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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인지 마스터 [7-4]
    작성자 : 절대긍정 | 조회수 : 2330 (2011-12-11 오후 1:03:03)
    레인지 마스터 4권

    목차
    제12장   예고 없는 습격과 재회(2)
    제13장   할아버지의 선물
    제14장   조선 스킬 마스터! 그리고 성장
    제15장   몬스터 침공 이벤트
     
    제12장   예고 없는 습격과 재회(2)

     배를 만드는 스킬.
     어디선가 들어본 적도 있는 것 같다. 아니, 확실히 들어본 적이 있다. 정령계약 퀘스트를 할 때, 누군가가 ‘나룻배 제작’이란 말을 했던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시간이 없어 그냥 넘어갔었고 그러다 또 잊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다시 떠오르는군.
     나는 시선을 다시 십자수에 두었다.
     “벨터, 그럼 그 조선(造船) 스킬도 벨터가 직접 가르쳐주는 건가요?”
     “그건 차후에 알게 될 게다. 우선 가구 제작부터 끝내야지?”
     “넷! 앞으로 2주 안에 나머지 200%를 올려놓고 그 조선 스킬을 꼭 입수하고 말겠어요.”
     십자수를 금세 마친 나는 기지개를 켜 몸을 풀다가 뜨개질을 하고 있는 티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꾸 틀리면서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잘 해나가는구.
     그렇게 한참동안 집중해서 뜨개질을 하던 티아도 마침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아, 눈 아파서 더 이상 못하겠어.”
     그만 하려는지 티아가 뜨개질 물품을 정리하며 말했다.
     티아도 뜨개질을 끝냈으니 이제 가구 제작 스킬에 손 좀 대봐야겠군. 나는 십자수를 아이템 창에 넣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벨터, 이제 가구 제작 좀 해도 되죠?”
     “오, 그래. 조금만 기다리렴.”
     그러자 벨터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 잡화점 안으로 들어가 커다란 상자를 꺼내왔다. 어라, 도대체 뭘 꺼내온 걸까?“
     호기심이 인 나는 얼른 벨터가 가져온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책장?’
     놀랍게도 벨터가 가져온 상자 안에는 서양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한국채널 세릴리아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동야풍의 작은 책장이 들어 있었다.
     “우와. 벨터 이런 건 어디서 난 거에요?”
     “얼마 전에 티르 네티아에서 온 유저가 나에게 주더구나.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는 다른 대륙과도 교류를 하니까 이런 물품도 적지 않게 있다지. 설계도가 너무 어렵게 되어 있어 완성되면 보여 달라고 그랬는데. 어때, 네가 한 번 만들어 보겠니?”
     나는 벨터의 말에 고개를 떨어져나가라 끄덕였다. 그리고 혹 그 사이에 벨터의 마음이 바뀔까 봐 재빨리 설계도부터 꺼내들고 펼쳤다.
     “어머, 이런 아이템도 있었네?”
     언제 왔는지 티아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내 어깨너머로 설계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타아도 나 못지않게 호기심이 많나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작게 소리 내어 설계도에 적힌 설명문을 읽기 시작했다.
     “책장(冊欌:bookcase)."
     책을 넣어두는 장이라. 보면 볼수록 흥미로운 걸?
     “서가(書家)와는 달리 창호(窓戶:온갖 창과 문을 통틀어 이르는 말)가 있고 열쇠를 달아서 보관이나 보존에 유의하였다. 창호에는 내부의 서적을 밖에서 쉽게 볼 수 있도록 유리를 끼운 것이 많고 미닫이문과 여닫이문이 있는데, 여닫이문의 경우에는 두꺼운 유리판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얼레? 유리판도 사용하나? 이야, 현대에선 쉽게 볼 수 없는 물품이라 그런지 꽤나 흥미로운데?”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계속 설명문을 읽어 내려갔다.
     “책장에는 티크, 자단(紫檀), 나왕 등의 단단한 나무로 만든 거실용과 강철로 만든 사무실용이 있다. 이건 나무로 되어 있으니까, 거실용인가보군.”
     한창 설명문을 읽고 있는데 지루했는지 루카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내 볼을 핥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 설계도를 든 채 읽어 내려갔다.
     “아, 루카 간지러워, 이놈아. 오호 칸의 간격이나 안 깊이는 서적의 치수를 고려하여 결정하지만 서가보다 치수에 약간 여유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 책을 받쳐주는 널빤지는 장서의 변화에 따라 위치를 바꿀 수 있는 구조로 만드는 것이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
     그렇게 설명문을 전부 읽은 나는 설계도로 눈을 돌렸다. 이제 슬슬 이 멋진 책장을 만들어보실까?
                   *    *     *
     “그래, 결국 막내 사제에게 패했다는 건가?”
     “예, 스승님.”
     “허허. 그나저나 자네가 가지고 싶어 하던 루니오스 카이샤 말일세.”
     로시토가 잔잔한 눈으로 라벤더를 응시했다. 그에 라벤더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성전을 시작하기 전에 막내 사제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이 자랐더군요. 그리고 더 이상 루니오스 카이샤에게 미련이 없습니다.”
     “오, 그런가? 생각 외로 금방 포기했군.”
     “저보단 막내 사재에게 더욱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고 스승님. 셋째 사형의 행방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라벤더의 물음에 로시토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하긴 궁수의 탑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NPC인 로시토가 신대륙으로 건너간 유저의 행방을 알 수 있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로시토가 이어 말했다.
     “셋째 녀석의 이야기는 그만 하기로 하세. 그건 그렇고 첫째 녀석, 신대륙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겠다며 떠난 지 꽤 되었는데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군.”
     시선을 자신의 손목에 감시 새하얀 손목 보호대에 둔 로시토는 지난날을 떠올리는 듯했다.
     “스승님. 저도 신대륙으로 떠나겠습니다. 첫째 사형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는지 두 눈으로 확인을 하고서 다시 세릴리아 대륙으로 건너오겠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전직을 할 당시에 말했던 최고의 명궁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로시토의 시선이 말을 마친 라벤더에게 향했다. 그런 라벤더를 바라보는 로시토의 두 눈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    *     *
     “좋아, 드디어 완성이군!”
     책장을 완성시킨 나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양풍의 책장이 세릴리아 대륙에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봐도 모양새가 독특하군. 정말 마음에 들어.’
     나는 빙긋 웃으며 책장의 문을 열어 내부도 살펴보고, 바깥 부분의 여기저기도 훑어보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책장이었다.
     보기에 어떠냐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벨터도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는 것이 보였다.
     “정말 잘 만들었다. 훌륭해. 역시 넌 잡화점의 후계자가 되어야 했어.”
     “에이, 아니에요.”
     벨터가 장난스럽게 말했고 나는 괜스레 쑥스러워져 손을 저으며 피식 웃었다.
     ‘피로도가 오르진 않았는데 왜인지 몸이 나른하군. 현실에서의 피로가 세릴리아 월드에서도 느껴지는 건가? 현실의 피로도가 적용되지는 않을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세릴리아 월드에선 최근에 잠을 안 잤었네. 미궁, 공성전 때 무리해가며 움직였으니 피로도가 그만큼 증가했겠군.’
     나는 눈꺼풀에 반쯤 가려진 시야에 들어온 티아를 보았다. 갑자기 피로해져서 몰랐는데 그러며 꽤 멍한 표정을 지었나보다.
     “응? 오빠 많이 피곤해 보여. 이제 가서 좀 쉬자. 풋, 근데 표정이 바보 같아, 히히.”
     걱정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하던 티아는 금세 손으로 입으로 가리며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쉴 작정이었던지라 고개를 돌려 벨터에게 말했다.
     “벨터, 이만 가볼게요. 갑자기 무지 피곤하네요.”
     “그래? 그럼 가서 쉬렴. 무지 피곤해 보이는구나.”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티아, 루카와 함께 잡화점에서 나왔다.
                   *    *     *
     ‘현성이 이 녀석은 잠도 없나.’
     거대한 배틀 해머를 어깨에 들쳐 멘 혁이 잡화점과 거리를 둔 채 비실비실 걸어가는 현성과 현성을 부축해주는 티아,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는 루카를 보며 읊조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고개를 돌린 혁은 시선을 잡화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잡화점을 향해 건들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혁이 다가가자 방금 현성이 만들어놓은 책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벨터가 고개를 들고 아는 척을 했다.
     “오, 루샤크. 오랜만이군요.”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인가요?”
     벨터의 물음에 혁은 책장을 흘끔 보며 물었다.
     “레드가 아까부터 만들던 것이 이건가요?”
     “네, 참 잘 만들었지요.”
     “오호.”
     역시나 낯선 모양새가 흥미로운지 혁도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책자의 문을 열어보기도 하며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본래 현성이 잡화물품을 잘 다루고 손재주가 뛰어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정교하게 가구를 제자가다니… 내심 놀라는 혁이었다.
     한참동안 이리저리 책장을 살피던 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벨터에게 말했다.
     “방금 레드가 저쪽으로 가는 걸 봤거든요. 어디로 간다는 말은 안 했나요?”
     “피곤하다면서 가던걸요. 아마 집이나 여관으로 갔을 확률이 높군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혁은 가볍게 목례를 한 뒤 현성이 향했던 방향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깐, 여관이면 이 자식들 설마… 그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괜스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혁이 잡화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여관을 향해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피로도가 무지 상승했군.
     “티아는 다른 방으로 갔고. 무지 피곤하네. 넌 안 피곤하니, 루카?”
     나는 침대에 누운 상태로 고개를 돌려 침대 곁에 앉아 있는 루카를 보며 물었다. 하지만 별로 피고나지 않은지 루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캉캉 짖었다.
     나는 왼손을 뻗어 그런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편한 자세로 누워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익숙한 여성의 음성과 함께 메시지 창이 떴다.
     [루샤크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어라? 혁이도 접속해 있었나? 승인.”
     -현성이 너 어디냐?! 벌써 여관 들어간 거야?!
     대화 승인을 하기가 무섭게 소리치는 혁. 나는 영문을 모른채 입을 열었다.
     “내가 여관에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
     -뭐야, 벌써 끝난 거야?!
     “뭐가?”
     -그거!
     “그거라니?”
     -이 자식! 모르는 척하기는. 그거 있잖아.
     “아, 이놈 또 헛소리하네. 몰라. 시끄러 이놈아. 나 피곤해.”
     -어디야?!
     “여기? 잡화점 근처에 있는 여관인데. 작은 여관이야. 여기가… 몇 호였지? 아, 205호.”
     -티아 씨도 같이 있는 거야?!
     혁이 잔뜩 흥분하여 소리쳤다.
     “아니. 티아는 옆방에 있지. 왜, 오려고?”
     -어라? 다른 방이면 그거는 아니겠네. 내가 곧 가마. 기다려!
     [루샤크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말을 마치며 급히 대화를 끊는 혁.
     나는 반쯤 뜬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후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루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레드! 나왔어!”
     쿵쿵!
     그때 익숙한 음성과 함께 여관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처에서 대화를 걸었나보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여관의 문을 열었다.
     철컥.
     문을 열자 삐죽삐죽 세운 갈색의 머리카락과 짙은 눈썹, 갈색의 눈동자에 평범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내가 보였다. 혁이였다. 피식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혁을 보고 힘없이 눈인사를 건네며 문을 열자 혁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어라? 이 자식 다 죽어가네.”
     “미궁 그리고 공성전 때 너무 무리해서 피로도가 너무 증가했나봐. 이상하게 피곤하네.”
     나의 대답에 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꾸했다.
     “무슨 멍청한 소리야? 레벨업을 하면 생명력, 마나, 스태미나, 피로도, 공복도가 전부 100퍼센트 풀 회복되는데. 파티 퀘스트를 하고나서 레벨업 했고, 또 공성전 때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니까 또 레벨업을 했을 거 아니야?”
     그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레벨업을 하게 되면 혁이 말한 대로 생명력, 마나, 스태미나, 공복도가 전부 회복된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몸이 무거운 걸까?
     그 의문은 이어진 혁의 말에서 서서히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아하, 너 아까 책장인가? 그거 만드는 걸 쭉 지켜봤는데. 물건 만드는 동안 피로도가 증가한 거 아니야?”
     “아차, 그러고 보니까 책장을 만드는데 꽤 오래 걸린 것 같기도 해.”
     “멍청한 놈. 얼른 쉬어.”
     말을 마친 혁이 나를 부축해 침대로 데려왔고, 내던지듯 침대에 눕힌 뒤 반대편에 걸터앉았다. 내던져진(?) 나는 고개를 돌려 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른 애들은?”
     “글쎄, 곧 접속할 것 같아. 그동안 푹 자둬. 또 어디로 돌아다녀야할지 모르니까.”
     혁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수마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    *     *
     리버 마운팀은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의 동쪽 줄기에 위치한 산을 일컫는 세릴리아 대륙식 지명이다. 극히 웅장한 산세와 가파른 지형은 인간이 발을 들이는 것을 막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곳은 해발이 높은 고원지대였다. 게임이지만 현실성이 부여된지라 보통 사람은 숨을 쉬기조차 힘든 고원지대에 뜻밖의 방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제 겨우 십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놀랍게도 소년은 이 험난한 고원지대에서도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굳건히 발을 내딛고 있었다.
     눈을 감고 숨을 가득 들이마셔 폐부에 공기를 가득 채운 소년이 다시 숨을 내쉬며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 허공에 쏘아지는 형형한 안광.
     “세릴리아 대륙은 대자연의 기가 이렇게 풍부한 곳이구나.”
     대자연의 기를 음미하며 미소 짓는 소년의 모습은 무척이나 생소했다.
     겉으로 보기에 소년은 완벽한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지도, 그렇다고 푸석푸석하지도 않은 새카만 흑발에 흑진주를 연상시키는 까만 눈동자까지. 유난이 높고 쭉 뻗은 콧대와 백황색의 피부만 제외한다면 완벽한 동양인의 모습이었다.
     저벅저벅.
     소년은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겨 절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 아래로 광활한 대지가 연이어 활짝 펼쳐졌다.
     끝없이 펼쳐진 장대한 지평선.
     그곳에는 소년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세릴리아 대륙이 존재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소년의 두 눈에 쉴 새 없이 애증이 교차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세릴리아 대륙에 오게 되었는데, 확실히 중원과는 다르구나. 풍경과 풍습.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가.”
     절벽 가장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평서을 내려다 보던 소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중원에서는 만끽할 수 없었던 풍부한 대자연의 기를 느꼈다.
     이대로 그냥 산을 내려가기엔 아쉬움이 남았는지 소년은 그 후로도 한참동안 대자연의 기를 음미하며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운기조식을 마친 소년이 감았던 눈을 떴다.
     “자, 이제 출발해볼까?”
     절벽 아래 드리워진 지평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년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 내내 소년은 어떤 색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잠시 세릴리아 대륙에 머물러 있는 동안 할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래 전 절정(絶頂)의 벽을 돌파한 고수였다. 두 눈에서 뿜어지는 형형한 안광과 매 발걸음마다 한 치의 다름도 없는 정교한 보폭만 보아도 그가 이룬 경지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도 이곳에서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게임 내에는 벨런스라는 것이 존재해 제 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다른 채널 혹은 다른 차원에서는 그가 보유한 권능을 제한받는다. 그렇지 않는다면 벨런스가 무너져 엉망이 되어버릴 테니 말이다.
     공평하게 지정된 게임 내의 벨런스는 이계의 존재들이 다른 채널에서까지 절대적인 권능을 자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때문에 중원(중국채널)의 유저들이 세릴리아 대륙(한국채널)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중원에서에 비해 제한될 수박에 없었다.
     그 규칙은 소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비록 그가 절정의 벽을 돌파한 고수라지만 이곳에서는 소년이 가진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그것을 소년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정보를 빼먹은 셈이었다. 게다가 소년은 중원에서는 흔치 않은 몬서터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인적 없는 산길을 따라 서쪽에 위치한 티르 네티아로 가고 있었다.
                   *    *     *
     “후아암.”
     도대체 얼마나 잔 걸까?
     나는 기지개를 켜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뒤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근처엔 은빛 풀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하고 허리춤에 기다란 장검을 단 강찬과 새카만 복장을 하고 너클 건틀렛을 착용한 경훈, 그리고 혁과 티아가 서 있었다.
     배를 깔고 엎드려 있던 루카가 내가 일어난 걸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 앞발을 올려놓고 캉캉 짖으며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일어났네. 아주 늘어지게 자더라.”
     경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라? 너희들은 언제 온 거야?”
     “조금 전에.”
     강찬이 대답했다. 다들 무얼 하려는 거지?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도 일단 침대에서 내려와 아이템 창을 열어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화살통을 꺼내 등에 둘러메고 허리춤에 찼다.
     기지개를 쭉 켜는 찰나, 강찬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레드. 너 지금 레벨이 몇이야?”
     “나? 공성전 이벤트가 끝날 때 레벨업을 했으니까, 어디보자, 62네.”
     “오, 많이 올랐네. 전부터 말해왔던 건데, 우리 일행 중에 레벨이 100이 넘어가는 유저가 있으면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벗어나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에서 활동하기로 했었거든. 물론 너랑 티아 씨는 모를 거야. 우리 셋이서 상의한 것이니까. 널 만나기 전에 미리 말해줬어야 했는데, 너무 게임에 몰두한 나머지 잊고 있었다. 우린 앞으로 티르 네티아에서 활동할 생각인데 너는 어때? 티아 씨는 네 생각을 따른다고 했으니까, 잘 생각해봐.”
     나는 강찬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티르 네티아라면 고레벨의 유저들이 모여 있는 도시다. 그러니 그곳에 간다면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냥터와 던전도 이곳과는 수준이 다르니 더욱 갈등이 되었다.
     궁수의 탑과 정이 든 잡화점, 대장간이 있는 수도 세인트 모닝에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로 향할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로 활동 무대를 바꾸는 것으로.
     언제까지나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만 머물러 있으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릴리아 월드 최고의 명궁이 될 수 없음을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생활직이야 티르 네티아에서 할 수 있는 것이고 수도 세인트 모닝은 언제든 오면 된다. 무엇보다도 궁수로 전직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세릴리아 대륙 최고의 명궁이 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일단 끝은 볼 생각이었다. 반드시 레인지 마스터가 되어 최고의 명궁이 될 것을!
     속으로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한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너희들이 간다면 나도 가지.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로.”
     “역시, 너라면 갈 줄 알았다.”
     강찬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레인지 마스터가 되어 궁수에 대한 지긋지긋한 고정관념들을 깨부술 생각을 하자 들뜬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흥분해서 방방 뜨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들어올렸다.
     “너희들 공성전 이벤트 끝나고 아이템 지급 받았어? 나는 이 부츠를 지급받았거든. 유니크 아이템이고 신속의 부츠래.”
     “유, 유니크?!”
     경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른 녀석들도 알게 모르게 흠칫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빤히 부츠를 바라보던 경훈이 입을 열었다.
     “옵션이 뭐야?”
     “옵션? 이동속도 70%증가, 민첩 스탯 30증가, 행운 스탯 10증가, 이동속도 증가 스킬 사용 시, 추가 이동속도 20%증가와 함께 방어력 10감소.”
     “오, 방어력이 깎이는 것만 빼면 무지 좋은데? 어디 한 번 움직여봐.”
     “음. 그럴까?”
     경훈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나는 즉시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그러자 순식간에 왼쪽 벽면으로 몸이 날아갔고 놀란 나는 황급히 왼발로 벽면을 박차고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돈 뒤 지면으로 착지했다.
     그 모든 것이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나도 어리둥절했다. 지켜보던 다른 녀석들 역시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 전에 동영상으로 본 엘프보다 훨씬 빠른 것 같은데?”
     “그래?”
     강찬의 말에 나는 머쓱해진 것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너무 들뜬 나머지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새버렸군.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근데, 티르 네티아는 언제 갈 셈이야?”
     “글쎄, 일단 네가 깨면 어떻게 할 건지 묻고 바로 가려고 했지. 네가 간다고 했으니 지금 출발해도 나쁠 건 없겠지?‘
     강찬이 차근차근 대답해주었다. 떠나기 전에 잡화점과 대장간, 궁수의 탑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돌려 강찬에게 말했다.
     “떠나기 전에 혼자 좀 들려봐야 할 곳이 있는데 모두들 잠시만 기다려줄래?”
     “갔다 와. 시간이야 충분하니까.”
     강찬이 대답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루카를 불러내 여관 밖으로 빠져나왔다.
     여관을 나온 내가 제일 먼저 들른 곳은 다름 아닌 잡화점이었다. 그동안 제일 정이 많이 든 NPC 벨터에게 들려 인사를 하려는 것이었다.
     수도 세인트 모닝을 떠난다고 하면 벨터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나저나 가구 제작 스킬도 아직 마스터 하지 못했는데 조선 스킬을 알려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끝에 잡화점에 다다르게 되었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벨터는 잡화점 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어쩔 수 없이 나는 잡화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늑한 잡화점 내부. 그리고 크지 않은 소박한 잡화점이었지만 흔치 않은 아늑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그 잡화점 안쪽 구석자리에서 간단한 빵과 수프로 식사를 하고 있는 벨터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식사를 하고 있는 벨터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벨터.”
     “오, 레드구나. 하하, 아깐 눈이 잔뜩 풀려 있더니.”
     수프를 떠먹던 벨터가 나의 부름에 수저를 그릇에 내려놓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식사 중에 죄송해요.”
     “아니, 괜찮단다. 무슨 일 있니? 표정이 그리 밝지 않구나.”
     내 표정만으로도 이미 속내를 단숨에 읽어낸 벨터에게 나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벨터. 저 이제 수도 세인트 모닝을 떠나려고 해요.”
     “…그러니?”
     “네. 처음 세릴리아 월드에 발을 들이게 된 이유가 평소에 하던 일을 그 누구의 방해와 제약을 받지 않고서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거든요. 그렇게 시작했지만 궁수로 전진을 하면서부터 생각이 달라졌어요. 저번에 제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그래. 세릴리아 월드를 빛내는 최고의 명궁이 되겠다고 했던 걸 기억하지.”
     “네…….”
     “그렇다면 이곳에 머물러있으면 안 되지. 더욱 큰 인물이 되려면 네 말처럼 수도 세인트 모닝에 머무르지 말고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로 떠나는 게 나을 거야.”
     벨터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웃고 있음에도 그 미소 뒤에 가려진 아쉬움을 나는 볼 수 있었다. 언제든지 세인트 모닝으로 놀러와 벨터를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아쉬운 건지.
     막 목례를 하고 뒤돌아서 잡화점을 나서려는 찰나 벨터가 나를 불러 세웠다.
     “레드 잠깐만 기다려 보거라.”
     내가 멈춰 서서 뒤돌아보자 벨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티르 네티아로 간다고 했지? 그럼 심부름 하나만 해주겠니?”
     심부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벨터를 바라보았다. 벨터가 빙긋 웃으며 작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그래. 그럼 이것부터 받아라.”
     “네.”
     나는 벨터가 건네주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순간 주변이 번쩍임과 동시에 퀘스트가 하나 주어졌다.
     [퀘스트, 벨터의 부탁]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의 명물이자 최고의 관광지에 속하는 큰 규모를 가진 조선소의 책임자 ‘네프’에게 이 편지를 전해주자.
     남의 것이니 읽어보지 않는 게 좋을 테지?
     “꼭 전해주길 바란다.”
     “예. 그럼…….”
     나는 벨터에게 목례를 한 뒤 등을 돌려 잡화점의 문턱을 넘었다. 또다시 놀러오면 되는데 왜 이렇게 자꾸 아쉬움이 남는 것인지.
     심란한 속을 고개를 저어 상념을 날려버린 나는 루카와 함께 대장간으로 향했다.
     왠일인지 대장간 앞은 전과는 다르게 유저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얼른 대장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저들은 아세른이 능숙한 솜씨로 무기를 제작하는 것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느라 난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등에 활을 둘러메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세른이 무기 제작을 하는 것을 지켜보던 한 유저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고, 나와 루카를 유심히 살펴보던 유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오! 궁탑의 제자다!”
     그의 말에 그와 같이 아세른이 무기를 제작하는 것을 지켜보던 유저들의 시선이 내게로 쏘아졌다. 그중에는 여성 유저도 끼어 있어 나는 순간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아세른의 시선도 나에게로 향했다.
     아세른이 말했다.
     “오, 레드 무슨 일인가?”
     “아세른. 잠시 할 말이 있어서 들러봤어요. 그런데 이분들은……?”
     “아, 이 녀석들 말인가? 파릇파릇한 궁수지망생 녀석들이지.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작가 이곳에서 제련과 블랙스미스 스킬을 배우고 갔다는 말을 듣자마자 자기들도 한 번 해보겠다고 하는게 아닌가? 허허, 나 참. 그게 몇 주 전이지? 그래서 제련하는 법과 블랙스미스 스킬을 보여주고 있었다네.”
     “아하, 그렇군요.”
     나는 쑥스러움에 머리를 긁적이며 애꿎은 루카의 머리만 연신 쓰다듬었다. 루카는 기분이 좋은지 눈을 살짝 감으며 머리를 내 다리에 기댔다.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레드 파운 님이다! 정말 소문대로 엄청난 활을 가지고 다니시네요.”
     “맞아. 이야, 저런 활을 한 손으로 들고 쏘는 건가? 저 화살 좀 봐! 저게 창이야 화살이야?”
     “소환수 좀 봐! 이야, 멋지다. 저 하얀 진돗개!”
     다른 건 다 좋은데 왜 루카가 진돗개인 것이냐!
     나는 이 혼잡한 상황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등에 숏 보우를 둘러맨 한 여성유저가 소리쳤다.
     “그 활 한 번 쏴보세요!”
     “맞아!”
     그녀의 말에 곁에 있던 다른 유저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인사를 하러 왔다가 활을 쏘게 되다니.
     물론 활을 쏘는 것은 별것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등에 둘러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왼손에 들고 풀어진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고정시켰다.
     단단히 고정된 활시위를 손가락으로 퉁기자, 활시위의 맑은 음이 들려왔다.
     “우와…….”
     거대한 철궁을 한손에 쥐는 것이 신기했는지 지켜보던 한 유저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머쓱해진 나는 허리춤에 단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활시위를 힘껏 당기자 고정된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런데 이걸 어디다 쏴야 하지? 활시위를 힘껏 당겨놓고 두리번거리자 아세른도 흥미가 동했는지 이쪽을 보고 있다가 대장간 내부에 위치한 과녁을 가리켰다.
     “저기다 쏘게.”
     “아, 고마워요. 아세른.”
     나는 아세른이 가리킨 과녁을 겨냥한 뒤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쐐애액.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대기를 가르며 과녁을 향해 쏘아졌다. 과녁의 정중앙에 틀어박힌 화살. 강한 파괴력 때문인지, 과녁은 정중앙에서부터 사방으로 금이 어지럽게 그어졌다.
     정확하게 과녁의 정중앙에 틀어박힌 화살을 보며 나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고정시켜두었던 활시위를 풀고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등에 둘러멨다.
     “우와, 대단하다!”
     “정말로 저런 거대한 철궁을 저렇게 자유롭게 다루는 이가 있었다니…….”
     몇몇 궁수지망생 유저가 탄성을 질렀다. 머쓱해진 나는 발걸음을 옮겨 아세른에게 다가갔다.
     “아세른. 저 할 말이 있어요.”
     “음? 무슨 일인가?”
     무기 제작을 하던 아세른이 시선을 내 두 눈에 고정시킨 뒤 물었다. 그에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세인트 모닝을 떠나려고 해요.”
     “음? 티르 네티아로 떠난다는 건가?”
     아세른의 대답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내가 되물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야 일전에 들은 말이 있으니까. 다 아는 법이라네. 더 강해지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하려면 여기 수도 세인트 모닝보다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로 떠나는 것이 나을 걸세.”
     “네…….”
     “자, 그럼 어서 서둘러 가보게. 계속 주체한다면 정이 들어 발을 떼기 힘들 테니 말일세. 자, 자네들은 아까 하던 것을 마저 보여줄 테니까, 잘 보도록 하게나.”
     매정한 것 같았지만 나를 생각해주는 아세른을 보며 나는 등을 돌려 궁수의 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뒤로 루카가 그림자처럼 따랐다.
     시끄러운 분수대 광장을 지나 벼룩시장을 가로질러 궁수의 탑에 도착하게 된 나는 경비병들에게 눈인사를 한 뒤 훈련장을 가로질러 궁수의 탑 입구에 도착했다.
     내 호칭을 확인한 활을 든 경비병들이 궁수의 탑 출입을 허가했고, 궁수의 탑 입구의 문턱을 넘어 발을 들인 나는 즉시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게나.”
     금으로 만들어진 고풍스런 문을 두드리자, 정겨운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빙긋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로시토를 볼 수 있었다.
     뒤로 가지런히 빗어 넘긴 새하얀 백발과 허연 눈썹, 에메랄드를 박아 넣은 듯한 밝은 초록색의 눈동자와 높은 콧대. 간만에 보는 로시토였다.
     새하얀 셔츠 위에 초록색 조끼를 받쳐 단정하게 차려입은 로시토가 말했다.
     “오, 레드. 오랜만이네?”
     “로시토!”
     나는 얼른 방문을 닫고 로시토의 책상 앞으로 향했다.
     “오, 오. 정말 많이 성장했군. 곧 레인지 마스터가 되겠어… 이 짧은 시간에 상급 레인지 엑스퍼트가 되다니…….”
     로시토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궁탑의 현자 로시토는 제자들의 능력치를 그대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한눈에 내가 얼마나 성장을 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로시토의 시선은 마치 물속처럼 고요했다.
     “머지않아 나와 같은 레인지 마스터가 되겠군 그래.”
     잔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로시토가 빙긋 웃었다. 문득 레인지 마스터가 되면 레인지 엑스퍼트와 크게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진 나는 로시토에게 물었다.
     “로시토. 레인지 마스터가 되면 레인지 엑스퍼트일 때와 크게 달라지는 게 무엇인가요?”
     “우선은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킬 수 있다는 점이라네. 다른 것은 직접 레인지 마스터가 되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걸세. 직접 겪어보는 것이 백 번 이상 설명을 해주는 것보다 나을 테니 말이네.”
     로시토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에 가게 된다면 먼저 벨터의 심부름을 끝마치고 레인지 마스터가 되기 위해 엄청난 수련을 해야겠어!
     내가 조금이라도 빨리 레인지 마스터가 되기 위해 결심하는 동안 내 옆에 앉아 있던 루카가 꼬리를 흔들며 로시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로시토의 다리에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로시토는 나를 볼 때와 동일한 부드러운 시선으로 루카를 바라보며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처음 그이 책상 뒤쪽에 있던 작은 상자에서 꺼내지던 루카를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당시만 해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 궁수지망생이었는데 벌써 레인지 마스터를 눈앞에 두고 있다니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가긴 하는 것 같다.
     나는 눈을 돌려 공허한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고 초목들은 그 따듯한 햇살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레드.”
     로시트의 불음에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로시토에게 옮겼다. 그러자 로시토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레인지 마스터가 된다면 신대륙에 한 번 가보게나. 그곳엔 자네가 보지 못한 나의 첫째 제자 로빈훗과 둘째, 셋째. 그리고 넷째 제자들이 있다네. 참, 신대륙은 이곳과는 달리 무시무시한 몬스터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초인들이 존재한다네. 초인들은 자네와 같은 제 3자인 유저라는 존재들도 있고 나와 같은 세릴리아 월드 주신의 피조물인 인간들도 있지.”
     로시토가 말한 주신은 아마도 운영자들이겠지?
     로시토의 말을 들으며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시무시한 몬스터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초인들이라. 그렇다면 소드 마스터와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들, 그리고 여러 고수들이 존재한다는 말이군.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나를 들뜨게 한 것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사형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막내 사형인 라벤더와 다섯째 사형인 로화는 만나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무위가 얼마나 대단하진도 직접 겪어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막내 사혀인 라벤더가 그토록 강하다면 다섯 째 사형인 로화는 얼마나 강할 것이며, 나의 목표이자 나를 궁수로 전직하게 만든 장본인인 로빈훗은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졌다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날려버린 뒤 로시토에게 말했다.
     “로시토.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이제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벗어나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로 떠나기 위해서예요. 한시라도 빨리 레인지 마스터가 되어 세릴리아 월드 최고의 명궁이 되려면 지금 즉시 떠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말이죠. 뭐, 가끔은 놀러 올 거예요. 그러니 레인지 마스터가 된다면 먼저 사형들을…….”
     “좋은 생각이네. 레드. 지금 자네의 모습에서 첫째 로빈훗의 모습을 본 것 같다네. 그리고 내 부탁 하나만 하지. 레인지 마스터가 된다면 신대륙으로 떠나주게. 신대륙으로 떠나 그곳에 존재하는 제국과 수많은 왕국의 초인들을 하나씩 꺾어 궁수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궁탑의 제자가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지를 입증해주기 바라네. 즉, 나의 무학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널리 떨쳐주기 바라네.”
     “아, 알겠습니다.”
     진지해진 로시토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대륙에 존재하는 초인들을 하나씩 꺾어 달라… 그리고 자시의 무학을 즉,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키는 레인저가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지를 입증시켜 달라…….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 로시토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궁수에 대한 편견을 박살내려던 중이었어요.”
     “음?”
     갑작스런 나의 발언에 로시토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궁수에 대한 지긋지긋한 고정관념들 말이죠. 근거리에선 취약하며 마나를 다루는 이들에겐 화살이 통하지 않고 후방지원에서만 쓸 만한 나약한 존재들. 이것이 궁수에 대한 지긋지긋한 고정관념이며 편견들이지요.”
     나는 왼팔을 들어 등에 둘러 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잡았다. 그리고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꺼내든 나는 오른손으로 왼쪽 허리춤에 달린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 모든 편견을 이 활과 화살로 박살내려고 합니다.”
     나의 결의가 담긴 다짐에 로시토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화살을 화살통에 다시 수납하고 활도 도로 등에 둘러멘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로시토. 레인지 마스터가 되면 다시 올게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몸조심하고 잘 지내게.”
     “가자, 루카!”
     나는 등을 돌려 로시토의 방을 나섰다. 나의 부름에 루카는 쏜살같이 달려와 내 뒤를 따랐고, 로시토의 방에서 벗어난 나는 궁수의 탑을 내려와 여관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신대륙을 발칵 뒤집어 놓을 또 하나의 초인이 탄생하겠군.’
     진지한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있던 로시토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그는 벽에 걸어둔 자신의 애궁(愛弓) 스피릿 롱 보우를 꺼내들었다.
     애정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활을 내려다보던 로시토는 풀어져있었던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고정시킨 뒤 화살이 가득 담긴 화살통을 꺼내들었다.
     “가끔은 운동을 하는 것도 좋겠지? 요새 너무 우직이지 않아 몸이 둔해진 것 같으니 말이야.”
     활을 어깨에 걸친 로시토는 화살통을 등에 메고 자신의 방에서 나왔다.
     ‘레드 녀석을 끝으로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을 셈이고 이제는 아무리 뛰어난 궁수라고 해도 궁탑의 제자가 될 수 없으니까 당분간 내 방에 찾아오는 이는 전무하겠군. 가끔씩 훈련소 주변을 걸어 다니며 산책을 하는 것도 좋겠어.’
     계단을 밟고 내려와 궁수의 탑에서 나온 로시토는 훈련소 주변을 천천히 배회하기 시작했다.
     훈련소에는 전직 시험을 보는 궁수지망생들로 가득했다. 그것을 본 로시토의 입가엔 미소가 맺혔다.
                   *    *     *
     “좋아, 이제 떠날 준비가 다 된 거지?”
     강찬이 잔뜩 들뜬 상태로 소리쳤다. 그에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볼일을 다 봤거든.”
     모두들 티르 네티아로 떠날 채비를 마쳤는지 다들 들떠 있었다. 물론 가장 들뜬 녀석은 혁이었다.
     “근데 가서 뭘 하지?”
     침대 위에 걸터앉아있던 경훈이 말했다.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먼저 벨터의 심부름을 끝마치고 티르 네티아 주변을 돌아다녀 볼 생각이야. 세인트 모닝이야 이제까지 있었으니 훤하지만 그곳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잖아.”
     “음. 그렇다면 일단 확인 삼아 돌아다녀는 보자.”
     경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경훈이 아이템 창을 열어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 위프스크롤을 꺼내들고 말했다.
     “자, 일단 레드. 파티에 가입해.”
     “그래.”
     [데시카 님의 파티에 가입하셨습니다.]
     내가 파티에 합류하자 경훈이 워프스크롤을 북 찢었고 우리는 순식간에 티르 네티아의 시계탑 광장에 도착했다.
     티르 네티아는 세인트 모닝보다 훨씬 더 많은 유저들이 바글거렸고, 더욱 시끄러웠다. 상당한 고레벨의 유저들은 물론 많은 엘프 유저들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이야, 정말 활기차다.”
     “시끄럽다는 게 흠이지만.”
     경훈의 말에 혁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나는 멀리에 있는 유저들까지 관찰하기 위해 적안(赤眼)을 개안(開眼)했다.
     ‘벨터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좀 둘러보다가 심부름을 해야겠는 걸.’
     나는 빙긋 웃으며 앞장서는 강찬을 뒤따라 모두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전 가게 된 곳은 많은 유저들로 붐비는 항구였다. 항구도시라는 이름답게 항구엔 많은 유저들과 기념품을 파는 잡상인 유저들도 많았고, 다른 대륙과 교류를 하는 커다란 배도 볼 수 있었다.
     “우왓 저것 좀 봐.”
     혁이 오도 방정을 떨며 출항하는 배를 향해 소리쳤다. 흔히 볼 수 있는 범선이었는데 모양새가 특이했다.
     ‘조선 스킬로 저런 거대한 배도 만든다는 것이군. 근데 혼자 만드는 건가? 만약 혼자 만든다면 무지 힘들 텐데.’
     출항하는 배를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다고, 우리는 도착하게 된 곳은 티르 네티아의 유명한 관광지에 속하는 항구 근처의 커다란 레스토랑이었다.
     건물의 규모는 큰 편에 속했고, 새하얀 벽돌과 밝은 파란색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건물은 눈의 피로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티르 네티아의 풍경과도 잘 어울렸다.
     문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문 정중앙에는 조각사가 조각을 해놓았는지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많은 유저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현실시간으론 새벽일 텐데. 역시 폐인들은 다르군.”
     경훈이 고개를 내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그 폐인에 속하는데 그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빈자리가 있는지 주변을 빙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침 창가 쪽에 자리가 남아 우리는 빈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를 잡고 앉자 레스토랑의 서빙을 담당하는 아르바이트생 유저가 메뉴판을 들고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예.”
     유저가 내미는 메뉴판을 받아든 강찬이 짧게 대답했다.
     대부분 해산물로 만든 요리들이었다. 하구도시답게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해산물들을 주 메뉴로 삼는 것으로 보였다.
     유명한 레스토랑인 만큼 가격도 비쌌지만 돈 많은 강찬이 대부분 부담했기 때문에 우리는 부담 없이 음식을 주문할 수 있었다. 물론 루카도 있었기에, 소환수가 먹을 만한 음식도 주문했다.
     주문을 하자 30초도 안 되어 커다란 탁자 위에 주문한 요리들이 즐비하게 놓였다. 일급 숙수들이 솜씨를 부려 만든 요리이니 만큼 그만큼 맛도 있을 것 같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요리를 앞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앉은 경훈과 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키기 시작했다.
     경훈이 말했다.
     “누가 더 많이 먹나 시합해볼래, 루샤크?”
     “좋지. 저번에 진 빛을 여기서 갚아주마.”
     두 팔을 걷어 올린 혁이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이런 데까지 와서 꼭 저러고 싶을까…….
     그런 경훈과 혁 옆에서 고개를 내저으며 피식 웃던 강찬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자, 먹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다고, 이런 고급스런 요리를 언제 또 먹어보겠어? 자, 부담 갖지 말고 어서 먹어. 티아 씨도 드세요.”
     “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자, 잘 먹을게.”
     달그락.
     “후아, 잘 먹었다.”
     나는 올챙이처럼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해산물로 이런 기막힌 맛을 낼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걸?
     옆에 앉은 티아도 만족스러운지 티슈로 입을 닦아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먹기 시합(?)을 한 두 녀석에게 시선을 던졌다.
     안색이 창백해진 혁과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경훈. 대충 봐도 승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의자에 등을 잔뜩 기대고 겨우겨우 숨을 쉬던 혁이 말했다.
     “져, 졌다. 네놈의 위장은 도대체 얼마나 큰 거냐?”
     “뭐야? 겨우 그거 먹고 그렇게 뻗은 거야? 덩치는 나보다 크면서 왜 이렇게 못 먹어?”
     경훈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정말이지 경훈의 위장은 엄청난 것 같았다. 혁도 보통사람의 두 배는 먹는 것 같았는데, 경훈은 그런 혁의 약 1.5배가량 더 먹는 것 같았다.
     혁을 뺀 모두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컵에 반쯤 담겨 있는 음료를 목구멍에 모조리 털어 넣은 강찬이 말했다.
     “아, 잘 먹었다. 오늘은 이쯤 해볼까? 잠을 자둬야 내일 학교에 나가든 말든 하지.”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경훈이 대꾸했다.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탁자를 부여잡은 혁이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다.
