.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4.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4. 친화력 100%
     [상세정보]
     상태 창을 쭈욱 읽어 내려가던 도중 나는 손재주 스탯에 변화가 있는 것을 보곤 피식 웃었다.
     가구 제작스킬의 수련치 100%를 올리는 동안 손재주 스탯이 20이나 증가했던 것이었다. 나는 남은 스탯 포인트를 손재주와 민첩에 분배한 뒤 상태 창을 닫았다.
     “수성 성공 시 지급되는 아이템이 왔을 텐데 무슨 아이템이려나?”
     잡화점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아이템 창을 열었다. 반투명한 초록색의 직사각형 모양의 입체 창이 열렸고 아이템 창이 열리자 또 하나의 메시지 창이 생성되었다.
     [수성에 성공하신 걸 축하합니다!]
     “뭐야, 이건?”
     나는 메시지 창을 닫고 아이템 창 구석진 자리에 놓인 검은 부츠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신고 있는 검은 부츠와 엇비슷하게 생긴 아이템이었다.
     ‘쳇, 수성을 성공했는데 주는 아이템이 고작 이런 부츠라니, 절대 신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템의 옵션을 보기 전까지, 그러한 나의 다짐은 몇초도 안 되어 깨질 것이란 걸 아무도 몰랐다.
     ‘그래도 어디 옵션이나 한 번 볼」 허억?!’
     [신속의 검은 부츠(유니크)]
     설명: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부츠이다. 물들인 사슴 가죽으로 만든 튼튼하고 내구력이 강한 부츠.
     방어 12증가
     마법방어 10증가
     효과- 이동속도 70%증가.
     민첩 스탯 30포인트 증가.
     행운 스탯 10포인트 증가.
     이동속도 증가 스킬 사용시, 추가 이동속도 20%증가, 방어 10 감소.
     내구력 50/50
     유, 유니크!
     나는 재빨리 신고 있던 부츠를 벗고 신속의 검은 부츠를 신었다.
     부츠를 착용하자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이템의 옵션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이동속도 70%증가에 퀵 스텝을 시전하면 추가 이동속도 20%가 증가되는 대시 방어력이 10 깎인다. 상당히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대신 방어력을 깎는 거군.
     어차피 방어에 신경을 쓰지 않는 나였기에 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뭐가 또 없나? 아이템 창을 쭉 둘러보고 있을 때 은빛을 띠는 작은 날개모양을 한 배지를 볼 수 있었다. 이게 아까 받은 ‘수도 세인트 모닝의 수호자’ 배지인 것 같았다.
     배지의 모양이 참 예쁘군. 나는 배지를 집어 들고 아이템의 옵션을 보았다.
     [수도 세인트 모닝의 수호자]
     설명 : 불순물이 전혀 없는 백금으로 만든 날개모양 배지. 오픈 3주년 이벤트에 참가한 수성군 유저 중, 생존한 유저들에게만 주어지는 아이템.
     효과- 배지착용 시 NPC들에게 높은 호감도를 얻을 수 있다.
     ‘NPC들에게 높은 호감도를 얻을 수 있다’라.
     NPC와의 호감도가 극에 달하면 먼저 말했던 것처럼 물건을 아주 싼 값에 사거나 필요한 정보 등을 얻을 수 있다. 좋은 아이템 하나를 얻은 셈이었다. 앞으로 물건을 사거나 떠도는 소문을 물을 때 적합할 것 같았다.
     유저들이 하나 둘 접속하기 시작했는지, 수도 세인트 모닝 분수대 광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많은 유저들로 가득해졌다.
     이번 오픈 3주년 기념 이벤트인 공성전은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반면에 이번 이벤트에 대해 비속어를 남발하는 유저도 많았다. 꽤 박진감 넘치는 이벤트였지만 끝은 너무도 허무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이벤트에 참가한다던 학교 친구들은 공성전을 할 때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루카가 꼬리를 흔들며 내 앞으로 다가와 까만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제법 늑대의 티를 갖추었지만 늑대나 개가 거기서 거기. 나는 그런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공성전이 끝나자 세인트 모닝에 있던 엘프 유저들과 고레벨의 유저들이 아리스 노아나 티르 네티아로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나도 달리 할 일이 없었기에 잡화점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    *     *
     세릴리아 월드 기획팀.
     직원들과 운영진들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녹초가 되어있었다.
     오픈 3주년 기념 이벤트인 공성전이 끝난 후 페허가 된 수도 세인트 모닝 복구와 다른 여러 가지 문제점을 4시간 동안 쉼 없이 수정하느라 바빴었기 때문이었다.
     ‘엄청나군. 한낱 그래픽일 뿐인데, 이렇게 세세하게 표현이 가능하다니, 역시 과학은 위대해.’
     김 팀장이 공성전 때 운영자 추가 녹화해둔 동영상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김 팀장의 시선은 상위 클래스의 마법을 발동시키는 마법사 유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복잡한 수식을 빠른 시간 내에 계산해 발현시킨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복잡한 수식을 이토록 빨리 계산하다니… 이미 공식과 그 해답을 머릿속에 외워둔 건가?’