     “우엑, 아무래도 안 되겠다. 얘들아 나 먼저 나가볼게, 티아 씨도 내일 봬요.”
     그것을 마지막으로 혁의 모습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무식하게 먹는 걸로 시합을 하냐.”
     “상대도 안 되는 녀석이 오기는 있어가지고 자꾸 덤빈다니까.”
     나는 혁이 앉아 있던 자리를 응시하며 말했고 그에 경훈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등을 의자에 깊숙이 기댄 나는 블루 네티아 레스토랑 내부를 쭉 훑어보았다.
     ‘저 유저들은 잠도 없나?’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으니 강찬과 경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가볼게, 레드. 너도 일찍 자라. 내일 지각하지 말고.”
     “그래, 내일 학교에서보자.”
     “수업 끝나고 우리 반으로 와.”
     “그래.”
     대화를 끝낸 강찬과 경훈도 안개에 가려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티아에게 두었다.
     “티아, 늦었으니 얼른 가서 자. 늦게 자면 그 고운 피부 다 상한다.”
     “헤헤. 괜찮은 걸.”
     티아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허, 내가 안 괜찮아.”
     “치, 내가 나갔으면 좋겠어?”
     그에 티아가 서운한 듯 고개를 휙 돌리며 대답했다.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헷, 장난이야. 오빠도 일찍 자.”
     “응.”
     “그럼 먼저 가볼게, 내일 봐!”
     “응, 그래. 잘 자.”
     로그아웃을 했는지 티아의 모습도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도 얼른 자야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나는 루카와 함께 블루 네티아에서 빠져나와 조선소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세인트 모닝과는 달리 티르 네티아는 주변이 탁 트여 있었다. 그저 새하얀 건물로 가득한 수도 세인트 모닝과는 달리 티르 네티아는 흰색과 파란색으로 어우러진 건물로 가득했다.
     주변풍경을 감상하며 걷는 사이 어느새 조선소에 다다르게 되었다. 거대한 규모를 가진 조선소에선 망치질소리와 고함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조선소는 네티아 항구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소 입구로 들어간 나는 연신 망치질을 해대는 NPC로 보이는 사내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이곳의 책임자인 ‘네프’라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을까요?”
     “네프 군을 찾는 건가? 네프 군은 지금 조선소에 없네. 티르 네티아 관청에 가 있을 텐데. 아마 볼일을 끝내고 내일쯤 복귀하실 것 같네.”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관청이 어딘지 안다면 찾아갔겠지만 길조차 모르는 나였기에 네프를 찾아가는 건 포기해야 했다. 찾아간다고 해도 급한 용무를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 나를 만나줄 확률도 낮다는 걸 생각해봐야 했다.
     결국 오늘은 그를 만나는 걸 포기한 나는 허탈감을 느끼며 조선소를 빠져나와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에휴, 오늘은 대강 요 근처나 눈에 익혀두고 로그아웃해야겠다. 가자, 루카.”
     캉캉!
     나는 루카와 함께 항구를 지나 사방이 틱 트인,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이 가지각색이구나.”
     티르 네티아에 도착한 소년이 흥미롭다는 듯 주변을 빙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정신을 놓고 다니던 소년은 묵빛 풀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무장하고 검은 망토를 늘어뜨린 기사 유저와 어깨를 부딪히고 말았다.
     소년과 키가 비슷한 기사 유저는 난데없이 어깨를 부딪친 것이 기분 나쁘다는 듯 소년을 잡아 세웠고,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잔뜩 인상을 쓰며 소년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뭐야?”
     “아, 죄송합니다. 중국채널에서 건너온 유저라 주변풍경이 익숙지 못해 구경을 하느라고 정신을 놓았나봅니다.”
     “뭐야? 짱깨야? 앞으로 조심해. 젠장.”
     소년의 정중한 사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은 기사 유저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소년을 노려보다 시선을 다른 곳에 던졌다.
     ‘이곳의 무사들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 같군. 뭐, 내 쪽이 먼저 잘못한 것이니까 남 탓할 처지는 안 되지. 그건 그렇고 세릴리아 대륙은 정말 신기한 걸?’
     방금 전과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기 위해 잔뜩 감각을 끌어올린 소년은 주변을 살피며 또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재수 없으려니 별게 다.’
     목빛 풀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무장한 유저가 읊조렸다. 방금 전까지 뒤쫒던 유저를 조금 전에 부딪힌 중국 유저 때문에 놓쳐버린 때문이었다.
     “제길. 분명 외관상으로 궁탑의 제자였는데 마리야. 왜소한 체격에 거대한 철궁과 뒤를 따르는 흰 늑대.”
     유저는 허리춤에 달린 고풍스런 문양이 새겨진 묵빛의 검갑에 수납되어 있는 롱 소드의 손잡이를 어루만지며 그 사이 많은 인파 사이로 사라진 유저를 찾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른 녀석을 찾지 않으면 길드 분위기가 전처럼 활발해지지 않을 것 같군.’
     그것을 끝으로 고개를 내저은 묵빛의 기사 유저의 모습은 어느새 수많은 인파 사이로 유유히 사라져갔다.
                   *    *     *
     시간이 시간인지라 지나다니는 유저도 얼마 없었고 넓은 길목에 드문드문 놓인 벤치가 있는 한적한 공터에 다다른 나는 조금 쉬어가기로 했다. 사위가 조용한 것이 산책을 하기에 이토록 좋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많은 인파 사이에 끼어 답답했지만 공터로 오니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자 뒤따라오던 루카도 개처럼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 누군가가 내 뒤를 밟는 것 같았는데 아닌가?’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지만 의심 가는 이는 전무했다.
     그렇게 대충 공터와 광장의 길을 파악한 나는 벤치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내일 학교에 가려면 얼른 자두어야 하지만 왠지 잠이 오지 않았다.
     수도 세인트 모닝과는 다른,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의 지리에 완벽히 매료되어 조금 더 살펴본 뒤 잘 생각에 잠이 오는 않은 것이다.
     “그럼 공터 좀 돌아다녀볼까?”
     캉캉!
     다시 이동할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자 루카가 캉캉 짖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등을 둘려 광장 쪽으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한참을 걷던 중 저 멀리서 상당히 고레벨로 추정되는 유저 하나가 이쪽을 향해 급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지만 적안을 개안했기에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보통 기사들의 갑주가 은색인 반면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유저의 갑주는 검은색이었다. 게다가 어깨 위에서부터 검은 망토를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 겉모습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루카와 함께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사이 유저와 나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고 1미터 남짓 되는 거리에서 멈춰선 기사 유저가 투구 사이로 안광을 뿜어내며 내 위아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드디어 찾았다.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유저의 손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 손잡이로 향하고 있었다.
     어라? 도대체 무슨 일이지?
     잠자코 있던 루카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기사 유저를 경계하는 것으로 보아 기사 유저는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평소엔 얌전한 루카가 저러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나는 얼른 뒤로 물러나며 등에 둘러멨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왼손에 집어 들고 풀어진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고정시켰다.
     기사 유저의 투구 사이로 탁한 음성이 비집고 나왔다.
     “역시 소문대로 거대한 철궁을 가지고 다니는군. 설마 했는데 진짜라니.”
     “저를 아십니까?”
     “물론, 잘 알고말고.”
     검을 뽑아든 기사 유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이 티르 네티아에 도착하길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이제 곧 다른 길드원들도 이곳으로 들이닥칠 테지. 크크크.”
     “무, 무슨?”
     “말이 길었군. 먼저 몸 좀 풀어보실까?”
     말을 마친 유저의 검신을 타고 푸른 오러가 밀려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유저의 두 다리가 지면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오러가 맺힌 검신이 내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그에 나는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백스텝(Back Step)으로 거리를 두었다.
     신속의 부츠 덕분에 순식간에 거리차를 만든 나는 왜 갑자기 공격을 하려는 것인지를 물으려 했지만, 기사 유저는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파상적으로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퀵 스텝(Quick Step)!"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유저가 가해오는 공격을 피했다.
     “쥐새끼처럼 잽싸긴!”
     유저의 검은 내 몸에 작은 상처하나 남기지 못한 채 허공만 갈가리 찢어발겼다.
     이 부츠, 효과 하는 끝내주는군. 나는 확실히 움직임이 빨라진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루카, 끼지 마! 백스텝, 더블 샷(Double Shot)!"
     동시에 두 개의 화살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기사 유저에게 쏘아졌다. 손에 쥔 검으로 화살 하나를 쳐내고 허리를 뒤로 젖혀 나머지 화살 하나를 피해낸 그가 손에 쥔 롱 소드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훗, 드디어 도착했군.”
     “응?”
     기사 유저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나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대기가 뒤틀리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저들이 하나 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손에 짤막한 완드를 쥐고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유저와 거무튀튀한 배틀 엑스를 쥔 유저, 묵직한 철퇴를 휘두르는 유저 등 상당히 강해 보이는 유저들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난데없는 갑작스런 습격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실눈을 뜬 채 웃고 있는 고양이 가면을 쓴 유저가 어깨에 거대한 낫을 들쳐 메고 나를 쏘아 보며 말했다.
     “티르 네티아에서 레이어를 꺾어 길드에 망신을 준 장본인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유저의 말에 나에게 파상적으로 공격을 가해오던 기사 유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마스터를 뵙습니다.”
     그에 낫을 든 유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이 자는 누구이고 이 자를 중심으로 나타난 유저들은 누구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나의 의문은 낫을 든 유저의 정체는 이어진 유저의 독배에서 서서히 베일을 벗었다.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얼마 전, 이곳 티르 네티아에서 네 녀석과 대련을 한 기사를…….”
     이제야 그들의 정체를 알아채고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대충 짐작한 나는 활등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얼마 전 어쌔신 유저와 날 습격했던 기사 유저의 길드원들인 것 같군. 저쪽에 고양이 가면을 쓴 유저가 길드 마스터고 분위기를 보아 상당한 고레벨의 유저 같은데… 다른 녀석들도 고레벨의 유저인 게 분명할 테고…….’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주변을 경계했다. 패치로 인해 소환해 놓았던 정령들은 모조리 정령계로 강제 역소환 되었다. 루카야 패치와는 상관없이 늘 소환 상태인 것 같지만 말이다.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지금 상황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그들의 기세를 보아 일을 좋게 끝내는 건 무리인 것 같았다. 살기 띤 눈초리로 역겨운 비웃음을 띠운 채 나를 노려보던 유저가 손에 쥔 짤막한 완드를 이리 휘두르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주문영창을 끝낸 뒤 그가 품에서 뼛조각을 꺼내 바닥에 뿌리자 뼛조각들이 하나로 뭉치더니 서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뼈로 만들어진 스켈레톤 울프가 섬뜩한 안광을 뿜어내며 목청을 울리기 시작했다.
     뼈밖에 없는데도 목청을 올리다니. 게다가 놈의 안광은 무척이나 섬뜩했다. 꼬리를 빳빳하게 세운 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루카가 잽싸게 내 앞을 가로막으며 스켈레톤 울프를 경계했다.
     “호오. 저것이 소환수들이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는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샤인가? 늑대들이 스켈레톤 울프를 본다면 꼬리를 말고 줄행량을 쳐야 정상인데. 네놈을 족친 뒤에 그 늑대를 잡아다 실허을 좀 해봐야겠어. 크크크.”
     ‘상종하지 못할 작자들이로군.’
     레인지 마스터가 되기도 전에 이 녀석들에게 아이템을 강탈 당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과 어떻게든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빠르게 교차되었다.
     신속의 부츠를 신고 있는 이상 줄행량을 놓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중에 마법사가 있다면 무덤을 파는 행위이니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할 수 없군. 정령을 소환하는 수밖에. 그런데 어떻게 정령을 소환하지…….’
     나는 최대한 눈치를 봐가며 주문을 윌 순간을 기다렸다.
     “볼수록 탐난단 말이야.”
     얼굴에 흉측한 문신을 새긴 유저가 루카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방금 전에 스켈레톤 울프를 소환한 그 유저였다. 후드 사이로 살짝 보이는 입가엔 소름끼치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흑마법사일 확률이 높은 유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낫을 든 유저가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모두 물러나있도록.”
     유저의 말에 모두들 뒤로 물러나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유저 한 명을 몰라놓고 구속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 듯 능숙하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는 유저들.
     나는 낫을 든 유저를 노렵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러는 겁니까?”
     “본인이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최근에 있었던 일은 정당방위를 한 것이고 시비를 걸어온 건 그쪽 길드원이었습니다.”
     그에 낫을 든 유저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걸 알면서 우리가 이렇게 나오는 건 네 녀석이 궁탑의 제자이기 때문이야.”
     “궁탑의 제자인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나는 유저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궁탑의 셋째 제자에 의해 우리 길드가 무너질 뻔했다. 길드가 무너지는 위기에 처하게 만든 뒤 신대륙으로 떠났다는 소문이 들려오더군. 이제 겨우 길드가 다시 일어섰을 때 신입 길드원이 궁탑의 제자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있는지 조차 몰랐던 궁탑이 일곱 번째 제자에게.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 땐 마도 안 되는 이유로 네 녀석을 척살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입장으로 본다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지.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은 없나? 뭐, 죽더라도 다시 접속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을 거야. 추적마법을 걸어두어 어디든 따라가 죽일 테니까.”
     ‘치밀한 놈들…….’
     나는 너무도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를 자신의 길드 척살 리스트에 넣었다는 것과 지금 하는 행동으로 보아 이 길드의 길드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알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 좋아. 마지막 유언과 함께 네 녀석들에게 궁탑의 제자가 얼마나 끈질긴지 보여주지.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주문영창이 이어질 테니 주문영창이 끝나면 너희들 맘대로 해라. 단, 주문을 외는 동안 어떤 짓도 하면 안 돼. 그게 내 마지막 유언이다.”
     그에 잠자코 있던 기사 유저가 소리쳤다.
     “무슨 저급한 술수를!”
     “그만.”
     낫을 든 유저가 뽑아든 검에 오러를 주입한 기사 유저에게 재도을 걸었다. 그저 잠자코 지켜보라는 의도에서였겠지.
     물론 이후 벌어질 일은 저들로서는 상상하지 못 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이제부터 궁술과 정령술을 조합하여 비약적으로 강해진 내가 얼마나 끈질긴 존재인지 각인시켜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바람을 관장하는 자여…….”
     주문영창이 이어지자 백호와 현무, 청룡과 주작이 모습을 나타냈고 각자 내 머리 위 발등, 팔과 어깨에 착지했다.
     “호오. 정령인가? 이제 더 할 일은 없는 건가?”
     낫을 든 유저의 말에 나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유저들이 파상적으로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낫을 든 유저와 흑마법사 유저는 뒤로 물러났다. 대신 기사 유저와 배틀 엑스를 쥔 두 명의 유저와 철퇴를 휘두르는 거대한 자안의 유저가 나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퀵 스텝! 현무, 그리스(Grease)>!"
     나는 퀵 스텝을 걸고 내 머리로 쇄도해오는 철퇴를 피한 뒤 현무의 그리스로 철퇴를 휘두르는 장한의 유저를 무력화시켰다.
     “어이쿠!”
     짧은 신음과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유저를 뒤로한 채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백스텝으로 거리를 두었다.
     “어서 와.”
     “앗.”
     언제 나타났는지, 흑마법사로 추측되는 유저가 짤막한 완드를 들고 수인(手認)을 맺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활을 휘둘렀다.
     “헉!”
     헛바람을 집어삼킨 유저가 급히 실드를 펼쳤다. 육중한 철궁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쇄도해오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실드가 충돌했다.
     “쳇.”
     회심의 미소를 짓는 유저를 뒤로한 채 나는 재빨리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등에서 전해져오는 섬뜩한 느낌에 본능적으로 몸을 던진 것이었다.
     예상대로 오러가 충만히 맺힌 기사 유저의 장검이 내 등을 쇄도해오고 있었다. 재빨리 피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분명 저 검이 내 등짝을 관통했으리라.
     “파이어 애로우(Fire Arrow)!"
     화살촉에 형성된 붉은 화염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목표물은 나를 향해 돌진해오는 배틀 엑스를 쥔 유저 두 명이었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 흑마법사 유저를 보니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것을 보아 마법을 캐스팅하는 것 같았다.
     “윈드 애로우(Wind Arrow)!”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으며 지면을 박찼다. 백호에 의해 비약적으로 빨라진 불화살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배틀 엑스를 쥔 유저에게 쏘아졌다.
     쾅!
     도끼의 면으로 화살을 재빨리 막아낸 유저가 재빨리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막 지면을 박차고 뒤로 물러서 거리를 두려는 찰나, 탁한 음성이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웹(Web).”
     절망적인 주문영창이었다.
     순간 끈적끈적한 거미줄과도 같은 실들이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신이 거미줄과 같은 실에 휘감겼고, 느낌 또한 불쾌했다.
     나는 들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놓치고 그대로 맨바닥에 곤두박질 쳐지는 신세가 되었다.
     ‘제, 제길! 이게 뭐지?!’
     나는 끈적끈적한 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끈적끈적한 실은 끊어질 생각도 없었는지 굳건히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자 루카도 나와 같이 끈적끈적한 거미줄에 묶이는 신세가 된 것이 보였다.
     “헹. 네놈이 정말로 궁탑의 제자인지 의심이 가는군. 고작 1클래스 마법 웹에 당하다니.”
     후드로 얼굴을 가린 흑마법사의 비웃음어린 목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았다.
     ‘제길. 난생처음 보는 마법인데 뭘 어떡하란 거냐.’
     정령의 힘을 빌려 이 끈적끈적한 거미줄을 제거하려고 한다 해도 아직 하급 정령인지라 보조적인 역할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흠이었다
     레벨 10이 되어 중급 정령으로 등급이 올라가지 않는 이상 직접 공격을 가하는 것은 무리였다. 물론 포이즌이나 고블린 같은 저급한 몬스터는 상대할 수 있지만 이런 마법을 해제할 수는 없었다.
     ‘어처구니없게 당해버렸네. 제길. 이대로 아이템을 강탈당하고 루카를 빼앗기는 건가? 그런데 남의 소환수를 빼앗을 수 있는지 그게 의문이군. 이대로 당하는 건가…….’
                   *    *     *
     “어머, 저 유저 좀 봐. 복장이 참 특이하다.”
     “그런데 정말 잘생기지 않았니?”
     “키도 크고… 딱 내 타입이다.”
     두 명의 여성 유저의 대화가 티르 네티아의 시계탑 광장을 활보하는 소년의 귓전에 맴돌았다. 이런 말들이 익숙하지 않은지 머리를 긁적이던 소년은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중원에서 건너온 유저가 얼마 없었는지 어디를 가든 많은 유저들의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주원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이처럼 자신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시선이 없었기에 소년으로선 살짝 불쾌하기까지 했다.
     ‘간단한 경공을 사용해야겠군.’
     내공을 끌어올린 소년의 두 다리가 가볍게 지면을 두드리자 소년의 몸이 쏜살같이 허공에 쏘아졌다.
     그렇게 순식간에 인적이 드문 장소로 오게 된 소년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내공이 평소보다 1.5배가량 더 소진되었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간단한 경공을 펼쳤을 뿐인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상태 창을 열어 내공의 양을 살펴보던 소년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께서 누군가 싸움을 걸어오거든 피하라고 하신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이곳에서 무공을 펼치게 되면 소모되는 내공의 양이 중원의 약 1.5배 정도 더 되는구나. 쳇. 몰래 이곳의 무사들과 비무를 펼치고 싶었는데. 장기전은 불리하겠군.’
     소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을 때였다. 어디선가 미미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분명 사람의 소리였다.
     소년은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한 두 어디선가 들려오는 미미한 소리를 자세하게 귀담아듣기 시작했다. 이윽고 처절한 비명 소리가 귓전에 맴도는 것을 확인한 소년은 시선을 소리가 들려온 곳에 던졌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한 것을 잘 참지 못하는 소년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검은 로브와 검은 망토차림을 한 예닐곱 정도 되어 보이는 유저들이 붉은 망토차림에 온몸이 은색 거리줄과도 같은 실에 꽁꽁 감긴 유저를 구타하고 있었다.
     그들이 든 무기와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을 쓴다면 단번에 쓰러뜨릴 수 있었지만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 이처럼 구타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사이에도 체구가 거대한 장한의 솥뚜껑만한 주먹이 붉은 망토차림의 유저의 안면에 적중했다.
     “크윽!”
     유저의 콧대가 뭉개지고 코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이어지는 것은 검은 망토를 두른 세 명의 유저들의 거침없는 발길질이었다.
     이들의 발길질엔 자비란 없었다. 밟히는 대로 유저를 마구 밟아대기 시작했고, 방어력이 딸리는지 한 번의 주먹질과 몇 번의 발길질이 적중하자 붉은 망토차림의 유저는 그대로 축 늘어졌다. 아직 죽은 것은 아니었고 데들리 직전의 생명력이 남아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었다.
     “순 맹탕이잖아? 역시, 궁수란 존재는 근접전에선 취약한 쓰레기에 불과해. 꼴에 이런 화, 활을 들고 다니는군.”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유저가 거대한 철궁을 두 손으로 겨우 집어 들며 말했다. 하지만 그 무게 때문에 들고 있기가 벅찬지 수초도 되지 않아 활을 바닥에 내던진 그는 손목을 어루만지며 벌레를 내려다보듯 거대한 철궁을 노려보았다.
     지켜보던 낫을 어깨에 들쳐 멘 유저가 말했다.
     “육체적인 고통은 여기까지다. 방어력이 워낙 약하다보니 몇 대 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쓰러지는군. 너희들은 뒤로 물러나 있도록.”
     “예, 마스터.”
     유저의 말에 궁수 유저를 구타하던 다른 유저들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모두가 뒤로 물러나자 낫을 어깨에 들쳐 멘 유저가 천천히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데프네스(Deafness).”
     대상의 청력을 차단하는 마법이 발동되자 구타를 당하던 유저의 얼굴엔 절망감이 어렸다.
     유저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에게 마법을 건 유저를 싸늘하게 노려보았지만 낫을 든 유저는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이어진 것은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흑마법이었다.
     “으아아악!”
     정신적인 고통이 극에 달하자 궁수 유저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좋아, 이제 이 녀석을 치료한 뒤 다시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주도록.”
     “예. 마스터.”
     낫을 든 유저의 말에 지켜보던 유저들이 하나 둘 궁수 유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쯤일 텐데?’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에 도착하게 된 소년은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여러 명이 움직이지 못하는 한 유저를 둘러싸고 집단구타(?)를 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소년은 인상을 찌푸렸다.
     ‘삼류 문파에서도 저런 짓을 하지 않는데. 이거 세릴리아 대륙에 약간 실망감이 드는군. 돕고 싶지만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제3자가 개입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못 본 셈치고 돌아가야겠다.’
     이제 막 등을 돌리려는 순간 한 유저를 마구 구타하던 다수의 유저들이 비켜나기 시작했다.
     순간 소년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구타를 당하던 한 유저의 얼굴이었다.
     “응? 잘못 본 건가?”
     두 손으로 눈을 비빈 소년의 시선이 구타를 당하던 유저에게 고정되었다.
     “이런, 저 유저들이 조금이라도 늦게 물러섰다면 큰일 날 뻔했군.”
     소년은 망설임 없이 여덟 명가량 되어 보이는 유저들이 한데 모인 자리로 몸을 날렸다.
     “크크크. 데프네스의 지속시간이 끝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다. 이제 정신적인 고통을 안겨줄 필요 없이 네 녀석의 목을 치고 아이템을 강탈하면 되겠군. 그리고 완벽하게 척살령을 내린 뒤 세릴리아 월드를 떠나게 만들어주마.”
     낫을 든 유저의 비웃음어린 목소리가 궁수 유저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쓰레기 같은 자식들.’
     궁수 유저의 몰골은 처참했다. 콧대가 뭉개져 피가 쏟아지고 있었고, 입술이 터져 피가 맺혔다. 깨끗했던 옷은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온몸은 은빛을 띠는 거미줄과 같은 실에 묶여있었다.
     “크흐흐. 그럼 잘 가도록.”
     묵빛 풀 플레이트 메일차림의 유저의 장검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궁수 유저는 두 눈을 질근 감았다. 그에게 꼭 이뤄내야 할 목표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접어두어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궁수 유저는 두 눈을 질근 감고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어 보인 묵빛 플레이트 메일차림의 유저의 장검이 궁수 유저의 목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새하얀 신형이 궁수 유저를 낚아챈 뒤 1미터가량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검은 혼돈 길드원 일곱의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순식간에. 길드원 모두의 시선이 궁수 유저를 낚아챈 실루엣을 응시하고 있었다.
     궁수 유저와 동일한 검은 머리카락과 엇비슷한 눈매. 큰 키에 비해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어디서나 볼 수 없는 절세미남의 용모를 가진 소년이 허리를 굽혀 궁수 유저를 친친감은 거미줄과도 같은 실을 맨손으로 풀어해치기 시작했다.
     “역시나 맞았어.”
     소년이 빙긋 웃으며 궁수 유저를 내려다보았다. 궁수 유저의 반쯤 뜬 눈의 망막에 소년의 모습이 맺혔다. 소년이 나지막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현성이 형.”
     

    제13장   할아버지의 선물

     모든 걸 포기하고 눈을 감았는데 순간 무언가에 이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기사 유저의 검을 피해낸 뒤 눈을 떴을 때였다. 빙긋 웃으며 나를 걱정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을 하는 유저가 하나 보였다.
     “오랜만이야, 현성이 형.”
     “누, 누구……?”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와는 완벽히 다른 이모구비를 가진 잘생긴 소년 유저. 하지만 눈매와 머리색만큼은 나와 비슷했다.
     나는 눈을 비빈 뒤 나를 내려다보는 소년 유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혀, 현민이?”
     가족들과 함께 중국으로 떠난 동생이었다. 그런데 현민이가 세릴리아 월드를 하고 있다니? 게다가 그 어린아이 같은 얼굴은 어디 가고 없었다. 통통했던 볼도 조금 갸름해졌고, 귀엽던 얼굴이 절세미남의 용모로 변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여긴 어떠게 온 거지?
     나는 반가운 마음에 웃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현민이 네가 어떻게…….”
     “조금 이따 설명해줄게. 그건 그렇고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건…….”
     내 꼴을 본 현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이템 창을 열어 생명력 포션을 꺼내 마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 혼돈 놈들을 노려보았다. 쭈그리고 앉아 허리를 굽히고 있던 현민도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을 검은 혼돈 유저들에게 던졌다.
     일어선 현민을 본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중국으로 떠날 당시 나보다 약간 작았던 현민이 지금은 내가 올려다볼 정도로 자라 있었다.
     뭐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다시 일어선 나를 본, 짤막한 완드를 손에 쥔 흑마법사 유저가 다시 현민을 향해 말했다.
     “네놈은 뭐냐?”
     “놈?”
     짧게 대답한 현민은 매서운 눈빛으로 흑마법사 유저를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기세가 주위를 완전히 장악했다.
     파츠츠츠.
     유형화된 살기로 인해 피부가 따끔따끔해질 정도였다.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 순박하고 어리던 현민이 이렇게 변모하다니…….
     “크으으.”
     나를 비롯해 검은 혼돈 길드원 중 길드 마스터를 제외한 나머지 유저들이 제대로 숨을 몰아쉬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아차, 미안해, 형.”
     겨우겨우 숨을 몰아쉬는 나를 보며 황급히 기세를 거두는 현민, 현민은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수인 것이 분명했다. 나를 강하게 억누르는 기세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현성과 나란히 선 현민은 검은 혼돈 길드원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형이 개입된 일이니 내가 나서도 상관없겠지. 이곳의 무사들과 겨뤄볼 겸 형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지.’
     현민이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검은 혼돈 길드원 중 선두로 서 있던 묵빛 플레이트 메일차림의 기사 유저를 무시한 채 짤막한 완드를 쥔 유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아까 어깨를 부딪친 유저군. 이런데서 또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그건 그렇고 이곳의 술사들은 모두 이상한 도포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군. 철제갑옷을 입고 있지 않은 이상 가장 쉽게 손 쓸 수 있겠어.’
     완드를 쥔 유저에게 다가간 현민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범인의 눈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점혈(點穴)을 놓자 흑마법사 유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형을 건드린 대가로 너희들을 응징하려고 한다. 이의가 있는가?”
     현민의 음성에는 내공이 충만했다. 그러자 지켜보던 세 명의 유저가 현민을 품(品)자로 에워싸기 시작했다. 두 명은 두터운 배틀 엑스였고 한 명은 묵직해 보이는 철퇴였다.
     그들은 살기를 풍기며 현민을 에워쌌다. 그 중 덩치가 가장 큰 유저가 철퇴를 머리위로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흐흐흐, 아까전의 기세는 참 대단했다. 하지만 우리 셋을 감당할 수 없겠지. 마지막으로 유언은 없느냐?”
     그 말에 현민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말이 많네. 난 입으로 싸우고 싶지 않다.”
     “이런 미친 자식, 하아앗!”
     기합 소리와 함께 철퇴가 허공을 갈랐다. 나머지 두 명 역시 배틀 엑스를 휘둘러 현민의 상단과 하단을 동시에 공격했다.
     현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서서 죽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자신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형 현성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자신을 향해 쇄도해 오는 무기들을 그저 물속처럼 고요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철퇴가 지척에 와서야 현민이 손을 움직여 허리춤에 찬 장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화아악!
     눈부신 빛이 일어나며 쇠가 끊어지는 듯한 강렬한 음향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동시에 고요한 공터를 울리는 처참한 비명소리.
     “크어억!”
     어깨를 움켜쥐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세 유저.
     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어깨에는 구멍이 하나씩 뚫려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쓰고 있던 투구도 잘려 바닥에 나뒹굴었기에 세 유저의 질린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텅 터텅.
     정확히 손잡이 부근에서 두 동강 난 배틀 엑스가 그때서야 바닥에 나뒹굴었다.
     후두두두둑.
     산산이 부서진 철퇴의 파편이 어지럽게 떨어져 내렸다.
     현민은 마치 천신처럼 버티고 서서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세 유저를 쳐다보았다.
     늘어뜨린 검에서는 자욱한 연기가 뿜어지며 피가 증발되었다. 검기(劍氣)를 잔뜩 끌어올린 상태라 피가 검에 맺히지 않고 증발해 버린 것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현민을 뺀 나머지 모두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철퇴가 막 머리에 적중되려는 순간 검을 뽑아든 현민이 철퇴를 부수고 배틀 엑스를 토막 낸 다음 세 유저의 투구를 잘라내고 그 다음에 어깨에 각각 한 번씩 검을 찔러 넣은 것이었다. 설명은 길었지만 일어난 것은 순간이었다.
     “세, 세상에…….”
     현성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적안이 개안된 상태라 움직임을 그나마 희미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지라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던 추역은 더욱 컸다.
     세 유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름한 차림새와 허약해 보이는 용모와는 달리 엄창난 실력과 레벨을 가진 유저였다. 자신들이 입고 있는 고급 플레이트 메일을 이토록 간단하게 뚫고 상처를 입힌 것으로 보아 분명했다. 게다가 현민이 가한 공격의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한 번씩 찔렀을 뿐이지만 검기에 당한 상처는 칼날에 직접 베이는 것보다 더 상처의 회복이 더디다. 검에 맺힌 마나가 격중된 부근의 세포를 괴사시키기 때문이다.
     엄청난 고통이 어깨에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며 세 유저는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뒤로 주춤주춤 물어나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묵빛 플레이트 메일차림의 기사 유저가 들고 있던 롱 소드의 검신에 오러를 불어 넣은 뒤 현민의 등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순간 현민의 몸에 새하얀 빛무리가 일렁이더니 이내 눈부신 빛을 뿜어냄과 동시에 기사 유저의 검을 퉁겨냈다.
     “뭐, 뭐야?”
     난생 처음 보는 기술로 자신의 검을 퉁겨낸 현민을 보며 기사 유저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빙긋 웃어 보인 현민이 검을 휘둘러 유저의 검을 두 동강 낸 뒤 투구를 정확히 반으로 쪼갰다.
     기사 유저의 휘둥그레진 눈과 쩍 벌어진 입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투지를 잃은 유저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검을 토막 내고 투구를 쪼갬과 동시에 검기가 충만히 맺힌 검이 자신의 목젖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에 전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져, 졌다.”
     기사 유저의 말에 유저의 목을 노리고 있던 현민이 검을 늘어뜨렸다.
     세릴리아 대륙 기사들이 끌어올리는 오러의 색과는 다른 새하얀 검기를 발산해내는 자신의 애검 백월(白月)을 애정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현민이 시선을 낫을 든 유저에게 옮겼다.
     그 사이 현성은 자신을 묶어두었던 것과 동일한 끈적끈적한 실에 묶인 루카를 풀어주고 있었다. 루카와 맞붙던 스켈레톤 울프는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소환주의 몸이 굳자 덩달아 굳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뭐, 뭐지… 저 유저는…….’
     커다란 낫을 어깨에 들쳐 멘 검은 혼돈 길드 마스터의 두 눈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고양이 가면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빛은 이미 투지를 잃고 있었다. 세릴리아 대륙의 기사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빠른 몸놀림과 정교한 검법.
     자신의 마법을 발현시키기도 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저의 검이 자신의 목을 치고도 남을 것이었다.
     하지만 검은 혼돈 길드에는 숨겨둔 비장의 카드 하나가 있었다. 비밀리에 거금을 주고 고용한 아니, 고용을 했다기보다 거금과 함께 검은 혼돈 길드의 세컨드 마스터의 자리로 들어오라는 정중한 부탁으로 인해 겨우겨우 가입시킨 소드 마스터 유저가 있었다. 그라면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저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낫을 든 유저가 손가락을 퉁켰다.
     따악.
     순간 대기가 뒤틀리더니 은빛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감싸고 검은 망토를 늘어뜨린 기사 유저 하나가 나타났다.
     “재밌게 사냥하고 있었는데 이곳으로 강제 소환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냐?”
     모습을 나타낸 기사 유저가 짜증이 난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그에 낫을 든 유저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저 유저를 처리해주시오.”
     “또 잔챙이 하나를 처리해달라는 말이군. 그만큼의 보수는 준비 되어 있겠지?”
     그에 낫을 든 유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끌어올린 검기를 거둔 현민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기사 유저를 보며 궁금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기를 잃고 어깨를 움켜쥔 세 명의 유저, 그리고 자신에게 패배를 인정한 유저와는 다른 위압가을 풍기는 사내였다.
     “잔챙이로군. 빨리 끝내야겠어.”
     투구사이로 시린 안광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장검에선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검신을 타고 뿜어져 나왔다.
     검신에 응축된 오러 블레이드가 피를 갈구하며 탐욕스럽게 빛났다. 그러나 현민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제야 적수를 찾았다는 듯 약간 들뜨기까지 했다. 겉으론 드러내지 않았지만 잔뜩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공의 1/4정도는 소모한 것 같아.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어.’
     지켜보던 현민이 자신의 장검에 내공을 밀어 넣었다. 순간 화려한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길이가 무려 2미터에 달하는 새하얀 강기가 현민의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절정고수의 전매특허이자, 부술 것이 없다는 무적의 절기인 검강(劍剛)의 발현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소드 마스터 유저가 흥미롭다는 듯 현민의 검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끌어올린 푸른빛의 강기와는 다른 새하얀 강기.
     소드 마스터 유저가 망설임 없이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장검을 쥐고 몸을 날렸다. 보통 유저들이 본다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빠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현민은 실망감이 가득한 눈으로 유저를 바라보았다.
     ‘움직임이 형편없군. 강기의 색이나 강도로 보면 내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이곳의 무사들은 몸에 철제 갑옷을 두르고 오직 강기를 뿜어내는 것에만 전념하는 것 같군.’
     가볍게 몸을 날린 현민의 검과 소드 마스터 유저의 검이 3합을 겨루고 뒤로 물러났다. 뒤늦게 강기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떨어져 내렸다.
     ‘움직임은 조금 둔해도 생각보단 강한 걸? 내공 소모량이 이렇게 많지만 않으면 오랫동안 붙어보고 싶은데 이곳의 사정이 안 따라주네. 백월검법(白月劍法)으로 빨리 끝내는 수밖에.’
     현민이 검을 고쳐 잡으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백월검법 제 1초. 쾌섬결(快閃決)!”
     순간 검을 세운 현민의 몸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쏜살같이 소드 마스터 유저에게로 쏘아졌다. 특수한 기의 운행과 보법을 통해 그 속도를 극대화 시켜 상대를 일순간에 쓰러뜨리는 매서운 초식이 세릴리아 대륙에 습을 나타냈다.
     “허억. 이게 뭐야?”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겨우겨우 현민의 공격을 막아낸 소드 마스터 유저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났다. 반면 현민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읊조렸다.
     ‘본래 위력의 60퍼센트 남짓밖에 발휘를 못하는구나. 이곳에서 본래 실력을 전부 발휘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군. 이 기술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그렇담 제 2초식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자세를 바꾸어 검을 고쳐 잡은 현민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백월검법 제 2초, 환영결(幻影決)!”
     현민이 소드 마스터 유저에게 몸을 날리며 초식을 펼쳤다. 그러자 수십 개의 화려한 검의 잔영들이 흩뿌려지며 소드 마스터 유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중원의 무공을 알 리 없는 소드 마스터 유저가 현민에게 일격을 허락했고, 현민의 검은 소드 마스터 유저의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그러자 상처부위를 뚫고나온 검강에 핏방울이 떨어졌으나 자욱한 연기를 내며 증발해버렸다.
     현민은 PK행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죽이지 않고 그저 치명상을 남겼다. 현민에게 일격을 허용한 소드 마스터 유저가 패배를 인정하고 무릎을 꿇었다.
                   *    *     *
     나는 눈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직접 보고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현민이 세릴리아 월드를 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토록 엄청난 무공 실력을 가졌다는 것이 더더욱 놀라웠다.
     이곳의 기사들과는 전혀 다른 검술. 요상한 자세를 잡는가싶더니 이내 총알같이 쏘아져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린 검으로 상대를 찔러 들어가는 속도에 놀랐고 수십 개의 잔영을 남기는 것에 더더욱 놀랐다. 저런 스킬도 있었던가?
     패배를 인정한 소드 마스터 유저가 무릎을 꿇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패배를 인정한 유저를 뒤로한 채 현민은 낫을 든 유저에게 성큼성큼 벌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현민을 보며 재빨리 수인을 맺은 유저가 소리쳤다.
     “다크니스 핸드(Darkness Hand)!"
     순간 현민의 발아래를 중심으로 검은색의 복잡하게 생긴 커다란 마법진이 형성되더니 소름끼칠 정도의 시커먼 손이 나와 현민을 움켜쥐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현민은 낌새를 느끼고 지면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라 새하얀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올린 장검으로 소름끼치는 손을 두 동강낸 뒤 유저의 목젖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자신의 목젖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오러 블레이드를 본 유저는 들고 있던 낫을 놓았다.
     “져, 졌다.”
     유저의 한 마디에 현민은 검을 늘어뜨린 뒤 말없이 뒤돌아서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순간 현민이 뒤돌아서자 유저는 떨어뜨렸던 낫을 주워들고 낫을 휘둘러 정확히 현민의 머리를 쪼개어 들어갔다. 그 순간 이미 이럴 것이라고 예상을 했던지 현민은 그대로 몸을 돌려 낫을 잘라냄과 동시에 유저의 가슴팍을 깊게 베어냈다.
     츄악.
     “허억.”
     말할 것도 없이 즉사였다.
     현민은 무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인 뒤 오러 블레이드를 거두고 검을 검갑에 수납한 뒤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 처리됐어, 형.”
     현민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멍청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내 동생이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아, 현민아 잠시만 기다려봐.”
     말을 마친 나는 바닥에 떨어뜨렸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집어든 뒤 활시위를 풀고 등에 둘러멨다.
     “이제 저들은 어떻게 하지?”
     “글세, 다 같이 덤빌 가능성도 있으니까, 조심해야겠는 걸. 근데 표정들을 보니 더 이상 덤빌 것 같지는 않아. 마무리 짓고 올게.”
     현민이 상처를 회복한 채 한데 모여 잔뜩 긴장한 검은 혼돈 길드원들에게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보기엔 다 같이 덤빌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소드 마스터 유저를 단숨에 제압한 현민에게 덤빌 어두를 못 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좋아. 이곳에서도 오직 믿을 건 힘뿐이로군.”
     일(?)을 끝마쳤는지 현민이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검은 혼돈 길드원 유저더들은 이미 포기했는지 다들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로그아웃을 했거나 광장으로 돌아간 거겠지.
     나는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끼며 검은 혼돈 유저들이 한데 모여 있던 장소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런 나를 내려다보던 현민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저 늑대는 뭐야? 중원에서도 볼 수 없던 늑대네?”
     “아, 이 녀석은 루카라고 해. 세릴리아 월드에서 단 한 종밖에 남지 않은 전설의 흰 늑대 루니오스 카이샤라는 늑대야.”
     “아하. 이리와 쯧쯧.”
     현민의 손짓에 루카가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에 초면이지만 친근감 같은 것이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현민은 손을 뻗어 루카의 머리에 얹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루카는 현민의 손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것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즐기고 있었다.
     “우와, 진짜 순하다. 중원에서 ‘늑대’라고 하면 사납고 공격적인 동물로 여기지는데. 이곳은 아닌가보네?”
     현민이 쭈그리고 앉아 루카의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아직 루카가 전투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아서 그저 온순하고 얌전한 늑대로 보이는가보다.
     ‘아차, 잠시 잊고 있었네. 도대체 어떻게 현민이가 이곳에 오게 된 거지? 게다가 세릴리아 월드를 하고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한데?’
     루카를 쓰다듬는 현민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현민아. 그건 그렇고, 도대체 여긴 어떻게 오게 된 거야? 그것 보다 중요한 건 네가 세릴리아 월드를 하고 있다는 게 더 신기해.”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던 현민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아, 중국에 막 도착했을 당시부터 시작한 거였어. 할아버지도 게임을 하시는 걸.”
     “뭐, 뭐?! 진짜야?”
     “응. 현재 할아버지는 우리 문파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계셔. 그리고 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
     “그, 그렇구나…….”
     다른 건 몰라도 할아버지가 세릴리아 월드를 하신다는 것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그렇기에 나에게 가상현실 게임기기를 보내 주셨던 것이구나.
     갑자기 밀려오는 호기심에 나는 얼른 자야 하는 것을 잊고 현민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것보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이곳에 오는 배를 탈 수 있었어. 특수하게 만들어진 배는 채널간의 이동이 가능하다고 들었거든. 여기 와서 놀란 건 대자연의 기(마나)가 족히 중원의 서너 배가량 된다는 거였어. 훨씬 맑은 기운. 그래서 험준한 산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운기조식으로 시작해 뒤로 이어진 현민의 말에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다.
     경신법(輕身法)이라던가 자신이 이기고 있는 내공심범 등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던 현민이 하던 말을 멈추고 말을 돌렸다.
     “아차, 이곳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스킬들이지. 깜빡했네. 운기조식이란, 기운을 운행하고 호흡을 가다듬는 것을 뜻해. 즉,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단전의 진기를 혈도에 따라 운행시키는 것이지.”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끔 풀어서 말하는 것 같았지만 중간중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나왔기 때문에 나중에 내가 홈페이지에서 직접 찾아 뜻을 풀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무튼 세릴리아 월드의 본래 서버인 세릴리아 대륙을 구경하고 싶어서 오게 된 거야. 형을 만나볼 수 있을 거란 생각도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형 키가 많이 줄었다?”
     현민의 말에 나는 그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키가 줄어들 리가 있나. 네가 큰 거야, 녀석아.
     나는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한국 채널인 세릴리아 대륙과 중원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진 나는 현민과 함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음. 중원이 이곳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단 거지?”
     “응.”
     “음… 그럼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설명해줄게. 조금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무공에 대해 설명해줄게. 이곳과는 다르게…….”
     현민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이야기가 장황하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무공을 가장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면, 정(正)과 사(邪)로 나뉜다고 한다. 현민의 말대로라면 어느새 무공의 원류는 2가지로 나뉘었고, 서로가 피를 씻는 복수와 반복을 통해 왜 서로 간에 싸웠는지조차 아리소아다고 했다.
     현재 정파의 유저들과 사파의 유저들, 그리고 마교의 유저들에겐 서로간의 PK가 허용되어 있고, PK로 인한 패널티조차 없다고 한다.
     아무튼 현민도 수없이 많은 유저들과 싸워보았다고 하는데 자신은 정파도 사파도, 마교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서 중립을 선언하셨거든. 서로 싸우는데 의의가 없다고 하시면서. 새로운 문파를 새운 거야. 백월(白月)이라는 문파를 세웠고 현재 많은 유저들이 있어. 나는 할아버지의 손자고, 그중 무공도 뛰어난 편이라 소문주 자리에 있지.”
     그 뒤로 이어진 현민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중립을 선언하 할아버지의 문파로 수없이 많은 정사마를 초월한 유저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쳐들어와 분탕질을 쳐댔다고 한다.
     처음엔 문파가 무너질 위기까지 처했지만, 간신히 버틸 수 있었고, 문내에 많은 유저들이 일류 고수가 되었거나 절정의 벽을 깬 유저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해 지금은 처음과는 다르게 많이 성장을 했다고 한다.
     “뭐 아무튼. 나는 반년 전에 절정의 벽을 깬 거야. 초절정(招絶頂)의 경지로 넘어가게 되면 더더욱 엄청난 무공 스킬을 얻게 되는 거야. 수련치는 많은 유저들과의 대련을 통해 올라가거나 폐관수련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해. 이제 겨우 반절 남짓 채웠는데. 헤헤, 뭐, 이야기가 딴 데로 샜네. 그러니까…….”
     현민이는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중원채널의 이야기를 들었다.
     “뭐 아무튼 현재 유저들이 가장 많고 또 가장 강한 마교에서도 우리 백월문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있어. 그건 그렇고 세릴리아 대륙은 뭐가 어떻게 구성된 곳이야?”
     길게 설며을 늘어놓던 현민이 내게 물었다.
     크흠. 이건 뭐 어떻게 설명을 해주어야 하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중원가 같이 거창한 것이 없었기에 그저 간단한 설명만 해주면 될 것 같았다.
     “에… 그러니까, 세릴리아 대륙은 네가 말한 중원 채널과 전혀 다른 곳이지. 뭐 현대 사람들은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지 같은 것을 읽기 때문에 마법이 뭔지는 알 거야. 중원채널에는 마법사라는 직업과 마법이란 게 존재하지 않지?”
     “응. 간단한 술법을 사용하는 도사나 주술사는 있어도 마법사는 못 본 것 같아. 아니, 없는 것 같아.”
     “그래. 아무튼, 이곳 세릴리아 대륙에는 마법이란 것이 존재하고 ‘몬스터’라는 괴물들이 존재해.”
     “와, 책에서 읽은 적은 있어도 직접 보진 못했는데. 중원에는 강시라던가 야생의 영물들을 사냥하고 유저간의 대련을 통해서 레벨업을 하거든.”
     “허, 설명 주에 끼어드는 건 여전하구나.”
     “아, 미안.”
     현민이 머리를 긁적임 대답했다. 제 버릇은 남 못 준다더니, 어릴 때 버릇이 여전했다.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설명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아직까지 보지 못한 몬스터가 아주 많아. 예를 들어 골렘이란던가 와이번, 드레이크와 같이 엄청난 몬스터들은 본적이 없어. 그리고 지금까지 본 적도 없지만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엄청나다고 들었어.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강인하며 파괴적인 생물이지. 세릴리아 대륙의 유저들은 이런 몬스터들을 사냥하면서 레벨업을 해. 너희 중원채널에서는 각 문파간의 PK가 허용되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사적인 이유로 PK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 대신 대련을 통해 서로의 전투능력을 가늠해볼 수는 있지.”
     “아하.”
     현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더니 또다시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뭐가?”
     “형 몸에 붙어 있는 것들 말이야. 내가 보기엔 사신수를 축소한 것 같은데.”
     현민이 손을 뻗어 내 왼쪽 어깨에 앉아있는 주작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하, 이 녀석들은 정령이라고 하는 거야. 들어봤지?”
     “응. 자세히는 모르지만. 들어는 봤어. 이야, 근데 세릴리아 대륙에는 별 신기한 것이 다 있구나. 형이 등에 둘러메고 있는 거대한 활도 신기했고.”
     “음. 네 말을 들어보면 중원채널은 무지 따분할 것 같아 보인다?”
     현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정말 따분해. 아차, 할아버지가 형을 만나면 전해주라고 한 것이 있거든.”
     현민이 이이템 창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동야풍의 책자. 현민이 건네주는 아이템을 받아든 나는 책표지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스킬 북(Skill Book)인가?
     경공에 대한 모든 것이라××.
     책을 받아든 나는 겉표지를 넘겨 내용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몸을 가벼게 만드는 스킬인 경신법부터 크게 하늘을 걸어 다닐 경지에 이른 경공 최상의 경지 능공허도(凌空虛道)까지 실려 있는 스킬 북이었다.
     “일단 그것부터 전해주라고 하시더라. 경시넙을 익히면 대련을 한다거나 사냥을 할 때 무지 수월해질 거야.”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현민에게 받은 스킬 북을 아이템 창에 넣으며 말했다.
     “몸을 가벼베 하는 스킬 정도는 나도 있어. 잘 봐. 퀵 스텝!”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퀵 스텝을 시선한 뒤 두 다리로 힘껏 지면을 박찼다.
     신속의 부츠 덕분에 움직임이 빨라진 나는 지면을 박차는 순간 내가 허공에 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상태로 공중제비를 돈 뒤 지면에 착지한 뒤 뒤돌아선 나는 현민에게 시선을 던졌다.
     강찬과 경훈, 혁과 티아와는 다르게 현민의 반응은 싱거웠다.
     “음. 빠르긴 한데, 허점이 너무 많아. 만약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 공격을 가해온다고 생각해봐. 호신강기를 펼칠 수 있다면야 상관이 없겠지만, 검강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절정 이상의 고수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호시강기를 그대로 뚫어버릴 수 있는 것이 검강이니까.”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던 현민이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잘 봐. 우선 경신법을 이용해 이렇게 뛰는 거야.”
     지면을 힘껏 박찬 나와는 다르게 현민의 두 다리는 가볍게 지면을 두드렸다. 그러자 현민의 몸은 순식간에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다.
     천천히 착지할 거란 나의 생각과는 달리 현민은 쏘아진 탄환처럼 빠르게 지면으로 착지했다. 물론 착지할 때 또한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가볍게 지면에 착지한 현민이 말했다.
     “봤지? 이 속도로 지면에 착지한다면 적의 공격에 바로 대응할 수 있어. 방금 시전한 무공은 경공의 일종인 천근추(千斤墜)라는 거야. 몸의 무게를 일시적으로 늘려 아래도 신속하게 떨어지는 방법이지. 그리고 마지막에 지면에 착지할 때 시전한 무공은 경신법. 가볍게, 소리 없이 착지한 것이지. 전투 스킬은 세릴리아 대륙보다 우리 중원 쪽이 훨씬 더 발달되어있는 것 같아.”
     현민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릴리아 대륙에서 볼 수 없었던 신기한 기술들. 가장 놀라웠던 것은 현민이 소드 마스터 유저를 제압할 때 썼던 기술이었다.
     수십 개의 잔영이 유저를 감싸고 들어가는 요상한 기술. 주원의 스킬에 감탄하고 있을 때 현민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형,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이 시간까지 게임하고 있는 걸 엄마가 아시면…….”
     “주, 죽음이지…….”
     엄마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로써 현민을 이해하지 못할리 없었다. 즉시 로그아웃을 했는지 현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에휴. 현민이 녀석도 고생이네. 그건 그렇고 내일 학교에 가야 하는데… 이건 큰일이군. 현민과 이야기하느냐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로그아웃!”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푸쉬쉬. 위잉. 철컥.
     헤드셋 전원이 꺼짐과 동시에 게임캡슐의 문이 열렸다. 헤드세을 벗어 머리맡에 둔 나는 게임베드에서 일어나 캡슐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켰다.
     시간이 벌써 새벽 1시가 되었군.
     나는 얼른 침대에 몸을 던졌다. 컴이 잔소리를 했지만 나는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침대에 드러누운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보았다.
     공성전 이벤트. 만족스럽진 못했지만 난생처음 전쟁이란 걸 경험해보았다. 비록 가상현실이긴 하지만 엄청난 현실성으로 인해 현실인지 가상현실인지 구분을 못 했으니까.
     그리고 인간이 때에 따라 얼마나 잔인해지는지 알게 되었다. 검은 혼돈 길드. 이 치욕은 고대로 갚아주마.
     얼른 레인지 마스터가 될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감으니 엄청난 피로가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대체 얼마나 잔 걸까. 기지개를 켜니 기분이 참 상쾌해진다.
     상체를 일으켜 머리를 긁적인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물론 이어지는 것은 컴의 잔소리였다.
     「주인님, 지금은 10시 30분입니다. 오늘 결석하셨군요.」
     “음? 여, 10시 30분?!”
     「메시지가 어머님께 전달되었습니다.」
     냉장고로 향하던 나는 그대로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학벌이 중요하지 않게 된 이 시대라고 해도 기본적인 지식은 갖추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던 엄마.
     결석했다는 말이 엄마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생활비가 줄어들 것이고, 자칫하면 세릴리아 월드 가상현실 게이미기를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메시지가 전달된다면 불같은 성격을 가지신 엄마가 즉시 음성 메시지를 전송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은 뒤 욕실로 들어가 깨끗이 씻었다. 어차피 지각이니 간만에 산책이나 좀 해볼까?
     컴이 코디해주는 대로 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나는 콘택트렌즈를 낀 뒤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 신었다.
     붉은 와이셔츠 위에 흰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곰돌이 후드점퍼. 그리고 청바지. 마지막으로 단화를 신은 나는 집에서 나와 바깥바람을 쐬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은 외식이나 즐겨보실까?
     도로에는 에어바이크와 에어카(공기를 연료로 사용하는 최첨단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자가용들. 지면에서 20센티미터 정도 뜬 상태로 움직인다)가 빠른 속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후우. 에어바이크라. 부럽군.”
     나는 피식 웃으며 횡단보도 앞에 섰다.
     에어바이크라면 내 용돈으로 사고도 돈이 조금 남는다. 하지만 작년 여름, 부모님께 허락 없이 에어바이크를 샀다가 압수당해 돈으로 바꿔 왔던 적이 있었다. 위험한 에어바이크는 타지 말라는 이유에서.
     뭐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신호가 바뀌는 것을 확인한 나는 횡단보도 위를 건넜다. 많은 인파 사이에 끼어 횡단보도를 건넌 나는 PDA를 꺼내 요리좀 한다는 요릿집을 찾아 검색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만 맛있는 요릿집이 열세 군데나 있었다.
     “음. 역시 난 돈가스가 좋아.”
     나는 근처에 위치한 돈가스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혼자이신가요?”
     “네.”
     “자리로 안내 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친절한 알바생의 안내를 받으며 나는 창가 쪽에 위치한 자리에 앉았다. 전과는 다르게 이젠 여자 공포증이 많이 사그라진 것 같았다.
     나는 피자돈가스 정식을 주문했고 음식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금방 나왔다. 탁자 위에 놓인 돈가스 정식을 바라보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탁자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무의식중에 루카를 찾은 것이다.
     ‘이런, 너무 게임만 했나. 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을 하지 못하다니.’
     세릴리아 월드에 있을 땐 항상 밑에 루카가 배를 깔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지만 루카는 가상현실에만 존재하는 생명체일 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프로그램의 일부.
     요 몇 개월 사이 가상현실에 더욱 익숙해진 나를 돌아보자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직 따뜻한 돈가스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맛있다.’
     그렇게 한참을 먹고 있을 때였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했었나? 한쪽 자리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10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셋이 자꾸만 거슬렸다.
     ‘뭐 저렇게 할 말이 많은 거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요리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어느새 접시가 텅텅 비어가고 있었다. 포만감을 느끼며 음료를 마실 때였다. 무심코 시끄럽게 떠드는 세 여자들에게 슬쩍 시선을 던진 나는 많이 익숙한 얼굴에 놀라 시선을 고정시켰다.
     까맣고 긴 생머리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흑진주를 연상시키는 까만 눈동자. 분명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건만 왜 이렇게 익숙한 걸까?
     재밌는 소재가 나왔는지, 내가 주시(?)하고 있는 소녀가 생긋 웃었다. 순간 그녀의 미소에서 백 송이의 모란꼿이 한꺼번에 만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많이 본 얼굴이란 말이야」」.’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의 까만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서로 마주쳤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것을 느낀 나는 급히 고개를 돌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히 계산대로 가 바지 뒷주머니에 든 지갑을 꺼내 계산대에 대자 삐 하는 소리와 함께 음식 값이 지불 되었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와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말이야.’
     집에 돌아와서도 나의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넣어둔 뒤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나는 캡슐의 허리 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삑.
     위잉. 철컥.
     캡슐의 문이 열렸고 나는 캡슐의 안으로 들어가 게임베드에 누웠다.
     “히야~ 편하다.”
     게임베드에서 잠시 뒹굴던 나는 머리맡에 놓인 헤드셋을 들어 머리에 썼다. 그와 동시에 캡슐의 문이 서서히 닫혀 빛을 차단했고 헤드셋의 전원이 켜졌다.
     이어지는 익숙한 여성의 음성.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62.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현실의 강현성에서 가상현실의 레드 파운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현성이라는 내 이름보다 레드라는 월드 네임이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게 조금 우스웠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에 로그아웃을 했던 공터의 그 장소였다.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이미 끝난 일인 것을.
     고개를 저어 상념을 날린 나는 퀘스트 창을 열어 아직 끝내지 못한 퀘스트를 끝내기 위해 조선소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주 당연하단 듯이 루카는 내 뒤를 따랐다. 로그아웃을 하면서 정령들은 전부 정령계로 강제 역소환 된 것 같았다.
     조선소로 향하는 동안 나는 현민에게 받은 스킬 북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스킬 북에는 경공에 대한 여러 가지가 적혀 있었고 간단하면서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설명문이 적혀 있었다. 예를 들어 경신법과 같은 무고에 대한 설명을 몸을 가볍게 하는 무공과 같이 간단하게 설명을 해두었다.
     중원의 스킬 북은 세릴리아 대륙의 스킬 북처럼 스킬 북 한 권에 담긴 모든 스킬을 입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킬 북에 다민 스킬 중 몇 가지만 추려내 스킬을 입수 할 수 있다는 것이 세릴리아 대륙의 것과 달랐다. 이중에서도 맘에 드는 스킬이 몇 가지 있었다.
     무력답수(無力踏水:물을 밟고 둥둥 떠 있는 경공의 한 가지)와 답설무흔(踏雪無痕:말 그대로 눈을 밟아도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로 몸을 가볍게 해서 빠르게 펼치는 경신법의 한 가지.), 이형환위(以形煥位:몸을 순간적으로 날려 위치를 마음대로 바꾸는 경신법의 한 가지.) 천근추, 초상비(草上飛:풀잎을 밟고도 풀이 휘어지지 않는다는 경공. 절정의 고수가 아니면 시전 할 수 없는 상승의 경공) 등이었다.
     이 무공들은 기본적인 몸놀림이 되지 않거나 일정한 경지에 들지 못하면 쓸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우선 중원채널의 유저들처럼 움직이기 힘든 세릴리아 대륙의 유저들이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잔머리를 굴려 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퀵 스텝을 시전하게 되면 움직임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그 상태에서 이 무공들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문제점은 초상비나 이형환위, 무력답수, 천근추 등은 절정의 경지에 들지 못하면 사용하지 못한다는 제약이 걸린 스킬들이었다. 즉, 아직까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무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인지 마스터가 된다면 희망은 있을 것 같았다. 오러 애로우. 즉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는 경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빙긋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는 사이 조선소에 도착하게 된 나는 어제와 같이 일하고 있는 NPC에게 조선소의 책임자 ‘네프’의 행방을 물었다.
     “네프 군은 지금 지하 범선 제작실에 있다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하 범선 제작실로 내려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나의 물음에 NPC가 친절하게 손짓했고 나는 NPC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 시선을 두었다. 가볍게 목례를 한 나는 지하실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루카, 이리와.”
     캉캉!
     새하얀 돌로 차곡차곡 쌓아 만든 깔끔한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서 나는 범선을 제작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러 명의 NPC로 보이는 사내가 여기저기서 역할을 맡아 배를 제작하는 모습을 보이 왠지 모르게 나도 가서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퀵 스텝을 걸고 계단을 내려온 나는 머리 위에 ‘NPC 네프’라고 적힌 사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머리 위에 뜬 이름은 퀘스트로 인해 일시적으로 보이는 현상인 것 같았다.
     벨터와 같이 장년층에 든 네프는 작고 왜소한 체격과는 달리 두 눈에서는 함부로 대하지 못할 무어나가 뿜어져 나왔다. 조심스럽게 네프에게 다가간 나는 벨터가 준 편지를 내밀며 말했다.
     “네프 씨죠?”
     “본인이 네프가 맞습니다만.”
     “안녕하세요. 수도 세인트 모닝에서 벨터 심부름을 받고 편지를 전해주러 온 레드 파운이라고 합니다.”
     나는 아이템 창에서 벨터에게 받은 편지를 꺼내 네프에게 건네주었다. 편지봉투를 받아든 네프가 봉투를 뜯어 안에 든 내용물을 읽어보더니 빙긋 웃었다.
     “벨터 녀석, 잘 지내고 있군.”
     “예?”
     “아, 아닙니다. 우선 자리부터 옮기죠 자, 잠깐 쉬다 합시다!”
     편지를 두세 번 접어 호주머니에 넣은 네프가 앞장서 걸으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네프의 뒤를 따랐다. 이리저리 두러보던 루카도 내가 움직이자 즉시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네프를 따라 오게 된 곳은 조선소의 맨 꼭대기 층에 위치한 네프의 사무실이었다. 네프의 책상 뒤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어 네티아 항구와 함께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풍경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나와 같이 넋을 잃고 창문 밖의 아르다운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잠시 넋을 잃고 구경하던 나는 깔끔하게 정리 된 책장과 네프의 책상에 시선을 두었다.
     “늦었지만 제 소개 먼저 하겠습니다. 티르 네티아 조선소의 총 책임자인 ‘네프’라고 합니다.”
     “아, 예.”
     책상 앞에 앉은 네프가 공손히 자기소개를 했다. 벨터와 같이 자신으로부터 하여금 남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를 지으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벨터는 어릴 적부터 늘 함께해오던 소꿉친구입니다. 하하,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친구 녀석이 부탁한 것이니 들어줄 수밖에 없기도 하고.”
     “무슨 부탁이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에 네프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레드 군이 조선(造線) 스킬을 입수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 이런 식의 부탁이었습니다. 단, 레드 군의 능력을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네프가 편지봉투에서 꺼낸 종잇조각을 책상위에 내려놓은 뒤 시선을 나에게 고정시켰다.
     “음, 일단 ‘생활직’에 경험이 풍부한지. 우선 그것부터 알아야겠군요.”
     능력이라고 하기에 나는 무슨 대단한 걸 바라는 줄 알았건만 생활직에 경험이 풍부한지 여부를 묻다니.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경험이 풍부하다고 하기엔 부끄럽습니다.”
     나의 대답에 네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경험이 있긴 있다는 거군요. 각 생활직의 이름과 수련치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거야 간단하죠. 스킬 창, 오픈!”
     파밧!
     [Skill]
     방직(Weaving)
            Master
     천옷만들기(Tailorng)
            Master
     잡화물품 제작(Handicraft)
            Master
     생활필수품 제작
            Master
     제련(Refine)
            Master
     블랙스미스(Blacksmith)
            Master
     악기 연주(playing Instrument)
            (78.49/300.00%)
     가구 제작(Furniture production)
            (101.98/300.00%)
     스킬 창을 열어본 나는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방직 마스터, 천 옷 만들기 마스터, 잡화물품 제작 마스터, 생활필수품 제작 마스터, 제련 마스터, 블랙스미스 마스터, 악기연주는 78.48%의 수련치를 채웠고 막 일주일 전에 배운 가구 제작 스킬은 현재 101.98%수련치를 채웠습니다.”
     말을 마치자 네프의 눈이 반짝였다.
     잘못 본 것일까? 나의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아 풀렸다.
     “이야, 대체 몇 가지를 마스터 한 거지? 더 볼 것도 없이 내일부터 즉시 실습에 들어갑시다. 먼저 조선 스킬에 대한 스킬 북을 드리겠습니다.”
     책상서랍을 여는 네프가 연신 감탄을 했다.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벨터에 비하면 난 아직 배울 것이 많다.
     책상서랍에서 스킬 북을 꺼낸 네프가 스킬 북을 내밀었다.
     “자, 먼저 스킬 입수를 한 뒤, 가장 기본적인 뗏목 제작부터 들어가지요. 오늘은 시간이 안 되니까 내일쯤 조선소에 오시면 되겠군요.”
     “아, 예…….”
     나는 네프가 내민 스킬 북을 받아들었다. 파란색과 흰색이 보기 좋게 어우러진 겉표지엔 ‘배에 대한 모든 것. 조선 스킬’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구 제작 스킬을 마스터하지 못했는데 조선 스킬을 얻게 되다니.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뭔가 어리둥절했다.
     조선 스킬을 입수한 뒤 스킬 창을 닫고 스킬 북을 아이템 창에 조심스레 넣어둔 나는 네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조선소에서 빠져나왔다.
     월드 타임으로 정확히 내일부터 배를 제작하는 것이군. 직접만든 배를 타고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레었다.
     “루카, 직접 배를 타고 향해를 하는 기분이 어떨까? 무지 좋겠지?”
     캉캉!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그저 짖어대는 건지. 루카는 연신 꼬리를 흔들며 짖어댔다
     조선 스킬을 입수한 것도 좋았지만 일단은 어서 빨리 레인지 마스터가 되는 것이 더 급했다. 우선 월드타임으로 오늘 하루는 사냥을 할 생각이었다. 보다 더 빠르게, 근접전에서도 수월하게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을 개발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너무 근거리 전투법에만 신경 써서는 안 된다. 본래 궁수란 원거리에 있는 적을 쉽게 제압하는 원거리 사냥의 명수니까.
     나는 일단 루카와 함께 어제 한바탕(?)했던 공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저들이 얼마 없는 한적한 공터에 도착한 어제 현민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벤치로 찾아가 앉은 나는 먼저 어디로 사냥을 갈지 곰곰이 생각했다. 이젠 트롤도 쉽게 제압할 수 있게 되었으니 목표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오우거였다.
     지상 몬스터 중 먹이사슬 상위에 위치한 포식자이며 숲의 폭군이라고도 불리는 오우거.
     고블린이나 오크와는 달린 단독생활을 하는 몬스터라 다수가 모여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러니 다수의 오우거에게 쫓긴다거나 할 일은 없을 터였다.
     아리스 노아에서 보았던 오우거는 정말이지 겉모습만으로도 상대의 투지를 잃게 만들 정도로 무서웠다. 솔직히 오우거를 이길 수 있을 지가 의문이었다.
     레인지 상급 엑스퍼트가 되었고 또 그만큼 더 강해지긴 했다지만 지금껏 한 번도 상대해보지 않은 몬스터의 공격패턴을 알리 없는 나로썬 걱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을 갈등하고 있을 때 아무 것도 없던 허공의 대기가 뒤틀리더니 한 인영이 모습을 나타냈다. 훤칠한 키에 절세미남의 용모를 갖춘 현민이었다. 어제 로그아웃했던 그 자리에서 다시 로그인을 한 것이었다.
     “어라? 형, 여기에 계속 있었던 거야?”
     로그인을 한 현민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현민이 이 녀석, 몬스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던 것 같았다. 그렇담 이 녀석과 같이 가는 것도 좋겠군. 이 녀석의 무공 실력이라면 오우거 정돈 간단하게 제압하겠지?
     내가 피식 웃자 현민이 궁금한 듯 물어오기 시작했다.
     “응? 형, 무슨 일 있어? 왜 그렇게 웃는 거야?”
     “아, 아무 것도 아니야. 그건 그렇고 현민아. 너 몬스터란 녀석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했지?”
     “응.”
     나의 물음에 현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못지 않게 호기심이 많은 녀석인지라 한 번도 보지 못한 몬스터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하기도 할 터였다. 몸을 느릿하게 일으킨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 그 몬스터란 녀석들을 구경시켜주지. 자, 따라와.”
     티르 네티아에서 빠져나온 나와 현민은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원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숲이 신기했는지 현민이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살피며 내 뒤를 따랐다. 루카도 그런 현민이 신기했는지 시선을 현민과 주변을 번갈아가며 쫓으며 내 뒤를 따랐다.
     어느 곳에나 겁 없는 천둥벌거숭이들은 존재하는 법.
     산책을 즐기는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다름 아니 고블린 무리였다. 어두운 초록색 피부에 작은 키를 가진 고블린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놈들의 그런 모습은 초보자들의 기세를 누르고도 남을 만했다. 하지만 나와 루카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뿐더러 현민의 기세가 쏘아지다면 꼬리를 말고 도망칠 녀석들이었다.
     “우와, 이 녀석들은 뭐야?”
     “고블린이야. 책에서 본 적 있지?”
     “응. 대충 글로 묘사한 건 봤지. 우와, 이렇게 생겼구나.”
     내 뒤에 서있던 현민이 고블린 무리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런 현민을 말리려 했지만, 현민 정도의 고수라면 1센티미터 남짓 되는 거리에서 가해오는 공격을 피하고도 남을 만한 여유가 있었다.
     사납게 으르렁대는 고블린에게 다가가 쭈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춘 현민이 고블린을 자세히 들려다보기 시작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선두로 선 고블린이 손에 쥔 단검을 현민의 얼굴로 찔러 넣었다. 하지만 고블린의 단검은 맨 허공만 훑었다.
     슬쩍 고개를 틀어 공격을 피한 현민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내게 말했다.
     “이 녀석들 말고 다른 녀석들은 없어?”
     자신을 공격해오는 몬스터들 사이에서 저런 여유를 부리다니.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고블린 무리가 일제히 현민에게 몸을 날려 달려들기 시작했으나 고블린 무리가 현민을 덮치기도 전에 현민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푹 꺼져버렸다.
     “갑자기 덮쳐 와서 놀랐네.”
     어느 샌가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 현민이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내 뒤에서 땅에 곤두박질쳐지는 고블린들을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나는 그런 현민을 보며 말했다.
     “현민아, 네가 기세를 끌어 올려서 쫓아내지 않으면 끝까지 따라붙을 걸? 죽이거나 쫓아내지 않는 이상 끈질기에 달라붙는 녀석들이 저 녀석들이거든.”
     나의 말에 현민은 더 볼 것도 없이 기세를 끌어올려 고블린들에게 쏘아 보냈다.
     칼날 같은 기세가 쏘아지자 고블린들의 일그러졌던 얼굴이 어느새 공포로 질렸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수초도 지나지 않아 녀석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중엔 오줌을 저리며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녀석도 있었다.
     “순 겁쟁이들이로군.”
     현민의 말을 마지막으로 우린 벌벌 떠는 고블린을 뒤로한 채 깊은 숲속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사냥을 하는 유저가 있느지 여기저기서 유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스킬 명을 외치는 고함소리였다.
     어느 정도 깊은 숲에 들어오자 유저들의 모소리는 전처럼 자주 들려오지 않았다.
     약간 어두워 보이는 숲. 나는 적안을 개안했다. 그러자 주변이 어느 정도 밝아진 것처럼 보였고 시야가 확보되었다.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풀어진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고정시킨 뒤 주변을 경계했다.
     이곳에서부터는 여유를 부릴 틈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무리지어 달려드는 오크 나이트라던가 트롤 같은 중형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은 늘 이랬으니까.
     “현민아, 긴장해. 아까같이 만만한 몬스터는 이제 나오지 않을 테니까. 잔뜩 긴장하고 있어.”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나와는 달리 현민은 왠지 여유로웠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현민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나는 다시 시선을 정면에 둔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 때 우거진 수풀이 세차게 흔들리더니 큰 덩치를 가진 실루엣이 모습을 나타냈다.
     “인간이다. 취익!”
     금빛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한 채 자시의 키보다 더 큰 투해디 소드를 치켜든 실루엣의 정체는 오크 나이트였다. 그 실루엣의 정체가 오크 나이트라는 것을 확인한 나는 놈과 급히 거리를 두었다.
     루카도 나를 따라 거리를 둔 채 오크 나이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현민은 그저 자신보다 큰 키를 가진 오크 나이트를 신기하단 듯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라? 말을 하네. 요상한 콧소리를 내는 것을 보니 오크 같은데. 맞지, 형?”
     도대체 신경이 어떻게 돼야 저토록 여유로울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동생인 현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크 나이트의 장검이 현민의 목을 쇄도해 오는 순간이었다. 현민의 주변으로 은은한 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현민의 옷자락이 미세하게 부는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고 현민의 주먹이 오크 나이트의 브레스트 플레이트에 닿았다.
     툭.
     순간 현민의 목을 쇄도해오던 장검이 힘을 잃고 늘어졌고 투구 사이로 드러난 오크 나이트의 코와 입에서 피가 주륵 흘러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구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보자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저 주먹을 슬쩍 갖다 대었을 뿐인데 왜 저렇게 쓰러지는 거지?
     나는 현민에게 다가가 말했다.
     “뭐, 뭐야? 이 녀석 왜 쓰러지는 거야?”
     하지만 현민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질문이 던져지기가 무섭게 오크 나이트의 뒤르 따르던 무리가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오크 나이트 대여섯이 모습을 나타냈지만 아까와 똑같은 공격에 오크 나이트들은 힘도 써보지 못한 채 바닥에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다.
     순식간에 오크 나이트 무리를 제압한 현민이 실망감이 어린 눈초리로 쓰러진 오크 나이트 무리를 빙 둘러보았다.
     “뭐야, 겉만 번지르르 해가지고.”
     나는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온 현민에게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슬쩍 건드렸을 뿐인데 왜 이 녀석들이 이렇게 쓰러지는 거야?”
     “응? 왜? 뭐가 잘못된 거야?”
     “당연하지! 전신갑주로 몸을 감싸고 있어 꽤나 높은 방어력을 자랑하는 녀석들이데. 슬쩍 건드린 걸로 쓰러지다니,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야?”
     잔뜩 흥분한 채 소리치는 나를 보며 현민이 빙긋 웃어 보이며 대꾸하기 시작했다.
     “음? 이 스킬이 세릴리아 대륙에선 없는 스킬인가보네.”
     “스, 스킬이라고?”
     “응.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라고 하는 건데. 내가 중수법이란 발경(發勁)을 이용해 권력(券力)을 상대의 내부 깊숙이 전달하는 고도의 기법이야. 어느 정도의 수련치를 쌓는다면 겉을 전혀 상하지 않게 한 상태로 내부를 파기하는 것이 가능하지. 방금 전 이 녀석들을 쓰러뜨릴 때 쓴 것이지. 지금쯤 내장이 파괴 돼 엄청난 부상률 때문에 정신을 잃었을 걸. 일부러 심장 쪽을 노렸으니 말할 것도 없이 즉사지. 할아버지께서 검법 말고도 권법에서 내가중수법을 익히라고 하셨던 이유를 알것 같아.”
     현민의 말을 들은 나는 중원서버의 유저들이 과연 어떻게 싸우는지가 궁금했다. 도대체가 중원채널의 스킬들은 세릴리아 대륙 채널의 유저들이 이해할 수 없는 스킬들로 가득했다.
     아직 물어볼 것이 더 많았지만 얼른 오우거를 상대해봐야 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점점 몬스터들의 체취가 사라지는데?”
     현민이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이따금 트롤도 나오긴 했지만, 급히 자리를 피하는 모습밖에는 볼 수 없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황급히 피하는 트롤의 모습을 보며 현민은 신기하다는 듯 구경을 했고 숲속 깊이 들어오자 더 이상 작은 몬스터들의 포효는 들을 수 없었다.
     오우거의 숲.
     숲의 재왕인 오우거가 서식하는 숲에 드디어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전의 다른 숲에선 여러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이 숲에서만큼은 들을 수 없었다.
     지상 몬스터 중 먹이사슬 최상위에 위치하는 포식자 오우거의 영역에서 감히 포효를 내지를 수 있는 몬스터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시각과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손에 쥔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고쳐 잡고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다 해두었기에 불시에 가해지는 기습은 어떻게든 피해낼 자신이 있었다. 현민과 루카가 있는 이상 기습이라곤 생각도 못 할 테니까.
     제 아무리 오우거가 나무를 잘 타고 기척 없이 사냥감에게 접근할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의 몸에서 풍겨지는 노린내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그렇기에 루카의 후각에 포착되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오우거의 체취를 맡았는지 루카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낮게 목청을 울리기 시작했다.
     10미터 남짓 되는 곳의 수풀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분명 바라에 의해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 사냥을 하면서 늘 봐왔기 때문에 이런 것을 구분하는 것쯤은 누워서 떡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무언가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경계했다.
     “형, 왜 그…….”
     “쉿.”
     이러 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현민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지만 나는 도중에 말을 끊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실루엣.
     4미터를 넘어 보이는 신장에 적갈색의 동체에 몸에 비해 현저히 작은 머리통을 가진 숲의 제왕 오우거가 바로 실루엣의 정체였다.
     아리스 노아에서 본 뒤로 처음 보는 오우거. 그것도 고개를 쳐들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장정 허벅지 굵기의 팔뚝에서는 흉물스런 근육이 꿈틀거렸고 핏발선 눈동자와 귀밑까지 쭉 찢어진 입은 보는 이로부터 하여금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오우거가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핏발이 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도 참 좋군. 오우거의 숲에 들어오자마자 오우거를 보게 되다니. 지금 이곳이 저 녀석의 영역인가? 그럼 다른 오우거는 없다는 건데.’
     “퀵 스텝.”
     나는 조심스레 퀵 스텝을 걸고 두 다리로 지면을 힘껏 박찼다. 높이 뛰어올라 굵직한 나뭇가지에 올라오게 된 나는 미리 꺼내둔 화살 하나를 활시위에 걸고 오우거의 머리를 겨냥한 채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우와, 저것이 말로만 듣던 오우거인가?”
     “조, 조용…….”
     시끄럽게 떠드는 현민에게 재동을 걸려고 했지만, 이미 현민은 오우거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    *     *
     “오늘은 현성이가 안 보이네?”
     “그러게.”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횡단보도 앞에 선 세 명의 소년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년들은 모두들 훤칠한 키와 가지각색의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결석했어.”
     “그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검붉은색의 조금 긴 머리칼을 가진 소년의 말에 갈색 머리칼을 삐죽삐죽 세운 소년이 소리쳤다.
     “글세, 그건 잘 모르겠어. 현성이의 집에다 메시지를 보내 봐도 답장도 없고. 이렇게 가정하면 될 것 같아. 아프다거나, 세릴리아 월드를 하고 있다거나.”
     그에 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가 바뀌자 도로를 질주하던 에어카와 에어바이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우뚝 멈춰 섰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횡단보도 위를 걷기 시작했다.
     세 명의 소년도 많은 인파 사이에 끼어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경훈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혁아. 팔라딘(Paladin;성기사)은 2차 전직을 어디서 하는 거야?”
     “음, 그게 좀 애매해. 2차 전직을 하려면 우선 신대륙으로 가기 전에 위치한 신성제국으로 가서 이것저것 해야 된다고 하더라. 우선 레벨부터 올려야지.”
     “네가 팔라딘이 된 모습이 상상이 안 간다. 그 성격에 팔라딘을 한다니 이거야 원…….”
     “뭐 인마?”
     “너희들 밖에서도 그래야겠냐?”
     서로 티격태격 하는 경훈과 혁에게 강찬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래저래 많은 이야기를 하며 횡단보도를 건너온 강찬과 경훈과 혁. 모두 집에 가까웠기에 집으로 가는 동안은 이렇게 늘 시끄럽게 떠드는 그들이었다.
                   *    *     *
     나는 기겁을 하며 오우거에게 접근한 현민에게 시선을 두었다. 제법 큰 키를 가진 현민이었지만 오우거와 비교하니 그저 어른과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현민을 인식한 오우거가 시선을 현민에게 두었고 현민과 오우거의 시선이 허공에서 엇갈려 뒤엉키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오우거와 눈이 마주친 것은 아니지만 등에서 식은땀이 절로 흘러내렸다.
     아무리 절정의 벽을 돌파한 현민이라지만 형으로서 걱정이 안 될 리 없었다.
     자신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는 인간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오우거가 두 팔을 양옆으로 쫙 펼치더니 이내 아가리를 쫙 벌렸다.
     카오오오!
     정말 사납고 광폭한 소리였다.
     자신의 영역권을 알리고 적의 기세를 제압하기 위해 내지르는 포효였다. 순간 나는 기가 죽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오우거의 바로 앞에 선 현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식 웃고 있었다.
     크게 목청을 울리는 오우거의 앞에 선 현민의 눈썹의 끝이 위말려 올라거더이 니내 칼날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현민이 쏘아낸 기세가 주변을 장악했고, 현민의 기세에 오우거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팔을 뻗어 현민의 머리통을 움켜쥐려 했다.
     수간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오른 현민이 천근추를 시전했는지 녀석의 몸뚱이가 매섭게 오우거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퍼억!
     현민의 두 발이 오우거의 머리에 작렬했지만 오우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현민을 낚아채려 했다. 그러자 또다시 천근추를 시전해 재빨리 지면에 착지한 현민이 오우거와 거리를 둔 채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금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까 쓰던 내가중수법을 쓰지 않은 탓인가?
     나는 오우거를 상대하는 현민을 보며 그저 대단하단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먼저 오우거의 기세에 제압당하지 않는다는 것부터가 참 신기했다.
     재빨리 오우거의 밑을 파고든 현민의 주먹이 오우거의 옆구리에 적중했고 발경이 먹혀들었는지 오우거가 입에서 검붉은 선혈을 한 줌이나 토해냈다.
     보통 다른 몬스터들이라면 꼬리를 말고 도망칠 상황이었지만 오우거는 달랐다. 피를 보자 이성을 잃고 마치 버서커와 같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현민의 주먹이 몇 번이나 적중했으나 오우거는 주저 없이 달려들어 팔을 뻗었다. 현민은 하는 수없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현민의 검에서 어제 보았던 새하얀 오러 블레이드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고,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장검이 오우거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치이익.