     마법사 유저를 지켜보던 김 팀장의 시선이 다른 모니터로 옮겨졌다. 모니터는 검은 복면을 쓴 다수의 유저와 붉은 망토를 둘러멘 거대한 철궁을 든 유저를 비추고 있었다.
     ‘다수의 어쌔신과 단수의 궁수라. 빠른 몸놀림을 가진 어쌔신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면 궁수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 할 텐데…….’
     김 팀장이 안쓰럽다는 듯 궁수 유저에게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김 팀장의 예상과는 달리 궁수 유저는 능숙하게 어쌔신들의 공격을 흘려내며 근거리에서 강한 공격을 가했다.
     그에 김 팀장은 넋을 잃고 다수의 어쌔신과 맞붙는 궁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오픈 베타 이후, 이런 식으로 근거리의 적을 제압하는 궁수는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활 또한 기존의 궁수들이 쓰는 것과는 다른, 무겁고 투박해 보이는 굵직한 철제 활이었다. 그에 걸맞은 창과 같은 화사도 눈에 띄었다.
     “지금 팀장님께서 보고 계신 궁수 유저가 예전 팀장님께서 수시하고 했던 유저입니다. 현재 생활직 가구 제작에 손을 댔는데 불과 일주일 만에 수련치 100%를 오렸다는 것이 관건이지요.”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김 팀장이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 향했다.
     이번 동영상을 촬영한 운영자 GM추였다.
     운영자 추의 말에 작업실에 있던 운영진 몇과 김 팀장은 경악을 했다.
     “이, 일주일 만에 그게 가능하다니…….”
     김 팀장의 시선이 다시 모니터에 고정되었다.
                   *    *     *
     “가구 제작은 이제 안 하는 거니?”
     초록색 털실뭉치로 뜨개질을 하던 도중 벨터가 물어왔다.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것만 하구요.”
     내가 뜨개질을 해서 만들 아이템은, 밝은 초록색의 벙어리장갑과 밝은 초록색의 목도리였다.
     오랜만에 조용히 앉아 뜨개질을 하니 세릴리아를 처음 할 당시 잡화점에 와서 세 달간 생활직을 하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처음 벨터를 만났을 때와 종이 거북이를 천 마리 접었던 일, 여러 가지 잡동사니를 만들어 아이템 창이 지저분해져 벼륙시장에 개인상점을 열고 아이템을 팔았던 일.
     이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일을 회상하며 뜨개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반투명한 직사각형의 입체 창이 내 눈앞에 떴고 입체 창에 적힌 문구를 보자 내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티아 젠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승인!”
     대화 요청을 승인하기가 무섭게 티아가 소리쳤다.
     -오빠! 어디야?
     “나 지금 잡화점이야. 너는?”
     -으응 나는 지금 분수대 광장 앞인데. 잡화점으로 금방 갈게!
     “응, 그래.”
     [티아 젠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대화가 끊긴 후에도 나는 빙긋 웃으며 뜨개질을 해나갔다 지켜보던 벨터가 말했다.
     “응? 갑자기 급방긋이구나.”
     “헤헤. 티아가 온다고 해서요.”
     “그렇게 좋으냐?”
     “당연하지요. 여자친구인데.”
     ‘허허, 녀석도 참. 역시 젊을 때가 좋은 거야.“
     벨터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티아는 금세 잡화점으로 왔다.
     그녀는 우선 벨터에게 인사를 하고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루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이내 잡화점 앞 탁자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뭐 만드는 거야?”
     “응.”
     “뭐 만드는데?”
     “목도리랑 벙어리장갑.”
     “와아. 남자가 이런 것도 하는구나.”
     티아가 신기한 듯 바라보며 말했다. 쩝, 남자가 이러 걸 하지 말란 법이 있니? 티아.
     뜨개질을 하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은 티아가 돌돌 감겨있는 털실뭉치를 들어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여자라 그런지 이런데 흥미가 있었는지 이내 말을 걸어왔다.
     “오빠, 나도 한번 만들어볼래.”
     훗. 이걸 하려면 기본적인 천옷 만들기 스킬을 입수해야 한다.
     스킬이 없이도 할 수 있긴 하지만 아무리 많이 해도 스킬이 없는 이상 수련치란 게 없으니 실력이 늘지 않는다.
     내가 말할 필요 없이 내가 마주보는 자리에서 잡화물품을 수리하던 벨터가 말했다.
     “티아, 혹시 천옷 만들기 스킬을 가지고 있나요?”
     “천옷 만들기 스킬이요? 그게 뭐에요?”
     “뜨개질과 같은 여러 가지 의류를 제작할 때 쓰이는 스킬이지요. 여 옆 서점에 가서 스킬 북을 구입한 뒤 책을 정독한 뒤에 스킬을 입수하면 됩니다.”