     오우거의 피가 오러 블레이드에 닿자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며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이내 오우거의 거대한 몸뚱이가 축쳐졌고, 오우거를 순식간에 처리한 현민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후, 검을 쓰지 않았다면 그대로 당할 뻔했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것을 보니 마치 마공을 잘못 연성해 미쳐버린 광인을 보는 듯한 느낌이야.”
     현민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렸다.
     아무래도 오우거를 잡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방금 전처럼 기선제압이 된다면 싸워봐야 뻔했기 때문이었다.
     현민이 오우거와 싸우는 동안 오우거를 노려보며 목청을 울리던 루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한 눈망을을 한 채 내 옆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오우거의 숲에서 빠져나와 티르 네티아를 향해 천천히 걷고 있을 때였다.
     [카이루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어라? 강찬이 녀석이네. 벌써 수업이 다 끝난 건가?”
     나는 현민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한 뒤 대화를 승인했다. 대화를 승인하기가 무섭게 강찬이 말했다.
     -어, 접속해 있었네?
     “응. 벌써 수업 끝난 거야?”
      -끝났지. 그건 그렇고 오늘 학교에 왜 안 나온 거야?
     “음, 그게 말이야…….”
     강찬의 물음에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모두와 헤어져 조선소에 들른 일과 공터에서 벌어진 일. 하지만 동생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꺼내지 않았다. 직접 만나게 해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으니까.
     -잔인한 녀석들. 유저 하나를 묶어놓고 그런 짓을 하다니. 그런 건 신고해버려.
     “됐어. 이미 지난 일인데 뭐. 그건 그렇고 다른 녀석들은 들어온 거야?”
     -혁이는 방금 들어왔고, 경훈이는 이제 들어올 것 같아.
     “그래? 그럼 티르 네티아 공터에서 만나자.”
     -그래. 이따가 보자.
     [카이루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    *     *
     “현성이 녀석도 참. 어제 일찍 잠을 잤어야지 쯔쯔.”
     강찬과 나란히 공터를 향해 걷던 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에 강찬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게. 그건 그렇고 나는 현성이가 왜 검은 혼돈 길드에게 당했는지가 궁금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공터에 다다른 강찬과 혁이 근처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대한 배틀 해머를 잠시 바닥에 내려둔 혁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후아암. 근데 너는 이제 어디로 사냥 갈 생각이냐?”
     “나야 뭐. 이제 오우거나 잡아볼까 생각중이야. 2차 전직을 하고나서 보조스킬이 더욱 강해졌거든. 특히 플레임 웨폰의 위력을 보고 처음엔 진짜 놀랐어. 소드 마스터 유저의 오러 블레이드에 범접할 수 있는 강도더라고 아직 수련치가 낮아서 그렇지, 마스터를 하게 되면 오러 블레이드보다 더 강해질지도 모르지.”
     “좋겠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혁이 투덜대며 벤치에 앉을 대였다. 저 멀리 공터의 끝에서 걸어오는 두 유저가 강찬의 시선에 들어왔다
     왜소한 체격에 커다란 철궁을 등에 둘러메고 붉은 마오를 늘어뜨린 유저와 그 뒤를 따르는 흰 늑대. 그리고 그 옆에서 세릴리아 대륙에서 볼 수 없는 동양풍의 새하얀 무사복을 입은 큰 키를 가진 유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여어~ 카이루, 루샤크!”
     강찬과 혁을 목격한 현성이 두 손을 높이 들고 흔들며 말했다.
     “빨리 가자. 현민아, 루카. 퀵 스텝!”
     잔뜩 들뜬 현성이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순식간에 강찬과 혁의 앞에 도착한 현성의 뒤로 루카와 현민이 잇달아 도착했다.
     현민을 본 강찬과 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누구……?”
     “누, 누구야?”
     그에 현성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인사해. 내 동생 ‘강현민’이라고 해.”
                   *    *     *
     “도, 동생?”
     “동생이 있던 거야? 그건 그렇고 저런 복장은 난생 처음 보는데?”
     모두들 내 예상대로 깜짝 놀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혁이 현민의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혁의 행동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자, 현민아 인사해. 내 학교 친구들이야.”
     “안녕하세요. 세릴리아 월드 네임은 ‘현민’이라고 합니다.”
     현민의 간단한 목례를 하며 자기 자신을 소개했고 강찬과 혁은 아직까지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현민을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때 혁의 입에서 결정적인 한 마디가 나왔다.
     “넌 동생보다 키가 작냐?”
     “윽…….”
     “그러고 보니 얼굴도 별로 안 닮았다. 눈매가 약간 엇비슷한 것만 빼고 닮은 게 하나도 없어. 동생이 훨씬 낫다.”
     ‘믿었던 강찬마저 이런 말을 하다니!’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뭐 이 녀석은 중원채널에서 건너왔어. 아무래도 잠시 머물다 갈 건가봐. 그치?”
     “응. 현실시간으로 내일 모레쯤에 가야할 것 같아.”
     나의 물음에 현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강찬이 몸을 느릿하게 일으키며 말했다.
     “그런데 현성이 넌 여기서 머무는 동안 뭘 할 생각이야?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티르 네티아에 온 거겠지?”
     “물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서 빨리 조선 스킬의 수련치를 높이 올려 배를 제작해 이 녀석들에게 보여주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피식 웃으며 훗날에 벌어질 일을 생각했다.
     먼저 조선 스키의 수련치를 어느 정도 올려놓고 사냥을 다닐 생각이다. 혼자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혁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데시카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오늘 아침에 학교에서 같이 사냥가자고 했으면서. 그냥 먼저 가버릴까?”
     혁이 사납게 으르렁대며 배틀 해머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그럼 블루 네티아에 가서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배틀 해머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혁에게 강찬이 말했다. 그러자 혁이 표정이 잔뜩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으윽. 이제 앞으로 다신 그 레스토랑엔 안 갈 거야. 어제 로그아웃 하고 나서도 느낌이 이상했다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식하게 먹을 것으로 시합하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뭐 인마?!”
     버럭 소리치는 혁. 반응이 바로바로 오니까 재밌군. 나는 이제야 경훈이 왜 혁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경훈이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을 했고, 강찬과 대화를 한 뒤 우리의 위치를 물어 공터로 왔다. 강찬, 혁고 마찬가지로 경훈도 현민을 보고 흠칫 놀라며 나와 현민을 번갈아보았다.
     이거 상당히 기분이 나쁜데? 그래도 나쁜 뜻은 아니니까 이해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공터에 한데 모인 우리는 쓸데없는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물론 화제는 현임의 입에서 나오는 중원채널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이미 한 번 들었지만 다시 듣는 것도 재밌었기 때문에 나는 귀를 기울여 현민의 입에서 끝없이 나오는 중원채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고, 중원과 세릴리아 대륙의 스킬을 비교하는 것을 소재로 이야기가 전개 되었다.
     “뭐 이런 거예요. 아차, 데시카 형은 무투가라고 했지요?”
     “응. 그렇지.”
     “그럼 이곳의 권사(券士)들도 내가중수법을 익히고 있나요?”
     “내가중수법? 그건 또 뭐지?”
     경훈 말고도 다른 두 녀석도 현민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내가중수법이란 발경을 이용한 권력을 상대의 내부 깊숙이 전달하는 고도의 기법이고 어느 정도 수련치를 쌓게 되면 겉은 전혀 상하지 않게 하는 상태로 내부를 파괴하는 것이 가능한 수법이다. 이미 들어봤던지라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저, 정말 그런 게 있단 말이야?”
     현민의 말을 들은 경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물론 강찬과 혁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네 중원의 권사들은 대부분 내가중수법을 쓰지요. 세릴리아 대륙의 권사들은 주로 어떤 스킬들은 쓰나요?”
     “내가중수법? 그것처럼 내부를 파괴한다는 개념은 없이 그저 치고받는 식이지. 그래서 두터운 중갑주를 걸친 몬스터나 기사들과 대련을 할 때 보다 큰 충격을 주기 위해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공격위주 스킬의 수련치를 많이 올려. 예를 들어서 보여줄게. 내가 가진 스킬 중 가공할 공격력과 스피드를 자랑하는 스킬이 하나 있어.”
     경훈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공터의 커다란 통나무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벤치 바로 뒤에 있었기에 통나무 쪽으로 걸어가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통나무 앞에 선 경훈이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소리쳤다.
     “탬핑 어택(Tamping Attack), 피스톨!”
     부웅.
     퍼억!
     경훈의 주먹이 통나무에 적중하자 통나무가 기괴하게 비틀어지며 경훈의 주먹이 틀어박혔던 지점을 중심으로 금이 쫙 가기 시작했다. 이미 주먹이 적중했던 곳은 흉물스럽게 패이고 터져나갔다.
     “후우. 뭐 이런 식의 스킬이야.”
     경훈이 손목을 빙빙 돌리며 다시 벤치로 돌아왔다. 나무는 금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고 경훈의 스킬을 본 현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 권술이 대단한 경지에 올라섰네요. 타격점 직전에 주먹을 멈춰 파괴력을 높이는 것도 정교한 편이고 공력을 한 것 분출하고 나서도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외부 파괴에만 목적을 두었다고 해야 할까요?”
     현민이 재빨리 몸을 일으켜 두 다리로 지면을 살짝 두드렸다. 순식간에 통나무 앞에 도착한 현민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물론 간단히 내가중수법을 선 보일만큼의 미량의 내공이었다.
     주먹에 내공을 집중한 현민이 재빨리 팔을 내뻗었다.
     퍽.
     그리 크지 않은 소리가 우리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자, 됐습니다.”
     통나무를 슬쩍 후려친 현민이 벤치로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엥? 뭐가 됐다는 거지?”
     혁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현민을 쳐다보다 통나무로 다가가 통나무에 손을 댔다. 그때였다. 태풍이 불어도 뽑여나가지 않을 것 같던, 굳건히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던 통나무가 혁이 손을 댐과 동시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허억? 이게 뭐야?”
     통나무를 지탱해주던 내부의 조직들이 파괴되어 힘을 잃은 상태에서 외부의 작은 충격이 가해지자 통나무가 맥없이 주저 앉은 것이었다.
     이것을 본 경훈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너져 내린 나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물론 나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분명 경훈의 공격이 훨씬 더 파괴적이었다. 통나무의 겉이 기괴하게 패이고 터져나간 것만 봐도 경훈이 가한 스킬의 위력을 알 수 있었다. 반면 현민은 그저 슬쩍 툭 후려쳤을 뿐인데 통나무의 내부가 붕괴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지?”
     “그, 그러게…….”
     경훈의 말에 혁이 대꾸했다. 그에 현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발경을 통해 상대방의 방어력을 무시하고 고스란치 데미지를 입히는 공격. 이것만 있으면 제아무리 두터운 중갑주를 걸친 무사들이라고 해도 버터낼 재간이 없지요. 데시카 형이 원하신다면 가르쳐드릴 순 있어요. 물론 이곳에서 발휘할 수 있는 위력은 본래 위력의 60퍼센트 남짓밖에 안 된다는 거지요.”
     “정말 가르쳐 줄 수 있는 거야?”
     “네. 현성이 형의 친구인데, 어려울 건 없죠. 좀 더 이야기를 한 뒤에 가르쳐드리도록 할게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세릴리아 월드에도 해가 지기 시작했다. 푸르던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들었고 붉게 물든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좋아, 나는 이제 사냥이나 하러 가봐야겠다.”
     배틀 해머를 어깨에 들쳐 멘 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에 강찬도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나도 이제 슬슬 가볼까? 그건 그렇고, 현민아 중원 이야기 꽤 재밌더군. 언제 한 번 가보고 싶은 걸?”
     “하하, 기회가 된다면 저희 백월문에 놀러오세요.”
     강찬의 말에 현민이 빙긋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마주 웃어보인 현민이 다시 시선을 경훈에게 두고 말을 잇기 시작했다. 중원의 유저들이 사용하는 권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강찬과 혁은 손을 흔들며 시계탑 광장을 향했다. 손을 마주 흔들어준 경훈은 이미 현민의 이야기에 푹 빠져 감탄사를 내뱉으며 놀라고 있었다.
     “자, 이건 스킬 북이에요. 먼저 기본적인 권법의 많은 수련치를 쌓아야 발경을 쓸 수 있게 되요.”
     “아, 고마워.”
     현민이 건네준 스킬 북을 받으며 경훈은 무척 기뻐했다.
     경훈이 중원의 권법을 익히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아이템 창을 연 나는 피식 웃으며 현민에게 받은 할아버지의 선물을 꺼내들었다.
     

    제14장   조선 스킬 마스터! 그리고 성장

     어느덧 해가 저물고 검푸른 창공 위에 푸른 달과 붉은 달이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은 나는 내 곁에 배를 깔고 엎드린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창 현민에게 교습(?)을 받는 경훈을 보며 감탄을 했다.
     아까부터 몇 시간 동안 기본적인 여러 동작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릴리아 대륙에선 그저 치고 받는 것이 무투가 이지만, 중원의 권법은 뭔가 달랐다.
     여기서 중원의 권법이 세릴리아 대륙의 무투가들이 익힌 스킬보다 더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 경훈이 하고 있는 기본동작을 보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좀 전에 있었던 경훈과 현민의 대련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세릴리아 대륙의 무투가들이 약하다는 것이 아니다.
     혹시 사람을 때려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주먹질을 할 때 그냥 후려치는 것보다 스냅을 주어 끊어 치는 것이 더더욱 큰 충격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냐 하면, 세릴리아 대륙의 무투가들도 타격점 직전에 주먹을 멈춰 공력을 한껏 뿜어내는 것에 익숙했고, 또 그에 적합한 스킬들이 있다. 더욱 효과적으로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게 스킬을 사용하게 된다면 그 위력은 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강한 파괴력을 가진 것이 무투가이다. 하지만 중원의 권사들은 이보다 앞서는 것 같았다. 권법을 주특기로 사용하지 않는 현민이 경훈과의 대련에서 월등히 앞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결과였으니까.
     “이제 그 정도면 됐어요. 이곳에선 유저간의 PK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아하, 몬스터란 것들에게 이 스킬을 사용해보세요.”
     열심히 허공에 주먹질을 해대는 경훈에게 던진 현민이 그렇게 말했다. 그에 경훈은 하던 주먹지을 멈추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팔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후우, 그저 기본적인 동작들이 이렇게 많다니. 이 많은 걸 열 번 이상 반복하니 스태미나가 안 남아나는군.”
     피식 웃어 보인 경훈이 아이템 창에서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다들 열심히 하는군. 내가 레인지 마스터가 되었을 쯤엔 혁과 경훈도 2차 전직을 할 레벨이 되겠지? 그리고 루카 녓헉도 완전히 다 자라나겠는 걸?
     나는 경훈에게 두었던 시선을 루카에게 던졌다. 길게 하품을 하는 루카. 하품을 해서 그런지 까만 눈망울에 대롱대롱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귀여운 녀석.’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벌써 동이 트기 시작했으니 곧 날이 밝겠군. 드디어 조선 스킬의 기본적인 여러 가지를 배우는 건가?
     벌써부터 기대에 들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건 그렇고 티아는 아직까지 접속을 안 했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기지개를 켠 나는 티아가 걱정이 되었지만 조금 이따 접속할거라 믿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경훈과 현민에게 다가갔다.
     “이제 다 끝난 거야?”
     “응. 데시카 형이 이해력이 빠르고 그만큼 기본적인 동작들을 빠르게 익혀서 무지 편하게 가르칠 수 있었어.”
     “하하, 네가 잘 가르친 거야.”
     현민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경훈이 말했다.
     이 녀석들 금세 친해졌는데? 이제 슬슬 해가 뜨기 시작했으니 조선소로 가봐야겠군.
     나는 꺼내들었던 경공에 대한 스킬 북을 아이템 창에 넣었다. 동이 트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날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어둑어둑하던 공터도 이내 밝아지기 시작했다. 체력과 스태미나 포인트를 늘리기 위해 공터를 달리는 유저들도 몇몇 있었다. 꼭 레벨업을 해야만 스탯 포인트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제 슬슬 조선조에 가보실까?
     나는 휴식을 취하는 현민과 경훈에게 말했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알아둔 생활직이 하나 있어서 말이지. 이것의 수련치를 어느 정도 올린 뒤에 레벨업을 할 생각이야.”
     “또 생활직이구나. 이번엔 뭘 만들지 궁금하네.”
     “나중에, 수련치가 어느 정도 오르면 그 때 직접 보여줄게. 그럼 데시카, 현민아 다음에 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둘을 뒤로한 채 나는 조선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지하 던전.
     이곳은 티르 네티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제 막 티르 네티아에 발을 들인 유저들이 주로 찾는 무대이자 가장 선호하는 던전이다. 아직 던전의 정확한 명칭은 없었기에 모두들 ‘지하 던전’이라고 일컫는다.
     레벨이 어느 정도 되는 대여섯 명의 유저가 파티를 맺어야만 순조롭게 사냥을 할 수 있는 이 던전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강력한 언데드 몬스터들과 기타 여러 몬스터들이 한데 모여 있는 장소가 바로 이 ‘지하 던전’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지정된 보스 몬스터는 없었지만, 보스급의 몬스터가 있었기에 이곳을 찾는 유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보스급의 몬스터를 잡게 디면 호칭을 얻을 수 있을뿐더러 운이 좋으면 상당히 많은 금액과 좋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석상은 뭐지? 무슨 고대의 악마 같은데?”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악마의 얼굴에 심하게 굽은 등과 얇고 기다란 꼬리, 그리고 양쪽 어깨 밑에 돋아난 커다란 피막형의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는 석상을 가리키며 한 유저가 말했다.
     유저는 두 손에 커다란 배틀 엑스를 들고 있었다. 유저가 유심히 석상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의 일행들이 던전에 발을 들임과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고급스런 흰색 조각상의 색이 점점 짙은 회색으로 변색되더니 이내 커다란 피막형의 날개를 활짝 펼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허억, 이, 이게 뭐야?!”
     유저는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으나, 날개를 펼친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더니 급히 몸을 빼내는 유저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우읍!”
     유저의 머리통을 움켜 쥔 몬스터가 허공으로 떠오르자 뒤따라오던 유저들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가, 가고일이다!”
     “구, 궁수님들, 테라 님이 가고일에게 잡혔습니다!”
     그에 뒤따르던 세 명의 궁수 유저가 어깨 위로 손을 넘겨 화살을 하나씩 꺼내들고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건 뒤 가고일을 겨냥한 채 힘껏 당겼다.
     모두들 2차 전직을 한 궁수들이었지만,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몬스터를 예측 사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 가고일에게 잡힌 자신의 파티원에게 자치하면 상처를 입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쳇, 처음부터 가고일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성직자 유저 하나를 더 데려오는 것이었는데…….”
     검신에 푸른 오러가 맺힌 바스타드 소드를 손에 쥐고 풀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무장한 유저가 안절부절 못한 채 가고일이 낮게 비행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던전의 천장이 무지 높았기에 가고일은 자유롭게 비행을 할 수 있었다.
     “으아악!”
     유저를 가지고 노는 것이 지켜웠는지, 높이 뜬 상태엣 움켜쥐고 있던 유저의 머리통을 놓았고, 유저는 그대로 낙하나는 신세가 되었다.
     머리부터 곤두박질쳐진 유저는 몸이 회색으로 변색되더니 이내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볼 것 없이 즉사였다. 유저 하나를 해치운 가고일이 유저들이 한데 모인 곳으로 빠르게 비행하기 시작했다.
     레벨 80대의 가고일이라지만, 주 활동 무대인 던전에서 이곳에 처음 오는 유저들을 당해내지 못할 리 만무했다. 제 아무리 레벨 100을 넘겨 2차 전직을 한 유저라고 해도 처음 오는 이곳 던전의 지리와 몬스터들의 행동패턴을 간파하고 있을 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몹시 당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자리에 한데 모인 유저들이 지하 던전에 발을 들인 것이 처음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자, 와라!”
     맹렬히 활공하는 가고일을 보며 기사 유저가 오러가 충만히 맺힌 바스타드 소드를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가고일이 쏜살같이 유저에게 달려들어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난 발을 쫙 펴 유저의 머리통을 움켜쥐려 들 때,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쐐애액.
     세 명의 궁수 유저들이 쏘아낸 트리플 샷(Triple Shot)이 가고일을 쇄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몸을 빼내지 못한 가고일의 가죽에 총 아홉 개의 화살이 박혔고, 기사 유저가 휘두른 검에 의해 아랫배가 세로로 쭉 갈라지는 신세를 모면하지 못했다.
     아랫배가 길게 갈라진 가고일은 그대로 땅에 처박혔고, 갈라진 아랫배 사이로 내장이 주르륵 밀려 나왔다.
     검붉은 피가 땅을 흥건히 적셨고 소름끼치는 기성을 지르던 가고일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축 늘어졌다. 몸이 회색으로 변색되며 서서히 형체를 잃어가는 가고일을 보며 기사 유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테라 님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실 줄이야. 제일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성직자분들이라도 있으면 가고일에게 신성력이 담긴 스킬을 사용했을 텐데 말이죠.”
     그의 말에 세 명의 궁수 유저 중 한 명이 대꾸했다.
     던전에 발을 들이자마자 제일 기대를 걸고 있던 유저의 죽음에 유저들은 하나같이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두들 믿을 수 없다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참 신기하게 생긴 던전이네?”
     모두가 심란해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음성이 유저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당연히 유저들의 시선은 낯선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집중되었다.
     “무지 넓잖아? 분위기가 참 칙칙하군. 안 그래, 카이루?”
     “좀 그렇다.”
     “쳇. 홀리 라이트(Holy Light)!"
     환한 빛줄기가 뿜어짐과 동시에 어둠속엣 모습을 나타낸 두 유저.
     거대한 배틀 해머를 어깨에 들쳐 멘 유저와 조금 짧아 보이는 투핸디 소드를 허리춤에 차고 은빛 플레이트 메일로 머리를 제외한 전신을 무장한 유저가 느릿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어라? 유저들이 있었네?”
     갈색의 머리카락을 삐죽삐죽 세운 혁의 말이었다. 배틀 해머를 어깨에 들쳐 메고 건들건들 걸어가는 혁의 몸 주위를 주먹만 한 새하얀 빛의 덩어리가 느릿하게 맴돌고 있었다.
     홀리 라이트로 인해 살짝 비춰진 혁의 모습은 상당한 위압감이 넘쳐흘렀다.
     “우와, 저 석상은 뭐야? 마치 악마 같은 걸?”
     피막형의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는 석상에게로 건들건들 걸어가며 혁이 말했다. 강찬은 아무 말 없이 혁의 뒤를 따랐다.
     “조, 조심하세요! 그건 몬스터…….”
     기사 유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혁이 접근했던 석상형태의 가고일이 변색되더니 피막형의 날개를 활짝 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기성을 내지르기 시작한 가고일이 손을 뻗어 혁의 머리를 움켜쥐려던 순간이었다.
     “실드.”
     터엉.
     혁의 몸을 중심으로 새하얀 구체의 막이 형성되었고, 혁의 머리를 움켜쥐려던 가고일의 손은 맥없이 튕켜 나갔다.
     끼아악!
     괴성을 지르던 가고일이 천장까지 높이 치솟더니 매섭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에 실드를 해제한 혁이 뒤로 슬쩍 물러나더니 두 손을 배틀 해머의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부웅.
     퍼억!
     가고일이 내려 올 때를 기다려 배틀 해머를 휘두른 혁.
     배틀 해머의 기공할 파괴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듯 가고일은 훨훨 날아가 던전의 벽면에 처박혔다. 날개 하나가 기괴하게 뒤틀어져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지만 놈은 특유의 빠른 몸놀림으로 혁에게 접근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가고일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혁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힐 볼.”
     주문영창이 이어지자 농구공만 한 구체가 형성되더니 성스러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가고일의 손톱을 슬쩍 피해낸 혁이 힐 볼을 왼손으로 움켜쥔 채 가고일의 면상에 틀어박았다.
     끼악…….
     스아악!
     가고일의 흉측한 면상이 서서히 잿더미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언데드 몬스터 혹은 어둠의 속성을 가진 몬스터를 상대한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혁의 실력이 이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가고일 하나를 쓰러뜨린 혁을 보며 먼저 왔던 유저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쳇, 시시하구먼.”
     이런 혁을 보며 기사 유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가고일을 알아보지 못하는, 처음 상대하는 유저임이 분명했는데 자신들과는 달리 저토록 쉽게 해치우다니…….
     그런 유저들을 뒤로한 채 강찬과 혁은 던전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오, 역시 생활직을 먼저 해봐서 그런지 상당한 손재주로군요.”
     “헤헤. 그렇죠?”
     남들보다 조금 잘난 것이 있으면 자랑하고 싶으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꾹꾹 눌러 참는 나에게 칭찬이란 참으로 좋은 영약이나 다름없었다.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더욱 힘이 났고 더욱 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나무를 톱으로 잘라 모양을 낸 뒤 탄탄한 뗏목으로 만드는 작업이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끝나자 네프가 감탄사를 내뱉은 것이어서, 그에 기분이 들뜬 나는 잠시 뒤집어쓰고 있던 겸손함의 가면을 아주 약간 벗었다.
     “벨터 녀석, 이런 인재를 알고 있었으면서, 진즉 연락을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네프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엔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더 볼 것도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 이번엔 간단한 나룻배 제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나룻배라…….
     정령 계약 퀘스트를 하면서 이곳 티르 네티아에서 얼핏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 배우고 싶었지만 빨리 정령 계약 퀘스트를 끝내야 했기에 자세히 알아보지 못했던 것을 드디어 하게 된 것에 나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네프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배웠고, 조선 스킬의 수련치도 점차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생활직 스키과는 달리 조선 스킬은 총 수련치가 500%가 되었는데, 일주일에 100%씩 채운다면 총 5주가 걸린다는 소리였다.
     물론 일주일에 100%를 올린다는 건 내 관점에서 보는 일이었다. 나 이외에도 생활직을 잘 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나보다 월등히 높은 손재주로 그저 생활직에만 몰두하는 유저들도 많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서 빨리 작은 범선을 제작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키워 친구들과 함께 신대륙으로 떠날 생각을 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오, 거긴 그렇게 하지말고, 비례가 맞지 않는다면 한쪽으로 기울어져 침몰 당할 테니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아, 그렇군요.”
     여러 번의 실수가 거듭될수록 요령이 생겨났고, 그만큼 더 조선 스킬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나룻배는 큰 강이나 사람이 건너지 못하는 깊은 냇물에서 교통 소통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배의 크기도 몇 명밖에 태우지 못하는 소형선에서 100여 명을 태울 수 있는 대형선에 이르기까지 대중소로 나누어져 있는데 지금 내가 제작하고 있는 것은 소형 나룻배였다.
     “그건 그렇고 저 늑대는 참 얌전하군요. 얼마 전, 한 소환술사가 이곳에 왔던 적이 있는데, 소환수가 얼마나 극성맞던지 조선소 내부를 헤집고 다녔었죠. 덩치 큰 히포그리프가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데 사납기도 얼마나 사납던지 자신의 소환주 이외엔 접근하는 것도 불가능했었지요. 하하.”
     몇 시간동안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나에게 지루함을 떨쳐주기 위해서인지 다른 소재로 말을 돌린 네프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친구는 닮는다고 했던가? 벨터의 친구 아니랄까 봐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또 친근감 있게 만드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덧 나룻배는 온전한 모습을 갖춘 채 작업실 정중앙에 놓여있었다. 두 사람 정도는 거뜬히 태울 수 있는 소형 나룻배. 흐흐, 나중에 티아와 함께 타면 되겠군.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네프가 말했다.
     “이렇게나 빨리 제작하다니. 이거 얼마 안 있어서 범선 제작팀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을 갖추겠는걸요?”
     “범선 제작팀이요?”
     네프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네. 커다란 범선은 혼자서 제작할 수 없는 법이지요. 아무리 작은 범선이라도 크기는 어마어마하니까요. 각자 자신이 담당한 곳을 맡아 제작 및 수리를 하는 겁니다.”
     “에? 혼자서는 다 할 수 없나요?”
     나의 물음에 네프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린달까요?”
     “그럼 제가 혼자 범선 제작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겠습니다. 아니, 제작이 아니더라도 혼자서 여러 부분을 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키운다고 해야 맞는 말인가?”
     작정하고 내뱉은 말에 네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무심코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조선 스킬을 입수했을 때부터 이미 마음먹고 있었다.
     세릴리아 월드를 처음 접하면서 벨터와 함께 생활직을 하면서 끝을 본 내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조선 스킬도 끝을 볼 생각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가구 제작 스킬은 수련치 약 200%가량을 남겨두고 잠시 접어두어야 했지만, 레인지 마스터가 되어 세릴리아 월드의 초인들을 꺾고 나서도 할 수 있었기에 잠시 접어둔다고 봐야할 것 같았다.
     내가 직접 만들었단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 직접 제작한 나룻배로 다가가 이리저리 쓸어본 나는 나룻배 위에 탑승해보왔다
     흔들거리지도 그렇다고 불편하지도 않은 나룻배.
     정말 만족스러웠다. 나룻배 위에 올라타 정신없이 헉ㅇ에 노를 젓고 있는 사이 네프가 다가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죠.”
     “예. 아, 네프. 이 배는 제 거죠?”
     “물론이죠.”
     네프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즉시 나룻배에서 내려 아이템 창을 열었다. 그런데 이런 커다란 아이템은 어떻게 아이템 창에 넣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네프가 다가와 말했다.
     “이런 거대한 아이템도 일반 아이템과 마찬가지로 아이템 창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아이템 창을 끌어당겨 나룻배를 밀어 넣어보십시오.”
     나는 즉시 네프의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아이템 창의 끄트머리에 손을 대자 입체 창이 손에 잡혔다. 허공에 떠 있는 아이템 창을 바닥으로 내려놓은 나는 나룻배를 밀어 아이템 창에 넣었다.
     나룻배가 들어가자 아이템 창이 다시 허공에 떠올랐고 아이템 창 한쪽 가장자리에 나룻배가 차지했다.
     네프는 범선 제작팀의 상황을 체크해봐야겠다며 지하 범선 제작실로 내려갔고, 나는 아이템 창에서 미리 넣어두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화살통을 꺼냈다.
     활은 등에 둘러멨고, 화살통은 허리춤에 찬 나는 루카와 함께 조선소에서 빠져나왔다.
     [티아 젠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어라?”
     조선소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대화 요청이 들어왔다. 티아에게서 온 대화 요청. 나는 빙긋 웃으며 대화 요청을 승인했다.
                   *    *     *
     수도 세인트 모닝.
     분수대 광장 한 가운데 서있는 두 유저를 중심으로 많은 유저들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수많은 유저들이 두 유저를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대련을 하는 유저들인 것 같았다.
     두 유저의 차림새로 보아 근거리 결투로 치고받는 유저는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나같이 로브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마법사 모자에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로브를 입고 갈색 뿔테 안경을 쓴 유저. 그 유저의 손에는 붉은 빛이 맴도는 기다란 스태프가 들려있었다.
     그 차림새로 보아 그는 세릴리아 월드에 얼마 없는 마법사임이 분명했다. 그와 마주보고 있는 유저는 새하얀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고 흑발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손에는 짤막한 완드가 들려 있었고 전형적인 마법사와는 뭔가 달랐다.
     짤막한 완드를 손에 쥔 유저가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의 능력이 당신과 같은 일반 마법사보다 월등히 앞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텐데 이렇게 대련을 요청하다니. 아직 흑마법사의 무서움을 모르시는가 봅니다. 마성의 두 번째 현자 레온.”
     상대방을 깔보는 그런 말투였다. 하지만 레온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랄까요? 이제 6클래스의 벽을 부술 때가 돼서 말입니다.”
     “벌써 5클래스 마스터이신가요? 훗, 비록 제가 이제 겨우 5클래스에 입문했습니다만. 같은 클래스의 경우 흑마법사가 월등히 앞선다는 것만 알아두십시오.”
     자신을 상당히 깔보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온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럼 시작할까요?”
     “좋을 대로 하시지요.”
     흑마법사 유저 슬레어의 말을 마지막으로 두 유저의 몸을 푸른빛이 감쌌다.
     슬레어의 말대로 마법의 위력 면에선 일반 마법보다 흑마법이 월등히 뛰어난 건 확실했다.
     어둠의 마나는 파괴적이고 패도적인 반면 대자연의 마나는 그저 순수한 기의 집합체일 뿐이었다. 현재 5클래스에 입문한 흑마법사 슬레어의 마법은 일반 마법사 6클래스에 달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슬레어가 완드를 휘휘 저으며 마법을 캐스팅 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스 포그(Ice Fog)."
     처음부터 강력한 공격을 해올 거란 레온의 예상이 딱 맞아 떨어졌고, 슬레어가 마법을 캐스팅하는 동안 레온이 간단한 2클래스 마법인 아이스 포그를 시전했다.
     슬레어의 주변에 시린 한기를 내뿜는 안개가 형성되어 슬레어의 몸을 감쌌다.
     “이 무슨!”
     캐스팅을 중단한 슬레어의 주변으로 재배열되기 시작하던 마나가 이내 허공에 흩뿌려졌다. 기의 요동이 거친 것으로 보아 다소 위력이 강한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
     레온의 몸 주변으로 은빛 선들이 줄기줄기 형성되기 시작했다. 공기가 응축되고 응축되어 금세 새하얀 화살의 형태를 갖추었다.
     순식간에 시전된 수백 발의 매직 미사일이 시전자의 몸 주이를 빠르게 맴돌기 시작했다. 레온이 손짓하자 수백 발의 매직 미사일이 일제히 슬레이어를 향해 맹렬히 쏘아졌다.
     “허억. 브, 블링그(Blink;공간전이)!”
     허공을 빽빽이 메운 다발의 매직 미사일을 보며 헛바람을 집어삼킨 슬레어가 급히 블링크를 시전 해 매직 미사일을 피해냈다. 그리고 매직 미사일이 슬레어에게 쏘아짐과 동시에 마법을 캐스팅하던 레온이 캐스팅을 마친 뒤 슬레어가 모스을 나타내기만을 기다렸다.
     정확히 자신과 4미터 남짓 떨어진 거리에 모습을 나타낸 슬레어를 바라보며 레온이 시동어를 외쳤다.
     “윈드 블레이드(Wind Blade).”
     윈드 커터의 강화판인 절삭력이 강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람의 칼날 윈드 브레이드가 슬레어를 쇄도해 왔으나 급히 실드를 펼쳐 레온의 공격을 막아낸 슬레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흑마법의 위력만을 믿고 레온의 대련을 받아들였지만 이토록 자신을 몰아붙일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실드를 펼쳐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사이 또다시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한 레온이 분주하게 수인(手認)을 맺기 시작했다.
     기의 파동이 거칠어지면서 레온을 중심으로 주변의 마나가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흑마법사가 우세하다거나 막상막하로 맞붙을 거란 유저들의 예상과는 달리 압도적으로 슬레어를 밀어 붙이는 레온의 손속은 메서웠다.
     “익스플로전(Explosion)!”
     캐스팅을 끝마친 레온이 급히 거리를 두며 시동어를 외쳤다.
     공성전 당시 수없이 많은 유저를 쓸어버린 공포의 마법이 또 다시 발현되었다.
     불의 속성을 가진 마나와 대자연의 마나가 반응하며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눈을 뜨지 못할 섬광과 엄청난 열기가 치솟았다.
     퍼엉!
     자욱한 흙먼지와 연기가 걷히며 지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익스플로전이 작렬한 부근의 지면이 움푹하게 패여 들어갔다. 슬레어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레온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재빨리 간단한 수인을 맺어 마법을 시전했다.
     “마나 스캔(Mana Scan).”
     마나를 가진 주변의 생명체들을 감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며, 숨어있는 대상도 찾을 수 있는 마법이 레온을 중심으로 주변을 장악했다.
     금세 슬레어의 위치를 찾아낸 레온이 마법을 캐스팅하려던 찰나, 이미 캐스팅을 마친 슬레어가 시동어를 외쳤다.
     “그대로 갚아주마, 익스플로전!”
     슬레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온을 중심으로 대폭발이 일어났다. 방금 전 레온이 발현시켰던 익스플로전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보여주는 익스플로전이었다.
     흙먼지가 뒤섞인 안개가 걷히며 익스플로전이 작렬한 대지가 모습을 나타냈다. 움푹하게 패인 대지가 흑마버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끝인가?”
     슬레어가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막 5클래스에 들어선 그로써 5클래스의 세세한 마법까지 전부 사용하진 못했기 때문에 레온과 같이 마나 스캔과 같은 마법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간파하는 것은 무리였다.
     대련을 할 때 몸을 감싸는 푸른빛이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레온이 죽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녀석이 나오기 전에 어서 빨리 캐스팅을 마쳐야 한다.’
     슬레어는 즉시 완드를 휘휘 저으며 마법을 캐스팅했다.
     ‘역시, 연구한대로 흑마법의 위력이 일반 마법보다 훨씬 뛰어나구나. 방금 전 익스플로전의 위력이 정말 가공할 만 했어.’
     인비지빌리티(투명화)마법을 시전한 뒤 관중하는 유저들의 틈새에 숨은 레온이 시선을 슬레어에게 두었다.
     기의 파동이 제법 거친 것을 보니 아무래도 다소 높은 클래스의 마법을 캐스팅하는 것 같았다. 즉시 투명화 마법을 푼 레온이 블링크를 이용해 슬레어의 뒤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스(grease).”
     벌러덩.
     “허억!”
     캐스팅을 하던 슬레어는 레온의 그리스에 맥없이 맨바닥에 곤두박질쳐졌고 틈을 놓치지 않은 레온이 재빨리 시도어를 외쳤다.
     “라이트닝 스피어(Lighting Spear)!”
     레온의 손아귀에서 주먹만 한 전하덩어리가 형성되더니 이내 길게 위아래로 쭉 뻗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맹렬한 방전을 일으키며 스파크를 튀는 뇌전의 창이 레온에 형성되는 순간 라이트닝 스피어를 움켜쥔 레온이 쓰러진 슬레어의 심장에 뇌전의 창을 찔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 실드!”
     푸욱!
     “크억.”
     슬레어의 실드가 펼쳐지기도 전에 레온의 손에 쥐어진 뇌전의 창이 슬레어의 심장을 꿰뚫었다. 레온의 압도적인 승리로 대련은 끝이 났고, 유저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대련이 끝나자 감소되었던 생명력과 마나, 스태미나가 모두 회복되었고, 레온과 슬레어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픈빛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허탈한 표정을 짓고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슬레어를 잔잔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레온이 손을 뻗었다. 주저앉아 있는 슬레어는 레온의 손을 잡지 못한 채 그저 허탈한 눈빛으로 레온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으흠. 분명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말이지.”
     시계탑 광장 중심부에서 티아를 만나기로 했는데 왜 여태 안오는 것인지.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어여쁜 엘프 유저를 볼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타고 그녀의 밝은 갈색 머리칼이 흔들렸다.
     “오빠!”
     생긋 웃으며 달려오는 티아. 그에 나는 마주 웃어주며 손을 흔들었다.
     “헤헤, 많이 기다렸지?”
     “아니, 나도 이제 막 왔는걸.”
     늦은 것이 마안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티아에게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내 뒤에 바짝 붙어있던 루카가 티아게게 다가가 꼬리를 흔들며 캉캉 짖기 시작했고, 티아는 그런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던 티아가 고개를 들어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나 오늘 학교 다녀오는 길에 오빠랑 정말 닮은 사람 봤다.”
     “날 닮은 사람?”
     “응. 수업 끝나고 친구랑 돈가스 전문전에 갔었거든. 한쪽 자리에서 조용히 있던 어떤 남잔데, 키도 오빠랑 비슷한 것 같았고, 나랑 눈이 마주치니까 황급히 나가더라?”
     티아의 말에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분명 오늘 돈가스 전문점에 가서 밥을 먹을 때 처음 보는 것이지만 왠지 모르게 많이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게 티아였다니…….
     잠시 멍하게 있는 사이 내던진 티아의 질문에 나는 뜨끔해야 했다.
     “오빠, 혹시 오늘 경기도 남양주 3번 도시 덕소동에 위치한 돈가스 전문점에 오지 않았어?”
     티아가 말한 곳은 다름 아닌 우리 동네였다. 그도 그럴 것이 티아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니… 왜 여태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걸까?
     “응? 왜 대답이 없어?”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 나에게 되묻는 티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에… 그게… 그러니까…….”
     “응? 왔었어, 안 왔었어. 그것만 말해봐.”
     내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그렇게 묻는 티아.
     티아 앞에선 나타나지 않았던 몸이 굳는 현상이 갑자기 일어나기 시작했다.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까맣게 바꾸고, 뽀족한 귀만 평범한 인간의 귀로 바꾼다면 분명 오늘 오전, 돈가스 전문점에서 본 소녀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떠올리자 몸이 굳는 것을 느낀 나는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으, 응. 가, 갔었어.”
     “어쩐지! 너무 닮았다 했어! 근데 왜 그냥 나간 거야?”
     “그, 그게…….”
     바짝 달라붙어 팔짱을 끼는 티아. 내 왼팔이 티아의 팔에 감기자 나는 몸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음, 현실에선 내가 이 모습을 하지 않아서 알아보지 못한 건가? 히히. 우리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구나.”
     “하, 하하.”
     나는 티아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시선을 루카에게 던졌다. 이런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루카.
     “아, 그건 그렇고 아까 보여준다고 했던 거 있잖아!”
     내가 돌덩이처럼 굳어있을 때, 티아가 얼른 화재를 돌렸다. 그에 나는 굳었던 몸이 다시 슬슬 풀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평정(?)을 되찾은 나는 티아를 이끌고 네티아 항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응? 어, 어디 가는 거야?”
     “가보면 알아.”
     네티아 항구는 수많은 유저들로 북적였다.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의 관광지이니만큼 하루하루 모여드는 유저의 수가 좀처럼 줄지 않았다.
     유저들이 잘 가지 않는 개인 나루터로 도착한 나는 나루터에 서서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바다를 둘러보다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상쾌한 바닷바람이 폐부를 가득 채웠고, 실컷 바닷바람을 음미한 나는 들이켰던 공기로 도로 내뱉었다.
     “후아, 공기 좋지?”
     “응. 근데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주변이 탁 트여 무언가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을 주는 나루터 주변을 둘러보며 티아가 물었다. 나는 아이템 창에서 나룻배를 꺼내 푸른 바다로 밀어 넣었다.
     첨벙.
     두 사람 정도는 거뜬히 태울법한 아담한 나룻배가 푸른 바다 위에 몸을 담갔다. 나룻배를 본 티아가 입을 떡 벌리며 말했다.
     “이게 오빠가 만든 거야?”
     “응. 오늘 만들었지, 어때? 한 번 타볼래?”
     나룻배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은 나는 티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타아는 방긋 웃으며 나의 손을 잡고 나룻배에 올라탔다. 서로 마주 보고 않을 수 있게끔 제작되어 있었기에 자리에 앉은 나는 피식 웃으며 노를 잡았다.
     캉캉!
     “응?”
     나루터로 눈을 돌리자 배에 탑승하지 못한 루카가 캉캉 짖으며 꼬리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으흠. 훼방을 놓는구먼. 잠시 소환 해제라도 시켜놓을까?
     이리저리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고개를 돌려 루카에게 시선을 던지 티아가 말했다.
     “가운데 자리가 비는데? 루카가 타면 적당하겠다.”
     “큭.”
     나는 하는 수 없이 루카를 나룻배 가운데에 태운 뒤 노를 젓기 시작했다.
     [‘항해술’ 스킬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눈앞에 뜬 직사각형 모양의 반투명한 초록색 입체 창. 그에 나는 스킬 창을 열었다.
     [Skill]
     방직(Weaving)
            Master
     천옷만들기(Tailorng)
            Master
     잡화물품 제작(Handicraft)
            Master
     생활필수품 제작
            Master
     제련(Refine)
            Master
     블랙스미스(Blacksmith)
            Master
     악기 연주(playing Instrument)
            (78.49/300.00%)
     가구 제작(Furniture production)
            (101.98/300.00%)
     조선(造船)
            (3.42/500.00%)
     항해술(航海術)
            (NPC 혹은 스킬 붉을 통해 획득해야 합니다.)
     “항해술? 이건 또 뭐지?”
     항해술이란 스킬을 보자 궁금증이 밀려오기 시작했지만, 나중에 천천히 알아보면 되었기에 나는 스킬 창을 닫고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망토가 작게 펄럭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상당히 거치적거리는군.
     나는 등에 둘러 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루카의 옆에 놓고 다시 노를 젓기 시작했다.
     “와아… 오빠가 여러 가지 물건을 잘 만든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런 것까지 만들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서툴지만 열심히 노를 젓고 있을 때, 티아가 말했다. 나는 빙긋 웃어주며 노를 젓기 시작했다.
     나룻배가 항구에서 점차 멀어지기 시작할 때였다.
     [소형배로 더 이상 나간다면 위험할 것이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권장합니다.]
     익숙한 크기의 입체 창이 떴고, 나는 그대로 한쪽 노를 저어 뱃머리를 돌린 뒤 다시 항구를 향해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항구와 소형선 경계지역의 중간지점에서 노를 젓는 것을 멈춘 k는 티아를 보며 말했다.
     “저… 티아. 할 말이 있는데.”
     “응? 무슨 말?”
     티아가 궁금한 듯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말이지. 좀 있으면 내가 레인지 마스터리 수련치를 모두 채워 ‘레인지 마스터(Ranged Master)'라는 경지에 오르게 되거든.”
     “레이지 마스터? 그게 뭐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는지 티아가 궁금한 듯 또다시 되물었다. 그에 나는 차근차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소드 마스터가 뭔지는 알지?”
     “응.”
     “검에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는 경지. 레인지 마스터도 그것과 같아. 소드 마스터와 같이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는 경지지.”
     “우와, 정말?”
     “응. 그리고 레이지 마스터가 되면 신대륙으로 떠날 생각이야.”
     “시, 신대륙?”
     “응.”
     신대륙으로 떠난다는 말에 티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대륙이면… 이곳의 사냥터보다 족히 열 배 이상 위험천만한 곳이라고 들었어. 그런데도 신대륙에 건너가고 싶은 거야?”
     신대륙이 이곳과 다르다고는 들었지만 열 배 이상 위험천만한 곳이라니… 하지만 티아의 말을 들어보니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듣고 하는 말 같았다.
     직접 보지 않고서야 신대륙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었기에 떠도는 소문 따위에 얽혀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나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그건 직접 가봐야 알지, 너도 같이 신대륙으로 떠날래?”
     “음… 글쎄…….”
     티아가 시선을 루카에게 고정시킨 뒤 아무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민 중인 것 같았다. 한참동안 미동도 하지 않던 티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뒤 입을 열었다.
     “레인지 마스터가 되려면 얼마나 있어야 해?”
     “레이지 마스터? 글쎄. 우선 조선 스킬의 수련치를 상당량 올린 뒤 다시 사냥을 할 생각이야. 우선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조선 스킬에 열중하려고, 레인지 마스터리 스킬은 이제 조금만 더 수련하게 되면 마스터가 되니까, 금방 도달할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치자 티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그럼 족히 한 달 이상 걸린다는 거네. 그럼 내가 그동안 레벨업을 해서 2차 전직을 하면 되겠다. 2차 전직을 하면 2차 전직을 했을 때보다 월등히 강해지니까 신대륙에 따라가서도 짐은 되지 않을 거야.”
     티아의 말에 나는 입 꼬리가 귀에 걸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티아의 말인즉슨 자기 자신도 나를 따라 신대륙으로 건너가겠다는 말이 아닌가?
     기분이 좋아진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2차 전직을 한 뒤에 2차 스킬들을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쯤 되면 그때 같이 출발하자. 나도 레인지 마스터가 된 뒤 곧장 출발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럼 다른 곳도 더 두러볼까?”
     “응!”
     티아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나는 세차게 노를 저었다.
                   *    *     *
     “도대체가 이 던전은 처음 보는 몬스터로 가득하구먼.”
     “…….”
     피가 흥건히 묻어있는 배틀 해머를 어깨에 들쳐 메고 주변을 경계하는 혁의 뒤로 강천이 말없이 따르기 시작했다.
     문 블레이드의 때 하나 묻지 않은 순백색 검신이 혁의 홀리 라이트의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던전 내부의 환경은 상당히 혹독했다.
     온도가 낮아 싸늘한 것은 당연했고, 추위로 인해 둔화 된 후각과 신경 때문에 소리 없이 접근하는 몬스터를 인식하는 것이 어려웠다. 게다가 이미 던전의 환경에 익숙한 몬스터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움직일 수 있었기에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루샤크, 잠깐 멈춰봐. 플레임 웨폰.”
     화르륵.
     순백색의 검신을 타고 시뻘건 겁화가 밀려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강찬의 시선이 어둠속에서 꿈틀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런 강찬을 인식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쏜살같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몸길이만 해도 족히 3미터가량 되어 보이는 거대한 몬스터, 그 몬스터는 바로 붉은 피부를 가진 블러드 윔(Blood Worm)이었다.
     블러드 윔은 습기가 가득한 어두운 습지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살아있는 생물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거대한 지렁이 몬스터다.
     놈들은 몸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존재들은 모두 먹잇감으로 인식하는 습성이 있었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강찬과 혁에게 몸을 날린 것이었다.
     블러드 윔의 공격을 살짝 피해낸 강찬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문 블레이드를 고쳐 잡은 채 블러드 윔을 경계했다.
     “허억. 뭐, 뭐야?”
     블러드 윔의 갑작스런 등장에 혁도 그렇게 소리치며 배틀 해머를 고쳐 잡았다.
     “제길, 한 마리가 아니야. 긴장해, 루샤크!”
     “그래? 그건 그렇고 지렁이가 뭐 저렇게 큰 거지?”
     강찬의 말에 혁이 정산을 차린 뒤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런 강찬과 혁을 중심으로 도합 세 마리의 블러드 윔이 주변을 빙빙 돌며 공격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호오. 주위를 돌아 신경을 분산시키겠다는 뜻인가? 하지만 나에게 먹히지 않는다, 벌레 녀석들아.’
     뜨겁게 타오르는 화염을 머금은 문 블레이드를 고쳐 잡은 강찬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몸이 주저 없이 지면을 박차고 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블러드 윔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강찬의 문 블레이드가 반원을 그리며 어둠을 가르자 불러드 윔의 옆구리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옆구리를 베인 블러드 윔이 몸부림을 쳤지만, 강찬은 멈추지 않고 문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상처 부위가 그슬려 재생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걸레짝이 된 블러드 윔은 서서히 형체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질 수 없지!”
     동료의 피 냄새를 맡은 두 마리의 블러드 윔 두 마리도 한꺼번에 강찬에게 몸을 날렸지만 휘둘러진 혁의 배틀 해머가 한 마리의 블러드 윔에게 제동을 걸었다.
     부웅!
     퍼억!
     휘둘러지는 거대한 배틀 해머와 블러드 윔의 대가리가 충돌하자, 묵직한 파육음이 던전 내부를 가득 채웠다.
     배틀 해머와 충돌한 블러드 윔의 머리 부분에 신경이 터져 피가 맺혔고 커? 충격을 받은 블러드 윔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차앗!”
     그대로 다시 몸을 날린 혁이 배틀 해머를 머리 위로 치켜들더니 있는 힘껏 블러드 윔의 대가리를 내리찍었다.
     퍼억!
     혁의 배틀 해머가 작렬하자 블러드 윔의 대가리가 기괴하게 함몰되었고,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카이루, 여기 끝이다!”
     순식간에 블러드 윔을 해치움 혁이 고개를 돌려 강찬에게 소리쳤다.
     강찬은 자신에게 달려든 블러드 윔의 공격을 피해낸 뒤 화염을 머금은 문 블레이드로 블러드 윔의 옆구리를 길게 베어냈다.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뜨거운 열기에 의해 검신으로 튄 피는 순식간에 증발되어 버렸다.
     “징그러운 녀석들.”
     블러드 윔을 해치운 강찬이 서서히 형체를 잃어가는 블러드 윔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하, 이 던전이 지금껏 사냥해왔던 곳 중에서 제일 신나는데? 미궁보다 훨씬 재미있어.”
     그런 강찬과는 달리 혁은 상당히 들뜬 상태였다. 난생 처음 보는 몬스터들과 자주 나타나는 어둠 속성의 몬스터와 언데드 몬스터와 엄청난 경험치. 혁에게 있어선 안성맞춤인 던전인 것이었다.
     잔뜩 들뜬 혁에게 강찬이 말했다.
     “루샤크, 이제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보자. 여태껏 네가 앞장섰잖아.”
     “뭐, 좋아. 대신 언데드 몬스터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 거다?”
     “그래, 알았다.”
     혁의 대답을 끝으로 강찬이 앞장을 섰고 던전을 지탱하는 커다란 기둥을 지나 요상한 문양이 어지럽게 새겨진 벽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우거 사냥은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앞장 선 강찬이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으음? 이상하군.’
     혁과 함께 지하 던전을 배화하던 강찬이 주위를 빙 둘러보며 읊조렸다.
     이상한 문양의 벽화가 새겨진 이 장소로 오기 전에도 드문드문 파티를 맺어 사냥을 하는 유저들을 몇몇 볼 수 있었지만 이곳은 이상하게도 그보다 더 많은 유저들이 오가고 있었다.
     새하얀 사제복장을 한 프리스트 유저 하나와 은빛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무장을 한 기사 유저 몇으로 이루어진 파티, 마법사 유저 하나와 기사 유저 몇으로 이루어진 파티 등 여러 파티가 이곳에 모여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파티 플레이를 하는 유저들을 본 강찬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야, 야. 여긴 유저들이 너무 많다. 더 깊이 들어가 보자.”
     강찬이 멈춰 서서 유심히 유저들을 지켜보고 있자 성질 급한 혁이 강찬을 잡아끌며 말했다.
     “아, 그래.”
     강찬은 파티 플레이를 하는 유저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혁을 따라 던전의 내부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지하 던전 내부는 요상한 벽화가 새겨진 길이 쭉 뻗어 있는 곳이었다.
     “듀, 듀라한이다!”
     흰 사제복장을 한 프리스트 유저가 리젠 된 실루엣을 보며 소리쳤다. 그에 그의 뒤를 따르던 기사 유저 셋이 프리스트 유저를 둘러싸고 듀라한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듀라한이라 불린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작은 왕국의 농민들이나 입을법한 그런 옷이었다.
     그러데 뭔가가 이상했다. 분명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어깨 위에 있어야 할 머리통이 없다는 것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였다.
     듀라한은 처형장에서 목이 잘린 시체를 되살아나게 한 것을 말한다. 본래 목이 잘린 시체이니 당연히 언데드 몬스터의 일종이다.
     본래는 어깨 위에 있어야 할 제 머리통을 철퇴처럼 휘두르며 달려드는 모습을 하고 있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명사였다.
     게다가 모든 상급 언데드 몬스터가 그러하듯 듀라한은 오우거에 육박하는 힘과 단단한 피부(즉, 높은 방어력)를 가져 2차 전직을 하지 않은 유저들로서는 절대로 상대할 수 없는 그런 몬스터였다.
     프리스트 유저의 말에 멀뚱히 서있던 듀라한이 몸을 돌렸다.
     목이 잘린 부분은 썩어 들어가 있었고, 왼팔에 끼고 있는 머리에 있는 눈에서 초점 없는 시선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머리통의 목 아래론 척추가 길게 늘어져 있어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면 이 흉측한 모습에 그 자리에서 구역질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잠시 멀뚱히 서 있던 듀라한이 잘린 목 밑으로 길게 늘어진 척추를 움켜쥐었다. 언데드화 되면서 잘렸던 척추가 목 아래로 다시 자란 무기 같은 형태가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기사 유저들의 검신에 눈부신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2차 전직을 한 기사 유저들의 특권인 오러의 발현인 것이다.
     네 명의 유저를 인식한 듀라한이 기성을 내지르며 일절의 망설임 없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척추를 손에 쥐고 마치 철퇴를 사용하듯 자신의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는 듀라한이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부웅!
     듀라한이 휘두른 머리통이 대기를 갈랐고, 듀라한의 공격을 겨우 피해낸 기사 유저들이 검을 고쳐 잡고 듀라한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듀라한은 높은 지능을 가진 언데드 몬스터가 아니었기에 눈앞에 존재하는 적으로 간주되는 물체는 무조건 파괴하려는 습성이 있는지라 좀에게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앗!”
     기사 유저의 검이 듀라한의 어깨를 깊게 베어냈다. 오러가 맺혀 있기에 가능한 일었다.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움찔 하던 듀라한이 자신을 공격한 기사 유저에게 몸을 던졌다.
     듀라한은 지극히 직선적인 공격을 가하는 몬스터다. 뛰어난 방어력 때문인지, 어지간한 자상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든다고 보는 것이 정확했다.
     “허억.”
     기사 유저가 잠시 발을 헛딛는 사이 거세게 허공을 맴돌던 듀라한의 머리통이 기사 유저의 복부에 작렬했다.
     제법 방어력이 높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하고 있다지만 이곳 지하 던전의 보스급 몬스터인 듀라한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낼 순 없었다.
     생명력의 절반 이상이 감소된 것을 느끼며 기사 유저는 맨땅에 거칠게 쑤셔 박혔다. 다른 두 명의 기사 유저가 손을 쓰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듀라한은 그 자리에 쓰러진 기사 유저에게 몸을 던졌다. 듀라한의 머리통이 기상 유저의 투구를 박살낼 듯 작력하려던 순간이었다.
     “세인트 파이어(Saint Fire)”
     마법사들의 파이어 볼과는 다른 신성력이 깃든 새하얗게 타오르는 구체가 듀라한을 향해 쏘아졌다.
     화르륵!
     언데드 몬스터인 듀라한에게 신성력이 깃든 신성 마법은 치명적이다.
     프리스트 유저의 세인트 파이어가 듀라한의 등판을 작렬했고 듀라한이 잠시 경직된 사이 지켜보던 기사 유저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검을 휘둘렀다.
     크아아아!
     잠시 경직되어 있던 듀라한이 거세게 몸부림치며 머리통을 마구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듀라한의 반격에 기사 유저들 전원이 머리통에 맞아 바닥에 나뒹굴었다.
     “으악.”
     “허억!”
     듀라한은 머리통을 휘두르며 프리스트 유저에게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에 프리스트 유저가 급히 실드를 펼쳤다.
     터엉!
     단 한 번의 공격에 실드엔 좍 금이 가기 시작했고 듀라한의 머리통이 세 번 더 적중하자 실드는 그대로 깨져버렸다. 프리스트 유저의 망막엔 머리통을 거세게 휘두르는 듀라한의 모습이 맺혔다.
     “으, 으악!”
     퍼억!
     애당초 방어력이 약한 프리스트 유저는 듀라한의 단 한 번의 공격에 데들리 직전까지 생명력이 감소되었다.
     제 아무리 언데드 몬스터의 천적인 프리스트라고 하지만 이제 갓 2차 전직을 한 성직자 유저가 보스급 몬스터인 듀라한을 이겨낸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오, 이쪽 분위가가 음산한데? 금방이라도 언데드 몬스터가 나올 것 같아?”
     앞장ㅅ 길을 걷던 혁이 소리쳤다.
     “잠깐, 루샤크. 이번엔 내가 앞장서는 것 아니었냐?”
     신이 난 혁과는 달리 강찬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차, 그랬었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계속 앞장 서 길을 가는 혁. 말과 행동이 전혀 맞지 않았다. 하지만 강찬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한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으아악!”
     퍼억!
     단발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둔탁한 파육음이 이곳 던전 내부의 한 장소에 울려 퍼졌다. 지나가는 유저도 얼마 없었기에 지극힌 조용한 이곳. 혁과 강찬의 시선이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급히 쏘아졌다.
     “뭐, 뭐야.”
     “한 번 가보자.”
     이번엔 강찬이 앞장서 달리기 시작했고 그 뒤를 혁이 급히 따랐다. 제법 가까운 곳이었으나 이미 일(?)은 벌어져 있었다.
     죽은지 얼마 안 되어 서서히 희색으로 변색되는 네 명의 유저들의 시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사체들의 중앙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각 천천히 버티고 서있었다.
     도대체 저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의문은 얼마 안 되어 베일을 벗게 되었다. 길게 늘어진 척추 끝엔 사람의 머리통으로 간주되는 것이 있었고. 척추를 쥔 몸뚱이의 어깨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저거 뭐지? 몬스터인가“
     정찰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유심히 살펴보던 강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플레임 웨폰(Fame Weapoon)
     문 블레이드에서 뿜어진 화염이 일정한 형태를 갖추었고 뿜어진 화염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강찬의 문 블레이드에서 뿜어지는 열기로 인해 추위 때문에 둔해진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느낀 혁이 말했다.
     “저건 뭐냐?”
     “글세. 몬스터인 것 같은데?”
     “그럼 잡아야지!”
     배틀 해머를 두 손으로 고쳐 잡은 혁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몸을 날렸다. 묵직한 혁의 배틀 해머가 듀라한의 잘린 목 부분을 강타했다.
     퍼억!
     “얼레?”
     ‘어째 손맛이 좀 이상하다?’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혁이 급이 몸을 뒤로 뺐다. 그에 혁에게 일격을 허용한 듀라한이 몸을 돌렸다. 바닥에 뒹굴던 머리통의 초점 없는 시선이 혁에게 고정되었고, 그와 동시에 듀라한이 기성을 내지르며 혁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뭐, 뭐야?!”
     “듀라한이다! 홈페이지에서 본 적 있는 몬스터야! 어서 피해, 루샤크!”
     허공에서 빙빙 휘둘러지던 듀라한의 머리통이 혁에게 쇄도해 오는 순간에 혁이 급히 몸을 뒤로 뺐다. 다행히도 듀라한의 정체를 알고 있는 강찬이 몸을 날려 듀라한과 치고받는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강찬도 2차 전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저였지만 히든 클래스라는, 직업상 남들보다 좀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화염의 대마검사의 전매특허인 플레임 웨폰은 소드 마스터가 뿜어낸 오러 블레이드와 맞먹는 강도를 지니고 있었기에 듀라한의 머리통을 무리 없이 막아낼 수 있었다.
     거기에 신성 마법을 구사할 줄 아는 혁이 개입하자 싸움의 양상이 딴판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듀라한의 머리통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베이고 그슬려져 있었다.
     “힐 볼!”
     혁의 손아귀에서 농구공만 한 성스런 구체가 형성되어 듀라한을 향해 쏘아졌다. 상급 언데드 몬스터인 듀라한에게 저급한 힐 볼 따위가 먹혀들 리 없었으나 움찔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듀라한과 공방전을 벌이는 강찬이 밀린다 싶을 때 혁의 힐 볼이 쏘아졌다. 그렇게 된다면 언제 밀렸냐는 듯 다시 강찬이 맹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제길, 홈페이지에서 본 글귀에 없었던 사항이 많군.’
     듀라한의 파상적인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던 강찬이 읊조렸다.
     “허억.”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듀라한의 소름 돋는 머리통이 자신의 머리를 쇄도해 오는 것을 본 강찬이 소리쳤다.
     “파이어 실드!”
     화르륵.
     강찬을 중심으로 커다란 화염의 구체가 형성되어 강찬을 감쌌다. 강찬을 쇄도해 오던 듀라한의 머리통이 파이어 실드에 부딪힘과 동시에 맥없이 튕겨나갔다.
     ‘이때다!’
     듀라한이 빈틈을 보인 사이 실드를 거둔 강찬이 즉시 플레임 웨폰을 시전한 뒤 듀라한의 가슴팍에 검을 꽂아 넣었다.
     푸욱.
     크워억!
     강찬의 문 블레이드가 듀라한의 심장을 파괴하긴 했지만 애당초 제 기능을 잃고 있던 내장을 파괴한다고 해서 죽을 몬스터가 아님을 알아챈 강찬이 즉시 꽂아 넣었던 문 블레이드를 뽑았다.
     “카이루, 비켜 봐!”
     혁의 말에 강찬이 급히 뒤로 몸을 뺐다. 몸을 뒤로 뺀 강찬의 시선이 혁에게 던져졌다.
     ‘저럴 틈이 있었나?’
     혁의 몸 주위로 대여섯 개의 힐 볼이 형성되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혁이 배틀 해머로 힐 볼을 하나씩 쳐내자 힐 볼이 듀라한에게 쏘아져나가 신성 데미지를 가하기 시작했다.
     “크아아……."
     강찬의 일격과 혁의 힐 볼에 몸을 내준 듀라한이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듀라한의 몸뚱이가 그대로 뒤로 벌렁 넘어갔다. 서서히 형체를 잃어가는 것을 보아 죽은 것이 분명했다.
     놈이 완전히 형체를 잃어갈 때쯤, 갑자기 혁의 몸 주위로 새하얀 빛무리가 형성되더니 이내 혁의 몸을 휘감으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번쩍!
     “오, 축하한다. 루샤크.”
     “좋았어, 드디어 레벨 88이다!”
     레벨업을 해 기분이 좋아진 혁이 빙긋 웃으며 소리쳤다.
     “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내일도 다시 한 번 돌아다녀 보자.”
     “그러자. 그건 그렇고 경훈이 녀석의 레벨이 86이었지? 크흐흐. 미궁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보다 높았었는데, 이제 내가 더 높군.”
     “풋. 그리도 좋으냐? 그건 그렇고 듀라한은 보스급 몬스터인데 생각보다 빨리 잡았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듀라한이 대(大)자로 뻗어있던 곳에 시선을 옮긴 강찬이 말했다.
     “아까 전에 들려왔던 비명소리와 회색으로 변색되는 유저들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가지 않냐?”
     상태 창을 열어 스탯 포인트를 분배한 혁이 대꾸했다. 그에 강찬이 이해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유저들이 생명력을 절반 정도는 깎아 놓았다고 봐야 이상할 건 없는 건 같아.”
     “맞는 말이다. 아, 로그아웃하면 밥이나 먹어야겠다.”
     “나는 로그아웃하고 잠이나 자야지.”
                   *    *     *
     배를 타고 항구 주변을 전부 다 돌아다녔더니 어느새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다.
     벌써 세릴리아 월드에는 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저 멀리서 푸른 달 하나가 둥둥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노를 저어 나루터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재밌었지?”
     “응! 무지 재밌었어!”
     내가 묻자 티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룻배는 부드럽게 바다 위를 건너 나루터에 도착했고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집어든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나룻배에서 일어나 배에서 내려 티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티아가 내 손을 잡고 배에서 내렸고, 그후 루카도 그대로 폴짝 뛰어올라 나루터에 착지했다.
     우리가 모두 배에서 내리자 나룻배 위에 직사각형의 입체 창이 형성되었다.
     [레드 파운의 배.]
     간단한 문구가 적힌 입체 창이었다. 아무래도 배에는 주인의 이름이 남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된다면 배를 이곳에 묶어두고 가도 상관이 없을 테지?
     나는 배에 달린 밧줄을 나루터에 묶어둔 뒤 티아, 루카와 함께 대리석 계단을 밟고 항구 위로 올라왔다.
     “으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나는 기지개를 쭉 키며 말했다. 그에 루카도 덩달아 개처럼 기지개를 켰다.
     “내일부터 바빠지겠다.”
     기지개를 켜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을 때 티아가 말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동안 자주 못 보겠네.”
     “아쉽다, 그치?”
     티아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대화 기능이 있으니까 목소리 정돈 들을 수 있을 거야. 티아, 그럼 이만 로그아웃 하자.”
     “응.”
     “그럼 내일 보자, 티아.”
     “응. 내일 보자!”
     “음… 알았어.”
     이 말을 끝으로 티아는 로그아웃을 했고 나도 티아를 뒤따라 로그아웃을 외쳤다.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푸쉬쉬.
     위잉. 철컥.
     헤드셋의 전원이 꺼짐과 동시에 캡슐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헤드셋을 벗어 머리맡에 둔 나는 게임베드에서 일어나 게임기기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컴,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오후 9시 50분입니다. 주인님, 점심 식사를 거르셨군요.」
     “아 지금 점심 겸 저녁을 먹으면 되겠군.”
     「먼저 콘텍트렌즈부터 빼십시오. 깜빡 잊고 잠들면 렌드자 돌아가……」
     “아, 알았어.”
     컴의 말을 들은 나는 즉시 화장실로 들어가 손에 식염수를 묻힌 뒤 콘텍트렌즈를 빼고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안에는 배달시켜두었던 식료품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중 인스턴트 식품을 손에 집히는 대로 꺼내든 나는 그것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전원을 켰다.
     수초도 지나지 않아 전자레인지 안에는 먹음직스러운 치즈스파게티가 가득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뜨거운 접시를 꺼내든 나는 쫄래쫄래 거실로 나와 탁자 위에 접시를 올려놓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이야, 편하다. 그건 그렇고 신대륙에 대한 자료를 좀 살펴볼까? 컴, 멀티비전 전원 좀 켜주고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에 접속해줘.”
     「알겠습니다.」
     컴에게 명령을 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가 식탁 위에 진열 된 고급스런 식사도구 상자에 놓인 포크 하나를 집어 거실로 달려와 소파에 앉았다.
     “아, 냄새 좋다.”
     접시를 들어 치즈스파게티의 향(?)을 음미한 나는 그대로 포크를 접시에 쑤셔 넣고 휘적휘적 돌렸다.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에 채널을 맞춰두었습니다.」
     “게시판으로 들어가서 신대륙에 대한 자료 좀 검색해줄래?”
     「네, 알겠습니다.」
     컴이 신대륙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는 사이 나는 치즈스파게티를 느긋하게 먹기 시작했다.
     「신대륙에 대한 자료 중 제일 정확한 자료를 검색했습니다. 자료를 모니터에 띄웠습니다.」
     “응. 고마워.”
     나는 컴이 검색해놓은 자료를 쭉 훑어보기 시작했다.
     세릴리아 대륙과 중원, 일본, 유럽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대륙인 신대륙. 신대륙의 정확한 명칭은 ‘신대륙 아리시아’였다.
     아리시아 대륙은 세릴리아, 중원, 일본, 유럽 대륙과는 달리 이벤트적인 요소가 많다고 한다. 이곳은 자유의지를 가진 NPC들이 이끌어나가는 세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NPC들이 많다.
     그리고 신대륙 아리시아에서는 현실적인 요소가 더 첨가되어 NPC들이 세워놓은 왕국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고 종족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것이 흥미를 느낀 나는 스파게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른 채 스파게티를 먹으며 신대륙에 대한 자료를 쭉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몬스터 또한 신대륙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개의 대륙보다 두배가량 더 강했고 그만큼 인공지능이 부과되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신대륙에서는 PK로 인한 패널티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즉 아리사아 대륙에서 PK를 당해 신고를 한다고 해도 운영진 측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MPC와 유저들이 알아서 개척해 나가는 대륙이 바로 신대륙이라는 곳이었다.
     신대륙에 대한 자료를 쭉 읽어보던 나는 얼마 전에 일어난 종족 전쟁에 대한 부분에 특히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과 오크가 영토 문제로 인해 피가 튀는 전쟁을 벌인다. 물론 이것은 아리시아에 생존하고 있는 NPC들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마치 중세시대를 그대로 몸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운영진들의 기막힌 아이디어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거대한 대륙에 제 3자인 유저가 개입해 역사를 바꾼다니 정말 흥미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개입되는 유저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큼 신대륙이 위험한 곳이었고 이곳 세릴리아, 중원, 일본, 유럽 대륙처럼 선량한 NPC들만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에 더욱 그랬다.
     신대륙에서는 NPC를 죽이는 것이 허용된다.
     NPC에게 아이템을 강탈당한다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은 이곳에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신대륙에서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것을 알게 된 나는 기가 막히는 것을 느꼈다.
     게임적인 요소에서 많이 벗어나 현실적인 요소가 많이 개입된 신대륙은 정말이지 신비한 베일에 싸인 대륙이었다.
     “우와, 신대륙은 이런 곳이구나. 어? 건물이 파괴되어도 이곳처럼 바로 복구가 되지 않고 대규모의 공사를 해야 하는군.”
     이미 스파게티 접시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나는 올챙이처럼 부른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신대륙에 대한 자료를 더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쏟아져오는 잠을 이겨내지 못한 채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컴, 멀티비전 좀 꺼줘.”
     「멀티비전의 전원을 종료합니다. 주인님 피로가 많이 쌓인 것 같습니다.」
     멀티비전의 말을 뒤로한 채 방으로 들어온 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내일부터 조선 스킬에만 매달려야겠군. 그래야지 신대륙 아리시아로 건너갈 수 있으니까 말이야.’
     침대에 드러누운 이불 속으로 들어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학교 수업을 마치기가 무섭게 강찬, 경훈, 혁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나는 즉시 방으로 들어와 캡슐의 허리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주인님 손을 씻고 식사부터 하신 뒤에 게임을 하시는 게……」
     “오늘부터 한 달 동안은 바쁠 거야.”
     나는 컴의 말을 무시한 채 가상현실 게임기기 안으로 들어와 게임베드에 누웠다. 머리맡에 놓인 헤드셋을 뒤집어쓰자 전원이 켜지기 시작했고 익숙한 여성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62.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어제 로그아웃을 했던 네티아 항구.
     로그인을 하기가 무섭게 소환된 루카가 꼬리를 흔들며 캉캉 짖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조선소로 향했다.
     ‘좋아. 오늘부터 조선 스킬 수련치를 올리는 것에만 몰두한다.’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목재를 이용해 배를 제작하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룻배에 대한 기본지식을 잊어버리진 않았는지 여부를 물어오는 질문 공세에 전부 대답을 하자 네프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배의 제작에 대한 설명에 들어갔고, 설명이 끝난 뒤엔 바로 배의 제작이 시행되었다.
     남들보다 배우는 속도가 월등히 빨랐기에 나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조선 스킬 수련치의 100%를 채울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세릴리아 월드에 접속하는 시간동안 조선스킬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무서운 집념으로 생활직에 매달린 지 어느덧 4주 하고도 5일이라는 시간이 자나가고 있었다.
     이미 조선 스킬의 수련치는 마스터를 내다보고 있었다. 2주 전부터 범선 제작팀에 합류하게 된 나는 네프를 비롯한 다른 NPC들과 함께 범선 제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레드! 거긴 신중하게 못을 박아야 g나다!”
     “알고 있어요!”
     저 아래에서 네프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네프와도 많이 친해져 호감도가 극에 달해 있었기에 마치 벨터를 대하는 기분이었다. 벨터와 여러모로 닮은 네프는 아직도 나를 조선 스킬을 배우러 왔을 때와 동일하게 대하고 있었다.
     지금 제작하고 있는 범선은 지금껏 만들어왔던 범선에 비해 형편없이 작은 크기를 가진 범선이었다.
     물론 작은 범선이라지만 다른 커다란 범선에 비해 작을 뿐, 이곳에 처음에 와서 제작한 나룻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범선이었다.
    이 배는 나를 신대륙에 데려다 줄 나의 첫 작품인 셈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범선 제작팀 모두의 작품이겠지만.
     범선의 형태는 갈레온(Galleon)선이었다.
     갈레온(16세기 초에 등장한 3~4층 갑판의 대형범선)은 16세기 말엽부터 캐랙선(마스트가 3개 달린 범선. 서양 범선의 대표적인 모형)에 이어 등장한 군선이다.
     캐랙과 갈레온은 외형상 크게 다르지 않으나 갈레온은 처음부터 군용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배로서, 적을 제압하기 위해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많고 많은 것 중에서 왜 하필 군용 범선으로 만들었냐고 묻는 사람도 적지 않게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신대륙으로 건너가려면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고 네프가 말했다. 네프는 신대륙으로 건너가는 유저들이 타고 갈 범선을 여럿 만들어 본 엄청난 장인이다. 그의 경험을 참고로 내린 결론은 역시나 여러 위험에 대비해 군요 범선으로 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신대륙의 해저에서 밀려오는 해적들과 약탈자들이 배를 습격한다는 말이었다. 그들이 배로 접근하기 전에 대포를 쏴 격퇴 시키는 것이 현명하다는 네프의 말이 군용 범선으로 배를 만들게 된 계기였다.
     일주일 전부터 제작하던 범선이 드디어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일주일이면 월드타임에서 꽤 많은 시간이 자난다.
     그러므로 현실시간을 일주일로 범선 하나를 제작하는데 이상할 것이 없었다.
     돛을 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범선 제작이 끝이 났다. 범선 제작을 마침과 동시에 조선 스킬도 마스터할 수 있게 되었다.
     완성된 범선을 본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붉은 바탕색의 돛에 ‘RED Paun’이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적힌 내 배가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이었다.
     네프를 비롯해 범선 제작팀 NPC들은 축하한다며 박수를 쳐 주었다.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좋아, 드디어 조선 스킬을 전부 마스터 했다.’
     나는 시선을 완성된 범선에 고정시킨 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스킬 창을 열어볼까?’
     “스킬 창, 오픈!”
     파밧!
     [Skill]
     방직(Weaving)
            Master
     천옷만들기(Tailorng)
            Master
     잡화물품 제작(Handicraft)
            Master
     생활필수품 제작
            Master
     제련(Refine)
            Master
     블랙스미스(Blacksmith)
            Master
     악기 연주(playing Instrument)
            (78.49/300.00%)
     가구 제작(Furniture production)
            (101.98/300.00%)
     조선(造船)
            Master
     항해술(航海術)
            (NPC 혹은 스킬 붉을 통해 획득해야 합니다.)
     마스터한 조선 스킬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한 달 동안 고생해 얻은 성취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들뜬 기분으로 스킬 창의 전투 목록까지 확인하고 있을 때 네프가 말했다.
     “레드, 배의 이름은 뭐라고 지을 거니?”
     그에 스킬 창을 훑어보던 나는 시선을 네프에게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배의 이름이요?”
     “그래. 각각의 배에는 이름을 붙인단다.”
     ‘배에도 이름이 붙는다니, 참 신기하군.’
     네프의 말에 이제 막 완성된 범선을 향해 시선을 던진 나는 범선의 이곳저곳을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명센스가 없는 나인지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 멋진 배에게 이름을 지어줄 자신이 없었다.
     “음… 글쎄요. 제가 워낙 작명센스가 없다보니… 뭐라고 지으면 좋을까…….”
     배를 빤히 바라보며 말끝을 흐리는 내 귓전에 네프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레드 갈레온(RED Galleon)호는 어떠니?”
     “레드 갈레온이요?”
     “그래, 레드 갈레온. 네 이름과 배의 이름을 합친 것이지.”
     나의 물음에 네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레드 갈레온이라. 왠지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좋아요. 이제부터 이 배의 이름은 레드 갈레온호라고 부르도록 하죠.”
     나는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에 네프를 포함한 나머지 범선 제작팀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돛에 새겨진 문구를 수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팔을 걷어붙이고 도우려 했지만 네프는 상냥하게 웃으며 그냥 쉬라고 말했다.
     순식간에 돛에 새겨진 문구가 수정되는 것을 보며 나는 지난 한 달간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정확히 한 달 하고도 2일.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노력해 맺은 결실을 눈앞에 두고 볼 수 있다는 것에 성취감을 느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선 스킬의 수련치를 올리는 동안 내내 범선 제작실 안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던 루카는 내가 일어서자 꼬리를 흔들며 천천히 다가왔다.
     이제부터 슬슬 사냥을 시작해야겠군.
                   *    *     *
     “하앗!”
     퍽!
     커다란 통나무의 몸뚱이에 기합을 내지른 경훈의 주먹이 꽂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전과 같았으면 통나무는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기괴하게 함몰되어 충격이 가해진 중심점으로부터 패이고 터져 사방으로 금이 죽 그어졌을 텐데, 어째서인지 통나무는 아무렇지 않게 굳건히 버티고 서있었다.
     남들이 본다면 형편없는 주먹질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은 이어진 경훈의 행동에서 서서히 베일을 벗었다.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경훈이 통나무를 슬쩍 건드리자 통나무가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좋아. 실전에서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는 걸? 이제 나도 발경을 이용해 상대의 방어력을 무시한 뒤 본래 데미지를 고스란히 전해줄 수 있다. 흐흐흐.”
     만족스런 표정을 지은 경훈의 웃음소리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같은 시각.
     네프와 범선 제작팀의 팀원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조선소에서 나온 현성은 조선 스킬에 몰두하는 한 달 동안 아이템 창에 넣어두었던 자신의 무기인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화살통을 꺼내들었다.
     꽤나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무기인지 활등에 손바닥이 착 감기는 맛이 일품이었다. 화살통을 허리춤에 차고 활을 등 뒤로 둘러멘 현성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루카에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그동안 무지 심심했지, 루카?”
     캉!
     대답이라도 하는 듯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짖는 루카였다. 빙긋 웃어 보인 현성은 블루 네티아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범선을 제작하면서 공복도가 꽤나 증가해 무지 배가 고픈 상태였지만 조선소에서 끼니를 때우지 않았다. 조선 스킬을 마스터하고 난 뒤에 블루 네티아에서 나오는 요리들을 실컷 섭렵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소에서 지급해주는 급식도 맛있지만, 감히 블루 네티아에 견줄 순 없지.’
     조선소에서 일하는 동안 현성은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 스킬의 수련치는 물론이거니와 일을 하며 받은 돈, 그리고 인맥을 쌓을 수 있었다.
     비록 NPC들이라지만 게임 내에선 중요한 정보 전달을 하는 역할을 맡은 가상생명체들이 아니가?
     블루 네티아로 향하는 동안 현성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조선 스킬에 몰두하고 있는 한 달 동안 다른 녀석들은 많이 성장했겠지? 경훈이 제일 기대되는군. 현민이 녀석에게 중원의 권법을 전수 받았으니까. 티아도 2차 전직을 했을지 궁금하군. 지금쯤이면 모두들 강해졌을 텐데. 나 혼자만 아직 제자리걸음 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블루 네티아에 도착하게 된 현성은 고급스런 문을 열고 들어가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어서 오세요.”
     계산대 앞에 선 웨이터 NPC의 인사를 받고 고개를 끄덕여 보인 현성은 빽빽이 자리를 메우고 있는 많은 유저들을 보며 읊조렸다.
     ‘음. 언제나 유저들로 북적거리는군. 그래도 레스토랑이라 그런지 분위기는 조용하구먼.’