     그에 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점으로 냅다 달려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스킬 북을 들고 잡화점 앞으로 달려오는 티아. 얼마나 해보고 싶었으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킬 북을 구입해 왔을까?
     나는 피식 웃으며 계속해서 뜨개질을 해나갔다. 이미 천옷 만들기 스킬을 마스터한 나는 순식간에 목도리를 다 뜨고 벙어리장갑을 천천히 떠 나갔다.
     책을 정독하고 스킬을 입수한 티아가 탁자 위에 놓인 잡화물품이 든 상자에서 털실뭉치를 꺼내려 할 때 내가 제동을 걸었다.
     뜨개질이란 무턱대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손뜨개질의 기초인 기호부터 알아야 한다.
     손뜨개질의 기호는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가다난 기호로 표시해 좋은 것으로 각 기호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야 책이나 그 밖의 자료를 보고 손쉽게 만들 수 있다.
     바늘과 실을 준비하여 스킬 북에 실린 그림을 따라하면 쉽게 익힐 수 있었다.
     “그러니까, 먼저 기본적인 기호부터 외워둬. 스킬 북을 펼치면 제일 첫 장에 나올 거야.”
     그에 티아가 스킬 북을 펼쳐 첫 장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기 시작하더니 뜨개질을 하는 내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오빠는 이걸 다 외운 거야?”
     “나는 스킬을 얻자마자 스킬 북을 아이템 창에 모셔두고 바로 뜨개질을 시작했지. 현실에서도 이런 잡동사니를 쭉 만들어왔거든. 기계부품 조립이라던가.”
     “와아… 대단하다.”
     티아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시선을 스킬 북으로 돌렸다.
     이거 쑥스럽군. 기본적인 기호를 다 머릿속에 담아두었는지, 티아가 이후 잡화물품이 담긴 상자에서 뜨개질에 필요한 아이템을 꺼내들고 스킬 북에 적힌 그대로 천천히 뜨개질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이라 그런지 많이 서툴렀다.
     나는 뜨개질을 하던 것을 내려두고 뜨개질을 하고 있는 티아의 손에 내 거친 손을 얹었다.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야. 어때, 쉽지?”
     손을 움직여 방법을 지시해준 나는 티아의 손엣 내 거친 손을 떼며 말했다.
     “이렇게?”
     “응. 잘 하네. 그런 식으로 한 열 번만 반복해봐.”
     “응, 알았어.”
     서툰 솜씨로 여러 번 틀리긴 했으나 티아는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차분하게 뜨개질을 해나갔다.
     나도 내 거나 마저 해야지.
     금세 완성된 목도리와 벙어리장갑을 내려다보며 나는 기지개를 켰다. 이제 슬슬 가구 제작 스킬에 손을 대야겠군. 나는 고개를 돌려 뜨개질을 하고 있는 티아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서툴렀으나 아까에 비해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수련치가 점점 오르고 있다는 거겠지. 나는 티아가 뜨개질을 끝낼 때까지 옆에서 지켜봐주기로 했다.
     “아, 거긴 이리 줘봐. 이렇게, 이렇게. 오케이?”
     “오케이!”
     뜨개질에 재미가 들었는지 티아는 한참동안 뜨개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좀 심심하군. 나는 잡화물품이 든 상자에서 십자수 재료를 꺼내 십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언제 가져왔는지 벨터가 과일과 쿠키, 그리고 홍차를 내왔다.
     “먹으면서 하렴.”
     “아, 감사합니다.”
     “와! 잘 먹겠습니다!”
     뜨개질을 하던 티아가 재빨리 쿠키 하나를 집어 입에 물고 다시 뜨개질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먹을 것을 정말 좋아하는군.
     나는 다시 십자수에 시선을 두고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수를 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십자수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뜨개질에 진전이 있었는지, 티아가 손뼉을 치더니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오빠, 오빠. 이것 봐봐. 잘 봐.”
     내가 티아의 손에 시선을 두자 다시 뜨개질을 하기 시작하는 티아. 내가 보기엔 아직 서툴렀지만, 아까보단 훨씬 나았다. 나는 과장하며 말했다.
     “이야,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는데?”
     “그치, 그치? 앗싸~!”
     티아가 생긋 웃더니 스킬 북의 책장을 넘겼다.
     흐음. 지금 하던 걸 좀 더 연습하고 다음 진도로 넘어가는 게 나을 텐데. 뭐, 수련치가 오르면 알아서 손놀림이 좋아지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렇게 한참을 십자수에 몰두해 있을 때였다.
     “레드.”
     잡화물품 수리를 끝낸 벨터가 말을 걸어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십자수에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네?”
     “가구 제작 스킬을 마스터하게 되면 내가 또 다른 스키을 알려주마.”
     “예?! 무슨 스킬이요?!”
     고개를 들어 묻자 벨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조선(造船)스킬이라고 알고 있니?”
     “조선 스킬이요?”
     “그래. 배를 만드는 스킬 말이다.”
     “배, 배를 만든다고요?!”
     벨터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4권에 계속>    -by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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