     빈자리가 있는지 이리저리 살피고 있을 때, 아르바이트생 유저가 현성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리로 안내해 드릴까요?”
     “아, 예.”
     유저의 물음에 현성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르바이트생 유저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유저의 안내를 받아 한쪽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배치 받은 현성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석진 자리라고 하면 얼핏 허름한 자리를 떠올리는 사람도 몇 있겠지만, 이곳은 부유한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의 명물인 최고급 레스토랑이다. 때문에 구석진 자리가 허름할 확률은 전무했다.
     창밖을 내다보는 현성의 표정은 정말 편안해 보였다. 지난번에 가장 맛있게 먹었던 요리를 주문한 현성은 내친김에 상태 창을 열었다.
     “상태 창, 오픈!”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
     Lv. 62
     생명력(HP). 700
     마나(MP). 490
     스태미나(SP). 400(1200) (배고픔 수치 80%/ 갈증 10%)
     힘 137
     체력 65
     민첩 179(+30)
     손재주 520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15)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390~520
     방어력 10(+12)
     마법방어력 2(+10)
     남은 스탯 포인트: 0
     바람(백호) Lv. 6.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5.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4.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4. 친화력 100%
     [상세정보]
     “어라?”
     상태 창을 쭉 훑어보던 현성의 시선이 손재주 스탯에 고정되었다. 470이었던 손재주 스탯이 520으로 눈에 띄게 증가했던 것이다.
     손재주 스탯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성은 피식 웃으며 상태 창을 닫았다. 손재주 스탯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수없이 겪어왔기 때문에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주문한 요리가 나왔고 요리의 향이 코를 자극하자 빈 위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낀 현성은 주변을 둘러보다 천천히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아, 잘 먹었다.”
     일급 숙수들이 한껏 솜씨를 부려 만든 요리는 조선소에서 먹던 급식과는 비교도할 수 없는 맛을 내고 있었다. 만족스런 표정을 지은 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 값을 지불한 뒤 블루 네티아에서 빠져나왔다.
     ‘좋아, 이제 또다시 죽어라고 수련에 매달려야겠는 걸?’
     현성은 적안을 개안한 뒤 무표정한 얼굴로 시계탑 광장으로 향했다.
                   *    *     *
     시계탑 광장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수련치를 올리려면 강력한 몬스터와 맞붙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한 달가량 티르 네티아에 머물러 있었지만 조선소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곳의 지리를 잘 모르고 있는 터라 어디에 던전이 위치해 있고 어디에 강력한 몬스터들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다.
     20분 남짓 시산이 지났을까?
     광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 궁수 유저를 구하는 파티가 눈에 띄었다. 나는 즉시 파티 창을 띄운 파티 리더 유저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 레벨 제한은 몇인가요?”
     내 질문에 검고 긴 생머리에 새하얀 피부와 까만 눈동자를 가진 새하얀 사제복장을 한 성직자로 보이는 여성 유저가 웃어 보인 뒤 나를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적어도 80이상은 돼야 해요.”
     “하하. 80은 넘는데 가, 가입해도 될까요?”
     ‘여잔데 키가 무지 크군.’
     나는 몸이 굳는 것을 느끼며 어리바리하게 대꾸했다.
     상대가 여자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레벨을 속인 것이 찔렸던 것이다. 그에 성직자로 보이는 유저가 고개를 돌려 파티원으로 보이는 유저들에게 말했다.
     “이쪽에 오신 궁수 분까지 합하면 도합 4명으로 구성된 파티가 되요. 그럼 네 명의 인원이 차는데 어떻게 할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은빛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무장한 유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마법사로 보이는 한 여성 유저는 대답 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린님의 파티에 가입하셨습니다.]
     파티에 가입하자 파티 세린이라는 유저가 파티 창을 닫았다. 아마도 파티 리더의 이름이 세린인가보다.
     그것을 끝으로 우리는 시계탑 광장에서 벗어나 항구도시 티르 테니아의 남족 성문으로 향했다. 남쪽 성문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여러 가지 질문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실례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레드 파운입니다. 레드라고 불러주시면 되요. 그리고 제 뒤를 따르는 이 녀석은 저의 소환수에요. 별명은 루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에릭이라고 합니다.”
     나와 나란히 걷던 기사 유저가 손을 내밀었고 그에 나는 기사 유저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그리고 이분은 파티의 리더이신 세린님이에요. 그리고 앞장서 걷고 계신 분은 4클래스 마법사이신 루나님이고요.”
     자신을 에릭이라고 소개한 기사유저가 친절하게 파티원들을 소개해주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제가 파티 리더인 세린이라고 해요. 2차 전직을 한 프리스트구요.”
     “프, 프리스트요?”
     “네. 성직자에서 2차 전직을 했지요. 보다 더 많은 보조 스킬과 신성 마법 스킬이 있어요.” “그, 그렇군요…….”
     세린의 말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마법사 루나를 빼고 세린과 에릭은 나와 나란히 걸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던 세린이 나의 정보를 보았는지 이내 소리쳤다.
     “어머, 궁탑의 제자시네요?”
     “엑?! 정말 그러네요?”
     세린의 말을 들은 에릭이 덩달아 소리쳤다. 이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었기에 나는 자연스레 받아 넘길 수 있었다.
     앞장 선 루나가 잠시 멈칫하는가 싶었으나 이내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저 유저는 원래 말이 없나보다.
     “소문에 의하면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는 거대한 철궁을 사용한다던데. 일곱 번째 제자이신가 봐요? 뒤를 따르는 흰 늑대도 그렇고.”
     “네, 맞아요.”
     에릭의 물음에 나는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나란히 걷고 있는 에릭의 시선이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화살통을 번갈아가며 신기한 듯 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저런 자밤을 나누는 사이 우리는 티르 네티아 남쪽 성문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한 번도 나와 보지 못한 티르 네티아 남쪽 성문. 얼마 걷지 않아 드넓게 펼쳐진 들판 위로 토끼와 사슴이 노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쪽에는 양떼들이 있었고 양떼를 노리는 늑대로 몇 보였다.
     “궁탑의 제자시면 2차 전직은 하셨나요?”
     티르 네티아 밖의 풍경을 감사하고 있을 때, 또다시 질문공세가 시작되었다. 파티 리더인 세린의 질문이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아하, 2차 전직을 하셨다면 레벨 100은 넘기셨겠네요? 활을 사용하시는 걸 보니 헌터로 2차 전직을 하신 것 같은데 맞죠?”
     궁수에 대해 관심이 많은 듯 세린이 물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대꾸했다.
     “아, 아직 레벨 100은 못 되었어요.”
     “응? 그런데 어떻게 2차 전직을 하셨다는 거죠?‘
     “궁탑의 제자들은 헌터, 사수 말고도 다른 한 가지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죠 ‘레인저’라는 직업인데, 저는 그것으로 2차 전직을 했어요.”
     “아하 그렇구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용케도 알아들은 세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제 질문이 끝났구나하는 안도감을 느끼려는 찰나 에릭이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그 무기는 직접 만든 건가요?”
     “네.”
     “궁수는 손재주 스캣에 데미지가 비례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레드군은 손재주가 얼마나 되나요?”
     에릭의 질문에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라는 생각을 했다. 에릭의 질문에 궁수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 세린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시선을 내게 두었다.
     ‘에휴.’
     “520입니다.”
     “허억.”
     “오, 520이요?”
     여태껏 그래왔듯이 에릭과 세린의 반응도 다른 이들과 같았다.
     “여기서부터 위험하니 이제 대화는 자제해주세요.”
     앞장서 걷던 루나의 말이었다. 상당히 예쁜 목소리였다(티아 만큼은 아니지만. 흐흐).
     드넓게 펼쳐진 들판에서 숲으로 바뀌는 구간. 고레벨의 유저들의 사냥터에 걸맞게 숲속은 음침했다. 울창한 숲에는 습기가 가득했고 여기저기서 몬스터들의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끼루룩, 끼루룩!
     기다란 수풀너머에서 들려오는 위협적인 소리.
     나는 등에 둘러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왼손으로 집어 들고 풀어진 활시위를 당겨 활 끝에 고정시켰다. 그리곤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아무래도 놀 떼인 것 같습니다.”
     앞장서서 걷던 루나가 멈추며 작게 말했다.
     스르릉.
     나란히 걷던 에릭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고풍스런 롱 소드를 뽑아들었다. 에릭이 두 손으로 검을 고쳐 잡자 이내 푸른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전투를 전문적으로 하지 않는 세린이 뒤로 빠졌고 근거리에서 치고받는 것에 능숙한 에릭이 앞장섰다.
     “온다.”
     에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풀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하이에나의 대가리를 가진 직립보행 몬스터인 놀이 무리지어 나와 우리를 둘러쌌다.
     “하앗!”
     지면을 박찬 에릭이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시퍼런 오러를 머금은 검이 대기를 갈랐고, 맹렬한 파공성과 함께 붉은 선혈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정확히 놀의 목을 베어낸 에릭. 그는 2차 전직을 한 기사답게 정교한 초식으로 잘 다져져 있었다. 순식간에 대여섯 마리의 놀 무리가 목이 잘린 채 바닥에 널브러지는 신세가 되었다.
     검신에 맺힌 오러를 거둔 에릭이 말했다.
     “다 처리되었습니다.”
     “역시 에릭 군이야. 멋져요!”
     “하하. 뭘요.”
     세린의 말에 에릭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에릭도 강찬과 마찬가지로 투구를 착용하지 않았다. 뛰어나게 잘생기진 않았지만 또렷한 이목구비에 순박한 외모. 거기에 훤칠한 키가 한몫했다.
     나는 잠시 뒤돌아선 루나와 눈이 마주쳤다. 갈색의 생머리에 갈색 눈동자. 귀엽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상당히 무뚝뚝한 성격. 왠지 뭔가 맞지 않았다.
     숲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이내 깊은 숲속에 위치한 기이한 형태의 던전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던전의 입구 안으로 향했다. 앞장선 루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캄캄한 던전의 내부에 입장하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것은 오싹한 한기였다.
     “라이트(Light).”
     주문영창이 이어지자 어른 주먹크기만한 구체가 형성되어 밝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어둡던 던전을 밝게 비추는 마법이 발현되자 주변은 상당히 밝아졌다.
     이미 적안을 개안해둔 상태라 라이트 마법이 없어도 사물을 식별할 수 있지만 라이트 마법처럼 정확히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하. 이곳에서는 루나 양과 세린 양이 맹활약을 하겠군요.”
     에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란히 걷고 있던 세린이 걸음을 빨리 하여 루나와 나란히 섰다.
     “우와, 이건 뭐지?”
     요상하게 생긴 악마의 얼굴에 심하게 굽은 등, 커다란 피막형의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는 석상을 본 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석상을 만져보려고 손을 내뻗을 때였다.
     “앗, 레드 손대지 마세요!”
     세린이 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내 손은 석상에 닿아 있었다.
     손이 닿자마자 석상의 색이 변색되더니 피막형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고 소름 돋는 기성을 내지르며 방금 전까지 석상이었던 몬스터로 간주되는 물체가 갑자기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움켜쥐려 했다.
     “헉, 백스텝!”
     재빨리 백스텝을 밟고 멀찍이 뒤로 물러선 나는 백스텝을 밟음과 동시에 미리 꺼내두었던 화살을 몬스터로 간주되는 물체에게 내쏘았다.
     화살은 대기를 가르며 정확히 몬스터의 이마에 틀어박혔다.
     끼아아아악!
     소름 돋는 비명소리와 함께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쳐진 몬스터를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 이게 뭐지?”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나는 아직까지도 놀란 가슴을 추스를 수 없었다.
     “세상에…….”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있을 때, 천천히 다가온 세린이 말했다.
     “아니 어떻게 그 가까운 거리에서 가고일에게 잡히지 않고 뒤로 빠지면서 활을 쏠 수 있지요?”
     “역시 궁탑의 제자는 다르구나.”
     세린의 뒤를 따라온 에릭이 말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을 던졌다.
     “음? 궁수들은 다 이렇지 않나요?”
     “무슨 말씀을! 얼마 전 따라왔던 궁수분은 가고일에게 잡히셔서 던전 입구에서 바로 게임아웃 되셨다고요.”
     “그런가…….”
     놀라서 소리치는 세린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시간이 없으니 쓸데없는 대화는 그만하도록 하죠.”
     멀리 서 있던 루나의 말에 대화는 이렇게 끊어져버렸다.
     우리는 다시 루나를 선두로 던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다른 파티 유저들도 간간히 볼 수 있었고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루나를 따라 요상한 문양이 새겨진 구간으로 오게 되자 허공이 뒤틀리더니 이내 신장이 2.5미터 가량 되어 보이는 몬스터로 추측되는 물체 대여섯 구가 리젠되었다.
     분명 생긴 것은 좀비와 비슷했으나 무언가가 달랐다. 우선 크기부터가 달랐고 기형적으로 긴 팔은 마치 긴팔원숭이를 연상시켰다.
     “으어어… 이, 인가안…….”
     대여섯 마리의 몬스터가 느릿느릿 접근하기 시작했고 앞장선 세린이 소리쳤다.
     “에이션트 좀비네요. 저와 루나 양이 한 마리씩 맡을게요. 에릭 군과 레드 군은 다른 녀석들을 맡아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는 재빨리 허리춤에서 화살하나를 꺼내들고 내 쪽을 향해 다가오는 에이션트 좀비에게 시선을 두었다.
     ‘정말 못생겼군.’
     “퀵 스텝!”
     퀵 스텝을 걸자 몸이 상당히 가벼워진 것을 느낀 나는 그대로 지면을 박차고 에이션트 좀비에게 몸을 날렸다.
     느린 움직임과는 달리 빠른 공격속도를 가진 에이션트의 팔이 휘둘러졌고 빠른 반사 신경으로 에이션트 좀비의 공격을 피해낸 나는 화살 깃을 재빨리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쐐애액.
     화살은 활시위를 벗어나 대기를 가르며 에이션트 좀비의 가슴팍을 향해 쏘아졌다.
     푸욱!
     창과 같은 화살이 가슴팍에 박히자 잠시 움찔하던 에이션트 좀비가 마구잡이로 기다란 손톱이 돋아난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느린 움직임과는 달리 빠른 공격을 하는 에이션트 좀비였다.
     “쳇, 공격 속도 하난 무지 빠르군. 보우 어택!”
     휘둘러지는 에이션트 좀비의 날카로운 손톱을 아이언 레드 롱 보우로 쳐낸 나는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에이션트 좀비의 밑을 파고들었다.
     내 뒤를 따르던 루카가 에이션트 좀비의 정신을 분산시키기 시작했고 이따금 팔을 물고 몸을 회전시키는 공격을 가했다.
     퀵 스텝의 지속시간이 끝날 때쯤 또다시 퀵 스텝을 건 나는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에이션트 좀비의 어깨 위에 올라와 활을 높이 치켜들었다.
     “보우 어택!”
     퍼억!
     메이스에 필적하는 강도를 지닌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작렬했으나 에이션트 좀비의 머리는 박살나지 않았다. 하지만 상당한 충격을 남겼는지 에이션트 좀비는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했다.
     에이션트 좀비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쇄도하는 것을 본 나는 재빨리 에이션트 좀비의 어깨를 박차고 뒤로 물러나며 허공에서 화살 한 발을 쏘아 보냈다.
     화살은 대기를 가르며 에이션트 좀비의 머리에 틀어박혔다.
     화살이 틀어박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살며시 지면에 착지했고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에이션트 좀비를 뒤로한 채 시선을 전투중인 파티원들에게 던졌다.
     벌써 한 마리 에이션트 좀비를 쓰러뜨리고 다른 한 마리 에이션트 좀비에게 신성 마법을 가하는 세린.
     에이션트 좀비의 날카로운 손톱이 세린을 쇄도해 오자 세린은 급히 실드를 펼쳐 손톱을 튕켜낸 뒤 홀리 애로우(Holy Arrow)를 쏘아 보냈다.
     홀리 애로우는 언데드 몬스터인 에이션트 좀비에게 치명적인 신성 마법. 홀리 애로우가 몇 발 적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에이션트 좀비는 그대로 쓰러져 절명했다.
     ‘호오. 엄청나군. 홀리 애로우라… 혁의 힐 볼과는 많이 다른걸?’
     신성 마법을 보자 혁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 나는 시선을 에릭에게 던졌다.
     그는 현란함 몸놀림으로 에이션트 좀비의 공격을 전부 피해내며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기사가 끌어올리는 ‘오러’는 모든 몬스터들에게 치명적인 것 같았다.
     순식간에 에이션트 좀비의 팔을 잘라내고 다리 하나를 베어낸 에릭의 검이 허공에서 몇 번 휘둘러지더니 이내 에이션트 좀비의 대가리를 정확히 반으로 쪼갰다.
     에이션트 좀비의 썩은 피와 뇌수가 튀었지만 오러에 닿는 즉시 증발해버렸다.
     “타오르는 화염구가 내 앞에 나타날지어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파이어 볼!”
     루나를 중심으로 형성된 세 개의 배구공만 한 화염구가 ud성되어 시전자의 중심을 맴돌기 시작했다. 루나가 손짓하자 루나를 중심으로 느릿느릿 회전하던 화염구가 기염을 토해내며 에리션트 좀비를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퍼퍼펑!
     언데드 몬스터에게 신성 마법 다음으로 치명적인 것이 다름 아닌 화염계열의 마법. 세 개의 파이어 볼(Fire Ball)이 작렬하자 에이션트 좀비가 휘청했다.
     “타오르는 화염의 창이 내 앞에 나타날지어다, 룬 플레이어(Rune flare)!”
     또다시 이어진 주문영창.
     주문영창이 이어지자 루나의 앞엔 기다란 화염의 창 하나가 형성되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뜨거웠는지 화염의 창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루나가 손짓하자 허공에 우뚝 멈춰서 있던 화염의 창이 대기를 가르며 에이션트 좀비의 머리에 틀어박혔다.
     푸악.
     에이션트 좀비도 보통 좀비와 마찬가지로 뇌를 파괴시키면 그대로 쓰러져 죽어버리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다섯 마리의 에이션트 좀비를 쓰러뜨린 우리는 아직까지 모두들 본래 실력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루나, 이제 제가 앞장설게요.”
     세린이 앞으로 나서며 말하자 루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귀여운 외모와는 상반되는 무뚝뚝함. 그런 루나에게서 시선을 뗀 나는 세린의 뒤를 따랐다.
     “루카 이리와.”
     캉캉!
     지하 던전은 깊숙이 들어갈수록 처음 보는 신기한 몬스터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난생처음 블러드 윔이라는 몬스터를 보게 되었고 블러드 윔을 상대하는 동안 루카의 레벨이 증가했다.
     “점점 재밌어지는데요?”
     에릭이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말했다.
     나도 신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한 달 가량 조선소에서 수련치 올리는 것에만 몰두하다 오랜만에 사냥을 하게 되니 답답했던 것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제일 신난 것은 루카였다. 루카는 시키지 않았는데도 몬스터가 나나타면 먼저 달려들어 견제를  신경을 분산시키는 일을 척척 잘 해냈다.
     앞장선 세린의 뒤로 나와 에릭이 나란히 걸었고 그 뒤로 루나가 천천히 걸어왔다.
     아무래도 루나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다른 사람과 말을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인지.
     무뚝뚝한 표정을 보니 후자로 봐야 정확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한을 걷고 있을 때,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4~5미터 남짓 되어 보이는 거대한 체구에 장정 허벅지만 한 팔뚝에선 흉물스런 근육이 꿈틀거렸고 연신 콧김을 내뿜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성이 난 것 같았다.
     실루엣의 정체는 다름 아닌 미노타우로스였다. 미궁의 보스 몬스터인 미노타우로스. 미궁 말고도 다른 던전에서도 서식하다니…….
     보스급 몬스터의 등장에 모두들 잔뜩 긴장을 한 채 전투 자세를 취했다.
     쿠워어엉!
     잔뜩 성이 난 미노타우로스가 연신 콧김을 내뿜으며 포효를 내질렀다.
     “세린 양은 뒤로 피하시고 루나 양, 레드 군. 뒤에서 서포트를 해주세요.”
     롱 소드를 두 손으로 고쳐 잡은 에릭이 미노타우로스에게 천천히 접근하며 소리쳤다.
     “저와 같이 협공하죠.”
     화살 하나를 꺼내든 나는 미노타우로스에게 접근하는 에릭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레드 군. 궁수는 원거리에서 서포트를 해주시는 게…….”
     “궁수라고 무조건 근접전에 취약한 것은 아닙니다.”
     “네?”
     에릭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린 나는 퀵 스텝을 걸고 지면을 박찼다. 지금 눈앞에 서있는 미노타우로스는 미궁에서 보았던 미노타우로스와 동일한 등급인 것 같았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았으니까.
     순식간에 미노타우로스에게 접근한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나를 쇄도해 오는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을 피해냈다.
     거대한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을 피해낸 나는 꺼내 들었던 화살 하나를 쏘았다. 화살은 미노타우로스의 눈을 향해 맹렬히 쏘아졌다.
     굵직한 화살이 미노타우로스에 눈에 틀어박히자 흉성이 폭발한 미노타우로스가 괴성을 지르며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퍼퍼퍼펑!
     루나가 쏘아 보낸 서너 개의 화염구가 미노타우로스의 면상을 적중했고, 큰 폭발을 일으켰다. 미노타우로스가 경직하는 사이 미노타우로스의 밑을 파고든 에릭이 오러를 머금은 검을 휘둘러 미노타우로스의 다리를 깊게 베어내었고, 중심을 잃은 미노타우로스의 육중한 몸뚱이가 벌렁 뒤집어졌다.
     쿵!
     “시린 한기를 머금은 구체가 내 앞에 나타날지어다, 아이스 볼, 아이스 볼!”
     미노타우로스가 넘어지기가 무섭게 후방에서 기회를 노리던 루나가 캐스팅을 마쳤고, 그녀의 몸 주위로 대기의 수분이 응축되고 응축되어 일정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내 오싹한 냉기를 뿜어내는 아이스 볼 두 개가 형성되자, 루나의 손짓에 시린 한기를 뿜어내는 두 개의 아이스 볼이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쏘아졌다.
     아이스 볼은 정확히 에릭에 의해 상처부위가 벌어진 곳에 적중했고, 심각한 부상을 남기게 되었다.
     미노타우로스가 경직된 틈을 노려야 했기 때문에 에릭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에릭의 오러를 머금은 검이 미노타우로스의 아랫배를 길게 갈랐다.
     서걱.
     나는 재빨리 허리춤에서 두 개의 화살을 꺼내들고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건 뒤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내가 겨냥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에릭에 의해 길게 베어진 미노타우로스의 아랫배.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활시위를 벗어난 두 대의 화살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미노타우로스의 상처부위에 적중했다.
     그에 광분한 미노타우로스가 재빨리 몸을 일으킨 뒤 내 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미궁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미노타우로스를 이렇게 쉽게 상대할 수 없었는데, 2차 전직을 한 유저 둘과 마법사 유저가 개입하자 사냥이 쉬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루카, 견제해!”
     왕왕!
     미노타우로스의 주위를 빠르게 맴돌던 루카가 나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내뻗은 미노타우로스의 팔을 타고 어깨 위로 질주했다. 미궁에서 볼 수 있었던 루카의 공격이었다.
     재빨리 어깨 위로 올라간 루카가 미노타우로스의 귀를 물고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촤르륵!
     살점이 찢겨져 나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미노타우로스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가해진 공격이 생명력의 상당량을 깎아놓았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비켜서세요, 타오르는 네 개의 화염의 창이 내 앞에 나타날지어다, 파이어 랜드(Fire Lance)!”
     루나의 말이었다. 그에 에릭과 나 그리고 루카는 재빨리 미노타우로스와 멀리 떨어졌고 루나가 시전 한 네 개의 화염의 창이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쏘아졌다.
     파이언 랜스가 적중하자 미노타우로스의 육중한 거구가 거칠게 바닥으로 처박혔다.
     쿠웅.
     미노타우로스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가싶더니 이내 호흡이 멈춰졌다.
     번쩍!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리 증가했습니다!]
     루카의 레벨업과 함께 눈부신 빛무리가 루카의 몸을 휘감고 공중으로 치솟았다.
     “어머, 축하해요~ 소환수의 레벨이 증가했네요.”
     “가, 감사합니다.”
     루카의 몸을 훑고 지나간 빛무리를 본 세린이 말했다. 그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미노타우로스를 잡고난 뒤 세린을 제외한 모두가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후우. 좀 지치네요.”
     요상한 문양이 새겨진 벽면으로 걸어가며 에릭이 말했다. 아이템 창에서 스태미나 포션 한 병을 꺼낸 그가 벽면에 기댄 채 주저앉아 포션을 마시기 시작했다.
     “루나 양, 잠시 쉬었다 가죠.”
     에릭의 말에 루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과 1미터 남짓 떨어진 거리에서 벽에 기대고 앉은 그녀는 아이템 창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책자를 펼친 뒤 읽기 시작했다.
     적안이 개안된 상태라 책표지에 적인 제목을 읽을 수 있었던 나는 슬쩍 책표지에 시선을 던졌다.
     ‘화염계열 마법의 발현’이라. 아무래도 마법을 발현시킬 수 있는 마법 수식과 주문, 수인 맺는 법이 적혀있을 것 같았다.
     마법에 대해 그다지 흥미가 없는 나였기에 곧장 시선을 세린에게 던졌다. 세린은 쭈그리고 앉아 루카와 눈높이를 맞춰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실레지만 레드는 이곳 지하 던전에 처음 오는 거지요?”
     벽에 기댄 채 휴식을 취하던 에릭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네, 처음입니다.”
     “하하, 그럼 이야기가 재밌어지겠네요. 이곳엔 수도 세인트 모닝 근처에서 볼 수 없는 몬스터가 많이 나온답니다. 그만큼 사냥도 재밌지요. 던전의 환경이 혹독하다는 것만 빼면요.”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에릭이 벽면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아이템 창이란 자신 이외에 다른 유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에 나에겐 그저 허공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는 것 같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장작을 구해가지고 다닌답니다. 이런 곳에서 무리해가며 움직이면 금방 배도 고파지니까요.” 아이템 창에서 바짝 마른 장작을 꺼내 바닥에 차곡차곡 쌓으며 말하던 에릭이 고개를 돌려 루나에게 말했다.
     “루나, 불 좀 붙여주시겠어요?”
     “불씨가 형성 되어라, 파이어(Fire).”
     루나의 주문영창이 이어지자 바짝 마른 장작이 이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장작이 타며 주변이 한층 더 밝아졌고 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템 창에서 간단한 요리도구를 꺼낸 에릭이 말했다.
     “제가 또 요리 스킬에 잠시 빠져 있던 적이 있습니다. 쉬는 동안 간단한 식사라도 하지요.”
     말을 마친 에릭이 식료품을 꺼내 능숙한 솜씨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에릭, 냄새가 멀리 풍겨나가면 몬스터가 인식하고 오게 됩니다.”
     흥에 겨워 요리를 하는 에릭에게 차갑게 말하는 루나. 에릭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루나 양도 이리 와서 쉬세요.”
     싫지는 않았는지 책을 읽던 루나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뒤 활활 타는 장작 앞으로 천천히 다가와 풀썩 주저앉아 펼쳐둔 책에 시선을 두었다.
     루카를 쓰다듬던 세린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잠시만 머물다가 좀 더 아래쪽으로 가보는 게 어때요?”
     “좋습니다. 자, 다 됐다. 이것 좀 드셔보세요.”
     장작 위에 작지 않은 철냄비를 고정시킨 뒤 요리를 하던 에릭이 나무로 만든 다용도 국자로 요리를 떠서 그릇에 덜었다.
     고소한 냄새가 사방으로 풍겨졌고 먹음직스러운 스튜를 받아든 나는 뜨거운 스튜를 후후 불어가며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수저가 없었기에 떠먹을 수 없었지만 불편한 건 없었다.
     그렇게 즐거운 식사시간이 끝나고 주변을 말끔히 정리한 우리는 세린의 말대로 지하 던전의 아래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같은 시각. 티르 네티아 서쪽 성문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몬스터의 숲.
     “하앗!”
     퍼억!
     유저의 기합소리와 함께 트롤의 육중한 거구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에 주변에 있던 트롤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일제히 유저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저의 눈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트롤을 스산한 눈빛으로 쓸어오던 유저가 두 주먹을 강하게 움켜쥔 뒤 자세를 낮췄다.
     쿠오오! 카아아!
     사방에서 뻗어지는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난 트롤의 팔을 수초사이를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유유히 피해낸 유저는 포위망에서 간단하게 빠져나왔다.
     눈앞에서 포효를 내지르는 트롤의 옆구리에 강하게 움켜쥔 주먹을 휘둘러 꽂자 트롤의 자세가 무너졌다. 연이어 유저의 주먹이 두세 번 더 적중하자 트롤은 그대로 쓰러져 절명했다.
     트롤 한 마리가 허무하게 주저앉자 다른 트롤들의 시선이 유저에게로 향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유저에 의해 벌써 네 마리의 트롤이 절명한 상태였다.
     ‘좋아, 이 녀석들만 처리하면 레벨업이군.’
     싸늘하게 웃던 유저의 신성이 트롤들에게 쏘아졌고 빠른 속도로 주먹이 휘둘러졌다. 그에 네 마리의 트롤도 순식간에 절명했다.
     씨익 웃는 유저의 몸 주위에 눈부신 빛무리가 형성되더니 이내 몸을 휘감고 올라갔다.
     “흐흐흐. 드디어 내가중수법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쓰러뜨린 트롤들의 시체가 서서히 형체를 잃어가는 것을 보며 웃는 유저는 경훈이었다. 현민에게 전수받은 내가중수법을 완벽하게 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슬슬 사냥감을 바꿔볼까? 이제 트롤의 피부색과 비슷한 색만 봐도 어지러울 정도로 트롤을 잡아왔으니까.”
     주변을 빙 둘러보던 경훈이 키가 자신보다 큰 수풀 사이로 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다른 녀석들은 한층 더 성장했으려나? 하긴 강찬이 녀석은 히든 클래스이니 우리 중 가장 강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테고. 걱정되는 것은 혁이 녀석인데…….’
     태평하게 숲속을 걷던 경훈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루샤크 님께 대화를 요청합니다.]
     대화를 요청한 경훈이 상대의 승낙여부를 기다리며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루샤크 님께서 대화를 승인하셨습니다.]
     -여어, 경훈이냐?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음미하던 경훈이 입을 열었다.
     “혁. 캐릭터는 잘 키우고 있냐?”
     -물론이지! 지하 던전에서 레벨업도 많이 했으니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2차 전직이다. 짜샤.
     “그래? 그래서 레벨이 몇인데?”
     -99야. 그러는 너는 몇이냐?
     혁의 말에 약간 충격을 먹은 경훈이 말했다.
     “허억. 99? 이런, 그 사이에 벌써 따라잡혀 버렸네. 너보다 1 낮다.”
     -그럼 98이란 소리네? 그건 그렇고 현성이 동생한테 전수받던 기술은 완성되어 가냐?
     “물론.”
     경훈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통화를 하는 것처럼 음성만 전달될 뿐이지만 내가중수법을 무리 없이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에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이야 잘됐다. 너랑 나, 강찬이는 한층 더 강해졌는데, 현성이 녀석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그러게. 뭐 아무튼 잘 알았다. 네 녀석이 걱정 되서 대화를 걸어본 거야.”
     -그래? 네가 내 걱정을 하다니 별일이군. 약이라도 먹은 거냐?
     “시끄러 이놈아. 그럼 대화 끊는다.”
     -싫어. 내가 먼저 끊을 테다!
     [루샤크 님께서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유치한 녀석.”
     먼저 대화를 끊은 혁을 떠올리며 경훈이 피식 웃었다.
                   *    *     *
     지하 던전 2층.
     1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시린 한기가 대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 역시 몸의 감각이 서서히 둔해지는 것을 느끼며 앞장 선 세린의 뒤를 따르고 있을 때였다.
     지하 2층으로 내려오자 1층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요상한 문양이 새겨진,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크기를 가진 문 하나가 던전의 벽면에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뭐지?’
     요상한 문양이 새겨진 문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호기심이 극에 달한 나는 일행과 떨어져 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문의 손잡이는 기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거북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녹이 슬대로 슨 경첩이 회전하며 내는 거북한 소리를 일해들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일행 중 나와 함께 걷던 에릭이 먼저 물었다.
     “레드 군, 거기서 뭐해요?”
     “어머, 레드 군!”
     “잠시만요! 루카, 넌 여기 있어.”
     캉!
     세린도 놀라 소리쳤지만 나는 빙긋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도대체 이 문 뒤에 어떠한 곳이 있을까? 끝없이 펼쳐진 복도일까? 아니면 던전의 작은 방 하나가 존재할 것인가?
     “거긴 들어가면 안 돼요!”
     묵묵히 침묵을 지켜가던 루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궁금증을 떨쳐내지 못한 나는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끼이익.
     쿵.
     소름 돋는 경첩의 마찰음과 함께 자동적으로 문은 굳게 닫혔고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 차단되었다.
     작지 않은 어두운 방.
     춥디추운 던전의 복도와는 달리 방 안은 따뜻했다.
     물론 던전의 복도에 비해 따뜻한 것이지 난로를 쬐는 것처럼 따뜻하지는 않았다. 다만 혹독한 추위를 겪던 이가 약간이라도 온도가 높은 곳에 오게 되면 잠시 추위를 잊게 된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저건 누구지?’
     방 안을 빙 둘러보던 나는 방의 한쪽 가장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는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허름한 차림새를 한 사내는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양인지 머리는 보이지 않았고, 왼팔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작은 이벤트를 위해 준비된 NPC인가? 혹시 알아? 던전에 갇힌 NPC를 구출하라는 퀘스트를 줄지.’
     무언가 이벤트가 준비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우두커니 서있는 사내에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도중에 방 안에서 기회를 노리던 몬스터가 암습할 수도 있을 거라 예상한 나는 아이언 레드 롱 보우의 활등을 꽉 움켜쥔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보기보다 당당한 체구를 가진 사내는 뒤에서 보아도 상당한 위압감을 풍겼다. 차림새를 보아 잘 다져진 근육질 몸매를 가진 목수와도 같았다.
     “저기요.” 사내에게 다가간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사내. 그에 나는 사내의 어깨에 손을 얹고 흔들었다.
     “저기요?”
     그에 사내는 대답 대신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사내의 앞모습을 본 나는 기겁을 하며 백스텝을 밟아 거리를 두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안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머리는 이미 어깨 위에서 없어진 지 오래였다. 날이 선 물체에 베어져 나간 지 꽤나 오래된 듯했다.
     시선을 사내가 왼팔에 끼고 있는 물체에 고정시킨 나는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사내가 왼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내의 머리로 간주되는 그것이었다. 목 아래로는 척추가 길게 늘어져 있어 그것을 본 순간 전신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게 뭐야.”
     사내의 초점 없는 시선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초점은 없었지만 정확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내 사내의 팔에 들린 머리가 이빨을 드러냈고, 머리를 거꾸로 집어든 사내는 길게 늘어진 척추를 당겨 끝부분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터엉.
     척추의 끝부분을 집어든 사내는 자신의 머리통을 바닥에 던지는가 싶더니 이내 철퇴를 휘두르듯 팔을 들어 머리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크아아!
     “저, 저게 뭐야. 퀵 스텝!”
     놀랄 틈도 주지 않고 사내는 기성을 내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재빨리 왼쪽 벽면으로 몸을 던진 나는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부웅.
     콰앙!
     대기를 가로지르는 파공성과 함께 나를 노리고 쇄도해오는 사내의 머리통.
     나는 급히 백스텝을 밟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사내의 머리통은 단단한 벽면을 부수고 벽면에 틀어박혔다.
     “저, 저것에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리겠다.”
     벽면에 틀어박힌 머리통을 빼내는 사내. 순간적인 빈틈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때를 놓치지 않는 나는 꺼내든 화살을 재빨리 활시위에 활을 쏘았다.
     쐐애액.
     사내의 가슴팍을 향해 맹렬히 쏘아진 화살. 그 뒤론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티잉.
     화살은 사내의 가슴팍을 뚫지 못한 채 맥없이 튕겨져 나왔다.
     ‘허억? 화살이 통하지 않는다?’
     나는 맥없이 튕겨져 나간 화살을 보며 넋을 잃었다. 하지만 재빨리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린 나는 거침없이 휘둘러지는 사내의 머리통을 재빨리 피해내기 시작했다.
     화살이 안 통하는 상대라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파워 샷(Power Shot)을 먹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데미지를 입힐 수는 있는데 말이야… 우선 정령들부터 소환해야겠군.’
                   *    *     *
     현성이 들어간 방 내부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릭은 문손잡이를 잡고 연신 잡아당기고 있었다.
     “레드 군! 장난치지 말고 어서 여세요!”
     쿵쿵쿵.
     연신 문을 두들기며 소리쳤지만 방 안에서 대답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요?”
     사정없이 문을 두드리는 에릭을 보며 세린이 말했다. 그에 문을 두드리는 것을 멈춘 에릭이 대꾸했다.
     “음… 아마 그런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레드 군이 만난 지 얼마 안 된 상대에게 이런 장난을 칠 정도로 예의가 없지 않았거든요.”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파티의 밸런스가 무너지기 때문에 사냥을 할 때 큰 곤란을 겪게 될 것임이 분명했기에 모두들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불행히도 다른 일이 벌어졌다.
     “이런…….”
     평소에 말이 없던 루나의 음성이 에릭과 세린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루나에게 옮긴 에릭 역시 기겁을 했다. 루나와 3미터 가량 떨어진 거리에서 굳건히 대지를 밟고 서 있는 거대한 동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실루엣을 인식한 루카가 자세를 낮추며 낮게 목청을 울리기 시작했다.
     크르르…….
     “일 났다.”
     재빨리 수인을 맺은 루나가 공간전이로 에릭의 후방으로 대피했다.
     우람한 동체에 전신을 단단한 갑주로 무장한 실루엣.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틀 엑스를 손에 쥔 실루엣의 정체는 미노타우로스 나이트였다.
     미노타우로스 나이트는 일반 미노타우로스보다 족히 두세 배는 강했기 때문에 결코 만만하게 볼 몬스터가 아니었다.
     미노타우로스의 서식지는 지하의 깊은 던전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그가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루나를 인식했는지 미노타우로스 나이트가 묵묵히 루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철컹. 철컹.
     갑주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분주하게 수인을 맺던 루나가 시동어를 외기 시작했다.
     “스톤 스킨(Stone Skin), 스트렝스(Strength), 헤이스트(Haste), 샤프니스(Sharpness).”
     주문영창이 이어짐과 동시에 에릭의 몸을 휘감은 가지각색의 눈부신 빛. 보조마법을 걸어준 것이었다.
     “블레스(Bless).”
     그에 세린도 질세라 분주하게 수인을 맺으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프로텍션(Protection), 생추어리(Sancuargy).”
     많은 종류의 보조 마법이 걸린 에릭은 자신 있게 미노타우로스 나이트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미노타우로스 나이트의 거대한 배틀 엑스가 쇄도해 왔으나 망설임 없이 에릭의 오러를 머금은 롱 소드가 마중 나와 배틀 엑스와 충돌했다.
     콰앙!
     지속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힘 스탯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주는 스트렝스 마법을 걸어두었기에 에릭은 미노타우로스 나이트의 공격을 무리 없이 막아낼 수 있었다.
     거기에 방어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주는 스톤 스킨과 프로텍션이 걸려 있어 어지간한 충격에는 끄떡도 안 할뿐더러 세린이 걸어준 고위급 보조마법에 의해 싸움의 양상은 딴판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헤이스트로 인해 민첩 스탯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에릭의 몸놀림은 전과는 달리 더욱 빠르게 움직이며 미노타우로스 나이트를 몰아넣기 시작했다.
     이릭은 그야말로 신이 나서 치고받는 공방을 벌이기 시작했다.
     채앵, 채앵!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펴지기 시작했다.
     무기를 날카롭게 만들어 공격력을 대폭 상승시키는 샤프니스 마법과 에릭의 오러 때문인지 미노타우로스 나이트의 배틀 엑스는 조금씩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슬로우(Slow).”
     상대방의 움직임을 일시적으로 느리게 만드는 마법이 미노타우로스를 작렬했고 움직임이 상당히 느려지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에릭이 치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쿠워엉!
     광분한 미노타우로스 나이트, 흉성이 폭발했지만 슬로우 마법에 걸린 채 보조 마법이 잔뜩 걸린 에릭을 몰아넣을 수 있는 확률은 전무했다.
     시간이 갈수록 에릭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스태미나가 서서히 바닥나기 시작했는지 힘겹게 배틀 엑스를 휘두르는 미노타우로스 나이트.
     에릭의 검이 미노타우로스가 걸친 갑옷의 여기저기를 두드리며 거침없이 공격해나가는 동안 미노타우로스 나이트의 생명력은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현성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치고 들어오는 유라한의 공격을 피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령을 소환해야겠어. 주문을 외는 동안 정신이 흐트러져 저 무식한 머리통에 맞지는 않을지 걱정되는군.’
     “백스텝, 백스텝, 백스텝!”
     세 번의 백스텝을 밟자 현성과 듀라한의 거리는 상당히 멀어졌다. 하지만 듀라한은 금세 또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바람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한 나 레드 파운이 그대의 힘을 빌리고자 명하노니, 내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라, 백호!”
     방안에 배치된 물건들을 마구 때려 부수며 휘둘러지는 머리통을 피하며 현성이 외치자 현성을 중심으로 약한 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이내 현성의 머리 위에 대기의 바람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응축되고 응축되어 일정한 형태를 갖춘 바람의 정령이 빠르게 날아와 현성의 머리에 착지했다. 마치 새하얀 털에 초록색의 줄무늬를 가진 작은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마스터!”
     재빨리 활을 쏘아 듀라한을 경직 시킨 현성은 주문을 외며 나머지 세 정령을 소환했다.
     “형!”
     “마스터~.”
     “…….”
     소환된 정령들은 각자 자리(?)를 맡았고 정령을 소환하자 현성의 자신감은 극에 달했다.
     “좋아, 이제야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겠군. 디그(Dig)!”
     현성의 말에 현무가 정령마법을 펼쳤다. 빠르게 현성에게 접근하던 듀라한의 발밑에 깊지 않은 구덩이가 형성되어 듀라한을 묶어두었다. 하지만 듀라한이 거세게 몸부림치는 것을 보아 금세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것 같았다.
     재빨리 허리춤에서 화살 두 개를 꺼내든 현성이 소리쳤다.
     “파이어 애로우!”
     그에 화살촉에 뜨겁게 타오르는 화염이 형성되어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윈드 애로우, 파웟 샷!”
     듀라한이 막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타이밍에 맞춰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두 대의 활사은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듀라한의 가슴팍을 향해 쏘아졌다.
     콰앙!
     비약적으로 속도가 증가한 화염을 머금은 화살이 언데드 몬스터의 가슴팍을 작렬하자 듀라한은 뒤로 쭉 밀려나 잠시 경직 되었다.
     현성의 예상대로 화살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언데드 몬스터에게 신성 마법 다음으로 치명적인 것이 화염계열의 마법.
     듀라한 같은 상급 언데드 몬스터에게 화염 마법이 큰 충격을 줄 수는 없었지만 윈드 애로우를 이용해 속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파워 샷까지 중첩되자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차앗!”
     재빨리 듀라한에게 다가간 현성은 잠시 경직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척추를 뒨 듀라한의 오른쪽 어깨를 활로 강하게 내리찍었다.
     “보우어택!”
     터엉!
     ‘얼레?’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듀라한의 몸뚱이가 워낙 단단했기 때문에 현성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무리 없이 퉁겨냈다.
     경직에서 풀려난 듀라한이 다른 한 손으로 현성의 머리를 움켜쥐려는 찰난 현성은 재빨리 백스텝을 밟으며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그리스를 외쳤다.
     그에 듀라한은 마찰계수가 0이 된 지면에서 맥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휴우, 지금까지 일대일로 사냥해왔던 몬스터 중 가장 무시무시한 녀석이군. 도통 화살이 박히지 않으니 말이야. 레인지 마스터가 되어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킬 수 있게 된다면 무리 없이 화살이 틀어박힐 텐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접근하는 듀라한을 보며 활을 고쳐 잡은 현성이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밀어붙이는 에릭에 루카까지 합세하자 미노타우로스 나이트는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루카가 미노타우로스의 정신을 완전히 분산시켜 놓고 있을 때 빈틈을 드러낸 미노타우로스 나이트의 투구 사이에 에릭의 검이 파고들었다.
     쿠워어엉!
     커다란 투구 얼굴가리개 사이로 뻘건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허연 뇌수도 간간히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것이 분명했다.
     약점을 가격했으니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미노타우로스 나이트의 정신을 분산시키던 루카가 재빨리 미노타우로스 나이트에게서 떨어져 루나와 세린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에릭은 롱 소드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는 미노타우로스 나이트를 경계했다.
     ‘뇌수까지 뿜어진 것을 보니 이제 곧 절명하겠군.’
     에릭의 생각대로 미노타우로스 나이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육중한 몸뚱이가 뒤로 벌렁 넘어져 절명했다.
     번쩍!
     미노타우로스가 쓰러짐과 동시에 눈부신 다섯 개의 빛줄기가 루카의 몸을 빠르게 휘감기 시작했다.
     네 개의 빛줄기는 루카의 몸을 휘감으며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고 남은 한 개의 빛줄기는 넓게 퍼져 루카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어라? 루카가 왜 저러죠?”
     자신의 검에서 오러를 거둔 에릭이 황급히 루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머, 점점 커지기 시작하는데요?”
     세린의 말대로 루카는 새하얀 빛에 휩싸여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몸이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눈부신 빛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번쩍!
     눈부신 섬광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어두웠던 던전이 순간이었지만 대낮처럼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루카를 휘감고 있던 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지 오래였고 루카가 서 있던 자리엔 은빛을 띠는 새하얀 털을 가진, 사람 한 명은 거뜬히 태울법한 큰 늑대가 네 발로 서 있었다.
     쫑긋 세운 귀와 쭉 뻗은 주둥이는 이미 개의 티를 벗어나 완전한 늑대의 모습을 갖추었고 길게 뻗은 다리와 몸통은 무지 단단해 보였다. 길게 뻗은 꼬리 또한 이전처럼 사정없이 흔들지 않았다.
     완벽한 늑대의 모습을 갖춘 루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았다.
     “루, 루카?”
     루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에릭에게 시선을 두었다. 완벽한 늑대의 티를 갖추었지만 이전의 까만 눈망울은 변함없다.
     크르르…….
     낮게 목청을 울리던 루카가 몸을 돌려 현성이 들어갔던 방을 주시했다. 커다랗게 변한 루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자 에릭과 세린, 루나는 자연스레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루카였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낮게 목청을 울리던 루카는 현성이 들어간 방의 문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이샤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어라, 이게 뭐야?”
     사내의 공격을 힘겹게 피해내며 활을 쏘던 내 앞에 루카의 레벨업 메시지 창이 중첩되어 뜨기 시작했다.
     ‘루카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니, 또 자란 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사내의 머리통이 내 왼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한 충격에 옷이 찢겨져 나가며 살점이 터진 것을 느낀 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놓쳤다.
     “마스터!”
     “크윽. 제길.”
     극심한 통증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공할 파괴력에 상당량의 생명력이 감소되었다.
     애초에 방어력이 약했던 나였기에 이런 충격을 받고서도 멀쩡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때였다. 상처 부위에 눈부신 푸른빛이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부상을 회복시킨 뒤 생명력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처, 청룡.”
     “감동할 시간 있으면 어서 피해, 미스터!”
     청룡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재빨리 퀵스텝을 걸고 두 다리로 지면을 박찼다.
     신속의 부츠 덕에 움직이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한 나는 허공으로 뛰어올라 횡으로 휘둘러지는 사내의 머리통을 재빨리 피해낼 수 있었다.
     사내의 머리통을 피해낸 뒤 재빨리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수거한 나는 백스텝을 밟아 사내와 거리를 두었다. 내가 이제막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들려던 참이었다.
     콰앙!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방의 입구에 먼지가 자욱하게 번졌다. 사내를 응시하던 나는 자연스레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자욱한 먼지가 걷히면서 나타난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깊은 숲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짐승의 안광이었다. 상당한 위압감을 풍기며 모습을 나타낸 것은 은빛의 새하얀 털을 가진 커다란 늑대였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늑대. 나는 늑대의 눈을 보고 단번에 정체를 알아챘다.
     “루카!”
     루카의 어깨(?)부분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것으로 보아 문을 부순 것이 루카임이 분명했다. 재빨리 달려와 내 앞을 가로막으며 사내를 경계하는 루카. 전과는 달리 완벽한 늑대의 티를 갖춘 루카였다.
     “레드 군! 무사했네요!”
     헐레벌떡 부서진 문으로 다가오며 세린이 소리쳤다. 그 뒤로 에릭과 루나가 급히 들어오며 소리쳤다.
     “허억? 듀라한! 저것과 싸우고 있었나요?”
     루카를 향해 머리통을 연신 휘두르는 사내를 보며 에릭이 소리쳤다.
     “류라한이오?”
     “네. 저 몬스터의 이름이지요. 무지막지한 녀석이라 혼자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인데 지금까지 상처 없이 상대하고 있었던 건가요?”
     나의 물음에 가까이 다가온 세린이 되물었다.
     종횡무진 자신의 머리통을 철퇴처럼 휘두르는 듀라한. 하지만 루카는 무리 없이 듀라한의 공격을 유유히 피해내고 있었다. 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루카를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세린이 말했다.
     “미노타우로스 나이트를 잡고 나니까 눈부신 빛무리가 루카의 몸을 휘감더군요. 그 상태로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저렇게 변했어요. 그건 그렇고, 레드 군 몸에 붙어 있는 그 작은 동물들은 뭐에요?”
     “정령이요. 루카! 이제 됐어, 내가 할게!”
     듀라한의 맹공격을 유유히 피해내며 빈틈이 보일 때마다 몸으로 부딪히며 듀라한을 몰아붙이던 루카가 내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빨리 듀라한과 거리를 두었다.
     나는 지속시간이 끝난 퀵 스텝을 다시 시전하며 힘차게 지면을 박찼다.
     “윈드 애로우!”
     쐐애액!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든 나는 재빨리 화살을 쏘았다. 백호로 인해 가속이 붙은 화살은 대기를 가르며 듀라한의 복부로 쏘아졌고, 화살에 맞은 듀라한이 움찔하는 순간 또다시 화살 하나를 꺼내든 나는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홀리 웨폰(holly weapon)!”
     파이어 애로우를 외치려는 찰나, 뒤에서 지켜보던 세린이 외쳤다. 그러자 아이언 레드 롱 보우에서 성스러운 새햐얀 빛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활은 물론 화살촉에도 마치 오러와도 같이 맺힌 새하얀 기운.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으며 외쳤다.
     “윈드 애로우, 파워 샷!”
     푸슝!
     쐐애액.
     신성력을 한껏 머금은 화살이 대기를 가르며 듀라한의 가슴팍을 향해 맹렬히 쏘아졌다.
     푸욱.
     크리티컬 히트!
     단단하던 듀라한의 몸통에 굵직한 화살이 틀어박힘과 동시에 듀라한의 몸통이 부르르 진동하기 시작했다.
     크에에엑!
     이어진 공격으로 상당량의 생명력이 감소했던 듀라한. 그 뒤로 이어진 신성력을 머금은 공격에 크리티컬 히트까지 터지니 언데드 몬스터인 듀라한이 버틸 재간이 없었다.
     키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듀라한의 당당한 체구가 그대로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때였다.
     번쩍!
     [레벨업! 스탯 포인트를 분배해주세요!]
     레벨업 메시지와 함께 또 다른 빛무리가 내 몸을 휘감아 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혼비백산했다.
     [레인지 마스터가 되었습니다.]
     [캐릭터의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향상 됩니다.]
     [시력이 좋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청각이 발달되는 것을 느낍니다.]
     [보조 스킬의 능력치가 향상됩니다.]
     [오러 애로우(Aura Arrow)를 발현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환수 루니오스 카아샤의 등에 탑승할 수 있습니다.]
     [클래스가 변경 됩니다. 호칭이 ‘레인지 마스터’로 변경됩니다.]
     [정령 청룡(물)의 레벨이 증가했습니다.]
     눈부신 빛줄기와 함께 뜬 여러 가지 메시지가 적힌 입체 창. 그중 유독 내 눈이 띄는 것은 다름 아닌 레인지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를 휘감던 빛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자 던전은 다시 어두컴컴해졌다.
     아니, 밝았다. 이상하게도 어두운 방이 밝았다. 루나의 라이트가 켜져 있었지만 그것은 한정된 범위만 밝게 비출 뿐 다른 곳은 밝게 비출 수 없었다.
     나는 시선을 문 밖으로 던졌다. 그토록 어둡던 던전이 대낮처럼 밝게 보였다. 먼 곳을 집중하자 시야가 확보되는 것을 느끼며 저 멀리서 파티를 맺어 사냥을 하는 유저들이 보였다.
     물론 게임 내에 벨런스라는 것이 있기에 던전의 끝에서 끝까지 볼 수는 없었다. 그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 유저 몇이 희미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보조 스킬의 능력치가 향상된다는 뜻을 대번 이해한 나는 상당히 기분이 들Em기 시작했다.
     꿈에 그리던 레인지 마스터가 되었으니 기분이 들뜨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와, 축하드려요, 레드 군. 루카와 함께 이곳에서 레벨업을 하다니.”
     “감사합니다.”
     들뜬 기분을 억누르고 있을 때 어느새 다가온 에릭이 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그에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해따.
     “하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파티원 전원을 둘러보며 세린이 말했다.
     “그러죠, 저도 곧 나가봐야 해서요.”
     에릭이 롱 소드를 검갑에 수납하며 대답했다. 루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뭐 상관없어요.”
     잔뜩 기분이 들뜬 나는 전과는 달리 크게 대답했다.
     “아, 레드 군. 메신저에 친구추가를 해도 될까요?”
     “오, 그럼 저야 좋죠.”
     천천히 다가온 에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에릭과 세린, 루나를 메신저에 추가하자, 파티 리더인 세린이 아이템 창에서 마을 귀한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자, 그럼 마을로 돌아가서 로그아웃 하겠습니다. 워프!”
     세린이 외치며 스크롤을 찢자 우리는 순식간에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의 시계탑 광장의 중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제15장   몬스터 침공 이벤트

     “모두들 나갔네요. 앞으로 자주 사냥하러 다니죠, 레드 군.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친절하게 말을 하던 에릭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로그아웃을 했겠지.
     레인지 마스터가 되어 홀가분해진 나는 부쩍 커진 루카를 보며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번에 많이 자라 허리를 숙이지 않고서도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게 된 것이 신기했다.
     “먼저 내 상태와 루카의 상태부터 살펴봐야겠는 걸? 상태 창, 오픈!”
     파밧!
     [이름] 레드 파운
     [직업] 스피릿 레인저
     [계급] 평민
     [호칭] 레인지 마스터
     Lv. 63
     생명력(HP). 800
     마나(MP). 600
     스태미나(SP). 1,400(배고픔 수치 0%/ 갈증 0%)
     힘 137
     체력 65
     민첩 179(+30)
     손재주 520
     지력 15
     지혜 15
     행운 15(+10)
     (정령 친화력 30)
     건강상태 양호
     공격력 300~420
     방어력 10(+12)
     마법방어력 2(+10)
     남은 스탯 포인트: 5
     바람(백호) Lv. 6. 친화력 100%
     [상세정보]
     땅(현무) Lv. 5. 친화력 100%
     [상세정보]
     불(주작) Lv. 4. 친화력 100%
     [상세정보]
     물(청룡) Lv. 5. 친화력 100%
     [상세정보]
     레인지 마스터라고 표기 되어있는 호칭을 봐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을 느끼며 나는 이번엔 스킬 창을 열었다.
     <Skill>
     레인지 마스터리(Ranged Mastery)
         Master
     보우 어택(Bow Attack)
         Master
     적안(赤眼)
         Master
     백 스텝(Back Step)
         Master
     크리티컬(Critical)
         Master
     퀵 스텝(Quick Step)
         Master
     더블 샷(Double Shot)
         Master
     파워 샷(Power Shot)
         (324.25/500.00%)
     트리플 샷(triple Shot)
         (0.20/200.00%)
     “하, 머지않아 나머지 것들도 전부 마스터해야겠군.”
     나는 상채 창과 스킬 창을 번갈아보며 빙긋 웃었다.
     ‘이제 레인지 마스터가 되었으니 잠시 수도 세인트 모닝에 놀러가도 괜찮겠지?’
     상태 창과 스킬 창을 닫은 나는 루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레벨 업을 하면서 보게 됨 메시지 창을 떠올렸다.
     ‘루니오스 카이샤 탑승이라…….’
     나는 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라 루카의 등에 탑승했다. 루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원래 같으면 꼬리를 흔들며 난리법석을 떨어야 하는데, 극도로 얌전해진 루카를 보며 나는 못내 아쉬웠다.
     “루카~ 반응이 없으니까 재미없다?”
     끄응… 캉캉.
     뭔가를 말을 하는 듯한 루카. 하지만 아무리 루카의 주인이라 해도 동물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법.
     루카의 등에 탑승한 나는 수도 세인트 모닝 워프 스크롤을 구입하기 위해 지나가던 레벨이 높아 보이는 유저를 아무나 한명 붙잡고 말했다.
     “저… 혹시 마법사의 길드로 가려면 어디로 가면 되나요?”
     “마법사의 길드 말입니까?”
     유저의 설명을 들은 나는 곧바로 마법사의 길드로 향했다.
     루카를 타고 다니니 이동할 때 확실히 편하군. 앞으로 자주 타고 다녀야겠어. 흐흐.
     마법사의 길드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루카의 등에서 뛰어내린 나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유리로 만들어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 카운터라고 말하긴 뭐하지만 아무튼 카운터에 서 있는 유저가 인사를 했고, 그에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수도 세인트 모닝 워프 스크롤을 구입하려고 하는데요.”
     “아, 세인트 모닝 워프 스크롤 말입니까? 한 장에 10실버입니다.”
     유저의 말에 나는 아이템 창에서 30실버를 꺼내 수도 세인트 모닝 워프스크롤 세 장을 구입한 뒤 마법사의 길드에서 나왔다.
     워프 스크롤 하나만 남겨둔 채 아이템 창을 닫은 나는 망설임 없이 워프 스크롤을 찢었고 루카와 나는 순식간에 수도 세인트 모닝의 분수대 광자에 도착하게 되었다.
     언제나 활기찬 수도 세인트 모닝의 분수대 광장은 여러 유저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와는 달리 인간 유저밖에 없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래도 내겐 내 집과도 같은 곳이었다.
     나는 루카의 등에 훌쩍 올라타며 말했다.
     “루카, 궁수의 탑으로 가자.”
     그에 루카는 네 다리로 힘차게 지면을 박차며 궁수의 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말을 탄 기분이 이럴까?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분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분 좋게 바람을 만끽하고 있을 때, 궁수의 탑 훈련소에 도착하게 된 나는 전직 시험을 보는 유저들을 뒤로한 채 탑을 향했다.
     1층에서 보초를 선 경비들이 내 호칭을 보자 전과는 달리 극존칭을 쓰기 시작했다.
     “현재 입장 가능한 시간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아, 예.”
     나는 루카의 등에서 내려와 궁수의 탑의 문을 열고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금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문을 열자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로시토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빙긋 웃으며 소리쳤다.
     “로시토!”
     “엇 레드, 어서 오게나. 아닛?”
     나의 대답에 책에서 시선을 뗀 로시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켜졌다. 보던 책을 덮으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로시토가 책상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아니, 벌써 레인지 마스터가 된 건가?”
     “네.”
     로시토의 물음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를 쓸어보던 로시토의 시선이 내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루카에게 옮겨졌다.
     “루니오스 카이샤도 벌써 성체가 되었군. 저기 저 상자에서 꺼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말일세.”
     로시토의 말에 루카가 천천히 꼬리를 흔들어보였다.
     “레드, 오러 애로우는 발현시켜 보았나?”
     나와 루카를 번갈아 보던 로시토가 말했다.
     “아니요. 아직 안 해봤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켜 보게나.”
     “예.”
     로시토의 말에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든 뒤 화살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오러 애로우는 발현되지 않았고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만이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
     “어라?”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 로시토가 말했다.
     “집중을 하게. 화살촉에 집중을 한다면 오러 애로우가 발현 될 것이라네.”
     “네.”
     나는 로시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다. 그러자 기사들의 오러와는 다른, 붉은 빛을 띠는 붉은 오러가 형성되어 화살촉에 맺혔다. 나는 그대로 활짝 열린 창문을 겨냥한 채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쐐애액!
     오러 애로우를 머금은 화살이 창밖으로 쏘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화살이 아니 마치 붉은 섬광만을 쏘아 보내는 것을 연상시켰다.
     “우와…….”
     직접 내가 쏜 것이지만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은 나는 다시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고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화살촉에 붉은 빛을 강렬하게 발산하는 오러 애로우가 발현 되었고 그것을 쏘자 붉은 섬광이 쏘아짐과 함께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이 오러 애로우라면 부술 것이 없는 무적의 절기인 셈이죠?”
     나의 물음에 로시토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로시토가 말했다.
     “레드, 신대륙은 언제 떠날 생각인가?”
     “우선 오러 애로우를 좀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때쯤 출발하려고 해요. 그리고 나머지 향상된 보조스킬에도 적응을 해야 하구요.”
     “그렇군. 잘 생각했네.”
     로시토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오늘도 꽤 오랜 시간 플레이 한 것 같군. 나는 책상으로 돌아가 자리에 앉은 로시토를 보며 입을 열었다.
     “로시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가는 건가?”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말을 마친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따라 네 마리 정령도 유난히 조용하군. 나는 네 정령을 모두 소환해제 시킨 뒤 로그아웃을 했다.
     [로그아웃. 5초 후 종료됩니다. 5, 4, 3, 2, 1.]
     푸쉬쉬.
     위잉.
     헤드셋의 전원이 꺼짐과 동시에 캡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천천히 열리는 동안 나는 극심한 현기증과 두통을 느끼며 헤드셋을 벗은 뒤 머리맡에 두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크윽. 머리가 쑤실 듯이 아프군.’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스킬 수련치를 올린답시고 하루 종일 게임만 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요 한 달간 아침식사 이외의 식사는 거의 걸러서 그런지 건강 상태도 무지 나빠진 것 같았다.
     힘겹게 게임베드에서 일어난 나는 가상현실 게임기기의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고, 그와 동시에 캡슐의 문이 서서히 닫혔다.
     ‘배가 무지 고프군.’
     빈속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째서인지 입맛이 나지 않았다.
     「주인님, 최근에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어서 식사를 하신 뒤 푹 쉬시기 바랍니다.」
     “응? 아, 그래. 그런데 컴,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오후 8시 30분입니다.」
     “그렇군.”
     나는 방에서 나와 느릿하게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째서 먹을 맛이 나질 않는군.’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하지만 평소에 좋아하던 인스턴트식품이 가득 차있는 것을 보고도 식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뭐라도 먹어두는 게 좋겠지.’
     나는 인스턴트식품 사이에 놓인 야채 죽을 꺼낸 뒤 냉장고 문을 닫았다. 빈속에 자극적인 것을 넣게 되면 속이 쓰릴 것이 분명하니 죽을 먹는 게 낫겠지?
     야채 죽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자 야채 죽은 금세 데워졌고, 전자레인지의 문을 연 나는 야채 죽을 꺼내 천천히 식탁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야채 죽을 한 수저 떠 입에 넣었다. 죽이라 그런지 속에서 잘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인스턴트식품에 비하면 맛은 없지만 그래도 먹을 만했다.
     순식간에 야채 죽을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나는 거실로 나와 소파에 몸을 기댔다.
     “컴, 멀티비전 좀 켜줄래? 채널은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에 좀 맞춰줘.”
     「네, 알겠습니다.」
     멀티비전의 전원이 들어옴과 동시에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에 채널이 맞춰졌고 나는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들고 신대륙으로 가는 행로를 검색했다. 그러다 한 유저가 자세하게 올려놓은 정보를 발견한 나는 그것을 선택해 천천해 읽기 시작했다.
     그의 정보에 의하면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의 네티아 항구에서 출항을 해 북서쪽으로 키를 놓은 뒤 월드타임으로 약 4일가량 항해를 하면 신대륙 아리시아에 도착하게 된다고 한다.
     “오, 간단한데?”
     신대륙으로 향하는 경로는 간단했지만, 그간에 습격하는 해적들과 해저의 몬스터들에 의해 신대률에 도착하지 못한 채 침몰당해 게임아웃 되는 유저들도 적잖게 많다고 한다.
     나는 그제야 네프가 왜 군함을 고집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레인지 마스터가 되었으니 웬만한 몬스터들은 내 적수가 되지 못 하겠군. 나머지 향상된 보조스킬에 적응한 뒤에 할아버지께서 주신 경신법 스킬 북에 있는 몇 가지 경공을 익혀봐야겠어. 레인지 마스터가 되었으니 불가능하진 않겠지?”
     신대륙 아리시아에 대한 정보 검색을 마친 나는 들뜬 마음으로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둘러보고 있을 때, 이제 막 업로드 된 글이 공지사항에 뜨게 되었고, 글 옆엔 ‘Event'라는 단어가 작게 적혀있었다.
     “이벤트인가? 무슨 이벤트인 거지?”
     나는 이제 막 업로드 된 공지사항을 검색했고, 검색을 함과 동시에 거실의 형광등이 껴졌고 주변이 어두컴컴해졌다.
     “뭐, 뭐야?!”
     화들짝 놀란 나는 쿠션을 끌어안은 채 주변을 살폈다.
     정전인가? 멀티비전의 전원을 보니 정전은 아니었다. 하지만 멀티비전의 모니터는 어두웠고 아무런 소리 또한 들려오지 않았다.
     “컴 도대체 무슨 일…….”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멀티비전에 새하얀 문구가 순차적으로 나타나며 각종 몬스터들의 포효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의 대 반란이 시작된다.]
     문구는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순차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언제 그랬냐는 듯 몬스터의 포효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까맣게 물들었던 멀티비전에 이내 수도 세인트 모닝의 분수대 광장을 비추기 시작했다.
     분수대 광장 주변에서 한창 평화를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과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들. 분수대 안으로 들어가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과 주변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한없이 평화로운 분수대 광장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디선가 맹렬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고, 기다란 화살이 분수대에서 빨래를 하던 아낙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까악!」
     모두의 시선이 화살을 맞고 쓰러져 피를 콸콸 쏟아내고 있는 아낙내에게 향했다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와 함께 모니터 또한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돌아가 그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어느새 성 안으로 잠입한 수많은 오크 아처들. 모두들 화살을 활시위에 걸고 활시위를 힘껏 당기고 있었다.
     쐐애액.
     그에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어린아이들과 마을의 아낙네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노인들까지 그곳에 있었다.
     오크들이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화살은 공중으로 치솟았다 이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던 민간인들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화살에 맞지 않은 사람들은 오크 아처들의 뒤에서 무리지어 나타난 오크들의 글레이브에 처참하게 죽어 나갔다.
     오크들의 뒤로는 트롤과 오우거가 모습을 나타냈고 하늘 위론 와이번과 그리폰, 히포그리프, 가고일 떼가 무리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빠르게 활공하던 와이번들이 브레스를 뿜어내며 세인트 모닝의 건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각종 몬스터들이 끝도 없이 세인트 모닝의 성문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상황이 어찌나 암울했던지 이게 지금 세릴리아 월드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라면 즉시 접속을 해 도와주고 싶은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멀티비전이 까맣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다시금 큼지막한 새하얀 문구가 순차적으로 새겨지기 시작했다.
     [공성전에 이은 대규모 이벤트.
     ‘몬스터 침공’
     2234년 7월 23일 오후 3시.
     몬스터들의 대 반란이 시작된다!]
     “7월 23일이면 3일 후네?”
     그것을 끝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거실의 형광등이 켜짐과 동시에 멀티비전은 세릴리아 월드 홈페이지를 비추고 있었다.
     이벤트 광고가 끝나자 이벤트에 대한 자세한 사항이 멀티비전에 떴고 나는 그것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도 세인트 모닝, 아리스 노아, 항구도시 티르 테티아를 중심으로 대규모 이벤트가 진행되고 누구나 이벤트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 관건이었다.
     대체적으로 레벨이 낮은 유저들이 머무는 세인트 모닝과 아리스 노아에 침공하는 몬스터는 대체적으로 슬라임, 고블린, 오크, 트롤 정도의 몬스터들이 침공한다고 한다.
     레벨이 낮은 그들이라면 트롤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울 것이란 운영자들의 생각이었다. 반면에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에 침공하는 몬스터들은 달랐다. 트롤부터 시작해서 던전에 서식하는 각종 몬스터들이 전부 침공을 한다는 것이 흠이었다.
     세릴리아 월드를 플레이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몬스터들도 대거 출현한다는 것에 이벤트에 흥미를 느낀 나는 몬스터 침공 이벤트에 대한 자세한 사항들을 모조리 읽어본 뒤 컴에게 멀티비전의 전원을 끄라고 시킨 뒤 방으로 향했다.
     다음날.
     컴이 틀어준 알람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재빨리 욕실로 향했다.
     깨끗이 씻고 나온 뒤 부엌으로 향한 나는 냉장고에서 인스턴트식품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고, 그것을 허겁지겁 먹고 난 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PDA를 챙긴 뒤 현관으로 향했다.
     오늘은 바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학식!
     잔뜩 기대에 들뜬 나는 신발을 신고 문밖으로 나와 학교로 향했다.
     여느 때와 같이 교실은 떠들썩했다. 조용히 들어와 자리에 앉았을 때 교탁 앞으로 나온 반장 명석이가 소리쳤다.
     “너희들 이거 알아?! 모레 대규모 이벤트가 또 진행된대!”
     명석이의 말에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이 조용해졌고, 교실 안에는 갑작스레 침묵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명석이에게 집중되었고, 그런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명석이 자신 있게 말하기 시작했다.
     “몬스터 침공 이벤트라고, 세인트 모닝, 아리스 노아, 티르 네티아를 중심으로 이벤트가 진행되는 거야. 세인트 모닝, 아리스 노아엔 비교적 약한 몬스터들이 침공하고 고레벨 유저들이 머무는 티르 네티아는 각종 고레벨 몬스터들이 침공한대!”
     명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교실은 또다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고 있을 때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강찬이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이내 내 쪽으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안녕, 현성아.”
     “오, 강찬이네? 안녕.”
     “그런데 무슨 일이야? 원래 우리 반 애들이 시끄러운 건 알았는데, 오늘은 유난히도 시끄럽네.”
     거의 소음에 가까운 소리에 강찬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 내일 모레 열릴 대규모 이벤트 때문에 다들 들떠있는 것 같아.”
     “대규모 이벤트?”
     나의 대답에 강찬이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 모르는구나. 공성전에 이어 또 다른 대규모 이벤트가 진행된대. 어제 나는 직접 홈페이지에서 봤는데, 이게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더라. 아무튼 침공한 몬스터들을 잡으면서 경험치도 얻고 공성전 때와 같이 끝까지 살아남으면 보상 아이템을 주나봐.”
     “오, 그래?”
     “응. 내일 모레 7월 23일 오후 3시부터 시작돼.”
     “재밌겠는데?”
     강찬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고 있을 때 교실의 문이 열리면서 담임선생님이 교탁 앞으로 천천히 걸어와 주변을 조용히 시키기 시작했다.
     “모두들 조용! 주목하세요.”
     그에 시끄럽던 주변이 이내 잠잠해졌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교실 안이 조용해지자 그제야 담임선생님이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다 알고 계시지요?”
     “네!”
     “방학식!”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리치는 아이들. 그에 선생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 전달사항은 각자 집으로 메시지를 보낼 거예요. 전달사항을 메시지로 보낼 거면서 왜 학교에 나오라고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학생이 있을 것 같아 말하는 거지만, 방학하기 전에 여러분의 얼굴을 좀 더 보고 싶어서라고 전달하라고 교장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자, 그럼 방학 잘 보내고 9월 1일 날 웃는 얼굴로 봐요.” “네!”
     선생님의 말씀이 모두 끝나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걸상을 책상 안으로 밀어 넣고 교실 문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왔다가 바로 가는 거잖아.”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강찬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방과 후.
     넓은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나와 강찬, 경훈과 혁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덕 혁이 말했다.
     “얼레? 너 많이 해쓱해졌다?”
     “그래?”
     “엉. 다크서클도 짙어졌고.”
     혁의 말에 나는 손을 들어 눈 아래를 매만졌다.
     “그건 그렇고, 너희 둘은 내일 모레 열리는 이벤트 알고 있어?”
     “그야 당연히 알고 있는 거지. 몬스터 침공 이벤트.”
     함께 걷던 강찬이 화제를 바꿔 말했고 그에 경훈이 대답했다. 우리 셋 중 강찬만 모르고 있었나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너희들 얼마나 성장했냐?”
     “글세. 나는 제자리걸음이야.”
     피식 웃으며 경훈이 대답했다. 그에 혁이 경훈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기 시작했다.
     “푸하하. 네가 그렇지 뭐. 나는 곧 있으면 레벨 100에 도달한다.”
     “손가락 치워, 징그러운 자식아.”
     “뭐 인가?!”
     또 시작이다. 하여간 이 둘은 붙으면 싸우는 것 같았다. 티격태격하는 둘을 뒤로한 채 강찬이 내게 말했다.
     “현성아, 넌 어떻게 됐어?”
     “뭐가?”
     “뭐 생활직에 손을 댄다고 했었잖아. 그건 다 끝난 거야?”
     “아하, 그건 이미 끝났지. 그건 그렇고, 강찬아. 너 궁수가 오러를 발현시킨다는 말 들어봤어?”
     그에 강찬이 놀라며 말했다.
     “궁수가 오러를 발현시킨다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얘긴데?”
     “그렇군.”
     “왜?”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혁과 경훈은 교문의 문턱을 넘을 때까지 서로 티격태격 싸웠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나는 식사를 한 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왔다. 왠일인지 컴은 잔소리를 한지 않았다.
     ‘뭐, 컴이 잔소리를 안 하니까 내 입장에선 좋은 거지.’
     나는 빙긋 웃으며 가상현실 게임기기 허리부근에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위잉.
     캡슐의 문이 열렸고, 캡슐 안으로 들어온 나는 그대로 게임 베드에 누워 머리맡에 둔 헤드셋을 뒤집어썼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레드 파운 Lv. 63. 접속하시겠습니까?(예/아니오)]
     “예.”
     [세릴리아 월드에서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파밧!
     “어제 마지막에 있던 장소가 궁수의 탑이었구나.”
     궁수의 탑 1층에서 로그인 한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접수를 하기 위해 온 유저가 몇 보였고, 은빛의 새하얀 털을 가진 루카도 볼 수 있었다.
     “오, 루카.”
     나의 부름에 루카가 꼬리를 느릿하게 흔들며 다가왔고 난 손을 뻗어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궁수의 탑에서 빠져나와 훈련소의 한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아직 전직시험을 볼 때가 아니라 주변은 한적했다. 교관과 조교 NPC들도 어디 갔는지 볼 수 없었다.
     “호오. 이거 잘 됐네. 루카, 저기 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있어.”
     그에 루카는 구석진 곳의 커다란 나무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향상된 보조 스킬을 시험해 볼 때가 된 것 같군. 어제 레인지 마스터가 되면서 능력치가 향상된 적안을 몸소 체험해 봤기 때문에 효과가 얼마나 향상되었을지 짐작이 갔다.
     나는 먼저 퀵 스텝을 걸었다.
     “퀵 스텝!”
     전과는 달리 몸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두 다리로 지면을 박찼다. 그에 내 몸은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고 이내 지면으로 전보다 빨리 착지했다.
     “으흠. 몸놀림은 확실히 빨라진 것 같은데, 도약력은 그대로군. 그렇담 백스텝!”
     말을 마친 나는 그대로 백스텝을 밟아 뒤로 물러났다. 백스텝 역시 최대한 벌릴 수 있는 거리는 변함없었으나, 뒤로 빠지는 속도가 전보다 더 향상되었다.
     “오, 좋은데? 아차, 그건 그렇고 레인지 마스터가 되었으니 이제 현민이에게 전달받은 할아버지께서 주신 경신법에 대한 스킬을 입수할 수 있겠지? 안 된다면 능력치가 향상된 이 스킬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쓸 수 있게 연습하면 되는 거고.”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스킬 북을 꺼내며 말했다. 기대에 잔뜩 부푼 난 스킬 북을 재빨리 펼쳤다.
                   *    *     *
     “팀장님, 벌써 레인지 마스터가 된 유저가 두 명이 되었네요.”
     모니터를 주시하던 직원의 말에 서류를 작성하던 김여수 팀장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벌써 두 명이라고?”
     “네.”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작성하던 서류를 잠시 접어둔 김 팀장이 말했다.
     “그 레인지 마스터 중 한 명은 로빈훗일 테고 나머지 한 명은 누구지?”
     “그게 그러니까… 궁탑의 일곱 번째 제자인 ‘레드 파운’이라는 유저입니다.”
     직원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레드 파운이라면… 공성전 때 커다란 철궁을 들고 다수의 어쌔신을 상대하던 유저가 아닌가? 석 달 만에 생활직 스킬 6가지를 마스터한…….”
     “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생겼습니다.”
     “뭔가?”
     활짝 웃던 직원이 표정을 싹 바꾸며 말하자 김 팀장이 물었고 그에 직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약 1개월 전, 중원 채널에서 한 유저가 세릴리아 대륙 채널로 건너온 일이 있었는데, 그 유저가 세릴리아 대륙의 유저 두 명에게 중원의 스킬 북을 나눠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김 팀장의 물음에 직원이 차근차근 말했다.
     “현재 중원의 스킬이 세릴리아 대륙 유저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뭐, 뭐라고?”
     그 말을 들은 김 팀장의 표정이 상당히 심각해졌다.
     이대로 그냥 나간다면 밸런스가 무너져 반발하는 유저가 생길 것이고, 게임을 운영해 나가는데도 지장이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김 팀장이 딱 잘라 말했다.
     “우선 스킬 북을 받아 스킬을 입수한 두 유저를 주시하고 유저들이 다른 채널의 스킬을 입수하지 못하도록 패치를 시행하도록.”
     “아직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중원의 유저가 나눠준 스킬 북의 종류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중원 채널에 널리 알려진 ‘권법’이구요. 다른 하나는 ‘경공’입니다. 현재 한 무투가 유저가 중원의 권법을 익혀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을 보았는데, 조금 문제가 있더군요. 레벨 90대의 유저가 트롤을 단 네 방에 보낸다는 것이. 물론 약점을 가격하지 않고 그저 약점과는 무관한 다른 곳을 타격을 했다는 것입니다.”
     “허허…….”
     “그리고 경공 스킬을 받은 유저는… 현실 시간으로 어제 레인지 마스터가 된 레드 파운 회원입니다.”
     직원의 말에 김 팀장의 두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그, 그래서 그 유저가 상승 경공을 익혔나?”
     “아니요. 상승 경공의 특성상 절정의 벽을 깨지 못하면 배울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팀장님도 잘 아실 텐데요.”
     “아, 그랬었지. 이거 당황하는 바람에 잠시 잊었군.”
     “하지만 안심하긴 아직 이릅니다. 현재 유저는 레인지 마스터라는 경지에 도달한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앗?”
     모니터에 시선을 둔 직원이 말을 끊으며 화들짝 놀랐다. 그에 김 팀장이 궁금한 듯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인가?”
     “이거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군요. 레드 파원 회원이 상승 경공 중 4가지를 입수했습니다.”
     직원의 말을 들은 김 팀장의 표정이 상당히 암울해졌다. 암담해진 김 팀장이 겨우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우, 우선 주시하도록. 이틀 후에 열릴 몬스터 침공 이벤트 때 잘 주시해야 할 것 같아. 이건 아니다 싶으면 유저가 익힌 경공 스킬을 회수하면 되는 거고…….”
     “네, 잘 알겠습니다.”
                   *    *     *
     “퀵 스텝이 경신법과 중북되는 스킬인 건가?”
     나는 자꾸 중복된 스킬이 있다면 입수 불가능한 경신법 스킬을 보며 중얼거렸다.
     기본적으로 경신법을 마스터해야 상승 경공 스킬을 입수할 수 있는데, 퀵 스텝이 경신법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머지 스킬 허공답보(虛空踏步)와 이형환위(以形煥位), 천근추(千斤墜), 초상비(草上飛)를 입수한 나는 스킬 창의 수련치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련치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지만 만만치 않게 마나를 먹는 것을 보아 자주 사용하는 것은 무리인 것을 깨달아야 했다.
     게다가 중원의 경신법과 내가 가지고 있는 궁수의 기본 스킬인 퀵 스텝은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경신법은 패시브(Passive)스킬인지라 스킬을 입수하게 되면 따로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효과가 나타난다. 하지만 퀵 스텝 같은 경우는 스킬을 사용해야만 효과가 나타나면 지속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점이다.
     방금 입수한 네 개의 상승 경공은 반드시 경신법을 마스터한 뒤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스터한 퀵 스텝을 발동시켜야 경신법을 마스터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 상승의 무공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 뭔가 이리 복잡한 거지.”
     이제야 뜻을 이해한 나는 즉시 퀵 스텝을 걸고 이형환위를 시전했다.
     그에 나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원하는 장소에 순식간에 도착하게 되었고 상당량의 마나가 감소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의 절반 이상의 마나가 감소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효과가 좋긴 한데… 마나 감소가 너무 심하군. 오러 애로우를 발현시킬 때도 마나가 감소하는데. 장기전 전투에서 쓸 게 못 되는구나.”
     물론 마나 포션을 마셔도 되지만, 전투 중에 상대가 포션을 마시도록 내버려두는 이는 전무했다. 아이템 창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 마신 나는 지속시간이 끝난 퀵 스텝을 또다시 걸고 지면을 박차 힘껏 뛰어올랐다.
     허공답보를 시전해 지면을 딛자 허공에서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게 되었고 이형환위와 마찬가지로 절반 이상의 마나가 감소했다.
     ‘이렇게 된다면 밸런스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같은데? 마나의 절대량을 늘린다 해도 마나 소모량이 너무 극심해서 몇 번 쓰지 못할 것이 분명하고. 게다가 마나의 절대량을 늘리기 위해 지혜 스탯에 투자를 하게 되면 그만큼 패널티가 있겠지?’
     곰곰이 생각한 나는 나머지 천근추와 초상비도 시전해보았다.
     천근추와 초상비는 먼저 썼던 이형환위와 허공답보 스킬처럼 마나의 소모량이 극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량의 마나를 잡아먹었다.
     “후우. 세릴리아 대륙의 유저가 획득하나마나한 스킬이군. 자주 써먹지 못하니 말이야. 위험한 순간에만 써먹어야겠어. 아니, 거의 안 쓸지도 모르겠군.”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이템 창을 열어 스킬 북을 넣어둔 뒤 루카를 불러 마법사의 성으로 향했다.
     “하아~ 여전히 변함없구나.”
     마법사의 성 앞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이전에 파티 퀘스트인 미노타우로스 퇴치 퀘스트의 결과를 보고하러 왔을 때와 변함없는 마법사의 성.
     나는 문을 열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한 번 와봤기 때문에 레온의 방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도 알고 있어 헤매지 않고 찾아 갈 수 있었다.
     레온의 방 앞에 도착한 나는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십시오.”
     이어 들려오는 정겨운 음성. 나는 문을 열고 고개를 빠끔 들이밀었다. 내 시선과 레온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고 나와 눈이 마주친 레온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오, 레드!”
     “안녕하세요, 레온.”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온 나는 레온의 책상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허억.”
     그때였다. 레온의 눈동자가 방문 쪽을 향하더니 이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나는 고개를 돌려 레온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다 자란 루카를 보고 놀란 것이군.
     “저, 저게 루카인가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레온이 말했다.
     “네, 많이 자랐지요?”
     “그, 그러네요.”
     느릿하게 내 옆으로 다가온 루카가 조심스럽게 배를 깔고 엎드렸다. 나는 신기하다는 듯이 루카를 바라보는 레온에게 말했다.
     “저, 레온. 혹시 내일 모레 열리는 몬스터 침공 이벤트에 참가하시나요?”
     “저야 물론 참가하지요. 공성전에 이어 열리는 대규모 이벤트라는데, 어찌 참가를 안 할 수 있겠습니까?”
     레온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레온도 티르 네티아에서 강력한 몬스터를 때려잡겠지?
     나는 빙긋 웃는 레온에게서 시선을 떼어 책상에 어지럽게 벌려진 양피지 조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복잡한 수식이 적힌, 마법을 발현시키기 위해 풀고 암기해야 하는 여러 가지 수학 기호와 원소 기호들.
     애초에 공부와 담을 쌓고 지냈던 나는 레온의 책상 위에 어지럽게 벌어진 양피지 조각들을 보자 공부 울렁증이 도지기 시작했다.
     “이런 걸 풀고 있었어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레온이 풀던 마법 수식을 보며 내가 말했다. 그에 레온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6클래스로 넘어오면서부터 수식계산법이 더욱 복잡해졌거든요.”
     “6, 6클래스요?”
     레온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건 그렇고 레온은 지금 새로운 고위급 마법을 익히기 위해 공부 중인 것 같았는데, 방해한 것 같군. 하지만 레온은 그저 빙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하하, 네 6클래스에 도달한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익힌 마법은 몇 개 없네요.”
     말을 마친 레온이 깃펜을 손에 쥐고 잉크를 살짝 묻힌 뒤 다시 양피지 조각에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바쁘신 것 같은데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틀 후에 티르 네티아 시계탑 광장에서 봬요.”
     “네, 잘 가요. 레드”
    *    *   *
     티르 네티아의 시계탑 광자.
     광장 한 가운데에 유독 눈에 띄는 검은색의 복장을 한 경훈이 팔짱을 낀 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천신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으흠. 이 자식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오면 발경을 이용한 꿀밤을 먹여줄 테다.”
     경훈이 장난스럽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느긋하게 걸어오는 혁이 보였다.
     그는 이전과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허름한 흰색 복장은 온데간데없고, 군데군데 보석이 박힌 고급스런 흰색 복장에 새하얀 망토를 뒤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들기 벅차 보이는 배틀 해머를 한 손으로 쥔 채 어깨에 들쳐메고 오는 혁의 모습은 전과는 다른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호오, 저 녀석 치장 좀 했는데?’
     경훈이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느릿하게 다가온 혁이 말했다.
     “뭐야? 카이루 이 녀석 먼저 가 있으라고 해놓고 아직도 안 왔어?”
     “엥? 아까 같이 있는 거 아니었냐?”
     경훈의 물음에 묻자 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은 경훈을 보며 혁이 말했다.
     “넌 어째 복장이 변하질 않냐.”
     “내 컨셉이다 이놈아. 어, 저기 카이루 온다.”
     “어디?”
     경훈이 턱짓하며 말했고 혁은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멀리서 달려오는 강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순식간에 달려온 강찬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허억, 허억. 후우. 마, 많이 늦었냐?”
     “뭐야, 어디 갔다 온 거야?”
     숨을 헐떡이는 강찬에게 혁이 물었다. 그에 강찬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니 그냥 체력 포인트 좀 상승 시키려고 멀리서부터 여기까지 달려왔지. 쳇, 1포인트 정도는 상승할 줄 알았는데, 스태미나가 바닥날 때까지 뛰었건만.”
     “멍청한 놈.”
     강찬의 말에 혁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같은 시각.
     수도 세인트 모닝의 분수대 광장에는 왜소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철궁을 등에 둘러멘 현성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이 분명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혼잣말이 아니었다. 본인에게밖에 보이진 않지만, 현성의 앞엔 직사각형의 입체 창이 떠 있었고, 입체 창에 ‘대화-티아 젠’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티아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 현성의 근처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있던 루카가 길게 하품을 했다.
     “그래서, 2차 전직은 한 거야??”
     -응.
     “오옷? 정말? 근데 정령술사는 2차 전직을 하면 뭐가 되는 거지?”
     -그건 비밀~ 이따가 직접 만나서 알려줄게!
     “쳇.”
     현성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티아. 이틀 후에 열리는 대규모 이벤트 알지?”
     -응? 아, 몬스터 침공인가 그 이벤트?
     “웅,”
     -당연히 알지~ 유저들 둘 이상 모이면 그 이야기만 하던걸? 그건 그렇고 오빠는 레인지 마스터라고 했었나? 어떻게 됐어?
     티아의 물음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마치 너도 당해봐라! 라는 식의 대답이었다.
     “음? 그거야 당연히 비밀이지. 이따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해줄게.”
     -피, 바로 따라하는 거 봐라. 애야, 애. 히히. 아, 오빠 나 지금 사냥 중이었거든. 조금 이따가 다시 대화 걸게.
     “응, 그래 알았다. 조심해서 사냥해.”
     -응!
     이 말을 끝으로 현성의 앞에 있던 입체 창이 사라졌고 또 다른 입체 창이 떠올랐다.
     파밧!
     [카이루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어라? 강찬이네. 승인.”
     대화를 승인하자 바로 강찬이 말을 걸었다.
     “여어, 현성이냐?”
     -응. 무슨 일이야?
     현성의 물음에 강찬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무슨 일은 인마. 너 어디야?”
     -나? 세인트 모닝.
     “엥? 세인트 모닝엔 뭐 하러 간 거야?‘
     -그냥. 궁수의 탑에 들러 볼 겸 한 번 와봤지.
     “그래? 그럼 티르 네티아엔 언제 올 건데?”
     -지금 갈게.
                   *    *     *
     나는 대화를 끊은 뒤 아이템 창을 열어 정령계약 퀘스트를 할 때 구입해두었던 티르 네티아 귀환 스크롤을 꺼내들고 부욱 찢었다.
     그에 나와 루카는 순식간에 항구도시 티르 네티아의 시계탑 광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주변을 빙 둘러본 후 금세 한데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세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폼 나게 나타나는 게 좋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루카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루카, 저 녀석들한데 가자.”
     그에 루카는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루카를 타고 느릿하게 목적지에 도달한 나와 눈이 마주친 혁이 강찬과 경훈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히엑? 야, 야. 저 녀석 좀 봐.”
     그에 강찬과 경훈이 화등잔 만해진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거 루카야?”
     “어째 쟤는 볼 때마다 커지는 것 같다?”
     경훈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루카의 등에 훌쩍 띄어내려 지면에 착지했다.
     그건 그렇고 현민이 녀석은 여기에 없나? 한 달 가량 대화나 쪽지조차 보내지 않던 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챈 나는 주위를 빙 둘러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현민이 녀석은 어디 간 거야? 한 달 가량 연락도 없더니.”
     “아, 현민이. 나한테 쪽지 하나 전송하고 난 다음에 중원채널로 도로 건너갔더라.”
     경훈의 말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었다. 어릴 적부터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말없이 나타났다 사라진 현민이를 떠올리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사대전이 또 터졌다고 할아버지께서 급히 귀환하라고 하셨다나 봐.”
     “나한텐 말도 없이 사라지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고개를 젓던 난 시선을 혁에게 더졌다. 전과는 다른 허름한 복장에서 깔끔하고 고풍스런 새 옷을 차려 입으니 분위기가 한껏 달라진 혁. 나는 그런 혁을 보며 말했다.
     “오~ 신경 좀 썼나보네?”
     “내가 니들처럼 만날 똑같은 복장만 하고 다닐 것 같으냐?”
     우쭐해진 혁이 거만하게 말했다.
     “그런데 얼굴은 왜 그 모양이냐. 쯔쯔.”
     불시에 가해진 경훈의 일격. 그것을 시발점으로 둘은 또다시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지 시작했다. 그런 둘을 뒤로한 채 나는 강찬에게 다가갔다.
     “얼레? 겉모습으로 보면 변한 게 없잖아?”
     “너는 어떻고 다만 네가 성장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겠다. 결정적인 단서가 있으니까.”
     강찬이 손을 뻗어 루카를 가리키며 말했다. 루카의 레벨이 오르려면 루카의 소환자인 내가 성장해야 하는 법. 그것을 한눈에 꿰뚫어본 강찬이었다.
     ‘눈썰미 하난 뛰어나군.’
     나는 강찬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일단 모이긴 했는데 뭘 해야할지 모르겠군.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혁과 경훈에게 던졌다. 그 둘은 여전히 티격태격 싸우고 있었다.
     “넌 좀 칭찬해주면 안 되냐?”
     “아니 매일 자화자찬인 녀석한테 뭘 해주란 말이야. 쿠쿡.”
     “뭐 인마?‘
     배를 잡고 웃는 경훈에게 악을 쓰는 혁. 정말 광장 한가운데서 잘하는 짓들이다. 광장 주변의 유저들의 시선이 악을 쓰는 혁에게 향했고 모두들 피식 웃으며 지나갔다. 그것을 지켜보던 강찬이 말했다.
     “너희 둘 이제 그만해. 사람들 지나다니는데 뭐하는 거냐?”
     “그래, 그만 하자. 루샤크. 푸훕.”
     그것을 끝으로 둘은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강찬이 급히 화제를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데시카. 내가중수법은 확실하게 마스터한 거야?”
     “그렇지. 아, 강찬. 저번에 말 했던 대련 한번 해볼래?”
     경훈이 두 주먹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에 강찬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오, 한 번 붙어 볼까?”
     강찬의 손은 어느덧 문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문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훑어보던 강찬이 말했다.
     “여기서 대련을 하게 되면 유저들의 이목이 집중되니까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는 게 어때?”
     “좋지. 공터로 가자.”
     경훈의 대답에 강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공터로 따라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틀 안에 어서 오러 애로우를 익숙하게 발현시키는 것에 적응해야 했다. 이틀 후에 열릴 몬스터 침공 이벤트에서 보다 더 많은 몬스터들을 잡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같이 이동하려는 이들을 붙들고 말했다.
     “저기, 얘들아. 나는 사냥터에 좀 가봐야겠다.”
     “왜? 너도 구경하지 그러냐? 두 멍청이가 대련을 하신다는데.”
     혁이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틀 후에 열릴 몬스터 침공 이벤트에 대비해서 새로운 기술을 좀 더 익숙하게 쓸 수 있도록 연습해야지.”
     “그래? 알겠다. 그럼 이따 쪽지 하나 보내라.”
     강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배를 깔고 엎드린 루카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루카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번에 나갔던 남쪽 성문 밖으로 가자, 루카.”
     루카를 타고 사냥터로 나온 나는 제일 먼저 오크의 숲으로 향했다. 오크의 숲은 상당히 가까웠다. 루카를 타고 달려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울창한 숲에 도착한 나는 루카의 등에서 뛰어내린 뒤 적안을 개안했다.
     시력이 전보다 향상된 것을 느끼며 저 멀리에 세워진 움막에 집중하자 시야가 확보되었다. 저곳이 아무래도 오크들의 캠프인 것 같았다. 아직 적을 인식하지 못했는지 그저 정해진 루트대로 움직이는 오크들이 보였다.
     ‘흐흐, 시작해볼까?’
     나는 등에 둘러메고 있던 활을 왼손에 움켜쥐고 풀어진 활시위를 활 끝에 고정시켰다.
     팽팽하게 고정된 활시위를 본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목표물은 그저 멍하니 나무 위를 응시하고 있는 오크. 허름한 가죽으로 아랫도리만 대충 가린 것으로 보아 보통 오크인 것이 분명했다.
     ‘나도 잘생긴 건 아니지만 저 녀석들은 얼굴에 양심이 없군.’
     나는 목표물을 겨냥한 채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약간의 마나가 감소되는 것이 느껴짐과 동시에 화살촉에 은은한 붉은빛을 강렬하게 발산하는 오러 애로우가 발현되었다.
     쐐애액!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활시위를 벗어난 붉은 섬광이 목표물을 향해 맹렬히 쏘아졌다. 화살이 쏘아질 때 오러의 잔상이 길게 늘어져 화살을 전부 휘감았기 때문에 마치 붉은 섬광이 쏘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대로 오크의 대가리를 관통한 채 움막을 뚫고 들어간 오러를 머금은 화살.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오크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동료가 맥없이 주저앉더니 머리에서 피를 콸콸 쏟아내는 것을 본 오크들이 그제야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오호. 효과가 대단한 걸? 이 정도라면 바로 중형 몬스터에게 시험 해봐도 되겠어.’
     나는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한 번 손을 댄 이상 끝을 봐야 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오크의 캠프로 몸을 날렸다.
                   *    *     *
     같은 시각.
     유저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공터로 자리를 옮긴 강찬과 경훈 그리고 혁.
     혁이 공터의 벤치로 걸어가 느릿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빨리 끝내고 사냥하러 가자.”
     투덜대며 말하는 혁을 뒤로한 채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보는 강찬과 경훈. 경훈이 말했다.
     “자, 시작해볼까?”
     “그러지.”
     강찬이 대답하자 발아래서 형성된 푸른빛이 강찬과 경훈의 몸을 휘감았다.
     “플레임 웨폰.”
     화르륵.
     문 블레이드의 검신을 타고 올라온 시뻘건 화염이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며 일정한 형체를 갖춘 채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뿜어지는 열기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패스트 워커, 아이언 너클.”
     이동속도 증가 스킬과 너클 건틀렛 강화 스킬을 자신에게 건 경훈이 자세를 낮춘 채 강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두 손으로 문 블레이드를 움켜쥔 강찬의 모습엔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물론 두 주먹을 움켜쥔 채 전투자세를 취한 경훈에게도 한 치의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생각 외로 빈틈이 전혀 없잖아.’
     잠시 눈동자를 굴려 강찬을 살피던 경훈이 읊조렸다.
     강찬의 플레임 웨폰에 닿는다는면 물리적인 데미지와 함께 화상을 입게 되어 서서히 생명력이 감소하게 될 것을 익히 짐작한 경훈은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경훈이 머뭇거리는 사이 지면을 박찬 강찬이 무섭게 치고 들오기 시작했다.
     “앗.”
     그에 경훈이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급히 몸을 회전시켜 자신을 찔러 들어오는 검을 피해냈다. 하지만 강찬이 손목을 미묘하게 움직여 검의 행로를 바꿔 경훈의 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크윽.”
     허리를 훑고 지나간 강찬이 멀어지려는 찰나, 경훈이 재빨리 뻗은 주먹이 강찬의 등판에 적중했다. 발경을 이용해 플레이트 메일의 방어력을 무시한 뒤 고스란히 데미지가 전해졌기에 강찬에게 가해진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크윽.”
     강찬이 인상을 쓰며 재빨리 몸을 돌린 뒤 검을 고쳐 잡았다. 경훈도 미간을 찌푸린 채 전투자세를 취했다.
     대련을 하는 강찬과 경훈을 지켜보던 혁이 이맛살이 점점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선 자신도 저렇게 치고받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직업의 특성상 그러질 못했다.
     그의 직업은 전투 클레릭. 전투가 가능한 성직자를 뜻한다. 전투와 신성마법 둘을 구사하다보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없는 것이 전투 클레릭이었다.
     일반 전사들보다 약한 전투력과 성직자 유저보다 더 적은 신성마법. 때문에 그만큼 지지도도 낮았다. 그런 이유로 처음에 혁이 전투 클레릭으로 전직을 하려고 할 때 강찬과 경훈이 극구 만류했지만 혁은 고집을 꺾지 않고 전투 클레릭으로 전직을 한 것이다.
     ‘2차 전직을 하게 된다면 저 녀석들처럼 신나게 치고받으며 싸울 수 있을 텐데.’
     물론 혁도 전투 클레릭이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직을 한 것이었다. 전투 클레릭일 때는 불편한 점이 다소 많겠지만, 2차 전직을 하게 된다면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몬스터 침공 이벤트 때 레벨 업을 하고나면 바로 2차 전직을 해야겠어. 팔라딘이 된다면 강찬과 필적할 수 있을 거야.’
     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곰곰이 생각을 하는 사이, 경훈과 강찬은 치고받는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경훈의 빠른 주먹질과 발길질에 맞게 된다면 전해져 오는 데미지가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기에 강찬은 사력을 다해 종횡무진 검을 휘둘렀다.
     경훈 또한 강찬의 문 블레이드에 뿜어져 나오는 화염의 오러 블레이드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강화 스킬을 걸어둔 너클 건틀렛으로 그것을 힘겹게 쳐내며 사력을 다해 주먹을 내뻗었다.
     푸캉!
     창창!
     시간이 갈수록 경훈의 너클 건틀렛의 내구력이 빠르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에 필적하는 강도를 가진 플레임 웨폰과 연신 충돌을 해 내구력이 빠르게 감소했던 것이었다.
     물론 강찬의 문 블레이드도 다를 것은 없었다.
     빠각.
     한동안 치고받는 공방전을 나누던 사이 마침내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경훈의 너클 건틀렛의 내구력이 다 되어 부서져 버린 것이다.
     “헉.”
     그에 강찬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경훈의 목젖에 문 블레이드를 겨누었다. 그에 경훈이 잔뜩 인상을 썼다. 문 블레이드에서 뿜어지는 열기에 의해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입을 열어 패배를 시인했다.
     “졌다.”
     경훈의 말을 끝으로 둘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    *     *
     취에엑!
     푸욱.
     오러 애로우를 머금은 두 대의 화살이 마지막 한 마리 오크의 가슴팍에 틀어박혔고, 가슴팍에 화살이 틀어박힌 오크는 그대로 뒤로 고꾸라졌다. 더 볼 것도 없이 즉사였다.
     나는 허리를 쭉 펴고 초토화가 된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확실히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게 되면서 사냥이 더욱 쉬워진 것을 느꼈다. 나는 오크들의 시체가 사라지면서 드랍하는 돈을 주우며 화살도 함께 회수했다.
     ‘생각보다 오러를 다루는 건 쉽구나’
     돈과 화살을 전부 회수한 나는 회수한 화살을 화살통에 꽂아 넣은 뒤 서둘러 오크의 캠프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또다시 오크들이 리젠된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가자, 루카.”
     루카에게 손짓한 뒤 나는 서둘러 오크의 캠프에서 나와 다시 숲속을 걷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의 서식지인지라 이곳에 오기 전까지 간간이 들렸던 새들의 지저귐 소리조차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이따금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간혹 포효성도 들려왔다. 그렇게 한참을 숲속을 걷고 있을 때였다.
     쿠오오!
     쿠어엉!
     ‘어라?’
     커다란 수풀이 거칠게 흔들리며 트롤로 간주되는 괴성이 들려왔다. 나는 수풀과 거리를 두고 수풀을 응시했다. 루카 또한 잠자코 가만히 내 곁에 서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둔탁한 소리와 목청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 놈들은 서로 뒤어켜 싸우는 것 같았다.
     ‘쳇. 현실성을 과다하게 집어넣었구먼. 몬스터끼리의 싸움이라… 하긴 저 녀석들도 공복도라는 것이 있고 인공지능이라는게 있는데. 이전의 오우거가 트롤을 잡아먹는 것도 봤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 뭐.’
     크라락!
     거세게 흔들리던 수풀 사이에서 두 마리의 트롤이 뒤어킨 채 수풀 밖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이 되어있었고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 험악하게 일그러진 면상.
     서로 뒤엉켜 싸우던 트롤 두 마리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고 뒤엉켜 있던 녀석들은 서로 떨어져 내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3미터 가량 되어 보이는 신장을 가진 트롤 두 마리가 접근해 왔지만 나는 별달리 공포감을 느끼지 못했다.
     한 마리 트롤이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움켜쥐려고 할 때였다. 잠자코 있던 루카가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트롤의 목덜미를 문 채 바닥에 메다꽂았다.
     쿠워억!
     트롤이 발버둥 쳤지만 루카는 쉽게 놔주지 않았고 트롤의 입에서 거품이 새어나오는가 싶더니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트롤을 제압한 루카였다.
     루카를 구경하고 있을 때, 내게 다가오던 다른 한 마리의 트롤이 괴성을 지르며 아가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정확히 내 목을 향해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퀵 스텝.”
     퀵 스텝을 시전한 나는 몸을 슬쩍 움직여 트롤을 피했다. 흉측한 면상이 아가리를 쫙 벌린 채 다가오는데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을 리 만무했다.
     나는 트롤의 공격을 피해냄과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활을 휘둘러 트롤의 대가리를 내리쳤다.
     “보우어텍!”
     퍼억!
     정확히 뒤통수에 아이언 레드 롱 보우가 적중했고, 보우어택에 맞은 트롤이 거칠게 바닥에 쑤셔 박혔다.
     나는 재빨리 백스텝을 밟고 뒤로 물러나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나의 예상대로 트롤은 금세 몸을 일으켜 흉측한 면상을 일그러뜨린 채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쿠어엉!
     재빨리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든 나는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그와 동시에 화살촉에는 붉은빛을 강렬하게 발산하는 오러 애로우가 발현되었고, 나는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쐐애액.
     맹렬한 파공성을 흘리며 붉은 섬광이 쏘아졌다.
     쏘아진 붉은 섬광은 트롤의 면상에 틀어 박혔고, 트롤은 화살에 맞는 것과 동시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오러를 머금은 화살이 머리를 관통했으니 말할 것도 없이 즉사였다.
     “후, 이대로라면 몬스터 침공 이벤트 때도 잘 써먹을 수 있겠는 걸?”
     나는 쓰러진 트롤에게 다가가 트롤을 내려다보았다. 오러를 머금은 화살에 관통당한 머리. 굵직하게 뚫린 구멍이 까맣게 그슬려져 있었다.
     그 모습이 흥미로워 관찰하고 있을 때, 눈앞에 반투명한 초록색의  사각형 모양의 입체 창이 떴다. 나는 입체 창에 새겨진 문구를 읽었다.
     [티아 젠 님께서 대화를 요청하셨습니다.(승인/거절)]
     “어라? 승인.”
     대화를 요청한 것이 티아임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승인을 외쳤다.
     “티아? 벌써 사냥이 끝난 거야?”
     -응. 오빨 말대로 2차 전직 한 뒤에 스킬에 익숙하게 스킬을 쓰는 법을 연습하는 거였어. 후, 스킬 지속시간이 거의 다 끝나간다.
     티아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건 그렇고, 어디야?
     -나 지금 티르 네티아 동쪽 성문으로 걸어가고 있어.
     “그래, 그럼 이따가 시계탑 광장 앞에서 만나자.”
     -응, 알았어.
     “난 하던 일마저 하고 금방 갈게. 그럼 대화 끊는다.”
     -응. 빨리 와~.
     [대화를 끊었습니다.]
     대화를 종료한 나는 서서히 사라져가는 트롤의 시체를 보며 화살을 회수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에휴,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그래도 내일도 시간은 있으니까, 마을로 돌아가야지.’
     화살을 화살통에 꽂아 넣은 나는 루카와 함께 티르 네티아 남쪽 성문으로 향했다.
                   *    *     *
     모니터를 지켜보던 직원이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팀장에게 소리쳤다.
     “팀장님.”
     그에 꾸벅꾸벅 졸던 김영수 팀장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으음? 무슨 일인가?”
     “깜빡 조셨군요. 지금까지 중원의 무공을 익힌 세릴리아 대륙의 유저 둘을 지켜본 결과 유저간의 대련을 통한 밸런스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더 지켜봐야 하지만요.”
     직원의 말에 김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군. 그것보다 레드 파운? 그 회원이 중원의 상승 경공을 익혔다는데, 그런 어떻게 됐나?”
     팀장의 물음에 직원이 대답했다.
     “아, 스킬을 입수하긴 했지만 사용하는데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왜 그렇지?”
     “유저를 지켜본 결과 세릴리아 대륙의 유저들에겐 부적합한 스킬인 것 같더군요. 잡아먹는 마나의 양도 만만치 않았고요. 아마 입수를 했으나 쓰는 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원의 말에 김 팀장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하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김 팀장이 다른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자, 여러분, 앞으로 이틀 남았습니다. 남은 이틀 동안 이벤트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물론이고 다른 버그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서 이벤트를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김 팀장의 말에 직원들이 대답했다. 이벤트를 준비하는 운영자들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키보드와 마우스에 떨어지지 않았다.
     테스트를 위한 서버에 직접 접속해 문제점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운영자도 있었고, 그 서버를 통제하며 미리 시험하는 운영자도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운영진들의 모습을 빙 둘러본 김 팀장의 입가엔 미소가 맺혔다.
                   *    *     *
     같은 시각. 티르 네티아 시계탑 광장.
     시계탑 아래에 왜소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철궁을 등에 둘러멘 소년과 어여쁜 엘프 소녀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정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둘은 누가 봐도 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녀와 수줍음이 많은 듯한 소년은 바로 현성과 티아였다. 그 둘의 근처엔 루카가 철탑처럼 버티고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레인지 마스터가 된 거야?”
     “음. 네가 보기엔 어때?”
     현성의 손을 잡고 흔들며 티아가 조르듯이 묻자, 그에 현성은 빙긋 웃으며 되물었다.
     정보보기를 비공개로 설정해 두었기에 티아가 현성의 정보를 볼 수 없었고, 아까부터 현성은 그렇게 티아를 놀리고 있었다.
     현성의 손을 연신 흔들던 티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현성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현성의 붉은 눈동자와 티아의 밝은 초록색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지 5초도 안 되어 현성은 얼굴을 붉히며 티아의 시선을 피했고 그런 현성을 보던 티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레인지 마스터가 된 것 같아. 맞지?”
     “음… 맞아.”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현성과 이야기를 나누던 티아의 시선이 루카에게로 향했다. 타아가 손을 까닥이며 손짓 하자 주변을 맴돌던 루카가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루카가 현성을 볼 때와 동일한 눈으로 티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에 티아는 그런 루카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뭐야. 티아, 너는 안 알려줄 거야?”
     잠자코 있던 현성이 말했다.
     “응? 나는 직접 보여줄게. 음… 공터엔 유저의 이목이 별로 없으니 공터로 가는 게 좋겠다.”
     루카의 머리를 쓰다듬던 티아가 대답하며 현성의 팔을 잡아당기며 공터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에 루카가 소리 없이 둘의 뒤를 따랐다.
                   *    *     *
     티아에게 이끌려 공터에 오게 된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티아의 말대로 광장과 같이 유저들의 이목이 많지 않았다. 한적했기에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을 때 적합한 장소였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는 거야?” 나는 티아에게 반강제적으로 이끌려 공터의 쭉 뻗은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응, 유저들의 시선이 거의 없어야 돼. 음. 이정도면 됐다.”
     한적한 장소에서 주변을 빙 둘러보던 티아가 말했다.
     “음. 이 근처엔 유저가 없는 것 같아. 그럼 이제 알려줄게.”
     나는 티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원래는 엘프 캐릭터인 티아의 시각이 인간 캐릭보다 월등히 뛰어나지만 현재 나는 적안을 개안한 상태, 게다가 레인지 마스터가 되면서 보조 스킬들의 능력치가 향상되었기에 티아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혹시 몰라 확인 차 한 번 더 둘러본 것이다.
     주변을 빙 둘렀고 있을 때, 티아가 말했다.
     “물을 관장하는 자여, 그대와 계약을 맺은 나 티아 젠이 그대의 힘을 빌리고자 명하노니 내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라, 엘레스트라!”
     주문영장이 이어지자, 티아의 주변으로 마나가 재배열 되며 대기의 수분이 점차 모여 일정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엘레스트라? 뭐지 최상급 정령인가?’
     나는 정령이 소환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내 일정한 형태를 갖춘 물의 정령이 나타났다. 티아와 엇비슷한 어여쁜 소녀의 모습을 갖춘 물의 정령에게선 청명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무척 맑고 깨끗한 기운이었다.
     내가 그런 정령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티아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풉. 아주 넋을 잃었네. 얘는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야. 정령술사들은 2차 전직을 할 때 최상급 정령술사로 2차 전직을 할 수 있거든. 음. 그러니까, 대체적으로 불, 물, 바람, 땅. 이 넷 중 하나로 정해.”
     나는 티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정령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2차 전직을 최상급 정령술사로 하는군. 그렇담 3차 전직은 정령왕을 소환한다는 건가?
     정령왕이란 정령계를 관장하는 정령들의 왕을 뜻한다. 현상계(인간계)로 모습을 나타내면 그들의 힘 중 1/3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지만 그 위력은 드래곤은 물론이거니와 마왕과도 맞먹는다.
     설마 그런 정령와을 소환하지는 않겠지?
     나는 얼른 고개를 저어 상념을 날려버렸다.
     “그런데, 오빠 이거 알아?”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티아가 말했다.
     “응? 뭘?”
     “최상급 정령부터는 정령들의 특성이 그대로 살아나.”
     티아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음… 어떻게 설명을 해주면 좋을까. 아, 우선. 불의 정령은 공격력이 탁월하다고 보면 돼. 정령술사들 중에서도 데미지 딜러 역할을 하는 유저들이 불의 최상급 정령술사로 2차 전직을 하지.”
     “아하.”
     티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흘 내뱉었고, 티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땅의 정령은 방어에 탁월해. 그렇다고 공격력이 약한 건 아니야. 그래서 파티 플레이를 할 때 선두로 나서서 몸빵? 아무튼 몸빵이란 걸 도맡아 하지. 그리고 바람의 정령은 빠른 공격 속도와 함께 심한 부상을 남겨줄 수 있을뿐더러 치명타까지 먹일 수 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의 정령은 공격력과 방어력은 네 정령들 중에서 가장 보통에 가까워. 대신 회복과 치료에 탁월하지. 그런 점에서 장기전에서 유리한 정령이기도 해.”
     말을 마친 티아가 소환된 엘레스트라를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정령술사라는 직업도 나름대로 좋긴 하지만 왠지 많이 지루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직접 전투에 임하는 것은 정령이지 정령술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티아. 그런데. 정령술사들은 전투를 할 때 직접 전투에 임하지 않고 정령들이 대신 싸우잖아. 그래서 무지 지루할 것 같은데…….”
     “왜 그 말을 안 하나 했어.”
     나의 물음에 티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정령술사가 2차 전직을 해 최상급 정령술사가 되면 계약을 한 최상급 정령과 같이 전투에 임할 수 있어.”
     “엥? 정말이야?”
     나는 티아의 말에 정령과 정령술사가 함께 전투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하지만 영 아닐 것 같았다. 정령술사가 전투에 함께 임한다고 해도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이어진 티아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풋,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겠다. 정령과 정령술사가 따로 움직이며 공격하는 것을 떠올렸나본데, 아쉽게도 그건 아니야. 2차 전직을 하고나서부터 생기는 스킬. 융합(融合)이 있거든.”
     “유, 융합? 정령술사와 정령이 융합을 한다고?”
     “응.”
     티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령술사와 정령과의 융합이라니. 이 무슨 듣고 보도 못한 소리인가?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융합이란 걸 보여줄 수 있어?”
     “물론. 그것 때문에 일부러 유저들이 다니지 않는 곳으로 왔는걸?”
     나의 물음에 티아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융합한 모습이 어떨지 궁금해진 나는 티아를 부추겼고, 그에 티아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융합!”
     티아의 외침에 티아의 곁에 둥실 떠있던 짙은 푸른색의 반투명한 소녀의 모습을 한 정령의 몸이 형태를 잃기 시작했고 이내 본래 물의 모습을 갖추더니 빠르게 티아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섬광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새하얀 빛무리가 티아를 감쌌다.
     번쩍!
     눈부신 빛줄기가 허공으로 산산이 흩뿌려짐과 동시에 정령과 융합한 티아가 모습을 나타냈다.
     짙은 하늘색의 기다란 머리칼과 푸른 눈썹, 그리고 그에 맞는 청명한 푸른 눈동자. 피부색과 외모는 변한 것이 없지만 머리색과 눈동자 색 등 여러 가지가 바뀌어 있었고, 융합을 하기 전과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온몸에서 은은하게 내뿜어지는 청명한 기운은 한없이 맑고 깨끗한 기운이었다. 그래서인지 마치 추운 겨울날 포근한 이불속에서 몸을 녹이는 것과 같이 포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헤헤. 이렇게 융합을 하는 거야.]
     티아가 말했다.
     티아의 음성은 마치 전음을 날리듯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와… 진짜 융합이란 걸 할 줄이야… 그런데 지속시간은 얼마나 유지되는 거야?”
     [지속시간은 자신의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유지 돼. 서서히 감소하는 거지. 최상급 정령술사가 되면 마나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무리하지만 않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 모습으로 전투에 임하게 되는 거야.]
     “그렇구나.”
     160가량 되는 작은 키를 가진 티아가 나와 눈높이가 같을 정도로 공중에 둥실 떠있었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티아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오빠 나랑 대련 한 번 해볼래?]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티아가 나에게 대련신청을 하게 될 줄이야. 그렇다고 저렇게 부탁하는 눈을 하고 있는 티아에게 거절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 요청을 승낙하자 푸른빛이 대련에 임하는 티아와 나의 몸을 감쌌다.
     ‘최대한 살살해야겠군. 웬만해서 오러 애로우를 끌어 올리지 말아야지.’
     나는 등에 둘러메고 있던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왼 손에 쥐고 허리춤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자, 준비 다 됐으면 간다?]
     “그, 그래.”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전혀 빈틈이 없잖아?’
     거대한 철궁과 한 자루의 창을 연상 시키는 화살을 든 현성을 보며 티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사냥을 해온 그녀지만, 직접 몸소 대련을 하는 것은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기에 상대가 어떤 공격을 해올지 짐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티아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성은 있는 빈틈을 보여주지 않고 티아를 응시했다.
     ‘웬만해서 퀵 스텝과 백 스텝 같은 보조스킬을 사용하지 않을 거고, 오러 애로우도 발현시키지 않을 거니까 마나를 거의 쓸 일이 없겠군. 상대가 티아인 만큼 최대한 살살해야지.’
     현성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티아가 양손을 쫙 펼쳤다. 그에 손바닥 위로 대기의 수증기들이 모여 동그란 구의 형태를 갖추었다.
     한없이 맑고 청명한 기운을 흘리는 두 푸른 구체가 현성에게 쏘아졌다. 그에 현성은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치켜세우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두 개의 아쿠아 볼을 가볍게 쳐냈다.
     아이언 레드 롱 보우와 충돌한 두 개의 아쿠아 볼이 물 풍선이 터지듯 공중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두 개의 아쿠아 볼을 쳐냄과 동시에 현성은 재빨리 화살 깃을 활시위에 걸고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쐐애액.
     티아를 향해 쏜 화살이 맹렬한 파공성을 흘렸다.
     ‘아차!’
     티아는 몸을 돌려 급히 화살을 피해냈다.
     화살을 피해낸 티아가 안도의 한숨을 쉬려던 찰나였다. 그녀의 뒤로 아이언 레드 롱 보우를 치켜들고 천신처럼 버티고 선 현성이 나타났다.
     ‘티아가 아니었으면 진즉 보우어택을 먹인 뒤 화살로 마무리 지었을 것을.’
     그저 활을 치켜들고 있는 것을 보아 애초에 내리찍을 생각도 없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티아는 기겁을 하며 몸을 뒤로 뺐다.
     [앗!]
     나는 황급히 몸을 뒤로 빼는 티아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오빠, 그냥 그만하자. 상대가 안 된다.]
     머리를 긁적이는 나를 보며 티아가 말했다. 그에 나는 대련을 취소했고, 티아와 내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봐주면서 하는 데도 이렇게 밀린다.]
     티아가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아마 삐친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봐주면서 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금금해진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에? 알고 있었어?”
     [응. 당연한 거 아냐? 평소에 대련을 할 때 보조스킬을 사용하면서 상대방을 몰아치는 것이 오빠의 패턴인데, 지금은 안 그랬어. 보조스킬도 사용하지 않고 보우어택으로 충분히 내리칠 수 있는 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서 있었지?]
     티아의 말에 나는 전신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니… 하지만 한편으론 기분이 좋았다. 그만큼 나에게 관심이 많다는 거니까.
     나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티아를 바라보았다.
     티아의 몸에서 푸른 안개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융합이 해제 되었는지 티아의 모습은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고 티아의 옆엔 물의 정령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나도 처음부터 보조스킬을 이용해 상대방을 몰아치는 기술을 쓰진 않았어.”
     갑자기 옛 생각이 떠오른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루카와 함께 갈색여우를 잡던 시절. 그 때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활 쏘는 것이 좋았기에 보조스킬을 사용하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처음 보조스킬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도 신기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사용해보지 않았던가? 조용히 옛일을 생각하던 나는 시선을 티아에게 고정시킨 채 말했다.
     “티아, 너는 궁수를 어떻게 생각해?”
     그에 곰곰이 생각하던 티아가 대답했다.
     “글세. 처음엔 원거리 공격엔 탁월하지만 근거리에선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후방에서 지원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어.”
     “그렇구나.”
     “그런데, 오빠는 그런 다른 궁수들과 다르더라고. 대부분 유저들이 궁수 유저와 대련을 하게 되면 최대한 거리를 좁히려고 한다고 하거든. 그러면 궁수 유저들은 황급히 거리를 두고. 그런데 오빠는 다르더라.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마다하지 않고 상대하는 것 때문에 솔직히 처음에 봤을 땐 놀랐어. 저런 궁수도 있구나 하고.”
     “그랬구나.”
     티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해보기 위해 나는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맞다. 티아, 이번 몬스터 침공 이벤트가 기대되지 않아? 직접 사냥터로 가지 않아도 몬스터들이 알아서 이곳 성으로 난입하니까 그저 굴러들어오는 떡을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건데.”
     대충 아무렇게나 화제를 돌린 것이 먹혀들었는지, 티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런데 그 이벤트를 보니까 몬스터를 잡으면서 레벨업을 할 수도 있던데? 이참에 레벨업을 최대한 많이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아의 말대로 레벨업을 최대한 많이 해두고 신대륙을 건너가는 편이 확실히 나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아의 말대로 레벨업을 최대한 많이 해두고 신대륙으로 건너가는 편이 확실히 나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티아와 함께 근처의 벤치에 앉아 앞으로 신대륙에서 있을 일들로 이야기보따리를 펼쳐냈다.
                   *    *     *
     세릴리아 월드 본사.
     개발팀 사무소.
     앞으로 정확히 이틀 후에 열릴 몬스터 침공 이벤트로 운영진들의 손은 분주했다.
     가상현실 게임기기를 통해 테스트 서버에 접속해 이벤트를 진해시켜본 결과 아무런 무리 없이 이벤트를 진행할 수 있다고 판정이 되었기에 걱정 없이 이틀 후 이벤트를 개최하면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개발팀 사무소에 서너 대 놓인 가상현실 게임기기 중 한 대의 캡슐의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훤칠한 키를 가진 한 사내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메인이벤트 담당 운영자 추(秋)였다.
     그가 말했다.
     “팀장님, 이번 이벤트를 테스트해본 결과 유저들이 무리 없이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오, 그래? 수고했어. 이리 와서 좀 쉬게.”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김영수 팀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몬스터 침공 이벤트의 준비를 마무리 짓는 운영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좋아, 공성전 때와 같이 이번 이벤트를 통해 세릴리아 월드가 확실하게 변하겠어.”
     김 팀장이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허공을 응시했다.
     “휴우. 드디어 다 끝났습니다.”
     일을 마친 운영진들과 직원들이 같은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해 뻐근해진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말했다. 그에 김 팀장이 부드럽게 말했다.
     “모두들 수고 했어. 푹 쉬게.”
     
                                          <5권에 계속>     -by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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